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0: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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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58><colcolor=#fff> 미합중국 제13대 대서양함대 사령관
마크 미처
Marc Mitscher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c_Mitscher.jpg
본명 마크 앤드루 미처
Marc Andrew "Pete" Mitscher
출생 1887년 1월 26일
위스콘신 힐스버러
사망 1947년 2월 3일 (향년 60세)
버지니아 노퍽
묘소 알링턴 국립묘지
재임기간 제13대 대서양함대 사령관
1946년 9월 26일 ~ 1947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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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58><colcolor=#fff> 임관 미국해군사관학교
복무 미합중국 해군
1910년 ~ 1947년
최종 계급 대장 (미합중국 해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미드웨이 해전
솔로몬 제도 전역
필리핀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
주요 서훈 해군십자장
훈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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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3. 평가4. 그 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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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 제독으로 태평양함대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했던 인물이다.

2. 일생

2.1. 초기 이력

위스콘신에서 태어났지만 오클라호마에서 자랐고 학교는 워싱턴 D.C.에서 다닌 까닭에 순수하게 위스콘신 출신이라 표현하기는 어려운 인물이다. 어쨌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애너폴리스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했다. 최초 부임지는 태평양 함대 산하의 USS 콜로라도였고 한동안은 수상함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1916년에 해군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면서 정통파 수상함이 아닌 항공 계통으로 빠지며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특히 미 해군 최초의 항공모함 랭글리에 탑승하여 같이 배치된 소위 '개척자'들과 함께 해군 항공대의 기반을 닦았고, 항공모함 새러토가의 비행대장을 맡아 훈련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태평양 전쟁을 불과 몇 달 앞둔 시점에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호넷의 함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호넷은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미처 역시 버지니아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진주만 공습 이후 태평양으로 옮겨왔다.

2.2. 둘리틀 특공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00px-Marc_A._Mitscher_and_James_Doolittle.jpg

호넷 갑판 위의 미처와 제임스 둘리틀

태평양으로 건너온 호넷이 맡은 첫 임무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할 육군 항공대 소속 폭격기가 출격할 수 있도록 일본 근해까지 접근하는 것으로 바로 그 유명한 둘리틀 특공대였다. 항공모함에서 육군 폭격기 B-25가 발진하여 일본 본토를 폭격한다는 다소 황당하게 보일 수 있는 이 계획은 폭격의 전과만 놓고 보면 그리 보잘것 없었지만 미국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일본을 동요시킨다는 프로파간다로서의 목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뒀다. 심하게 데인 일본해군은 미드웨이를 공격하고 이를 요격하기 위해 나온 미 해군 항공모함을 격멸한다는 작전을 수립했다.

2.3. 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은 대승을 거뒀고 일본 해군은 최고의 정예라는 항공모함 4척을 날려먹으면서 태평양 전쟁의 흐름이 뒤바뀐다. 이때 미처는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 휘하에서 호넷을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커다란 흑역사를 하나 남기고 항공모함 부대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당시 미처는 호넷의 뇌격비행대의 지휘관 스탠호프 링 중령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었다. 문제는 링이 부하들에게 평가가 극악이었다는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 직전에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의 비행대 승무원들은 결전에 앞서 배에서 내려 지상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링 중령은 승무원들을 배에 남도록 강요했고 종군기자들이 오면 자신 위주로 취재를 시키는 등의 행동으로 부하들은 그에게 불만이 많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링 중령이 뇌격대를 잘못된 길로 이끌자 그간의 불신과 불만이 폭발하였다. 링 중령의 부하인 뇌격대의 존 C. 월드론 소령이 "Well, the hell with you."[1]라고 하며 뇌격대를 이끌고 그와 따로 떨어져서 단독행동을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뇌격기가 이탈한 이후 와일드캣 편대와 돈틀리스 편대도 연료가 떨어지자 링 중령이 대형이탈을 금지했음에도 무시하고 그냥 기수를 돌렸다. 이 와중에 와일드캣 편대는 귀환 중에 연료가 고갈되어 전부 해상에 불시착하는 촌극이 일어났다. 독자적으로 공격에 나선 월드론 소령의 뇌격대 역시 전투기의 엄호를 받지 못해 일본함대를 공격하던 중 전멸했다.[2]

하지만 평소 링 중령을 신뢰하던 미처 제독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보고서에서 일부러 몇몇 부분은 제출하지 않고 심지어 조작까지 하면서까지 그를 보호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미처의 직속 상관인 스프루언스에게 그게 걸렸다' 규정상 항모의 각 비행대대들은 함장에게 전투 보고서를 제출해야되고 함장은 다시 상급 지휘관에 보고서를 넘겨야 하는데 제대로 제출되지 않았다. 관련하여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정황상 미처가 호넷의 비행전대장인 링 중령을 감싸기 위해 예하 비행대대들의 보고서를 뭉개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덕분에 격노한 스프루언스 제독은 미처 제독을 강판했으며 꽤 오랜 기간동안 그를 불신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처 제독은 링 중령을 끝까지 감싸돌았으며 해군십자장을 수여받도록 추천까지 했다.

문제는 링 중령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호넷의 전과가 아예 없다시피 했으며, 연료 문제로 귀환 도중 불시착하여 미귀환한 항공기가 꽤 많았다는 점이다. 소류는 요크타운 항공대가, 아카기와 카가, 히류는 엔터프라이즈 항공대가 격침시켰으며 호넷의 전과는 없다. 결국 성과도 없이 함재기와 조종사만 잃은 꼴. 스프루언스 제독이 열받은 근본적인 원인도 여기에 있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호넷 항공대가 제 일을 똑바로 했더라면 요크타운을 잃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호넷이 제 일을 제대로 했으면 히류도 운명의 5분 당시에 가라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요크타운이 히류의 공격으로 대파될 일이 없으니까 가라앉을 일도 없게 된다. 링 중령의 판단 착오가 엄청난 결과를 낳은 셈이다.

심지어 요크타운 상실의 여파는 미드웨이 해전의 현장 최고 지휘관이었던 프랭크 플레처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쳤다. 플레처의 상사들은 요크타운 상실의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봤던 것이다. 아무리 부하의 잘못이 상관책임이라지만, 플레처 입장에선 날벼락이었다. 더욱이 스프루언스는 플레처 제독에게 각별했다. 플레처가 미드웨이 전투 도중 자신의 기함인 요크타운이 대파되자 부하인 스프루언스에게 지휘권을 기꺼이 이양하여 배려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스프루언스는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며 미드웨이 해전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고, 스프루언스는 플레처에게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플레처가, 링 중령의 실책 때문에 상부에 찍힌 것이다. 그런 링 중령을 무리한 직권남용으로 공문서 조작까지하며 감싸고 돌다가 걸렸으니, 스프루언스가 미처를 어떻게 봤을지는 뻔하다.

미처의 제독 진급 자체는 미드웨이 해전 직전에 예정된 것이었으므로 해전 이후 미처는 무사히 승진했다. 그러나 해전에서 보여준 그의 인사적 행동으로 인해, 오랜기간 근무해온 항공모함이 아닌 남태평양의 지상기지로 전출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한동안 태평양의 주요 지상기지를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이 시절 미처 제독은 과달카날 전투 직후 캑터스 항공대를 확대 개편한 솔로몬 제도 항공사령관 직위로 과달카날에서 지상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암살을 위한 실무책임자였다. 정확히는 그의 휘하에 있던 육군항공대 P-38 전투기 대대가 작전을 수행했다.

2.4. 일선 복귀

파일:Marc_Mitscher_g236831.jpg

1944년. 기함인 CV-16 렉싱턴에서

훗날 TF 58의 명지휘관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지만 1943년 5함대가 창설되던 시점에는 미국 서해안 항공대 사령관직을 맡고 있었다. 다만 첫 전투에서 항공모함 항공대가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일선에서는 아무래도 미처 제독이 적임자가 아니냐는 의견이 대두됐고, 니미츠 제독이 항공관계쪽 참모들과 장시간 의견을 나눈 끝에 최종결정을 내리면서 마침내 일선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물론 복귀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없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5함대 사령관이 바로 스프루언스 제독이었기 때문이다. 앞선 사건으로 미처 제독을 불신하던 스프루언스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지휘관 교체 결정에 크게 반발했으며 거부의사를 밝혔다. 결국 니미츠 제독은 전임자 파우널 제독을 5함대 항공관계 고문으로 동승시키고 만약 마셜 제도 공습에서 미처 제독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즉시 해임한다는 타협안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처 제독은 이 작전에서 탁월한 항공모함 항공대 운용능력을 보여줬으며 결국 스프루언스 제독의 신임을 받아냈다.

2.5. 필리핀 해 해전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제58기동부대의 지휘관으로 참전,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공격할 것을 주장했으나 고속전함부대의 지휘관인 윌리스 리 제독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어차피 스프루언스는 '사이판, 티니안, 괌을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아 지키라'는 니미츠의 명령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찾아서 공격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미처가 툴툴거리든 말든간에 미군은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지 않았고, 오자와의 일본 항모전단은 미 항모전단을 공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가 칠면조 사냥을 당하고 등뼈가 부러졌다.

아무튼 마크 미처는 요격전이 끝난 후 소원대로 일본 함대를 공격해서 쏠쏠한 전과를 챙겼고, 마술사라는 별명도 얻는다. 그러나 일본 함대가 너무 먼 위치에 있었던 데다, 늦은 시간에 공격대를 투입했기에 공격대는 연료부족과 야간착함이라는 이중고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마크 미처는 결단을 내렸다.
빛을 밝혀라! (Turn on the lights!)
야간에 함재기도 없는 항공모함이 등화관제를 깨고 불을 밝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었지만, 미처의 결단은 수많은 조종사를 살리게 되었다. 다만 항공모함이 아닌 다른 배들도 일제히 불을 밝히는 바람에 조종사들이 구축함이나 순양함에 착함을 시도하다가 불시착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거의 모든 비행기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고, 귀환하지 못한 비행기들도 미처 제독의 지시에 따라 철저한 구조 활동을 진행하여 일부 실종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력을 구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때 작은 개그 에피소드. 마크 미처는 구조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 조종사를 구한 함선에겐 아이스크림을 더 많이 배급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지금에서야 무슨 아이스크림 배급으로 포상을 하느냐 싶지만, 당시 아이스크림은 일반인은 배급량이 제한되어 쉽게 구할 수 없는 우유와 설탕이 대량으로 들어가는 귀한 몸이었고, 금주법의 영향으로 타국에 비해 주류 통제가 심한 미군에서 그것도 항해 도중 술을 마실 수 없었던 해군 장병들에게 있어 술을 대신할 수 있는 최고의 기호식품이었다. 그래서 2차대전 관련된 매체에서는 장병들을 독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장면이 많이 묘사된다. 예를 들면 미국 참전수기 소설 및 HBO의 동명의 미드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공수작전 전날 저녁에는 항상 아이스크림이 나왔다던가, 마찬가지로 HBO 미드 퍼시픽에서 함상 주말 예배가 끝나면 아이스크림을 지급했던 모습, 산호해 해전에서 CV-2 렉싱턴이 침몰할 때 구조를 대기하다가 준사관 한 명이 아이스크림이 창고에 남아있는 것을 깨닫고 침몰하는 와중에 문을 따서 아이스크림을 빼 먹은 사건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배글리급 구축함 DD-392 USS 패터슨은 엔터프라이즈 제10 전투비행단(VF-10) 지휘관인 파일럿 윌리엄 "킬러" 케인(William R. "Killer" Kane)[3] 중령을 구출하자 "우리 비행단장님 몸값은 아이스크림 얼마치입니까?" ("How much ice cream is Killer Kane worth?")라고 보고했다. 물론 이는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기 위한 농담이고, 항공모함으로서는 고위장교였던 케인 중령 몸값(?)에 비해 요구사항이 매우 저렴하여 만족하였다. 이런 공적으로 인해 USS 패터슨은 충분한 양(약 25갤런≒94.64리터)의 아이스크림을 배급받았다고 한다. 당시 구축함의 급양환경이 워낙 열악했기 때문에 구축함 승조원들은 아이스크림 생산설비가 딸린 대형함과 함께 작전에 투입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스크림을 얻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구축함 승조원들의 입장도 이해가 될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정말 절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전이 끝난 후, 미국 본토에서는 스프루언스의 소극적인 지휘에 대한 비난이 일어났다. 미국의 수뇌부들이 보기에는 해전 규모에 비해 대함전과가 작았고,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나구모 함대의 항공모함인 즈이카쿠의 격침도 실패하는 등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았던 탓이다. 미처 역시 스프루언스가 요격전에만 전념하고 일본 함대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며 상관을 신나게 씹어댔다. 미처는 나중에 자신이 너무 과했다고 인정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나 전후에 일본군의 자료를 연구해본 결과, 요격전에 전념한 스프루언스의 판단은 옳았다. 미 해군은 그제서야 스프루언스를 인정했지만, 일반인들은 여전히 스프루언스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 의회는 스프루언스의 원수 진급을 거부하고 만다. 일본 해군의 등뼈를 부러뜨린 명장이 전공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스프루언스로서는 빈약한 전력으로 일본 최강의 함대를 격파하고 태평양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켰는데도 좌천당한 프랭크 플레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프루언스가 자신의 전공을 인정받은 것은 그가 죽은 후, 니미츠 제독의 전기가 출간된 후였다.

2.6. 레이테 만 해전

미 해군의 방침에 따라 윌리엄 홀시 제독이 스프루언스 제독과 교대하여 부대를 지휘하게 되면서 3함대로 이름이 바뀌었고, 미처 제독 역시 5함대 소속이었으므로 3함대의 존 매케인 제독과 교대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처 제독은 중도 인사 교체로 인하여 임기 1년을 모두 채우지 않았으므로 레이테 만 해전까지 이름만 바뀐 TF 38을 지휘한다는 결정이 내려져 교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전이 완료된 후 매케인 제독과 교대하여 후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윌리엄 홀시의 함대는 구리다 함대와 교전한 끝에, 대형 전함 무사시를 격침시키고 구리다 함대를 퇴각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오자와의 항모전단이 미군에게 발견되었고, 그 중에는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항공모함 즈이카쿠가 있었다. 홀시는 구리다 함대가 확실히 도망쳤고, 전쟁에서 항공모함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함대를 북상시켜 오자와 함대를 박살내기로 결정한다. 홀시 휘하의 지휘관들이 이 결정에 우려를 표했으나, 그들의 주장은 모조리 추측에 불과했고 확실하게 홀시를 설득할만한 근거가 없었다. 38.2 임무전대의 지휘관인 윌리스 리 제독도 "오자와 함대는 미끼"라는 결론을 내리고 홀시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홀시는 매케인의 38.1 임무전대를 제외한 모든 함대를 이끌고 북상한다.

이때 마크 미처 제독은 38 임무부대 지휘관이었으며, 38.3 임무전대의 렉싱턴을 기함으로 삼고 있었다. 그의 참모장인 알레이 버크 대령과 비행단장인 제임스 플래트리는 윌리스 리 제독과 마찬가지로 오자와 함대가 미끼라는 결론을 내리고 마크 미처 제독을 깨웠다. 그러나 미처는 홀시에게 보고했냐고 물었고, 그렇다는 대답을 듣더니 홀시의 성격상 본인이 필요할때나 내 의견을 들을 것이라고 답변하고는 도로 자러 갔다.

이후 홀시의 함대는 즈이카쿠를 포함한 오자와 함대의 항공모함 4척을 모조리 격침시키고 진주만의 복수를 이룬다. 그러나 도망가던 구리다 함대는 홀시의 정찰기가 "이제 쟤네들을 경계할 필요는 없겠다"며 철수하자마자 곧바로 U턴을 하더니 레이테 만으로 쳐들어왔고, 미 해군의 2선급 함대인 태피 3과 마주치면서 사마르 해전이 벌어졌다. 상륙부대 지원임무를 주로 맡던 태피 3의 호위항공모함들은 혼비백산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를 악물고 싸우면서 도망쳤다. 태피 3의 구축함 3척과 호위구축함 1척이 호위항공모함이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달려나갔지만, 구리다 함대의 전함들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러나 미군의 플레처급 구축함 히어만이 일본의 전함 야마토와 나가토를 어뢰로 전장에서 쫓아냈다! 함대 기함을 잃은 구리다 함대는 태피 3을 상대로 온갖 추태를 벌인 끝에 해전에서 패배하고 구리다 턴을 시전하며 도망쳤다.

그러나 38.1 임무전대를 지휘하던 매케인은 홀시에게 불만을 품고 소극적 항명을 하느라 제 위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매케인이 홀시의 명령을 준수했으면 구리다 함대는 태피 3을 건드리자마자 38.1 임무전대의 공격을 받고 박살나거나, 매케인에게 쫓겨서 77.2 임무전대가 있는 남쪽으로 밀려난 후 2개의 함대 사이에 끼어서 박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태피 3은 혼자서 일본 최강의 함대와 맞서야 했다. 기적적으로 이기기는 했지만, 레이테 만을 비워두는 바람에 태피 3을 포함한 미군이 엄청난 위험에 빠진 데 따른 책임을 누군가가 져야 했고 미 함대의 현장 최고 지휘관은 홀시였다. 당연히 모든 책임을 홀시가 뒤집어썼다.

레이테 만 해전 이후 홀시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지만,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이런 조짐은 이미 보였다. 스프루언스가 '사이판, 티니안, 괌을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아 지키라'는 니미츠의 명령을 지키느라 요격전에만 전념했다가 온갖 욕을 먹었고, 미 해군은 공개석상에서 스프루언스를 옹호하지 않았다. 홀시 자신도 스프루언스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믿었던 만큼 즈이카쿠를 잡으려고 함대를 북상시키는 것은 당연했고, 그 결과가 사마르 해전이었다. 미처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스프루언스를 비난한 대가가 레이테 만 해전에서 돌아온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 16전대(기함 아오바)는 레이테 섬 돌입에 성공했다. 구리다 함대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태피 3이 패배했다면 레이테 만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태피 3의 승리로 미군 상륙부대가 살아남은 것은 실로 천운이었다.

2.7. 전쟁의 막바지

이오지마 전투를 앞두고 다시 존 매케인 시니어 제독과 교대한 미처 제독은 오키나와 전투에도 참여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나름 유명한 항명 사건을 일으키는데, 원래 기쿠스이 작전에 의해 미군 함대에 전함 야마토 특공을 할 것이라는 통신이 감청된 이후, 레이먼드 스프루언스가 야마토의 처리를 맡긴 함대는 모튼 데요 제독이 이끌던 54기동부대였다. 이 부대는 전함으로 편성되어있어 주로 상륙전때 포격지원과 엄호를 맡았고 아이오와급 고속전함이 아닌 구식 전함 10척으로 편성된 전대였다. 어차피 야마토 특공이라고 해봐야 전함 1대,경순양함 야하기,구축함 8대로 편성된 빈약한 규모라 54기동부대 전력으로도 충분하다는 평가 하에 낭비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스프루언스가 모튼 데요에게 맡긴 것.[4]

그러나 마크 미처는 미드웨이에 참전했던 호넷 함장 출신이자 항모전단 사령관 아니랄까봐 일본 해군의 마지막 상징격인 전함 야마토가 출격하는데 이걸 54기동부대에게 뺏기는게 자존심이 엄청나게 상했는지, 스프루언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멋대로 호넷의 함재기들을 전원 준비시켜서 작전 당일인 4월 7일 오전 10시에 함재기를 출격하게 대기시키고는 당시 참모장이었던 알레이 버크를 시켜 호넷이 야마토를 공격할거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전문을 보낸다. 심지어 버크는 원문 내용보다 더 직설적으로 "Will you take them or shall I?"(당신이 처리할래요? 아님 내가 할까?)라고 보낸다.[5] 뭐 이미 다 엎은거 스프루언스는 승낙했고 미처의 함대가 야마토를 집중공격해 야마토를 수장시킨다.

그 이후의 전투에서는 복수귀가 따라붙었는지 카미카제 공격을 받아 미처 제독의 기함 벙커힐이 대파되는 상황도 직접 경험했다. 이로 인해 기함을 엔터프라이즈로 교체했는데 그 엔터프라이즈마저 카미카제 공격에 피해를 보아 기함을 랜돌프로 옮겨야 했다.

2.8. 죽음

종전 이후 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잠시 8함대 지휘를 맡은 뒤 1946년 대서양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존 매케인 시니어, 윌리스 리 등 미처 제독을 포함한 적잖은 수의 미해군 제독들이 45~48년 사이에 당시 기준으로도 비교적 이른 나이에 타계하는데,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전시, 함상 근무, 지휘관이라는 3중고가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고. 그 이전에 위에서 보여주는 현역 시절 사진만 봐도 일찌감치 왜소하고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것을 보아 허약한 몸이 안 그래도 빠르게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3. 평가

당대 항공기는 카미카제에서 보듯이 순항 미사일과 성격이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탄두부를 조종사의 판단에 따라 분리하여 적을 타격할 수 있다는 점 뿐이었다. 당대의 인식도 실제로 그러하였으며, 영국 해군은 이러한 '항공모함의 항공기는 사거리가 연장된 수상함의 주포'라는 통찰을 바탕으로 항공모함과 전함의 함동 작전을 구상하여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래서, 항공기 공격은 그렇게 사람을 적진에 집어넣었다가 도로 끄집어내는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데다가 그 '사람'이 매우 값비싸다는 특성을 가진 탓에, 항공기 지휘관은 진취적이고 저돌적이지만 부하들을 아껴야하는 성향을 가져야 좋다고 보았다. 미처는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전술 전략적인 면은 특출난 점이 거의 없었으나, 그들의 상사가 구상한 전략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조종사들을 이끌고 격려하는데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상관의 명령서는 거의 읽지도 않고 참모장의 요약보고로 대신했지만, 예하 조종사들의 전투보고서는 꼼꼼히 읽는 것은 물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예사로 소령 계급인 비행대대장을 직접 불러 물어봤을 정도. 심지어 소위 조종사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미처 제독은 미 해군에 길게 남을 큰 악영향을 끼친 사람이기도 하다. 스탠호프 링 중령의 처분을 두고 미처 제독이 보인 행동을 보면 알겠지만 그가 닦아놓은 미 해군 항공대의 '좋은 조종사 리더에 대한 인식'은 더 이상 그런 류의 자질이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게 된 '미사일과 무인기가 날라다니는 현대'까지도 이어져서[6], 테일후크 스캔들이나 드론 조종사에 대한 차별, 혹은 상관에 대한 항명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홀시와 비교하면, 전술가 전략가로서는 크게 뒤쳐졌으나, 인간적인 매력은 비슷하거나 조금 뒤쳐졌고, 그러나 홀시보다 훨씬 군내 정치적인 처신을 잘했다. 홀시는 자신이 이끄는 군대가 '미국'의 군대라는 점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실수를 종종 저질렀으나, 미처는 '인간'의 모임이 조직이고, '성과는 공동으로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분배될 수밖에 없다'라는 통찰을 가지는 부류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7]

4. 그 외 이야기

미 해군은 미처급 선도구축함[8]을 건조하면서 그의 이름을 붙였고, 이 함급이 퇴역한 이후에는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 DDG-57에 이름을 승계했다. 그런데 알레이 버크가 사실 미처 제독의 부관이었다.


[1] 정말로 부드럽게 번역하자면 "네 맘대로 하십쇼." 정도고, 사실 대놓고 직속상관한테 "네 대로 해라"라고 한거다.[2] 그래도 뇌격기들의 필사적인 공격으로 일본 항모와 전투초계기들의 시선을 해상으로 끌어내릴 수 있었고, 이어지는 미군 급강하폭격기대의 공격에 큰 도움이 되었다.[3] 당시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 내 제10 전투비행단 단장이었으며 해군 에이스였다. 해군십자장 수훈, 전후 경항공모함 사이판에 함장을 역임[4] 심지어 스프루언스는 "It's a fair game for TF54."라는 말까지 남겼다.[5] 원문은 대답 안하면 12시에 공격하겠다하는 무미건조한 전언이었다.[6] 이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 전통적인 인간상인 매버릭과 현대에 어울리는 파일럿상인 아이스맨을 보여주는 영화 탑건이다.[7] 하지만 상술한 미드웨이 해전이나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처 제독이 저지른 엄청난 실책들과 정치질을 본다면 그가 정치적인 처신을 잘했는지조차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세 해전이 미 해군과 태평양 전쟁에서 끼친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더더욱.[8] Destroyer Leader, 나중에 미사일 구축함(DDG)으로 재분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