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06:20:28

존 고티

<colbgcolor=#000><colcolor=#fff> 존 고티
John Gotti
파일:gotti.jpg
이름 John Joseph Gotti Jr.
존 조셉 고티 주니어
출생 1940년 10월 27일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브롱스
사망 2002년 6월 10일 (향년 61세)
미국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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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마피아
신체 178cm
배우자 빅토리아 디지오르지오 (1962년 ~ 2002년)

1. 개요2. 생애3. 여담4. 어록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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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갬비노 패밀리의 두목(Boss).

일명 말쑥한 두목(Dapper Don), 기소 면역성 두목(Teflon Don), 조니 보이(Johnny Boy)

미국 대중들에게는 시카고알 카포네 이후 가장 유명한 마피아 두목이다.

2. 생애

이탈리아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12세 때 마피아와 연관된 거리의 갱단에 가담한 존 고티는 트럭 강탈, 장물 처리 등에 손대기 시작했다. 그는 범죄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특히 16세 때 학교를 자퇴해 배움이 짧았음에도 군주론의 중요한 단락들을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술에 심취해 있었다.

당시 앨버트 아나스타시아(사진)가 이끄는 망가노 패밀리(현 갬비노 패밀리)에 가담한 존 고티는 행동대장(Caporegime) 카마인 페티코 산하 조직원이 되어 암흑가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멘토 아니엘로 델라크로체(사진)를 만났고 패밀리 두목(Boss) 아나스타시아를 롤 모델로 삼게 된다. 1968년 트럭 강탈 혐의로 수감된 고티는 1972년에 가석방되었다.

가석방된 존 고티는 마피아 세계로 돌아갔고 불법 도박 같은 사업을 관장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비록 1957년 아팔라친 회합 사건으로 미 전역의 마피아 패밀리들이 신입 정규조직원(Made Member)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탓에 고티 역시 추종세력(Associate) 신분이었지만, 이미 암흑가에서 인정받는 폭력배가 되었다.

1973년 패밀리 두목(Boss) 카를로 감비노는 자신의 조카를 납치하여 살해한 아일랜드계 조직폭력배 제임스 맥브래트니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존 고티와 2명의 부하에게 내렸다. 그들은 맥브래트니를 스태튼 아일랜드의 한 술집에서 살해했다. 목격자와 경찰 내부자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고티는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감비노의 비호로 당대 최고의 마피아 전문 변호사인 로이 콘을 선임할 수 있었고 고작 4년형을 선고받는다.

1977년 출소한 존 고티는 갬비노 패밀리에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했고 바로 행동대장 대행(Acting Caporegime)을 맡았다.

1980년 존 고티의 아들을 자동차로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뉴욕시민이 실종되었다.

1985년 존 고티는 카를로 감비노의 후계자였던 폴 카스텔라노를 사살하고 행동대장(Caporegime) 20명의 지지를 받아 스스로 두목(Boss)이 되었다. 당시 카스텔라노는 연방정부의 마피아 위원회 기소에 걸려 2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간신히 빠져나온 상태였다. 예나 지금이나 마피아 패밀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지만 표면적으론 두목의 허가를 받지 않은 마약거래를 엄격하게 금지한다. 고티는 재판이 진행되면 FBI가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기 부하들의 마약거래 사실을 카스텔라노가 알게 되어 마피아 규율에 따라 자신이 처형될 수 있음을 깨닫고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이런 주먹구구식 쿠데타가 가능했던 것도 카스텔라노가 부하들의 신망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화 고티(1996)에서 묘사한 폴 카스텔라노 살인사건 폴 카스텔라노 살인사건을 다룬 뉴스
그러나 위원회의 허가 없이 두목을 살해한 고티는 제노비스 패밀리빈센트 지간테 같은 다른 마피아 두목으로부터 추격을 받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임명한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데치코(사진)가 살해되었다. 영화 고티(2018)에서 묘사한 데치코 살인사건(gif).
프랭크 데치코 살인사건을 다룬 뉴스
이듬해인 1987년 4월엔 고티를 노린 총격 사건이 발생했지만 오히려 습격을 가한 총잡이가 고티 측 수행원들에게 폭행당하고 납치되어 5발의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 결국 갬비노 패밀리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받은 고티는 장기적으로 자신이 위원회를 장악하여 뉴욕 5대 패밀리 전부를 관리하는 총 두목이 되려는 원대한 야망을 키웠다.[2]

새로운 마피아 '대부(代父)'가 된 존 고티는 멋진 외모와 특유의 연예인 기질로 말쑥한 두목(Dapper Don)이라 불리며 대중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원로 마피아들은 그런 고티의 태도에 우려를 표했다. 당시 고티는 이미 FBI의 추적을 십여 년간 받고 있었고 연방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시행한 조직범죄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2번이나 기소되었지만 번번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방면되어 나왔다. 결정적인 증인들이 피살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어버리고 가족들의 생명을 위협받은 잠재적 증인들이 증언을 거부했으며 일부 배심원들이 매수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재판이 있는 날이면 이탈리아계 주민들이 연방법원 앞으로 몰려와 대형 스피커로 영화 대부의 주제음악을 틀어놓고 환호성을 올렸다. 고티는 재판에서 승소한 뒤 시민들을 대상으로 낮에는 대규모 축제를 열고 밤에는 대규모 불꽃놀이를 하는 등 자신의 승리를 만방에 과시했다.
존 고티 승소 축제
그는 스스로를 불사신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앤디 워홀이 그려준 그의 초상화가 타임지 표지에 오르기도 했다. 고티는 그 과정에서 기소 면역성 두목(Teflon Don)으로 불리며 약 5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존 고티는 FBI의 끈질긴 수사로 1990년 12월에 구속 기소되었다. 당시 재판의 중대성에 비추어 보석이 허가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배신한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사진)의 내부 증언으로 1992년에 폴 카스텔라노가 포함된 5건의 살인, 1건의 살인 공모, 도박업, 사법방해, 뇌물, 탈세 혐의로 유죄판결이 내려져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벌금 25만 달러가 선고되었다. 이 당시 고티 재판을 총괄한 인물이 미래의 FBI 국장이자 러시아 게이트 특검을 맡게 되는 로버트 뮬러다.

재판 전 FBI는 살바토레 그라바노를 정부 측 증인으로 회유하기 위해 수사 과정에서 수집한 도청 자료를 들려주며 둘 사이를 이간질했다. 결정적인 도청은 "그라바노는 너무 탐욕적이야."라고 고티가 얘기하는 육성이었다. 마피아 세계에서 두목(Boss)에게 찍힌 이상 머지않아 살해되거나 강등되리라는 걸 잘 알았던 그라바노는 자신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내부 증언자로 나섰다. 결과적으로 고티는 스스로 내뱉은 말이 도청기에 잡힘으로써 거리에서 롱런하지 못했다.

당시 방청석에서 판결을 지켜본 FBI 뉴욕지국장 제임스 폭스는 공교롭게도 갬비노 패밀리 간부 조셉 데치코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유죄판결이 확정되자 존 고티는 반항적으로 일어서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면, 법정 주위에서 마피아의 프런트 회사였던 퀸즈 구조 회사 소속 견인차가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경적을 울리며 건물 주위를 돌았다. 고티의 부하와 지지자들은 소요사태를 일으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며 연방요원 자동차 1대를 전복시키고 4대를 파손시켰으며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태로 7명이 폭행과 폭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고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존 고티 주니어(사진)의 변호사들은 그 시위가 자발적인 분출이며, 계획된 폭동이라는 걸 부인했다.

재판 후 연방보안관들이 존 고티를 일리노이 주에 있는 연방교도소로 이송하기 위해 비행기로 데려갔을 때, 그는 감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고티는 비행기를 보더니 "미안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군.(You think it's too late to say I'm sorry.)"이라고 말하며 끝까지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당시 존 고티가 수감됨에 따라 그의 아들 존 고티 주니어의 패밀리 장악을 반대하는 세력이 권력 쟁탈을 위한 항쟁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예측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고티의 조직 장악력은 굳건했다.

재판이 확정된 날 저녁엔 특집으로 뉴스가 방영되기도 했다. 재판의 주요 쟁점, 시민들의 반응, 후계구도 예상 등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존 고티 유죄판결을 다룬 뉴스

마리온 연방교도소로 존 고티를 이송해올 때 탈취를 저지하기 위해 2대의 F-16 전투기가 고티를 태운 비행기를 호위했다.[3]

존 고티의 수감 이후 일상적인 조직 관리는 그의 아들을 필두로 한 고위 간부들이 맡았지만 고티는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Boss)이었고 사망할 때까지 조직을 관리했으며 수감 중에도 지속적으로 사업 수익을 상납 받았다.[4]
파일:John gotti family.png
아들 존 고티 주니어와 장소변경접견[5]을 실시하는 존 고티
고티는 가족, 친구, 부하, 팬, 작가, 언론매체로부터 매일 50통이 넘는 편지를 받았고 FBI 요원 2명이 그 편지들을 검열하기 위해 연방교도소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했다.

존 고티는 접견 온 가족이나 측근들에게 “사자는 우리에 갇혀도 사자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 발언은 그의 딸 빅토리아 고티가 언론사 기자에게 전해 세간에 보도되었다.

전 갬비노 패밀리 간부에 따르면, 법원 명령으로 대부분의 수감 기간을 슈퍼맥스급 교도소에서 보낸 존 고티는 하루 23시간 독방 감금으로 기본적인 처우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완전하게 패밀리를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6] 반면 고티의 라이벌이자 그보다 약 7년 늦은 1997년에 유죄가 확정되어 수감된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의 경우 형량도 종신형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형기를 비교적 처우가 자유로운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보냈기에 패밀리를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즉, 두 마피아 두목의 수감으로 인한 고통의 정도와 처우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좌절과 분노를 경험한 고티는 대리인인 아들을 통해 거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적극적으로 알고 싶어 했고 여러 사진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7] 통제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고티는 극단적인 폭력과 두려움을 유지 수단으로 삼았다.

존 고티는 수감 중 암에 걸렸지만 가족들에게 자신을 의료시설로 후송하라는 그 어떤 요청서도 제출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는 결코 정부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결국 정부가 먼저 의료시설로 이감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2002년 존 고티는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인후암으로 사망했다. 고티는 죽음이 가까워 오자 아내와 딸들에게는 병으로 쇠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며 아들들의 접견만 허락했고 의사들에겐 자신에게 절대로 진통제를 투여하지 말라고 요구했다.[8]

존 고티의 장례식엔 갬비노 패밀리의 거의 모든 조직원이 참석했고 운구 행렬에는 22대의 리무진과 100여 대의 자동차, 19대의 꽃차가 동원되었으며 언론에서는 4대의 뉴스 헬리콥터를 동원했다. 한 언론 보도에서는 긴 운구 행렬을 보고 뉴욕 시 역사상 전례 없는 장면이라고 평했다. 장례식장과 장지 근처에는 조문객을 제외한 3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시민들 중 일부 고티의 추종자들은 장례행렬이 지나는 길에 그를 추모하는 피켓을 들고 서있었다.[9]
존 고티의 장례식

존 고티의 사망 이후 1999년부터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아온 그의 형 피터 고티(사진)가 갬비노 패밀리의 새로운 두목(Boss)이 되었다. 존 고티의 첫 번째 대리인이었던 존 고티 주니어는 아버지의 죽음을 전후로 마피아 세계에서 은퇴했다. 피터 고티는 2002년에 구금되어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는데, 교도소에서도 철권통치를 한 동생과 달리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이름뿐인 명목상 두목으로 남아있었다. 그가 수감되자 패밀리 고위 간부 존 다미코(사진)가 거리 책임자(Street Boss)가 되어 조직을 재정비했지만 얼마 안 가 은퇴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패밀리를 장악한 세력은 도메니코 세팔루(사진)프랭크 칼리로 대표되는 시칠리아 파벌인데, 이들은 피터 고티의 지시를 적극적으로 이행하진 않았지만 그를 명목상 두목으로 인정하며 최소한의 예우 차원에서 사업 수익의 일부를 피터 고티의 친족에게 전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3. 여담

  • 1996년에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고티(Gotti)가 나왔다. 이 영화는 마이클 프란지스 같은 전직 마피아가 극찬하는 등 꽤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주인공을 맡은 배우 아맨드 아상테는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에 마리온 연방교도소에서 존 고티를 접견했다. 당시 고티는 로버트 드 니로가 자신을 연기했으면 더 좋았겠다고 밝혔지만 아상테에게 연기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해줬다. 이후 영화가 완성되자 연방교도소에서 작품을 시청한 고티는 아상테의 연기를 극찬하며 "아상테는 고티 보다 고티 연기를 더 잘했다.(Asante played Gotti better then Gotti himself.)"라고 말했다.
영화 고티(2018) 속 존 고티-빈센트 지간테 담판 장면
  • 존 고티의 딸 빅토리아 고티의 삶을 다룬 영화가 2019년에 개봉했다. 원제는 '빅토리아 고티, 내 아버지의 딸(Victoria Gotti My Fathers Daughter)'이지만 국내 OTT 사이트 왓챠에 '나는 마약왕의 딸이다'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제목으로 올라와 있다.
  • 1980년 당시 갬비노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이던 존 고티의 12살 먹은 막내아들 프랭크 고티가 이웃 주민 존 파바라(John Favara)의 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훗날 존 고티의 아들 존 고티 주니어(사진)에 의하면 타인들에게 결코 슬픔을 드러내지 않던 강인한 아버지가 서재에서 흐느껴 우는소리를 들었다고 한다.[11] 가해자 파바라의 경우, 법적으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 탓에 면책사유가 인정되어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 해 말 파바라는 실종되었고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파바라가 실종되던 당시 존 고티는 플로리다로 휴가를 가 있었다. 존 고티의 흥망성쇠와 FBI 작전을 다룬 하워드 블럼의 논픽션 "Gangland"에서는 존 고티의 부하들에게 잡혀간 후 그가 직접 전기톱으로 토막 내 죽였다고 서술했다. 훗날 관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존 고티는 단순 사고일 뿐이라고 말하며 애써 복수심을 삭혔지만, 그의 부하들이 과잉충성으로 파바라를 납치하여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 1986년 존 고티는 당대 미국 마피아 수사를 주도한 연방검사장 루돌프 줄리아니의 암살에 찬성한 강경파였다고 한다.[12] 결국 줄리아니 암살은 빈센트 지간테 같은 다른 마피아 두목(Boss)들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1년 뒤 마피아 수사를 주도했던 또 다른 연방검사 출신 변호사 윌리엄 아론왈드는 마피아의 표적이 되었고 그의 판사 아버지가 아들 대신 살해되었다.
  • 1989년 임무를 수행하던 마약단속국(DEA) 요원 에버렛 해처가 보난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코스타빌 퍼라치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이 사건은 뉴욕 시에서 처음으로 DEA 요원이 살해된 일이자 17년 만에 뉴욕지국 소속 요원이 살해된 일이었다. 장례식엔 약 3000명의 조문객이 몰렸고 해처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관을 향해 경례하는 장면은 전미를 울렸다. 며칠 후 대통령 조지 허버트 부시가 뉴욕을 방문해 유족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였던 퍼라치는 사건 이후 잠적했고 8개월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결국 DEA 뉴욕지국장 로버트 스터트먼은 존 고티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고티에게 "올바른 일을 해 달라."라고 간청했다. 이후 마피아 위원회에서 퍼라치를 당장 잡아 처형하라는 내용이 결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달 뒤 퍼라치는 브루클린에서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스터트먼은 "퍼라치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어야 했다."라며 살인을 비난했지만 훗날 인터뷰를 통해 "사실은 퍼라치가 죽어서 아주 기뻤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1996년에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DEA 뉴욕지국 앞을 '특수요원 애버렛 해처의 장소'로 개명했다. 이후 사건 발생으로부터 약 8년 뒤인 1997년에 마피아 조직원 제임스 갈리온과 마리오 갈로가 퍼라치 살인 혐의를 인정했다.[13] 그들은 형기를 복역했고 갈리온은 2015년, 갈로는 2009년에 각각 출소했다. 연방요원을 살해한 죄로 마피아에게 처형된 퍼라치의 이야기는 데드 오어 얼라이브: 거스 퍼라치를 잡기 위한 경쟁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고 스티븐 시걸을 주연으로 한 영화 복수무정 2 각본에도 영감을 제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 존 고티는 미키 루크, 소피아 로렌, 휘트니 휴스턴 등 수많은 연예계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다. 특히 플로리다 주 윌리엄스 섬에 있는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 위치한 수영장에서 고티와 로렌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고 휴스턴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고티만을 위한 콘서트를 선보였다.
  • 존 고티는 사석에서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의 정신질환자 연기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갬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이 고티의 아들이자 한때의 후계자였던 존 고티 주니어에게 "(너희 아버지가) 지간테처럼 살바에야 종신형을 살겠다."라고 말한 적 있었다고 얘기한 사례가 존재한다.
  • 과거 프랭크 시나트라카네기 홀 공연에 초청받은 존 고티는 무대가 끝난 뒤 시나트라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연은 시나트라의 병 때문에 취소되었다. 그날 저녁 고티는 뉴욕 시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밤늦게까지 웃고 떠드는 시나트라를 목격했다. 이에 자신의 부하 조 왓츠를 시나트라의 테이블로 보냈다. 당시 왓츠는 "다음에 존이 당신을 찾을 땐 변명거리가 있어야 할 거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이 볼 수 있는 마지막 얼굴이 될 테니까."라고 시나트라를 위협했다.
  • 존 고티는 운전기사가 모는 5세대 검은색 벤츠 S클래스를 타고 다녔다.
  • 존 고티의 애청곡은 1965년에 발표된 제이 앤 더 아메리칸스의 Cara Mia다. 제목의 뜻은 이탈리아어로 ‘내 사랑’ 말 그대로 사랑 노래로, 보컬의 엄청난 가창력이 돋보이는 곡이다. 아들 존 고티 주니어와 딸 빅토리아 고티의 결혼식 때 아버지 고티의 부탁으로 원곡자 제이 블랙이 직접 축가를 불렀다.
  • 자신의 사교클럽에서 부하들과 하는 카드 게임을 제외하면 별다른 도박을 즐기지 않았던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와 달리 존 고티는 한 번에 5만 3000달러를 NFL 경기에 걸 정도로 도박광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 존 고티의 딸 빅토리아 고티의 1984년 결혼식엔 약 1500명의 하객이 참석했다고 알려져 있다. 존 고티의 아들 존 고티 주니어의 1990년 결혼식엔 약 200명의 하객이 참석했고 축의금은 약 35만 달러가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마피아 변절자 마이클 디레오나르도는 훗날 FBI가 1997년에 고티 주니어의 자택을 수색하여 현금 35만 달러를 발견했을 당시 고티 주니어가 그 돈을 축의금으로 둘러댄 것뿐이었다고 증언했다. 2015년 존 고티의 손자 결혼식엔 약 500명의 하객이 참석했고 축의금은 약 250만 달러가 들어왔다.
  • '인색한 여왕(Queen of Mean)'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80억 달러의 자산가 레오나 헴슬리는 과거 호텔 노동조합이 말썽을 일으켜 존 고티에게 해결을 부탁했다. 이에 고티는 자신의 측근이자 미래의 후계자인 존 다미코(사진)에게 해결을 지시했고 그는 전화 한 통으로 10분도 안 돼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헴슬리는 답례로 자신의 호텔에 고티만을 위한 객실을 제공했다. 그녀는 매번 고티에게 객실 요금을 받고 싶어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고티는 언제나 무료로 객실을 이용했다.
  • 존 고티를 배신한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사진)는 재판 후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갔지만 1995년에 그 신분을 드러냈다. 1997년 존 고티는 형 피터 고티(사진)와의 접견에서 그라바노 암살이 연상되는 발언을 했다. 2년 뒤 갬비노 패밀리는 그라바노 암살 계획을 추진했다. 결국 2명의 암살자가 뉴욕 시에서 애리조나 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지역 내 헬스 엔젤스와 제휴를 맺어 턱수염을 기르고 바이커 갱 행세를 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계획 실행 직전 그라바노가 대규모 마약범죄 혐의로 구금되었다. 이에 갬비노 패밀리는 편지 폭탄을 이용한 암살을 논의했지만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유죄를 인정한 그라바노는 정부의 엄중한 계호 속에서 복역했고 2017년 72세의 나이로 석방되었다.[14]
  • 전 갬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는 1997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Underboss' 452 페이지에서 두목(Boss) 재직 시절 존 고티의 연간 수입(연봉)을 밝혔다. 그에 의하면 최소한 500만 달러(약 60억 원)는 넘었고 대략 1000만 달러(약 120억 원)~1200만 달러(약 143억 원) 사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를 2020년대로 환산하면 미국의 물가 상승률을 고려해 연간 3000만 달러(약 360억 원)~3600만 달러(약 430억 원) 정도라고 할 수 있다.[15] 고티는 2002년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인후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이었기에 저 금액에 상당하는 돈이 지속적으로 고티 가문에 상납되었을 것이다.[16]
  • 존 고티는 평가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마피아 두목(Boss)으로, 그를 배신한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는 훗날 인터뷰에서 "나는 충성을 다했지만 고티가 먼저 날 배신했고 당시 고티의 허영심과 자만심이 패밀리를 위험에 빠지게 했다. 나는 오메르타를 어겼지만 여전히 마피아는 내 유산이며 애정을 가지고 있다."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고티의 아들이자 한때의 후계자였던 존 고티 주니어는 "부하들의 접근이 어려웠던 빈센트 지간테에 비해 현장에서 조직원들과 동고동락한 내 아버지가 진짜 지도자."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 1992년 시칠리아 마피아가 주도한 지오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 판사 암살에 당시 수감 중이었던 존 고티가 폭파 전문가를 이탈리아로 파견하여 사건에 관여한 사실이 2019년에 드러났다. 실제로 팔코네 판사 부부와 그들을 경호하던 3명의 경찰관은 폭탄에 의해 사망했다.
  • 존 고티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교정센터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고티는 시설 내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풍겼고 아랫사람들을 철권통치했다. 그는 남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으나 1:1로 대면할 때는 꽤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교정시설 밖 자신의 범죄 제국에 대한 걱정을 했다. 고티가 교정시설 내에서 특권을 누렸냐는 질문엔 ‘확실한(Absolutely)’ 특권을 누렸으며, 수감된 모든 마피아 두목(Boss)들은 예외 없이 특권을 누린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한 가지 예를 들었는데, “교정시설에는 이미 다수의 마피아 조직원들이 수감되어 있고 천하의 존 고티가 전화기를 쓰겠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거절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 증언자의 눈에 비친 교도관들은 “고티 씨가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있을 수 있기 위해서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며 아첨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또 증언자가 밝히길, 하루는 마피아 두목들이 수감되어 있는 분리된 지구에 내려갈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두목들이 랍스터를 먹으며 코냑을 마시고 시가를 피우는 걸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그 모든 것들은 당연히 교도관들에 의해 반입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7][18]
  • 평생 거칠 것 없이 살아온 존 고티는 보통 흑인들의 면전에서 대놓고 멸칭으로 부르곤 했다. 1996년 어느 날 마리온 연방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고티는 길을 막고 있는 월터 존슨이란 흑인 수용자에게 비키라고 말하며 평소처럼 "깜둥이 자식(Nigger)"이라는 멸칭을 사용했다. 놀랍게도 이에 앙심을 품은 존슨은 다음 날 휴게실에 있던 고티를 공격했다. 당시 교도소 내 특혜에 익숙해져 있었던 고티는 그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이후 고티는 교도소 갱단 아리안 형제단과 존슨을 살해하는 계약을 맺었다. 정보를 입수한 연방정부는 존슨의 신변보호를 위해 그를 최고 보안 교도소인 ADX 플로렌스 교도소로 이감시켰다. 그리하여 존슨은 2001년 5월에 무사히 출소하지만 정부의 보호가 무색하게도 한 달 만에 경찰관을 살해하여 재수감되었다. 2년 뒤 존슨은 워싱턴 D.C.에 위치한 교도소 내에서 무려 40여 차례나 사제칼에 찔려 폐가 관통되는 중상을 입었다. 당시 교정당국은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고 범행 동기도 파악하지 못했다고 밝혔지만 몇몇 전직 마피아를 비롯한 일각에선 이 공격을 과거 고티와 계약을 맺은 아리안 형제단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반면 고티의 자녀들은 존슨에 대한 보복으로 아버지가 교도소 갱단과 계약을 맺었다는 FBI 측 주장은 악의적인 거짓말이라고 부정했다.
  • 마리온 연방교도소에서 고티와 함께 수감생활을 한 크레 크레(Kre Kre)라는 블러즈 갱 단원의 인터뷰에 의하면, 고티는 교도소에서 주로 흑인, 히스패닉 수용자들과 사이좋게 지냈고 의외로 바이커 갱 단원이나 나치 로우 라이더, 네오 나치 같은 인종주의 백인 갱스터들과는 상종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상술한 월터 존슨 사건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교도소에서 있을 수 있는 치기 어린 젊은이(Youngster)와의 작은 해프닝일 뿐 별일 아니었다고(No Big Deal) 얘기한다.
  • 존 고티의 아들이자 한때의 후계자였던 존 고티 주니어에 의하면, 그가 5살 때 아버지가 트럭 강탈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던 탓에 종종 친구들이 자신을 아버지가 없다고 놀렸다고 한다. 그때마다 고티 주니어는 아버지가 출장을 갔기 때문에 부재중이라고 항변했지만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이었다. 어느 날 고티 주니어가 집 주위에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 갈색 링컨 컨티넨탈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더니 창문이 내려가고 사진으로만 보던 아버지가 "집이 어디지?"라고 자신에게 물어온 기억이 아주 선명히 남아있다고 한다. 집의 위치를 알려준 고티 주니어는 이내 곧 의기양양해졌고 "저 사람이 우리 아빠야."라고 친구들에게 얘기했다. 비극적으로 불과 3년 뒤 고티는 살인 미수죄로 다시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티 주니어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988년에는 두목(Boss)이 된 아버지의 인도하에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했다.[19] 그는 아버지가 구속된 1990년부터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이 되었고 1990년대 내내 갬비노 패밀리를 이끌었다.(제일 하단이 고티 주니어.)
  • 상술했듯 존 고티 주니어는 아버지의 수감 이후 갬비노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았다. 당시 FBI 도청으로 많은 마피아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마피아 패밀리에서 도청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다. 고티 주니어는 자신과 행동대장(Caporegime)들이 거리를 산책하면서 사업을 논의하는 'walk talk'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고티 주니어는 아버지와 달리 담판이나 이권싸움에 능하지 못했고 경험도 적었다. 그가 수괴로 재직하던 시기의 갬비노 패밀리는 다른 조직과의 이권 담판에서 깨지기 일쑤였다. 제노비스 패밀리는 아예 고티 주니어와 상대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1995년에는 부하들이 고티 주니어를 제거하는 쿠데타를 공모하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며 1990년대 내내 갬비노 패밀리를 이끌다가 1999년에 공갈죄로 6년 5개월 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20] 출소 이후 고티 주니어는 아버지의 죽음을 전후로 마피아 세계를 떠났다고 주장한다.[21] 그러나 FBI는 그가 여전히 마피아 사업에 관여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2008년에는 플로리다 주의 조직범죄를 총괄하는 갬비노 패밀리의 행동대장으로 보기도 했다.[22] 고티 주니어는 출소 후에도 4차례나 기소되었고 몇몇 과거의 부하가 정부 측 증인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모두 승소했다. 4번째 재판이 끝난 후 연방검찰은 더 이상 고티 주니어에 대한 재판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23][24] 2013년에는 고티 주니어가 배에 칼을 맞고 병원에 찾아온 사건이 있었다. 부상이 심각하지 않았는지 본인이 직접 운전해서 병원에 왔고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수사기관이 범인 검거를 위해 정보를 묻자 협력하지 않았다. 후에 고티 주니어는 인터뷰를 통해,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알던 마약 중독자들이었고 자신은 둘의 싸움을 말리다 찔렸다고 한다. 사건 이후 둘 중 한 사람이 자신에게 찾아와 사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누가 자신을 칼로 찔렀는지는 잘 모르겠다고.[25] 현재 뉴욕 주에서 8번째로 부유한 동네인 오이스터 베이 코브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CBS의 유명 프로그램 '60분'에 출연해 인터뷰를 가지고, '아버지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쓰고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홍보에 참여하거나, 마피아 관련 다큐멘터리에 관계자로 출연하는 등 일종의 유명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아들 존 고티 3세종합격투기 선수로 활약 중이다.[26] UFC 계약설이 슬슬 나오고 있는 그는 자기 또래의 사촌 형제들은 대부분 뒷세계의 길을 걷고 있지만 자신은 운동으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밝혔다.[27] 2023년 6월 11일 존 고티 3세는 전설의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와 시범경기를 가졌다. 경기는 6라운드에 무효 처리되었는데, 이 판정에 반발한 존 고티 3세가 메이웨더를 공격하면서 양측이 집단 난투극을 벌여 화제가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메이웨더 문서 참고.
  • 존 고티 주니어는 갬비노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시절 몇몇 살인을 지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시민운동가 '커티스 슬리와'의 살인을 지시한 혐의를 받았다.[28] 슬리와의 배짱에 대해 잘 알려면 우선, 유명 라디오 DJ '하워드 스턴'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한다. 스턴은 ‘모든 미디어의 왕(King of All Media)’으로 불리는 미국 최고의 라디오 진행자로 터무니없는 발언으로 유명했으며 거침없고 두려움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모든 사람을 깎아내리는 걸로 유명한 입담의 소유자였다. 그의 풍자 대상은 대통령은 물론이고 본인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방송국 사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단 한 마디도 논평하지 않은 인물이 존 고티다. 그는 심지어 당시 전미를 달군 화제거리인 고티 재판에 관한 얘기를 게스트가 불쑥 하기라도 하면 바로 제지했다. 반면 슬리와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재판 중이었던 고티를 공공의 적 1호로 규정하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아버지의 후계자였던 고티 주니어는 격분했고 그를 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얼마 안 있어 슬리와는 야구 방망이로 공격당해 머리에 12바늘을 꿰매고 손목이 부러졌으며 팔꿈치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 발언을 멈추지 않았고 2달 후엔 택시 안에서 3발의 총격까지 당하지만 끝내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총격으로 내상과 다리 부상을 입었지만 수술을 받고 살아남았다. 특히 총상에서 회복되자마자 즉시 반 마피아 방송을 재개했다. 훗날 그의 증언에 의하면, 마피아 측에서 자신을 납치하기 위해 도난 택시를 이용했고 자신이 택시를 타자 고릴라같이 덩치가 크고 마스크를 쓴 괴한이 조수석에서 나타나 "이거나 처먹어라 개자식아!(Take this shit, son of a bitch!)"라고 외치며 권총을 쏘았으며 자신은 그때 입은 부상으로 12년 동안의 재활과 여러 번의 수술을 거쳤다고 한다. 훗날 고티 주니어는 슬리와 살인교사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또 고티 주니어는 1990년대에 마피아 아지트들을 상대로 대담무쌍하게 강도 짓을 일삼다 자동차 안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 '우바 부부 살인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역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이 내려졌다.[29] 두 일화 모두 2015년에 제작된 영화 더 워너비-존 고티에서 각색하여 묘사하고 있다. 우바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또 다른 영화로 2014년에 제작된 롭 더 몹이 있다.
  • 전 갬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디레오나르도에 따르면,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시절의 존 고티 주니어는 진정한 권력자였으며 일부 마피아 패밀리에서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믿음은 완전한 거짓이라고 말했다. 고티 주니어는 아버지를 신(God)이라고 불렀는데 다른 패밀리 지도부와 만나는 자리에서는 우두머리(Chief)라고 불렀다. 이에 갬비노 패밀리 고위 간부 존 다미코가 "각 패밀리는 자신만의 두목(Boss)이 있기 때문에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조언하였고 고티 주니어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 다른 패밀리 앞에서는 아버지를 우두머리라고 지칭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디레오나르도는 "갬비노 패밀리에 대한 고티 주니어의 가장 큰 기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허가된 살인의 금지'라고 답했다. 이는 자신이 고티 주니어에게 살인과 마약 거래를 중단해야 한다고 조언해 세워진 정책으로, 1991년부터 2002년까지 계속된 선언이라고 설명했다. 갬비노 패밀리는 그 기간 동안 수사기관의 프락치 같은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인을 중단했다.[30] 위에서 설명한 커티스 슬리와 살인미수 사건에 대해 디레오나르도가 밝히는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처음엔 고티 주니어가 겁을 줄 목적으로 야구 방망이 공격을 지시했다. 습격 직후 부상에서 회복한 슬리와가 더욱 신랄하게 아버지를 비판하는 모습을 본 고티 주니어는 이번엔 아예 병원 신세를 지게 할 목적으로 그를 납치하여 야구 방망이로 아주 심한 폭행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일선 조직원 하나가 납치 현장에 권총을 가지고 갔고 예기치 못하게 총을 사용하게 되면서 일이 꼬인 것이라고 한다. 반면 우바 부부 살인사건은 자신들의 소행이 맞으며, 그건 살인이 허가된 특정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는 마피아 사교클럽을 강도질한 우바 부부의 행동은 자살행위라고 덧붙였다. 디레오나르도는 "만약 이 정책이 선언되지 않았다면 10년 동안 12명도 더 되는 사람이 살해되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시간이 흘러 고티 주니어는 아버지의 병세가 깊어질수록 큰 고심에 빠졌고 점점 위축되어 갔다. 하루는 고티 주니어가 디레오나르도에게 "브루클린의 모든 행동대장(Caporegime)들을 나 대신 관리해 줘, 누구든 날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바쁘다고 말해. 다른 행동대장들은 피터 삼촌이 관리할 거야. 난 그저 뒤로 조금 물러나고 싶을 뿐이야."라고 말했다는데, 당시 디레오나르도는 그런 고티 주니어의 모습을 보고 과거 스스로를 고립한 전 갬비노 패밀리 두목(Boss) 폴 카스텔라노가 떠올랐으며 고티 주니어가 암으로 쇠약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게 분명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고티 주니어는 아버지의 죽음을 전후로 마피아 세계를 떠났다.[31]
  • 2002년 존 고티가 사망하자 당시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고 있던 그의 형 피터 고티가 은퇴한 존 고티 주니어 대신 새로운 두목(Boss)으로 추대된다. 그는 the Dumbest Don(가장 멍청한 두목)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두목 대행 기간까지 포함, 불과 3년 만인 2002년에 체포되어 2003년에 장기 징역형 선고를 받고 수감된다.[32] 그의 수감 이후에도 고티 가문의 측근들이 연달아 두목 대행을 맡아 2008년까지 갬비노 패밀리를 이끌었기 때문에 가문의 영향력은 한동안 유효했다. 이후 도메니코 세팔루(사진)로 대표되는 시칠리아 파벌로 조직의 주도권이 넘어갔고 갬비노 패밀리는 전통의 마피아 조직으로 회귀했다는 평을 받는다. 2011년 뉴욕 데일리 뉴스는 마피아 전문가 제리 카피시의 칼럼을 인용해 피터 고티의 갬비노 패밀리 두목 직책을 시칠리아 출신의 도메니코 세팔루가 정식으로 승계했다고 보도했지만, 4년 후 카피시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기고하는 칼럼을 통해 갬비노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은 여전히 피터 고티며, 도메니코 세팔루는 두목 대행이라고 정정보도를 했다. 실제로 라 코사 노스트라의 두목은 본인 스스로 사임하거나, 위원회에 의해 강등되거나, 밀고자가 되지 않는 한 사망할 때까지 직책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고령의 나이에 교도소에서 죽음을 맞을 확률이 상당히 높은 장기 징역형을 앞두고도 동료를 밀고하지 않은 피터 고티의 태도는 조직원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교도소에서도 패밀리를 관리한 동생과 달리 피터 고티는 수감된 이래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단, 2008년 재판 과정에서 갬비노 패밀리가 수감된 두목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불법 수익금의 일부를 피터 고티의 친족에게 지급해온 사실이 밝혀지긴 했다. 2019년 피터 고티는 가석방 신청 요건에 도달했고 그의 변호사는 가석방을 신청하며 자신의 의뢰인이 나이와 지병 탓에 폭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 측에서는 ‘피터 고티와 같은 갬비노 패밀리 지도자가 제기하는 위험은 그가 개인적으로 폭력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지시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라고 반대 의견을 냈다. 결국 가석방 청구는 기각되었고 그는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 존 고티의 딸 빅토리아 고티는 작가 일을 하며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 420만 달러(약 50억 원) 짜리 호화 저택에서 세 아들과 함께 거주했다. 그녀는 자신의 합법적인 사업으로 집을 구입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수사기관은 아버지의 마피아 자금으로 구입한 것으로 여겼다. 2004년 이 집을 배경으로 빅토리아 고티 가족의 호화로운 생활을 담은 ‘Growing Up Gotti’라는 이름의[33] TV 쇼가 론칭되기도 했다.[34] 그녀의 전 남편 카마인 아그넬로는 고철업자였고 마피아 추종세력(Associate)이었다. 자신의 딸이 깡패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안 존 고티는 부하들을 시켜 아그넬로를 납치한 뒤 야구 방망이로 폭행하고 엉덩이에 총을 쐈다고 전해진다. 끝내 빅토리아 고티와 결혼에 성공한 아그넬로는 장인어른의 권력을 등에 업고 각종 범법행위를 자행하다 공갈죄와 방화죄로 2001년에 9년형을 선고받는다. 빅토리아 고티는 2003년에 수감 중이던 남편과 이혼했다. 아그넬로는 2008년에 출소하여 다른 여성과 가정을 꾸리고 클리블랜드에서 견인차 사업을 하다가 2015년에 차량 절도와 돈세탁 등으로 다시 기소되었다.
  • FBI는 2004년 수사 과정에서 마피아 조직원들이 상술한 빅토리아 고티와 세 아들을 다룬 TV 쇼 ‘Growing Up Gotti’에 대해 얘기하는 육성을 포착하기도 했다.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 대행(Acting Caporegime) 치로 페론이 "그건 싸구려 연속극이야, 그 집 아이들은 여자애들 같더군."이라고 얘기하자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존 야누치가 "가장 역겹고 모욕적인 쇼입니다. 돈을 벌긴 하겠지만."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그들과 동석한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랄프 스코포 주니어가 "엄청난 창피의 대가일 뿐이야."라고 평가절하했다. 한편 이 대화 속 주인공인 페론은 마피아 생활을 하며 60여 년간 성공적으로 법망을 피해온 인물이지만 2007년에 사법방해, 갈취, 고리대금업, 노동 공갈, 도박업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약 3년간 복역한 후 출소했고 2011년에 90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 존 고티의 동생이자 갬비노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이었던 진 고티가 마약 유통, 사법방해, 공갈 혐의로 29년의 긴 수감생활을 마치고 2018년 9월 14일에 출소했다. 7년으로 형량을 단축시켜준다는 정부의 제안을 거절했었던 그는 오메르타를 지키며 동료를 밀고하지 않았다. 2019년 갬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칼리가 암살당하자 사건 초기에는 진 고티가 배후가 아닌가 하여 내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결국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존 고티는 사망하기 전 자신의 후계자로 진 고티를 원했다. 그는 자신과 가장 많이 닮은 동생이었고 암흑가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장기 징역형을 앞두고도 동료를 배신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교정시설 내에서 대리인을 통해 효과적으로 사업을 운영 중이었다.[35] 그러나 진 고티는 수용자 신분이라는 현실적인 벽을 넘지 못했고 피터 고티가 존 고티의 뒤를 이었다. 전 갬비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루이스 페란테는 만약 지금 다시 조직 세계로 돌아간다면 진 고티를 두목으로 모시고 싶으며 암흑가 인사들은 전설과도 같은 그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 존 고티의 또 다른 동생 리처드 고티 역시 몇 차례 수감 경력이 있는 갬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이다. 그의 아들 또한 갬비노 패밀리 구성원이다.
  • 존 고티의 막냇동생 빈센트 고티는 존 고티가 사망한 2002년에 갬비노 패밀리에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했다. 그는 2008년에 기소되어 8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된 후 2015년 2월에 출소했다.
  • 과거 미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존 고티를 만나러 마피아 아지트를 찾아가는 내용의 방송을 하기도 했다.
  • 존 고티를 연기한 배우는 5명이 넘지만 그중에서도 아맨드 아상테와 존 트라볼타가 유명하다.
  • 영화 좋은 친구들에서 나오는 빌리 배츠는 존 고티의 동료이자 오랜 친구였다. 그가 좋은 친구들에서 나오는 것처럼 루케시 패밀리의 토미 데시몬과 지미 버크에게 무단으로 살해당하자 고티는 그 건과 또 다른 자신의 부하 로날드 제로테를 무단으로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데시몬의 암살을 지시했고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데시몬은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승격시켜준다는 꼬임을 받고 갔다가 살해당했다. 일설에는 존 고티의 부하인 토마스 아그로가 존 고티가 보는 앞에서 데시몬을 고문해서 죽였다고 한다.
  • 재판을 받고 차에 타려고 하는 도중 카메라 세례를 받던 존 고티에게 갑자기 한 노숙자가 난입해서 돈을 좀 달라고 하였다. 고티는 자비롭게도 그에게 돈을 좀 준다. 카메라 앞이라서 그런 것인지 정말 자비심이 들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행동도 꽤 화제가 되었다.영상
  • 말기 암에 걸렸음에도 진통제를 거부한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존 고티의 자존심은 마피아 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의 딸 엔젤 고티는 아버지의 자존심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과거 신문에서 아버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를 읽은 그녀는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조심하세요.(Be careful.)”라고 덧붙였다. 이에 아버지가 "무엇을 조심하라고?!(Be careful of what?!)"라며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는 그런 종류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엔젤 고티가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한 이유는 2016년에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전기를 쓴 작가가 '취재 결과, 존 고티는 지간테를 상당히 두려워했다.'라는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다. 이에 엔젤 고티가 자신의 아버지는 지간테나 연방정부는 물론이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남자라고 항변하는 과정에서 저 일화를 소개했다.
  • 존 고티는 아들을 군사대학에 보낼 정도로 군대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지만 경찰로 대표되는 수사기관에 대해서는 병적인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존 고티 주니어는 1971년 할로윈 때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슨 분장을 할 거냐고 물어 이웃 주민 마이크 경관이 소품을 빌려주기로 해 경찰관 분장을 할 거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 뒤 어머니에게 "내 아이가 경찰이랑 말을 섞게 했어?"라며 따졌다. 어머니가 "여보 그는 착한 이웃이야."라고 대답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양손을 꽉 잡으며 "내 말 잘 들어, 그 어떤 경찰이랑도 대화하지 말거라. 그들처럼 행동해서도 안돼, 넌 절대 경찰이 될 수 없어. 알아듣겠니? 할로윈 때든 아니든 그 언제라도."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디레오나르도에 따르면, 과거 존 고티는 자신을 세 번이나 체포한 전설적인 조직범죄수사관 조셉 코피(사진)에게 상해를 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당시 연방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던 고티는 자신의 측근이자 미래의 후계자인 존 다미코에게 코피를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한 지시는 다미코를 거쳐 당시 젊은 말단 조직원이었던 디레오나르도에게 하달되었는데, 처음 두목(Boss)의 지시를 접한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피는 NYPD 조직범죄전담반장 출신으로 뉴욕 주 조직범죄전담반에서 정보계장을 맡고 있는 당대 제일의 마피아 수사관이었기 때문이다.[36] 두목의 지시가 가져올 파장을 생각한 디레오나르도는 코피 같은 베테랑 수사관을 폭력으로 제압할 때면 반드시 총기로 반격을 당할 것이라 예상했다. 결국 야구방망이를 이용한 습격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총기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디레오나르도는 위장에 사용할 스키마스크를 구하거나 코피의 단골 레스토랑을 파악하는 등 계획 실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정작 습격 지시는 고티의 변심으로 2주 만에 취소되었다. 몇 년 뒤 우연히 코피를 레스토랑에서 목격한 디레오나르도는 과거 두목의 지시가 떠올라 어쩐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 2024년 2월 존 고티의 며느리와 손녀가 고등학교 농구 시합 도중 다른 학부모와 난투극을 벌인 혐의로 입건된 소식이 뉴스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 미국 누리꾼들은 소프라노스에서 재니스가 초등학교 축구 시합 도중 다른 학부모와 난투극을 벌이다 뉴스에 실리는 에피소드##2가 생각난다는 반응을 보였다.#

4. 어록

난 죽을 때까지 라 코사 노스트라야.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후에도, 오늘 밤에도, 아니면 내가 감옥에 있는 100년 후에도.
This is gonna be La Cosa Nostra 'til I die. Be it an hour from now, or be it tonight, or a hundred years from now when I'm in jail.
난 우리 가족의 보스요, 내 아내와 아이들의.
I'm the boss of my family, my wife and kids.
당신이 갬비노 패밀리의 두목(Boss)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37]

5. 관련 문서


[1] 당시 고티를 습격한 총잡이는 이탈리아 혈통을 가진 37세의 윌리엄 시코네로 밝혀졌다. 그를 살해한 범인들은 검거되지 않았다.[2] 고티를 노린 회심의 폭탄 공격이 실패하자 위원회는 암살 시도를 중단한 뒤 통제권을 인정하고 그를 위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이 당시 대대적인 기소로 마피아 지도부가 혼란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사실 제노비스 패밀리의 빈센트 지간테 같은 두목은 굳건했고 루케시 패밀리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상황이었으며 보난노 패밀리와 콜롬보 패밀리는 수감된 두목을 대리하는 두목 대행(Acting Boss)이 있었기에 완전한 설명은 아니다. 제일 합리적인 시각은 조직 간 항쟁은 원활한 사업에 좋지 않다는 걸 마피아 본인들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갬비노 패밀리 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던 고티를 인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3] #[4] 월 스트리트의 부패한 은행가로 마피아의 자금 세탁을 하다 2003년에 유죄판결을 받은 살 로마노의 출소 후 인터뷰를 보면, 자신은 갬비노 패밀리 소속이었는데 본인의 사업 수익을 고티 측에 상납했다고 밝혔다.[5] 교도소장 직권으로 접촉차단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특별한 장소에서 실시하는 접견[6] 고티가 수감되었던 마리온 연방교도소는 그가 사망한 뒤인 2006년에 중간 계호급 교도소(Medium-Security Prison)로 하향 조정되었지만 여전히 중경비시설로 분류된다. 기존의 슈퍼맥스급 처우를 받던 수용자들은 ADX 플로렌스 교도소로 이감되었을 것이다.[7] 이에 갬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은 주기적으로 모여 두목에게 보낼 사진을 찍었다.[8] 말기 암 환자가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럼에도 진통제를 거부했다는 건 고티가 지독할 정도의 마초였다는 걸 알 수 있다.[9] 고티와 달리 눈에 띄는 행동을 최대한 자제한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도 2005년에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사망했다. 지간테의 장례식 역시 뉴욕 시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당을 거의 가득 메울 만큼 많은 조문객이 모였지만 대부분 일반인들이었고 제노비스 패밀리 측에선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아온 그의 형을 포함해 고인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몇몇 원로 조직원만 참석했으며 그 외에 다른 폭력배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운구 행렬도 운구차 1대와 리무진 3대만 동원되어 고티 때와 비교하면 간소하게 치러졌다. 이렇듯 동시대에 활동한 두 마피아 두목의 성격 차이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10] IMDB에서는 4.8점, 로튼 토마토에서는 Tomatometer 0%를 받았다. 골든 라즈베리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연출상, 커플상 총 6관왕을 차지했다.[11] 고티 주니어의 침실에 서재와 통하는 환기구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12] 훗날 줄리아니는 뉴욕시장까지 된다.[13] 갈리온은 루케시 패밀리의 행동대원(Soldier)으로 알려져 있다.[14] 출소한 그라바노는 2020년에 유명 유튜버와 인터뷰를 가졌고 같은 해 개인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고티 가문의 영향력이 미미한 현재의 갬비노 패밀리는 그라바노에 대한 복수에 관심이 없다.[15] 1978년의 600만 달러를 2013년 가치로 환산할 경우, 약 3배인 1790만 달러에 달한다는 분석 결과가 있다.[16] 고티의 아내와 갬비노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은 아들이 포함된 4명의 자녀에게 골고루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17] 영상에서 ‘마피아 두목들’이라고 묘사하는 걸로 보아 그가 1985년 마피아 위원회 재판으로 수감된 두목들을 목격한 것으로 보인다.[18] 한국의 교정시설과 다르게 미국 연방교정시설은 2000년대 중반까지 수용자들의 흡연이 가능했다. 단, 술을 마시는 건 특별한 날이 아니면 허용 범위 밖이며 명백한 특권이다.[19] 당시 족벌주의로 비난받는 걸 우려해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가 고티 주니어의 입단식을 주재했다.[20] 고티 주니어가 재판 과정에서 FBI에 정보를 넘긴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는데, 2015년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은 거짓 정보를 주었고 그 정보로 기소된 마피아가 하나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고티 주니어가 마피아 재판의 증인석에 선 전례가 없다.[21]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은 마피아 패밀리가 아닌 진짜 가족(Blood Family)을 선택했고 마피아 두목(Boss)으로 살면 높은 확률로 교도소에서 죽거나, 거리에서 죽는 2가지 운명이 존재한다고 말했다.[22] FBI는 아버지와 접견했을 당시 고티 주니어 측에서 마피아를 은퇴하겠다고 알린 것 또한 고도의 전술로 보고 있다.[23] 만약 고티 주니어가 제공한 거짓 정보에 FBI가 속아넘어간 게 사실이라면, 그만큼 약이 올랐기 때문에 더욱 집요하게 그를 기소했던 것일 수도 있다.[24] 고티 주니어의 무죄를 이끌어낸 변호사를 멕시코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 로에라가 2017년에 선임하기도 했지만, 구스만은 종신형을 피할 수 없었다.[25] 물론 이 사람이 공개적으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26] 웰터급, 5전 5승 4KO.[27] 존 고티 3세의 실력만 뒷받침된다면 UFC 입장에서 '고인이 된 전설적인 마피아 대부의 손자이자 전직 마피아 수괴의 아들이 옥타곤에서 싸운다'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되기 때문에 계약에 관심을 가질만하다.[28] 훗날 슬리와는 2021년 뉴욕시장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지만 민주당 후보 에릭 애덤스에 패해 낙선한다.[29] 우바 부부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30] 바꿔 말하면 정보원이라고 확인되었거나 의심된 사람들은 처형했다는 소리다.[31] 마이클 디레오나르도는 2002년에 기소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와중, 패밀리의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심을 받고 조직으로부터 모든 지원이 끊긴 데 환멸을 느껴 정부 측 증인이 된 인물이다. 재판 과정에서 과거의 동료들을 밀고해야 한다는 죄책감에 자살시도까지 한 그는 훗날 진행한 인터뷰에서, 배신자가 된 사실 자체는 변명할 생각이 없으며 정부 증인이 되는 행위는 조직 세계에서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는 행동이라고 인정했다.[32] 유죄로 인정된 죄 중에는 스티븐 시걸 살해 협박죄 및 갈취 협박죄와 배신한 전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의 살인을 공모한 죄가 있다.[33] 한국에서는 ‘고티 가족 길들이기’라는 이름으로 방영.[34] 당시 마피아와 그 가족의 인간적인 면을 담은 HBO 드라마 소프라노스가 대히트를 치면서 기획된 성격이 강하다.[35] 마피아 패밀리 내에서 행동대장 이상 직책에 있는 사람은 두목(Boss)에 의해 특별히 강등되지 않는 한 수감된다 하더라도 대리인을 통해 사업을 운영한다. 수감자의 대리인은 사업 수익의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가지는 걸 제외하고는 기존의 상사에게 돈을 그대로 상납해야 한다.[36] 코피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 참고.[37] 2005년에 거리 책임자(Street Boss)가 되어 갬비노 패밀리를 장악한 존 다미코는 패밀리의 수괴가 맞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자 존 고티의 과거 답변을 패러디 해 "내 집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그땐 내가 보스요.(When I go in my house and my bathroom and close the door, I'm the boss)"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