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23:13:43

한국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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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韓國光復軍
Korean Liberation Army
[1]
<nopad>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설립 1940년 9월 17일 ([age(1940-09-17)]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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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중화민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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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중화민국 국민정부
중화민국
]] 충칭시
(現 중화인민공화국 충칭시)
해체 1946년 5월 16일[2]
국가
[[대한민국 임시정부|]][[틀:국기|]][[틀:국기|]] (1940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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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깃발 명칭
]][[미군정 조선|]][3] (1945 ~ 1946)
정당[4]
[[한국독립당(1940년)|
한국독립당
]][5]
[6]
조선혁명자동맹[7]
조선민족전위동맹[8]
조선민족해방동맹[9]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10]
신한민주당[11]
지휘체계 김구 (통수권자)
지청천 (총사령관)
김원봉 (부사령관)
이범석 (참모장)
최용덕 (총무처장)
병력 564명 (1945년)
참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동맹 세력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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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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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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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국민정부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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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틀:국기|]][[틀:국기|]]

[[영국|]][[틀:국기|]][[틀:국기|]]
적대 세력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후신 대한민국 국군[12]

1. 개요2. 배경3. 광복군 창설(1940년 9월 17일)4. 건국강령5. 대한민국 임시약헌(1940)6.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7. 활동
7.1. 징모활동(초모공작)7.2. 선전/방송 활동7.3. 유격전(遊擊戰)7.4. 공군 활동7.5. 독수리작전(Eagle Project) 1945.3.1~1945.10.1.7.6. 중국전구 전략사무국(OSS) 기타 작전들
8. 지휘체계 및 배치상황9. 광복(光復) - 1945년 8월 15일10. 한국광복군을 부정한 트루먼 대통령11. 한국광복군의 확군(擴軍)
11.1. 한국 광복군 예비대(韓國光復軍豫備隊, 1945년 9~11월(추정) ~ 1947년(추정)11.2. 가짜 광복군 논란11.3. 루머 "박정희 비밀광복군설"
12. 한국광복군의 국내귀국13. 광복군 복원선언(光復軍 復員宣言) - 1946년 5월 16일, 공식해체14. 광복군의 의미·평가
14.1. 의미14.2. 평가14.3. 독립운동가 서훈 기준
15. 파일:대한민국 국군기.svg 대한민국 국군과의 관계
15.1. 파일:대한민국 육군기.svg 대한민국 육군
15.1.1. 대한민국 육군의 모체: 남조선 국방경비대(南朝鮮 國防警備隊)15.1.2. 혼란한 당시 정치상황15.1.3. 미군정의 의도15.1.4. 여론반발 그리고 숙군(肅軍)15.1.5. 대한민국 육군의 뿌리 논란
15.2. 파일:대한민국 해군기.svg 대한민국 해군15.3. 파일:대한민국 공군기.svg 대한민국 공군
15.3.1. 대한민국 공군 창설(1949년 10월 1일 ~1950년 7월 초)
16. 광복군 출신
16.1. 광복군 지휘부16.2. 광복군 구성원16.3. 여성 광복군
16.3.1. 임시정부/총사령부 소속16.3.2. 제 1지대 여군16.3.3. 제 2지대/제 5지대 여군16.3.4. 제 3지대 여군
17. 광복군의 계급체계
17.1. 계급장을 달지 않은 사례
17.1.1. 계급 (1941 ~ 1944)17.1.2. 계급 (1945.2.20 ~ 1946.5.16.)
18. 직책/호칭19. 복제
19.1. 중화민국 군대의 상황(1937~1945)19.2. 청색 군복 vs. 황색 군복19.3. 총사령부 토교대(충칭), 일본 패전 후
20. 무기
20.1. 총기류
20.1.1. 총기제한 사례20.1.2. 총기지급 및 소지사례
20.2. 기갑부대(미실행) : 한·미 합동 기갑 전차훈련반(韓·美 合同機甲部隊 戰車訓鍊班)20.3. 광복군 공군(미실행) : 한국 현단계 공군 건설 개시 공작을 미군과 합작하는 계획20.4. 해상 병기
21. 군가22. 한국광복군 재현행사 (Re-enactment of Korea Independence Army)23. 한국광복군 기념품24. 관련 문서25. 가볼만한 곳26. 매체 속에서의 광복군
26.1. 영화26.2. 드라마26.3. 웹툰
27. 둘러보기
27.1. 독립운동관련 웹사이트27.2. 한국독립운동 역사책27.3. 회고록, 수기, 비망록
27.3.1.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수기27.3.2. 조선의용대/제 1지대/인면전구공작대 기록27.3.3. 한국청년전지공작대/제 2지대 회고록 및 기록27.3.4. 광복군 지대장들의 수기27.3.5. 일본군내 학병 출신 수기27.3.6. 그 외의 경로로 광복군 입대한 경우27.3.7. 조선의용군(연안파) 학병 출신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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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민족 반만년의 정치역사 최초의 완벽한 민주정부였다. 임시정부는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대일항쟁을 계속하는 가운데에서도, 임시의정원[13], 즉 의회중심의 민주공화체제를 고수했다.

그 기본정책은 삼균주의인데, 자본주의사회주의를 한국식으로 해석하여 적절하게 배합하되 민족주의의 기조를 받아 세계문명표준에 맞는 열린 민족주의와 함께 균권(均權), 균부(均富), 균학(均學, 均知)의 '한국식' 균등론를 강조하고 있다. 민주복지사회 건설을 지향했다.[14]

삼균주의는 국내의 모든 권력과 부력(富力)이 일제에 의해 독점된 현실에서, 한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전통에서 민족의 활로를 추구하였다. 또한,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캉유웨이(康有爲)의 대동사상(大同思想), 무정부주의 · 사회주의 등 여러 사상들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삼균주의의 대전제는 ‘완전균등’으로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완전균등을 표방하였다. 개인과 개인간의 균등은 정치 · 경제 · 교육의 균등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보통선거제 · 국유제 · 국비의무학제를 실행해 각각 정치 · 경제 · 교육의 균등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민족과 민족간의 균등은 민족자결을 통해 이룩된다고 전제하면서, 이를 모든 민족에 적용해 소수민족과 약소민족이 피압박 · 피통치의 위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3.1 운동 무렵부터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주창했지만, 이 시기 삼균주의는 평등주의를 표방한 정도에 그친 기초적인 단계였고 1920년대를 거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해 마침내 1941년 발표된 임정의 건국강령에 기본 이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2. 배경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盧溝橋事件)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그 해 8월 상하이에서 벌어진 송호회전(淞滬會戰)와 12월 난징 대학살이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일본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민당 장제스 총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무력수단을 갖추는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여기에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장제스 총통과 김구 주석 개인이 돈독한 관계도 한몫했다.

이와같이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초급장교 양성과 1개 연대 규모의 군대를 편성한다는 군사활동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15]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지역이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중국대륙 여러 곳으로 옮겨다녀야 했고, 계획한 군사활동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치장에 도착하면서 이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복군의 창설은 한국독립당에 의해 계획, 추진되었다. 기강에서 3당이 통합[16]을 추진하면서 광복군 창설을 주요 현안으로 결정하였다. 당이 추진해 갈 장단기 정책을 논의하면서
“국방군(國防軍)을 편성하기 위해 국민의무병역을 실시한다”(당강 6조)
“장교 및 무장대오를 통일 훈련하여 광복군을 편성할 것”(당책 3조)[17]
광복군 편성을 한국독립당이 추진해 나갈 당면 목표의 하나로 결정한 것이다.

1939년, 유럽에선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Fall Weiß / Polenfeldzug)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임시정부는 대일전쟁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고, 이를 위해 전시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가 전시태세를 갖추기 위해 추진한 대표적인 사업이 韓國光復軍(이하 광복군으로 약칭)의 창설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일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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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우리는 3천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격패(擊敗)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해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軸心國)에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 합병조약과 일체의 불평등 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 국가가 한국에서 합리적으로 얻은 기득권익이 존중될 것임을 거듭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倭寇)를 완전히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血戰)한다.
4.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창춘(長春)[18]남경정권(南京政權)[19]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데 적용되기를 견결(堅決)히[20] 주장하며, 특히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인), 외무부장 조소앙(인)
대한민국 23년[21] 12월 9일

3. 광복군 창설(1940년 9월 17일)

파일:FB_IMG_1474739838991.jpg 파일:FB_IMG_1474742784289.jpg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
1940년 9월 17일, 중경, 한국광복군 창설 기념식이 끝난 뒤 오찬장
축사하는 김구 주석(중앙좌 검은 옷)과 임시정부 요인 엄항섭(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1940년 9월 15일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이다. 흔히 약칭해서 ‘광복군’이라고 불린다.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1940년 9월 15일 「한국광복군선언문」이 발표되었고, 9월 17일에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典禮式)이 거행되었다. 창설 당시 총사령은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은 이범석(李範奭)이 담당했다.
한국광복군 선언문(1940. 9. 15)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元年)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원수(蔣介石 元帥)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이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과거 삼십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전을 계속하여 왔다. 영광스러운 중화민국의 항전이 사개년에 도달한 이 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중화민국 최고영수 장제스 원수가 한국민족에 대하여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여 감사의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들은 한중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 계속불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장 김구

한국 광복군의 성립은 임시정부가 따로 발표한 광복군총사령부 성립보고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구한말에 일본 침략자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해산된 직후에 일어난 의병활동으로부터 시발하여 만주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의 투쟁을 거쳐 임시정부통수하의 광복군으로 이어진 것이다.

1940년 9월 중국 쓰촨성 충칭에서 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되기에 앞서, 중국정부는 뤄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훈련반을 설치하여 1기에 93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기간요원으로 한 광복군의 조직이 곧 이루어지기에는 너무도 많은 난점이 있었다.
① 국외 영토 위에서 또 하나의 통수권을 가지는 군대를 조직한다는 일[22]
② 병력의 부족
③ 군비와 보급의 부족

그러나 이러한 애로 때문에 무한정으로 시일을 천연시키거나 중국정부의 처분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더욱이 영 · 불 · 호 · 뉴우질랜드의 대독선전에 이어 독일군이 노르웨이 · 벨기에 · 네델란드 · 룩셈부르크와 교전상황에 들어가고 다시 이탈리아와 영 · 불간 개전되고 열리는 등 전쟁의 판국 급진전하고 태평양 전역의 전세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우리 정부와 독립지사들은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시일을 늦추다가는 전세를 놓치고 한을 천추에 남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기까지의 하였다. 1940년 9월 17일의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은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 외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선언문은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 거행 이틀 전인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창설위원장 김구의 명의로 발표된 것으로서, 여기에는 선열의 위대한 순국정신과 그 뒤를 이은 광복군의 사명과 중국정부의 특히 장제스 총통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이 선언문에 이어서 발표된 광복군 총사령부의 충칭 부서는 다음과 같다.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
참모 이복원 · 김학규 · 고운기 · 유해준 · 이준식
부장관 황학수
주계장 조경한(안훈)

광복군 창설 준비는 크게 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병력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에는 군대를 편성할 만한 인적 자원이 없었다. 1920년대 이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등을 비롯한 각종 군관학교를 통해 양성한 군사인재들이 있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었다.[23] 그리고 이청천(李靑天)·이범석(李範奭)·김학규(金學奎) 등과 같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중국관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지만, 이들은 대부분 군사간부들이었다. 실제 병력이 될만한 인적 기반이 없었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병력을 확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은 일본군 점령지역에 이주해 있던 한인청년들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군 점령지역인 베이징(北京)·텐진(天津)·스좌장(石家莊) 등을 비롯하여 화북지역에는 약 20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다.[24] 이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한다는 것이 임시정부의 방안이었다.

1939년 7월 국무회의에서는 일본군 점령지역에 들어가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기구로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구성하였다. 조성환(曺成煥)을 단장으로 한 군사특파단은 대부분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던 군사간부들과 중국의 군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그해 11월 섬서성 서안(陝西省 西安)으로 파견되었다. 서안은 화북지역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특파원들을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들여보내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고자 한 것이다.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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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보고서

(1) 한국국군과 역사상의 국제투쟁

한국 민족의 건국역사는 오천년에 달하며, 중화 · 애급(埃及 이집트) · 희랍(希臘 그리스) 및 인도(印度)와 더불어 문화가 가장 유구한 나라의 하나이다. 한국은 삼천만 인구를 가지고 84000mi2의 국토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 소요되는 병력은 적어도 50만, 많으면 100만이다. 일찌기 성(盛)할 때에는 강병 100만을 거느려 밖으로는 이민족을 막고 안으로 국토기반을 튼튼히 함으로써, 이웃을 사귀는 방도와 자신을 지키는 방패로 삼았다. 그 뒤 15세기말에 해군대장 이순신, 육군원수부 권율이 서의 명나라군과 연합하여 명장 송응창(宋應昌), 양호(楊鎬), 진린(陳璘), 이여송(李如松)과 더불어 동쪽의 왜군을 막으니 전전(轉戰 : 여기저기 싸움) 8년에 비로소 왜군을 몰아냈다. 16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북쪽으로 청나라와 싸우니 싸울 때마다 화의를 맺었다. 이 두 전쟁을 겪고 난 뒤로부터 민족의식이 날로 높아지고 널리 치군지술(治軍之術)을 받아들여 국군 훈련의 명목 하에 서구의 총포와 같은 기구를 썼다. 중국인 척계광(戚繼光)의 전략은 일찌기 300여년전부터 국방에 응용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2) 포오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과 한국

18세기 하반기 이래 서세(西勢 : 서구세력이) 동점(東漸 : 동쪽으로 점점 번져) 인적(隣敵 : 이웃의 적)이 넘보니 국내에서는 내홍(內訌)이 자주 일어났으며, 그 틈을 타서 외환(外患)이 일어났다. 일본과 아라사(러시아) 두 나라가 한국 경내에 병력을 진주시켰다가 양국간에 정전이 이루어진 결과, 소위 「포오츠모드 조약(Treaty of Portsmouth)」이란 것이 세상에 나왔으니, 이것은 결국 한국의 희생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1905년으로부터 1910년까지 사이에 한국인이 얻은 것은 다만 저 수십종의 망국조약 뿐이었다. 여기에서 삼천만 민족은 일본의 포로가 되고, 84000mi2의 국토는 일본인의 이식처(移殖處)가 되고 광대하기 이를 데 없는 모든 권리는 결국 그들의 전리품이 되고 말았다. 충용 구국의 국방군은 적장 하세가와(長谷川)에 의하여 강제 해산당하고(1907년 8월 1일). 오천년 독립국가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1910년 8월 29일) 그것은 매국노와 적국 정부가 늑대와 이리처럼 결탁하여 꾸며낸 한토막 망국의 비극이었으니, 「포오츠머드 조약(Treaty of Portsmouth)」이 끼친 해독(害毒)은 참으로 혹심한 것이었다.

(3) 국방군 해산과 광복군 창립

1907년 이상설, 이위종, 이준 세 사람은 밀명을 받고 화란(네덜란드)에 가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여 1905년 11월 17일에 늑결(勒結 : 굴레로 얽듯이 옳아맴) 보호조약의 무효를 선포하려 하였다.

때마침 일본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통감으로 있어 한국 황실을 협박, 퇴위케 하고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으로 하여금 7조약을 늑결케 하였다. 다시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에 명령, 장병을 소집케 하여 국군 해산의 음모를 꾸몄다. 이때 시위대 제 1연대 제 1대대장 박승환은 영내에서 의거하여 국치를 씻고자 하였으나, 화(禍 : 재앙)가 황제에 미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거사를 뒤로 미루다가 성사하지 못하였다. 8월 1일에 이르러 국군이 해산되매 박장군은 노기가 머리 끝까지 뻗쳐 적장을 크게 꾸짖고, 휘하 장병에게 훈계하기도 전에 기氣가 격激하고 간담(肝膽 : 속마음)이 터질듯하여 총을 뽑아 자진(自盡 : 스스로 다하여 죽음)하였다. 해와 별을 꿰뚫고 귀신도 우는 박장군의 총성이 울러 퍼지자, 한국 국방군은 용감히 싸움터에 떨쳐 나아가 주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니 거리는 온통 붉게 물들었다. 며칠이 안 가서 이 소식은 안한 일대에 퍼져 의병이 다시 들고 일어났다. 그리하여 국방군과 민병이 서로 힘을 합쳐 그들이 가는 곳마나 모조리 적을 휩쓸어 버리니, 그 명성과 위세는 큰 물결처럼 호호탕탕(물이 한없이 넓게 흐르다.)하였다. 그러나 전전(轉戰) 10여년에 한국의 전국토는 창림탄우(槍林彈雨)의 전장으로 변화하고, 비무장의 한인 남녀 노소 중 비참하게 적의 칼에 쓰러진 사람은 50만이 넘었다. 번갈아 가면서 한국에 주둔한 적군 중 한국군에 의하여 맞아 죽은 자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요컨대 한국 광복군은 일찌기 1907년 8월 1일 국방군 해산과 동시에 성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적이 우리 국군을 해산시킨 그 날이 바로 우리 광복군이 창설된 날이다. 미침 그 33주년에 해당되는 금년 8월 한국 광복군총사령부는 항전의 소리높은 우방의 임시수도에서 그 성립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의 줄거리를 약술하여 우방 인사에 고한다.

(4) 광복군 국내에서 국외로 이전

광복군이 국내에서 적과 싸운지 5~6년에 적을 완전히 몰아내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국가를 위한 독립전에서, 민족을 위한 해방전에서 장기저항을 할 수 있었고 또 민족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여러 사람의 민족영웅과 혁명선열을 낳았다. 경술년(庚戌年) 신해년(辛亥年)에 이르러 한국은 망하고 청조에는 혁명이 일어나 중화민국이 난징에 건립되매 한국 광복운동의 대본영은 국내로부터 국외로 이전하였다. 상하이, 길림, 펑톈, 블라디보스톡,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우 등지를 근거로 외교와 군사 공작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동북성에 학교를 세워 사관 인재를 양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년 학생을 미국, 소련 및 중국 윈난(雲南) 군관학교에 밀파하였다. 동시에 유격대를 편성하여 두만, 압록 양강 연안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대소교전에서 무찌른 적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앞에서 쓰러지면 뒤에서 이어 나가기를 계속 10년, 그 동안 잠깐의 쉼도 없었다.

(5) 광복군과 대한민국

제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1919년 3월 1일 한국은 독립을 선포하고 민국정부와 의정원을 건립하였다. 국내외의 무장 항적부대를 개편하여 광복군을 세웠다. 광복군은 규정을 만들고 장령(將領)을 임명하고 총사령부를 설립하였다. 동북 만주에서는 3대 군사기관이 재만교포 200만을 통제하여 장정을 모으고 군량을 거두어 적군과 맹렬히 대적하니 적의 총독은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주한일본군만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하여 3개 사단의 병력을 증가하였다. 그들은 보루(堡壘)를 구축하고 경비정을 증가하고, 전선망을 가설하고, 교통망을 확장하고, 군용도로를 닦고, 비행기와 탱크를 배치시키고, 전국 경찰을 보조케 하고 다시 사복부대와 밀정을 모집하여 대적을 맞아 싸우듯이 전시와 마찬가지로 침식(寢食 잠 자는 일과 먹는 일)의 여가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전과를 보면 10전투에 1개의 승리도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적은 마침내 외교수단을 빌려 한국을 제압하려 하였다. 즉 1925년 일본 주한총독부 경무청장과 중국 펑톈성 경찰청장의 손에 의하여 「미쓰야 조약(三矣條約)」이 체결되었다. 거기에는 『중일 양국경찰은 서로 힘을 합하여 한교의 반일운동을 제지한다. 중국당국은 반일한인의 체포에 노력할 것이며, 한인 영수의 성명은 주한 일본당국이 그 명단을 작성하여, 즉시 교부한다. 또한 품행이 단정치 못한 한인은 중국 경찰이 체포, 일본 관서에 넘겨서 심문 징벌토록 한다.』고 규정하였다. 생각컨데 당시의 동북성은 아직도 중국 혁명정부의 세력 범위에 들지 못하였으므로 그곳 한국군은 공인을 받지 못하였음은 물론, 묵인조차 받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세계인(世人)의 감격와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던 수 많은 의사와 애국지사는 손쓸 겨를도 없이 포박당하고 말았으니, 천년 뒷 사람으로 하여금 어찌 통한케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옛 일을 더듬어 오늘을 생각할 때 창해(滄海 : 푸른 바다)가 상전(桑田 : 뽕나무 밭)으로 변한 것 같은 착잡한 감회를 금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한국군에게는 동족 교포의 인화(人和 : 인심이 화합함)와 산옥(山獄 : 험한 산) 삼림(森林 : 울창한 숲)의 지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군은 때로는 숨고 때로는 나타나고, 깜쪽같이 흩어지거나 뭉치고, 출몰이 무상하고 형세에 따라 기습 또는 정면공격을 하여 소수로써 능히 다수를 적대하니 험난을 평탄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1931년 이후에는 한중 양군이 서로 제휴하여 조직을 엄밀히 하고 군규율을 바로 세우게 되었으므로 싸울 때막가 전의는 더욱 격앙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퇴조(退潮 : 왕성하던 세력이 쇠퇴함)되지 않았다. 백두산, 흑룡강 일대에는 아직도 능히 싸울만한 수의 군대의 백전불굴의 용사들이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건국군이요. 약소민족의 전위대요, 중 · 한 공동의 구적(仇敵)을 타도하는 선봉대요, 동아의 평화를 건립하는 기간부대이다.

(6) 중 · 소의 대일 타협시기와 광복군

국제적 연쇄관계에 있어서나 민족적 연대성에 있어서, 어떠한 민족과 국가도 국외에 고립할 수는 없다. 한국 광복군도 또한 하나의 민족 단위의 무장세력인 만큼 국제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일찌기 러일 타협기에는 한국군은 러시아 국경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예컨데 미쓰야 협약이 만주에서 시행되고 있던 때와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는 국제적 원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 민중의 옹호와 지지조차 잃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지난날의 한국군은 참으로 많은 위협과 핍박을 받아 왔다. 그 중에서도 무기와 군비를 마련할 길이 막혔다는 것은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구사일생 중에서도 목숨을 다하여 싸우고 몸을 던져 탈전(奪戰)하였다. 수만 병력이 동원되어 적군을 대파하기를 수십번, 조금도 중단함이 없었으니, 이는 약소 민족운동사 상 하나의 이채(異彩 : 색다른 빛)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 다만 하나의 기다림이 있었다. 그것은 곧 우방의 대일개전이었다.

(7) 광복군과 중국

신해혁명 이후 중 · 한의 제휴(提携) 관계는 현저히 깊어지고 절실해졌다. 북벌에 앞서 중국 광둥성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장교장은 한국 독립당 청년을 다수 수용하여 국내외 유지들의 마음은 항상 여기에 쏠려 있었다. 「128」에 이어서 일어난 「429」는 서로 원인과 결과를 이루어 중 · 한의 동구(同仇 : 같은 원수) 의식은 더욱 깊어졌다. 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한인 청년을 비밀히 수용하여 장령(將領)이 될 만한 인재를 길렀음은 북벌 성공 후에 전개된 대국면(大局面)의 하나로는 이는 실로 대일 개전의 선성(先聲)이었다. 이와같은 폭풍우의 전야에, 동북 만주의 각계 영수는 이에 군사기관을 설립하여 국내외의 동지에게 즉시 동원하도록 밀령을 내렸다. 때마침 중국 최고영수 장위원장(蔣委員長)은 중 · 한 공동의 원수(怨讐) 적개와 손중산(孫中山) 선생이 약소민족 부조(扶助)의 원칙과 유지(遺旨)를 받들어 분연히 한국광복군의 중국 내에서의 편성과 활동을 승인하는 한 편, 지방 군정 각계에 령을 내려 상호 연결하고 편리를 제공하도록 하였다. 이는 중 · 한 연합군 성립의 선성이었다. 이에 한국 임시정부는 본래의 규정인 광복군 조례와 총사령부 조직대강에 의거하여 새로 광복군을 편성함으로써, 구제신군(舊制新軍)이 울연히 일어나 오늘 의식을 거행한 한국 광복군총사령부의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중한 오천년의 신의와 우의의 교환은 대일투쟁의 협력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고 두터웠으니, 이는 자연의 세勢라 하지 않을 수 없다.

(8) 광복군의 임무와 그 구성분자

광복군에는 파괴와 건설의 임무가 있다.

① 국내의 적에 대하여 모든 침략적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교통 기구를 타도할 것
② 국내의 한국인에 대하여 모든 봉건세력 반혁명세력 및 적에 부역한 각종 악렬요인(惡劣要因)을 타도할 것.
③ 모든 낡고 오염된 풍속을 제거할 것
은 파괴의 임무에 속한다.

① 대한민국 건국방침을 받들어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제도(토지의 국유, 보통선거제도, 국비교육의 실시 및 의무교육의 연한年限의 연장)를 수립할 것
②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지위의 평등을 실시할 것.
③ 우리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자와 더불어 손을 맞잡고 세계 인류의 평화와 행복 촉진에 협력할 것
은 건설의 임무에 속한다.

한국 광복군의 임무가 정해진 이상, 그 구성분자도 이에 따라 정해진다. 무릇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싸우고자 하는 자 및 공화국과 합리적 사회의 건립을 위하여 싸우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광복군의 기치하에 들어올 수 있다. 정의는 용감히 앞으로 나아갈 뿐, 뒤를 돌아봄이 없다. 맹세코 인류의 독 벌레를 격멸하여 다시 국기를 영원 무궁한 터전 위에 세우리라. 진심으로 원하건대 정의, 인도를 주장하는 우방 인사의 가르침이 있을지어다.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되었다. 그 정신적 기원은, 멀리는 수(隋)나라의 백만대군을 무찌른 을지문덕의 표한(剽悍 : 급하고 사나움), 신라의 정화(精華 : 뛰어나게 우수한)이었던 화랑의 임전무퇴 정신, 이순신의 충용(忠勇 : 충성스럽고 용맹함.)에서, 가까이는 일제의 국군 해산에 항거한 의병의 봉기 이래 줄기차게 일어난 민족 독립정신에서 우러 나왔다. 이 보고서는 특히 광복군의 정신적 연원(淵源)을 강조하여 적이 우리 국군을 해산시킨 그 날이 바로 광복군 창설의 날이라고 갈파하였다.

적에게 강제 해산 당한 국군은 을미사변 이래 울연히 일어난 의병과 합류하려 한 동안 대규모적인 반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시세(時勢) 불리하여 만주로 이동, 거기에서 다년간 항일투쟁을 벌이면서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삼시협정(三矢協定, 미쓰야 협정)의 체결과 그 뒤의 일본 만주지배에 따라 독립군은 다시 와해 이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중국 관내로 이동한 대오와 청년들은 장제스 총통의 군총사령부는 이들을 기간으로 성립한 것이나, 법적으로는 1919년 9월의 임시헌법에서 규정한 국민의 병역의무와 대통령의 통수권 및 1920년 이래 공포 시행한 육군임시군제, 육군임시군구제 등에 근거하였다.

국내외에 걸친 수 많은 항일 무장투쟁 중 특히 광복군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임시정부의 지휘 하에 활동안 단일체계의 무장혁명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 보고서는 광복군이 적의 타도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건국방침에 따라 삼균제도를 실현하고 나아가서 세계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하는 건설적 임무를 지녔다고 주장함으로써 내외를 주목을 끌었다.

4. 건국강령

건국강령
1942년 11월 28일 반포

제1장 총 강

1. 한국은 오천년래로 같은 말 · 글 · 국토 · 주권 · 경제 · 문화를 보유하고 공통의 민족정기를 길러 스스로 형성하고 단결한 고정집단의 최고조직이다.

2. 한국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다. 선민의 이르기를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 흥방보태평(興邦保泰平)』이라 하였으니, 그 뜻은 사회 각개층의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균등히 함으로써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 민족이 지켜야할 최고의 공리이다.

3. 한국은 역대로 토지 국유제도의 유범이 있었으니, 선현이 통론하기를 『성조는 지극히 공편한 토지분배법을 준수하였으나, 후인이 이를 혁파하여 사유 겸병(兼倂:합쳐서 소유함)의 폐해를 낳았다.』고 하였다. 이는 문란한 토지 사유제도를 고쳐서 국유로 환원하라는 일종의 토지혁명선언이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마땅히 고규(古規:오래된 법규)와 신법을 서로 참작하여 토지제도를 국유로 확정하여야 한다.

4. 한국이 국가주권을 상실할 때에 순국선열이 우리들에게 남긴 말씀에 『우리 동포는 국치를 잊지 말고 견인(堅忍:굳게 인내하고) 노력하여 동심동덕(同心同德 : 같은 마음과 같은 덕)으로 해외를 막고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는 전후 수십만 순국선열이 우리 민족정기를 고무 격려한 유지이니 우리 민족의 남녀노소는 영세불망(永世不忘 : 영원히 잊지 아니함)하여야 할 교훈이다.

5. 한국의 독립선언은 우리민족의 대혁명의 발단이다. 선언은 『오인(우리)은 이에 아(우리) 조국의 독립국임과 아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천명하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이 삼일독립운동을 발동한 원동력이다.

동년 4월 11일에 13도 대표는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의정원은 대한민국 건립하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창조 개포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이 자력으로 이족전제(異族專制)를 전복하고 오천년 군주정치의 구각(舊殼 :구 시대 껍질)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계급을 소멸한 제 일보(한걸음)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대중의 피와 살로 창조한 국가형식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옹호하고 확립함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6.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3년 4월에 대외 선언을 발표하여 『보통선거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정권을 균등하게 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함으로써 이권을 균등하게 하고 면비(免費:비용면제) 교육제도를 채용함으로써 권학을 균등하게 한다. 국내외에 대하여 민족자결권을 보장함으로써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불평등을 혁제(革除:갈아엎어 억제)한다. 이로써 국내에 실시하면 특권계급이 소멸할 것이요, 소수민족의 침능(侵淩)을 면할 것이다. 또한 정치 · 경제 · 교육의 권리를 균등히 하여 차별이 없게 한다. 동족이나 이족을 막론하고 모두 이와같이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삼균주의의 제 1차 선언으로서 우리들 모두가 이를 발양광대(發揚光大)하도록 힘써야 한다.

7. 임시정부는 이상의 모든 원칙에 근거하여 혁명적 삼균제도를 실시하며 복국과 건국 단계 중 이 불변의 최고 공리, 즉 정치 · 경제 · 교육의 균등을 실현하는 동시에 독립 · 민주 · 균치(均治)의 삼종(三種) 방식을 실시한다.

제2장 복 국

1. 독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확정 행사하고,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건립하고, 임시약법(約法)과 기타 법규를 반포하고, 인민으로 하여금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행하며, 군사 · 외교 · 당무 및 인심이 서로 배합하여 정부 지도하에서 적에 대한 혈전을 계속 실행하는 지속하는 과정을 복국의 제 1기라 한다.

2. 일부 국토를 회복하고 당 · 정 · 군의 기구가 국내로 옮겨 앉고 실질적으로 국제적 지위를 획득하는 조건이 충분히 성숙한 시기를 복국 제2기라 한다.

3. 적에게 병합된 국토와 노예(奴隷)로서 사역당하는 인민과 침점(侵佔)된 정치 · 경제와 말살된 교육 · 문화를 완전히 탈환하고, 평등한 지위와 자유의사로써 각국정부와 조약을 체결하는 시기를 복국의 완성기라 한다.

4. 복국기에서 임시 약헌과 기타 반포한 법규에 의하여 임시의정원의 선거로 조직된 국무위원회로서 복국사무를 집행한다.

5. 복국기의 국가주권은 광복운동자가 대행한다.

6. 삼균제도로 민족의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해외의 민족혁명역량을 집중하여 광복운동의 총동원을 실시하며, 장교와 무장대오를 통일훈련하여 상당한 인원의 광복군을 곳곳마다 편성, 적에 대한 혈전을 강화한다.

7. 일체 수단을 다하되 대중적 반항. 무장투쟁, 국제외교, 선전 등의 독립운동을 확대강화함으로써 왜적의 침탈세력을 박멸한다.

8. 우리 독립운동을 동정하고 원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연락하여 광복운동의 역량을 확대하고, 적 일본에 대하여 항전하는 우방과 긴밀히 연합하여 항일동맹군으로서의 구체적 행동을 취한다.

9. 복국임무가 완성될 개단(喈段)에서는 복국임무 수행에 필요한 인재와 법령 및 기타 계획을 준비한다.

10. 건국시기에 시행할 헌법과 중앙 및 지방의 정부조직법, 중앙의정원 및 지방의정원의 조직과 선거법 및 지방자치제도와 군사 · 외교에 관한 법규는 모두 임시의정원의 기초(起草)와 결의를 거쳐 임시정부에서 반포한다.

제3장 건 국

1. 국내에서 왜적의 모든 통치기구를 완전히 박멸하고, 수도를 정하고, 중앙정부와 중앙의정원의 정식 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며, 선거 · 입법 · 임관 · 군사 · 외교 · 경제 등에 관한 국가 정령(政令)이 자유롭게 시행되고, 삼균제도의 정강 정책이 국내에서 취진되기 시작하는 과정을 건국의 제 1기라 한다.

2. 삼균제도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 · 경제 · 교육의 민주시설이 균형을 얻임으로써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아동과 고등교육의 면비교육이 실현되고, 보통선거제도가 실시되어 전국 각 리(里) · 동(洞) · 촌(村) · 면(面) · 읍(邑) · 도(島) · 군(郡) · 부(府) 및 도(道)의 자치조직이 완비되고 민중단체(직업단체)와 민중조직(소년 · 청년 · 장년 · 부인 · 노인 · 군인 등 모임)이 감균제도와 배합 · 실시되고 , 경향(京鄕 : 서울과 지방) 각지의 극빈계급의 물질 및 정신상의 생활수준이 향상 보장되는 과정을 건국의 제 2기라 한다.

3. 건국에 관한 모든 기초시설 즉 군사 · 교육 · 행정 · 생산 · 교통 · 위생 · 경찰 · 상업(商) · 공업(工) · 농업(農) · 외교 등의 건설기구와 건설성적이 예정계획에 따라 반 이상 성취되는 시기를 건국의 완성기라 한다.

4. 건설시기의 인민은 기본권리는 다음 원칙에 따르되, 따로 법률을 제정하여 시행한다.
(1) 노동권 · 휴식권 · 피구제권 · 면비수학권 · 참정권 ·선거권 ·피선거권 · 파면권 · 입법권 및 사회 각종조직의 가입권을 가진다.
(2) 부녀는 정치 · 경제 · 문화 · 사회생활에 있어서 남자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3) 신체의 자유 · 거주 · 언론 · 저작(著作 : 책을 지어냄) · 출판 · 신앙 · 불신앙 · 집회 · 결사 · 시위운동(示威運動) · 통신비밀 등의 자유를 가진다.
(4) 보통선거는 만 18세 이상의 남녀로써 선거권을 행사하되, 신앙 · 교육 · 거주년수 · 출신사회 · 재산상황 및 과거의 행동을 묻지 않는다. 선거권을 가진 만 23세 이상의 남녀는 피선거권을 가진다. 다만 각개인은 평등 · 비밀 · 직접방식으로 이를 행사한다.
(5) 인민은 준법(遵法) · 납세 · 병역 · 사회목부 · 건설 · 조국보위 및 사회건설의 의무를 가진다.
(6) 적에 부화(咐和 : 내통)한 자 · 독립운동자를 방해한 자 · 건설강령을 반대한 자 · 정신결핍자 · 범죄판결을 받은 자는 모두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다.

5. 건설시기중 헌법 상의 중앙과 지방의 정치기구는 다음 원칙에 의하여 설치하여야 한다.

(1) 중앙정부는 국무회의에 결의에 의하여 국정을 집행하는 전국 최고행정기관이다. 국무회의는 건국 제 1기에 중앙 총선거로 국내선출 의회에서 통과된 헌법에 의거하여 조직된다. 그 정무분담은 내무 · 외무 · 군무 · 법무 · 재무 · 교통 · 실업 · 교육 등 각부로 한다.

(2)지방에는 도(道)에 도정부, 부(府) · 군(郡) · 도(島)에 부 · 군 · 도정부가 있으며, 다시 도(道)에는 도의정원, 부(府) · 군(郡) · 도(島)에는 부 · 군 · 도의정원이 있다.

6. 건국시기 중 헌법상의 경제체계는 국민 각 개인의 균등생활을 확보함에 있다. 그러나 민족 전체의 발전 및 국가의 건립 보위와 연대관계를 가져야 한다. 경제정책은 다음의 기본원칙에 의거하여 추진한다.

(1) 대생산기관의 공구와 수단을 국유로 하고 토지·광산·어업·농림·수리·소택과 수상·육상·공중의 운수사업과 은행·전신·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공·상 기업과 성시 공업구역의 공용적 주요 방산(房産)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 중등기업은 사영(私營)으로 허락한다.

(2) 적의 침점 혹 시설한 관·공·사유 토지와 어업·광산·농림·은행·회사·공장·철도·학교·교회·사찰·병원·공원 등의 방산(房産)과과 기지와 기타 경제·정치·군사·문화·교육·종교·위생에 관한 일체 사유자본과 부적자(附敵者)의 일체 소유 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한다.

(3) 몰수한 재산은 빈공(貧工) 빈농(貧農)과 일체 무산자의 이익을 위한 국영(國營) 혹 공영(公營)의 집단 생산기관에 제공함을 원칙으로 한다.

(4) 토지의 상속(相續) 매매(賣買) 저압(抵押) 전양(典讓) 유증(遺贈) 전조차(轉租借)의 금지와 고리대금업과 사인의 고용농업의 금지를 원칙으로 하고 두레농장·국영공장·생산소비와 무역의 합작기구를 조직 확대하여 농공 대중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 정도와 문화수준을 높인다.

(5) 국제무역·전기·자래수와 대규모의 인쇄·출판·전영·극장 등을 국유 국영으로 한다.

(6) 노공(老工) 유공(幼工) 여공(女工)의 야간 노동과 연령·지대·시간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함

(7) 공인과 농인의 무료 의료를 널리 시행하야 질병 소멸과 건강 보장에 힘쓴다.

(8) 토지는 자력자경인(自力自耕人)에게 분급함을 원칙으로 하되 원래의 고용농·소작농·자작농·소지주농·중지주농 등 농인 지위를 보아 저급(低級)에서부터 우선권을 준다.

7. 건국시기중 헌법 상의 교육 기본원칙은 국민 각 개인의 과학지식을 보편 · 균등화함에 있으며, 교육정책은 다음 원칙에 의하여 준수한다.

(1) 교육종지(宗旨 : 취지)는 삼균제도로써 원칙을 삼고, 민족정기 · 국민도덕 · 생활, 지능 및 자치능력을 발양하여 건전한 국민을 조성함에 있다.

(2) 6세부터 12세까지의 초등 기본교육과 12세 이상의 고등 기본교육의 일체 비용은 국가에서 부담하고 의무적으로 시행한다.

(3)학령초과 및 초등 또는 고등 기본교육을 받지 못한 인민에게는 일률로 면비 보습교육을 실시한다. 또 빈한한 자제로서 의식을 자공(自供)하지 못하는 자는 국가에서 대공(代供)한다.

(4) 지방의 인구 · 교통 · 문화 · 경제 등 상황에 따라 일정한 균형적 비례로 교육기관을 설립하되, 최저한 매 1읍 · 1면에 5개 소학과 2개 중학, 매 1군 · 1부 · 1도(島)에 2개 전문학교, 매1도(道)에 1개 대학을 설치한다.

(5) 교과서의 편집 · 인쇄 · 발행 등은 국영으로 하여 학생에게 무과배급한다.

(6)국민병과 상비병의 기본지식에 관한 교육은 전문적 훈련에 맡기는 한 편, 각 중학, 전문학교에서도 필과목으로 한다.

(7) 공 · 사립학교는 일률로 국가감찰을 받으며 국가에서 규정한 교육정책을 준수하여야 한다. 한교(한국교민)교육에 대하여도 국가교육정책을 추진한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전한 이래, 안으로는 독립운동 진행의 단결, 강화를 촉진하여 임시약헌의 제도 공포, 광복군 총사령부의 설치 등 모든 사업을 추진하고, 밖으로는 독일군의 중립국 침범과 소련 침공에 따른 연합군의 결속 강화, 미국의 대일석유금수(禁輸)를 비롯한 경제압박, 루우스벨트 · 쳐어칠의 「대서양 헌장」 선포 등에 힘업어 임시정부는 조국 광복의 명제를 「혁명적 대의」로 부터 「혁명적 현실」문제로 설정하여 이에 이르는 이정표를 세우고 광복 후의 건설목표를 명시하였으니 이것이 곧 「건국강령」이다.

건국강령은 2장 24개조로 구성된다.

제 1장 총강에서는 우리 민족 국가의 역사적 배경과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서술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구현하는 삼균제도로써 건국의 기본이념을 삼을 것을 규정한 바, 이는 선인의 유범(遺範 : 고인이 남긴 모범)이며 천하의 공리임을 강조하였다.

제 2장 복국은 상실한 주권을 회복하기까지의 독립운동의 기준을 명시한 것인바, 이 기간 중에는 광복운동자 전체가 주권을 대행하며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임시약헌에 근거하여 복국업무를 집행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이 기간 중 전민족 역량을 동원하고 국제적 협력을 얻어 적을 분쇄하고 건국준비를 진행할 것을 아울러 밝혔다.

제 3장 건국은 적의 모든 통치기구가 박멸되고 정부가 수립되어 보통선거를 실시하고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를 이룩하고 고등교육까지의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나아가서는 삼균주의의 풍성한 과실을 거두기까지의 단계적 건설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이 중대한 문헌이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거치지 않고 국무위원회의 결의만으로 공포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일부 의원의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어쨋든 임시정부가 태평양전쟁 전에 이미 이와같은 원대한 복국, 건국계획을 설계하였다는 것은 그 내용의 민주성, 진보성과 더불어 높이 평가 받을 만한 일이다.

5. 대한민국 임시약헌(1940)

대한민국 임시약헌(1940. 10. 9.)

제1장 총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되, 광복완성전에는 광복운동자 전체에게 있다.
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일체 평등하며, 또한 법률의 범위내에서 자유 및 권리를 가진다.
제3조 대한민국의 국민은 조국광복, 사회개혁, 헌법 및 법령의 준수, 병역의 복무, 납세의 일체 의무를 진다.

제2장 임시의정원

제4조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한다. 다만, 국내 각선거구에서 선거실시가 불능할 때에는 임시정부의 소재지에 교거하고, 각 당해 선거구에 원적을 가진 광복운동자가 각당해구선거인의 선거권을 대행한다.
제5조 임시의정원 의원의 수는 57인으로 하되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 각도 및 중국령의 교민은 각각 6인을 선출하고 강원, 황해각도와 미국령의 교민은 각각 3인을 선출한다.
제6조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만 18세에 달하고 공민권이 있는 자는 선거권을 가지며 또한 23세에 달하고 선거권이 있는 자는 피선거권을 가진다.
제7조 임시의정원 의원의 규정에 관하여는 선거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국무위원회의의 의결로써 이를 규정한다.
제8조 임시의정원은 매년 10월중순에 임시정부의 소재지에서 정기회의를 개최하며, 그 기간은 자체에서 정한다. 다만 원의 결의 및 정부의 요구 또는 총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임시의회를 소집한다.
제9조 임시의정원은 총의원 3분의 1 이상의 출석과 출석원 과반수의 찬성으로써 의안을 결정한다.
제10조 임시의정원은 의원 또는 정부가 제출한 모든 법률안 및 국가의 예산, 결산을 의결하고, 국무위원회 주석 및 국무위원을 선거하며, 또한 주외사절의 임면 및 조약의 체결과 선전, 강화를 동의함에는 총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다만, 국무위원회 주석 및 국무위원선거에 있어서는 2차의 투표에도 결정이 나지 않을 때에는 다수로써 이를 결정한다.
제11조 임시의정원이 의결한 법률 및 기타 안건은 정부가 이를 공포하고 또한 이를 시행한다.
제12조 임시의정원은 의장, 부의장 각 1인을 선거하며, 또한 제반 내규를 제정한다. 의장, 부의장의 선거에는 총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원 3분의 2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2차의 투표에도 결정이 나지 않을 때에는 다수로써 이를 결정한다.
제13조 임시의정원은 의원의 당선증서를 심사하며, 또한 의원의 자격 및 선거의 의의에 대하여 최고판결권을 가진다.
제14조 임시의정원은 국무위원회 주석 및 국무위원 또는 주외사절이 독직 또는 위법 그리고 내란외환등의 범죄행위가 있다고 총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원 3분의 2의 가결로써 심판하여 면직하게 할 수 있다.
제15조 임시의정원의 의사는 공개한다. 다만 의장 또는 의원 5인 이상의 제의나 정부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의결로써 비밀로 할 수 있다.
제16조 임시의정원 의장은 의원을 대표하여 회의를 소집하며, 원내의 의사를 정리하며, 원의 행정을 변리하며, 원내 경찰권을 집행하며, 원의 회계를 처리하며, 또한 5일 이내의 의원의 청가 및 방청을 허가한다.
제17조 의원이 의안을 제출할 때에는 법률 및 심사안은 5인 이상 기타 안건은 3인 이상의 연서가 있어야 한다.
제18조 의원이 만약 이유없이 개회후 7일까지 당선증서를 제출하지 아니하거나 연속 2주일을 결석할 때에는 그 직무는 자연히 해임되며 의원사직의 청허여부는 원의로서 한다.
제19조 의원은 회기중에 원의 허가없이는 자유의 방해를 받지 아니하며 원내의 발언 및 표결에 관하여 원외에서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제20조 의원은 3인이상의 연서로 정부 또는 지정한 국무위원에 대하여 질문권을 가지며, 국무위원은 5일이내에 구두, 서면으로 답변하여야 하며 답변을 하지 아니할 때에는 그 이유를 명시하여야 한다. 다만, 질문의원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출석하여 답변하여야 한다.
제21조 의원의 징계에는 발언 또는 출석의 정지 및 제명이 있으며, 총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원 3분의 2의 결의로써 처벌한다.
제22조 의원이 위법을 하였을 때에는 5인 이상의 의원의 제의로 심사하여 전조의 표결수에 의하여 면직한다.

제3장 임시정부

제23조 임시정부는 국무위원회 주석 및 국무위원으로 조직하며, 국무위원의 수는 6인이상 10인이내로 한다.
제24조 국무위원회는 국무를 의결하고 집행하며, 또한 행정각부를 두어 각 당해 행정사무를 처리하며 그리고 각부의 조직조례를 제정하여 이를 시행한다.
제25조 국무위원회 및 행정각부는 헌법 및 법률의 범위내에서 필요한 명령 및 결정한 규정을 발포한다.
제26조 국무위원회의 직권은 다음과 같다.
1. 광복운동 방략 및 건국방안을 의결한다.
2. 법률 및 명령에 관한 사항을 의결한다.
3. 예산, 결산, 예산초과 및 예산외의 지출안을 의결한다.
4. 선전, 강화 및 조약체결에 관한 모든 안을 의결한다.
5. 행정각부에 관한 사항을 의결한다.
6. 국무위원의 사직을 처리한다.
7. 고급관리 및 주외사절과 정부대표를 임면한다.
8. 외국사절을 접수한다.
9. 임시의정원에 보고 및 제안을 작성 제출한다.
10. 국무위원회의 회의규정 및 행정각부의 부서설치와 직원을 결정한다.

제27조 국무위원회의 주석의 직권은 다음과 같다.
1. 국무위원회를 소집한다.
2. 국무위원회의 회의시에 주석이 된다.
3. 임시정부를 대표한다.
4. 국군을 통감한다.
5. 국무위원의 부서로 법률을 공포하고 명령을 발한다.
6.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행정각부의 명령을 정지한다.
7. 국무위원회의 결의로 긴급명령을 발한다.
8. 신임장을 접수한다.
9. 정치범을 특사한다.
10. 국무위원회의 회의중 가부동수일 때에는 이를 표결한다. 다만 긴급명령을 발할 때에는 차기회의의 추인을 받아야 하며, 부결되었을 때에는 효력을 상실하였음을 즉시 공포하여야 한다.

제28조 국무위원회 주석 및 국무위원의 임기는 3년으로 하되, 재선될 수 있다. 국무위원회 주석이 유고할 때에는 국무위원회에서 대리 1인을 호선한다.
제29조 국무위원이 연속 2개월 광직할 때에는 자연히 해적된다.
제30조 국무위원회 주석 및 국무위원과 정부위원은 임시의정원 및 각위원회에 출석하여 발언할 수 있다.
제31조 국무위원회는 총위원 과반수의 찬동으로 의결한다.
제32조 국무위원회는 비서장 1인을 두어 국무위원회의 사무 및 회의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게 한다.
제33조 각부는 내무, 외무, 군무, 법무, 재무를 두되, 다만 시의에 따라 각부를 증감할 수 있다.
제34조 국무위원이 계속해서 2개월간 직무를 떠날 경우에는 자연 해직된 것으로 한다.
제35조 행정각부의 직원은 각당해부장의 추천으로 국무위원회에서 임면한다.
제36조 지방행정조직은 자치행정의 원칙에 따라서 정하며, 자치단체의 조직 및 권한은 법률로 정한다.
제37조 군법회의에 관한 법률 및 조직과 그 직무권한은 법률로 규정한다.

제4장 회계

제38조 조세 및 세율은 법률로 규정한다.
제39조 국가세입 세출의 예산, 결산 및 국채와 기타 국고의 부담이 되는 경우에는 임시의정원의 의결을 얻어야 한다. 예산의 초과 또는 예산외의 지출은 차기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제40조 국가의 회계는 회계검사원에서 검사한다.

제5장 보칙

제41조 본 약헌은 임시의정원에서 총의원 3분의 1 이상이 또는 정부가 제안하여 총의원 4분의 3이상의 출석과 출석원 3분의 2의 찬동으로 개정한다.
제42조 본약헌은 대한민국 9년 4월 11일에 공포한 약헌에 의하여 대한민국 22년 10월 9일부터 개정 시행한다.

부칙 <임시정부법령 제5호, 1940.10.9.>

본 약헌은 대한민국 9년 4월 11일에 공포한 약헌에 의하여 대한민국 22년 10월 9일부터 개정 시행한다.

1940년은 임시정부의 일대전환기였다. 비록 그 해 9월 임시정부는 서울에서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중국 쓰촨성 충칭으로 이전하지 않으면 안된 곤경에 처했으나, 중 · 영 · 미를 비롯한 연합국의 대일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항전체제를 재정비하고 승리의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그 해 9월 임시정부는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제 32회 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약헌을 개정 통과 시켰다.

대한민국 성립이래 임시헌법 또는 임시약헌의 가장 큰 특색은 임시의정원 중심제라는 데에 있었다. 특히 제 3차 헌법인 1927년의 임시약헌은 스위스의 위원제정부(委員制政府)와 같이 임시정부를 약화 내지 무력화 시키고 주석은 국무위원회에서 호선(互選: 서로 선출)하여 국회를 사회(司會 : 모임을 진행)하되 그 이상의 어떤 강력한 권한도 가지지 못하게 하였다. 이른 체제 하에서는 주석이 전시내각의 수반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 설립된 광복군의 지도권도 장악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임시의정원은 전시 지도체계의 강화에 주안점을 두고 약헌개정작업을 추진한 결과, 임시정부 주석을 국무위원의 와선으로부터 임시의정원의 선거로 바꾸는 동시에 그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국군총람권(國軍總籃權) · 명령권 · 법률공포권 · 행정각 부처의 명령정지권 등을 부여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명실상부한 정부대표자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주석 김구
국무위원 이시영
국무위원 군무부장 조성환
국무위원 내무부장 조완구
국무위원 외무부장 조소앙
국무위원 박찬익
국무위원 송병조
국무위원 비서장 차리석

6.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

대한민국 임시헌장
1944. 4. 22.

우리 민족은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개척한 강토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국가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문명과 진보에 위대한 공헌을 하여왔다. 우리 국가가 강도 일본에게 패망된 뒤에 전민족은 오매에도 국가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무수한 선열들은 피와 눈물로써 민족자유의 회복에 노력하여 3 ㆍ 1 대혁명에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에 순응하여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일체 제도에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 아울러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이에 본원은 25년의 경험을 적하여 제36회 의회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범 7장 공 62조로 개수하였다.

제1장 총 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
제2조 대한민국의 강토는 대한의 고유한 판도로 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원칙상 한국민족으로 함
제4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전체에 있음. 국가가 광복되기 전에는 주권이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음

제2장 인민의 권리 의무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좌렬 각항의 자유와 권리를 향유함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파업급 신앙의 자유
2. 거주, 여행급 통신, 비밀의 자유
3. 법률에 의하여 취학, 취직급 부양을 요구하는 권리
4. 선거급 피선거의 권리
5. 공소, 사소급 청원을 제출하는 권리
6. 법률에 의치 않으면 신체의 수색, 체포, 감금, 심문 혹 처벌을 받지 않는 권리
7. 법률에 의치 않으면 가댁의 침입, 수색, 출입제한 혹 봉폐를 받지 않는 권리
8. 법률에 의치 않으면 패산의 징발, 몰수 혹 추세를 받지 않는 권리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좌렬 각항의 의무가 있음
1. 조국을 광복하고 민족을 부흥하고 민주정치를 보위하는 의무
2. 헌장과 법령을 준수하는 의무
3. 병역과 공역에 복무하는 의무
4. 국세를 납입하는 의무

제7조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 혹 박탈하는 법률은 국가의 안전을 보위하거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거나 혹은 공공리익을 보장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면 제정하지 못함
제8조 광복운동자는 조국광복을 유일한 직업으로 인하고 간단없이 노력하거나 우는 간접이라도 광복사업에 정력 혹 물력의 실천공헌이 있는 자로 함. 단 광복운동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있을 시에는 광복운동자의 자격을 상실함

제3장 임시의정원

제9조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인민이 직접 선거한 의원으로 조직함
제10조 임시의정원 의원은 경기 ㆍ 충청 ㆍ 전라 ㆍ 경상 ㆍ 함경 ㆍ 평안 각도에서 각 6인, 강원 ㆍ 황해 각도에서 각 3인, 중령급 아령교민에서 각 6인, 미령교민에서 3인을 선거함. 내지 각 선거구에서 선거할 수 없을 때에는 각 해선거구에 원적을 두고 임시정부 소재지에 교거하는 광복운동자가 각 해구선거인의 선거권을 대행할 수 있음
제11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연령 18세되고 완전한 공권이 있는 자는 선거권이 있고, 년세 만 25세되고 선거권이 있는 자는 피선거권이 있음. 국가가 광복되기 전에는 제8조 원항에 해당한 자는 선거권이 있고 제8조 원항 상일단에 해당한 만 3년 이상의 역사가 있는 자는 피선거권이 있음
제12조 의 원의 임기는 3개년으로 하되 연선될 수 있음. 의원의 개선은 원의원의 임기만료 후 60일 이내에 행함을 요함
제13조 임시의정원 의원선거에 관한 규정은 선거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국무위원회의 의결로써 정함
제14조 의 원이 무고히 당선증서를 개원 후 3일까지 제출치 아니하거나 무고히 연속 2주일까지 결석할 때에는 그 직무는 자연 해임됨
제15조 의 원은 회기중에 원의 허가없이는 그 자유의 방해를 받지 아니하며 원내의 언론과 표결에 관하여는 원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함
제16조 의 원은 3인 이상의 연서로 정부나 지정한 국무위원에게 질문하는 권리가 있고, 국무위원은 5일 이내에 말이나 글로 답변치 아니할 때에는 그 이유를 명시하며 질문한 의원이 요구한 때에는 원에 출석하여 답변함
제17조 임시의정원의 직권은 아래와 같음
1. 의원당선증서의 심사와 의원자격급 선거의 의의에 대한 심판
2. 의원자격에 대한 처리
3. 의원이나 정부에서 제출한 일체 법안의 의결
4. 조세급 세율과 국고와 기타 국고의 부담이 될만한 사항의 의결
5. 국가의 예산 결산급 예산초과나 예산외 지출의 의결
6. 국무위원회 주석급 부주석과 국무위원의 선거
7. 조약체결과 선전강화의 동의

제18조 임시의정원은 국무위원회 주석 부주석급 국무위원이 실직위법 또는 내란 외환 등 범죄행위가 있거나 혹은 신임할 수 없다고 인정할 때에는 탄핵안 혹은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탄핵안이 통과되면 그를 면직하고 불신임안이 통과되면 그가 자행사직함
제19조 임시의정원은 의장 부의장 각 1인을 호선하며 그 제반 내규를 정함
제20조 임시의정원 의장은 원을 대표하며 회의를 소집하며 원의 의사를 정리하며 원의 행정을 판리하며 원내의 경찰권을 집행하며 원의 회계를 처리하며 5일 이내의 의원청유와 방청자를 허함
부의장은 의장을 보좌하며 의장이 유고할 때에는 그를 대리함
제21조 임시의정원은 매년 4월 11일에 임시정부 소재지에서 자행소집함
임시의정원의 회기는 3주일로 정하고 필요로 인할 때에는 연기함을 득하되 전회기의 3분지1을 초과함을 부득함
의원의 결의나 정부의 요구나 총재적 의원 3분1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임시의회를 소집함
제22조 임시의정원은 총재적 의원 반수 이상의 출석으로 개회함
제23조 임시의정원은 출석의원 반수 이상의 찬동으로 의안을 결정함
제24조 의 원이 의안을 제출할 때에는 법률안은 5인 이상, 탄핵 혹 불신임안과 의장의 면직안은 총재적 의원 3분지 1 이상 기타안은 3인 이상의 연서로 함. 1차 부결된 의안은 동일 회기내에 다시 제출하지 못함
제25조 임시의정원의 의결한 법률과 기타 안건은 임시정부가 분포 또는 시행함
법률은 정부에 송달한 후 10일 이내에 공포함
제26조 의 원이 결원될 때에는 의장이 정부로 통지하여 보선케 함
제27조 의 원의 징계는 발언 혹 출석의 정지와 제명으로 함
제28조 의 원이 위법할 때에는 제22조 제2항과 제24조 제1항에 의하여 면직함

제4장 임시정부

제29조 임시정부는 국무위원회 주석과 국무위원으로 조직한 국무위원회로써 국를 총판함
국무위원은 8인 이상 14인 이내로 함

제30조 국무위원회의 직권은 아래와 같음
1. 복국과 건국의 방책을 의결함
2. 법률 명령급 제안에 관한 사항을 의결함
3. 예산 결산 예산초과급 예산외 지출을 의결함
4. 선전 강화급 조약체결에 관한 사항을 의결함
5. 행정 각부에 관한 중요사항을 의결함
6. 국무위원의 사직을 처리함
7. 중앙 각기관의 주무 책임자급 고급 문무 직원과 주외 사절급 정부대표를 임면함
8. 외국사절의 접수여부를 의결함
9. 군무에 관한 사항을 의결함
10. 대사, 특사, 감형급 복권을 의결함
11. 임시의정원에 제출할 보고와 제안을 작성함
12. 국무위원회의 회의규정을 정하며 소관 각기관의 설폐를 의결함

제31조 국무위원회의 의결은 총위원 반수 이상의 찬동으로 함

제32조 국무위원회 주석의 직권은 아래와 같음
1. 임시정부를 대표함
2. 국서를 접수함
3. 국군을 통감함
4. 국무위원회를 소집함
5. 국무위원회의의 주석이 됨
6. 국무위원회의의 가부 동수될 때에는 표결함
7. 국무위원의 부서와 법률을 공포하며 명령을 발함
8. 행정 통일 혹 공익에 방해되거나 위법 혹 월권으로 인할 때에는 행정 각부서의 명령을 정지하고 국무위원회에 취결함
9. 국무위원회의 의결로 긴급명령을 발함단 긴급명령을 발할 때에는 차기 의회의 추인을 요하되 추인되지 못할 때에는 그 뒤로부터 효력이 상실됨을 즉시 공포함

제33조 부주석은 주석을 보좌하며 국무위원회에 열석하고 주석이 유고할 시에 그 직권을 대행함
제34조 국무위원회 주석급 부주석과 국무위원의 자격은 제8조 원항 상일단 규정에 해당한 10년 이상의 역사가 있고 연령 만 40세 이상된 자로 함
제35조 국무위원회 주석급 부주석과 국무위원의 임기는 3개년으로 정하되 연선될 수 있음
제36조 국무위원회 주석 부주석급 국무위원과 정부위원은 임시의정원과 그 각 위원회에 출석하여 발언할 수 있음
제37조 국무위원회는 비서처를 두어 국무위원회의 사무와 회의에 관한 사항을 장리함
제38조 국무위원회는 행정 각부서와 통수 심판 검사 등 각기관을 두어 각해 주관사무를 판리하고 임시의정원에 부책함. 우항 각기관의 조직조례는 국무위원회에서 제정 시행하되 차기 의회의 통과를 요함
제39조 행정 각부서는 내무, 외무, 군무, 재무, 문화, 선전 등 각부와 기타 각 위원회를 두되 시의에 의하여 그 수를 증감할 수 있음
제40조 행정 각부서 사무의 연락과 통제를 위하여 각 주무 책임자 연석회의를 열되 국무위원회 주석이 주지함
제41조 국무위원회와 행정 각부서는 헌장과 법률 범위내에서 필요한 명령을 발함
제42조 국무위원회 주석급 중앙 각기관의 주무 책임자는 법률의 규정과 국무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각기 주관사무를 판리함
제43조 중앙기관의 주무 책임자는 주석의 제천으로, 중앙기관의 소속직원은 각해 기관 주무 책임자의 천보로써 국무위원회에서 임면함
제44조 지방행정 조직은 자치행정의 원칙에 의하여 정하고 자치단체의 조직과 권한은 국무위원회에서 제정 시행하고 차기 의회의 통과를 요함

제5장 심 판 원

제45조 대한민국의 사법권은 중앙심판원 지방심판소급 기타 특종심판위원회 등 기관에서 집행함
제46조 중앙심판원은 심판위원장 1인급 심판위원 2인 내지 5인과 및 보조직원 약간인으로 조직함
제47조 각급 심판기관의 조직은 법률로 정함
제48조 각급 심판기관은 법률에 의하여 민사, 형사의 심판과 혁명자 징계처분에 관한 사항을 장리함

민법, 형법, 혁명기률급 혁명자 징계조례는 법률로 정함

제49조 국사심판, 행정심판, 군사심판 등 특별기관의 그 조직급 권한은 법률로 정함
제50조 대사, 특사, 감형, 복권은 법률에 의하여 중앙심판위원장의 제출을 경하여 국무위원회에서 행함
제51조 심판위원장급 심판위원은 독립하여 심판을 행하고 임가기관 혹 개인의 간섭을 받지 아니함
제52조 각급 심판기관의 심판은 공개하되 안녕질서와 선량풍속에 방해가 있다고 인할 때에는 비밀히 함
제53조 중앙심판위원장과 심판위원은 국무위원회에서 선임하되 임기는 3개년으로 함
제54조 각급 심판기관의 소속직원은 중앙심판위원장의 제천으로 국무위원회에서 임명함
제55조 심판위원장급 심판위원은 형의 선고나 혁명자 징계조례상의 중대한 처분에 의치 아니하면 임기내에 면직하지 못함
제56조 본장 각조의 규정을 실시할 가능이 있기 전까지는 심판안건의 발생을 따라 국무위원회에서 임시로 심판위원 약간인을 선출하여 판리함

제6장 회 계

제57조 조세와 세율은 법률로 정함
제58조 국가의 예산 결산급 회계는 검사 확정한 회계검사원의 보고와 같이 의정원에 제출하여 통과를 요함
제59조 회계검사원에서는 국가의 일체 회계를 수시로 검사함
제60조 회계년도는 4월 1일부터 익년 3월말까지로 정함

제7장 보 칙

제61조 본헌장은 임시의정원에서 총재적 의원 3분지 1 이상이나 정부의 제안으로 총재적 의원 4분지 3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지 2의 찬동으로 개정함을 득함
제62조 본헌장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하고 대한민국 22년 10월 9일부터 시행한 임시약헌은 폐지함

부칙 부 칙 <임시정부법령 제6호, 1944. 4. 22.>
본 헌장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하고 대한민국 22년 10월 9일부터 시행한 임시약헌은 폐지함.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최초와 임시헌장 10조를 공포한 뒤를 이어
1919년 9월 11일 임시헌법
1925년 7월 7일 임시헌법
1927년 4월 11일 임시약헌
1940년 10월 9일 임시약헌
1944년 4월 22일 임시헌장

을 거쳐 전후 5회의 개정 끝에 확정된 것이다.

이 임시헌장은 임시정부의 마지막 헌법이며 또한 가장 완벽하고 민주적인 헌법이라 할 수 있다. 1940년을 기점으로 하여 국내외 정세가 급진전함에 따라 임시의정원에는 많은 재야인사 특히 민족혁명당계 인사들이 참가하여 전시 거국체제(擧國體制 : 국가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일괄적인 지도 아래 전국의 자원을 동원하고 국민은 이에 협조하는 체제)를 이룩하고 혁명역량의 단결을 과시했다. 개정 임시헌장은 그와 같은 민족적 대단결의 산물이며 복국을 눈 앞에 바라보는 굳센 혁명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헌장 개정작업은 1942년 11월 이래 조소앙, 조완구, 유자명, 최석순, 박건웅, 김상덕, 차리석, 안훈, 신영삼 등 9명의 약헌개정 기초위원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다시 유림, 박건웅, 조시원 등 18명의 위원에 의해 재수정되어 1944년 4월 제 36차회 의정원 의회에서 결정되었다.

개정된 임시헌장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우리 민족과 유구한 전통과, 주권침탈 이후 줄기차게 벌어진 혁명투쟁과, 삼일대혁명에 이은 대한민국의 건립을 서술한 「전문」을 앞세우고, 인민의 권리와 의무를 한 장으로 하여 따로 내세우고, 또 국무위원의 증원, 부주석제의 신설, 선전 · 문화부의 증설 등 행정부를 크게 강화함 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개정으로써도 의정원 중심 체제를 근본적으로 지양하지는 않았다. 의정원은 입법권 및 재정권을 장악하는 외에 주석, 부주석 및 국무위원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을 계속 보유하고 있다.

임시의정원은 임시헌장 통과에 이어 임시정부 주석에 김구, 부주석에 김규식을 선출했다. 국무위원으로는 이시영, 조성환, 황학수, 조완구, 차리석, 장건상, 박찬익, 조소앙, 김붕준, 성주식, 유림, 김원봉, 김성숙, 안훈 등 14명을 선출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김원봉을 위시한 5명의 야당계 인사가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된 사실인데, 이는 헌장개정의 기본취지에 입각한 것으로 풀이된다.

7. 활동

파일:external/8c6738073efa7e28edeceb71a26e8f0f5cb850786439624b9adcf294f307f894.jpg 파일:FB_IMG_1474736538575.jpg
임천에 위치했던 광복군 간부 훈련소 한광반 제 1기 사진: 1944년 9월
장준하, 김준엽 등이 속해있다.
1942년, 한국 광복군

7.1. 징모활동(초모공작)

광복군은 인원과 부대편제를 처음부터 갖추어 창설된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1940년 9월 30여 명의 인원으로 광복군 총사령부만을 성립하여 창설하였고, 국무위원회의를 통하여 '창립 1개년 후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것을 당면전략으로 하고 있었으나, 인원이 적은 관계로 우선 사단 대신 지대(支隊)를 편성하고, 각 지대 휘하에 구대와 분대를 편성하는 방식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25] 우선 가능한 인원으로 창군을 하고 이후 병력을 확보하여 부대 규모를 확대 강화해 간다는 기본 전략을 수립했던 것이다.

초모활동에 대하여 임정이 광복군을 창설에 대한 구체적 계획인 한국광복군편제계획대강에서는 징모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동북방면으로부터 인관하여 화북 각지에 분포되어있는 한국독립군의 옛 군대 중에서 초모한다.
2. 윤함구(일본점령지역) 내에 흩어져 사는 한인장병을 초모한다.
3. 한국국내와 동북(만주/연해주)지방 각지에 있는 장병들에게 비밀리에 군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징모하게 한다.
4. 적군내에 있는 한인무장대오에 대해 방법을 써서 무기를 가지고 귀순하게 한다.
5. 포로로 잡힌 한인을 수편(거두어서 편성)한다.

이와같은 초모계획이 수립될 수 있었던 배경은 중국대륙으로 이주해온 한국인들을 기반으로 한 적이다. 중일전쟁 이후, 중국대륙에는 한인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주계기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일본군 군속 및 통역, 일본의 관공서 회사의 직원, 일본군 상대로 한 사업가들이었다.

당시 일제는 중국을 침략한 후, 그 점령지역에서 한인들을 이주시키는 이민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이에 화중일대에 이미 20여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군 안에는 한인청년들도 많았다. 한인청년들이 일본군으로 징집된 것은 지원병제도로 1938년 2월 칙령 제 95호로 공포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근거로 지원병제도는 4월부터 모집하여 6개월간 훈련 후 전선으로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8월 해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 실시하고 반도인학도특별지원병이라는 명목하에 전문학교와 대학교 재학생 졸업생들을 소집하여 1944년 2월 전선으로 내보냈고 1944년 9월부터는 소위 징병이라고 하여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되었다.

징모분처의 설치는 지대가 겸임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각 지대의 지대장을 징모분처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지대의 창설요원들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병력을 모집하여 지대의 규모를 확대 강화해 나가도록 했다.[26]

초모활동 전개되는 과정은 3단계이다.
1단계 : 적점령지역에 잠입하여 공작지점을 마련하는 것
2단계 : 공작거점을 기반으로 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들을 포섭
3단계 : 포섭된 인원을 광복군 지역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

김천성 동지의 초모공작
1940년 5월, 청년전지공작대 제 1분대의 김동수(金東洙) 분대장, 이재현, 김천성, 박영진, 김용주, 이월봉[27], 이삼녀 등은 중국군 제 34집단군 타이항산 유격대(太行山 遊擊隊)에 배속되어 본격적으로 적지공작(敵地工作)에 나섰다. 이들은 황허(黃河)를 건너 타이항산 주변에 공작 거점을 설치하였다. 이 중 이재현, 김천성 조는 일본군 제 36사단 주둔지인 산시(山西) 루안(潞安)에 박영진(朴永晋), 김용주(金容珠) 조는 신샹(新鄕)에 침투하였다.

김천성은 루안 성내에 찹쌀떡 가게를 차려 놓고 여기서 일본군 내의 한국 사병 및 한국 거류민단[28] 유지들과 접촉하였다. 먼저 일본군 군납업을 하던 김형철(金亨澈)을 포섭하고 다시 그를 통하여 일본군 제 36사단 통역관 이도순(李道淳)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패기 넘치고 통쾌한 사나이였다. 김천성의 신분과 사람됨을 간파하고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자신이 속해있는 일본군 제 36사단의 각종 군사기밀을 제공하고 또 사단 산하 각 부대의 한국인 통역을 포섭하여 그들을 수차례에 걸쳐 시안(西安)으로 후송하였다. 1941년 6월, 이도순(李道淳)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긴 칼을 찬 채 일본군 점령 지구를 벗어났다.

이에 앞서, 1940년 9월 충칭에서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립되고 그 후 총사령부는 전략 요충인 시안으로 이전하였다. 전투부대로서 제 1, 2, 3지대를 창설한 외에,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흡수하여 광복군 제 5지대로 편성하였다. 제 3전구에는 제 3징모분처를 두고 이어서 조선의용대를 흡수 통합하였다. 이에 따라 광복군의 편제를 대폭 수정하여 새로 편입된 조선의용대를 제 1지대로 하고 종전의 제 1, 2, 5지대를 제 2지대로 통합하였다. 제 3지대는 그대로 존속시켰다.

한편, 루안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여 온 김천성은 점차 그 공작이 노출되기 시작하였으므로, 부득이 조장 이재현과 의논하여 공작 거점을 쟈오쭈어(焦作)로 옮겼다. 여기에서는 루안만큼 큰 수확을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당지 사정에 익숙한 김용주, 이지홍, 이욱성 등의 도움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자오쭈어에서 포섭된 동지들 역시 시안으로 후송되어 광복군으로서의 정신적 군사적 훈련을 받았다.

이들 중 특히 적구 사정에 정통한 백정현은 김천성과 같이 전방공작을 하라는 지시를 받고 다시 산시(山西)로 떠났다. 둘은 서로 도와가며 장덕기(張德祺), 김용(金湧), 유덕량을 포섭 시안으로 후송하였다. 이어어 이해순(李海淳), 황삼룡(黃三龍), 이우성(李宇成) 등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1940년 이래 이재현, 김천성 조를 중심으로 포섭된 동지는 김유신(金有信), 최철(崔鐵), 이원범(李元範), 정일명, 박영섭(朴永燮), 박영만(朴英晩) 등 50여명에 달하였다.

얼핏 생각하면 50여명 인원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젊은이들이 금싸라기처럼 귀하던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들의 입대가 백만대군을 얻은 것처럼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1943년 제 2지대의 산시공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서히 그들에게 손짓하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희생의 신"이었다. 1943년 8월 이래 김성률(金聲律), 이한기, 문학준(文學俊)은 중국군 제 27 집단군 파견 공작 중, 김성률은 링촨(陵川)을 침범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였으며, 이한기, 문학준은 린센(林縣)전투에서 우세한 적에게 포위되어 적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전사하였다.

1943년 9월, 김유신, 김운백, 정상섭은 타이항산에서 활동 중 적의 기습을 받고 반격에 나섰으나 불행히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같은 시기에 산시 까오핑(高平) 전투에 참가한 안일용은 전투 중에 입은 상처가 도져 순사하였다.

1944년 3월 지난(濟南)일대에서 지하 공작을 벌여 온 백정현, 이해순은 적 헌병대의 감시를 눈치채고 텐진(天津)으로 이동하였으나 끝내 적 헌병대에 체포되어 타이위안(太原)헌병대에 압송되었다. 이 무렵, 한휘(韓輝)도 스좌장(石家莊)에서 적군 내 한적사병의 초모공작 중 적 헌병에 탐지 검거되어 재판없이 스쟈장 헌병대에서 총살당하였다.

이 무렵 타이위안 지구에서 유격활동을 하면서 애국청년의 규합에 전력을 다하던 김천성은 스쟈좡에서 이서룡, 정기주, 차영철, 권혁상, 정태희 등과 새로운 공작방향을 논의하였는데, 우군의 전우로 믿었던 왕모의 밀고로 적 헌병대에 포위되어 한 그물에 몽땅 잡히게 되었다. 용케도 김천성은 그 포위망에서 솟구쳐 나와 간신히 화를 면하였다. 다른 동지들은 타이위안 헌병대로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고 그들은 소위 순회재판에서 이서룡 무기징역, 차영철 15년, 권혁상 10년, 정태희 5년, 정기주 2년의 유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들은 그립던 고국으로 개선용사가 아닌 죄수인의 몸으로 압송되어 공주형무소에 복역 중 해방과 동시에 자유를 찾았다.

일시 적의 체포망으로부터 탈출한 김천성에게 사신(死神)은 짓궂게 쫒아 다녔다. 그러나 그는 생명을 거는 모험없이는 공작성과는 오르지 않는다는 신념 하에, 항상 칼날과 같은 생사의 경계를 밟고 다니며 결사적 활동을 감행하였다.

1944년 그는 자기가 포섭한 동지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옮기기 위하여 이호길, 이동학, 김두환, 박수덕, 이지성, 신덕영, 최복련 등을 인솔 시안 지대본부로 귀대하였다. 휴식을 취하라는 지대장과 동지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그는 다시 서북으로부터 휘몰아치는 몽고의 사진(砂塵:모래먼지)을 받으며 산시성 타이꾸(太谷)로 향하였다. 출발에 앞서 그를 포함한 적구 파견 공작원들의 엄숙한 선서식이 펄럭이는 태극기 아래 거행되었다.

이것이 김천성과 광복군 제 2지대 동지들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타이꾸에 도착한 김천성은 백정현, 전일묵, 김찬원, 정윤희와 연락하여 대단한 적군 침투 계획을 세우고 자금 조달을 위하여 따로 이길룡, 송병희, 정윤희, 정영순, 최송림과 빈번히 접촉하였다. 그러나 타이꾸 주둔 적 헌병대 정보원의 밀고로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기 직전에 관련자 전원이 적 헌병대에게 체포되었다.

타이위안 헌병대로 압송되는 도중, 이미 죽음을 각오한 김천성은 함께 묶여가던 정영순에게 "정동지, 광명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소. 동지들은 조국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싸워 주시오. 내가 죽으면 유골은 조국땅 의주군 송정면에 묻어주시오."라고 유언하였다.

김천성은 타이위안 헌병대의 조사를 받은 후, 일본 제 3001부대 임시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타이위안 헌병대 광장에서 그에 대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백정현, 전일묵, 김찬원도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총살당하였다.

1944년 4월에 텐진 헌병대에 체포된 이해순, 정윤희는 이보다 조금 앞선 1945년 4월에 적 타이위안 헌병대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7.2. 선전/방송 활동

  • 제 3전구
김문호를 위시한 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조명(曹明)·조동걸(趙東傑) 등의 대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한국독립당’ ‘제3 전구 정치부’ 등의 명의로된 반전 삐라, 염전(厭戰) 사상 고취 전단, 일군 귀순 통행증 등을 화물차로 싣고 야전 방송기 등을 휴대하고 진화(金華)지구로 출동하여 선전물의 살포, 일선 방송을 하며, 한편으로는 선전물을 미군 비행대에 공급하여 적군 점령 지역에 공중 살포하게도 하였다.

이일범
1945년 3월 이후 중화민국 제 3전구 정치부 소속, 대일(對日) 광파(廣播)선전대에서 대일선전공작을 담당하고 있다가 조국광복을 맞았다. 국민혁명군 소교(少校) 대적 전단 작성, 방송 실시, 포로 심문 업무를 수행하여 일본군에게 염전 / 반전 사상을 고취했다.

박승유
1944년 11월 25일 신의철, 김권, 김영관과 함께 탈출하여 광복군 복무 중 음악 소양을 활용하여 정훈과 대일 심리전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제2지대 징모 제3분처 소속으로 우시(無錫)·우후(蕪湖)·난징(南京) 일대에서 염전(厭戰) 가요투항 권고 방송 등을 통한 대적 심리전에 참여하였다.

* 총사령부
1944년 말, 엄도해(嚴道海) 안원생(安原生) 안병무(安炳武), 진춘호(陳春浩) 안우생(安遇生) 송면수(宋冕秀) 등을 파견되어 주중 미 대사관 내에 한국인 공작반이 설치 되어 본격적인 정보공작활동이 전개하게 되었다. 임무는 일본 및 한국 본토에서 발간하는 신문, 잡지 등 출판물과 전파를 통하여 오는 방송, 그리고 광복군 진영으로 들어온 신입 대원으로부터 첩보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 평가하여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 쿤밍(昆明)지구
1944년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윈난셩 쿤밍(雲南省 昆明)에 있는 미 제 5공군 사령부 특파원으로 김유철(金裕哲), 조중철(趙重哲) 등을 파견하여 대적 선전 공작을 담당했다. 중국 공군부대에서 복무중인 장성철(張聖哲), 김좌경(金左卿) 등과 운남 비행장 복무 중인 염온동(廉溫東) 중국 중앙군에 복무하는 김철군(金鐵軍), 유재원(柳在元) 등이 합류 협조하여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았다.

주로 적 점령 지구에 살포한 반전(反戰) 삐라를 작성하여 미 공군 비행기를 이용하여 중국 각 전선에 투하 살포하였는데, 김유철(金裕哲)이 직접 그린 그림과 한국어와 일본어로 된 반전 투항을 권유하는 내용의 선전물을 제 1차 50만 매를 작성하였으며 제 2차 역시 50만 매를 한국어, 월남어, 버마어, 일본어 등 4개 국어로 된 반전 사상 고취와 투항을 권고하는 내용의 전단을 작성하여 중국, 한국, 월남, 버마 지역에 살포하여 심리전을 하였다.

7.3. 유격전(遊擊戰)

조선의용대
제 1차 창사전투
“중국 창사(長沙)에서 일본군과의 첫 싸움을 앞두고 우리가 외쳤던 구호가 ‘3일 동안 굶고, 잠 안 자고, 안 씻는다’였어. 그만큼 우린 독하게 싸움을 준비했어. 중국군도 우리를 보고 ‘독종’이라고 불렀을 정도니까.”
육신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노쇠했지만 광복군 활동에 대한 김옹의 기억만큼은 또렷하기만 했다. 김옹은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의 중국 제9전구지역에 도착해 제1차 창사대회전에 참전해 한·중 합작군 100여명과 함께 일본군 600명에 맞서 싸웠던 1939년 당시를 떠올렸다.
“일본군이 기관총 7정을 앞세워 난사를 했는데 우리는 후퇴하면서 추격하는 일본군을 정확한 사격으로 한놈 한놈 쓰러뜨리는 전법으로 대응했어. 내 개인적으로는 그게 첫 전투였지만 이미 죽기를 각오했기 때문인지 그리 무섭지 않았어.”
말하는 내내 숨이 차 여러 번 말을 중단하면서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옛 기억을 되살렸다. 전투 상황을 설명할 때는 병상 철골 지지대를 주먹으로 칠 정도로 독립투사의 기백은 아직도 그의 몸에 살아 있었다.
“일본군이 쏜 대포가 우리 머리 위에서 터져 머리가 멍해지고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지만, 그 전투에서 우리는 일본군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어. 우리가 싸우는 모습을 본 중국군들이 다들 놀라는 거야.”
이후 그는 구룡산과 오봉산 전투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한국광복군 제 1지대로 편입된 조선의용대가 1941년 12월 12일 후좌장(胡家莊)전투 교전내용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권에 수록되어있다. 전투는 1941년에 일어났으나 1942년에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면서부터 수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전 중 전사한 4명의 대원들만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에 등재되어있고 나머지 대원들은 수록이 되어있지가 않다.#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제 2지대(현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3구대) 第二支隊(現 韓國光復軍 第1支隊 第3區隊) 대장 (隊長) 김세광(金世光) 이하(以下) 삼십여 동지(三十餘 同志)는 평한선(平漢線) 스좌장(石家莊) 이남(以南) 백여리(百餘里) 되는 위안쓰현(元氏縣)에서부터 싱타이(邢臺) 일대(一帶)에 무장선전공작(武裝宣傳工作)을 맡아(擔任)하고 작년 11월昨年 十一月[29]부터 공작(工作)을 전개(展開)하여 오는 바, 해당每黨에 공작工作은 순리順理로 개시展開되엿다. 그리하여 11월 4일十一月 四日부터는 적 敵과 약간 접촉이 있어 우리대대동지 我隊同志들도 전부全部 무장武裝하야 경계警戒하여 오던 다음 11일 정오次 十一日 正午에는 2백여명 적二百餘 敵과 조우 遭遇하야 맹렬猛烈한 실력實力으로 적敵을 격퇴出退하고 그날 밤同 夜적 보루敵堡壘를 포위包圍하고 김세광 대장 동지金隊長 世光同志가 20분간二十分間 중국어中語로 국제정세國際情勢에 관關한 대적연설對敵演說을 하고, 김학철 동지金學鐵同志가 다시 일본어日語로 15분간十五分間 반전연설反戰演說을 하엿다. 그래도 적진영敵營에서는 아모(아무) 반응反應이 없음으로 조소경 동지趙少卿同志가 반전노래反戰唱歌를 하엿으나, 역시亦是 하등下等의 반응反應이 無없해서 도라오고 말엇다. 다음 날 翌日은 그곳을 떠나 잔황현贊皇縣으로 가기로 약속約束허고 그날 밤의 경계警戒는 지방地方 자위대自衛隊에게 일임一任하고 연일連日 전투戰鬪의 지친疫困한 몸을 휴식休息하기 위爲하야 하로 밤 잘-자기로 하엿다.

전투 개시戰鬪의 開始

12일十二日 날이 밝을 무렵拂曉, 밤 사이夜間 우리 부대我隊를 포위包圍하여 노코, 날이 밝이를 기다리던 적 敵은 먼동이 틀때 지붕위 屋頂上에서 보초放哨하고 있는 우리군我隊 조관 동지 曺寬同志를 향向하야 발사射出하엿다. 이리하야 깊은 안개 속에서 고요히 잠자든 깊은 안개充凉한 산촌山村은 갑자기 격렬激烈한 전장戰場으로 변變하엿다.

조관 동지曺寬同志는 적敵의 총銃소리를 듯고, 급急히 김대장金隊長에게 보고報告할 때 지방자위대 대장地方自衛隊隊長도 와서 보고報告하기를 "적敵이 2리二里(약 800m)밖에서 아군我軍을 포위包圍 진공進攻하고 있으니 속速히 준비準備하라"고 하엿다.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익숙習慣된 준비공작準備工作을 재빨리瞬間에 맟이고, 대문大門을 나가랴 할때 적 기관총敵 機關槍의 화력火力은 우리 대문大門에 집중集中하엿다. 그럼으로 대문大門으로 나갈 수 없는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집지붕屋頂에다 기관총機關槍을 걸고 환격(반격)還擊하였다 적敵의 화력火力은 다시 집옥상屋頂으로 집중集中하엿다. 이틈을 탄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속速히 대문大門을 나가 서쪽 산골짜리西便山끝로 퇴각退하랴 할때 적敵의 화력火力은 또 사면에서 우리 부대我隊를 향向하야 집중集中 공격攻擊하엿다.

그때마참 적敵은 「敵は何處に居るか?(敵은 어데 있느냐?)」하고 소리첫다. 이것을 들은 우리我 김대장金隊長은 조용從容 침착沈着하게 「敵は南の方へ逃がたぞ(적敵은 남南쪽으로 도망逃亡쳣다)」 하고 답答하엿다. 적 敵은 이 소리를 듯고 남쪽방향南方으로 병력兵力과 화력火力을 집중集中하엿다. 이 틈을 탄 우리我 동지同志들은 급속急速히 서부고지西部高地를 점령占領하고 「이리 오시요!」 「이리 오시요!」 소리 찔너 혼란混亂한 우리 동지同志들을 집중集中식히며 일면一面 전투戰鬪를 계속繼續하엿다.

적敵은 아군我軍을 향向하야 난사亂射, 김대장金隊長은 지휘 중指揮 中 처음으로 「다리」를 맞엇다. 이여서 복부腹部를 또 마젓다. 탄을 맞은中彈한 대장隊長은 벌서 신기神氣를 상실喪失하고 지휘指揮 소리는 점점漸漸 약弱하야지엿다.

이것을 본 곁에 있든 조관 동지(신참 동지)曺寬同志(新同志)는 「대장 隊長 동무 고려정신高麗精神을 발휘發揮하시요!」하고 외쳣다. 대장隊長은 이에 감동感動되여 다시 정신精神을 차리고 기관총機關銃을 손에 잡고 쏘랴할 때 적敵의 탄환彈丸은 또 김세광 동지金世光同志의 왼편 손목을 명중命中하엿다. 하는 수 없이 총銃을 두고 다른 동지同志의 구원救援을 받게 되엿다.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는 다시 그 기관총機關槍을 가지고 사격射擊하야 할때 역시亦是 두발二發을 맞게 되엿다. 탄에 맞은中彈한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는 10보十步를 다닐行할 수 없어 최후最後의 결심決心을 하고 적敵 오기를 기다리든 차次 김흠동지 金鑫同志가 지나며 그 광경光景을 보고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를 등에 없고 안전지대眼前地帶에 탈출退出하랴 하엿다. 「기관총機關槍은 우리 부대대全隊의 생명生命이다, 나를 신경쓰지關心 말고 속速히 기관총機關槍을 가지고 가라」하고 조동지趙同志는 소리쳣다. 김흠 동지金鑫同志는 그래도 동지同志를 구救하라고 하엿으나 조열광 동지趙光烈同志는 두번 세번 거절再三拒絶함으로 하는 수 없이 총槍을 메고 가랴할 때 조관 동지曺寬同志가 지나게 되여 김흠 동지金鑫同志는 기관총機關槍을 조관 동지曺寬同志게 맡기고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를 등에 업고 하루 사이一日間을 적敵의 포위包圍를 피避하여 안전지대安全地帶에 도착倒着하엿다. 신도 버선도 없이 山길을 달린 까닭에 「발껌지」와 「살」은 모도다 떠러지고 뼈밧게 남지 않엇다.

그 후後 3개월간三個月間 치료治療하고 처음 것게 되엿다. 그리하야 대부 동지大部 同志는 안전지대安全地帶로 퇴출退出하 격전激戰하고 미처 퇴출退出하지 못하고 적敵에게 포위당包圍當하야 희생犧牲한 4 동지四同志의 전투戰鬪는 특特히 비장悲壯하엿다. 점령佔領한 고지高地에서 우리 동지我同志가 적敵에게 포위包圍되여 단독 분전單獨奮戰하며, 육肉박하는 것을 반히 보면서 구救할 수 없이 그대로 희생犧牲싴이는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의 심정心情이 어찌如何하엿을가?

손일봉 동지孫一峯同志는 처음 적敵과 보총步槍으로 싸우다 다시 접근接近된 적敵에게 수류탄手榴彈을 던저 많은 적敵을 죽이엿다. 수류탄手榴彈까지 다 쓰게 되여 탄환彈丸이 다 떨어져盡함에 손 동지孫同志를 사로 잡으라는 적敵과 육肉박이 시작始作되엿다. 이 육肉박 격투格鬪를 목도目睹하는 우리부대 동지我隊同志는 하는 수 없이 그를 향向하야 기관총機關槍을 소사掃射하엿다. 도저到底히 사로 잡어갈 수 없음을 안 적敵은 최후最後의 방법方法으로 각도刻刀로 손 동지孫同志의 왼편 가삼을 찔너 죽엿다.

왕현순 동지王現淳同志는 대문大門을 나와서 뒤담에다 은신隱身을 하고 적敵과 격전激戰하다가 가지고 있는所有의 탄환彈丸을 다 써버리고便用하고 부당不幸히 적敵의 탄환彈丸이 데징大腦에 명중命中하야 소장小腦를 둘고 나가게 되여 즉사卽死하엿다.

최철호 동지崔鐵鎬同志는 집 지붕屋頂에서 격전激戰하다 하는 수 없이 뒤담을 뛰여서 넘어 가다 국부局部를 명중命中 당當하야 신음呻吟하다 죽엇다.

박철동동지朴喆東同志는 탄환彈丸을 다 써버리用盡하고 사로잡으려는 2명 적二敵과 잡히여 가지 않으려고 육박격투肉博格鬪하여 언덕에서 골창으로 굴너가며 악전고투惡戰苦鬪하다가 적敵은 하는 수 없음을 알고 속력刺力로 왼편 가삼을 찔너 죽엿다. 사체死體를 발견發見할때 동지同志는 두 눈을 드고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자기自己 옷 가슴을 혓치고 꿀어 안즌 채로 죽엇다. 동지同志의 장렬壯烈한 죽엄을 전 화북全華北 방방곡곡坊坊谷谷에 가장 영英용한 고차故事로 전傳해지고 있다.

적과 아군敵我의 격렬激烈한 전투戰鬪가 두 시간時間 반半을 경經한 후後 우방군友軍의 지원군援軍이 도착到着되자 적敵은 허겁지겁慌하야 격퇴擊退하엿다. 이 다음此後에 백여명百餘 적敵을 격폐擊斃고 무수無數한 전리품戰利品을 확취獲取하엿다. 우리 군我軍은 손일봉孫一峰 · 왕현순王現淳 · 최철호崔鐵鎬 · 박철동朴喆東 4 동지四同志가 비장悲壯히 희생犧牲되고 김세광金世光 · 조열광趙烈光 · 황통삼黃通三 동지同志가 부상을 입음受傷하엿다. -끝-[30]

김승곤 지사는 구룡산, 오동산전투에서 일본군과 수십차의 전투와 유격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일전 경험, 일본군의 실정과 의용대의 형편, 그리고 전투의 실상과 유격전의 내용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였다.[31]
면담자 | 김행복(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사부장)
면담일시·장소 | 2001년 12월 1일, 12월3일·서울보훈병원
Q: 구룡산, 오동산전투 싸워보셨습니까?
김승곤: 우리 전지가 거기야, 전지가. 거기서 많이 싸웠죠.

Q: 주로 싸우는 방법이라든가 상황이 어떠 했습니까?
김승곤: 조우전이요, 조우전. 우리가 공격을 먼저 못해요. 야간에 우연히 일본놈을 만나서 (싸워요.) 중국군은 원체 궁해서 밤에 야습을 많이 나가요. 일본놈 군복이 3원이야 3원.

Q: 그럼 아까 말씀하신 경찰 봉급과 같으네요.
김승곤: 털이 있거든. 그 다음에 군에 있는 담요, 그거는 5원이고. 상당히 고급품이지요.

Q: 그렇군요.
김승곤: 그래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중국 사람들은 밤에는 야습을 나가.

Q: 그럼 주로 일본놈들 보급품을 훔치려고 야습을 가는 것이란 말입니까?
김승곤: 그렇지요. 중국 군대는 숫자가 많으니까, 저녁마다 야습을 가요. 또 가기를 원하고. 잘 먹으니까. 그놈 팔아서 저의 욕구를 채우지. 그러면 야습 습격조를 구성해요. 3개 조로 편성하는데, 제일 앞에 가는 조는 사람 둘이 가요. 칼만 들고 가서 입초를 칼로 찔러 죽여요. 한밤 중에. 그래야 아무도모르잖아요. 그 다음은 공격조.

Q : 두 번째 조군요.
김승곤 : 첫 번 째 조가 지나가면 두 번째 조는 수류탄을 던져요.

Q : 수류탄을 던지면 소리가 크게 날 것이 아닙니까?
김승곤 : 소리가 나죠. 그 때 일본놈들이 다 도망가죠.

Q : 일본놈들이 도망을 가요?
김승곤 : 도망을 가죠, 어떻게 해? 그러면 이제 추격대. 중국 사람들은 당가대라고, 중국 사람들이 메고 다니는. 담요, 군복 벗어 놓은 것을 몽땅 싣고 가서 골라서 팔아먹어요. 잘 팔리거든. 담요는 더 잘팔려. 오죽 하면 그렇게 하겠어요? 중국군은 서로 가려고 그래요. 그렇지만 부대장은 안 시켜요. 부대장은 안 시키지요. 아니요. 큰 사건 나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부대장이 안 시켜. 졸병들이 가자면 할 수 없이 가고. 그만치 부패했어요.

Q : 그렇다면 일본군도 중국군이 야습을 올거라고, 그만큼 많이 당해받으니까, 조심을 하고 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야습을 올거라고 경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김승곤 : 일본군은 아니 낮에 보초를 서고 있다가 밤에는 거둬들여요.

Q : 밤에는 거둬들여요?
김승곤 : 그럼요, 무서워서. 밤에는 꼼짝 못해요.

Q : 그래도 밤에 꼼짝을 못한다면 철조망을 쳐 놓는다든가 그래도 대비를 해 놓지 않았겠습니까?
김승곤 : 그래서 낮에 가서 다 조사를 해요. 일본군이 자리를 옮겨 놓기도 해요. 어떤 때는 허탕을 칠 때가 있어요. 중국 군대가 그런 데는 용감해요. 먹고 살기 위해서. 생존본능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Q : 그렇게 들어가다가 일본군들과 맞붙어서 죽고 다치고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승곤 : 앞에 두 사람이 있지요. 들어가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든지 해도 말도 못해요. 정말 보초는무서워 해요. 새벽 한 시, 두 시, 세 시에 고단합니다. 밤 중에 들어갔다가 많이 죽어.

Q : 잘 못 들어가다 보면 총에 맞아 죽는 수도 생기겠지요?
김승곤 : 찔러 죽이든가. 인정사정 볼 것 없으니까. 이쪽에서는 수류탄 가지고 가서 던지지요. 그러면 팡팡 소리가 나고, 그 다음에는 추격대, 당가대가 싸가지고 돌아오죠.

Q : 그러면 성공이네요?
김승곤 : 그렇지 성공이지요.

Q : 지사님께서도 습격조에 가 보신 적 있으십니까?
김승곤 : 중국 사람들이 못 가게 해요.

Q : 못 가게 해요? 한국 사람들을 못 가게 해요?
김승곤 : 절대. 우리는 한 사람 희생되면 보충할 수도 없고. 중국 군대에서 아껴주기도 해요. 사람들은 아껴줘요. 중국 사람들은 한자를 쓰잖아요? 중국에는 만 명 중에 글 아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라구요.

Q : 한국 사람들은 글 아는 사람이 많겠…
김승곤 : 그렇지요. 학교는 다 나왔으니까.

Q : 그 대신에 중국 사람이 가져온 물건을 달라고 한다든가 그러지는 못하겠지요?
김승곤 : 그렇지요. 달라고 못해. 달라고 못해.

제 3 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원으로 활동한 정영호 지사의 회고[32]
정영호 : 안후이성(安徽省) 마오린(茂林)에 본거를 둔 광복군 제3 징모처의 한교전지공작대원(韓僑戰地工作隊員)으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중화민국 제 3전구 제1유격종대사령부 대일책반 공작대원(中華民國 第三戰區 第一珽進遊擊從隊 對日策班)으로도 활동했지요. 3년 여 동안 태평천국의 무대였던 저장(浙江省), 안후이성(安徽省)의 그 넓은 벌판을 누비고 다녔어요.

A : 구제척으로는 어떤 공작을 했습니까?
정영호 : 우리의 공작지구는 혼전지대였어요. 일본군과 장제스(蔣介石)의 중앙군(中央軍)[33]이 있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의 씬쓰준(新四軍)이 있었지요. 광복군도 중앙군과 신쓰준[34] 두 갈래로 속해있었죠. 우리는 중앙군 산하의 50명 한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일본군의 괴뢰군[35]도 있고 민병대격인 대도회(大刀會)도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미 제 5공군(5th Air Force)산하 공수단이 절간 같은 걸 점령하여 활동하고 있었죠. 우리 부대는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하여 미군부대에 정보를 주면 미 제 5공군이 타전하여 폭격하게 하는 임무가 많았어요. 병참루트를 끊으라는 지령을 받고 교량폭파공작도 했죠. 중국인을 사서 폭약을 주고 우리는 먼 발치서 보고 있다 폭파되는 것을 보고 사라지지요. 또한 일본군에 있는 한국인을 중국 사람을 시켜 빼내거나 탈출해 숨어있는 사람을 구출하여 광복군 부대에 보내는 일도 했어요. 저도 지금 천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분을 비롯하여 6~7명을 구했어요.

1945년 6월, 일본군 최후 발악으로 제 3전구 유격지구에 대한 소탕작전을 전개한다. 작전 지구에서 공작 중이던 박승학(朴承鶴)을 방문한 김해일(金海一), 유익배(柳益培)는 안후이성(安徽省) 지에시현(結溪縣)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당했으나 중국군 유격대의 도움으로 포위망을 탈출하여 후이저우현(徽州縣)으로 돌아왔다.

7.4. 공군 활동

김원영(金元英)
중국의 항공위원회(航空委員會) 군관학생이 된 후 다시 공군군관학교(空軍軍官學校) 15기 군관학생으로 발탁되어 곤명(昆明)에서 항공군사훈련을 받았으며, 1944년 2월 인도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1945년 1월 상해(上海)로 돌아왔다. 상해로 돌아온 후 지강공군기지(芷江空軍基地)의 중미혼합단(中美混合團) 공군준위견습관(空軍准尉見習官)으로 배속된 그는 1945년 2월 7일 명을 받고 출격하여 악양(岳陽)·형양(衡陽) 등지에서 일본군 운수부대를 소탕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이 대일작전(對日作戰)을 전개하던 중 3월 24일 일본군 공격을 위해 출격하였으나, 불행히 애기(愛機)가 추락하는 바람에 순국하였다.

7.5. 독수리작전(Eagle Project) 1945.3.1~1945.10.1.

한국광복군과 공동으로 진행된 이글프로젝트로, 시안(西安)을 기지로 한 최초의 주요 프로젝트였다. 새로 단장한 OSS 북동사령부(OSS Northeastern Command)가 시안 남동쪽 15마일 지점인 두취(杜曲)에서 창설되었는데, 이 조직의 유일한 목적은 한국침투였다. 프로젝트의 암호명은 독수리(Eagle)이었으며 임정 휘하의 중국 내 100명의 망명 한국인들이 이글프로젝트의 야전지휘관인 클라이드 싸전트(Clyde B. Sargent)의 지휘하에 훈련받기 위해 두취으로 이동했다.

한국광복군과 관련있는 것이 바로 이글프로젝트(1944년 10월~1945년 10월 1일)였다.

1944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이 광복군과 OSS의 합작을 제의했고, 미군이 훈련한 한국인 요원들을 한반도와 일본에 침투시켜 첩보활동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이로부터 광복군을 인적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 성립했고, 독수리작전의 직접적 실현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945년 1월 싸전트(Clyde B. Sargent)는 한국계 미군 정운수와 함께 시안 2지대 본부를 방문한 후 광복군의 활용적합성, 2지대 주둔지(시안 두취)의 적합성, 이범석의 군사적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1945년 3월 1일 독수리 작전이 공식 승인된다.
파일:독수리 작전 승인과 관련된 전문.png

1945년 4월 3일임정·광복군과 OSS관계자·주중미군사령부와의 접촉을 했다.
비밀보고 1945년 4월 3일
1945년 4월 3일 아침, 본인은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약 30분간 면담했습니다. 이 면담은 본인이 전혀 요청하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 전 본인이 군사 관련 업무로 임시정부 본부를 방문했을 때 제의를 했었는데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면담은 응접실에서 진행되었는데, 그 방은 전혀 쾌적하지만 검소했고 벽 한 쪽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습니다.그 옆 면에는 중국기가 걸려 있었으며 또 다른 면에는 프랑스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최근 프랑스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이라 설명했습니다.
김구 주석과 대단하는 동안 한국광복군 이청천 총사령관 광복군 제 2지대장 이범석 장국, 최근 조직되어 안후이성 푸양에서 주둔 중인 광복군 제 3지대장 김학규 소장 그리고 통역 정한범이 배석했습니다. 김구 주석은 평범한 중국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응접실에 들어왔으며 몸이 불편해 잠시 쉬고 있었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구 주석은 외모나 몸가짐에서 건강하고 당당해보였습니다. 품격있어 보였고 절제와 점잖음을 갖춘 가운데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가 25년 동안 애국적 자객이자 테러리스트였다는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대담은 대부분 덕담을 나누는 수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김 주석은 미국의 관심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이어 전면적인 협력을 할 의향이 있으며 최근 안후이성 푸양에서 막 도착한 37명의 한국인을 포함해 광복군 인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본인은 일반적인 동맹국 간 공유하는 가치와는 다르게 한국과의 사이에서는 보다 각별한 가치를 공유해야만 한국-미국 공조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대담하는 가운데 김구 주석은 두개의 주목할 발언을 했습니다.

1. 김구 주석은 이범석 장군과 본인 사이에 발전되어온 관계에 대해 기쁨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양인과의 관계에서 싹튼 모든 것을 승인했다고 말했습니다.

2. 그는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섬에 진격할 때 필리핀 대통령 그리고 고위 관료들과 동행했는데 이는 필리핀 국민들로 하여금 마음에서 솟아나는 협력 정신으로 일본이 점령한 필리핀을 공격하는 미군을 돕게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연합국이 한국에 진격할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과 동행한다면 한국 민중들에게도 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조치는 한국 민중들로 하여금 기꺼이 일본에 저항해 일어서게 하여 한국 내 미국의 작전을 지원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김구 주석을 만나뵌 것은 제게 큰 기쁨이었으며 앞으로 자주 뵙기를 또 결국에는 한국에서 뵙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그에게 말하며 작별 인사를 마쳤습니다.

보고자 : 클라이드 싸전트 대위, 1945년 4월 3일
보고처 : OSS본부, 중국전구사령부

싸전트 대위는 김구 주석과의 면담을 마친 뒤 이범석 장군과 다시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내용은 문건으로 작성되어 상부에 보고되었다. 다음은 이범석과 나눈 내용에 관한 보고서이다.
비밀보고, 한국관련, 1945년 4월 3일

오늘 이범석 장군과 대화를 가졌습니다. 다음은 이 장군의 발언 내용입니다.

1. 예상되는 작전(이글프로젝트)은 김구 주석과 이청천 장군으로부터 전적인 승인을 받았습니다.

2. 광복군 제 3지대장 김학규 소장 역시 그가 통솔하는 안후이성 기지의 광복군도 이글 프로젝트의 작전에 포함되기를 강력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이 장군은 본인이 나서서 김학규와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김학규와 미 공군 중국 사령부의 윌프레드 스미스 중령과 버치 대위 사이에 논의되던 작전 계획과 향후 진행할 OSS작전 계획에 대해 보다 명확한 경계를 지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본인은 내일 열릴 회의에서 더 명확하게 선을 긋도록 노력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3. 김약산은 이글작전의 대략적인 계획에 대해 아직 찬성도 반대도 밝히지 않고 있으며 앨버트 C. 웨드메이어 장군과 면담 허락과 한국 내에 있는 미군 동조자들이 포함된 작전 계획을 제시할 것을 김구 주석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김구 주석은 웨드마이어 장군과 면담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의 판단으로는 김약산이 웨드마이어 장군과의 면담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입니다. 김약산은 김구, 이청천, 이범석, 김학규 그리고 그 밖의 독립당 인사들이 자신보다 한발 앞서서 미군 관계자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데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신과 그가 이끄는 민족혁명당이 미군과의 관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1945년 5월부터 한국광복군 2지대와 OSS의 합작훈련, 즉 독수리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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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계획안에 따르면 최초에 60명의 요원을 선발해 3개월 동안 정보수집 · 보고 · 통신훈련을 실시한 후 그중 45명의 적격자를 선별해 1945년 초여름쯤 5개의 전략지점(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침투시킬 계획이었다.
한반도의 공격 목표물과 관련한 서신

1944년 7월 11일
존경하는 柱 장군에게

1. 본인은 한국에 설치한 일본의 군사시설을 나타내는 몇개의 목표 대상 목록을 이미 송부하였습니다.

2. 평양, 진남포, 경성, 인천, 다사도, 수풍, 부전호반, 나진, 청진, 흥남, 무산, 길주 그리고 진해만은 모두 중요한 산업지역으로 한국에 있는 연합군의 폭격 목표물입니다. 안동, 청주, 대동, 그리고 한강에 있는 철교 역시 중요 목표물입니다.

3. 여기에는 한반도의 군사시설과 지리적 특성에 정통한 대원들이 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임무가 있을 경우, 그들은 목표지역을 인도하고 목표물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데 그들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4. 위의 제안들과 권고 사항들을 중국 국민당정부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바람을 이룰 수 있는 조치가 취해지길 바랍니다.

안부 전해주십시오.

한국광복군 징모분처 주임  김학규

이들은 지역별로 해군기지, 병참선, 비행장을 비롯한 군사시설, 산업시설, 교통망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침투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임무가 부여되었고, 첩보망이 정착되고 연합군(미해병대)이 한반도나 일본에 상륙할 경우에는 정보수집 외에도 지하운동의 규모와 활동, 한국인의 의식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나아가 한국인들의 봉기를 지원하도록 계획되었다. 침투 후 150일 이내에 첩보가 유입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훈련주관부서는 OSS 중국지부 비밀첩보과(SI)였고, 조사분석과(R&A)와 교육훈련과(S&T)의 협력을 받도록 되었다. 훈련의 핵심은 무전기 송수신 등 통신훈련이 중점을 이루었다. 교관 및 지원병력으로 OSS 소속 장교 및 하사관 7명이 동원되며, 향후 작전 확대시 장교 10명과 하사관 12명의 추가지원이 계획되었다.
한국에 대한 비밀첩보침투를 위한 독수리 작전 보고서

발신일 1945년 3월 1일
발신자 포병 대령, 작전장교 윌리암 P. 데이비스
수신자 중국전구 전략첩보국 책임자

5개조로 구성된 이글팀이 한국에 침투할 때 활용가능한 장비가 무엇인가에 따라 침투수단이 결정될 것이지만, 선호하는 순서대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안) 잠수함 또는 수상비행정[36]으로 해안 가까운 바다에 야간 낙하시키는 방법으로 고무보트, 장비와 함께 3명의 요원이 동시에 낙하함.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30마일(48km) 간격으로 낙하하게 됨
2안) 산둥반도에서 비행기로 도착한 후, 소형선박으로 서해를 거쳐 같은 방법으로 침투.
3안) 북중국과 만주를 육상으로 통과해 침투하는 방법. 장비는 별도로 공중 및 해상으로 투하.

광복군이 사용할 무전장비는 SCR-284로 한 세트 가격이 200kg육박하며 이걸 3인이 짊어지고 숨겨야 한다. 팀별로 1세트씩 총 5세트를 배정하며, 예비무선통신 장비는 5세트는 한국으로 수송이 어려운 점을 고려해 본부에 비치하고 필요시 추후 조치를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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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284 무전기 세트

광복군과 OSS는 두취(杜曲)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 한미합동지휘본부(Korean-American Joint Command)를 설치하고, 이범석과 싸전트대위가 한미 지휘관으로 긴밀한 공조체제 하에 훈련을 진행하였다. 싸전트는 5월 11일 독수리야전지휘관으로 두취(杜曲에 도착했다. 제 2지대원 125명 중 우선 50명이 선발되어 제1기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은 첩보공작에 중점이 두어졌으며, ‘첩보훈련반’‘통신반’으로 구분되었다.

또, 이글 작전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시안에서부터 항속거리가 짧은 한계를 보안하기 위하여 산둥반도에 보조기지를 둬야 했다.
산둥반도(山東半島)에 독수리작전 보조기지를 둘 것을 제안

싸전트 대위
조지아 (참조) 스웬센 소령

1945년 7월 8일

1. 최근의 협의에 따라, 본인은 한국에서 중국 陝西省 杜曲에 있는 독수리기지까지 무선중계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계획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2. 상호 거리는 다음과 같다.
두취(杜曲)에서 보조기지 산둥반도(山東半島)까지 대략 600비행항로(AL) 마일
보조기지에서 최근 거리 야전지점(한국 경성京城)까지 대략 260 비행항로(AL) 마일
보조기지에서 최고 원격 야전지점(한국 나진羅津)까지 대략 500 비행항로(Al) 마일
상기의 거리는 다음과 같은 설비로 야전지점부터 독수리기지의 보조기지까지 손쉽게 수행될 수 있는데, 그 설비는 아마도 공중투하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15개의 야전지점과 연락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장비
SX-28 또는 AR-88 기종 수신기 3대
SST-103 또는 TR-104 송신기 3대(대개 전자 송신기(SST-103)로)
750 또는 1000 W 발전기 2대 또는 Kohler 1.5 KVA 발전기 1대(만일 하역이 가능하다면)
여러 종류의 검파기 40개(개수는 추후에 결정됨)
(독수리)기지-보조기지간의 전신을 위한 4자리 숫자의 1회용 암호표
상기 물품을 위한 예비 부품 및 도구

4. 요원
15개의 무전지점의 운용을 위해 본인이 그 계획을 전체적으로 통일할 수 없다면 다음과 같은 방안을 추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미국 장교 1명, 가나 암호로 훈련받는다.
4명의 미국 사병, 가나 암호를 훈련받는다.
5명의 한국인, 독수리기지 중계소에서 훈련을 받으며, 가나 암호로 훈련받는다(이들 병사는 작전 능력이 증명되었을 때 파견될 것이다).

5. 작전의 진전에 따라, 보조기지도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에 있어 만일 요원이(특히 미국인 요원) 최고의 수준이라고 한다. 본인은 작전 운영 계획이 만족스러울 것으로 확신한다.

1945년 8월 3일 이글 작전 실무책임자 싸전트 대위와 직속 상관인 헬리웰 대령 간 비밀 교신이 바쁘게 오갔다.
우리 사업은 진행 중이며 시안은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이글 팀은 하루 이틀 내 준비를 마쳤고, 관련 장비와 지도를 조속히 보내줄 것을 요청합니다. 워싱턴에도 한국과 만주에 관한 첩보를 조속히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1945년 8월 4일 광복군 이글팀의 훈련이 종료된다.
이들 38명은 2기 훈련을 대기하던 11명과 함께 OSS 평가단의 평가를 받았다.
총 지휘 이범석
1지구대장 안춘생
2지구대장 노태준
3지구대장 노복선
본부요원 이재현, 민영수, 김석동, 이윤장, 강일성, 오건, 최철, 한경수, 김동걸

제 1지구
평안도 반장 강정선
1조 장덕기, 계의성, 장철
2조 김용, 이지홍, 이우경
3조 김중호, 전성윤, 선우기
4조 김영호, 박명광, 안국보

황해도 반장 송민수
1조 노성환, 황삼룡, 이동환
2조 홍기화, 신덕영, 석호문
3조 이우성, 허봉석, 송수일

경기도 반장 장준하
1조 이준승, 이명, 박수덕
2조 송창석, 정정산, 최문식
3조 김유길, 오서희, 이순승

제 2지구
충청도 반장 정일명
1조 이덕산, 박영섭, 김욱배
2조 장재민, 박재화, 송석형
3조 윤치원, 윤태현, 김세용

전라도 반장 박훈
1조 노능서, 신국빈, 김상을
2조 이정선, 장두성, 백준기
3조 임재남, 한종원, 박금동

제 3지구
함경도 반장 김용주
1조 석근영, 태윤기, 이욱승
2조 최봉상, 김덕원, 김선옥

강원도 반장 김준엽
1조 이계현, 임정근, 이준명
2조 고철호, 홍재원, 김성갑
3조 김춘정, 동방석, 이호길

경상도 반장 허영일
1조 김성환, 구자민, 이동학
2조 유덕량, 이지성, 윤재현
3조 이종무, 이건림, 이운학

1945년 8월 5일 임정 주석 김구이청천 총사령관, 엄항섭, 이시영 등 10여명의 임정 시찰단이 서안에 도착했다.

싸전트 대위는 다시 헬리웰에게 비밀전문을 보낸다.
잠정 일정에 따르면 첫 팀이 9월 5일 경 출발 예정이며 이것은 산둥반도까지 항공편이 가능한 상황을 고려한 것입니다. 항공수송이 불가능하다면 곧바로 몇 개 팀을 보낼 것이며 오늘 귀대한 이범석 장군과 협의한 뒤 확정된 일정을 보고 하겠습니다.

1945년 8월 6일 헬리웰이 싸전트에게 보낸 비밀 전문이다.
워싱턴의 OSS 사령부[37]와 쿤밍지부에 한국 어선에 관한 모든 자료와 사진을 요청했다. 보고서는 필요 없고 1차 자료 필요하며 9월 7일이 데드라인이다.

이들의 교신 내용을 들어보면 광복군 이글팀은 아직도 침투 방법을 결정하지 못했다. 시안에서 산둥까지 항공편, 이어 산둥에서 한국 서해안까지 소형선박을 이용한 침투를 검토하는 방안과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루트이지만 중국 북부와 만주를 통과하여 한국을 침투하는 마지막 방안도 검토하고 있었다. 잠수함 또는 수상비행정을 이용한 야간 침투는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싸전트 대위는 이글작전 참여를 앞두고 김구 주석과 이청천 총사령관, 김원봉 부사령관 그리고 이범석 제 2지대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김원봉은 한국 내에 미국인에게 협조하는 한국인에 관한 사항이 포함된 작전의 전모와 계획을 밝히라고 미국 측에 강력하게 요구하며 웨드마이어 장군과 면담을 요청했다."라고 보고했다. 이 회의에서 김구 주석은 김원봉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글작전의 무모함에 대하여 OSS 내부에서도 우려가 깊었다. 이글 작전이 확정되고 한 달 후인 3월 28일, OSS첩보 공작처 담당관이었던 던컨(Duncan C. Lee)소령은 독수리작전에 대한 첨언(1급 비밀)에서 이글계획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글팀의 침투작전은 구상부터 엉성하고 마치 아군에 우호적인 게릴라들이 장악한 지역에 도착하려는 것처럼 안이하다고 비판했다.
3. 그 계획은 첩보원의 다양한 그룹에 의해 행해질 침투가 어떤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침투 과정은 자세하게 다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침투계획은 우리를 다소 염려스럽게 만듭니다. 요원들에 대한 다양한 상황에 따라 각 장소마다 발생하는 문제들은 매우 다릅니다.

침투활동 전문기관이었던 OSS 검토보고서는 또 첩보요원들의 은신처 등 장소에 따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각각 다른데도 불구하고 침투 계획이 지나치게 단조롭다고 지적했다. 첩보 공작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을 서슴없이 지적했다.
“30마일의 간격을 두고, 매번 부대별 3명의 요원과 장비를 배치 시킨다”는 문구는 비밀 계획을 너무 도식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며, 마치 우호적인 게릴라 점령지역에 요원들을 배치하는 방법과 유사하게 보입니다. 만약 이러한 침투부대에 대한 우호적인 조건이 주어진 곳이어야만 그러한 배치는 가능할 것입니다.

이 지적은 김원봉 부사령관이 침투요원을 맞아줄 OSS협력자가 한국에 있는지[38] 물었던 것과 사실상 동일하다. SCR-284세트 200Kg이 넘는데 이 무거운 통신장비를 고무보트에 싣고 노를 저어 낮선 해안에 접근한 다음 끌어내려서 메고 끌면서 옮길 수 있었을까? 게다가 서해안의 갯벌은 상당히 넓다. 일본군은 물론 민간인의 눈을 피해 은신처는 또 어떻게 찾을 것인가 부분에서는 회의적인 작전이다. 무선장비는 고장도 잦은데 그에 대한 대비 또한 허술하다.
5. 귀하도 알다시피, 지난 야전에서의 경험으로 우리는 무전 고장이 빈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각 팀의 규모를 줄이거나 좀 더 많은 무전기와 무전병을 제공하여 고장이나 사고의 경우에도 소리가 나지 않거나 지연되지 않게 하십시오. 각 팀은 적어도 한 개의 비상용 무전기가 있어야 합니다.

1945년 8월 7일, 김구는 시안에 도착한 도노반국장 및 OSS 중국지부 책임자 헬리웰, 독수리야전사령부 책임자 싸전트 등과 회담했다. 도노반은 3번째 중국방문이었고, 독수리작전에 OSS의 운명을 걸 정도로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OSS의 연대는 양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김구는 도노반과의 회담으로, 미국과 임정의 항일비밀공작이 시작되었다고 쓸 정도로 고무되었다. 그러나 OSS가 임정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은 것처럼 비춰진 것은 OSS와 임정의 진로에 영향을 끼쳤다. 도노반과 만난 자리에서 김구는 ‘한미간의 공동협력’을 강조하는 임정 주석명의의 편지를 트루만대통령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 편지를 전달받은 트루만은 “미국정부가 승인하지 않는 자칭 정부 대표들의 메시지”를 OSS가 전달했다며 격노했다.

한편 독수리작전 계획에 따르면 한반도 침투는 잠수함을 이용하여 야간에 한반도 해안에 침투, 항공기를 이용해 낙하산으로 침투, 화북 · 만주를 경유해 육로로 침투하는 3가지 경우가 상정되었다. 그렇지만 훈련이 종결된 7월말까지 침투방법에 대한 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1945년 여름에 이르러 한반도 침투를 위한 2가지 주요 프로젝트가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OSS 중국은 이글프로젝트를, OSS 워싱턴은 냅코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이의 성공여부는 생사를 불문한 한국인들의 애국심에 달려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여름 OSS 중국과 OSS 워싱턴은 자신들의 작전이 우선권을 점하길 희망했다. OSS 중국은 한국선점의 공을 냅코가 빼앗아갈까봐 내심 불안해 했고, 특히 냅코의 실패로 인해 독수리작전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했다.

또한 전구별, 군별 관할권을 둘러싼 이견대립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중국전구 사령과 웨드마이어, 태평양함대사령관 니미츠, OSS 국장 도노반 간의 의견대립은 일본의 항복직전인 1945년 8월 11~12일에야 해소되었다. 이는 소련의 참전 직후, 미국이 한반도와 만주에 발붙일 겨를도 없이 소련의 독식을 허용할 것이라는 도노반의 협박이 있은 후에야 가능했다.

한편 증언과 일부 자료에는 1945년 1월 이래 김학규가 지휘하는 광복군 3지대는 OSS와 미14공군의 합작기구인 공지자원기술단(空地資源技術團 | AGFRTS)의 존 버치대위와 연계를 맺고 22명에 대한 합작훈련을 추진했다고 되어 있다.

1945년 8월 8일, 독수리작전은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 통보 이후 본래의 목적이 변경되었다. 먼저 광복군측은 8월 11일 제 2지대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였고, OSS측은 동북야전사령부(North Eastern Field Headquarters)를 편성해 한반도 진입을 통한 정보 수집, 일본문서 압수, 연합군 포로 구호 및 송환을 새로운 임무로 부과했다. 협의 결과 광복군측의 이범석,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 4명이 OSS의 책임자 버드(Willis Bird) 대령의 지휘하에 국내 진공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8월 18일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지만, 본국의 지시를 받지 못한 일본군의 위협 속에 다음날 중국으로 귀환해야 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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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비행장에서 산둥반도 웨이하이비행장(威海机場)으로 도착한 후 이범석 장군과 국민혁명군 일행

결국 독수리작전팀은 1945년 10월 1일 공식으로 해체되었다. 이날은 OSS가 트루먼의 명령으로 공식 해체된 날이기도 했다. 이로써 임정 · 광복군과 OSS의 공식적인 합작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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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7년(1945년) 9월 30일 이글 프로젝트가 공식으로 해체되기 하루 전에 촬영된 사진이다.
1줄 좌부터 : 노태준 제2지대 제 2구대장, 싸전트 대위, 이범석 장군, 안춘생 제 2지대 제 1구대장, 노복선 제 2지대 제 3구대장
3줄 좌부터 : 이재현[40] 공작조장, 김성근[41]

7.6. 중국전구 전략사무국(OSS) 기타 작전들

광복군과는 상관없지만, 미 전략사무국이 중국대륙에서 시행했던 작전들이다.

불사조작전(Phoenix operations)
미국인 토마스 메간(Thomas Megan) 주교 휘하의 반공 카톨릭망을 이용한 것이었다. 피닉스는 1945년 7월말부터 8월초까지 5개의 SI팀을 야전에 투입해 시안(西安)―베이핑(北平)[42]―하이저우(海州)의 삼각지점 내 일본군 전투서열 정보수집 작업을 했다. 종전 이후 이들은 곧바로 호남 중부, 산동, 산서 남부, 호북, 만주에 침투했다.

칠리미션(Chilli mission)
레오나드 클라크 (Leonard Clark) 육군 소령이 지휘한 이 팀은 미 육군 제14 공군(Fourteenth Air Force | Air Forces Strategic)을 위해 산시성(山西省) · 안후이성(安徽省) 일대 일본군 전투서열 및 부대 이동 정보, 방위 · 표적자료 수집업무를 수행했다.

R2S 미션(R2S Mission)
존 버치(John Birch) 육군 대위가 시안 외곽에서 지휘한 이 R2S는 최상의 OSS 작전으로 미군사령부는 그를 “우리 조직에서 최상의 정보장교 중의 하나”라고 평가했다. 버치는 북경에서 황하유역을 포괄하는 무선교신망을 가진 12개의 정보망을 구축했고, 특히 산동반도와 일본군 정보수집 분야에서 버취의 통신망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8. 지휘체계 및 배치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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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광복(光復) - 1945년 8월 15일

미 전략사무국 중국전구에서는 1945년 8월 8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용한 것을 계기로 알게 되었으며 백범 김구와 제 2지대 본부 그리고 임시정부와 총사령부에서는 8월 9일날 그리고 중국 정보기관과 함께 공작하는 부대들은 8월 10일에 일본제국주의가 항복할 것을 알았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을때는 중국전역에 불꽃놀이를 쏘아 올리는 등 축제 분위기라 당시 광복군 대원들이 해방됨을 알았다고 한다.

김승곤 지사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갑자기 일본놈들이 투항해 왔습니까?
김승곤 : 일본놈들이 중경서 해악 8월 9일 밤에 알았어요. 8월 15일에 해방이 됐지만. 그런데 8월 9일날 알았는데, 참 허망합디다. 일본놈들 우리 힘으로 같이 한 번 싸워보다가 투항해야 힘이나 있는데, 그래 가지고 14년이 되었지만, 생활을 위해서는 내가 안 나왔죠. 중경에서 본부중대 중대장을 해서우리는 훈련시키는 도중에 일본놈들이 갑자기 투항을 해 와서 전쟁이 끝났거든요.

8월 9일날 일본놈들이 투항하면서 일본이 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단 말씀이지요?
김승곤 : 그렇지요. 8월 9일 투항한 것만이 아니라 이미 그 때 말이 중경 사회에는 퍼졌다구요. 일본놈이 투항한다. 중국에서 오래 기다렸다구요. 그래갖고 광복군의 후속조치가 있잖아요? 그 처리하고 오느라고 그 다음해 6월달에 한국을 나왔거든요.
1945년 8월 15일 나는 환남(晥南)의 휘주(徽州)에서 도보 중에 일본 침략자가 투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펄쩍 뛰었다. 40세까지 살면서 이렇게 속이 시원한 경사를 만난 적이 없었다. 평생의 소원이 이미 미루어져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중략) '망국민'의 굴레를 빠져나와 진정으로 인생의 맛을 보는 것 같았다. 이후로 더 이상 누군가 우리를 가리켜 망국민이라고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망국민이 되고 싶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고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43]

반면 많은 한인교민들이 중국 상해와 남경일대로 강제이주를 당했었는데, 광복 후, 재산처리 문제에 관하여 적산처리위원회를 설치해서 중국정부와 같이 정리에 힘쓴 모습이 보여진다.
이소민이나 김문호는 광복군의 제복을 입고 그야말로 의기양양한 개선장군의 기풍으로 우리 교포들은 물론 중국인들로부터도 굉장한 환영을 받았다.[44] 그러나 그들은 상해에 도착한 후에 몇가지 실수를 범했다.
자기들이 임정의 근위사절이라고 자칭하면서 교포사회의 치안과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노력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일제에 협력했던 교포들의 가옥이나 재물에 딱지를 붙이고 함부로 처분했던 것이 실수였다. 그 중에는 중국인의 재산도 포함되어있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중략)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독립운동을 비웃고 방해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이제는 자기들이 애국자였고 또 독립운동가였던 것처럼 날뛰는 걸 볼 때, 피가 꺼꾸로 솟구쳐 올라왔다.
이소민이나 김문호가 그런 행위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자칭 급조 애국자들은 우리가 헐벗고 쫒기고 끌려갔을때 일본에 빌붙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 모으다가 이제는 그 돈으로 세상을 요리하려 들고 있으니 그것을 보고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는 사이에 중국정부로부터 행정관이 임명되어 오고 군대가 들어왔다. 상해에 모든 기관이 그들의 지시에 따라 운영되었다. 일본인이 소유하였던 재산을 처리하기 위하여 적산처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우리 한국인의 소유재산은 우리 교민단의 의견을 들어 처리했다. 교민단에서 몇 사람의 직원을 적산처리위원회에서 파견하여 우리 교포재산의 처리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중국정부는 일본인과 한국인 그 외의 외국인의 귀국에 따른 선박 등 모든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중국 내지로 피난갔던 우리 교포들이 귀국하려고 상해로 몰려들었다.[45]

10. 한국광복군을 부정한 트루먼 대통령

OSS 수장인 윌리엄 도노반(Willian J. Donovan) 국장은 중국 내 공작활동 점검을 마치고 1945년 8월 13일에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서거한 루즈벨트 대통령 후임으로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대통령이 되어있었다. 워싱턴에 도착한지 불과 2일 뒤 일본이 항복했다.

1945년 8월 18일, 도노반 국장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도노반 국장이 보고서 형식의 서한과 함께 하나 더 전달하려는 것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전문이었다. 도노반 국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가 보내온 전문"이라고 명시하면서 OSS는 그 동안 김구 주석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한국에 첩보 거점을 구축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진행해왔다는 보고도 빼놓지 않았다.관련기사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각하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드립니다.

우리는 한국의 독립에 대한 미국의 보증을 신뢰하며 한국의 독립이 동아시아 평화의 열쇠라고 믿는 바입니다. 우리가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함에 있어서 미국정부와 국민의 이해와 협조적인 지원에 크게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수 개월 동안 중국에서 대일항정을 전개하면서 진행된 한국-미국 간 긍정적인 협력관계가 지속되고 발전되기를 우리는 희망합니다. 자유를 희구하던 사람들이 이를 쟁취하기 위해 희생해 온 민주 세계의 평화가 자리 잡도록 미국과 함국의 국민들이 함께 노력하여 영원히 보장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나라는 되찾는 노력을 성심껏 지원해준 데 대해 3000만 한국인을 대신하여 미국 정부와 미국 국민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미국과 미국 국민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영속적인 평화를 유지하려는 물심양면의 노력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 각하, 따뜻한 개인적인 인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이 서한은 도노반 국장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김구 주석은 일본의 항복 선언 직후 서둘러 도노반 국장에게 재차 전문을 보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하기 위한 전문 서한을 함께 건넸다. 한국이 참전국 지위를 인정받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글 작전에 참여한 사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와 역할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뚜렷하게 인식시키고 싶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들기 위해 힘든 훈련을 받던 광복군에 대한 인상적인 기억과 열흘 전 중국에서 나눈 김구 주석과의 약속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던 그로서는 그만큼 책임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김구 주석의 서한은 백악관 비서실 콘웨이 부인의 도움으로 트루먼 대통령 책상에 놓였고 트루먼은 보고서를 읽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냉담을 넘어 격노했다.

1945년 8월 22일, 제임스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에게 보낸 대통령의 비망록에는 경멸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비밀로 분류된 이 비망록에서 트루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라고 서명한 김구라는 인물이 보내온 전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라고 서명한 김구라는 인물이 보내오고 도노반 소장이 전달한 첨부 문건에 관해 언급하건데 본인이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미 국무부의 관계자 볼렌(Mr. Bohlen)씨에게 질의한 끝에 알게 되었습니다. 도노반 장군은 그의 편지에서 김구 씨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라고 명시하고 있고, 도노반 자신이 그와 함께 한국에 첩보 거점을 구축하기 위해 작업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구 씨의 편지에 대해 내가 대통령으로서 답장을 보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국무장관은 도노반 장군에게 보낼 답신의 초안을 검토하기 바랍니다
국무장관은 도노반 소속 기관의 어떤 요원도 미국의 인정을 받지 않은 자칭 정부라고 내세우는 조직의 관계자가 보내온 서한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것은 매우 적절치 않다는 점을 도노반 장군에게 알려주기 바랍니다.

미 국무부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검토 문건을 작성했고 사흘 뒤인 8월 25일 번스 국무장관이 서면으로 보고했다.
대통령께 드리는 비망록
8월 18일 이른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라는 김구씨의 서한을 전달하여 보내온 도노반 장군에게 보내는 답신의 초안을 첨부해 보고드립니다.

별첨 :
1. 도노반 장군에게 보내는 대통령 답신 초안
2. 1945년 8월 22일 리히 제독이 보낸 비망록(반송)
3. 콘웨이 부인에게 보낸 1945년 8월 18알 도노반 장군의 서한(반송)
4. 1945년 8월 18일 도노반 장군이 대통령에게 보낸 비망록(반송)
제임스 번스(미 국무장관)

친애하는 도노반 장군
본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라고 자신을 내세우는 김구씨가 보내오고 귀관이 전달한 1945년 8월 18일 서한에 대한 답신이 불가피하게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자칭 정부의 대표가 우리에게 보내오는 서한을 전달하는 통로로 귀관 휘하의 요원들이 처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을 그들에게 지시해주면 고맙겠습니다.
건승을 빕니다
해리 트루먼

트루먼 대통령의 회신은 충칭 임시정부와 김구 주석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명백한 입장과 함께 경멸의 뜻까지 담고 있다. 서한을 전달한 도노반 국장 역시 대통령으로부터 심한 질책과 모욕을 받은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 지원 등에 관련한 비망록(3급비밀)

1942년 7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지원에 따라 대일항전에 대한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활동이 어떻게 달성될지에 관한 비망록이다.

1. 1919년의 한국혁명[46]이래, 한국 임시정부는 전 세계의 자유 한국인들의 기부금을 지원받아왔다. 임시정부는 1919년 이래 지속적으로 존속되어오고 있으며, 한국 및 인접지역에서 태업, 게릴라전, 그리고 온갖 종류의 파괴활동과 같은 혁명활동을 끊임없이 진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세계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혁명적인 활동과 파괴활동에 있어 한국임시정부와 같은 조직은 존재할 것 같지 않다.

도노반 국장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건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일항전공조는 미 국무성과 전쟁성의 지원 하에 진행되고 있음을 관련 문건을 통해 알 수 있다. 1942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이 보고서는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향후 공조 계획을 보고하기에 앞서 대한민국 임서정부와 이미 상당부분 공조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노반 국장은 마샬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한국인 대상으로 한 게릴라 양성소 설립을 위해 미국인 가운데 요원을 선발해 교육하는 계획을 허락받았으며, 미 국무성, 전쟁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공조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아가 "계획이 확정되는 즉시 중국 군 당국 그리고 중국 내 미군 지휘부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일항전에 공조하는 방안을 진행할 것"이라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 일본이 항복한 직후, 미국 정부는 그 동안 OSS의 주도로 미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에 실제로 진행된 공조에 대해서 조차 철저히 외면하고 부인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정은 물론이고 접촉까지 금지한 후, 한 달 뒤인 9월 25일에 OSS를 해체해버렸다. 동시에 도노반 국장도 해임된다. OSS는 해체령에게 불구하고 이름만 사라졌을 뿐, 제 각기 별도 부서로 이동하다가 2년 뒤 설립된 중앙정보국(CIA)에 포함된다. OSS는 CIA의 모체였다.

11. 한국광복군의 확군(擴軍)

확군이란 중국 내에 있는 한인청년(교민, 한적사병)들을 광복군으로 편입하여 광복군의 세력과 조직을 확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일은 일제가 패망한 일에도 추진되었다. 초모공작의 연장선상으로 미군정으로부터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지위를 받는 것을 목표로 했었다.

1945년 5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한 한-중간의 군사협정에서
중국의 각 포로수용소가 있는 한적포로는 감화를 거쳐 한국광복군에 넘긴다.
고 하여 중국군의 포로가 된 한인청년들을 중국측으로 인계받아 광복군으로 편입하고 있었다.

확군에 대한 방침은 광복 직후 결정된다. 제 3지대장 김학규 장군이 1945년 8월 17일 충칭(重慶)으로 와서 김구 주석과 이청천 총사령에게 확군에 대한 제의를 했다고 한다. 확군은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주요한 정책이다 활동방향으로 설정되었다.
확군의 의도
① 중국에 있는 한인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무사히 귀국
②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향후 건국군대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

임시정부는 중국축에 광복군 확군문제를 교섭한다. 김구 주석은 8월 24일 임시정부의 조속한 귀국을 요청하는 비망록을 장제스에게 제출하면서 "적군 중의 한적사병을 우대하여 줄 것과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광복군에 이교(이첩한다는 뜻)하여 임시정부의 기반대오를 편성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장제스는 이러한 김구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중국 국만당의 우티청(吳鐵城)이 이러한 김구의 요구를 그대로 정리하여 장제스 총통에게 재가를 올렸고 장제스가 이를 결재한 것이다.

일본 도쿄만(東京灣)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이 있던 1945년 9월 2일에 임시정부는 대변인의 성명을 통하여 중·미·영·소 등 연합국의 협조로 한국 해방을 가져온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아래와 같은 임시정부의 3대 임무를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3대 임무
① 즉시 고국으로 돌아가서 동맹국과 협력, 일본인을 몰아낸다.
② 한국 임시정부의 권한을 국민에게 반환하고, 자유 선거를 실행하여 정식 정부를 조직한다.
③ 한국 인민과 동심 육력(同心戮力)하여 한국으로 종속(從屬) 독립하게 한다.

또, 뒤이어 9월 3일에는 김구주석의 명의로 아래와 같은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서와 함께 전문 14개 항목의 임시정부 당면 정책을 발표하여 해방을 맞이한 임시정부와 국내외 동포의 갈 길을 명시하였다.

고(告) 국내외 동포 서
친애하는 국내외 동포들 !

최후의 벽루(壁壘)를 고수하며 완강히 저항하던 일본 제국주의자 파시스트 강도는 9월 2일에 마침내 항서(降書)에 서명하게 되었다.

이번 일구(日寇)의 패망은 온 세상이 환호하는 일이며, 더구나 우리 3천만 한국 민족의 눈으로 조국의 해방을 보게 되니 그 흔희작약(欣喜雀躍)의 정서가 어떠할 것인가.

본 정부가 지금 30년래로 오매불망하던 조국을 향하여 전진하는 전야에 있어서 본 주석은, 특히 본 정부의 광복 사업을 위하여 애호 독려하여 주던 수만 동포와 본 정부가 중국 대륙에 유리 전전함을 따라 공동 분투하던 다수 동지들에게 본 정부의 부하한 바 사명을 피력하려 하니, 충심으로의 감격 흥분을 무엇이라 말하기 어렵다.

한 국가의 흥망과 한민족의 성쇠는 결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전일 우리나라 국운이 단절되는 데에도 반드시 허다한 수치스러운 요인이 있었으며, 금일 우리 조국의 해방도 반드시 각고 장렬한 노력의 결과이리라는 것은 3척 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일 허다한 선열의 보귀한 열혈의 댓가와 중·미·소·영 등 동맹군의 영용 혁혁한 전적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불세(不世)의 공이 있을 수 있었으랴. 그러므로, 우리가 조국의 독립을 눈 앞에 바라보고 있는 이 때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우리 선열의 공적을 상기하고 맹군(盟軍)의 위업을 선양하면서 열렬한 사의를 표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본 정부에서 제정한 건국 강령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건국 시기로 들어가는 과도적 단계이다. 다시 말하면 아직 복국(報國)의 임무를 완성하지 못 하고 뒤따라 건국 초기가 시작되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의 임무는 지극히 번잡하고 우리의 책임은 배나 더 중대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우리 동포는 반드시 우리의 일언일자(一言一字)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모두 조국 독립 완성에 영향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매사에 먼저 치밀하게 분석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며 그 명확한 판단으로 매진하여 성공에 도달하기를 깊이 바라는 바이다.

본 정부는 여기서 당면 정책을 아래와 같이 의정하였다. 이것으로써 본 정부가 현단계에서 맡은 바 사명을 중외에 천명하려는 것이며, 또한 이것으로써 본 정부의 전진 노선과 제위 동포의 당면 진로의 지침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친애하는 동포들! 우리 조국의 자유와 민주 단결을 위하고 국제간의 안전과 인류의 평화를 증진하기 위하여 공동 노력으로 본 정부의 당면 정책을 실시하자. 공동 흥기(興起)하여 휘황 찬란한 전도를 개척하는 데 힘쓰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임시정부 당면정책
① 본 임시정부는 최단 기간내에 곧 환국한다.
② 우리 민족의 해방 독립을 위하여 혈전(血戰)한 중·미·소·영 등 우방 및 그 민족과 절실히 친목하여, 맹방을 협조하고 연합국 헌장에 의거하여 세계 일가(一家)의 안전 평화를 실현한다.
③ 연합국 중의 주요 국가인 중·미·영·소·불 5개 강국과 더불어 먼저 우호협정을 체결하고 따로이 외교의 길을 연다.
④ 맹군(盟軍)이 한국에 주재하는 기관 중에는 일체 필요한 일을 적극 협조한다.
⑤ 장차 열리는 평화 회의 각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한국으로서 가져야 할 발언권을 행사한다.
⑥ 국외 임무의 결속과 국내 임무의 전개 등이 서로 접속 교체되는 기간내에는 과도 조치가 필요하다. 장차 전국적 보통 선거에 의거하여 정식 민주 정권이 수립되기 전에는 임시로 국내의 과도 정권을 수립하여야 하므로 국내외 각 계층 각 혁명 당파, 각 종교 집단, 각 지방 대표 및 저명한 각 민주 영수 회의를 열어 임시 정권을 조직하도록 적극 노력한다.
⑦ 국내에서 과도 정권이 성립되는 대로 본 임시정부는 임무가 완성된 것을 인정하고, 곧 일체의 직권 및 소유 문서·물품을 과도 정권에 교환(交還)한다.
⑧ 국내에 건립된 정식 정권은 반드시 독립 국가·민주 정부·균등 사회를 원칙으로 하는 새 헌장에 의거하여 조직되어야 한다.
⑨ 국내에서 과도 정권이 아직 성립되기 전의 국내의 일체 질서 및 대외 일체 관계는 본 임시정부가 임시로 책임지고 유지한다.
⑩ 교포의 안전 및 귀국하는 일과 국내외 거주 동포를 구제하는 일을 신속히 처리한다.
⑪ 적인이 시행하던 일체 법령의 무효와 새 법령의 유효를 선포하는 동시에 적의 통치 하에서 발생된 일체의 범죄를 사면한다.
⑫ 맹군과 협상하여 적산을 몰수하고 적교(敵僑)를 처리하는 일을 진행한다.
⑬ 맹국과 협상하여 적군 중에 강제 출전하였던 동포 군인을 수합, 국군으로 편성한다.
⑭ 독립 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자 등은 공개적으로 엄중 처벌한다.

대한민국 27년(1945년) 9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

광복군의 확군활동은 중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1지대 2지대 3지대에서 각 중국의 주요도시로 대원들을 파견하여 확군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확군활동은 그것이 전개된 지역이 광대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된다.

각 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역에 대원을 파견하여 그곳에 있는 일본군 소속의 한국장병들을 접수, 광복군으로 편입시켜 잠편지대를 편성하였다. 1945년 10월 말까지 7개 도시에 잠편지대가 편성되었다.
한커우(漢口) 지대장 권준
난징(南京) 지대장 안춘생, 부지대장 지달수
항저우(抗州) 지대장 김관오
상하이(上海) 지대장 박시창, 부지대장 이하유
베이핑(北平) 지대장 최용덕
광둥(廣東) 지대장 최덕신[47]
국내(國內) 지대장 오광선
총사령부(總司令部) 주상해판사처 처장 김학규
파일:SSI_20210228222902_O2.jpg
김구 주석 사열 기다리는 광복군
1945년 11월 5일 중국 상하이 장완비행장(上海江灣機場)에 태극기를 든 한국광복군 대원들이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사열을 받기 위해 정렬해 있다.[48]

그러나 광복군의 확군활동은 중국측의 제재를 받게 된다. 중국측은 광복군의 확군에 우호적이었지만, 국내 정세가 변화하면서 광복군의 확군 방침이 달라졌다. 중국공산당이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현실에서 대규모 한인무장단체를 불안요소로 본 것이다.

1945년 12월 22일 한적포로처리변법(韓籍捕虜處理辨法)을 발표하여
각지 한국광복군의 지대, 구대, 분대는 본 군사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원상태로 유지하며 허락없는 활동을 금지한다.
라고 한 것이다.

미국의 對한반도 정책도 크게 작용한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임시정부를 환국시켜 이들을 이용하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만,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던 미국은 끝내 임시정부를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군정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입국을 거부하였고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전부 개인자격으로 환국해야만 했다.
김국주 : 우리 광복군 생활은 오직 일본을 타고하고 조국을 광복하는 것이 전체 목표였는데 타력에 의해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니 무한한 허탈감이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은 일제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술회했지만 어디 그 분만의 심정이었겠습니까? 광복군에 몸담고 있던 모든 동지들의 공통된 심정이라고 보겠습니다. 그 때 우리의 당면 문제는 중국에 있는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아가서 광복군을 국군으로 편성해서 국내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이징에는 김광언, 텐진에는 신홍균, 난징에는 장호강, 카이펑에는 박영준, 쉬저우에는 변영근, 차약도, 벙뿌에는 제가 장이 되어 현지로 나가서 교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광복군의 증편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현희 : 그 때 몇 명이나 같이 나갔습니까?

김국주 : 여러 분이 고인이 되었죠. 김영일, 문수열 동지를 비롯해서 몇 명은 생존해 계시고 김용관, 김병학, 조대균, 정우진 그 외 몇 동지는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광복군의 임시 편성 지대를 만들고, 일본 군대 내에 있는 한적 사병을 흡수하여 해외 건군을 해서 국내로 들어오기로 했었는데, 결국 임시정부 자체가 개인 자격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국제 정치의 냉혹성은 오늘 날 우리 민족을 분단의 아픔으로 묶어두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요는 광복군이 맞이하는 조국의 광복은 중국땅이 아니고 한국땅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제의 조기 항복은 이 민족을 분단의 비극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일제에 항거한 전후 50년 동안 60만의 선열이 희생되었는데도 우리 민족은 타력에 의해 광복이 되었다고 해서 자기 민족의 업적을 부정하는 지난 날의 사회 지도 계층의 사고 개념이 수치스러울 뿐입니다. 여하튼 우리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을 했는데 귀국할 때 피난민을 수용하는 LST를 타고 나오면서, 광복군 중에는 한적 사병들한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49]

11.1. 한국 광복군 예비대(韓國光復軍豫備隊, 1945년 9~11월(추정) ~ 1947년(추정)

파일:광복군예비대 금고발견.png
1972년 1월 13일, 서울시청 본관 4층 복도 북쪽의 12호 창고내 벽에 위치한 한 금고는 일제시대에 설치된 이후 열쇠가 없어 잠겨둔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 금고는 1971년 12월부터 개시된 청내 창고에 대한 일제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개방이 결정되었으며 금고의 크기는 가로 2m, 세로 1m, 높이 2.2m였다.관련기사
파일:00500883_20180304.jpg
우리가 알고 있는 광복군 군복은 광복 이후 국내 일본 학도병 군복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발견 당시 기록사진[50]

1월 12일 서울시 당국은 금고제조 전문기술자에 의뢰하여 오후 4시부터 개문 작업을 시작, 13일 오전 10시 반 문을 용접기로 절단하는데 성공하였다. 금고 안에는 서류, 책자 등과 함께 폭발성 물질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깡통 등이 발견되어 경찰관 및 관계자들을 입회 시킨 후 물품 정리를 계속하였으나 혹시 사고가 날 것을 우려하여 일단 봉인한 후 같은 날 밤 11시 반부터 작업을 속행하여 14일 새벽 4시까지 물품 정리를 완료하였다.

서울시는 발견 물품의 목록을 정리하여 문화공보부[51]에 조사를 의뢰하였으며 문화재 관계관들을 통한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 진 후 발견 물품들은 문화공보부 및 군 기관에 이관되었다.
발견된주요물건
▲대한민국 개선·환영대회 약도
▲각 정당 단체 해설 1권(45년 여론사출판)
김구 선생 친필 족자 1개
▲임시정부 환국·환영대회 계획서 1장
▲군무부장 김원봉 보고서
▲수표책 2권 (조선식산은행 1945년 12월)
▲대한 국군 준비 총사령부 공고문(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주석 김구)
▲우리 정부 27년 약사1권
▲신 조선보(신문 2장)
리청천(백산)광복군총사령이 김승학씨에게보내는 명함메모
▲한국 광복군 개성원호회의 경리관계서류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용(책 1권)
▲김윤식씨 서류 8장
▲한국 광복 예비군대 발행 증명서 및 금전 출납부
▲북경 사진첩
▲소화(昭和) 7년(=1932년) 경성 지도 37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예비대 사령장 5장
▲광복군 제 2지대 편성관계문건
▲군복 상의 2개, 하의 1개
▲전투모 5개, 정모 1개
▲인물사진 57장
▲조선은행권 2천7백4원·만주은행권 81원
▲일본은행권 6만5천9백76원5전

1945년 12월 16일 조선일보 광복군 예비대 이전에 대하여 보도된 적이 있다.
파일:광복군예비대 이전.png
광복군 예비대 본부 이전
7년 전(1938년)에 임시정부 특명을 받고 입국한 유진식씨를 중심으로 사방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군 정신으로 편의대를 조직하여 왜적의 가혹한 법망 속에서 지하공작을 계속하여 오다가 1945년 8월 15일 이강차 체계를 한층 강화하여 건전한 지상운동으로써 국가의 가장 견실한 간성 인재를 양성, 9월 6일 대전시에서 한국 광복군 예비대 훈련소를 설치하는 동시에 절대후원기관인 본 협찬회도 조직된 것으로 금반 임시정부 환국을 일으켜서 예비대 본부는 서울 역전으로 협회는 서울시 고시정 19번지로 각각 이전하고 가장 질서정연히 오직 국방공작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중인데 그 부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고문
조성환 회장
조소앙 부회장
서창휘 간사장
임지수 총무부장
한인구 재무부장
림지수 사업부장
홍종오 선전부장
이재호 실천부장
조두환 외사부장
이범용 조사부장
정길수 참의원
의장 정재하
부의장 이종영
참의 서창준, 이상준, 이병기, 송태식, 권태훈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이었던 장준하(張俊河)는
1945년 11월 23일에 오광선(吳光鮮)이 김구(金九)의 지시에 따라 귀국하여 국내지대를 만들었고 대원들은 모두 국내 청년이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광복군 국내지대, 기타 국군준비대 등 각종 단체들이 많았는데, 광복군예비대는 김구(金九)와 가깝게 지내던 김승학(金承學)를 배경으로 하여 조직된 것 같으며 당시 국내지대 요원은 100명 정도로 환국한 임정요인들의 경호역할을 맡았다.
고 언급하였다.

광복군예비대의 창설과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김용훈(金容勳), 김여산(金如山)의 증언이다. 당시의 보도 기사 간 증언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어 각각을 분리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파일:예비대부사령관 김용훈씨.png

김용훈(金容勳, 1972년 당시 그의 나이 64세) 증언

『동아일보』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52]
광복군예비대는 1945년 9월 유진식의 주동으로 대전에서 창설, 공식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예비대였다. 유진식은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 암살[53] 등의 활동을 했던 김구(金九) 휘하의 한인애국단 동지회원이었으며 광복군예비대 창설 당시 총사령은 김형동이었다. 이 광복군예비대는 창설 후 두 달 뒤 서울로 옮겨 후암동 병무청 자리[54]를 본부로 사용하다가 다시 남대문 경찰서 부근으로 위치를 옮겨 임시정부 환국 환영 준비와 국내 치안유지를 위해 힘썼다.

『조선일보』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55][56]
당시 서울의 치안 확보를 위해 서울시청에 (광복군예비대의) 파견대가 주둔, 별관 일부와 본관 2층 회의실을 사용하였는데 1947년 광복군예비대 협찬회에서 횡령사건이 일어나 관계 서류를 압수 시청파견대에 보관시킨 것이 금고 안에서 발견된 서류들인 것 같다.
고 증언하였다.

『경향신문』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57]
금고 안에서 발견된 물건들은 광복군예비대 파견대와 광복군(예비대)협찬회에서 맡긴 물건들로 1947년 1월 광복군예비대협찬회에서 문제가 생겨 협찬금 관계 서류를 서울시청 파견대에 가져다 보관시켰는데, 당시 보관책임자인 송재흥(宋在興)으로부터 서울시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에 보관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광복군예비대는 유진식(일명 유진만)을 중심으로 김용훈(金容勳)과 권오훈(權五勳), 한강현(韓康鉉) 등이 1945년 9월 1일 귀국하지 않은 광복군과 임정요인들의 환국 준비 등을 위해 대전에서 결성되었다. 광복군예비대 창설의 주역인 유진식은 윤봉길(尹奉吉), 이봉창(李奉昌)등 의사 등을 낸 한국애국단 회원으로 조선총독[58]을 암살하려다 무기형을 선고 받고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과 더불어 출감한 독립투사였으며 유진식이 창설한 공식명은 재중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예비대(在中大韓民國臨時政府 光復軍豫備隊)였다.

광복군예비대는 1945년 11월 대전에서 서울 용산구 후암동 당시 병무청사로 임시본부를 옮겼으며 예비대를 위한 협찬회가 결성되었다. 그 후 1946년 5월 본부를 다시 서울역 앞 남대문서 자리에 있던 일신빌딩으로 옮겼고 지방조직 확대와 김구金九 주석 등 상하이(上海) 임정요인 환국준비에 앞장섰다.

광복군예비대의 대원 숫자는 8,500명 가량으로 총사령은 중국바오딩군관학교 출신 김형동이었고 부사령은 김용훈(金容勳) 본인이 맡았다. 그러던 중 좌·우익 세력이 서로 충돌, 서울의 치안이 불안해지자 예비대는 시청 2층 회의실을 빌어 사용했으며 이 장소에 광복군예비대의 관계 문건과 예비대협찬회의 장부 등을 보관하였다.
고 한다.

김여산(金如山, 1972년 당시 58세)의 증언

『동아일보』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59]
광복군예비대는 전위대에서 3개 중대 규모로 1946년 2월 서울시 창신동 강문중학교 자리에 본부를 두고 발족되었다. 당시 서울운동장에서 신탁통치 환영대회가 열리려 하자 이를 분산시키기 위해 총격전까지 벌어지고 관련 인물들이 체포, 투옥되었는데, 그때 예비대에서 쓰던 비품과 문서들이 압수되어 서울시청으로 옮겨 졌을지도 모른다고 김여산(金如山)은 증언하였다. 또한 금고에서 발견된 토지대장, 헌금 문서 등은 일제시대 자작(子爵)을 지낸 이예한(李豊漢, 1885~1950)등이 기증한 것 같다고 언급하였다.

『조선일보』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고 안의 물품들은 1945년 9월~1946년 2월까지 서울에 있었던 광복군 국내지대(國內支隊)인 광복군예비대의 것으로, 김여산(金如山) 본인은 1945년 9월 만주 허투알라(興京)에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의 명에 따라 ‘대한건국군 전위대사령부 부사령’이란 비밀 직책을 받고 귀국하여 서울 창신동 현 용문중학교 자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건국군 창설활동을 벌였다. 당시 존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가 사령관으로 있었던 미군정이 국방경비대 창설을 반대하는 자신을 투옥하였고 1948년 출소해 보니(실제는 1947년 7월 출소) 사령부에 있던 서류·장비·재산 일체가 없어졌으며, 어떻게 서울 시청 금고 안에 보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광복군예비대의 대원수는 1972년 서울시청 금고 개방 당시 김용훈(金容勳)의 증언에 따르면 8,50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다만, 오광선(吳光鮮)휘하의 광복군 국내지대의 요원이 100명 정도였다는 장준하(張俊河)의 증언과 환국한 임시정부 요원들의 경비를 담당한 광복군예비대의 규모가 약 100명이었다는 언론보도 등을 고려하면 이는 과장된 숫자로 보인다.

광복군예비대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을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해방정국기에 국내에 창설, 운영된 군사조직이다. 광복군 예비대는 1972년 서울시청 12호 창 고내 금고에서 관련 유물이 대거 발견됨으로써 그 실체가 공개되었으며 이 때의 발견 자료 중 일부가 군기관으로 이관되어 현재까지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과의 연관성

중국에서의 한국광복군 활동에 직접 참여한 이범석, 장준하 등의언급으로 볼 때 광복군예비대의 설립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는 중국의 한국광복군 지휘부 등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국내의 창설된 공식적 성격을 지니는 광복군 지부는 오광선(吳光鮮)을 지대장으로 하는 광복군 국내지대였다.[60]

다만, 육군박물관 등 현재 기관 소장품 중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당시 서울시청에서 발견되어 신문기사에 언급된 광복군예비대 관련자료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 국내지대와 관련한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환국 환영대회 관련 문건, 군무부장 김원봉 보고서: 김구 임시정부 주석으로 보내는 광복군 국내 제 2지대 설치에 관한 공문, 제2지대[61] 편성 관계 문건, 김구 명의의 대한국군 준비 총사령부 공고문,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이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부의 고문 및 국내 광복군 제2지대장 역임한 김승학(金承學)에게 보내는 명함메모, 한국광복군 개성 원호회의 경리관계 서류철이 그것으로, 광복군예비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광복군 국내지대의 설치, 편성과 관련하여 일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있다.[62]

또한 당시 임시정부가 해방 후 국내에 들어갈 광복군의 조직과 세력을 확대하고자 적극적인 확군활동(擴軍活動)을 펼쳤다는 점, 광복군예비대 주요 간부에 독립군·광복군 활동을 직접 수행했던 인물들이 포함된 점, 광복군예비대가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이 머물렀던 장소를 경비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면 국내 임시정부 지지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광복군 예비대가 임시정부 및 광복군 국내지대와 교류 혹은 그 이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앞서 언급한 자료들은 현재 실물로서 확인되지는 않으므로 추가적인 자료 발굴과 확인이 필요하다.

11.2. 가짜 광복군 논란

서훈 잡음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① 친일파 서훈
② 5단계로 나뉜 건국훈장 등급
③ ‘가짜’ 또는 ‘자격 미달’ 광복군이다.[63]

광복군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사회에서 사실상 금기에 가까웠는데, 나중에 후술할 철기 이범석 장군의 숙군(肅軍)사업 과정에서 무분별한 양민학살 및 군내 좌익분자 숙청하면서 동시에 진행한 김구파 광복군들을 숙청한 적이 있었다. 이는 한국전쟁때도 진행이 되었으니 군, 경찰 내부의 요직헤 있던 김구파 광복군 출신들은 수기를 남기지 않고 조국에 대한 염증만 안고 있는채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다.[64]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때는 입조심을 해야하는 경우도 많았거니와 또 시간이 지나면 기억력이 떨어지거나 기억착오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1960년 7월 29일 열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화암 선생은 사회대중당 후보로 전라북도 김제군 갑 선거구에 출마했다. 이때 정화암은 곽상훈으로부터 사상공세를 당하게 된다. 곽상훈은 당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던 조한백을 지원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곽상훈은 상대방 후보인 정화암을 사상으로 공격하였다.
"정화암은 무정부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의 사촌쯤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이나라 정치를 어떻게 맡기겠습니까"
정화암 선생은 거물급 독립운동가였지만, 그의 수기가 만들어진 것은 그가 사망한 1981년이 지난 1년 후나 되어서야 나오게 된다.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도 없고 독립운동에 대한 사상조차도 반공이념 논리에 뭍히고 사람들이 따라주니 말이다. 독립운동의 거물급도 이런데, 그 밑에서 일했던 대원들의 수기는 말할 것도 없이 역사 속에 뭍히는 경우가 많다.

광복군 숫자에 과장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기존의 광복군에 '해방 후 광복군'이 대거 포함됐기 때문이다. 2005년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 취재에 의하면, 1945년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이다. 이들 중 해방 후인 8월 19일에 입대한 사람도 있다.

광복군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이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광복군 현세’를 보면, 1945년 3월 현재 광복군의 수는 총사령부 108명, 1지대 89명, 2지대 185명, 3지대 119명, 기타 13명 등을 합쳐 514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중국인의 수는 65명으로 이를 뺀 광복군의 실제 인원은 449명이다.#

특히 광복군의 확군 정책에 의하여 일본군포로로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한인출신 포로들이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무더기로 승계되고 이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돼 임시정부과 같이 귀국하면서 인원이 부정확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가짜광복군 논란은 토교대(土橋隊)을 비롯, 비호대(飛虎隊)와 3지대 등에서 주로 불거지고 있다.[65]
그 무렵 상하이에는 항전지구에서 독립운동하다 왔다는 사람과 윤함지구(일본군 점령지)에서 지하공작을 하다 왔다는 하는 정체불명의 투사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나서 "동포여, 나를 따르라"고 소리치고 떠돌아다니면서 임시정부를 팔아대고 있었다. 누구를 알고 누구와 같이 독립운동 했다고 약장수 고약 팔듯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놀아나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부지기수 늘어나고 있었다. 그 정체불명의 투사들이 임시정부의 누구를 알고 누구와 같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는 그 명사의 이름은 우리는 물론 오래된 상하이 교민들도 아는 사람이 없는 걸로 보아 사기꾼들임이 분명했다. 체포하려고 수배하자 36계(도망) 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이 모두가 홍커우 쪽에 사는 신 상하이 교포들을 상대로 사기치고 다니는 자들이었다.
일제 치하 교관 하나만 잘 사귀면 일확천금하던 때를 잊지 못하고 있는 일부 신 상하이 교포들 중에는 아직도 일확천금을 꿈꾸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속이고 속고 이용하려다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면서 해방직전 혹은 직후 일제가 패망하였으니 광복군으로 사칭해도 전투할 일은 없고 주로 광복군 지위를 이용하여 귀국할 때, 한자리 해볼 생각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광복군 제 1지대 2구대장 이소민 상교의 저장성 공작대장이라고 하는 전○○이란 사람이 나타났다. 이소민 상교가 아니고 장군이라고 하며 우리가 광복군 제 1지대 2구대 이소민 장군의 소속이라면 자기 직속상관의 계급은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상하이는 저장성 공작대 산하에 있는 만큼 공작대장인 자기에게 허락받지 않는 상해판사처는 인정할 수 없다는 얼토당토 않은 모략을 하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다.
그 정체를 수소문해 보았더니 1945년 4월 하순경 17명이 난징을 탈출하여 동년 5월 제 3전구 꽝더쎈마오린(廣德縣茂林)[66]에 와서 반일공작을 구상 중일 때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빈손 들고 돌아가게 된 신세를 어디다 하소연 할 데가 없어 전○○은 동대 저장셩 특파원이라는 직함을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전○○은 저장썽 어디에 연고를 둘만한 곳이 없어 상하이에 와서 상하이에 자기 관할이라고 행정구역조차 구별할 줄 몰라 망발하고 다니다 상하이 교포들에게 호되게 욕을 보고 난징으로 도망쳤다.
그 외에도 항일지구에서 해방 후, 상하이에 와서 남의 일에 훼방이나 하고 흑색선전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져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현상을 일찍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일부 독립투사들이 상하이임시정부를 찾아와서 자기 개인 중심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열을 내서 남을 헐뜯고 욕하던 때와 심지어는 왜놈의 스파이로 몰아붙이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며 세상의 온갖 추잡한 소문을 내서 모함하고 망신을 주던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판사처에 모여 앉아 한창일때 오래된 상하이 교민들은 옛날부터 항상 듣던 말들이라고 흥미를 두지 않고 있었지만, 새로 온 상하이 교민들에게는 처음 듣는 말들이라 흥미를 느끼고 귀담아 듣느라 점심때를 잊고 판사처 한쪽의 자리를 비워줄 줄 모르고 있었다.[67]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고 서훈 이후에도 죽을때까지 자신의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사후 또는 2010년 넘어서 유가족들이 출판하는 경우가 종종있는데, 살아 생전에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 그걸 이용해서 개명하면서까지 사기꾼들이 달려들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 유기석의 한교전지공작대를 사칭한 절강성 공작대였고 이소민 상교[68]의 계급도 모른채 순수 자기 상상력에 의존해서 사칭한 케이스이다.

11.3. 루머 "박정희 비밀광복군설"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은 일제말기 박정희가 독립군인 광복군의 일원으로 비밀공작원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실은 앞서 말했던 광복군의 확군(擴軍) 과정 즉, 일제가 패망 후에 만주군, 일본군 소속 한국인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해방 후 광복군'에 잠시 있었을 뿐이었다.[69]

이 비밀광복군설의 근거는 196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광복군 출신의 박영만이 출판한 '소설' 광복군에서 출발한다.
파일:소설 광복군.jpg
박영만, 소설 광복군, 협동출판사, 1967

상.하 2권짜리 책으로 상권은 광복군 3지대장이자 확군(擴軍)과정에서 총사령부 주상해판사처장을 맡았던 백파 김학규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고, 하권은 박정희[70]가 주인공이다. 이 책이 박정희가 광복군의 비밀요원이었다는 잘못된 내용을 담아 보수 일각에서 박정희의 친일논란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소설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 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
고 증언한다.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묘사한 책은 더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합참의장,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71]은 1984년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서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에 가담한 경위를 이렇게 기록하는데, 광복군 출신 박영만의 논 픽션의 소설 광복군이 계속 와전되면서 진실로 믿어버리게 된다.
파일:장창국 육사.png
장창국, 육사졸업생, 중앙일보사, 1984.
“신태양악극단이 1945년 2월9일 (만주군) 7연대에 들어가 공연을 했다. 광복군은 이 악극단에 잡역부를 가장한 공작원 이용기를 투입했다. 이씨는 부대 간부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 중위와 신 대위에게 줬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72]

파일:박정희 만주일보.jpg

물론 1942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했고 수석 졸업생으로 "대동아 공영권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며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박정희 자신도 광복군을 부인하고 만주국군 동료들도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5·16 쿠데타 동지인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도 박 전 대통령의 비밀광복군설을 부인하는 증언을 한 것이 정운현이 쓴 <실록 군인 박정희>에 나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1945년 7월 중위로 진급한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10일에 출발하여 17일 집결했으나 일본이 패망 소식을 접하고,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해제당했다.

1945년 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6단과 함께 미윤으로 이동한 후, 9월 21일 도망치기 위해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지휘하는 제1대대(평진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으나 광복 이후에 편입이 된 것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과는 무관하다.

1946년 4월 평진대(제1대대)가 해산한 후, 1946년 5월 8일 미군정의 방침에 의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73]

12. 한국광복군의 국내귀국

중국정부와 연합군 총사령부 사이에 한인 송환문제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고 1946년 1월부터 미군정 당국 주도하에 한인들의 송환이 이루어졌다. 1차로 2월 하순 칭따오(靑島)항에서 광복군 대원들이 교포들과 함께 귀국하였고 이후, 중국의 여러 항구에서 미해군측이 제공한 LST함정으로 광복군의 귀국이 계속된다.
1946년 3월 4일, 오후 2시부터 승선을 허락한다고 해서 그날 점심은 셋째 형과 천더썽, 박시준 두 형과 나 4인이 합석을 했다. ...(중략) ...나 자신은 임정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고국으로 돌아간 마당에 내가 피난민의 신세가 된 것이 부끄러울 것이 없었으나 후세 사람들이 볼 때 나라를 찾아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서 줄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 걱정이면 걱정이었다. ....(중략)... 우리가 승선할 배는 L.S.T.미해군 함정 3척이 나란히 있는 중에 맨 앞쪽이었다. ...(중략)...오후 6시쯤 되자 배는 기관소음이 커지고 고동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포강을 빠져나올때는 밤이었고 파고에 밀려서 배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중략) 3월 10일에 부산항에 기항한 배는 방역검사와 허열병 예방소독으로 인하여 13일 상륙이 허락되었다.[74]

광복군 총사령부 수뇌부는 광복군 전 대원들과 교포들의 수송이 완료된 후 최종 선편으로 귀국한다.
1946년 5월 16일 총사령부 이청천 장군은 광복군 복원선언을 발표하여 광복군의 공식적인 해체를 선언하고 1946년 5월 26일 국내로 귀국하게 된다.

하지만, 광복군의 지위와 편제를 유지하며 귀국하는 길은 미국과 미군정에 의해 거부되고 차단된다. 대부분 민간인 난민[75]과 함께 귀국 행렬에 끼어 인천항,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고 일부는 만주와 북한 지역을 거쳐 개성으로 귀국했다. 이들의 귀국 후 활동은 미군정에 의하여 철저한 감시를 받았고 결국 해체된다.
1946년 2월 20일, 중국에서 인천으로 귀국한 광복군 2명이 간첩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미군 첩보부대에 체포된 사람은 광복군 백순보 소령과 강공희입니다. 미군 수사 당국은 강공희라는 이름이 가명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강공희는 첫 심문에서 자신은 한국에서 첩보 활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선발되었다고 진술했습니다. 또 다른 1명인 백순보는 광복군 소령이며 강공희의 직속상관이라고 밝혔습니다. 첩보부대는 광복군 2명에 대한 수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1946년 2월 12일, 미군정 G-2보고[76]는 광복군 간부가 미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모를 겪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광복군에 관한 보고입니다. 광복군은 김구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조직입니다. 최근 군정은 이 단체의 해체를 명령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2월 12일 중국에서 중대장이었던 허상신[77]이 미군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미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진행된 취조에서 허상신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귀환하는 광복군의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고 언젠가 서울에서 다시 규합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최근 김구 주석을 방문한 바 있으며 그는 곧 임시정부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자신이 입고 있는 미 군복은 중국에서 미군과 함께 일할 때 지급받은 것이며 한국 귀국 시 소지할 수 있다록 허용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허상신은 구금상태에서 풀려났습니다.

1946년 2월, 미군정 정보 보고에 따르면 광복군은 미국과 미군정의 적대 조직으로 간주되어 국내에서는 물론 중국에서도 미군이 파악하고 있었다. 1946년 2월, 주한미군사령부 상하이 주재 연락 사무소 요원들은 OSS와 함께 이글작전을 준비했던 광복군 이범석 장군의 동향을 보고했다. 미군 측은 이범석 장군이 중국에서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을 대리하는 직책을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중국 정부 당국은 이범석 광복군 중장이 그 자신과 광복군 전 장병들의 본국 귀환을 위해 도움을 받으려고 애쓰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범석 장군은 자신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총참모장이며 김구 주석의 중국 대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정보 보고에는 중국 내 한국 거류민 협회가 광복군의 지원 업무를 주도하고 있는데, 과거 김구 주석이 설립해 현재는 장흥 대령이 이끌고 있다며 매우 정치 지향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중국 내 한국인 군인[78]들을 휘하에 두려고 애쓰고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군정 상하이 주재 연락 요원들은 장흥 대령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시에 따라 중국 국민당 군대에 소속된 한국인 장병들에 대한 군사훈련을 시작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를 위해 중국 키왕완(Kiangwan) 기지[79]에 일본군 출신 한국인 병사들로 구성된 조선청년협회를 설립했다는 것이다. 또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 출신 한국인 장병 전원에 대하여는 향후 한국 귀환을 별도로 진행하기 위하여 별개의 조직 아래 두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보고있다.

미군정 상하이 사무소는 중국군이 1945년 1월 10일,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중국 내 한국인 출신 군 병력은 1만 1,622명, 민간인은 4만 5천명이라고 보고했다.

1946년 2월 15일, 미군정 정보처는 중국 텐진에서 출발해 인천에 도착한 광복군이라고 주장하는 60명을 심문한 결과, 국민당 정부와 임시정부의 조선전재민구제회가 함께 한국인들의 귀국을 돕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중국과 광복군 간의 긴밀한 협조관계가 드러났다고 보고했다. 또 광복군 교화 교육을 마친 광복군 병사들로 하여금 김구 주석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충성 맹세를 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심문을 받은 60명 가운데 57명은 구제회로부터 난민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광복군에 입대해 1~3개월 과정을 밟으면서 의식화 교육을 마쳤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들은 자격을 완전히 갖춘 광복군 병사로서 현역 소집대기 상태에 있게 된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국의 공식 국가수반인 김구주석에게 충성을 서약했습니다. 심문을 계속한 결과 중국에 체류 중인 광복군은 날로 증원되고 있으며 한국이 완전 독립이 될때까지 중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한국에 귀국 중인 광복군 인원은 아주 적은 수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 정보 보고는 광복 직후 김구 주석을 도와 광복군의 세력 확장을 주도한 인물로 장흥 대령을 지목하고 있었다. 장흥 대령은 1903년 경기도 고양 출생으로 1927년 8월 여운형(呂運亨)의 추천으로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입학하여 마친 뒤 중국군에 입대했다. 1935년 5월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의열단을 조직한 약산 김원봉[80]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했다. 난징헌병사령부에 소속되어 독립운동가의 신변을 보호했고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한 후에는 일본 첩차들이 수집한 정보를 탐지해 조선혁명당 고위층에 전달, 장애 요인을 제거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또 중국에 있는 일본군 내 한국인 학병 수십명을 집단탈출시켜 광복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광복군 참모로 전임되어 교포의 안전한 귀국을 지원한다. 국군 창설에 참여하여 1949년 초대 헌병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김구 암살 사건이 벌어진 직후 사령관직에서 해임된다. 임명 4일만의 일이다. 이후 제 6사단장을 지냈고 예비역 소장을 전역해 원호위원장[81]을 거쳐 광복회 부회장을 역임한다.

장흥 대령의 발자취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과 미군정이 향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간의 충돌가능성을 예견하고 친중국 성향의 광복군에 대하여 적대 및 차단 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만 정부 수립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를 기용하면서 김구파 광복군은 군과 경찰 내에서 숙청이 된다.

13. 광복군 복원선언(光復軍 復員宣言) - 1946년 5월 16일, 공식해체

1946년 5월, 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 선전과장으로 있던 나는 총사령 이청천 장군으로부터 「광복군 복원선언(光復軍 復員宣言)」을 기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일문 : "복원선언이 무엇입니까?
이청천 :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그것도 몰라?"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아무리 명령이 지엄해도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이청천 : "동원한 군대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거야."
조일문 : "그러면 「해산 선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청천 : "아니야!"

총사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강직한 표정 되에 숨어 있는 부드러운 인간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나는 그로부터 선언에 담고자 하는 내용을 자세히 들었다. 특히, 그게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다시 총을 들고 싸우겠다."라는 부분을 강조하신 말씀에 가슴이 뿌듯했다. 나는 초고를 쓰고는 고치고, 고치고는 또 쓰며 밤을 새웠다.

초안을 받아 본 정훈처장은 좋다고 했으나, 총사령은 읽어보자마자 휙 던져 버렸다.

이청천 : "이게 「선전 포고」지, 「복원 선언」이야?"

나는 울화가 치밀었다. 기껏 애를 쓰고도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 나는 마루 바닥에 떨어진 원고를 줍지도 않고, 그대로 내 자리에 돌아가 버렸다. 정훈처장이 그것을 들고 와서 나에게 좋은 말로 위로했다. 분을 가라 앉히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과연 평화 복귀 선언으로는 너무 생경(生硬)하고 도발적이었다.

'좀 더 원숙하고 무게 있는 글을 써야 하겠구나.'

나는 밤새 쓴 원고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리고는 찬물로 머리를 감고 다시 붓을 들었다. 붓의 흐름은, 어떤 데에서는 대하처럼 거침없이 내려갔으나, 어떤 데에서는 암벽에 부딪쳐 산산 조각이 났다. 간신히 돌을 치우고 길을 파서 흩어진 물줄기를 모으니, 또 한 밤이 지났다.

원고지는 온통 빨간 글씨로 물들었다. 그 위로 꼬불꼬불 모세관같은 혈맥이 통했다.

"본 군은 국내외 무력 혁명의 대통(大統)을 계승하여...."로 시작된 이 선언은 "이제 숙적 일본의 항복으로...본군은 복원을 선포, 전 대원이 귀국하여 조국 건설사업에 참가할 것을 명한다."로 한 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이 글의 주안점은 "만일,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침범하는 제 2의 적이 나타날 때에는, 본군은 다시 놓았던 총을 잡고 전장에서 그들을 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대목을 이었다. 끝은 전사한 동지들의 명복과 연합군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맺었다.

나는 최종적으로 다듬은 원고를 붓으로 깨끗이 정서했다. 먹물에 찍어서 썼다기보다는 폐부에 붓을 담궈서 쓰는 심정이었다. 처장 - 참모장 - 총사령이 일사천리로 재가했다. 참모장은 곧 중국인 연락 장교를 불러서 중국어로 번역케 했다. 다시 중국어 번역문을 검토한 다음, 이를 인쇄하여 군 내외에 배포했다.

지금으로부터 38년전의 일이다. 나는 그때의 일들이 강물에 띄워 보낸 지 이미 오래이다. 어느 날, 대학 도서관에서 헌 책을 뒤적거리는데, 「이청천 장군전(李靑天將軍傳)」이 손에 잡혔다. 주마간산으로 훑어 보다가, 맨 끝에 붙어 있는 접은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광복군 복원선언(光復軍 復員宣言)」, 그것은 분명 내 글씨였다. 내가 중국어 번역문을 정서하여 석판에 인쇄한 것을, 이 장군이 문서 보따리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오신 것이다.

나는 지금 눈을 감고도 그 선언의 원문이나 번역문을 줄줄 외울만큼 극명히 머리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광복군 복원선언(光復軍 復員宣言)은 내 개인의 기억 속에 담아 둘 것이 아니라, 우리 광복운동사의 한 자료로 남겨야 할 문헌이다. 나는 기초자일 뿐, 그 문헌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정서하였을 뿐, 서명자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서와 더불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1983. 11. 19)[82]

파일:광복군 복원선언.png

이 선언은 조일문 지사가 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 선전과장 재직시, 광복군 복원(사실상 해산) 결정에 따라 기초한 것이다. 초안은 정훈처장, 참모장을 거쳐 총사령의 재가를 얻은 다음, 중국어로 번역하여 한국 광복군총사령 명의로 공포되었다. 중화민국 남경(1946년 5월 16일)에서 공표되었다.
본군(本軍)[83]은 30여 년의 줄기찬 항적(抗敵) 복국정신(復國精神)을 받들고, 국내외 무력혁명(武力革命)의 대통(大統)[84]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07년의 의병봉기(義兵蜂起) 이래, 우리는 만주(滿州)의 밀림(密林)[85] 광야(曠野)[86]를 전전하며 적구와 싸우는 동안, 막중한 출혈과 희생 속애서 분전고투하였으나, 정의는 반드시 이기고 진리는 반드시 빛을 보리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940년, 중국(中國)의 대일항전(對日抗戰)이 더욱 치열해지고 태평양(太平洋)의 전운(戰雲)이 감도는 가운데, 본군(本軍)은 중국조야(中國朝野)의 뜨거운 성원(聲援) 속에 성립되어, 중국 각지의 애국청년(愛國靑年)을 망라하니, 그 기(氣) 드높고 그 세(勢) 울연하였다. 광복군(光復軍) 성립 후 7개 성상(星霜)[87]에 걸쳐, 북(北)으로는 만리장성(萬里長城)으로부터 남(南)으로는 갠지스강(江)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제 1, 2, 3, 5, 10전구(戰區)의 중국군과 미얀마, 인도(印度)의 연합군 배합(配合) 병미(倂眉)하여, 적(敵)과 더불어 혈전(血戰)을 벌여왔다. 30여년간 대적투쟁(對敵鬪爭)에서 피아(彼我)의 전역은 대소 640여 차에 이르렀으며, 적(敵)에게 희생된 동지(同志)는 만 명을 헤아린다.

이제, 숙적(宿敵) 일본(日本)이 항복하여 연합군(聯合軍)은 승리를 획득하고, 우리 국토(國土)는 광명(光明)을 되찾았으니, 본군(本軍)의 중국경내(中國境內)에서의 작전임무(作戰任務)는 이로써 끝났다. 춘풍추우(春風秋雨)[88] 수십 년 망명(亡命)과 항전(抗戰) 과정에서, 우리는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였던가!

이에, 본군(本軍)은 복원을 선포, 전 대원(全 隊員)이 귀국하여 조국(祖國)을 건설 대업에 참가할 것을 명한다.

일본(日本)의 유린(蹂躪)을 받은 1910년 이래, 한국(韓國)의 민생(民生)은 도탄(塗炭)에 빠져 헤어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목하[89] 국내정국(國內政局)은 혼란하여 그 정돈(整頓)에는 상당한 시련이 예상된다. 본군(本軍) 복원대원(復員隊員)들은 모두 정성(精誠)과 노력(努力)을 다하여, 안으로 민주(民主) 단결(團結)을 실현하고, 밖으로 독립 평화를 달성하도록 힘쓸지어다. 한민족(韓民族)으로 하여금 영원이 식민지(植民地)의 굴레, 봉건(封建)의 질곡(桎梏)[90]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自由) · 행복(幸福) · 존엄(尊嚴)을 향수(享受)[91]하도록 할 것이며, 결코 불행하였던 역사(歷史)의 전철(前轍)[92]을 밟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자유(自由)와 독립(獨立)을 침범하는 제 2의 적(敵)이 나타날 때에는, 본군(本軍)이 놓았던 총(銃)을 다시 잡고 전장(戰場)에서 그들을 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본군(本軍)은 그 동안 항일전선(抗日戰線)에서 고귀한 희생을 당한 동지(同志)들의 명목(冥福)을 빌며, 본군(本軍)을 적극 지원(支援)하여 준 중국(中國)을 비롯한 미(美) · 영(英) · 소(蘇) 제국에 대하여 깊은 사의(謝意)를 표명한다.

​대한민국 28년[93]
중화민국 35년 5월 16일

광복군총사령 이 청 천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드디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국에게 항복하였다. 그것이 곧 반세기에 걸친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한민족을 해방하고 삼천리 강토의 광복을 뜻함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광복군이 본토 해방작전에 참가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였다는 사실과 38선을 분계선으로 하여 미 · 소 양군이 진주함으로써 국토가 분단된 사실에 대하여 울분과 비통을 금할 수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정부 즉각해체론이 나오기도 했으나,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선열의 피로써 세우고 많은 혁명 동지들이 생명을 다하여 수호한 임시정부를 삼천만 국민에게 바치기 전에는 결코 해산할 수 없다는 단호한 주장을 하였으며, 광복군도 또한 그 정통을 대한민국 국군에게 계승하기까지에는 해산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복원」이란 전시 하에 동원된 군인을 돌려 보낼 뿐, 군 자체가 해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이 광복군 「복원선언」은 실질적으로는 광복군 「해산선언」이었다. 임시정부의 전기(전에 기록한)한 방침에도 불구하고 총사령 이청천이 「복원」이라는 이름의 「해산」을 명하게 된 것은 한국 주둔 미군사령부(미군정)가 해외의 어떤 기관이나 단체도 해체하지 않고서는 입국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광복군 복원선언의 내용은

① 광복군의 성립과 사명
② 광복군의 중요전력(重要戰歷)
③ 희생된 전우에 대한 명복과 연합국에 대한 감사
④ 장래에 대한 경계
등 4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의병봉기 이래 적과의 전투는 대소 640여회 걸쳐 일어났으며 중국에서의 광복군 창설 이후에는 북으로는 만리장성으로부터 남으로는 갠지스강에 이르기까지 연합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유일한 합법적 무장대오였으며, 그로 인하여 혁명진영과 국내외 동포를 크게 고무하고 결속한 공적 또한 높이 평가되지 않을 수 없다.

14. 광복군의 의미·평가

14.1. 의미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한 다음 해인 1941년 11월에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하여
“자력(自力)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전복한다”
라는 자주 독립 노선을 내외에 천명하고 조국 광복 실천의 3단계를 제시하였다.
1기 대적혈전기(對敵血戰期)
2기 국토의 일부를 회복하여 임시정부가 국내로 이전한 시기
3기 국토를 완전 탈환하여 복국(復國)을 완성하는 시기가 그것이다.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실현되어야만 했던 것인데, 실현 직전에 일본이 항복하고 말았기 때문에 전후(前後)의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발언권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임시정부는 일본이 항복하자 국내정진군 선발대[94]을 1945년 8월 16일 출발시켜 1945년 8월 18일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국내정진군은 일본군의 저지를 받아 1945년 8월 19일 중국 산둥성으로 귀환했다.[95] 일본이 항복한 이후 광복군은 중국 지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나왔던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면서 확군(擴軍)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96]

그러나 미군정[97] 당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 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으며, 1946년 5월 16일 공식 해체되었다.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4.2. 평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무장해제된 이후, 광복군은 제국주의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외세를 물리치는데 목적을 두었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4.3. 독립운동가 서훈 기준

□ 심사 대상자
○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분

□ 포상 대상자
○ 적극적인 독립운동 공적이 있어야 함
○ 독립운동 공적이 원전자료에서 확인됨을 원칙으로 함
○ 사망 시까지의 행적에 문제가 없어야 함

□ 제외 대상자
○ 대한제국 시기에 친일단체 활동 등으로 국위를 손상시키거나, 을사늑약 등 매국조약 당시 대신급 이상을 역임하여 국권상실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 자
○ 일제 식민통치 기구 또는 관련 단체에 재직하거나 식민통치에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판단된 자
○ 상훈법 상의 서훈 취소 조항에 해당하는 자

□ 심사 고려사항
○ 독립운동에의 기여와 희생 정도, 독립운동 공적의 역사적 의의
○ 독립운동 단체에서의 지위와 역할, 이미 포상된 분과의 훈격 상 균형
○ 독립운동의 참여정도, 당시의 지위,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 등을 독립유공자서훈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포상 여부와 훈격을 결정
○ 포상에 수량적으로 확인되는 자료로 독립운동 활동기간 및 활동으로 인한 옥고에 따른 기준
○ 광복 후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했더라도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 동조한 것이 아니면 사안별로 판단하여 포상 검토
구분 건국훈장 1~3등급 애국장(4등급) 애족장(5등급)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
수형(옥고) 8년 이상 4년 이상 1년 이상 10월 이상 옥고(10월 미만), 퇴학
활동기간 8년 이상 5년 이상 2년 이상 1년 이상 6월 이상

※ 활동 기간은 자료상 독립운동 단체 등에 가입하여 실제로 활동한 기간을 뜻함
※ 위의 기준은 대략적인 일반기준이므로 활동내용이 다른 개별 공적을 수평적으로 단순 비교할 수는 없으며 같은 옥고기간이라도 활동의 성격, 의의 등에 따라 훈격에 차등이 생길수 있음.[98]

15. 파일:대한민국 국군기.svg 대한민국 국군과의 관계

15.1. 파일:대한민국 육군기.svg 대한민국 육군

15.1.1. 대한민국 육군의 모체: 남조선 국방경비대(南朝鮮 國防警備隊)[99]

대한민국 육군의 모체는 1946년 1월 15일에 창설된 남조선 국방경비대(南朝鮮 國防警備隊, South Korean Constabulary of Police Reserve)[100]이다. 국방경비대는 주한 미국 육군사령부 뱀부(BAMBOO)계획에 따라 국내치안 유지에 부족한 경찰력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경찰예비대라고 불렀다. 남한의 8개 도청소재지에 각각 1개 중대 규모의 경비부대를 편성하게 된게 시작이다. 1946년 5월 16일 중국 남경에서 지청천 총사령관이 선포했던 광복군 복원선언(光復軍 復員宣言) 기점으로 남조선 국방경비대(南朝鮮 國防警備隊)와 어떠한 연결점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15.1.2. 혼란한 당시 정치상황

광복군을 기반으로 한 임시정부계열의 사설군사단체인 1945년 10월 29일 대한국군준비위원회(大韓國軍準備委員會)를 만들었다. 그 외에 한반도에는 훗날 정규 국군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이던 무장집단이 많았다. 그 구성도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 팔로군, 국부군, 광복군, 만주군 등 출신 성분이 다양했다.[101] 1945년 11월경에는 군사단체가 60개를 넘을 정도였다.[102]

1946년 3월 1일, 미군정은 이들이 상황을 어지럽힌다 판단하여, 해방병단(海防兵團)[103]을 제외한 모든 사설 무장단체들을 해체시키고 1946년 1월 15일에 남조선 국방경비대(南朝鮮 國防警備隊) 설립하고 1945년 12월 5일에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104]를 열었다. 이것이 현재 육군사관학교의 모체가 된다. 이 학교는 지휘관이나 참모가 될 수 있는 장교들을 교육하기 위한 곳으로 당시 입학자 상당수는 백선엽(白善燁)[105], 이형근(李亨根)[106], 정일권(丁一權)[107]과 같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

15.1.3. 미군정의 의도

1945년 11월 미군정이 특별명령 제 26호로 한국군 창설 작업을 지시하면서 참고 자료를 하달한 <한국의 군사적 · 정치적 상황>은 중국을 소련 다음의 적국으로 전제하고 한국군 창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어차피 한국은 소련이나 중국의 전쟁 도발에 홀로 맞설 능력이 없을 것이라며, 평상시 한국군은 국내 소요를 진압하고 전쟁이 발발하였을 경우 우방의 군사개입이 가능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갖출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미군정이 한국에 진주한지 2달 만에 미군철수를 위한 사전 작업을 착수하게 된다.

보고서는 이어 미국이 한국의 우방으로 자리 잡도록 하려면, 한국 지도자들과 군부대들이 이념 주입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는 광복군보다는 일본군 출신 장교들에게 한국군 요직을 맡기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고했다
한국을 우방으로 붙들어두려면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으면서 장제스 국민당 정부 같은 여타 강대국에 충성을 바치지 않았던 군사 지도자들을 선택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일한 장교 출신들이 장제스 국민당 정부에서 일한 장교들보다 더 조직 적응력이 높고 활용도 역시 앞설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군의 일부 핵심 요직에 이들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기용하면 정치적 효용성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보고서는 또 "수십 년간 항일 투쟁하다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고위급 장교들이 귀국을 앞두고 자신들이 군 창설을 주도하기를 갈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군이 바라는 바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하급장교들의 주도 아래 이미 6만에서 7만 명 규모의 느슨한 형태의 군사조직이 갖추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본군 장교 출신들입니다. 시간 지체를 최소화하여 한국군 구성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미국과 미군정이 김구가 이끄는 충칭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참여를 국군 창설 과정에서 배제했던 속셈과 이유가 무엇인지 이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또 미국은 남한을 점령하자마자 병력 철수를 준비했다. 다만,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남한에서의 미국의 우월적 지위를 지키는 것을 전제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과 밀착된 광복군은 마땅히 배제 되어야 했다. 친미적인 한국군 창설을 위해, 오히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으로 한국군 요직을 채우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더 바람직했던 것이었다.[108][109] 해방 후 왜 광복군 출신들이 핍박을 받아야 했으며 한국군 창설의 들러리 역할에 그쳤는지 명백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미군정은 현재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에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을 우대했다.

군번 1번 이형근, 2번 채병덕, 3번 유재흥, 4번 장석륜, 5번 정일권까지는 육군 대위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백선엽, 김백일, 최남근, 이성가는 서류상으로만 수료하고 바로 육군 중위에 임관하여 조선경비대 창설 요원으로 간다. 군사영어학교생들을 선발한 일본군 대좌 출신 이응준(군번 110번)은 대령으로 임관, 부교장인 만주군 소좌 출신 원용덕(군번 47번)은 소령으로 임관했다.[110]

군사영어학교는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등을 안가리고 받아들였다. 이는 광복군 출신자들에게는 대단한 모욕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학교 60명의 1기를 선발할 때 만주군 출신 20명은 원용덕이 중국군 출신 20명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고 일본군 출신 20명은 이응준이 추천하기로 했는데 중국군, 즉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의 정책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일본군과 만주군으로 채워졌다. 광복군들은 나중에 1946년 9월에 통위부 장관으로 광복군 출신인 유동열이 오르자 입대하였다.

이후 110명의 교육수료자 가운데 87명은 일본군 출신이었고(일본육군사관학교 13명, 학병 68명, 조선지원병 6명, 관련기사) 21명은 만주군(만주국육군군관학교, 간도특설대), 2명은 광복군/중국군(이성가, 유해준) 결국 110명 중 108명이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장교로 근무한 이들이었다.

결국 이들이 창군의 주역이 되었고, 6.25 전쟁을 이끌어 갔다. 1948년 12월 15일에 이응준이 최초로 장성으로 승진했고 뒤를 이어 중간에 유고자를 제외하고 딱 5명만 별을 달지 못하고 남은 78명도 장성으로 승진하였다.(대장 8명, 중장 26명)

조선인 일본 육군 출신자는 39만 명이라는 대병력인 데 비해, 광복군 출신자는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도망친 사람까지 합쳐서 3만 5천 명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입장이었고 광복군 역시 그대로 한국군을 창설할 예비 단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숫적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광복군 출신들이 정치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1948년 육사 7기 특별생으로 입교한 광복군 제 3지대 출신 김국주 지사는 이현희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현희 : 이쪽으로 들어오면서 계급은 뭐부터 시작했습니까? 광복군을 하면 그걸 인정해주고 하는 것은 없었습니까?
김국주 : 소위부터 시작했습니다.[111]

1946년 5월 1일에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하지 못한 학생 60명과 경비대 각 연대의 사병 중에서 2~3명씩 선발된 28명 등 모두 88명을 제1기생으로 하여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南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가 개교하였다.[112]

미군정 초기에 미국은 소련과의 갈등을 피했다.[113] 그래서 한반도 남부에 정규군 대신 기존의 경찰[114]에게 치안을 맡겨두었고 이는 남조선 국방경비대(南朝鮮 國防警備隊)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경찰예비대였기 때문에 군사훈련이 아니라 폭동진압훈련 등 경찰과 비슷한 훈련을 했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장교들이 대부분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이었기에 실제로는 군대식으로 훈련이 치러졌다.[115] 미군정도 일단은 임시방편으로 만든 것이었다.

1947년에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소련과 관계가 틀어지자 남조선 국방경비대(南朝鮮 國防警備隊)가 1948년에 대한민국 육군으로 탈바꿈하는 걸 묵인했다. 과거 친일파들이 청산되지 않은채 반공투사 및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군대로 세탁하게 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육군 내에 친일파들을 기용하면서 생긴 일이다.[116]

15.1.4. 여론반발 그리고 숙군(肅軍)[117]

미군정은 1946년 말 통위부장[118]과 경비대사령관을 유동열[119]송호성[120] 등 독립군 출신으로 교체했다. 독립군을 우대한 것이 아니라 여론 때문이었다.
"이게 일본군이지 대한민국 군대인가!"
제1연대에선
“이 따위 경비대 해산시켜라. 빨갱이[121] 노랭이[122] 같은 놈 몰아내라”[123]
며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놀란 이응준은 미군정에 수뇌부를 광복군 출신으로 임명하자고 제안했다.

파일:송호 중좌 취임 46_12_18.png

유동열·송호성 체제는 서둘러 독립군 출신을 특임 장교 형태로 충원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경비대의 뼈대는 이미 일본·만주군 출신 장교들이었다. 비록 초대 국방장관이 광복군 제 2지대장 이범석이었지만 그는 김구, 김원봉와 각을 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광복군 출신은 대부분 김구 계열이었다. 그는 초대 총참모장에 이응준, 육군사령관에 이형근을 앉혔다. 이들에게 김구 계열의 광복군 출신들은 눈엣가시였다. 광복군 출신들은 친일파 청산을 물고 늘어졌다.

국방경비대 내의 이승만 권력을 업은 이범석 장군의 숙청작업, 일면 숙군(肅軍)사업[124]을 하게 된다. 백선엽, 특무대장 김창룡같은 사람들이 일선에서 지휘하게 되고 이범석 장군도 이승만 대통령[125]에게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송호성을 견제하면서 제주 4.3 진압과 여수-순천 사건의 총책임자였다. 이 기간동안 이범석 장군은 국방경비대 내에 있는 김원봉계, 김구계 광복군 출신들을 숙청해서 정권을 잡고 싶었던 것이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 장군과 송호성 장군을 서로 견제하게 하여 친일파를 기용하여 본인의 권력을 유지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126]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 事件)의 경우 당시 국방장관을 맡은 철기 이범석 장군, 조병옥 경무국장 미군정 모두 책임이 있다보니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 명예회복이 쉽지 않은 상태이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송호성문서와 1946-1950년 한국군의 숙군과정을 참조하기 바란다.[127]

관련기사 : '천안의 인물' 조병옥·이범석 포함에 시민단체 반발

육군 정보국 소속 포병 소위 안두희는 김구를 암살했다.관련영상 : 24분 10초부터, 안두희의 마지막 증언(1992년)참조 이른바 숙군(肅軍)의 대단원이었다. 당시 수사본부장으로 헌병대 실세는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으로서 경찰 최고직위에 올랐던 전봉덕이었다. 의열단 출신에 중국군 상위였던 장흥이 육군 헌병대사령관이었지만 실권이 없었다. 장흥은 김구 암살 다음날(1949년 6월 27일) 경질됐다.

잔불 정리만 남았다. 이범석은 숙군(肅軍)에 앞장섰지만, 순망치한의 화를 자초했다. 광복군 계열이 정리되자 그의 사조직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도 이승만의 압박으로 해체되면서 국방장관에서 밀려났다. 전쟁 발발 이후 내무장관으로 기용돼 부산정치 파동에서 크게 이용당한 뒤 결국 토사구팽 당했다.[128]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가에 대하여 한도신의 회고록을 보자
해방 이후 혼란이 계속되던 중 남한에서는 우리 민족의 큰 기둥들이 한 분씩 쓰러져 갔다. 김구 선생, 여운형 선생, 송진우 선생, 장덕수 선생 등이 알 수 없는 암살범에 의해서 애석하게 쓰러지셨다.

이와 같은 동족상잔의 어두운 세월이 흐르는 중에 남편도 다소 위협을 느낀 듯 했다. 물론 해방 이후 남편은 삼일동지회나 반탁투쟁위원회에서 잠시 일한 것 외에는 일체의 정치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교회 밖에서는 주목받은 인물이 되지도 못하였는데도 몇 차례 테러 위협이 있었다.

여수 순천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 용산에 있는 육군 포병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가 주모자들이 잡힌 일이 있는데, 그 때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서울 지역 살해 대상자 명단에 남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정치가도 아니고 다른 야심도 없는 종교인이 왜 살해 대상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129]

15.1.5. 대한민국 육군의 뿌리 논란

대한민국 정부는 제헌헌법과 1987년 개정헌법[130]에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음”을 명문화 해 놓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과 뿌리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두고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민주/진보 계열 정치권에서는 임시정부의 군대가 광복군이었고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는 국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보수진영 육군출신 그중에서 특히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그 뿌리를 광복군에서 찾고 있는 것 같지 않다.[131] 초기 육군 내에서 권력을 잡은 고위 지휘관과 장교 다수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다는 점만 부각하면, 육군의 정통성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논쟁거리가 안될 수 없다.

1961년에 있었던 5.16 군사정변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132],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회 인사까지 깍듯이 모시는 육군사관학교 육군 장성출신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니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이 현재까지도 논란이 지속되는 것을 보면 육군의 뿌리를 찾기란 쉽지 않아보인다.

15.2. 파일:대한민국 해군기.svg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해군독립운동가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상선사관들을 중심으로 창설되었고, 이후엔 해군병학교[133]에서 장교를 모집했으므로 일본군과의 연관성이 거의 없다.[134] 그러나 일본군과의 연계성이 없다고 해서 독립군, 광복군 계열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술했듯이 해군은 민간상선사관들이 모여 결성했으며, 결정적으로 광복군에는 해군이 없었다. 그리고 현 대한민국 해군은 손원일 제독이 대표로 있던 '조선해사협회'가 미 군정과 합의하여 조직했던 해방병단이 전신이므로, "광복군이 해군을 창설했다"라는 식의 주장을 할 수는 없다.

굳이 독립군, 광복군과 엮자면, 손원일 제독 본인부터가 독립운동가였으며, 1930년 상하이의 독립운동단체 비밀연락원 혐의로 일본 제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투옥된 경력이 있다는 것, 그의 아버지인 손정도 목사 또한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의 제2대 의정원장을 지내며 김구와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는 것, 해군공창장을 역임했던 독립운동가 출신의 서재현 제독의 아버지인 서병호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었다는 것 등이 있겠으나, 이 모든 것이 해방병단에 직간접적인 어떠한 계승점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예 광복군 출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민영구 제독이 광복군 주계과장을 맡아 광복군에 대한 군수품 보급을 맡았던 적이 있으므로, 해군에 광복군 출신이 합류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광복군이 해군을 창설했다는 식의 비약적인 주장은 합리화될 수 없다.

15.3. 파일:대한민국 공군기.svg 대한민국 공군

15.3.1. 대한민국 공군 창설(1949년 10월 1일 ~1950년 7월 초)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이후 조직된 대한민국 공군은 미군으로부터 L-4 연락기 10대를 비롯하여 20대의 경비행기를 인도받아 육군 항공대를 설립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공군을 창설하였다.

공군 창설에는 중국 공군에서도 지휘부 참모장, 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한국광복군 참모처장이었던 최용덕 장군을 위시한 공군창설 7인[135]의 공로가 컸다. 이들은 미국식 훈련을 다시 받고 육군 참위로 시작하라는 미 군정의 홀대를 받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생각하자는 최용덕 장군의 설득으로 모두 백의종군하여 육군 항공대를 창설, 대한민국 공군의 시작을 연다.

중국 공군에서 기지사령관과 공군차장을 역임한 베테랑 최용덕 장군을 중심으로 출신 불문 항공인들이 모여 창설이 진행되었고[136] 특히 공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최용덕 장군이 백의종군[137]을 감수하면서 까지 공군의 시작을 열어 육군 항공대 초대사령관, 공사교장, 참모총장까지 역임하였다. 김구의 아들인 김신을 비롯한 중국 공군군관학교, 운남비행학교 출신 고위장교 및 고위인사들[138]을 위시하여 초기 공군 창건에 지대한 공헌을 한 덕에 대한민국 공군은 광복군의 영향이 가장 컸다.

중국 공군 대령(남창기지사령관 역임)/광복군 참장/참모처장 출신의 최용덕 장군의 주도하에 창군되었다. 공군 창설 7인의 면면을 보면 중국군 출신 2명, 일본군계 4명(육사2, 소년병2, 학병 1), 민항기 1명 등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었고 경력 및 나이로 연장자 급인 최용덕 장군과 장덕창 씨의 주도로 모임이 운영되고 최장군의 결단으로 백의종군하여 육군항공대를 출범하고 공군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독자적인 조직으로 독립된 이후로도 공군의 사정은 상당히 열악했는데 대표적으로 군복이 지급이 안되어 밀가루 포대를 얻어다가 파란색으로 염색해 재단한 옷을 입고, 군모도 중학교 교모를 이용해 만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건 공군만의 문제는 아니라서, 건군 초창기에는 육/해/공군 모두 피복 부족으로 舊 일본제국군 복장을 입고 다니는 일도 흔했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바로 항공기 보유 숫자였다. 극소수의 연락기와 정찰기가 있긴 했지만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전투 임무를 수행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공군 간부들도 이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어서 미군이 곧 폐기할 B-26이나 일본군이 버리고 간 Ki-43, Ki-84, Ki-51 같은 군용기를 운용하려고 했으나, 대한민국의 선제 북침을 우려한[139] 미국이 이들을 모두 폐기시켜 버렸다.

또한 공군은 때아닌 때에 숙군도 맞이하게 되어 많은 수의 장교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 하에 제거되었다. 먼저 창설 초기인 1948년 8월 초대 공군참모총장 자리를 두고 정부에서는 경험이 많고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영무 장군을 참모총장 후보에 거론되지 못하도록 그를 좌익이라고 단정하여 배척했고 대신 우익성향을 가진 김정렬 장군을 초대 공군참모총장에 추대하였다.[140] 이처럼 이승만 정부는 독립을 위해 힘쓴 동지라 할지라도 좌익이라면 무조건 배척하였다. 그리고 이는 곧 숙군으로도 실현되었다. 여순사건 발발 이후인 1948년 11월 18일 비행부대 소속인 백흠룡(白欽龍) 하사가 연락기를 가지고 월북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군 정보국은 즉각 숙군을 단행하여 100여명의 장교와 하사관을 체포하고 이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이때 조사를 담당한 김창룡은 김신, 김정렬, 장덕창 등 공군의 주요인물들을 모두 감금시켜 며칠 간 취조를 했는데 공군의 수뇌부가 마비되어 업무에 차질이 빚을 것을 우려한 상부에서 김창룡에게 이러한 짓을 그만둘 것을 명령했고 이 때문에 김창룡은 공군 수뇌부를 전원 석방하였다. 그러나 휘하 장교,하사관들은 전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사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이로부터 약 1년 지난 1949년 11월 23일 이번에는 이명호 소위가 L-5 연락기를 가지고 월북을 감행하였다. 불과 1년 사이에 2대의 연락기가 월북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군 수뇌부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고 결국 제2차 숙군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군 창설 7인 중 한 명이었던 이영무 대령은 이전에 좌익으로 의심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1950년 2월 16일 정보국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었다.[141] 형무소에서 각종 옥고을 당한 그는 끝내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무보직 상태로 군에 남아있어야 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영무 대령은 서울에 잔류해 있다가 북한군에게 납북되었다.[142] 제2차 숙군 결과 항공부대 내에서 117명의 장병들이 숙청 당했다.


16. 광복군 출신

나무위키에 수록된 광복군 출신은 분류:한국광복군/군인 을 참고할 수 있다.

16.1. 광복군 지휘부

  • 김구

    • 1940년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각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으로 옮긴 뒤, 임시정부의 임시약헌 개정과 더불어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 공포됨에 따라 대일항전에 진력을 다하였으며 연합군과 함께 중국 각지에서 많은 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主席)으로 임명되었으며, 섬서성 서안(陝西省西安)과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써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 훈련(OSS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 약산 김원봉

    •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1919년에 의열단 조직하여 요인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 투쟁을 이끌었다. 해방 후,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좌우합작을 주력했다고 한다. 몽양 여운형 선생께서 혜화로타리에서 암살되자 백범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 국가보훈부 내규에 따라 북한정권에 협력한 사람은 공적 인정이 안되지만, 몇몇 황포군관학교 동기의 증언이나 실제 공산주의자였다면 공산주의자는 일본군보다 더 싫어하는 장제스 총통에게 지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는 국가보훈부 내규[143]에 따라 공훈록이 없다.
  • 철기 이범석

    • 광복군 참모장/ 제 2지대장, 1915년에 몽양 여운형(呂運亨)을 만나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1920년 3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부름을 받고 수천 리를 도보로 강행군하여 왕청현(汪淸縣)에 있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가서 연성대장(硏成隊長)이 되어 활약하였다.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그날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섬멸시킨 뒤, 그 다음날부터 23일까지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등으로 전지(戰地)를 옮기면서 일군의 주력부대를 강타하여 일본군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대전과를 올렸다. 광복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가 1942년 제5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이 불의에 타계한 후 각지대 개편에 따라 제 2지대장에 임명되었다.
  • 백파 김학규

    • 광복군 제 3지대장, 현익철(玄益哲)·양세봉(梁世奉)등과 같이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한중합작 항일투쟁을 협의하였으며 조선혁명군을 기동부대로 개편하여 유격전을 지휘하였다. 1932년 3월에는 조선혁명군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는데 조선혁명군 3개중대는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으로 신빈현(新賓縣) 남쪽에서 일본관동군을 격파하고 영릉가(永陵街)전투 등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소극적인 자세와 일군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동삼성에서의 무장항일투쟁을 더 계속할 수 없게 되자 1933년 12월 그는 이청천·황학수·오광선·박명진 등 독립군 장성들과 함께 산해관을 넘어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西安)으로 이동됨에 그는 참모처장 겸 참모장에 임명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후, 제3지대장 겸 징모제6분처 주임위원에 임명되어 1942년 2월 임지인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일본군 점령 치하에 광복군의 공작거점을 확보하고 광복군의 활동을 선전하였으며 적의 군사기밀을 탐지하는 외에도 중국 유격대와 같이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한 3지대 기간요원들의 활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45년 5월부터는 광복군 제2·3지대에 대한 한미합작 특수훈련(OSS훈련)이 계획되었다. 제3지대는 지대장인 그의 책임 하에 미국인장교 윔스(Chrence B.Weems)가 교육을 담당하도록 계획되었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무산되었다.
  • 나월환
    광복군 제 5지대장,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장, 무정부주의자로서 일본에서 박 열(朴烈)과 함께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던 도중, 청도(靑島)에서 탈출하였다. .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12명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군사기관에 복무하였거나 상해(上海), 만주(滿洲)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청년지사 30여 명이 모여 조직되어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와 함께 광복군의 주축이 된다.
    1942년 3월 31일까지 서안(西安)의 한국광복군훈련소에서 광복군을 훈련하였으나 동료간의 불화로 인하여 5지대 간부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 김문호

    • 1933년 4월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1937년 3월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독일 기선을 타고 일본 장기(長崎)를 탈출하여 절강성 영파(浙江省 寧波)로 망명하였다. 1937년 8월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영파 방수사령부(防守司令部) 정치부에 특채되어 1939년 12월 소교(少校)로 진급하고 3전구 방송국에서 반전방송을 하였으며 일본군 포로 심문과 일본 문서 및 서적 등에서 적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중앙군관학교 제3분교에서 특수교육을 받았다.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함에 중경에 복귀하였다. 다음 해 3월 1일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광복군 제3징모처(第三徵募處) 임명식이 거행되어 그는 주임위원 겸 선전 조장에 임명되어 강서성 상요로 파견된다. 그는 대원들과 함께 염전사상고취 전단, 일본군 귀순통행증 등을 화물차에 싣고 야전 방송기재를 휴대하고 금화지구로 출동하여 선전물을 살포하고 일선방송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선전물을 미군 비행대에 공급하여 적군 점령지역에 공중 살포하게도 하였다. 그리고 각종 선전물을 갖고 절강성 천태현(天台縣)으로 나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제1유격 정진군종대(挺進軍縱隊) 사령부와 합작하여 일선공작을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둔다.
      제 1지대 제 2구대 이소민 상교와 초모공작에 있어서 경쟁 관계에 있었고 1944년부터 그의 제 3 분대는 건양(建陽)에 근거지를 두고 항일선전 및 초모공작과 한미(韓美) 합작의 작전을 지원하였다.
  • 화암 정현섭

    • 광복군 전시공작대 대장/ 상하이 지하공작 활동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에는 미국 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일본의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는 상해에서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며 조국의 광복운동은 무력투쟁의 방법에 의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판단,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방안을 강구하였다.
      1928년에는 안공근(安恭根)·이정규(李丁奎)·한일원(韓一元)·이을규(李乙奎)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맹하여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탈환(奪還)"을 발행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촉구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신현정(申鉉鼎)·최석영(崔錫榮) 등이 천안의 호서은행에서 5,700원의 자금을 가져오자 유자명(柳子明)·이 달(李達)·이하유(李何有)·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 상해부(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上海部)를 조직하였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내 무정부주의자의 거두인 유기석(柳基石)을 비롯하여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활약하던 중 1931년 1월 4일 원심창(元心昌)이 동경에서 북경을 거쳐 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이중현(李中鉉)·유자명(柳子明)과 함께 조직을 좀더 강화하고 상해 등지에서 친일배와 전향자(轉向者) 등을 색출하여 암살 대상으로 지목, 결정하고 동지들에게 실천하게 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B.T.P)을 조직하여 일본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1933년에는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 간부들을 규합하여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동년 3월 17일에는 일본 주중 상해공사(日本駐中上海公使)인 유길명(有吉明)이 중국의 유력인사 100여 명을 무창로(武昌路) 육삼정(六三亭)이라는 일본요리집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백정기(白貞基)에게 권총 2자루와 폭탄 1개, 수류탄 4개를 주고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유길명(有吉明)이 나오는 것을 대기하던 중, 일본 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거사 직전에 백정기·이강훈 등이 체포되었다.
      1936년 1월부터는 남화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매월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맹혈단(猛血團)"이라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하도록 하였고, 1937년 9월에는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를 결성하는 한편,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여 한·중 양국민의 공동투쟁을 도모하였다.
      1940년부터는 전시공작대를 조직하여 이 강(李剛)·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상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다.
  • 유기석

    • 광복군 한교전지공작대 대장 / 제 3징모분처(2지대 3구대 3분대) 부대장
      1928년 3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재중국조선인무정부주의연맹(在中國朝鮮人無政府主義聯盟)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며, 1930년 봄 동지(同地)에서 연구단체 조선무정부주의간담회(朝鮮無政府主義懇談會)를 조직하였고 대한대독립당주비회(大韓大獨立黨籌備會) 기관지『한국(韓國)의 혈(血)』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동년(同年) 4월 상해에서 유자명(柳子明)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며, 1931년 무정부주의자 연구단체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上海事變) 이후에는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 등 각종 항일단체에 가입하여 천진(天津) 일본총영사관 파괴 및 주중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 처단 등을 시도하였다.
      1933년 7월 반일만(反日滿)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중호조연합회(中韓互助聯合會)를 결성하였고
      1935년 상해한인청년연맹원(上海韓人靑年聯盟員) 엄순봉 등과 함께 친일 행위를 자행하던 상해조선인민회 간부와 옥관빈 등의 처단에 관계하였으나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검거를 면하였다.
      1938년 김구(金九)와 협력하여 일제의 국제적 지위를 실추시키기 위하여 상해의 영미(英美) 각 기관과 신문사 등에 대한 폭탄투척과 일본 군함 이즈모(出雲丸)호 폭침(爆枕)을 시도하였고
      1943~1945년 남경(南京)에서 한족동맹(韓族同盟)의 의장이자 광복군(光復軍) 징모 제3분처 한교전지공작대 부대장으로 초모활동(招募活動)을 전개하였다.

16.2. 광복군 구성원

  • 김천성(金天成)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1939년 10월 충칭(重慶)에서 나월환(羅月煥)을 대장으로 하여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가입하였다. 그 해 겨울 공작대가 시안(西安)으로 이주하자 이해평(李海平)·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일선지구인 산시성(山西省)으로 파견되어 후쭝난(胡宗南) 직속의 중국 유격대와 합류하여 정보수집·적정탐색·초모공작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단신으로 일본군 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루안(潞安)에 잠입하여 문응국(文應國)[144]을 초모한다.
    스자좡·북경·타이위안 등지에서 국내침투 공작을 전개하던 중, 1945년 5월 일본 헌병에 잡혀 갖은 악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광복을 맞은 지 3일 만에 총살당하였다.
  • 이현근(李炫瑾)
    정화암 선생이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로 개편할때 회상하던 인물로 1931년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에는 유자명(柳子明)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육군군관학교 제11기생으로 입교하여 제1총대 보병과(第1總隊步兵科)를 1936년 10월에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임명되었으며, 그 뒤 보병상위(步兵上尉)로 진급하고 제6사 제17여 제31단 제2영 제6연장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일본의 중국본토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한구(漢口)전선 등에 참전하여 싸우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 이소민(李蘇民)
    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장, 이소민(李蘇民) 상교(上校)는 중국 황포 군관 학교 출신인 관계로 제 3전구내에 많은 선배·동창·후배 등이 있어서 섭외 활동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으며, 1943년까지 초모공작 실적을 못내던 제 2지대 3구대 3분대장 김문호와 경쟁에서 우월한 우위를 점했었다.[145] 또 구대장 자신이 중국군 상교(上校)로 중국군에도 군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과의 연결이 잘 되었다. 그러나, 광복군으로서의 공작 활동은 다소 소홀한 감마저 있었기 때문에 지대 본부로부터 경고를 받은 일도 있었다.
    약산 김원봉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북한으로 간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공훈전자사료관에 등록되어있지 않으나 하지만 광복군 역사 공부하면서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는 김영관 지사가 일본군 부대에 탈출하여 이소민 부대에 광복군 입대 선서를 했었다.#
1944년 12월3일 일요일, 저녁을 먹은 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부대의 철조망을 넘었다. 3명의 탈출자는 밤새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이튿날 저녁 한 마을에서 중국 청년들을 만나 필담을 나눴다.
“우리는 한국 청년으로서 일본 군대에서 탈출했다. 충칭에 있는 한국 임시정부에 가고 싶으니 장개석 군대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달라.”
“탈출을 환영한다.” “고생 많았다.”
중국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와 포옹으로 김영관 일행을 맞아줬다.하지만 고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찾아가는 도중에 일행 5명(다른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박승유, 이희화가 도중에 합류)은 차례로 풍토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1천여 킬로미터를 걸어 장시성 옌산(鉛山)에 1945년 2월 중순 도착했다. 중국군의 주선으로 옌산에서 마침내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장 이소민을 만났다.
-탈출한 뒤 거의 석달 만에 광복군을 만났는데.
“정말 감격적이었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중국군 부대로 이소민 구대장의 인솔 아래 젊은 청년 7~8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걸어왔다. 그때 태극기를 처음 봤지만, ‘태극기에 대하여 경례’ 구호에 맞춰 거수경례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양 볼에 줄줄 흐르더라. 애국가 제창 때도 우리 탈출병 5명은 곡(당시는 영국 민요인 ‘올드 랭 사인’이었음)을 몰라서 따라 부르지 못했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는 가사를 들으면서 그저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 순간을 영원히 못 잊는다. 그때의 감격이 내게는 초심이다. 양심대로, 또 나라 배반하지 않으면서 거창하지 않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돕자는 생각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 박승유(朴勝裕)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이자, 1910년 강제 병합 시 내부대신 겸 내각총리대신 서리였던 박제순(朴齊純)이고, 아버지 박부양도 부친의 자작 작위를 계승한 친일파이다.[146]
    1944년 10월에 절강성(浙江省) 의오현(義烏縣)에 주둔 중인 일본군 카사이(橫井)부대에 배속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 김영관, 이희화와 합류 후 이소민 부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무석(無錫), 무호(蕪湖), 남경(南京)지역에서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음악에 소질이 있던 터라서 야전 방송대에 파견되어 같은 동포 사병들에 대한 반정(反正)권고와 염전(厭戰)가곡 등의 방송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해방 후에는 강원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를 했으며 조용히 선친의 잘못을 뉘우치고 살았다고 한다.
  • 김우전(金祐銓)
    1944년 1월 일본군에 징병되어 중지나 파견군 제7995부대에 근무 중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중국 제10전구 중앙군관학교 분교 간부훈련단 한광반을 졸업하고 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되었다. 그는 제3지대 연락장교로 임명되어 곤명 미제14항공단에 파견되었다. 그는 oss본부에서 광복군 무전기술 교재와 한글 무전암호문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하면서 이 무전기술 교재와 한글 암호문은 사용되지 못한다.
  • 장철부(張哲夫)
    1945년 3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 20기 기병과로 입학하여 1947년 2월 졸업하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에 입교하여,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하였다. 1949년 육군본부 직할 독립기갑연대가 창설되자 기갑연대 예하 부대인 제2기병대대장(소령)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기병대대장으로 참전하여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올렸다.
  • 조일문(趙一文)
    남경(南京)의 중앙대학 재학 당시 송지영(宋志英)·이일범(李一凡) 등과 함께 한족동맹(韓族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애국청년 규합, 일군 동태 탐사, 초모인원 후송공작 등의 임무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4년 초에 남경(南京)에서 지하공작을 펴 오던 임정특파원 김병호(金炳豪)가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써 남경 중앙대학 학생들의 일대 검거 선풍이 불게 되었다. 그는 이일범(李一凡) 등 10여명과 함께 남경(南京)을 탈출하여 제3전구 지역인 무림(茂林)으로 왔다. 이때 그는 남경 주둔 일군이 보관하고 있는 기밀 문서를 대량 탈취 휴대하고 왔는데 이 기밀 문서 중에는 일본군 병력배치상황, 연합군의 기습상륙작전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계획, 중국 연해안탐측량(沿海岸探測量), 군용지도, 기타 기밀 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기밀문서는 제3전구 사령장관에게 보내지고 이어 중국군사위원회에 보고됨으로써 대일작전수행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후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강남분대에서 전방공작과 적후방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 선우진(鮮于鎭)
    광복군 제3지대 제6분처가 있는 부양(阜陽)에서 광복군에 입대하였으며 적지구 선전공작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44년 8월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반 부설 한국 광복군 간부훈련반에 입교하여 3개월간 군사교육 훈련과정을 수료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에 백범 김구선생님을 보좌하는 비서가 된다.
  • 장준하(張俊河)
    서주(徐州)지구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1944 5월부터 10월말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로 설치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광반 훈련 당시 여가를 이용한 과외 활동으로 김준엽(金俊燁)과 함께 교양과 선전을 위한 잡지인 "등불"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광복군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국내진공반 선발대로 뽑혀 김준엽, 노능서, 이범석 장군과 여의도 공항에서 일본군 항복받으려다 무산되어 귀국한다.
    돌베개: 장준하의 항일대장정이란 회고록으로 유명하다.
    해방 이후, 이범석 장군의 조선민족청년단에서 활동했으며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과 각을 세우다가 등산 중 의문사를 당한다.
  • 김준엽(金俊燁)
    1944년 2월 16일 중국 서주지역의 일본 츠카다(塚田)부대에 배치되었다. 이곳에서 기초훈련을 받고 근방의 경비중대에 배치된 그는 1944년 3월 하순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 중앙군 소속 유격대에 배치되었다. 뒤이어 탈출해 온 장준하·윤경빈 등과 1944년 6월 중국유격대를 떠나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향해 출발하여 임천(臨泉)에 도착한 후 광복군 초모위원회에 의해 입대하였다. 입대 후 한광반(韓光班)에 입교하였다.
    한광반 1기를 졸업한 후 장준하·신현창(申鉉昌) 등 30여 명과 함께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게 되자, 1945년 2월 5일에 한중문화협회 주최로 학병탈출 35명의 한국청년환영대회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어서 그는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 8월초에는 oss훈련 정보파괴반을 수료하고 광복군 국내정진군 강원도반 반장에 임명되어 국내진입의 날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교육자로 살았으며 김준엽 장정이란 회고록이 있다.

16.3. 여성 광복군

한국광복군은 한국임시정부에 직할된 한국의 국군이다. 한국 임시정부 본신이 이천만 대중의 공유한 혁명기관인 만큼 광복군도 당연히 이천만 대중의 공유한 군사기구가 되는 것이다. 범한국혁명 남녀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역사적 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광복군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똑같이 소유한 것이다.
- 1941년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16.3.1. 임시정부/총사령부 소속

  • 정정화
    시부(媤父)인 대동단(大同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따라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갔다. 1930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을 위하여 6회에 걸쳐서 국내를 왕복하면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고 한다.
    1932년에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上海)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가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으로 이동함에 따라 이동녕(李東寧) 김 구(金九) 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이동하여 임시정부를 도왔다.
    1943년 2월 23일에는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 산하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의 재건조직에 참여하여 훈련부장에 선출되었으며, 국내외 한인 부녀의 총단결과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에 있는 동포여성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고, 혹은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에 있는 독립군을 위문하며, 혹은 적진 중에 끼어 있다가 포로수용소를 통하여 넘어오는 동포 여성들을 계몽 교육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 김순애(金順愛)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의 아내
  • 김정숙
    9월 17일 광복군이 창립되자 여군으로 입대하여 대적심리공작을 수행하였다. 1942년 4월 임시정부 교통부 비서, 1943년에는 의정원 비서, 1944년 6월에는 법무부 비서 겸 총무과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에 심리작전 부문을 중요시하게 된 광복군 총사령부가 작전처내에 심리작전 연구실을 신설하게 되자 여기에 파견되어 보좌관으로서 한국어를 전담하여 전단작성, 전략방송, 원고작성 등 각종 심리작전을 수행하였다. 1945년 11월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주화대표단 비서처 비서로 활동하다가 귀국
  • 민영주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었을 때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2년 1월에는 한국임시정부 내무부 부원으로 파견되어 근무하였으며, 중경방송국(重慶放送局)을 통한 심리작전 요원.
  • 조순옥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오광심(吳光心)·김정숙(金貞淑)·이복영(李復榮)과 함께 여군으로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0년 10월부터 1942년 3월까지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西安)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서안으로 가서 총사령부 총무처에 배속되어 근무하였다.

공군
  • 권기옥(權基玉)
    윈난(雲南)육군항공학교 제1기 졸업한 후 동부 항공사령부 배속 1937년 중일전쟁시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교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 비행대 편성과 한국광복군 건군 작전 계획에 참여했고, 공군설계위원회 위원, 대한애국부인회 사교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6.3.2. 제 1지대 여군

  • 전월순
    1939년 9월 중국 귀주성(貴州省) 계림(桂林)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입대하여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 및 병사초모 등의 공작활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광복군(光復軍)으로 편입되었다.
    1942년 4월 20일부터 1945년 8월 14일에 이르는 기간동안 광복군 제1지대(第一支隊)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 한태은(韓泰恩)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는 산하에 부녀복무단을 뒀다. 부녀복무단은 1939년 10월 구이린(桂林)에서 설립됐다. 일부 대원은 본래 조선의용대에서 복무한 여성들이었고, 다른 일부 대원은 포로로 잡혔다가 교육을 받고 조선의용대에 가입한 여성들이었다. 1940년 2월 당시 단원은 22명이었고 단장은 박차정(朴次貞)이었다. 부녀복무단은 전선의 조선의용대원을 방문해 물품과 가족들의 소식을 전함으로써 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과 전단과 표어 등을 배포하는 선무활동을 맡았다. 한태은은 1941년 충칭에서 부녀복무단원으로 활동했고 이 무렵 이정호(李貞浩)와 결혼했다. 이정호는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소속으로 1941년 5월 조선의용대에 입대해 제1지대 제1전구사령부에서 활동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의 결정에 따라 종전의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됐고, 본부를 충칭에 두었다. 이에 따라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 된 한태은은 남편과 함께 계속해서 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16.3.3. 제 2지대/제 5지대 여군

  • 김마리아
    철기 이범석 장군의 아내, 고려혁명군 정치공작대원으로서 서백리아에서 항일전투에 참가.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참모장인 이범석(李範奭)을 보좌하며 중앙군관학교 제7분교의 노어교관, 전간단 제7분단한청반(戰幹團第七分團韓靑班)의 노어·중국어 교관으로 광복군 대원 교육에 활약하였다.
  • 신정숙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김문호의 아내, 제3 분처위원 겸 회계조장으로 파견되어 활약, 1942년 10월에는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에 편성되었다. 본부를 연산현 하구진(鉛山縣河口鎭)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신정숙은 김문호(金文鎬)와 함께 전선과 후방에서 중국 유격대와 합동 공작으로 정보, 선전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또 포로심문을 통하여 적의 일선 및 후방에 관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작활동함.
  • 민영주(閔泳珠)
    민필호(閔弼鎬)의 장녀로 태어나서 김준엽(金俊燁)의 부인이다. 민영주는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었을 때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2년 1월에는 한국임시정부 내무부 부원으로 파견되어 근무하였으며, 중경방송국(重慶放送局)을 통한 심리작전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으며, 임시정부 주석판공실 서기로 파견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5년 4월에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어 복무하였다.
  • 김효숙(金孝淑)
    1919년 부친 김붕준(金朋濬)을 따라 모친(盧英哉)과 오빠(金德穆), 동생(金貞淑) 등 가족전원이 상해로 망명하였다. 1938년에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가입하여 대일선무공작(對日宣撫工作)에 참가하였으며, 1939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장사, 사천, 중경 등지에서 교포아동교육을 담당하였다. 1940년에는 한국혁명여성동맹 부회장에, 그리고 1941년 10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1944년에는 민족혁명당의 감찰위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광복군 제2지대에 종군하여 대일 심리전 활동을 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 조순옥(趙順玉)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오광심(吳光心)·김정숙(金貞淑)·이복영(李復榮)과 함께 여군으로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0년 10월부터 1942년 3월까지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西安)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서안으로 가서 총사령부 총무처에 배속되어 근무하였다.
    1942년에는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 2분대원으로 편입되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 김숙영(金淑英)
    평남 평원(平原) 사람이다. 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 제3분대원에 입대하여 공작활동을 하였다.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 경위와 입대 경위 및 활동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 백옥순(白玉順)
    1942.3.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미육군특전단 장교들에 의하여 실시하는 훈련을 받고 대기중 8.15 광복을 맞이한 사실이 확인
  • 김숙영(金淑英)
    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 제3분대에 입대 활동하였다. 입대 경위 및 활동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 한영애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강남(江南)분대에 입대하여 적 정보수집, 초모 공작활동 등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제 5지대
  • 오희옥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독립운동가 오광선(吳光鮮)의 둘째 딸이다. 1939년 4월 중국 유주(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여 일본군의 정보수집, 초모(招募)와 연극·무용 등을 통한 한국인 사병에 대한 위무(慰撫) 활동에 종사하면서 1941년 1월 1일 광복군(光復軍) 제5지대(第5支隊)로 편입될 때까지 활동
  • 안영희
    1940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 광복군의 창설과 함께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되었다.
  • 송영집(宋永潗)
    1939.10 중국 중경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한 이래 전간단 제4단 한청반을 수료하고 의료 활동과 지하공작 활동을 하였고 1940.9.17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여 1945.8.15 광복 시까지 제2지대 본부요원으로 활동하는 등 약 5년10개월간 활동함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의무대(醫務隊)에서 의사 및 간호책임자로 활동하였다.
  • 이월봉(李月峰)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韓靑班)에서 군사훈련 과정을 수료하였다. 그후 서안(西安)에 있는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하여 항일활동을 벌이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39년 9월 주서안 한국청년전시공작대 입대.
    1940년 주서안 한국광복군 5지대 입대.
    1941년 중국전시간부 제4단 한청반 필업
    1942년 주서안 한국광복군 제2지대 편입.
    1946년 6월 귀국
  • 김봉식(金鳳植)
    1940년 2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하여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1년 1월 1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창군되자 중국서안(西安)에 본부를 둔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되어 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그후 1942년 5월 제5지대가 광복군 제2지대로 개편됨에 따라 그는 제2지대 제2구대원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 이보비(李寶妣)
    1942년 이전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및 한국광복군 제5지대 대원을 거쳐 1942년 4월경 중국 서안에서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으로 활동함.

지하공작
  • 정영(鄭瑛)
    난징 한족동맹으로 지하공작 활동한 이일범의 아내로 1942년 한국광복군 제3징모처에 입대하여 지하공작을 하다가 후방지역으로 탈출하여 제2지대에서 복무하였다.
  • 정영순(鄭英淳)
    1943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에 현지 공작원 김천성과 접선 공작 중 입대하여 대적 공작 활동을 하다가 2회나 일 헌병에 피체*된 사실이 확인됨.

16.3.4. 제 3지대 여군

  • 오광심
    광복군 제 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아내이다. 1934년에 김학규(金學奎)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국민부(國民府) 등 3개단체(三個團體)의 전권대표가 되어 임무를 띠고 만주(滿洲)에서 남경(南京)으로 갈 때, 동행하였다. 1940년 9월 17일에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김정숙(金貞淑), 조순옥(趙順玉) 등과 함께 여군복을 입고 광복군 창립식에 참가하였다. 제3지대의 간부로서 광복군 선전활동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 "우리 여성의 임무가 어찌 집안에서 아해(아이)나 양육하고 밥이나 해주고 길쌈이나 하는 것이겠읍니가?"라는 명언으로 유명하다.
  • 지복영
    지청천(池靑天) 장군의 딸.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오광심(吳光心)·김정숙(金貞淑)·조순옥(趙順玉) 등과 함께 여군으로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총사령부가 중경(重慶)에서 서안시 이부가(西安市二府街)로 이동함에 따라 지복영도 서안으로 옮겨갔다.
    1942년에는 광복군 제3지대로 배속되어 광복군 초모위원회 위원 겸 비서로 부양(阜陽)에서 활동하였으며, 1944년에는 임정 선전부 자료과와 선전과에 복무하면서 대적 선전방송을 하고 또한 원고를 작성하는 등 활동하였다. 1945년 4월에는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및 조리원(助理員)에 임명되어 겸직 근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 오희영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였다가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오광심(吳光心)·김효숙(金孝淑) 등과 함께 여군으로 입대하여 제3지대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2년에는 김학규(金學奎) 제3지대장의 인솔하에 일군의 점령지구를 돌파하여 오광심(吳光心)·이복영(李復榮)·신송식(申松植) 등과 함께 중국군 유격부대가 자리잡고 있는 부양(阜陽)에서 활동하였다. 1944년에는 부양(阜陽)에서 군사 교육 훈련을 마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단의 1기 졸업생들과 함께 신송식(申松植)교관의 인솔하에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중경(重慶)으로 갔으며,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그곳에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특이사례
  • 김영실
    평양 출생, 국일관(國一館) 기생 출신으로 1943년 중국 쉬저우(徐州)에서 희락관(喜樂館), 일본어로 기카칸이라 불리는 료테이(料亭 りょうてい) 기생으로 일하다가 일본군에 징집된 학병들을 탈출시키는 도움을 주면서 같은 해, 12월 광복군 제 3지대에 입대하여 공작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판사처가 상하이에 설치되자 처원으로 근무 중 같은 해 1945년 10월 순직하였다.
구호대(救護隊)
  • 최이옥(崔伊玉)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 구호대(救護隊)에 입대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 박금녀(朴金女)
    광복군 제3지대 1구대 본부 구호대(救護隊)에 입대하여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 박기은(朴基恩)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 구호대(救護隊)에 입대하여 구호분대원으로 광복시까지 활동하였다.

지하공작
  • 김정옥(金貞玉)
    23살때 남편따라 중국 베이징에 와서 전기부품상과 세탁소를 경영하던 와중 1944년 7월 일본인 형사 6명에게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남편은 고문을 받고 징역 1년 6개월 선고 후 신의주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김정옥 여사는 광복군 전방 공작원에게 도움 주는 것이 남편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945년 3월 중국 북경(北京)에서 광복군 제3지대원 목연욱(睦然旭)을 도와 적지구공작대(敵地區工作隊) 연락원으로 활동한 그는 동년 6월 김학규가 이끄는 중국 부양의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救護隊員)으로 조국독립 투쟁을 위해 적극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 김옥선(金玉仙)
    1945년 1월경 중국 하남성(河南省) 녹읍(鹿邑)에서 광복군 제3지대 전방 지하공작원 김 철(金哲) 및 김기극(金基極)과 접선한 그는 적지구공작대(敵地區工作隊) 연락원으로 활동하다가 동년 2월 동지(同地)를 탈출하였다. 그리하여 5월 광복군에 입대하여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救護隊員)으로 조국독립 투쟁을 위해 적극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7. 광복군의 계급체계

17.1. 계급장을 달지 않은 사례

계급호칭과 군복에 패용[147]을 하지 않았으며 계급은 광복군 문서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최전방 부대는 달지 않았으며 일부 사진 자료에서 계급장을 달고 있다면 후방에 있는 부대로 추정된다.
문응국 : 그래요. 안원생씨를 퇴원해라 해서 다시 캘커타로 와서 귀국 준비를 했는데, 내가 1945년 9월 6일 아침에 떠났어요. 한 3일 전부터 준비를 하는데 있어야 별 것 없지. 그 군복 다 가지고 올 수도 없고, 영국 군복인데 뭐, 계급장만 우리가 다르게 달았어요. 영국 계급장을 달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싫다. 그래 우리가 임시로 만들어 단 겁니다. 광복군은 계급장이 없거든 그때까지.

이현희 : 광복군은 계급장이 없었어요?

문응국 : 없었어요. 그 때 우리가 편지를 해서 빨리 계급장을 만들자 해서 무궁화로 만든 것이 그겁니다. 그래서 영국식을 많이 닮았어요. 좋은 점은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요.[148]
김행복 : 그때 지사님은 무슨 계급을 달고 있었습니까?
장호강[149] : 그때 우리 광복군은 계급 안 달고. 내용은 부관참모니까 중령급입니다. 부령급이지요. 부령. 그러나 그때는 계급은 안 달고. 중국군대도 계급은 안 답디다. 왠고 하니 전쟁 때는 달면 도리어 사병과 (사령부) 안에는 달고 있었는데 최전방 나온 부대는 안 답디다. 왜 안다느냐 했더니 전쟁시에는 안 단다고 그래요. 광복군도 속으로 난 무슨 계급이라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표시를 하지 않고 동지, 같은 동지다 이거죠. 부를 때도 ○○동지.. 절대 무슨 저 계급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대장 동지지, 구대장 동지고, 장호강 동지라 그러지, 절대 계급은 안 불렀어요.

김행복 : 우리 같은 경우에는 박소령, 김소령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그것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저희들 입장에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군요.
장호강 : 중국의 혁명 전통이 옛날부터 동지, 동지 했지 계급을 안 불렀습니다. 그 자체가.

김행복 : 그것은 저도 역사적으로 좀 알고 있습니다. 인민들은 전부 평등하고, 계급사회가 아니다. 하고 계급을 회피하는, 실제로는 게급이 있으면서도 그런 면이 있지요.
장호강 : 광복군은 계급을 안 달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해방 거의 가까이 가서 총사령부에 있는 분들이 계급을 붙이더만요. 허허허. 해방되어 갈 때.

(중략)

김행복 : 그때 지대장이 누구였지요?
장호강 : 지대장은 김학규 장군. 3지대장.

김행복 : 그러면, 김학규 장군이 그 일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지시도 내리고 하셨군요.,
장호강 : 부지대장에 이복원(李復源) 장군이라고 있었고.

김행복 : 그때 장군으로 부르셨습니까?
장호강 : 그땐 장군이 아니고 대령 계급이지요. 지대장은 우리 준장과 같은 계급이고, 또 부지대장은 대령과 같은 계급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계급장은 붙이지 않고.

김행복 : 계급장은 붙이지 않구요?
장호강 : 예. 예. (설명 도중에 서재에서 사진첩을 꺼내와서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을 한다) 구대장이, 제1구대장이 박영준. OSS특별 …… 이 사람은 정령, 대령과 같은. 이 분도 정령, 그래도 계급장은 안 달았습니다. 이 분은 부령, 중령과 같은 계급이지요. (이 분은) 참장

김행복 : 준장과 같은 계급이지요?
장호강 : 예, 그렇습니다.

김행복 : 그런데 계급을 공식적으로 명령 상으로는 부여를 해 줍니까?
장호강 : 그러니까 서류 상으로는 알고 있죠 자기들이. 중경서 파견할 때 계급을 알려 줍니다. 총사령부 거기에는 (계급이) 나옵니다. 나옵니다. 그러나 본인들이 현지에 왔을 때는 절대 계급장을 달지를 않고.[150]

한국광복군은 광복군 행동 준승 9개조항으로 인하여 중국군 지휘체계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1945년 초까지는 중국군 체계를 따랐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3. 본회는 해군(한국광복군)이 한국의 내지(內地) 혹은 한국 변경에 접근한 지역을 향한 활동을 원조하되 아국의 항전 공작과 배합함을 원칙으로 하며, 한국 국경 내로 추진하기 전에는 마땅히 한인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윤함구(淪陷區: 중국 내 일본군 점령지역)를 주요 활동 구역으로 삼는다. 군대를 편련기간(편성하고 훈련하는 기간)에는 아국(我國, 중국) 전구(戰區) 제1선 부근에서 조직 훈련하되 다만 우리의 현지 최고군사장관(지휘관)의 통제(當地 最高軍事長官의 節制)를 받아야 한다.[151]

한국광복군은 부대단위가 아닌 중국군에 예속되어있는 상태로 대원제를 운영하게 된다.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는 1942년 7월 <지도초안>을 제정하였다. 그 초안은 총 3항 15조였다. 총강에서는 이 방안의 제정이 쑨원 선생의 "약자를 건지고 쓰러지는 자를 부추기라"는 유지와 장제스 위원장의 항전방략에 맞추어 한국인들의 복국 역량을 배양하고 그들로 하여금 태평양 전쟁에 공헌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비 : 이 경비는 주로 조선의용대와 그 뒤에 나타난 한국광복군에게 제공되었다.
1938년~1941년 사이의 조선의용대는 명의상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지급된 봉급은 국민당 부대와 동등한 대우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이탈한 이후부턴 중단)
1940년 한국광복군이 성립된 뒤, 한 차례 미주의 한국 교민들과 쑹메이링(宋美齡)이 이끌던 중국 부녀단체로부터 경비 원조를 받은 적이 있으나, 1941년 겨울에 이르러 국민당 군사위원회 참모총장이 한국광복군을 지휘하도록 한 뒤부터 광복군의 무기와 식량 봉급도 국민당 군정부가 직접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은 부대 단위가 아닌 대원제(隊員制)를 채용하고 있었다. 각 대원은 모두 중국 장교(소위 이상) 봉급을 받았다.
1945년 5월, 한국인의 요구에 의하여,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직접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그들에 대한 보급은 여전히 군정부 군수서(軍需署)가 직접 담당하고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임시정부가 차관 형식으로 한데 묶어서 장부에 적는 수속상의 문제뿐이었다.[152]

게다가 1944년 10월 22일 학도병 출신 33명, 일반인 출신 11명 등 모두 48명의 교육생들은 한광반 제1기를 졸업하였다. 입교생 전원은 졸업과 더불어 중국군 소위의 임명장을 받았다[153] 왜냐하면 한광반이 제 10전구 린취안 소재의 중국중앙군관학교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편입되는 정화암이 이끄는 한중합동유격대(1939~1945년)와 유기석[154] 한교전지공작대(1943~1945)에는 계급이 없었다. 정화암 선생과 유기석 선생은 1920년대부터 재중국 무정부주의 활동을 하게 되면서 많은 중국인 동지들이 있었고 아나키즘 조직이 1937년 12월 조선혁명자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과 협의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한/중 연대와 함께 항일 투쟁을 위한 군대를 조직하였고 본인들이 아나키스트들이었기 때문에 원칙은 군대를 부정하는게 아나키즘의 원칙이라 필요악으로 공작대를 조직한 것인데, 어떤 자료에도 대원들에게 계급을 부여하진 않았다.

따라서 광복군의 지대장, 구대장, 분대장을 이끄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독립운동하게 되면서 중국군 각 전구의 군벌과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경우가 많았거나 약산 김원봉, 나월환처럼 중국의 군관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중국군 계급을 달고 있었다. 총기지급도 중국군관학교 임관 후, 2년 정도 중국군으로 복무해야 권총이라도 지급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광복군이 창설된 후, 초모공작하면서 그 총을 쓸 일이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등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광복군은 창설 당시에는 대한제국군의 계급[155]을 사용하였다고 하나,[출처1]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등록되어있는 광복군 출신 중, 임시정부, 총사령부, 제 2지대의 경우 현재 중위에 해당되는 부위(副尉)라는 계급을 많이 달고 있는데, 한광반 1기가 중국군 소위(小尉)계급장을 달고 각 부대에 배치가 되었으니 중위에 해당되는 부위(副尉)을 일괄적으로 달아주었다. 사병이나 부사관 계급장도 있으나 이는 훗날 초모공작으로 인하여 부대원 수가 많아졌을 때 대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장교의 비율만 너무 높다.

원래 군대에서 계급이란, 많은 병력을 지휘통솔할때 사용되는 것인데, 결국 광복군에게 있어서는 초모된 병력이 5천명에서 만여명 이상 많아야 통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광복군의 병력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때까지 540명 수준이었고 광범위한 중국대륙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계급을 부여받았다 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구대장, 부구대장 정도 되는 사람은 계급을 받았을 수도 있으나 실제 생활은 현대 대한민국 국군의 분위기랑 전혀 달랐을 것이고 작은 조직이니만큼 유연적/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김준엽, 장정-나의 광복군 시절에 이범석 장군에게서 계급받는 경험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다행스럽계도 1945년 5월 1일에 이범석 장군이 대원들에게 승진 발령을 내렸다. 충칭에서 새로 도착한 우리 일행 19명도 일제히 중위로 승진하였다. 다행이라는 것은 모두 승진의 기쁨 덕에 나의 부관 취임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범석 장군은 모든 것을 이미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다. 광복군을 창설할 때 전 대원을 위관급 이상으로 임명한 것은 장차 확대될 광복군의 기간요원으로 삼으려는 것이고 또한 중국측으로부터 지원을 많이 받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리촨분교를 졸업할 때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므로 중위로 승진할 때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157]
중국군 계급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다 한국식 계급도 총사령부나 제 2지대 서안본부로 가야 받을 수 있었다. 총사령부 본부와 멀리 떨어져 최전방있는 제 3지대나 제 3징모분처는 계급을 임명받으려면 특파원이 가서 임명장을 받아야 가능했는데, 현지 중국군하고 같이 공작활동을 하니까 당연히 중국군 계급을 따르는 수 밖에 없다.
이범석 장군을 '광복군 국내정진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자동으로 정진군 총사령관의 부관이 되었는데 철기는 그와 동시에 내 계급을 소령으로 진급 발령하였다. 그것은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 사령부나 국내 지도자급 인사들과 접촉할 때 사령관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을 것을 예견한 것이었다.[158]

17.1.1. 계급 (1941 ~ 1944)

한국광복군 9개안 행동준승을 적용받는 1941~1944년 동안의 한국광복군중국 국민혁명군 육군 군사계급을 부여받았다. 이 시기 한국광복군의 최고 계급은 중장으로, 총사령관 지청천의 계급이었다.[159] 중장은 현대 대한민국 국군 기준으로는 소장에 해당한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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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계급
장관(将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ieutenant_General_rank_insignia_%28ROC%2C_NRA%29.jpg
중장(中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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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少將)
교관(校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lonel_rank_insignia_%28ROC%2C_NRA%29.jpg
상교(上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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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교(中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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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교(少校)
위관(尉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nior_Lieutenant_rank_insignia_%28ROC%2C_NRA%29.jpg
상위(上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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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中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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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少尉)
준군관
(准軍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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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위(准尉)
사관
(士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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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上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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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中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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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下士)
사병(士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nior_Private_rank_insignia_%28ROC%2C_NRA%29.jpg
상등병(上等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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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병(一等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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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병(二等兵)

17.1.2. 계급 (1945.2.20 ~ 1946.5.16.)

  • 제정 배경
    1944년 8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군사위원회 참모총장으로부터 ‘종금 이후로는 한국광복군이 의당히 한국정부에 직속할 것인바, 전자에 중국군사위원회에서 정한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항은 지금 수요되지 않으므로 이를 곧 취소한다’ 라는 공문을 접수하였고, 뒤이어 1944년 10월 2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잠행(暫行) 조직 조례’ 및 ‘지대·구대 잠정 편제표’를 통과 시행하였다.[출처3]
이후 1944년 11월 6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광복군 총사령부와 각 지대의 조직조례 및 직원의 관급조정안을 제정 공포하고 군인들에게 계급을 부여하면서 한국광복군은 광복군 고유의 계급체계를 사용하게 되었다.[출처4][163]
1919년 이미 제정된 바 있었던 대한민국 육군임시군제 중 군인의 등급을 무관(武官)[165]과 병원(兵員)[166]의 두 종류로 나눈 다음, 무관에는 장관(將官)·영관(領官)·교관(校官)·사관(士官)으로 하여 각기 정(正)·부(副)·참(參)의 세 가지 등급이 있게 하고, 병원에는 1·2·3등이 있게 하였는데, 1944년 10월 23일 부로는 다시 교관(校官)을 위관(尉官)으로, 병원(兵員)은 상등병·1등병·2등병으로 개정하기로 결의를 보게 되었다. 이후 1944년 11월 6일 국무 회의에서는 다시 총사령부 및 각 지대 직원의 관급 조정안을 제정 통과하였다. .[출처3]
  • 계급장
    한국광복군의 계급장 도안은 1944년 12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과 과장 조지영이 고안하였고, 이듬해인 1945년 2월 20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공포시행되었다.
다만, 이 계급장들은 광복군 내에서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현지 일선 및 최전방에 파견된 군인들은 서류상으로는 계급을 부여받았으나, 그것을 표기하는 계급장은 패용하지 않았고, 해방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총사령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 또는 각 부서의 주임급 직책을 맡는 군인들만 정복을 착용할 때에 한하여 패용하였다.[출처2][169]
밑에 나와 있는 계급장 중 장관, 영관, 위관은 견장 형식의 계급장이고, 사관, 병원은 오른팔에 부착하는 형식의 계급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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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계급[170]
장관(將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95%9C%EA%B5%AD_%EA%B4%91%EB%B3%B5%EA%B5%B0_%EC%A0%95%EC%9E%A5_%EA%B3%84%EA%B8%89%EC%9E%A5.png
정장(正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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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副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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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장(參將)
영관(領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95%9C%EA%B5%AD_%EA%B4%91%EB%B3%B5%EA%B5%B0_%EC%A0%95%EB%A0%B9_%EA%B3%84%EA%B8%89%EC%9E%A5.png
정령(正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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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령(副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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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령(參領)
위관(尉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95%9C%EA%B5%AD_%EA%B4%91%EB%B3%B5%EA%B5%B0_%EC%A0%95%EC%9C%84_%EA%B3%84%EA%B8%89%EC%9E%A5.png
정위(正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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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위(副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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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위(參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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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위(准尉)
사관
(士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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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무정사(特務正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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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正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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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中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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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參士)
병원(兵員)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95%9C%EA%B5%AD_%EA%B4%91%EB%B3%B5%EA%B5%B0_%EC%83%81%EB%93%B1%EB%B3%91_%EA%B3%84%EA%B8%89%EC%9E%A5.png
상등병(上等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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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병(一等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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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병(二等兵)

18. 직책/호칭

한국광복군에는 계급 외에도 직책 역시 존재하였는데 실제로는 '동지(同志)'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아나키즘(무정부주의) 계열의 독립단체로 시작하여 만들어진 조선의용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이름 또는 성) 동지(同志)"[171]라는 호칭을 많이 썼다. 제 1지대 제 2구대의 경우 이소민 구대장과 귀국 전까지 의형제를 맺으면서 '형(兄)'이라는 표현도 많이 썼다.[172]

'동지(同志)'라는 표현이 없어진 배경
일제강점기 당시, 친구(親舊)라는 표현은 친고(親故)라도 쓰였고 '친척'과 '벗'인 사람을 뜻한다. 원래는 Friends라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대중적으로 동무[173], 벗[174], 중국에서는 동지(同志)를 많이 사용했었다.

동무, 동지(同志)라는 표현은 본래 한국 전역에서 쓰이던 말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숙군(肅軍) 및 무자비한 양민학살 과정을 거치면서 이 표현들은 친구(親舊)라는 표현으로 대체가 되었고 '동무' '동지(同志)'는 북한 사람들이 쓰면서 남한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광복군 출신들이 '동지(同志)'라는 표현을 많이 썼는데, 이 표현을 썼다고 빨갱이로 몰아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현철군이 그저께 아리랑고개[175]에서 불심검문[176]을 만나 "어디 갔다 오느냐" 하기에 "동무 집에 놀러 갔다 온다" 하였더니 "동무란 말을 쓰는 걸 보니 너 빨갱이 아니냐?" 하더라고. 우리 연배면 '친구(親舊)'라는 좋은 말이 있지만 현철이 나이 또래에는 '동무'라야 격에 맞을 터인데, 무슨 알맞은 대용어라도 찾아내어야겠다.
한 사학자의 6.25 일기 "역사앞에서" p252 1950년 10월 17일자 김성칠 지음.

'혁명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사람'이라는 Comrade라는 의미를 동무, 동지(同志)라고 번역하면서 북한 김일성 주석체제를 신격화하면서 아바이 동무, 수령 동무, 수령 동지 등등의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강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있었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동무라는 단어가 거의 죽은 말이 되다시피 하였고 1990년대까지도 금지하는 분위기였으며 흔적은 '어깨동무', '길동무', '말동무' 같은 합성어에만 흔적이 남아있다.[177]

직책 소개
지대장[178], 구대장[179], 분대장[180], 대원 등의 직책이 존재하였다.[181]

같은 광복군 부대라도 조선의용대 출신이냐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따라서 제대로 군관학교 출신에 따라 분위기와 직책이 다 달랐다. 오히려 계급과 직책에 군대처럼 엄격하게 따져대는 곳은 지청천 장군이 있는 총사령부와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에서는 직책, 계급을 부여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음을 볼 수 있다. 참모, 부관, 정훈, 경리, 군의, 군법, 부지대장, 정치지도원, 서기, (군사)특파원, 대원 등등의 여러 직책들도 존재하였지만, 각 부대에 일괄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대장 자리도 5차례 바뀌는 곳도 있었고 또한 임시정부나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발족식을 할때 독립군, 의열투쟁, 군관학교 졸업생, 중국군 복무 등등으로 이미 서로서로 아는 사람들이다.

각 조직의 총책임자에게는 '대장' 또는 '주임'이란 명칭이 쓰였다.

나월환과 함께 동경에서 유학 생활을 보냈고 항일 투쟁을 같이한 박기성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월환은 머리가 우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장점이 많은데 반해, 단점도 많았다. 아무튼 대원들 간의 여론이 좋지 않아서 제일 가깝고 그를 잘 알고 있는 나는 틈만 있으면 그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나 대장, 지금 현재 나 대장에 대한 대원들 간의 여론이 좋지 않으니 매사에 조심해주게."
그러나 나월환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내가 뭐 어쨌다는 거요. 도대체 어떤 놈이 나더러 뭐라고 합디까! 뭣을 조심하라고 합니까."
이렇게 응수하며 여전히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해 주었다.
"뭐라고 딱 집어서 얘기하기는 곤란하네만, 내 생각에 자네는 한동안 어디 가서 쉬었다 왔으면 싶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굵고 짧게 갈 생각이오. 내가 어떻게 되든 박형은 나에게 개의치 말아주시오."
이때부터 나는 그의 말대로 일체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신문에서 동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인도공작대(印度工作隊) 대장 한지성(韓志成) 업무보고차 충칭(重慶)에
한국광복군 인도공작대는 1943년 가을 인도 전선에 파견된 이래 대적선전공작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둬 영국군으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아왔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공작대 대장 한지성 동지가 지난 12월 말 임시정부당국에 보고차 인도로부터 중경에 도착하였다 한다. 다음은 임시정부 주회(週會)에서 한지성 동지가 보고한 인도에서의 활동 상황의 대강이다.

“인도 전선에서 공작대가 활동에 나선 이래, 각 대원들은 민족의 영광을 위해 빗발치는 탄환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영국군의 작전에 협조를 다하였다. 공작대는 적을 향한 육성(肉聲) 선전, 방송, 전단 살포, 포로 심문, 적정 정찰, 포로 훈련 등 여러 부분에서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영국군 당국은 우리 인도공작대를 깊이 신임하고 있으며, 한국독립에 대해서도 동정을 아끼지 않고 있다. 중경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청년동지들이 인도에서의 공작에 다수 참여하기를 희망한다.”[182]

면담자 | 김행복(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사부장)
면담일시·장소 | 2001년 12월 1일, 12월3일·서울보훈병원[183]
이제 거의 다 끝난 것 같습니다. 공산주의 이야기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닌데 지금 다 지나가버린 이야기죠 …
김승곤 : 내가 광복회 회장 할 때, 광복회 회장 할 때, 광복회 회장으로 있을 때…

예.
김승곤 : 우리 밑에 직원이 와서 회장님 일본 아가하타 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하자고 그런다고 해요. 일본 아가하타 신문, 일본의 공산주의 기관지죠. 제멋대로 쓰는 놈이라 한번 더 다시 왔죠.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공보실에서 부탁한거. 공보실에서. 그래 올라오라고. 그래 통역하고 둘이 왔어요.

통역하고 둘이 왔습니까?
김승곤 : 그래 이야기 하다가, 내가 전에 중국 들어갈 때, 목포 수상경찰서에서 차표에다가 도장 하나 콱 찍어 주면서 ‘샹하이데 힌데고이’, 상해에 가서 죽고 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지. 내 이제부터는 한국말로 하마. 한국말로 해야겠어. 기자들에게 그렇게 말하니, 기자들도 웃더구만. 그런 놈이 어디 있어. 내선일체라고 하면서, 아 상해에 가서 죽고 오라니. 그런 일이 어디 있나. 전시에는 중국에서 다 동집니다. 동지. 동지, 다 동지야. 어저께 죽일 놈, 살릴 놈 해도 다 동지가 되고. 중국에서 공산당은 다 동지라고 한다. 상황이 그랬으니까. 중국 공산주의자인 아오야마[184]라는 사람이 와 있었어요.

아오야마(靑山和夫)라고 하는 사람이 왔단 말이죠.
김승곤 : 중국에서 해방되었지요. 공산주의자이죠. 중국에 많이 협조했죠. 그래 그 신문이 나왔어. 중국 공산당은 나 동지 다 됐다고. 다른 사람들이 신문을 들고 가서, 보라고 광복군 회장이 공산주의자다. 그래서 무슨 그따위 소리 하느냐고. 중국 대륙에서는 다 동지야. 중국 대륙에서 어떻게 싸웠는지도 모르고. 중국 대륙에서는 따로 살았지만 다 동지거든.

공산주의자도, 뭐, 공산주의 아닌 사람도 …
김승곤 : 다 동지야. 그래서 공산주의자와는 철저히 싸웠어요. 중국 형편도 모르고, 제대로 독립운동 하지도 않은 놈이 그 따위 소리하고 다녀. 그랬죠

이 동지(同志)라는 표현은 해방 후에도 광복군 출신들이 쓰였다. #

광복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듯이 동지(同志)라는 표현을 후손들이 이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

19. 복제

19.1. 중화민국 군대의 상황(1937~1945)

국민혁명군의 복식과 동일하였다.[185]

다만,
파일:이렇게 좋은 옷은 없었다.jpg
"이렇게 좋은 옷은 그 당시 없었단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군복을 생산할 물자를 조달하고 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군복 관련 규정이 제정된 후, 군복 제작 경비가 군비(軍費)[186]의 형식으로 각 지구(地區)에 할당되었고, 지역 책임자는 피복 공장에 제작을 위임하였다. 그런데 이 경비가 중간에서 착복되기도 했고, 공장마다 제작 수준이 달라 군복의 완성도에도 차이가 생긴 것이다. 현지 염색 공장에서 원단을 염색하였기에 그 색이 규정된초록색에 근접하지 못하였다고 한다.[187]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의 주요산업시설이 있는 대도시와 철로를 점령하였던 여건 상 피복 공장마다 완성되는 군복의 품질이 불안정하였기 때문에 양질의 군복이 광복군에게 지급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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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처런 대부분의 경우 광목[188]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군복[189]을 착용하였는데, 추운 겨울철에도 3~4백명의 군인들이 얇은 옷으로 버텨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190] 이마저도 군복 염색물이 빠지는건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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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군에게 받은 군복 색깔도 옅은 황토색, 황토색, 청색, 진청색, 하얀색[191], 검은색 등등 다 달랐었고 모직이냐 면이냐 광목이냐 따라서 재질도 많이 달랐다. 같은 색이어도 나염기술[192]이 좋지 않아 군복의 색상 역시 앞의 이유 때문에 짙고 옅은 정도가 제각각이었다. 상하이[193]나 난징[194] 정도 되는 대도시에 가야 미싱 500기를 돌려가면서 공장처럼 군복을 찍어낼 수 있지. 이마저도 1937년에 중국의 도시들 절반이 일본군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군복을 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부대표식이나 계급장은 생략되는 경우도 많았다. 출신마다 중국군관학교 출신, 중국내 한인교민, 일본군 한적사병 출신 등등 많았지만 다양한 중국 군벌내에서도 옷이 다 다르니 그 옷들이 다 같을리는 없었다.

파일:1940 중국.png

충칭(광복군 총사령부와 1지대)과 쿤밍(OSS 중국전구 본부)[195] 일부분 제외하고는 광저우와 홍콩등 해안에 있던 대도시들이 전부 일본군에게 점령되는 바람에 양질의 좋은 전투복을 구할 수 없었다.[196] 해로가 다 차단된 상황에서 후난성 챵샤대회전처럼 철도 길목 요충지를 막아내려고 필사적으로 전투했었다.[197] 폭격기 공습으로 대도시도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양복옷감을 구하기는 더 힘들었고 설령 옷감이 있다하더라도 양복을 맞춤으로 입었던 시절이라서 양복만드는 테일러들이 일하는 곳이 대도시들이었다. 가죽 군화도 전부 맞춤 수제화였고 1990년대까진 양복과 구두는 전부 맞춤으로 입고 다녔다.

1990년도 이후, 현재 우리가 군대에서 대량으로 군복이나 전투화 받는 경우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다시피해서 나오는거지 중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엔 하나하나 다 맞춰 입어야 했다.

19.2. 청색 군복 vs. 황색 군복

한국광복군 장준하(張俊河, 1918-1975)와 김준엽(金俊燁,1920-2011)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은 청색(靑色) 군복을 착용하였다. 그들은 중국에 주둔했던 일본군 부대를 1944년에 탈출한 학도병이었으며, 1945년 1월말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하여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한국광복군이 된 그들은 아래와 같이 총사령부로부터 청색의 중국 군복을 보급받았다. 재질은 무명이었다.
재질 무명, 광목
색깔 청(회)색
염료 청대[198]라는 쪽 염색[199], 염료가 없을땐 백색군복 추정[200]
세탁 중국은 물이 부족하기에 세탁을 하지 않는다. 광목은 물에 묻으면 수축이 됨.
수명 3~4개월에 한 번씩 새로 지급받거나 기워서 입었다고 한다.[201]
깨끗한 무명으로 지은 군복이 왔다. 중국군의 군복이 청색임에 반하여 우리에겐 백색 군복을 지어준 것은, 우리가 백의 민족임을 아는 사령관의 소치일까. 여하간 우리는 기뻣도 고마웠다. 백의의 관습이라는 의미를 걷붙여 우리는 옷을 갈아입었다. 우리는 기쁨이 노란 금빛 단추를 뭉치어서 자랑스러웠다. 모자까지 흰 군모로 딸려 있었다.
우리는 백색 군복으로 정장을 했다.
아직 저녁시간까지 목욕을 할 만한 시간이 있어 근방 중국 목욕탕으로 전원이 안내되었다. 라오허커우를 떠난 후 첫 목욕 기분과, 목욕 후 마침 광복군 총사령부로부터 광복군의 새 군복이 지급되어 산뜻하게 새 옷을 갈아입은 기분은 날 것같이 상쾌했다.
이가 득실거리는청색 군복, 너덜너덜 찢기고 넝마처럼 해진 것[202]을 몇 개월만에 벗어버리고 새 청색 군복으로 바꿔 입으니 모두 사람마저 변한 듯이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기분 속에 조국의 군대가 다된 듯이 흐뭇해졌다.[203]

김준엽(金俊燁)은 그의 회고록에 일본군을 탈출하여 충칭(重慶)에 도착하기 전, 그가 잠시 몸담았던 중앙군 소속 유격대(遊擊隊)가 푸른빛의 심회색 군복을 착용한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마을 어귀를 얼핏 보니 노랑 군복을 입은 중국 군인이 총에 기대어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국민정부군은 파란 군복을 입었고 친일 왕징웨이군(汪精衛軍)은 노란 군복을 입었다. 신병인 나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고, 따라서 마을 어귀에 노랑 군복을 입은 군인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쑨 동지가 무엇을 안고 들어왔다. 그는 웃으면서 "김 동지의 군복이니 갈아입으라"는 것이었다. 정말 고마웠다. 어서 일본군복을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하고 있던 처지였다. 국부군의 청색 군복에 청천백일 휘장이 붙은 군모를 쓰게 되었다. 우리 독립군의 복장은 아니지만 우선 연합군의 일원인 중국군 군복을 입게 된 것이 여간 자랑스럽지가 않았다. 외양만 보고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없게 되었다.[204]
김준엽 지사가 1944년 3월 30일 중국 장쑤성 서북부에서 중국인 한즈룽 사령관 환영연을 맞이하기 전에 중국군복을 받았을 당시의 회고

반면에
황색 군복은 친일 괴뢰 부대인 왕징웨이 화평건국군(和平建國軍)의 군복임을 알 수 있다.[205]
정기여객선의 창저우(常州)의 교외를 달려 주리파(竹籬琶)를 경과할때 적 괴뢰부대(왕징웨이 군대)는 강 입구에서 여객의 '양민증(신분증)'을 검사하였고 검사가 끝나자 배는 바로 주리파 외곽으로 달려갔다. 주리파 외곽은 유격대 지역이다 함락지역의 완충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격대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다. 배 위에는 몇 명의 황색 군복을 입은 괴뢰 군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군복을 벗어버리고 평상복으로 입었다. 유격대를 만나기 두려워서 한 준비 행동이었다.[206]

남경의 지하공작대원의 경우 중국민간인 복장에 짚신을 신고 다니는 경우도 허다했다. 만약 광복군 표제나 백일청천기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다 일본 경찰이나 일본군에 발견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자.
광복군 시절 그 생활은 그대로 노숙입니다. 풀과 곤충과 나무와 함께 있는 생활이죠. 없는 길을 헤치고 다니다보면 식물이 계절따라 피고지고 하는 대자연의 숨소리를 듣게 되죠. 하루 100里[207]는 걷고 짚신 두 켤레 모두 닳아버리죠.[208]
남경대학의 조선인 비밀결사가 들통이 나 생긴 남경대 사건때 많은 조선인이 체포되고, 송지영씨는 나가사끼 형무소로 보내진다. 이 사건으로 많은 학생들이 남경대를 빠져나와 광복군으로 들어가게 된다. 정박사도 대학에서 도망쳐나와 광복군 공작대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가 맡은 일은 광복군 징모 제 3분처의 초모공작대였는데, 말하자면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일선지구를 돌아다니면서 일본군에 있던 조선인을 끌어내와 광복군에 편입시기는 임무로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위험 속에서 산 셈이다. "열여덟, 열아홉, 꽃같은 시절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생활로 보냈어요. 무기도 없이, 민간복장으로 일본군 지역을 돌아 다녔으니까 금반지 하나만끼고, 그게 돌아올때 여비에요."[209]
정영호 지사의 회고

19.3. 총사령부 토교대(충칭), 일본 패전 후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야 상하이에서 군복을 맞춰 입었다.
천더썽 소교(제 3전구 조사실)는 우리를 끌고 양복점에 가서 군복을 맞추어주면서 계엄지구 내에서 군인이 군복을 착용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조사실 공작원 뿐인데, 광복군으로서 대민사업을 하려면 군복을 착용해야 한다고 군복을 맞추어주고 군복 값도 지불해주었다.[210]
1945년 8월 28일, 김용 지사의 회고

또한, 여건이 될 경우 짚신이 아닌 가죽장화를 지급받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 총사령부 갔는데, 뭣 때문에 갔냐면 거기 파견된 사람들은 가죽장화를 해줬는데 우리는 그걸 안 해줘서 데모하러 갔어요. 그때 거기 있던 사람들 다 갔죠. 아, 거기 앞에 가서 쭉 대열에 서서 우리는 왜 안주고 저기만 주느냐 우리도 달라, 해준다면 가고 안 해준다면 여기서 끝까지 데모하겠다, 그래서 나중에 해줬어요.[211]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토교대 근무) 유재창 지사의 구술

인면전구공작대는 영국군복을 입었었고 제 2지대 제 3지대 OSS 국내진공반은 미군복을 입었었다.

20. 무기

20.1. 총기류

2차 세계대전기의 한국독립군 보병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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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총기제한 사례

광복군 9개 준승에 의거하여 광복군 대원은 중국군 장교의 통제를 받았었고 중국군 입장에선 일본군과 싸우는건 중국군이 할 일이었다.

중국사회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 중에 좋은 인재는 병사가 되지 않고, 좋은 쇠는 못이 되지 않는다(好男不當兵 好鐵不打釘 | Hǎo nán bùdāng bīng hǎo tiě bù dǎ dīng)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중국의 좋은 인재.. 달리 말하면 고학력자와 유산자들은 군대에 들어가지 않았고 대부분은 농민이나 노동자였다.
국민당군 제 17군단 감사결과(1945.2.)
부대에 병력이 18000명 있는데 소총은 겨우 5337정이었다.[212]
중국군 병사 3명 당 1명만이 소총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총이 없는 다른 병사들은 따다오(大刀)라는 큰 대검을 들고 싸우게 된다.
대도는 현지 대장간에서 쉽게 제작할 수 있었는데다가 가격도 상당히 저렴했었다. 중국 국민혁명군의 무기부족을 따다오로 대체하게 되다보니 일본군의 기관총에 몰살 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특히 현대전을 치르는데 있어서 포병이 되려면 수학이라도 잘해야하고 공병은 토목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군 90%는 문맹이라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 병사들은 대부분 농민공 출신으로 학력이 많이 낮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등학교나 전문대학 졸업 이상인 학병출신인 한국인들을 우대했었다. 대졸출신인 독립운동가들이 국민혁명군 소교나 상교 계급장을 받고 부대를 맡은 적이 있다거나 하는 일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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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지급받더라도 총알이 없거나 관리용품이 없어서 총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우산대용으로 쓰였다.

국민당 군대의 소총은 각기 다른 원산지로 채워졌다. 산둥반도에 독일식민지였던때가 있어서 독일 Kar98소총, 그리고 장제스 총통이 소련으로부터 군수지원받은 모신나강 1891, 체코 ZH-29, 적에게 탈취한 일본 38식, 체코 VZ.98/22소총 등 장비가 많아지니 만큼 필요한 보급 탄약이나 부품도 많아지다보니 소총을 받았어도 발사할 탄환이 없다면 막대기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군수공장들도 타이위안 조병창, 난징 조병창, 상하이조병창 등이 있었으나 1937년 12월까지 수도 난징까지 다 먹히면서 1938년부터는 이 조잡한 권총들 조차 만들어서 지급하지도 못했다.

총을 수입을 했으면 탄약이나 관리용품도 수입했어야 했는데, 독일제나 체코제는 그러지 못했다. 모신나강 말고도 미국이 소련에 대여해준 미군 무기도 소량 중국에 풀렸으나 이마저도 탄약이나 관리용품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였다.

제해권조차 일본군이 장악하면서 미국과 캐나다에서 무기대여법을 통과하여 태평양을 통해서 총기를 보낼려고 했으나 그때 만들어진 미국에서 만들어진 대부분 무기들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돼서야 보내졌고 그 무기들은 1946년 이후, 국공내전과 한국전쟁때 쓰인다.

장준하의 회고록에도 린촨 한광반에 제식하는데도 총이 없었다고 한다.
조국이 없는 군대에는 목총 한 자루도 없었다. 집총훈련은 고사하고 이곳에선 총을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였다. 그러니 군사훈련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오와 열을 맞춰 대열을 정리하고 "앞으로 갓", "뒤로 돌앗" "구보" 등의 구령에 따라 질서 정연히 연병장 안을 맴도는 것 뿐이었다. 이것이 한 달 이상이나 계속 되었다.

중국 중앙군 군관후보생들의 훈련광경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훈련이 아닐 수 없었다. 집총 훈련의 그 늠름한 모습이 부러웠고 사격훈련은 우리의 선말이었다.

이따금씩 야외 교장에서 들려오는 실탄사격 훈련의 총성이나 박격포 훈련의 포성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우리는 총없는 군대다. 우리는 조국없는 군대다. 아니, 조국은 있었으나 잠시 빼앗겼을 뿐.'

물론 이 임천군관학교 당국으로서는 동등한 대우를 해준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나라없는 설움을 받는 대우였다.
총없는 군대.
구태여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날개 없는 새처럼 무기 없는 군대는 의붓자식 대접 속에 있었다. 내 눈으로 보아도 우리 한광반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보기 싫어지는 군대였다.[213]
이현희 : 그 밖에 장비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김국주 : 장비 지원을 받은 일은 없습니다. 지하 공작을 나갈 때 무기를 가진 동지도 있었습니다만, 사실 그 때 우리 광복군은 소총이나 기관총을 메고 일본군하고 싸우는 것보다는 연합국 측에게 우리 한국 민족은 독립 의지가 굳세고 독립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켜주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윤봉길 의사와 의거는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을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했고 그 때부터 중국 정부에서도 본격적인 지원을 한 것입니다.
광복군 제 3지대에서 끝까지 남아있었던 김국주 지사의 증언.[214]

제 9전구 공작대에서 제 1지대 제 1구대 김승곤 지사의 면담 기록에서도 총기 지급되진 않았다.
면담자 | 김행복(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사부장) 면담일시·장소 | 2001년 12월 1일[215]
Q : 그런데, 지사님께서 1구대를 인솔해서 그 장사 중국 제9전구 지역으로 가셨다고 되어 있네요. 지금 그말씀 하실려고 그러십니까?
김승곤 : 그래요. 외국에서 우리가 실제 일본놈하고 마주 싸웠으니까. 전투는 거칠었어요. 광복군은 무장도 못했어. 광복군은 무장도 못했어.

Q : 무기가 없어서 그랬습니까.
김승곤 : 무장도 변변찮았지.

Q : 무장을 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까?
김승곤 :했겠지요.

중국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를 꾸린 유기석 회고록에서도 제한과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우리들이 경현에 가서 작업하는 것은 사전에 전쟁 지역의 사령장관부의 비준과 소개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주둔군 측은 우리들의 작업을 책임지고 협조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부대는 국민당의 완전한 정규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임무와 방향은 우리들 공작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연고때문에 우리들 공작대의 작업과 활동은 모두 일정한 제한과 영향을 받았다."[216]

1942년 12월 약산 김원봉이 광복군 부사령직에 취임한다는 소식을 접한 에서는 약산 김원봉 부사령관이 9개 행동 준승에 대한 개정을 요구했다.
광복군 제1 지대장 겸 부사령 직에 취임한 김약산은 부대의 재정비와 아울러 대원의 교육 훈련에 힘을 경주하는 한편, 중국군 당국이 제정하여 실시되고 있는 소위 9개 행동 준승에 대한 개정을 촉구하기 위하여 총사령을 보좌하면서 광복군 지위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중국 군사위원회 당국에 교섭을 추진하였다.[217]

일본군 탈영한 한인 학병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준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나는 류 참모장에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여러번 표시했다. 그리고 야간행군 중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포로가 되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자살할 생각이니 권총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 ···(중략)··· 이 말을 듣고 참모장은 한 사령관과 의논해서 선처하겠지만, 나의 안전은 절대로 지킬터이니 안심하라고 위로하였다."[218]

20.1.2. 총기지급 및 소지사례

광복군 제 3지대에 소총을 지급받은 때는 1945년 6월 11~12일 경이고 기종은 한양조 88식으로 추정된다. 총기 100자루는 어떻게 받았으나 탄약은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김행복 : 지사님, 그 앞 부분 이야기는 이미 하셨고, 가서 작전처의 중령을 만나니까 내 소관이 아니다 그래서 대령을 만났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대령을 만나고 난 그 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장호강 : 예. 리황에 가서, 그때 갈 때 윤창호 동지와 둘이 갔습니다. 처음에 저는 지리를 잘 몰랐기 때문에 거기 있던 고참을 안내를 받아가지고, 공문을 받아가지고 갔죠. 윤창호라고 우리보다 선뱁니다. 먼저 들어간 동진데, 지리를 알더만요. 그 사람하고 같이 갔습니다. 도보로. 사흘을 걸려서 리황에 가서 그 다음에 총사령부에 밤에 가서 사흘만에 리황에 도착해서 그 날은 밤이 되었길래 그 날은 자고 그 다음날 들어 갔어요. 6월 11일인가, 12일 경인데, 아이구 참 ……

김행복 : 됐습니다. 날짜를 모르시면 그냥 넘어가시죠.
장호강 : 들어가서 작전처 갔더니 중령이 안내를 하더만. 작전처의 주임하고, 대령이죠. 우리가 광복군에서 왔다. 쭉 브리핑을 현황을 보고드리고 ……

김행복 : 그렇게 하셨다고 했죠. 현황 보고 드린 내용이, 우리 부대에 병력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일본군과 같이 싸워야 되지 않겠느냐. 도와 달라,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그러셨죠.
장호강 : 그런 말을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왜적과 싸울려면 무기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계속해서 들어오는데 약 300명이 들어와 있다. 그런데 무기를 좀 빌려줄 수 없겠느냐? 했더니, 에, 처음에 저희가 200정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그것도 많다는거죠. 이거 그렇게 안 된다. 100정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오너라. 내일 또 오너라 그래서 여러 가지 브리핑하고 공문을 갖다 바치고, 그 다음에 다른 얘기 쭉 하다가, 그 다음에 이제 다음날 갔죠. 갔더니 100정 밖에 못주겠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고, 또 전방에 연락을 했더니, 전방에 리황 총사령부에는 무기가 없고, 전방부대에 가야만 있다. 임천에 가면, 전방지휘소에 가서 산하 부대 어느 사단에서 타도록 해라.

김행복 : 아마도 무기고가 그 쪽에 있고, 사령부에는 없었기 때문이겠죠.
장호강 : 그래서 공문을 써다오. 그래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또 그 다음날 떠나서 임천으로 걸어서, 그것도 사흘 걸려서 갔습니다. 가서 200자루 달라고 이야기 하니까 안 된다고 그래, 하하. 그래 갔더니 또 사단사령부로 가라. 자기네 전방지휘소에는 무기가 없다. 가까이 있는 사단에 가라. 사단에 갔더니, 사단장이 부양에 우리 광복군에 왔다 간, 좀 얼굴이 익은 사람이었어요.

김행복 :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군요.
장호강 : 안면이 있는 분이었어요, 류 준장이라고. 갔더니 아주 대우를 잘 해줘요. 점심을 먹이고 지시해서 좋은 총을 골라서 100정 골라서 주라고. 골라 줄테니까 내일 와서 받아 가라. 그리고 자기네 사단사령부 안에서 자라. 그래서 우리 둘이서 거기서 대접을 받고, 밤에 또 좋은 음식 주어서 먹고, 그 다음날 총을 타가지고 갔죠. 그런데 둘이서 가져 올 수 없잖아요.

김행복 : 그렇죠. 100정이나 되는 총이니……
장호강 : 마침 거기가 강이 흘러내려 가고 있어요. 황하의 지륜데, 지류가 흘러서 우리 부양으로 가는 조그마한 강이 있습니다. 마침 그 부대에서 배를 구해주고, 중국 배를, 거기서 자기들이 사병을 시켜서 (총을) 다 실어주고 부양까지 싣고 왔습니다. 부양에 와서, 부양에 우리 광복군 연락처가 있거든요. 연락처에서 연락을 해가지고, 우리 동지들이 나와 가지고 총 100자루를 인수해 가지고, 마차를 구해가지고, 싣고 리오자이(劉寨), 그때는 우리 3지대가 이동을 해서 리오자이라는 데 이동해 있었어요. 여기에 우리 3지대 본부가 위치했습니다. 거기에 우리 3지대 본부가 이동해 갔습니다. 처음에 여러 곳에 이동하다가 인원이 점점 불어지니까 이거 안되겠다 넓은 지방 지역을 달라 해가지고. 그것도 중국 현정부와 교섭해가지고 여기에 갔더니 넓어요. 큰 부락, 큰 마당이 있더만요. 광장이. 훈련장으로 겸해서, 거기서 3지대 본부가 훈련을 하게 되었죠.

김행복 : 그때 총의 종류가 무엇이었습니까? 총의 종류가.
장호강 : 종류가 보병 소총이었습니다. 중국제 보병총이라고.

김행복 : 저는 실물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장호강 : 일본 99식은 아주 깨끗하고 가볍고, 그런데 이 중국 것은 좀 무겁습니다. 쇠도 좀 둔해 보이고. 그런 총이에요.

김행복 : 그 무게는 우리 M-1총 만 합니까?
장호강 : 우리 M-1총보다야 가볍지요. 일본총보다는 약간 무겁고, 미제 총보다는 가볍고.

김행복 : M-1총은 서양 사람들 체격에 맞도록 만들어서 우리들한테는 좀 무겁죠.
장호강 :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의 99총 비슷하죠. 동양 사람 체격에 맞게 해야 되니까.

김행복 : 실탄은 구해 오셨습니까?
장호강 : 실탄은 안 주더만요.

김행복 : 안 줘요?
장호강 : 예, 안 줘요. 제가 전방의 사단장을 아니까 좀 어떻게 줄 수 없느냐 하니까, 절대 안 된대요. 그때까지는 (중국측에서 한국 광복군을) 믿지를 못했죠. 우리 광복군을 확실한 전우라고 믿지를 못했죠.[219]

김준엽 지사가 리볼버 권총, 카빈 소총 등 총기를 추가로 받은 것은 1945년 5월 1일, 이범석 장군 부관으로 임명되고 난 일이었다. 심지어 중국군 유격대에 있을때 총기 못받은 서러움을 표출하기도 했다.국내진공대 빼고는 이 시기쯤에 제대로된 총기가 지급되었고 중국군에서 군관학교를 나와야 중국총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한편 나는 부관으로서 이 장군을 호위해야 할 임무도 있다고 하여 6연발 권총도 차게 되었다. ...(중략)... 특히 권총을 찬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기도 했다. 그날로 전 대원에게 미제 카빈총이 지급되었다. 그러니까 전부터 쓰던 중국군 보병총 이외에 새로 카빈총까지 소유하게 된 셈이다. 새 무기의 지급은 또 한 번 대원들을 기쁨으로 떠들석하였다. 노태준, 안춘생, 노복선 등 3 구대장에게도 같은 권총이 지급되었다.
(중략)
점심식사 후에 나는 장준하 동지 노능서 동지와 함께 카빈총을 들고 들판으로 나갔다. 어서 이 카빈총을 한 번 쏘아보고 싶었다. 그것은 유격대에 참가한 이후로 무기없는 독립군으로서 서러움을 한꺼번에 씻어버리려는 충동이었던듯 하다.[220]

반면 개인적으로 구매해서 소지하고 있는 건 가능했다.
찐화(金華)시내 야간 통행은 일본군의 철통같은 경계망 때문에 특별한 용무가 아니면 통행할 수 없었다. 우리는 1944년 7월 15일 밤 12시 약속 시간에 맞추어 김 씨네 가족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행장을 위장했다. 옷 보따리를 챙겨들고 김 씨와 박시준과 나는 전송 차역에 가는 것처럼 간단한 옷차림을 했다. 밤 11시 사무실 대문을 나와 박시준 형이 앞장을 서서 인도하고 그 뒤 김 씨네 가족이 따르도록 하였다. 내가 맨 뒤를 따라 나섰다. 일본영사관 앞을 지나 찐화역(金華驛)으로 가는 도중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하여 나는 회사에 비치해 두었던 모젤 2호 권총[221]을 휴대하고 따라 나섰다.[222]

개인적으로 구입해서 구비해둔 권총이다. 김용 지사가 당시 일본군 점령지였던 찐화에서 탈출하는 수기 내용으로 회사에 비치해두었던 자기 권총을 가지고 나왔었다.

당시 마우저뿐만 아니라 브라우닝, FN M1900, FN M1910, 콜트M1911등 보기에도 조잡하나 발사는 가능한 데드카피류 권총들이 시중에 유통이 되었다고 한다. 회고록의 내용만 보면 어떤 기종인지는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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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루거 짭퉁에 와우저(Wauser)라고 표기된 마우저 짭퉁 각인이 박혀져 있는 정체모를 권총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조심히 추론해볼 수는 있는데, Pistols of the Warlords에 따르면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C96 Mauser/FN 1900 복제품이 제일 많았고 이 두 기종이 인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주로 상하이 조병창, 진링(난징)조병창, 싼시 조병창, 타이위안 조병창 권총들 위주로 소개하고 있다.

김용 지사가 활약하던 곳은 상하이, 난징, 찐화 일대였기 때문에 아마도 난징 조병창이나 상하이 조병창에서 나온 FN M1900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 FN M1900에 짭퉁 마우저 각인이 박혀있는 권총이지 않을지 조심히 추측해보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어떤 기종인지는 모르고 다른 분들 회고록에서도 이런 방식의 표기를 많이 보여진다.

미국 OSS와의 국내진공작전 훈련사진(1945년 5월~ 194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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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여름, 국내진공을 앞둔 광복군 대원들 일부는 M1903스프링필드 소총, M1A1톰슨, M1941 존슨 소총( M1941 Johnson Rifle)[223]을 들고 훈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 미군복을 지급받지 않은 상태로 보이며 붕대형태의 각반에 군화가 아닌 짚신을 신고 있다. 저런 국민당 군복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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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훈련 사진에서는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훈련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3194302
광복군 시절의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의 사진. 셋 다 카빈소총을 들고 있다. 김준엽의 수기에는 기관단총으로 언급되어있다.

20.2. 기갑부대(미실행) : 한·미 합동 기갑 전차훈련반(韓·美 合同機甲部隊 戰車訓鍊班)

중국 윈난(雲南) 한·미 합동 기갑 전차훈련반 3개월 교육받은 후, 전차부대를 꾸릴 계획이었다.
"이보다 1945년 6월에 중경의 제1지대장 명령에 의거, 구대장 김준은 전방 공작원을 제외한 장철부(張哲夫) 등 30여 명을 운남성(雲南省)에서 실시하게 된 한·미 합동 기갑부대(機甲部隊) 전차훈련반(戰車訓鍊班)에 입교시키려고 중경 지대 본부로 후송하였으나, 8·15 해방으로 전차 교육 계획은 부득이 중단되었으며...[224]"
1945년 8월, 안중달 지사는 중국 윈난(雲南)의 한·미 합동 기갑부대(機甲部隊) 전차훈련반(戰車訓鍊班)에서 받을 3개월 과정의 교육 훈련 계획에 따라 충칭(重慶)에 갔다가, 8.15 광복으로 교육 훈련 계획이 중단되었다.[225]

버마 임팔 작전에서 일본이 패퇴한 후. 버마로드(滇緬公路)를 통해 미군장비와 무기들이 중국 운남성으로 집결하고 있었는데다 전략사무국 중국전구(OSS China Theatre)가 곤명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226] 만약 일본의 패전이 늦춰졌더라면 광복군에게 M3 스튜어트[227] 혹은 M4A4 셔먼 부대에 배속받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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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버마로드(滇緬公路)를 타고 진격 중인 국민혁명군의 M4A4 전차. 1945년 10월 즈음 광복군 제1지대(前 조선의용대)에 배속받을 예정이었다.

20.3. 광복군 공군(미실행) : 한국 현단계 공군 건설 개시 공작을 미군과 합작하는 계획

방침
1. 왜적의 무력 세력을 근본 박멸하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세계의 영구 평화를 쟁취하기 위하여 아국 작전 행동을 반드시 미국과 절실히 합작하는 중, 무력 일부인 공군 인원의 훈련 편대와 기계, 기름, 탄환 등 여러가지 보급도 공동 협상 진행하여 최단 기간 내에 공군 작전을 개시하고 나아가 건군, 건국 중 공군 기초를 확립할 것.
지도요령
2. 한국 공군 인원과 미국 공군 인원이 공동으로 조직한 한국 공군 훈련도를 상당한 지점에 설립할 것.
3. 맹군(盟軍) 작전 계획에 의하여 한국 공군 인원이 단시간내에 능히 훈련하여 공헌이 있게 하는 데 주력할 것
4. 공군 공작의 초보인 연락 및 통신 공작을 착수하여 미국 공군 인원과 혼합 편대를 개시할 것
5. 한국 항공대를 편성하여 미국 공군과 연합 작전하며, 한국 광복군의 작전 행동을 협조할 것.
6. 공군 건설의 제반 인재를 미국 협조로 양성하여 공군 건설의 기초를 확립할 것[228]

20.4. 해상 병기

광복군에는 해군이 없었으며, 보유한 해상전력이라고는 4,500톤급 군수지원함계림호가 전부였다.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

21. 군가

광복군 제 2지대가
광복군 제 2지대가[229]
이해평 작사 · 한유한 작곡

총 어깨메고 피 가슴에 뛴다.
우리는 큰 뜻을 품은 한국의 혁명청년들
민족과 자유를 쟁취하려고 원수 왜놈
때려 부쉬려

희생적 결심을 굳게 먹은 한국 광복군 제 2지대
앞으로 끝까지 전진 앞으로 끝까지 전진
조국 독립을 위하여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광복군 제 3지대가
광복군 제 3지대가
작사·작곡 장호강(張虎崗)

1. 조국의 영예를 어깨에 메고 태극기 밑에서 뭉쳐진 우리
독립의 만세를 높이 부르며 나아가자 광복군 제3지대

2. 굳세게 싸워라 피를 흘리며 총칼이 부러져도 열과 힘으로
무엇에 굴할 소냐 열과 힘으로 나아가자 광복군 제3지대

3. 첩첩한 산악이 앞을 가리고 망망한 대양이 길을 막아도
독립의 만세를 높이 부르며 나아가자 광복군 제3지대
자유 프랑스 비공식 국가로 쓰이던 Les Chant des Partisans 라는 곡을 행진곡으로 썼다. 더 자세한것은 독립군가 항목 참고 바람.
그 외 군가는 다음이 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원수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이 길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 독립군가 -
위에 곡은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쓰인 조지아 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라는 곡을 썼다.
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
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뛰고
반만년 역사 씩씩한 정기에
광복군의 깃발 높이 휘날린다
칼집고 일어서니 원수 치 떨고
피 뿌려 물든 골 영생탑 세워지네
광복군의 정신 쇠같이 굳세고
광복군의 사명 무겁고 크도다
굳게 뭉쳐 원수 때려라 부셔라
한 맘 한 뜻 용감히 앞서서 가세
독립 독립 조국 광복
민주 국가 세워보자

-광복군 행진곡-
요동만주 넓은뜰을 쳐서파하고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원수쳐보세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광복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용진가-

22. 한국광복군 재현행사 (Re-enactment of Korea Independence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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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있었던 광복군 창설 70주년 정부에서 주최한 행사에서 재현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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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복식을 훌륭하게 재현한 한국 개인 재현자들. 모두 사비를 들였다고 한다.

23. 한국광복군 기념품

네이버 블로그, 카페에서 쓸 수 있는 광복군 스티커.가 있다.

독립기념관과 니맘을뺏지에서 광복군배지가 판매된다.

아이언로미오 광복군 총사령부 패치를 판매 중이다.
아이언로미오 K I A 광복군 패치판매 중이다.
아이언로미오 광복군 제 2지대 패치판매중이다.

넷피엑스에서 조선의용대 반팔티셔츠를 판매하는 중이다.

펀샵에서 광복군 태극기를 판매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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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1층 카페에서 임시정부 뱃지를 판매하고 있다.

24. 관련 문서

25. 가볼만한 곳

효창공원 백범 김구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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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255 효창공원 안에 모셔져 있다.

효창공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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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임시정부 국무위원 군무부장(국방부 장관)

이동녕
독립협회 활동, 을사늑약 반대운동, 신민회 조직,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당수,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국무위원, 주석 등 역임

차리석
105인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3.1운동 만세시위때 주도적으로 참여, 상하이 망명 후,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편집국장을 하게 된다.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조직, 비서장에 선출된다.

효창공원 3의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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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소가 모셔져 있다. 안중근 묘소는 가묘로 유해를 찾을 경우 송환돼서 안장될 예정이다. 원래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소만 있어서 3의사묘라고 불렀다.

광복군 합동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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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광복군합동묘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순국한 애국선열 17위 합동묘서로 1967년 광복군동지회에서 조성 후, 국가보훈부에서 단장하고 2017년 강북구청에서 추모조형을 건립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순국한 애국선열 17위의 합동묘소로 1967년 광복군동지회에서 조성 후 1985년 국가보훈처에서 단장하였고 2017년 강북구청에서 이 추모조형물을 건립하였다.

현재 묘소는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되어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원에 준하는 예우로 관리하고 있다.

김성률 : 1943년 9월 산서성 능천 전투에서 순국
김순근 : 1945년 초모공작 중 체포되어 자결 순국
김운백 : 1943년 9월 태행산 전투에서 순국
김유신 : 1943년 태행산 전투에서 순국
김찬원 : 1945년 8월 태원에서 순국
문학준 : 1943년 8월 하남성 수무현에서 순국
백정현 : 1944년 4월 태원에서 순국
안일용 : 1943년 5월 하남성 수무현에서 순국
이한기 : 1943년 7월 전방공작요원으로 활동
이해순 : 1945년 8월 하북성 석가장에서 순국
전일묵 : 1945년 8월 산서성 태원에서 순국
정상섭 : 1943년 9월 태행산 전투에서 순국
현이평 : 1941년 3월 서안에서 순국
한 휘 : 1943년 7월 태행산 전투에서 순국
동방석 : 1971년 사망, 태행산지구 공작요원으로 활동
이도순 :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였다.1940년 9월에 광복군이 편성됨에 따라 제5지대에 편입되었으며, 중국 전시군사간부훈련 제4단 한광반(韓光班)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1941년 12월에는 산서지구(山西地區)에서 적후방 공작요원으로 활동하다가 부대원간의 내분이 일어나 대장 나월환(羅月煥)을 암살하게 되었다.이로 인하여 그는 15년 역형(役刑)에 처해졌다가, 후에 사면되어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어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조대균 : 미상, 특수공작훈련단으로 활동

<이장자>
김천성 : 1945년 7월 산서성 태원에서 순국, 1975.8.8.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
한성수 : 1945년 5월 광복군 모집 및 정보공작 중 순국, 1991.6.19.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

파일:조계사_광복군 8용사.png

광복 직후에는 선열들을 모실 국립묘지가 없었고, 1963년 이전까지만해도 광복군 선열들이 독립유공자가 아니었다. 1990년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선열들이 20·30대에 순국해 후손이 없어 지난 77년간 국립묘지로 이장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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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백범로 281-9

용산에서 나고 자란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를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이봉창 의사는 용산문창소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19살 때 용산 철도국에 임시 인부로 들어가 역부로 일하였다. 이후, 금정청년회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4년 철도국을 사직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 직공 등을 하며 오사카, 도쿄를 전전하였다. 1930년 상하이로 건너가 1931년 김구 선생이 조직한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 되었고 1932년 1월 8일 도쿄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힡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비록 거사는 실패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봉창 의사는 거사 현장에서 체포되며, 그 해 교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용산구는 이봉창 의사를 기리기 위해 2020년 10월 이봉창 의사 역사 울림관을 개관하였다.

이봉창 의사의 집터는 그 옆에 재개발되어서 용산 KCC 스위첸 아파트(서울 용산구 백범로 275)이며 아파트 단지 안에 이봉창 의사 집터 표지석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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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79-24
국가보훈부 직영으로 운영하는 임정기념관은 서울시 서대문구 옛 서대문구의회 부지에 지하 3층, 지상 4층, 전체면적 9703㎡(약 2935평) 규모로 건립됐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돼 고문을 당했던 서대문형무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3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특별전시실에서 1919년 3∙1운동부터 지금까지 임시정부와 관련된 자료 1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료는 무료이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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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95

독립기념관은 대한민국 국가보훈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이자 역사박물관으로,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에 있다.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응하며, 국민모금을 통하여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 안춘생 독립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장 겸 초대 독립기념관장이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관람 시간은 하절기(3월~10월) 9:30~18:00, 동절기(11월~2월) 9:30~17:00로 관람 마감 1시간 전까지는 입장해야 한다. 또한 정기 휴무일은 매주 월요일이다.

의열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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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남 밀양시 노상하1길 25-12
연락처: 055)351-0815
∎ 관람시간: 09:00 ~ 18:00
∎ 입장시간: 09:00 ~ 17:30
∎ 휴관: 1월 1일, 설날, 추석, 매주 월요일
∎ 입장료: 무료
∎ 주말(토,일요일) 문화해설사 신청 가능

2018년 3월 7일 약산 김원봉 생가지에 전국 최초로 건립된 의열기념관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충의(忠義)에 앞장선 사람”을 일컫는 의열지사(義烈志士)들의 항일독립투쟁사를 소개하고 있다. 의열투쟁사 주요연표, 동영상, 의열단 창립단원 소개, 최수봉 의사 밀양 경찰서 투탄내용을 다룬 웹툰 영상 등이 있다.

26. 매체 속에서의 광복군

26.1. 영화

1. 아! 백범 김구 선생(1960)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전창근 감독의 1960년 영화이다. 작품의 감독을 담당키도 한 전창근을 비롯하여 조미령 등이 주연으로도 출연하였고, 성동호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여러 행적에 관련 기반을 두고 있다. 영화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2. 아나키스트(2000)
의열단 단원들의 도움으로 공개처형장에서 목숨을 건진 상구는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어느 날, 상하이의 일본군들을 상대로 대담한 테러작전을 감행하던 단원들에게 독립자금을 착복한 러시아인을 암살하고 돈을 되찾아오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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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흥행하지 못했지만 작품성에 있어서는 매우 훌륭한 명작으로, 이 영화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아무 가감없이 보여주는 국내의 거의 유일한 영화다.

1933년 3월 17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살해하려 했다가 미수에 그친 육삼정 의거 사건 주역인 백정기 의사를 그리며 이강훈이 했던 회고와 아주 닮아있다. 이 영화 이후 영화 "암살"과 영화 "유령"도 계속 육삼정 사건 재탕 삼탕한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영화 암살과 영화 유령은 배경이 조선 경성인데, 당시 경성으로 무기를 운반해온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개 한국의 독립운동 관련 영화들은 대중성을 중시한 화려한 액션 영화나 애국심을 고양할 목적에서 만든 감성팔이 영화, 혹은 단순한 오락거리 영화들밖에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고증도 형편없고 후세의 미화나 어설프게 현대적인 해석을 집어넣어 실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는 한참 떨어진 영화들뿐이지만

이 영화는 당시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있었던 사상적 충돌과 내부 갈등, 횡령, 배신, 숙청, 암투, 이중첩자 등의 실제 모습을 아무런 치장이나 연출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3.고지전(2011)

양효삼 (고창석役) 계급은 상사. 악어중대의 최연장자로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출신이다. 고향이 평안도라 북한 말을 쓴다. 악어중대의 원년 멤버 중 하나로 부사관 중 최고참임에도 항상 능글 맞고 살가운 태도라 중대원들에게 큰형 같은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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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지전_광복군총사령부고창석.png

영화 초반부에서 광복군 뱃지를 볼 수 있다.
양효삼 상사 : 내래 일정때는 광복군이었시오

강은표 중위 : 어?! 독립운동?

양효삼 상사 : 만주에 있었디요 (뱃지를 보여주며)
때는 바야흐로 1941년 화백산 전투 요거이 임정에서 받은 광복군 뱃지라요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일본 관동군 아새끼들이 개떼같이 몰려오고 총알은 똑 떨어지고 아! 그냥 딱 죽자!

다만, 영화 고증상의 오류를 꼽자면광복군 총사령부 잠행편제표(總司令部 暫行編制表)에서 볼 수 있듯이 총사령부 인원 절반 이상은 중국군인데다가 제일 어린 나이인 조소앙 선생의 아들인 조인제 소위와 박찬익 선생 아들 박영준으로 이루어졌다. 장교비중이 많은 광복군 출신으로 국군으로 편제된다하더라도 최소 소장계급[230]으로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강은표 중위의 소속은 국군 방첩대(CIC)[231]로 현실에서 김창룡 특무대장이 한국전쟁 전후로 간첩조작으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았던 걸 생각하면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웃을 수 없는 장면이다.

실제역사에서 김창룡 특무대장은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과 대립 관계에 있었고, 김창룡은 이러한 족청을 밀어내기 위해 1953년 8월 31일 정국은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정국은이 체포된 지 10일 만에 내각에서 족청 계열 장관 3명이 동시에 파면되고, 곧 자유당에서 족청 계열 거물인사 8명이 제명됐다. 김창룡의 반대 세력이었던 족청은 순식간에 권력에서 이탈했다.

4.암살(2015)

육삼정 의거는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훙커우(虹口)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원심창 등은 고급 요정인 육삼정에서 주중일본공사인 아리요시 아키(有吉明)가 만찬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밀정의 신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거사는 실패했으나 이후 중국과 한국 등지의 신문들이 아리요시 암살 계획을 대서특필하면서 침체기에 있던 국내 항일운동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의거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살 시도 의거와 함께 일제강점기 해외 3대 독립 의거로 꼽힌다.

영화 상에서는 상하이가 아닌 경성에 총기와 폭약을 반입하고 약산 김원봉과 합작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당시 백범 김구는 정화암, 유기석, 유자명과 같은 무정부주의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합작해서 친일부역자(밀정)들의 처단을 위해 투쟁했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김좌진은 1930년 1월에 피살되었고, 상하이로 옮겨온 남화한인청년연맹에는 장도선, 정화암, 정해리, 안공근 등이 참여했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조승우 役)은 1924년 김지섭이 도쿄 황궁에 폭탄을 던지는 일을 끝으로 의열단이 이런 소규모 테러적인 항쟁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다른 방향으로 재정립해야 함을 느꼈고 황푸군관학교에 가입하여 의열단의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1927년 난창 폭동에 일부 의열단이 참여하자 이에 의열단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좌파 민족주의자 등이 여러 투쟁의 방향성은 물론 사상적으로 많은 다툼을 겪었고 결국 의열단은 와해된다. 이후의 테러는 의열단의 체계적 조직을 통한 테러가 아닌 개별적인 투쟁으로 성격이 변했다.

영화적 고증을 따지자면 실존인물은 정화암이나 유기석 정도 넣어야 고증에 맞다고 볼 수 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정재가 연기한 염석진의 모델은 염동진[232]이라는 실존인물이다. 염동진은 중국에서 남의사[233] 일원으로 활동 중 1937년 일제 관동군에 체포되었다. 1940년 풀려났고, 이후 전향했다는 설이 파다했으나 본인은 끝까지 극구부인하였다. 김구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였다는 점도 극중 염석진과 유사하다. 한국전쟁 중 납북.

전지현의 극중 이름 '안옥윤'은 안중근, 김상옥, 윤봉길 3명의 독립의사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원래는 이름을 '윤옥'이라고 지으려 했으나 전 영부인 김윤옥과 이름이 겹치는 관계로 '옥윤'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김상옥은 극중 안옥윤처럼 (중국이 아닌) 경성에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수백명의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 순국했다.

5. 귀향(2016)
파일:귀향_독립군.png
파일:귀향_독립군2.png

후반부에 위안부 소녀들을 집단 학살하려는 일본군들을 공격하는 독립군들이 나온다. 영화 귀향은 강일출 할머니의 기억을 참고하여 만든 영화이다. 문제의 발단은 대다수의 관객들, 그중에서도 역사를 어느 정도 아는 분들은
"광복군이 만주에 간 적이 없는데?"
"한국광복군이 그 시기에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운 적이 없다, 엉터리다!"

라는 혹평도 있었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데 1944년 9월에 만주지구 공작반에 정보요원 김근수, 유원해, 윤원장, 안원생, 안우생[234] 등이 파견되어 잔존 독립군들과 접선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정보수집이 목적이지 만주군과 직접적인 교전을 목적을 두고 있지 않았다.

또한, 김학규 장군이 이끄는 광복군 제 3지대 중에서도 1945년 초, 만주 펑톈 소재 동광 중학(東光中學)을 중심으로 비밀 조직망을 형성하고 있던 이영순(辛英淳)·오성규(吳成奎)·조승희(趙昇熙)·김철수(金鐵壽)·이선규(李善奎)·김병익(金炳益)과 장춘(長春) 법정 대학(法政大學)의 한이윤(韓伊尹) 등이 만주를 탈출하여 베이핑 경유해서 광복군에 입대한 사례도 있기 때문에 당시 광복군이 만주국으로 갈 수 있는 신분증이 있다면 못가는 지역도 아니었다. [235]

반은 맞는 이유는 설령 광복군이 만주에 들어갔다하더라도 삼엄한 경계에 무기나 장비 반입이 쉽지 않았고 저런 형태의 전면전 전투는 큰 군대의 지원이 없으면 사실 상 불가능하다. 광복군 창설때부터 광복을 맞을때까지 초모공작이 주된 업무였다.

강일출 할머니 증언
경북 상주 출신인 강 할머니는 열여섯살 때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중국 선양과 창춘을 거쳐 무단장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했다.

이후 강 할머니는 태평양 전쟁말기 장티푸스에 걸려 부대 밖으로 이송돼 불에 태워지려다 독립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 중국 인민해방군 간호사를 거쳐 지린 병원에서 근무하다 지난 2000년 3월 귀국했다.

하지만, 1945년 5월 2일 소련군에 의해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함락이후, 소련군이 극동으로 병력을 보내 1945년 8월에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수행했었고 만주군과 관동일본군이 박살나는 상황이었다. 강일출 할머니를 구출한 독립군의 실체는 아마도 '한인계 소련군'이거나 또는 당시 만주에 살고 있던 교민들에 의하여 구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광복군 대원이 위안부 여성을 접하게 되는 시기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확군시기에 일본군 부대를 접수하면서 부터 일본군 부대 내에 한국인과 일본군을 분류하여 귀국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위안부 여성을 목격하고 슬퍼했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26.2. 드라마

1. MBC 특별기획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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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 장하림은 미군 측의 협박, 공갈, 감언이설 설득으로 중국 쿤밍으로 가서 OSS 요원이 되고 대일 특수 작전[236]에 참가하기 위해 제주도에 침투하여 방어계획을 훔쳐내는 임무를 하게 된다.

13회에서 OSS대원 훈련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증상의 오류가 있다면 OSS중국전구 본부는 중국 윈난성 쿤밍에 있던 것은 사실이나 광복군 이글프로젝트는 산시성 시안 두취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또한 101분견대(OSS Detachment 101)는 인도 아쌈주 나지라(Nazira)에 훈련캠프가 있어서 드라마 작가가 어느 정도 공부는 했지만 세세하게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아쉬운 면이다.

장하림은 일본군 탈출해서 광복군에 입대한 장준하와 광복군의 군사교육을 담당하였던 정운수 미 공군 소위를 모티브 한 캐릭터로 극중에선 광복군이 아닌 OSS 한국인 요원으로 나온다.

이 드라마는 1987년 신군부 독재가 끝나고 민주정부로 들어서면서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처우 문제와 위안부 문제가 대두되면서 이들을 배상해야하는 사회적 이슈가 나왔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았지만, 이는 박정희가 군부쿠데타 정통성을 위하여 광복군 출신들의 지지를 원했던 것이지 국가배상이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독립유공자들과 그들의 후손이 가난하게 된 이유는 정치에 참여한 임시정부 고위직이나 광복군 장교 출신들은 특무대장 김창룡과 같은 친일군부에 의해서 가세가 망가진 사례들이 너무 많고 일부 후손들은 다시 미국이나 대만과 같이 해외로 이민가는 사례가 많다. 안중근 조차 안우생만해도 광복군때 미군과 같이 통역, 선전활동도 많이했지만, 백범 김구 선생님이 사망한 이후 생계가 어려워졌는데, 이건 김문호의 아내 신정숙 지사도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어쨋든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 정통성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부각이 되었었다. 광복군 출신들의 회고록이 잘 안나오는 이유도 1990년대까지만해도 이념가지고 싸움을 하는데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좌익으로 몰릴 수 있으니 회고록이 안나오는 이유이기도하다.

현재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손자/녀까지 일부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독립운동 여부를 증명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독립 후 70년이란 세월이 지나며 현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후손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26.3. 웹툰

1.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전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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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 페이지 웹툰에서 전월순지사를 모티브로 해서 웹툰을 창작했다. 전월순 지사는 실제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제 1지대 여군이었으며 같은 부대에 있던 김근수지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에 통합되자 광복군 제1지대에 배속되어 산시(山西)·화베이(華北) 지구 등지에서 지하공작 등에 가담하였다. 이 무렵 같은 대원인 전월순(全月順, 일명 전월선)과 결혼하였다. 전월순은 경북 상주(尙州) 출신으로 1939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였고 1942년한국광복군 제1지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두 사람은 동지로서 함께 항일운동에 매진하였다.#

27. 둘러보기

27.1. 독립운동관련 웹사이트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가 공적정보와 원문사료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나무위키 문서는 국가보훈부 원문사료를 중심으로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명시한다.
상단바 "원문사료실" → "원문사료조회" → "독립운동사" → "독립군전투사(하)"에서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광복군 제 2지대 중, 국내진공 대원들 사진, 주로 철기 이범석 장군 사진들을 볼 수 있다. 미군복입고 찍은 사진들이 다수 있는데, 국내진공이 무산되고 나서 1946년 4~5월 쯤 대원들하고 난징, 상하이 등 중국여행을 하고 찍은 사진들이 다수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독립운동가 사료 자료와 사료원문출처 링크까지 상세하게 공개되어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신편한국사로 들어가면 임시정부 및 광복군 자료를 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독립운동가 인물이라든가 근현대사까지 있었던 사건들까지 상세하게 기록된 편이다.

27.2. 한국독립운동 역사책

독립운동사, 국가보훈처, 1988년 발간
현재는 구할 수 없지만,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에서 검색할 수 있고 인터넷에 조회를 하면 찾아볼 수 있다.

만약 원문 글을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도서관(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디지털 도서관에서 열람 가능하고 원하는 페이지를 출력가능하다. 대여는 안되고 그 자리에서 열람하거나 복사를 해서 가져가야한다.

혹시 국립중앙도서관에 자료가 없다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 에 있는 국회도서관에서도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김승학, 한국독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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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산 김승학 선생의 한국독립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에서 인용되기도 하고 어떤 파트의 경우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다만, 단점은 국한혼용체로 되어있어서 한자를 알아야 읽을 수 있으며 과거의 책처럼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읽어야 한다. 공훈전자사료관에서는 볼 수 없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

비록(秘錄) 군(軍), 고정훈. 동방서원 1967년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에 대한 전반적인이야기가 수록되어있다. 단점이 있다면 년도가 맞지 않아서 위 두 자료와 대조해서 봐야한다.

나무위키 고정훈 자료에는 광복군 소위 출신이라고 명시되어있지만,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에는 기재되어있지 않다.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광복군 연구를 하는 유일한 국사학자로서 그 동안 연구해온 내용들이 많다. 일부 국한혼용체로 되어있어서 한문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요즘은 네이버 사전에 모르는 한자 검색해보면 나온다.) 현재는 절판되었을 것으로 보이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 가능하다. 논문같다고 보면 된다.

27.3. 회고록, 수기, 비망록

27.3.1.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수기

김구, 백범일지
독립운동가이며 역사학자인 백범 김구가 1929년 상해와 1934년 충칭에서 집필한 자서전이다. 출판사도 각양각색이니 관심있는 분은 사보는게 좋다.

김신, 조국의 하늘을 날다: 백범의 아들 김신 회고록, 돌베개, 2013.
김구 아들 김신의 회고록, 주로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 곽낙원에 대한 추억 및 본인의 학창시절을 중심으로 기록했고 떨어져서 사는 시간이 더 많았던 아버지 김구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지청천, 자유일기 (미간행)
백산 지청천의 자유일기는 1951년 5월부터 백산이 타계하기 한달 전인 1956년 12월까지의 육필 기록이며,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다. 백산의 외손자인 이준식(55) 전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위원은 “독립운동을 위해 1919년 만주로 건너가면서부터 일기를 쓰셨는데 한국전쟁 당시 피란 가는 과정에서 분실했다.”며 “1951년부터 다시 쓰신 광복 후의 기록으로 총 7권으로 되어 있다.”고 밝혔다. 자유일기는 백산 사망 이후 막내딸인 지복영 여사가 관리해 왔으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많아 살아 생전 공개를 하지 않다가 지 여사 사망 후 서울신문을 통해 공개됐다.

지복영, 민들레의 비상-지복영 회고록, 민족문제연구소 2013년
지청천 장군의 딸 지복영의 회고록이다. 전반부는 가족을 중심으로 만주의 삶을 비춰본다면 후반부는 광복군 활동을 중심으로 중국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군사적인 부분은 많이 기술되어있진 않지만, 그 시대상이 궁금한 사람은 읽어볼만하다.

신숙(申肅), '나의 일생', 일신사, 1963 | 도인권, '죽헌 도인권 자서전', 석실, 2010
1920년대 초기에 임정에 참여했다가 창조파에 가담해 반임시정부적인 활동을 했던 인물의 회고록이다.

계봉우, (桂奉瑀) 꿈속의 꿈(상·하)
초기 임정에 참여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회고록이다.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나의 회고록[237], 자유문고, 1982.
鄭華岩(1896~1981)의 회고록은 1966년 9월 이후 녹음테이프로 된 것을 정리, 편집, 교정을 거쳐 1982년에 출판된 것이며 10년 후인 1992년에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로 재출간 돼서 둘 중 하나를 봐도 상관없다. 호서은행 거금 사건, 윤봉길 의거, 육삼정 사건, 옥관빈 살해사건, 거류민회장 살해사건 등 관내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남화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 이회영, 이정규, 백정기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단체와 동지들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했다. 그리고 남화한인청년연맹과 김구의 애국단 간의 합작과 갈등 관계 등을 증언했고 중국인, 일본인, 대만인 등 아나키스트들과의 연대운동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의 회고록은 일찍부터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 연구의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어 왔고 회고록의 내용도 학자 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1988도 같이 보는게 좋다.

류자명, 나의 회억, 료녕민족출판사 1985
아나키즘운동의 이론가로 이름을 날린 柳子明(1894~ 1985)은 자신의 생애를 후대에게 교훈으로 남겨주고자 자전 수기를 집필. 류자명의 회고록에는 ‘임시정부가 성립된 경과’, ‘한성에서 다시 북경에’, ‘천진에서’,‘의열단의 내력과 반향’, ‘남경에서 만난 사람들’, ‘여명중학교로부터 입달학원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조선의용대’, ‘항일전쟁과 계림생활’, ‘조선혁명 각 당파의 통일’ 등의 제목으로 기술했다. 류자명의 투쟁 역정을 보면 그가 아나키즘의 열렬한 신봉자임은 분명하지만 그의 회고록에는 아나키즘의 반동적 본질을 비판하고 본인은 아나키즘 대신 공산주의를 수용했다고 강조했다.[238]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회고록 상권은 1931년까지를 서술한 것으로 1920년부터 1927년까지는 상해, 남경, 북경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흥사단에 가입
해 안창호와 관련된 활동을 주로 기록했다. 하권에는 有吉明(육삼정)사건, 천진 조계지 폭탄 사건, 한교전지공작대 등 본인이 직접 체험한 내용을 수록했다.

장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임시정부 27년 여정을 뒷받침하며 이끌었던 인물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대한애국부인회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현재도 구입가능하다.

27.3.2. 조선의용대/제 1지대/인면전구공작대 기록

조선의용대는 약산 김원봉 제 1지대장이 광복 이후,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조선의용군의 김두봉과 부대명과 인물 이름이 유사하다보니 사람들이 공산당 부대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도 있어서 출간을 잘 하지 않은 것도 있고 수기가 많지 않은 편이다.

앞서 제 1지대 본부와 제 1지대 제 1구대 제 9전구공작대, 제 1지대 제 2구대 이소민 부대에서도 국가보훈부 서훈을 받은 분들도 있기 때문에., "광복군 제 1지대는 공산당 부대라 쳐다볼 자격없다."이러지 마시라는 의미에서 써둔다. 프레임에 씌워진 상태에선 진실을 못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안춘생 지사의 면담자료[239] 에서는 김원봉의 좌익성향에 의문을 표하는 만큼 사상으로 배척하는건 신중히 해야한다.
김원봉씨가 정말 좌익이냐? 이것도 의문입니다. 좌익 청년들 전부 많이 포섭했는데 내가 독립기념관을 지을 적에 대만에 자료 수집을 하러 몇 번 갔었는데. 장개석의 가방들고 다니던 사람인데… 그 사람들이 황포 4기생 김원봉하고 동기동창입니다. 한달 동안 같이 지냈는데 이 사람을 찾아 갔더니 중국 정장을 하고, 아주 정중하게 맞이 하는데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고 임시정부와 김원봉, 임시정부에서는 김원봉을 자꾸 공산당으로 내모는데 나보고 당신 생각해보라고 동창생으로서 솔직히 얘기하는데 내가 김원봉하고 같은 반으로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그 사람이 공산당이라면 우리가 공산당하고 싸우는데 내가 또 개인적으로 동기동창이라고 해서 우리 군사기관에서 용납하겠는가? 난 처음 학생때 부터 관계를 가졌는데 왜 그 사람을 공산당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철기[240] 장군도 김원봉씨 한데 좌익 그치 그렇게 하니까 아주 강력하게…

철기 이범석 장군은 광복 이후,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반란 진압하는 파시스트같은 면을 보여주었고 제 3지대장인 김학규 장군도 정치판에 못끼어들게 방해한 사실도 생각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 있으니 인물 평가에 신중해야한다고 보는 편이다.

김학철(金學鐵),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자서전, 문학과지성사, 1995
김학철(1916~2001)은 이미 1980년대에 항전별곡·격정시대를 출판하여, 한국 학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30년대 초반 상해로 와서 조선민족혁명당 당원 및 조선의용대 대원, 그리고 1940년대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 책은 이러한 자신의 활동 역정을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어, 중국 관내의 정당 및 군사 활동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자신들의 생활상을 비롯하여 조직원 개인에 대한 기록도 적지 않아 독립운동 인물사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

김사량, 노마만리(駑馬萬里), 양서각, 1947.
김사량은 1945년 5월 일본군 소속 한인 학병을 위문하기 위해 평양을 떠나 북경으로 갔다가 연안으로 탈출, 팔로군 조선의용군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귀국한 후 평양을 떠나 항일 근거지 태항산 남장촌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민성≫에 연재하다가 1947년에 단행본 노마만리를 냈다

김영범, 한지성의 독립운동 자료집, 선인,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기념사업회
인면전구공작대 대장이었던 한지성 지사의 기록에 관련된 것은 모두 수록되어있다. 그 동안 냉전논리에 의하여 감춰진 조선의용대 편성표, 활동내역, 문서 등이 수록되어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시절 기록과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대장으로서 광복군 총사령부 보고서들이 수록되어있다.

해방 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는데, 미군정에 의하여 많은 괴로운 수난을 당한 신문기사들 또한 수록되어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찬 광복회장의 헌사가 수록되어있다.

27.3.3. 한국청년전지공작대/제 2지대 회고록 및 기록

박기성, 나와 조국, 시온, 1984
박기성 朴基成(1905~ 1991)은 일본에서 자유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했다가 1926년 중국 상해로 넘어가 해방될 때까지 관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관내에서의 활동은 회고록 제7장 「상해시절」, 8장 「6.3정 사건」, 10장 「중국군관학교시절」, 11장 「광복군 총사령부 및 각 지대의 활동」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회고록에는 같이 지냈던 동지에 대한 증언과 더불어 육삼정 사건 전후 사정을 상세하게 증언했다.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기관지 ≪정의공보≫와 ≪탈환≫의 간행, 이회영을 밀고한 연충렬·이규서 처단 사건, 육삼정 사건(有吉明 사건)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하지만 그가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남화한인청년연맹 및 기관지 ≪남화통신≫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활동에 관한 상세한 증언을 남겼고 나월환 및 그의 피살 사건에 관련된 상세한 증언이 있다.

해평 이재현, 한국광복군 제 2지대사, 선인 2022.
해평 이재현 지사께서 김천성 동지와 함께 태행산 적후 공작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했고 나월환 암살사건 전에 대원들과 갈등분위기에 대하여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수기에 가까우나 사실상 한국청년전지공작대부터 5지대, 2지대를 거쳐온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광복군안영희선양사업위원회, 『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주소』나녹, 2019
수기나 회고록이 아닌 전기이다.
안영희 지사의 삶을 기리기 위해 숙명여대 동문인 모수미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재연 숙명여대 명예교수, 형난옥 도서출판 나녹 대표, 송경란 한국어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송우림 ㈜휴노데이터분석팀 연구원 등이 참여한 위원회를 구성해 4년여 작업 끝에 책을 펴냈다.

27.3.4. 광복군 지대장들의 수기

지청천, 「인생회고록: 광복군과 나의 투쟁」, ≪희망≫, 1953년 2월호.
광복군에 관한 지청천의 회고는 단행본으로 간행된 것이 아니라 1953년 잡지에 실린 회고록 성격의 글이다. 관내로 들어온 후부터 낙양군관학교 및 광복군에서의 활동을 회고했는데 전체적으로 내용이 짧고 간략한 편이다. 광복군 창립에 대해서는 계획 수립 및 중국과의 교섭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광복군 초기 편제에 대한 서술에서 오류가 없지는 않다. 전란 때문에 참고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빚어진 기억의 오류로 짐작된다.

이범석, 「3·1운동 59주년 기념 시리즈, 광복의 증언②,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 그 활동: 광복군」, ≪신동아≫, 15권 56호, 1969, 188~202쪽
광복군 제 2지대장 이범석 장군의 회고 ‘국민당 직업군인 시절’, ‘낙양군관학교이야기’, ‘국민당 중앙훈련단 중대장으로’, ‘광복군의 출범’, ‘공산분자들의 책동’, ‘중국병졸을 꾸어오기도’, ‘중국 측의 인사간섭’, ‘미국과의 합작’, ‘연합군에의 작전건의’, ‘중국에서의 광복군의 전공’, ‘난민선 타고 영광의 환국’, ‘김포공항에서 일본군사령관과 담판’의 제목으로 본인의 중국군대 경력, 낙양군관학교 및 광복군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남겼다. 전체적으로 본인 및 제2지대의 활약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보이고 오류도 있지만 광복군에서 이범석 및 제2지대의 역할이 가장 컸던 것은 사실이므로 이범석의 이 회고는 광복군 연구에 필요한 적지 않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김학규, 「백파 자서전」, 독립운동사연구 1,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583~613쪽.
광복군 제 3지대장 김학규의 자서전으로 몇개의 기억 혼돈 흔적을 제외하곤 창립 초기부터 한국청년전지공작대로 편성된 제5지대가 존재한 것처럼 기억했다. 하지만 5년 동안 제3지대의 본부인 부양에서의 초모, 훈련 활동 및 立煌에서 미국 OSS과의 연합훈련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여 광복군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사료임은 틀림없다.

박영준,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박영준(朴英俊) 자서전, 한국독립유공자협회, 2005.
김학규의 휘하에 활약했던 박찬익의 아들인 박영준(1915~2000)의 자서전은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의 지하공작, 광복군 제3지대에서의 사병 모집 및 훈련, 광복군 총사령부에서의 활동을 기록하였다.

김홍일,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김홍일의 회고록은 출생부터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기 까지의 긴 역정을 기술했다. 김홍일은 일찍이 1918년 9월 상해에 도착한 뒤 바로 귀주군관학교에 입학했고 3·1운동 이후 독립군에 동참하고자 하여 만주로 떠났다가 1926년경 다시 관내로 넘어왔다. 그 뒤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관내에서 중국 군인으로 있으면서 한국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은 만주와 관내지역 독립운동 연구에 많이 활용되는 회고록 중의 하나이다. 특히 상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을 맡으면서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를 위한 수류탄을 제작하고 제공한 내용, 조선혁명군정치간부학교와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 학생대의 조직 경위 및 자신의 역할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다. 광복군에 관한 기술도 있지만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한 시기가 늦었던 관계로 간략한 편이다. 김홍일의 회고록에는 본인의 항일투쟁 및 독립운동의 동향뿐만 아니라 귀주군관학교에 관한 이야기, 남경과 상해를 점령하던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27.3.5. 일본군내 학병 출신 수기

장준하, 돌베개: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2015년 개정판
1944년 7월 7일, 중국 쉬저우의 ‘쓰카다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장준하가 일본군 부대에서 중일전쟁 7주년을 맞아 기념 회식을 하느라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김영록․윤경빈‧홍석훈과 함께 목숨 걸고 탈출하여 충칭 임시정부까지 6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찾아가는 대장정에 굽이굽이 서린 숱한 일화와 1945년 11월 임시정부 환국 직후의 상황까지 2년여의 기간을 다룬 책이다.

김준엽, 장정-나의 광복군 시절, 아연출판부 2023년 개정판
기존에 출간되었던 「장정」의 1ㆍ2권 중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때까지의 기록을 발췌하여 단권화하고 새롭게 편집하여 「장정-나의 광복군 시절」이란 제목으로 개정판을 펴냈다. 김준엽 선생의 청년 시절, 가장 강렬했던 기억인 일본군 학병 탈출과 광복군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재편집되었다. 책에서 저자는 일제 식민지 시기 말기에 한국인들이 겪었던 고난과 이에 맞서고자 했던 한국 청년들의 항일 활동을 다루고 있다.

윤재현, 사선을 헤매이며, 국제문화협회, 1948
2014년 어느 독립운동가의 조국(회령, 중경 그리고 보스턴)의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김문택, 새벽으로 가는 길, 인하대학교 출판부, 1995.7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김문택의 수기는 처음에 1988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집에 「회고광복군시기」로 수록되었고, 원고를 축소하여 새벽으로 가는 길이 간행되었다.

金光彦, 「韓國光復軍第3支隊의 作戰槪要」金國柱, 「나의 光復軍時節體驗記」
자신들의 일본군 탈출 경위 및 광복군 제3지대의 조직 및 활동상을 기술해 광복군 연구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회고록이나 자서전, 수기 외에 이들의 증언을 담은 자료집도 있어 이들의 탈출, 입대 경위 및 광복군 각 지대 내부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김영관, 저산을 넘어서: 어느 한국광복군 노병의 회상과 바람, 1997.

황갑수, 전의 운주산자락, 경일사, 2007.

27.3.6. 그 외의 경로로 광복군 입대한 경우

태윤기, 回想의 黃河: 피어린 독립군의 항쟁수기, 甲寅, 1975

선우진, 최기영 편,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회고록, 2009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난징 지하운동 학생 조직 한족동맹, 난징중앙대학교 송지영 사건 이후 한교전지공작대 보조대장인 박철원 지사 탈출을 도와주고 자신의 형 김여제와 박시준 등과 함께 일본군 점령지에서 탈출한 경로가 상세하게 적혀져있고 그 당시 미공군 P51전투기가 찐화 상공에서 폭격하는 것 하나하나 다 기록하고 있다. 중화민국 제 3전구 조사실 소속과 동시에 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 이소민 구대장을 접한 귀중한 수기이다. 년도가 상당히 자세히 기록이 되어있다.

정영호, 아름다운 마음, 운초서사, 1995.
운초 정영호 교수는 광복군 출신 식물학자로 무궁화 제정에 힘썼다. 난징 중앙대학교 의학원(醫學院) 생물계에 입학하여 재학 중, 송지영 사건이 터져 학업을 중단하고 1944년 4월초, 일본군에 구류되어 근무하고 있는 이일범, 조일문 포함 18명 난징 일대 유학생 및 교민들 함께 난징에서 탈출하여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원 및 제 1정진유격종대사령부 대일책반(中華民國 第三戰區 第一珽進遊擊從隊 對日策班)공작대원으로 활동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1994년 사후 1년후인 신문 인터뷰했던 자료를 취합해서 1995년에 출간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가능

27.3.7. 조선의용군(연안파) 학병 출신 회고록

신상초(申相楚), 탈출: 어느 자유주의자의 수기, 태양문화사, 1977.
신상초(1922~1989)는 1944년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간 중국에서 탈출한 뒤, 중국 공산당 신사군에 합류하여 연안으로 떠났고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항일운동을 하였다

嚴永植, 탈출: 죽어서야 찾은 자유, 야스미디어, 2005.
엄영식(1920~2004)도 신상초와 비슷한 경력을 갖고 있는 인물로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 徐州로 파견되었다가 그해 8월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편입되었다. 그는 신사군 게릴라 지역을 20여 일 동안 걸어 조선독립동맹에 들어가 최용건, 김무정 등을 만나고 항일군정대학에서 문화교육을 강의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해방 후 공산당 군대를 이탈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곧 월남했다

鄭哲洙(高哲), 나의 청춘,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3
정철수(1923~1989)의 경우에는 해방 이후 중국에 잔류했던 경우로 주목된다. 그도 1944년 졸업을 앞두고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중국으로 끌려갔다.
그해 3월 중국 산동성 제남의 일본군 훈련소에서 탈출하여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맹하여 高哲의 이름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해방 이후 그는 귀국하지 않고 연길현정부 교육과장, 길림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교육계에 종사했으나 김학철처럼 문화대혁명 시기 수난을 당했다.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뒤 연변대학교 일문과 교수로 재직했다가 1985년에야 한국으로 영구 귀환했다.

[1] 영어권에 주로 사용하는 명칭이며, 임시정부에서는 한국독립군과 같은 'Korean Independence Army'을 공식 영문 표기로 사용했다.[2]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가 발표한 '한국 광복군 복원 선언'에 따라 실질적으로 광복군의 활동이 종료되었다. 공식적인 해체는 6월에 이루어졌다. 복원(復員)은 군인의 소집해제를 뜻하며, 동원(動員)의 반대.[3] 중화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했으나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한다. 조선총독부도 붕괴 및 해산되었으니 사실상 대한민국 영토에 주권이 없던 시기로 미국과 소련이 남북으로 나뉘어 신탁통치하고 있었다. 남한 점령임무 후보자로 죠셉 W. 스틸웰 10군 사령관은 장제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아시아에 정통했던 주중미군사령관 알버트 C. 웨드마이어 장군이 후보자에 올랐으나 통치자는 맥아더 장군의 휘하 24군단장이던 존 리드 중장이 맡게된다. 그는 극동이나 아시아 문제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던 사람이다.[4] 류자명, 나의 회억에서 "1944년 9월에 나는 중경에서 조선혁명 각 당파 통일회의에 참가했다. 당시에 중경에 있는 조선혁명 단체는 2대 집단으로 분립되어 있었다. 한 방면은 한국임시정부, 한국독립당과 전시 복무대였고, 또 한 방면은 조선민족혁명당, 해방동맹, 전위동맹과 조선무정주주의연맹의 4단체가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그 연맹 밑에 조선의용대를 두고 있었다."[5] 주석 김구, 국무위원/외무부장 조소앙, 재무부장 조완구, 국무위원 선전부장 엄항섭, 국무위원 박남파, 차이석, 황학수, 조성환, 조경한[6]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군무부장 김원봉, 국무위원/문화부장 김상덕, 국무위원 성주식, 최석순[7] 유자명(柳子明)·전시공작대 정화암(鄭華岩)·광복군 제 5지대장 나월환(羅月煥) 등이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광복군 제 5지대)간부들이 이에 속한다.[8]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핵심대원으로 활동함. 조선의용대 내의 이 동맹에 속한 좌파계 인물들은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가고 김원봉을 비롯한 일부 의용대원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 1지대에 흡수되었다.[9] 국무위원 김성숙[10] 국무위원 유림[11] 1945년 2월 7일, 한독당의 지도층의 불만을 품은 홍진(洪震)·유동열(柳東說)·유진동(劉振東)·김붕준(金朋濬)·안원생 그리고 일부 조선민족혁명당원들과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했다.[12]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현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은 구한말 의병, 대한제국군, 그리고 광복군이다.[13] 현재의 국회[14]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중국 내에서 민족주의와 보수주의를 표방하였으나 정책적인 측면에서 보면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깝다.[15] 군사위원회는 ‘속성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최단 기간 내에 초급장교 200명을 양성하고, 기본군대로 1개 연대를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한 사업비로 37만 원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당시 37만 원이란 금액은 임시정부 1년 예산의 65%에 해당되는 것으로 임시정부가 군사사업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국회도서관,≪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247쪽).[16] 1940년 3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던 세 당 한국국민당(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지청천)이 한국독립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940년 5월 8일 3당이 해체를 선언하면서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3.1 운동의 정맥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 대표 정당임을 천명하였고, 그 다음부터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치 체제로 운영되는 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활동을 벌였다.[17]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3(1968), 405쪽.[18] 만주국의 수도 신징(新京)의 개칭 이전 명칭이 창춘이다.[19] 중국 국민당의 요직을 역임했던 왕징웨이가 중일전쟁 후 1940년 일본의 도움으로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별도로 난징에 세운 괴뢰 국가이다.[20] 굳세게[21] 대한민국 연호로 1941년을 말한다. 1919년 3월 1일부터 대한민국 연호 시작이다.[22] 19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대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또 하나의 한인 무장단체가 생기는 딜레마가 있었다.[23] 안춘생 국내정진군 구대장의 경우 송호회전에 참가하여 전투하고 있었다.[24] 葛赤峰,<朝鮮革命記>(秋憲樹,≪資料韓國獨立運動≫1), 114쪽. 韓志成,<目前環境與朝鮮義勇隊今後工作>(≪朝鮮義勇隊≫제37기, 1940. 5).[25] 지대의 편성은 총사령부 창설 시점보다 늦은 1940년 11월, 총사령부가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이전한 후에 이루어졌다.[2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4, 1975, p.910: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독립군항쟁사, 1985, p.226[27] 여군[28] 한국교민[29] 12월 오타인듯하다.[3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권, 임시의정원 Ⅱ, 우리 통신[31]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1권 광복군편[32] 정영호, 아름다운 마음, 운초서사, 1995, p520[33] 수도 난징과 상하이가 근처에 있는 3전구를 중앙군이라고 불림[34] 연안파 조선의용군을 말함. 제 3징모분처가 중국군 제 3전구내에서 활동하는데 공산화된 조선의용군이 중국 신사군(新四軍)과 관계를 가져 말썽을 일으켰다.[35] 왕징웨이 정부의 화평건국군(和平建國軍)[36] PBY Catalina 미해군에서 운용하던 기체로 잔잔한 바다를 노린다면 가능했을 수 있다. 서해안이 잔잔한 물때 시기가 언제인지를 모른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37] OSS중국전구사령부와는 별개의 조직이다[38] 왜냐면 중국내에 있는 한국인 교민들도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해서 투옥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39] 관련 스토리는 김준엽, 장정과 장준하 돌베게 수기를 참조[40] 이해평[41] 다른 이름 안근(安勤), 제 3지대로 초모됨. 한광반 1기를 거쳐 1944년 8월 제 2지대 제 1구대로 편입된다. 1945년 한·미훈련반수료(2기생 추정) 1946년 6월 인천으로 환국하였고, 얼마 후 미국으로 이민하였다.[42] 베이징[43]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 334[44] 1945년 9월 말에 상해에서 퍼레이드했다고 한다.[45]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pp.229~231[46] 1919년 3·1운동[47] 독립운동가 최동오 선생의 아들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선전과 비서를 역임했다. 훗날 1950년 8월 27일 경북 영천에서 창설된 11사단장이 된다. 최덕신의 지휘 하에 1950 11월 남원군, 12월 함평군, 1월 광산군 이어서 2월에 산청→함양→거창 양민학살을 저지른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1961년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63년 8월 서독 주재 대사로 부임하던 중. 동백림 사건의 수습이 실패하여 외교 문제로 인해 박정희는 최덕신을 해임. 1986년 북한으로 망명해버린다. 역사상 최고위급 인사의 월북이어서 북한 정권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조선골프협회 회장 등을 맡았다.[48] 중국 상하이도서관 소장 잡지 ‘승리’[49]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일반자료총서 86-2, 1986, pp. 34~35[50] 서울기록원 소장[51]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52] 이시헌, “치안단체 서류 보관 해뒀다”, 『동아일보』(1972년 1월 15일);“시청 금고서 발견된 서류 국내 광복군 별동대의 것”[53] 당시 다수의 언론기사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유진만(유진식)이 암살을 기도한 조선 총독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이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 대한 암살 사건은 1911년 일제가 항일세력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조선총독 암살사건을 조작,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으로 ‘105인 사건’으로도 불린다.[54] 현재 서울 브라운스톤 남산아파트 자리[55] 광복군 예비군 창설멤버로 부사령을 역임한 것으로 소개되었다.[56] 金英鎔, “光復軍 國內支隊것”, 『조선일보』(1972년 1월 15일)[57] “光復軍文書 등 발견”, 『경향신문』(1972년 1월 14일).[58]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93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는 유진만 등 한인애국단원을 파견하여 우가키를 암살하려 했다.[59] 이시헌, “치안단체 서류 보관 해뒀다”, 『동아일보』(1972년 1월 15일);“시청 금고서 발견된 서류 국내 광복군 별동대의 것”[60] 위 문서, 한국광복군 확군, 잠편지대 편성표 참조.[61] 중국 시안(西安)에 본부를 두었던 한국광복군 제2지대인지, 혹은 광복군 국내지대의 제2지대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국내 제2지대 관련 자료 및 국내 제 2지대장이었던 김승학(金承學)에게 이청천(李靑天)이 보낸 명함메모 등이 함께 발견된 점을 고려했을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62] 장준하는 광복군예비대가 김승학을 배경으로 조직된 것 같다고 증언한 바 있다, 앞의 기사, 『동아일보』(1972년 1월 15일)[63] 1945년 8월 15일 이후로 들어온 일본군 한적사병, 교민이거나 1945년 8월 14일 이전에 들어왔어도 중국군 포로가 되어서 들어왔거나 하는 등의 광복군을 말한다.[64] 이 당시엔 간첩으로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취직이 되지 않았다. 아나키즘, 공산주의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말을 하면 부대가 빨갱이로 낙인 찍히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해방 후, 제 1지대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의 월북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어떤 오해를 하게 되냐면, 조선의용대하면 공산군대로 착각하고 그 조선의용대가 1지대 출신으로 이뤄지니까 광복군의 붉은 군대로 오해받는 경우이다. 2020년대인 현재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니 제대로 솔직히 말하기가 힘들다.[65] 밀리터리 동호회 가면 토교대, 비호대, 제 3지대를 마치 광복군 중에서도 특수부대처럼 환상을 가지는 사람이 많을 정도이다.[66] 지명도 틀린 것이 징쎈 마오린(涇縣 茂林)이다.[67]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년 pp. 213~214[68] 대령[69] 국가보훈부 공적심사 기관에서도 1945년 8월 15일 이후 입대한 한적사병 출신 광복군의 공적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 학병출신은 최소 1년 정도 복무할 것을 잡고 있다. 광복 이후에 그만큼 광복군을 사칭하고 다니는 한국인들이 많았는데다 이런 사람들에게 물으면 어느 부분에서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많게는 200명에서 40명의 분대, 구대로 나뉘어져 있는데, 서로서로 모를 것 같은가?[70] 심지어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인정에도 없다.[71] 장창국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제59기) 출신이고 박정희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 57기) 입학생,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다.[72] 장창국, 육사졸업생, 중앙일보사, 1984. p. 26[73] 만주는 소련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팔로군에 있던 연안파 조선의용군은 육로 귀국할 수 있었고 나머지 자유진영에 속한 지역은 광복군과 함께 배를 타고 국내로 귀환하게 된다.[74]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 pp. 249~252[75]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인들을 중국 화북지대 20만명 강제이주됨[76] 단순한 영인본의 차원을 넘어선 체계적인 자료집으로서 최초의 것은 미군 정보부서(G-2)의 보고서이다. 이는 일월서각과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각각 1986년과 1988~90년에 간행되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부관부, G·1(인사), G·2(정보), G·3(작전), G·4(군수) 등 일반 참모부와 민정국, 경제과학국, 법무국, 천연자원국, 민간정보교육국, 민간운수국, 일반회계국 등 점령과 관련된 전문부서로 구성되었다. 군사문제에 관해서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통제를, 일반 민정 문제에 관해서는 미 국무부의 지시를 받았다.[77] 홍기화(洪基華):OSS훈련 무전반 교육훈련을 받았으며, 국내정진군 황해도반 2조 배속[78] 일본제국육군에 있던 한적사병을 말함[79] 상하이장완비행장(上海江湾機場)으로 영문명은 Kiangwan Airfield이다.[80] 4기 동기생인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81] 국가보훈부 전신[82] 조일문, 춘풍추우, 건국대출판부, 1997, pp. 45~47[83] 광복군[84] 임금의 계통[85]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깊은 숲.[86]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87] 7년[88] 지나간 세월[89] 지금[90] 속박[91] 어떤 혜택을 받아 누림[92] 이전 사람의 그릇된 일이나 행동의 자취[93] 1946년[94] 이범석 장군과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로 미 전략사무국(OSS) 명령에 정진대 인원을 줄여서 여의도로 일본 항복문서를 받으러 간 작전이었다.[95] 관련하여 장준하, 돌베개 -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돌베개, 2015. 김준엽, 장정 : 나의 광복군 시절, 아연출판부, 2023(개정판)을 보시면 된다.[96] 학병뿐만 아니라 위안부 여성들도 같이 편입시켰다고 한다.[97]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1945년 9월 9일 ~ 1948년 8월 15일을 줄여서 미군정 시기라고 한다.[98]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 기준[99] 조선경비대 또는 국방경비대라고 부른다.[100] 8·15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창설되어 대한민국국군(육군, 공군)의 모체가 되었던 군사조직.[101] 건군기 광복군 출신들은 약산 김원봉의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241]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242]이나 지청천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서 활동하였다.[102] 총기나 각목같은 무기로 상대 진영을 테러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103]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104] 원용덕 교장으로 1932년 만주군에 입대하여 군의관으로 복무한다. 일제 패망 당시 최종 계급은 만주군 중교(中校)(만주군은 괴뢰국이었지만 일본식 계급이 아닌 중국식 계급인 교관급 장교 표현을 썼다.) 당시 만주군 소속 조선인 중 최선임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도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을 모집할 수 밖에 없다.[105]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側), 1941년 12월 30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 만주군 헌병 중위,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 간도특설대 여기서 1945년 1월까지 항일 세력을 상대로 한 작전을 지휘[106] 마쓰야마 다케오(松山武雄), 194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 졸업, 일본 육군야전포병학교를 졸업, 일본군 포병 대위로 복무[107] 나카지마 잇겐(中島一權), 1937년 9월 봉천군관학교 제5기,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성적우수자)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 만주군 장교로 임관[108] 이는 한미동맹이 유지되어있는 현재도 마찬가지이다.[109] 육사출신 황헌친 증언 : 그럼. 미군정청에서 임관하는 날 서약을 했는데, "미군정 정책에 충실하고, 나중에 수립될 한국 정부의 정식 군대에 충성을 다 한다"는 내용이었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이었지.[110] 오늘날에 기수로 판단하는 서열문화라든가 군번빠른 사람을 대우해주는 문화는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시절 잔재로 남아 있다.[111] 이현희, 한국독립운동 증언 자료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김국주 지사 증언.[112] 현재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가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자리이고 그 전에 군사영어학교는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에 있었다.[113]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 내 반전여론도 있었고 소련과 직접 전쟁하게 된다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고 1945년 11월, 당시 여론조사에서 1등 한 유력 정치가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었다.https://youtu.be/ha97vNaKg7I?si=xu-b0gnw_Juh9Mq1 미군정 입장에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지 않는다면 한반도가 공산화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많이 작용되었던 걸로 판단된다.[114] 23,000명 규모였다.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의 경찰이 그대로 인수되었다.[115] 백선엽은 각개전투 등을 시킨 탓에 경찰처럼 훈련하라는 미국 고문관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116] 우리나라 극우 보수세력들이 건국절을 1948년으로 잡는 이유도 바로 이때문이다. 문제는 1948년 건국절로 잡는 경우 임시정부와 대한제국 간의 법통의 승계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3.1운동 이전과 이후에 상해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들이 수립했었고, 이것이 1919년 9월에 들어서서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써 1919년을 시작한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117] 김구파 광복군을 숙청한 걸 말한다.[118] 미군정기 국방장관[119] 광복군 참모총장, 6·25당시 북한에 납치 도중, 1950년 10월 18일 평북 희천의 어느 농가에서 숨을 거두었다[120] 광복군 훈련처장, 제 5지대장, 6·25당시 서울에 잔류하다 납북된다.[121] 소련군[122] 미군[123] 미소공동위원회 1945 ~ 1947로 미군과 소련군이 신탁통치하고 있던 시기이다.[124] 부분별한 양민학살도 자행했지만, 육군내에 즉결처분[243]이라는 명목으로 이유없이 부하를 죽이거나 군인으로서 불명예한 상관을 죽이는 상관살해[244]가 벌어진다.[125] 이범석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파커 만년필을 선물 받을 정도로 각별했다고 한다.[126] 임시정부와 한독당 출신 인사들은 북한간첩단 사건으로 특무부대장 김창룡에 의하여 누명 씌워지거나 함정수사에 체포되어 구금되거나 사형판결을 받은 사람이 많았고 광복군 출신은 군대나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들이 겨우 살아남았다.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의 자서전이나 수기가 뒤늦게 나온 것도 군부정권때까지만 해도 내가 독립운동했다는 사실을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왜냐면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책을 내면 내용에 대하여 사상검증하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127] 특히 제주도민들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하여 이범석 장군과 광복군 출신을 좋아하지 않는다.[128] 그래서 광복군 출신들도 철기 이범석 장군 안좋아하는 사람들 꽤 있다.[129] 한도신 기록, 김동수. 오연호 정리, 꿈갓흔 옛날 피압픈 니야기, 민연주식회사, p. 260[130] 1987년 6월 항쟁에서 전두환 독재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직선제 투표로 이끌어내는데 민주주의를 이룩했으며 이 당시 학생운동했던 정치인들과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찬, 이종걸 의원 적극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면서 개정헌법이 탄생하게 되었다.[131] 주변에 나이 좀 있으신 육군 장성 출신이거나 육사 출신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광복군을 뿌리로 두고 싶은 생각은 커녕 심한 경우 빨갱이로 보는 경우도 있다.[132] 만주군 출신이다.[133] 초기 해군사관학교의 명칭. 일본 해군병학교와는 관련 없으며, 당시 해군과 육군의 용어가 달랐기 때문이 이 명칭을 썼다.[134] 만주군, 일본군들이 주축이었던 육군은 고사하고, 공군조차 핵심 창군 인물 중 일본 육군 항공대 출신이 있다. 그런데 일본 해군병학교는 조선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은 조선인이 해군에 입대해 항해술을 터득할 수 있던 환경 자체가 아니었고, 따라서 상선사관들이 중심이 된 것이다.[135] 최용덕, 장덕창, 이영무,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 이들은 각자의 출신배경을 잊고 백의종군하여 육군 참위로 임관 후 공군의 기틀을 닦았다. 당시 최용덕은 중국공군 상교 (육군 중령 급) 겸 광복군 참장의 위치였고 김정렬은 일본군 항공대 중대장(대위), 장덕창은 일본 민항기 베테랑 파일럿으로 9,800시간 비행 기록 보유, 이근석은 일본 항공대 소년병 배경의 화려한 도그파이터 경력 보유, 이영무도 중국공군 항공대 부대장 소교 (육군 상교 급) 등의 무시 못 할 배경이 있었다. 박범집 같은 경우에는 일본군 육사출신 항공인 중에서 가장 선임자였고, 김영환의 경우에는 다른 6명과는 달리 통위부 시절부터 군에 들어가 있었기에 공군 창설을 위한 소통의 창구로서 포함되었다.[136] 공군 창설의 7인중 최용덕 이영무는 중국군 광복군계. 장덕창은 일본 민항기 베테랑 파일럿. 김정렬, 이근석, 박범집, 김영환은 일본군계로 고루 분포되어 있었으며, 모임의 좌장이 최용덕 장군이었다.[137] 공군 창설의 7인 모두 고급장교 또는 베테랑 경력자임에도 당국의 홀대로 육군 참위 임관을 제안 받았다. 육군에서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고속승진하던 만군 일군 출신과는 대조. 최용덕 장군은 당시 이미 군경력 20년을 넘겼으며 중국 육군대학까지 졸업하고 기지사령관, 총사령부 차장을 역임한 거물이었다.[138] 이영무, 권기옥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운영한계 때문에 항공전력은 중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어 항일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임시정부 활동을 같이 하였다. 광복 후 육군 항공대 및 공군 창설에 관하여 정치적인 기여를 하거나, 현역으로 작전을 수행하였다.[139] 제 2대 국방부 장관 심성모다 1950년 제 2대 국회 답변에서 "아침은 해주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발언은 현상유지상태(Status Quo State)를 원했던, 쉽게 말해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미국내 반전감정이나 소련과 제 3차 세계대전의 두려움이 작용되었던 미국에게 한국의 국방부 장관의 이런 발언은 상당히 위험했고 한국군이 북진하지 못하게 탱크는 물론 대전차장비도 제한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다.[140] 이에 대해 김정렬은 "국방차관으로서 최장군이 군복을 벗게 되었기 때문에 현역이라면 당연히 초대 공군 참모총장을 했을 분인데 (내가) 그 일을 맡게 됩니다. 이영무씨는 참모총장에 오를 수 없을 만한 사정을 지니고 있었고...그래서 내가 그 선배들께 죄송스럽게도 초대 총장직을 맡고 군번도 공군 1번을 받게 되었답니다"라고 증언하였다.[141] 당시 조사기록에 따르면 북한에서 내려온 특사가 국군에게 체포된 사건이 있었는데 특사의 행방을 추적해보니 그가 이영무 대령의 집에서 투숙한 사실이 밝혀졌고 이영무 대령은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불고지죄로 인해 숙군대상이 되었다.[142] 다만 김정렬 장군의 증언에서 나오듯 납북이 아닌 월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영무 대령은 이미 정보국으로부터 각종 취조를 당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비록 무혐의로 석방됐으나 군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무보직 상태였다. 더구나 당시 서대문형무소는 취조를 하기 위해 각종 고문방식이 동원되었는데 이 중 일부는 일제의 고문방식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즉 이영무 대령은 군의 이러한 행태에 크게 실망하여 서울에 남아있다가 스스로 월북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143] 북한에 협력한 사람은 공적인정하지 않음.[144] 나중에 인면전구공작대 부대장이 된다.[145]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문서를 보면 김문호 대장 휘하 20명도 안되는 인원이 있었는데, 이소민 부대 출신들 몇명으로 채워졌었다. 이 부분은 정화암 회고록에 자세히 나타나 있는게 이소민과 김문호 둘이 대판싸우고 이소민 자기 부하 몇명을 붙여줬다고 한다.[146] 결국 최고 친일파 손자도 학병으로 전선에 끌려간다.[147] 군복에 부착물[148]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집부, 1986. p. 118[149] 1943년 8월 광복군 제1지대 전방공작원 김석산과 접선(강흥모 등 10명 후송)1944년 3월 광복군 제3지대 전방공작원 조동린과 접선(문수열 등 8명 후송) 1945년 4월 광복군 제3지대 본부 부관주임[150] 장호강 증언,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2권,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공훈전자사료관[151] 한국 광복군의 행동 준승 9개항 제 3조[152] 무타오, 쑨지커 저서, 조일문 번역, 피어린 2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대학교 출판부, p.226[153]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mngNo=8253[154] 김승학의 한국독립사에서는 유 소교로 현재 소령 계급을 명칭했었는데, 유기석 회고록을 읽어본 분은 아시겠지만, 중국군 유격대에 복무한 적이 있다.[155] 189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황학수(대한제국 육군 참위(參尉)에 임관후, 부위(副尉)로 승진함)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있었으니 그 영향도 있을 것이다.[출처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1권, 한국광복군 II[157] 김준엽, 장정-나의 광복군 시절, 아연출판사, 2023, p.462[158] 김준엽, 장정-나의광복군 시절, 아연출판사, 2023, p.497[159] 김홍일 장군도 중국 국민혁명군에서 별 두개의 중장을 달았다.[160] 이는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중국 국민혁명군 계급체계가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이 가져온 독일 국가방위군의 계급제도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당대 독일 육군 계급체계에는 소장 - 중장 - 병과대장 - 상급대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준장이 없었다. 중장보다 상위의 계급이자 독일 병과대장상급대장에 해당하는 이급상장이나 일급상장광복군에 도입되지 않았다.[출처3] 독립운동사 제6권, 독립군전투사 (하), 제2편 한국광복군 성립, 제2장 대일선전과 전열의 정비 강화, 제2절 전열의 정비 강화-1. 총사령부 기구 조정[출처4] 독립운동사 제6권, 독립군전투사 (하), 제3편 광복군의 후기 활동, 제1장 각 부대의 활동, 제1절, 전국의 진전-2. 연합군의 태도와 임시정부의 활동[163] 광복군 고유의 계급체계가 사용됨에 따라 총사령관의 계급도 중장(☆☆)에서 정장(☆☆☆)으로 승격되었다.[164]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136p,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165] 오늘날의 장교 및 부사관에 해당[166] 오늘날의 병에 해당[출처3] 독립운동사 제6권, 독립군전투사 (하), 제2편 한국광복군 성립, 제2장 대일선전과 전열의 정비 강화, 제2절 전열의 정비 강화-1. 총사령부 기구 조정[출처2]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2권, 광복군-장호강[169] 총사령관 지청천, 3지대 정훈주임 조성산 등이 정복에 견장을 패용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만, 해방 이후에는 총사령부가 아닌 2지대의 평대원들이 사관 및 병원의 계급장을 부착한 사례 역시 존재한다. 출처 : 한국광복군, 그 뿌리와 발자취 (2011, 독립기념관 출판)[170] 한국의 군복식 발달사I(479p), 국방군사연구소(1997)[171] 동지라는 표현은 중국군과도 같이 공작활동을 했기 때문에 많이 쓰였다.[172]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173] 한글표현이다. 어깨동무가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174] 한글표현이다.[175]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176] 불심검문(不審檢問)은 경찰 또는 군인이 거동이 수상한 사람을 대상으로 행동을 멈추게 하고 질문하는 것이다.[177] 비슷하게도 한자어 '인민(人民)'처럼 정치적 이유로 금기어가 되었는데, 임시정부 문서들보면 인민(人民)이란 표현은 People을 제대로 번역한 단어이다. 인민(人民)을 대체한 단어인 국민(國民)이 이 국민이란 단어표현도 일본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약자라는 이유로 1996년 김영삼 정부때 국민학교를 전부 초등학교로 바꾸었다.[178] 참장이 부임[179] 부령~참령이 부임하나 제 1지대 2구대장처럼 이소민은 국민혁명군 상교 계급이 있었다[180] 참령~부위가 부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제정한 관급조정안 상으로는 정위가 부임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참령이나 부위 계급으로 분대장 직책을 맡았다는 김문택 지사의 수기와 윤석진 지사의 구술자료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1개의 관급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81] 독립운동사 제6권-독립군전투사(하), 제2편-한국광복군 성립, 제2장-대일선전과 전열의 정비 강화, 제2절-전열의 정비 강화-2. 각 지대의 개편[182] 『독립신문』(중경판), 제5호, 1945. 1. 10.[183]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1권 광복군 편[184] 아오야마 카즈오 靑山和夫 (본명 : 구로다 젠지黑田善次) : 장제스 총통에게 조선의용대를 창설 건의한 사람[185] 심지어 백일청천 뱃지가 달린 군모를 쓰고 촬영된 증명사진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186] 이 당시 광목, 비단, 모직 등의 원단은 현물자산으로 현금대용으로도 사용되었다.[187] 김정민, 한국광복군 군복과 군용장구 연구, 28p (2018)[188] 목화에서 실을 뽑아 베를 짠 후 삶는 작업을 반복하여 당시 베틀을 사용해서 만들어서 현재 만들어진 광목에 비하여 상당히 거칠었을 것이다. 자연가공한 원단이기 때문에 물세탁시 5~10%내외 수축률이 있는 원단이다. 중국대륙은 깨끗한 물을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가급적 안빨고 다녔을 것이다.[189] 한국전쟁 시기 국군 전투복도 경성방직, 조선방직에서 군복을 대량 제작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전투복이 구하기 어려운 것은 내구성이 약하기 때문이다.[190] 육군박물관 학예지 제24집, 광복군복 연구 (152p~153p)[191] 염색재료도 없으면 하얀색 그대로 입고 다니는 것이다.[192] 천연 쪽염색, 먹염색을 사용하거나 혼용하는 식으로 색을 냈을 것이다.[193] 당시 상하이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국제도시이자 항구였다.[194] 중화민국 수도였고 현재 베이징은 베이핑이라고 불렀다.[195] 장제스가 김구와 약산 김원봉을 좋아했기 때문에 당시 양복점에서 맞춤으로 모직으로 된 군복들이 있었고 장제스와 친하지 않은 군벌이거나 소수민족 공작대에겐 가혹하게 차별했다고 한다.[196] 심지어 무기대여법으로 캐나다에서 중국으로 총기를 해상로로 보내고 싶어도 못보내고 일본이 패망하고 나서야 국공내전때 미군무기가 중국대륙에서 많이 나오지 그 이전엔 상선도 못들어갔다.[197] 창샤가 뚫리면 구이저우성과 쓰촨성 충칭으로 가는 곳을 열어주는 것이니 필사적으로 막아냈던 것이다.[198] 청대(靑黛): 중국어로 '칭다이'라고 불린다. 한약재로 쓰이며 식용이 가능하며 염색을 하게 되면 청회색의 국민혁명군복 색이 된다.[199] 천연 쪽 염색을 했을 경우 예쁜 청색이 나오지만, 청대쪽으로 염색하면 청회색에 가까운 칙칙한 색이 나온다고 한다.[200] 사진상 밝은 계열의 국민혁명군복은 대부분 하얀색이거나 제염전 과정으로 살짝 자연에서 나오는 누런끼가 있었을 것이다.[201] 좀 입다보면 거지넝마처럼 되어버리니 군복에 계급장이나 명찰을 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202] 무명으로 군복을 만들면 몇개월만에 해져버리기때문에 남아있는게 없다.[203] 장준하,『돌베개』 중에[204] 김준엽, 장정 나의 광복군 시절, 아연출판부, 2023, p.116[205] 일본제국군복이 황색이었기 때문에 최소 구분을 하려면 중국군에서는 다른 군복색을 입었어야 했다.[206]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294[207] 한국 里數로 120里[208] 정영호, 아름다운 마음, 운초서사, 1995, p.520[209] 정영호, 아름다운 마음, 운초서사, 1995, p.550[210] 김용, 나의 길을 찾아, 도서출판 이화, 2012, p.203[211] 우리는 광복군, 조국의 영원한 용사(독립운동가 구술자료집), 국가보훈처, 2016, p.231[212] Benjamin Lai, Chinese Soldier vs. Japanese Soldier : China 1937~38, Osprey Publishing, 2018, p. 105[213] 장준하,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돌배개, 돌배개, 2015, P. 146[214]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일반자료총서 86-2, 1986, p. 37[215]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독립유공자증언 1권 광복군 편[216]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306[217] 재미한교 ≪신한민보(新韓民報≫논설[218] 김준엽, 장정 나의 광복군 시절, 아연출판부, 2023, p.133[219] 장호강 증언,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2권,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공훈전자사료관[220] 김준엽, 장정 나의 광복군 시절, 아연출판부, 2023, p.463[221] 모젤은 일본어 표기 '모제루(モーゼル)'의 영향을 받은 발음법으로 마우저(Mauser)를 말하지만, 국민혁명군이 자주 사용했던 M712/C96은 개인이 소지하고 다니기엔 너무 크기 때문에 아닐 것 같고 Mauser 1912/14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Mauser HSc를 말하는건지 알 수 없다. 그 당시 모든 권총류를 마우저라고 불렀는지 모른다. 이런 표기법은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에도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명칭되는데, 당시 중국이 만든 데드카피총기들이 중국시장에 유통되었던거 생각하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222]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p.113[223] 당시 미육군에 채택이 안된 소총으로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군에 소량 유입되었다. Jowett, Philip (20 November 2013). China's Wars: Rousing the Dragon 1894-1949. General Military. Osprey Publishing. p. 347.[224]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제3편 광복군의 후기 활동, 제1장 각 부대의 활동, 제2절 제1지대 p. 377[225] 디지털 성주 문화대전 http://www.grandculture.net/seongju/toc/GC08400804[226] https://arsof-history.org/articles/v3n2_det_404_page_1.html[227] 일본제국육군 치하중전차를 상대할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228] <<소양문서>> 제 52호, 여기에는 편성할 수 있는 우리의 공군 인원 중 중국군 출신 및 소속의 비행사, 기계사로 최용덕, 이영무, 김진일, 염은동 등 11명 명단이 있다.[229] 문응국 지사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최중천(김천성)이 우리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제 5지대라 했거든요. 그래 나월환 대장이 찾아가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제 5지대로 해주십시오."해서 5지대가 되었지요. 산시성에는 그 후에 5지대로 통했지요. 산시성에는 그 후에 5지대로 통했지요. 최중천이 5지대라 했으니, 그 5지대로 간판이 붙었다가 광복군으로 전입하라더군요. 처음부터 제 2지대가 아닙니다. 그래도 내가 우겨서 5지대로 하자고 했지요. 그래서 광복군 제 5지대라 했는데 광복군 제 5지대가 제 2지대가 되었지요. 처음에 청년전지공작대가(歌)가 광복군 제 5지대가로 되었다가 우리가 떠난 후에 제 2지대가가 된 것입니다."[230] 안춘생[231] 現 기무사령부[232] 드라마 야인시대에도 나온다.[233] (중국어: 藍衣社, 영어: Blue Shirts Society, BSS)는 극우 정당 중국 국민당 산하의 파시즘 비밀조직으로 장제스의 지휘 아래 중화민국과 국민당을 군국주의 노선으로 이끌어간 일종의 정보기관이자 준군사조직이었다.[234] 안중근 의사의 조카들이다.[235] 다만, 소련군이 만주를 점령한 이후부터는 김원봉과 결별한 조선의용군도 당시 만주에 입국거부된 적이 있다.[236] 이글프로젝트[237]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1992[238] 중국에서 출간된 도서니만큼 회고 당시 정치적인 입지때문에 공산주의를 수용했다고 했을 수도 있다.[239] 2001년 11월 23일, 12월 21일 · 장석흥교수 연구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열람가능[240] 이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