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9 19:26:47

노국대장공주

고려 왕조의 역대 왕후
충혜왕
덕녕공주
희비
화비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
혜비
익비
정비
신비
순정왕후
우왕
근비
영비
현비
파일:공민왕 노국공주.jpg
공민왕과 노국공주. 경기도박물관 소유.
시호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
처음 시호 고려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
노국휘익대장공주(魯國徽翼大長公主)
공주호 승의공주(承懿公主)
관저 숙옹부(肅雍府)
몽골식 이름 보르지긴 부다시리(Borjigin Budashiri)
고려식 이름 왕가진(王佳珍)
부왕 베이르테무르
능호 정릉(正陵)
생몰연도 ??? ~ 1365
1. 개요2. 시호3. 생애4. 이모저모5. 노국대장공주가 등장한 작품
5.1. 드라마5.2. 영화5.3. 소설5.4. 게임

1. 개요

고려 왕조 제 31대 임금 공민왕의 1비.

원나라의 위왕(魏王) 베이르테무르의 딸로 공민왕과 그녀는 9촌이 되지만[1], 충숙왕의 2비 조국장공주가 그녀의 고모라서 어떻게 보면 사촌 사이에 결혼한 셈이 된다.[2]

엄밀히 말하면 당시 만악의 근원이었던 원나라에서 시집온 왕비인데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반원정책들을 지지하고 자기 딴에는 공민왕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이미지는 매우 좋다. 태생으로 따지면 외국인 왕비, 그것도 적국 공주 출신의 왕비였던 이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특이한 케이스.[3]

특히 공민왕과의 관계는, 둘이 정략결혼과 정쟁으로 한 결혼인데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세기의 로맨스로서 창작물에서도 흥하고 현대까지도 여러가지 이야기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로맨스 때문에 고려사에 대해 잘 모르고 이 두 사람의 로맨스만 알다가 정략결혼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반대로 정략결혼인데 이런 로맨스가 있었다는 것에 놀라기도 한다. 가히 고려의 뭄타즈 마할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

당시 고려 왕족은 공민왕의 증조할아버지인 충렬왕 때부터 몇 번이나 통혼이 이루어져 원나라 황실의 방계이기도 했다.[4][5] 몽골 황실이 한배에 나온 형제 간에도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던 걸 생각하면, 노국공주의 행동은 전혀 이상할게 없다. 다만 공민왕의 정책들이 명백하게 원나라의 이익에 반하는 것들이었음에도 공민왕과 정치적으로 함께 한 것을 보면 단순히 원 황실의 권력다툼의 연장선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이름은 보르지긴 부다시리(ᠪᠣᠷᠵᠢᠭᠢᠨ ᠪᠦᠳᠬᠠᠱᠢᠷᠢ, Borjigin Budashiri, 孛兒只斤 寶塔實里 / 패아지근 보탑실리, 孛兒只斤 寶塔實憐 / 패아지근 보탑실련). 공민왕이 친히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王佳珍)이다. 성은 고려 왕성(王姓)인 왕씨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이름을 해석해보면, 아름다운 보배. 흔히 한자어를 우리식대로 읽어 보탑실리라고도 곧잘 일컫는 편.

또한 한국사의 왕비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외국계 인물이다. 영친왕과 혼인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는 대한제국이 멸망해 영친왕이 이왕세자가 된 후에 결혼했기에 좀 복잡하지만 굳이 대한제국에 맞추자면 황태자비가 된다.

2. 시호

시호는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 보통은 줄여서 노국공주 또는 노국대장공주라고 불린다.

고려왕과 혼인한 원나라 황실의 여성은 원나라에서 공주 명칭이 붙은 시호를 주기 때문인지[6] 고려 내에서 자체적으로 올린 시호가 기록에 있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 노국대장공주는 시호가 기록에 있는 몇 안 되는 경우 중 하나다. 그러나 원혜종이 내린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라는 시호와 합쳐지면서 '왕태후'가 삭제된 모양. 이런 사연 때문인지 인덕태후 또는 인덕왕후(仁德王后), 선안왕후(宣安王后)라고도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발견되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명칭은 역시 노국공주 또는 노국대장공주다.

참고로 시호에서의 '노국(魯國)'은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고향이었던 바로 그 노나라를 말한다. 옛 중국에서는 시집갈 때 받은 땅의 이름을 취해 공주의 칭호를 정했는데, 이 공주는 '노나라(魯國)'를 시호로 받은 것이다. 국내에서도 조선 시대 때 군주(왕세자의 정실 딸.), 현주(왕세자의 측실 딸.)의 시호를 지을 때 지명을 곧잘 사용했으니 이와 비슷한 이치. 또한 대장공주(大長公主)는 황제의 고모나 왕고모뻘인 공주라는 뜻이다. 한 단계 밑으로는 그냥 장공주(長公主)가 있다.

3. 생애

1349년 당시 강릉대군이었던 공민왕과 혼인하여, 1351년에 고려왕비가 된다. 원나라공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개혁정치나 반원정책을 지지했다. 그야말로 공민왕의 정치적 동반자나 다름없었으며, 따라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흥왕사의 변 때는 공민왕이 숨은 방 앞에 앉아 반란군을 가로막은 걸로 유명하다.

비록 공민왕을 지지했지만 노국공주는 엄연한 원나라의 공주이고 때문에 원나라를 등에 업고 있던 부원배, 反 공민왕 세력들은 서열상 자신들보다 높고 명분과 권위도 가지고 있는 그녀가 나서면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노국공주 본인은 정치에 나서지 않았지만, 앞서 말한 그녀의 입지 때문에 그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의 정치적 보호막이 되어 주었고, 본인도 이런 자신의 입장을 남편의 개혁정책을 위해 적극 이용했다. 이런 까닭에 원나라를 오랑캐 취급한 조선왕조 개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조차 그녀를 인정했고, 그런고로 조선 종묘에 있는 공민왕의 사당에는 노국공주가 같이 모셔져 있다.[7]

그러나 금슬에 비해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기에, 1359년 결혼 10년 만에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중신이었던 이제현의 딸을 비로 들였고, 그녀가 바로 혜비 이씨이다. 사실 이것도 공민왕은 들이기 정말 꺼려했다지만, 신료들은 물론 어머니인 공원왕후마저 청을 올려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들일 때는 노국공주의 허락까지 맡고 들였지만, 들이고 나서는 노국공주의 투기로 인해 식음을 전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공민왕은 노국공주 외의 여자에겐 마음을 주지 않았다.[8]

1364년 드디어 아이를 가졌지만[9] 다음 해 음력 2월 16일 난산으로 사망한다. 공민왕이 얼마나 절실하게 순산을 바랐는지 사형수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사면하고,[10] 공주가 위독해지자 산천과 사찰에 기원을 드리도록 했으며[11] 나중에는 사형수까지 모두 사면했을 정도.[12] 하지만 끝끝내 아이도 공주도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국)공주가 죽은 지 8년 뒤 어느 날.
공원왕후: "어찌하여 비빈들을 가까이하지 않습니까?"
공민왕: "공주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공원왕후: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왕 또한 결국은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하여 심히 슬퍼하십니까.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삼가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ㅡ 《고려사절요 29권》, 1373년(공민왕 22년) 3월 #
괜히 세기의 로맨스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노국공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왕은 공주가 죽은 뒤에도 그녀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식사를 차렸으며, 공주가 살아 있을 적과 다름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지고(至高)의 사랑. 크게 상심한 공민왕은 그날 이후 정치에 뜻을 잃었고, 고려 왕조의 운명도 그날부로 사실상 끝났다. 당시 왕의 보령(寶齡)[13]은 고작 36세였다.

노국공주의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여러가지의 개혁을 시도하려던 공민왕에게 결정적인 좌절을 안겨주면서 고려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다만 이것이 단순히 공민왕의 순애보가 지나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권문세족들의 반발을 누르고 있었던 노국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의 개혁정책의 동력이 크게 약화됨을 상징한다. 물론 공민왕이 그녀의 죽음 자체로 크게 상심한 것은 확실하고, 공주가 공민왕의 편을 최대한 들었던 것 역시 사랑의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은 다른 왕실 여인들의 죽음과 다르게 한국의 역사교과서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로 정사에 영향을 준, 역사 교과서에까지 서술된 얼마 안 되는 역사 로맨스다.

물론 따지고보면 이런 애처가적인 모습은 한나라의 군주로서 부적절한 짓이다. 바로 후계문제가 터져서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 실제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로맨스는 고려의 멸망을 앞당기는 촉진제가 됐다. 실제로 국왕이 아내 바보일 때 아내가 죽으면 이후 늘 피가 튀기는 배틀로얄이 벌어진다.[14]

4. 이모저모

능은 정릉(正陵)으로, 고려시대 왕과 왕비를 합장한 유일한 쌍릉 형식이다. 공민왕의 능은 옆에 있는 현릉(玄陵)으로, 보통 '공민왕릉' 혹은 '현정릉(玄正陵)' 식으로 둘을 합쳐 부른다. 여기에는 두 능 사이를 잇는 조그만 구멍이 있는데, 이는 '영혼의 통로'라고 하며, 무덤 공사도 왕이 직접 주관했다고 한다.

이후 역사에서는 연산군 때인 1497년(연산 3년) 2월 15일 《연산군일기》에 언급이 되는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노국대장공주와 닮았다는 말을 들은 연산군은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대궐 안으로 들여오라고 전교한다.

5. 노국대장공주가 등장한 작품

5.1. 드라마

5.2. 영화

  • 1967년 영화 《다정불심》 배우: 최은희

5.3. 소설

  • 1942년 소설 《다정불심》
    월탄 박종화의 소설이다. 영화 《다정불심》과 드라마 《신돈》의 원작 소설이다.

5.4. 게임

  • 징기스칸 4: 1370년 시나리오에서 공민왕의 왕비로 구현됐지만 이 때 노국공주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고증에 맞지 않는다. 또한 문화권은 몽골이 아닌 고려로 나온다.
  • 크루세이더 킹즈 2: 1337년 시나리오에서 본명인 부다시리(Budashiri)로 등장하며 게임에서는 중국과 고려가 영토로서 등장하지 않으므로 차가타이 한국의 바미안 백작령에 있다. 시나리오 시작 시점에서의 나이는 6세로 되어 있다.[16]


[1] 노국대장공주의 고조부인 친킴(쿠빌라이 칸의 장남)과 공민왕의 증조모인 제국대장공주가 남매지간이므로, 공민왕이 아저씨뻘인 9촌지간이다.[2] 공민왕은 쿠빌라이 칸의 현손(4대손)이고 노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내손(5대손)이지만, 조국장공주가 공민왕의 의붓 어머니이므로. 참고로 대를 거듭하여 내려갈수록 8대째까지 자, 손, 증손, 현손, 내손, 곤손, 잉손, 운손 순으로 칭한다. 운손은 '구름과 같이 멀어진 자식'이라는 뜻. 그쯤 되면 거의 남남에 가깝지 않나.[3] 이와 비슷한 사례로 이방자 여사가 있다. 이방자 역시 한국을 식민지배한 일본 황실 출신의 인물이지만, 말년에 국적에 대해 물었을 때 "이제는 한국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졌고,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등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만행들에 대해 죄책감을 피력했다. 그리고 영친왕의 유지라는 명목으로 학교 설립과 같은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했던 점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평가가 좋다.[4] 그리고 마냥 방계라고 할 수도 없는 게, 공민왕의 아버지가 충숙왕, 또 그의 아버지가 충선왕이다. 충선왕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고 제국대장공주는 그 유명한 쿠빌라이 칸의 딸이다. 알다시피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고. 즉, 공민왕은 칭기즈 칸의 직계 자손이다.[5] 정리하자면, 칭기즈 칸-툴루이-쿠빌라이 칸-제국대장공주(충렬왕과 혼인)-충선왕-충숙왕-공민왕.[6] 혼인 전부터 공주였던 제국대장공주 이외엔 대체로 고려 왕족과 혼인한 종친의 딸에게 공주의 칭호를 내렸다. 보통은 황제가 양녀로 삼아서 주는 식. 이에 의해 사후엔 따로 공주로서의 시호를 준 것.[7] 사실 이럴 경우 많은 역사적 유사 사례들을 비추어 보면 보통은 왕이랑 왕비가 적대/대립관계가 되기 쉬웠다. 당장 충선왕의 왕비는 계국대장공주는 틈만 나면 충선왕과 대립했고, 쿠빌라의 칸의 딸이었던 제국대장공주은 자기 남편인 충렬왕심지어 뚜까패기까지 하면서힘을 제어했다. 따라서 만약 노국대장공주가 모른 척하거나 그때의 유력 권문세가들의 손을 들어줬다면 진작에 공민왕의 정책은 브레이크가 심하게 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손을 들어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방패막이가 되어줬기 때문에, 공민왕에게 정치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의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래저래 손꼽히는 연리지. 진정한 내조의 여왕.[8] 노국공주를 제외한 4명의 비(들인 순서대로 혜비 이씨(1359년), 익비 한씨(1366년), 정비 안씨(1366년), 신비 염씨(1371년))는 대부분 후계자 문제 때문에 들였는데, 그 중 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주의 사후에 들인 데다 그나마 반야가 유일한 소생이었던 우왕을 낳을 수 있었던 이유마저, 그녀가 노국공주와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혜비는 공민왕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보내다가 결국 공민왕 사후에는 출궁하여 비구니가 되었다.[9] 기록상으로는 2번째 아이. 첫 아이는 유산됐다고 고려사 열전에 나온다.[10] 왕실에 경사가 있으면 사면을 내리는 일은 흔했다.[11] 조선시대에도 역시 왕이나 왕비가 위독하면 종묘사직이나 명산대천 등 여러 곳에 기도를 드리곤 했다.[12] 이 부분은 정말 공주를 아끼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보통 사면령을 내려도 사형수를 사면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에 아기가 태어날 때 사람을 죽이면 그 원혼이 아기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이 있어서 사형을 미루기도 했다.[13] 임금의 나이를 높여 이르는 말.[14] 이때문에 바로 후대 왕인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핏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게 되는데에 한 몫 한다. 물론 이 설은 조선건국 당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주장이지만.[15] 난산으로 자궁이 열리지 않자 "내 배를 갈라야 아이가 숨을 쉴 것이니 칼을 가져오라."고 절규한다.[16] steamapps/common/Crusader Kings II/history/mongol.txt를 찾아 보면 name="Budashiri" # Queen Noguk of Goryeo 및 1351.3.23 = {name="Noguk"}# Queen of Goryeo라는 설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