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디즈니가 설립한 회사에 대한 내용은 월트 디즈니 컴퍼니 문서 참고하십시오.
월트 디즈니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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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 Walt Disney | |
<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 월터 일라이어스 디즈니 Walter Elias Disney |
출생 | 1901년 12월 5일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
사망 | 1966년 12월 15일 (향년 65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1]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애니메이터, 성우[2], 애니메이션 감독 영화 제작자[3],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기업인 |
활동 | 1920년 ~ 1966년 |
신체 | 178cm |
부모 | 아버지 앨라스 디즈니 어머니 플로라스 콜 디즈니 |
형제 | 형 로이 올리버 디즈니[4] |
배우자 | 릴리안 디즈니[5] (1925년 결혼) |
자녀 | 친딸 다이앤 마리 디즈니 수양딸 샤론 메이 디즈니 |
종교 | 개신교 (회중교회)[6] |
최종 당적 | |
서명 | 파일:월트 디즈니 서명.p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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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애니메이터, 영화 제작자, 기업인.
세계적 미디어 기업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설립자이다.
"감독이 한 것도 자신이 했다."는 식으로 포장한 일이 많아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으나 그가 감독을 한 작품은 회사 설립 초기의 단편 애니메이션들이고[7], 대부분의 대표 작품은 연출 감독을 따로 두고 월트 본인은 기획과 프로듀스를 했다. 월트 디즈니의 능력은 프로듀서와 기업가로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2. 생애
1901년 12월 5일 미국 시카고 출생.[8] 부모님은 영국령 캐나다에서 이민온 아일랜드계 빈농이었다. 10세 때는 생계 문제 때문에 가족이 미주리주의 마르셀린으로 이주했다. 마르셀린에서 농사 실패로 농장을 팔아 캔자스시티로 이주했다. 돈 문제로 정규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으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림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그림으로 많은 돈은 벌지 못했으며, 생계를 위해 이것저것 다양한 일을 했다. 1917년에는 적십자사 트럭 운전수로 제1차 세계 대전을 경험하기도 했다.전쟁 후 캔자스시티 광고업체에서 컷 아웃 애니 제작에 착수해 뉴욕에서 셀룰로이드를 사서 《빨간 모자》를 만들었다. 이 시기 친구이자 천재 애니메이터 어브 아이웍스와 인연을 맺어 1922년 래프 오 그램(Laugh-O-Gram) 사를 세워 《신데렐라》나 《잭과 콩나무》 같은 명작 동화 단편 애니 6개를 제작하고, 혼자 뉴욕에 가서 1만 1천 달러를 조건으로 배급업체에 팔았으나 계약금 100달러를 받은 채 회사가 도산했다.[9] 이후 그는 어브와 헤어져 뉴스 영화 카메라맨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실사영화 감독이 되기 위해 할리우드로 진출했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자 애니메이션 하나에 전념하기로 마음먹고 형 로이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Disney Brothers Studio)를 세웠고, 실사-애니 합성영화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를 제작해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 시기부터 월트는 회사 경영과 재정은 형에게 맡긴 후 프로듀싱에 전념하고 어브를 총작화감독으로 다시 불러서 작화를 맡기도록 했다.
1927년 대형 영화사 유니버설 픽처스의 발주로 만든 오스왈드 래빗이 예상 외로 인기를 끌자, 배급사였던 유니버설 픽처스에게 그 캐릭터를 빼앗기고 말았다.[10] 이에 월트는 '두 번 다시 딴 회사 하청 안 맡겠다!'고 다짐하여 어브와 함께 오스왈드를 손봐 미키 마우스를 만들어 1928년에 미친 비행기를 선보였다. 미키 마우스의 성공으로 사업을 점차적으로 확장해 도날드 덕, 구피 구프 등 인기 캐릭터들을 내세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1930년 들어 절친 어브가 월트와의 갈등으로 헤어졌고, 팻 파워즈(Pat Powers)와도 대립이 지속되자 배급처를 컬럼비아 픽처스로 옮겨 최초의 컬러 애니 <꽃과 나무>를 만들었고[11], 1932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배급처를 옮긴 뒤 중편 애니 <아기돼지 삼형제>를 만들어 히트했다. 1934년 RKO 라디오 픽쳐스로 배급처를 옮겨 장편 영화의 제작에 뛰어들어 1937년까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제작에 돌입했다. 제작 당시 주위로부터 '미친 놈' 소리를 듣고 빚더미까지 올랐으나, 개봉 후 흥행성적이 8백만 불에 달해 빚더미를 말끔히 청산하고 임금체불도 해소됐으며, 디즈니 프로덕션 역시 우량기업으로 등극했다. 이후 버뱅크로 스튜디오를 옮겨 종업원은 1,000여명이 됐다.
1940년대 초엔 피노키오(1940년), 덤보(1941년), 밤비(1942년) 등을 각각 만들었으나, 타 영화사들과 달리 흥행은 적자였고 정리해고 및 임금삭감 등의 조치를 취하자 노사분규가 벌어지기도 했다.[12] 이를 타개하고자 장편 애니 제작을 중지하고 총통각하의 낯짝 같은 전쟁 홍보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으며, 일부 직원들이 미군의 태평양 전선 & 유럽 전선 참전을 위해 병영으로 징집된 일도 있었다. 2차 대전 중에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은 작품들을 수출할 해외 시장의 상실이 겹쳐서 재정적으로 상당한 적자에 시달렸고, 종전 이듬해(1946년)에도 사내 직원들의 절반을 해고했던 일 등의 고난을 겪으면서 점차 애니메이터나 연출가 등 스탭들에게 권리를 존중하는 쪽으로 바꾸었다.
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난 1950년대 초부턴 신데렐라(1950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년), 피터 팬(1953년) 등의 동화에 기반을 둔 애니메이션들을 잇따라 개봉했는데, 그 때마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 몰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월트 본인은 자신이 직접 체크하고 연출한 작품이 아니란 이유로 썩 내켜하지 않았고, 1953년 브에나 비스타란 독자 배급사를 세우고 1955년에 오랫동안 구상해 낸 테마파크인 '디즈니랜드'를 만든다. 1964년에는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합성한 영화인 메리 포핀스를 제작해 생애 처음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13] 월트 디즈니는 메리 포핀스를 그의 경력에서 최고의 업적 중 하나로 여겼으며, 평론가 레너드 말틴은 이 영화를 "이미 환상적인 디즈니의 경력의 정점"이라고 평했다.#
월트 디즈니는 생전에 거의 700편에 달하는 각종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 다큐멘터리 등에 제작자로 참여했고, 1954년부터 CBS <Walt Disney's Wonderful World>[14]를 통해 진행/해설자로서 얼굴을 비췄다.
마지막으로 정글북을 제작하던 도중에[15] 폐암이 발병해 버뱅크 세인트 조셉 병원에 입원해 폐 절단 수술을 받았다. 그는 수술마저도 버텼지만 몸을 살피지 않고 불철주야로 일한 완벽주의자였었던 탓에 회복이 더뎠다.
디즈니 프로덕션 식구들의 끊임없는 쾌유 기원에도 불구하고 1966년 11월 폐암 진단을 받았으며 같은 달 30일엔 건강이 악화되어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생일이 지난 지 열흘 뒤인 12월 15일에 65세로 숨을 거뒀다. 사망하기 전에 유언으로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기억하기 위해 장례식을 치르지 말아달라"고 전했고, 시신은 화장되어 글렌데일의 포레스트 론 공동묘지에 유해가 안장됐다.
월트 사후에 디즈니 프로덕션은 한동안 부침을 겪었으나, 1980년대 들어 회사 외부에서 마이클 아이스너, 제프리 카첸버그 등의 경영인들을 영입하고 기업 구조를 쇄신하면서 디즈니는 새로운 회사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영화 산업과 저작권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회사가 되었다...[16] 여담으로 월트 디즈니의 시신이 냉동인간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설이 나돌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니 믿지 말자.
그외 자세한 인생사는 다음백과- 월트 디즈니와 영문 위키백과를 참고해볼 것.
3. 평가
3.1. 호평
월트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업계와 세계 오락 산업에 미친 영향력은 현재도 방대하게 남아있으며 대중문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는 그를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이자 가장 유명한 비정치적 공인"이라고 일컬었고 뉴욕타임즈는 그를 추모하는 기사에서 "아마도 미국과 소련 양쪽으로부터 칭찬받은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평가했고 뉴욕 데일리뉴스는 월트 디즈니를 '20세기의 아이소포스'라 표현하기도 했다.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월트 디즈니의 작품을 미국의 가장 뛰어난 예술적 성취라며 극찬을 하기도. #1920년대 말에 월트는 미국 애니메이션을 새롭게 창조했다.[17] 움직임이나 선의 탄력성을 강조하던 신기한 어떤 것으로부터 캐릭터와 내러티브와 감정을 강조하는 예술로 차츰 뒤바꿔놓는 식이었다. 아울러 월트는 부드럽고 둥글고 대담하고 다채로운 형태를 선보임으로써 그래픽 디자인을 새롭게 창출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뒤 선구자적 예술가들은 월트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에서 나왔던 그래픽 디자인을 채택해서 각색했다.
평론가 로버트 휴즈는 "월트 디즈니는 저급예술과 고급예술의 수렴을 통해서 팝아트 분야를 일궈낸 장본인"이라고 평가했다.
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디즈니랜드를 통해서 미국 오락의 외양을 변모시키기도 했다. 분명히 디즈니랜드 이전에도 놀이공원이 있긴 했지만, 하나같이 이러저러한 탈것들, 게임, 쇼를 뒤섞어놓은 잡탕이었다. 디즈니는 놀이공원을 일련의 오락거리를 모아놓은 곳이 아니라 상상력이 충만한 체험의 공간, 즉 테마파크로 탈바꿈시켰다. 그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그래픽 디자인을 변모시킨 것처럼 그의 공원도 결국에는 도시 디자인을 바꿔놓은 것이다.
월트 디즈니가 1957년 작성한 그림. 현대의 미디어 믹스 전략을 그보다 훨씬 이전에 정립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
이처럼 월트 디즈니는 위대한 기업인으로 평가받지만 그럼에도 사실 본인은 직접 회사를 경영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월트는 주로 기획적인 측면에서 회사에 기여한 것이었고 회사의 전반적인 재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회사의 공동 창업자이자 그의 형인 로이 디즈니였다. 그는 1929년부터 1971년 뇌졸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디즈니의 CEO로 재직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필요한 자금과 디즈니랜드의 건설에 필요한 투자처를 확보하는 등 월트가 구상한 아이디어를 경제적으로 서포트하는 데 끝까지 헌신했다. 그래서 로이 디즈니의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지금의 디즈니도 없었을 것이라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야심적인 크리에이터와 이를 뒤에서 지원하는 비즈니스적 파트너의 동업이라는 측면에서 둘의 관계를 다른 곳에 비유하자면 초창기 픽사에서의 존 라세터와 스티브 잡스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듯.
3.2. 비판
당연히 월트 디즈니에게도 어둠이 있다. 가공할 저임금으로 하청을 했으며 모든 작품을 홍보할 때 영화 제작자인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고 홍보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월트 디즈니가 만든 애니로만 알지 이 작품들의 영화감독이나 애니메이터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18] 현재도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등 미국의 대형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신작이 나올 때마다 제작사 자체의 브랜드에만 의존해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입장에서는 언제 회사를 그만둘지 모르는 직원을 밀어주는 것보단 회사가 다 한 걸로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19] 덕분에 히트작을 다수 연출한 감독들조차 이름을 알리지 못하는 판. 미국 애니메이션 감독들은 인터넷 시대가 오고 직접 팬과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그제서야 이름을 알린 사람들이 많다.[20] 옆동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일본은 1세대 오타쿠인 히카와 류스케, 데이터 하라구치 같은 평론가들이 창작자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해서 감독 이름이 알려진 편이다. 일본도 기업이 앞장서서 창작자를 강조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 외에도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안 좋은 흐름을 만든 게 월트 디즈니라고 볼 수 있다.또한 미키 마우스를 비롯한 디즈니의 마스코트 캐릭터들을 만들어낸 친구 어브 아이웍스와 갈등도 유명한 사실이다. 평소 조용하고 온화롭던 어브는 월트가 애니 타이밍을 무단 변경한다거나, '그깟 동화는 아랫것한테 맡겨라'라고 주장했기에 두 차례 언쟁을 벌였다. 분개한 아이웍스가 독립하자, 수단방법 안 가리고 훼방을 놓기도 했다. 결국 아이웍스는 애니메이션보단 멀티플레인 촬영기법 등 애니 효과 개발로 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21]
그 밖에도 스튜디오에서 감독에게 잦은 간섭을 해서 참다못한 여러 감독들이 1941년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에 참가하여 끝내 UPA라는 독립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디즈니를 풍자하며 실컷 비난할 정도였다. 돈에 환장하고 독재자 스타일이며 밑에 사람을 간섭하고 괴롭히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월트가 처음부터 잦은 간섭만 했었던 사람이라면 밑의 애니메이터, 연출가들처럼 이들이 그의 스튜디오에서 일하지 않았었을 것이며, 파업이 진행되었을 때에도 월트의 편에서 잔류한 애니메이터들이 있었다. 월트는 동화 하청 작업 같은 노가다에 가까운 작업은 저임금을 지불했지만 애니메이션의 품질에 크게 작용하는 연출 작업을 하는 연출가와 중요한 원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에게는 엄청난 고액을 지불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22] 월트 디즈니는 작품이 성공하거나 좋은 작화가 나와도 칭찬에 매우 인색했는데 성격이 소심하고 살짝 이상했기 때문에 "칭찬을 하느니 보너스로 돈을 더 주면 좋아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23] 거기다 애니메이터를 고를 때는 완전히 실력제였고 학력이나 출신은 특별히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끝까지 그를 따른 애니메이터도 적지 않다. 다만 애니메이터들의 말로는 돈을 엄청나게 줬지만 그 대신 완벽주의자인 월트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작화를 요구해서[24] 그 돈을 받아도 부족할 정도였다고 하며, 버티기 힘들어 그만두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독단주의적 성향과 직원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로 인해 수많은 직원들이 스튜디오를 떠났던 것은 월트의 큰 실책이자 비판받을 오점임엔 분명하다. 그런데 월트 디즈니는 이렇게 사람들이 그만두어도 다시 인재를 찾아오면 된다는 마인드였으며 신기하게도 또 어디선가 인재를 데려와서 작품과 회사는 살리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 맘대로 해도 일이 잘 풀려니 문제를 고칠 생각이 없었으며 이런 그의 성향은 죽을 때 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이중성은 상대가 형제라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회사 설립 시 공동 창업자였던 형 로이 올리버 디즈니에게 회사명을 '디즈니 브라더스'로 짓겠다고 약속한 뒤, '월트 디즈니'로 등록한 뒤 화를 내는 로이에게 '사장 이름을 넣어야 신뢰감이 있다'고 발뺌했다.
미국에 메카시즘 광풍이 불었을 때는 여기에 적극 동조하며 이전에 파업을 하며 자신을 비판했던 사람들이나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가정에서도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월트 디즈니가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된 것도 나름 뒷사정이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냉대를 당하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게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동화 등에 심취하게 된 것도 이런 어린 시절의 상처로부터 도피하려는 심리 때문이었다.
여성을 무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남성직원들이 수염을 기르지 못하게 금지시킨 적도 있다.
4. 루머
월트 디즈니에 대한 루머가 많은데, 일부는 실제였으나 잘못 알려진 것도 상당수. 대표적인게 월트 디즈니가 죽은후 냉동보관 되었다는것, 그리고 반유대주의자라는 것. 다음은 음모론자들의 주장이다.4.1. 냉동인간설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후 냉동보존되었다는 루머가 널리 퍼져있으나 사실이 아니다.디즈니는 1966년 12월에 사망 후 화장되어 글렌데일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에 안치되었다. 최초의 냉동인간인 제임스 베드포드는 1967년에 냉동되었다.
4.2. 반유대주의 논란
월트 디즈니는 인종 차별주의자이며 특히 유대인을 너무나도 증오하여 디즈니에는 일절 유대인이 입사하질 못했다는 루머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덕분에 어빙 탈버그 상을[25] 받고서 트로피를 집안에 내던졌다는 후문까지 있다. 또한 한동안 나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때문에 사실 히틀러와 개인적인 친구라는 이야기까지 있었을 정도.[26]. 다만 히틀러가 별 볼 일 없던 시절에는 초창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볼 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미키 마우스를 따라 그린 것이 남아있기도 하다.[27] 아이러니 하게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나자, 나치와 싸우는 미군과 후방의 국민들을 고무하기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 역할을 엄청 성공적으로 수행해서 디즈니는 재정적으로도 크게 성장하고, 그 이후 미국에서 애니메이션이 대중적인 문화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위에 서술된 주장들은 확실한 근거가 빈약하다. 첫째로 월트 디즈니의 전기문 Walt Disney 미국적 상상력의 승리를 쓴 닐 개블러(Neal Gabler)에 의하면 월트가 일부 반유대주의자들과 친구이긴 했으나 본인은 반유대주의 활동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아래에도 명시된 대로, 월트는 오히려 유대인 단체들에 대한 기부도 활발한 편이었다. # 둘째로 디즈니가 나치에 긍정적이었다는 주장 역시 근거는 없으며, 실제로 나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을지조차 확실치 않은 관계로 루머이다. 게다가 유대인인 제프리 카젠버그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회장을 맡은 바 있으며, 부사장도 짐 골드먼 같은 유대인 간부들이 주축이다.[28]
또한 월트는 살아 생전에도 유대인들을 고용했다. 디즈니의 초기 대표 애니메이터인 '아트 배빗(Art Babbitt)'도 유대인이었다. 물론 그는 죽을 때까지 월트의 인성을 까기는 했으나 월트가 자신에게 지불한 금전적 대우는 부족하지 않았다고 했다. 각종 유대인 관련 단체들에 기부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한 유대인 단체에 의해 1955년 올해의 인물로까지 선정되었다. ##2
우습게도 중동권에선 시온주의자들을 후원한다는 루머가 있다. 다만 중동권에서는 시온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 직전까지 나치들을 후원했다는 루머도 있어, 중동 한정으로는 의외로 상극인 루머는 아니다.
패밀리 가이에서는 반유대주의자설을 차용하여, 스튜이가 모든 세계가 디즈니풍인 세계로 가는 에피소드에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평화롭게 파이에 대한 노래를 부르다가, 갑툭튀한 유대인을 때려죽이는 장면을 넣기도 했다. 현대 미국에서 디즈니의 반유대주의설이 총통각하의 낯짝 관련 오해와 더불어 정설로 취급받게 된 큰 이유 중 하나.
4.3. 백인 우월주의자 논란
또한 백인우월주의자로서 KKK 회원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으며 실제로 디즈니에선 월트 디즈니가 죽은 뒤에야 회장이 된 조카 로이 디즈니에 의하여 유색인종 입사가 허용됐다는 루머마저 있다. 이 역시 사실이 아니며, 심지어 40~50년대에도 디즈니에는 아시아계 직원이 있었다. 초기 디즈니 홍보용 영상에 아시아계 직원의 모습이 보인다.구피를 창조할 정도로 디즈니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월트의 직원 대우에 불만을 품고 파업을 주도했으며 평생 그를 까면서 살아온 유대인 애니메이터 아트 배빗조차도 월트 디즈니는 인종 차별을 하지 않았다고 했고 디즈니의 첫 흑인 애니메이터인 '플로이드 노먼(Floyd Norman)' 또한 월트와 같이 일했지만 그에게 차별을 당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후 월트 디즈니는 실사 영화 제작에 전폭적인 투자를 해나갔는데 이 무렵 제임스 바스켓(James Baskett) 등의 흑인 배우를 주역으로 기용한 작품인 남부의 노래도 제작했다.[29] 월트 디즈니의 유작인 정글북도 인도인이 주연이다. 이 외에도 그와 같이 일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부정했다. 그러나 이 루머는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으며 믿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Mickey's Mellerdrammer, Mickey's man Friday, Trader Mickey 등의 일부 디즈니 단편과 2차 대전 전시 선전용 단편들, 덤보, 남부의 노래, 피터팬 등의 작품에서 구시대적 스테레오 타입의 캐리커쳐가 나왔던 건 사실이다. 1933년 실리 심포니 단편 시리즈로 개봉된 아기돼지 3형제의 최초 상영본에선 후반부에 늑대가 위 영상처럼 솔 파는 유대인으로 변장한 모습이 나왔으며, 종전 후 문제가 제기된 해당 장면을 1948년 재개봉했을 당시 전면적으로 수정해서 새로 그려냈다. 때문에 디즈니+에서 스트리밍 중인 판본은 이 버전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워낙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절이라서, 이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어느 정도 무의식적으로는 저런 차별적인 요소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의도한 부분이라기보다는 시대적 한계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데즈카 오사무나 후지코 F. 후지오,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에도 흑인을 스트레오 타입으로 그리는 묘사가 있고 이러한 비판을 받지만 이들이 인종 차별주의자로 불리지는 않는다. 실제로 차별을 한 것이 아니었고 묘사에 배려가 부족한 실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묘사가 있다는 사실이 부풀려져 이런 루머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이 많아 월트 디즈니 생전에 나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작품 평가와 별개로 평점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어쨌든 월트 디즈니 생전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이러한 당대 시대상의 한계로 인해 훗날 인종차별 경고문을 붙임과 동시에 디즈니플러스에서 7세 이상 관람가 딱지를 붙여버리고 말았다.
4.4. 그 외
- 동성애자였다는 얘기 역시 존재한다. 물론 당시의 시대 상황상 자신이 스스로 커밍아웃했을 리는 없고, 죽은 뒤에 연인과 주고 받은 편지로 알려져 있다고 하나 확인되는 바는 없다.
- 월트가 설립한 디즈니의 사장은 대대로 생전에 월트가 받았던 악명(?)을 그대로 계승하는 자들이 많다는것도 재밌는 대목. 대표적으로 디즈니의 사장을 지냈던 마이클 아이스너를 예로 들수있는데 그에게 반감을 가진 애니메이터들이 나와서 독립한 회사가 드림웍스인데 드림웍스의 슈렉은 악역의 얼굴을 아이스너의 얼굴을 베이스로 모델링하여 디즈니를 전면으로 까는 작품.
- 월트 디즈니가 실사 영화를 만드는 걸 싫어했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나왔지만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폭망 후 TV와 실사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30] 호주 출신 영국 작가 P. 트래버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 실사 영화 메리 포핀스는 월트 디즈니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64년에 나왔다. 게다가 영화 계획은 26년 전인 1938년에 나왔지만 원작자인 P. 트래버스가 자기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걸 싫어하여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오랫동안 설득했고, 영화 제작을 하면서도 작가가 워낙 하나하나 깐깐하게 굴어 감독인 스티븐슨은 물론 제작진과 출연자들도 고생했다.[31] 이 루머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에서 직접 디즈니 이름으로 12세 이상 등급의 컨텐츠를 제작하기 꺼렸다는 일화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32]
- 월트 디즈니가 프리메이슨의 단원이었다는 루머도 매우 오래된 떡밥인데, 이는 하나의 루머가 생기고 거기에 와전(?)까지 된 것으로, 프리메이슨에서는 월트 디즈니가 단원이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5. 어록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꿈을 실현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내 모든 것이 꿈과 생쥐 한 마리로 시작했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
- 월트 디즈니, 1954년 10월 27일 디즈니 랜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 월트 디즈니, 1954년 10월 27일 디즈니 랜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돈을 벌어들인다.
비평가를 즐겁게 할 필요는 없다. 일반 대중이 대상이다.
나는 주로 어린이를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여섯 살이든 예순 살이든 우리 모두의 어린이를 위해 영화를 만든다.
6. 여담
- 프랑스계 미국인이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은 프랑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디즈니란 성씨 자체가 원래는 디지니(D'isigny)라고 썼는데 de+isigny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조상은 노르망디의 마을인 이지니쉬르메르[35] 출신이라고 한다. 노르만족으로서 1066년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때 같이 따라갔다가 17세기경 다시 아일랜드로, 그리고 미국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 역대 영화 및 애니메이션 업계인이자 제작자로써 가장 많은 상복을 차지한 인물이기도 한데 아카데미상 29회 수상[36]이라는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어빙 탈버그 상[37]을 비롯한 상들을 엄청나게 받았다. 죽기 2년 전에 데즈카 오사무와 뉴욕 세계 박람회 현장에서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눈 적도 있는데, 데즈카의 자서전을 보면 월트 디즈니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서 되려 자신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 각각 1937년과 1954년에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적이 있으며, 2016년 개최된 D23 엑스포에서 월트 디즈니 패밀리 뮤지엄의 발표에 의하면 월트가 전 세계에서 950개 이상의 영예와 표창장을 수여받았음을 합산하여 기록했다고 한다.
- 후속작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1966년에 그는 주주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왜 메리 포핀스의 속편을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이유를 밝혔는데, 자신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타고난 실험가일뿐더러 설령 속편을 만든다 할지라도 절대 오리지널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로부터 50년 뒤에서야 나온 메리 포핀스의 속편이 결국 원작만 못 하다는 평을 들은 것을 보면 월트의 우려가 타당했던 것일 수도.[38]
- 인생의 말년에 접어들어 생애 최대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월트 디즈니 월드의 건설에 자신의 온힘을 쏟아부었는데, 정말이지 막대한 거금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였을뿐더러 당시만 해도 디즈니는 비교적 영세한 규모의 회사였기 때문에 건설비용을 모두 감당하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재정적으로 탄탄한 다른 대기업에 회사를 매각하려고 여러번 협상을 거쳤다 한다. # 1966년 월트 디즈니의 사망을 몇개월 앞둔 시점에서, 제너럴 일렉트릭과 웨스팅하우스에 회사 매각 가능성을 논의했지만 결국 불발되었고, 같은 해에 워렌 버핏과 만난 자리에서 8000만 달러에 회사 전체를 팔겠다고 제안했지만 버핏은 그저 지분 5% 가량을 매입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
- 적십자 운전병으로 참전했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으로의 귀환 명령을 기다리며 유럽에 대기 중이던 당시 우연한 기회로 뜯지도 않은 독일군의 새 철모[39]들이 중고 시장에 나온 것을 보고 몽땅 사들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미술 실력을 이용해서 철모에 가짜 총알 구멍을 내거나 찌그러뜨리고 색칠을 하는 등 전장에 굴러다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미군 병사들에게 팔아먹어 쏠쏠한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미군은 유럽 전선에 좀 늦게 참전했기 때문에 의외로 실전에 투입되지 않은 병력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이 귀국하면서 무용담을 늘어놓기 위한 용도로 많이 사갔다고(...). 이외에도 이 2년간의 프랑스 파견 기간동안 차량에 만화 캐릭터 노즈아트를 그리거나 적십자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하고, 전쟁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미국 적십자의 관련 포스팅
- 가장 좋아한 디즈니 노래는 메리 포핀스의 주제곡 중 하나인 Feed the Birds (Tuppence a Bag)다.##
- 디즈니가 배급하는 <세이빙 MR. 뱅크스>에서 톰 행크스가 월트 디즈니 역할을 연기했다. 영화 메리 포핀스의 제작을 위해 소설 메리 포핀스의 작가로부터 판권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월트 디즈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아래 사진은 월트 디즈니가 젊은 시절 자신의 명함에 그린 오너캐다.
- http://tvtropes.org/pmwiki/pmwiki.php/Creator/WaltDisney - 월트 디즈니 자신이 제작자를 담당한 작품들에서 사용한 클리셰 기법들을 분류해 둔 TV Tropes 문서 웹페이지.
- 폴아웃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누카-콜라의 발명가이자 기업가인 존 칼렙-브래드버턴은 코카콜라의 창업자들보다 월트 디즈니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누카 월드나 매카시즘 시대에 활동한 기업가 등 월트 디즈니의 요소를 그대로 따왔다.
- 진보적인 할리우드 산업체에서 일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공화당원이었다. 젊었을 때는 민주당 지지자였으나 1940년 미국 대선을 이후로 공화당 지지자로 전향했으며, 1944년 미국 대선에 나온 토머스 E. 듀이를 후원해 준 것과 1947년 2차 레드 컴플렉스(레드 스케어)가 미국에서 일었을 때는 반공주의자로 활동하면서 매카시즘 운동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 월트와 함께 일하거나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인이 공개적으로 드러냈던 모습관 내면적으로 상당히 다른 성격을 지녔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밝은 성격의 멋진 신사의 이미지를 고수했지만 그것은 마케팅을 위한 페르소나였고 실제로는 상당히 소심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영어 위키백과 월트 디즈니 문서의 개인사 & 성격 문단과 평판 문단도 참고해 볼 것.
- 월트 디즈니가 마지막으로 감독으로서 연출한 애니메이션 작품은 1935년 개봉된 실리 심포니 시리즈의 The Golden Touch 편이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한창 제작하던 와중에 1930년 이후 몇 년간 맡지 않았던 애니메이션 감독직에 자신이 적합할 지에 대한 테스트 격으로 작품을 연출했지만, 같이 일한 사람들한테 (해당 작품에 대하여) 두 번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뒀을 정도로 흥행에서 큰 실패를 거두었고 이후엔 완전히 제작자로 전업하여 활동하게 된다.
-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이 다른 회사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참고해 그리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고 한다. 어차피 우리가 만든 것보다 못 할 테니까 참고가 되지 않는다. 라는 이유였다고 한다. 참고할 거면 실사 영화를 참고하라고 했다고 한다.
- 닐 개블러가 서술한 전기문 《월트 디즈니: 미국적 상상력의 승리》에서 언급된 내용에 의하면, 월트 스스로가 중대한 난관에 부딪혀 위기에 직면하거나 기대와는 정반대적인 상황에 놓여있다고 판단할 경우 이전에 구상했던 것들을 포기하거나 깔끔히 잊으면서 새로운 것들을 계획해가며 구상했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디즈니의 유산으로 자리잡은 미키 마우스 클럽 등의 TV 프로그램이나 디즈니랜드라는 테마파크의 탄생과, 말년에 칼아츠를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애니메이션 업계인 양성에 보다 이바지해 준 것도 월트의 그러한 과감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현재 그의 묘지는 로스앤젤레스 글랜데일 숲 공원에 있으며 그곳에는 아내와 딸 부모님과 형제도 함께 안장되어 있다.
- 뛰어난 스토리텔러의 명성과 세심하고 꼼꼼한 제작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월트가 프로듀서를 맡은 작품들을 살펴보면 (원작과 비교하면) 시나리오가 단순하고 평이함에도 스토리(개연성)에 몰입하지 않으면서 잇따르는 재미와 유머들로 하여금 현재 관객들이 보아도 지루하게(혹은 루즈하게) 느껴지지 않는 플롯의 작품들이 많다. 이에 나인 올드 맨 멤버 중 프랭크 토마스와 올리 존스턴은 도서 "Too Funny For Words: Disney's Greatest Sight Gags"에서 당시 영화사들이 개그만으로 영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의문을 표하며 더 많은 개연성을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월트가 이런 경향에 대해 이제 영화를 끝낼 시간인데 관객을 웃게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 그의 생각엔 영화의 최우선 순위가 웃음이었으며 너무 지나치면서 이야기가 금방 지루해졌지만 월트는 생전 평생 그런 점을 잊지 않았고 예능적인 면보다 연속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을 기피하는 면모를 보였다고 증언했으며, 정글북에서 스토리 아티스트로 참여한 플로이드 노먼도 자신의 블로그에서[40] 작품을 제작할 때 스토리 아티스트들에게 책을 읽거나 따라하지 말 것을 지시했으며 개연성이 우려되는 경우엔 캐릭터와 오락성이 더 중요하다고 하며 (관련한) 아이디어를 기각시킨 일들도 목격했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전략은 훗날 또다른 영상 매체 비디오 게임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나온 바 있으며, 현재도 과다한 개연성 몰입 및 설정 변경으로 갑자기 캐릭터가 붕괴되거나, 사상을 주입시켜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결과물로 남거나 후속편의 제작이 보류, 중지되는 미디어믹스 시리즈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이에 따른 문제점과 미치는 여파들도 짐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 교통 수단 중에선 철도와 기차를 좋아하였으며 1949년 새 집으로 이사했을 때, 월트는 디즈니랜드 테마파크의 청사진을 구상하면서 동시에 집 뒷마당에서 철도 미니어처를 만드는 작업도 했었다고 한다. 이런 영향으로 생전 월트가 제작자를 맡은 장&단편 애니메이션 작품들에선 종종 기차와 철도가 (움직일 때의 세부적인 기동 장면과 관련된 철도 용어들도 무척 꼼꼼하고 정확하게) 묘사된 작품들이 종종 나왔으며[41] 디즈니 랜드와 월트 디즈니 월드의 내부 어트랙션에도 그의 이름을 딴 레일로드가 설치되어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 하츠오브아이언의 모드인 카이저리덕스에서는 태평양국의 대선후보로 등장한다. 태평양국으로 플레이 할때
선택지가 2가지가 등장하는데 이브에 전쟁을 피하는
선택지를 골라서 후견주의 루트로 갈수 있다.
7. 관련 인물
- 동료
- 전 동료[52]
- [▼관련 명단 일람]
- * 휴 하먼(Hugh Harman) & 루돌프 아이싱(Rudolf Ising)[53]
- 아트 배빗
- 어브 아이웍스
- 로버트 매킴슨
- 프리즈 프레렝
- 모리스 노블(Maurice Noble)[54]
- 프랭크 태쉬린(Frank Tashlin)[55]
- 에드 러브(Ed Love)[56]
- 레이 패터슨(Ray Patterson)[57]
- 케네스 뮤즈(Kenneth Muse)[58]
- 프레스턴 블레어(Preston Blair)[59]
- 하울리 프랫(Hawley Pratt)[60]
- 잭 브래드버리(Jack Bradbury)[61]
- 코넷 우드(Connet Wood)[62]
- 사이러스 영(Cyrus Young)[63]
- 타이러스 웡(Tyrus Wong)[64]
- 칼 스털링(Carl W. Stalling)[65]
- 빌 타이틀라(Bill Tytla)[66]
- 스티븐 보서스토(Stephen Bosustow)[67]
- 에머리 호킨스(Emery Hawkins)
- 딕 런디(Dick Lundy)
- 월트 켈리(Walt Kelly)[68]
- 돈 패터슨(Don Patterson)
- 타카모토 이와오(Takamoto Iwao)[69]
- 존 허블리(John Hubley)
- 월트 클린턴(Walt Clinton)
- 버질 파트치(Virgil Partch)
- 빌 멜렌데즈
- 멜 블랭크[70]
- 기용한 애니메이터, 연출가
- [▼관련 명단 일람]
- * Nine Old Men(나인 올드 맨)[75] - 밀트 칼(Milt Kahl), 마크 데이비스(Marc Davis), 워드 킴볼(Ward Kimball), 프랭크 토마스(Frank Thomas), 에릭 라슨(Eric Larson), 올리 존스턴(Ollie Johnston), 볼프강 레이더만, 존 라운스베리(John Lounsberry), 레 클락(Les Clark)
- 그림 냇윅(Grim Natwick) - 1930년대 중기에 일부 디즈니 단편과 백설공주의 일곱 난쟁이의 제작에 참여. 이전엔 플라이셔 스튜디오에서 주로 활동.
- 잭 키니(Jack Kinney)
- 잭 한나(Jack Hannah)
- 벤 샤프스틴(Ben Sharpsteen)
- 칼 바크스(Carl Barks) - 초기 도날드 덕 관련 코믹 작품에서 스토리 작가로 활동.
- 클라이드 제로니미(Clyde Geronimi) - 1930~1950년대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활동한 이탈리아계 미국인 애니메이터.
- 데이비드 핸드(David Hand) - 월트 디즈니의 의향을 잘 이해했으며 현장을 잘 통제하고 사람을 잘 갈궈서 작화 관리를 잘 했고 현장 감독으로는 최고였다고 한다. 1944년 퇴사.
- 노먼 퍼거슨(Norman Ferguson)
- 플로이드 노먼(Floyd Norman) - 1950~60년대에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일했던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애니메이터.
- 윌프레드 잭슨(Wilfred Jackson) - 캐릭터의 연기와 움직임을 통제하던 사람으로 증기선 윌리부터 디즈니의 많은 작품의 연출과 작화를 담당했으며 회사에서 연출 실력으로는 최고였다고 한다. 레이디와 트램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은퇴.
- 해밀턴 루스케(Hamilton luske)
- 클리프 에드워드(Cliff Edward)
- 돈 블루스 - 잠자는 숲속의 미녀 제작 당시 몇 달간 애니메이터로 일한 경력이 있다.
- 빌 월쉬(BIll Walsh) - 미키 마우스 클럽 등의 디즈니 TV 프로그램 관련 제작자.
-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phenson) - 195~60년대 디즈니 실사 영화 감독.
- 추종자
8. 관련 자료
- 월트 디즈니 Walt Disney 미국적 상상력의 승리(총 2권, 닐 개블러(Neal Gabler) 저술)
- Disney Animation: The Illusion of Life[81][82]
- 미키 마우스: 전설의 시작
9. 둘러보기
미키 마우스 전담 성우 | ||||||
1대 월트 디즈니 | → | 2대 짐 맥도널드 | → | 3대 웨인 올와인 | → | 4대 브레트 이완 |
[1] 그의 시신은 글렌데일에 있는 포레스트 론 묘지에 안장되었다. 참고로 이곳 버뱅크에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 본사 외에 최고 라이벌 회사의 본사도 있다.[2] 후술할 증기선 윌리 때문에 세계 최초의 애니메이션 성우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3] 초기 디즈니 단편의 경우는 쭉 감독을 맡아왔지만 이후 장편 영화를 제작하면서부터 감독 대신 프로듀서의 위치에서 디즈니 영화들을 관리하기 시작했다.[4] 동생 월트와 함께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공동 창업자이자 초대 회장. 1893년 출생. 1971년 12월 20일 뇌졸중으로 사망.[5] 1899년 출생. 1997년에 사망했으며 월트보다 2살 많았지만 월트가 65세로 당대 평균 비슷하게 산 것에 비해 무려 98세까지 장수했다. 여성 평균 수명이 더 길다는 걸 감안해도 상당히 장수한 편.[6] Congregational church. 칼뱅주의의 일파로서 회중(교회의 군중) 정치로 교회를 운영하는 개혁주의 개신교 교회이다. 위로부터 지배를 부정하여 각 교회의 독립을 주장하고(개교회주의), 국가로부터 분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독립파, 혹은 분리파 교회라고 불리며# '조합교회'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의 미국에서는 그리스도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UCC)의 주요 구성교단이 되었다. 월트 디즈니의 부친 엘리아스 디즈니(Elias Disney)은 회중교회의 목사였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회중교회의 일원이었다. 월트 디즈니의 이름인 '월트' 역시 회중교회의 사역자였던 월터 파(Walter Parr)에서 딴 것이다. 월트 디즈니는 이러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회중교회에 속했다#[7] 같이 일한 애니메이터들의 말로는 월트 디즈니 본인의 연출 실력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하면 대단해진다고.[8] 여담이지만 그해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였다. 군사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문화의 힘으로 대영제국보다 더욱 넓은 지역을 지배한 인물이 태어남으로써 19세기와 20세기의 세계정복 방식이 큰 차이가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격이다.[9] 참고로 이 래프 오 그램 스튜디오는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에 위치하고 있는데, 도산한 이후에도 건물이 허물어지거나 하지 않고 유지되어 2010년대에 건물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10] 훗날 미키 마우스를 시작으로 돈을 왕창 벌자 21세기에 오스왈드의 판권을 다시 사들였고, 에픽 미키에 출연하게 됐다.[11] 꽃과 나무 개봉 이전에 월트는 테크니 사와 테크니컬러 프로세스를 3년 동안 독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권리 계약을 미리 체결하며 컬러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한 바 있었다.[12] 1941년 발발한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의 자세한 과정은 Pink Elephants on Parade 문서를 참고하기 바라며, 이직한 직원들의 명단은 영어 위키백과의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의 파업 문서를 참조해볼 것.[13] 메리 포핀스의 대성공으로 디즈니는 막대한 수익을 플로리다 중부 지방의 땅을 구입하고 월트 디즈니 월드의 건설 자금을 조달하는데 사용했다.#[14] 한국 KBS1 방영 당시 <디즈니랜드>란 제목이었으며, 월트 디즈니의 목소리는 유강진 성우가 맡았다.[15] 다음 작품인 아리스토캣까지는 기획 및 초안이 나온 상태였다.[16] 마이클 아이스너의 부임 이후 그룹 규모가 커지면서 영화사들을 산하에 거느리게 되었고, 성인용 장편 실사 영화의 제작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더 규모가 거대해진 지금은 애니메이션 영화보다 되려 실사 영화의 제작 편수가 더 많을 정도. 물론 줄었다는 것은 아니고 나오는 기간과 속도는 비슷하다.[17]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의 아버지인 데즈카 오사무 또한 월트 디즈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보았을 때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애니메이션에 그가 미친 영향력은 거대하다.[18] 이러한 운영 방식이 관행으로 남은 탓에 디즈니는 지금도 블랙기업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월트 생전에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제작된 장편 애니들의 스태프진을 잘 살펴보면 월트 본인은 영화 제작자(producer)로 참여했다고 표기되어 있다.[19] 디즈니/픽사 작품 포스터에는 아직도 '토이 스토리 제작진', '겨울왕국 제작진'같이 제작사의 이전 작품을 내세울 뿐 감독 이름이나 전작은 나오지도 않는다.[20] 다만 1966년 미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 'FunnyWorld'가 발행된 이래, 애니메이션 역사가를 포함한 평론가들이 과거 태동기와 황금기에 상영된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감상하고 본인들의 견해를 다룬 비평을 올리기 시작했었다. 월트 디즈니를 포함한 애니메이션 업계인들도 1950년대부터 차츰 TV 출연을 하기 시작했으며 1970년대 초중기부턴 애니메이션에 대한 연출 기법을 분석 & 연구하거나 애니메이션 감독 & 주요 애니메이션 스탭과의 인터뷰가 포함된 도서 자료들과 The Boys from Termite Terrace, Bugs Bunny: SuperStar 등의 다큐멘터리 영화도 발간 & 개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에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나 전문 도서 자료, 다큐멘터리 등의 관련 매체를 접하는 사람들은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업계인들의 TV 인터뷰가 수록된 방송자료도 본방을 놓치면 다시 보는 것이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 애니메이션 감독의 인지도가 보다 넓어진 때는 개인용 인터넷이 보편화된 1990년대 중후기(현대기)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의 인지도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거나 거의 묻혀진 동시기의 감독들도 여럿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자가 플라이셔 형제. 그나마 동시기에 활약한 애니메이터들 중 유명한 연출가는 척 존스, 텍스 에이버리, 해나-바베라 콤비가 있다.[21]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새》에서 새들이 가득 검게 모여든 듯한 장면이 실은 아이웍스가 참여해서 그린 애니메이션 특수효과로 그려진 것이다.[22] 평생 월트 디즈니를 깐 애니메이터 '아트 배빗(Art Babbitt)'은 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를 하먼서 번 돈으로 큰 저택을 두고 가정부를 고용하고 자동차를 3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금전적으론 부족함이 없었으나 자신처럼 중요 스태프에 속하지 않는 하급 노동자들을 월트가 너무 막대했기 때문에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파업을 주도하고 디즈니를 그만두었다고 한다.[23] 심지어 다른 사람을 불러서 "쟤 잘 했으니 네가 나 대신 칭찬 좀 해줘라." 라고 지시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24] 월트 디즈니가 있던 시절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작화는 80년은 족히 지난 후대의 애니메이터들도 재현을 못한다고 할 정도이다.[25] 탈버그는 유대인 이름이다.[26] 다만 만에 하나 이게 사실이더라도, 나치의 동조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에 나치가 어렴풋하게만 알려져 있을 때에는 잔학행위나 전쟁범죄가 드러나기 이전이라, 그렇게 나쁜 놈들이라 생각치 못한 경우도 많기 때문. 심지어 유럽국가인 영국에서조차 폐허가 된 국토를 순식간에 복구한 능력있는 독재정당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 히틀러를 깠던 찰리 채플린은 욕을 먹었다.[27] 한편 디즈니 영화가 시작할때 성과 함께 나오는 멜로디를 히틀러가 매우 좋아해, 파리 점령 후 에펠탑을 바라보며 흥얼거렸다는 이야기가 있다.[28] 훗날 카젠버그는 디즈니를 나와서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드림웍스를 세웠다.[29] 월트가 제임스 바스켓을 제작 중이던 영화의 주역으로 배정한 것은 의도치 않게 영화계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는데, 이는 관객들이 많이 보는 실사 영화에서 당시 할리우드에서 만연하게 게으르고 둔하며 쉽게 겁에 질리며 당황하는 성격으로 묘사된 흑인 캐릭터가 아니라 진중하고 사려깊은 성격의 주연 캐릭터를 비백인 영화배우로써 처음 연기하도록 캐스팅을 결정해 준 영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30] 조금 더 정확한 이야기는 실사 영화를 제작하는 것에 1940년대 중후기부터 적극적으로 주력해왔지만, 그 다음에 제작되기 시작한 TV 애니메이션은 제작하는 비용이 이들을 만드는 비용보다 많이 소모되고 제때에 제작 기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이유로 많이 만들지 않았었다. 디즈니에서 TV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제작하게 된 때는 1980년대 중기부터이다.[31] 이 뒷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로 세이빙 MR. 뱅크스가 있다.[32] 실제로 캐리비안의 해적 이전까지 디즈니 레이블로는 아동용 위주로 제작했고, 청소년층 이상 부터는 터치스톤 픽처스나 미라맥스 등 계열사 레이블로 제작하는 관례가 있었다가 배급 방침이 바뀌면서 계열사들이 정리된 바가 있다.[33] 본인은 절대로 무언가의 후속작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로 던진 말이다. 디즈니의 히트작 중 《아기돼지 삼형제》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원하는 것 같아서 여러 속편들도 만들었더니 평가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에서 비롯된 말. 아기돼지 삼형제는 미국에서 최초로 선형적인 줄거리와 개성을 불어넣은 각각의 캐릭터들이란 시도를 해낸 애니메이션으로 여겨지며, 뉴욕의 한 극장에서 몇 달이나 상영되었을 정도로 큰 흥행을 거두었다.[34] 그러나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후 마이클 아이스너 CEO 체제로 들어서면서 디즈니툰 스튜디오를 통해 기존 애니메이션들의 속편을 찍어내기 시작했으며, 밥 아이거 체제 이후로는 인수합병과 프랜차이즈 영화에 집중하면서 현재는 디즈니 배급 영화 중 속편의 비중이 굉장히 높아졌다.[35] Isigny-sur-Mer, 버터로 유명한 동네.[36] 이 기록은 아카데미 역사상 최다 수상 기록으로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37] 유대계 영화 제작자인 어빙 탈버그의 이름을 기려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주는 상.[38] 다만 어디까지나 전작에 비해 못했다는 것이지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39] 독일군의 철모는 1916년경부터 기존의 뿔이 있던 피켈하우베에서 보다 실용성이 중시된 슈탈헬름으로 교체되고 있었으며, 나치 패망 때까지 우리가 '독일군'하면 떠올리는 그 헬멧을 개량해가며 사용했다.[40] 비공개 사이트라서 현재는 접속할 수 없지만 티비 트룹스의 월트 디즈니 문서에서 관련된 증언을 담은 내용이 일부 남아 있다.[41] 우연이었지만 당시 디즈니 스튜디오 내부 직원들 중에도 철도 애호가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론 나인 올드 맨의 멤버 중 1명인 워드 킴볼이 있었다.[42] 어머니에 대한 비극적인 일을 월트는 경험한 적이 있다. 백설공주가 개봉한 이듬해 부모를 위해서 장만한 새 집에서 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아버지 엘리아스는 살아남았지만 어머니 플로라는 질식사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고에 대해 월트는 스스로 자책하여 비난하였고 그녀의 죽음을 다시는 말하지도 않았으며, 딸 샤론의 증언에 의하면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울면서 말하는 것을 꺼렸었고 죄책감으로 인해 평생 어머니의 무덤을 방문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43] 월트 디즈니 컴퍼니 공동 창업자이자 월트의 형.[44] 공동 창업자인 로이 디즈니의 아들이자 월트의 조카. 디즈니 사의 경영에 활발하게 참여한 디즈니 가문의 마지막 인물로 알려져 있다.[45] 팻 설리반이 원작을 그리고 오토 매스머가 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제작한 캐릭터 펠릭스 더 캣의 디자인은 월트가 오스왈드 래빗과 미키 마우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46] 리틀 네모, 공룡 거티 등을 제작한 애니메이터 & 만화가 & 제작자,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현역으로 활동.[47] 1915년부터 1956년까지 활동한 애니메이터이자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테리 툰즈의 설립자, 유명한 작품은 마이티 마우스가 있다.[48] 관련 자료 참조, 유명한 작품들은 우디 우드페커, 펭귄 윌리와 개 스미드릭 등의 캐릭터들이 있으며, 과거 한국에서도 지상파, 케이블 등지에서 방영된 바 있다.[49] 관련 자료1, 관련 자료2 참조, 월트와 채플린 모두 서로가 만든 작품들을 존중해 주고 높이 평가했다.[50] 1947년에 발족한 반공주의 단체 'Motion Picture Alliance for the Preservation of American Ideals'의 설립 멤버들이자 동료였다.[51] 텔레비전 아카데미 인터뷰 영상 자료 참조,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의 일부 작품들에서 배역을 맡은 성우, 그녀한테 많은 영향을 줬던 월트였지만 그를 현장에서 개별적으로 만나지 못했던 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52] 반 이상은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 이후 해고되어 디즈니를 떠난 직원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위로 디즈니를 떠난 직원들 또한 있다.[53] 앨리스 코미디, 오스왈드 래빗을 만들 시기에 함께 일했던 애니메이터 콤비이자 하먼-아이싱 프로덕션의 설립자.[54] 실리 심포니 시리즈, 백설공주, 환타지아, 덤보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한 애니메이터,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으로 해고당한 뒤 미 육군에 입대해 이등병 스나푸(Private Snafu) 제작에 참여한 척 존스, 닥터 수스랑 같이 일했다. 종전 이후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1952년부터 루니 툰에서 레이아웃, 공동 디렉터 등으로 활동하며 40여년 간 척 존스의 작품 제작에 주요 스탭으로 참여.[55] 1936년부터 2년간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서 디렉터로 일했으며, 디즈니의 스토리 담당 부서에서 활동하다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으로 해고된 뒤엔 컬럼비아 픽처스 산하 스크린 젬스에서 매니저로 일했다가 임원 간의 마찰로 해고당해, 1942년부터 2년여 간 루니 툰 제작에 재참여해 디렉터로 활동했다. 이후엔 영화감독, 각본가, 작가로 활동.[56] 1931년부터 10년간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애니메이터로 활동했으며, 1941년부터 MGM으로 이직해 5년간 텍스 에이버리 산하 유닛에서 일한 뒤 1949년까진 월터 란츠 프로덕션에서 활동. 1959년부터 30여 년간 해나-바베라, 드파티-프레렝 등의 TV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애니메이터로 참여.[57] 1929년부터 약 11년간 찰스 민츠(Charles Mintz) 산하의 스크린 젬스에서 일하다 1940년에 디즈니로 이직해 애니메이터로 입사,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 이후엔 MGM에서 해나-바베라, 텍스 에이버리 산하 유닛에서 애니메이터로 1950년대 초기까지 활동, 1954년에 그랜트 시몬스(Grant Simmons)랑 설립한 그랜트레이-로렌스 애니메이션을 1968년까지 운영했다가 1970년대 초부터 말년까진 해나-바베라 프로덕션에서 활동.[58] 1939년부터 2년간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활동했지만,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 이후엔 MGM으로 이직해 1950년대 후기까지 해나-바베라 산하 유닛 애니메이터로 일했다. 1957년에 해나-바베라 프로덕션이 설립될 때 이직하여 1985년까지 활동.[59]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 이전엔 로머 그레이(Romer Gray) 스튜디오 / 스크린 젬스(Screen Gems) /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각각 1년, 6년, 4년간 일했으며, 파업이 발발한 해에 MGM으로 이직해 1950년까지 일했다. 1960년대엔 해나-바베라 프로덕션에서 활동.[60] 업계 데뷔 이전에 프랫 인스티튜트를 재학했으며, 1933년부터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 이전까지 디즈니에서 일했다가 1941년에 워너 브라더스로 이직해 1945년부터 10여 년간 프리즈 프레렝 산하 유닛에서 레이아웃, 보조 디렉터 등으로 활동했다. 1963년 드파티-프레렝 엔터프라이즈가 설립될 때 이직하여 1990년까지 참여하며 활동.[61] 1930년대 중기부터 1941년까지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으며,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 이후엔 잠시 워너 브라더스에서 활동했다가 1947년부터 코믹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만화가로 전업해 활동.[62] 1930년대 중기부터 1941년까지 디즈니에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환타지아 제작에 애니메이터로 참여해 일했으며,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 이후엔 워너 브라더스로 이직해 로버트 매킴슨 산하 유닛에서 레이아웃으로 활동.[63] 월트의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1세대 아시아계 미국인 애니메이터,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에 참가한 뒤에 스튜디오에서 해고당했다.[64] 월트의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1세대 아시아계 미국인 아티스트 & 일러스트레이터, 디즈니 애니메이터 파업에 참가한 이후 해고당했다.[65] 월트가 제작한 극초기 단편 애니메이션들의 음악을 작곡한 뮤지션으로 1930년대 초기엔 어브 아이웍스 작품들의 음악을 작곡함, 1930년대 중기 ~ 1950년대 중기의 루니 툰 & 메리 멜로디즈 단편들의 음악 감독으로써 유명.[66] 1930년대 중기 ~ 1940년대 초기에 디즈니에서 일한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애니메이터.[67] UPA의 모태가 되는 Industrial Film and Poster Service 스튜디오의 공동 설립자.[68] 코믹 스트립 포고(Pogo)의 작가이자 만화가.[69] 2차 세계대전 중에 그의 가족들이 행정명령 9066호의 발효로 설치된 일본계 미국인(을 주로 격리해 놓은) 수용소에서 살았다고 하며, 전후에 만화계로 데뷔하여 디즈니에서 어시스턴트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다가 1960년대 초부턴 해나-바베라 프로덕션 작품들에서 캐릭터 디자이너, 감독 등을 맡으면서 활동했다.[70] 워너 브라더스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기 이전에 피노키오에서 기디온의 성우를 맡았었다.[71]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애니메이션들 중에서, 연출 기법 & 공식 등을 많이 오마주했을 만큼 월트의 스튜디오에서 일한 애니메이터들이 활동 당시에 주목해보던 작품의 연출가들이었다.[72] 전성기(1930년대)에는 디즈니의 라이벌로 불렸을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던 형제 콤비였으며, 월트도 이들이 만든 기법(로토스코핑)을 1930년대 중반부터 활용하기도 했다.[83] 업계인들로써 서로간의 입지를 의식하며 새로운 애니메이션 제작 기법을 적극적으로 응용하고 장편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했을 만큼 가장 라이벌다운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73] 에이버리가 활동한 당시, 그가 작품에서 만든 연출 기법들이 194~50년대에 제작된 디즈니 단편에서 줄곧 오마주됐었다. 서로간의 성격상 대놓고 경쟁하던 관계는 아니었지만, 에이버리도 디즈니의 작품들에서 묘사된 콘텐츠와 캐릭터들을 (워너 브라더스와 MGM에서 연출한 본인의) 작품들에서 구조를 비틀어 많이 풍자&패러디했으며, 말년의 필름 인터뷰에서 우리(터마이트 테라스(Termite Terrace))는 디즈니가 하지 못했던 것을 시도하러 노력했다고 언급한 일도 있었다.[74] 둘이 연출한 톰과 제리의 인기를 의식하여 스튜디오 차원에서 캐릭터 구성을 패러디한 작품을(도날드 덕 - 칩과 데일을 시작으로) 1940년대 후기부터 디즈니 단편에서 여러 시리즈를 제작하게 된다.[75] 디즈니 초기부터 연출과 작화를 책임지던 9명의 애니메이터.[76] 윈저 매케이와 같이 척 본인이 가장 고평가한 애니메이션 업계인으로, 디즈니의 히트작 아기돼지 삼형제에 대해서도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그들은 닮았지만 다르게 행동한 (최초의) 세 캐릭터였다고 호평한 바 있었다. 월트와 수 년간 여러 편지를 써가면서 종종 교류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 척에게 유일하게 편지를 쓰는 애니메이터였다고 칭찬해준 일도 있었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 제작 당시 몇 달간 휘하 애니메이터로 일한 경력도 있었다. 말년(1965년)에 월트는 칼아츠 동문회의 창립 회원 멤버 12명 중 1명으로 척을 임명해주기도 했다.[77] 월트에 대해 "나는 월트 디즈니를 부러워했답니다. 그는 오로지 카툰만 그리지 않아요? 만약 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릴 수도 있고 말입니다."라고 말했던 일이 있었다. 한 번은 디즈니 랜드에서 영화를 촬영할 계획을 진행하다가 거절당했던 비화도 있었다.[78] D23 디즈니 레전드 내용 참조.[79] 월트가 제작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환타지아, 밤비에 대하여 높이 평가했다.[80] 그는 괴물 2를 만들지 않은 이유에 대해 같은 장르가 아닌 각각이 개성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하였다.이 점이 월트 디즈니랑 비숫한 부분.[81] 생전 월트 디즈니가 레 클라크한테 발간을 의뢰한 논픽션 애니메이션 교육/역사 도서로, 클라크가 사망한 후 생존한 나머지 나인 올드 맨 멤버들이 저술을 진행하였으며 프랭크 토마스와 올리 존스턴이 작가를 맡아 1981년에 초판을 발간하였다. 서술된 내용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대한 역사와 그에 따른 프로세스 과정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으며 애니메이션의 12가지 기본 과정이 설명된 것으로도 유명해져 1995년과 2013년에 개정판이 발매되는 등 내외적으로 많은 호평을 얻었다.[82] 다만 도서에 저술된 내용이 전반적으론 디즈니 작품에 대해 편중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른 한편에선 마이클 배리어를 포함한 애니메이션 역사가, 애니메이션 마니아, 애니메이터 중에서도 이러한 점에 대해 동시대의 다른 애니메이션 제작사들과 그들이 제작한 작품(루니 툰, 톰과 제리, UPA 등등)의 영향력을 경시하면서 하대하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관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