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23:38:21

화순옹주(고려 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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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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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고려 우왕의 제10옹주
화순옹주 | 和順翁主
출생 미상
사망 1389년 이후 (향년 미상)
고려 개경 사저 추정
(現 경기도 개성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고려 화순옹주
1388년 2월 ~ 138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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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본관 미상
소매향(小梅香)
부모 미상
배우자 우왕
자녀 없음
관저 미상
봉작 화순옹주(和順翁主)
}}}}}}}}} ||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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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32대 국왕 우왕의 제10옹주.

2. 생애

고려 말 우왕의 총애를 받은 구비삼옹주 중 한 명이다. 본래 기생 출신으로, 그 이름은 소매향이다.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기생 적선래가 맡았던 교방에서 있던 기생으로, 역시 우왕의 후궁이 된 연쌍비와 같은 교방 출신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388년(우왕 14년) 음력 2월 현비 안씨가 왕비로 책봉되던 때 또 다른 기생 출신인 연쌍비와 함께 후궁으로 책봉되어 그 작위를 화순옹주(和順翁主)라고 하였다. 이날 우왕은 동강에 가서 봉천선이라는 배에 올라타고, 음악을 연주하고 그 곳에서 머물렀다. 우왕은 소매향을 옹주로 책봉한 그 달에 지밀직 김영진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이 재산은 모두 소매향의 차지가 되었다.

한편 우왕현비화순옹주, 명순옹주를 책봉한 지 한 달 만에 영비 최씨정비 신씨선비 왕씨 등을 왕비로 또 책봉하였다. 당시 우왕의 왕비들에게 들어가는 물자로 인해 나라의 창고에 재물이 고갈되고, 이것도 모자라 공물을 3년분을 미리 징수하였는데도 부족하여 불법으로 세금을 더 거두는 바람에 그 폐단이 매우 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우왕의 후비들의 화려한 생활은 1388년(우왕 14년) 음력 6월 우왕이 폐위되면서 모두 막을 내려야 했다. 소매향이 후궁으로 책봉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우왕이 폐위되고 근비 이씨 소생의 창왕이 옹립되었다. 이때 우왕의 정비이자 창왕의 모후인 근비 이씨가 대비로 궁에 남게 되고, 고모가 왕대비였던 현비 안씨만이 궁궐에 남고 화순옹주를 포함한 우왕의 후비들은 모두 사가로 쫓겨나고, 그 아버지들은 모두 유배를 가게 되었다. 또 그녀들에 대한 국가의 물자 지급도 모두 중단되었다.

이후 그녀의 행적뿐 아니라 그녀의 생몰년이나 묘소에 대한 기록조차도 남아있는 것이 없어 알 수 없다. 우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다.

3. 가족관계

  • 배우자 / 남편
    • 남편 : 우왕 왕우(王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