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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杜景升? ~ 1197년(신종 즉위년) 11월 1일
고려 중기의 장군. 전라도 전주 만경현[1] 출신으로 만경 두씨(杜陵 杜氏)의 중시조이다.[2] 고려 예종 때에 중서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두방(杜邦)의 아들이며, 두경승의 장인은 상장군 문유보(文儒寶)이다.
2. 생애
무신정변 당시 두경승은 왕실 친위대 견룡군의 하위 장교인 대정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무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이때 수도 내에서 장졸들이 약탈을 벌였지만 두경승만은 홀로 자리를 지키며 군인의 본분을 다하자 그 휘하의 부대도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명종 즉위 이후 산원으로 옮겼고 이후 이의방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내순검군지유로 삼았다. 그런데 하루는 퇴근하여 갑자기 옷을 바꿔입고 북산 바위 틈에 숨어버렸는데 까닭을 물으니 “일찍이 숙직을 하다가 어슴푸레 꿈꾸는 것 같았는데 몇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해서 무서운 나머지 미복(微服)으로 갈아입고 도망갔는데 잠시 후 수만 명이 나를 쫓아오기에 여기까지 도망해왔다.”고 대답했다. 이에 사람들은 “경인년(1170)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재앙을 내린 것”이라고 평했다.[3] 두경승이 다시 복귀하자 이의방은 기뻐하며 그를 낭장으로 승진시켰다. 출처김보당의 난 때는 이의방의 종형 이춘부와 함께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임명되어 민심을 수습하는 공을 세웠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이춘부가 포악하여 고을 수령들을 많이 죽였으나 두경승이 이춘부를 설득하여 이미 적의 기세가 꺾였으니 일을 너그럽게 처리하되 반역의 증거가 명백한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했다고 한다. 덕분에 반란을 수월하게 수습한 이춘부는 두경승을 높이 평가했다. 출처
조위총의 난 토벌군 | ||||
원수(元帥) | ||||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인첨 | ||||
부원수(副元帥) |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기탁성 | ||||
<rowcolor=#fff> 중군(中軍) 병마사(兵馬使) | 좌군(左軍) 병마사(兵馬使) | 우군(右軍) 병마사(兵馬使) | 전군(前軍) 병마사(兵馬使) | 후군(後軍) 병마사(兵馬使) |
상장군(上將軍) 최충렬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진준 |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경진 | 상장군(上將軍) 조언 | 상장군(上將軍) 이제황 |
<rowcolor=#fff> 지병마사(知兵馬使) | 지병마사(知兵馬使) | 지병마사(知兵馬使) | ||
섭대장군(攝大將軍) 정균 | 섭대장군(攝大將軍) 문장필 | 사재경(司宰卿) 하사청 | ||
기타 지휘관 | ||||
동로 가발 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 → 후군 총관사(後軍摠管使) 두경승 |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지병마사(知兵馬事) 이의민 |
1174년 9월 무신정권에 항거한 조위총의 난이 벌어졌다. 당시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였던 두경승이 개경으로 돌아오는 중에 서경의 군사들을 만나 그들을 패퇴시켰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평안도 무주 객관에 머무는데 적군의 습격을 받자 군사들이 당황하여 혼란에 빠질뻔한 상황에서 두경승이 객관 대문을 활짝 열고 적군을 활로 쏴 그 자리에서 거꾸러뜨리자 적들이 당황하여 패주했다. 돌아온 두경승은 북부 전선으로 동로가발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로서 출전하여 의주, 고산, 덕주, 무주, 대동강 일대에서 조위총의 반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명종이 지주사 이광정을 황해도 평주로 보내 두경승을 맞이하게 했다. 명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두경승의 공을 치하하며 후군총관사(後軍惣管使)로 임명하고, 두경승은 다시 전장으로 향하였으니 '이르는 곳마다 적들이 마치 초목이 바람에 쓰러지듯 하였다'고 기록될 만큼 적을 연파했다. 마침내 서경에 이르러 대동문(大同門)을 공격하고 진입하여, 통양문(通陽門)으로 진입한 윤인첨과 함께 서경을 무너뜨렸고,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겸 처치사(處置使)로 임명되어 조위총의 남은 잔당들도 진압했으니 이렇듯 전장에서 큰 공이 있어 상장군의 지위에 오른다.
경대승과 이의민 집권기에도 승진 행진을 멈추지 않아 공부와 호부의 상서 직책을 맡았고 수태위, 참지정사, 판리부사 수국사로 승진을 거듭하였으며 재상의 지위인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마침내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봉해진다. 1196년에는 이의민과 함께 문하시중에 제수되었다. 경대승과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였으며 이의민 집권기 때는 이의민과 대립하였지만 이의민 정권에서도 승승장구하는 등 무신정권에서 소외되지는 않았다.[4] 무예가 뛰어나고 명망이 높아서 이의민의 괴력에 대적할 수 있기도 했으니 명종이 이의민을 견제하는 카드로 두경승을 중용하며 일부러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의민은 두경승과 주먹다짐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5][6]
1196년 4월 최충헌이 미타산에서 이의민을 암살한 후 1196년 8월 왕과 태자가 행차하는데 태자 일행의 수레가 구경꾼들과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때 누군가가 왕의 어가에 변고가 생겼다고 외치자 호종하는 관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두경승만이 태연히 왕과 태자의 곁을 지켰다고 한다. 사실 이 소란은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가 꾸민 일이었으며 최충헌은 이 사건 이후 두경승을 제거하기로 결심을 굳히는데 이미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에게 두경승은 앞날에 방해가 되는 존재일 뿐이었다. 결국 1197년 9월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킴과 동시에 개경에 군사들을 배치하고 상의할 일이 있다며 두경승을 불러들인 뒤 그를 붙잡아 그대로 자연도(紫燕島)[7]로 유배보냈다. 1197년 11월 그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울분으로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는 설부터 병을 얻어 죽었다는 설, 최충헌이 암살했다는 설도 있고, 노비가 그가 가진 금을 노리고 독살했다는 설도 있는 등 사인은 불분명하다. KBS 《무인시대》에서는 비장미를 한층 더하기 위하여 자결한 것으로 묘사했다. 사망 후 영종도에 묻혔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무덤이 남아 있다.[8]
3. 기타
- 이의방을 거쳐 최충헌 초기까지 성격이 제각기 다른 집권자들 아래에 있었음에도 말년에 최충헌에게 숙청된 것 말고는 좌천되는 일 1번 없이 꾸준히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정확하게는 이의방 정권 후반기와 정중부 정권 초기 때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영향이고 경대승 정권 당시는 경대승과 친우 관계였으며 이의민 정권 당시는 이의민과 대적하기는 했으나 무신정권을 부정하지는 않고 이의민과 대립된 포지션인 까닭에 여러가지가 섞여서 이의민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이었다.[9] 본인의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능력에 더해 인간 관계도 넓었기에 그렇게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최충헌에게 사실상 참패하였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 학식이 부족했다거나 이의민의 라이벌로 민폐를 끼쳤다는 기록이 있는 등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고려사》같은 사료에서는 다른 무신정권 권력자들과 달리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인 편. 그래서 경대승을 제외한 무신정권 권력자들이 대개 《고려사》 〈반역 열전〉에 기록된 반면 두경승은《고려사》 〈제신 열전〉에 기재되었다.[10]
- 활 솜씨가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임기응변이 전세를 뒤집어놓았다는 기록도 있는 등 군인으로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성품이 온후하고 가식이 적었다는 기록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인덕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 한 일화에 따르면 라이벌인 이의민과 기싸움을 하는 도중 기선 제압을 위해 이의민이 "어떤 자가 힘자랑을 하길래 내가 이렇게 때려 눕혔지."라고 말한 뒤 건물 기둥을 주먹으로 후려쳐 기둥을 진동시키자 두경승은 "그래? 나도 일전에 한 번 저잣거리에서 주먹을 썼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더군."이라고 대답하고 벽을 주먹으로 한 방에 뚫어버리는 것으로 훈훈하게 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두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뚫어버린 장소는 고려의 중요 회의 기구였던 중서문하성. 그 정도가 극심하여 두 사람이 만나 눈을 마주치면 주위 사람들은 휘말릴까봐 무서워서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
위풍이 당당해서 진짜 재상 같거든
황각에 앉은 지 삼사 년에
주먹 바람은 만 번도 넘게 불었네
吾畏李與杜
屹然眞宰輔
黃閣三四年
拳風一萬古
고려사 반역조 '이의민 열전'에서
위풍이 당당해서 진짜 재상 같거든
황각에 앉은 지 삼사 년에
주먹 바람은 만 번도 넘게 불었네
吾畏李與杜
屹然眞宰輔
黃閣三四年
拳風一萬古
고려사 반역조 '이의민 열전'에서
4. 대중매체에서
}}}]] ||- <박시백의 고려사>에서도 등장하는데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모습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경대승이 죽고 이의민이 집권하자 두경승은 문하시중에 있었다. 그러다 중서문하성에서 이의민이 “옛날에 말이요, 어떤 자가 내 앞에서 힘 자랑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라는 말과 동시에 이의민이 “이렇게!”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나무기둥을 쳐버려서 “때려눕혔지요. 카카카.”라고 호탕하게 웃자 두경승이 “그래요? 나도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한번 가볍게 쳤는데.”라는 말과 함께 두경승은 벽을 주먹으로 쳐버리면서 “사람들이 도망갑니다.”라고 말하면서 벽이 뚫렸다. 이 모습을 본 신하들은 벌벌 떨었다. 이후 신종 때 유배를 가고 유배지에서 피 토하고 죽은 모습을 마지막으로 등장종료.
5. 같이보기
[1] 오늘날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만경읍[2] 이는 두사충을 시조로 하는 두릉 두씨와는 다른 계통이다. 두경승의 집안은 흔히 만경 두씨라고도 불리는 집안으로 고려 목종 때에 귀화한 두경녕의 후손이다.[3] 무인시대에서는 두경승이 이 꿈을 꾼 후로 무인들이 임금을 내쫓고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직위를 버리고 농사를 짓다가 이의민의 설득으로 복귀한 것으로 각색되었다.[4] 무인시대에서는 최충헌이 이 일을 언급하며 이의민이 아무리 권력을 장악하여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두경승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둘의 대립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라 하는 장면이 있다.[5] 이는 이의민과 두경승이 서로를 인정하여 일종의 연립 정권이 성립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전 시기였으면 2명 중 1명이 군사를 동원했을 것이다.[6] 이의민 집권기로 알려졌던 시기는 사실 초기부터 이의민, 두경승, 무신정변에 참여한 이례로 승진을 거듭해온 조원정 이 3명의 거두로 군립한 연립 정권의 형태였으나 1187년 조원정이 탄핵 후 자신의 일파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인해 참수되자 2명의 연립 정권 형태로 바뀌었다.[7] 오늘날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바로 그 곳이다.[8] 영종역 1번출구 부근[9] 그렇기에 이의민을 견제하기 위해서 명종이 두경승을 적극 기용한 것이었다. 최충헌이 명종을 폐위했을 때 두경승도 같이 유배보내는 등 왕실의 측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10] 경대승 또한 〈제신 열전〉에 기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