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11 11:35:43

예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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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16대 군주
睿宗 文孝大王
예종 문효대왕
묘호 예종(睿宗)
시호 제순명렬문효대왕
(齊順明烈文孝大王)[1]
절일 함녕절(咸寧節)[2]
성씨 왕(王)
우(俁)
세민(世民)
왕후 경화왕후(敬和王后), 문경태후(文敬太后)[3],
문정왕후(文貞王后)
부왕 숙종 명효대왕
모후 광혜유가명의왕태후(光惠柔嘉明懿王太后)
능호 유릉(裕陵)
생몰연도 음력 1079년 1월 7일 ~ 1122년 4월 8일
양력 1079년 2월 11일 ~ 1122년 5월 15일
(43세 총 15799일.)
재위기간 음력 1105년 10월 2일 ~ 1122년 4월 6일
양력 1105년 11월 10일 ~ 1122년 5월 15일
(16년 6개월)

1. 소개2. 생애
2.1. 대내 업적2.2. 외교 업적2.3. 무과의 부활, 군사력 강화2.4. 말년
3. 평가4. 가족 관계5. 기타
5.1. 뻐꾸기, 도이장가, 태묘악장5.2. 중국 창작물에서의 등장

1. 소개

고려의 제16대 국왕. 묘호는 예종(睿宗), 시호는 제순명렬문효대왕(齊順明烈文孝大王). 휘는 우(俁). 자는 세민(世民). 어린 조카인 헌종을 퇴위시키고 스스로 보위에 오른 숙종의 장남.

2. 생애

고려의 역대 왕태자
왕욱 왕우 왕해

부왕 숙종이 여진 정벌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승하하자, 그 뜻을 이어 윤관에게 여진족 정벌을 명해 동북9성을 쌓는 등 큰 수확을 보았지만(1107년) 그만큼 손해도 많았다.

결국 이 같은 여진족의 끈질긴 게릴라 전술에 그 지역을 지키던 고려군의 피해가 누적되자 예종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양도함으로서 아이러니 하게도 여진 중흥의 발판이 되었다.

이후 패전의 책임을 명분으로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윤관은 파직되었다. 그러나 사망하기 직전(1110년, 참고로 1111년 사망)에 예종에 의해 복직되었다. 여진 정벌 중에 한국사 역사상 최강의 인간흉기 장수로 일컬어지는 척준경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그 활약은 인종 때까지도 이어진다.

2.1. 대내 업적

예술에 조예가 깊어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나름 문학적 소양을 나타냈다.[4]

예종은 또 현재 아악(雅樂)의 근본인 북송의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와 이를 정비했으며, 9성 개척으로 인한 국력 소모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는 등 민생에도 신경을 썼다.

또한 학당을 많이 설치하는 등 유교를 기반으로 한 통치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미 최충의 학당으로 대표되는 사교육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숙종 대에는 폐지론까지 나온 국자감(공교육) 진흥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선 국왕이 바로 예종이다.

9재 학당을 모방하여 국자감 7재를 개설하였다. 7재란 주역, 모시(시경), 주례(3례의 하나), 상서(商書, 서경의 일부), 대례(戴禮, 예기), 춘추(오경)와 무예[5]가 된다.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국자감에 설치하였으며, 학문 연구 기관인 보문각(寶文閣)과 청연각(靑讌閣)도 설치하는 등 고려 시대 중앙 교육 시설의 틀을 잡았다.

조선시대에만 행해진 것으로 착각 할 수 있는 경연을 한국역사에서 처음 시행한 것도 예종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연을 안하거나 피하는 것이 군주권의 상징일 정도였지만, 예종은 국왕권이 강했기 때문에 유교 활성화 목적으로 경연을 도입한 특이한 예이다. 다만 이후 경연은 무신정권 시기에 아주 폐지되기도 하였다가 원간섭기에 부활하는 등 시행 자체가 잘 이어지지 않는 것에 더해서 강제성도 약했다.

동시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도교 도관(道觀)인 복원궁(福源宮)이 세워진 것도 예종 대의 일이다. 예종은 송휘종에게 도사를 요구해서, 궁궐 내에 도관을 세웠다. 종교로 신봉할 수도 있었겠지만 연개소문의 사례처럼 도교를 끌어들여서 불교를 견제했을 가능성도 높다.

2.2. 외교 업적

송나라와의 관계는 문종, 선종 대를 거치며 상당히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당시 송나라에선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 당시 자신들을 제외한 나라 중에 가장 높은 직위로 인정해 주었다.
정화(政和) 연간(1111년 ~ 1117년)에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로 승격시켜 예우가 서하국보다 위에 있었고, 요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다.

인반관(引伴官)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대성연악(大晟燕樂)》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따위의 그릇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 안에서 고려 사신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고려의)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아뢰길:
고려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6]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7]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려가 과거에 거란(契丹)을 섬겼으므로 지금에는 반드시 금(金)나라를 섬길 터인데, 그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명주(明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그 예물(禮物)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비로소 귀국하였다.
왕휘(王徽)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契丹)의 책봉(册封)을 받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여 송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干支)를 사용하였다.
고려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은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8]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이 한번은 고려가 서쪽으로 조공(朝貢)한 일에 대하여 힐책(詰責)하자 고려는 표(表)를 올려 사과했다. 그 표(表)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갑자(甲子)만에 한번씩 조공(朝貢)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朝貢)합니다.” 하니

거란이 깨달아 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서는 금(金)나라 사람들이 고려와 내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가종정소경(假宗正少卿)으로 삼아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으로 임명하여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려(胡蠡)의 귀국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심지어 송나라에선 고려 사신들이 행패를 부리는데 아무런 제재를 하지 못하자 이를 보고 한탄하는 기록도 남아있다. 송사 고려전에서 문종 - 예종 사이의 기록들은 송나라에서 "와 고려 저 새퀴들 진짜 너무 깝치는데 우리가 손쓸 방법은 없고 어휴..." 같은 한탄이 굉장히 늘어난다.

이 시기 고려 사신의 위상은 엄청났는데 각국의 사신들이 송 황제와 대면하기 전 고려 사신을 먼저 접견해서 문제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1118년, 송휘종은 예종에게 직접 쓴 사찰 간판[9]과 부처 상을 보냈으며 역시 직접 쓴 어필국서를 전달했고, 예종도 보답으로 어필국서를 써서 보냈다.

또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여 거란과 여진과의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 의주가 우리 땅이 된 것도 바로 예종의 치세.

당시 거란은 발해 유민 출신인 고영창이 반란을 일으켜 대발해를 세운 탓에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거란의 지원 요청을 묵살하고(1115년) 오히려 지원을 빌미로 거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도로 받아(1116년 ~ 1117년)낸 것이 바로 지금의 의주(당시 의주 방어사)이다.

그렇다고 여진족에게도 저자세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형제국이 되자(물론 금이 형)',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글을 보낸다."며 아골타[10]가 제의해온 것을 무시하였다(1117년).
중서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파견해 금(金)을 찾아갔다. 그 서(書)엔:

"심지어 네 근원은 내 땅에서 발(發)한 것이다(况彼源發乎吾土)."

란 말이 있어 금주(金主)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이후 2년 뒤 1119년 8월 정축일, 금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고려의 글 중엔 "너(彼)의 근원은 내 땅(吾土)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구절이 있어 금 황제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11] 사신이 가져간 글은 고려의 국서인데 국서에다가 당시 황제를 자칭하던 아골타를 "너(彼)"라고 칭한 것이다.

예종 14년(1119년) 12월 계미일, 여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천리장성의 높이를 석 자나 더 높였다. 이 공사를 여진은 방해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천리장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이 보고를 받은 금 조정은 그저 정찰만 늘릴 뿐,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기록엔 예종 15년 1120년 7월, 거란은 사신을 보내 여진을 거란과 고려의 같은 원수란 뜻인 '동구(同仇)'라고 표현하며 은근히 같이 여진과 싸워 주길 바랬다.

허나 막상 고려는 1117년 의주를 수복했을 때 거란과 여진을 두 적국이란 뜻인 '양적(兩敵)'으로 부르며 서로 싸우다 망하라고 놀린 적이 있다...[12] [13]

고려사절요 기록엔 예종 15년 1120년 7월, 송나라의 사신들이 떠날 때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송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음에도 전각의 계단 밑에서 절하게 했다. 그 전엔 계단 위에서 절했는데 너무 과하다고 여긴 것이다.

2.3. 무과의 부활, 군사력 강화

또한 1109년(예종 4년), 앞서 언급한 국자감 7재 중에 무관 양성을 위한 '무학재'라 불린 강예제를 설치하였고, 후기에는 무학재에 인원을 상대적으로 더 늘리기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군사 분야에 신경을 많이 쓴 보기 드문 국왕이었다. 고려 시대에 유일하게 시행된 무과 역시 예종 대에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벌 귀족 사회였던 고려는 이후의 조선 시대보다 훨씬 무과에 대한 천대가 심해서 강예제 설치에는 엄청난 반발이 따랐다.

그런 반발에도 예종은 본래 유학재 70명, 무학재 8명으로 시작한 관학 7재를 10년 뒤에는 60명과 17명으로 조절해버렸다. 겉보기로는 유학재가 3배 이상 많은 것 같지만. 유학재는 6재가 모인 것으로 각 재당 10명이었던 반면에 무학재는 17명으로 오히려 1.7배가 된다.

윤관별무반도 그렇고 예종으로서는 독한 맘을 먹고 군사력 강화를 진행한 것이다. # 문종과 더불어 무관에 대해 대접을 잘 했던 군주이며 전쟁에 나가 싸운 문무신료들의 죄는 그동안 공을 생각해서 묻지 않았다.

이유는 숙종이 동북 9성을 추진했고 당시 참여했던 문무신료들은 숙종의 뜻에 따라 움직였으니 참작이 가능했다. 이는 세종대왕조차도 이점을 인정하여 예종의 장점을 흡수해 4군 6진때 참여한 문무신료들에 대한 견제를 하지않고, 오히려 우대했다.

그러나 무과는 결국 예종 다음 국왕인 인종 11년(1133년, 24년만)에 바로 폐지되어 경사 6학으로 재편되었다. 무과가 시험이 간단하고 상대적인 응시자가 적어(앞서 말한 뽑는 인원이 많았기 때문),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문과의 세가 약해진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려 시대의 무과는 사실상 없는 것과 같다고 해석되다가, 최근에 예종 때 아주 잠깐 했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추가되었다. 공양왕 2년에도 무과가 257년 만에 부활되었으나, 사실상 멸망 직전이라 의미 없는 부활이었다.

2.4. 말년

그러나 말년에 지나친 음주가무와 연이은 연회로 인해 종기가 발병, 발병 후 한 달만에 붕어하고 만다. 향년 44세.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다.

죽기 전 한국의 유명한 산과 강에 제사도 지내고 이자겸을 시켜 하늘에 제사도 지내지만 곧 자신의 수명이 다했음을 느끼고 얼른 태자 왕해에게 양위한다. 예종은 태자가 어린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1122년 4월 2일, 예종은 부축을 받고 앉았다. 여러 중신들을 소환해 일렀다.
짐(朕)이 부덕하니 하늘이 벌을 내렸다. 질병이 낫질 않으니 어떻게 신민(臣民)의 위에서 군국(軍國)을 총괄하겠는가.

태자(太子)가 비록 어리고 작으나 덕행이 이미 완성됐으니 저공(諸公)이 모두 마음을 합쳐 보좌하여 그가 다치지 않게 하라.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군신(群臣)들은 엎드려 울고 있었고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곧이어 태자를 불러 말하니
내(予) 질병이 커져 형세가 회복되지 않을 것 같구나. 이에 중임(重任)을 풀어 너(汝)에게 전해 돌려주마.

내 평생(平生)의 행동을 돌이켜 보니 득소실다(得少失多)하니 따르려 하지 말거라.

단지 옛 성현(聖賢)의 길을 따르고 우리 태조의 교훈(我太祖之訓)을 따르거라.

(왕의) 자리(位)에서 게을러지지 말고 영원히 서민(庶民)을 품거라.
태자는 울며 머리를 들지 못했고 일어나질 못했다.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그가 태자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날 따라하지 말고 위대한 선조들을 배워라." 아버지로서 어린 아들이 걱정 된 듯하다. 이 말을 마치고 태자에게 국새(國璽)를 넘겨주었다.

신하에게 남긴 유조(遺詔)는 태자를 잘 따르라고 당부하고 있다.
(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여 재(載)가 지났다.

쇠락한 자를 돕고 피폐한 자를 구했다. 만민(萬民)과 같이 생각하고 같이 쉬었다.

옷을 대충 입고 식사를 대충했다. 하루도 잠시라도 게을러진 적이 없었다.

근심이 심하고 누적되니 질병을 요양할 시기를 놓쳐 결국 크게 심해졌다.

권국사(權國事) 해(楷)는 그 명철한 성격이 하늘이 내린 것이며 그 원랑(元良)[14]의 자질이 인망(人望)을 채울 수 있다.

내 명이 끝나기 전에 왕위(王位)를 이어라. 모든 군국중사(軍國重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맞긴다.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방진주목(方鎭州牧)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오호라(於戲)! 죽음과 삶은 늘 있는 길이니 사람이 도망치기 힘들다. 시작과 종말이 내가 원하는데로 이어지니 짐이 유감이 있겠는가.

묘(廟)사(社) 덕분에 저지(儲祉)[15]를 세웠으니 신린(臣隣)들은 사군(嗣君)을 같이 보좌하여 왕실(王室)을 영원히 밝혀라.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게 하라.

아(咨)! 너희(爾) 여러 나라(多方)[16] 들아, 내 의지를 받들라!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예종의 유조.

1122년 4월 8일, 예종은 붕어한 뒤 본궐 선정전(宣政殿)에 재궁[17]이 안치됐다. 태자가 즉위하니 인종 공효대왕이다. 인종은 아버지의 빈전[18] 선정전에서 며칠동안 크게 울었다고 한다.

3. 평가

43세 ~ 44세인 고려 왕의 평균 수명까지 살았던 국왕이다. 재위 기간도 17년으로 평균인 14년과 흡사하다. 더구나 폐위나 비명횡사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현종 이후의 고려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로, 더 나아가 고려사에서 마지막으로 성공을 거둔 현군이라 할만하다.

어느 정도냐면 고려왕으로서 순번으론 절반에 못 미치는 예종 이후로 고려는 무탈하게 재위 기간을 마친 왕이 없다. 인종은 이자겸, 묘청의 난이라는 대혼란을 겪었고,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폐위된 후 시해당했으며, 무신정변 ~ 원 간섭기는 한반도 역사상 유례 없는 기나긴 국왕들의 수난사였다.

그나마 이 시기를 극복하나 싶었던 공민왕은 말년에 실정을 저지르다 시해당했고, 우왕 이후로는 사실상 멸망 테크를 밟았다.

고려 중기 최대의 문제아 중 하나인 이자겸은 예종 시기 이전에도 이미 외척으로 존재하였지만, 예종 대에선 감히 꼼짝도 못하고 그냥 일반 친척으로 머물렀다는 것만 봐도 예종 이후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자겸을 견제하기 위해 예종이 일부러 한안인(韓安仁)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하기도 했다. 다만 예종이 죽을 시 그의 후계자 인종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인종의 안전한 제위 보장을 위해 이자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

선대의 왕들이 받아먹었다라고 해야 할 정도로 대내외적으로 시기를 잘 타고나기도 했고, 문벌 귀족들에게 휘둘린 감도 없지 않지만, 예종은 숙종시기 어느 정도 확보된 왕권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이후 이자겸의 난과 함께 고려 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이 막장의 후반기 300년은 설사 왕이 능력이 있어도 무인정권처럼 실권이 없거나 원의 내정간섭을 극복 못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4. 가족 관계

그의 아들이 두 이모하고 결혼해 몸소 근친을 실천한 인종(仁宗)이다.

첫 왕비 경화왕후[19] 는 선종의 딸로 1079년에 선종과 정신현비의 딸로 태어났으며, 성씨는 외가의 성을 따라 이(李)씨로 하였다. 남편인 예종과는 친사촌이 된다. 1109년(예종 5년)에 사망한 후에 경원 이씨 집안의 딸을 맞아들였는데 이가 문경왕태후 이씨[20]이다.

문경태후에 대해선 문서 참조.

문경왕태후 이씨 뒤에는 종친인 문정왕후 왕씨와 혼인했다. 왕씨의 아버지 진한후 왕유는 그녀의 시아버지인 숙종의 이복 동생으로 문종과 인경현비의 아들이다. 또 남편 예종의 친조모는 이자연의 딸인 인예태후이며, 그녀의 할머니 인경현비도 역시 이자연의 딸이다. 이로써 예종과 문정왕후의 혼인은 친가로는 4촌간, 외가로는 6촌간의 혼인인 근친혼이다. 전왕 숙종이 6촌 이상 근친금지령을 내려봐야 왕실에서도 안 지키고 있었으니 이건 뭐 말짱 황(...). 인종은 문경태후 소생으로, 자신의 이모들과 결혼하게 된다.

5. 기타

5.1. 뻐꾸기, 도이장가, 태묘악장

고려사 악지 중 속악 부분이 있는데 이 속악은 향악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가락과 우리 말로 만들어진 노래를 말한다. 고려사는 유명한 고려의 '풍입송'[21]이나 고대 삼국 고구려, 신라, 백제의 노래는 전부 속악으로 분류해놨다.

여하간 이 기록된 속악 중 '벌곡조(伐谷鳥)'란 노래가 있다. 벌곡조는 뻐꾹새, 즉 뻐꾸기의 음차인데 예종이 직접 지은 노래라고 한다. 노래가 우리말로 되있어 고려사는 실 가사를 기록하지 않고 노래 내용만 기록했는데 뻐꾸기의 내용은 예종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겁내지 말고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 노래 뻐꾸기는 조선시대까지 남은 듯 하다. 조선왕조에서 만든 '시용향악보'에 '유구조'란 노래가 있는데 유구조는 비둘기를 뜻한다. 노래의 내용이 설명한 예종의 뻐꾸기와 똑같아 사실상 둘이 같은 노래로 보인다.
비두르기 새

비두르기 새는

울음을 울지만

뻐꾹쟁이

난 좋아

뻐꾹쟁이아

난 좋아
- 조선조 시용향악보에 기록된 노래 유구조.

이 노래는 의외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2016년에 방영된 KBS사극 정도전에서 이 노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장면은 한양 천도 직후 열린 연회에서였는데, 당시 흥에 겨운 태조가 궁에서 판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잠시 등장한다.[22]

본인이 지은 유명한 향가인 도이장가도 그렇고 예종 세가에 보면 서경 장락궁에 가서 노래를 하나 또 지었다고 하는데 예술가적 면모가 꽤 있던 듯 하다.

고려사 악지 아악 부분엔 예종의 태묘 찬가가 적혀있다. 제목은 '미성(美成)'이며 아쉽게도 가사가 없다.

5.2. 중국 창작물에서의 등장

수호전의 스핀오프작인 수호후전에서는 고려국왕 이우(李俁)로 나온다. 배경 시기를 감안하면 인종이 나오는 게 맞겠지만.


[1] 고려사 예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절일은 태자 시절엔 창녕절(昌寧節), 왕이 되어 함녕절로 바꾸었다. 원종과 절일이 같다.[3] 이자겸의 2녀로 예종비이자 인종의 어머니이다. 인종의 폐비인 이씨들의 언니이기도 하다.[4] 이건 사실 왕권 강화 목적이다. 공산 전투에서 태조를 지키고 전사한 김락신숭겸을 기리는 글을 써서, 신하들에게 왕인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목적이었다.[5] 무술과 병법을 가르쳤다. 강예재講藝齋라고 불렀다.[6] 재정을 궁핍하게 하고 민생을 피페하게 했으니[7] 고려 사신이 오는 것을[8] 거란과 고려는 비록 사대관계를 맺고 전쟁을 멈췄다지만 늘 사이가 안좋아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고려는 거란에 입조하지도 않았고 6성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장성을 쌓을 때 거란이 항의했지만 결국 끝까지 쌓았다. 밑에도 나오는데, 거란은 고려가 송과 만나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지만 고려는 무시하고 연락을 지속했다.[9] 이 사찰은 안화사(安和寺)로 예종의 왕후, 인종의 모후인 문경태후의 원찰이다.[10] 1115년에 칭제건원하였으며 후의 금태조이다.[11] 여진이 옛날 고려의 제후였음을 비꼰 것이다.[12]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12년 1117년 3월 기록.[13] 위에도 나왔듯이 거란은 늘 고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심지어 고려는 여진을 한번 공격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 서로 건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고려는 더욱 양적이 싸우다 망하길 바랬을 것이다.[14] 원자란 뜻이다.[15] 태자의 다른 말이다.[16] 方은 나라 방 자이기도 하다. 즉 多方은 많은 나라란 뜻이다.[17] 왕의 관을 높혀 부르는 말.[18] 재궁을 왕릉에 묻기 전 안치해둔 전각을 이르는 말.[19] 예종의 첫 왕후임에도 불구하고, 예종의 시호인 文의 시호를 덧붙이지 못했다. 이는 인종이 의도적으로 생모인 문경왕태후를 높이기 위해서 했을 가능성이 있다.[20] 첫 시호는 순덕왕후이다. 인종 즉위 이후, 예종의 시호인 문효왕의 시호를 따서 문경왕태후로 시호를 고쳤다. 인종의 생모이기 때문에 太를 더한 것이다.[21] 고려의 외왕내제 성격을 드러내는 노래이다.[22] 이 노래는 권근과 하륜 등의 무리들이 "궁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하며 막는 바람에 끝까지 부르지 못한다. 이성계 :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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