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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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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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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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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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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J.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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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M. 코핸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머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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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런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셸턴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러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달라이 라마 14세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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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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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nopad> 파일:Harry_S_Truman,_bw_half-length_photo_portrait,_facing_front,_1945-crop.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884년 5월 8일
미주리 주 바튼 카운티 라마
사망 1972년 12월 26일 (향년 88세)
미주리 주 캔자스 시티 연구 의료 센터
묘소 미주리 주 잭슨 카운티 인디펜던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박물관
재임기간 제34대 부통령
1945년 1월 20일 ~ 1945년 4월 12일
제33대 대통령
1945년 4월 12일 ~ 1953년 1월 20일[1]
서명
파일:해리 S. 트루먼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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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존 엔더슨 트루먼 (1851 ~ 1914)
어머니 마사 엘런 영 트루먼 (1852 ~ 1947)
형제자매 2남 1녀 중 첫째
배우자 베스 트루먼 (1885 ~ 1982)[2]
자녀 마거릿 트루먼 (1924 ~ 2008)
학력 인디펜던스 고등학교[3] (졸업)
스폴딩 상과대학교[4] (중퇴)
캔자스시티 대학교 법학대학원[5] (중퇴)
병역 미합중국 육군 대령 전역[6]
종교 개신교 (침례회)
신체 175cm[7], O형
정당

의원 선수 2 (상원)
의원 대수 74, 77 (상원) }}}}}}}}}
파일:HarryTruman.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이름3. 약력4. 생애
4.1. 어린 시절4.2. 제1차 세계 대전4.3. 정치인, 부통령, 대통령까지의 길4.4. 해리 S. 트루먼 행정부
4.4.1. 대통령 제1임기(1945.4.~1949.1.)4.4.2. 대통령 제2임기(1949.1.~1953.1.)
4.5. 사망
5. 평가
5.1. 서양에서의 평가5.2. 한국 내의 평가5.3. 일본 내의 평가5.4. 북한의 평가5.5. 소련의 평가5.6. 중화권의 평가
6. 선거 이력7. 어록8. 기타9. 대중매체에서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제33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The buck stops here![8][9]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대통령 재임 중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명패에 적힌 글.[10]
미국의 제33대 대통령.

34대 부통령 임기 도중,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4선으로 연임한 지 한 달여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 트루먼 개인으로서는 부통령이 된 지 단 82일 만에 미국의 33대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당시에는 미국 역사에 손꼽히는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쟁 영웅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 가려 평범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서 냉전기로 이어지는 급격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냉철한 판단력으로 전후 세계의 질서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 시간이 지날수록 고평가 되고 있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생존에 크게 기여한 미국 대통령인데, 그가 바로 6.25 전쟁 당시 미군파병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11]

특이사항으로 이전의 대통령들과 달리 시골에 해당하는 미주리주 출신이며, 미국 역사상 마지막 고졸 대통령이다. 앤드루 잭슨과 비슷한 아웃사이더 출신.[12][13][14]

2. 이름

퍼스트 네임인 해리는 해리 S. 트루먼의 외삼촌이자 어머니 마사 엘런 영 트루먼(Martha Ellen Young Truman)의 오빠인 해리슨 "해리" 영(Harrison "Harry" Young)에게서 따왔다. 외삼촌은 해리슨이 정식 이름이고 해리는 애칭이었지만, 해리 S. 트루먼은 해리 자체가 정식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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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의 친필 서명. 미들네임 S 뒤의 점이 선명하다.

트루먼의 미들네임은 그냥 S이다. 그의 친할아버지 앤더슨 십 트루먼(Anderson Shipp Truman)과 외할아버지 솔로몬 영(Solomon Young)의 이름을 동시에 따왔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알파벳 한 글자를 그대로 미들네임으로 하는 건 스카치 아이리시[15] 사이에서 흔한 관습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미들네임이 알파벳 한 글자인 경우 구두점을 찍지 않지만, 트루먼 본인은 공문서나 조약 등에 서명할 때는 분명히 'Harry S. Truman'이라고 적었으며 자서전에도 미들네임 뒤에 점을 찍어 본인의 이름을 표기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표기할 때에도 이를 존중하여 S 뒤에 점을 찍어 표기한다.[16]

이름을 두고 트루먼은 "할아버지가 내 출생신고를 하면서 서류 위에 국수 한가닥을 흘렸어."라고 농담하거나, 트루먼의 대통령 취임식 선서를 진행한 할런 F. 스톤(Harlan Fiske Stone) 연방 대법원장은 트루먼의 풀네임을 오해하여 그에게 "나 해리 십 트루먼은(I Harry Shipp Truman)"이라고 말하게 시켰는데 트루먼 본인은 알아서 "나 해리 S. 트루먼은(I Harry S. Truman)"으로 고쳐서 선서한 일화가 있다.

3. 약력

4. 생애

4.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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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13세) 사진.

미주리주 러마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책벌레였다고 한다. 안경을 쓰게 된 것도 너무 을 많이 읽어 시력이 나빠져서 근시가 와서 쓰게 되었다. 특히 역사책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원래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어했지만, 지독한 근시 때문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우드로 윌슨과 함께 안경잡이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있다.[17]

4.2. 제1차 세계 대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젊은 시절에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며, 군 복무도 2차례나 했었다. 먼저 1905년부터 1911년까지 6년간 미주리주 주방위군 육군사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포병 상병으로 제대했고, 2번째로 1917년~1919년의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트루먼은 지독한 근시 때문에 군 복무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합중국 육군 신체검사에서 시각검사판을 통째로 외워서 입대하였다.[18] 이렇게 자원 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육군 포병 장교[19] 복무하였으며 대위까지 승진하였다. 육군 복무 경력은 두 기간을 합쳐 8년에 달한다. 그리고 트루먼의 부대는 종전이 선언되는 그날까지 독일 제국군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1차대전의 마지막 교전에 참전한 부대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 게 그라는 걸 생각해보면 트루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마지막 사건을 장식한 중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볼 수 있다.

4.3. 정치인, 부통령, 대통령까지의 길

I felt like the moon, the stars, and all the planets had fallen on me.
달과 별, 그리고 모든 행성들이 내게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전임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남긴 말.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와 소꿉친구였던 베스 윌리스결혼하고 양복점을 운영했지만, 얼마 못 가서 폐업하였다. 이 후 30대에 캔자스시티 법률학교를 졸업하여[20] 38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1922년부터 1934년까지 지역 판사(겸 서기)로 일했으며, 1934년 미주리주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 이후 계속 재선해서 2차대전 당시엔 미국 연방 상원의 국방사문위원회, 일명 트루먼 위원회의 의장으로 주로 군납비리에 대해 군대와 산업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활동을 펼쳐 당시 물가 기준으로 약 150억 달러의 국고를 보존할 수 있었고 미군에 납품되는 물자, 병기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확립했고 이러한 업적은 오늘날까지 미군과 군수산업계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다만 상원의원 활동 때에도 그렇게 활발한 타입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일을 못하지도 않는 무난한 의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4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부통령이 되었다. 부통령이 된 과정이 좀 무섭다. 전임 부통령이었던 헨리 A. 월리스가 루스벨트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4선 선거(1944)에서는 부통령을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났는데, 이 때 가장 가능성이 낮은 후보가 트루먼이었기 때문이다.

트루먼이 부통령이 된 것은 민주당 중진들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동상이몽의 결과였다. 민주당 중진들의 입장에서 보면, 1944년 당시 루스벨트의 건강상태가 심각한 수준임은 미 정가 고위층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따라서 194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당시 민주당 중진들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트루먼을 뽑은 것이다. 후보자들 중에서 가장 만만하고 능력도 없어보이니 루스벨트 사후 자기들이 잘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트루먼을 부통령직에 앉히는 데 동의한 까닭은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이 4선을 꽉 채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선택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가 트루먼을 선택하는 데 동의한 이유는 부통령 후보자들 중에서 뉴딜 정책을 옹호하는 유일한 후보자였기 때문이었다.[21] 또한, 상술한대로 그가 4선을 한 시점에서 전쟁이 끝나가기 때문에 종전과 함께 시작해야할 군축을 밀어붙일 수 있는 능력자로 트루먼 위원회때 인상깊은 활동을 할 트루먼을 자신의 종전후 정치일정에 맞춰서 선택했다는 의견도 있다.[22] 하지만 그는 월리스가 스스로 자력으로 치고 나온다면 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보았고, 트루먼에 그의 의중이 있다는 것은 월리스를 경계하는 정객들에게 더욱 과대포장된 감이 있었다. 여하간 모든 것은 정객들의 계산에 들었고, 루스벨트도 크게 마음에 안 들진 않았고, 월리스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과연, 3개월 만인 1945년 4월, 얄타 회담 직후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죽자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한 상태로 대통령이 되었다. 참고로 트루먼은 이 소식을 하원의원들과 술 마시다 받았다고 한다.[23] 물론 여기서 술 마셨다는 것은 놀러가서 마신 건 아니고 민주당 의원들과의 공식 미팅에 정부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자리이긴 했다. 그리고 미팅 중에 급한 소식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투덜거리면서 백악관에 들어갔더니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첫 마디가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였다고 한다.

엘리너의 회고에 따르면 소식을 듣고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여사님을 위해서 뭘 해드릴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요. 제가 부통령님께 뭘 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이 많으실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과 별, 그리고 모든 행성들이 내게 떨어지는 기분이다."(I felt like the moon, the stars, and all the planets had fallen on me)라고 소감을 밝혔다.

4.4. 해리 S. 트루먼 행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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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대통령 제1임기(1945.4.~19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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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한 때 무능하고 유약하다 폄하되었던 평화의 연합체는, 독재자와 군부의 폭정보다 훨씬 더 강력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ㅡ 1945년 5월 8일 유럽전선 승리를 발표하며.

지도력에 대한 평가를 받기도 전에 그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해야 했다. 그것도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사항들이었다.
"트루먼이 일본에게 경고하다."
먼저 트루먼은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 일본 제국무조건 항복을 권유하는 TV 방송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이 이를 거절하자, 이후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제국에 최후통첩문을 보냈는데, 일본은 조건부 항복[24]이 아니면 항복 할 수 없다며 똑같이 거절한다. 하지만 그때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을 보고 받고 일본의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폭탄 투하를 승인했다. 이 때문에 트루먼을 비판하는 표현으로 'give 'em hell, harry(엿 먹여줘, 해리)'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1975년에는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 사실 트루먼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 처음 보고 받았다. 원래 부통령으로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해야 했지만, 루스벨트 생전에는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트루먼의 프로젝트 접근을 의도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너 루스벨트 문서에 앞서 서술된 일화가 루머로서 소개 되어 있으니 참고할 필요가 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사회주의 권역의 확산 저지 문제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서유럽 경제의 복구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공산화 방지를 천명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렵 대륙에 경제 원조를 하는 마셜 플랜을 세워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부흥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에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국가에게 자국의 돈으로 지원을 한다는 마셜 플랜 등에 대한 당시 대중들의 여론이 곱지만은 않아서 1948년 재선에서 트루먼의 재선 가능성은 불투명했다.[25] 1944년 이미 FDR과의 대결에서 상당한 득표력을 보인 미국 공화당토마스 E. 듀이 후보가 다시 대선 레이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여권이 둘도 아닌 셋으로 찢어졌다. 전 부통령이었던 월리스는 진보당을 차려 출마했고, 특히 남북 전쟁 이래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는 주권민주당(딕시크랫)이란 이름으로 따로 출마해 실제 4개 주에서 승리해 39명의 선거인단[26]을 확보하는 이변을 일으키게 된다. 이는 FDR 시기까진 그래도 뉴딜 동맹에 붙어있던 남부 보수파들이, 트루먼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한 인종적 민권운동에 반감을 가진게 컸다.[27]

실제 트루먼 대통령은 민권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1945년 "우리는 새로운 세계, 훨씬 나은 세계, 즉 인간의 영원한 존엄성이 존중되는 세계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발언하며, 비록 사회적인 평등은 아닐지라도 정치적인 평등은 신봉했으며, 흑인 도시로의 점증하는 중요성을 인정했다. 남부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린치와 기타 형태의 민중의 힘이 1946년에 알려지게 되자, 그는 인종 및 종교에 입각한 흑백 차별대우를 조사하기 위한 민권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했다. 그 이듬해에 발표된 보고서는 미국 생활에 있어서의 흑인들의 2급 지위를 상세히 기록했다. 보고서는 모든 미국민들에게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연방 정부가 국민들에게 확보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0개항 민권계획을 의회에 송부함으로써 이에 응답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보다 강력한 민권옹호 자세에 성난 남부 민주당원들이 1948년 민주당을 떠났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연방 정부 고용분야에서 흑백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군대 내에서의 평등한 대우를 명령하고, 그리고 군대 내의 흑백 인종차별을 끝내는 방향의 일을 하기 위한 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했다. 군대 내에서의 (흑인에 대한) 마지막 제한은 한국전쟁 중에 끝났다. 민권 운동의 기원.

다시 선거 얘기로 돌아와서, 16년 만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벼르던 공화당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다며 그야말로 약이 바짝 오른 상황. 실제 트루먼은 이런 엄청나게 불리한 판세를 어떻게든 해결해보기 위해 당시 전쟁영웅으로 인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고 했었으나 아이젠하워가 '군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이유로 거절하면서 실패했고[28], 대통령 선거날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에 일어나자 박빙의 차로 자신이 이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당초 공화당의 기대와 달리 결과는 반대였고, 이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대선 당시 라이벌이던 듀이가 낮아보이던 트루먼의 지지율과 자신의 인기를 과신해 미리 각료를 구성하고 뱃놀이나 즐기는 등 선거 유세 기간을 흥청망청 보낸 게 컸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 선거 2주 전인 10월 중순 시행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듀이는 5% 이상으로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2주일 사이에 표심이 뒤바뀌어버린 것. 물론 후대 연구자들은 듀이가 우세했다는 내용을 담은 당시 <갤럽>의 여론조사 자체가 오류가 많은 조사였다고 보기도 한다. 전후 미국은 농촌보다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는데, 표본에서 농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그 결과 듀이의 지지율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갤럽 외에도 수많은 언론들과 여론조사들이 듀이의 승리를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대놓고 한 잡지는 듀이에게 '차기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했고, 유명 정치평론가들은 듀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차기 듀이 내각의 장관은 누가 될까를 예측하고 있었으며 대선 승자를 예측하는 도박에서는 트루먼 승리 진영의 배당률이 15배까지 올라갔던 상태였다. 이는 개표방송 초반까지도 이어져 초반 트루먼이 앞서가자, 초반이라 트루먼 강세지역의 개표가 먼저 되어서 그럴 뿐이고 개표가 진행되면 듀이가 역전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여하간 1936년 루스벨트 당선을 예측하며 현대적 여론조사의 효시가 된 <갤럽>은 12년 만에 이 사건으로 체면을 구긴다.[29] 그리고 이 선거에서 <갤럽>이 행한 잘못된 여론 지지율 조사방식은 이후 통계학개론 강의 등에서 적절한 표본집단 선정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두고두고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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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선 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오보를 들고 웃는 트루먼.

하지만 당시 선거에서 언론에 하이라이트로 잡힌 장면은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이라는 신문이 앞서서 '듀이가 트루먼을 이겼다'고 설레발을 친 게 하루아침에 오보가 되어버린 사건이었다. 원래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공화당에 우호적이었고 트루먼과 민주당에게 적대적인 신문이었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인 트루먼의 패배를 아예 기정사실화하고 헤드라인을 저렇게 박아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당선된 이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을 비웃듯이 저런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이 일화는 신문 보도의 정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로 손꼽히며, 그와 함께 트루먼이 신문을 번쩍 치켜들고 웃고 있는 위 사진도 미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로 뽑힌다. 어쨌든 이런 역전극을 통해 트루먼은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다.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

그로부터 59년 뒤인 2007년, 시카고 트리뷴은 망하지 않고 자신들의 실수를 덤덤하게 회고했다. # 사실 당시 시카고 트리뷴만 이런 실수를 했던 건 아니고, 라이프지를 비롯한 여러 언론도 듀이를 '차기 대통령'이라고 표기한 사진 등을 내놓았지만 상기한 사진의 임팩트가 워낙 세다 보니 시카고 트리뷴만 더 부각된 측면도 있다.

4.4.2. 대통령 제2임기(1949.1.~1953.1.)

2차 대전이 끝난 후, 그의 친공군적 성향 때문에 타군(특히 해군)과 사이가 매우 나빴던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 미국 국방부는 전쟁부(육군부)/해군부로 나뉜 것을 통솔하는 '부 위의 부'로서 창설되었는데, 초대 장관이 해군장관 출신 제임스 포레스탈[30]이긴 했지만 별로 쓸모가 없었다. 되레 트루먼의 공군 위주 성향과 타군에서 "왜 미군은 해군에만 그렇게 돈을 퍼부어대냐"고 징징대는 영향으로 인해 극단적으로는 "어차피 2차 대전 만큼 무식한 전쟁이 나지도 않을텐데 해군 예산 확 줄여도 되지 않을까?"라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제2대 루이스 A. 존슨 국방장관은 육군 예비역 법무중령 출신으로 트루먼의 성격에 딱 맞는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해군이 핵무기 운용이 가능한 거대한 폭격기를 운용하기 위해 기획했던 초거대 항공모함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함을 건조 시작 5일만에 취소시켜버리자 참아왔던 해군 제독들은 분노가 차올랐다. 오늘날에도 제독들의 반란으로 회자되고 있는 사건으로 존 설리번 해군장관과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 대장 루이스 덴펠드 제독, 해군 소장 알레이 버크 제독 등 수많은 제독들이 불명예 제대까지 각오하고 국방부에 항명했으며 5월에는 포레스탈 전 장관이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투신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31] 그러자 존슨 국방장관은 해군에게 거친 언행으로 비난하는 상황까지 초래되었다. 참고로 1949년은 소련의 핵개발 성공이 하반기에 세계에 알려지자 핵무기 무턱대고 쓰다간 인류 멸망이 온다는 공포 속에 재래식 무기의 중요성이 다시 조명되던 참이었고 존슨 국방장관이 저 말을 한 건 12월이었다.[32] 소련의 핵개발이니 6.25 전쟁이니 하는 마당에 집안싸움까지 벌어지자 트루먼은 국방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존슨 장관의 후임으로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장군을 임명하는 초강수를 두어야 했다. 물론 마셜 장군이 현역 군인 신분[33]으로 국무장관에 재직하며 마셜 플랜을 실행했던 경력이 있고, 국방부와 군부에서 명망이 높은 먼치킨이기는 했지만 일각에선 문민통제를 위반하는 인선이라고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국방부가 더욱 혼란해질 것을 걱정한 상원에서 마셜 장군의 국방장관 임명을 특례로 승인했다. 마셜 장군은 건강 문제로 짧게 재임하고 물러나긴 했지만 6.25 전쟁과 역시 육군 원수 출신인 아이젠하워 장군의 백악관행이 겹치며 마찰은 점점 중화되었다.
나는 그 양반이 멍청한 개새끼라서 자른 게 아니라,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아서 잘랐다. 멍청한 개새끼인 것은 맞는데, 그게 불법은 아니니까. 만약 그게 불법이었으면 장군들의 절반 내지 3/4 정도는 다 감옥에 있어야 할 것이다.
I fired him because he wouldn't respect the authority of the president. I didn't fire him because he was a dumb son of a bitch. Although he was, but that’s not against the laws for generals. If it was, half to three-quarters of them would be in jail.
- 1973년 12월 3일 타임지 기사, 트루먼이 1960년에 했다는 발언을 인용하며

트루먼의 대통령 제2임기에서 가장 중요했던 외교적 사건은 역시 6.25 전쟁일 것이다. 이때 벌어진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와의 마찰 일화도 나름 유명하다. 애시당초 둘은 성격이나 정치사상부터가 달랐는데, 거기에 트루먼은 군인인데 쇼맨십이 강한 맥아더의 행동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대통령 말 안 듣고 혼자 설쳐대는 맥아더를 보고 누가 대통령인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을 정도니... 그래도 군사적 능력을 인정해서 딱히 제재를 가하려 들지는 않았다.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와는 다르게 맥아더 장군과 극동사령부는 핵무기 사용 신중론이었고, 핵무기 사용을 고려한 건 미 본토 군부와 트루먼 대통령이었다.관련 기사 전쟁 초반부터 워싱턴 군부는 핵무기 사용을 적극 고려했고 트루먼 대통령도 딱히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일종의 확전 방지용 뻥카의 목적도 있겠지만 핵무기 장착이 가능한 B-29 폭격기 10대를 괌에 배치했고 맥아더 해임 나흘 전엔 아예 괌에 핵무기 전진 배치를 지시했다. 기자들에게 "언제나 핵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 반해 맥아더와 극동 사령부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장의 상황에서는 핵무기의 필요성과 효과가 계속해서 변동되기에 핵무기 사용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핵무기 사용을 준비했다.
맥아더는 6.25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상황이 아니라면 핵무기 사용이 필요하지 않다는 전략도 고려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이뤄진 핵무기 사용 논의를 바탕으로 실무적인 사용 계획은 준비했다. 1950년 12월 22일에 작성된 미군 문서에 구체적인 논의 과정과 내용이 담겨있다.

한 달 전인 11월 29일 맥아더는 극동사령부 참모들에게 “지상 작전 지원을 위한 전술 핵무기 사용 관련 보고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극동사령부는 “핵무기를 한반도에 사용하는 데 장애가 없고, 적에게 결정적 타격이 가능하다”며 “대규모 증원에 대응하려면 핵무기 120개가 필요하고 이를 일본에 비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해임한 결정적인 이유는 위에서 인용된 트루먼의 어록대로 맥아더가 문민통제를 무시하고 대통령에게 대들었기 때문이다. 1951년 4월 5일,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조셉 윌리엄 마틴 주니어는 트루먼의 유럽 정책과 전쟁 전략을 비판하는 맥아더의 서신을 의회에서 낭독했다. 이는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사령관이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의 입을 빌려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 공개적으로 항명하는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으로 맥아더의 경력은 끝장났다.

여담으로 미국에서는 6.25 전쟁을 '트루먼 전쟁(Truman's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외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가 트루먼의 두 번째 임기에 발족했다.

1952년 대선에서 초반엔 재선에 도전하려 했으나 뉴햄프셔 주의 경선에서 크게 뒤지는 결과가 나오자 재선을 포기하고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4.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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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1년 전인 1971년 12월 촬영된 사진. 대통령 재임 시절 사진과 비교하면 상당히 인상이 초췌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1953년 퇴임했고 1972년 12월 26일에 향년 88세로 타계했다. 90세가 되지 못 한 대통령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 살았다.[34]

5. 평가

5.1. 서양에서의 평가

후대로 갈수록 평가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미국 대통령 인기 순위 조사나 업적 평가를 하면 보통은 10위권 내에 들며 우수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2000년 이후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순위에서는 5위에서 9위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으며, 평균 7위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17년 CBS에서 91명의 역사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6위로 순위가 책정되는 등 2020년대 현재 평균 6위 정도의 랭킹을 보이고 있다.#

전임자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나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한 채 갑작스레 대통령이 되었지만,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전후 질서 확립,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소련 공산주의의 공격적인 팽창에 대응하여 냉철한 판단력으로 여러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침착하게 세계 질서를 이끌었고, 냉전과 6.25 전쟁을 주도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세계의 지도국가로 굳힌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냉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소련이 스스로 무너진 이후 트루먼의 정책이 냉전의 평화로운 종결과 냉전 후 미국의 헤게모니에 큰 기여를 했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헨리 키신저는 냉전에서의 그 유명한 봉쇄정책과 관련하여 트루먼을 고평가하며, 자신이 젊은시절에 만난 해리 트루먼과의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트루먼은 냉전의 시작을 주도했고 궁극적으로 냉전의 승리를 가져오게 될 봉쇄정책의 확대를 이끌었다. 그는 미국이 최초로 평시에도 군사동맹을 체결하도록 했다. 그의 지침에 따라 네 명의 경찰관이라는 루스벨트의 구상은 전례가 없던 동맹체제로 대체되어 이후 40년간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미국의 신념을 신봉하는 중서부 출신의 이 평범한 사나이는 기진맥진해 있던 적들이 민주주의 국가들의 공동체에 다시 합류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마셜 플랜(Marshall Plan)과 포인트 포 프로그램(Point Four Program, 개도국 기술 원조 프로그램)을 후원했으며,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은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들이 회복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자원과 기술을 헌신적으로 제공했다.

나는 1961년 초 하버드 대학교의 젊은 교수 시절에 트루먼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캔자스시에서 강연할 일정이 있어서 인근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시에 있는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에서 트루먼 전 대통령을 예방할 기회가 생겼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트루먼 전 대통령의 쾌활한 성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도서관을 같이 둘러본 후, 트루먼은 자신의 대통령 시절 백악관 집무실을 똑같이 베낀 집무실로 나를 안내했다. 내가 케네디 행정부의 백악관에서 비상근 자문역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트루먼은 나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물어보았다. 워싱턴 칵테일파티에서 써먹을 수준의 지식을 동원해 나는 관료제가 정부의 제4부 기능을 하고 있고 대통령의 행동의 자유를 상당히 억누르는 것 같다고 답변했다. 트루먼은 이런 발언이 재미있지도 유익하지도 않다고 보았다. 트루먼은 "교수님 말씀"이라고 비꼬듯 대답하고는 대통령의 역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만약 대통령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안다면, 어떤 관료도 대통령을 막을 수가 없어요. 대통령은 언제 조언을 그만 들어야 할지를 알아야 해요."

좀 더 익숙한 학문 분야로 잽싸게 화제를 돌리면서, 나는 트루먼에게 어떤 외교적 결정을 내린 인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어봤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가 적들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항복시켰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그들이 회복하고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국제공동체에 다시 참여하게 도와줬죠. 오로지 미국만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트루먼은 인디펜던스시 거리를 걸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단출한 집으로 나를 데려갔고, 부인인 베스를 만나도록 해주었다.

나는 이 간단한 대화가 트루먼의 전형적인 미국식 특성을 너무나 완전하게 담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거론한 것이다. 대통령 직위의 위엄과 대통령의 책임에 관한 그의 의식, 미국의 힘에 관한 그의 자부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의 궁극적 소명이 모든 인류의 자유와 진보를 위한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헨리 키신저, 헨리키신저의 외교 441~442p

다만 재임 당시엔 그런 업적들이 묻히는 경향이 있었고, 언변이 정치인치고 능숙한 편도 아니라서 재선을 위한 선거유세를 할 때에는 야유를 받는 굴욕까지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기차를 타고 소도시, 지역 마을을 돌았다. 서유럽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유럽에 거의 돈을 퍼붓다시피 한 마셜 플랜은 지금은 냉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장면 중 하나로 교과서에서도 제법 거론되지만 이때만 해도 서유럽 돈 퍼주기라고 욕도 많이 먹었다. 퇴임 후 고향 미주리로 돌아갈 때도 굳이 뒤에서 욕설을 퍼부은 안티들도 있었다고 하니.. 그가 3선에 나서지 않고 한달반 일찍 퇴임한 것도 어찌보면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35]

게다가 트루먼의 정책은 정작 민주당보다 공화당에 가깝다는 평을 받기도 할 정도로 민주당의 보편적인 성향과는 차이가 있었다. 때문에 민주당 골수 지지자들 중에서는 그에게 평가가 박한 경우가 많다. 현재도 민주당에서는 전임자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거의 당의 최고 위인으로 꼽지만 루즈벨트 바로 다음 가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인 트루먼은 의외로 그다지 부각시키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케네디를 트루먼보다 훨씬 많이 내세우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면,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나 위에 나온 그의 좌우명인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에 따른 강건한 책임의식은 그가 높이 평가받는 요인 중 하나. '재임 중엔 욕을 꽤 먹었지만 퇴임 후 재평가받은' 전형적인 케이스. 그의 미들네임 S를 따서 3S라고도 한다. Stubbornness(고집), Sympathy(동정심), Stoicism(인내[36]).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그를 좋아했으며 철의 장막도 처칠이 트루먼의 모교(인디펜던스 고등학교[37])를 찾아가서 한 연설에서 나온 말이다.[38] 처칠은 처음에는 FDR 대신 대통령이 된 그를 얕잡아보고 못 미더워했으나 나중에는 "다른 누구보다도 서구 문명을 지켜내는데 공을 세웠다"며 트루먼을 극찬했다. 또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도 처음에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만큼 트루먼이 중국에 관심을 줄지 우려했지만 나중에 가선 그의 기질을 평가한다.

CNN래리 킹은 그를 "매혹적인 언변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정확히 표현할 줄 알았던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라고 평가했고, 트루먼 정부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트루먼에게는 리더의 최대 걸림돌인 교만이 없었다. 그와 그의 일 사이에는 한 번도 사적인 자존심이 끼어든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1972년 12월에 그가 88세로 사망했을 때 칼럼리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트루먼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영웅도 예술가도 체스 선수도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솔직하고 실수도 하고 어떨 때는 예기치 않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인간 그 자체였다. 그는 평범한 미국인이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5.2. 한국 내의 평가

위에서도 설명한대로 트루먼은 핵무기로 일본 제국을 패망시켜 사실상 한반도 독립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대통령이며, 이후 6.25 전쟁에 파병을 결정하여 대한민국이 존속할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다. 실제로 당시 한국을 포기하자는 의견이 꽤 있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고 5개월 뒤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는 트루먼 대통령과의 미·영정상회담에서 한국을 포기하라고 건의했다. 그러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을 포기하면 우리를 믿고 싸웠던 이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애틀리 총리의 ‘한국 포기 건의'를 거절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임에도 한국 현대사에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2차 세계대전 시절에는 전임자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6.25 전쟁 이후에는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전황을 반전시킨 더글라스 맥아더의 이미지에 묻혀 대중적 인지도는 낮은 편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현대 대한민국 성립의 일등공신으로써 우호적 평가가 대세가 되었으나, 정작 1990년대 이전에서는 과거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평판이 좋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이는 좌파 입장에서 공산권의 확산을 막는 과정에서 펼쳐진 좌익 민족운동 탄압 이미지로 비난받았고, 우파 입장에서도 김일성을 자극한 애치슨 라인 설정과, 맥아더의 주장대로 산둥반도와 만주에 핵을 쐈으면 공산권을 후퇴시키고 6.25 전쟁을 북한 멸망과 북진통일로 마무리할 수 있었을 텐데 '트루먼이 초를 쳤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심지어 맥아더가 6.25에서 승리하면 맥아더의 인기가 높아져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그에게 패배할 것을 우려해 맥아더를 자르고 본인도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은 것이라는 원색적인 미국발 음모론까지 있었다.[39] 물론 당시에도 그가 한국 독립을 도운 입장이라는 점과 6.25 전쟁에 미군을 파병시켜줘 고마움을 느끼는 여론이 있긴 했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는 최근 출간된 『해리 S. 트루먼-평범한 인간의 비범한 리더십』에서 한국의 이런 분위기를 지적했다. 강 교수는 6·25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이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한국인들의 운명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며 그를 대한민국의 대부(godfather)라고 불렀다. “한국인들에게는 거의 전적으로 잊히고 말았으며 학문적으로도 주요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물론 이때도 절대다수에게 비난받던 정도는 아니었고, 교민들 사이에서는 소식을 듣자마자 "개새끼들, 당장 파병해!"라면서 미군을 한국에 즉각 파병해준 그를 은인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 트루먼이 사망하자 1972년 12월 28일을 애도일로 선포하고 하루 동안 조기를 게양하였다. # 6.25 전쟁 당시 그의 성 트루먼(Truman = True + Man)을 한역하여, 정감록에 나오는 바다를 건너와 백성들을 구하는 진인(眞人)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파병 당시 정확한 인용은 다음의 대목으로, 군통수권자로서 의회 승인과 관계 없이 미군을 파병했다.
“이곳은 극동그리스다.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해야 다음 단계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40]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채명신은 퇴임 후의 트루먼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채명신과의 만남에서 트루먼은 손수 커피를 끓여주며 채명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채명신이 한국민과 한국군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의사를 전하자 본인 역시 승전군인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받으면서 당시 백악관의 상황과 결정이 상세히 기록된 자신의 일기를 직접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수첩에는 본인이 군통수권자의 직권으로 미군을 파병한 흔적이 부대별로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문득 채명신에게 "내가 맥아더를 경질한 것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국인들의 생각을 여과없이 듣고 싶군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채명신은 당시 트루먼과 맥아더의 정치적 관계[41]를 고려해서 “한국민들은 맥아더의 해임 이유를 모르고 그가 그저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훌륭한 장군이라 믿지만, 저는 압록강 전선에서의 후퇴에 분명 맥아더의 판단 착오[42]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였고, 공과 과에 대한 평가를 적절히 섞은 채명신의 답변을 들은 트루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 그의 화려한 명성 뒤엔 작전상의 중대한 과오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정치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트루먼은 궁극적인 목표[43]의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관철을 위해 당시 상황의 균형[44]을 먼저 선택하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원론적인 육참골단의 전략을 내세운 것이다.

종종 극단적 매카시주의자라고 불릴 정도로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군인 맥아더는 극동에서의 확전을 불사하고도 공산주의 사상의 궤멸을 목표로 삼아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고 판단한 반면, 트루먼은 이념적, 외교적 이해관계를 연결적으로 분석하는 정치가적인 성향을 토대로 제한전쟁의 성격을 가지는 전쟁은 시작된 곳에서 결론을 맺어야 하고, 재확전과 경쟁적 핵무장이 이루어지기 전에 얼른 전쟁을 종결지어야 국제정치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 균형을 위해서도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여러 연구를 통해 이러한 업적이 재평가되어 이제는 6.25 전쟁에 파병을 결정한 은인으로 점차 알려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맥아더의 여러 전략, 전술적인 실수[45]와 지나친 확증편향[46]이 다방면에서 객관적으로 연구되는 측면도 있고 냉전 초기의 트루먼의 전략적 결정이 가지는 국제정치적 가치가 평가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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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임진각국민관광지에 트루먼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한국에 현존하는 유일한 외국 국가원수의 동상이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동상도 논란이 되는 와중에 트루먼의 동상은 어떠한 논란도 없었는데, 강경파의 경우 1950년 초여름에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의 한국 파병을 최종 결정 승인한 미국 대통령'이라는 점을, 온건파의 경우 맥아더를 경질해서 핵전쟁의 발발을 막아낸 점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정치 성향이 어찌되었든 간에 확실하게 인정할 만한 업적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맥아더만큼 논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칭송하는 이들은 해리 트루먼에 대해서 좋게 평가한다. 6.25 전쟁 때 이승만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구한 인물로 보는 것이다. 2023년 경북 칠곡 다부동의 경우 이쪽 인사들이 이승만의 동상과 더불어 트루먼의 동상까지 세우려고 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이 동상을 세우려고 추진하는 단체 이름이 이승만 트루먼 동상건립추진 모임이다.#

그외에 제2임기 항목에서도 서술되었지만 6.25 전쟁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고[47] 맥아더 장군이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면 핵사용을 유보[48]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세간에선 반대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독립 즈음에 쓰여진 소설을 보면 등장인물이 트루먼을 '돌맹이'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트루먼이'-'툴먼이'-'돌맹이'로 음차되어 부른 것이다.

5.3. 일본 내의 평가

트루먼을 향한 일본의 평가는 참으로 묘하다. 일본 극우, 우익들에겐 그들만의 기준 위대하던 일본 제국을 패망시키고 신성시하던 천황까지도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권한을 완전히 끌어내린 불구대천의 원수 수준이고, 좌익들에게도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원자폭탄이라는 희대의 수단을 사용해서 일본 열도를 불태우고 많은 인명을 살상한 원흉으로 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거기에 더해 미군정을 통해서 전후 일본에 여러가지 제재를 가한 대통령이라고 싫어하기도 한다.[49] 일본군 출신의 입장에서도 보면 국방군을 현재의 방위급 자위대로 격하시킨 주요 인사로 지목되는 편이다.

그러나 일본이 간과하는 사실 중 하나는 트루먼이 6.25 전쟁에 파병을 결정한 덕분에 일본이 '경제부활'을 이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 맥아더가 이끈 일본 미군정의 정책 방향은 일본이 다시는 군사강국이 되지 못하게 농축산업 위주의 중립국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는데, 한국전쟁이 터지고 미군이 상당수 군수물자들을 일본에서 발주한 덕분에 이 계획은 전면 수정되고 무너진 일본경제도 다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소련을 견제하고자 일본 전범 대다수를 용서해준 사람도 트루먼이다.

5.4. 북한의 평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습니다. 지난 어느 한 시기에 엥겔스는 영국 군대를 가장 야수적인 군대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독일 파쑈군대는 그의 야수성에 있어 영국 군대를 릉가하였다. 사람의 두뇌를 가지고서는 그 당시 히틀러 악당들이 감행한 만행보다 더 악독하고 더 무서운 만행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양키들은 히틀러도배들을 더 훨씬 릉가하였다.
북한에서 방영한 기록 영화 <조국해방전쟁사> 中 [50]
북한의 입장에서는 김일성과 대적한 원흉이자 6.25 전쟁 때 UN군을 파병해서 자신들의 남침을 좌절시킨 원흉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시에 한반도 전체 공산화를 방해하고 좌절시킨 원흉으로도 평가한다. 위의 인용문과 같이 북한에선 트루먼을 히틀러 못지않은 악인으로 평가한다. 무엇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현재까지도 남북 분단의 원흉으로 부르는 '철천지 원쑤인 미제'의 대통령이기도 하였기에.. 하지만 1949년 남한에 있는 주한미군 일부를 본국으로 철수시켰을 때는 호의적인 반응도 보였는데, 미군이라는 골칫거리가 없어지면 남침을 하기 더 쉽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5.5. 소련의 평가

당시 소련이었던 러시아에서도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다. 2차세계대전 종전 직전까지만 해도 소련의 수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머리를 맞대고 추축국 소탕에 협력하기도 하였으나, 사실 트루먼 자체가 스탈린에 그닥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라서 종전 이후 냉전기가 다가오고 한반도 문제까지 겹치면서 여러모로 소련과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기 때문.

5.6. 중화권의 평가

중국의 입장에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및 마오쩌둥 정권 수립 이후 1950년 6.25 전쟁 때 중국군 인해전술을 무력화한 계기로 한동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의외로 오늘날 상당수 중국인들은 그를 과거 중화민국 시절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같은 '연합국으로써 추축국 일본제국을 무너트린, 무찌른 영웅 동료'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해리 트루먼이 일본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두고 망할 르번구이쯔 워누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꺾어버린 대통령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심지어 중화민국침공해서 국공내전을 강제 종식시켜 처형 직전의 마오쩌둥을 살려내고[51], 2500만명을 학살하고 생화학 대량살상무기를 잔뜩 퍼부어버린 일본을, 아예 지구상에서 없애버리는 몰락 작전이 진짜로 실행됐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중국내의 극단주의자들도 있다. 중국내 반미 감정과는 별개로 트루먼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호평하는 기류가 있다.

만약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하지 않고 일본에 대한 전면 상륙 침공을 실행했다면 연합군뿐만이 아니라 일본군 점령지, 또는 식민지 주민들이 더 많이 희생당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베트남만해도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200만명만 해도, 1940년에 점령 뒤 1944년 10월까지가 절반이고, 그부터 1945년 8월까지 10개월 동안 나머지 절반을 죽인 것이니, 일본이 궁지에 몰리면서 식민지인들을 점점 혹사시켰다. [52] [53]

대만에서의 평가는 긍정적인 편이다. 당시 중공의 마오쩌둥은 대만을 끝장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에 대만상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대만도 위험하다고 판단한 트루먼은 많은 각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만 해협에 미 제7함대 소속의 항모전단을 파견해서 중공군의 대만상륙을 저지시켰다.[54] 이후 미군 주둔 등 대만에 대한 각종 경제적ㆍ군사적 지원도 해주며 오늘날 대만-미국 관계의 기반을 쌓았다.

6.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34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미주리

787,110 (59.55%) 당선 (1위) 초선
194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930,775 (51.17%) 당선 (1위) 재선
1944 미국 부통령 선거[55] 미국 25,612,916 (53.39%, 432명) 당선 (1위) 초선[56]
1948 미국 대통령 선거 24,179,347 (49.55%, 303명) 당선 (1위) 재선

7. 어록

"만약 독일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는 러시아를 지원하고, 러시아가 이기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는 독일을 지원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가능한 서로 더 많이 죽이게 할 수 있다"
"If we see that Germany is winning the war, we ought to help Russia; and if that Russia is winning, we ought to help Germany, and in that way let them kill as many as possible."
1941년 6월 상원의원 시절,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것을 보고 한 발언#
"일본의 군 병력이 궤멸되기 전까지, 세계 평화란 없습니다."
"No peace in the world, until the military power of Japan is destro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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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새끼들을 막아야 하오. 그게 전부입니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and that’s all there is to it."
"남한은 미국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1950년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강대국의 책임은 세계에 봉사하는 것이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The responsibility of the great states is to serve, and not to dominate, the world."
"손에 피를 묻혔다고, 젠장! 그 녀석은 내 손에 묻은 피의 절반도 손에 묻히지 않았어! 저 울보를, 다신 여기 들이지 말게나!"[57][58]
"Blood on his hands, dammit! He hasn't half as much blood on his hands as I have! Don't let that crybaby back in here!"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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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렌 버콜과 피아노를 치는 트루먼.

    의외로 피아노가 취미였다. 실력도 제법 괜찮았던 듯. 트루먼이 부통령 시절 유명한 할리우드 여배우인 로렌 버콜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그녀를 피아노 위에 앉혀 놓고 피아노를 치는 위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을 본 트루먼의 친구이자 동료가 "자네 혹시 그 사진 보고 부인이 뭐라고 안 했나?"라고 묻자 트루먼은 "아내가 '당신 피아노를 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여자랑 노는 거예요?'라고 묻던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영어로는 (피아노 등을) 연주하는 거나 노는 거나 둘 다 to play다. 이를 이용해 트루먼이 말장난을 한 것이다. 그 뒤로 별 말이 안 나온 걸 보면 이걸로 부부관계에 불화가 생겼다거나 하진 않았던 모양.
  • 또 다른 취미로는 볼링이 있었다. 미국 대통령중 최초로 볼링이 취미였으며, 아예 백악관의 웨스트 윙에다 볼링장까지 만들었다. 이를 따서 백악관 옆에 있는 아이젠하워 행정동 빌딩의 볼링장은 해리 트루먼 볼링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소꿉친구결혼해서 백년해로한 인물인데 영부인 베스 트루먼을 6세 때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며 그 이후 고등학교에 가서 사귀었는데 둘의 결혼은 트루먼이 그럭저럭 안정을 찾은 1919년(35세)에야 이루어졌다. 결혼 전인 1910년부터 1959년까지 부부는 매번 편지를 교환하곤 했는데, 이 편지를 따로 묶은 서간첩인 <베스에게(Dear Bess)>가 따로 책으로 나왔을 정도이다. 이 서간첩은 576페이지에 이른다고 한다. 이 부부 사이에 자녀는 딸인 마거릿뿐이었지만 트루먼이 만난 지 84년만인 1972년 사망할 때까지 글자 그대로 백년해로했다. 베스 트루먼은 남편이 죽은 지 딱 10년 뒤인 1982년 영면했다. 사족으로 장모 마거릿 게이츠 월리스(Margaret Gates Wallace)(애칭은 매지Madge)는 사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 20세기 유일한 또 아직까진 미국 최후의 고졸 대통령인데, 21세기에도 이 기록은 쉽게 깨지진 않을 것 같다.[59]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근대 이후로 미국 대통령들은 거의 다 명문대 출신들이었다.[60]
  • 독서는 죽을 때까지도 즐겨서 은퇴 후 70대에 들어서도 어떤 기자가 트루먼의 자택을 찾자 책이 수북이 쌓여있었으며, 기자가 "대통령님께서는 주무시려고 책들을 읽으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아니오. 깨어 있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현역 시절 스트레스가 많아 그랬는지, 개새끼!(Son of a bitch!)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고 한다.[61] 실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한성깔하기로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맥아더를 해임하고 나서도 "난 딱히 맥아더가 멍청한 개새끼라서 해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아서 그를 해임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 논쟁을 하다가도 이 욕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 후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전 트루먼 대통령께서 저에게 개새끼라고 부른 것에 대해 사과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 제가 개새끼인 것에 대해 사과할 생각입니다.

    또한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를 할 무렵 지원유세를 하기도 했는데, 연설하러 온 곳에 공화당원들이 온 것을 보고 별안간 "지옥에나 떨어져라!(Go to hell!)"라고 욕설을 내뱉어서 케네디가 트루먼에게 직접 '자제 좀 해주세염'이라고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트루먼은 처음에는 조지프 케네디를 싫어해서 그의 아들인 존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케네디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 그의 성질머리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로, 1950년 12월, 워싱턴에서 열린 외동딸 마거릿 트루먼의 공연에 대해 음악평론가 폴 흄은 "노래는 잘 못하며 전문 성악가로 남기는 힘들 것이다"라는 혹평을 내렸다. 그러자 트루먼은 흄에게 다음과 같은 격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방금 당신(폴 흄)의 형편없는 평론을 봤소.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만난 적 없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당신은 새로운 코가 필요할 것이며, 눈에 멍이 들 줄 아시오."

    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마거릿은 아버지에게 정치적으로 어렵게 될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트루먼은 되레 "국민들의 80%는 내 편일 테니 넌 너무 걱정마라"고 여유있게 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백악관에 많은 편지가 도착했는데, 트루먼의 장담대로 대부분은 트루먼의 행동을 지지했으며, 특히 여성들한테서 "제 남편도 우리 딸을 대통령님이 하신 것처럼 지켜줬으면 좋겠어요"란 내용이 많았다고. 세간에선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다'라는 평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국의 대통령이 취하기엔 부적절한 행동이었던건 맞는지라 그의 비판자들은 '도량이 좁고 비루한 인물'로 혹평하기도 했다.
    참고로 딸 마거릿은 그 평론가의 평론처럼 성악가로서는 별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훗날 미스터리 작가로 꽤나 성공했다고 한다.[62]
  • 해리 트루먼 사후 3년 후에 발매된 시카고(밴드)의 1975년 싱글 'Harry Truman'에서 묘사하는 인물로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데, 노래의 내용은 과거에 직설적인 말을 자주 했던 해리 트루먼은 미국이 필요로 한다는 내용의 트루먼에 대한 긍정적인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
  •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1950년 푸에르토리코의 민족주의자인 오스카 코아조와 그라젤리오 트레솔라에게 워싱턴의 블레어 하우스[63]에서 암살당할 뻔했으나 경호원들의 대응으로 토레솔라는 사살되고 코아조는 체포되었다. 다음 날 어떤 기자가 트루먼에게 "만일 대통령님께서 암살범들과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을 던지자 트루먼은 주저없이 "그 자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목구멍에 처박은 후 방아쇠를 당길 거요(I would have taken the gun from him, shoved it up his gullet and pulled the trigger.)."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아무래도 언론에서 대통령으로서 약한 모습을 피하기 위한 언론플레이인 측면이 있었는지 트루먼이 재선[64]을 포기할 때 이 암살 사건이 자신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고백했다. 체포된 코아조는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고 이후 푸에르토리코에서 1994년 8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 "당신 이웃이 일자리를 잃으면 불황이고, 당신이 일자리를 잃으면 공황이다."(It's a recession when your neighbor loses his job; it's a depression when you lose yours)라는 말을 한 대통령으로도 나름 유명하다. 정작 한국에서는 레이건의 어록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트루먼이 원조다. 레이건은 선거운동 중에 트루먼의 이 말에 정적 카터를 까는 표현을 추가했을 뿐이다.
  •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베트남호찌민으로부터 "독립 후 당신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허나 당시 호찌민은 트루먼에게 낯선 인사라 트루먼은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고 한다. 호찌민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라고 본 수정주의에서는 이때 트루먼이 큰 관심을 가졌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보기도 했지만, 이런 드립은 옌안 시절의 마오쩌둥도 쳤던 것이고 수정주의와 달리 근래의 연구들에서 지적하듯이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적 이념성은 확고했던 것이니 당연히 미국이 남베트남의 반공세력을 버리고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을 선택하게 됐을 가능성은 없다.
  • 트루먼의 자서전은 오늘날 2차 대전 말기와 냉전에 관한 정책적 결정 연구에 중요 자료 중 하나로 남아있는데, 자서전답지 않게 의외로 진솔하고 호방한 점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렇게 싫어했던 맥아더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이다.
  • 후임자인 아이젠하워에 대해서는 그가 당선되기 전에 “아이젠하워는 이 자리에 앉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라고 단언했다고 한다.[65]
  • 리처드 닉슨에 대해서도 평가한 적이 있었는데, (태평양 전쟁의 전리품으로 트루먼이 얻어낸 오키나와1972년 사토 에이사쿠에게 반환한) 닉슨을 뽑는 인간은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공개적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이후 닉슨이 재선하여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나는데 후일..
  • KKK 멤버였던 적도 있었는데, 본인 스스로도 이 사실을 상당히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1924년에 미주리주 잭슨 카운티의 판사 재선에 성공하게 되면서, 당시 잭슨 카운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KKK의 제안을 받아 한 번 참석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일단 10달러를 주고 가입했다고는 하나 공개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다고 하며 본인 스스로 당시 이야기를 말하는걸 꺼렸다고 한다. 이후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한 대통령이라 더 묘한 부분이다.
  • 부통령이 되기 전에는 "백인 하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인데, 하딩의 one drop rule에 따르면 흑인인 연고로 인해 저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근데 하딩 흑인설도 이미 사장된 설이다.
  • 대통령 재임 시절 예산위원장을 만나면 늘 직접 나와서 악수로 맞아주었다. 그래서 "늘 뵙는 건데 이렇게 직접 나오셔서 악수로 맞아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예산위원장이 말하자 트루먼 대통령 왈, "아니오, 언론을 모르셔서 그런데 내가 이렇게 나와서 맞아주지 않으면 신문에 '대통령이 예산위원장에게 화났다'라고 나올 거요."
  • 대통령 재임 당시 백악관에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기도 했다.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만년필이 엉뚱한 곳으로 가있거나, 잠을 자려고 할 때 옆에서 사람이 혼잣말 하는게 들린다던가, 에이브러햄 링컨 귀신을 마주쳤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한성깔 하시는 분답게 백악관 내부를 모두 불도저로 밀어버렸고, 그후에는 귀신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66] 사실 과학적으로 귀신 이야기가 말이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백악관의 보수공사를 위한 예산을 타내려고 귀신 이야기를 꺼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다짜고짜 보수공사 얘기를 꺼낸다면 치적 쌓기용 혈세낭비 운운하는 소리가 나왔을 테니까, 귀신 핑계를 댄 것이다. 2층에 놓아둔 피아노 다리가 바닥을 뚫고 1층 천장에 삐죽이 나왔을 정도였으니, 폴터가이스트 핑계로 일부를 밀어내고 재건하지 않았다면, 백악관 전체가 무너지는 참사가 났을지도 모른다. 이 때 백악관은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싸그리 철거한 뒤,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만들었다.
  •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소유 재산이 제일 적은 대통령이다. 반면, 소유 재산이 제일 많은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이다.
  • 부통령-하원의장-상원 임시의장[67]-국무장관... 순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미국 대통령 승계서열을 확립한 장본인이다. 그전까지는 하원의장과 상원의장이 승계서열에 없고 부통령 다음이 바로 국무장관이었다.
  • 이 사람 재임기에 한반도가 광복을 맞았고,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지도자 자리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남북한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 남북 전쟁 이후 민주당 대통령 중에서는 처음으로 살아생전에 후임 민주당 대통령을 맞이한 인물이다. 남북전쟁의 저주 탓인지 민주당 대통령들은 거의 살아생전에 후임 민주당 대통령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68] 그가 살아있는 동안 존 F. 케네디린든 B. 존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케네디도 임기 중 암살당하고, 존슨 역시 지미 카터 당선 이전에 사망하여 징크스가 유지되는듯 했으나 지미 카터가 역대 최장수 대통령이 되면서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의 당선까지 지켜보게 되었다. 다만 여전히 정상적으로 취임-정상적으로 퇴임-정상적으로 취임한 후임자-정상적으로 퇴임한 후임자는 여전히 없다. 하필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JFK 모두 임기중 사망했고 카터, 클린턴은 후임자가 공화당이었다. 만일 바이든 후임자가 민주당 소속이 되면 남북전쟁 직전인 피어스-뷰캐넌 이래로 160년 정도만에 민주당은 전임자와 후임자가 정상적으로 취임 및 퇴임하게 된다. 그러나... 하필이면 전임자인 공화당 소속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되어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9. 대중매체에서

  • <맥아더>(1977년 더글라스 맥아더의 전기영화)에서는, 6.25 전쟁의 수행 방식을 둘러싸고 맥아더(그레고리 펙)와 대립하는 모습이 부각되어 나온다. 이건 실제 역사이긴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맥아더인 관계로 트루먼은 맥아더의 승리에 열폭하거나 사사건건 발목잡는 인물처럼 묘사되었다.
  •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에서는 44년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민주당이 민주당과 입헌당으로 분열할 경우 다음 1948년 선거 경선때 입헌당 거르고 민주당쪽 후보에서 선택 가능한 대통령 후보로 등장한다.
  • Hearts of Iron IV/TNO에서는 필립 하트가 대통령에 당선될 시 국무부 장관으로 등장한다. 참고로 이 세계관에서 트루먼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69] 현실과 같이 대외 강경파 성향으로 나오며, 고령의 나이 때문인지 현실처럼 1972년에 죽고 헨리 키신저로 대체된다.
  • 아버지의 깃발에 등장한다. 아이라 헤이즈, 존 브래들리, 레니 개그넌과 악수를 나누며 모금 활동을 독려한다. 배우는 데이비드 패트릭 켈리[70]인데 꽤 싱크로율이 좋은 편이다. 캐스팅을 제법 잘한 편.
  • 에이틴 어게인(1988년 영화)에서 손자 데이비드의 몸으로 들어간 81세 잭은 해리 S. 트루먼에 대해 배우는 미국사 수업에서 직접 만나기도 했던 트루먼에 대해서 줄줄히 읊는다. 영화상 설정이지만 잭은 심지어 미들 네임인 S가 실제로는 그냥 S가 아니라 세르게이였고 이를 개인적으로 들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여자친구 로빈이 데이비드(사실은 잭이 몸에 들어갔지만)에게 관심을 크게 가지는 계기가 된다.
  • 울펜슈타인 시리즈(나치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대체역사게임)에서는 마지막 미국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신문기사에서 더는 인명피해를 초래할 수 없어서 항복했다고 한다. 생사는 불분명하나 로스웰 UFO 추락사건이 패색이 짙은 연합국을 돕기 위해 다트 이슈드라는 비밀결사 집단에서 미국측에 기술을 전수해주려는 눈속임으로 보아 정황상 미국 저항군측 지도자가 이 사람으로 추정된다. 최신작 뉴 콜로서스 기준 미국이 나치에게서 해방된 만큼 고전시간대의 FDR 포지션을 트루먼이 이어받을 듯 하다.
  • 이상한 선생님(채만식의 소설)에는 '돌멩이' 양반이라고 언급된다. 트루먼이->도루만이->돌멩이 식으로 변형된 발음이다.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스웨덴 소설)에선 주인공인 알란 엠마누엘 칼손과도 친분을 쌓는다. 영화판에도 당연히 등장하는데 실제 나이보다 좀 젊은 인상에 뭐랄까 좀 허영에 찬 인간으로 등장한다. 하원 의원이 아니라 칼손과 술을 마시다가 루스벨트의 죽음을 듣고 칼손에게 미합중국 대통령에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며 자신의 라이터를 주곤 퇴장하는데 원작 소설에서의 후일의 행보는 다 편집됐다. 영화 버전 자체가 소설에 비해서는 고증을 많이 포기한 부분이 많아서..
  • 트루먼 전기(HBO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존 애덤스>의 원작자 데이비드 매클로가 쓴 전기)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이 전기를 원작으로 게리 시나이즈[71] 주연으로 TV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포스터 오른쪽 밑부분은 항목 상단에도 있는 트루먼이 시카고트리뷴의 오보를 들고 있는 모습을 재현해 낸 것.
      파일:external/ia.media-imdb.com/MV5BMTUwNjc2MTg2NF5BMl5BanBnXkFtZTcwODQzODgyMQ@@._V1_SY317_CR11,0,214,317_AL_.jpg
  •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앤디 앤드루스가 쓴 "우화의 탈을 쓴 자기계발서")에서 천사장, 링컨 대통령, 솔로몬 왕보다 더 먼저 등장한 트루먼은, 주인공이자 60년 뒤의 미래에서 타임슬립해 온 40대 백수인 데이비드 폰더에게 자기의 좌우명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72]에 바탕한 충고를 해주어 책임감을 북돋워준다.
  • 퓨처라마에서 머리가 아니라 몸이 나온 몇 안 되는 미국 대통령 중 하나인데 로스웰에서 어떤 외계인이 발견되자[75] 이 외계인을 51구역으로 보내고, 때문에 거기서 찍던 달착륙 조작영상을 못찍게 되자 NASA를 만들고 진짜로 달에 사람을 보내라고 지시한다. 이후 조이드버그를 구출하러 온 프라이와 릴라를 보고 루즈벨트의 유령 맙소사를 외치며 기겁한다. 게다가 구출 과정에서 조이드버그의 방광을 얼굴에 맞는 굴욕을 당한다.
  • <히로시마>(199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일본, 캐나다가 공동 제작한 TV영화)에서는 케네스 웰시가 트루먼 역을 맡아 매우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루스벨트의 갑작스런 사망 직후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이후 원자폭탄 투하에 이르는 과정을 잘 재현한 작품이다.
    파일:external/o.aolcdn.com/36714_v3_ba.jpg
  • 2023년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게리 올드먼이 연기했다. 실제 성격을 반영해서 오펜하이머를 백악관에서 만났을 때 오펜하이머가 "피를 손에 묻히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자 오펜하이머를 "울보(crybaby)"라고 평가했으며, 다시는 백악관에 오펜하이머를 초대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경멸한다.[76]
    파일:Oppenheimer.Harry S. Truman.gif
  • 왓치맨에서는 로어셰크가 이상적인, 정직하게 벌어먹고 노동하는 인간을 묘사할때 자신의 아버지[77]와 함께 예시로 든 인물이다. 로에셰크가 비정상적이고, 극우에 반공주의자이지만, 마음 한편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인간이란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
  • 바탈리언(영화)에서 전화를 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좀비들이 나오자 인간쪽에서 지금 미국 대통령이 누구냐고 묻자 이미 죽은지 한참된 좀비들은 해리 트루먼이라고 답변한다.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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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전과 같다면 그의 임기는 한달 보름 뒤인 3월 4일에 끝나야 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이는 1933년 2월 6일에 발효된 수정헌법 20조에 따라 조지 워싱턴이 퇴임 이래(1797~1933) 136년간 계속 같은 날(3월 4일)로 유지되던 대통령, 부통령의 취임식은 이로서 모두 1월 20일 정오가 되면서 그도 마찬가지로 부통령 취임을 1월 20일에 했기 때문이다. 존 낸스 가너가 수정헌법 20조에 따라 1941년 1월 20일 퇴임하면서 루스벨트의 2, 3선 러닝메이트 헨리 A. 월리스와 트루먼 모두는 1월 20일에 취임하고, 퇴임했다. 즉, 트루먼 이후로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1월 20일에 취임과 퇴임을 하게 되었다.[2] 역대 미국 영부인 중 가장 장수한 영부인이다, 향년 97세 247일.[3] 현재 명칭은 William Chrisman High School.[4] Spalding's Commercial College.[5]미주리 대학교 캔자스시티 캠퍼스 법학대학원,[6] 1차대전 시기 대위까지 진급하고 예비역으로 전환 후 대령까지 진급[7] 고령으로 인해 말년에는 172cm 정도로 줄었다.[8] 직역하면 “모든 책임은 여기(집무실 책상)에서 멈춘다.”. 트루먼의 좌우명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다.[9] 어린 시절부터 포커를 좋아했던 해리 트루먼은 포커 용어를 좌우명으로 사용하였다. buck은 미국의 옛 포커 테이블에서 누가 딜러인지 표시하기 위해 테이블에 돌아가며 꽂아 두던 사슴뿔 나이프를 말한다.#[10]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윤석열의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도 해당 명패를 그대로 본 딴 명패가 놓여 있다. 여담으로 그 명패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이다.[11] 정확히 말하면 유엔 안보리파병 결의안을 상정해서 통과시켰다.[12] 하지만 잭슨은 아웃사이더 출신이긴 해도 자수성가한 어마어마한 재력가였다. 미국 대통령 보유 자산 순위 4위라는 최상위권에 랭크 중이다. 반면 트루먼은 보유 자산 순위가 꼴찌다(…).[13] 그 외 초임 '러닝메이트'가 아닌 후임자 부통령, 대통령직 승계, 재임 당시의 낮은 인기 등 제럴드 포드와도 흥미로운 공통점이 많다.[14] 실제 중서부 출신 대통령은 이 두 명 밖에 없다. 다만, 트루먼은 제럴드 포드와 달리 재선에도 성공했고, 굵직한 정치적 결단들을 통해 미국 역사, 더 나아가 세계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는 차이가 있다.[15] 아일랜드 섬에 정착한 스코틀랜드계 주민. 현재도 북아일랜드의 개신교도들 상당수가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사람의 후손이다. 이들 중 일부가 다시 미국에 이주해서 상당수가 정착했는데 이들을 Scotch-Irish American이라고 한다. 해리 트루먼도 Scotch-Irish American이다. 참고로 스카치 아이리시라는 표현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구닥다리 표현이라 쓰이지 않고 대신 Ulster Scots라고 부른다. 현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Scotch를 스카치 위스키버터스카치 등 스코틀랜드와 관계된 먹을거리에 한정해서 쓰는 경우가 많고 스코틀랜드계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반면 미국에서는 옛 용법이 남아 Scot(s)나 Scottish와 동일한 의미로 쓰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16] 사적인 편지 등에서는 S 뒤에 점을 찍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소년 시절 트루먼을 존경해 그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사람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 중에 트루먼에게 이에 관해 편지로 질의한 결과 '점은 찍어도 되고 안 찍어도 됩니다.'라는 답변을 받았던 경험을 공개한 바 있다. 물론 그 역시 트루먼의 미들네임이 S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글에서는 단 한 번도 트루먼의 S 뒤에 점을 찍지 않았다.[17] 물론 미국의 거의 모든 대통령들은 한 번쯤 안경을 쓴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공식 이미지로서 안경을 쓴 이미지가 남은 대통령은 윌슨과 트루먼 정도. 거기에 더 더해도 시어도어 루스벨트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정도 뿐이다.[18] 다른 비슷한 사례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존 F 케네디는 군대에 갈 수 없는데도 가문빨미합중국 해군장교로 입대했다. 이때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분위기와 다르게 진주만 공습에 대한 분노로 미국의 청년들이 앞다투어 군에 자원하는 분위기이긴 했다.[19] 여담으로 트루먼의 장교 임관은 부대원들의 선출로 이뤄졌고 상부에서 이를 추인한 형식인데.. 기록을 보면 주방위군의 경우 전간기까지 시행한 듯 하다. 투표로 부대의 간부진(부사관, 장교)을 뽑는 것은 프랑스 혁명 때의 국민 방위군이 시초로, 이를 참고한 미국은 1800년대부터 대규모 전쟁(미영 전쟁, 멕시코 전쟁, 남북 전쟁, 미서 전쟁)에서 군대의 규모를 늘려야 할때 당대의 관료제 열악과 미국 특유의 민병대 문화의 영향으로, 특히 의용부대 소속으로 투표로 선출된 장교들을 1차대전까진 추인했다.[20] 이후 법대 야간 코스를 시작했지만 중도에 포기했다.[21] 트루먼은 재임기간 뉴딜을 한층 강화한 "페어 딜(Fair deal)"로 사회보장정책과 완전고용을 완수하였다.[22] 정작, 그는 루스벨트 사후 대통령이 되어 전쟁을 매듭지었지만 냉전의 시작으로 군축에는 실패했고, 결국 군축은 한국전쟁 종전을 공약으로 제시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가서야 실행된다.[23]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이 일화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24] 항복조건도 어처구니 없는데 천황제 유지를 지키기 위해 내건 조건이 1.천황제 유지, 2.중일전쟁 발발 이전 만주/조선의 식민지 지배권 인정, 3.무장해제 및 전범 처리를 자국이 할 것 등등 패전을 눈앞에 둔 국가가 너무 뻔뻔한 항복조건을 내세운 것이다.[25] 근데 이 마셜플랜 덕에 서유럽은 완전히 친미국가가 되었고 종전 이후에도 미국의 서유럽 영향력은 상당한 편이다.[26]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 그 외 테네시에서 불충실한 선거인단 1명이 나왔다,[27] 사실 FDR 시기도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등이 이쪽으로 유명세를 떨치긴 했지만, 뉴딜 시기 민권운동은 노동 분야가 더 돋보였다.[28] 사실 저 때 공화당 역시 아이젠하워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시도했었다. 정치 성향과는 상관없이 저 당시에는 아직 아이젠하워가 정계 진출 의지가 없었다는 이야기. 게다가 아이젠하워는 후일 공화당 주자로 출마해 대통령이 되는데 사실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의 러브콜에도 군인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며 거절하고 있었지만 공화당에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20년 이상 집권하는데 막는데만 도와달라"는 말에 고민하다가 받아들였다. 사실 아이젠하워의 정치적 성향은 민주당에 가까웠지만 공화당측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어서 공화당 주자로 나왔다.[29] 여론조사와 별도로 선거인단 제도에서도 트루먼은 우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언론은 듀이의 승리를 예측했다. 트루먼은 전국적으로는 듀이보다 4.5%를 더 득표했지만, 78석이 걸린 오하이오, 일리노이, 캘리포니아에서 1%도 안되는 격차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월리스가 유독 4.7%를 득표한 상황이었다. 이 세 주의 격차였던 2만 9천표만 뒤바뀌었어도 대선은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났을 것이다.[30] 해군장관 시절부터 육군/해군부를 통합하는 안에 기겁하던 것을 초대 국방장관으로 내정하여 겨우 진정시켰던 것이고 트루먼이 해군을 등한시하자 1948년 대선에서 제임스 듀이 공화당 대선후보와 비밀리에 짝짜꿍을 했다가 선거 몇 주 전 그 일이 들통나서 트루먼이 재선 후 2기 내각을 구성할 때 해임해버렸다.[31] 이후 포레스탈 장관의 헌신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이 명명되었다.[32] 물론 타당성 여부를 떠나 항명까지 해대는 해군 자체의 기를 죽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33] 미군의 각군 원수 계급 진급자는 종신 복무가 보장된다. 이 때문에 트루먼의 후임 대통령인 육군원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도 출마 후 전역, 대통령 퇴임 후 예비역 재소집이라는 방식으로 대통령에 재직했다.[34] 90세를 넘긴 대통령은 지미 카터, 조지 H. W. 부시,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존 애덤스, 허버트 후버 이렇게 6명이다.[35] 트루먼의 재임시기에 대통령의 3선 금지가 헌법에 성문화되었으나 '개헌 시점의 현직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적용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3선 도전이 법적으로는 가능했다. 1선 후 재출마를 포기했거나 재선에 실패했다면 정치판 속성상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이지, 이론적으론 나중에 다시 도전해서 당선만 된다면 한 번 더 할 수 있긴 하다.[36] 스토아 철학이란 의미인데, 흔히 극기, 인내로 번역된다.[37] 현재로는 윌리엄 크리스먼 고등학교.[38] 철의 장막 항목에 있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연단에서 연설하는 처칠 뒤에 트루먼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39] 수정헌법에서 3선 금지 조항이 추가되었지만, 이 수정헌법이 발효된 게 1951년이라 트루먼이 원했다면 3선에 나설 수도 있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실제 맥아더가 대선에 관심이 있었는지와는 별개로 대신 나온 게 또 다른 전쟁영웅 아이젠하워라 별 반향은 없었지만.[40] 그리스 역시 44년부터 49년까지 공산당과 왕당파(자유진영)의 내전을 겪은 나라다. 즉,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곳이므로 미리 막는다는 뜻이다. 참고로 그리스 내전은 왕당파의 완승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그리스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라고 불린다.[41] 당시의 결정을 두고 그의 정치적 라이벌로 성장한 맥아더를 제거하려는 방편이었다는 비난도 있었다.[42] 중공군을 향한 지나친 과소평가, 원폭 투하 이외의 대안 부재 등.[43]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동시에 서방 진영의 이익 확보.[44] 공산주의 확산 저지[45] 예스맨인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의 말만 듣다가 졸전한 사례 등. 다만 아몬드는 미군 입장에서는 똥별이었을지 몰라도 10만 명 이상을 살린 흥남 철수의 구세주이다. 근데 애초에 아몬드가 잘했으면 흥남에서 철수할 일이 없지 않았을까...[46] 군정 당시 본인의 의지에서 비롯된 철저한 한국 권한 배제 등[47] 핵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핵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워싱턴 군부를 제지하지 않고 같이 고려했으며 맥아더 해임 나흘 전엔 아예 괌에 핵무기 전진 배치를 지시했다.[48] 맥아더는 전술 핵무기의 효용성을 의심했다.[49] 웃긴 건 정작 그 일본 미군정을 이끈 장본인인 맥아더는 일본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트루먼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맥아더를 고의적으로 고평가하는 극단적 보수주의자들도 존재한다.[50] 북한이 트루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즉, 북한에게 있어서 트루먼은 히틀러와 같은 악인으로 평가되는 것이다.[51] 실제로 마오쩌둥이 일본이 중국을 침공해줘서 살려줬으니 고맙다고 했고, 1945년 5월에는 그 보답으로 8년 동안 일본군 상대로 홀로 싸우던 국민당군 상대로, 동쪽에서 일본, 서쪽에서 공산군 즉 양면전쟁을 해줬다.[52] 어쨌든 이런 사실은 감춘 채, 수십년간의 프로파간다 끝에 3000만명을 죽인 자들이 폭격 몇번으로 30만명이 죽고 그마저도 1/3이 강제노역하던 노예들 + 전후까지 방사능 방호 없이 치우라고 노역시켜 희생자들을 바다에 버린 건 쏙 빼먹은 채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하며 동서양에 걸쳐 먹혀들어 가고 있다.[53] 사실 일본은 9월에 미국에 생화학폭탄을 퍼부어 일본에서 개발중인 핵폭탄 2발(니고 연구)를 완성할 시간을 벌여 그걸로 중화민국과 미국에 핵전쟁을 해서 승리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생화학병기 개발 중심지인 히로시마와, 미쓰비시의 노예 공업단지인 나가사키에 대한 핵폭격은 사실 대본영이 항복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대 늦게 잡아도 첫 폭격 이후 항복을 했지, 2발이나 투발될 때까지 항복을 안 한 이유는 핵공격과 무관하고 사실 소련의 8월의 폭풍 작전이 만주에서 성공하자, 이 기세를 몰아 한반도는 무시하고 그냥 그대로 홋카이도에 상륙할 뻔했기 때문이다. 이미 1945년 6월에 독일이 연합국 4개국의 분할 통치 되는 걸 본 일본은 미군을 자신들을 보호해줄 감시견으로 쓰려고 마치 동유럽에서 전쟁범죄를 잔뜩 저지르고 서유럽으로 도주해서 굴라그를 피하려던 나치처럼 국가 전체를 서방으로 성공적으로 도주시킨 셈이다. 실제로 소련과 일본은 1956년까지 공식적으로 평화협정을 맺지 않았다.[54] 대신 당시 한국전에 참전하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장제스의 요구는 묵살했는데, 사실 대만의 국민당 장제스 진영은 한국전이 더 커져 미국이 대대적으로 참전하는 동북아 전쟁까지 확전이 되어야 중국 대륙을 다시 찾을 수 있을거라고 여겼기에 당연히 참전에 적극적이었는데, 반대로 미국은 당연히 그 순간 제3차세계대전인데 그건 감당할 수 없으니 제발 자중하고 대신 중공으로부터 대만은 지켜주겠다는 제스처로 항모전단을 파견한 측면도 있었다.[55] 대통령 후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56] 1945. 4. 12. 전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병사로 대통령직 승계[57]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5년 10월, 맨해튼 계획의 총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가 트루먼에게 "대통령님, 나는 내 손에 피가 묻어있음을 느낍니다.(Mr.President, 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 라고 말하자,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58] 즉 핵무기를 만든 사람은 너지만 투하 지시는 내가 했으니까 더 큰 죄인인 나에게 죄책감으로 찡찡대지 말라는 것이다. 더구나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야 했던 트루먼의 중압감은 당연히 훨씬 무거웠다.[59] 19세기의 경우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고졸이다. 흥미롭게도 그 역시 민주당 출신이며 변호사를 땄다. 또 밀러드 필모어가 고졸 출신 대통령인데 트루먼은 그를 신랄하게 깠다. 항목 참조.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시절엔 에이브러햄 링컨처럼 아예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케이스도 있긴 했다. 다만 당대에도 정치인들은 대졸자들이 많았다.[60] 그렇지 않은 경우는 린든 B. 존슨, 로널드 레이건 정도.[61] 지금도 심한 욕설이지만 이때 당시는 정말 쌍욕 중의 쌍욕이었다. 이 당시에는 '제기랄!'이라고 번역되는 "Damn!"도 욕설로 간주되던 시절이었으니 이건 대통령이 "개새끼"란 육두문자를 쓴 것이나 마찬가지 수준이었다. 하다못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스칼렛 오하라의 곁을 떠나기 전, 자기는 어떻게 하냐고 한 물음에 했던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이란 대사도 이 ”damn”때문에 검열에 걸릴 정도였다.[62] 마거릿 트루먼이 쓴 추리소설 가운데 한글로 번역된 것이 하나 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살인사건'(원제: Murder in the Smithsonian)인데, 1987년에 출판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중고책으로도 구하기 어렵다. 저자명의 국문 표기는 '마가렛 투루먼'으로 되어 있다.[63] 당시 백악관은 수리중이었다.[64] FDR의 4선 이후 제정된 연임 제한 헌법은 트루먼의 경우에는 소급적용이 되지 않아서 이론적으로 트루먼은 루즈벨트처럼 여러 번 재선에 출마할 수 있었다.[65] 실제 아이젠하워는 재임 중에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아이젠하워가 국민들의 지지 속에 상당히 권력이 강했던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대통령이란 자리가 얼마나 어렵고 막중한 자리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발언.[66] 이전에 링컨의 유령을 만났다는 이들의 일화는 대개 평범했다. 윈스턴 처칠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고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은 보고 놀랐으며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은 아예 기절했다.[67] 정식 상원의장은 부통령이 겸임.[68]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재임기에 죽었고, 우드로 윌슨은 퇴임 후 3년만에 사망했다. 윌슨이 죽었을때 대통령은 캘빈 쿨리지였다.[69] 당대 미국인들은 독소전의 패배를 야기한 부하린의 신경제정책과 FDR의 뉴딜이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FDR은 재선에 실패했고, 그 때문인지 아이젠하워가 민주당으로 편입되어 경선조차 이기지 못했다.[70] 이후 존 윅 시리즈에서 ‘청소부’란 이름의 시체처리업자인 찰리역으로 나온 배우. 이 영화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젊었을 적 출연한 영화 워리어, 48시간, 코만도에서는 양아치스러운 범죄자 역을 맡았다.[71] 포레스트 검프에서 댄 중위 역, CSI : NY맥 테일러를 연기한 배우다.[72] 국내 번역판에서는 직역하여 '공은 여기서 멈춘다' 라고 번역되었다.[73] 본인 스스로 나라가 망할 위기가 아닌 이상 대통령 될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74] 원래 역사에서는 아프로디테 계획으로 인해 전쟁중 사망했다.[75] 극비리에 공군 기지를 방문하기 위해 수송기 안 통조림 상자 속에 숨어서 왔다.[76] 손수건을 꺼내 오펜하이머 앞에서 두 손가락으로 들고 흔들면서 비아냥거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인도 핵 투하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으며, 이를 결정한 것은 자신인데 단순히 기술개발을 했던 뿐인 오펜하이머에게 분노를 느낀 것이다.[77] 로에셰크는 폭력적인 미혼모 집안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