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0 16:51:36

잉그리드 버그만

잉그리드 버그만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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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
조엔 우드워드
(이브의 세 얼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png
이름잉그리드 버그만
INGRID BERGMAN
분야영화
입성날짜1960년 2월 8일
위치6759 Hollywood Blvd.}}} }}}}}}
파일:1561601_original.jpg
이름잉그리드 버그만 (Ingrid Bergman)[1]
국적스웨덴 파일:스웨덴 국기.png
출생1915년 8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
사망1982년 8월 29일 (향년 67세), 영국 런던
직업배우
활동1931년 – 1982년
신체175cm, 61kg[2]
모교스웨덴 왕립 드라마 스쿨[3]
가족 페터 린드스트롬 (1937 – 1950), 1녀
로베르토 로셀리니 (1950 – 1957), 1남2녀
라스 슈미트 (1958 – 1975)
서명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Ingmar_Bergman_Signature.png

1. 소개2. 생애3. 주요 작품4. 기타

1. 소개

파일:잉그리드 버그만.jpg

175cm의 큰 키와 금발벽안,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고전적인 외모의 스웨덴 출신의 배우이다. 스웨덴어로는 잉리드 베리만라고 발음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모국 스웨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활동을 하며 수많은 명작들에서 명연기를 선보였다. 말년까지 영화, 연극, TV 모든 분야에서 활발한 연기활동을 펼쳤으며 아카데미상, 에미상, 토니상을 모두 수상하였다. 통산 아카데미상 7회 노미네이트 및 3회 수상, 에미상 2회 수상, 토니상 1회를 수상했다.[4]

대표작으로 《카사블랑카》(1942),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 《가스등》(1944), 《잔 다르크》(1948), 《이탈리아 여행》(1954), 《아나스타샤》(1956), 《오리엔트 특급살인》(1974), 《가을 소나타》(1978) 등이 있다.

2. 생애

스톡홀름에서 스웨덴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3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어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17세 때 스웨덴 최고의 명문인 왕립 드라마 스쿨(Dramatens elevskola)에 입학했으나, 버그만은 자퇴하고 영화계로 투신해 스웨덴과 독일 영화계에서 활동했다.참고로 이름 때문에 종종 유태인이 아닌가 하는 말이 나오는데 아니다.[5]

유럽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버그만의 배우 생활은 1936년에 출연한 《간주곡》으로 새 길이 열리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이 《간주곡》을 보고 버그만을 눈여겨보아 미국으로 초청한 것. 셀즈닉의 초청에 응한 버그만은 미국으로 건너와 《간주곡》의 리메이크작 《이별》(1939)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 데뷔한다.
파일:external/24.media.tumblr.com/tumblr_m7mypbhxZ81rc4lyco1_500.jpg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와 함께

할리우드 진출을 했지만 유럽에서 건너온 여배우를 써주는 스튜디오는 없었고, 버그만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출연 외 변변한 출연작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1942년 출연한 《카사블랑카》로 일약 스타가 되고 이후 찍은 영화들 역시 호평을 받으며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들 중 한명이 되었다. 당시 버그만의 인기는 만인의 연인 수준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를 영화화할 때에는 헤밍웨이가 직접 주인공 마리아 역으로 버그만을 지명했다고 한다. 이 시기 앨프리드 히치콕과 여러 영화를 찍었으며, 1944년 출연한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의 열애로 배우 경력 최고의 위기에 맞닥뜨리게 된다. 버그만은 로셀리니의 작품 독일 영년을 보고 감동을 받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로셀리니 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영어는 아주 잘하고, 독일어는 아직 잊지 않았고, 프랑스어는 썩 잘하지는 않고, 이탈리아어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잉그리드 버그먼.” 출처

버그만은 정말로 로셀리니의 곁으로 달려가 로셀리니의 영화에 출연하며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로셀리니가 유부남이었고 버그만 역시 남편과 딸이 있는 유부녀였다는 것. 이 불륜 사건은 1940년대 후반 미국에 파란을 일으켰고 거센 비난 여론이 일었으며 버그만은 결국 할리우드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당시에는 지금의 할리우드처럼 유명인의 스캔들에 그러려니 넘어가주지 않았고, 유명인의 싱글맘이나 혼외자녀는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에는 배우 경력을 위협했기에 로레타 영 같은 배우는 몰래 출산한 후 친딸을 입양하는 형태로 눈속임을 해야 했다.[6] 또 잉그리드 버그만의 이미지가 너무 좋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진 할로 등 섹스 심벌 이미지나 좀 덜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배우의 스캔들과 달리, 버그만은 성녀 잔 다르크와 수녀처럼 청순하고 고결한 역할을 한 스웨덴인이지만 국민 여배우의 타락이니...

이때 앨프리드 히치콕도 버그만에게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었다. 히치콕과 버그먼이 연인 관계인 것은 아니었지만[7], 스캔들이 터지기 전까지 버그만은 히치콕을 높이 평가했었고 히치콕 역시 버그만을 자신의 작품들에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특별하게 대우해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감독을 찾아 떠나버리니 배신감이 적지 않았을 듯하다. 이후 그레이스 켈리에게로 페르소나의 자리가 넘어갔지만 보통 잉그리드 버그만만큼의 임펙트를 주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로셀리니와 함께 영화를 찍으나 연달아 흥행에 실패했다. 다만 흥행에 실패했을 뿐이지 이때 찍은 《스트롬볼리》나 《이탈리아 여행》 같은 영화들은 소위 모더니즘 영화의 시초라 불리며 재평가받게 된다.너무 시대를 앞서갔다 흥행이 거듭 실패한 것도 있었고 로셀리니는 버그만이 자신 이외의 감독과 작업하는 것을 매우 반대해서 둘 사이의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버그만은 로셀리니가 촬영으로 인도에 간 사이 할리우드의 제안을 받아 1956년 《추상(아나스타샤)》에 출연하며 6년만의 할리우드 복귀를 하였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버그만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는데 감독 아나톨 리트박이 버그만이 아니면 작업을 안하겠다고 선언을 하여 촬영할 수 있었다. 버그만은 《아나스타샤》로 두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성공적인 미국시장 복귀를 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1957년 로셀리니와 이혼하였다.[8]

1958년 파리에서 활동하는 스웨덴인 연극 연출가(Lars Schmidt)와 세번째 결혼을 하면서 로마에서 파리로 거쳐를 옮기고 프랑스에서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연극에 많이 출연하였으며 전세계 순회 공연을 하여 토니상 등을 수상하였다. 세번째 남편과는 1975년 이혼하였고 이혼 후에는 런던으로 다시 거쳐를 옮겼다.

1972년 유방암 선고를 받았으나 연기에 매진, 1974년 출연한 《오리엔트 특급살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78년에는 마지막 영화 출연작인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에서 명연을 펼쳐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다.

1982년 8월 29일 자신의 생일에 친구들과의 생일 파티를 한 뒤 조용히 사망하였다. 향년 67세. 유작은 텔레비전 영화였던 《골다라는 여인》. 골다 메이어에 대해 그린 영화였고 그녀가 맡은 배역은 당연히 골다 메이어 역이었다.

3. 주요 작품

  • 간주곡 - Intermezzo (1936년)
  • 달러 - Dollar (1938년)
  • 여자의 얼굴 - En kvinnas ansikte(1938년) ※ 1941년 헐리우드에서 조앤 크로퍼드, 멜빈 더글러스 주연으로 리메이크
  • 하룻밤 - En enda natt (1938년)
  • 이별 - Intermezzo : A Love Story (1939년)
  • 여섯째 달밤 - Juninatten (1940년)
  •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 Dr. Jekyll and Mr. Hyde(1941년)
  • 카사블랑카 - Casablanca (1942년)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For Whom the Bell Tolls (1943년)
  • 가스등 - Gaslight (1944년)
  • 세인트 메리의 종 - The Bells of St. Mary 's (1945년)
  • 백색 공포 - Spellbound (1945년)
  • 사라토가 본선 - Saratoga Trunk (1945년)
  • 오명 - Notorious (1946년)
  • 개선문 - Arch of Triumph(1948년)
  • 잔 다르크 - Joan of Arc (1948년)
  • 염소자리 - Under Capricorn (1949년)
  • 스트롬볼리 하나님의 땅 - Stromboli(1950년)
  • 유로파 51 - Europa '51 (1952년)
  • 우린 여자 - Siamo donne (1953년) ※옴니버스 영화. 로셀리니 편에 출연
  • 이탈리아 여행 - Journey to Italy (1954년)
  • 불안 - La Paura (1954)
  • 사랑 많은 여자 - Elena and Her Men (1956년)
  • 아나스타샤 - Anastasia (1956년)
  • 무분별 - Indiscreet (1958년)
  • 여섯 번째 행복 - The Inn of the Sixth Happiness (1958년)
  • 이별을 다시 - Goodbye Again(1961년)
  • 방문 - The Visit (1964년)
  • 노란 롤즈 - The Yellow Rolls - Royce (1964년) ※ 옴니버스 영화.
  • 선인장 꽃 - Cactus Flower (1969년)
  • 봄비 속을 - Walk in the Spring Rain(1970년)
  • 외침과 속삭임 - Viskningar och Rop (1972년)
  • 오리엔트 특급 살인 - Murder on the Orient Express(1974년)
  • 가을 연가 - Höstsonaten(1978년)
  • 골다라는 여인 - A Woman Called Golda (1982년) ※ 텔레비전 영화

4. 기타

  • 평생 잔 다르크를 연극에서 두 번, 영화에서 두 번 총 네 번 연기했다. 버그만은 어릴 때부터 평범한 소녀가 영웅이되는 잔 다르크의 서사를 사랑했다고 하며 잔 다르크를 연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처음 《잔 다르크》당시 헐리우드 최고의 스타가 잔 다르크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되었으며[10] 잔 다르크와 관련된 지역인 동레미, 오를레앙, 랭스와 루앙을 방문했으며 동레미의 명예시민이 되기도 했다. 버그만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잔 다르크의 환생처럼 여겨서 당황했을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또한 잔 다르크의 고향 동레미를 굉장히 사랑했다고 한다. 다만 이 영화를 찍을 때 잉그리드 버그만이 이미 30대를 넘어서 10대 소녀인 잔 다르크를 연기한 게 어색하다는 평도 있다.
  • 할리우드에서 추방되었을 때도, 복귀하여 할리우드에 돌아왔을 때도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준 것은 배우 캐리 그랜트 단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 첫 남편 피터 린드스트롬과의 사이에서 딸 피아 린드스트롬을 두었고,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사이에서 아들 로베르티노 로셀리니, 쌍둥이 딸 잉그리드 이소타 로셀리니와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두었다. 이사벨라 로렐리니는 엄마를 닮아 상당한 미녀로 모델 겸 여배우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랑콤의 첫 전속모델로 1983년부터 1996년까지 활동하였다. 이사벨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아내이기도 했으며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도 출연하였다. 버그만의 손녀이자 이사벨라의 딸 엘레트라 로셀리니 역시 랑콤 모델로 활동 했으며, 2016년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랑콤에서 다시 모델로 기용하여 화제가 되었다.
  • 남자 관계는 복잡했지만 자녀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줬으며 아무리 바빠도 같이 하는 시간을 가지려는 어머니였다고 한다. 다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질 못하는 성격이어서 아이들과도 같이 살지는 못하고 항상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이런 버그만의 행동을 자녀들은 이해하면서도 어머니를 그리워 했다고 한다. 버그만의 자녀들은 이부남매끼리 사이가 좋아서 그녀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연락을 하고 만나는 사이이다.
파일:external/www.newyorksocialdiary.com/937811571_dc7c8073e5_o.jpg 파일:external/farm2.static.flickr.com/938655346_3137ae4aa2.jpg
생전 자녀들과 함께한 잉그리드 버그만
  • 데뷔 전 가 너무 크다고 성형 권유를 받은 적이 있으나, 자신은 자기 코가 맘에 든다며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키가 너무 커서 성공하지 못할거라는 평도 받았다고 한다.
  • 2차 대전 종전 무렵에 미군 위문공연으로 유럽에 방문했다가 로버트 카파와 만나 연인이 되었다.[11] 버그만은 카파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카파는 전쟁터에서 자신이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버그만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서 죽은 자신의 첫 애인 생각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 2015년 잉그리드 버그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칸 영화제 포스터에 등장하였다. 또한 일기, 편지, 가족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Jag är Ingrid)》이 상영되었다.
파일:external/dl9fvu4r30qs1.cloudfront.net/cannes-2015-poster.jpg 파일:external/thefilmstage.com/ingrid_bergman_in_her_own_words_poster_2-620x930.jpg
2015년 칸 영화제 공식 포스터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 포스터


[1] 당연하겠지만 스웨덴식으로는 읽으면 잉리드 베리만이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온 듣보 여배우 한 명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리 없고 당연히 잉그리드 버그먼으로 발음했고 이는 할리웃내에서 유명해지고 나서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그렇다.[2] #[3] 현재 스톡홀름 드라마 예술 아카케미(SADA). 그레타 가르보, 잉마르 베리만 등을 배출한 스웨덴 최고의 드라마 스쿨이다.[4]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1978)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을 제외하고, 모두 모국어(스웨덴어)가 아닌 외국어(영어) 연기로 이런 수상기록을 남겼다.[5] ~만(man), ~버그(berg) 같은 이름은 원래 사람, 산을 뜻하는 독일어에서 온 이름이다. 독일계 아쉬케나지 유태인이 미국 영국 등지에 많기 때문에 유대인 이름으로 인식되고 있다.[6] 아이의 생부는 유부남이었던 클라크 게이블이었다.[7] 히치콕은 편집 기사로 일하던 아내랑 결혼했는데, 공처가로 유명해서 금발 미녀 배우들과 작업을 하면서도 스캔들이 터진 적이 없다.[8] 한편 로셀리니는 잇따른 실패와 더불어 몰락해 제작비 지원을 못 받고 나중엔 텔레비전 연출가로 머물다가 사망했다.[9] 다만 영국의 대배우 존 길거드는 "아, 불쌍한 잉그리드. 5개국어를 하지만 그 중 어떤 언어로도 연기는 못한다네"라는 영국인 특유의 위트있는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실제로 해당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쩔수 없이 외국인이 말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려운게 사실. 그럼에도 버그만의 출중한 연기력은 그런 약점을 상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10] 역대 잔 다르크 역할을 한 여배우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 중 배우 자체로 봤을 때 전체적인 커리어와 스타성에서의 위상만으로 잉그리드 버그만의 위상을 능가할 수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배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물론 영화의 작품성과 연기력 부분에서는 잉그리드 버그만 이전의 《잔 다르크의 수난》의 마리아 팔코네티가 잉그리드 버그만을 능가하긴 한다.[11] 당시 버그만은 첫번째 남편과 혼인관계였다. 로셀리니 이전 연인이 카파 였던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