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3 20:49:59

원덕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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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 태조 후 혜종 후 [ruby(정종, ruby=定宗)] 후 광종 후
1
신혜왕후 류씨
2
장화왕후 오씨
3
신명왕후 유씨
4
신정왕후 황보씨
5
신성왕후 김씨
6
정덕왕후 류씨
1
의화왕후 임씨
1
문공왕후 박씨
2
문성왕후 박씨
1
대목왕후 황보씨
<rowcolor=#670000> 경종 후 성종 후 목종 후 현종 후
1
헌숙왕후 김씨
2
헌의왕후 류씨
3
헌애왕후 황보씨
4
헌정왕후 황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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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왕후 유씨
2
문화왕후 김씨
1
선정왕후 유씨
1
원정왕후 김씨
2
원화왕후 최씨
3
원성왕후 김씨
4
원혜왕후 김씨
5
원용왕후 류씨
6
원목왕후 서씨
7
원평왕후 김씨
<rowcolor=#670000> 덕종 후 [ruby(정종, ruby=靖宗)] 후 문종 후 순종 후
1
경성왕후 김씨
2
경목현비 왕씨
3
효사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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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왕후 한씨
2
용의왕후 한씨
3
용목왕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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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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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예왕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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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왕후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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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왕후 김씨
<rowcolor=#670000> 선종 후 숙종 후 예종 후 인종 후
1
정신현비 이씨
2
사숙왕후 이씨
1
명의왕후 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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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왕후 이씨
2
순덕왕후 이씨
3
문정왕후 왕씨
연덕궁주 이씨
복창원주 이씨
1
공예왕후 임씨
2
선평왕후 김씨
<rowcolor=#670000> 의종 후 명종 후 신종 후 희종 후
1
장경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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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왕후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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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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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왕후 김씨
태자비 왕씨
1
성평왕후 임씨
<rowcolor=#670000> 강종 후 고종 후 원종 후 충렬왕 비
1
사평왕후 이씨
2
원덕태후 류씨
1
안혜왕후 유씨
1
정순왕후 김씨
경창궁주 유씨
1
제국대장공주
<rowcolor=#670000> 충선왕 비 충숙왕 비 충혜왕 비 공민왕 비
1
계국대장공주
1
복국장공주
2
조국장공주
3
경화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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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왕후 홍씨
1
덕녕공주
2
희비 윤씨
1
노국대장공주
<rowcolor=#670000> 우왕 비 공양왕 비
근비 이씨
1
순비 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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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정강원덕태후(貞康元德太后)
존호 연덕궁주(延德宮主) - 왕비(王妃)
왕태후(王太后)
작위 태자비(太子妃)
연덕궁주(延德宮主)
관저 연덕궁(延德宮)
본관 ?? 유씨(柳氏)
능호 곤릉(坤陵)
생몰연도 1160년대[1] ~ 1239
1. 개요2. 가족관계3. 생애4. 평가5. 왕릉6. 왕실의 중시조

1. 개요

강종의 2비. 시호는 강종 元효대왕과 元 자 돌림이다. 고종의 모후이며 생전 태후로 올려졌다.

2. 가족관계

원덕태후는 부계로는 현종의 후손이며 모계로는 인종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안후 왕성, 어머니는 인종과 공예태후의 셋째 딸 창락궁주다.

부계 족보는 현종 → 정간왕경안공 왕영 → 승화백(承化伯) 왕정(王禎) → 한남백(漢南伯) 왕기(王杞) → 신안후 왕성 순이다.

모계 족보는 인종 → 창락궁주(昌樂宮主) 순이다.

이렇듯 강종과 원덕태후는 부계로는 멀어도 모계로는 상당히 가까웠는데 두 사람은 외사촌(강종 입장에서는 고종사촌) 관계이다.

자녀는 고종 하나이다.

3. 생애

강종이 명종의 태자였을 시절, 두번째 태자비(太子妃)로 들어왔다. 강종의 첫 태자비[2]이의방의 딸이었고, 둘 사이에 이미 딸도 하나 있었다. 그러나 첫번째 태자비는 1174년 이의방이 실각하자 폐출되었다.

그렇게 1175년 9월, 원덕태후는 새로운 태자비가 되었다. 두 사람의 아들인 왕진은 1192년 1월에 태어난다.

1197년, 최충헌, 최충수 형제에 의해 북궁에서 폐태자된 남편을 따라 같이 강화도로 떠난다.

1211년 당시 군주 희종수창궁에서 최충헌을 죽이려 시도 했다가 실패, 강화도로 내쫓기는 일이 발생한다.

최충헌은 결국 다시 강종을 소환했고, 태자비도 다시 만월대에 복귀한다. 1212년 10월, 태자비는 연덕궁주(延德宮主), 이어 연덕궁주(延德宮主) - 왕비(王妃)에 봉해져 정식 왕후가 된다.

사평왕후의 딸 수령궁주를 잘 보살핀 듯하다. 수령궁주는 결혼할 때 아버지 강종과 의붓어머니 연덕궁주 - 왕비에게 표문(表文)을 바쳤는데 이 때 왕비에게 자신을 보살펴 주어 감사하다고 하고 있다.

남편 강종은 너무 늙어 1213년에 붕어하니, 연덕궁주 - 왕비는 혼자가 되었다.

남편을 이어 아들 왕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연덕궁주 - 왕비가 언제 태후가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1215년 9월, 연덕궁주 - 왕비는 아들과 함께 청주동궁(淸州洞宮)으로 거처를 잠시 옮긴다. 이 때부터 왕태후(王太后)란 존호로 사서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1216년 1월, 자신의 어머니 창락공주가 죽었다. 외손자인 고종은 3일동안 소복을 입었다고 한다.

1218년 4월, 며느리 안혜태후가 들어왔다.

1219년 3월, 손자 왕전이 태어났다.

1220년 10월, 오빠인 영인후(寧仁侯) 왕진(王稹)이 죽었다.

1223년, 황태후에서 태황태후로 진봉되었다. 조카딸이자 강종의 전임 국왕인 희종의 왕후 성평왕후와 구분을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3]. 어쨌든 그는 고려사 최초로 살아서 태황태후라는 존호를 얻은 여인이다.

1232년, 상도(上都)을 떠나 강도(江都)로 천도하였다. 이 혼란스러울 때에 며느리가 죽었다.

1235년 6월, 손자 왕전결혼하였다.

1236년 2월, 증손자 왕심이 태어났다.

1239년 5월,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나라가 엉망진창일 때 훙(薨)하였다.

4. 평가

한 때 태자비로서 본궐 내명부의 2인자였으나 폐위되었고, 다시 돌아와 왕후, 이어 태후로서 내명부의 1인자가 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강화도에 숨었고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여러모로 다이나믹한 삶을 산 태후이다.

5. 왕릉

능호는 곤릉(坤陵)이며 현재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 있다.

강화도엔 총 4기의 고려 왕릉이 존재하는데 태후의 곤릉, 아들 고종의 홍릉(洪陵), 사촌 희종의 석릉(碩陵), 손자 며느리 순경태후의 가릉(嘉陵)이다.

6. 왕실의 중시조

원덕태후의 아들 고종부터 → 원종 →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우왕창왕까지 총 10명의 왕이 원덕태후의 피를 이었다. 충선왕 대부턴 몽고 황실의 피가 섞이긴 하지만.


[1] 어머니 창락궁주의 탄생년도를 추측할 때와 고종의 탄생 년도로 보아 빨라야 1150년대 후반에서 1160년대 사이 출생이다.[2] 훗날 사평왕후로 추존되었다.[3] 즉 이 시기에 이론적인 서열은 강종 > 희종 > 고종 순서였던 듯하다. 희종과 고종의 실질적인 항렬이 같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