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03:34:27

제독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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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해군 제독들이 정권 찬탈을 위해 일으킨 군사반란에 대한 내용은 쿠데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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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포레스탈의 해임과 유나이티드 스테이츠함 건조 취소, 해병대 항공대 폐지 시도4. 반전5. 여담

1. 개요

Revolt of the Admirals.

미합중국 해군의 제독들이 해군의 폐지라고 봐도 무방한 정부의 감축 시도에 대하여 저항한 대규모 항명사태.

'반란'(Revolt)이란 자극적인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실제로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 대규모 항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당시 해군장관 출신으로 해군의 원로로 예우받던 제임스 포레스탈 전 국방장관이 자살함에 따라 해군은 눈이 뒤집혀졌고 제독들은 단체로 들고일어나 파업 수준의 항명을 일으키는 등 당시의 흉흉했던 상황과 분위기를 반영하면 '반란'이라는 단어가 과장이라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을 필두로 미 행정부는 전쟁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불어난 군비를 정상적인 규모로 축소할 필요성을 느꼈다. 정확히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 3기 후반부터 전쟁 이후 군축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미 상원 국방사문위원회에서 활약해 군납비리 150억 달러를 잡아낸 미주리주 상원의원 트루먼을 높게 평가해 단번에 부통령에 지명해 전후 군축때 트루먼이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켰다. 당연히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후 전쟁을 끝낸 뒤 약속한 대로 군축을 진행해야할 상황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미합중국 육군 소속의 육군 항공대미합중국 공군으로 독립하여 위상이 크게 높아졌으며 새로운 전략무기인 핵무기와 당시 기준으로 핵무기 투발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폭격기를 앞세워 전쟁의 패러다임 변화를 꾀하였다. 가뜩이나 군비를 줄이고 싶은데 마침 공군이라는 좋은 대체제까지 생긴 트루먼 행정부는 공군을 밀어주면서 예산을 많이 잡아먹는 해군부 소속의 군사집단(즉, 해군, 해병대, 해군 항공대 등)을 대대적으로 감축하기로 결정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육군의 육군부와 해군의 해군부로 따로 돌아가던 미국의 국방조직은 둘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조지 C. 마셜 미 육군원수의 제안을 계기로 마침내 1947년에 국방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초대 국방장관은 前 해군장관이던 제임스 포레스탈이 임명되면서 해군이 가져가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육군 항공대가 끝내 공군으로 독립하여 육군과 해군이 반분하던 미군의 새로운 축으로 등장하였고 트루먼 행정부는 신생 공군을 밀어주며 해군을 대대적으로 칼질하려고 하였다. 행정도 육군과 따로 운영하며 육군에 휘둘리지 않았던 해군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위기를 느끼게 되었고 트루먼 행정부의 군축을 반대하고 항공모함을 예로 들면서 해군의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포레스탈은 자신의 출신인 해군을 지지했고 따라서 해군의 감축을 주장한 트루먼과 갈등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미국의 입장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유럽전선을 최우선 지역으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물량공세를 집중시켰다. 알다시피 나치 독일은 영국과 스위스나 스웨덴과 같은 중립국 이외의 전 유럽을 점령하고 영국 공략에 총공세를 퍼붓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참전이 결정되기 전에도 자국의 군병력 일부를 '의용군' 형식으로 영국에 파견시켰을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웠고 미국과 유럽은 대서양을 건너면 맞닿은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지척에 위치해 있었으며 U보트가 미국 동부 연안까지 진출해 집적거리는 사태까지 생겼었으므로 이유를 막론하고 반드시 유럽전선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했고 이 유럽전선의 주력이 당연히 육군과 육군 항공대였으니 중요성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해군과 해병대가 주력이었던 태평양 전선은 우선 지리적으로 먼 데다[1] 주요 격전지도 대부분 해상이었거나 태평양 부근의 열도 혹은 인근 아시아 지역이었던 관계로 직접적인 피해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이 컸으며 무엇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 유럽전선에 비해 그다지 중요도가 높지 않다는점도 한몫했다[2]. 태평양이 대서양보다 크고 넓어서 미 본토에 대한 공격에 대해 안전하다는 게 중요한 것인데 대서양은 영미권에선 pond, 즉 '연못'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유럽의 국적 민간 항공사들이 상대 지역을 왕래할 때 보잉 767이나 A330과 같은 중장거리 여객기를 주력 기체로 사용하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지리적 위치로 인해 유럽의 중요성이 컸다. 미국이 아시아를 실질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시기가 1949년 중국의 공산화, 1950년의 6.25 전쟁과 같이 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산과 같이 했다는 점을 보면 당시까지는 유럽이 아시아에 우선했다고 봐야 할 듯하다[3].

3. 포레스탈의 해임과 유나이티드 스테이츠함 건조 취소, 해병대 항공대 폐지 시도

위기를 느낀 포레스탈은 다가오는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공화당의 대선 후보인 토머스 E. 듀이가 승리할 것이라 예상하고 트루먼 몰래 공화당과 접촉해 듀이에게 협력하는 조건으로 차기 정부에서 국방장관 자리를 보장받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선거 몇 주 전에 이 합의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었고 듀이가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던 대통령 선거는 예상을 뒤엎고 트루먼이 승리를 가져가게 되었다. 포레스탈의 배신에 트루먼은 격분했고 때마침 포레스탈의 건강 문제도 언급이 되자 트루먼은 2기 행정부를 행정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49년 3월 31일 위의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포레스탈을 국방장관에서 해임했다. 후임으로는 트루먼의 측근이었던 육군 법무대위 출신 루이스 존슨이 임명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_United_States_keel_laid.jpg

그러던 1949년 4월 23일 미국 해군의 최신형 항공모함이 될 예정이였던 CVA-58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nited States)의 건조가 시작된 지 불과 닷새 만에 취소되었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는 1948년 7월 미 해군이 건조를 주문해 만재배수량 8만 3천톤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정말 초대형 항공모함이었는데 미 해군이 폭격기와 핵무기 시대가 오더라도 자신들은 여전히 유용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핵폭탄 투하가 가능한 폭격기 운용이 가능하도록 일부러 초대형으로 설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존슨이 의회 상임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건조 취소를 지시했다. 이 지시에 해군장관 존 설리번을 비롯해 미 해군참모총장 루이스 덴펠드 해군대장을 비롯한 수많은 제독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존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해병대를 방문해 해병대 항공대의 항공 자산을 공군으로 이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군과 해병대의 반발이 심해지자 이 계획은 취소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설리번 장관과 덴펠드 제독이 해임됐다. 그 와중에 국방장관에서 해임된 후 우울증으로 치료받고 있던 포레스탈은 일생의 숙원이었던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건조까지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하여 5월 22일 해군 병원에서 투신자살하였고 이 밖에도 갖가지 명분으로 해군을 칼질하려는 트루먼 행정부와 여기에 반발하는 해군 사이의 알력으로[4] 마침내 연방 의회에서도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There's no reason for having a Navy and Marine Corps. General Bradley tells me that amphibious operations are a thing of the past. We'll never have any more amphibious operations. That does away with the Marine Corps. And the Air Force can do anything the Navy can do nowadays, so that does away with the Navy.
더 이상 해군해병대를 운영할 이유가 없다.[5][6] 오마 브래들리 장군이 그러는데 상륙작전은 구식이 되었다더라[7]. 더 이상 상륙작전을 할 일이 없으니 해병대는 필요가 없다[8]. 그리고 오늘날 공군은 해군이 할 일을 다 할 수 있으니까[9] 해군도 마찬가지다.
1949년 12월, 미 국방장관 루이스 존슨

이뭐병이란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과격한 발언. 이런 발언이 나올 정도로 당시 미 군부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4. 반전

그러던 1949년 소련의 핵개발이 성공하여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핵으로 싸우다가는 다 죽게 생겼다상호확증파괴의 개념이 대두되어 재래식 무기의 중요성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국회는 항공모함을 건조하겠다는 보증[10]을 해 주었다. 게다가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해군과 해병대의 맹활약이 이어지며 해군의 중요성이 다시 인정받아서 군축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후 해군은 자살한 포레스탈 장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개한 초대형 항공모함 프로젝트를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으로 명명하였고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건조를 취소하면서 생긴 예산을 기존의 에식스급과 미드웨이급의 현대화 개장에 사용하였으며 하이먼 리코버 제독의 주도로 원자력을 함정의 동력원으로 쓴다는 발상을 내놓아 오늘날의 위엄 돋는 원자력 해군화에 성공해 지구상 유일한 세계해군을 이룬다. 깊은 바닷속을 은밀하게 헤집고 다니는 전략원잠에 배치된 삼지창들이 오히려 공군의 ICBM보다도 위협적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는 걸 보면 반세기 전에 존립의 위기에 놓였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때 전략공군사령부를 운영해 핵 투발 수단을 독점하던 공군이 해군의 반격(?)으로 통합전투사령부전략사령부(United States Strategic Command; USSTRATCOM)로 통합되어 해군과 공군 대장이 번갈아 가면서 사령관을 맡는 등 냉전 초기에 비하면 공군의 위세가 많이 죽었으며 예산 조정안에서도 육-해-공군이 33-34-33으로 해군이 가장 많은 예산을 배정 받았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라는 이름이 다시 니미츠급 항공모함 8번함 CVN-75에 붙을 예정이었지만 항공모함에 붙이는 이름이 역대 대통령 이름으로 바뀌면서 하필이면 해리 S. 트루먼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트루먼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두 번 죽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5. 여담

반란 이후 해군 항공대는 미 해군력의 주축으로서 공군을 업신여길 정도로 크나큰 위상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것이 안하무인의 추태로 이어지면서 20세기 말에 큰 홍역을 치르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테일후크 스캔들로, 쉽게 말하면 해군/해병 항공장교들의 집단 성폭력 스캔들인데 이것으로 모자라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여 해군 개혁을 부르짖던 해군참모총장 제러미 마이클 보더[11] 제독을 생트집잡아서 괴롭히고 기수열외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여 보더 제독이 자살까지 했다. 해군 항공대가 반세기 전 포레스탈 장관의 자살과 제독들의 항명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면 1990년대에는 그러던 선배들의 명예에 먹칠한 항공장교들의 추태로 사실상 해군참모총장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제독들의 반란과 테일후크/보더 제독 자살 사건은 모두 대통령에게 항명한 것이었는데 똑같은 항명이었음에도 매우 다른 원인과 성격에서 비롯되어 최고위 간부가 자살하는 동일한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섬뜩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통합 과정에서 해군의 정체성은 지켜냈지만 1958년에 해군참모총장작전권을 박탈당했다. 그 덕분에 Chief of Naval Operation이란 이름에도 불구하고 작전권이 없다.


[1] 핵추진과 같은 장거리 항해능력이 가능한 기술이 개발되기 전이었음을 감안하자. 물론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 서해안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 해군의 상황으로 볼 때 미 서해안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은 적었거나 없었다는 의견이 우세한 편이다.[2] 미 병력 일부가 필리핀에 주둔하긴 했지만 그저 수비대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많았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일부 미 육군 항공대 소속 전투기 조종사들도 아시아에 파견되기도 했으나 몇 안되는 인력이었으며, 그마저도 장제스의 요청으로 파견된 인원이었다.[3] 이후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한 현실을 목격하게 되었고 참전하여 이를 막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에 실패하고 베트남은 공산화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에 닉슨 독트린까지 발표되어 직접적인 군사개입은 자제하는것으로 노선을 변경하지만 북한의 존재와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는 않았다.[4] 실제로 육/해/공군의 홍보와 정치 알력들을 전부 다 언급하면 책 한권은 나 온다. 한국에도 윤영식 제독이 번역한 <제독들의 반란>이라는 서적이 나와 있고 제독들의 항명을 주도했던 알레이 버크 제독의 전기에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5] 오늘날 미군에 있어 해군과 해병대의 위치를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코멘트다. 특히 미 해병대는 분쟁지역에 급파 가능한 '신속 대응군'의 성격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너무나 근시안적 발언이다.[6] 군은 어디까지나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그러므로 설령 정말로 해군과 해병대의 필요성이 낮아졌다고 해도(정말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없애기보다는 예산을 까거나 다른 임무를 주어 평상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7] 물론 브래들리는 이 작전이 나오리란 예측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연합군의 승리에 어떠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안다면 이렇게 말했다는게 의아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땐 육군이 상륙했었으니 소위 모래사장에서 구보 뛸 줄 아는 것 빼곤 알맹이가 없다고 비하하던 육군 내의 시각이 작용한 듯?[8] 상륙의 의미와 개념이 달라졌다. 해군 항공대에도 자체의 수송능력이 있어 MH-53 같은 대형 수송헬기나 V-22 같이 기동성 높고 수용능력이 좋은 항공기를 이용해 상륙함에서 직접 띄워보내는 방식이다.[9] 활동 분야가 다르다. 공군은 일반적인 상공에서 작전활동을 펼치지만 해군은 공해상에서 작전을 한다. 즉 공군은 하늘이 주 작전 영역이지만 해군은 바다다. 더구나 바닷물은 염분이 섞여 있고 그렇기 때문에 바다의 하늘에는 소금기가 섞인 바람이 늘 분다. 해군이 이용하는 항공기는 별도의 방염처리가 되어 있어 해풍을 견딜 수 있지만 공군의 항공기에는 그런 게 없으니 바다에서 활동하기 어렵다. 더구나 해군의 작전 가운데는 적의 잠수함을 탐지, 감시하는 대잠초계란 것이 존재하는데 일반 공군 항공기에 이 임무를 맡겼다간 얼마 못 가 염분이 있는 해풍 때문에 항공기가 고장날 수도 있다. 물론 이건 해상작전에 투입되는 공군기는 방염처리가 된 기체를 투입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기는 하다. 실제로 영국 같은 일부 국가는 해상초계기가 공군 소속이다. 하지만 항공기만 가지고 해군의 주력인 수상함이나 잠수함의 역할을 완전히 대신할 수 없으니 어찌되었든 틀린 말이기는 하다.[10] 특히 하원 군사위원회의 칼 빈슨 의원이 가장 적극적이었고 해군은 이 덕을 잊지 않고 나중에 니미츠급에 칼 빈슨의 이름을 붙였다.[11] 그간 미국해군사관학교 출신이 보임되던 참모총장 자리에 16세의 중졸 학력 이등병으로 시작하여 OCS로 장교가 된 인물이 보임된 것은 위업으로 평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