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09 17:12:51

골다 메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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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댓수를 유지한다. }}}}}}

‏גולדה מאיר‎
Golda Meir
(1898년 5월 3일 ~ 1978년 12월 8일)
파일:attachment/골다 메이어/Example.jpg 파일:attachment/골다 메이어/Exaple.jpg
1. 소개2. 초기 생애3. 총리 재임4. 평가5. 어록6. 기타

1. 소개

이스라엘의 정치인. 제 4대 총리(1969년 3월 17일~1974년 4월 11일)를 역임했다. 이스라엘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여성 총리.

이름의 표기에 대해서 다소 논란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히브리어 기준으로는 '메이르' [meˈʔiʁ] 에 가깝게 발음된다.[1] 물론 이와 별개로 독일어 인명으로 오인하여 마이어로 읽는 사람들이 한국이나 외국이나 많긴 하지만 이 이름은 독일어 이름이 아니라 히브리어 이름이다. 한편 메이어라는 표기는 엄밀히 말하면 영어식 발음이지만, 국립국어원에서는 표준 표기로 '메이어'라는 표기를 정해 놓았다. #

실제 행보와 발언을 고려해 이스라엘의 발트하임이라 하기도 한다.

위스콘신 대학교 밀워키 캠퍼스의 도서관 이름이 골다 메이어 도서관이다.

이스라엘 옛 10셰켈권(구 10,000셰켈권)의 주인공이었다.

2. 초기 생애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d483be0398a8a00341e143080521f7d.jpg

골다 메이어는 골다 마보비치(Голда Мабович)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제국(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1906년에 메이어의 가족은 미국의 밀워키로 이민을 갔다. 아버지는 목수로 일했고, 어머니는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다. 8세 때 가족을 위해 가게를 맡아봐야 했다고 한다. 1906년에서 1912년까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학생을 위한 Fourth Street School에 재학했다. 입학했을 당시에 영어를 구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현재 이 학교는 메이어의 이름을 따서 골다 메이어 학교라고 불린다. 메이어가 14세였을 때 형편이 어려워져 어머니가 학업을 포기하고 결혼하라고 권하자, 반항하고 덴버로 가출했다가 1913년 밀워키로 돌아왔다. 이후 1917년 간판장이였던 모리스 마이어슨(Morris Meyerson)과 결혼했고, 이후 한동안 마이어슨이라는 성을 썼다.

1949년에서 1956년까지 노동 총리로 일했고, 1956년 다비드 벤구리온 아래에서 공사가 되었다. 벤구리온이 이름을 히브리어 이름으로 바꾸라고 요구하자 성을 “메이어”(גולדה“빛을 만들다”를 의미)로 바꿨다. 1960년대 초 림프종이 있다는 걸 발견했으나 1965년에 병이 심하게 악화될 때까지 비밀로 했다. 총리였던 레비 에슈콜이 돌연사하자, 1969년에 연합당은 메이어를 당 대표로 선출해 그의 자리를 잇도록 했다. 이후 5년간 총리를 역임했다.

3. 총리 재임

뮌헨 올림픽 당시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죽이자 메이어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모사드에게 테러리스트를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메이어는 시리아를 먼저 칠지 말지에 대해서 확실한 결단을 하지 못했고, 결국 시리아와 이집트의 공격을 받게 되어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천조국의 지원으로 간신히 전쟁을 뒤집었지만, 결국 이 때의 엄청난 피해로 인해 사임했다.[2]

이후 은거하다가 1978년 12월 8일에 예루살렘에서 지병인 림프종이 악화되어 80세로 숨졌고, 12월 12일에 사망지인 예루살렘 근처의 헤르츨 산에 매장되었다.

4. 평가

이스라엘에서는 위인이지만 팔레스타인이나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같은 아랍권 국가들 입장에서는 원수 그 이상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아돌프 히틀러를 생각하는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스라엘 국부인 다비드 벤구리온은 '가끔은 팔레스타인인과 우린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우리가 악마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도 팔레스타인인도 생각하자는 말도 하며 입을 조심하던 것과 달리 메이어는 그런 거 따지지 않은 데다가 지독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백인도 무조건 좋아한게 아니라 유대인 백인만이 최고이지 다른 백인은 사람으로는 인정하나 좋아하진 않았다.[3] 정작 그러면서도 사회주의자를 표방했다.

비단 팔레스타인 문제 말고도 다른 유대인 종족인 세파라딤(아랍계 유대인)에 대한 반감도 갖고 있었으며 백인 유태인만이 진정한 유태인으로 여겨 흑인이나 아시아계 유태인도 무척 싫어했다. 그러다보니 비백인 유대인들은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아랍인과 동급으로 멸시했다. 다른 외국인들도 야만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말할것도 없었다. 후원국인 미국에 대해서도 배타적이라서 컬러 TV 도입을 반대할 때 미국을 비하하는 발언까지 했다. 그리고 밑에 어록에 나올 정도로 이런 말을 대놓고 하여 세파라딤에선 증오한다. 오죽하면 이스라엘내 세파라딤 유대인들은 메이어가 사망할 때 지옥에 간 계집이라고 대놓고 노래를 부르며 기뻐했다.

5. 어록

마가렛 대처 이전 철의 여인이라 함은 골다 메이어를 일컬음이었다.#[4]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강인하고 억압적이며, 강경하고 보수적인 말을 많이 남겼다. 동시에 전쟁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현실주의적 견해를 견지했다.
오늘밤 태어날 수 많은 아랍 아기들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다.

겸손해하지 마시오. 당신들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오.

아랍 국가들은 싸우고 질 수 있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싸우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직 한 번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랍과의 전쟁에서 비밀무기가 있다고 항상 얘기했습니다 - 바로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집트로, 시리아인들은 시리아로 도망갈 수 있지만 우리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바다 뿐이었고, 그러느니 차라리 싸우는 편이 낫죠. (We have always said that in our war with the Arabs we had a secret weapon — no alternative. The Egyptians could run to Egypt, the Syrians into Syria. The only place we could run was into the sea, and before we did that we might as well fight.)
한국에선 흔히 "우리는 아랍과의 전쟁에서 최종병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면 끝장'이라는 절박함이다."라고 의역된다.
우리가 모든 전쟁에서 이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가를 치렀습니다. 승리는 더 이상 원치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같은 경우를 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언제 팔레스타인인들이 독립국가를 만든 적이 있습니까? 1차대전 이전에 팔레스타인은 남시리아의 일부였고, 요르단의 일부였습니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내쫓았다고 하지만 팔레스타인인과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것 자체는 없었습니다.

너무 인위적이고 미국냄새가 나서 여기와는 안 어울린다고 봅니다(It is so artificial, I know it from America. There is no need for this)
- 이스라엘의 컬러TV 도입을 반대하면서 남긴 말. (참고로 이스라엘은 대한민국과 컬러방송 개시 시기가 거의 엇비슷하다)
컬러가 인위적이라니 색맹이었나보다
이스라엘의 약점은 아랍화되어 있고 무지하여 개조가 필요한 세파르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헨리 키신저가 자신은 첫째로 미국인이고, 둘째로 국무장관이고, 셋째로 유대인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받아쳤다고 한다. 그가 보여준 몇 안 되는 위트있는 모습일 듯?
"여성해방운동가들은 모두 브래지어를 태우고 남자를 증오하는 정신병자들입니다. 임신이 불행이고 아이를 낳는 것이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정신나간 여자들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1972년,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의 발언.
메이어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무척 혐오스럽게 여겨 비난했다. 이스라엘 내 페미니즘 활동에 법적으로 제약을 가했고 여군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남자 군인도 목숨걸고 인권에 매달리지 않는다며 차디차게 대했다. 그와는 별개로 여군에 대한 성범죄에는 강한 처벌을 가했다.

6. 기타

1982년에 미국과 이스라엘 합작으로 메이어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만든 바 있다. 하지만 개봉은 안 하고 TV영화로 방영했는데 작중 골다 메이어 역은 스웨덴의 전설적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연기했다. 버그만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게 유작이 되었다.
[1] 맨 끝의 r발음은 구개수 전동음이다. 이는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썼던 이디시어의 영향이다.[2] 이 당시 사진을 보면 이스라엘군이 패배를 하며 힘겹게 싸우는것에 머리 싸매고 괴로워했고, 인터뷰에서 "열등한 아랍인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지다니..."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3] 물론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이방인으로 생각하는 정도였다. 백인 만을 인간으로 생각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니 백인을 싫어할 리가 없다. 그저 유대인 백인이 백인 중에서 뛰어나다는 생각을 가졌다라는 정도다. 실제로 백인에게는 굉장히 호의적이었다.[4] "Golda Meir was the Iron Lady of Israeli politics years before the epithet was coined for Margaret Thatc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