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4 09:37:17

예종(고려)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color:#670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or:#181818"
초대

태조
제2대

혜종
제3대

정종定宗
제4대

광종
제5대

경종
제6대

성종
제7대

목종
제8대

현종
제9대

덕종
제10대

정종靖宗
제11대

문종
제12대

순종
제13대

선종
제14대

헌종
제15대

숙종
제16대

예종
제17대

인종
제18대

의종
제19대

명종
제20대

신종
제21대

희종
제22대

강종
제23대

고종
제24대

원종
임시

영종
제25대

충렬왕
제26대

충선왕
제27대

충숙왕
제28대

충혜왕
제29대

충목왕
제30대

충정왕
제31대

공민왕
제32대

우왕
제33대

창왕
제34대

공양왕
국조 · 의조 · 세조
대종 · 안종
비정통 안경공 · 승화후 · 덕흥군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백제 · 가야 · 신라 · 발해
후삼국 · 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민국

제후왕 · 심왕 · 무신정권
}}}}}}}}}
고려 16대 군주
睿宗 文孝大王
예종 문효대왕
묘호 예종(睿宗)
시호 제순명렬문효대왕
(齊順明烈文孝大王)[1]
절일 함녕절(咸寧節)[2]
성씨 왕(王)
우(俁)
세민(世民)
왕후 경화왕후(敬和王后)[3], 문경태후(文敬太后)[4],
문정왕후(文貞王后)
부왕 숙종 명효대왕
모후 광혜유가명의왕태후(光惠柔嘉明懿王太后)
능호 유릉(裕陵)
생몰연도 음력 1079년 1월 7일 ~ 1122년 4월 8일
양력 1079년 2월 11일 ~ 1122년 5월 15일
(43세 총 15799일.)
재위기간 음력 1105년 10월 2일 ~ 1122년 4월 6일
양력 1105년 11월 10일 ~ 1122년 5월 15일
(16년 6개월)
1. 개요2. 묘호와 시호3. 치세
3.1. 내정
3.1.1. 국자감 7재 설립과 경연 실시3.1.2. 무과 설치, 군사력 강화3.1.3. 혜민국(惠民局) 설치3.1.4. 제례악 정비3.1.5. 불교와 도교 진흥
3.2. 외정
3.2.1. 對 북송3.2.2. 對 거란3.2.3. 對 여진
3.3. 말년
4. 평가5. 가족관계6. 이모저모
6.1. 예술가적 면모6.2. 창작물에서
7. 같이보기

1. 개요

고려의 제16대 국왕. 묘호는 예종(睿宗), 시호는 문효대왕(文孝大王). 휘는 우(俁). 자는 세민(世民). 어린 조카인 헌종을 퇴위시키고 스스로 보위에 오른 숙종의 장남.

승하한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부왕 숙종이 마련한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예종은 신하들을 억제하고 정권을 차지해 국정을 주도할 수 있었다. 음악, 시, 연회를 좋아했지만, 국자감 세분, 학문 연구 각(閣) 설치, 서경 용덕궁 건설을 통해 중앙귀족 견제, 무과 최초 설치, 북방 정벌, 대 여진 강경외교, 대 송 친화외교를 성공시켜 국정을 탄탄하게 이끌었다.

다만 부왕 숙종 때부터 이어져오던 측근 정치가 더욱 강화되는 동시에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을 심화시켰으며,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금나라를 세울 정도의 힘을 가진 여진과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강력한 왕권을 지니며 국정을 주도했던 예종 때까진 이런 단점이 억눌러졌으나, 태자 인종 대부터 안좋은 점들이 줄줄히 터지게 된다.

2. 묘호와 시호

공식 묘호예종(睿宗)이다. 문(文)으로는 문학 진흥에 힘썼고, 무(武)로는 17만 대군을 출정, 북벌을 진행하여 고려의 존재감을 드러냈으니 예(睿) 자에 맞다고 볼 수 있다. '현화사승통각관묘지명'[5]에선 예묘(睿廟)로 등장한다.

시호는 제순명렬문효대왕(齊順明烈文孝大王). 태자 인종이 문효를, 또 명렬을, 4대손 고종이 제순을 올렸다. 대표시호는 문효대왕(文孝大王)으로 예종의 공식 묘호 및 시호는 예종 문효대왕(睿宗 文孝大王)이다.

신하들이 예종을 황옥(黃屋)[6], 고려 조정을 천공(天工)이라 불렀다.[7] 신하 곽여는 자신의 시에 예종을 옥제(玉帝), 일월(日月)로, 만월대를 천문(天門)으로 비유했다. 예종은 자신의 보위를 천서(天序)라고 칭하는 등 천자로서 군림했는데, 이는 당시 여진족의 발호와 맞물려 고려는 더욱 보수적으로 변하게 된다.

3. 치세

고려의 역대 왕태자
왕욱 왕우 왕해
왕우는 할아버지 문종 재위 33년차인 1079년 1월 7일에 태어났다. 아버지어머니가 아직 국왕, 왕후가 되기 전에 태어났으며 그저 왕위 계승권에서 먼 방계 왕족에 지나지 않았다.
검교직 검교사공(檢校司空) 선종이 봉한 검교직. 주국과 겸했다. 검교사공은 명예 사공이다. 사공은 삼공 직 중 하나다.
훈위 주국(柱國) 선종이 봉한 2등급 훈위. 검교사공과 겸했다.
삼공 태위(太尉) 검교사공 - 주국에서 태위 - 주국으로 승진했다. 태위는 삼공 직 중 하나다.
하지만 할아버지 문종이 붕어하고 나서 그 자리를 이어받은 순종조차 한 달만에 붕어, 그리고 즉위한 큰아버지 선종이 재위 11년만에 승하하면서 어린 사촌 헌종에게 자리를 넘기자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나라 사람들이나 조정, 심지어 같은 친척들조차 아버지인 계림공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형이었던 선종이 승하 전 유조를 통해 헌종을 후계자로 임명했고 끝내 그가 즉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왕의 등극과 권신의 출현 등으로 인해 점차 조정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이를 틈타 세력을 키워 이자의 등 반대파를 몰아낸 아버지 숙종이 헌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8] 이 때 왕자가 된 예종의 나이는 만 16살이었다.

예종은 처음부터 태자 혹 왕자였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왕족들 중 한 명에 불과헀으며, 장성하고서도 다른 왕족들 및 자신의 숙부들과 형제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근신들과 경쟁해야했다.[9] 이런 배경 속에서 예종은 살아남는 방법과 정치적 감각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10] 이리하여 예종은 만 21살일 때, 드디어 태자에 봉해졌다.[11]

만 26살이 되었을 때, 서경 장락궁을 순수하고 돌아오던 중 아버지가 붕어하였고, 본궐 중광전(重光殿)[12]에서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13]

3.1. 내정

3.1.1. 국자감 7재 설립과 경연 실시

학당을 많이 설치했다. 숙종 대에는 폐지론까지 나온 국자감(공교육) 진흥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섰다. 최충의 9재 학당을 모방하여 국자감 7재를 개설하였다.
국자감 7재 국자감 7과목 전문 강좌
재(齋) 과목 설명
여택재(麗澤齋) 주역
경덕재(經德齋) 모시(毛詩) 시경이다.
구인재(求仁齋) 주례 3례 중 하나이다.
양정재(養正齋) 춘추 오경 중 하나이다.
복응재(服膺齋) 대례(戴禮) 예기 중 하나이다.
대빙재(待聘齋) 상서(商書) 서경(書經)의 하나이다.
강예재(講藝齋) 무학(武學) 무술과 병법. 별칭은 무학재(武學齋).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국자감에 설치하였으며, 학문 연구 기관인 보문각(寶文閣)과 청연각(靑讌閣)도 설치하는 등 고려시대 중앙 교육 시설의 틀을 잡았다.

조선왕조에만 행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경연을 한국사에서 처음 시행하였다.

3.1.2. 무과 설치, 군사력 강화

1109년(예종 4년), 앞서 언급한 국자감 7재 중에 무관 양성을 위한 '무학재'라고도 불린 강예제를 설치하였고, 후기에는 무학재에 인원을 상대적으로 더 늘리기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군사 분야에 신경을 많이 쓴 보기 드문 국왕이었다. 고려 시대에 유일하게 시행된 무과 역시 예종 대에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벌 귀족 사회였던 고려는 이후의 조선시대보다 훨씬 무과에 대한 천대가 심해서 강예제 설치에는 엄청난 반발이 따랐다. 그런 반발에도 예종은 본래 유학재 70명, 무학재 8명으로 시작한 관학 7재를 10년 뒤에는 60명과 17명으로 조절해버렸다. 겉보기로는 유학재가 3배 이상 많은 것 같지만. 유학재는 6재가 모인 것으로 각 재당 10명이었던 반면에 무학재는 17명으로 오히려 1.7배가 된다.

윤관별무반도 그렇고 예종으로서는 독한 맘을 먹고 군사력 강화를 진행한 것이다.# 문종과 더불어 무관 대접을 잘 했던 군주이다.

전쟁에 나가 싸운 문무신료들의 죄는 그동안 공을 생각해서 묻지 않았는데, 이유는 숙종이 동북 9성을 추진했고 당시 참여했던 문무신료들은 숙종의 뜻에 따라 움직였으니 참작이 가능했다. 이는 세종대왕조차도 이점을 인정하여 예종의 장점을 흡수해 4군 6진때 참여한 문무신료들에 대한 견제를 하지않고, 오히려 우대했다.

그러나 무과는 결국 예종 다음 국왕인 인종 11년(1133년, 24년만)에 바로 폐지되었고, 7재는 경사 6학으로 재편되었다. 무과가 시험이 간단하고 상대적인 응시자가 적어[14],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문과의 세가 약해진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려 시대의 무과는 사실상 없는 것과 같다고 해석되다가, 최근에 예종 때 아주 잠깐 했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추가되었다. 공양왕 2년에도 무과가 257년 만에 부활되었으나, 사실상 국가가 멸망 직전이라 의미 없는 부활이었다.

3.1.3. 혜민국(惠民局) 설치

9성 개척으로 인한 국력 소모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는 등 민생에도 신경을 썼다.

3.1.4. 제례악 정비

예종은 현재 아악(雅樂)의 근본인 북송의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와 이를 정비했다. 태묘 자체가 북송이 정비한 유교식 제사방식인 것을 고려가 수입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종묘제도를 한차례 개선한 셈이다.[15]

또한 고려 태묘악장을 완전히 새롭게 고쳤다. 예종 이전에도 분명히 태묘악장이 있었겠지만 현존 기록 상 예종이 제작한 악장이 제일 오래됐다.

고려사 악지 기록으론 태조, 혜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숙종 9명에게 올렸으며 각 임금 문서에 내용이 나와있다. 고려사 악지 아악 부분엔 태자 인종이 올린 본인의 태묘찬가가 적혀있다. 제목은 '미성(美成)'이며 아쉽게도 가사가 없다.

3.1.5. 불교와 도교 진흥

예종 때에는 덕창(德昌), 담진(曇眞), 낙진(樂眞), 덕연(德緣) 등 불교 고승들이 있었다.

이 중 담진은 1107년 예종의 왕사(王師)가 되었고, 1114년 국사(國師)가 되었으며, 1116년 보제사로 행차한 예종에게 설법하였다. 화엄학(華嚴學)의 대가로서 일승법(一乘法)을 선양하여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한국사상 최초의 도관(道觀)[16]복원궁(福源宮)을 세운것도 예종 때의 일이다. 예종은 송휘종에게 도사를 요구해서, 궁궐 내에 도관을 세웠다.

3.2. 외정

3.2.1. 對 북송

송나라와의 관계는 문종, 선종 대를 거치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당시 송나라에선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 당시 자신들을 제외한 나라 중에 가장 높은 직위로 인정해 주었다.
정화(政和) 연간(1111년 ~ 1117년)에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로 승격시켜 예우가 서하국보다 위에 있었고, 요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다.

인반관(引伴官)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대성연악(大晟燕樂)》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따위의 그릇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 안에서 고려 사신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고려의)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아뢰길:
고려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17]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18]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려가 과거에 거란(契丹)을 섬겼으므로 지금에는 반드시 금(金)나라를 섬길 터인데, 그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명주(明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그 예물(禮物)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비로소 귀국하였다.
왕휘(王徽)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契丹)의 책봉(册封)을 받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여 송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干支)를 사용하였다.
고려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은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19]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이 한번은 고려가 서쪽으로 조공(朝貢)한 일에 대하여 힐책(詰責)하자 고려는 표(表)를 올려 사과했다. 그 표(表)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갑자(甲子)만에 한번씩 조공(朝貢)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朝貢)합니다.” 하니

거란이 깨달아 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서는 금(金)나라 사람들이 고려와 내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가종정소경(假宗正少卿)으로 삼아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으로 임명하여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려(胡蠡)의 귀국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심지어 송나라에선 고려 사신들이 행패를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하자 이를 보고 한탄하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송사 고려전에서 문종 - 예종 사이의 기록들은 송나라에서 "와 고려 저 새퀴들 진짜 너무 깝치는데 우리가 손쓸 방법은 없고 어휴..." 같은 한탄이 굉장히 늘어난다.

이 시기 고려 사신의 위상은 엄청났는데 각국의 사신들이 송 황제와 대면하기 전 고려 사신을 먼저 접견해서 문제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1118년, 송휘종은 예종에게 직접 쓴 사찰 간판[20]과 부처 상을 보냈으며 역시 직접 쓴 어필국서를 전달했고, 예종도 보답으로 어필국서를 써서 보냈다.

고려사절요 기록엔 예종 15년 1120년 7월, 송나라의 사신들이 떠날 때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송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음에도 전각의 계단 밑에서 절하게 했다. 그 전엔 계단 위에서 절했는데 너무 과하다고 여긴 것이다.

3.2.2. 對 거란

당시 거란은 발해 유민 출신인 고영창이 반란을 일으켜 대발해를 세운 탓에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거란의 지원 요청을 묵살하고(1115년) 오히려 지원을 빌미로 거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도로 받아(1116년 ~ 1117년)낸 것이 바로 지금의 의주(당시 의주 방어사)이다.

고려사절요 기록엔 예종 15년 1120년 7월, 거란은 사신을 보내 여진을 거란과 고려의 같은 원수란 뜻인 '동구(同仇)'라고 표현하며 은근히 같이 여진과 싸워 주길 바랬다.

허나 막상 고려는 등거리 외교를 취해 1117년 의주를 수복했을 때 거란과 여진을 두 적국이란 뜻인 '양적(兩敵)'으로 부르며 서로 싸우다 망하라고 놀린 적이 있다...[21] [22]

3.2.3. 對 여진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23]의 부락(部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을 깊히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우리를 배반했고 무도(無道)해졌으니, 선고(先考)께선 심히 분노하셨다.
늘 듣길 고인(古人)이 말하는 '대효자(大孝者)'란 '뜻을 잘 계승한 자'라고 한다. 짐(朕)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제사를 끝마쳐 국사(國事)를 돌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함을 벌하고 선군(先君)의 분노를 풀 것이다!"
- 고려사 윤관 열전 중 발췌. 예종의 북벌 선언문이다.
부왕 숙종이 여진 정벌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승하하자, 그 뜻을 이어 윤관에게 여진족 정벌을 명해 동북9성을 쌓는 등 큰 수확을 보았다(1107년).

허나 그만큼 손해도 많았다. 결국 여진족의 끈질긴 게릴라 전술에 그 지역을 지키던 고려군의 피해가 누적되자 예종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양도함으로서 아이러니 하게도 여진 중흥의 발판이 되었다.[24] 이후 패전의 책임을 명분으로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윤관은 파직되었다.[25] 여진 정벌 중에 한국사 역사상 최강의 장수로 일컬어지는 척준경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그 활약?은 인종 때까지도 이어진다.

그렇다고 여진족에게도 저자세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형제국이 되자(물론 금이 형)',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글을 보낸다."며 아골타[26]가 제의해온 것을 무시하였다(1117년).
중서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파견해 금(金)을 찾아갔다. 그 서(書)엔:

"심지어 네 근원은 내 땅에서 발(發)한 것이다(况彼源發乎吾土)."

란 말이 있어 금주(金主)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이후 2년 뒤 1119년 8월 정축일, 금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고려의 글 중엔 "너(彼)의 근원은 내 땅(吾土)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구절이 있어 금 황제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27] 사신이 가져간 글은 고려의 국서인데 국서에다가 당시 황제를 자칭하던 아골타를 "너(彼)"라고 칭한 것이다.

예종 14년(1119년) 12월 계미일, 여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천리장성의 높이를 석 자나 더 높였다. 이 공사를 여진은 방해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천리장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이 보고를 받은 금 조정은 그저 정찰만 늘릴 뿐,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28]

3.3. 말년

그러나 말년에 지나친 음주가무와 연이은 연회로 인해 종기가 발병, 발병 후 한 달만에 붕어하고 만다. 향년 44세.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다.

죽기 전 한국의 유명한 산과 강에 제사도 지내고 이자겸을 시켜 하늘에 제사도 지내지만 곧 자신의 수명이 다했음을 느끼고 얼른 태자 왕해에게 양위한다. 예종은 태자가 어린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1122년 4월 2일, 예종은 부축을 받고 앉았다. 여러 중신들을 소환해 일렀다.
짐(朕)이 부덕하니 하늘이 벌을 내렸다. 질병이 낫질 않으니 어떻게 신민(臣民)의 위에서 군국(軍國)을 총괄하겠는가.

태자(太子)가 비록 어리고 작으나 덕행이 이미 완성됐으니 저공(諸公)이 모두 마음을 합쳐 보좌하여 그가 다치지 않게 하라.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군신(群臣)들은 엎드려 울고 있었고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곧이어 태자를 불러 말하니:
내(予) 질병이 커져 형세가 회복되지 않을 것 같구나. 이에 중임(重任)을 풀어 너(汝)에게 전해 돌려주마.

내 평생(平生)의 행동을 돌이켜 보니 득소실다(得少失多)하니 따르려 하지 말거라. 단지 옛 성현(聖賢)의 길을 따르고 우리 태조의 교훈(我太祖之訓)을 따르거라. (왕의) 자리(位)에서 게을러지지 말고 영원히 서민(庶民)을 품거라.
태자는 울며 머리를 들지 못했고 일어나질 못했다.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그가 태자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날 따라하지 말고 위대한 선조들을 배워라." 아버지로서 어린 아들이 걱정 된 듯하다. 이 말을 마치고 태자에게 국새(國璽)를 넘겨주었다. 이후 신하에게 남긴 유조(遺詔)는 태자를 잘 따르라고 당부하고 있다.
(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여 재(載)가 지났다.

쇠락한 자를 돕고 피폐한 자를 구했다. 만민(萬民)과 같이 생각하고 같이 쉬었다. 옷을 대충 입고 식사를 대충했다. 하루도 잠시라도 게을러진 적이 없었다. 근심이 심하고 누적되니 질병을 요양할 시기를 놓쳐 결국 크게 심해졌다.

권국사(權國事) 해(楷)는 그 명철한 성격이 하늘이 내린 것이며 그 원랑(元良)[29]의 자질이 인망(人望)을 채울 수 있다. 내 명이 끝나기 전에 왕위(王位)를 이어라. 모든 군국중사(軍國重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맞긴다.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방진주목(方鎭州牧)[30]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오호라(於戲)! 죽음과 삶은 늘 있는 길이니 사람이 도망치기 힘들다. 시작과 종말이 내가 원하는데로 이어지니 짐이 유감이 있겠는가. 묘(廟)사(社) 덕분에 저지(儲祉)[31]를 세웠으니 신린(臣隣)들은 사군(嗣君)을 같이 보좌하여 왕실(王室)을 영원히 밝혀라.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게 하라.

아(咨)! 너희(爾) 여러 나라(多方)[32]들아, 내 의지를 받들라!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예종의 유조.

1122년 4월 8일, 예종은 붕어한 뒤 본궐 선정전(宣政殿)에 재궁[33]이 안치됐다. 태자가 즉위하니 인종 공효대왕이다. 인종은 아버지의 빈전[34] 선정전에서 며칠동안 크게 울었다고 한다.

4. 평가

43세 ~ 44세인 고려 왕의 평균 수명을 산 국왕이다. 재위 기간도 17년으로 평균인 14년과 흡사할 정도. 더구나 폐위당하거나 비명횡사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현종 이후 고려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로, 더 나아가 고려사에서 마지막으로 성공을 거둔 명군이라 칭할 만하다.

어느 정도냐면 고려왕으로서 순번으론 절반에 못 미치는 예종 이후로 고려는 무탈하게 재위 기간을 마친 왕이 드물 정도. 인종은 이자겸, 묘청의 난이라는 대혼란을 겪었고,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폐위된 후 처참히 시해당했으며, 무신정변 ~ 원 간섭기는 한반도 역사상 유례 없는 기나긴 국왕들의 수난사였다.

그나마 이 시기를 극복하나 싶었던 공민왕은 말년에 실정을 저지르다 시해당했고, 우왕 이후로는 사실상 멸망 테크를 밟았다.

고려 중기 최대의 문제아 중 하나인 이자겸은 예종 시기 이전에도 이미 외척으로 있었지만, 그의 대에선 감히 꼼짝도 못하고 그냥 일반 친척으로 머물렀다는 것만 봐도 예종 이후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자겸을 견제하기 위해 예종이 일부러 한안인(韓安仁)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하기도 했다. 다만 예종이 죽을 시 그의 후계자 인종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인종의 안전한 제위 보장을 위해 이자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35]

선대의 왕들이 받아먹었다라고 해야 할 정도로 대내외적으로 시기를 잘 타고나기도 했고, 문벌 귀족들에게 휘둘린 감도 없지 않지만, 예종은 부왕 숙종이 강화시킨 왕권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이후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며 고려 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이 막장의 후반기 300년은 설사 왕이 능력이 있어도 무인정권처럼 실권이 없거나 원의 내정간섭을 극복 못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5. 가족관계

  • 경화왕후(敬和王后) 이씨(李氏):
    경화왕후는 1079년에 선종과 정신현비의 딸로 태어났으며, 성씨는 외가의 성을 따라 이(李) 씨로 하였다. 남편인 예종과는 친사촌이 된다. 1109년(예종 5년)에 사망한 후 시호 경화가 올라갔다. 예종의 첫 왕후임에도 불구하고, 예종의 시호인 文의 시호를 덧붙이지 못했다. 이는 인종이 의도적으로 생모인 문경왕태후를 높이기 위해서 했을 가능성이 있다.
  • 문정왕후(文貞王后) (왕씨)[37]:
    문경왕태후 이씨 뒤에는 종친인 문정왕후 왕씨와 혼인했다. 왕씨의 아버지 진한후 왕유는 그녀의 시아버지인 숙종의 이복 동생으로 문종과 인경현비의 아들이다. 또 남편 예종의 친조모는 이자연의 딸인 인예태후이며, 그녀의 할머니 인경현비도 역시 이자연의 딸이다. 예종과 문정왕후의 혼인은 친가로는 4촌간, 외가로는 6촌간의 혼인인 근친혼이다. 선왕 숙종이 6촌 이상 근친 금지령을 내렸지만 민간이나 왕실이나 안지키고 있었다.
  • 숙비(淑妃) 최씨(崔氏):
    후궁인 숙비 최씨는 예종 생전 장신궁주 였으며 예종 사후 숙비 존호를 받았다. 숙비는 해주 최씨 가문 출신으로 최윤의와 남매였다.
    • 왕각관:
      자는 치허(致虛), 생몰연도는 음력 1120년 11월 9일 ~ 1173년 11월 23일. 현화사의 주지였다. 고려사엔 나오지 않지만 현화사승통각관묘지명이 남아있어 존재를 알 수 있다.

6. 이모저모

6.1. 예술가적 면모

예종은 예술에 조예가 깊어 1120년, 서경 장락궁에 행차해 팔관회를 열고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문학적 소양을 나타냈다. 이는 왕권 강화 목적으로 공산 전투에서 태조를 지키고 전사한 김락신숭겸을 기리는 글을 써, 신하들에게 왕인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목적이었다.
을 완전하게 하신 / 主乙完乎白乎 주을완호백호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고 / 心聞際天乙及昆 심문제천을급곤
넋은 갔지만 / 魂是去賜矣中 혼시거사의중
내려 주신 벼슬이야 또 대단했구나 / 三烏賜敎職麻又欲 삼오사교직마우욕
바라다보면 알 것이다 / 望彌阿里刺 망미아리자
그 때의 두 공신이여 / 及彼可二功臣良 급피가이공신량
이미 오래 되었으나 / 久乃直隱 구내직은
그 자취는 지금까지 나타나는구나 / 跡烏隱現乎賜丁 적오은현호사정
- 도이장가(悼二將歌), 김완진 해독본 기준.
고려사 악지 중 속악 부분이 있는데 이 속악은 향악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가락과 우리 말로 만들어진 노래를 말한다. 고려사는 유명한 고려의 '풍입송'[38]이나 고대 삼국 고구려, 신라, 백제의 노래는 전부 속악으로 분류해놨다. 이 기록된 속악 중 '벌곡조(伐谷鳥)'란 노래가 있다. 벌곡조는 뻐꾹새, 즉 뻐꾸기의 음차인데 예종이 직접 지은 노래라고 한다. 노래가 우리말로 되있어 고려사는 실 가사를 기록하지 않고 노래 내용만 기록했는데 뻐꾸기의 내용은 예종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겁내지 말고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 노래 뻐꾸기는 조선시대까지 남은 듯 하다. 조선왕조에서 만든 '시용향악보'에 '유구조'란 노래가 있는데 유구조는 비둘기를 뜻한다. 노래의 내용이 설명한 예종의 뻐꾸기와 똑같아 사실상 둘이 같은 노래로 보인다.
비두르기 새
비두르기 새는
울음을 울지만

뻐꾹쟁이
난 좋아

뻐꾹쟁이아
난 좋아
- 조선조 시용향악보에 기록된 노래 유구조.
이 노래는 의외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2014년에 방영된 KBS사극 정도전에서 이 노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장면은 한양 천도 직후 열린 연회에서였는데, 당시 흥에 겨운 태조가 궁에서 판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잠시 등장한다.[39] 본인이 지은 도이장가도 그렇고 예종 세가에 보면 장락궁에 가서 노래를 하나 또 지었다고 하는데 예술가적 면모가 꽤 있던 듯 하다.

이인로의 파한집 권중엔 예종이 지은 시가 실려있다. 예종이 시를 쓰자 신하 곽여가 응제한 문답시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종이 수춘궁에 머물며 태자로 있을 때 곽여란 신하를 알게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자 곽여는 관직을 버리고 산 속에서 살았는데, 예종은 산 속 곽여의 집에 '동산재(東山齋)'란 이름을 붙혀주고 가끔 놀러 갔다.

어느날 예종이 '종실열후(宗室列侯)'라 칭해 위장하곤 동산재로 갔다. 그러나 곽여는 임금이 올 줄 몰랐으니 타지에 가 있던 참이었다. 곽여를 놀래키는 데 실패한 예종은 동산재에 잠시 있다가 '직접' 붓을 들어 벽에 시를 쓰고 갔다.
술을 잊을 곳이 어디일까? / 何處難忘酒
진인을 찾았지만 못 만나고 간다. / 尋眞不遇廻
창문엔 햇빛이 들어오고, / 書窓明返照
옥같은 꽃잎은 재를 덮었다. / 玉篆掩殘灰
지팡이는 아무도 지키지 않고, / 方丈無人守
문도 온종일 열려 있네. / 仙扉盡日開
원에서 새가 늙은 나무에서 울고, / 園鶯啼老樹
정에서 학이 푸른 우리 안에서 잔다. / 庭鶴睡蒼笞
도에 대해 누구와 얘기할까? / 道味誰同話
선생은 가서 오질 않으니. / 先生去不來
깊히 생각하면 마음이 생기고, / 深思生感慨
머리를 돌려 서성거리네. / 回首重徘徊
붓을 휘둘러 벽에 시를 남기고, / 把筆留題壁
누대에 내려갈려 하니 싫증이 나네. / 攀欄懶下臺
시 읊게 해줄 태도는 많은데 / 助吟多態度
있는 곳은 아무도 없는 곳이네. / 觸處絶塵埃
더위는 숲 아래서 없어지고 / 暑氣蠲林下
좋은 바람은 전 안으로 들어오니, / 薰風入殿隈
이럴 때 한 잔 하지 않으면 / 此時無一盞
번뇌를 어떻게 씻겠는가? / 煩慮滌何哉
- 파한집 권중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 예종의 어제시.
파한집에선 예종의 시를 본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漢) 제(帝)의 백운지사(白雲之詞)[40]당(唐) 황(皇)의 무봉지필(舞鳳之筆)[41]을 실로 겸비하고 있으니, 고금에 찾아볼 수 없도다.

6.2. 창작물에서

  • 수호전의 스핀오프작인 수호후전에서는 고려국왕 이우(李俁)로 나온다. 배경 시기를 감안하면 인종이 나오는 게 맞겠지만.

7. 같이보기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예종 문서의 r124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1] 고려사 예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절일은 태자 시절엔 창녕절(昌寧節), 왕이 되어 함녕절로 바꾸었다. 원종과 절일이 같다.[3] 선왕인 선종의 공주, 즉 예종은 선종의 사위가 되는 셈이다.[4] 이자겸의 2녀로 예종비이자 인종의 어머니이다. 인종의 폐비인 이씨들의 언니이기도 하다.[5] '현화사의 승통 각관의 묘지명'이란 뜻이다. 각관은 예종의 아들로 출가한 왕자이다.[6] 누런 집. 오로지 천자만이 누런 지붕을 가진 집에 살 수 있었다. 왕건과 견훤이 신라의 제후를 자칭할 시절에 신라를 황옥으로 표현한 적 있다.[7] 이상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9년 8월조 기록.[8] 이것이 이자의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다만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그를 따르던 이들의 숫자가 적었던 점, 이후 숙청된 신료 역시 비교적 그 수가 적었다는 점을 근거로 숙종이 이자의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어 그를 제거한 뒤 헌종을 퇴위시킨 친위 쿠데타로 보기도 한다.[9] 실제로 부왕 숙종의 재위기 때 그의 동생이자 예종에게는 숙부가 되는 부여후 왕수가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등의 소문에 휘말려 끝내 역모죄 혐의를 받아 유배형에 처해졌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맏아들이었던 예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을 정도로 형제 상속이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것. 당연히 예종 입장에서는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왕위 계승권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10] 당장 부왕인 숙종이 어떤 식으로 왕위에 올랐는지를 생각해보자. 그 역시 선례와 훈요 10조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명분이 충분했지만 형인 선종의 장남이자 자신에게는 조카가 되는 헌종이 왕위를 이어받았고 거기다가 이자의라는 인물이 나타나 권력을 노리며 대놓고 그와 대립했을 정도. 끝내 그를 죽이고 반대파를 억누르고 나서야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11] '이공수 묘지명'엔 황태자(皇太子)가 되었다고 한다.[12] 정궁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13] 즉위할 당시 예종의 배향공신 위계정이 옥새(玉璽)를 전달했다고 한다.[14] 앞서 말한 뽑는 인원이 많았기 때문.[15] 완벽하게 태묘를 정비한 건 아니다. 예종 대에는 5묘 + 9실 + 묘호라는 제후식과 천자식을 섞은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손자 의종이 7묘 + 9실 + 묘호로 바꾸어 완벽한 천자식 종묘를 완성한다.[16] 도교 사원의 명칭이다.[17] 재정을 궁핍하게 하고 민생을 피페하게 했으니[18] 고려 사신이 오는 것을[19] 거란과 고려는 비록 사대관계를 맺고 전쟁을 멈췄다지만 늘 사이가 안좋아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고려는 거란에 입조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이 정복한 강동 6주를 돌려주지도 않았다. 장성을 쌓을 때도 거란이 항의했지만 결국 끝까지 쌓았다. 밑에도 나오는데, 거란은 고려가 송과 만나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지만 고려는 무시하고 연락을 지속했다.[20] 이 사찰은 안화사로 예종의 왕후, 인종의 모후인 문경태후의 원찰이다.[21]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12년 1117년 3월 기록.[22] 위에도 나왔듯이 거란은 늘 고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심지어 고려는 여진을 한번 공격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 서로 건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고려는 더욱 양적이 싸우다 망하길 바랬을 것이다.[23] 특이한건 고려사 윤관 열전엔 고구려는 일관되게 '구고려'라고 적혀있다.[24] 하지만 앞서 서술한대로 여진 역시 고려를 함부로 침입하지 않았는데 몇 십년 후 두 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지만 금나라는 고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칙서만 내렸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물론 사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있었겠지만 그 속에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겪었던 피해에 대한 공포심이 내재되어 있었을 것이다.[25] 사망하기 직전(1110년, 1111년 사망)에 예종에 의해 복직되었다.[26] 1115년에 칭제건원하였으며 후의 금태조이다.[27] 여진이 옛날 고려의 제후였고, 금나라 시조가 신라나 고려 계열임을 비꼰 것이다.[28] 물론 고려 역시 여진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여진족은 삶의 터전 자체가 갈려나가는 참화를 입었다. 더군다나 척준경의 대활약으로 여러 번 쓴 맛까지 보았기에 건국 초기부터 고려에 대해 필요 이상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29] 원자란 뜻이다.[30] 방(方)은 나라 방 자로 쓰인 것으로 천하 혹 제후들을 지칭한다. 진(鎭), 주(州), 목(牧)은 고려의 행정단위이다.[31] 태자의 다른 말이다.[32] 方은 나라 방 자이기도 하다. 즉 多方은 많은 나라, 천하란 뜻이다.[33] 왕의 관을 높혀 부르는 말.[34] 재궁을 왕릉에 묻기 전 안치해둔 전각을 이르는 말.[35] 아무래도 본인이 태자 시절 겪었던 경험이 은연 중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본인 역시 숙부인 부여후 왕수가 대놓고 왕위 계승을 염두해 둘 정도로 형제 상속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보위에 오르기까지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을 것이다.[36] 첫 시호는 순덕왕후이다. 인종 즉위 이후, 예종의 시호인 문효왕의 시호를 따서 문경왕태후로 시호를 고쳤다. 인종의 생모이기 때문에 太를 더한 것이다.[37] 고려사엔 문정왕후의 성씨가 안나와있다.[38] 고려의 외왕내제 성격을 드러내는 노래이다.[39] 이 노래는 권근과 하륜 등의 무리들이 "궁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하며 막는 바람에 끝까지 부르지 못한다. 이성계 :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40] 흰 구름과 같은 시 솜씨.[41] 춤추는 학과 같은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