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H. 터너 William H. Tunner | |
본명 | 윌리엄 헨리 터너 William Henry Tunner |
출생 | 1906년 7월 14일 |
미국 뉴저지주 엘리자베스 | |
사망 | 1983년 4월 6일 (향년 76세) |
미국 버지니아주 웨어넥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미합중국 공군 |
최종 계급 | 중장 |
복무 기간 | 1928 ~1960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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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서 태어났고 당시 뉴저지 상원의원 어니스트 R. 애커먼의 추천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928년 졸업 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 해 육군항공단에 지원해 1929년 수료했다. 적7폭격단 제11폭격대대에 배치되었고 수송기쪽으로 옮겼다.랜돌프 비행장에서 교관으로 복무하던 중 질병으로 위기에 빠졌으나 회복 후 복귀했으며 1934년 중위로 진급했다. 이후 파나마에서 복무하다가 대위로 진급했다. 보병학교, 항공전술학교를 수료하고 1941년 소령으로 진급했다. 항공단본부에서 참모, 볼링 비행장에서 인사참모로 복무하던 도중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항공수송사령부 소속으로 로버트 올즈 휘하의 참모로 배치되었고 1942년 중령, 몇 개월 뒤 대령으로 진급했다. 낸시 러브를 채용하는 등 여성을 수송기 파일럿으로 받아들이며 여성항공대파일럿을 조직했다. 1943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인도-버마-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 당시 C-54를 이끌고 황량한 정글지대와 중국에 항공보급을 개시했다. 일명 '험프 넘기'라고 해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물자를 수송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손실이 나왔지만 육로가 차단당한 중국에 물자를 공급한 작전이었다.
전후 귀국해 항공감독관을 지내고 1946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로렌스 S. 커터의 후임으로 항공수송대장으로 있었고 베를린 봉쇄당시 주유럽미공군사령관이자 커티스 르메이의 추천으로 C-54 부대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베를린에 지속적으로 항공수송을 보냈으며 소련의 봉쇄를 푸는데 공을 세웠다.
6.25 전쟁 당시 극동공군의 일원으로 임시수송사령관으로 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 당시 성공적으로 공수부대를 강하시켰으며 이 공으로 더글러스 맥아더가 수훈십자장을 추천했고 1951년에 수여받았다. 이후 제315항공사단장으로 물자와 공수부대를 강하시켰다. 1951년 항공군수사령관을 지냈고 C-141의 개량에 관여했다. 1960년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1983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