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8 17:44:27

조비(고려)


고려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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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선왕의 제4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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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선왕의 세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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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능묘 미상
재위기간
고려 세자비
1292년 6월 ~ 1298년 1월 19일
고려 왕비
1298년 1월 19일 ~ 12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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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본관 평양 조씨
부모 부친 - 조인규(趙仁規, 1237 ~ 1308)[1]
모친 - 미상
배우자 충선왕(초혼)
오마르(재혼)[2]
자녀 없음
관저 미상
별호 충선왕비 조씨(忠宣王妃 趙氏)
작호 미상[3] }}}}}}}}}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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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6대 왕 충선왕의 제4비. 왕과의 혼인관계를 단절하고 재가해 호칭이 없으며, 사서에서는 성과 비를 합쳐서 그냥 趙妃라고 부른다.

2. 생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한 조인규(趙仁規)의 딸.

충선왕이 제1왕후인 계국대장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데 반해, 조씨와 충선왕의 금슬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러자 계국대장공주는 그녀가 자신을 저주했다고 원나라에 모략했다. 조씨는 결국 원나라로 끌려가 아버지와 함께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1298년에 1차적으로 즉위한 충선왕이 폐위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녀는 1292년(충렬왕 18년) 6월 무진일 당시 세자로 있던 충선왕에게 시집을 와 세자비에 책봉되었다.[4][5]

조비는 평소 충선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는 조비보다 4년 후에 고려로 시집 온 계국대장공주의 엄청난 질투를 샀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4월 공주는 당시 원나라에서 사용하던 문자인 외오아 문자를[畏吾兒文字] 사용하여 원나라 황태후에게 편지를 썼는데, 당시 편지에 “조비가 저를 저주하여, 왕이 저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라고 쓰며 조비를 무고하였고 이를 자신의 시종인 활활대와 활활불화를 시켜 원나라로 전하게 했다.[7]

그러나 이를 알아챈 충선왕이 박선[8]을 시켜 두 사람에게 편지의 내용을 물었으나, 두 사람은 편지의 내용을 말하기는커녕 도리어 박선을 구타하기만 하였다. 이에 겁에 질린 충선왕은 부왕 충렬왕에게 이러한 사실을 고하자, 충렬왕은 공주의 처소로 가서 공주와 활활불화, 활활대, 장길철리 등을 위로하고 노비, 여자 등을 하사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계국대장공주는 끝내 두 사람을 원나라로 보내어 기어이 원나라 황태후에게 이 일이 들어가게 하였다.

사건 이후 1298년(충선왕 즉위년) 5월 궁궐 문에 익명서 한 장이 붙었는데, 익명서에는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시켜서 저주를 하여, 왕이 공주는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익명서는 당시 사재주부 윤언주가 붙인 것이었다. 어쨌든 이 익명서로 인해 계국대장공주는 조인규와 그 처, 조인규의 아들 조서·조연·조후, 조인규의 사위 박의·노영수와 딸들까지 모조리 가두어 버렸다고 나와있다.

이 사실을 다시 사람을 시켜 원나라에 이 사실을 고하게 하였고 당시 충선왕, 상락백 김방경 등은 이를 못 가게 막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5월 병술일 계국대장공주가 조비에 대한 투기가 절정에 다다르자 공주의 유모가 무뢰배들과 함께 몰래 음모를 꾸며, 공주가 왕에게서 소박을 맞았다고 하면서 코케부카[闊闊不花]·코케다이[闊闊歹]와 대장군 김정·오정규 등을 원나라에 보내 황태후에게 고자질 하게 했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5월 활활불화 등이 원나라 황태후의 사신과 함께 고려로 들어왔는데, 황제의 명이라며 조비와 최충소, 장군 유온 등을 모두 가두어버렸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6월 정사일 원나라의 사신은 조인규와 그 처를 국문하였는데, 조인규의 처는 매우 참혹한 국문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허위 자백을 하고 말았다.

결국 조비와 환관 이온을 비롯하여 조인규와 그 처, 아들과 사위 최충소(崔沖紹)·박선(朴瑄) 모두를 원나라에 압송되었고 직후 원나라 황태후는 홍군상을 시켜 충선왕계국대장공주를 동침하게 하였다.

1305년(충렬왕 31년) 그녀의 아버지 조인규는 방면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충선왕은 즉위 7개월 만에 폐위되고, 태상왕으로 있던 충렬왕이 복위한다.

또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충렬왕충선왕 부자 및 두 왕 주변의 세력들은 정적이 되어 약 10여 년간의 정쟁으로 비화된다.

그러나 훗날 조비 일가는 복권되었을 뿐 아니라 고려 후기의 대표적 재상 가문으로 발전하였다.

조비가 원나라로 끌려간 이후 오마르에게 재가를 했다는 기록빆에 남아있지 않는다. 또 생몰년이나 사망지, 능지에 대한 기록 역시 없다. 시호도 전하는 것이 없고, 단지 그녀의 성인 조(趙)에 비(妃)를 붙여 조비(趙妃), 또는 충선왕비 조씨(忠宣王妃 趙氏)라고만 한다. 충선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11]

조서, 조련, 조후, 조위 등은 그녀와 남매이다. 이중 조련은 훗날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되는 조준의 할아버지이다.

3. 가족관계

  • 친정
    • 아버지 : 조인규(趙仁規)
      • 오빠 : 조서(趙瑞)
      • 남동생 : 조련(趙璉)
      • 남동생 : 조후(延珝)
      • 남동생 : 조의선(趙義旋)
      • 남동생 : 조위(趙瑋)
      • 형부 : 박의(朴義)
      • 형부 : 노영수(盧潁秀)
      • 제부 : 최충소(崔忠紹)
      • 제부 : 백효주(白孝珠)[재혼]
      • 제부 : 박경량/박선(朴景亮/朴瑄)
      • 제부 : 용양위대호군 염세충(廉世忠)[재혼]

4. 대중매체에서

조비를 주인공으로 하는 로맨스 소설인 《손끝에 물든 향기》가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되고 있다.
[1]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의 증조부[2] 원나라 사람[3] 기록삭제 추정[4] 즉, 충선왕의 제1왕후이자 훗날 대립 관계로 발전하는 계국대장공주보다는 4년 먼저 충선왕과 혼인한 것이다.[5] 따라서 조비는 정비 왕씨에 이어 충선왕의 제2비였으나, 몽골 출신인 계국대장공주와 의비 등에 밀려 제4비로 기록되었다.[畏吾兒文字] 외오아는 옛 회골을 말한다. 당시 원나라에는 따로 문자가 없어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으나, 편지 등에서는 외오아 문자를 많이 이용하였다.[7] 조비무고사건[8] 조인규의 사위[闊闊不花] [闊闊歹] [11] 작호는 결과론적으로는 폐비가 되어 원으로 쫓겨나간 것이니 당시 친원파 세력들에게 기록이 삭제되었을 수도 있고 충선왕 즉위 후에 몇개월 지나지 않아 바로 조비무고사건이 터졌기에 왕비로 재위한지는 얼마 되지 못했으며 이러한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 작호를 올릴 겨를이 없었을 수도 있다.[재혼] [재혼] [초혼]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