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의 전자제품 제조사
Radio Corporation of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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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설립된 미국의 전자 회사 중 하나로, 전기와 방송 산업에 종사하는 회사였다. 회사의 기원은 이탈리아의 발명가인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1899년에 설립한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의 미국 사업 본부이다.
1916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해군이 라디오 방송을 독점하도록 했다. 1919년에 1차 세계 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국가 안보를 우려해 라디오 방송을 독점하길 원했으나 상원 의회에서 민간 사업자들에게 매각할 것을 결정했다. 미 해군은 제너럴 일렉트릭에게 라디오 방송 사업 중 가장 큰 회사였던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의 미국 사업 본부를 인수할 것을 제안했다. 제너럴 일렉트릭은 이 제안에 응해 1919년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의 미국 사업 본부를 인수해 Radio Company of America로 사명을 변경해 출범했는데, 이것이 시작이다.
제너럴 일렉트릭은 당시 화력 발전소와 조명 설비 회사였으며, 진공관에 대한 특허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RCA는 1920년대 라디오 방송 사업과 수신기 판매 사업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의 주요 지상파 방송으로 유명한 NBC도 제너럴 일렉트릭과 RCA가 주도해 1926년에 지역 라디오 방송국들을 인수 합병해 설립했다. 라디오 수신기만 있으면 무료로 방송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1920년대 라디오 방송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 영향으로 SP를 구매해야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축음기와 음반 사업이 동반 쇠퇴하게 되었다. RCA는 이틈을 타 1929년 축음기와 음반 회사였던 Victor Company를 인수해 축음기와 음반 사업에도 진출했다. 이 회사는 RCA 빅터가 되었다. 참고로 JVC는 한때 RCA 빅터의 일본 사업부(일본 빅터 레코드)였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이후 1949년 RCA 빅터는 EP 규격을 만들기도 했다.
회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제너럴 일렉트릭과 웨스팅 하우스가 상호 특허 라이선스를 남용해 라디오 경쟁 기업들을 도태시키자 반독점법의 표적이 되었다. 1932년 허버트 후버 정부의 법무부의 조정에 따라 제너럴 일렉트릭은 RCA를 매각했는데, RCA가 이 때 독립하였다.
이후 1939년 RCA는 미국 최초의 완전 전자식 흑백 텔레비전 RCA 빅터 TRK12를 개발하면서, 흑백 텔레비전 시험 방송을 뉴욕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1941년에 미국 연방통신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NBC를 통해 흑백 텔레비전 상업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후 진주만 공습이 터지고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전쟁이 끝난 1945년에서야 대중화 되기 시작했다.
또한 RCA는 1941년 RCA Laboratories를 설립해 마치 AT&T의 벨 연구소와 제록스의 PARC처럼 전자 현미경, LED, LCD, CMOS, 위성 방송 시스템 등 현대 전자 기술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겼다. RCA Laboratories는 1953년에 미국 연방통신위원회에서 승인된 NTSC의 컬러 텔레비전 방송 표준 규격에도 기여했다. 미군의 방위산업에도 진출을 했는데 이지스 시스템을 만든 회사가 RCA이다.
이런 RCA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몰락하기 시작했다. RCA의 라디오 수신기는 1950년대 들어서면서, 텔레비전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마쓰시타 전기 산업과 소니, 히타치 등 일본 전자 기업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받았다. 텔레비전의 경우 1980년대에 공장을 멕시코로 옮기면서 버텼으나 1983년부터 적자가 나기 시작했다. RCA는 변화를 위해 사업 다변화를 시도했으나 업종과 전혀 상관이 없는 많은 회사들을 인수했다. 인수한 회사들 중에는 렌터카 회사, 냉동 식품 회사, 카펫 회사, 출판 회사 등이 있었고, 모두 재정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IBM 메인프레임과 호환하는 Spectra 70을 1965년에 만들었으나 7년만에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은채 1972년 사업부를 매각해야 했다. 1976년부터 5년간 CED라고 불리는 비디오 디스크 시스템[1] 을 개발해 1981년에 내놓았으나 당시 시장 선점자이자 방송 녹화까지 가능했던 VHS와 베타맥스에 경쟁이 되지 않아 3년만인 1984년에 사업을 철수하면서 다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시판기간이 개발기간의 반의 반도 안 된 셈.[2] 1977년 흑백 게임기인 RCA Studio II도 만들었으나 같은 해 아타리 VCS가 출시되면서 2년만에 사업을 철수했다.
1986년 제너럴 일렉트릭이 64억 달러에 RCA를 다시 인수했다. 그러나 제너럴 일렉트릭은 RCA가 갖고 있었던 NBC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나머지 사업은 전부 분리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RCA 레코드를 독일의 베르텔스만 그룹에, 반도체 사업은 해리스 반도체[3]에, 가전 사업은 프랑스의 톰슨-CSF에, 컬럼비아 픽처스와 합작한 미국 가정용 비디오 판매 사업은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에 매각하는 등 이로써 기업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상표권은 톰슨-CSF를 거쳐 테크니컬러 SA[4]에게 넘어갔다. 테크니컬러 SA는 RCA 상표권을 라이선스 사업으로 사용했다. 즉, 제조사가 상표를 쓰겠다고 계약을 하면 테크니컬러가 상표를 빌려주는 형태인 것이다. 그래서 제품의 종류마다 제조사가 다르다.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가 RCA 레코드를 상표로 쓰고 있지만, 계약 조건에 따라 테크니컬러 SA로부터 무기한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2019년에 10월 17일에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2022년 6월 1일, 테크니컬러 SA는 모든 상표 임대 사업을 established.(Talisman Brands, Inc)에 1억 유로에 매각했다.## 현재는 established.의 라이선스 상표로 사용되고 있다.
RCA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까지 고음질 스테레오로 녹음한 리빙 스테레오는 특유의 히스 노이즈가 있지만 절륜한 음질을 자랑한다. 덕분에 아직도 리마스터링을 거듭하며 새로운 미디어로 발매 중인데 지금도 잘 팔리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HLKZ-TV를 1956년 합작해서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때는 TV가 소수의 상류층이나 가질수 있었던 데다가 서울에서만 방송이 송출되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한국 상업 방송이라기보다는 간보기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어쨌든 DBC 시절까지도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DBC가 당시 RCA 제휴 방송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방송 장비를 썼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한, 중, 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을 통틀어 최고 수준이었다. 실제로 당시 미국 방송국에서 쓰던 장비라서 아시아에서는 손 대기도 어려운 수준이었으며 소니는 갓 창립한 상태였다. 1959년에는 DBC 대한방송이 화재로 인해 폐업하고 1961년 국영방송인 HLKA가 KBS TV(현 KBS 1TV)를 개국하며 DBC의 방송 장비와 인력을 인수하였다. 봉두완과 최창봉의 회고에 의하면 DBC의 RCA 장비는 DBC 시절까지만 해도 미국인 엔지니어가 있어서 그럭저럭 유지 보수가 가능했는데 국영화된 이후에는 한국인 엔지니어가 부족해 고장이 자주 났다고 한다.
1.1. 단자의 종류
전기 단자의 한 종류이다. 위에 써져 있는 회사인 RCA에서 1930년대에 개발한 단자로 원래 축음기와 스피커를 연결하는 단자로 시작하였으나, 비디오 장치를 TV에 연결해 TV에 아날로그 영상과 음성 신호를 전달하는 컴포지트 단자와 컴포넌트 단자로서 쓰이면서 유명해졌다.물리적 모양은 외측의 원통과 내측의 축으로 구성되었는데, 축이 매우 굵은 편이어서, 축이 얇은 선으로 구성된 BNC와 동축케이블과는 확연히 다르다. 상위 범주인 단자/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이 'coaxial'의 넓은 의미로서 "동축 케이블"의 하위에 원통형 RC와 BNC와 RCA를 포함한 용례도 있으나, 국내 산업 현장에서는 으레 '동축 케이블'은 원통 RF를 말하고, 그것에 회전식 잠금 소켓이 있으면 'BNC'로, 축이 굵게 구성된 AV 단자류를 'RCA'로 칭한다.
RCA는 케이블 말단의 물리적 형상을 뜻하므로, 해당 케이블이 쓰인 용도에 따라 명칭이 다시 세분화되며, 손잡이 색상에 따라 대략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
AV 분야에서 주로 쓰이는 RCA 단자는 크게 '오디오선'(붉은색 RCA 1개와 하얀색 RCA 1개 묶음), 'AV선'(영상 신호인 노란색 RCA와 모노 오디오 RCA선 묶음)으로 나뉘며, AV선은 다시 컴포넌트 단자와 컴포지트 단자로 나뉜다. 컴포넌트는 영상용 RCA 단자 3개(손잡이 색상 청/녹/적)와 라인 레벨 오디오 단자 2개(백/적)로, 컴포지트는 영상용 단자 1개(손잡이 노랑)와 음성용 단자 2개로(적/백으로 스테레오, 모노인 경우는 1개) 구성되어 있다. 옛 현장에서 그냥 AV선이나 AV 단자를 말하면 그냥 '컴포지트' 단자를 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문 분야보다 매우 컸던 가전 기기 시장에서 널리 쓰인 비디오 장치의 기본 연결선이었기 때문이다.
S/PDIF 신호 전송에 쓰이기도 한다.
2. 소니 뮤직 산하 레코드 레이블
자세한 내용은 RCA 레코드 문서 참고하십시오.3. 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
자세한 내용은 왕립예술대학 문서 참고하십시오.4. 근본원인분석(Root Cause Analysis)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시스템의 잠재적인 취약점, 원인을 변화시키거나 수정하여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주로 사건이나 추세의 근본 원인을 식별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원리, 기법 및 방법론을 수집하는 식으로 수행하게 된다. 근본원인 탐색을 위해 '왜?'라는 질문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5 why 분석법이라고도 한다.RCA를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제퍼슨 기념관의 부식 문제 해결.[5] 또한 인권론에서도 인권침해에 관하여 설명적 인과관계로 파악하고자 하는 방법으로 쓰이고 있다. 즉 인권의 달성을 차단하는 다양한 차원의 권력[6]들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사회적 권리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5. 중국국민당의 파벌 개조동지회(Reorganization Comrades Association)
자세한 내용은 개조파 문서 참고하십시오.[1] 특이하게도 레이저디스크나 DVD와 같은 광학 형식이 아니고, LP판과 같이 바늘로 판에 고밀도로 새겨진 홈을 읽어내는 방식이다. 해당 포맷은 1964년에 처음 고안되어 조금씩 구상되다 위의 여러 뻘짓들을 비롯한 회사의 여러 문제들로 목표기한을 넘기며 취소될 위기들을 겪고 76년에서야 본격적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다.[2]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 포맷이 지연되지 않고 목표년도인 4~5년 전에 출시되었다면 이렇게까지 실패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LP판과 유사한 디스크와 단순한 플레이어로 생산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CED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졌고 대량생산이 까다로운 비디오테잎보다 훨씬 저렴했다. 출시년도인 81년도에는 CED의 거의 모든 면에 앞서 있는 레이저디스크라는 물건이 이미 나와있었고, (원가는 CED가 훨씬 싸긴 했지만)VCR의 규모의 경제가 실현된 뒤였다.[3] 現 인터실. 2016년에 르네사스에 인수됨.[4] 프랑스의 옛 톰슨-CSF(현 탈레스)의 미디어 관련 부서가 분리 독립된 회사.[5] 부식 문제가 심각하다 → 왜 부식이 되었는가? → 비둘기 똥을 닦는 세제가 너무 독해서다 → 왜 비둘기들이 똥을 싸는가? → 기념관에 거미가 많아 비둘기들이 이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 왜 거미가 많은가? → 거미의 먹이인 나방이 많기 때문이다 → 왜 나방이 많은가? → 기념관에 켜놓은 불 때문이다 → 그러므로 불을 2시간 늦게 켜자[6] 예: 성소수자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는데,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임에도 불구하고 사단법인 설립을 거부한 사례. 즉 사단법인 설립을 거부함으로써(사회권의 차단) 사단법인 활동을 통한 자유권의 쟁취를 차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