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4:14:35

로이 콘

<colcolor=#fff><colbgcolor=#000> 로이 콘
Roy Cohn
파일:로이 콘.jpg
이름 Roy Marcus Cohn
로이 마커스 콘
출생 1927년 2월 20일
미국 뉴욕 브롱스
사망 1986년 8월 2일 (향년 59세)
미국 메릴랜드 베데스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컬럼비아 대학교 (BA, LLB)
직업 법조인
소속

가족 아버지 알버트 C. 콘
어머니 도라 마커스
조부모 조슈아 라이오넬 코웬
1. 개요2. 생애3. 여담4. 어록5. 평판 및 평가

[clearfix]

1. 개요

미국의 법조인.

일명 악마의 변호사.[1]

연방검사로 법조 경력을 시작한 뒤 1950년대 초반 매카시즘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았다. 공직을 내려놓은 뒤엔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여 정재계 고위 인사 및 마피아 고위 간부로 대표되는 거물들을 변호하거나 자문했고 유능한 정치 브로커로 활동하며 악명을 떨쳤다.

2. 생애

로이 콘은 뉴욕 시 브롱스에서 아버지가 판사인 유대인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공공연하게 아들의 신체적 매력이 떨어진다고 조롱했으며 변변치 못한 남자라고 평가절하하곤 했다. 특히 그녀는 콘이 여름캠프를 갔을 때 캠프 근처의 집을 빌려 거주할 정도로 아들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 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존재는 훗날 자라나는 콘이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지 못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어린 나이에 매우 영악하고 비범한 모습을 보인 로이 콘은 계산이 아주 빨라 초등학생 때 이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정치적 질문을 하고 16살 정도에 뇌물을 주는 등 정치적 거래를 하는 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그에 걸맞게 공부도 굉장히 잘해 고작 스무 살 약관의 나이에 아이비 리그에 속한 컬럼비아 법대를 졸업했지만 규정상 너무 어려 변호사 시험을 바로 치를 순 없었다고 한다.

이후 변호사 시험에 초고속으로 합격한 뒤 연방검사가 된 로이 콘은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을 기소하는 전형적인 공안검사의 길을 걸었다. 이런 모습이 조지프 매카시 연방상원의원의 눈에 들었고 콘은 매카시즘 광풍에 편승하여 공산주의자 과잉 색출에 열을 올렸다.[2] 당시 콘은 냉전으로 인해 소련에 대한 공포가 확산하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본인 특유의 냉혹하고 계산적인 성향을 마음껏 발휘해 승승장구했다.

이 시기 로이 콘은 검찰 자문 대표로서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에 깊이 관여해 부부가 사형 판결을 받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 판결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훗날 자신의 영향력으로 담당 판사와 검찰 측 대표가 결정되었다고 자서전에 서술하는 등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자신의 역할이 훨씬 더 컸다고 주장했다.

한편, 로이 콘은 동성애자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경력을 위해서라면 위선적 행동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콘과 조지프 매카시 연방상원의원은 해외 공산주의자들이 미국 연방정부에서 일하는 동성애자들에게 그들의 성적인 비밀을 유지하는 대가로 중요한 정부 기밀을 전달하도록 설득한다고 주장하며 동성애자 추방 운동을 벌였다. 이에 동성애자를 고용하는 것이 국가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4월 29일 연방정부에서 동성애자가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콘의 사촌인 데이비드 마커스에 따르면 콘과 매카시에게 동성애자로 지목된 워싱턴 D.C.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꽤 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로이 콘은 자신의 동료였던 반공선전가 데이비드 샤인이 징집되자 그가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육군 고위 관계자 측에 불법적인 로비를 했다. 당시 콘이 미남이었던 샤인을 짝사랑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매사 이성적이었던 그는 유독 샤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군 관계자에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군대를 파괴하겠다.(Wreck the Army.)"라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나 청문회가 개최되는데, 조지프 매카시 연방상원의원은 청문회를 여는 것은 육군 내 공산주의자 색출과 안보 위협 문제 조사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과정이 낱낱이 ABC와 DuMont를 통해 TV 생중계되면서 매카시의 대중적 인기가 몰락하고 콘의 이미지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결국 얼마 뒤 콘은 공직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야심도 함께 내려놓게 된다.

이후 고향인 뉴욕 시로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로이 콘은 명성에 걸맞게 상류층 유력인사들의 변호와 법률자문을 맡았다. 대표적으로 미국 대통령이 되는 부동산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뉴욕 양키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 뉴욕 시 유명 나이트클럽 스튜디오 54 사장 스티브 루벨•이언 슈라거, 텍사스 주 사업가 션 무디 주니어, 예술가 리처드 듀퐁, 가톨릭 뉴욕 대교구 등이 그의 의뢰인들이었다.

로이 콘은 상류층 유력인사들 외에도 마피아 고위 간부(주로 뉴욕 마피아)들의 변호와 법률자문을 맡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대표적으로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의 형 마리오 지간테(사진), 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Street Boss)가 되는 부두목(Underboss) 시절의 앤서니 살레르노, 보난노 패밀리 두목 조셉 보난노(사진)의 아들 살바토레 보난노, 보난노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카마인 갈란테(사진), 감비노 패밀리 두목이 되는 행동대원(Soldier) 시절의 존 고티 등이 그의 의뢰인들이었다.

로이 콘은 변호사로 활동하며 절도, 업무방해, 갈취, 탈세, 뇌물수수, 협박, 사기, 위증, 증인 매수 같은 다양한 범죄행위를 일삼았고 그의 의뢰인들을 고소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협박편지를 보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로이 콘은 일생 동안 특정 정파와 관계없이 여러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공화당 소속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로널드 레이건의 비공식 고문 역할을 하면서 민주당 소속 뉴욕시장 에드 카치, 마피아와 가까워 뉴욕 시의 그림자 시장(Shadow Mayor)이라 불린 정계 거물 아마데오 에스포지토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3] 특히 레이건 대통령의 배우자 낸시 레이건CIA 국장이 되는 윌리엄 케이시가 콘과 자주 통화하는 사이였다는 전화교환원의 증언도 존재한다.

로이 콘은 1970~80년대에 걸쳐 불법적인 변호사 활동을 벌인 혐의로 세 차례나 기소되었음에도 모두 승소했지만 1984년에 에이즈 판정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엄청난 인맥 덕분에 새로 시행하는 특별 치료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병세가 나아지지는 않았는데, 콘은 투병 중에도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을 언론과 지인들에게 철저히 숨겼고 자신이 간암에 걸렸다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1986년 뉴욕주대법원 상소부는 로이 콘이 죽어가는 의뢰인의 손에 볼펜을 쥐여준 뒤 콘 자신에게 유산을 남기도록 수정한 유언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던 1975년의 사취 행위가 위법했음을 인정하며 그의 변호사 자격을 박탈했다. 하지만 그 시기의 콘은 이미 시한부 상태였고 그로부터 5주 뒤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콘의 관계자 로저 스톤에 의하면 그의 인생 목표는 '완전히 파산하고 수백만 달러를 국세청에 빚진 채 죽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콘은 사망하기 전에 파산함으로써 자신의 꿈을 이뤘다.

3. 여담

파일:_methode_times_prod_web_bin_25c08a18-4d2d-11e7-8b46-aeb9dec90269.jpg
  • 외모가 독특한 편으로 마치 영화 속 빌런 같이 생겼는데, 실제로 당대 사람들도 대개 콘을 못 생겼다고 평가했다.
  • 악마의 변호사라는 악명이 무색하게도 사석에서는 피터팬 콤플렉스가 의심될 정도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였는데,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한 자택 침실을 초등학생 남자아이의 방처럼 꾸미고, 가장 좋아한 개구리 인형을 필두로 엄청난 양의 인형을 보유했었다. 이는 어린 시절 콘을 과잉보호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 로이 콘과 도널드 트럼프는 르 클럽(Le Club)이라는 호화 사교클럽을 중심으로 친분을 쌓았다. 주로 콘이 트럼프를 도왔는데, 당시 트럼프가 흑인들에게 부동산 임대를 하지 않으며 차별한다는 소송을 당하자 콘이 나섰고 승소했다. 트럼프가 두 번의 이혼에서 재산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콘 덕분이다. 대표적 예로 트럼프의 첫 부인인 이바나 트럼프에게 “이혼 할 경우 남편으로부터 받은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는 혼전계약서를 서명하게 한 일이 있다. 정작 트럼프는 에이즈에 걸린 말년의 콘을 외면했지만, 끝내 잊지는 못했는지 대선 후보 시절까지 본인의 사무실에 콘의 사진을 걸어놨었다.
  • 자색 공포 시기를 배경으로 한 길 위의 연인들에 등장하며(배우: 윌 브릴), 짝사랑 상대인 제랄드 데이비드 샤인(배우: 맷 비서)도 같이 나온다.

4. 어록

의뢰인의 승소를 위해서라면 뭐든 합니다. 무엇이든지요. 그게 제 일이니까요. 승소를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어요. 항상 논쟁을 치러야 하는 법조계에서 중요한 건 딱 한 가지니까요. 바로 승소죠.
(사회자: 무엇이 로이 콘을 움직이게 하나요?)
치열한 싸움이 주는 희열요. 권력과 기성세대에 맞설 때 느끼는 특유의 희열이 있어요. 상대가 누구든 명분만 확실하면 맞설 준비가 돼 있죠.
한 대 맞았다고? 그럼 1000대 때려줘.
어떤 상황에서도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돼.
좋은 홍보, 나쁜 홍보란 없어. 모든 종류의 홍보는 다 좋은 거야.
자신을 멘토로 여긴 도널드 트럼프에게 해준 조언.
저는 갈란테 씨가 일반 사람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의 판단은 신의 영역이니까요.
(기자: 갈란테 씨가 왜 살해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누가 한 말을 인용하죠. ‘신문에서 읽은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마피아 항쟁 과정에서 살해된 보난노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카마인 갈란테의 장례식에서 한 말.

5. 평판 및 평가

로이 콘은 사람을 경멸했어요. 법도 경멸했죠. 이를 전혀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옆에 있을 때면 마치 악마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철창에 갇힌 야수 같았죠. 철창의 문을 여는 순간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야수요.
넘지 못할 선이란 게 없었어요. 로이와 같은 편이라면 큰 이점이었지만 로이를 상대해야 할 때면 너무나 끔찍했죠.
변호사 로버트 코헨
1번 라인에는 스타인브레너가 연결됐고 2번 라인에는 카마인 갈란테가 있었죠. 그리고 시멘트 회사를 운영하는 무시무시한 마피아 두목이 3번 라인에 있었어요 제가 수화기를 붙잡고 기다려야 했죠.
로이 콘의 비서

[1] 한국 한정 별명.[2] 미국의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41대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그러한 이력이 있다.[3] 물론 조지프 매카시 사례에서 잘 알 수 있듯 민주당보다는 공화당과의 관계가 더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