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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총리는 임기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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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제4대 총리 골다 메이어 גולדה מאיר|Golda Meir | |
<colbgcolor=#ececec> 출생 | 1898년 5월 3일 |
러시아 제국 키예프 (현 우크라이나 키이우) | |
사망 | 1978년 12월 8일 (향년 80세) |
이스라엘 예루살렘 | |
국적 | 러시아 제국 → 미국 → 이스라엘 |
종교 | 무종교 (무신론)[1] |
학력 | 4번가 학교[2] 노스디비전 고등학교 위스콘신주립사범대학 |
직업 | 정치인 |
정당 | 마파이당 → 이스라엘 노동당 |
배우자 | 모리스 메이어슨 |
자녀 | 2명 |
서명 | |
이스라엘 제4대 총리 | |
임기 | 1969년 5월 17일 ~ 1974년 6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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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이스라엘의 정치인. 제4대 총리(1969년 3월 17일~1974년 4월 11일)를 역임했으며 이스라엘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여성 총리다.이름의 표기에 대해서 다소 논란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히브리어 기준으로는 '메이르' [meˈʔiʁ] 에 가깝게 발음된다.[3] 독일어 인명으로 오인하여 마이어로 읽는 사람들이 한국이나 외국이나 많긴 하지만 이 이름은 독일어 이름이 아니라 히브리어 이름이다. 한편 메이어라는 표기는 엄밀히 말하면 영어식 발음이지만 국립국어원에서는 표준 표기를 '메이어'로 정해 놓았다. #
2. 초기 생애
골다 메이어는 골다 마보비치(Голда Мабович)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제국(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1906년에 메이어의 가족은 미국의 밀워키로 이민을 갔다. 아버지는 목수로 일했고 어머니는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다. 8세 때 가족을 위해 가게를 맡아 봐야 했다고 한다. 1906년에서 1912년까지 특별한 재능을 가진 학생을 위한 Fourth Street School에 재학했다. 입학했을 때 영어를 구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현재 이 학교는 메이어의 이름을 따서 골다 메이어 학교라고 불린다. 메이어가 14세였을 때 형편이 어려워져 어머니가 학업을 포기하고 결혼하라고 권하자 반항하고 덴버로 가출했다가 1913년 밀워키로 돌아왔다. 1917년 간판장이었던 모리스 마이어슨(Morris Meyerson)과 결혼했고 이후 한동안 마이어슨이라는 성을 썼다. 1920년대에 부부가 함께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키부츠에서 살았는데 남편이 힘들어해서 텔아비브로 이사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시온주의 독립운동에 전념하느라 부득이하게 남편과 별거했다.[4]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초강경 시오니즘을 주장했다. 193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아랍국와 유대국으로 분할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하자 다비드 벤구리온, 하임 바이츠만 등은 이를 필요악이라고 보고 수용하자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골다 메이어는 영국놈들이 우리의 땅을 훔쳐가고 있다고 반발하면서 이스라엘 땅을 모조리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평화롭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랍인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게 뻔하니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 무력으로 이들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강경 시오니스트인 데다 보수 개신교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상황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찬양하거나 한국군에서 정신교육을 한다면서 이스라엘을 열심히 띄어준 영향 때문에 한국에선 무슨 네오 나치, 극우파마냥 이상하게 알려진 감이 있으나 사실 매우 강성한 사회주의자였으며 이스라엘 건국 후에도 사회주의 요소가 부족하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시오니즘의 실현과 유대 민족국가의 건설 역시 사회주의적 민족해방 혁명의 일환으로 생각하였다. 괜히 나중에 주 소련 대사,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 아니다.
1948년에 소련 주재 이스라엘 대사로 부임했는데, 1949년부터 1956년까지 노동부 장관으로 승진했으며 1956년부터 1966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재임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히브리어 이름으로 바꾸기를 권유했고 그녀는 성을 “메이어”[5]로 바꿨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골다 메이어는 부총리급 실력자로서 이스라엘 정계의 동향을 좌우했고 1960년대 초 림프종이 있다는 걸 발견했지만 1965년에 병이 심하게 악화될 때까지 비밀로 했다. 레비 에슈콜(당시 총리)이 돌연사하자 1969년에 연합당은 메이어를 당 대표로 선출해 그의 자리를 계승하게 했으니 곧이어 5년간 총리를 역임했다.
강직한 성품과는 별개로 총리 자리의 중압감 때문에 총리직을 원하지 않았으며 총리로 지명된 이후 자신이 수백만 이스라엘인의 운명을 책임지게 되었단 사실에 충격받아 눈물을 흘렸으며 나중에 한국 외무장관 김용식과의 대화에서 "된 이상 최선을 다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3. 총리 재임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죽이자 메이어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모사드에게 테러리스트를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전쟁 준비를 할 동안 이전 전쟁에서의 연이은 승리로 인해 방심하여 대비를 소홀히 했다가 기습공격을 받아 초반에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6] 미국의 지원으로 간신히 전쟁을 뒤집었지만, 이 때 입은 엄청난 피해는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의회에서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청문회까지 벌였다. 1973년 12월 열린 총선[7]에서는 간신히 승리하여 총리직은 유지했지만 결국 1974년 4월 새 내각이 들어선지 한 달 만에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총리직을 사임했으며[8], 국회의원직의 잔여 임기를 마무리한 것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 뒤에는 은거하면서 회고록을 쓰거나 요양했는데, 1977년 가을에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서 VIP 자격으로 안와르 사다트(당시 이집트 대통령)의 연설에 참관하여 악수하고 대화를 나눈 것이 그녀의 마지막 정치활동이었고, 이스라엘방송공단의 텔레비전방송국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녀의 인생에 대하여 구술하거나 국내외의 정세에 대하여 의견을 표한 것이 그녀의 마지막 사회활동이었다. 1978년 12월 8일에 예루살렘에서 지병인 림프종이 악화되어 80세로 숨졌고, 12월 12일에 사망지인 예루살렘 근처의 헤르츨 산에 매장되었다.
4. 평가 및 비판
이스라엘에서는 위인이며 현재 우익이 지배하는 이스라엘과 달리 초기 이스라엘의 사회주의에 기반한 좌익 내셔널리즘 지도자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같은 아랍권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원수 그 이상이다.[9]다비드 벤구리온은 '가끔은 팔레스타인인과 우린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우리가 악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팔레스타인인도 생각하자는 말도 하며 입을 조심하던 것과 달리 메이어는 그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백인 유대인을 유색인종 유대인보다 우대했다는 논란도 있다.
비단 팔레스타인 문제 말고도 다른 유대인 종족인 세파르딤과 미즈라힘에 대한 반감도 갖고 있었으며 백인종 유대인만을 진정한 유대인으로 여겨 흑인종 유대인과 황인종 유대인을 무척 싫어했다.[10] 그러다보니 백인종이 아닌 유대인들은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아랍인과 동급으로 멸시했으며 다른 외국인들도 야만인으로 생각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후원국인 미국에 대해서도 배타적이라서 컬러 TV 도입을 반대할 때 미국을 비하하는 발언까지 했다. 밑에 어록에 나올 정도로 이런 말을 대놓고 하여 세파르딤들은 증오한다. 오죽하면 이스라엘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메이어가 사망할 때 지옥에 간 계집이라고 대놓고 노래를 부르며 기뻐했을 정도였다. 베타 이스라엘도 메이어 정권 시절에는 제3세계의 외국인으로 푸대접했지만 이츠하크 라빈이 집권하면서 자국민으로 인정하는 결단과 함께 이런저런 특혜를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5. 어록
마거릿 대처 이전 철의 여인이라고 함은 골다 메이어를 일컫는 말이었다.#[11]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강경한 말들을 많이 남겼으며 동시에 전쟁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현실주의적 견해를 견지했다.오늘밤 태어날 수많은 아랍 아기들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다.
Don't be humble, you are not that great.
겸손해하지 마라. 당신은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겸손해하지 마라. 당신은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아랍 국가들은 싸우고 질 수 있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싸우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직 한 번 질 수 있습니다.
We have always said that in our war with the Arabs we had a secret weapon — no alternative. The Egyptians could run to Egypt, the Syrians into Syria. The only place we could run was into the sea, and before we did that we might as well fight.
우리는 아랍과의 전쟁에서 비밀 무기가 있다고 항상 얘기했습니다. 바로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집트로, 시리아인들은 시리아로 도망갈 수 있지만 우리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바다뿐이었고, 그러느니 차라리 싸우는 편이 낫죠.
한국에선 흔히 "우리는 아랍과의 전쟁에서 최종병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면 끝장'이라는 절박함이다."라고 의역된다. 우리는 아랍과의 전쟁에서 비밀 무기가 있다고 항상 얘기했습니다. 바로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집트로, 시리아인들은 시리아로 도망갈 수 있지만 우리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바다뿐이었고, 그러느니 차라리 싸우는 편이 낫죠.
우리가 모든 전쟁에서 이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가를 치렀습니다. 승리는 더 이상 원치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같은 경우를 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언제 팔레스타인인들이 독립 국가를 만든 적이 있습니까? 1차 대전 이전에 팔레스타인은 남시리아의 일부였고, 요르단의 일부였습니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내쫓았다고 하지만 팔레스타인인과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것 자체는 없었습니다.
It is so artificial, I know it from America. There is no need for this.
너무 인위적이고 미국 냄새가 나서 여기와는 안 어울린다고 봅니다.
컬러TV 도입을 반대하면서
이스라엘은 대한민국과 컬러방송 개시 시기가 거의 엇비슷하다. 이걸 보면 메이어가 반미주의자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데 메이어는 우크라이나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간 후에 미국 사회의 자유와 풍요에 반해서 미국이 굉장히 위대한 국가라는 믿음을 견지했던 인물이다. 그거와 별개로 이스라엘 사회와는 안 어울리니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너무 인위적이고 미국 냄새가 나서 여기와는 안 어울린다고 봅니다.
컬러TV 도입을 반대하면서
이스라엘의 약점은 아랍화되어 있고 무지하여 개조가 필요한 세파르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녀가 보여준 몇 안 되는 위트 있는 모습일 듯?
그저 가정에 남아있을 수 없는 여자들이 존재한다. (...) 자녀와 가정이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자들의 본성과 존재는 그 이상의 것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여자들은 더욱 큰 사회적 삶과 이혼할 수 없다. 아이들이 그녀의 지평을 좁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여자들에게 휴식은 있을 수 없다.
1930년의 발언
1930년의 발언
여성 해방 운동가들은 모두 브래지어를 태우고 남자를 증오하는 정신병자들입니다. 임신이 불행이고 아이를 낳는 것이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정신 나간 여자들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1972년,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의 발언
1972년,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의 발언
메이어가 여성 총리라는 것 때문에 미국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골다 메이어를 페미니즘의 선구자, 롤모델로 아주 높게 봤지만 정작 메이어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매우 복잡한 태도를 취했다. 메이어는 분명 양성 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옹호하였고, 시오니즘 진영에 만연했던 남성 우월주의자들과 계속 맞섰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여성 해방 운동에 대해서는 무척 혐오스럽게 여겨 비난했다. 이스라엘 국내의 페미니즘 활동을 법률로 탄압해 싹을 잘랐으며, 여군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남자 군인도 목숨 걸고 인권에 매달리지 않는다며 차디차게 대했다.[12] 페미니스트들을 강경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정부의 공안 정책 수립에 오래 전부터 깊이 관여한 메이어의 관점에서는 가정으로부터 여성의 독립과 낙태의 자유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반드시 없애야 마땅한 불온분자들의 해악 사상으로 여겼을 뿐이다.[13][14]
이스라엘의 공안 정책은 리콴유가 후일 싱가포르의 지도자가 되면서 본받았다고 전해진다. 싱가포르와 이스라엘의 통치 규범은 1970년대~1980년대에 완성되었고, 지금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양국의 정재계에서 건국 영웅 세대가 완전 퇴장한 시점이 2010년대~2020년대였으며, 그들과 똑같은 관념을 공유한 공화국 1세대가 양국의 정재계를 주름잡고 있으니...
우리 이스라엘인이 모세에 대해 불만이 좀 있다. 그는 우리를 40년이나 광야를 헤매게 한 뒤 중동에서도 석유가 나지 않는 땅으로 이끌었다.
1973년 6월 10일 이스라엘을 방문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만찬을 하던 중 한 농담. 당시는 제1차 오일 쇼크 도중이었다. 메이어의 푸념이 무색하게도 메이어가 죽고 난 뒤 2000년대에 들어서 이스라엘 본토와 연안에서 채산성 있는 유전과 가스전이 하나 둘씩 발견되었다 하여 이제는 역으로 모세가 떠나온 그 애굽 땅에 가스를 수출하고 있다. 그자가 자기 국민들에게 전쟁 말고 대체 준 게 뭐가 있지?
1970년, 가말 압델 나세르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 논평. 하지만 그는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나세르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1970년, 가말 압델 나세르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 논평. 하지만 그는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나세르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조그만 잘못도 저지를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외무장관 재임 시절, 1962년 한국과 수교 문제를 협상하면서 한 말.
외무장관 재임 시절, 1962년 한국과 수교 문제를 협상하면서 한 말.
저는 1973년 전쟁 초반에서 절망했던 사람들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절망하지 않았던 것은 제가 용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온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신비로울 정도의 신념을 가졌습니다.
1978년, 80세 생일연 때의 연설.
1978년, 80세 생일연 때의 연설.
6. 여담
- 위스콘신 대학교 밀워키 캠퍼스의 도서관 이름이 그녀에게서 따온 골다 메이어 도서관이다.
7. 매체에서
- 1982년에 미국과 이스라엘 합작으로 메이어의 일대기를 다룬 TV 영화 <A Woman Called Golda(골다라는 여인)>를 만든 바 있다. 작중 골다 메이어 역은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이 연기했다. 버그먼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게 유작이 되었다.
-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5년작 <뮌헨>에선 미국 여배우 린 코언이 분했다. 아이히만 때처럼 강하게 나가서 보복하라는 지시를 내리고[16] 장관들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직접 요리를 해주는 등 메이어의 독특한 리더십을 재현한다.
- 2023년 욤 키푸르 전쟁 중의 골다 메이어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골다>가 제작되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연기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헬렌 미렌이 골다 메이어 역을 맡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평가는 매우 좋지 않은 모양으로, 가디언 지 등에서 혹평을 퍼부었다.
[1]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는 유대교를 존중하였으나 종교적 신념은 무신론이었다.[2]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 위치한 특수학교. 1979년에 이 학교는 골다 메이어 총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학교 이름을 골다 메이어 학교로 바꿨다.[3] 맨 끝의 r 발음은 구개수 전동음이다. 이는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썼던 이디시어의 영향이다.[4]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 수년간 머무르면서 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의 특사로 일했고,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귀향한 뒤에도 시온주의 시민단체들의 우두머리를 맡았는데 자녀들은 그녀가 데려가 양육했고 나중에 남편의 임종을 지켰다.[5] מאיר. “빛을 만들다”를 의미한다.[6] 당시 사진을 보면 이스라엘군의 연패 소식을 전달받자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했고, 인터뷰에서 "열등한 아랍인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지다니..."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7] 원래는 10월에 치를 예정이었으나 제4차 중동전쟁 때문에 2개월 미뤄졌다.[8] 후임 총리에는 이츠하크 라빈이 임명되었다.[9] 당시 아랍권에도 가말 압델 나세르 같은 좌익 내셔널리스트들이 있었다. 물론 메이어 같은 시오니스트들과 원수관계였지만..[10] 정작 그녀가 싫어한 미즈라힘이야말로 오히려 정통 유대인에 가깝다. 미즈라힘의 상당수가 유럽으로 떠나지 않은 유대인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11] "Golda Meir was the Iron Lady of Israeli politics years before the epithet was coined for Margaret Thatcher."[12] 그는 여군에 대한 성범죄에는 매우 강력한 처벌로 응징했다. 다만 이는 메이어 본인이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스라엘 군법상 성범죄는 불법이고 군 내 기강 확립에도 문제가 되니 강하게 응징한 것.[13]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분파를 제외한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은 시온주의 사상과 공존이 불가능하다. 공산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시온주의 체제를 뒷받침하는 유대주의(Judaism:유대교 신본주의 + 유대 문화 + 유대인 정체성) 및 민주공화제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재계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나 페미니스트는 '시온주의 체제의 지향점에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바탕한 공민권운동과 사회복지사업에 주력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스라엘 공산당과 메레츠당 및 하다사 조직과 WIZO 조직이 대표적인 모범이다. 또한, 애초에 메이어도 노동시온주의자로 사회주의자였는데 극좌파일수록 오히려 페미니즘 계통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14] 이스라엘의 사상 통제 술책은 WZO(세계시온주의자기구)의 통일전선 방침, GPO(이스라엘 공보청)의 언론 통제, 관영자본 출판사들의 도서 통제, 신 베트의 불온세력 감시, 이스라엘 국회의 참정권 박탈, 공안부의 사상범 투옥, 내무부의 시민권 박탈, 법무부의 강제퇴거, 이스라엘 대법원의 기본법 해석 등등으로 분업하거나 협업하면서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반체제 운동을 원천봉쇄했다.[15] 이스라엘은 미국과 캐나다와 멕시코, 영국과 네덜란드와 노르웨이,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과 브라질에서 석유와 석탄 및 LPG와 LNG를 수입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6일 전쟁 직후부터 시나이 반도에서 원유를 채굴했고, 팔라비 2세 시절의 이란(1950년대~1970년대)과 호스니 무바라크 시절의 이집트(1980년대~2010년대)에서도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했다.[16] 공식 자막에선 아이히만이 누군지 몰랐는지 누락해버리는 오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