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3:25:34

매카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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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일인가 - 공산주의 하의 미국!"
소련군에게 유린당하는 국민들을 묘사한 미국의 프로파간다 만화

1. 개요2. 배경
2.1. 미국사회주의와 전후 상황2.2. 반공정서의 확산
3. 전개
3.1. 조지프 매카시의 등장3.2. 매카시즘 열풍3.3. 몰락
4. 평가5. 해악
5.1. 스털링 헤이든5.2. 첸쉐썬 박사5.3. 베트남 전문가 퇴출5.4. 중국 전문가 퇴출, 대중 정보망 와해
6. 공산주의자 침공 연극 사건7. 문화계에 미친 영향8. 미디어에서의 매카시즘9. 매카시즘의 피해자10. 재평가?11.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 Ted-Ed '매카시즘은 무엇이고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한글자막 있음)

매카시즘(McCarthyism)은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 전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으로, 의혹을 제기한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상원의원에서 비롯되었으나 실상은 멀쩡한 일반인을 잡는 것이었다. 자신의 혐의를 부정했던 실제 간첩 엘저 히스도 목록에 있었으므로 일반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밑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몇 명이 실제 간첩이었다고 해도 결국 간첩이 아니었던 사람이 월등히 많으며[1] 오히려 대규모로 조지는 와중에 어쩌다 몇이 걸렸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후술될 피해자에 있는 여러 인재들과 간첩 몇을 압박했는데 매카시즘이 과연 유용했을까.

현재에 와서는 지식인들을 대거 숙청하고 문화계를 박살낸 미국문화대혁명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미국 주류 학계나 미디어에서 매카시즘은 "매카시 개인 정치 야망에 의한 광적 선동" 정도로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대부분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근거 없는 무분별한 주장이나 고발을 비판하는 용어로도 사용한다.

인명피해만 봐도 수백 명이 구금되었고 1만 ~ 1만 2천 명이 직장을 잃었다. 심지어 후술하듯 사망자[2]도 2명 나왔다.

2. 배경

2.1. 미국사회주의와 전후 상황

1941년 나치 독일일본 제국이 각각 바르바로사 작전, 진주만 공습을 일으키면서 소련미국은 나란히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자본주의공산주의를 놓고 이념적으로 달랐던 둘이었지만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라는 더 큰 적들을 앞두고 둘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소련과 함께 독일을 물리치면서 미국의 사회주의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반전여론을 주도했던 이들이었지만 2차 대전에는 더 큰 적인 파시즘이 있고 소련과 미국이 동맹국으로 전쟁했기 때문에 미국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한편으로는 독일과 싸우는 소련을 옹호하고 그들의 용맹성을 칭송하는 프로파간다 포스터와 기사를 쓰거나 할리우드에서 소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승전국이면서 본토에 아무런 피해가 없는 미국은 명실상부 최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전시에 가동되었던 경제 체제를 평시로 돌리는 것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군수품은 전쟁이나 그에 대비할 때는 가장 중요한 물건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하등 쓸모가 없는 물건인지라 전쟁이 끝나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군수공장들은 사라지거나 품목을 전환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근로자들이 해고당했으며 남은 근로자나 타 분야의 근로자들도 처우 개선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이 발생했다. 1945년 1만여명의 영화 제작진들이 파업을 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 말부터 1946년 말까지 도합 430만~460만명의 근로자들이 파업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 파동이 벌어졌다. 1945~1946년 파업 파동 이 파업은 이념에 상관없이 전쟁이 끝나면 으레 겪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국의 사회주의의 성장과 자본주의의 위기감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무렵 해외에서도 공산주의의 위협이 대두되고 있었다. 1946년 3월에는 소련이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처칠이 철의 장막으로 빗대서 말하고 국공내전이 발발했으며 한국 등 세계 곳곳에서 분할과 이념갈등이 있었다. 이에 트루먼 행정부는 경제적으로는 페어 딜 정책을 펴는 한편 양대 강국으로 떠오른 소련과 공산주의의 급부상은 전시가 평시로 해제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실제로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는 미국 측에도 공포를 안겼고 미국-소련은 한반도에서 대리전을 치르면서 핵전쟁에 대한 위협은 현실적인 공포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2.2. 반공정서의 확산

1947년 3월, 트루먼은 새로운 대외 정책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세계에 뻗어나가는 소련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터키, 그리스 등에 엄청난 군사, 경제적 지원을 했다. 이런 대외 정책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국내에는 반공 정서가 싹트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미국의 파시스트들의 활동을 조사하고 감시했던 반미활동조사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HUAC)는 공산주의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지금 와서 돌아보면 너무도 냉전스러운 촌극이긴 하지만 애초에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창설한 민주당 뉴욕주 하원의원인 새뮤엘 딕스틴(Samuel Dickstein, 1885~1954) 본인부터 소련으로부터 돈을 받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중립국 미국행 비자를 팔아넘긴 간첩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간첩은 아니고 내통자고 검증되는 기록상 소련한테 돈 받기 이전부터 반공 활동을 열심히 해 온 사람이 신념형 공산주의 동조자는 아니고 그냥 전형적으로 이익에 팔린 기회주의자로 보이지만 애초에 시작부터 미국의 반공 정서를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먹은 소련에게 놀아났다는 소리다.

당시 미국 사회에 뿌리깊이 자리했던 공산권에 대한 괴담과 공포도 매카시즘의 형성에 한 몫 했다. "Reds under the bed"(침대 밑의 빨갱이)라는 프로파간다가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완전히 장악한 1910년대 후반부터 떠돌고 있었으며 노동조합의 연이은 파업도 볼셰비키에 의해 사주된 것이라는 음모론이 확산했다. 그 결과는 매카시즘의 행태와 매우 유사한 좌파-사회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이어져 뉴욕 주의회 의원 중 사회주의 성향을 가졌던 5명이 제명되고 노조의 파업 및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되기도 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1차 적색공포, 매카시즘의 등장을 2차 적색공포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다 1948년 6월에는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고 1949년 8월에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했으며 1949년 12월에는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중국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이동하는 대참사가 벌어지면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공포와 위기감이 극도로 커졌다. 이에 HUAC는 이런 위기감에 더욱 박차를 받아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반공 활동에 전념했다. 매카시가 하도 임팩트가 있기 때문에 보통 매카시즘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의 출발점은 매카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인 1947년 말부터 시작됐다. 1947년 10월, 2차 대전 때 소련에 우호적인 영화를 낸 점 때문인지 HUAC에서 할리우드를 조사했다. 약 40~50명의 영화 관계자들을 조사하면서 11명의 사람들을 최종적으로 남겨 1명을 국외로 추방하고 10명을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 일명 할리우드 10으로, 할리우드에서는 이들에게 어떤 일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48년에는 앨저 히스 간첩사건이 벌어졌다. 앨저 히스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루스벨트 때 여러 정책에 참여하며 출세가도를 달리던 인물로, 1945년에 자수한 공산 간첩 엘리자베스 벤틀리가 넘긴 자료에 히스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 조사를 받았다. 이때 훗날 대통령이 되는 하원의원 리처드 닉슨이 청문회를 주도했다. 히스는 잘생긴 외모와 좋은 말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간첩과 연관이 없다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혐의에서 빠져나갔고 이후 자수한 다른 간첩의 증언을 통해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얄타 회담에서도 동행했던 루스벨트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그가 간첩이라는 사실은 전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3. 전개

3.1. 조지프 매카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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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2월 9일, 조지프 매카시 미 상원의원은 공화당 당원의회에서 "중국공산당에게 빼앗긴 것미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 때문" 이라고 말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3]는 발언으로 관심을 모았는데 이는 반공주의로 긴장 상태에 돌입한 미국에서 화젯거리가 됐다. 그 다음날 매카시는 연설에서 "미 국무부에 57명의 공산당원이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4]

매카시는 1946년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던 인물로, 언론을 이용해 대중들의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재주가 있었다. 그는 이 능력을 이용해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지만 곧 근거 없는 비방에 대한 명예훼손, 경력 위조, 음주 문제 등에 휘말려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런 차에 반공주의 열풍이 들이닥치기 시작해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어 위에서 언급한 연설로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매카시의 폭로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긴장하던 미국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일약 공산주의에 맞서는 애국자로서 미국의 대스타로 떠올랐다.

3.2. 매카시즘 열풍

1950년 6월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6.25 전쟁이 발발하고 같은 해 여름에는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이 발생하면서 매카시의 활동에 제트 엔진을 달아 줬다. 당시 매카시와 HUAC의 활동을 대충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매카시나 고발자가 간첩이나 공산주의자일 것 같은 인물을 지목한다.

2. HUAC는 고발된 사람을 청문회에 소환해 조사한다.

3. 만약 조금이라도 꼬투리를 잡을 만한 의심스러운 증거가 있다면 청문회에서 확증인 것 마냥 쓰여서 공산주의자로 몰아간다.[5] 결국 고발된 인물은 지위나 명예를 잃고 추방되거나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4.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하고 국민들은 공산주의로부터 미국을 지켰다고 환호, 매카시와 고발자는 다른 인물을 지목해 1번부터 반복.

파일:McCarthy060921GettyCROP.gif

이런 식으로 HUAC와 매카시가 서로 돕는 무한동력(?)이 돌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혐의로 체포되거나 심문받았으며 유명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매카시가 등장한 이후 첫 1년동안 HUAC의 공개 청문회에 소환된 인물은 214명이었는 데 반해 비공개 청문회에는 395명이 소환되었으며, 녹취록은 공개 5671페이지, 비공개는 8,969페이지에 육박한다. 거의 하루에 1~2명 꼴로 조사하는 것을 반복했다는 의미였다.

이 과정 속에서 할리우드 등의 영화계는 반공주의적 성격의 영화를 찍어내며 자신의 애국심을 증명하려고 노력했고 미국 공산당 등 사회주의 관련 단체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은 스스로 자신의 활동을 자성하는 수기나 글을 쓰면서 열풍을 피해가려고 노력했다. 이 광풍에 힘입어 매카시는 1952년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하고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자 상원 감사위원회의 위원장이 되면서 더 큰 권한을 얻었다. 그 이전 1952년 대선 당시에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인 리처드 닉슨 상원의원을 포함한 공화당 의원들은 트루먼 행정부가 반공 활동에 불충실하다고 비난하며 색깔론을 펼쳤다.

한편 1952년 대선과 같이 치러진 하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트루먼 정부의 레임덕[6][7]과 끝나지 않는 한국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 힘입어 하원 435석 중 221석을 가져가며 가까스로 과반을 유지했지만, 반대로 민주당은 213석을 얻었다. 하지만 득표율은 달랐는데, 오히려 공화당이 49.3%를 얻고 민주당이 49.8%로 고작 0.5% 차로 앞지르며 득표에서는 가까스로 이겼다.[8] 즉 아이젠하워의 인기와 매카시즘 열풍으로 인한 반공 기조와는 별개로 미국 국민들은 공화당을 절대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당시 매카시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1954년 2월 6일에는 공개 연설[9]에서 무려 루스벨트-트루먼 행정부까지 '반역의 20년(20 years of treason)'으로 몰아세웠을 정도였다.(!) 이는 당시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돌던 흉흉한 소문이 아니라 뉴욕 타임즈 기사로도 남아있는 사실이다. 당시 뉴욕 타임즈 기사

그렇다고 당시 미국 정부가 매카시즘을 방관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삼권분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 백악관도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는 것이 의회, 상원위원회다.[10] 매카시가 대중적 선동을 통해 동력을 얻고 의회에서 반공의 핵심적인 역할을 장악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는 몰락 과정에서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3.3. 몰락

하지만 이런 과정이 몇 년씩이나 지속되자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차츰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매카시에 대한 지지세는 강했고 그는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목하려 했다. 매카시는 점점 그 대상을 확대하다가 나중에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이젠하워 정부도 매카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1953년 10월, 한 공군 장교가 갑자기 강제 퇴역을 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사건의 전말은 어떤 인물이 그 공군 장교를 아버지의 사상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고발했고 군 당국은 해당 장교에게 가족을 고발할 것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고 강제로 퇴역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는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없었다. 억울하게 퇴역당한 장교는 이를 에드워드 머로프레드 프렌들리에게 알렸고 머로와 프레들리는 방송사와 군 당국의 중단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를 용기 있게 보도하기로 결정했다.

이 보도가 알려지면서 철벽 같던 매카시즘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언론은 차츰 정신을 차리고 매카시즘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정치인은 물론이고 소속당인 공화당에서도 매카시를 문제삼기 시작했는데 아이젠하워가 군 장성 출신 대통령임에도 매카시가 군대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카시를 지지하는 여론은 만만치 않았으며 매카시는 미국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머로와 프레들리는 <See It Now>라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매카시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준비한 그들은 1954년 3월 9일에 방송하여 매카시의 주장의 거짓과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비판하였으며 매카시는 공포심을 이용할 뿐이며 우리는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러자 매카시는 머로의 방송에 대한 반박문을 보냈는데 1954년 4월 6일에 방송된 반박문은 머로의 폭로에 비하면 초라하면서 근거 없는 인신공격성 내용이 많았고 결국 여론도 하나 둘 매카시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11]

뒤이어 매카시는 미 육군을 공격하면서 청문회를 열었는데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소속되었던 군을 공격하는 매카시를 보고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1954년 4월 22일부터 1~2달 정도 진행된 이 청문회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적극적으로 매카시에게 대응하였고 먼저 고발을 시작한 매카시 자신이 어느새 청문회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근거 없이 육군을 고발했던 매카시는 육군 측의 조지프 웰치에게 설전으로 대패했다. 더욱이 매카시는 청문회 도중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멸했다. 미국의 전설적인 코미디언 밥 호프(Bob Hope)는 아래와 같은 말로 비꼬기까지 했다.
"Senator McCarthy is going to disclose the names of two million Communists. He just got his hands on a Moscow telephone book."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공산주의자 200만 명의 명단을 공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매카시 의원이 모스크바 시내 전화번호부를 막 손에 넣은 모양이다."

마침내 1954년 12월 2일, 매카시의 비난 결의안이 의결되고 매카시에 대한 견책 결정이 내려지면서 4년간 지속된 매카시즘은 막을 내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12]은 매카시의 비난 결의안이 의결되고 나서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었즘이다."

4. 평가

초창기 매카시즘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6.25 전쟁으로 인한 미-소 핵전쟁 공포의 확산과 '엘저 히스 사건' 등 미국 정부 지휘부를 관통한 간첩 사건을 목격한 대중적 공포를 자양분 삼아 매카시 상원의원이 반공 아이콘으로 급부상하면서 전국적인 여론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공화당의 정치권과 미디어가 동조하면서 국가적인 광풍이 일었고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국가와 흡사한 경직된 숙청 국면[13]이 펼쳐졌다.

매카시즘의 간첩 리스트 실체와 성과는 허위로 밝혀져 결국 매카시 상원의원의 동인도 전국적인 인지도와 정치적 야망을 위한 대국민 블러핑으로 결론이 난 상황이다. 실제로 매카시가 지속적으로 강조했던 "공산주의자 명단"은 끝내 명확하게 공개되지도 않았으며 공개 고발된 공산주의자 중 상당수가 누명이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결국 매카시즘은 무작위 난사 수준의 모함이었던 것은 공인된 팩트이다.

미국에서 암약하던 간첩이 다수 확인된 "베노나(VENONA) 프로젝트 사건"[14]이나 동독 비밀정보국 슈타지(Stasi)의 대서독 스파이전, 베트콩의 대남 간첩 작전 등에서 확인된 적대국가 잠입 스파이전은 모든 이데올로기 대치 전장에서 예외없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러한 간첩들에 대해 매카시즘은 굉장히 무력했고 취약했다. 소련과 공산주의 국가들에 파견되었거나 포섭된 간첩들이 미국과 여러 자유진영 국가들에게서 중요정보들을 빼돌릴 때 정작 매카시 의원과 그에 경도된 이들은 자신의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정치인들이나 과거 좌익 세력과 단순 접촉한 유명인사들, 사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논하던 사회운동가들을 빨갱이 첩자라고 자신들이 세운 제단에서 희생시키는 것에 전념했다.

결과적으로 매카시즘은 매카시라는 허황된 정치인이 정치적인 위기에서 이를 반전시키고자 내세운 허위의 공산주의자 리스트로 전국적인 화제 인물이 되면서 수년간 미국 전역을 혼돈에 빠뜨린 해프닝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 여파가 당시로서는 워낙 전국적이고 파괴적이어서 해프닝을 넘어서 이데올로기가 남긴 희대의 사회적 상처이자 역사적 실책으로 공히 인식되는 것이다. 또 수많은 지식인들과 문화인들이 숙청당한 거나 다름없는 사건인지라 오늘날 미국에서 반지성주의 문제가 화두되고 있는 것도 메카시즘이 영향이 없지 않다.

매카시즘은 현재에도 미국 정치사, 사회학, 역사학에서 대표적 흑역사로 거론된다. 미국판 문화대혁명으로 취급되지만 1966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10년간이나 사회 붕괴 수준으로 진행된 중국의 문화대혁명보다 심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파장이 컸던 데다가 공산주의 독재 국가인 중국과 정반대로 매카시즘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본진인 미국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미국의 사회적 흑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미국이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운 데 비해서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아직까지도 금지어에 가깝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15]

파일:1200x887.jpg

5. 해악

미국이 스스로 생사람을 때려잡고 필요 없는 적을 만들었던 역사. 매카시즘은 정말 쓸모없는 삽질로 미국의 흑역사 정도로 여겨지는데 소모적인 공산주의자 논쟁을 일으킨 것뿐만 아니라 냉전이 시작되는 시기에 대 소련공산권 관계를 극도로 경직시켜 국가 정책에도 실질적인 피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5.1. 스털링 헤이든

스털링 헤이든제2차 세계 대전 당시 OSS 요원으로 자원하여 독일 점령지 유고슬라비아에 잠입해 당시 반독 게릴라를 이끌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지원하는 임무에 종사했고 그때의 인연으로 티토와는 개인적 친분을 쌓게 되어 전쟁이 끝나 귀국한 뒤에도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공산국가의 수장이지만 지속적으로 스탈린 휘하의 패권을 거부하고 단독 노선을 유지하는 등 반소 성향이 상당히 강했던 티토였으니 이 인맥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상당히 믿을 만한 정보망이 저절로 생기는 셈이지만 이 사실이 매카시에게 알려지자 그는 나라를 위해 적지에 단신 잠입하여 작전을 수행하고 은성장까지 받은 전쟁 영웅인데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의 협력자로 매도당했고 결국 누명을 벗기 위해 밀고자 노릇까지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른다.

헤이든은 매카시즘 종식 후 할리우드에서 사실상 쫓겨났지만 그나마 반할리우드감독들인 스탠리 큐브릭,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등이 배역을 줘서 연기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큐브릭은 자신의 장편 데뷔작 《킬링》에서 주연을 맡았던 인연으로 주변의 만류와 고사에도 불구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수도물 불소첨가가 성불구를 만들려는 소련의 음모라는 사이코 광신도 핵 우월론자 잭 리퍼 장군 역을 맡기기도 했다.[16] 헤이든은 죽는 순간까지 이것 때문에 고통에 시달렸으며 티토에게도 의절당했다. 미국은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차 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영국SIS냉전 시기에 동구권 무기의 정보를 얻기 위해 주로 사용한 창구가 유고와 체코였다. CIA가 동구권 무기의 정보를 얻지 못해 발만 구르고 있을 때 SIS는 외교행낭에 넣어간 달러 뭉치로 무기 매뉴얼까지 입수하고 있었던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5.2. 첸쉐썬 박사

본래 중화민국 출신이었고 당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 교수였던 첸쉐썬 박사도 매카시즘으로 인해 중국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전공 분야인 항공우주공학 연구를 금지당하면서 5년간 반 유폐 상태로 지냈다가 6.25 전쟁에서 포로가 된 미군 병사들과 교환되어 중국에 귀국했다. 첸쉐썬 박사는 미국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고 중국의 항공우주공학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될 뻔했던 우주공학 분야를 지켜냈다. 그의 원한이 어느 정도였냐면 미중 국교 정상화 이후 Caltech 출신끼리 만나자고 미국에서 초청했음에도 단칼에 거절할 정도였다. 그는 중국의 우주개발과 핵개발을 주도했고, 중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ICBM을 개발하고 다섯 번째로 인공위성을 발사했으며 핵무기 클럽에도 가입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중국의 핵개발 및 미사일 개발은 중국이 21세기에 패권국가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며 영구적으로 미국의 안보 환경을 악화시켰다.

5.3. 베트남 전문가 퇴출

  • 웨슬리 피셸 교수: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국무부 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웨슬리 피셸 교수는 응오딘지엠미국으로 초청하는 등 미국이 베트남의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미시건 대학의 싱크 탱크 베트남 고문그룹의 프로그램 책임자였지만 전쟁 중반에 반전파로 돌아섰다. 피셸 교수의 경우 당장 본인이 196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대표적인 주전파이자 미국베트남에서 판돈을 점차 키워 나간 것에 직접적으로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 "그러니깐 나도 잘못된 정보를 받았기에 잘못된 판단을 내렸던 거다"라는 식의 자기 변호성 발언이라 볼 수도 있다.
  • 데이비드 마: 베트남 전쟁 사학자인 데이비드 마는 그의 저서에서 베트남 전쟁 개입 이전 미국의 국무부 자료를 보면 막상 베트남 현지의 사정이나 배경은 아예 관심조차도 없이 오로지 중공을 막아야 한다는 편집증적인 집착만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과 베트남의 뿌리 깊은 불신의 역사, 당시 월맹 지도부측의 미국을 향한 유화적 메세지 같은 당장 눈 앞에 뻔히 보이는 정보는 마치 일부러 무시한 양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이에 대한 원인으로 베트남 전쟁 개입 직전 세대에 터졌던 매카시즘 때문에 애초에 얼마 안 됐던, 그나마 미국과 월맹이 일제에 대항해 동맹이었던 OSS 시절부터 베트남과 관계를 맺었던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싹 사라졌던 것을 주목했다.[17] 이는 베트남 전쟁 직후에 벌어진 중국-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이 중국-베트남 관계에 대해 무식했음이 증명되었다.
  • 제프 스타인: 역시 베트남 전쟁 관련 언론, 학술 활동으로 명성을 쌓았으며 현대도 대외 정책 전문가로 활동하는 작가 제프 스타인은 2010년대 현대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 행정부가 베트남 시절과 똑같이 현지의 현실과 복잡한 권력 관계는 하나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주제에 미국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며 이에 따라 삽질성 개입을 반복하는 근시안적인 인지부조화를 미국의 대외정책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은 바가 있는데[18] 이 두 학자들이 베트남 전쟁과 현대 테러와의 전쟁을 두고 한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미국이 비서구권 세계와의 대외정책에서 저지르는 삽질은 구조적이고 의도적인 무지함이 가장 큰 원인이고 이런 반지성주의의 씨앗이 미국 외교가에 퍼진 근원은 매카시즘이 된다. 일이 이런 식으로 굴러갔으니까, 매카시즘은 미국 사회 전반을 아주 개박살냈다. 그 후유증은 50년이 넘은 시점에도 고쳐지지 않았고 미국 사회에 전방위적인 정치개혁이 벌어지지 않는 한 계속 미국 외교정책에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테러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중남미 외교에서도 매카시즘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경우가 많았다. 본래 제3세계였을 뿐인 국가들이 조금만 좌경화한다 싶으면 바로 쿠데타를 조장해 독재정권을 만들어 냈고 이들이 자국민에게 심각한 인권 탄압과 경제개발 실패를 벌이면서 반미, 반서방 감정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5.4. 중국 전문가 퇴출, 대중 정보망 와해

오언 래티모어가 책임자로 있었던 제2차 세계 대전기 미국의 중국통 싱크탱크였던 '중국의 손들'(China Hands)의 구성원 모두 매카시즘 열풍으로 인해 뭐 막상 중국에 대해서는 아는 바 하나도 없는 일자무식 정치인들과 선동꾼들에게 당신들이 일을 똑바로 못 했으니 중국이 공산화당했을 것이다라고 매도당하면서 미국에서 추방당하거나 본인들이 활약했던 업계에서 억울하게 매장당했다. 상원의원이자 상원 대외관계 위원회장이었던 J. 윌리엄 풀브라이트[19]는 완고한 반공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숙청당한 외교관들이었던 존 패튼 데이비스, 존 스튜어트 서비스 같은 사람들을 1970년대, 국회에 다시 초청하여 "당신들은 대중이 받아들이지 못한 진실을 말해서 핍박받았다"고 말할 만큼 대아시아, 특히 대중국 외교와 정보계에서는 확실하게 매카시즘을 통해 위축되었다.[20] 래티모어 못지 않게 당대 중국학의 권위자였던 존 K 페어뱅크 박사는 자기가 속한 하버드 대학교의 라인이 워낙 강철이라 추방은 면했지만 이 사람도 청문회에 종종 끌려갔고 무혐의로 풀려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훼방을 당했다. 위의 매카시즘 옹호자들의 주장과 다르게 오히려 매카시즘 자체가 미국의 안보정보 태세에 큰 해악을 끼친 셈이다.
  • 오언 래티모어(Owen Lattimore, 1900 ~ 1989): 1950년대 이전까지 미국은 물론, 서구권 전반에서 중국유라시아 변경사 최고 권위자였다. 오언 래티모어 교수는 청나라 말기 톈진의 미국인 영어 교사 부모에게서 나고 자라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다. 적백내전과 중국의 대군벌시대, 국공내전으로 개막장 무법지대였던 1930년대 신장 위구르 일대와 몽골, 소련령 튀르키스탄을 직접 수년간 도보로 여행하고 중일전쟁 당시 장개석의 고문으로 일했다. 이미 격동적인 중국 현대사를 몸으로 겪었던 미국인이라서 꽤나 유명한 중국통이다. 순수한 학문적인 명성도 대단했다. 조국에서 쫓겨난 그를 받아준 곳은 영국의 리즈 대학이었다. 이 시람은 리즈 대학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다가 1989년에 사망했다. 특히 이 사람이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몽골원나라-만주청나라 순의 중국 변경사는 아예 이 사람이 독자적으로 설립한 분야이다. 정작 해당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주변 동양 국가들은 당시 학술활동 따위 할 정신머리가 없었고, 이전엔 할 생각도 안 했었다.(...) 특히 서양측의 시각으로 중국사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 그의 저서들을 읽어 보았을 교과서적 위치의 거물 학자이다. 게다가 래티모어 교수의 경우 시기적절하게도 청나라 멸망 이후 청 황실을 통한 동군연합적 성격에 의해 정치적, 민족국가적 의미로 '중국'에게 느슨하게 묶여 있던 내•외몽골, 위구르 같은 많은 유라시아 내륙 중국과 연관된 반유목 집단들이 아직 훗날의 문화대혁명과 무분별한 산업화로 인해 전통사회가 해체되어 버리기 전에 이를 직접 발로 뛰며 연구한 사람이라 다시 반복할 수도 없는 귀중한 연구 자료와 시각을 가진 핵심 인재였다. 오언 래티모어는 일본 제국이 집요하리만치 중국 대륙한반도에서 행한 잔인한 문화말살정책의 실체는 문화적으로 오랫동안 극동의 변두리 국가에 머물러있었던 일본의 열등감에서 나온 산물임을 꿰뚫어 봤던 날카로운 통찰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한편 6.25 전쟁에 관해선 "민족문제에 개입해 봐야 분쟁은 막을 수 없고, 미국은 손해만 볼 것."이라며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내버려두라며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주장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우파 성향의 학자나 정치인들에겐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다만 이런 날카로운 통찰력의 오언 래티모어를 1941년 미국이 장제스의 보좌관으로 임명했을 때 장제스가 오언 래티모어의 의견을 죄다 무시하며 앙숙으로 지내지 않고, 그의 조언들을 받아들였으면 제2차 국공내전은 국민당의 승리로 끝날 수도 있었다.[21] 만약 이렇게 중국국민당이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면 김일성은 애초에 존재할 자리가 없어진다.

6. 공산주의자 침공 연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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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나오는 랄프 유진 크로넨웨터(Ralph Eugene Kronenwetter, 1899 ~ 1950) 시장.
1950년 5월 1일, 위스콘신 주의 작은 마을인 모사이니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침략당했다. 대부분 트렌치코트를 입은 '침략자'들은 모사이니 시장과 경찰서장을 체포하여 침공을 알렸다.

그들은 이 마을의 주요 교차로로 행진했고, 광장 이름을 '붉은 광장'으로 바꿨으며 인민재판을 했다.

수녀들은 체포되어 철조망을 둘러친 '수용소'에 구금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마을 도서관을 장악했고, 대부분의 책을 압수했다. 그들은 지역 영화관에 소련 선전영화를 보여주라고 협박했다.

현지 식당들조차도 햄버거와 콜라, 스테이크를 메뉴에서 빼고 거친 흑빵, 우유, 감자 수프로 대체하도록 강요받았다.

수십 명의 미국인 및 국제 언론인들, 심지어 소련의 국영 언론사인 TASS의 언론인조차도 모사이니 '침공'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 '침공'은 반공주의를 심어주기 위한 연극이었다. 사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 재향군인회 구성원이었다.
이 사건은 모사이니 해방과 지방정부의 복구로 끝났다. 그리고 '침략'을 목격한 언론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에서 제대로 된 기반을 마련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여담으로, 이 일 때문에 랄프 시장은 뇌졸중으로 5일 뒤 향년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시장을 진찰한 의사는 흥분과 피로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현지 재향군인회 지부장이었던 프랭클린 베이커는 "끔찍한 우연의 일치였다."라고 말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침공해 올 경우 성경을 교회 오르간에 숨기는 법을 언론에 시연했던 성직자 Will La Brew Bennett(72)는 '붉은 광장' 근처에 있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리고 5월 7일 밤에 그는 숨진 채로 발견됐다. 시장이 죽은 지 하루 뒤였다.
참고 자료
http://alphahistory.com/coldwar/reds-under-the-bed/
http://m.dcinside.com/view.php?id=war&no=231655
https://mobile.nytimes.com/1950/05/08/archives/mayor-minister-dead-after-mock-red-coup.html?referer=https://en.m.wikipedia.org/
http://archive.is/2fLi4
작성자:granit, 1950년, 미국에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났다! 아카이브 (군사 마이너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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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침공 연극을 하다가 산 사람 2명을 죽인 일까지 있었다. 사실상 백색테러라 봐도 무방한 셈.

7. 문화계에 미친 영향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참조. 이 밖에도 매카시즘 광풍이 불었을 때 게리 쿠퍼[22], 그리고 영화배우 출신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월트 디즈니 등은 미국의 이상 보존을 위한 영화 동맹(Motion Picture Alliance for the Preservation of American Ideals, 일명 MPAPAI)를 만들어 반공 기조를 이어갔다.[23] 앞에서 말했던 스털링 헤이든과 엘리아 카잔은 공산주의 전력자들의 이름을 대는 것으로 압박에서 빠져나왔다.

극작가 리처드 콜린스는 블랙리스트에서 빠지기 위해 HUAC[24]에서 증언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내와 이혼까지 하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매카시즘이 잦아든 뒤 엘리아 카잔은 배신자란 낙인을 찍히고 제대로 영화인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그가 1999년 아카데미상 공로상을 받을 때 할리우드의 분위기는 대단히 험악했다. 물론 존 포드 같이 대놓고 비난하며 맞서던 영화인도 있었지만.[25]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온건 보수주의자들과 공화당 지지자들이 주류를 차지하던 할리우드[26]는 완전히 민주당쪽으로 주류가 넘어오게 된다.[27]

8. 미디어에서의 매카시즘

매카시즘을 풍자나 우회적 묘사 없이 정면으로 소재로 다룬 영화로는 매카시즘과 맞서 싸운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이 있다.

2008년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서 매카시즘 광풍을 희화적으로긴 해도 나름대로 잘 묘사하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를 공산주의자로 모는 FBI, 공원에서 공산주의자를 때려잡자라는 피켓을 들고 단합대회하는 사람들. 다만 영화의 배경인 1957년은 매카시즘이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시점이라는 건 애교로 넘어가 주자.

영화 《맨츄리안 켄디데이트》가 노골적으로 매카시즘에 대한 조롱을 담았다. 스릴러와 인간승리로 포장했지만 원작은 블랙 유머로 매카시즘을 풍자하고 있다. 소설판에서 공산당 간첩을 강조하는 사람의 군대 시절 이야기는 매카시의 그것을 풍자했고 영화에서 그 의원 역시 매카시처럼 알코올 의존증에 포즈까지 흉내낸다. 심지어 영화 중간에 그 의원의 기록영상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건 새로 찍은 게 아니라 매카시의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결말 부분에서 이렇게 반공주의를 외친 사람이 바로 소련의 진짜 첩자라는 게 아이러니다.

영화 트럼보에서는 각본가인 달튼 트럼보가 겪는 고초를 통해 매카시즘의 야만성을 보여준다. 영화 헤일 시저에서는 매카시즘과 미국 내 사회주의자들을 동시에 풍자한다.

밥 딜런의 곡 '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28]는 매카시즘을 풍자한 노래인데 극우 반공 단체 '존 버치 협회'의 회원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 이곳저곳 들쑤시다 자기 자신까지 훑어본다는 내용이다.

TRPG 파라노이아 역시 디스토피아 SF에 메카시즘을 융합시킨 블랙 코미디 TRPG로 인류가 망한 뒤 알파 컴플렉스를 관리하게 된 컴퓨터가 원인규명에 나섰다가 데이터베이스의 오류로 냉전 당시의 자료를 접하게 된 뒤 인류멸망이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판단해 버린 이후에 벌어지는 세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냉전 시대에 일어났던 상당수의 역사적 사건들을 모두 카드화한 보드게임 황혼의 투쟁에서도 등장하며 미국의 매카시즘과 소련의 대숙청을 동급의 대형 이벤트로 다룬다. 매카시즘/대숙청 참조.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서는 매카시즘이 한창이던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주인공 제임스 도노반은 소련 스파이였던 루돌프 아벨을 변호했다가 사람들한테 눈총을 받을 뿐 아니라 손가락질을 당하고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위협을 받게 된다.

마블 코믹스에서의 판타스틱 포의 리더 리드 리처즈의 삼촌은 메카시즘으로 인해 처벌되어 끔찍한 말년을 버림받은 채 보냈고 그를 좋은 눈으로 바라보던 리처즈는 메카시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설정이 있다. 이는 시빌 워 당시 스파이더맨이 리처즈에게 직접적으로 인용하면서 리처즈가 히어로 등록 법안 찬성파에서 후일 빠지는 계기가 된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마다가스카의 펭귄에도 메카시를 풍자하여 '붉은' 다람쥐를 잡는다면서 동물원 동물들을 말도 안 되는 의심으로 고문, 감금하는 록거트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정작 붉은 다람쥐는 동물들 사이에서 화폐 역할을 하는 도토리가 없어서 단 한 명의 부하도 고용하지 못했으며 나중에 겨우 세뇌로 부하 한명을 만드는데 우습게도 록거트 본인이 세뇌당해 부하 노릇을 한다.

2023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나온다. 오펜하이머가 매카시즘에 들들 볶이다가 모함당해 몰락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도 주인공 유진 킴이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호치민에게 전차를 보낸 것을 트집 잡아서 빨갱이로 몰자 해명해 봤자 오히려 본인만 곤란해질것[29]을 안 유진킴이 오히려 메카시를 반공을 핑계로 집권한 히틀러 같다고 평했고 마침 메카시의 밑천이나 진짜 나치 인사들이 미국에 침투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자[30] 오히려 본인이 몰락해서 역사대로 메카시는 정신병원에서 술 마시다가 죽는다. 우습게도 실제 메카시는 나치를 옹호한 전력이 있다.#

더 뷰로: 기밀 해제된 엑스컴은 메카시즘으로 부터 지난 196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지만 작중 사회 분위기는 외계인의 침략과 테러[31] 그 외계인의 습격을 소련의 공작이라고 발표하는 작전지휘국 덕분에 사회분위기가 메카시즘으로 돌아가서 엉망이다. 덕분에 주만들의 녹음 기록을 보면 외계인들을 발견해도 아무래도 소련군이 쳐들어왔나 보다 하고 하는 녹음을 들을 수 있다. 물론 냉전시대다 보니 진짜 소련 스파이도 존재한다.[32]

디스트로이 올 휴먼즈 시리즈는 외계인 영화와 냉전을 웃기게 패러디한 시리즈답게 인간들 생각을 외계 기술로 도청가능한데 생각들 대부분이 속물적이거나 멍청하거나 매카시즘에 찌들어있다. 사회분위기 자체가 우스꽁스러운 냉전시대 풍자가 대부분이지만 더 개그인 점은 가끔씩 시민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진짜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것.[33]

길 위의 연인들 역시 매카시즘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이다. 매카시 본인 역시 등장인물 중 한 명이며, 크리스 바우어가 담당했다. 주인공들이 자색 공포의 희생양이 된다. 여기서 매카시는 본인도 동성애자로 의심되는 행동을 하며[34], 이것이 약점으로 잡혀 같은 편이자 매카시즘의 기수였던 로이 콘과 사이에 균열이 생겨 둘이 사이좋게 공멸한다.

대체역사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소련이 멸망한 세상이라서 그런지 매카시즘이 반공주의가 아닌 황화론인종차별을 기반으로한 사상으로 등장한다.

폴아웃 시리즈는 핵전쟁이 터지는 2077년까지 문화가 1950년대에 정체되어 매카시즘도 수명을 연장해 거슬리는 자들은 빨갱이로 몰렸다. 이쪽도 공산진영에서 소련보다 중국의 영향력이 훨씬 거대해진 세계관이라 인종차별이 덤으로 추가되었다.

9. 매카시즘의 피해자


확실히 매카시즘은 미국의 두뇌를 반쯤 박살냈다. 특히 문화계와 외교계의 피해가 심했다.

10. 재평가?

1995년 기밀해제로 공개된 미-영 간의 러시아어 암호 해독 프로젝트인 "베노나(VENONA)"에 의해 매카시가 공산주의자 및 소련간첩으로 지적한 이들[42]이 당시 정말로 소련의 간첩으로 활약한 사실이 드러나 매카시 상원의원의 지적이 사실이라는 이야기가 돌기는 한다.

그러나 베노나 프로젝트에 의한다고 하더라도(관련 글) 매카시의 '지적'이 재평가 운운할 정도로 미국 안보를 공고히 하였는지는 참으로 의문이다. 실제로 베노나 프로젝트에 있는 명단과 매카시의 명단을 상호 비교해 보면 매카시가 지적한 사람들이 베노나 명단에 있는 경우는 극히 적다.

매카시가 1950년 2월 20일에 의회 Tydings 위원회[43]에 고발한 국무부 직원 108인[44], Tydings 위원회에 추가로 고발한 16인,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연설에서 개인적으로 지목한 기타 인물들을 합한 159인의 실명 명단을 역사학자 존 얼 헤인즈가 VENONA, Elizabeth Bentley의 증언[45], Gorsky memo[46], The Haunted Wood[47] 등과 비교해 본 결과 간첩혐의가 검증되는 인물은 159명중 10명에 불과하였다.[48][49]

매카시의 주장으로 1950년대의 미국 사회가 얼마나 공포에 감염되어 경직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매카시즘을 재평가한다는 것은 황당한 일일 뿐이다.

대한민국에 재평가 운운하면서 나도는 떡밥은 모 교수의 주장과 그가 번역한 미국의 앤 콜터(Ann Coulter)[50]라는 정치평론가의 저서, 그리고 그들을 소스로 한 모 극우 블로거의 포스팅들이 대부분으로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그러한 극우 블로거들은 '누가 뭐라고 떠들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매카시 의원의 발언이 미국 안보에 별 공헌을 못했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며 논점을 흐리는 주장에 불과하다' 면서 '더불어 역매카시즘 때문에 이후 거꾸로 반공주의에 대한 혐오가 미국에 팽배하게 되었고 소련 간첩을 열심히 잡고 신고하는 사람은 변태 취급을 받게 되어 오히려 미국의 방첩망에 큰 장애를 주었다'고 하면서 현대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까지 들먹거리기도 한다. 물론 조금만 생각하면 인과관계를 혼동한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방첩망이 악화되었다면 이는 매카시즘의 부작용이지 매카시즘을 진정시키려는 노력 때문이 아니다. 반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를 불러 일으킨 이유가 매카시 의원의 삽질이었으니까.

당시 국무성에서 일하고 있었고 이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각료가 되는 딘 러스크[51] 장관은 자서전에서 매카시즘으로 훌륭한 중국 전문가들이 희생되었다고 비판했으며 그러면서도 국무성이 매카시즘으로 인해 위축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11. 관련 문서


[1] 이 부분에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볼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이 실수를 만나면 이런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것일까? 한편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에선 공산주의자를 잡기 위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2] 정부 측에 의한 사망자는 아니다.[3] 205명이 아닌 297명이라고 되어 있는 곳도 있다.[4] 이후 그의 공산주의자 명단의 공개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종종 나왔는데, 그때마다 매카시는 "명단을 공개했다가는 출처가 유출된다"고 일축하며 공개를 끄끝내 거부했다.[5] 당연하지만 기소 이후 법정에서는 증거로서 인정되지 않거나 인정되더라도 이후 결과가 뒤집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사람을 선동하기는 쉽더라도 선동된 사람들을 다시 되돌리는 건 선동의 주도자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매카시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지금처럼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 시기에 항소해서 여론을 뒤집는다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든 일이였다.[6] 1951년 11월 16일, 1952년 2월 14일 갤럽 지지율 조사에서 22%를 기록한 적이 있다. 이는 미국 대통령 지지율 중 최저 기록인데, 어느 정도냐면 리처드 닉슨의 사임 직전 지지율이 24%, 대침체 당시 조지 워커 부시의 최저 지지율이 25%였다! 부정평가 최대치도 1952년 1월 6일 기록한 67%였는데, 이 역시 사임 직전의 닉슨의 66%,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당시 도널드 트럼프의 62%보다 높았고, 오직 대침체 당시 조지 워커 부시의 부정평가 최고치 71%만이 트루먼을 이길 수 있었다. 임기 말의 트루먼은 가히 워터게이트 폭로 후 닉슨까지 능가하는 종전 후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던 셈. 심지어 닉슨의 경우는 워터게이트와 은폐 공작으로 낮은 도덕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데다가 사임 시점(1974년)도 제1차 오일쇼크로 경제성장률 -0.5%, 물가상승률 12.3%를 찍은 불황기이기도 했고, 부시와 트럼프 역시 각각 대공황/대침체 여파로 경제적으로 죽을 쒔던 것과 달리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 중 하나를 누리던 상황이던 트루먼이 저 정도 지지율을 기록했다는 것은...(1950~1951년 2년 연속 6% 물가상승률을 찍긴 했지만 경제성장률이 각각 8.7%/8%로 종전 후 미국에서 가장 높았기에 물가상승률을 상쇄할 수준이었다. 참고로 (아이젠하워 시기인) 1955년, 1959년에도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7% 가량 됐고, 1962, 1965, 1966년에도 경제성장률이 6%를 넘겼으며, 이후 미국 경제성장률이 6%를 넘긴 해는 7.2%를 찍은 1984년밖에 없다) 하다못해 훗날 대한민국노태우조차 말년에 지지율이 10%대를 찍을 정도로 민심이 아주 바닥이었는데도 이 무렵(1991년) 한국이 '중진국의 최대'에 진입할 정도로 엄청난 경제적 호황기였던 덕택에 부정평가는 40~50%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대단한(?) 셈이다. 심지어 당시 미국은 90년대 초 한국과도 비교를 불허하여 전후 복구 중이던 서유럽일본을 제치고 1인당 GDP를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3만 달러에 육박하는(영국, 프랑스조차 1인당 GDP가 1960년 기준 2024년 가치로 1.5만 달러 미만이었고, 일본은 아예 5천 달러를 가까스로 넘겼다) 압도적인 세계 1위 부국이었다. 퇴임 1년 전이던 1952년 기준 트루먼의 지지율은 30% 안팎 수준을 맴돌았는데 부정평가는 50%를 넘겼다.[7] 아이러니하게도 트루먼은 집권 직후인 1945년 6월 5일 조사에서는 87% 지지율(당시 부정평가 3%)을 기록해 부시 부자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대통령이었다.(...) 그 다음 조사인 1945년 10월 5일 조사에서는 긍정평가 82%, 부정평가 9%를 기록했으나 그 사이 제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공식적으로는 트루먼도 90%대 지지율을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게 사실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역사상 최고 지지율과 최저 지지율을 모두 기록한 사람은 트루먼이 되는 셈이다.[8] 득표수 차도 고작 248,743표였다. 참고로 이 선거는 1948년 의회 선거 이후 1994년까지 공화당이 하원에서 우세를 점하게 했던 유일무이한 선거였다.[9] 공화당 전국위원회의 후원으로 행해진 8차례의 연설 중 첫 번째로 한 연설이었다.[10] 애초에 상술했듯 공개 연설에서 전직 대통령들을 , 그것도 현직 국회의원 신분으로 반역자인 것마냥 우겨대던 게 매카시였다.[11] 1954년 1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매카시의 지지율은 50%였고 반대율은 29%였지만, 6월이 되자 모두 16%씩 바뀌어 찬성 34%, 반대 45%로 바뀌었다. 1월에는 매카시즘이 흔들리기 시작했음에도 50%의 높은 지지를 기록한 반면, 머로의 폭로가 있고난 후에는 찬성이 크게 줄었음을 볼 수 있다.[12] 군인 출신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미국 공화당 내의 중도우파의 상징적 인물로, 이후 공화당 내 온건파는 아이젠하워의 계보를 이었다.[13] 물론 행정부와 사법부가 폭주하고 사형 판결을 남발했던 소련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공산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차이로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정부를 내세웠던 미국 입장에선 그것만으로도 큰 상처였다.[14] 소련 암호해독 문건이 기밀해제된 후 미국 내 스파이들이 다수 공식 확인되었다.[15] 물론 그 피해가 너무 큰지라 천안문 6.4 항쟁과 정반대로 중국 정부에서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은 막지 못한다.[16] 특이한 것은 또 다른 밀고자 아돌프 만주(Adolphe Menjou)도 큐브릭의 영화 《영광의 길》에서 인간말종 프랑스 장군으로 캐스팅되기도 했다. 큐브릭의 할리우드 혐오가 잘 드러나는 사례.[17] Vietnam: State, War, and Revolution (1945–1946), 2013년 작 중[18] 이 사람은 2006년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치고 수니파시아파의 차이점도 모르는 인간들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하여 주목을 끈 전적도 있다.[19] 풀브라이트 장학금에게 이름을 준 그 사람이다.[20] 풀브라이트는 당시 미국의 전형적인 완고한 보수주의자였지만 이와 별개로 조셉 매카시의 마녀사냥질이 적법한 절차를 따른 안보 정책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설치는 건 경멸하면서 강경하게 반대했다. 사실 제대로 된 안보관의 소유자라면 이게 당연한 모습이다.[21] 당시 전력은 장제스 군대가 모택동 군대를 몇 배나 압도했었다. 장제스 패전의 원인으로 장제스의 한족 우선의 파시즘을 많이 꼽는데, 오언 래티모어가 장제스에게 지적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22] 희한하게 게리 쿠퍼는 매카시즘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하이 눈에 출연하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 자체가 엄청나게 은유적이고 여러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에 게리 쿠퍼가 제대로 알았을 지는 의문이지만, 각본가의 의도를 알았다면 아마도 출연을 거절했을 것으로 보인다.[23] 이 단체는 무려 1975년까지 이어졌다.[24] 하원 비미(非美) 활동 조사 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반미활동 조사를 위해 설치된 미 하원의 위원회이다.[25] 모임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매카시즘을 선동하던 선배 감독 세실 B. 드밀보고 당신이 싫다고 저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견 보수적인 이미지랑 달리 포드는 집단 광기를 비판하고 핍박받는 소수자에 동정적인 시선을 자주 보여 매카시즘과 거리가 멀었던 편이다.[26] 월트 디즈니,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 등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전부 공화당원이었다. 전부 30~4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라는 점. 다만 프랭크 시나트라도 공화당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시나트라는 당시 골수 민주당원이었다.[27] 이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말론 브란도가 있다. 물론 아놀드 슈워제네거클린트 이스트우드(1954~1974년까지)같은 공화당원도 있지만 이들도 역시 온건보수주의자에 가까우며 극우 꼴통들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28] 정규 앨범엔 안실려 있고, 당시 출간된 포크 음악 잡지 부록 레코드와 이후 발매된 공식 해적판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되었다.[29] 닉슨 대통령이 자기가 사기꾼이 아니라고 했다가 오히려 사기꾼으로 낙인찍힌 걸 기억해냈다.[30] 페이퍼클립 작전의 여파로 일부 들어와 있었다.[31] 마을 하나를 통째로 박살 내는 건 다반사에 대학교 하나 파괴하고, 댐을 폭파시키려는 등 준 전시상황까지 갔는데 그걸 전부 전쟁중도 아닌 소련 탓으로 돌리는 미정부와 X-COM(조직)의 능력이 대단하다.[32] X-COM(조직)의 전신인 작전지휘국의 원래 목적이 대소련 저항본부인데, 실제로 피요트르 제드레프라는 소련 스파이가 침투했다.[33] 당시 실제로 존재했던 소련간첩과 뒷걸음치다 잡았던 진짜 공산주의자들을 모티브로 한것.[34] 드라마적 각색이 있지만 당시에도 제기되었던 스캔들이다.[35] 피해를 입은 게 워낙 유명해서 영화화되기도 했다.[36] 세실 드밀에게 빨갱이 감독으로 억지몰이당했다.[37] 더 억울한 게 원래 중화민국 출신이다... 장인이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중장이었으니 말 다했다.[38] 매카시즘의 광풍으로 인해서 미국에서 활동이 아예 불가능해졌으며 노년에서야 겨우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39] "나는 죽음이요, 인류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한 맨해튼 계획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조국의 50만 젊은이를 구한 사람조차 빨갱이라고 쏘아붙인 것이다.[40] 마셜 계획 창안자다. 매카시가 마셜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간 논리는 '서유럽은 막았으면서 중국 공산화는 못 막았다.'는 것이었는데 중국의 공산화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다름아닌 부패한 국민당 관료들의 하드 트롤링이었다.[41]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참조[42] 가령 뉴딜 정책의 발안자인 해리 화이트, 그리고 로젠버그 부부 등[43] 매카시의 고발을 검증하기 위해 美 의회에 설치된 위원회[44] 108 List 또는 Lee List로 통칭 참조[45] 미국 공산당원으로서 소련 간첩들과 갈등을 겪다가 1945년에 FBI에 자수한 여성이다.[46] 영국, 미국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고정간첩 Anatoly Gorsky가 작성하여 KGB에 보고한 Bentley가 FBI에 고발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인사들의 명단.[47] KGB의 후신 SVR이 조직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스탈린 시기 KGB의 미국 내 간첩활동을 정리한 책. 1995년에 검열된 초고가 완성되었으나 소련 말기에 KGB 요원으로 활동한 Alexander Vassiliev가 무검열본을 빼돌려 1999년에 미국에서 출간하였다.[48] 조셉 매카시의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에선 "존 얼 헤인즈는 실제로 159인중 상당수가 보안상 위험인물이었다고 주장하였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이는 그의 연구를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헤인즈는 "보안상의 위험이라는 표현은 소련의 스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국가안보 업무의 민감성을 감안하였을 때 그러한 정보를 맡기기 부적합하다는 의미이. 위험요인은 이념적 동조뿐만 아니라 도박 빚, 적성국 거주 친인척의 존재 등 매우 다양하다."고 오히려 선을 분명히 그었다.[49] 159인 중 상당수가 이념적 위험요인을 지녔지만 미국 공산당(CPUSA)과 청년조직에 소속되었던 인물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조직에 몸담았던 인사들조차도 대부분은 40,50년대에 들어서 공산주의 이념을 버렸다고 헤인즈는 판단하였다. 헤인즈가 든 대표적인 예로는 헝가리계 미국인 화학자 Steven Brunauer가 있다. 1921년에 뉴욕 시립대학교에 유학하여 1925년에 미국에 귀화한 Brunauer는 1920년대 말까지 CPUSA의 청년조직에 속하였다. 1942년의 진주만 공습 이후에는 해군 예비군에 입대하였다. 1943년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망명작전을 주도하였고 1946년에는 공산화된 헝가리 내 과학자들의 미국 망명을 보조하는 업무를 부여받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매카시트루먼 행정부가 이미 검증한 인물조차도 냉전 발발 이전의 행적을 근거로 무차별적으로 고발한 것이다.[50] 미국의 대표적인 극우 보수 언론인이다.[51] 러스크 서한을 작성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