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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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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후보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지지율 33% 21% 18% 16% 12%
후보 김일성 최현배 김규식 서재필 홍남표
지지율 9% 7% 6% 5% 5%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대통령 내무부장 외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만식 김일성
사법부장 문교부장 경제부장 교통부장 노동부장
허헌 안재홍 백남운 최용달 박헌영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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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이승만
李承晩 | Syngman Rhee
[1]
파일:이승만.jpg
대통령 재임 중 사진[2]
파일:이승만.png
대통령 기록관 사진
파일:이승만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출생 1875년 3월 26일[3]
조선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사망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4]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마우타네리아 요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5]
재임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2px-Syngman_Rhee_Signature.svg.png[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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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16세손[7]
부모 아버지 이경선, 어머니 김말란
형제자매 3남 2녀 중 막내
배우자 박승선이혼, 프란체스카 도너
자녀 친아들 이봉수[8], 양아들 이강석, 이인수
학력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학사
하버드 대학교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
종교 개신교 (기감)
신체 165cm, O형
약칭
아호 우남(雩南) }}}}}}}}}

1. 개요2. 일생3. 평가4. 박정희와 이승만의 관계5. 매체
5.1. 야인시대
6. 선거 이력7. 이승만과 기독교8. 소속 정당9. 묘소10. 이야깃거리11. 관련 인용구12. 관련 서적
12.1. 본인이 저술한 저서12.2. 전문가들의 저서12.3. 비전문가들
13. 각종 타이틀14. 관련 단체


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호는 우남(雩南)이다. 1900년대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9]를 수여받았다. 대통령 이외에도 ‘우남’ 혹은 ‘싱먼리 박사’[10], 리 박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이 대통령이라는 호칭보다 ‘이 박사’라고 더 많이 불렸다.[11]

고종 13년 조선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연마하였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YMCA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하에서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고종의 전제왕권에 반대하였으며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5년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대한제국의 멸망 직전에 미국으로 유학하였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청원외교를 전개하였다. 이후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대통령을 역임했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외교위원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 머물며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 신탁통치 반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거쳐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이후 11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내면서 6·25 전쟁 등 정부수립 초기의 굵직한 사건을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 농지개혁, 초등교육 의무교육,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대대적인 학교 건립, 평화선 선포 등과 같은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동시에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독재 권력을 추구하여 반발을 샀고, 결국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4.19 혁명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이후 미국 하와이에서 말년을 보냈고 1965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나 고국에 안장되었다.

2. 일생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박정희와 이승만의 관계

현대에는 두 사람의 지지세력이 겹치는 경향이 강하지만, 정작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박정희 본인의 집권에 여전히 인기 있던 이승만은 장벽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의 귀국을 불허하였으며 장면 총리는 죽어서야 집 밖에 나오도록 했다. 아울러 이승만을 무능한 지도자라 평가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해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썩어 문드러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해방 귀족이 날뛰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박정희는 이승만과 가까웠던 정치군인의 횡포, 여기서 비롯되는 인사 적체 문제 등을 이승만 집권기에 겪은 바 있다.[12][13].

박정희는 발췌 개헌 당시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상관인 이용문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수립한 바가 있다. 즉 5.16 군사정변은 두 번째 계획이었다. 본래 5.16은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계획되었다. 시행날짜는 3월 15일로부터 두 달 뒤인 5월 8일이었다. 그렇게 정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사람이 송요찬인데 그 송요찬이 미국으로 가는 날이 5월 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 8일로 정한 것이다.[14]

이승만 대통령 영결식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한 추모사에서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건국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김종필은 박정희가 우남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던간에 일단 죽은 고인에 대해선 심한 비판을 삼가고 되도록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인 생각과 별도로 영결식에서의 발언은 립서비스에 가까울 수 있다. 그 증거로 박정희 대통령의 1962년 저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이승만 평가는 영결식 당시 연설과 전혀 다르다. 내용 일부 발췌 그리고 2015년 4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배나TV의 장원재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조사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대신 참석한 정일권 전 총리가 말하길 박 대통령에게 조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사는 노산 이은상에게 부탁해서 쓰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의 장례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는데, 당연하게도 이승만의 장례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었다. 거기서 양자와 의견 조율이 안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했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한다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석제 당시 총무처 장관은 이 보도를 부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많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독립운동가와 그 일족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이승만 대통령 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실제로 '그게 독립운동이냐, 그따위 경력으로 정치에 나서 당파싸움이나 유발했다. 그 경력 자체가 엉터리다.'라고 평가했는데, 이것은 아직도 기록에 남아있다.#[15][16]미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약속'''을 들고 와서 임시정부의 의원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신채호에게도 멱살을 잡혔다고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재임 기간이 두 번째와 첫 번째로 오래되었다. 또한 보수 우익 진영에서는 찬사와 고평가를, 진보 좌익 진영에서는 비난을 받는다. 다시 말해 70년 현대사에서 절반가까이 재임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굵직한 행적을 남긴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하야한 이승만 대통령이 그러지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이나 다른 대통령들보다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행동했다는 주장도 있다. 단 보도연맹 학살사건 같은 것만 봐도 알듯이 이승만도 폭정으로 악명이 높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국제법에서도 최악의 범죄로 꼽히는 인도에 반하는 죄 (crime against humanity)다.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공적 지위에 의한 면제를 주장하지 못하는 범행이다[17].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은 일부 공통점이 있다. 생몰연도가 각각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자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으로 즉 생몰이 두 시작되는 평년의 요일이 엇갈림없이 동일한 인물이었다.

5. 매체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499519_STD.jpg
  • 영상물에서 이승만 역을 가장 맛깔스럽게 연기해낸 배우로는 역시 최불암이 첫손에 꼽힌다.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처음 맡은 이래, 거의 드라마 자체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 특유의 스타일은 그 이후 이승만을 맡게 된 후배 배우들이 이승만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최불암을 흉내 내었다고 일컬어질 정도. 그 외에는 신구권성덕 등 유명배우들이 있지만 최불암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그나마 권성덕의 경우는 이승만과 비슷한 외모여서 현재 인지도론 2번째에 가까우며, 시대극에서 자주 나오는 편이다.
  • 1984년에 방영되었던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는 서인석이 이승만 역을 맡았다. 다만 드라마의 시대배경이 동학 농민 운동 이후 경술국치 이전까지의 시기를 다루다 보니까 이승만이 2~30대때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것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 성우 중 최고의 이승만 연기는 단연 격동 50년의 박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최불암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맛깔스럽게 대사를 구사했다. 동시에 이승만의 능구렁이같은 면도 세세하게 표현하여 많은 호평을 받았다. 미중년을 많이 맡았던 박일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준 연기라고 볼 수도 있다.

5.1. 야인시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야인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서울 5)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무투표 당선 당선 (1위) [18]
1948 제1대 대통령 선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80 (91.8%) 당선 (1위) [19]
1952 제2대 대통령 선거 자유당 5,238,769 (74.6%) 당선 (1위)
1956 제3대 대통령 선거 자유당 5,046,437 (70.0%) 당선 (1위)
1960 제4대 대통령 선거 자유당 9,633,376 (100.0%) 당선(1위) [20]

7. 이승만과 기독교

생전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종파는 감리회였으며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다.[21] 원래 조선왕조에서 태어난 그는 그 시절 태어난 여느 사람들처럼, 과거시험을 공부하고 유학(儒學),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며, 불교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교와도 친화성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고종의 전제왕권에 반대하였고 반역죄로 5년 간 감옥살이를 하던 중, 1901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원래 미국 선교사들과 만남을 가지던 시절에는 성경에 큰 관심이 없다가, 감옥에 갇혀있고 나라의 앞날이 어두웠던 시절 마음이 힘들어 성경을 감옥으로 들여와서 읽기 시작한 뒤 감명을 받아서 개종했다고 한다. 정동교회에서 장로직[22]을 맡으며 교회 내에서도 위치를 차지했다.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미국 기독교 사회에 한국을 알리고,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인들에게 105인 사건 등과 같은 일본의 한국교회핍박 사실을 알리며, 미국 기독교 사회 인사들과 접촉하거나 청중 강연을 통해서 한국독립을 호소하였다.

해방 후 대통령이 된 후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며 이승만은 개신교를 특별히 우대해주기 시작했고, 대한민국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해 시도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제헌의회 개헌식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축사를 하거나, 이윤영 목사가 국회 시작 전 기도를 맡기도 했다. 이 후 취임식에도 매번 목사가 취임선서를 하기 전 기도를 했고,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했다.[23] 대통령직 사임 이후 하와이로 간 이후에는 하와이에 있는 기독한인교회를 다니다가 사망한 뒤 장례예배 등은 정동교회에서 치뤄줬다. 당시 장례는 전통 상여식 장례식과 개신교식 예배를 혼용한 형태였다.[24]

다만 한국근현대사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이승만 외에도 개화기 이래 정치가, 지식인들 가운데 개신교인들이 많았다. 개신교를 통해서 유교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었기 때문.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고, 해방 이후에 대립했던 김구[25][26]와 독립운동기에 이승만과 협력, 갈등관계에 있었던 안창호 등도 개신교인이었고[27] 정치적, 민족적으로 중요한 상황에 신앙적인 발언을 한 적은 있다.

8. 소속 정당

9.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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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雩南)[28]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와 같이 안치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國立—顯忠院) 국가원수묘역에 자리하였다.

10. 이야깃거리

  • 191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무렵 미국 입국 당시 이승만은 자신의 국적을 일본(Japan)이라고 기재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이 처음에는 국적을 한국(Korea)이라 썼는데 당시 미국에서 '그런 나라는 없다'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적었다는 반박이 있었지만, 추가 조사에서 동시대 미주한인 90%는 '한국(Korea)국적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반(反) 이승만 성향의 사람들은 “이승만의 기회주의적 행태로 미뤄 개인서류에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에 일본은 물론 미국으로도 귀화한 적이 없었고 국적이 없는, 무국적자로 살았다. 그가 남긴 다른 문서와 기록들에는 자신의 Nationality를 한국(Korea)이라고 명기되어 있는 문서들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교차, 검증이 요구되는 일이다. #
  •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고의 명필가로 평가된다. 근데 이는 당연한 것이, 후대 대통령들과는 달리 사실상 조선왕조-대한제국을 겪었던 사람[29]이고, 어린 시절에는 한학(漢學)을 공부했던 사람이다. 이 때문에 서예의 숙달 정도가 다른 대통령들과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고, 취미로 즐긴 사람과 생활로 한 사람과는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평생 서예를 연마했기에 "명인"이라 불릴 만큼 글씨의 정교와 기교가 빼어나고 한자 뿐 아니라 한글과 영어 필체도 유려하고 필체가 굳세면서 부드럽다. 이승만은 영어에도 굉장히 능했지만 한문실력도 매우 뛰어났다. 그리고 글씨를 매우 길게 썼다.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필체가 반듯하여 의지가 강하고 인간적인 완숙함을 갖추고 있으며 원칙을 중시하고 보수적인 성향이 있고 자신감이 강하고 용기 있는 성격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2006년 지인용(智仁勇)이라는 작품으로 대통령 글씨로는 최대인 1억 5500만 원의 낙찰가로 경매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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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왕실의 후손이고 충무공 이순신의 부하였던 무의공 이순신의 후손이라 한다.[30] 왕조에 대해 반대하였으며 공화정 추종자였지만, 곽영주가 '옥체'라든지, "~옵니다" 등 황제에게나 쓸 용어를 사용하자 매우 좋아했다. 스스로를 지칭할 때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거군주제? 그리고 미국에서는 자신을 프린스 리라 칭했다 어느 정도 신분이나 지위가 있어야 사교계나 행정부서에서 상대를 해주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당시 미국 생활에서 이승만은 이러한 신분 위조를 통해 사교계에 적잖이 참여했는데, 이 원인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공화국으로 시작되다 보니 황족, 귀족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더해진 덕택이었다는 의견이 있다.물론 현실에서는 미국에서 웬만한 귀족들은 씹어먹는 평민 거부들이 있었지만[31] 게다가 동양인이었던 탓에 자신을 도와주던 미국 여성과 같이 있거나 하면 타 백인들이 미국 여성에게 '당신 옆은 당신 남편이냐'→'동양인하고 결혼한 거냐 쯧쯧' 식으로 비아냥거려서 먼저 동양의 황자라는 식으로 선수를 친 적도 있다고 한다. 아무리 동양인이라고 해도 일단 황족쯤 되면 그래도 좀 달리 봤다고. 다만 임시정부 초창기에도 "대통령"(president) 직함을 사용하는것에 광적으로 집착했던 것을 보면 원래부터가 외형적인 직책/직위를 중시했던 인물이 아닐까 하는 분석도 있다.
  • 정작 이승만은 광복 이후 잔존한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매몰찼다. 조선의 궁궐, 종묘 같은 국가 시설은 차치하더라도 의친왕의 사동궁이나 운현궁 같은 일종의 사유 재산마저 국고로 환수하려 했고 실제로 일부는 성공했다. 8세 때 사실상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해방 때까지 환국하지 못했던 영친왕이 맥아더와 회담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나 한국행을 논의하고자 했지만 냉대 받았고 이승만에게서 "본국으로 오려거든 오시오."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말년의 순정효황후 윤씨[32]6.25 전쟁이 터지자 미군의 원조로 피난했는데, 휴전 후 이승만의 지시로 창덕궁으로 환궁하지 못하고 한동안 정릉 수인재(修仁齊)[33]에서 기거해야 했다. 이 부분은 이승만이 미국 거주시기에 어떻게든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는 점으로 보면 이해가 가는 게 이승만은 자신이 왕조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긴 했지만 정작 귀국한 뒤에는 그걸 적극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독립운동 경력을 강조했고[34], 권력을 잡은 뒤에도 자신은 공화국의 대통령이지 세습군주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지만...[35]
  • 참고로 거의 모든 화폐에 이승만이 실렸고 화폐의 이승만 초상화가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로 오른쪽으로 옮기던 시절이었다. 화폐의 인물 초상화가 원래 왼쪽에 있다가 가운데로 옮겨간 이유는 왼쪽이 있으면 좌익이라는 이유로 중앙으로 갔고, 자기 얼굴 접힌다고 오른쪽으로 다시 옮겼다.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대화할 때 "짐은..."이라는 군주의 수사를 즐겨 썼고 주변인의 회고록을 보면 은근히 군주 느낌을 많이 냈다고 한다. 하지만 한반도에 공화정이 처음으로 자리 잡던 시기이고 국민들 역시 생전에 공화정을 본 적이 없던 터라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군주 같은 자리로 인식하고 있었다며 변명을 하는 측도 있지만 사실 수긍하기 어려운 변명에 불과한게 이승만은 젊은시절 활동 대부분을 대통령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활동하고 거주했으며 일제시대 내내 활동할 때도 민주주의 정치체제이 입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직책을 수행한 사람이다.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본다 하더라도 지 스스로 짐은.. 그러면서 왕 흉내를 '헷갈려서'(...) 그럴 일은 절대 없고 스스로 권력에 취해서 왕 코스프레를 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부터도 이미 이승만과 어울릴만한 정도로 정상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민주주의와 왕정은 구분할 줄 알고 그런 사람이 많으니까 4.19 혁명 같은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다만 이승만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걸 구분할 줄 알면서도 일부러 아첨을 하느라 왕 취급 했던것일 뿐...[36] 현대사회에서도 독재정권에게 세뇌교육을 당하며 자란 저소득 저학력 노인층에게는 아직도 이와 같은 인식은 지금도 한국사회에 잔존해 있긴 하다.
  • 광복 후 운현궁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인정받아 사유재산화 되면서[37] 관저로 쓰지 못하게 되자, 그 대가로 이우 왕자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운현궁에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는 등의 무례를 범했다. 출처
  • 조선 시대 출생한 둘 뿐인 대통령 중 한 명이다. 다른 한 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후임인 윤보선 대통령으로 둘 다 고종 재위 시기에 출생했다.[38]
  • 조선 시대에 과거시험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낙방했다.[39] 이것은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이었고 이후 갑오개혁으로 사라지게 된다. 다만 선접 군과 거벽, 사수로 대표되는 당시 과거시험의 폐단을 생각해보면 이승만이 자력으로 합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승만의 집안은 과거급제자를 못 낸 지 꽤 되어서 사실상 평민 집안이었고 급제자를 냈다고 쳐도 방계 중의 방계인, 말 그대로 종친의 떨거지라서 빽도 못 받는다.
  • 이승만이 학업에 정진하기 위해 1904년 말 조국을 떠날 때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대학에 제출할 추천서를 무려 19통이나 받았다고 한다. 흠좀무(...) 1905년 2월,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의 학업을 인정 받아 조지 워싱턴 대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1907년 6월 5일에 졸업하였다. 그 후 1907~1908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1909~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석,박사를 각각 2년 만에 취득한 것도 대단...
  • 손 끝에 입김을 후후 부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독립협회를 하다가 공화정을 세우려는 음모를 꾸민 죄로 체포되었을 때 손에 고문을 당해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다녔으나, 조선총독부나 미국의 형사입건 명부에 이승만의 이름은 없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기에 일본 경찰에 체포당할 일도 없었다. 물론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으로 귀국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 더글러스 맥아더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대할 때, 서양인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동양인을 대체로 아랫사람으로 인식하거나 소수가 동등하게 대했던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대할 때처럼 공손하게 대했기 때문이다.[40] 또한 이승만의 얘기도 잘 들어줬다고. 그래서 이승만은 맥아더가 있는 곳을 일부러 찾아갈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맥아더가 GHQ라는 수완을 발휘한 것과 같이 볼 때 그가 동양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음을 엿볼 수 있는 면이다.[41] 그래서 맥아더가 UN군 사령관에서 잘렸을 때 이승만은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전자의 이유로 이승만의 마음에 들었기도 했지만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 폭탄 사용을 주장할 정도로 북진을 할 생각이 있어 이승만과 죽이 잘 맞기도 했다. 반면 월튼 워커[42] 후임으로 온 매튜 B. 리지웨이제임스 밴 플리트1.4 후퇴 이후 미국 정부의 북진 불가, 현 상황 유지 방침[43]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사사건건 충돌을 빚었다. 이들의 성격도 이승만 앞이라고 말을 가려 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불편해 했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자서전인 '군과 나'에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리지웨이 사령관에 대해 "좀 버릇없는 친구였어"라고 평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만난 적이 있는데 만나는 과정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아이젠하워는 미군 장병들을 위로하러 온 것이라 원래 계획에 없던 이승만을 만날 생각이 없었고 이에 환영 군중대회에 각료들까지 준비해놓고 기다렸던 이승만은 개망신을 당할 처지였다. 이에 백선엽이 한미 양국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겨우 회담을 주선했다.
  • 백범일지는 이승만 집권기에 금서로 지정돼, 판매와 독서가 금지되었다.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때 출정식을 하는 축구팀을 배웅해주며 "만약 (한일전에서)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져야 하네." 라고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당시 축구 한일전은 승리.
  • 두음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때에는 리승만으로 불렸다. 당대의 선거 포스터를 봐도 이승만 본인도 리승만이라고 볼렀던것에 별다른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북한이나 중국재중동포들은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 이승만 그가 살아온 모든 일생의 일수가 총 32988일. 그 1일의 기준일을 포함하여.(탄생 D-Day)
  • 1백환권, 5백환권 등 그가 집권한 시기의 최고가액 지폐는 모조리 그의 얼굴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처음엔 좌측에 자신의 얼굴을 박았다가 1956년에는 중앙으로 위치를 바꿨는데, 사람들이 얼굴을 반으로 접고 다녀서 헤지는 데 불만을 가져 1년만에 오른쪽으로 자기 얼굴을 옮겼다. 위에서 스스로를 짐, 왕으로 여긴 걸 보면 그럴듯하긴 하다.이러한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간 뒤에는 살아있는 사람을 지폐 모델로 쓰지 않고 사망한 지 오래된 위인들을 중심으로 쓰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존칭을 '박사'라고 불러주길 바라던 자 답게 이 지폐 시리즈는 각각 '좌이박', '중앙이박', '우이박'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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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경기도 성남시의 도로명에 그의 호를 딴 '우남로'가 있었다가 헌릉로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해당 도로에 지어지는 서울 지하철 8호선 역의 가칭도 우남역이었지만 여러 논란 끝에 그냥 역명이 확정될 때까지 8호선 추가역으로 부르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다만 우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아파트가 해당 역 인근에 생각보다 꽤 있다.
  •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만 81세의 나이였고, 1960년 퇴임 당시 만 85세[44]로, 대한민국 대통령 사상 최고령 대통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최초 취임 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만 74세였던 김대중 대통령.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나이가 만 73세였다.
  • 후임 대통령과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대통령 중 한명이다.[45] 후임 윤보선 대통령이 1897년생으로 이승만 대통령과는 22세의 나이차가 난다. 후임과 나이차가 많이 나는 또 다른 사례는 15대 김대중 대통령(1924년생)으로 후임인 노무현 대통령(1946년생)과 역시 22세의 나이차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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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최초의 영부인아내와의 나이 차는 25살이며 아내도 남편처럼 91세까지 장수했다.
  • 알고 보면 근현대사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장기간 활동한 인물일 것이다. 첫 등장이 1896년 독립협회이며, 마지막 등장이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한 퇴진이니, 무려 64년간의 활동이 소개된다. 심지어 독립협회 시절은 대한제국도 성립되기 전이니,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미군정)-대한민국을 거쳐 왔다. 근현대사 교과서의 대단원 구분이 '개항기-일제강점기-대한민국'으로 구분되는 걸 보면 사실상 모든 단원에서 이승만을 한 번씩은 보고 가게 된다. 사실 생존 시기가 더글러스 맥아더[47]와 겹친다.
  • 그의 혈액형은 O형이다.

11. 관련 인용구

평생을 우리나라의 독립, 통일, 강력한 민주정부 수립과 그 발전에 바쳐왔다. 그러나 최근 사건이 말하여주듯 과업은 완수되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져야 할 책임이나 닥쳐오는 위험을 회피한 일은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 1959년 2월 3일, 대선 출마 질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답변 中
공산주의자는 콜레라[48]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같이 살 수 없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 연설 中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며, 이 조약은 앞으로 우리를 번영케 할 것입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후
자유의 권리만 알고 자유의 한계를 모르는 이들은 자유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

12. 관련 서적

이승만은 1900년 대 초에 신문을 발행하는 데에 참여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생애 동안 여러 저서와 논설 등을 남긴 바 있다. 그래서 아래에 대략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12.1. 본인이 저술한 저서

이승만이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고종의 양위 문제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하던 시기인 1904년에 저술한 책이다. 1904년 2월 19일부터 같은 해 6월 29일 사이에 이 책을 집필하였다. 집필 동기는 러일 전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위협이 높아져 민족 독립에 대한 조선 민중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자신에게 적대적이던 대한제국 시기에 출판되지 못하였고, 학업을 위해 미국에 있었던 1910년 2월 10일에 로스엔젤레스 대동신서관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은 일본 제국시기 내내 금서로 지정되었고, 4.19 혁명뒤에 절판되었다가 1993년에 다시 발간되었다. 책의 구성은 51장과 후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10장에는 조선이 처한 상황을, 11~25장에는 민주주의와 자유·백성의 권리·의무를, 26장부터는 국제정세를 기록한 것이 담겨 있으며, 당시 지식인으로써 국민의 계몽에 앞장서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이 1941년 7월에 미국에서 출판한 책으로, 일본 제국주의 사상을 낱낱이 분석하여 일본이 미국과 충돌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저술하였다. 일본 신화부터 대략적으로 설명하며 일본인들의 성전(聖戰)사명과 전쟁 심리를 분석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의 대비를 하지 않는 미국의 평화 주의자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될 당시 미국인들은 관심도 주지 않았고, "일본의 식민지 국가의 사람이 일본과 우리(=미국)의 관계를 이간질시키려 한다."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나, 그로부터 약 5개월 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일으켜 일본과 미국 간 전쟁이 발발하자 그 때서야 이 책은 미국에서 인지도를 얻게 된다. 현재 이 책은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라는 제목으로 연세대학교 번역총서로써 번역되었으며, 출판을 미국에서 했으니 원서는 당연히 영어로 쓰여있다 비봉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이 후 아래의 책들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대중 서적들이며, 이외에도 이승만을 다룬 책과 연구 논문들은 무수히 많다. 다만, 아직까지 만 90세를 살았던 이승만의 생애에 대해서 세밀한 연구는 많이 부족한 편이다. 이승만의 전집발간사업 조차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승만과 관련된 자료들에 대해서 치밀한 고증을 한 연구는 많지 않은 편이다. 이승만에 관한 책들이 많은만큼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기 때문에, 1차자료에 근거해서 학자에 의해서 전문적으로 수행된 이승만 연구 저서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기를 바람.

이승만의 생애를 알고 싶다면 유영익 前 국사편찬위원장의 저술들도 참고해볼 수 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이 있다. 이승만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는 책들이다. 그리고 이승만의 젊은 시기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젊은 날의 이승만』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이 책은 청년기 이승만의 사상에 관한 연구서로 1899~1904년 이승만의 나이 24세부터 29세까지 한성감옥에 수감된 시기에 집필했던 옥중잡기를 바탕으로 그의 초기 생애와 사상을 분석했다. 옥중잡기의 원문을 원본과 일일이 대조해가며 번역하고 그 해제를 썼다는 것이 특징이다.

유영익과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1948년 이전까지 이승만에 대해서 다룬 연구로는 정병준 교수가 출판한 『우남 이승만 연구』가 일독할 만하다.[49] 출판사 '역사비평사'에서 한국학연구총서의 일환으로 2005년 출간한 이 책은 개화기,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제1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이승만의 전 생애에 걸친 행적을 매우 자세하게 담고 있다. 서적정보

이승만의 독립운동활동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알고 싶다면 고정휴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가 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을 추천할 만하다. 이 책은 3.1운동시기, 한성정부시기 이승만의 행적,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조직과 활동, 이승만의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이승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외교활동 등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12.2. 전문가들의 저서

실제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들이 쓴 책이다.

▲ 유영익의 저서들
  •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학술서적)
  •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 생애 사상 업적의 새로운 조명』 (학술서적)
  •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학술서적)
  •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 대통령이 되기까지』 (학술서적)
유영익은 거의 일평생을 이승만 연구에 천착해온 학자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하지만 다른 뉴라이트 학자에 비하면 이승만정부 시기 발생했던 부정적인 행태들까지 부인하는 역사왜곡을 하지는 않으며, 이승만의 과에 대해서도 대체로 인정한다. 그리고 이승만과 관련된 1차 자료들을 두루 섭렵하여 저술과 연구를 남기고 있다. 특히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李仁秀) 박사로부터 이승만이 소장하고 있거나 개인적으로 수집한 편지, 문서, 수첩, 사진 등과 같은 방대한 문서군들을 기증받아서, 이를 바탕으로 이승만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를 진행했다.[50]

▲ 고정휴의 저서
  •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학술서적)
고정휴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비교적 차분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책이다. 3.1운동시기, 한성정부시기 이승만의 행적,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조직과 활동, 이승만의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이승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외교활동 등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승만과 구미위원부,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알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봐야할 책이다. 이 밖에도 고정휴 교수는 이승만의 독립운동활동과 사상에 대해서 상당한 연구를 남겼다.

서중석의 저서들
  •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학술서적)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교양서)
서중석은 한국현대사의 대표적인 학자로 이승만을 가장 강도높게 비판하는 인물이다. 굳이 정치적 성향을 들이댄다면 좌파적 민족주의 정도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우파 측에서는 강한 거부감을 표출한다. 다만, 본래 이승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며, 이승만에 관한 연구로는 해방 이후로 국한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아울러 유영익, 고정휴, 오영섭, 정병준 등의 학자들과 달리 이승만과 관련된 1차자료, 미국자료 등에 대해서 방대하게 고증, 분석하지는 않았으며, 개인적인 선입관이 많이 투영되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 오영섭의 연구들
  • 오영섭,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위임통치 청원논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1 (학술논문)
  • 오영섭, 「이승만의 『청일전기』 번역.간행과 자주독립론」 『한국사학사학보』 22 (학술논문)
  • 오영섭, 「이승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치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학술논문)
오영섭은 이승만연구의 권위자 유영익의 제자이다. 이승만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및 자료정리 및 번역출간 등을 수행해왔다. 이승만에 대해서 단독저서로 낸 책은 아직까지 없지만, 공저 및 학술지 논문을 통해서 이승만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해오고 있다.

▲ 정병준의 저서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학술서적)
정병준의 책 또한 이승만 연구에 필수적인 책으로 평가받는다. 이승만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중 하나인데 미군 문서에 근거한 실증의 진수를 보여준다. 정병준의 사관을 고찰하면 국방부 측의 연구는 굉장히 존중하며 앞서 언급된 유영익, 오영섭, 양영조 등의 역사학자들과도 교류하고 도움받을만큼 교류의 폭이 넓다. 브루스 커밍스의 역사학적 업적엔 호평하지만 '선제공격이 누구인지 상관없다'든가 국방부 연구를 부정하는 시각은 절대 반대하며 오히려 3공화국 시절 국방부의 연구가 (북한에 비하면) 객관적이라 호평하기도한다. 그리고 여순사건에 대한 시각을 보면 좌익으로 볼 여지가 전혀 없다. 여순사건에 대한 서술을 보면 " 2000명 규모의 폭동", "반란 세력은 지역 토착 공산주의자들과 결합해 군인반란을 지역폭동으로 전환", "관공서와 경찰서 등 공공기관이 습격을 당했고, 최소 2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 당시 발생한 여타의 많은 사건들과 같이, 이는 하나의 운동이라기보다는 폭동의 모습을 띠었다."[51][당시] 물론 일부 강경 우파들 중에서는 정병준도 종북이라면서 색깔론을 들이대지만, 국방부 연구자료를 대단히 중요시하면서 양영조 등의 역사학자들과도 협력하며 여순사건을 폭동이라 평가하는 연구자를 좌익으로 모는건 어불성설.

손세일의 저서들
  •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전 7권) (대중서적)
손세일은 학자 출신은 아니지만[53]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비교연구에 오랫동안 천착하며, 이 책 역시도 선행연구 및 자료들을 소화해낸 책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심인물이자 한국독립운동사의 두 거목(巨木)인 이승만과 김구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1969년 『신동아』에서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글을 처음으로 투고한 이래, 이후 『월간조선』 연재활동 및 단행본 출간을 통해서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 공저
  • 송복 외, 『저서를 통해 본 이승만의 정치사상과 현실인식』 (학술서적)
  • 유영익 외,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술서적)
  • 김영호 외, 『이승만과 6.25전쟁』 (학술서적)
  • 최상오, 홍선표 외,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 (학술서적)
  • 오영섭, 홍선표 외, 『이승만과 하와이 한인사회』 (학술서적)
  • 이주영 외, 『이승만 연구의 흐름과 쟁점』 (학술서적)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및 이승만연구원을 중심으로 이승만에 관한 연구서들이 출간되고 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소장하고 있던 기록물들을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으며, 이승만 및 한국독립운동사, 제1공화국사 등에 관한 연구서들을 출간하고 있다.

12.3. 비전문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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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깨기:이승만에 씌어진 7가지 누명서적정보
저자는 남정욱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 류석춘[54] 연세대 교수.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라이트 인사들이 2015년 11월 출판하였다. 한강철교폭파와 같은 민감한 주제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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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 젊은 세대를 위한 바른 역사서서적정보
뉴라이트적 시각의 도서를 주로 출판하는 <기파랑>에서 2015년 4월 나왔다. 참고로 저자 안병훈은 2015년 8월에는 '혁명아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도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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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부 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서적정보
저자는 언론인이자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2012년 9월 출판. 이승만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력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이다. 그 외 김삼웅이 쓴 인물 평전이나 한국현대사를 서술하는 책에서는 이승만 개인과 정권이 비슷하게 비판받고 있다.

13. 각종 타이틀

14. 관련 단체



[1] 밑에 서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문 이름을 이렇게 표기했기 때문에 현대 방식의 로마자 표기로 편집은 삼가기 바람. 초명은 승룡(承龍)이다.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 별칭 이박사(李博士).[2] 가장 잘 알려져 있는 1956~1960년 사이의 공식 사진. 관공서에 걸린 사진이다.[3] 음력 2월 19일[4] 당시 평균수명(65세)을 감안하면 꽤 오래 살았다. 2019년 시점에서도 90세면 평균보다 오래 산 수준이다.[5] 영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6] 로마자 표기가 Syngman Rhee다. 즉 리승만. 여러모로 일반적인 표기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표기 방식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립되지 않았고, 이승만 본인이 자기만의 표기법으로 영문명을 만들어 해외에서 사용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국문으로 된 한국 정부의 공문서에는 '李承晩'이라고 한문 휘호로 서명하였다.[7] 전주 이씨 양녕대군 16세손이며 시조 40세손 承자 항렬이다. 같은 항렬로 서강준(본명 이승환), WHORU(본명 이승준), 그리고 이승우가 있다.[8] 이승만이 박승선 사이에서 둔 그의 유일한 친아들이었으나 10살 때 장티푸스로 사망했다.[9] 당시 그가 다니던 대학 총장이 미국 제39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었다.[10] 동양의 실력자들이 서구 열강 지도층과 교류를 시작한 이 시기 인물들은 출신지역 방언, 서양인들의 발음현지화, 식민시대 정보망을 피하기 위한 가명 등 여러 사유로 본명과 상이한 영어/세계권 통용 이름이 굳어진 일이 흔하다. 이승만이 Syngman Rhee가 된 것도 유사한 이유이다. 다만 앞선 서술에 Sun Yat-sen(쑨원)과 Chiang Kai-shek(장개석)을 예로 들었는데 이 사항과는 관련이 없다. 항목 참고[11] 지금은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많고, 미국 유학 출신자들이 많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박사 출신도, 미국 유학자들도 극히 드물었던 시절이다. 특히 미국 유수 대학에서 학위과정을 마쳤는데, 특히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를 마친 건 지금도 고학력이라고 볼 수 있다.[12] 다른 야사로는 한국전쟁 당시에 박정희가 군대에 머물면서 자신은 죽어라하고 싸우고 있는 와중에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자 길길히 날뛰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서로의 사이는 많이 안 좋은 듯 하다.[13] 1차적으로는 여순사건이 박정희와 이승만의 앙금을 만드는데 기여했고, 2차적으로는 전후 진급심사에서 곽영주가 자신의 남로당 행적때문에 진급을 누락시키려하자 백선엽이 말려 겨우 진급한 것 때문에 박정희와 이승만의 사이가 나쁜 것으로 보인다.[14] 다만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데는 군 인사에서의 소외, 진급 지체 등 개인적인 불만과 군의 파벌 및 비리에 대한 반감, 장면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 등이 함께 작용했고, 그 바탕에는 만주군 시절의 경험군국주의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른바 5.16 군사정변의 주체들이 내세우는 '국가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은 상당 부분 언어적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들의 주장대로 무능한 민주당 정권에 들고일어난 것이라 해석한다 하여도, 5.16 군사정변이 합법적인 민주주의 정부를 전복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한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라는 사실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15] 실제로 박정희의 가족 중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와 밀접하게 연관된 형이 있었는데, 비록 자신이 일본군에 있었긴 했으나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고 냅뒀으며 오히려 임시정부의 실체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도 박정희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이 일제에게서 독립시키고자 정부를 열었으나 정작 독립군을 이끌고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당파 싸움으로 여러 번 무산 되었으며 결국에는 중일전쟁으로 여러 번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16] 거기다 이승만 본인도 미국한테서 조선의 독립을 약속하러 미국에 갔지만 정작 받아온 것은[17] 실제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취재하던 외국 기자마저도 식겁했다고 한다. 그만큼 대대적인 학살이 이루어졌고, 초대 대통령치고는 엄청난 학살과 자행을 저지른게 많다. 아직까지도 피해자들과 후손들이 정부에 소송을 내거나 조상들의 묘라도 만들 수 있게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에 발굴작업을 해달라고 요청할 정도다.[18] 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일대, 무투표 당선[19] 간접선거[20] 부정선거로 인한 4.19 혁명으로 하야 및 당선 무효. 결국 제4대 대통령은 윤보선이 되었다.[21] 참고로 정동교회는 소래교회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22] 장로직은 감리회에도 있는 직책이며, 실제로 일제 감정기 시절 한국 감리회에서는 장로 임직식도 여러번 가졌다. 또한 권사 역시 장로회처럼 여자만 맡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권사직을 부여했었다.[23] 공휴일로 지정된 첫 종교 기념일은 개천절이다. 개천절이 공휴일로 지정되자 그 이유로 크리스마스도 공휴일로 지정됐고 같은 논리로 불교계의 요구에 따라 석가탄신일까지 공휴일로 지정됐다.[24] 본래 개신교는 장례 내의 미신적 행위를 허용하지 않지만, 대통령의 장례라는 특성상 아예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허락된 듯 하다.[25] 다만 원래는 친한 사이였다[26] 김구도 처음부터 개신교 신자는 아니었다.[27] 애초에 독립운동가들 중 개신교 신자가 천도교 신자 다음으로 많았다. 당장 민족대표 33인 중에도 목사들만 10명이며 전도사 장로 등까지 따지면 더 많다.[28] 서울 우수현 남쪽에서 태어나 고향 이름을 본떠 기우제 '우'와 남쪽 '남'을 썼다.#[29] 무려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시험을 봤던 사람이다[30] 더 위로 올라가면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참고로 이기붕은 효령대군의 후손.[31] 미국이 막 성장하던 시절 이런 평민 거부들은 유럽의 몰락귀족의 여식들과 결혼하는게 일종의 유행이었다. 영화 타이타닉의 여주인공인 로즈도 이렇게 미국의 거부에게 팔려가듯 결혼할 예정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시대상을 볼수 있다.[32] 순종황제의 계후(繼后). 한국의 마지막 황후다.[33] 齊(제)로 썼지만 거처를 뜻하는 齋(재)를 대신해서 쓰는 경우도 있어서 수인'제'가 아니고 수인'재'로 읽는 것이 옳다.[34] 당연히 양녕대군파면 왕족이라고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멀어진 후인데다(500년쯤 전에 왕족이었다는 소리다.) 이승만은 양녕대군파에서도 방계중에 방계이니 한국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이니 그걸 언급할 리 없다.[35] 잔존한 대한제국의 황족들을 박대한 이유는 일제강점기 전부터 해방 정국 이후의 상황에 있다. 이승만 본인이 대한제국 황실에 대해 가졌던 개인적인 악감정을 배제하고서도 해방 정국의 당시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인데다 왕정에 반대한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공화국인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온 이승만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선 왕실은 나약해서 일제 강점기의 원인이 되었고, 해방 이후 대통령제 공화정으로의 변화를 위해서였다고 봐야 한다.[36] 건국 초기인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미국도 그런 인식이 있었다.[37] 이우 왕자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의 노력이었다. 장남인 이청 명의로 사유화되었다.[38] 참고로 윤보선 대통령이 출생한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이 건국되나, 윤보선 대통령은 같은 해 8월 생으로 출생 시에는 국체가 조선이었다. 역대 대통령 중 대한제국 시대에 출생한 대통령은 없으며, 앞으로도 추가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39] 헤이그 특사 사건의 특사로 파견된 이상설이 이 마지막 과거의 합격자 중 하나였다. 시험 성적도 훌륭해서 병과 2위를 차지할 정도였다.[40] 같이 식사를 할 때도 맥아더가 이승만의 식기를 먼저 챙겨주거나 하였다고 한다.[41] 맥아더의 부친은 일찍이 일본 주재무관을 지냈으며, 더글라스 맥아더는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이미 1905년에 일본에 체류한 경험이 있었다.[42] 월튼 워커도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이승만이 싫어했다고. 그래도 그가 죽었을 때 매우 슬퍼하면서 사고를 낸 병사를 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보면 어느정도 정은 들었는 듯하다.[43] 애초에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의 방침이 한국이야 어찌 되든 전쟁 끝내고 보자는 것이었다. 맥아더가 사령관이었던 시절도 그랬으나 2차대전동안 비대화된 군대에서 육해공군의 최선임자씩이나 되었으니 어느정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44] 그것도 당시 한국 남성 평균수명이 60년이 채 안되던 때다![45] 19대 대통령 재임시점 기준[46] 신탁 반대 운동을 하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발언을 한 연설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47] 같은 19세기 후반 출생으로 1차대전 때 이미 사단장이었고 한 번 퇴역했다가 2차 대전 때 복귀해 6.25까지 현역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태평양 전쟁부터 인천상륙작전정도까지 알려져 있는데 알고 보면 짬밥이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정도 짬밥이냐면 영미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맥아더의 옛 부관 출신이다.[48] 당시 표현으로는 호열랄(虎烈刺)[49] 정병준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으로 석사 학위를, 이승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전쟁과 제1공화국 시기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50] 이인수 박사가 기증한 문서군들은 오늘날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아직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많다.[51] 정확한 전문은 다음과 같다."이 반란은 자연발생적이며 거의 무계획적이었다. 하사관과 사병 몇몇이 시작한한 군사반란은 몇 시간 만에 2000명 규모의 폭동으로 발전했다. 여수에서 시작된 반란은 인근 도시 순천으로 번졌고 곧 전라남도 전역을 휩쓸었다. 반란 세력은 지역 토착 공산주의자들과 결합해 군인반란을 지역폭동으로 전환시켰다.(중략)관공서와 경찰서 등 공공기관이 습격을 당했고, 최소 2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 당시 발생한 여타의 많은 사건들과 같이, 이는 하나의 운동이라기보다는 폭동의 모습을 띠었다." 정병준, 2006, 한국전쟁, 돌베개,233페이지[당시] 정병준 교수가 여순사건에 대해 서술한 시기는 2006년인데 이 시기는 이미 좌익측에서 항쟁이라는 재평가를 주장한지 한참이 지난 시절이다.[53] 손세일은 『신동아』 및 『사상계』 편집장 등을 지낸 언론인으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래, 주로 민주당계열 정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이력을 갖고 있다.[54] 연세대 사회학 교수.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이승만연구원장. 류석춘의 아버지는 박정희정부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과 공보처 장관을 지낸 류혁인이다.[55] # # # # 단, 이는 《고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으로 인정할 경우에 한한다. 조선이 멸망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실릴 대통령은 전혀 없다. 참고로 거의 다 독립협회 관련해서 처벌받은 내용이다.(...)[56] 이러한 바톤을 이어받은 바로 다음 주자 둘은.[57] 통일이 되지 않는 한, 황해도 출신은 물론, 이북 출신 대통령은 당분간 없을듯 하다. 새터민 출신이 아니고서는 깨지기 어려운 기록.[58]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영부인 가운데 외국인은 프란체스카 도너 단 한 명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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