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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선종의 제2왕후 사숙왕후 | 思肅王后 | |||
고려 헌종의 모후 사숙태후 | 思肅太后 | |||
출생 | 연대 미상 | ||
이석의 사저 | |||
사망 | 1107년 이전 | ||
고려 개경 개성부 흥성궁 (現 경기도 개성시) | |||
능묘 | 인릉(仁陵) | ||
재위기간 | 고려 왕후 | ||
1083년 12월 6일 ~ 1094년 6월 17일 | |||
고려 왕태후 | |||
1194년 6월 17일 ~ 1095년 11월 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 인주 이씨[1] | |
부모 | 부친 공부상서 이석[2] (工部尙書 李碩) 모친 강릉군부대부인 강릉 왕씨[3] (江陵郡大夫人 江陵 王氏) | ||
배우자 | 선종 |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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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 | ||
관저 | 국원공부(國原公府)[4] → 연화궁(延和宮) → 중화전(中和殿) 영녕부(永寧府) | ||
작호 | 국원공빈(國原公嬪)[5] → 연화궁비(延和宮妃) | ||
시호 | 광숙정화사숙태후 (匡肅貞和思肅太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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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종의 제2비. 시호는 선종 思효대왕과 思 자 돌림이다.인천 이씨 출신으로 문종 대의 명신 경원군 개국공(慶源郡 開國公) 이자연의 친손녀이며 이석의 딸이다.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과 사촌이다.
2. 비운의 태후
선종이 공작일 때 혼인했으며 남편이 즉위하자 연화궁비(延和宮妃)라는 존호를 받았다. 인예왕후의 사례를 보면 연화궁비 존호는 아마 '연화궁주 - 왕비' 존호의 약칭인 것으로 보인다.선종이 승하하면서 모두가 후계자로 예상한 선종의 동생 계림공이 아닌 어린 태자 왕욱(王昱)을 왕위에 올렸고, 헌종의 친어머니였던 연화궁비는 왕태후의 존호를 받았다. 또한 본궐 내에 관저 중화전(中和殿)을 받고 산하기관 영녕부(永寧府)를 받았다.
왕태후는 너무 어렸던 아들 헌종을 대신해 3년 동안 수렴청정하였다. 하지만 민심이나 왕실 내의 의견은 모두 헌종보단 계림공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였고, 결국 계림공이 움직이면서 왕태후와 헌종은 수세에 몰린다. 결국 이 같은 상황에서 사촌오빠인 이자의가 계림공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목숨을 잃게 되면서 끝내 헌종은 숙부 숙종에게 양위하게 된다. 1년 뒤 아들 헌종이 어린 나이로 승하하자 숙종은 태후의 관저를 폐쇄해 태후의 권력을 일절 끊어버린다. 이에 태후는 아들이 살던 궁궐인 흥성궁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거처했으며, 조용히 지내고 살다 승하한다. 이후 숙종의 아들 예종은 태후를 선종의 태묘 묘실에 합쳐 제사를 지내 주었다.
남편인 선종과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지만, 남편이 승하하고 몇년 뒤에는 병약했던 아들 헌종까지 권력 다툼에 휘말린 뒤 쓸쓸히 승하한 것은 물론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 수안택주(遂安宅主)조차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으니 걱정이 컸을 것이다. 여러모로 왕실 권력 다툼의 패배자로서 피해를 크게 입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