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07 23:32:34

조지 C. 마셜

조지 C. 마셜의 주요 수훈과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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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gressional Gold Medal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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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1777년1779년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1787년1800년1805년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컵 존스
1813년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1814년, 1848년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컵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1815년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1835년1846, 1847년, 1848년1847년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의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1863년1864년1866년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1871년1873년1874년, 1904년1883년
조지 피보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1890년1900년1902년1909년
조지프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1914년1915년1928년
대령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1929년1930년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들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1938년1939년1940년
조지 코한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1945년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멤버들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미합중국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1954년1955년1956년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들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1960년1961년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1968년1969년1973년1977년
미합중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1979년
중장 아이라 C.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1980년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리오 라이언 대니 토머스
1984년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1987년1988년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1990년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런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1996년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테오도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2003년
대장 휴 셸턴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러시 하이트 박사 조지프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달라이 라마 14세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산수지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브룩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2010년
여성 공군 서비스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100연대 보병 대대
442 연대 전투단
군사 정보국
2011년2012년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대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남녀들 라울 발렌베리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들 미국의 공군 에이스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들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2015년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들 OSS
2017년2018년
밥 돌 래리 도비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들 USS 인디애나폴리스의 승무원 스티브 글리슨
2018년
안와르 사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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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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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1902년1903년1904년1905년
장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윌리엄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1906년1907년1908년1909년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1911년1912년1913년1914년1915년
토비아스 아서르
알프레트 프리트
일라이휴 루트 앙리 라퐁텐 수상자 없음
1916년1917년1918년1919년1920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수상자 없음 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1921년1922년1923년1924년1925년
칼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프리드쇼프 난센 수상자 없음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도스
1926년1927년1928년1929년1930년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수상자 없음 프랭크 켈로그 나탄 쇠데르블룸
1931년1932년1933년1934년1935년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
수상자 없음 노먼 에인절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1936년1937년1938년1939년1940년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로버트 개스코인 세실 난센국제난민 사무국 수상자 없음
1941년1942년1943년1944년1945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코델 헐
1946년1947년1948년1949년1950년
에밀리 그린 볼치
존 모트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
수상자 없음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1951년1952년1953년1954년1955년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C. 마셜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수상자 없음
1956년1957년1958년1959년1960년
수상자 없음 레스터 B. 피어슨 도미니크 조르주 피르 필립 노엘 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1961년1962년1963년1964년1965년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사 마틴 루터 킹 유엔아동기금
1966년1967년1968년1969년1970년
수상자 없음 르네 카생 국제 노동 기구 노먼 볼로그
1971년1972년1973년1974년1975년
빌리 브란트 수상자 없음 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숀 맥브라이드
사토 에이사쿠
안드레이 사하로프
1976년1977년1978년1979년1980년
베티 윌리엄스
마레드 코리건
국제앰네스티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1981년1982년1983년1984년1985년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1986년1987년1988년1989년1990년
엘리 비젤 오스카 아리아스 유엔 평화유지군 14대 달라이 라마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1년1992년1993년1994년1995년
아웅산수지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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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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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로트블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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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1997년1998년1999년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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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금지국제운동
조디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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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트림블
국경없는의사회 김대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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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국제원자력기구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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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유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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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라시 사티아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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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아흐메드 알리 }}}}}}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1940년대)
Time Time Person of the Year 19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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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time_1940.jpg파일:attachment/time_1941.jpg파일:attachment/time_1942.jpg파일:attachment/time_1943.jpg파일:attachment/time_1944.jpg
1940
윈스턴 처칠
1941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42
이오시프 스탈린
1943
조지 C. 마셜
1944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파일:attachment/time_1945.jpg파일:Person Of The Year 1946.jpg파일:attachment/time_1947.jpg파일:attachment/time_1948.jpg파일:attachment/time_1949.jpg
1945
해리 S. 트루먼
1946
제임스 F. 번스
1947
조지 C. 마셜
1948
해리 S. 트루먼
1949
윈스턴 처칠
1920년대1930년대1950년대1960년대1970년대
1980년대1990년대2000년대2010년대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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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C. 마셜의 주요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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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토머스 제퍼슨 에드먼드 제닝스 랜돌프 티모시 피커링 존 마셜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매디슨 로버트 스미스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헨리 클레이 마틴 밴 뷰런 에드워드 리빙스턴 루이스 맥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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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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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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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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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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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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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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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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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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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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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제임스 베이커 로렌스 이글버거 워런 크리스토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제69대 제70대 제71대 제72대
렉스 틸러슨 마이크 폼페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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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포레스털 루이스 A. 존슨 조지 C. 마셜 로버트 A. 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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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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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럼즈펠드 로버트 게이츠 리언 패네타 척 헤이글
제25대 제26대 직무대행 제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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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미합중국 전쟁부장관(육군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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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s_army_ww2.png 제2차 세계 대전 미군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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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
육군 원수
헨리 아놀드육항 | 더글러스 맥아더 | 조지 C. 마셜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육군 대장
오마 브래들리 | 조지 S. 패튼 | 조지프 스틸웰 | 마크 클라크 | 조나단 웨인라이트
★★★
육군 중장
레슬리 맥네어 | 존 리드 하지 | 앨버트 웨드마이어 | 매튜 B. 리지웨이
★★
육군 소장
제임스 밴 플리트 | 커티스 르메이육항

||<bgcolor=#CCC><tablewidth=100%>※ 문서가 있는 인물만 2차 대전기 당시 계급으로 서술함
※ 윗 첨자 : 전사, 육항 : 육군 항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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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s_army_ww2.png 제2차 세계 대전 미군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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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
육군 원수
헨리 아놀드육항 | 더글러스 맥아더 | 조지 C. 마셜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육군 대장
오마 브래들리 | 조지 S. 패튼 | 조지프 스틸웰 | 마크 클라크 | 조나단 웨인라이트
★★★
육군 중장
레슬리 맥네어 | 존 리드 하지 | 앨버트 웨드마이어 | 매튜 B. 리지웨이
★★
육군 소장
제임스 밴 플리트 | 커티스 르메이육항
||<-5><#FFF><tablewidth=100%><tablebordercolor=#cdcdcd> 해군 ||
★★★★★
해군 원수
체스터 니미츠 | 어니스트 킹 | 윌리엄 리히 | 윌리엄 홀시
★★★★
해군 대장
마크 미처 |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
해군 중장
프랭크 플레처

해군 준장
알레이 버크

||<bgcolor=#CCC><tablewidth=100%>※ 문서가 있는 인물만 2차 대전기 당시 계급으로 서술함
※ 윗 첨자 : 전사, 육항 : 육군 항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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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g.blogin.com/blogin_00386449_336803651.jpg
이름 George Catlett Marshall Jr.
(조지 캐틀렛 마셜)
출생 1880년 12월 3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사망 1959년 10월 16일, 미국 워싱턴 D.C.
복무 미합중국 육군(1902–1951)
최종 계급 육군 원수
주요 이력 미국 육군참모총장(1939~1945)
미국 국무부장관(1947~1949)
미국 국방부장관(1950~1951)
주요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제1차 세계대전 이후2.3. 제2차 세계대전2.4. 군인으로서 업적2.5. 정치가
3. 개인사 및 기타

1. 개요

"승리의 설계자(True architect of Victory)" - 윈스턴 처칠
세계 전쟁사에서 위대한 대전략가중 하나로 꼽히며, 그가 구상한 전략들은 제2차 세계 대전뿐만 아니라, 이후 벌어진 냉전에서도 미국이 승리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전후에는 마셜 플랜(1947년~1961년)을 수립, 실행하여 유럽 부흥에 큰 공을 세웠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미 육군의 최고책임자였다. 일선 전쟁에서 실제 전투를 수행한 군사령관은 아이젠하워, 맥아더 장군 등이었지만, 이러한 작전들을 기획, 입안, 지시한 이는 조지 마셜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역사상 유래 없는 전쟁에서 미군 전체의 편제, 보급 등을 비롯한 미군 시스템의 전반적인 기획과 관리를 담당했다.[1][2] 또 합동참모부 안에서 성적이 지랄맞기로 유명한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의 협력을 이끌어내거나, 전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의회로부터 예산 동의안을 얻어내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처럼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참모라는 역할의 특성상 그의 업적은 좀처럼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경우 처음부터 마셜이 이 작전을 구상하고 기획한 후 대통령 등을 설득하여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고 작전이 실행된 후에도 그가 최고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마셜의 이름은 그 긴 나무위키와 위키피디아의 해당 문서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3]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이젠하워에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지휘를 맡기면서 한 말에서 마셜에 대한 루스벨트의 평가의 한 단면이 잘 드러난다.
당신이 워싱턴 밖으로 나간다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소.("I didn't feel I could sleep at ease if you were out of Washington.")[4]
“당신과 나 정도라면 남북 전쟁의 마지막 해에 육군참모총장이 누구였는지 알고 있지만,[5]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소. 그랜트 같은 유명한 장군은 알지만, 누가 최고 책임자였는지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는 50년 후에 조지 마셜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갈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소.”
루스벨트의 예측대로 아이젠하워는 모든 국민이 다 아는 영웅이 되어 나중에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루스벨트는 조지 마셜의 역할과 위대함이 일반 국민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끝내 그를 유명해질 수 있는 자리인 야전 지휘관으로 내보내지 않았는데, 일선 지휘관으로 보내기엔 마셜이 너무 유능했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는 마셜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실로 독일에서 발전된 근대적 개념의 장군참모와 그 정점에 있는 참모총장로써 첫손으로 꼽힐 만한 가장 모범적이고 위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독일 국방군은 비합리적인 조직 체계로 인하여 그 장점을 잘 살리지 못했다. 잘살렸다고 하더라도 장성들 대다수가 전술적 능력에 비해서 대국적 안목이 떨어지는 편이라 한계가 있었겠지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조차 데꿀멍해야 할 정도의 먼치킨. 조용한 인물이었던 오마 브래들리, 아이젠하워조차 마셜에 비한다면 연예인 정도의 진성 히든캐릭터인 인물. 이는 미해군이나 공군도 마찬가지인데 해군참모총장으로서 해군을 총지휘했던 어니스트 킹체스터 니미츠레이먼드 스프루언스와 같은 휘하 일선 지휘관들에 묻혀버렸고[6] 공군참모총장(당시는 육군항공대 사령관)으로 공군을 총지휘했던 헨리 아놀드도 별을 10개(육군 항공대 원수, 공군 원수)나 달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커티스 르메이 등의 야전사령관에 묻혔다. 합참의장 윌리엄 리히 제독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5성 장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알려지지 않아서 갓 입문한 밀덕들은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대다수.

마셜 제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 제도는 영국 탐험가 존 마셜의 이름을 딴 케이스.

2. 생애

2.1. 초기 이력

펜실베이니아주 유니온 타운시에서 태어났다. 1901년버지니아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임관했으며 필리핀을 거쳐서 1917년에는 소령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1보병사단의 작전 및 교련 담당 참모로서 프랑스에 파견되어 1918년에는 유럽 파견군 최고사령부에 근무하며 작전계획 담당 참모로 활약했고, 이후 1919년에는 대령[7]으로 승진, 유럽 파견군 총사령관 존 퍼싱 대장[8]부관이 되었다.

2.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정규 소령으로 복귀했다.[9] 전간기[10]에는 육군성에서 근무했으며, 주로 교련 프로그램의 입안에 종사했다.[11] 또한 국방대학의 교관으로 복무할 때는 3년 동안 국민당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어 1차 국공내전을 직접체험하기도 했다. 이때가 중국이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안타깝게도 마셜은 이후로도 중국에 대한 시각이 이때의 부정적인 경험에서 일신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마셜은 훗날 중일전쟁 당시 참모장으로 비슷한 시각을 가진 스틸웰을 참모장으로 추천해서 보냈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 1923년에는 중령, 1933년에는 대령이 되었고 참모총장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라이벌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후잡질 때문에 좌천당했다. 이후 1935년 맥아더가 물러나기가 무섭게 1936년준장으로 승진하면서 30여 년 만에 을 달았다.

2.3.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에는 소장이 되었고, 9월 1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제15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됐다. 참모총장이 되며 임시 대장으로 승진우왕 굳, 유럽 반격계획(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입안, 지도했고,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연합군이 전쟁에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12]. 1943년에는,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에도 선정되어 명성의 절정을 달렸으며, 1944년 12월 드디어 원수가 되었다. 2차대전 시기 육군 원수 중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닌 인물은 마셜이 유일하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남서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나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원수와는 달리, 소련이 일본을 치게 해야한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소련군을 대일 전선에 끌어들였다. 1945년 8월 9일부로 말이다[13]. 전쟁이 끝난 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 났다.(육군 원수).

1945년 12월에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중국 전권특사로 임명되어 국공내전에 개입하였으나 국공 양당의 갈등으로 성과를 크게 거두지 못하고 귀국한다. 최근엔 국민당의 초반 공세를 중재로 중단시킨 것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에 일정부분 기여했다는 비판도 받는다.[14] 그 이후에 국무장관에 취임했을때에도 대중국정책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극동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듯하다.

2.4. 군인으로서 업적

1939년 2차대전 발발 당시 17만 5000명의 조악한 숫자에 소총이 없어 모형총으로 훈련 중이던 군기 바닥의 군대를 단 6년 만에 830만이라는 잘 훈련된 군대와 12만 9천여 대의 항공기, 4천여 척의 함정, 2천 5백만여 대의 차량, 1억 2천만여 정의 소총,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핵무기 2발을 보유. 전 세계 6만 마일에 걸쳐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병참 밎 보급 시스템[15]을 구축해낸 주역. 괜히 처칠로부터 '승리의 설계자'라는 찬사를 들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성과는 미 의회의 엄청난 반대를 이겨가며 그가 만들어낸 결과들이다.

아이젠하워, 맥아더, 브래들리, 패튼, 몽고메리 등의 연합군 명장들이 거두는 승리에는 마셜이 구축한 전략과 병참/보급 시스템이 뒷받침이 되었으며[16] 그가 쌓아온 시스템은 현대의 미군에게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이젠하워, 브래들리를 발굴, 패튼이 사고쳐도 계속 돌격대장(?)질 할 수 있게 한 양반. 지휘 체계 일원화하는등 수없이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임에도 직접 전장에서 싸운 이력이 없어 정작 졸병대장이라 불린 브래들리한테도 밀리는 겸손함을 보였다. 비슷한 포지션으로 해군의 윌리엄 D. 리히, 어니스트 J. 킹, 육군항공대[17]의 헨리 아놀드가 있는데 마셜을 포함한 이 4인방은 2차대전기 합동참모회의를 주관하고 루스벨트를 보좌하며 실질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직접적인 작전 지휘를 담당했던 킹 제독과 아놀드 장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18]으로 각 군대의 조율과 중재를 맡았던 리히 제독과 함께 병참, 군비 증강, 인사를 맡았다.

그의 업적을 찬찬히 뜯어보면 군비증강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의회를 설득하여 기하급수적인 군비증강과 전시경제체제로의 전환, 총력전 체제로 순식간에 전환했다.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2년까지 총력전체제로 전환에 성공했는데 정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독일은 43년에서야 총력전체제로 전환했으니... 인사 부분을 보면 아이젠하워를 비롯하여 패튼, 브래들리, 공군원수에 오르는 헨리 아놀드가 있고, 리히 제독을 최고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추천한 것 역시 그의 업적.

2.5. 정치가

1947년, 국무장관으로 취임. 이 해 6월 5일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 나중에 「마셜 플랜」으로 알려지는 유럽 부흥계획을 발표했으며(11월 실행), 대 중국정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국무장관에서 물러나서 미국 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했으나 이듬해에는 트루먼의 요청으로 다시 국방장관이 되었다. 문민통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에서는 군인 출신의 경우는 예비역으로 10년 이상 되어야 국방장관으로 임명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사례에서 非 문민 출신(특히 장성급 장교를 기준으로 보면)은 2017년에 제임스 매티스가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오직 마셜이 유일한 특례로 임명되었다. 다만 원수 계급이 종신직이라는 점과 당시 해군과 공군이 예산과 항공전력, 핵무기 등의 문제로 으르렁대던 시기[19]라 이들을 통솔할 리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특례가 인정된 것이었다. 이때 국무장관이 바로 애치슨 라인을 선포한 딘 애치슨이었다. 당연히 6.25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행정부는 국내외에서 호된 비판을 받았고,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을 국방장관에 기용하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그러나 다음 해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장관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3. 개인사 및 기타

군인으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성격도 강직해서 다른 각료들에게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본래 미국을 비롯한 서양 문화권에서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적인 친분을 의미한다. 즉 철저하게 자신을 공적으로 대하라는 뜻이다. 오죽하면 "조지라고 불러도 되겠소?"라고 묻는 트루먼 대통령한테 "아닙니다, 각하. 마셜 장군으로 불러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올 정도...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첫 자리에서는 대놓고 '저는 각하의 말에 한 마디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라고 쏘아붙이거나[20] 대민업무를 수행하던 부하가 사무실에서 불만을 토하자 즉석에서 전역(...) 시켜버리기도 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신념 때문에 투표도 하지 않았고 백악관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사적인 초대도 일체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통령의 농담에도 웃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이런 면모 때문인지 동갑(1880년생)이면서 참전 동기, 심지어 최종 계급까지 같은 맥아더와 비교 대상으로 오르곤 하는데 성격은 정반대. 맥아더와 비슷한 성격에 짬은 딸리던 패튼은 '마셜 장군과 대화하느니 독일군 기갑사단을 상대하는게 쉽겠다' 라 할 정도 였다. 그럼에도 패튼의 능력을 높이 산 마셜은 아이젠하워의 패튼 해임 건의를 반려했다. 패튼의 사례와는 반대로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반기를 들자 맥아더를 해임, 전역시키는 등 철저할 정도로 능력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마셜의 부하들이었던 아이젠하워, 브래들리 등은 마셜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보냈다.

사실 이 사람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진주만의 참극을 연출한 공로가 그것이다. 사실 마셜 장군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21]

그보다는 중국에서 있었던 국공내전을 중재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물론 이것 또한 그가 원해서 했다고 보기엔 어렵겠지만, 그의 중재로 인해 중공군이 크게 강화되고 말았으니......

같은 합참의 구성원이자 해군참모총장이던 어니스트 킹 제독과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었다. 이는 유럽 및 대서양에 중점을 두던 마셜과 태평양에 중점을 두었던 킹의 성향 차이에 기인한 것. 하지만 마셜이 원래 과묵한 인물인지라 직접적으로 말싸움한 적은 드물다. 근데 사실 킹 제독과 사이가 좋았던 인물이 몇 없어서(...)[22]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4형제 중 홀로 살아남은(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제임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미션을 최종 승인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나온다. 배우는 하브 프레스넬.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소재한 NASA의 조지 C. 마셜 우주센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관제센터인 휴스턴 LBJ 우주센터와 발사장인 케이프 커내버럴 케네디 우주센터만큼은 아니지만 로켓 제작과 테스트를 실시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굉장한 인지도를 갖고 있으며 지역의 쏠쏠한 관광자원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1] 아이젠하워, 맥아더, 패튼, 브래들리 장군 등의 공적은 마셜이 보내주는 잘 훈련된 병력, 충분한 장비, 풍부한 물자 등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들이었다.[2] 전후 독일 내부의 편견 가득한 시각에 따라서(특히 독일군 참전 수기의 상당수에) 미군은 약골, 영국군은 그래도 그럭저럭, 소련군은 호적수다. 이런 식의 주장을 독일측에서 자주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프리카 전선 초기 미군은 졸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시체제가 완전히 자리잡은 1944년 하반기부터는 적어도 마셜의 큰 그림이 빛을 발해 전선으로 향하는 모든 미군 병력들이 상향 평준화 되어있었다. 즉 미군에 에리히 하르트만이나 오토 카리우스 같은 장병은 흔치 않더라도 대부분의 미군은 우수한 장비와 보급을 바탕으로 보통의 독일군보다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훨씬 잘 훈련받고 잘 보급받아 강했다. 결국 독일이 1945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한 것도 마셜의 큰 그림이 빛을 발한 것이다. 독일측의 주장과 달리 동부전선 못지않게 서부전선 역시 독일에 다른 쪽으로 막대한 출혈을 강요했다.[3] 사실 이런 케이스는 역사의 책갈피에서 종종 발견된다. 조지 C 마셜의 지휘를 받은 레슬리 그로브스 미 육군 소장은 그 장대한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이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작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하고 실행한 지휘관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적 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맨해튼 계획은 오펜하이머가 책임자고 원폭 투하는 맥아더의 공로인줄 아는 사람들이 꽤 많다. 여담으로 조지 C. 마셜 장군은 성격 까칠한 그로브스를 상당히 아낀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4] Buell, Thomas B.; John H. Bradley. The Second World War: Europe and the Mediterranean. p. 258[5] 남북 전쟁의 마지막 해의 육군참모총장(육군총사령관)은 율리시스 그랜트였다, 루즈벨트가 잘못 알고 있었던 듯, 북군을 지휘했던 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되는 전쟁장관은 에드윈 스탠튼이었다. 대남 강경파였던 그를 링컨의 후임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무리하게 잘랐다가 탄핵소추의 위기에 몰린다...[6] 사실 해군에서는 마셜 장군보다 더한 사람이 한 사람 있다. 어니스트 킹의 이름 때문에 묻혀버린, 어니스트 킹의 상관에 해당하는 최고사령관 참모장 윌리엄 리히.[7] 직위 진급[8] M26 중전차에 이름이 붙은 그 사람 맞다. 조지 S. 패튼 장군의 은사이기도 하다.[9] 전쟁 시기에는 전시 임관도 많았고 장교의 수도 부족했기에 승진이 빨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기에 군축을 단행하게 되는데 많은 장교들을 예편시키거나 전쟁 이전의 계급으로 강등시켜서 수요를 맞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계급 특진 참고.[10] 프랑스의 포슈 장군이 말한 20년간의 평화. 1차 세계대전 종전일부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날까지(1918년~1939년)를 가리킨다. 또 다른 말로는 해군 휴일.[11] 이 때의 경험이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을 빠른 시간 안에 재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12]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연합군 전체를 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다. 스포츠로 바꿔보면 감독(아이젠하워)과 단장(마셜) 같은 사이.[13] 이때 일본에서는 "소련한테 전쟁 물자 좀 얻어봅시다. 이왕이면 내분도 일으켜보고. 안되면 소련한테 평화 회담을 주선해달라고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물론 외교 담당자들의 반응은 "나치하고 편먹었던 우리가 소련한테 물자를 받는다고요? 거기에다 미국하고 소련을 이간질 시키겠다고? 머리에 총 맞았소?"총 안 맞아도 이미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14] 이에 대해선 중일전쟁 당시 추천하여 임명된 참모장인 스틸웰에 대해서도 참고하면 좋다.[15] 나치독일이 독소전쟁기간 내내 광활한 러시아 영토로 인해 병참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과는 극명하게 비교된다. 미국은 우월한 병참능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독일과 태평양의 일본을 상대로 동시에 전 세계의 곳곳에서 양면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꺼려했던 양면전쟁을 미국은 거뜬히 해냈다.[16] 그는 직접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 하려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이 난 상황에서 이 모든 상황을 조율 할 수 있는 전략적 안목을 가진 장군은 마셜밖에 없다며 지휘를 말리기도 했다. 오오[17] 당시 이미 육군에서 반독립하여 실질적인 공군이었다.[18] 최고 사령부는 합참의 전신. 리히 제독은 지금으로 치면 합참의장.[19] 해군 측의 인물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 초대 국방장관이 자살을 했고, 해군청장과 해군참모총장 휘하 수많은 제독들이 사표를 내거나 좌천, 불명예 제대를 각오하며 국방부에 항명하였다. 후세는 이를 제독들의 반란이라 기록하고 있다.[20] 참고로 마셜을 이 일로 루스벨트에게 눈도장을 찍고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된다.[21] 사실 당시 어니스트 킹 제독과 이승만 (진주만 공습 몇 달 전에 《일본 내막기 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써서 일본의 침공을 예언했으나 미국인들에게 비웃음당했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 후 이 예언이 재평가되면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을 제외하고는 미국의 어느 누구도 일본 따위가 미국을 공격하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영국 등에 밀리는 2류 국가처럼 인식되었는데, 그렇다 해도 일본과는 넘사벽의 간극이 있었다. 또한 미국을 방문했던 이들로 인해 실제 미국의 경제력은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구 열강들에 비해서도 월등하다는 결론을 낸 상태였음에도 미국을 공격했다. 당장 연합함대 사령장관(즉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마저도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던 인물이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2] 또다른 합참의 구성원이자 육군항공대사령관(공군참모총장)이었던 헨리 아놀드 장군은 킹 제독과 폭격전략으로 담판을 짓다가 뒷목을 잡았다(...) 또 킹 제독은 수하였던 태평양 함대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과도 의견이 상당히 갈려서 많이 싸운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