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62626><colcolor=#fff> 조안 크로포드 Joan Crawford | |
본명 | 루실 페이 르슈어 Lucille Fay LeSueur |
출생 | 1900년대 3월 23일[1] |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 |
사망 | 1977년 5월 10일 (향년 69세 또는 73세) |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배우, 무용수 |
신장 | 160cm |
활동 | 1922년 ~ 1972년 |
배우자 |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1929년~1933년 이혼) 프랜쵸우 토운(Franchot Tone)(1935년~1939년 이혼) 필립 테리(1942년~1946년 이혼) 앨프리드 스틸(1955년~1959년 사별) |
자녀 | 모두 입양한 자녀들 |
딸 크리스티너 크로퍼드(1939년생) 아들 크리스터퍼 크로퍼드(1943년생) 딸 신디 크로퍼드(1947년생) 딸 캐시 크로퍼드 라론드(1947년생) | |
종교 | 가톨릭 → 크리스천 사이언스 |
서명 |
[clearfix]
1. 개요
2. 위상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이며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10위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오늘날엔 중년 이후의 이미지만이 유명하지만 젊었을 적에는 멋진 몸매와 스타일로 당대 최고의 글래머 스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3. 활동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의 이혼 후 아버지가 떠나고 어머니와 재혼 가정에서 사는 등 가정사가 불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대로 학교를 다닐 여력도 안 돼서 학력도 사실상 초졸에 가까웠다고 한다. 훗날 앙숙이 된 베티 데이비스는 상류층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나름 여유가 있던 중산층 출신인데다, 제대로 대학까지 나온 것과 대조적.1925년 <Lady of the Night>에서 노마 시어러의 대역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에 바로 왐파스 베이비 스타즈[2]에 뽑혔다.
20대엔 청초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Our Dancing Daughters>(1928) |
또한 당시엔 현재의 아이돌의 개념에 가까운 핀업 걸이나 플래퍼로서 활동했던 시기를 거치기도 했다.
산타 코스프레 핀업 걸 화보 | 플래퍼 룩 |
자녀 방치/학대 문제에 있어 베티 데이비스, 헨리 폰다, 제임스 캐그니, 마를레네 디트리히, 말런 브랜도, 바버라 스탠윅은 많이 묻히고 크로퍼드와 메리 픽포드만 유독 대두됐던 이유는 전자의 스타들은 악역 이미지도 강했던 반면 픽포드와 크로퍼드는 이처럼 사랑스러운 이미지만을 굳혔던 시기가 있어서 대중의 배신감이 더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 시기의 크로퍼드를 굿걸 시절의 크로퍼드라고 부르며 부정적 이미지로 점철돼버린 현 크로퍼드와 구분하기도 한다.
무용수 출신이라 춤을 잘 췄고 이를 영화 속에서 많이 써먹었다.
<Dance, Fools, Dance>(1931) | <Dancing Lady>(1933) |
1930년대 초중반 명실상부한 최정상의 인기 배우였다.
1940년대 초반 크로퍼드의 인기 순위가 하락했다. 그래도 소속사인 MGM은 크로퍼드의 주연작들이 계속 일정 수익을 거뒀기에 계속 주연으로 썼지만, 극장주들 사정은 달랐다. 흥행국밥[3]으로 불리면서 MGM에서도 나가야 했다. 그러나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칼럼니스트인 헤더 하퍼가 1945년 <밀드레드 피어스> 평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감으로 크로퍼드를 밀면서 상황이 반전돼 수상에 성공하고 경력 흐름도 바뀌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흔해진 아카데미상 캠페인의 시초로 불린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대배우 베티 데이비스와의 불화로도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이 항목을 참조. 둘이 말년에 공동주연으로 출연한 <제인의 말로>(1964)는 대박을 쳤다. 이 영화의 영향으로 데이비스와 마찬가지로 무서운 할머니 연기도 많이 했다. <I Saw What You Did>(1965), <Night Gallery>(1969)가 대표적. 데이비스뿐만 아니라 니컬러스 레이의 <쟈니 기타>(1954)에 함께 출연했던 머세이디스 매케임브리지와 스털링 헤이든하고도 사이가 지독히 나빴다.
4. 주요 출연 작품
<rowcolor=#ffffff> 연도 | 작품 |
1927 | The Taxi Dancer |
Twelve Miles Out | |
1928 | Across to Singapore |
Our Dancing Daughters | |
1929 | 야성녀 |
1930 | Montana Moon |
Our Blushing Brides | |
Paid | |
1931 | Dance, Fools, Dance |
Laughing Sinners | |
Possessed | |
1932 | 그랜드 호텔 |
Letty Lynton | |
비 | |
1933 | 오늘만의 생명 |
Dancing Lady | |
1934 | 세이디 맥키 |
Chained | |
Forsaking All Others | |
1935 | No More Ladies |
I Live My Life | |
1936 | The Gorgeous Hussy |
사랑의 도피 | |
1937 | The Last of Mrs. Cheyney |
The Bride Wore Red | |
Mannequin | |
1938 | The Shining Hour |
1939 | The Ice Follies of 1939 |
여자들 | |
1940 | Strange Cargo |
Susan and God | |
1941 | A Woman's Face |
1942 | Reunion in France |
1943 | Above Suspicion |
1945 | 밀드레드 피어스 |
1946 | 유머레스크 |
1949 | Flamingo Road |
1950 | The Damned Don't Cry |
1951 | Goodbye, My Fancy |
1952 | This Woman Is Dangerous |
1953 | Torch Song |
1954 | 쟈니 기타 |
1963 | The Caretakers |
1964 | Strait-Jacket |
제인의 말로 | |
1965 | I Saw What You Did |
1967 | 가라데 킬러스 |
1969 | Night Gallery |
5. 스타일
- 탁월한 몸매로 주목 받았던 소위 글래머 스타 중의 하나였다. 중년 이후에도 관리를 잘한 편이었다. 아래는 1953년작 <Torch Song> 촬영 중 쉬는 시간에 찍힌 것으로, 49세 때의 모습이다.
- 특히 드레스에 최적화된 신체 비율의 보유자였다. 어깨가 직각이라 위엄 있어 보이는데, 이 어깨를 드러내는 디자인을 자주 입었다. 드레스 착용 사진들은 오늘날에도 자주 소환된다. 난해한 디자인도 잘 소화해냈다.
- 정작 본인은 몸매에 자격지심이 심해서 가는 허리에 비해 넓은 골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4] 골반을 상대적으로 작아보이게 하려고 어깨를 부풀려 강조한 의상을 입곤 했는데 이게 당대에 크게 유행했다.
특히 <Letty Lynton>(1932)에서 입고 나온 드레스는 소위 레티 린튼 현상을 낳았다. MGM 소속 디자이너 에이드리안[5]의 디자인으로, 메이시즈 백화점에서만 5만 벌이 팔렸으며 미국 전역에서 무려 수천여종이 넘는 모조품이 만들어졌다. 천을 최대한 조금 써서 몸의 선과 피부를 드러내던 당대 유행과 정반대로 오건디 소재의 천을 특히 상체 윗부분에 잔뜩 덧붙인 이 드레스는 낭만주의로의 회귀 흐름을 만들어냈다. 랑방을 만든 잔 랑뱅[6], 마들렌 비오네[7]도 영향을 받은 드레스들을 만들었을 정도.
또한 에이드리안은 어깨에 특별히 고안한 퍼프를 넣어주기도 했다.
}}} ||- 그런데 여성들이 멋지다고 너도나도 따라하던 이 "어깨뽕" 디자인이 실은 크로퍼드를 위해 발명된 몸매보정용 장치라는 게 알려진 뒤 갑자기 당대 대중들 사이에 크로퍼드의 몸은 정말 아름다운가 아니면 그렇게 보이도록 연출된 것에 불과한가를 주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도 자주 다뤄서 많은 할리우드 황금기 관계자들이 말을 얹었고 오늘날에도 관련 칼럼과 기사들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스타에게 자신감이 왜 중요한지를 시사하는 좋은 예시로 거론된다.
- 이 어깨뽕과 관련한 안 좋은 일화가 있다. <밀드레드 피어스>(1945)의 주인공 역은 처음엔 베티 데이비스에게 갔으나 데이비스가 거절하면서 크로퍼드가 어부지리로 얻게 된 자리였다. 감독 마이클 커티즈는 크로퍼드를 너무 싫어해서 바버라 스탠윅을 꽂아달라고 제작사 워너 브라더스에 요청했는데 무시 당했고, 평소 욱하기로 유명했던[8] 커티즈는 왜 자신이 "거들먹거리는" "한물 간" 배우랑 일해야하냐며 항의하더니 의상 시착 때 크로퍼드가 어깨에 뽕을 넣은 것 같다고 의심하며 갑자기 드레스를 찢어발겼다.[9]
6. 사생활
- 4번 결혼했다. 3번 이혼했고 마지막 남편은 병으로 죽었다.
- 첫 번째 남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 결혼생활 중에 클라크 게이블과 바람피웠다. 페어뱅크스도 마찬가지로 맞바람을 피우는 등 둘의 관계는 순탄치 않아 빠르게 파국을 맞았다. 오히려 이혼 후 서로 반성하고 잘 지냈다고 한다.
- 한때 스펜서 트레이시와 불륜 관계였다.
6.1. 노마 시어러와의 갈등
고전 영화 팬들에겐 크로포드와 데이비스의 갈등이 주로 주목받지만, 크로포드는 사실 데이비스와 갈등을 겪기 전, 노마 시어러와 갈등을 겪은 것이 유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데이비스보다 시어러가 크로포드 인생 최대 라이벌이라 말하기도 한다.[10]크로포드는 상술했듯, 노마 시어러의 대역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무렵 연기에 대해 어려움을 겪던 크로포드는 시어러를 멘토로 삼으려 했고, 그녀와 친해지고자 했으나 그 즈음 MGM의 주요 배우로 성장해나가던 시어러는 크로포드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두 배우 모두 MGM에서 성공해나갔고, 두 사람은 배역을 두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1930년, 노마 시어러에게 오스카상을 안겨준 <이혼녀(The Divorcee)>의 주인공 역은 원래 어빙 솔버그가 크로포드에게 주려고 했던 배역이었다.
그러나 이미지 변신이 필요하던 시어러가 남편 솔버그를 끈질기게 설득해 배역을 받아냈다.[11] 시어러가 오스카를 수상하자 크로포드는 크게 분노했으며, 기자들 앞에서 "노마는 자기 상사랑 같이 자면서 배역을 따낸다"며 비난했다.
사실 시어러는 크로포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 시어러는 자신의 능력에 더해 화려한 인맥과 족벌 체제로 MGM에서 영향력이 컸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만 5번 노미네이트된 거물 여배우였기 때문이었다.
어빙 솔버그가 죽은 뒤에도 갈등은 이어졌다. <여자들(The Women)> 촬영 중, 시어러와 크로포드는 의상부터 촬영까지 모든 분야에서 부딪쳤다. 크로포드 개인의 주장이지만, 크로포드가 입으려 했던 옷을 시어러가 뺏어간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시어러가 촬영할 때 크로포드가 카메라 뒤에서 큰 소리로 뜨개질을 하며 방해해서 분노한 시어러가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12]
시어러가 영화계에서 은퇴하고나서 두 사람의 갈등은 해소되었다. 크로포드는 "나는 노마의 영화를 모두 챙겨보려고 노력했다"고 말하며 시어러에 대한 존경을 간접적으로 시인했고, 시어러는 "내 생각에 조안과 나는 닮았다. 우리 둘 다 서로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했다. 그녀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라며 조안의 능력을 인정했다.
6.2. 양녀 학대 논란
아이들 4명[13]은 모두 입양으로 얻었는데 그 중 하나인 양녀 크리스티너[14]가 조운 크로퍼드가 죽은지 1년 만에 회고록을 써서 조운 크로퍼드가 알콜 중독으로 아이들을 학대해왔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크리스티너는 유산도 받지 못했다.
지인들은 반응은 극과 극이었는데, 회고록에 동감하는 측도 있었지만 악랄하게 왜곡해 돈벌이를 한다며 크리스티너를 비난하는 의견도 있었다.
양아들 크리스터퍼는 크리스티너의 말이 사실이라고 했다. 크리스터퍼가 더 심하게 당했다는 얘기가 있다. 반면 나이차가 나는 캐시와 신디는 거짓말이라고 맞섰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도 내가 아는 그 당시의 크로퍼드는 토라지거나 말씨름은 해도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은 절대 아니라며 크로퍼드를 변호했다.
크리스티너는 캐시와 신디가 애기 때까진 조운 크로퍼드의 상태가 나빴는데 네 번째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 그와 만나는 동시에 가정이 모든 점에서 나아져 조운 크로퍼드가 안정됐고 학대도 멎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캐시와 신디는 자신과 크리스터퍼와는 조운 크로퍼드에 대한 기억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크리스티너는 주변 어른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경찰 등에게 얘기해본 적도 있지만 아무도 개입하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폭로 전부터 업계에 이미 공공연하게 소문이 퍼져있었는지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자기 애들을 때려대는 그 끔찍하고 천박한 퉁방울눈의 여자"라고 욕한 적이 있다.[15]
1970년대 초까지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려왔던 것은 사실이고, 당시에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혀왔었다.
최근에도 유튜브를 보면 크리스티나의 인터뷰 영상마다 조안 크로포드의 팬들과 비난자들이 양녀 학대한 게 맞다 아니다로 논쟁을 하고 있다. 조안 크로포드의 팬들은 크리스티나의 인터뷰 영상들을 모두 모아 업로드하며 모순점을 짚어내는 활동을 하고 있다.[16]
7. 미디어 매체 속 모습
조운 크로퍼드를 다룬 <존경하는 어머니(Mommie Dearest)>(1981)는 컬트 영화로 추앙받고 있다. 참고로 이 영화 감독은 케이티 페리의 삼촌인 프랭크 페리다.양녀 크리스티너 크로퍼드가 쓴 같은 제목을 가진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평이 매우 나빴다. 심지어 원작자 크리스티너 크로퍼드조차도 "터무니 없고 부정확한 허구"라고 비난했다. 조운 크로퍼드는 "도끼로 나무를 내리친 적도, 자신을 옷걸이로 때린 적도 없다"며 불만을 표했다.
조운 크로퍼드 역을 맡은 페이 더너웨이가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공동으로 받았을 정도로 더너웨이의 이후 경력 전체에 치명적 영향을 끼쳤다.
1000만 달러를 들여 제작해 1900만 달러 가량의 수익을 벌어들였다.
양녀를 옷걸이로 학대하는 장면이 명장면으로 꼽히는데, 이 장면은 파라마운트 픽처스 100주년 심볼에서도 보인다.
<존경하는 어머니>(1981) |
특히 이 장면은 퀴어들의 패러디 필수요소로 쓰이기도 하며 컬트 영화로서 생명력이 길게 유지되고 있다.영상링크
8. 여담
- 오빠 핼 르슈어[17]도 배우였는데 MGM에서 크레딧에 거의 오르지도 못하는 역만 전전하다 분장사 일도 잠깐 했다가 스포츠 용품 영업사원을 뛰다가 호텔 접수원이 되었다. 수입이 쪼들려 살던 모텔의 승강기 운전원으로도 일해야 했다. 핼 르슈어가 1963년 맹장 파열로 입원했을 때 크로퍼드는 사망 직전 병원으로 전보만 보냈고 장례식엔 불참했다.
<세이디 맥키>(1934) 촬영장에서 |
- 밴 존슨과 좋은 친구 사이였다.
- 조앤 우드워드의 이름은 조운 크로퍼드에게서 따와 작명됐다고 한다.
- Night Gallery 감독인 22살인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이 저녁식사를 하려고 했으나 스필버그가 아들일 줄 알고 불성사 되었다고 한다.#
- 1960년 4월 4일 정치 행사에서 팻 닉슨과 만난 조안 크로포드
세간엔 크로포드가 민주당 지지자라는 말이 돌아다니지만, 그녀는 살아 생전에 어느 정당이나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위 사진처럼 공화당 쪽 인사들과 만난 적도 많고, 리처드 닉슨의 선거 운동을 지원했다는 문서도 있다.[18]
- 바버라 스탠윅의 옆집에 살았고, 두 사람은 굉장히 친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상술한 Sewing Circle 이야기와 엮어서 두 사람이 사실 동성연인이었다는 설도 제기된다.
- 팬서비스가 매우 좋았다. 여가 시간 대부분을 팬들이 보내는 편지에 일일이 답해주는 데 썼을 정도.
- 1959년 펩시콜라 CEO였던 남편 알프레드 스틸이 죽은 뒤에도 펩시콜라 이사진으로 남아있었다. 크로포드는 1973년 은퇴당할 때까지 연간 6만 달러를 벌었으며, 펩시를 홍보하기 위해 기업의 지원 하에 여러 곳을 여행했다. 개인적으로도 펩시 콜라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 어릴 때 집에서 놀다가 발에 유리조각이 박혀서 평생 걷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댄서가 되기 위해 재활에 매진했고, 최고의 댄서가 되었다.
- 인터뷰에 따르면, 원래 이름은 루실 페이 르슈어(Lucille Fay LeSueur)였으나 MGM에서 데뷔시키기 전에 이름이 하수구[19]와 비슷하게 들린다며 예명을 정하려 했다. 곧 잡지에 광고가 나가서 그녀의 예명을 정하는 콘테스트가 열렸다. 처음 이름은 조안 아든(Joan Arden)이었으나, 같은 이름을 가진 배우가 MGM을 고소했고, 결국 조안 크로포드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크로포드는 자신의 예명을 몹시 싫어했다. 왜냐하면 크로포드가 가재[20]와 발음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 죽을 때 유언이 서양권에선 상당히 유명하다. 옆에 있던 하녀가 임종 직전의 그녀를 보고 하느님께 기도하자 "제기랄, 하느님에게 날 도와달라느니 하는 소리는 집어치워!"[21]라고 말한 뒤 죽었다.
[1] 생전에는 1908년생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딸은 1904년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조차 공식 확정된 건 아니라, 영문 위키에서도 물음표 했을 정도로 출생년도 논쟁이 있다.[2] WAMPAS Baby Stars. 영화 광고주 서부 연합(Western Association of Motion Picture Advertisers)이 1922년부터 34년까지 매해 13명씩 뽑던 여배우 유망주 명단. 출신 중엔 클래러 보우(1924), 재닛 게이너(1926), <킹콩>(1933)의 페이 레이(1926), <말타의 매>(1941)의 메리 애스터(1926), 로레타 영(1929), 진 아서(1929), 조운 블란델(1931), 진저 라저스(1932) 등이 있다.[3] Box-Office Poison.[4] 허리 둘레와 엉덩이 둘레가 3사이즈 이상 차이가 났다. 즉 엉덩이 둘레 실측정치가 '허리 대비 엉덩이' 표준 치수보다 4인치 가량 컸던 것.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은 적 없었다. 크로퍼드 본인만의 미적 기준으로 집착한 것.[5] Adrian. 본명은 에이드리언 애덜프 그린버그(Adrian Adolph Greenburg). 재넛 게이너의 두 번째 남편이었다.[6] Jeanne-Marie Lanvin. 1867 - 1946.[7] Madeleine Vionnet. 1876 - 1975.[8] 제임스 캐그니는 이를 두고 "헝가리인 특유의 성질머리"라고 표현했다.[9] 크로퍼드는 당연히 어깨뽕을 미착용한 상태였다. 크로퍼드는 나중에 "그나마 브래지어를 차고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했다.[10] 크로포드가 데이비스와 워너 사에서 같이 일한 기간은 얼마 안 되는데, 시어러와 MGM에서 일한 기간은 더욱 길다.[11] 어빙 솔버그뿐만 아니라 시어러 저택의 하녀까지 시어러가 이혼녀에 출연하는 걸 반대했으나, 시어러는 자신이 배역을 잘 소화할 수 있다며 원래 이미지와 다른 섹시컨셉 화보까지 촬영해 보여줌으로서 솔버그의 인정을 받았다.[12] 결국 조지 큐고어 감독의 요구로 크로포드가 먼저 시어러에게 전보를 쳐서 사과했다.[13] 5번 입양했으나, 그 중 한 명은 생모 때문에 입양이 취소되었다.[14] 1939-.[15] 그러나 디트리히 역시 폭력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자기 딸을 학대한 건 마찬가지였다.[16] 조안 크로포드의 팬들은 크리스티나의 주장에 모순점이 많은 것, 크리스티나의 증언 외에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 학대행적에 대해 얘기한 적이 거의 없는 점, 무엇보다 생애 동안 최악의 사이였던 베티 데이비스마저 회고록을 비난하며 사실이 아니라고 한 점을 이유로 들고있다. 반면 비판자들은 주장에 모순점이 많다고 해서 모두를 거짓말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점, 베티 데이비스를 포함한 사람들의 증언같은 경우 단순히 고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그렇게 말했을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17] Hal Hays LeSueur. 1903 - 1963.[18] IMDb의 "Republicans of Old Hollywood" 분류에 소속되어있다.[19] sewer[20] Crawfish[21] “Damn it! Don’t you dare ask God to help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