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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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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각종 오해와 통념들3. 관련 어록4. 기타

1. 개요

당신은 당신 인생에서 뭘 하고 있는가?[1]
인생(, human life)이란, 인간, 인간이 생명으로서 생을 받고 희비의 과정을 거쳐 사로 마무리되는 것을 말한다. 사자성어로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도 한다. 대비어는 축생(畜生, 동물의 삶)이 있다. 다만 인간이 아니어도 한 생물의 삶을 지칭할 때 관습적으로 인생이라고 하기도 한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물리적, 화학적인 분자들의 정밀하고 간단한 화학작용에서부터 출발하여 세포, 기관, 기관계로 이루어진 거대한 유기체이며 스스로 사고 및 자각, 자신의 삶을 논할 수 있는 수준의 고등한 인격체, 즉,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삶을 말한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매 순간마다 선택의 결과물을 쌓아올려 지금의 '당신'이라는 존재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며, 그렇기에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 지 전혀 알 수 없다.[2]

2. 각종 오해와 통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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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은 공평하지 않지만 기회는 누구나 찾아온다.
    • 사회에서는 누구나 기회는 찾아온다고 낙관적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실상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속된 말로 왕으로 태어날 운명은 현실에서도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기회라는 개념 보다는 운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무리 준비를 하고 있어도 기회가 오지 않아 좋은 시절을 다 날려먹은 사람들은 세상사 부지기수다.
  • 유산의 위험은 만삭의 임산부가 가장 크다.
    • 반대로 임신 초기일수록 위험이 크다. 태아가 충분히 성장한다면 어지간한 비극적 사고가 아닌 이상 위험 자체는 줄어든다. 지하철에서 "임신 초기 임산부들을 배려해 달라"는 안내방송을 그렇게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다.
  • 인간의 태아는 모체에서 세상으로 나올 모든 발달적 준비를 마치고 나서 출산되는 것이다.
    •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준비 완료!"의 통념은 갓 태어난 동물들이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반면 갓 태어난 인간은 머리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무시하고 있다. 실제로 태아의 눈동자는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출산을 겪고, 이로 인해 신생아기에는 부모님의 얼굴조차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다.[3] 또 다른 예로, 인간의 신경계는 그것이 "완전히 발달" 했다거나 "준비가 끝났다" 고 말하기 위해서는 출산 시점은 둘째치고 적어도 20세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사춘기에 충동적인 경향이 강한 것도 충동을 다스리는 의 전전두피질[4]이 미발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출산은 9개월쯤 되면 다 준비가 되어서라기보다는 자칫 그 이상으로 기다리다가는 머리가 너무 커져서 출산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5] 더 늦기 전에 부랴부랴 짐 챙겨서(?) 나온다는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그 신생아기에 양적 및 질적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부모 양친 모두의 관심과 지원과 양육을 필요로 하는 종이라고 할 수 있다.
  • 유치원생인 어린 남자아이들은 항상 색색깔의 프로펠러 모자를 쓰고 다닌다.
    • 한국보다는 서구권에 널리 퍼진 어린이에 대한 레알 진짜배기 스테레오타입. 그런데 간혹 이걸 어른들이 쓰고 나타나서 보는 이를 충격에 빠뜨리기도 한다. 일부 게이 포르노에서 우락부락한 남자 배우들이 쓰고 나오기도 한다 게임 심즈 2에서 캐릭터 만들기를 할 때에도 적용 가능한 모자 중 하나로 설정할 수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대중매체에서 유치원생을 묘사할 때 흔히 등장시키는 둥근 챙이 있는 노란 병아리 모자와도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모자와 편견은 해피 트리 프렌즈에 등장한 에게도 묘사되었다.
  • "아직 세상 살아보지도 않은 어린애가 스트레스는 무슨 스트레스냐? 쪼끄만 게"
    • 어린이들에게도 시상하부(hytothalamus)와 뇌하수체(pituitary)와 부신(adrenal gland)은 다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어린이들의 몸도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킬 능력을 갖춘 건 당연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스트레스라는 용어 자체가 학술적으로 정의할 경우 '외부 환경의 위협적 변화에 대한 신체적인 저항 반응' 정도로 설명되는데 위 말대로라면 어린이들은 이런 반응 능력이 없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 물론 어른들이 더 빈번하게 "세상 살기 참 힘들다" 같은 표현을 하는 건 분명하다.[6] 그러나 어린이들도 자기 나름의 힘든 일을 만나면 어른들과 똑같이 느낀다.

    이들은 단지 자신이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어른들처럼 정교하게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또는 한번 표현했다가 "흥, 쪼끄만 게 잘도 맹랑한 소리를 하네" 같은 어른들의 비아냥을 듣고 좌절당한 것일 수도 있다.
  • 갓난 아이들이 사랑을 알아!? 아이들은 사랑따윈 몰라!!
    • 오히려 유치원생들이 이성 간에 서로를 그리워하고 만나면 얼싸안고 뽀뽀하고 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물론 이 연령대에서는 "○○(이)가 좋아요" 정도로만 표현하거나 어른들이 쟤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몸을 비비 꼬거나 하는 귀요미한 반응으로만 나타나겠지만 넓게 치자면 어린이들도 이성에 대한 이끌림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생식 내지 재생산을 위한 성적 끌림(sexual attraction)이 아닐 뿐이다. 성적 끌림만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상당한 오산이다. 이건 무성애자들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도 된다. 사랑을 구성하는 3가지 조건은 우애, 열정, 그리고 헌신이다.
  • "우리 아이가 벌써 거짓말을...?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고 벌써 이러지?"
    • 사실, 부모가 막장 부모가 아닌 전제하에서 대부분의 경우는 기뻐할 일이다. 거짓말을 또래들보다 일찍 깨우쳤다는 것은 그만큼 인지적으로 발달과 성장이 빠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아이들이 1~2년 후에 선의의 거짓말도 더욱 일찍 깨우치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부모의 적절한 훈육과 교정을 잘 받아들인다면 차후 사회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 단, 이 거짓말이 너무 상습적으로 반복되고, 매번 혼내는데도 일말의 반성도 죄책감도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요주의.

    이러한 태도는 그 아이의 향후의 비행 및 일탈을 강력하게 예측한다. 특히나 동물을 잔혹하게 괴롭히거나 의도적으로 타인의 재산 및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말썽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에 아이를 데려가서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볼 것.
    심각할 경우 품행장애의 증후일 가능성이 있다.
  • 동심은 무지 상태이니 가급적 어릴 때부터 과학적 사실들만을 알려주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동심은 무지 상태가 아니다. 애초에 인간은 자기 연령에 맞는 정상적 발달단계를 자연스럽게 거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취학 전 연령대 특유의 환상적 사고[7]와 상상력들은 전세계의 발달심리학자들에게 가열차게 연구되어 왔으며 향후 성인이 되어서의 건강한 세계관과 타인에 대한 신뢰, 강인함(hardiness)과 같은 내적인 자질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적응적 역할이 밝혀져 있다. 뒤집어 말하면, 애를 위한답시고 억지로 매섭고 냉혹한 시궁창급 현실을 비아냥 섞어서 냉소하는 것그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짓거리다. 도리어 동심이라는 단계를 정상적으로 거쳐 올라간 개인이 향후 더 균형잡히고 건강하며 심사숙고하는 이성을 갖추는 데 더 유리하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긴 하지만 일부 고2병 환자들이 그리도 추앙(?)하는 세계적인 지식인들과 과학자들도 알고 보면 유년시절에 푸른 자연 속에서 뛰어놀면서 자연 세계에 대한 다양한 상상과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향후 그들이 자연과학에 매혹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 어린이들의 동심은 언제나 아름답고 밝고 명랑하며 맑고 투명한 것이다.
    • 그렇지 않다. 물론 어른들에 비해 어느 정도 더 그런 면이 있긴 해도, 이는 존재를 기초로 한 설명이기보다는 당위를 기초로 한 설명에 가깝다.

    즉, 선진 후기산업사회의 어린이들은 정상적인 사회화(socialization)를 위하여 "밝고 아름답고 명랑하며 맑고 투명할"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삐딱하게 도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옳다고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긍정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어린이들은 "순수해야 한다" 보다는 "순진무구하다"로 설명되는 심성을 갖고 있어서, 종종 섬뜩할 정도로 잔인한 말을 하는[8] 등의 사례 역시 정상적 발달과정이라고 설명될 수 있으며 악당의 팔을 잘라 악어에게 던져주며 낄낄거리는가 하면 "죽음이란 정말 짜릿한 모험일 거야"(!!) 등의 어록을 남긴 바 있는 《피터 팬》 동화의 주인공 피터 팬은 역설적으로 동심의 세계를 아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옛날 어린이들은 순수하고 착한 동심을 갖고 있었는데, 요즘 어린이들은 말끝마다 욕을 하고 어른들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일종의 추억 보정. 옛날에는 "이것이 어린이들에게 교육적인가, 유해한가"에 대한 인식 자체가 어른이건 어린이건 간에 상당히 희박했으며 교육수준도 높지 않았고 일제 강점기, 6.25 전쟁, 군부 독재정권 등... 제대로 된 인권이 보장되기 전이었고 국민들이 충분한 시민의식을 배양하고 건전한 가치관을 가질 기회가 없었던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여 러번 거쳤다. 기성세대들의 젊은 시절이 어느 때였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당시의 사회가 어떠했는지 답은 나온다. 그 때문에 실제로 당시 아이들은 집에서부터 체벌이 없었던 집안을 찾기가 힘들었고, 현재 기준으론 아동 학대로 걸릴 만한 가정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신체적 폭력이 없었다 치더라도 "오라질 놈, 가난대물림할 놈, 도야지 새끼 같은 놈, X물에 씻겨 나온 놈, 확 나가 죽어버려라" 같은 동심파괴급 저주와 개새끼, X발새끼 등의 심한 욕설들을 다름 아닌 부모님들에게서 항상 듣고 살아야 했다.[9] 그게 여자아이라면 두 배로, 딸부잣집 막내딸이라면 세 배로.[10] 즉, 매스미디어나 다른 무언가가 문제가 되기 전에 이미 가정환경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 요즘 어린이나 옛날 어린이가 어차피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점을 생각하면 일부의 사례만을 보고 그 세대 전체를 일반화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위와 같이 요즘 애들은 옛날보다 못하다는 일반화를 함부로 한다면 역으로 요즘 애들이 옛날보다 어른스럽다고 일반화가 가능하다...
    • 서구 선진국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조사에 따르면 실제로는 최근 10~15년 동안 서구권의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은 도리어 점차적으로 행실이 반듯해져 왔다.

    다시 말해 술에 덜 취했고, 성관계도 덜 했으며, 부모님과 대화가 더 많아졌다. 반대로 외로움은 점점 더 많이 호소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이런 국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옛날 애들은 착했는데 요즘은..." 같은 한탄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국민일보 2018년 기준으로 영국 젊은이들의 20%는 아예 금주를 하고 있으며 영국 전역에서 이 줄줄이 폐점하고 있고, 최근 10년 동안 스웨덴아이슬란드에서는 금주자가 각각 31%와 61%(?!)로 폭증했으며, 유럽 전역의 청소년 수감자는 10년 전에 비해 3분의 1로 감소했다. 미국은 50년 전에 비해 미성년 성관계 경험자의 비율이 8.9%p 감소했고, OECD 국가들의 청년층에 있어서 학사 이상의 고학력자 비율은 16년 전의 26%에서 43%로 증가했다. #시사인
  • 청소년 시기에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상적인 발달과정이다.
    •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정체성의 위기는 사회가 개인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정체성이 개인이 그 스스로에 대해 갖는 자기개념(self-concept)과 충돌할 때에만 나타나며, 그러한 충돌이 없는 청소년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는다.
  • 모든 어머니들은 당연히 모성애를 갖고 있으며, 언제나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 개체별로 모성애의 정도가 다양하다. 모체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여러 형태로 발현된다.
      자세한 내용은 모성애 문서 참조.
  • 모든 부모들은 자녀가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분가해 나가면 소위 "빈 둥지 증후군"(empty-net syndrome)을 경험한다.
    •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빈 둥지 증후군은 자녀의 존재를 자기정체성에 포함시킨 부모들[11]이 주로 겪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모들은 자녀 양육의 책임에서 벗어나서 비로소 배우자와 함께 자유로운 생활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12] 특히 개인주의적 문화가 두드러지는 서구권에서는 성인 자녀가 부모에게 의지하거나 나이든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얹혀 사는 것을 그다지 좋지 않게 보기도 한다. 꼭 문화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부모의 신념이나 성격, 세계관, 가치관에 따라서는 자녀를 독립시킨 후 전혀 허탈함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오늘날의 "낀 세대" 들은 자녀가 독립해 나간 이후 허탈감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병든 노부모를 봉양해야 할 책임에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부모 봉양이 선택적이게 되면서, 이런 개인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 모든 중년의 개인들은 중년기 위기(midlife crisis) 혹은 속칭 "오춘기"를 겪으며 방황한다.
    • 중년기는 생각보다 부정적이지 않으며, 서구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중년기의 이미지는 실제보다 더 부정적이다. 중년기를 생물학적, 사회문화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영미권 대중들의 고정관념에 기대고 있으며, 이 인식은 일본이나 인도 등과의 교차문화 연구를 통하여 지지되지 않는다.[13]
    • 단, 중년이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일생을 중간점검하게 되고, 비로소 죽음이란 개념을 자신의 삶과 의미 있게 연결하는 경향은 있다. 유념할 것은 영미권 대중들 외에도 그들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현대 한국 사회의 중년들 역시, "내가 지금껏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 왔지? 내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문화적으로 학습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 노인이 되면 수면시간이 줄어든다.
    • 수면패턴이 바뀌어서 갑자기 아침형 인간이 되거나 낮잠이 많아지거나 하는 변화는 있지만, 개인차가 너무 커서 수면시간 자체가 줄어든다는 설명을 일반화하긴 어렵다. 단, 거의 모든 노인들이 예외 없이 얕은 수면인 1단계 수면의 비율이 급증하고 깊은 수면인 4단계 수면의 비율이 급감한다. 즉, 노인들은 쉽게 뒤척이며 잠도 쉽게 깨고, 충분히 수면을 취하더라도 푹 쉴 수 없다.
  • 모든 노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부정적인 정서를 보이고 우울해한다. 즉, 노인들은 젊은이들에 비해서 덜 행복해한다.
    • 그렇지 않다. 노년기 발달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노인들이 감정 조절의 전문가가 되어 있으며 수많은 부정적 사건들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지켜내는 비결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높은 각성수준의 긍정적 정서[14]보다는 낮은 각성수준의 긍정적 정서[15]에 주로 치우친 상태로서 꽤 자주 "기분이 좋다"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당황/불안/걱정하게 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재빨리 다른 쪽으로 주의를 돌려 버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젊은이들은 뉴스에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인이 나오면 욕을 퍼부으며 물고뜯고 하지만, 노인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정치인이 뉴스에 나오면 아예 채널을 돌려 버리며, 욕을 한다고 해도 조용히 '에휴 저 병신 같은 놈.' 하고 한마디 정도만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극소수의 언론사들만을 선택적으로 골라서 그것 이외에는 절대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올바르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 전략이 그들의 감정 조절에 꽤나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일부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타인과 사소한 시비가 붙더라도 이를 재빨리 잠재우려 하거나 아니면 속으로 삭이는 경향이 있다. 노년기 인간관계는 극도로 선택적이며, 그 선택의 기준도 몹시 까다로워지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노인들은 자신의 기분을 정말 좋게 만들어 주는 극소수의 타인과만 극히 간단한 사회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그 외의 사람들과는 피상적으로만 접촉하면서 가급적 회피하려 한다. 탑골공원에 그렇게 많은 노인들이 모여있는데도 분쟁이 흔치 않은 이유
    • 노년기의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지극히 적응적이어서, 그들이 인생의 황혼을 나름대로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젊은 시절에 자신의 발달과업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불행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노인들은 젊은이들보다 뛰어난 감정 조절 테크닉을 구사하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한다. 사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들이 더 많다.

    평생을 몸바쳤던 회사에서 물러나서 느끼는 공허함, 성인이 된 자녀들의 독립, 가문의 최고 원로가 되었다는 책임감,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돌아보게 하는 성찰, 가까운 친우들이 하나 둘씩 죽음을 맞았다는 부고(訃告)의 연속, 일상을 영위하기 힘들 만큼 나날이 감퇴되어 가는 기력과 감각, 나날이 추한 모습으로 쭈그러드는 신체와 그 고린내[16], 무엇보다도 배우자와의 사별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 그리고 특히나 앞으로 살 날이 불과 몇 년밖에는 남지 않았다[17]는 것은 평범한 젊은 사람들이라면 몇 번씩 멘탈붕괴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들이 나름대로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감정 조절 능력 때문이다. 즉, 이들에게는 처절할 정도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 연구자들 중 일부는 이에 대해서 "앞으로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인식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이들에게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일희일비가 의미가 없으며 전부 사바세계의 부질없고 무의미하며 헛된 것들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설령 시비가 붙더라도 그런 일상의 문제들로부터 초연한 관점에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감정이 크게 상하지 않은 채 수월하게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노년기 초월(gerotranscendence) 상태라고도 부른다. 단, 이 가설에도 약점은 있는데 노년기 감정 조절이 의외로 인지적 수준에까지 관여되어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례로, 노인들은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 사진 속에서 '화난 얼굴'을 젊은이들보다 더 못 찾아내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노년기 초월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 오래 사는 것은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이다.
    •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어떻게 오래 사느냐가 중요하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신체는 30대부터 이미 노화가 진행 중이며, 75세가 되면 그때부터는 신체적, 인지적 기능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죽음을 향해 치달아가는 기관차가 된다. 그래서 일부 노인심리학 등의 연구자들은 75세를 전후로 해서 노년기 전기, 노년기 후기로 나누기도 한다. 노년기 전기는 주로 사회적으로 새로운 역할을 갖게 됨을 강조하는 반면 노년기 후기는 신체 전반적인 감퇴에 방점을 찍는다. 사회적으로 보면 "제2의 시작"이라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와는 다르게 현실은 시궁창이며 은퇴 이후의 노후보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노인들도 굉장히 많다. 그렇다고 정년을 늦추자니 이번엔 일자리 부족해진 청춘들이 울고... 종합하면 자신의 발달과제를 충분히 달성하고, 적절한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며, 기력의 감퇴에 대비한 준비가 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이런 많은 조건들 하에서만 오래 사는 것이 의미가 있다.

    실제로 트랜스휴머니즘 같은 분야에서도 단순히 생명공학적 진보를 통해 장수를 달성하는 것 외에도 장수에 필요한 여러 개인적/사회적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 가는 상태다.
    • 간혹가다 일부 대범한 사람들은 "나는 짧고 굵게 살다 갈 거야!"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무작정 오래 사는 것을 모두가 바라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 모든 사람은 죽음을 꺼리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
    •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하나의 궁극적인 스트레스원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이 지나치게 서구 특정적인 문화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아프리카/남미의 인류학적 부족사회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할지는 의문이다. 즉, 죽음은 곧 자연과의 합일(合一)이라고 믿는다거나, 저 바이킹들처럼 죽음 이후에 발할라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 계통이나 도 계통의 문화권에서도 죽음을 하나의 주어진 것 내지는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거나 죽음 이후에 인간을 초월한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 불로불사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죽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의외로 거부감을 보일 만한 여지도 꽤 있다. 실제로 많은 대중매체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케이스도 많이 있으며, 무조건 좋은 것처럼 묘사되는 것을 지양하는 편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죽음 그 자체를 영원히 피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생의 목표를 충분히 달성하고, 자신과 타인을 위해 충분히 공헌한 다음,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작별을 받으며, 될 수 있는 한 존엄하고 고귀한 모습으로 고요히 잠드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웰빙"(well-being)이 아니라 이제는 "웰다잉(well-dying)이 중요한 시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웰다잉은 극히 힘든 것이다. 최악의 경우 독거노인으로 지내다가 고독하게 죽거나, 병원 중환자실에서 온갖 참혹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손들에게 물적/정신적 고통을 끼치다가 보기 흉한 모습으로 숨이 끊어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 그렇게 죽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많이 있다. 여러분을 포함하여, 누구라도 이런 식의 죽음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3. 관련 어록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도 같도다.
<구약성서> 시편 103:15 (다윗)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구약성서> 역대상 29:15 (다윗)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
<구약성서> 시편 90:9-10 (모세)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그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구약성서> 전도서 1:2-3,5:15-16 (솔로몬)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구약성서> 이사야 2:22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이 있으리니
<신약성서> 히브리서 9:27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데 옛날 신이 동물을 만들어 그들의 수명을 50년씩으로 정해 주었다. 그러다 맨 나중에 인간의 차례가 왔을 때는 25년 밖에 줄 수 없었다. 인간이 불평하자 신은 인간더러 다른 동물한테서 조금씩 꾸어보라고 했다. 인간은 동물들을 찾아 다니면서 말과 개와 원숭이한테서 각각 25년씩을 받아냈다. 그랬더니 신은 인간에게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는 25년은 인간으로 살되 그 다음 25년은 말처럼 일하고, 다음 25년은 개처럼 짖고, 나머지 25년은 원숭이처럼 웃음거리가 될 거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 병동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모든 남자와 여자는 배우에 불과하다. 그들은 퇴장하고 또한 등장한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 동안 여러 편의 연극을 연기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C('C'hoice)[18]가 있다.
프랑스철학자 장폴 사르트르[19]
인생은 다음 두 가지로 성립된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다.
영국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내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내 배역을 잘 연기했더냐? 그랬다면 박수를 쳐다오.
아우구스투스
아닐세, 불가능한 것이야. 개인의 존재에 있어 특정 시기의 삶의 감각을, 곧 인생의 진실이며 의미이자 인생의 미묘하고도 예리한 에센스라고 할 삶의 감각을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네. 그건 불가능해. 우리는 꿈꿀 때처럼 그렇게 살아간다네... 홀로......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21]의 등장인물 말로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렸네.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 살게 해.
가수 이소라 7집 "track 9" 중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은 신이 주신 보너스 게임[22]입니다. 모두들 그저 아프지 말고 건강만 하세요.
대한민국의 가수 신해철
잠자는 시간 26년, 식사시간 6년, 세수를 한 시간 228일, 넥타이를 맨시간 18일, 다른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기다린 시간 5년, 혼자 멍하니 보낸 시간 5년, 담뱃불을 붙이는시간 12일, 그리고 그중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 46시간.
스위스의 80세 노인이 시간으로 계산한 자신의 인생
당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요.(Don't waste it. Don't waste your life.)
호 인센
시한부 성병[23]
어반 딕셔너리
타인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그대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
- 니콜라 드 콩도르세
어떤 세대가 도로를 만들고, 다음 세대가 그 위를 지나간다.
중국의 속담
만물은 유전()한다.
헤라클레이토스
인생은 우리의 불사불멸의 유년기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인생은 석재(石材)이다. 이것에다 신의 형상을 새기든 악마의 형상을 새기든 그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허버트 스펜서
인생은 때로는 난파선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을 때가 있는. 그 파편이 우정이나 영광이나 연애이다. 우리의 생존 중에 흐르는 시간이라는 기슭은 이런 유기물로 가득하다.
스탈 부인(프랑스의 작가)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렇게나 책장을 넘기지만 현명한 사람은 공들여 읽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 한 번밖에 그것을 읽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잔 파울(독일의 작가)
산다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하는 일이다.
장 자크 루소
사람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다.
소크라테스
일년의 희망은 봄이 정하고, 하루의 희망은 새벽이, 가족의 희망은 화합이, 인생의 희망은 근면이 정한다.
중국의 속담
인생이 무엇인가를 옳게 알기 전에, 인생은 벌써 반이 지나고 있다.
영국의 속담
우리는 울며 태어나서, 불평하며 살다가, 실망하며 죽는다.
영국의 속담
모든 사람의 일생은 신의 손으로 씌어진 동화이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
반고
인생은 표를 사서 궤도 위를 달리는 차에 타는 사람에게는 알 수 없다.
서머셋 몸
인생은 왕복표를 발행하지 않았다. 일단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R.롤랑(프랑스의 작가)
인생은 불완전한 항해이다.
셰익스피어
인생은 어떠한 값으로도 구입할 수 없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인생보다 어려운 예술은 없다. 다른 예술이나 학문에는 도처에 스승이 있다.
세네카
내게는 나의 생애가 해변의 모래 사장에서 노는 한 소년과 같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모든 미지의 것을 보여주는 진리의 대양의 해변에서 매끄러운 조약돌이나, 예쁜 조개 껍질을 발견하고 이따금 즐겁게 정신없이 놀고 있는 한 소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이작 뉴턴
천국에서 봉사하기보다는 지옥에서 다스리는 편이 낫다.
존 밀턴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다운 맛을 못 본다.
괴테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쉽다,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일이다.
에머슨(미국의 시인, 철학자)
우리는 인생이라는 연극의 열렬한 공연자이다.
카롯사(독일의 작가)
인생은 천국에 가기 위한 검역 기간이다.
아라비아의 속담
사람은 여행한다. 여행을 한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온다. 사람은 산다. 살고 난 다음에는 대지로 돌아온다.
에티오피아의 속담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침내는 자기가 산 대로 생각하게 된다.
브루제(프랑스의 작가)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세 사람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최후의 제 일보는 자기 혼자서 걸어야 한다.
헤르만 헤세
인생의 처음 40년은 텍스트를 부여해 준다. 그로부터 30년은 텍스트에 관한 주석을 부여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비참한 사람에게는 인생은 짧고, 행복한 사람에게는 길다.
시투스(로마의 시인)
기쁨이 없는 인생은 기름 없는 등잔이다.
W.스코트(영국의 작가)
인생은 고통이며 인생은 공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행하다. 그러나, 인간은 지금도 인생을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고통과 공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인생은 낯선 땅에서의 권투이다. 그리고, 뒤따르는 명성은 망각되기 쉬운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나는 세상을 여인숙이 아니라 병원, 그리고 사는 곳이 아니라 죽는 곳으로 간주한다.
T.브라운(영국의 수필가)
우리는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옳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네카
인생의 아침에는 일을 하고, 낮에는 충고하며, 저녁에는 기도한다.
헤시오도스
친구여,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실제 인생의 황금 나무는 언제나 푸르다.
괴테
살기 위해 먹어라, 먹기 위해 살지 말고.
벤저민 프랭클린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산 자가 훌륭히 살아온 자이다.
오비디우스
사랑이 없는 청춘, 지혜가 없는 노년- 이 모두가 실패의 일생이다.
스웨덴의 속담
대문자만으로 인쇄된 책은 읽기 어렵다. 일요일만의 인생도 그와 마찬가지다.
파울 리히터(독일의 작가)
타인의 지혜로는 멀리까지 갈 수 없다.
리투아니아의 속담
9개월에 걸쳐 인간은 살 준비를 하지만, 인간을 죽게 하는 데는 한 순간밖에 필요치 않다.
로가우(독일의 시인)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싶다. 왜 내가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
앙드레 지드
우리의 지상(地上)은 국도요, 우리 인간은 통행자이다. 도보로 또 말로 사람들은 달리고 또 뛴다. 전령이나 급사처럼.
하인리히 하이네
인생은 개인이나 인류 전체에게도 매우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논리의 세계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쇠렌 키르케고르
이 세상은 감옥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곳으로 들어가지만 각각 다른 방에서 생활한다.
반투족의 속담
매일, 매주, 매계절, 매년,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점심을 들고, 같은 시간에 퇴근한다. 그것이 20세에서 60세까지 계속된다. 그동안 대서 특필한 사건은 네 가지밖에 없다. 결혼, 최초의 자식의 출산, 어버이의 죽음,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실례했습니다. 승진이었군요.
기 드 모파상
산다는 것은 생각하는 일이다.
키케로
우리의 인생은 우리들이 한 노력만큼의 가치가 있다.
모리악(프랑스의 작가)
인생은 유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기만의 의사로 이것을 포기할 권리는 없다.
레프 톨스토이
이 세상은 한 권의 아름다운 책이다. 그러나, 그것을 읽을 수 없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골도니(이탈리아의 작가)
만나 알고, 사랑하다가, 그리고 헤어지는 것이 수많은 인간의 슬픈 이야기이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인생이란 좀처럼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 거야.(人生って中々思った通りには行かないものよ)
그 점이 재밌는 거지만 말이야.(そこが面白いんだけどね。)
마카오·조마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복하고 평안하라.
붓다
...사회적 지위나 성별에 관계없이 인생이란 용기를 보여주어야 하는 전쟁터이다. 비애는 겁쟁이의 몫일 뿐이다. 인생은 병상에서 죽든 들판의 텐트 속에서 죽든 하등 차이가 없는 공정한 경기이다. 그 둘 사이에 차별을 두려는 어리석은 행위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절망하는 것은 비겁하고 패배적인 행위다. 인간은 실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공하기 위해서 태어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1853년 3월 21일, 소로의 일기

4. 기타

리뷰 블로거들이 은근히 자주 쓰는 접두어이며 대략 '생애 최고로 훌륭한 ~'의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여행지에서 인생사진을 찍었다.", "어느 선수가 인생경기를 했다.", "어느 가수의 인생곡이 나왔다." 또는 "저번에 토익 시험 봤는데 700점도 안 되었다가 1달만에 900점을 찍어서 인생점수를 만들었다" 등이 있다.

[1] 쿠르츠게작트의 영상.[2] 지금 당장에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하루아침에 실패해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고, 반대로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사람도 어느 순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해 있을 수 있다.[3] 그래서 젊은 어머니가 산부인과에서 자신의 갓난아기와 만났을 때 이 아기가 한동안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것은 "아아 이 분이 내 어머니시구나..." 하는 절절한 인륜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이 희뿌연 물체가 도대체 뭐지...?" 하면서 어떻게든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4] 간단히 말하면 전두엽을 말한다.[5] 이것마저도 상당히 크고 나서 나오는 거다.[6] 어린아이는 제 몸 하나만 잘 건사하면 되지만 어른은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린아이는 자기 생계를 부모가 챙겨준다.[7] 예를 들어 자신이 잠든 사이 침실에 담쟁이덩굴이 덮이고 이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거나 무지개를 미끄럼틀 삼아 미끄러져 내려온다거나 하는 등...[8] 아이의 시점에서 순수하게 소름끼치는 말을 하는 것도 있지만 귀신 따위가 보이는 것 같은 얘기를 하는 초자연적인 사례도 섞여 있다.[9] 실제로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주보(성당에서 매주 발행하는 소식지)에 기고하였던 글에도 그러한 내용이 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라 자녀에게 욕설을 퍼붓는 부모가 한두 집이 아닌 시절이었음에도 자신의 부모님은 절대로 그러시지 않고 자식들을 잘 키우셔서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10] 당장 주변에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께 직접 여쭈어 보자. 당신께서 유년 시절에 듣고 사셨던 걸쭉한 욕들이 한도 끝도 없이 나올 것이다.[11] 즉, 자녀를 양육하고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이유라고 믿는 부모들. 이런 부모들이 흑화하면 헬리콥터 부모 내지는 캥거루 부모가 되곤 한다. 이들은 자녀가 독립해 나가게 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듯한 거대한 허무감과 같은 감정에 빠지게 된다.[12] 이와 관련된 서구권의 클리셰 중 하나가 명절이 되어 자식들이 손자손녀의 손을 잡고 승용차에서 내리는데, 아이들의 한 손에는 꽃다발이, 다른 한 손에는 케이크가 들려 있고, 그때 마침 울타리 너머 정원에서 텃밭에 물을 주던 노부부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반겨주는 장면이다. 유럽 여행자들 중 상당수도 험준한 알프스 산길에서 풍채 좋은 노부부와 우연히 만나서 친구처럼 대화하며 산을 내려왔다는 경험담들을 꽤나 늘어놓기도 한다.[13] Gullette, 1998 등의 문헌에 나온다.[14] 짜릿함, 경쾌함, 황홀함 등.[15] 편안함, 자연스러움, 느긋함 등.[16] 샤워나 목욕을 하기에는 기력이 부치기 때문. 젊은 시절에 깨나 깔끔떨던(…) 사람이라면 이 체취 때문에 노인이 된 후 엄청나게 위축된다. 괜히 사회복지 분야에 노인 목욕봉사 활동이 있는 게 아니다! 만일 여러분이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저질체력이라면... 남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17] 이미 수십 년을 살아온 노인의 입장에서 몇 년은 코웃음이 나올 만큼 짧은 찰나의 세월이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바로 코앞까지 밀어닥친 것이다. 혹시 이 기분이 짐작이 되시는지?[18] 이 부분을 치킨('C'hicken)으로 바꿔서 쓰는 유머가 있다. Christ로 바꾸는 기독교인도 있다.[19] 단, 이 말을 실제로 사르트르가 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사르트르는 프랑스인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로는 선택이 C(Choix)인 건 같지만 N(Naissance)으로 시작해서 M(Mort)로 끝난다.[20] 사실 채플린이 한 정확한 말은 멀리서 찍으면 희극, 가까이서 찍으면 비극이란 이야기였다.[21] 영화 지옥의 묵시록과 게임 스펙 옵스: 더 라인의 원작[22] 굳이 장르 따져보자면 RPG로 보는게 알맞을 듯.[23] A sexually-transmitted, terminal dise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