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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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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의 설립자
| 1974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 |||||||||||||||||||||||||||||||||||||||||||||||||||||||||||||||||||||||||||||||||||||||||||||||||||||||||||||||||||||||||||||||||||||||||||||||||||||||||||||||||||||||||||||||||||||||||||||||||||||||||||||||||||||||||||||||||||||||||||||||||||||||||||||
재키 스튜어트 | → | 무하마드 알리 | → | |
<colbgcolor=#000><colcolor=#fff> 무하마드 알리 Muhammad Ali | محمد على | |
개명 전 이름 |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 Cassius Marcellus Clay Jr.[1][2] |
출생 | 1942년 1월 17일 |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 | |
사망 | 2016년 6월 3일 (향년 74세) |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3]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91cm / 107kg[4] / 198cm / 310mm |
체급 | 라이트헤비급[아마추어] 헤비급[프로] |
아마추어 경력 | 1960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 1959, 1960 US 내셔널 챔피언쉽[7] 금메달 1959, 1960 인터시티 골든 글러브[8] 금메달 1959, 1960 시카고 골든 글러브[9] 금메달 |
프로 전적 | 61전 56승(37KO) 5패(1KO) |
프로 경력 | WBA 헤비급 챔피언 4회 WBC 헤비급 챔피언 2회 The Ring[10] 헤비급 챔피언 3회 NABF[11] 헤비급 챔피언 3회 |
종교 | 개신교(침례회) → 이슬람(NOI → 수니파) |
서명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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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권투 선수.선수 생활 이외에도 흑인 민권 운동에 몸담았으며 공개적으로 베트남 전쟁의 징집을 거부하는 등 사회 정의에 관해 목소리를 낸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2. 유년 시절
1942년 1월 17일, 알리는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의 비교적 부유한 흑인 중산층 집안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알리가 살던 곳은 인종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곳이었고, 그는 온갖 무시와 놀림을 받으면서 성장했다.[12] 이러한 성장 배경으로 인해 알리는 자존심이 세고 당당한 성격을 가진 아이로 자랐다.12살이 된 알리는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아이들에게 무료 아이스크림과 풍선을 나눠주던 루이빌 서비스 클럽의 전시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알리가 구경을 다 마치고 자전거를 가지러 돌아갔을 때 누군가 자신의 자전거를 훔쳐간 것을 알게 되었다. 화가 난 알리는 서비스 클럽 지하의 컬럼비아 체육관에서 복싱 코치 일을 병행하던 경찰관 조 마틴을 찾아가 도난신고를 하였다. 알리가 마틴에게 도둑을 혼내주겠다고 말하자 마틴은 먼저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알리를 타일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알리는 컬럼비아 체육관에서 마틴의 지도 아래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한 알리는 루이빌의 그레이스 커뮤니티 센터에서 일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트레이너 프레드 스토너에게도 지도를 받았다.[13]
3. 커리어
3.1. 아마추어 경력
1954년 첫 아마추어 경기에서 스플릿 판정으로 승리했고, 라이트헤비급 초심자들을 위한 1956년 골든 글러브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3년 후, 내셔널 골든 글러브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에서 우승했고, AAU 라이트 헤비급 국가 타이틀도 차지했다.알리는 1956년부터 1960년까지 루이빌의 센트럴 고등학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흑인 공립학교에 다녔고, 수업 시간에 종종 백일몽을 꾸며 복도에서 섀도우복싱을 했다. 당시 그는 1960년 올림픽을 위해 훈련하고 있었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서 일부 교사들은 그가 졸업하는 것을 막고 싶어했다. 그러나 학교 교장인 애트우드 윌슨은 알리의 잠재력을 보고 이에 반대하며 교직원들에게 "내가 캐시어스 클레이가 졸업하지 못한 학교의 교장이 될 것 같은가?"라고 비꼬며 물었다.
3.1.1. 올림픽 금메달
1960 로마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어 라이트헤비급으로 출전했다.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8강전에서 1956 멜버른 올림픽 미들급 금메달리스트였던 게나디 샤트코프[14]를 상대로 승리하는 등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고, 결승전에서 폴란드의 즈비그니에프 피에트르지코브스키[15]를 상대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따냈다.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알리. |
로마 올림픽에서 루이빌로 돌아온 직후 "백인 전용" 레스토랑에서 서비스를 거부당해 올림픽 때 받은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에 던졌다는 일화는 1975년 출간된 알리의 자서전 'The Greatest, My Own Story'에 기술된 내용으로, 전기 작가 토마스 하우저와 데이빗 렘닉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은 알리가 어떠한 이유로 메달을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16]
3.2. 프로 경력
3.2.1. 데뷔 초
1960년 10월 26일, 증류소 경영자 윌리엄 파버샴을 필두로 한 루이빌의 사업가 11명은 '루이빌 후원회'를 구성하여 올림픽에서 돌아온 알리가 프로복싱에서도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그와 계약을 맺었다.1960년 10월 29일, 알리는 튜니 헌세이커를 상대로 6라운드 판정승을 거두며 프로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후 후원회는 알리를 샌디에이고로 보내 전설적인 파이터 아치 무어에게 지도를 받게 했지만, 무어는 "내 아내도 그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내 아이들도 그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나도 그를 미치도록 사랑하지만, 그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불평을 토로했다. 알리는 자신의 오랜 우상이었던 슈거 레이 로빈슨처럼 싸우고 싶었던 반면 무어는 알리가 그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둘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결국 알리는 무어의 곁을 떠나 1957년 아마추어 시절에 첫 만남을 가졌던 안젤로 던디[17]를 새로운 트레이너로 맞이했다. 12월에 들어서자 마이애미에 도착한 알리는 던디가 형 크리스와 함께 운영하던 5번가 체육관(5th Street Gym)에서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노가드 복싱을 고수하며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알리의 또다른 상징이라면 역시 그의 거침없는 트래시 토크를 들 수 있겠다. 이는 프로레슬러 고저스 조지를 보고 영감을 받아 그의 수법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덕분에 알리는 신인 시절부터 주목받을 수 있었지만, "루이빌 떠벌이(The Louisville Lip)"라는 조롱섞인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알리는 자신이 경기에서 어떻게 상대들을 물리칠 것인지에 대한 시를 쓰거나, 상대들을 몇 라운드에 제압할 것인지 예측하였다.
1962년 11월 15일, 한때 자신의 트레이너였던 아치 무어를 상대하게 된 알리는 경기 전 "Archie Moore...Must fall in four."라는 라임을 맞춘 문장을 만들며 4라운드 KO승을 예측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알리가 무어를 4라운드 1분 35초 만에 KO시키면서 그의 예측이 딱 들어맞았다.
1963년 6월 18일, 알리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첫 원정경기를 치르기 전에도 영국의 헨리 쿠퍼를 상대로 KO라운드를 예측했다. 5라운드 KO승을 예측한 알리는 아예 쿠퍼를 5라운드에 제압하지 못한다면 미국땅에 30일 동안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거나, 관중들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휘황찬란한 왕관을 머리에 쓴 채로 링에 들어섰다. 경기 직전까지 남다른 자부심을 드러내던 알리는 5라운드 TKO승[18]을 거두며 이번에도 예측에 성공하였고, 나중에 한 기자가 왜 링에 들어설 때 왕관을 쓰고 있었냐고 물어보자 "내가 왕이니까. 영국에 여왕은 있지만, 왕은 없는 걸로 안다"고 대답하면서 그의 거만한 캐릭터를 한없이 뽐내었다.
그러나 알리의 KO라운드 예측도 항상 들어맞던 것은 아니었는데, 1963년 더그 존스와의 대결이 그러했다. 당시 The Ring 헤비급 랭킹 2위였던 알리는 랭킹 3위였던 존스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치를 경기를 앞두고 존스를 6라운드에 제압하겠다고 선언하였다가 경기 시작 며칠 전 4라운드로 정정하기까지 하며 자신만만한 태도로 일괄했으나... 큰소리친 것과 달리 경기 내내 존스에게 고전한 끝에 10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어 경기장을 찾아온 수많은 팬들에게 야유를 받기도 하였다.[19] 한 술 더 떠 KO라운드 예측에 실패했다는 말에 한 변명이 가관이었다.
"사람들은 경기가 10라운드까지 갔기 때문에 내 예측이 빗나갔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나는 존스를 6라운드에 제압하겠다고 말했고, 그런 다음 존스를 4라운드에 제압하겠다고 말했습니다. 6 더하기 4를 하면 무엇입니까?"
그리고 1962년 무명의 소니 뱅크스에게 레프트 훅을 맞고 1라운드 만에 프로 경력 첫 다운을 당하거나, 헨리 쿠퍼와의 경기에서도 4라운드가 끝날 무렵 또다시 레프트 훅에 맞으며 다운을 허용하는 등 커리어 초창기에 오점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1960년대 초반 무하마드 알리, 즉 캐시어스 클레이가 경기 내외적으로 화제를 일으키던 선수였음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인 경기력의 선수로 평가받던 것은 또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눈에 알리는 그저 허풍쟁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3.2.2. vs. 소니 리스턴 1차전
어찌됐건 1963년 헨리 쿠퍼와의 타이틀 엘리미네이터 경기에서 승리한 알리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마침내 1964년 2월 25일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비치의 컨벤션홀에서 WBA, WBC 언디스퓨티드 챔피언 소니 리스턴과 맞붙었다.리스턴은 1962년 플로이드 패터슨과의 대결에서 1라운드 2분 6초 만에 패터슨을 KO시키며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리스턴의 첫 타이틀 방어전이자 패터슨과의 재경기에서도 패터슨은 1차전 때보다 4초를 더 버티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이전에도 여러 인상적인 KO승을 기록했던 리스턴은 다른 헤비급 선수들에겐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20] 반면에 알리는 지난 두 경기에서 너무나도 실망스런 경기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가 리스턴을 이기리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실제 배당률도 7:1로 알리가 압도적인 언더독이었고 경기 전 46명의 스포츠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알리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고작 3명 뿐이었다.
이러한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알리는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그의 코너맨이었던 드루 분디니 브라운과 함께
“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 Rumble, young man, rumble.”
라고 소리를 빽빽 지르며 이전처럼 승리를 자신했다. 심지어 겁도 없이 리스턴에게 조롱을 퍼붓기도 하였는데,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리스턴을 "커다랗고 못생긴 곰"이라고 부른다거나,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되기엔 너무 못생겼어! 세계 챔피언은 나처럼 잘생겨야 해!"라고 말하면서 리스턴의 성질을 건들였다.1963년 11월 5일, 타이틀전에 합의하는 알리와 리스턴. |
경기 당일 계체량 때 알리는 난동이 어찌나 심했는지 위원회로부터 벌금 2천 5백 달러의 징계처분을 받을 정도였다. 신체검사 결과 알리의 심장 박동수는 정상 속도의 2배 이상인 분당 120회였고, 혈압은 200/100이었다. 마이애미 복싱 위원회의 수석 의사인 알렉산더 로빈스 박사는 알리가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고, 죽을 만큼 무서워하고 있으며, 링에 오르기 전에 중압감을 못 이기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서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경기가 취소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1시간 후 신체검사를 다시 실시했을 때 알리의 혈압과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경기는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겁에 질린 알리가 이를 숨기기 위해서 미친 척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지만, 사실 리스턴을 향한 알리의 도가 지나치는 도발행위들은 모두 고도의 심리전을 건 것이었다. 훗날 알리는 "리스턴은 나를 두려워 하진 않지만, 미치광이는 두려워 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 또한 알리는 리스턴이 이전에 3번의 경기에서 모두 1라운드 KO승을 거두며 지난 35개월 동안 9분도 채 못 싸웠다는 사실을 간파했고, 던디와 함께 리스턴의 경기 영상을 철저히 분석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로 링에 들어섰다.
8,297명의 관중들이 모여 컨벤션 홀의 절반을 조금 넘게 채웠고, 두 선수의 대결을 보기 위하여 조 루이스, 슈거 레이 로빈슨, 록키 마르시아노,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윌리 파스트라노같은 복싱계 유명 인사들도 참석하였다. 이때 조 루이스는 아나운서 스티브 엘리스와 함께 폐쇄 회로 TV 방송의 해설을 맡았으며, 스포츠 캐스터 하워드 코셀과 레스 케이터는 ABC 라디오 중계를 진행하였다.
경기 시작 전 리스턴은 알리를 매섭게 쏘아보았고, 알리도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리스턴을 응시하였다. 곧 경기의 첫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알리는 초반부터 재빠른 풋워크와 슬립을 통해 리스턴의 위협적인 레프트 잽과 파워샷을 회피하였고, 오히려 리스턴을 향해 콤비네이션을 적중시키면서 경기를 주도하여 관중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3라운드 리스턴은 알리가 날린 잽잽투를 더킹으로 피했으나, 이내 알리가 두 번째로 잽잽투를 날렸을 때 마지막 투가 안면에 걸려 잠시 주춤거렸다. 그 순간 기회를 놓치지 않은 알리는 바로 무차별적으로 콤비네이션을 날리기 시작했고, 리스턴은 오른쪽 눈 아래가 멍든 데다 왼쪽 눈 밑에 커리어 사상 최초로 커팅까지 났다.
리스턴에게 펀치를 적중시키는 알리. |
그러나 4라운드 종료 후 어찌된 영문인지 알리는 코너로 돌아와 세컨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패닉에 빠지는데... 이때 잠시동안의 헤프닝 때문에 추후 리스턴의 세컨이 알리를 일시적으로 실명시키기 위해서 약물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실제로 1970년 리스턴과 대결한 적이 있는 헤비급 컨텐더 에디 메이컨은 해당 주장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젤로 던디의 의견은 메이컨과 달랐는데, 25년 후 NBC 특집방송에서 던디는 리스턴의 컷맨이었던 조 폴리노가 리스턴의 커팅에 사용한 연고가 클린치 도중에 클레이의 이마로 옮겨가는 바람에 생긴 우연한 사고였을 거라고 생각했다.[21]
이유가 어찌됐든 알리는 5라운드 시작 벨이 울릴 때까지 앞을 볼 수 없었고, 주심에게 경기 포기의사를 선언하려는 듯 손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에 주심이 진짜로 경기를 중단시킬까봐 초조해진 안젤로 던디는 알리의 등을 억지로 떠밀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도망쳐!(Run!)
알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리스턴은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기세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왼손 훅과 라이트를 여러 차례 적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알리는 앞을 볼 수는 없었어도 여전히 발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가능했기에 5라운드가 끝나기 전까지 롱가드를 사용하면서 리스턴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고, 6라운드가 돼서는 시력이 완전히 돌아와 경기의 주도권을 되찾게 되었다. 이후 7라운드 시작 벨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리스턴은 코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에 승리를 직감한 알리는 두 팔을 높이 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중계 해설을 맡고 있던 레스 케이터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은 하워드 코셀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잠시만요! 잠시만요! 소니 리스턴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새로운 세계 헤비급 챔피언의 등장을 알렸다.
승리를 환호하는 알리. |
허나 7:1의 압도적인 탑독으로 평가받던 챔피언이 22살 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에게 완패를 당하자, 경기가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루머는 필연적이었다. 게다가 리스턴은 마피아 연루설로도 떠들석한 인물이었던 탓에 조작 논란을 피해가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한 달간의 조사 끝에 플로리다 주 검사인 리처드 E. 거스타인은 조작과 관련한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으며, 3개월 후 미국 상원 소위원회가 청문회를 열었을 때에도 역시 조작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 2014년 정보공개법에 따라 워싱턴 타임즈에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FBI는 마피아와 관련이 있는 라스베이거스의 도박꾼 애쉬 레스닉이 알리와 리스턴의 1차전을 포함한 여러 권투 경기를 조작한 것으로 의심했다고 한다. 해당 문서에는 알리가 이 계획에 가담했거나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고, FBI가 조사한 의심을 완전히 뒷받침했다는 증거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링사이드에서 이 싸움을 취재한 '뉴어크 스타-레저'의 스포츠 기자 제리 아이젠버그 는 "이게 마피아가 조작한 엄청난 승부조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를 바꿔야 하거나,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필라델피아 데일리 뉴스'의 스포츠 기자 잭 매키니는 이에 동의하며 조작 논란에 대하여 "터무니없다"고 불렀다. 전 스포츠 기자이자 HBO 해설가인 래리 머천트 역시 "리스턴을 통제하던 마피아들이, 자신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하마드 알리에게 통제권을 넘기고 싶어하는 이유가 뭐죠?"라고 물었고, "승부조작의 증거는 어디에 있나요? 저는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며 조작 논란을 믿지 않았다.
3.2.2.1.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의 교류
경기 한 달 전 캐시어스 클레이가 뉴욕시에서 열린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집회에서 연설을 하였다는 기사가 신문 1면을 장식한 것이다. 그후 몇 주 동안 '마이애미 헤럴드'를 포함한 여러 신문사에서 클레이와 네이션 오브 이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룬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는데, 심지어 클레이는 당시 마이애미의 모텔에 머물고 있던 말콤 엑스와도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에 경기의 프로모터였던 빌 맥도날드는 티켓 판매에 영향을 끼칠 것을 염려하였고, 클레이에게 역정을 내면서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관계를 끊지 않으면 경기를 취소시키겠다고 협박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이가 뜻을 굽히지 않자 그대신 말콤 엑스가 마이애미를 떠나고,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클레이의 무슬림 신분을 숨긴다는 조건하에 경기는 취소를 면할 수 있었다.1964년 2월 27일, 리스턴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지 이틀이 지난 후 클레이는 자신이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클레이가 이 단체에 가입했다는 사실은 전날 밤 시카고에서 열린 이 단체의 연례 전국 대회에서 지도자인 일라이저 무하마드에 의해 처음 밝혀졌다.
"저는 5년 전 라디오에서 일라이저 무하마드라는 사람이 이슬람 종교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또한 그의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이나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는 합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또한 그의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이나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는 합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클레이는 캐시어스 엑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단체 구성원들이 더 이상 전 노예 소유주 가문에서 물려준 이름을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성을 엑스로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1964년 3월 6일, 마침내 일라이저 무하마드는 라디오 녹음방송을 통해 캐시어스 클레이가 이름을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22]
무하마드 알리(당시 캐시어스 클레이)가 소니 리스턴을 이기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 에서 우승한 직후 두 선수가 인터콘티넨탈 프로모션스(Inter-Continental Promotions, Inc.)[23]에 알리가 리스턴을 이긴다면 그의 챔피언으로서의 첫 경기를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의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권한도 있었는데, 그 상대는 당연히 리스턴이었다. 이는 두 번째 계약에 있었지만 비밀로 유지되었고, 주요 경기 계약의 일부가 아니었다. WBA가 재경기 조항이 있는 경기 계약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서술되었다. 1963년 8월 21일, WBA는 재경기 조항이 있는 계약을 승인하는 모든 회원국은 자격을 정지하기로 의결했는데, 이 규정은 리스턴이 플로이드 패터슨과의 타이틀전을 위해 강제로 서명해야 했던 계약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24]
알리를 후원하는 단체의 변호사인 고든 B. 데이비슨은 "우리는 재경기를 확정하는 조항을 두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명백히 부당한 연이은 재경기보다 WBA 규칙의 정신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것이 "속임수"라는 말에 동의했다. 알리와 리스턴이 재경기를 하기로 계약했을 때 WBA는 만장일치로 알리의 타이틀을 박탈했고, 리스턴을 랭킹에서 제외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나 WBC, NYSAC, The Ring은 알리를 챔피언으로 계속 인정했다.
WBA의 압박에 캘리포니아, 네바다, 뉴욕을 제외한 전국의 주 권투 위원회는 논란의 두 선수 간의 재경기를 허가하기를 꺼렸고, 경기장을 찾기도 어려웠다. 결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이 경기를 주최하기로 동의했고, 그 결과 WBA는 매사추세츠주 권투위원회의 자격을 정지시켰다.
배당률은 13:5로 지난 경기와 마찬가지로 리스턴이 탑독이었다. 이 경기는 1964년 11월 16일, 보스턴 가든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경기 3일 전, 알리는 감돈 서혜부 탈장에 걸려 보스턴시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어 즉시 수술[25]을 받는 바람에 결국 경기는 1965년 5월 25일로 연기되었다. 하지만 경기가 다가오자 프로모터가 조직 범죄와 관련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고, 매사추세츠 공무원, 특히 서폭카운티 지방검사였던 가렛 번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번은 보스턴에서 경기를 금지하는 가처분 명령을 요청하면서 인터콘티넨탈 프로모션스가 매사추세츠주의 허가없이 경기를 주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터콘티넨탈은 지역 베테랑인 샘 실버먼이 프로모터라고 말했다. 5월 7일, 재경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법정싸움을 끝내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보스턴에서 경기를 철회하였다.
프로모터들은 전국의 폐쇄회로 텔레비전 공약을 구하기 위해 규모에 상관없이 빠르게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는데, 메인 주지사 존 H. 리드가 나선 덕분에 몇 시간 만에 프로모터들은 보스턴에서 북쪽으로 140마일 떨어진 인구 약 41,000명의 제분소 마을인 메인주 루이스턴이라는 새로운 장소를 확보했다.[26] 인터콘티넨탈은 허가를 받았고, 지역 프로모터 샘 마이클과 협력하기로 했다. 선택된 장소는 주니어 하키 경기장인 세인트 도미닉 홀이었고, 이는 메인주에서 열린 유일한 헤비급 타이틀전이다.
싸움을 둘러싼 분위기는 긴장되고 때로는 추악했는데, 주로 알리가 일라이저 무하마드와 네이션 오브 이슬람를 공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의 여파 때문이었다. 일라이저 무하마드와 공개적으로 격렬한 불화를 빚었던 말콤 엑스는 싸움이 있기 몇 달 전에 암살당했고, 살해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 구성원들이었다. 말콤 엑스가 일라이저 무하마드와 결별하자 그를 공개적으로 무시했던 알리가 말콤의 지지자들에게 보복으로 살해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FBI는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알리 주변에 12명의 경비원들을 24시간 배치했다. 이에 리스턴의 진영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편재하는 나비넥타이를 맨 준군사 조직인 프룻 오브 이슬람이 알리를 둘러싼 것은 불길한 예감과 적대감을 더할 뿐이었다. 그 당시 경기에 필요한 보안은 전례가 없을 정도였고, 외딴 지역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4,900석 규모의 경기장에 단 2,434명의 팬만 모였으며, 이는 헤비급 챔피언십 경기 역사상 최저 관중 기록을 세웠다.
3.2.3. vs. 소니 리스턴 2차전
논란의 장면은 11분 47초부터. |
많은 관중이 알리가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경기장은 금세 혼란에 빠졌다. 이 경기의 주심을 맡고 있던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 저지 조 월컷은 알리를 중립 코너로 가도록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알리는 처음에 다운당한 리스턴의 위에 서서 몸짓을 하며 "일어나서 싸워, 개자식아!"라고 소리쳤다. 월컷이 리스턴에게 돌아와 카운트를 세기 위해서 넉다운 타임키퍼였던 프랜시스 맥도노프를 바라보았지만, 리스턴은 또다시 캔버스에 쓰러졌다. 월컷은 마이크가 없는 맥도노프의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카운트를 셀 수도 없었다. 또한 맥도노프는 캔버스를 두드리거나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는 동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맥도노프는 월컷이 관중석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리스턴이 일어나자 월컷은 경기를 속행시켰지만 맥도노프는 월컷에게 손을 흔들며 리스턴이 10카운트를 넘겼다고 말했고, 맥도노프 옆에 앉아 있던 냇 플라이셔(The Ring 편집자)도 손을 흔들며 경기가 끝났다고 말했다.[27] 그 말을 들은 월컷은 경기를 재개한 선수들에게 달려가 경기를 중단시켰고, 알리의 1라운드 KO승을 선언했다.[28] 경기 후 월컷은 "저는 제 일을 했습니다. 그(알리)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무엇을 할지 몰랐습니다. 그가 그를 밟거나 들어올려 다시 때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맥도노프는 "만약 그놈 클레이가 미친 놈처럼 돌아다니지 않고 중립 코너로 갔다면 모든 문제를 피할 수 있었을 거요."라고 말하며 월컷이 "그 난폭한 놈, 클레이를 중립적인 구석으로 데려온 후에" 자신에게 다시 카운트를 시작하라고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경기가 중단되자 수많은 팬들이 야유를 보내며 조작("Fix!")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회의론자들은 이때 알리의 KO펀치를 조롱의 의미로 "팬텀 펀치"라고 불렀다.[29] 경기 후 링에서 알리는 폐쇄회로 해설자 스티브 엘리스에게 "내가 깜짝 놀랄 일이 있다고 세상에 말하지 않았나요? 내가 깜짝 놀랄 일이 뭔지 말했다면, 당신들은 싸움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알리는 경기 직후 펀치가 제대로 맞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30]
슬로 모션으로 본 알리의 팬텀 펀치. |
경기가 끝난 후, 조지 추발로는 아예 링 위로 올라가 알리를 밀치며 난동을 부리다가 제지당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추발로는 당시 리스턴의 상태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는데, 선수가 다치게 되면 눈이 위로 올라가는 반면 리스턴이 다운을 당했을 때 자세히 살펴본 결과 눈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음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넉아웃된 선수의 반응을 연구한 전 켄터키 주 복싱 위원 캐럴 L. 위튼 박사는 "추발로는 틀렸다. 눈의 좌우 흔들림은 일반적으로 일시적인 의식 상실과 관련이 있으며, 가장 먼저 발견되는 현상 중 하나다. 이것을 안진이라고 한다."라며 추발로의 주장에 반박했다.
이 경기를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호세 토레스는 완벽한 펀치였다고 말했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짐 머레이는 팬텀 펀치가 아니었다며 알리를 옹호했다. 그리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텍스 몰 은 "그 펀치는 너무 강해서 리스턴의 체중 대부분이 실려 있던 왼발이 캔버스에서 훨씬 들어올려졌다."라고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중에 한명은 명예의 전당 아나운서인 돈 던피로 그 남자는 감옥에 있었고, 간수들이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도 쓰러뜨릴 수 없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가 같은 리스턴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뉴욕 타임스'의 데이브 앤더슨은 리스턴이 경기 전 마지막 운동에서 "끔찍해 보였다"고 말했고, 리스턴의 세컨이 비밀리에 스파링 파트너였던 에이모스 링컨에게 100달러를 더 지불하며 리스턴을 무리하게 만들지 말라고 요구했다. '뉴욕 타임스'의 아서 데일리는 리스턴의 세컨드에서 그가 "더 이상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썼다.
링사이드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던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 제임스 J. 브래덕은 알리의 오른손이 단지 앞서 펀치로 시작된 것을 끝낸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브래덕은 "저는 이 사람(알리)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 기억에 남는 것은 녹아웃 펀치가 아니라 (이전에) 그가 낸 펀치입니다... 그것은 리스턴의 턱에 가해진 직격이었고 그는 신발 위로 흔들렸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이 녹아웃을 만든 펀치였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전 챔피언인 록키 마르시아노는 다음 날 비디오테이프를 본 후 KO펀치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마르시아노는 "링사이드에서 경기를 보았을 때는 강력한 펀치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비디오를 본 후) 클레이가 가드가 열린 것을 보고 마지막 6인치에서 펀치를 꺾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데이브 앤더슨은 1967년 라스베가스에서 리스턴을 만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었고, 리스턴은 그렇게 강한 펀치는 아니었지만 균형을 약간 잃었고 다운을 당했을 때 주심이 카운트를 세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고 답했다. 리스턴은 "나는 카운트를 들으려고 하였다. 그게 제일 먼저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클레이가 중립 코너로 가지 않아서 카운트를 들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뉴어크스타레저'의 제리 아이젠버그는 리스턴이 자신에게 "타임키퍼가 카운트를 셀 수 없어서" 졌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Mark Kram은 리스턴이 자신에게 "그 녀석(Ali)은 미쳤다. 나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슬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그런 걸 필요로 했겠어? 그래서 나는 쓰러졌다. 나는 맞지 않았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1995년 HBO에서 리스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을 때, 라스베가스에 복싱 체육관을 소유한 트레이너 조니 토코는 재경기 전에 세인트 루이스 패밀리의 존 비탈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토코는 비탈로부터 경기에 대해 들은 말을 신경 쓰지 말라고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한 토코에게 루이스턴에 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말했다. 토코가 이유를 물었을 때, 비탈은 싸움이 1라운드만에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전 FBI 요원 윌리엄 F. 로머 주니어는 "우리는 그 경기에 조작이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시카고의 권투 매니저이자 마피아와 관련이 있는 버니 글릭먼이 싸움 전에 리스턴과 그의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리스턴의 아내가 리스턴이 경기에서 져야 한다면 부상당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링에서 일찍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리스턴이 일부러 졌다고 믿은 사람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가설들을 세웠다.
- 마피아가 승부조작의 일환으로 리스턴에게 경기를 포기하라고 강요했다.
- 리스턴은 마피아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알리에게 베팅을 하고 일부러 졌다.
-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몇몇 구성원들이 리스턴의 훈련캠프를 방문하여 리스턴에게 재경기에서 이기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구성원들이 리스턴의 아내 제럴딘과 아들 바비를 납치했고, 리스턴은 재경기에서 알리를 이긴다면 가족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들었다.[31]
- 리스턴은 링에서 알리를 죽이려고 하는 말콤 엑스의 추종자들에 의해 실수로 총에 맞을까봐 두려워했다.
논란이 많았던 경기의 여파로 언론과 정치인들은 권투 폐지를 요구했고, 여러 주 의회에서 이 스포츠를 금지하는 법안이 계획되었다. 샌안토니오의 한 프로모터는 극장 TV 고객에게 사과했고, 그들이 "부끄러운 광경"에 사기를 당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수입을 소년 클럽에 기부했다. 캘리포니아 의회는 회의 중에 폐쇄회로 시청자들이 사기로 돈을 뜯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 법무 장관이 조사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받았다.
3.2.4. vs. 브라이언 런던
브라이언 런던과의 경기 영상 |
무하마드 알리의 속도 |
3.2.5. vs. 조지 포먼
알리의 가장 유명한 경기는 조지 포먼과 맞붙은 "The Rumble In The Jungle" 이다. 당시 조지 포먼은 24세의 압도적인 챔피언이었고 지금까지도 헤비급 역사상 최고의 핵주먹으로 평가받는 강타자였다. 게다가 알리와 싸우기 직전에도 헤비급 역사에 꼽히는 인파이터인 조 프레이저를 상대로 한 경기에 6번이나 다운시키며 2라운드 KO 승리를 거두며 기량이 절정에 달한 상태였다. 반면에 32세의 알리는 이전에 베트남 전쟁 징병 거부로 인해 선수 자격을 박탈당해 신체적 최전성기인 25세부터 29세까지 4년 동안 선수 생활을 전혀 하지 못했다. 게다가 알리는 전성기에도 강펀치 스타일은 아니었으며 주무기였던 순발력과 민첩성도 노쇠한 상황이었다.하지만 알리는 이토록 온갖 불리한 조건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때처럼 경기를 앞두고 도발과 언론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난 저번 주에 돌을 죽여버리고 바위를 박살내고 벽돌을 병원으로 보내버렸어!"
"난 너무 빨라서, 어제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이 꺼지기도 전에 침대에 들어갔지."
"난 너무 빨라! 링 위에서 댄스를 보여주마. 포먼은 날 볼 수도 때릴 수도 없을 거라고!"
"너희들 모두 포먼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 하지만 두고봐라, 내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마!"
1974년, 포먼과의 경기를 앞두고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의 기자 회견에서 알리가 한 말들.
물론 알리의 이런 도발에도 불구하고 세상 그 누구도 알리에게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알리가 늘 해오던 자신감 과시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것은 평소 알리가 해오던 언론 플레이와는 차원이 다른 작전이었으며,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알리는 자신이 "댄스를 보여주겠다"라며 순발력과 민첩성으로 포먼을 제압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33]"난 너무 빨라서, 어제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이 꺼지기도 전에 침대에 들어갔지."
"난 너무 빨라! 링 위에서 댄스를 보여주마. 포먼은 날 볼 수도 때릴 수도 없을 거라고!"
"너희들 모두 포먼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 하지만 두고봐라, 내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마!"
1974년, 포먼과의 경기를 앞두고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의 기자 회견에서 알리가 한 말들.
경기 시작은 21분 11초부터. 하이라이트는 51분 30초부터. |
그런데 2라운드에 돌입하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알리의 '진짜 속셈'이자, 가디언지가 '스포츠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박' 이라고 일컬은, 'Rope-a-dope' 전술이 실행된 것이다. [35]
Rope-a-dope 로프에 몸을 기대고 로프의 신축력과 반동을 이용해 상대의 타격을 흡수하는 전술로, 알리가 바로 이 포먼 전에서 최초로 창시한 전술이다. |
이후로 상황이 경기 전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알리는 포먼의 펀치를 모두 흡수하며 자신의 공격을 모조리 성공시켰고, 4라운드에서 펀치를 주고 받으며 살짝 비등한 모습을 보였으나 5라운드에서는 포먼에게 맞으면서도 미소를 짓는 여유를 보였다. 반대로 포먼은 경기 내내 알리의 전술과 운영에 완벽히 말려들어 효과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포먼이 아예 가까이 들이대면 알리는 클린치를 걸어 공격을 차단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왕을 상대로 백전노장 도전자는 노련한 모습을 보이며 8라운드까지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조지 포먼에게 펀치를 적중시키는 무하마드 알리. |
"...아마도 이게 알리의 작전인가 봐요. 자기 펀치에 자기가 나가떨어지도록 말이지요!"
라운드 종료 20초 전, 코너에 몰린 듯한 알리의 오른손이 포먼에 적중한다. 이후 몇 번의 잽에 이어 라이트 펀치가 포먼에게 한번 더 적중한 순간 알리는 코너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운드 종료 15초를 남긴 순간, 포먼이 그로기 상태가 된 것을 확신하자[38] 알리는 재빠르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종료 13초 전 눈 깜짝할 사이에 2차례의 펀치를 포먼의 턱에 정확하게 꽂아넣었다. 그리고 포먼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라운드 종료 10초에 카운트에 들어가서 라운드가 끝나는 정확히 00:00초에 KO 선언이 나왔다. 이로서 싸움은 전설이 되었다.전성기 때 3초에 12번의 펀치를 날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고, 1초 내에 주먹 두 번은 보통 사람도 할 수 있다. 비록 경기 내내 우세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이때 알리는 32세의 나이, 8라운드 24분 가까이 뛴 상태, 그리고 헤비급 사상 손꼽히는 24세의 젊은 돌주먹 챔피언의 펀치를 계속 몸으로 받았다. 아무리 로프를 이용하며 가드로 받아낸다고 해도 누적되는 피해와 피로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로프에 등을 기댄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회피는 상체로만 하겠다는 것인데, 이 경기에서만 보자면 회피는 거의 포기하고 그냥 가드와 맷집으로만 버틴 것.[39] 알리는 그 상태에서 찰나의 순간 그림 같은 펀치 콤비네이션을 포먼의 안면에 정확히 적중시켰다.
이 경기는 지금까지도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기로 평가받는다. 단순히 알리와 포먼이라는 뛰어난 선수들이 맞붙었다는 것 이상으로 알리의 두뇌와 끈기가 빛을 발한 경기였다. 시합 전 기자 회견부터 경기가 KO로 끝나는 순간까지 알리가 완벽하게 구상하고 연출한 전략적 걸작이었고, 본인만의 주무기를 잃은 노장이 최강의 젊은 챔피언을 꺾은 기적이었으며, 승리를 위해 유례없던 도전을 과감히 행한 용기와, 그것을 견뎌내고 끝내 이겨낸 위대한 끈기였다. 그리고 팬들은 복싱 역사상 가장 강력한 주먹을 상대로 스스로를 로프에 고립시킨 알리의 용기에 열광했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왕좌에서 내려왔던 알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정상을 탈환한 것에 환호했다.[40]
그야말로 경기가 있기 전 양 선수의 배경과 상황, 서로 간의 치열한 신경전, 경기의 진행, 전술적 완성도, 해설진의 코멘트까지 스포츠 만화보다도 더 만화 같은 극적인 결과를 낳으면서 복싱 역사에 영원히 남을 명경기가 되었다. 알리가 GOAT로 인정받은 이유 중 하나인 명경기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로프 어 도프 전술에도 파훼법은 존재한다. 로프에 기댄 선수를 클린치를 통해 떨어 뜨리는 등 굳이 무리해서 때리지 않거나, 혹은 머리보다는 비교적 움직임이 적은 보디를 위주로 치되 롱 펀치 대신 체력이 덜 닳는 숏 훅이나 어퍼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방법도 있다. 다만 로프 어 도프 전술은 이 경기에서 최초로 등장한 전술이었다. 더군다나 이 당시의 포먼은 무뚝뚝하게 힘으로 몰아붙이며 별 다른 전략을 잘 쓰지 않던 일명 "첫번째 포먼" 시절이라 미처 이 방식을 떠올리지 못하고 강펀치만 날리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포먼 본인도 "경기 내내 내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 할 정도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술이었다. 이 경기 뒤에도 알리는 론 라일이나 어니 세이버스 같은 슬러거들도 로프 어 도프 전술로 상대해 승리했다.
3.2.6. vs. 조 프레이저
경기 시작은 17분 20초부터. |
알리와 포먼의 경기가 역사적 의미에서 최고의 명경기라면, 내용의 치열함에 있어서는 조 프레이저와의 3차전이 권투 사상 최고의 명경기로 꼽힌다. 이 경기는 경기 전 신경전도 치열했고 경기 내용도 대단했는데, 경기장 냉방 시설마저 고장나서 선수들 뿐 아니라 보는 사람들마저 지칠 대로 지쳤던 경기다. [41]
이 둘은 세 차례나 맞붙으며 복싱 역사상 가장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프레이저와 알리의 1차전, 15라운드까지 가는 혈투 속에서 결과는 프레이저의 판정승. 알리의 생애 첫 패배였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프레이저가 조지 포먼에게 2라운드에만 6번의 다운을 당한 끝에 KO 패배로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기고, 이후 알리가 그 포먼을 무너뜨리며 다시 챔피언이 된다. 이후 알리는 프레이저를 상대로 두 번의 타이틀 방어전을 치렀고, 모두 승리한다. 2차전은 알리의 만장일치 판정승이었고, 3차전에선 알리의 14라운드 TKO승. 전적 2승1패로 완벽하게 설욕한 것이다.
대중과 언론앞에 나서서 흥미 유발을 즐겼던 알리와 달리 프레이저는 별 다른 마케팅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프레이저는 1975년 10월 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알리와 경기를 앞두고 이처럼 기도했다. "신이시여, 저 녀석을 때려눕힐 힘과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덤으로 프레이저가 챔피언이 된 후 알리가 베트남 전쟁 참전 거부로 인해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자 프레이저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의 면담[42]에서 알리의 라이선스를 다시 발급해달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하며 여러 방면으로 그를 도우기도 했다. 허나 알리는 프레이저를 '백인에게 굴종적인 흑인'이라고 말하며 그를 탐탁스럽지 않게 여겼다. 이로 인해 둘의 관계는 선수 생활 내내 나빴고, 둘 다 은퇴 후 노인이 되어서야 화해했다.
이들의 혈투는 '마닐라의 전율'(Thrilla in Manila)이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알리가 프레이저와의 3차전을 앞두고 "이 경기는 마닐라의 전율이 될 것이다"라며 '스릴라' + '마닐라'로 라임을 맞추는 입담을 선보였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켜 경기 이름을 '스릴러 인 마닐라'로 부르게 되었다.
4. 은퇴 후
그의 권투 신화는 1978년 2월 15일 레온 스핑크스[43]에게 패하면서 저물기 시작했다. 이때 상실한 WBC, WBA 헤비급 타이틀 중 WBA 타이틀은 같은 해 9월 15일 다시 레온 스핑크스와의 설욕전 끝에 탈환했으나[44] WBC 타이틀은 탈환하지 못했고 1981년 은퇴했다.
은퇴한지 3년밖에 되지 않은 1984년, 병원을 찾은 알리는 의사로부터 파킨슨병 진단을 받는다. 파킨슨 병은 근육 움직임이 제대로 제어가 안 되고 손발을 떠는 등 이상 증세가 나타나다가 점차 몸이 마비되는 병이다. 알리의 파킨슨병 진단은 공식적으론 1984년이지만, 선수 말년 시절의 영상들을 보면 이미 움직임과 언행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어눌해지고 느려지고 부자연스러워졌기 때문에 이미 1970년대 말부터 파킨슨병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전성기 때 엄청나게 떠벌이였던 그가 더듬거리며 말도 잘 못하게 되었으니 권투 관련 인물들을 비롯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 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이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의 성화 점화 장면. 한쪽 손이 덜덜 떨리며 걸음이 부자연스러움에도 성화 점화자로써 의지를 보이는 모습은 전세계에 큰 감동을 안겼다. 그리고 1960 로마 올림픽 이후 36년 만에 또 다른 금메달을 증정받았다.
선수 생활을 하며 펀치를 많이 맞은 게 누적되었기 때문에 파킨슨병이 생긴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는 의학적 견해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근거 없는 오해일 뿐이다. 파킨슨 병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건지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은 어쨌든 뇌에 이상이 생긴 거니까 파킨슨 병이나 펀치 드렁크 증후군이나 다 비슷한 병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퍼진 건데, 실은 파킨슨 병과 펀치드렁크 증후군은 전혀 다른 종류의 질환이다. 펀치로 인한 뇌의 충격이 누적되어 생기는 펀치드렁크와는 달리 파킨슨병은 발생 원인 자체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의학 통계 조사에 따르면 복싱, 미식축구, 럭비 등과 같이 뇌에 타격을 많이 받는 종목의 선수 출신들이 일반인에 비해 파킨슨 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지도 않은 걸로 보아 파킨슨 병의 발병과 뇌에 대한 물리적 타격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한다. 즉 알리가 복싱 선수 활동을 한 것과 파킨슨 병의 발병은 별 관계가 없는 것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알리는 은퇴와 투병의 시기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은퇴 이후에는 사회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는 어려워졌지만, 오히려 참여 영역은 현역 때보다도 다양해졌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파킨슨병 연구 재단 설립과 사담 후세인을 직접 설득해 인질을 석방한 것.
2016년 6월 3일 앓고 있던 파킨슨병의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날 조지 포먼, 마이크 타이슨, 플로이드 메이웨더, 매니 파퀴아오 등 수많은 복싱계 인물들이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알리의 관을 운구할 때 마이크 타이슨과 윌 스미스도 직접 운구했다. 알리가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믿었던 종교가 이슬람교 수니파였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은 수니파식으로 치러졌다.
5. 평가
그는 단순한 무슬림도, 흑인도, 루이빌의 아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The Greatest of All Time"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무하마드 알리였습니다. 그 누구보다 더 크고, 더 밝고, 더 독창적이고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틴 루터 킹과 넬슨 만델라와 함께 섰고, 어려운 시절에 함께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꺼릴 때 나서서 말을 하며 행동했습니다. 세상을 뒤흔들었고, 그로 인해 세상은 더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어린 혼혈아가 자신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 대담함을 갖도록, 영감을 갖도록 도와줬습니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미국 그 자체였습니다. 앞으로도 늘 그러할 것입니다. 누구보다 멋진 인간이자, 영혼이었으며, 유쾌했던 우리의 최강의 챔피언입니다. 신의 축복이 있길, The Greatest of All Time.
- 버락 오바마, 알리를 추모하며
그는 마틴 루터 킹과 넬슨 만델라와 함께 섰고, 어려운 시절에 함께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꺼릴 때 나서서 말을 하며 행동했습니다. 세상을 뒤흔들었고, 그로 인해 세상은 더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어린 혼혈아가 자신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 대담함을 갖도록, 영감을 갖도록 도와줬습니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미국 그 자체였습니다. 앞으로도 늘 그러할 것입니다. 누구보다 멋진 인간이자, 영혼이었으며, 유쾌했던 우리의 최강의 챔피언입니다. 신의 축복이 있길, The Greatest of All Time.
- 버락 오바마, 알리를 추모하며
저도 어떤 면에서는 제가 대단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알리가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는 건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만 합니다. 알리는 저보다도 펀치가 강한 조지 포먼이나 어니 세이버스를 상대로도 승리한 위대한 챔피언입니다.
- 마이크 타이슨 출처[45]
- 마이크 타이슨 출처[45]
"...무하마드 알리의 위대함은 그저 훌륭한 선수라는 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존재감이었습니다. 알리와 함께 링에 들어선다는 것은 그저 '훌륭한 복서', '훌륭한 싸움꾼'을 상대하는 게 아니었어요. 이제껏 만난 사람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The Greatest)과 경합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위대한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위대한 사람은 잽이니 라이트니 하는 것으로는 상대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가 그에 걸맞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만 상대할 수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복서, 훌륭한 펀쳐를 찾는다면 알리를 찾지 마십시오.
하지만 사상 최고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궁금하다면, 그가 바로 무하마드 알리입니다."
- 조지 포먼, 알리를 추모하며
알리의 커리어는 복서가 어떻게 진화하고 노화에 대처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알리 이전 세대의 복서들은 자신만의 장기를 극대화하여 난타전에서의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주로 택했다. 현대 복싱의 근간을 다진 선수인 슈거 레이 로빈슨은 이 전략의 정점에 서있었다. 하지만 알리는 아웃복싱과 인파이팅을 모두 적절히 구사할 줄 알았고, 본인이 아마추어 복싱부터 다져진 풍부한 경험에 의해 상대의 우위에 있다는 점을 잘 이용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위대한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위대한 사람은 잽이니 라이트니 하는 것으로는 상대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가 그에 걸맞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만 상대할 수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복서, 훌륭한 펀쳐를 찾는다면 알리를 찾지 마십시오.
하지만 사상 최고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궁금하다면, 그가 바로 무하마드 알리입니다."
- 조지 포먼, 알리를 추모하며
알리 이전에 활동한 슈거 레이 로빈슨이 풋워크 사용과 아웃 복싱으로 대성공을 거뒀으나, 로빈슨 이후에도 당시의 아웃 복싱은 비주류 스타일이었고 선수들의 파이팅 스타일도 각자만의 한 가지 스타일에 고착되어 있었다. 더불어 풋워크의 중요성도 일깨워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알리는 당시에 보기 드문 아웃 복싱을 구사하는 선수였다. 알리의 하이라이트 영상 등에 잘 나오지만 초창기 알리는 빠른 풋워크와 레프트를 이용해서 상대를 제압하고 순간적인 콤비네이션으로 다운을 따냈다. 알리는 체력 소모, 힘싸움, 움직임의 둔함이 가장 심한 헤비급에서 경량급 선수처럼 현란한 풋워크와 좌우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운 펀치 구사, 또 그것을 가능하게끔 하는 기력으로 수많은 승리를 거두며 오랜 기간 챔피언으로 군림했다. (오소독스가 주였으나 오소독스와 사우스포 모두 완벽히 구사하였다.) 이런 알리의 '탈(脫)헤비급' 퍼포먼스와 업적은 당대 복싱계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알리는 아웃 복싱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 변화를 시도했다. 어니 터렐, 클리브랜드 윌리엄스, 론 라일 등과의 경기에서 아웃복서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인파이팅을 여러번 선보였고, 레온 스핑크스, 조라 폴리 등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Right-Hand Lead' 전략이나, 풋워크가 노쇠한 후에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어니 세이버스 등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Rope-a-Dope' 전략 등 고정적인 스타일로는 소화할 수 없는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또한 '알리 스텝'으로 불리는 본인만의 독자적인 풋워크를 개발했고, 이는 현대 격투기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받는 풋워크로 안착했다. 또한 복싱의 노가드 전술도 알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렇듯 복싱 역사에서 알리의 위치가 높은 이유가 바로 완성형 복서의 프로토 타입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전성기에는 압도적인 아웃복싱과 인파이팅을 구사하면서 챔피언으로 군림했고, 나이를 먹고 신체 능력이 저하된 뒤에는 퇴보하는 게 아닌 경험과 전략을 바탕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를 보여준 셈) 이러한 알리의 퍼포먼스와 커리어는 복싱 전반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이것은 현대 복싱에서 아웃 복싱이나 인파이팅 등 한 가지 파이팅 스타일에 매몰되는 '반쪽짜리' 복서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복싱의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지는 결과물로 이어졌다. 슈거 레이 로빈슨이 아웃 복싱을 완성해 복싱의 기초를 다졌다면, 무하마드 알리는 그 완성된 아웃 복싱을 기반으로 복싱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올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알리는 현대 복싱의 선구자이자 복싱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다.[46]
이 외에도 알리는 복싱을 당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발돋움시키고, 더 나아가 스포츠 업계와 팬들의 관계 및 접근법에 대한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실력과 결과가 전부라고 여겨지는 스포츠, 그것도 그런 경향이 가장 심한 격투기에서 알리는 챔피언이 되기도 전인 신인 시절부터 자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지칭하며 즉흥적이고 재치있는 발언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과묵함이 미덕'이던 격투기의 암묵의 룰을 깨고 과감하게 자기표현을 행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알리는 당시에 '입만 산 떠벌이'라는 등의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모두가 알다시피 알리가 등장한 이후로 격투기는 물론 타 스포츠 종목에서도 선수 본인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여 마케팅을 펼치는 선수들이 굉장히 많아졌고 현대에 와서는 일종의 문화처럼 자리매김했다.
더 나아가 알리는 자기 표현에서 그치지 않고 복싱을 통해 대중들과의 소통을 시도했다. 그 대상은 경기장 안에 들어선 관객들이 되기도 했고, 경기장 밖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되기도 했다. 상대 선수와의 대결을 단순히 '스포츠 선수'로서의 대결로서 놔두지 않고, 알리 개인의 정체성 혹은 사회적 가치가 내재된 대립 구도로 전환시켰다. '사회 운동가' 문단에 설명된 플로이드 패터슨, 어니 테럴과의 대결이 그 대표적 예시다. 또한 언론에게 '입만 산 떠버리'라고 공격받자 자신의 입에 자물쇠가 걸린 테이프를 붙인 사진을 공개하나, 라커룸 칠판 위에 '다음 상대는 4라운드 만에 제압할 것'이라고 적거나, 자신이 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시민들 앞에서 즉석으로 시를 낭송하거나, 흑인 사회의 부흥을 위해 포먼과의 경기 장소를 킨샤사로 택하는 등, 알리 본인이 "복싱은 그저 세상에 날 소개하기 위한 도구"라고 말했듯이 알리는 복싱을 소통 수단이자 사회 참여의 도구로써 적극 활용했다. 이는 알리 이전에는 스포츠계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사회 현상이었다.
심지어 알리는 경기 도중 링 위의 상대 선수에게도 말을 걸었다. 자신을 '클레이'라 부르며 조롱한 어니 테렐을 링 위에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며 자신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라고 소리치거나, 조지 포먼의 펀치를 받아내는 도중에도 '그게 다냐, 조지?'라고 도발한 것이 그 예다.
알리는 뛰어난 쇼맨십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펀치를 맞으면 다리를 휘청거리는 척 능청을 떨거나, 클린치 상황에서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젓는 등의 제스처를 취하고, 상대에게 더 해보라며 손을 까딱까딱 거리거나, 쉬는 시간에 팔을 흔들며 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게 하기도 했다. 반대로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는 양 팔을 만세하듯 들어올려 자신감을 표현하는 등 일종의 연극처럼 과장된 움직임을 선보이기도 하고, 페이크 모션이나 셔플스텝 등을 사용하여 심리전과 시각적 재미를 모두 이끌어냈다.
언제나 전설로 회자되는 '노가드(No Guard)' 회피 장면.[47] |
그리고 현란한 풋워크와 노가드 전술 등 알리의 복싱 스타일이 주는 시각적 효과도 일종의 자기표현이자 관객들과의 소통 수단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상술했듯이 알리 이전의 복싱은 풋워크에 대한 개념이 체계적으로 자리잡기 전이라서 난타전 등의 힘싸움을 통해 경기를 지배하는 방식이 주류였다. 그런데 알리는 당시에는 파격적이게도, 가드를 내린 채 링 전체를 쉴 새 없이 누비고 다니다가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펀치를 꽂아 넣고는 상대의 공격을 부드럽게 회피하곤 했다. 이렇듯 유연한 움직임이 강조되는 알리의 스타일은 경직성과 힘싸움으로부터 벗어나 시야와 각도 등의 유리함을 선점하여 상대에게 비대칭성을 강요했다. 독일의 사회과학자 얀 필립 렘츠마는 이러한 알리의 스타일에서 오는 '비대칭성'이 그가 상대를 압도하는 지배력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스포츠 철학자 정계화 씨는 이에 덧붙여 "우아함은 파괴성을 배제하고 파괴력은 우아함을 거부하는 게 상례이지만, 이 상례는 알리의 움직임에서 깨진다"라고 설명하며 그의 복싱 스타일이 '문명에 반하는 야만적인 폭력 행위'였던 권투를 '미학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우아한 행위'의 경지로 이끌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알리가 행해온 직간접적인 커뮤니케이션 외에도, 그가 복싱을 하는 방식과 움직임 자체가 복싱에 일종의 감성을 부여하여 관객들을 동요시키고, 그로 하여금 복싱이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이자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되는데 암시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리의 퍼포먼스와 커리어는 복싱의 기술적 발전에 대한 공로 외에도, 이렇게 대내외적으로 행해온 직간접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관중들을 제3자로써 지켜보기만 하는 '관찰자'가 아닌 적극적으로 끼어들고 영향을 끼치는 참여자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즉 스포츠가 단순히 선수 개개인이 육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그 결과물을 보여주는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대중들이 참여함으로써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데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것은 알리를 평가를 할 때 그의 신체적 퍼포먼스와 커리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의 카리스마, 존재감이라는 키워드와도 맥락을 같이하는 요소이다. 문서 상단에 위치한 조지 포먼의 추모사에 적혀있는 '압도적인 존재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수식어는 그가 복싱 선수로서의 기본에 충실하여 뛰어난 기량과 성적을 남겼음은 물론, 복싱을 통해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함과 더불어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한 존경과, 그것이 사회 현상으로 확대된 성과에 대한 찬사를 담은 평가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알리가 '뛰어난 복싱 선수', '영향력 있는 스포츠맨'을 넘어서 범사회적으로 '위인'으로까지 여겨지는 것은 복싱을 넘어 사회적 부당함에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선 그의 위대한 도전 정신과 끝내 굴하지 않고 승리한 업적에 따르는 존경이다. 알리는 수많은 챔피언들을 상대로 언더독 판정을 수두룩하게 받으면서도 그들과 겨뤄 챔피언 자리를 쟁취하였고, 백인 사회의 부당한 차별에 맞서며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 당하고 재판까지 받는데도 저항 정신을 굽히지 않는 등 흑인 사회의 대표로서 숱한 투쟁을 거쳐왔으며, 미국 흑인 사회를 넘어 제 3세계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긍정적 방향으로 활용했다. 대표적인 예로 조지 포먼과의 챔피언 타이틀 전이 이뤄진 장소가 킨샤사인 것도, 아프리카계와 흑인 사회의 부흥에 보탬이 되겠다는 알리의 생각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또한 전성기가 지난 노쇠한 몸으로도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고 성공시키며 끝없이 발전했다. 전성기가 지난 뒤 맞붙은 역대 최강의 챔피언 조지 포먼을 꺾었고, 오랜 라이벌로 비교되던 조 프레이저와의 정면 대결에서도 전적 2대1로 승리하며 자신의 우위를 증명했다. 또한 은퇴 후 몸과 언어의 자유를 앗아간 파킨슨병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꾸준히 사회운동가로서 활동을 하고 부당한 현실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등 외적으로는 사회적 부조리와, 내적으로는 병마와 맞서 싸우며 평생을 자신감과 도전 정신, 투쟁 정신의 화신과 같이 살았다.
정리하자면 알리는 권투 실력과 시대 정신, 인간적 매력을 모두를 갖춘 완전체에 가까웠다. 시와도 같이 아름답고 거침없는 언변, 인종차별같은 사회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는 투쟁 정신,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즐비했던 60~70년대 헤비급을 평정한 역대 최고의 실력 등 권투라는 스포츠의 전투적인 이미지와 무하마드 알리라는 한 인간의 이미지가 당시 사회 상황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며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임은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흑인 사회의 영웅이자 아이콘으로, 복싱을 넘어 인류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존경받고 있다. 항상 외치던 말인 “I’m the Greatest” 를 말 그대로 실현시킨, GOAT(Greatest Of All Time)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6. 사회운동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서 함께 활동했던 말콤 엑스와 함께. 여자아이들은 모두 말콤 엑스의 딸들이다. |
알리는 권투선수로서도 엄청난 업적을 이뤘지만, 사회 운동가로서 남긴 영향력 또한 상당하다. 사담 후세인을 직접 만나서 설득해 인질로 붙잡힌 미국인 15명을 석방할 수 있도록 했고, 베트남 전쟁 징병 거부를 통해 미국 사회의 인식에 계몽을 가져왔으며, 흑인민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자살하려는 사람을 설득해서 구해내기도 했다.
알리는 강경주의의 흑인 인권 운동가였으며, 인종차별과 인권침해를 일삼는 백인들과 사회적으로 분리되기를 주장하는, '흑인민족주의에 기반한 흑백분리주의자'였다.[49] 이런 강경한 사회적 노선과 알리 본인의 굳센 자존심 때문에 복싱계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심지어 같은 흑인 복서들과도 크고 작은 마찰이 자주 생겼다.
1965년 소니 리스턴과의 2차전에서 1라운드 KO로 승리한 이후, 같은 해 헤비급 챔피언 출신인 플로이드 패터슨이 '알리로부터 챔피언 벨트를 되찾아 미국에 바치는 것이 내 의무다'라며 알리를 비난했다. 심지어 알리를 두고 알리가 개명하기 전 이름인 '캐시어스 클레이'라고 부르며 거세게 비난했다. 결국 이에 화가 난 알리는 "패터슨을 줘패겠다"라고 호언했다. 당시 이슬람 신자, 흑백분리주의자, 강경파였던 알리와 반대로 패터슨은 기독교 신자, 흑백통합주의자, 온건파였다. 그리고 결국 두 선수 간의 매치가 성사됐고, 결과는 알리의 TKO승리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주류 언론들은 온건파이자 기독교 신자인 패터슨을 옹호했고, 강경파에 이슬람신자였던 알리를 '고의적으로 경기를 질질 끈 후 잔인하게 징벌했다'고 비난했다. 몇 년 후 알리는 패터슨과 한 번 더 붙게 되는데 그때도 승자는 알리였다. 흑표당 대변인을 지냈던 엘드리지 클리버는 알리와 패터슨의 이러한 대립을 두고 "이 싸움은 사상적 측면에서 흑인 혁명의 정신적 성취를 반영하는 전환점이 됐다. '독립적인 흑인'이 '굴종적인 흑인'을 징벌하는 상징적인 승리였다."라고 평한다.[50]
이와 같은 상황은 2년후인 1967년 어니 테럴과의 매치에서도 반복된다. 어니 테럴은 계체량 측정 도중 알리를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알리를 도발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알리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알리가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슬람 식 이름인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 이유가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도중 흑인 인권 운동의 중심에 서있던 말콤 엑스와 그가 속한 '네이선 오브 이슬람'이란 조직을 접하며 흑인 인권 운동과 이슬람에 경도됐기 때문인데, 인종차별이 극심한 그 당시에, 그것도 자신과 같은 흑인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과 사회가 직접적으로 연관된 현재의 이름을 무시당하고 개명 전의 이름으로 불리는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분노한 알리는 경기 당일, 링 위에서 테럴에게 펀치를 꽂아 넣으며 "내 이름이 뭐라고? 어!? 내 이름이 뭐라고!?"(What's my name? huh? what's my name?)라고 소리쳤다. 어니 테럴 역시 "캐시어스 클레이"라고 응수했다. (나중엔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Muhammad Ali”) 라고 떨면서 말하였다.) 경기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리가 테럴을 완전히 압도하여 알리의 만장일치 판정승. 하지만 이슬람 개종 선언과 개명으로 인해 주류 언론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알리는 패터슨 전에서도 그랬듯 KO 시킬 수 있음에도 경기를 끌고 갔다며 비난 받았다.[51] 사족으로 테럴은 경기 내내 알리에게 쉴새없이 맞은 탓에 눈 위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고 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어올랐다.
권투 이외에도 196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흑인민권운동에 동참하여 미국 흑인들의 권익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이유로 일부러 1974년 조지 포먼과의 대결 때는 아프리카 콩고의 킨샤사에서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끝내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현재는 야구의 재키 로빈슨 등과 함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맨으로 불리기도 한다.[52]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징병 거부를 하다가 챔피언 자리를 박탈당하고 무려 3년 5개월 간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옥살이를 했다는 것은 법정 싸움에 대한 와전. 당시엔 주류 미국 사회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으나, 법정 공판에서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내 조국에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남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라고요? 적어도 베트콩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우릴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지구 반대편의 이름 모를 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합니까?"
라고 변론하며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당시 이미 흑인 사회에서는 당연히 '병역을 통해 의무를 다 하면 우리에게도 권리가 오겠지' 같은 순진한 생각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이는 1965년 2월 18일 앨라배마 주의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경도되어 있던 26살의 젊은이 지미 리 잭슨이 시위 도중 경찰의 폭행으로부터 모친을 보호하려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그 지미 리 잭슨은 육군 참전 용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가 징병 거부를 시작한 1967년은 구정 공세 이전이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주류 백인 사회에서는 병역 거부는 파렴치한 반국가적 행위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이후 미국에서 베트남전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일면서 알리의 징병 거부가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무죄를 선고받긴 했으나 긴 법정싸움 이후 전성기의 나이가 지나 육체적으로 노쇠하였다. 법정싸움 기간 동안 링 위에 서지 못한 그는 주무기였던 경쾌한 스텝을 이용해 반사신경만으로 주먹을 회피하던 노 가드 전술의 비중을 줄이게 되었다. 그가 전성기를 벗어나 경력 중반기에 대결한 선수들은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어니 세이버스, 켄 너턴, 척 휴프너 등 모두 시대를 초월해 최고로 인정받는 돌주먹들이었다. 하지만 알리는 이른바 'Rope-a-dope' 전술을 고안, 로프의 신축력을 이용해 펀치의 충격을 흡수하는 전술로 이들을 모조리 쓰러뜨린다.
또한 알리는 사회 운동가뿐만이 아닌 평화주의자이자 인문주의자였다. 알리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의 역할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신의 발가락"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신을 등에 업고 세계의 모든 어두운 곳을 뛰어야 한다"라는 것이 그가 내린 정의의 이유였다. 이러한 업적 덕분에 은퇴 이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여[53], 오토 한 평화 메달 수여, UN 평화의 메신저 임명,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 박사학위 수여,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되는 등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알리는 때로는 저항자로서 흑인들의 권리가 법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여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렸으며,[54] 때로는 지식인처럼 부정의한 전쟁을 고발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엘리트들 앞에서 미국의 명문대에 강연을 다녔고, 때로는 광대처럼 브로드웨이에서 <백인들의 희망>이라는 연극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고, 때로는 외교관이 되어 사담 후세인을 만나 억류되어 있던 인질들을 석방하도록 설득했으며, 정치 지도자처럼 미국의 공립 학교와 병원을 찾아다니며 교육과 의료 체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다녔고, 또 파킨슨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창립하기도 했다.[55]
==# 어록 #==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56]
(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
(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
그게 다냐?[57]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내가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내가 세계 챔피언이라고![58]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내가 세계 챔피언이라고![58]
절대로 누가 나를 막아설지에 대해 떠들어대지 마!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
만약에 나를 이기기를 꿈꾼다면, 일어나서 사과하는 게 좋을 거다.
이 경기를 위해 악어와 레슬링을 했지. 고래와 몸싸움을 하고, 번개에 수갑을 채웠고, 벼락을 감옥에 집어넣었어. 난 그만큼 강하다고(bad). 저번 주에는 바위를 죽였고, 돌에 부상을 입혔고, 벽돌을 입원시켰지. 너무 사나운 나머지 약을 병들게 한다고. 강하고, 빠르지. 어젯밤에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이 꺼지기도 전에 침대에 들어갔지. 포먼은 날 볼 수도 때릴 수도 없을 거야. 너희들 모두 포먼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 하지만 두고 봐라, 내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마![59]
난 윗몸 일으키기를 몇 회나 하는지 세지 않아. 힘들기 시작할 때부터 세지. 내가 고통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 때가 내가 숫자를 세기 시작할 때야. 그 때부터가 진짜니까. 그게 당신을 챔피언으로 만들어주는 거라고.[60]
알지도 못하는 유색인종한테 총을 쏘라고? 왜 쏴야 하는가? 날 깜둥이라고 부른 적도 없고, 날 줘팬 적도 없고, 기르는 개를 시켜서 날 물게 한 적도 없고, 내 국적을 박탈한 적도 없는데?[61]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들은 우리를 깜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국내에서 흑인들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 그들은 왜 내가 군복을 입고 베트남까지 가서 싸우기를 원하는가? 만약 내가 입대해서 베트콩과 싸우는 것이 2200만 명이나 되는 미국 흑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수 있다면, 미국 정부는 나를 징집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내일 당장 내 발로 입대하겠다.
나는 알라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 내 신념을 지키는 한, 나는 잃을 게 없다. 우리 흑인들은 이미 노예로 끌려온 지 4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이슬람교의 성직자로서 미국 육군 입대를 거부한다.[63]
'캐시어스 클레이'는 백인들이 내 노예주에게 준 이름이다. 지금부터 난 자유롭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므로, 난 노예가 아니므로, 백인들의 이름을 반납하고 아름다운 아프리칸의 이름을 선택한다.
나는 미국이다.
나는 당신이 모르는 한 부분이다.
흑인이고, 자신감 넘치고, 건방지다.
내 이름도, 내 신앙도 당신과 다르다.
내 목표는 나만의 것이다.
내게 익숙해져라.
나는 당신이 모르는 한 부분이다.
흑인이고, 자신감 넘치고, 건방지다.
내 이름도, 내 신앙도 당신과 다르다.
내 목표는 나만의 것이다.
내게 익숙해져라.
그저 직업일 뿐이다.
풀들이 자라나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파도가 모래를 덮치고,
나는 그들을 때려 눕힌다.
풀들이 자라나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파도가 모래를 덮치고,
나는 그들을 때려 눕힌다.
기자: "왜 원투 펀치만으로 얼굴을 때리는 플레이만 하는 거죠?"
알리: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알리: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권투란 수많은 백인들이 두 흑인끼리 서로 때리는 걸 지켜보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지 못할 정도로 용감하지 않은 사람은 인생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이 도전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
나는 나 자신을 믿었고, 이제는 다른 이들의 선함을 믿는다.
타인에 대한 봉사는 이 지구에 세 들어 사는 것에 대해 내는 임대료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될 필요가 없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자유가 있다.
만약 당신의 꿈이 당신을 두렵게 하지 않는다면, 그 꿈은 충분히 크지 않은 것이다.
상상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날개가 없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건 눈앞의 산이 아니라 신발에 스며드는 모래알이다.
내 마음이 그것을 상상할 수 있고, 내 마음이 그것을 믿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
50살이 되어서도 20살 때와 똑같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30년 삶을 헛 산 것이다.
나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나이 먹었다.
곰팡이가 핀 빵에서 페니실린이 나올 수 있었다면 당신에게서도 뭔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농담하는 방식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게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이다.
멋진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침묵이 금이다.
국가 간의 전쟁은 지도를 바꾸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과의 전쟁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Wars of nations are fought to change maps. But wars of poverty are fought to map change.)[65]
그러나 가난과의 전쟁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Wars of nations are fought to change maps. But wars of poverty are fought to map change.)[65]
우정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정의 참 뜻을 모른다면 아무것도 안 배운 거나 다름없다.
우리에겐 모두 똑같은 신이 있다. 우린 그저 그를 다른 방식으로 대했을 뿐이다.
강, 연못, 호수, 개울. 이름은 다 다르지만 모두 물을 담고 있다. 종교도 똑같다. 모든 종교는 진실을 담고 있다.
자유란 자신의 종교를 따를 수 있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선택할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66]
챔피언은 체육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챔피언은 욕망, 꿈, 식견과 같이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목적이 있고, 모든 신은 목적이 있어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은 기쁨을 알지도 모르지만, 기쁨이 행복은 아니다. 인간을 쫓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나는 링 위에 오르기 전 마음속으로 수십, 수백번을 되뇌었다.
하지만 패배한 상대는 언론과 내게 입으로 수십, 수백번을 떠벌렸다.
하지만 패배한 상대는 언론과 내게 입으로 수십, 수백번을 떠벌렸다.
패배하는 것이 어떤 건지 아는 사람만이 영혼의 바닥까지 닿을 수 있으며, 승부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여분의 힘을 낼 수 있다.
나는 훈련의 매 순간을 싫어했지만, 난 그 때마다 되뇌었다.
"지금 열심히 하면, 챔피언으로서 남은 생애를 보낼 수 있다"라고.
"지금 열심히 하면, 챔피언으로서 남은 생애를 보낼 수 있다"라고.
당신은 죽을 만큼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라야 하고, 더 뛰어난 기술과 더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
기술보다 열정이 더 중요하다. 열정이 있는 자는 전진하게 되어 있다.
기술보다 열정이 더 중요하다. 열정이 있는 자는 전진하게 되어 있다.
불빛 아래서 춤을 추기 전까지, 나는 길을 달린다.
남들의 말을 들을 것인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해낸 것은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해낸 것은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나만큼 위대하다면 겸손해지기 힘들다.
나는 가장 위대한 자다. 때려눕혔을 뿐 아니라, 경기를 선택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자다. 내가 깨닫기도 전에, 내가 말했다.
나는 권투보다 위대하다.
나의 유일한 실패는 내가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가장 위대한 사람도 한 때는 초보였다. 그 첫걸음을 내딛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불가능이란 단지 세상을 변화시킬 힘 대신 쉽게 안주하며 살아갈 길을 찾는 소인배들이 내뱉는 핑계일 뿐이다.
불가능이란 사실이 아니라 의견이다.
불가능이란 단정될 것이 아니라 도전의 대상이다.
불가능이란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불가능이란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이다.
불가능이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68]
불가능이란 사실이 아니라 의견이다.
불가능이란 단정될 것이 아니라 도전의 대상이다.
불가능이란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불가능이란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이다.
불가능이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68]
내가 링 위에 오르면 전 세계에서 수백, 수천만 명의 시청자가 TV로 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에너지 낭비인가?
1초 만에 끝내고 돌아오겠다.
이 얼마나 큰 에너지 낭비인가?
1초 만에 끝내고 돌아오겠다.
챔피언이 되면, 나는 낡은 청바지와 낡은 모자를 쓰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채로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 시골로 갈 것이다.
거기서 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작고 귀여운 여우 같은 여자를 한 명 찾아낼 것이다.
난 그녀를 백만 달러가 넘는 대지 위에 세워진 25만 달러 짜리 내 집으로 데려가서 내 캐딜락과 수영장을 보여 줄 것이다.
비가 내릴 경우를 대비해서 만든 실내 수영장까지도.
그런 다음 그녀에게 말하리라.
"이건 모두 네 거야. 왜냐면 넌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하니까."
거기서 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작고 귀여운 여우 같은 여자를 한 명 찾아낼 것이다.
난 그녀를 백만 달러가 넘는 대지 위에 세워진 25만 달러 짜리 내 집으로 데려가서 내 캐딜락과 수영장을 보여 줄 것이다.
비가 내릴 경우를 대비해서 만든 실내 수영장까지도.
그런 다음 그녀에게 말하리라.
"이건 모두 네 거야. 왜냐면 넌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하니까."
알리: "제리[69], 전 링 위에 발을 올려놓은 사람 중 가장 위대한 파이터로 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날 밤 엄청난 돈을 잃을 것이고요. 이번 경기는 20세기 권투 역사상 가장 큰 이변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제리: "자네는 말로만 떠드는 것 같소. 역사상 최고의 파이터가 아니라, 최고의 허풍쟁이가 아니오?"
- 1964년 소니 리스턴과의 경기[70] 전 인터뷰에서. 알리는 이후로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지킨다.
"사람들은 그날 밤 엄청난 돈을 잃을 것이고요. 이번 경기는 20세기 권투 역사상 가장 큰 이변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제리: "자네는 말로만 떠드는 것 같소. 역사상 최고의 파이터가 아니라, 최고의 허풍쟁이가 아니오?"
- 1964년 소니 리스턴과의 경기[70] 전 인터뷰에서. 알리는 이후로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지킨다.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에게 "난 챔피언이 될 거야"라고 말하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내가 챔피언이 된다면, 내가 돌아와서 너네들이 틀렸다는 걸 알려줄게."
"난 언젠가 위대한 의사, 치과의사가 될 거야. 나는 과학자가 될 거야. 난 대통령이 될 거야."
하지만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말을 이루고 집에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말했지?"
"그리고 내가 챔피언이 된다면, 내가 돌아와서 너네들이 틀렸다는 걸 알려줄게."
"난 언젠가 위대한 의사, 치과의사가 될 거야. 나는 과학자가 될 거야. 난 대통령이 될 거야."
하지만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말을 이루고 집에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말했지?"
지나간 날에 가치를 매기지 말고, 남은 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Don't count the days. Make the days count.)[71]
(Don't count the days. Make the days count.)[71]
나는 모든 이의 권리를 존중하는 유머 있는 흑인으로,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등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흑인이면서 장애인인 내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싸워온 것처럼,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소외받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맞서 승리했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성공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주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7. 가족 관계
- 존 클레이(증조부)
- 허먼 H. 클레이(조부): 노예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
-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시니어(父)
- 라하만 알리(남동생): 개명 전 이름은 루돌프 발렌티노 클레이. 아마추어 경력을 거쳐 헤비급에서 프로 복싱 선수로 잠깐동안 활동하였다. 아들 이븐 알리도 크루저급에서 활동한 프로 복싱 선수였으며, 마이너 기구 타이틀을 석권하기도 하였다.
- 네테니얼 클레이
- 이바 클레이
- 이외에 이름이 안 알려진 고종 형제들 3명이 있다.
- 샐리 앤-클레이(증조모)
- 에디스 그리츠하우스(조모)
- 에이브 오'그레이디(외증조부)
- 존 르위스 그레이디(외조부)
- 오데사 그레이디(母)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남매 5명이 있다.
- 버디 B. 모어헤드(외조모)
- 손지 로이(1964년 - 1966년; 이혼)
- 벨린다 보이드(1967년 - 1977년; 이혼): 훗날 칼릴라 알리로 개명.
- 메리윰 알리(장녀): 미국에서 방영된 감옥 언더커버 다큐멘터리인 A&E의 "60 days in"에 출연한 바 있다. 국내에서는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직업은 사회복지사이며 주 업무는 갱단 가입 방지이다.
- 자밀라 알리 & 라셰다 알리(차녀/3녀 쌍둥이)
- 무하마드 주니어(장남)
- 패트리샤 하벨
- 미야 알리(4녀): 혼외정사로 낳은 딸.
- 완다 볼튼: 법적 혼인관계가 아닌 이슬람식 결혼식을 올린 사이였다. 훗날 아이샤 알리로 개명.
- 칼릴라 알리(5녀)
- 베로니카 포르쉐(1977년 - 1986년; 이혼)
- 하나 알리(6녀)
- 라일라 알리(7녀): 아래 문단에서 나오듯 여성 권투 선수로 활동했다. WBC, WIBA, IWBF, IBA 수퍼 미들급 챔피언, IWBF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을 지냈다. 1999년 데뷔하여 2007년 은퇴 까지 총 전적 24전 24승 무패, 21KO의 완벽한 커리어를 자랑했었다. 아버지의 압도적인 위상에 밀릴 뿐이지 본인 스스로도 여성 프로 복싱에서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릴 만한 선수였다.
- 커티스 무하마드 콘웨이 주니어(외손)
- 시드니 주르딘 콘웨이(외손녀)
- 욜란다 윌리엄스(1986년 - 2016년; 사별): '로니 알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86년 11월 19일에 결혼하여 알리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곁을 함께한 마지막 부인이며, 현재 무하마드 알리 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 아사드 아민 알리(차남/양자)
- 커티스 콘웨이(4사위)
- 카메론 콘웨이 & 켈튼 콘웨이
- 레일라니 콘웨이
8. 여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닐 라이퍼가 촬영한 사진. | AP통신의 존 루니가 촬영한 사진. |
- 위 두 사진은 알리가 리스턴과의 2차전에서 KO 승을 거두고 포효하는 장면. 위의 첫 번째 사진은 전설적인 스포츠 사진작가 닐 라이퍼[72]의 작품이며 그가 찍은 가장 유명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 라이퍼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갓 입사한 22세의 신인이었고, 아무리 좋은 자리를 맡으려 경기장에 빨리 도착해도 같은 잡지사의 수석 사진작가였던 허브 샤프먼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샤프먼이 심판석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라이퍼는 하는 수 없이 반대편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한 지 불과 1분 44초 만에 리스턴은 알리의 "팬텀 펀치"에 맞아 운명의 장난처럼 라이퍼의 눈 앞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박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다른 사진작가들과 달리 컬러필름을 가져온 라이퍼는 자신의 롤라이플렉스로 단 한 장의 컬러사진만을 찍을 수 있었고[73], 세간의 주목을 받는 데 실패했다.[74] 하지만 알리가 베트남전쟁 징병거부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시작하자 라이퍼가 찍은 사진도 함께 재조명을 받았고, 마침내 1999년 7월 26일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표지[75]를 장식하며 현재까지도 스포츠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사진으로 기억되고 있다.관련영상 여담으로, 경기 전 라이퍼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강요한 허브 샤프먼은 현재까지도 라이퍼의 사진 속 알리의 가랑이 사이에 찍힌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의 옆에는 입을 떡 벌린 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시절의 래리 머천트도 함께 찍혔다.
- 상대를 교묘하게 비웃고 도발하는 트래시 토크와 거침없고 화려한 언변으로도 유명했으며, 단순히 거칠고 조롱적인 발언뿐만이 아니라 언변 속에 녹아있는 뛰어난 라임 구성과 시적인 문장 구성이 탁월했고 대중들이 자신을 지지하게끔 하는 '정치적인 시'(Political poetry)에 가까운 발언을 잘 구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기 전 선수간의 언쟁을 일으켜 대중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키는 걸 즐겼다. 무하마드 알리의 언변은 단순히 마케팅에 국한되는 흥미 유발과 상대방에 대한 도발만이 아니라 이외의 영역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의 어록 문단만 봐도 그렇다. 상기한 베트남 전쟁 징집 반대로 인한 법정 공판에서의 항변과,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는 말도 그의 언변 능력을 잘 나타내는 사례이다. 이 때문에 음악•문화 평론가들은 무하마드 알리의 이런 언어 구사가 힙합과 랩의 발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본다.#
- 실제로 알리는 소니 리스턴과의 1차전에서 승리하여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하기 6개월 전인 1963년 8월 컬럼비아 레코드와의 계약을 통해 "I Am The Greatest!"라는 제목의 앨범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총 8개의 트랙으로[76] 구성된 이 앨범의 내용은 온통 리스턴을 향한 알리의 트래시토크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지만 발매 당시엔 그닥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64년 2월 알리가 그의 말대로 리스턴을 이기면서 역주행을 타기 시작했다. 이후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알리가 벤 E. 킹의 히트곡인 Stand by Me를 커버한 노래를 발매하기도 했으며, 1964년 제 6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알리의 앨범이 최우수 코미디 레코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아쉽게도 수상에는 실패하였다.[77]
- 알리를 상징하는 말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는 말은 원래 경기 전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허세이자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출하는 도발이었으며, 그는 정말 본인의 말대로 알리스텝과 알리셔플을 이용하여 다양한 콤비를 넣거나 다양한 전략을 보여주는 플레이하며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이와 같은 경기 전 도발을 통한 마케팅은 스포츠 계에서 하나의 전술이 되었다. 더불어 자신의 권투 방식을 시적으로 정의하여 대중들이 권투에 대해 갖고 있는 경직된 이미지를 허무는데 크게 기여한 말이기도 하다. 알리의 이런 언행일치는 마케팅과 캐릭터를 일치시킨 모범적인 사례로 유명하며 특히 풋워크와 디펜스, 펀치 콤비네이션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 현란한 풋워크로도 유명한데 아예 '알리 스텝'이란 풋워크도 따로 있다.'알리 스텝'에 대한 설명 슈거 레이 로빈슨이 스텝의 중요성을 일깨운 이후, 스텝의 발전과 활용도를 확장 시킨 것이 알리라고 할 수 있다.
- 프로 데뷔 이후 강제 공백기를 맞이하기까지인 1960년부터 1967년까지의 알리는 30전 전승,[78] 타이틀 9차 방어에 성공하여 복싱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선수로 평가 받는다. 그중에서도 1966년 3월부터 1967년 3월까지가 가장 압도적이었는데, 알리는 그 1년 사이에만 무려 7번의 경기를 치렀고 모두 승리했다. 단순 경기수만 놓고 본다면 1961년에 8번, 1962년에 6번의 경기를 치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66~67년도의 기록이 대단한 점은, 이 시기가 바로 알리가 베트남전 징병을 거부하면서 FBI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당하는 등 미국 정부에게 가장 심한 압박을 받는 동시에 법정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는 점이다. 거기다 신인 시절이었던 61~62년과 달리 이 당시의 알리는 헤비급 챔피언으로서 매 경기가 타이틀 방어전이었기에 대중들의 관심도 엄청나게 높았던, 그야말로 정신적 고통이 가장 심할 때였다. 그리고 알리는 이 '1년 간 7경기 전승'이라는 대기록을 마지막으로 징병 거부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아 선수 자격과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 당하고, 1967년 1심에서의 유죄 판결이 1970년 2심에서의 무죄 판결로 뒤집어질 때까지 선수 생활을 아예 하지 못했다. 즉 멀쩡히 유지 중이던 챔피언 타이틀을 강제로 빼앗긴 것인데,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알리가 '강제 공백기'만 겪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아는 지금의 알리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모습과 대단한 기록을 써내려 갈 수도 있었을 거라며 아쉬워 하기도 한다. 이후 복귀는 1967년 3월 22일 조라 폴리와 치른 방어전 이후로 약 3년 7개월이 지난 1970년 10월 26일 제리 쿼리와의 경기였다.
- 은퇴 후 아세니오 홀 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 토크쇼 진행 도중에 최근 주목하는 복서가 누구냐는 질문에 마이크 타이슨을 뽑았는데, 이후 진짜 타이슨이 슈거 레이 레너드와 함께 깜짝 게스트로 등장하였다.[79] 진행자가 알리에게 "당신의 전성기 때 이 친구(타이슨)과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나요?"라고 묻자 알리는 손으로 타이슨을 가리키며 "난 주먹이 세진 않았지만 빨랐어요. 만약 저 친구가 날 쳤다면..."이라며 뒤로 넘어지는 시늉을 해 방청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하지만 타이슨이 손사래를 치며 "전 알리의 말을 안믿어요. 왜냐하면 저분은 저보다도 강한 펀쳐인 조지 포먼, 어니 셰이버스에게 맞고도 이겨낸 위대한 챔피언이에요. 저도 제가 대단한 걸 알지만, 모두의 머리가 고개 숙이고, 모두의 혀가 진실되게 말해야 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은 여기 이분이세요."라고 답하자 방청객들은 크게 환호하였다.# 그리고 타이슨은 "오히려 꼬맹이었던 저야 말로 알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의 행동을 따라하면서 '나는 무적이다, 나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알리는 제가 강해질수 있게 된 힘이었어요."라는 말을 덧붙였다.[80]
- 1976년 6월 27일 한국에 온 적이 있다. 이준구의 초청으로 인해 온 것인데, 사실 당시 유신 독재 체제와 사회적 문제 및 사건들로 인한 국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정권의 이벤트에 가까웠다. 이준구의 친구인 중앙정보부 요원이 이준구에게 "알리를 한국에 데려올 수 있느냐"라고 물어본 것이 발단.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알리의 팬이기도 했다. 알리와 한국간의 금전 거래는 하나 없는 무대가성 방문이었다고. 알리는 한국에서 3박4일 간 머물렀으며, 웨스틴 조선 서울에서 묵었고 MBC의 특집 방송에 출연, 육영수 묘역 방문, 공장 방문, 군 부대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하고 갔다. MBC에서 특집 쇼를 방송하면서 여자 연예인들이 알리와 껴안거나 함께 춤을 췄다는 이유로 당시 방송심의위원회의 경고를 받아서 그 다음 주에 경고받은 내용을 방송 전에 내보냈다. 알리의 출국일이 돼서야 청와대 측의 접근이 있었으나 비행기 시간 때문에 박정희와 만나진 않았다. 입국 직후 서울 시내에서 3시간 동안 카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20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인구가 725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당시 알리의 인기가 얼마나 드높았는지 알 수 있다. 이 카 퍼레이드는 MBC가 생중계했다.참고
- 자살하려는 사람을 설득해서 구해낸 적이 있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남자는 알리와 같은 흑인 남성이며 당시 나이는 21세였다. 1981년 1월 19일, 이 청년은 투신자살을 하려고 LA의 한 건물 9층 난간에 올라가 있었고, 현장에는 경찰이 출동한 상태였으며 시민들도 몰려든 상태였다. 그런데 마침 그곳 근처를 알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자살시도 소동이 벌어진 것을 목격한 알리는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그 청년이 있는 건물 9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청년은 건물의 실내가 아닌 건물 바깥쪽에 위치한 계단의 난간에 있었고, 알리는 우선 계단쪽으로 직접 들어가진 않고 건물 실내의 창문으로 몸을 내밀어 그 청년을 바라보며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이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내가 죽는다 한들 관심조차 없을 텐데, 왜 당신은 나한테 관심을 주는 거죠?"라고 묻자 알리는 "당신은 제 형제니까요.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전 그저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이후 알리는 청년이 걸터앉아 있는 난간으로 직접 다가가서 그 청년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등을 두드려줬고, 청년은 스스로 난간에서 내려와 알리와 함께 건물 바깥까지 내려왔다. 건물 1층에서 알리와 청년이 함께 나오자 현장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은 알리를 연호했다.#
- 1973년 1월 12일 할렘의 한 학교를 방문하여 강연을 하던 도중에 한 교사로부터 지금 이 학교에 조 프레이저의 조카인 마크 프레이저가 재학 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조 프레이저의 조카라고? 그녀석 지금 어딨어!"라며 들뜬 목소리로 마크를 찾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를 무대 단상 위로 부르는 등 특별한 추억을 선사했다.# 참고로 마크 프레이저 역시 훗날 프로 복싱선수로 활동하였다.
- 1980년대 WWF에 출연하며 락 앤 레슬링 커넥션의 주축으로 WWE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WWF 레슬매니아 I의 호스트로 초대받았다.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때는 최종 성화 점화자로 등장하여 손을 떨면서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당시 파킨슨병으로 투병중이던 알리가 쉽게 불을 붙이게 하기 위해 이미 완성되어있던 성화대의 설계를 변경했다고 한다.
- 그의 딸 라일라 알리도 여자 프로 권투선수로 활약했고 세계 챔피언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며 그 아버지에 그 딸임을 보여주었으며 라일라는 2007년 이후 은퇴한 상태. 방송 진행자 등의 일을 하는 듯하다.[81] 여담으로 라일라는 무하마드 알리의 세번째 부인이었던 베로니카 포르쉐 알리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며, 어머니의 외모를 이어받아서 아름답게 생겼다.라일라 알리의 최근 모습, 무하마드 알리와 베로니카. 또한 아디다스 광고에 아버지와 함께 출연해서 카리스마를 뽐내기도 했다.
-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때는 딸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등장. 원래는 올림픽 오륜기 게양식에 같이 참가하려고 했지만 건강상 문제로 오륜기를 만져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알리>에서 윌 스미스가 맡아서 알리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작품성은 좋았으나 흥행은 실패했고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 당시 상영시간이 길다고 30분 가까이 삭제하고 개봉했다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더더욱 극장에서 외면당했다. 극장 수익으론 해외 수익까지 다 합쳐도 제작비도 못 건졌고 그나마 DVD 같은 2차 판권 시장은 꽤 괜찮게 팔려 수익을 거둬들였다.
- 위 영화의 주제곡인 R. Kelly - The World's Greatest 또한 무하마드 알리로부터 영감을 받은 곡이다.
- 이 사람을 바탕으로 만든 캐릭터가 바로 록키의 라이벌 아폴로 크리드다. 당시 영화를 찍을 때 스타 중의 스타였던 알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는데 실제 그는 록키를 보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으며 심지어 스탤론에게 헌정하는 시를 써서 바치기까지 했다. 또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내가 진짜 아폴로 크리드다!!" 라면서 뛰쳐나와 스탤론과 스파링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25년 후 알리의 60세 생일 이벤트에 스탤론이 등장하여 그때 알리에게 받은 시를 낭송하였다.#
- ebs 지식채널 e에서 무하마드 알리를 주제로 해 방영한 적이 있으며 5분 짜리 영상에 무하마드 알리의 생애를 감동적으로 요약해 놓았다.
- 1977년 개봉한 알리의 생애를 다룬 전기 영화 The Greatest(더 그레이티스트)에서 나온 주제가 The Greatest love of all이 유명하다. 부른 가수는 조지 벤슨.[82]
- 이탈리아의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가 알리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알리가 멜론을 먹으면서 연신 트림을 하는 등 매우 무례한 태도로 팔라치를 맞았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팔라치가 알리에게 "나는 너같은 짐승이랑 함께 있지 않을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자 알리는 팔라치의 마이크를 빼앗아 벽에 던졌다고 한다.출처
- 많은 1세대 미국 무슬림이 그랬듯이 흑인우월주의를 지향하는 신흥종교였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입교하였고 후에 교단과 함께 정통 수니 이슬람으로 전향하였다. 이후 알리 개인은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에 깊게 심취했다.
- 2015년 12월에 미국 공화당의 대선주자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무슬림들을 입국금지 시킬 것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자, 알리는 즉각 성명을 내고 "나는 무슬림이다."라고 말문을 열며 "우리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를 위해 쓰는 사람에 맞서 싸워야 한다" 라고 강조하는 동시에 "파리나 샌 버나디노, 그밖의 세계 어디에서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이슬람이 아니다."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알리가 언어능력을 잃기 전 공식석상에서 행한 마지막 발언으로 알려지며 주목을 받았다. 과연 그답게 마지막 말 역시 피부색과 종교, 성별, 빈부 할 것 없이 차별로 점철된 이 세상에 철권을 날린 셈이다.
- 이탈리아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인 마르코 멘고니의 2018년 노래 중 Muhammad Ali(무하마드 알리)가 있다.
- 알리의 개명 전 이름 '캐시어스 클레이'를 본뜬 '카시우스(Cassius)'라는 바다악어가 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파충류인 바다악어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덩치를 자랑하는 악어다.
- 미국뿐만 아니라 1960,70년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흑인 스포츠 스타여서 가끔씩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초청을 받거나 방문하기도 했었다.
- 마이클 조던 같은 다른스포츠의 GOAT들이나 유명인들과의 만남등 다양한 활동이 있다.
- 복싱과 관련된 웹툰, 영화, 만화, 애니 등 다양한 콘텐츠의 캐릭터들에 영향을 주었고 복싱과 관련이 없더라도 그와 관련된 콘텐츠도 많고 영향을 주었다. (광고에도 많이 나왔다.)
- 콜드플레이의 7집 앨범 수록곡 중 Everglow의 Single버전에서 노래 후반부에 알리의 연설이 나온다.
- 슈퍼맨과 싸운 만화책이 있다. 한 외계인이 자기네 최강의 전사와 싸울 지구 최강의 전사로 슈퍼맨을 선택하자, 알리가 '슈퍼맨은 지구인이 아니고 슈퍼파워를 가졌으니 불공평하다'라며 누가 지구 최강의 전사일지 판가름낸다는 내용. 말도 안 되는 대결 같지만 붉은 태양( 슈퍼맨의 힘을 일시적으로 빼앗는다.) 근처의 행성에서 경기를 치렀기에 슈퍼맨은 일반인인 상태였다. 그리고 대전끝에 알리가 슈퍼맨을 쓰러트린다! 들것에 실려나가는 슈퍼맨 이후 외계인 챔피언과 대전에서 알리가 승리를 거두고, 서로 악수를 나누며 훈훈하게 마무리.
- 알리셔플(ali shuffle): 노가드 회피 비슷하게 상대방을 농락하면서 상대의 시선과 타이밍을 빼앗는 기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쇼맨십 기술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알리는 이 기술이 단순히 광대놀음이 아닌 실용성을 가진 기술이라고 설명했고 또 실제 시합에서 여러번 사용하기도 했다. 알리의 설명
- 1978년 영화 천국의 사도(Heaven Can Wait) 제작 당시 주연으로 맡기를 제안받았지만, 선수생활 집중 이유로 거절하였다.
- 한 기자가 무하마드 알리에게 가장 중요한 훈련을 물었을 때 "클럽 안가고 여자 조심하기" 라고 말했다. 그 뒤로도 "9시에 침대에 눕기, 특히 자기처럼 잘생긴 사람은 여자를 더 조심해야 한다" 라고 말했다.
- 배우 리암 니슨이 무하마드 알리의 엄청난 팬이라고 한다.[83] 1980년 알리와 직접 만나게 된 리암은 떨리는 목소리로 "ㅁ무하마드...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전했다고. 덤으로 알리가 당시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추근덕거리자, "와우, 무하마드 알리가 내 여친한테 플러팅을 하잖아!"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 2024년 3월 11일, 2024년 WWE 명예의 전당에 네 번째 헌액자로 헌액이 되었다. # 회사는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최초의 이종 격투기 경기인 '격투기 세계 제일 결정전'을 치르고, 1984년 레슬매니아 1에서 호스트로 초청받아 헐크 호건 & 미스터 T VS "로우디" 로디 파이퍼 & 폴 온돌프 경기에 특별 심판을 담당했던 공로를 언급하며 업계와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WWE CCO 트리플 H는 위대한 사람은 많아도 "가장 위대한" 사람은 알리 한 사람뿐이라면서, 알리는 스포츠를 초월해 누구보다도 전 세계를 사로잡고 영향력을 행사한 글로벌 아이콘임을 헌액 사유로 들었다. 사망한 알리를 대신해 부인인 로니 알리가 대신 연설을 진행하였으며 명예의 전당 당일날 언더테이커가 깜짝 등장하여 직접 알리를 소개하였다.
[1] 원래 침례회 신자였으나 1964년 말콤 엑스가 이끄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하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함과 동시에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이후 그는 1965년 소니 리스턴과의 2차전부터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출전하였다.[2] 참고로 여기서 "클레이"는 헨리 클레이의 그 클레이가 맞다. 그의 먼 조상이 정치가 헨리 클레이의 노예였다고 한다.[3] 현지 시각으로는 6월 3일, 한국 시간으로는 6월 4일 1시 40분경에 세상을 떴다.[4] 전성기 시절 시합 체중은 90kg대 초중반. 커리어가 갈수록 체중이 점점 늘었다.[아마추어] [프로] [7] 전미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8] 미국의 3대 아마추어 복싱대회 중 하나.[9] 미국의 3대 아마추어 복싱대회 중 하나.[10] 세계적인 복싱 매거진 The Ring에서 수여하는 타이틀로, 4대 메이저기구 다음 순위의 타이틀이다. 당시에는 IBF와 WBO가 창설되기 전으로, 양대 메이저기구 다음 순위의 타이틀.[11] North American Boxing Federation[12] 알리의 어머니 오데사 클레이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에 흑인이라는 이유로 가게에서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1955년 발생한 에밋 틸 피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친구와 함께 차량기지를 파손한 적까지 있었으며, 훗날 그때 받았던 충격을 딸 하나 알리에게도 이야기해 주었다.[13] 스토너는 알리가 프로 데뷔전을 치를 때 그의 세컨을 봐주기도 했는데, 알리는 세계 챔피언이 된 후 스토너로부터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배웠다는 말도 하였다.[14] 소련의 권투선수로 1958년에 라이트헤비급으로 월장했으며, 로마 올림픽 출전 당시 나이는 28세였다.[15] 4년 후 1964 도쿄 올림픽에서도 라이트헤비급으로 출전하였으며, 이때는 동메달을 따냈다.[16] 다음은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의 무하마드 알리 센터의 설명. "His resentment was dramatized in the 1970s book and movie, The Greatest. In this symbolic tale, Cassius Clay and his buddy sat down at a restaurant counter and heard a man's voice boom, "I done told you, we don't serve no niggers." Hurt and humiliated, Clay was described as passionately flinging his gold medal into the depths of the Ohio River. The story was fiction, but the pain is fact."[17] 던디가 처음으로 훈련시킨 세계 챔피언은 카르멘 바실리오로 그는 1955년 토니 더마코와의 웰터급 타이틀전과 1957년 알리의 우상이었던 로빈슨을 상대로 치른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승리하며 두 체급을 석권하였다.[18] 쿠퍼의 왼쪽 눈썹에 난 커팅으로 인한 레프리스탑이었다.[19] 별개로 이 경기는 나중에 링매거진에서 올해의 경기로 선정되었다.[20] 심지어 헨리 쿠퍼마저 알리가 이긴다면 타이틀전을 원하지만, 리스턴과는 같은 링 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였다.[21] 미국의 작가 데이빗 렘닉이 저술한 무하마드 알리의 전기 'King of the World: Muhammad Ali and the Rise of an American Hero'의 내용에 따르면, 조 폴리노가 '필라델피아 데일리 뉴스'의 스포츠 기자 잭 매키니와의 대화에서 리스턴으로부터 글러브에 수렴제를 바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고백했다고 한다.[22] 무하마드는 "찬미받은 자"라는 뜻이고, 알리는 "최고로 높다"는 뜻이다.[23] 리스턴의 경기를 주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프로모션 회사였다.[24] 이때 패터슨은 재경기가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건을 결정할 권리까지 얻었고, 대표단은 이를 권투 사업에서 본 것 중 최악이었다고 표현했다.[25] 주치의 중 한 명이 "위가 너무나 훌륭하게 발달해서 잘라내고 싶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26] 루이스턴은 1923년 잭 뎀시가 몬태나주 셸비(인구 3,000명)에서 토미 기븐스와 싸운 이후로 헤비급 타이틀 경기를 개최한 가장 작은 도시였다.[27] 규칙이 적용되는 방식에 대한 맥도노프와 플라이셔의 해석도 잘못되었는데, 원래 규칙대로라면 타임키퍼는 넉다운 시점에 카운트를 시작해야 한다. 심판의 의무는 선수가 중립 코너에서 넉다운을 기록하게 해야 하고, 타임키퍼로부터 카운트를 듣고 넉다운된 선수에게 큰 소리로 반복해야 한다. 메인주 위원회의 규칙에 따르면 선수가 적절한 코너로 가기를 거부하면 심판은 카운트를 멈출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위원회 위원인 던컨 맥도날드는 "월컷이 클레이가 중립 코너로 갈 때까지 (넉다운 타임키퍼에게) 카운트를 멈추게 하고 다시 시작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8] 공식 중단 시간은 1라운드 1:00으로 발표되었는데, 이는 잘못된 시간으로 리스턴은 1:44에 다운을 당해 1:56에 일어났고, 월컷은 2:12에 경기를 중단시켰다.[29] 알리는 이를 "앵커 펀치"라고 불렀는데, 이 펀치는 코미디언이자 영화 배우인 스티핀 펫칫이 잭 존슨에게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30] 이벤트 영상에서 알리가 링에 서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그를 때렸나?"라고 묻는 모습이 나왔기 때문.[31] 작가 폴 갈렌더의 주장.#[32] 정확히는 2.7 ~ 2.8초 정도인데 2.8초 보단 2.7초에 가깝고 2.7초 보단 2.6초에 가깝다. 즉 2.6 ~ 2.7초 라는 시간에 헤비급의 몸으로 12 ~ 13대의 펀치를 날린 셈이다.[33] 때문에 이 기자 회견은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언론 플레이'로 불리며, 높은 전략적 가치를 담고 있다.[34] 콩고와 미국은 6시간(미 동부)-9시간(미 서부) 시차가 나므로 미국인들은 7시에서 10시 사이에 이 경기를 관람하게 된다.[35] 무하마드 알리의 전략 중 하나인 ‘Rope-a-dope’ 는 나중에 타이슨 퓨리도 사용하였다.[36]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알리를 보면 이 점이 잘 묘사되어 있다. 기세 좋던 알리가 로프에만 기대자 사람들은 다들 그가 기세가 죽어 밀린다고 생각하고 알리 측 사람들은 "로프에서 떨어져!!"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알리는 맞아가면서도 집요하게 포먼을 도발하고, 겉으로 보기엔 밀리면서도 움직임이 크게 느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포먼은 때리면서도 점점 지쳐가고 나중엔 눈까지 풀리는데, 이때 알리의 반격이 시작된다. 비장한 OST와 알리의 결의에 찬 표정, 포먼의 기죽은 듯한 표정까지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장면.[37] 포먼은 이 경기 직전 3년간 치른 12경기 중 11경기를 2회 이내에 KO로 끝냈고, 다른 한경기조차 5회 KO로 끝냈다. 즉 6라운드 이상의 장기전은 거의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38] 알리의 펀치 직전을 보면 포먼이 가드는커녕 아예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다. 체력적으로 완전히 나가떨어진 것이다.[39] 실제로 경기가 끝난 후 알리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잠시 바닥에 주저앉았다.[40] 인용 및 편집 발췌[41] 다양한 풋워크, 다양한 연계 기술 및 콤보, 콩콩이스텝을 통한 스텐스 변환 및 카운터콤보, 알리스텝, 알리셔플, Rope-a-dope 등 알리의 모든 것을 불태운 경기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마닐라의 전율인 셈.[42] 당시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의 위상은 엄청났기 때문에 대통령과의 일대일 면담도 그렇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닉슨도 프레이저의 요청에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일이며, 곧 알리가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긍정적인 대답을 줬다.[43] 2021년 2월 7일 암 투병 중 사망.[44] WBC 타이틀은 레온 스핑크스가 챔피언 타이틀 획득 이후 다음 경기를 지명 도전자인 켄 노턴이 아니라 무하마드 알리와 다시 붙겠다고 선언하면서 규정위반으로 박탈되었다.[45] 12분 27초[46] 일반적으로 슈거 레이 로빈슨과 함께 복싱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손꼽힌다.[47]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알리는 이런 쇼맨십을 역으로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을 한다는 것. 즉 "너한테는 가드 따위도 필요없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행동이 계속 되면 상대는 점점 심적으로 몰리게 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전성기의 알리는 상대방의 펀치를 물 흐르듯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슥슥 피해버리는 괴물이었다.[48] 이런 알리를 보고 오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운되는 상대에겐 절대로 불필요한 추가타를 넣지 않았고, 상대가 그로기 상태에 빠졌을 땐 공세를 낮추며 심판에게 레프리 스탑을 요청하는 등 스포츠맨십을 지키는 면모도 보여줬다. 이는 링 밖에서의 과묵한 이미지와 달리 링 위에서는 다운된 상대에게도 추가타를 넣는 등의 과격한 모습을 보여준 조지 포먼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부분. 재미있는 점은 알리가 포먼을 8라운드 KO로 잡아낼 때, 다운되는 포먼에게 충분히 추가타를 넣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알리는 시선과 몸의 방향만 따라갔을 뿐 공격을 하진 않았다. 은퇴 후 포먼은 이 순간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넘어지는데도 때리지 않은 알리가 존경스러웠다고 말했다.[49] 훗날 알리도 점차 온건한 스탠스로 변화해 갔다. 사회적인 차별과 불공정함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점은 한결 같았지만.[50] #[51] 알리와 테럴의 경기[52] 안타깝게도 두 선수의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희소질환을 앓았다는 점이다. 로빈슨의 경우 1형 당뇨병을 앓았다.[53] 자유 훈장과 시민 훈장 두 개를 모두 수여받았다.[54] 상술했듯 알리 재단에서는 금메달을 버렸다는 얘기를 부인하고 있다.[55] '어쩌면 무하마드 알리는 천사였다'[56] 알리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하다.[57] 조지 포먼을 상대로 6라운드 진행 중에 클린치 상태에서 포먼의 귀에 대고 한 말. 이에 덧붙여 "어서 나에게 뭔가 보여줘! 그것보다 더 세게 칠 수 있잖아, 조지!"라고 도발한다. 포먼은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알리는 포먼을 8라운드 KO로 꺾고 챔피언 타이틀을 되찾는다.[58] 조지 포먼을 상대로 8라운드 KO 승리를 거둔 후 인터뷰에서 한 말.[59] 조지 포먼과의 경기를 앞두고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한 말이다.[60] 윗몸 일으키기를 몇 개나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며.[61] 1968년 2월 26일 베트남 전 징병거부의사를 밝히면서 한 말.[62] 이 발언과 위의 4개 발언 모두 베트남 전 징병을 거부하며 한 말이다.[63] 알리가 징병 거부에 대한 이유서에 작성한 내용이다.[64] 알리가 속한 이슬람교는 예수를 블랙 인디언으로 묘사한다. 대부분의 성인은 백인으로만 묘사되는 유럽계 기독교와 차별되는 부분.[65] 'change maps'와 'map change'로 두 문장의 대비를 이뤄 시적인 효과를 줬다.[66] 베트남 전쟁 징병을 거부하며. 알리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징병 거부와 개명을 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입대식에서 이름이 호명되면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서 선서를 하면 입대식을 통과하는 것이었는데, 장교가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개명 전 이름으로 알리를 호명하자 알리는 나가지 않았다.[67] 소니 리스턴과의 1차 타이틀 매치를 하루 앞두고 알리가 질 것이라고 말하는 대중들 앞에서 즉석으로 낭송한 시라고 한다.[68] 아디다스 광고에서 쓰였던 대사로 유명하다.[69] 인터뷰어의 이름이다.[70] 당시 배당률이 7:1일 정도로 그 누구도 알리가 이길 것이라 생각지 않은 경기였다.[71] "count"란 단어가 "계산하다"와 "중요하다"라는 두 뜻이 있음을 재치 있게 활용한 말이다.[72] 라이퍼는 15번의 하계 및 동계 올림픽과 4번의 FIFA 월드컵 등에서 여러 사진들을 찍었으며, 그의 사진들은 200개가 넘는 잡지 표지에 실렸다.[73] 1965년 당시 컬러사진을 찍기 위해선 스트로브가 필수였는데, 스트로브를 재충전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겨우 한 장밖에 찍지 못했던 것이다.[74] 반면에 라이퍼의 옆자리에 앉았던 AP통신의 사진작가 존 루니는 자신의 35mm SLR 카메라로 여러 장의 흑백 사진들을 찍었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위의 두 번째 사진이다. 루니의 사진들은 전세계의 신문에 게재되거나 같은 해 스포츠 부문에서 세계보도사진상을 수상하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현재는 두 사진의 위상이 정반대가 되어 루니의 사진을 라이퍼의 사진의 흑백 버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75] [76] 특이하게도 Track이라는 이름 대신 Round라는 이름으로 쓰였는데, 이는 알리가 경기 전 리스턴을 8라운드에 KO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각 Round는 벨 소리가 울리면서 시작되었다.[77] 그로부터 12년 후인 1976년 아이들의 구강 위생 장려를 목적으로 발표한 앨범인 "The Adventures of Ali and His Gang vs. Mr. Tooth Decay"는 프랭크 시나트라, 오시 데이비스, 스포츠 캐스터 하워드 코셀도 녹음에 참여하여 최우수 아동 레코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이번에도 수상에는 실패하였다.관련 영상[78] 공백기 이후까지 합치면 1970년 10월의 제리 쿼리 전과 같은 해 12월의 오스카 보나베나 전까지 2연승을 추가하여 데뷔 이후 32연승이다. 보나베나 전의 다음 경기인 1971년 조 프레이저 전에서 프로 데뷔 이후 처음 패배했다.[79] 당시 알리는 파킨슨병을 앓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이 두명이 스테이지로 걸어오자 예상 외의 등장에 깜짝 놀랐는지 벌떡 일어난다.[80]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쇼맨십, 자신감, 선수로서의 마음가짐 등 피지컬이나 경기 외적인 면에서도 알리가 후대 복서들에게 남긴 족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81] 2014년 팔콘 라이징 이라는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의 누나로 나왔다. 애석하게도 액션 담당은 아니다.[82] 1986년 휘트니 휴스턴이 리메이크했으며, 해외에선 이 버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83] 실제로 리암은 과거에 프로복서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그 때문인지 알리가 자신의 우상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