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21:58:54

J. 로턴 콜린스

파일:미국 육군참모총장기.png
미합중국 육군참모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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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미합중국 육군참모총장
조셉 로턴 콜린스
Joseph Lawton Collins
파일:1000121299.jpg
출생 1896년 5월 1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사망 1987년 9월 12일 (향년 91세)
미국 워싱턴 D.C.
복무 미합중국 육군
최종 계급 미국 육군 대장
복무 기간 1917~1956
학력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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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중퇴하고 1913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17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17년 4월에 제 22 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917년 5월에 중위로 승진하여 1917년 8월에 임시대위로 승진했다. 그는 포트 씰의 보병병기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17년부터 1919년까지 각지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1918년 6월에 정식으로 대위로 승진해 9월엔 임시소령으로 제 22 보병사단 제 3대대를 지휘하면서 1919년에 프랑스에 주둔했다.

콜린스는 1920년부터 1921년까지 독일 주재군의 부참모장으로 일했다. 1921년에 글래디스 이스터 브룩과 결혼한 콜린스는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육군사관학교에서 화학 교관으로 일했다.

1926년에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 위관코스를 수료한 후 1927년에 포트 씰의 야포학교 상급코스를 이수한 콜린스는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병기 및 전술교관으로 일하면서 1932년에 소령으로 승진해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마닐라의 제 23여단장 부관 및 필리핀 사단의 부참모장으로 근무했다. 1937년에 육군산업대학을 졸업한 후 1938년에 다시 육군전쟁대학을 수료하여 1940년까지 이 대학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1940년 6월에 중령으로 승진한 콜린스는 1941년에 제 7군단의 수석보좌관이 되었다. 1941년에 대령, 1942년 2월에 준장, 3월에 소장으로 진급한 콜린스는 하와이의 제 25보병사단 사단장으로 과달카날 전역에서 일본군과 맞서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전투 후 은성훈장에 수여되었다.

그 후 유럽으로 전출되어 1945년까지 제7군단장에 임명되어 제1군 사령관 오마 브래들리와 함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되었고 프랑스를 해방시킨 후 독일의 본토에 진격해 독일의 항복까지 전투에 임했다. 특히 벌지 전투,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독일군과 혈전을 벌였다. 1943년 당시 47세로 미 육군 장성 중 어린 나이에 속했다.

1945년 4월에 임시중장으로 승진해 12월까지 임시 부사령관 및 육군지상부대 참모총장,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육군정보국 국장, 1949년까지 육군 부참모총장으로 일하다가 미육군 참모총장으로 승진하여 한국전쟁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미육군의 지휘를 담당했다 이후 참모직에서 1953년 휴전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미 육군참모총장으로써 6.25 전쟁을 수행하면서 2번 한반도 전선 시찰을 왔는데, 첫번째는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가 진행중일때 전선을 시찰해 폴 프리먼,존 마이켈리스 대령,랄프 몽클라 프랑스부대 대대장,백선엽 원수등을 만났다. 이후 1951년 1월 1.4 후퇴로 혼란하던 한반도 전선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자원해 한반도 전선을 찾았고, 교통사고로 순직한 월튼 워커 8군 사령관의 후임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이 울프하운드 작전을 수행하는 중 전선을 시찰해 울프하운드 작전의 성과를 확인하고, 중공군의 기세가 꺾였음을 확인하고 워싱턴과 UN 일부의 주장인 UN군 전면철수가 아닌 중공과의 전쟁을 속행해 주도권을 찾아온 뒤 휴전하는 대전략을 확인해 조지 C. 마셜 국방장관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1953년부터 1954년까지 NATO 군사위원회 미국대표로 일하다가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베트남에서 미대사관 특별대표로 취임한 후 다시 NATO로 돌아와 1956년 3월에 대장계급으로 퇴역했다. 콜린스는 1987년에 워싱턴 D.C에서 사망했는데 그는 사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매장되었다.

3. 여담

우주비행사 마이클 콜린스가 조카다.

그의 형제인 제임스 로턴 콜린스 군인으로 일했고 소장까지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