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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제22대 대왕 강종 | 康宗 | |||
출생 | 1152년 5월 10일 | ||
즉위 | 1211년 12월 25일 | ||
고려 양광도 강안전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 |||
사망 | 1213년 8월 26일 (향년 61세) | ||
고려 양광도 수창궁 화평전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 |||
능묘 | 후릉(厚陵) | ||
재위기간 | 고려 왕태자 | ||
1173년 4월 2일 ~ 1197년 11월 4일 (24년) | |||
고려 한남공 | |||
1211년 1월 25일 ~ 12월 25일 (11개월) | |||
고려 제22대 대왕 | |||
1211년 12월 25일 ~ 1213년 8월 26일 (2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 개성 왕씨 | |
휘 | 숙(璹) → 정(貞) → 오(祦) | ||
부모 | 부왕 명종 모후 광정왕후 | ||
형제자매 | 8남 2녀 중 장남 | ||
배우자 | 은평왕후[1], 원덕왕후 | ||
자녀 | 10남 2녀 | ||
종교 | 불교 | ||
자 | 대화(大華) / 법주(法柱) | ||
묘호 | 강종(康宗) | ||
시호 |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 (濬哲文烈亶聰明憲貽謀穆淸元孝大王)[2] | ||
작위 | 한남공(漢南公) | ||
절일 | 천희절(天禧節) → 광천절(光天節)[3] |
[clearfix]
1. 개요
고려 제22대 대왕.묘호는 '강종'(康宗), 시호는 '원효대왕'(元孝大王). 휘는 처음 아버지에게 받은 '숙'이었으나, 사촌동생 희종(제21대)이 '한남공'으로 봉해주며 '정'으로 개명했고, 이후 수창궁 사변으로 군주가 되어 '오'(祦)로 다시 개명했다. 자는 '대화'(大華) 혹은 '법주'.
무신정권 탓에 여러모로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불운한 군주였다. 원래 부왕 명종(제19대)이 군주가 될 팔자가 아니었지만 1170년 8월, 무신정변이 터진 후, 큰아버지 의종이 폐위되며 졸지에 그의 아버지가 군주가 되어버렸고, 덩달아 그도 태자 신분으로 수직 상승했다. 이후 제1대 집권자였던 이의방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했건만 이의방이 반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1174, 갑오정변) 생이별을 해야 했고, 이후 최충헌이 이의민을 암살하고(1196, 병진정변) 정권을 차지하자마자 부왕 명종과 함께 그대로 끌려나와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는 수모를 겪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3년 후 최충헌에게 대들었던 사촌동생 희종이 폐위되자(수창궁 사변) 또 최충헌에 의해 개경으로 옮겨와 군주 자리에 올랐지만 고작 2년만에 붕어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권력을 잡고, 농단한 무신들 탓에 한 많은 삶을 살아야 했다.
덧붙여 강종 이후로 왕위가 상당히 오랫동안 장자에게로 계승되었다.[4] 제22대 강종을 시작으로 해서 고려의 왕위는 제29대 충목왕에 이르기까지 계속 장자[5]에게 승계되었다.
2. 묘호, 시호, 존호
공식 묘호는 '강종'(康宗)으로 아들 고종이 올렸다. <강종 시책문>(실물 소실. 《동문선》 제28권에 기록)에는 '백성을 위무해 안정시켰기에'(撫民於安) 묘호 '강'(康)을 올렸다고 기록했다.대표 시호는 '원효대왕'(元孝大王)으로 역시 고종이 올렸다. <강종 시책문>에는
'원'은 '모든 선함의 맏이'(長於諸善), '효'는 '모든 행위의 근본'(本於百行)
이라는 뜻에서 시호 '원효'(元孝)를 정했다고 했다.이후 시호가 계속 추가되어 최종 존호는 '강종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康宗 濬哲文烈亶聰明憲貽謀穆淸元孝大王)이었다. 의외로 고려 중~후기를 보낸 임금치고는 시호가 긴 편인데, 왕권이 실추되면서 시호가 줄어들었던 제18대 의종 이후 임금들과는 달리 강종은 아들인 고종과 손자인 원종이 계속 올려주었다.
아쉽게도 추가 시호가 언제 올려졌는지, 누가 올렸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하지만 시호 '명헌'(明憲)이 고종 재위 40년에 올려진 걸로 봐서는 '이모목청'(貽謀穆淸)은 고종 40년 이전, '준철문열단총'(濬哲文烈亶聰)은 고종 40년 이후에 올려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3. 생애
고려 제19대 명종의 장남으로 아직 아버지가 익양공으로 있었던 시절에 태어났다. 1170년 무신정변으로 백부인 의종이 무신들에 의해 폐위되고, 아버지 명종이 즉위하자 1173년 4월에 21세의 나이로 왕태자가 되었다. 강종의 관례식 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키려던 이고가 역으로 이의방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의방이 권력 실세가 되자 1174년 3월에 이의방의 딸 이씨와 정략 혼인을 하게 되었다.강제로 이루어진 혼인이었으나 태자와 태자비의 사이는 좋았는지 고작 9개월 짧은 결혼 기간 동안 슬하에 수령궁주라는 딸을 1명 두었고, 태자비 이씨는 강종 즉위 후 '사평왕후'로 추봉되어 강종과 재회하게 되었다. 그러다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 무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러 출정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오던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승려 종참에게 암살당하자(갑오정변) 혼인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태자비 이씨는 폐출되고 말았다.
1197년 9월 최충헌이 부왕 명종을 폐위시킬 때 그 역시 강화도로 유배당했다. 당시 강종은 북궁(北宮)에 있었는데 최충헌의 부하들이 윽박지르자 태자비와 함께 궁궐을 나와 비를 맞으며 말을 타고 강화도로 갔다고 한다. 이후 강화도에서 14년간 유배 생활을 했고, 1210년 12월 사촌동생이던 희종이 다시 그를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1211년 1월 희종은 강종을 한남공(漢南公)[6]으로 봉해 공작으로 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 때 같이 받은 직위는 수사공(守司空), 훈위는 상주국(上柱國)이었다.[7]
1211년 12월 최충헌이 암살당할 뻔한 위기(수창궁 사변)를 겪은 뒤 주동자였던 희종을 폐위시키면서 강종을 강안전(康安殿)에서 왕으로 추대했다. 이때가 강종의 나이 60세로 역대 고려 임금 중에서는 최고령 즉위였으며, 동시에 유일하게 60대에 즉위한 임금이었다. 그 다음은 강종의 숙부인 신종(제20대)으로 54세에 즉위했다.
재위 원년(1212년) 1월 강종이 임금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들 왕진(훗날의 고종 안효대왕)을 현 황해도 안악군에서 개경으로 다시 불러들인 것이었다. 이후 강종은 전례를 따라 조세를 줄이고, 사면령을 선포했다. 4월에 절일을 정했고, 5월에 자신의 모후 의정왕후(義靜王后)를 광정태후(光靖太后)로 추존하면서 <옥책>(玉冊)을 올렸다. <옥책>에서는 스스로를 '신'(臣)이라 하고, 어머니를 '성모'(聖母)라 했으며, 아버지 명종을 '선황'(先皇)으로 칭했다. 7월에 아들 왕진을 왕태자(王太子)로 봉했고, 부(府)를 만들어 관저를 설치해주었다. 8월에 조칙(詔勅)을 내려 태자의 모후이자 자신의 왕후인 유씨(柳氏)를 '연덕궁주 왕비'(延德宮主 王妃)로 책봉했다.
또한 이의방의 딸 사평왕후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수령궁주'(壽寧宮主)로 봉했으며, 하원백(河源伯) 왕춘(王瑃)[8]에게 시집보냈다. 《동국이상국집》에 수령궁주가 강종과 원덕왕후에게 감사의 뜻으로 보낸 표문들이 전해지고 있다. 수령궁주는 계모인 원덕태후와의 사이가 좋았던 걸로 보이는데 표문에는 >"친모(사평왕후 이씨)를 잃은 자신을 너무 잘 보살펴 줘서 첩이 제명(帝命)을 받들 수 있다."
라는 내용이 있다.
강종은 이때부터 이미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위 하원백 왕춘이 태자에게
'천인(天姻)[9]의 기회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한다.'
는 내용의 전문(箋文)을 올렸기 때문이다. 단순히 태자에게 과장되게 올린 표현일 수도 있지만 강종이 워낙 늙었으니 단순 표현이 아닐 수도 있다. 재위 2년(1213년) 4월에 드디어 아버지 명종의 무덤인 '지릉'(智陵)을 참배했으나 이미 고령이었던 강종은 점차 건강이 악화되었고, 오랜 유배 생활로 인한 지병으로 8월 9일에 수창궁 화평전에서 붕어했는데 즉위한지 1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의 유조(遺詔)는:짐은 본디 받을 수 없는데도 대보(大寶)[10]를 이어 받아 몇년이 지났다.
덕은 박한데 부담은 크니 질병이 심해졌다.
천위(天位)(보위)는 고려해보니 잠시라도 비울 수 없다. 태자 진은 덕은 위를 덮고 밝음이 아래를 씌우니 이에 명령을 내려 커다란 어려움[11]을 전한다.
너희 모든 관료들은 자신의 일을 하며 사왕(嗣王)을 받들라. 산릉은 검소하게 만들고 상은 역월로 따져 3일안에 끝내라.
- 《고려사》 <강종 세가> 중 발췌.
덕은 박한데 부담은 크니 질병이 심해졌다.
천위(天位)(보위)는 고려해보니 잠시라도 비울 수 없다. 태자 진은 덕은 위를 덮고 밝음이 아래를 씌우니 이에 명령을 내려 커다란 어려움[11]을 전한다.
너희 모든 관료들은 자신의 일을 하며 사왕(嗣王)을 받들라. 산릉은 검소하게 만들고 상은 역월로 따져 3일안에 끝내라.
- 《고려사》 <강종 세가> 중 발췌.
유조를 남긴 뒤 밤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사후 아들 고종이 강종을 종묘에 제사지내며 <책문>을 올렸다.
본래부터 용비(龍飛)의 모습를 가지셨고,
홍학(鴻擧)의 자질을 갖추셨습니다.
역수(曆數)가 몸에 계셨으니 중명(重明)을 계속 비추셨지만,
국가(國家)가 다난(多難)하니 어쩔 수 없이 숨어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돕고 신이 도우니,
거룩함이 드러났고 모든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황극(皇極)에 오르셨고,
대통(大統)을 이으셨습니다.
이제 신기(神器)를 후동(後侗)에게 넘기시니,
현명한 유풍(遺風)이 선조(先祖)들에게 밀리지 않습니다.
- 《고려사》 <고종 세가> 중.
홍학(鴻擧)의 자질을 갖추셨습니다.
역수(曆數)가 몸에 계셨으니 중명(重明)을 계속 비추셨지만,
국가(國家)가 다난(多難)하니 어쩔 수 없이 숨어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돕고 신이 도우니,
거룩함이 드러났고 모든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황극(皇極)에 오르셨고,
대통(大統)을 이으셨습니다.
이제 신기(神器)를 후동(後侗)에게 넘기시니,
현명한 유풍(遺風)이 선조(先祖)들에게 밀리지 않습니다.
- 《고려사》 <고종 세가> 중.
고종은 직접 의봉문[12]까지 나가 강종의 영정을 배웅했는데 주변 신하들이 이를 보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고려사》 <고종 세가>에는 당시 이를 구경하던 백성들의 반응이 적혀 있는데, 백성들은 강종이 돌아올 거란 생각을 전혀 못한 듯하다. 의종(제18대) 이래로 고종(제23대) 즉위까지 제대로 국정을 운영한 임금이 없고, 무신에게 간섭받았으니 폐태자가 어떻게 돌아와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고종 재위 2년에는 고종이 강종을 '경령전'(景靈殿)[13]에 모셨다.
선왕(先王)[14]이 원래 태자(太子)였다가 섬으로 번천(播遷)[15]되니 12년을 숨어 살았다.
그러는 동안 사직신민(社稷臣民)을 다른 자가 가져갔으니 다시 보위(寶位)에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겠는가.
향국(享國)[16]한지는 얼마 안됐지만 성사(聖嗣)에게 넘기고 죽은 뒤 '사친지전'(四親之殿)[17]에 안치되니 참 천명(天命)이로다.
그러는 동안 사직신민(社稷臣民)을 다른 자가 가져갔으니 다시 보위(寶位)에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겠는가.
향국(享國)[16]한지는 얼마 안됐지만 성사(聖嗣)에게 넘기고 죽은 뒤 '사친지전'(四親之殿)[17]에 안치되니 참 천명(天命)이로다.
4. 기타
- 《동국이상국집》 전집 37권에는 고종이 이규보를 시켜 만든 강종을 추모하는 글이 남아 있는데'어째서 만승지존(萬乘之尊)의 자리를 버리고 가셨냐며 하늘이 10,000개의 나라를 무너뜨린 것과 같다'
고 했다(天崩萬國).
- 강종의 왕릉인 '후릉'은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나 고려사절요 기록에 따르면 추존 안종의 무릉 옆에 위치했다고 한다. 1217년에 후릉이 풍수에 맞지 않아서 외침이 있다는 이유로 낭장 김덕명이 최충헌에게 이장할 것을 간언했다. 이후 최충헌이 세조의 재궁을 봉은사로 옮긴 후 개장후릉도감을 설치해 후릉을 이장하고자 했으나 곧바로 없앴기에 모종의 이유로 이장이 무산되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안종의 무릉 인근에는 두개의 왕릉급 고분이 50m 거리를 두고 상하로 배치되어 남아있는데, 이 중 하나가 후릉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 측에서 이에 대해 조사했다는 내용은 딱히 확인되지 않는다.
- 사신은“강종이 임금으로 있으면서 모든 정무는 권신의 견제를 받았고 갑자기 병들어 나라를 다스린 햇수도 짧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라며 평가를 내릴 정도로 임금으로서 했던 업적이 없었다. 이 점에서는 숙부였던 신종과도 비슷한 부분이다.
- 사실 임금으로 즉위할 때 이미 늙고 병든 상태였고,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붕어한데다가 결정적으로 당시 최충헌이 전권을 쥐고 흔들며, 국정을 자기 마음대로 농단했던 만큼 뭘 해보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겠다. 그래도 그의 아들인 고종의 가계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지도 모른다.
5. 가족관계
5.1. 부인
- 제1비 사평왕후 이씨: 강종이 왕태자 때인 1174년 3월 이의방의 딸을 태자비로 들였으나 1174년 12월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이의방을 암살하면서 태자비가 된 지 9개월만에 폐출되었다. 강종이 즉위한 후 '사평왕후'로 추존되었다. 조선 왕조때는 국성인 전주 이씨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평왕후는 한국사 사상 유일한 전주 이씨 출신 왕비이다. 사료에 따르면 강종과의 사이에서 딸 1명(수령궁주)을 낳았다. 아버지 이의방의 친동생, 즉 숙부 이린의 6대손이 바로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의 초대 국왕 이성계이므로 강종의 5대손인 충숙왕(제27대)은 태조와 무려 14촌 형제였다. 그리하여 창왕(제33대)은 17촌 증손자 뻘이 되는 셈이었다.
- 제2비 원덕태후 유씨: 사평왕후 폐출 이듬해인 1175년 9월에 태자비에 봉해졌다. 제17대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의 셋째 딸인 창락궁주와 종실 신안후 왕성의 딸이었으며, 유씨 성은 누구의 성씨를 따른 것인지 불분명하다. 강종 즉위 후인 1212년에 '연덕궁주'에 봉해지고, 아들인 고종이 즉위한 후 태후가 되었다. 1239년에 붕어하여 '원덕태후'의 시호를 받았다. 능은 '곤릉'이며, 이 곤릉은 남한에 남아 있는 고려 왕릉 4기 중 1기이다. 강화도에 있다.
- 기타 첩실들
5.2. 자녀
- 장녀 수령궁주 - 이의방의 외손녀이자, 사평왕후 이씨 소생으로, 강종 즉위 후에 궁주에 봉해졌다. 사후 '경렬'(敬烈)의 시호를 받았다. 특이하게도 며느리가 전임 군주 희종의 딸인 가순궁주였다. 가순궁주는 신안공 왕전과 혼인했으므로, 신안공 입장에서 봤을 때, 희종 치세에는 군주의 사위였다가 다음 군주인 강종 치세에는 갑자기 군주의 외손자로 항렬이 더 내려가버린 양상이 된다.
- 장남 고종 - 태자이자 고려 제23대 군주.
- 기타 서자 9명 - 《고려사》 <최충헌 열전>에 의하면, 강종은 왕태자 시절에 이미 여러 첩실들로부터 9명의 서자를 두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소군(小君)으로 중이 되었다.
- 서녀 정화택주 - 《고려사》에 나오는 의종 대 별궁 중 하나인 정화궁에 기거했을 가능성이 있다. 남편인 <최충헌 묘지명>에도 나온다.
6. 대중매체에서
}}}]] ||}}}]] ||- 2022년 신작인 박시백의 고려사에서는 아버지 명종에게 백성들이 자신을 보고 노태자라 하는 말을 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그러다가 명종이 폐위되자 자신도 부인과 함께 같이 유배를 갔지만 희종이 강종을 다시불러 한남공에 봉했고 후에 희종이 폐위되자 60세의 최고령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재위 2년만에 병에 걸려 죽으면서 등장종료.
[1] 아버지 이의방[2] 《고려사》 <강종 세가> 총서 기준.[3] 왕태자 시절엔 '천희절'(天禧節)이었고, 왕이 돼서 절일을 '광천절'로 정함.[4] 이전에는 부자 승계와 형제 승계가 혼재된 형태였다.[5] 이들 모두 위에 형이 있었다해도 이복형이었고, 전부 서출이었다.[6] 사촌동생 희종이 봉해준 '한남'(漢南)은 옛 고구려의 매홀군이었으며, 신라의 수성군이었다. 현재는 경기도에 속해 있으며 수원시이다.[7] '수사공'은 수직으로 명예직이었고, '상주국'은 훈위라 하여 작위와 같이 주는 명예직이었다.[8] 후에 하원공(河源公)으로 진작[9] 하늘과 결혼은 왕실과의 결혼을 의미한다.[10] 왕위를 비유한 것이다.[11] 왕위의 비유인데 '큰 어려움'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뒤를 이을 아들이 걱정된 듯하다. 아니면 왕으로서의 부담을 강조한 것이거나.[12] 황성 정문 광화문, 궁성 정문 승평문 다음의 문. 가장 화려한 문이었다.[13] 제8대 현종이 지은 신전으로 태조 및 현 임금의 4대조를 모셨다. 경령전은 신위가 아닌 영정을 안치했다.[14] 강종. 당시 임금은 고종이다.[15] 내쫓기다란 뜻.[16] 나라를 다스리다란 뜻.[17] 경령전의 별칭. 태조와 현 임금의 4대조를 봉안하니 이런 별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