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d700><colcolor=#000000> 최능진 崔能鎭 | |
출생 | 1899년 |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 |
사망 | 1951년 (향년 52세) |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파동 (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 |
국적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아호 | 일석(一石) |
직업 | 독립운동가, 경찰공무원, 정치가 |
학력 | 듀크대학 체육학과 |
정치 노선 | 중도우파 |
이념 | 민족주의, 온건 반공주의, 보수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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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형 집행 직전의 최능진. |
한국의 독립운동가, 경찰, 정치인.
해방 후 친일파가 다수였던 경찰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친일 청산을 부르짖었고, 끝내는 친일 헌병 출신인 김창룡의 손에 죽임을 당한 비운의 인물.
2. 생애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
최능진은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서 부유한 지주이자 기독교도인 최경흠(崔敬欽)의 4남으로 태어났다. 출신 성분이 부유한 지주이긴 했지만 집안의 분위기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우선 그의 두 형 최능찬과 최능현은 평안남도 사천리(沙川里 : 현 증산군 사천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주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은 전력이 있다. 특히 최능현은 감옥에서 탈출해 중국으로 건너가 윤봉길 의사와 함께 폭탄을 제조하는 실험을 하다 폭발사고로 생명을 잃기도 했다.1915년 평양 숭실중학을 졸업한 최능진은 중국으로 건너가 금릉대학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191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프링필드대학과 듀크대학 체육학과에서 수학한 뒤 4년 만에 졸업한 그는 워싱턴 YMCA 체육담당 간사를 맡는 한편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 운동에도 참여했다.
흥사단에 가입한 최능진은 사대주의적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독립운동 세력 내에서의 파벌주의와 분열주의 조장 등 이승만의 정치행태를 지켜보며 이때부터 '반(反) 이승만' 노선을 견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30세가 되던 1929년 귀국해 평양숭실전문학교 체육과 교수로 부임한 최능진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징역 2년(구류 통산 190일)형을 언도받았다. 공교롭게도 조병옥 또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그의 감옥 동기였는데, 이들이 해방 이후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
최능진은 1945년 광복이 오자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2] 치안부장을 맡았다. 당시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러나 그해 9월 3일 발생한 현준혁 암살사건으로 우익 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자 이틀 후 10여 명의 추종자와 함께 38선을 넘는다. 그가 월남한 데는 서울에서 정당 활동을 하겠다는 동기도 있었다.
2.2. 경찰 활동
"남조선에서는 아직도 친일 부역 경찰 출신이 그대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모양입네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가!"
"다른 건 몰라도 북조선에선 친일파 청산 하나는 확실히 하고 있지 않습네까?"
"그러게 말이야.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구만기래."
"남조선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갔습네다."
"내 이 놈들을 그냥 두지 안캈어!"
1945년 9월 15일 월남 도중 해주에 도착한 최능진은 동지들과 신문을 처음으로 구해서 읽다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그가 남한지역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뛰어든 곳이 바로 경찰계였다. 능숙한 영어 솜씨를 활용해 미군정에 스스로 접촉해 얻어낸 첫 직장인 경찰관강습소 책임자로 취임한 그는 곧바로 '해주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가!"
"다른 건 몰라도 북조선에선 친일파 청산 하나는 확실히 하고 있지 않습네까?"
"그러게 말이야.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구만기래."
"남조선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갔습네다."
"내 이 놈들을 그냥 두지 안캈어!"
다음은 조선일보 사회부장 출신인 조덕송이 자신의 저서 『머나먼 여로-언론외길 반세기의 증언』(도서출판 다다, 1989) 제2권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그가 경찰관강습소 책임자로 취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강습소에 남아 있던 일제 총독부 경찰 출신자들로부터 사표를 받아낸 일이었다."
친일경찰 청산을 몸소 실천에 옮긴 최능진은 약 한 달 후 미군정이 경무부를 창설하자 수사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경무부 부장은 이승만과 밀착해 있던 한국민주당의 실세 중 한 명이자 그의 옛 동지인 조병옥이 맡고 있었다.최능진은 그곳에서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가 친일파 출신을 경찰계 요직에 등용시키는 것을 목격하고 다시 한 번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 취임한 것을 비롯해 이익흥, 최운하, 최연 등 일제강점기에 악명이 높았던 친일경찰 간부들이 요직에 속속 중용된 것이다.
최능진은 곧바로 친일경찰 퇴진을 주장했다. 친일 전력 족쇄 때문에라도 자신들에게 절대 충성하리라 기대하며 그들을 중용했던 조병옥과 장택상은 즉각 반발하였으며, 친일파를 적극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일본경찰 출신이라고 모두 Pro-JAP(친일파)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Pro-JOB(전직)이었다." - 조병옥
"경찰은 기술직이므로 어쩔 수 없다." - 장택상
친일경찰 청산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논쟁을 벌이던 최능진과 조병옥, 장택상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6년 10월 1일부터 대구 일원에서 발생한 대구 10.1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진압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10월 7일 『대구지방 소요사태에 대한 경위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에 선동되어 일반시민이 가담한 폭동사건'으로 규정했다. 참고로 스티코프의 일기에는 공작금 내용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직접 현지로 내려가서 면밀하게 조사를 실시한 최능진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결국 그의 강력한 요구와 이를 수용한 김규식의 제안으로 '대구사건의 원인규명과 대책수립을 위한 한미공동회담'이 열렸다. 최능진은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직접 조사한 내용을 거침없이 증언했다. 다음은 당시 회담에 참석했던 송남헌 선생[3]의 증언이다.
"최능진 씨는 폭동을 일으킨 좌익을 철저히 다스려야 하지만, 그런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요인이 경찰 자체에도 내재해 있다고 진술했지요. 다시 말해서 일제강점기의 고등계 형사들이 광복 후에도 버젓이 경찰에 몸담고 있어 일반 양민의 원성을 사고 있으니 그들을 숙청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공동회담은 한 달 동안 계속됐고, 공동결의문까지 작성해 미군정의 하지 중장에게 전달했다. 이 결의안에 최능진의 증언이 대부분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12월 5일 하지 중장은 "친일파 출신을 조사해서 경찰에서 배제하거나 파면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편 한미공동회담의 조선측 대표였던 김규식 등은 조병옥 경무부장의 책임을 물어 그를 즉각 파면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도 이 요구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조병옥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고, 최능진이 그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최능진을 '경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유해한 인물'로 몰아서 사직을 강요했다. 최능진은 이를 거부하고 한동안 정상근무를 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조병옥의 압력에 밀려 결국 12월 5일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능진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대(對) 조병옥 성명서』를 발표하며 조병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귀하는 당연히 현직을 사퇴하여 3천만 민중 앞에 고두(叩頭) 사과하는 동시에, 속죄의 의미로서 8.15 이후 불의(不義) 취득한 재산을 전재(戰災) 동포를 위하여 제공한 후 광복 전의 애국자 조병옥으로 돌아가기를 충고한다."
이에 맞서 조병옥과 장택상도 최능진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몇 차례 공개적인 성명전이 오가면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당시 조병옥의 인기가 바닥이었던지라 시민들은 최능진에게 절대적인 지지의 박수를 보냈다.특히 최능진이 마지막 성명서에서 "조병옥, 장택상 씨가 경찰 행쟁을 한민당의 책동에 의하여 자행해 온 것은 사실이다. (중략) 일제 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민중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고 일갈하면서, 서민 대중 사이에서 최능진은 큰 지지를 받게 된다.
2.3. 반 이승만 투쟁
최능진은 1917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에 머무르면서 이승만의 독선과 독단, 파벌주의를 목격한 바 있었고, 이에 따라 이승만에 대한 그의 혐오감은 일찍부터 굳어진 상태였다. 이는 광복 이후 친일경찰 등 친일파를 옹호하는 이승만의 행각을 목도하며 확신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이 무렵 이승만은 우익단체의 반민특위법 성토집회에 참여해 축사까지 하는 등, 지지세를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최능진은 반 이승만 운동의 일환으로, 경찰계를 떠난 뒤 서재필을 지도자로 옹립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김규식을 자주 만났으며, 김구, 김규식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론'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독선거는 강행됐고, 1948년 5.10 총선거 일정이 확정됐다. 최능진은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다. 이승만이 무투표 당선을 노리던 선거구인 동대문구 갑 선거구[4]에 자신이 입후보해서 이승만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추종 세력은 차기 지도자이자 단독정부의 상징과도 같은 이승만이 대놓고 도전받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최능진은 이승만 추종 세력의 집요한 선거 등록 방해 공작에 시달려야 했고, 공작은 치졸하고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첫 번째 훼방꾼으로 나선 것은 동 선거 위원회였다. 당시 선거 등록 요건은 유권자 2백 명 이상의 추천서를 받아 동선거위원회에 제출, 적법 여부에 대한 인준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위원회는 최능진 선거 운동원들이 추천서를 받아서 제출하면 선거 위원이 없으니 다음에 오라는 식으로 둘러대면서 고의로 접수를 연기시켰다.
두 번째 훼방꾼으로 나선 것은 정치 청부업자들이었다. 그들의 방해 공작은 노골적인 정치 테러였는데, 등록 마감 직전 동선거위원회 입구에서 두 명의 괴한이 선거 운동원들이 가지고 가던 추천서 가방을 강제로 탈취해 도망가버린 것이다. 이 탈취 사건의 전말은 서북청년단 리더였던 문봉제가 중앙일보 1973년 2월 8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회고한 바 있다.
"이 박사는 당시 '라이벌' 최능진 씨가 후보 등록 마감 전날인 4월 15일 하오 추천서 꾸러미를 가방째 선관위 앞에서 날치기당함으로써 무투표 당선됐다. 이미 알 사람은 대강 짐작했겠지만 이때 최 씨의 가방을 날치기한 2명의 괴한은 바로 우리 서청(西靑)의 성북 지부장 계호순 동지 외 1명이었다."
물론 이들은 이승만 측근의 부탁을 받고 이런 테러 행각을 벌인 것이었다. 이들을 사주한 장본인은 이승만에게 이화장(梨花莊)을 기증한 백성욱이었다. 이들은 이 정치공작의 대가로 나중에 자유당 정권에서 백성욱은 4대 내무부 장관, 문봉제는 6대 교통부 장관, 서북청년단 단원 이성수는 백성욱의 공보비서로 발탁된다.이승만 일파가 그렇게 집요하게 최능진의 선거 등록을 방해하려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승만은 당시 웬만한 여론조사에서도 차기 지도자 1순위로 꼽히며 거물급의 인사로서 자리매김했지만, 막상 선거를 앞두고 나서는 확실한 당선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당시 동대문경찰서 윤기병 서장은 사찰 주임 최병용이 제출한 정보 보고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유권자 지지 성향을 조사해 보니 민심이 이승만보다 최능진에게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유권자들은 2년 전 친일경찰 청산을 과감히 주장한 정치지도자 최능진을 기억하고 있었고, 기꺼이 '익숙한 인물'인 이승만이 아닌 신선한 정치인인 최능진에게 표를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윤기병 서장은 장택상 수도청장으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박사를 당선시켜야 한다"는 극비지령을 받았던 만큼, 이러한 예측 못한 상황은 패닉이었다.
결국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취소되고, 이승만은 원하지 않았던 선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최능진은 단단히 이승만 눈 밖에 나게 된다.
2.4. 전쟁과 최후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출범했고, 그 해 10월 1일에 최능진은 수도경찰청 형사대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 연행된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인민해방군 사건)'이었는데, 최능진이 서세충(독립운동가), 오동기(광복군 출신으로 14연대장 역임) 등과 연계해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해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최능진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된 10월 19일에는 공교롭게도 여순사건이 터졌고, 최능진에게는 이 사건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중에 악질적인 친일헌병 출신인 김창룡에 의해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다음은 방송작가 김교식이 저술한 『죽음을 부른 권력』(마당문고사, 1984)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재연해 본 것이다.
1970년 봄의 어느 날이었다. 동양방송 라디오 드라마 『광복 20년』 담당 방송작가로 마침 여순사건 부분을 집필하고 있던 김교식에게 한 노인이 찾아왔다. 그 노인은 때때로 긴 한숨을 내쉬며 소위 '혁명의용군 사건'의 진상을 설명했다.
"조작입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한 죄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만약 공산당이었거나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6.25 때 괴뢰군을 따라 북으로 가지 않고 나를 박해한 자들이 세도를 부리고 있는 이 땅에 남아 있을 리가 있습니까? 혁명의용군, 그런 것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방송을 듣다가 여순사건 이야기가 나오기에 역사의 기록만은 사실대로 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경위가 어쨌든 당시 상황에서 최능진은 이승만 일파가 파 놓은 정치 공작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1심에서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례적으로 2심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5년형을 선고 받는다.최능진이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고 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 문이 열리면서 다른 수형인들과 함께 출옥한 최능진은 곧바로 김구, 김규식 계열 인사들과 접촉하는 한편, 북한과 대한민국 양측에 즉각 동족상잔의 전쟁을 중단할 것과 유엔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누구도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일은 없었다.
이윽고 미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최능진은 9월 28일 서울 수복 뒤 납북될 것을 우려해서 숨어 지내는 한편 대한민국 정객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당시 19세였던 그의 장남 최필립(전 스웨덴 대사, 전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증언에 의하면, 최능진은 이승만, 이기붕, 조병옥에게 "조국 재건에 정적이 있을 수 없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를 모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일파 입장에서는 탈옥한 범죄자가 화해 운운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이었다. 그 해 11월 그는 당시 최고의 권력 실세로 군림하고 있던 김창룡(군·경·검 합동수사본부장)에 의해 구속됐다. 재판은 불공정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군사법정은 최능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듬해 1951년 2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에서 총살되었다. 총살 후 대구에 가매장되었다가 4.19 혁명 이후에야 경기도 양주군으로 이장되고 공개적으로 추도회가 열렸다.
3. 사후
3.1. 유족
그의 부인인 이풍옥 여사는 43세에 과부가 되어 '빨갱이 가족' 소리를 들으며 5남매를 힘겹게 길렀다.장남 최필립은 1970년대 초반 남북적십자회담에 참여하고 스웨덴 대사를 지내기도 한 외교관으로 성장한 후, 1974년부터 5년 간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의 의전비서관을 맡았다. 2005년부터 8년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3남 최만립은 1971년에 이낙반도체(구 대한마이크로전자)를 창업해 기업인 생활을 하며 대한체육회 부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체육계의 거물이 되었다.
최능진의 손자이자 최필립의 아들인 최우석은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월간조선 기사로 활동중이다.
최우석은 당시 한국을 '언론탄압국'으로 규정하며 일방적으로 족벌사주를 옹호한 IPI(국제언론인연맹)의 정회원이자 결의문 작성위원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 바 있다. 한국에서 평기자 출신으로 IPI 정회원이 된 것은 그가 유일하거니와, IPI 정회원은 주로 언론사 사주나 주필, 편집국장, 보도본부장 등 핵심 간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IPI 정회원이 된 비결은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방우영 회장을 보좌하기 위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언론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3.2. 진실규명
이후 2009년에 이르러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51년 당시 헌법에 근거가 없는 군법회의에서 최 씨의 활동을 왜곡해 사형을 선고하는 등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가 있었기에 진실규명을 하라고 결정했다.유족들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당시 최 씨의 진술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며 최능진의 무죄를 선고했으며 2016년 6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후 2016년 11월 최 씨의 아들과 손자, 손녀 등은 국가를 상대로 총 4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017년 5월, 1심은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와 생명권을 침해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며 "이로 인해 최 씨와 유족들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당했을 것이 명백해 손해배상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위자료로 총 7억 5000만 원을 인정하였다.
정부는 항소하였으며, 2017년 12월 서울고등법원 민사 7부는 최 씨의 아들 등 유족 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항소심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11일 밝혔다. 항소심은 1심보다 2억 원이 높은 총 9억 5000만 원을 위자료로 인정했으며, 지난해 사망한 최 씨의 막내아들 한 명의 몫(5000만 원)을 제외한 9억원을 최 씨의 장남 최필립 씨 유가족과 최만립 씨 등 아들, 딸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심은 "최 씨의 사형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한 정치활동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국민의 생명권을 침해한 건 불법의 정도와 결과가 매우 무겁다"고 밝혔다. 항소심 판결 이후 정부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 판결은 2023년 1월 기준 아직 나지 않았거나, 알려진 바가 없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서울 4[5]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등록 취소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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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후보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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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록
부(父)의 금일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비롯됐다.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6]
군인이 정치사상의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51년 2월 11일 총살 집행 전에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서. 본문의 부(父)는 아들을 대상으로 본인을 칭한 것이다.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6]
군인이 정치사상의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51년 2월 11일 총살 집행 전에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서. 본문의 부(父)는 아들을 대상으로 본인을 칭한 것이다.
6. 대중 매체에서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과 1990년 8.15 특집극 《반민특위》에서는 배우 남성훈이 최능진 역을 맡았다. 여기서는 광복 후 경무국 수사과장으로서 친일파 출신들을 경찰에서 내치려다가 오히려 이들과 결탁한 조병옥과 장택상에 의해 밀려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제1공화국 최종화와, 반민특위가 방송되기 전에 종영된 제2공화국에서 남성훈은 최인규 역을 맡아 묘한 대조를 이룬다.
- 1985년 KBS 광복 40주년 대하드라마 <새벽>에서는 배우 김영식이 연기했다.
- 1994년 1월 28일, KBS1 <다큐멘터리극장> '인물발굴 1: 대통령에 도전한다 최능진 수사국장' 편에서 재연극 형식으로 다룬 바 있는데, 배우 김봉근이 최능진 역을 맡았다. 이 프로그램은 최능진이 추천인 서류가 잘못돼 후보자 등록이 안 됐다는 기존의 견해를 뒤집고 장택상의 압력으로 후보직을 사퇴당했다는 식으로 다뤘다. 방영 후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와 건국애국단체총연합 등이 "북한의 대남전략과 비슷하며, 우리 건국사를 왜곡/날조했다"는 식으로 홍두표 KBS 사장 등 관련자 3명을 고소했다. 우익 시사잡지 《한국논단》도 1994년 2월호에서 이를 심층적으로 비판했고 1998년 3월호 기사 <누가 움직이는가: 빨갱이는「善」, 경찰은「惡」으로 연출하는 공영방송 KBS(이명인 글)>를 통해 해당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당시 책임프로듀서인 남성우 CP까지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했다가 2003년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대법원 2000다14613)
7. 관련 문서
[1] 민족주의 계열 우파 성향인 최능진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해방 직후, 한국의 민심은 좌파에 호의적이었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미군정청 여론국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어떤 종류의 정부를 원하느냐고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응답자의 대부분이 사회주의(6,037명, 70%)를 선택했으며, 자본주의는 고작 14%(1,189명)에 불과했다.#1 그러나 주의할 점은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북한과 같은 체제가 아니라 기반시설 국유화 등 유럽식 사회주의를 이야기한다. 오히려 응답자의 약 70% 가량이 우익인사 내지 우익정당을 지지하는 결과도 나타난다. 1946년 미군정의 여론조사에 나타난 한국인의 사회인식 이승만조차도 제헌헌법과 초기 정책에서는 기반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한 기록도 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보다도 더 적은 7%(574명)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조사에서 나타난 한국인의 성향은 양 극단을 모두 배격한 중도좌파 정도가 적당하다. 한편, 조선의 역사학자 정인보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 특사 앨버트 웨드마이어 중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선인들의 절대 다수는 친일파와 일본에 대한 미움 및 조선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들로 인해 공산주의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조선 사람이 왜 '빨갱이'를 좋아하는지 아시오?"[2]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현준혁이었다.[3] 김규식의 비서실장으로 일제강점기 시기 항일단파방송 밀청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적이 있다.[4] 현재의 동대문구 갑과는 관할구역이 전혀 다르다. 이 당시 동대문구 갑의 관할구역은 현재 종로구와 성북구에 속해있다.[5] 당시 행정구역 기준 동대문구 갑. 관할 모든 동들이 서울 확장으로 인한 분구와 구간 경계 조정을 거치면서 다른 구로 이관 되었다. 현재 기준 서울 종로구 창신동, 숭인동 및 성북구 돈암동, 성북동.[6] 당시 대한민국 내에서 신탁통치 찬성파들은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는 세력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자신들이 '반공투사', '애국자'임을 자처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비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