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원종의 제2비 경창궁주 | 慶昌宮主 | |
본관 | 류씨(柳氏)[1] |
부모 | 부친 - 신안공 왕전 |
배우자 | 원종 |
자녀 | 슬하 2남 2녀 장남 - 시양후 왕태 차남 - 순안공 왕정 장녀 - 경안궁주 차녀 - 함녕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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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원종의 제2비.2. 생애
남편 원종이 즉위한 1260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경창궁주는 원종이 원나라에 입조하고 돌아오는데도 기뻐하지 않았고, 권신의 외손[2]을 태자로 삼을 수는 없다며 태자로 책봉된 충렬왕을 참소하였다.[3] 원종은 경창궁주의 참언이 옳다고 여겼으나 김준의 간언으로 경창궁주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경창궁주는 아들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는지, 1277년 경창궁주가 아들 순안공 왕정과 함께 맹인 승려 종동으로 하여금 충렬왕을 저주하게 하였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종동은 죄를 자복하지 않았으나, 두 달 뒤에 경창궁주는 폐서인되었고 왕정과 종동은 섬으로 유배되었다.[1] 외가의 본관을 따름.[2] 충렬왕의 어머니 순경태후가 무신 김약선의 딸이었다. 김약선은 최우의 사위이자 한때 최강의 권신이었다.[3] 사실 경창궁주 입장에서는 충렬왕이 눈엣가시일 만도 했다. 원래 종친 출신인 경창궁주의 자녀들이 충렬왕에 비해 계승서열이 더 높아야 했으나, 충렬왕의 모친 순경태후가 권신 최우의 외손녀라는 이유만으로 충렬왕이 본인의 자녀보다 더 계승서열이 높아져 버리는 모순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원래는 종친 출신의 왕후가 귀족집안 출신의 왕후를 출신 성분으로 압도했으나 무신정권으로 인해 상하가 뒤바뀌어 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