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8:00:50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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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보컬
신해철†
키보드
지현수
기타
김세황
베이스
제이드
드럼
김단
서브 보컬
이현섭

<colbgcolor=#000><colcolor=#fff> 신해철
申海澈|Shin Hae Cheoll
파일:168212_202396_4808.jpg
2007년 솔로 5집 'The Songs For the One'[1]
출생 1968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2]
사망 2014년 10월 27일 (향년 46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388-1 서울아산병원[3]
장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화곡길 130 유토피아추모관 (화곡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1cm[4][5], 55kg, O형, IQ 150 (표준편차 24)
직업 싱어송라이터, 음반 프로듀서, 라디오 DJ, 프로그래머[6], MC[7]
본관 평산 신씨 사간공파 34세
데뷔 1988년 12월 24일 MBC 대학가요제
무한궤도 '그대에게'
D[dday(1988-12-24)]일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8]
서명
파일:신해철 서명.svg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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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영훈초등학교 (졸업)
중동중학교 (졸업)
보성고등학교 (졸업)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철학 / 중퇴)
등록기준지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 #
병역 방위병 일병 전역[9]
가족 아버지 신현우[10]
어머니 김화순[11]
누나 신은주
배우자 윤원희(1977년생 / 2002년 결혼, 2014년 사별)[12]
딸 신하연(2006년 9월 14일생)[13]
아들 신동원(2008년 7월 15일생)
반려동물 얄리†(1974년)[14]
친척 외증조부 이성구
사촌 쿠블라이 권[15]
육촌 동생 서태지[16]
칠촌 조카 정담[17]
구촌 신정환[18]
소속 기획사 대영AV (대영기획) (1989~1995)[19]
Revolution No.9 (1995~1997)
빅뱅뮤직 (1997~2004)[20]
싸이렌엔터테인먼트 (2005~2011)[21]
휴먼엔터테인먼트 (2008~2013)
K.C.A. 엔터테인먼트 (2014)[22]
넥스트 유나이티드 (2014~)[23]
소속 그룹 무한궤도(1987년 ~ 1990년)
N.EX.T[24](1991년 ~ 1997년, 2003년 ~ 2014년)
노땐스(1996년 ~ 1997년)
Monocrom(1999년)
비트겐슈타인(2000년 ~ 2002년)
종교 가톨릭(세례명: 아우구스티노) → 무종교[25]
팬덤 철기군[26]
퍼스널 컬러 없음[27]
별명 마왕(뫙), 교주, Crom, 악기덕후, 시장[28], 노래하는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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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사망
2.1.1. 추도2.1.2. 유명 인사들의 추도 및 추모2.1.3. 의료과실
3. 음악 활동4. 음반5. 음악 외 활동
5.1. MC 활동5.2. 성우 활동5.3. 배우 활동5.4. 라디오 DJ
6. 논객 · 정치연예인 신해철7. 다양한 경력과 에너지의 소유자
7.1. 서강대 중퇴7.2. 라디오 진행7.3. 신해철 닷컴 폐쇄사건7.4. 유사 나치 복장, 밀리터리 룩7.5. TOP밴드 코치 거부 논란7.6. 맥심 편집장 취임 취소
8. 신해철의 오덕력9. TV출연10. 콘서트11. 평가 및 영향력
11.1. 프로듀서 신해철11.2. 악기 덕후 신해철11.3. 작사가 신해철11.4. 선구자 신해철11.5. 저평가
12. 팬덤
12.1. 팬들과의 관계
13. 특이 사항14. 루머 및 오해15. 저서16. 관련 서적17. 여담18. 어록1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신해철 개요.gif
대한민국의 전 싱어송라이터, 음반 프로듀서, 라디오 DJ, 프로그래머이자 사회운동가. N.EX.T의 리더 및 메인 보컬이었으며 마왕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무한궤도라는 밴드로 참가해 <그대에게>를 불러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솔로로 활동하며 0세대 아이돌 활동을 하다 밴드 N.EX.T를 결성하여 많은 인기를 끌면서 6촌 동생인 서태지와 함께 90년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하였고, 2000년대 이후에는 체벌 금지를 주장하거나 노무현문재인의 선거 유세를 돕는 등 사회운동가 및 정치연예인 활동도 겸하였다. 이후 2014년의료사고로 인해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신해철이 생전 음악계에서 가지고 있었던 영향력이 컸던 만큼, 그가 사망한 지 10년이 된 현재까지도 신해철에 대한 추모 사업이 진행되고 음악 예능에서 신해철을 주제로 다루는 등 신해철의 영향력은 현재진행형이다.

2. 생애

록 음악부터 시작해서 일렉트로니카(테크노), 재즈, 국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했고, 전공을 살려 일반적 대중가요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철학적 노랫말을 많이 지었으며, 평단의 호평과 함께 상업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 뮤지션이다. 또한 작사, 작곡, 편곡, 악기 연주는 물론 프로듀싱과 엔지니어링 및 음악 작업을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까지 한 만능의 뮤지션이었다. 또한 대한민국 컴퓨터 음악(소위 미디 음악)의 선구자 겸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싸이, 서태지, 이현도 등도 신해철에게 샘플러를 비롯하여 각종 미디음악 장비 사용법 등을 배웠다고 한다.[29]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데뷔한 이후 말년까지 그의 노래 속 이야기의 결론은 대부분 염세주의적인 내용[30]으로 귀결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이상주의적인 메시지[31]또한 크게 공존했다. 섹드립[32]이나 자조적인 블랙유머도 심심찮게 구사했다. 데뷔 10주년까지 나온 노래의 대부분은 위와 같으며, 데뷔 10~20주년 사이에는 기존의 진지하던 가사에 보다 직설적이고 많은 공격성과 그에 기반한 유머를 섞었다.[33] 데뷔 20주년이 넘은 뒤에 나온 노래들[34]은 대개 자조적 유머나 특정 세력을 향한 블랙유머가 꽤 있는 편이다.
파일:신해철 1988 대학가요제.jpg
1988년 대학가요제 인터뷰
파일:2005년 MBC 100분 토론.jpg
2005년 MBC 100분 토론 출연분[35]

본인이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FM 음악도시에서는 "시장"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이후 진행했던 고스트스테이션 및 팬들 사이에는 마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영어로는 보통 Demon Lord(데몬 로드)번역된다. 다만 마왕이라는 신해철의 별명은 고스트스테이션보다 훨씬 전인 1998년 6월 25일, 동아일보 25면의 기사에 언급되어 있다.[36]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마왕이라는 별명은 지상파 TV 등지에서도 심심찮게 소개되곤 했다. 라디오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다루는 인터넷 기사에서조차 '마왕'이라는 표현이 빠지지 않기도. 사실상 마왕이라는 말은 현재 신해철의 호나 다름없다.

한편 신해철은 크롬(Crom)이라는 예명을 가지고 있는데, 올리버 크롬웰에서 따왔으며, 넥스트 4집~모노크롬 작업을 위해 영국에 체류하던 시절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그의 이름 대신 엔지니어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래서 그의 트위터 계정도 Crom Shin. 당시 모 영국 엔지니어가 신해철을 두고 '사람 부릴 때는 꼭 올리버 크롬웰 같구나? 이 독한 놈.'이라며 붙여줬다.

가족 관계로는 1남 1녀 중 둘째이자 막내로 2살 위의 누나를 두고 있다.[37] 이후 신해철은 미스 뉴욕 출신의 방송인 윤원희와 결혼하여 마찬가지로 1남 1녀의 자녀를 두게 된다. 자녀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2살 터울의 누나-남동생 남매라는 점도 같다. (신하연 양 - 신동원 군)

한편 신중현의 아들이나 신대철의 동생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신중현의 아들인 신대철도 평산 신씨 34세손 '澈'자 항렬을 쓰다 보니 이러한 오해가 더 심해진다. 실제로 시나위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신대철이 록씬에서 맹활약한 덕에 같은 장르를 종사하는 신해철과 혼동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방송 관계자들 역시 이러한 혼동은 마찬가지인지라 실제로 신인 시절 음악 방송 녹화를 마치고 내려오는 신해철에게 PD가 "아버지 잘 계시냐"라고 묻고, 그가 지칭한 아버지가 신중현이라는 걸 알게 된 신해철이 "우리 아버지 아닙니다"라고 답했음에도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하라며 어깨를 두드리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으로 신해철의 아버지는 약사였으며, 신해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신대철이 출연하여 둘을 혼동한 이야기[38]나 서로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39] 참고로 서태지와 6촌 관계인데 서로가 데뷔하기 전까지 친척 사이인걸 몰랐다. 신해철의 어머니가 갓 데뷔한 서태지를 보고 '저거 현철이 아니니?'라고 하고 나서야 친척인걸 알았다고 한다. 참고로 현철이는 서태지의 본명 정현철을 말한다.

이외에 그가 신문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참고하면 신해철이 어떠한 인물인지를 보다 더 잘 알 수 있다. 다만 해당 에세이가 1집 활동 중이었던 1990년에 연재되었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즉 데뷔한 지 채 5년도 안 된 그 당시의 신해철과, 대마초 사건을 한 번 더 겪고, 새 밴드인 넥스트와 비트겐슈타인의 해체를 겪고, 모노크롬으로 수준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다시 넥스트를 뭉쳐 로열필과 협연하고 데뷔한 지 20주년이 넘었으며(현재는 30주년) 사회운동가로서 발돋움했던 말년의 신해철과는 철저히 다를 수 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남긴 에세이도 참고하면 좋다. 링크 출처는 1998년에 출간된 <무라카미 류는 도대체?>라는 책인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무라카미 류가 화제가 되자, 류의 팬인 신해철이 그에 대한 생각을 에세이로 남긴 것이다. 글 내용에 그의 성장과정이 언급되어 있으며, 사회에 대한 관점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이 글을 발표한 후 신해철은 대마초 비범죄화를 주장했는데, 이 글의 내용에 비춰 보면, 대마초를 권장하는 의미의 비범죄화가 아니라,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자는 의미의 비범죄화임을 알 수 있다.[40]

그의 생전 마지막 트윗 (2014.10.21)

2.1. 사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해철 의료사고 사망사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신해철_묘지.jpg
신해철이 영면하고 있는 묘[41][42][43]
숨을 못 쉬겠어...
신해철의 생전 마지막 말[44]
2014년 10월 22일, 심장 이상으로 인해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장이 멈추었고 눈은 뜨지만 대화는 안 되는 상태라서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

KCA 엔터테인먼트가 23일 의료진의 소견을 인용하면서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하는 전문. 출처
신해철 씨가 입원 중에 있는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의 공식 소견으로 신해철 씨의 수술 경과 및 현재 예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해철 님에 대한 서울아산병원 담당의료진의 간략한 경과 보고〉
신해철 님은 2014년 10월 22일 수요일 오후 2시경 서울아산병원 응급실 내원. 내원 당시 무의식이었으며 동공반사 및 자발호흡이 없는 위중한 상태였으며, 혈압은 고 용량의 혈압상승제가 투여 되면서 유지되었음.
본원 도착 후 원인 파악을 위하여 각종 검사를 통해 복막염, 복강내고압, 심장압전(심장을 싸고 있는 심막 내부에 액체 혹은 공기로 인해 심장압박) 상태를 확인하고 당일 오후 8시에 응급수술을 시행하였음.
복강 내 장 유착 및 장 손상을 확인 후 장절제 및 유착박리술을 시행하고 흉부외과와 협진 하에 심막을 열어주는 응급배액술 및 세척술을 시행하고 개방복부상태로 수술 종료함.
수술 후 혈압은 안정화되어 혈압상승제 없이도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나, 아직 의식은 전혀 없고 동공반사도 여전히 없는 위중한 상태임.
향후 수일 내에 추가적인 손상 부위 확인 및 열어놓은 복강을 폐복 또는 부분 폐복을 위하여 추가 수술을 계획하고 있음.
향후 뇌손상 정도를 파악하고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과의 협진을 받아 노력하고 있으며 회복 정도는 장기간의 경과 관찰이 필요한 상태임.
앞으로도 저희 의료진은 환자의 빠른 회복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상이 병원 측에서 밝힌 신해철 씨의 현재 상황입니다.

신해철 씨의 갑작스런 응급 상황에 일부 확인되지 않은 추측성 기사와 루머들이 돌고 있어 부득이하게 재차 공식 입장을 전하오니 부디 그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사실인 양 보도하거나 억측성 얘기들은 자제해 주길 다시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계속되는 근거 없는 소문 기사가 확산되자 10월 24일, 소속사 측에서 다시금 공식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 당시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황이며 알려져있는 패혈증은 언급되어있지 않다. 5년 전 받은 위밴드 수술과도 무관하다고 밝혔다. 공개된 날짜별 내•퇴원 일지로 상태 경과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

그 뒤 뇌사에 준하는 상태라는 기사가 떴으며 # 뇌사라는 기사의 후속 기사도 떴다.

결국 그는 2014년 10월 27일 오후 8시 19분 끝내 세상을 떠났다. 이때 심장이상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알려졌었으나, 소속사가 최종 사인은 뇌 산소결핍에 의한 뇌손상이라고 밝혔다. #

2014년 10월 31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 미사가 진행되었다. 원래는 성당에서 치러야 하지만, 냉담자였고 또한 부검으로 인해 장례일정이 지연된 상황이라 부득이하게 아산병원 가톨릭 발인식장에서 치렀다.

그가 떠난 뒤인 11월 3일 진행된 국과수의 부검결과, 뇌 산소결핍에 의한 허혈성 뇌손상이 아닌 복막염 및 심낭염 그리고 이로 인해 합병된 패혈증에 가깝다는 주장이 나왔다.

유가족의 의뢰로 집행된 부검인 만큼 의료사고 논란이 종료되면, 소속사가 다른 발표를 내놓을 확률이 크게 올라갔다.

11월 5일 비공개로 천주교식 가족장을 치렀다. 가족들은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노래 같았던 민물장어의 꿈 대신 Here, I Stand For You를 대신 선곡했고, 실제 묘비에도 Here, I Stand For You를 새겼다.

신해철은 심정지 직전 심장제세동기를 이용한 심폐소생술 도중 왼쪽 눈에서 눈물을 흘렸고 그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2.1.1. 추도

사망 이후 정치인부터 전 밴드멤버들을 포함한 선후배 및 동료 뮤지션, 방송인, 작가 등 각계각층에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특히 맨 위에서도 서술했다시피 대한민국 가요계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조용필 또한 빈소를 찾아 훌륭한 뮤지션을 잃었다는 말로 신해철의 사망을 애도했을 정도였다.

팬들도 조문을 할 수 있도록 오후 1시부터 9시 이전까지 개방되어 있었으나, 조문 마지막 날은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시간제한 없이 조문을 허용하였다. 소속사의 발표에 따르면 총 조문객은 15,000여명이라고 한다. # 과거 신해철이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청취자들이 고스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조화를 바치기도 했다. # MBC라디오는 2014년 10월 31일 기준 과거 신해철이 진행했던 고스트스테이션 홈페이지를 통해 추모 메시지를 받고 있다. #

또한 생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고 언급했던 민물장어의 꿈이 7개 음원사이트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

한국프로야구/2014년 포스트시즌 플레이오프 1차전 SBS 중계 제작진은 중계 마지막 배경음악으로 이 날 작고한 고인의 대표곡 중 하나인 그대에게를 삽입하여 고인을 추모하였다. 영상

MBC 라디오와 SBS 라디오는 라디오스타였던 그를 기리며 28일 추모방송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과거 신해철은 MBC FM4U의 대표방송 프로그램이었던 음악도시의 초대시장이었으며, 고스트네이션으로 새벽 시간대에도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라디오스타로 맹활약했다. SBS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고릴라는 과거 신해철이 진행하던 고스트스테이션의 후신격 프로그램인 남궁연의 고릴라디오에서 따온 것이며, 남궁연은 신해철이 진행했던 고스트스테이션이 쌓은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였을 정도였다.

신해철이 고스트스테이션을 처음으로 진행했던 SBS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신해철을 기억하기 위해 이날 SBS파워FM과 러브FM, AM 등 라디오 방송 대부분을 신해철 추모 방송으로 진행된다"며 의견을 밝혔다. #

신해철이 처음으로 라디오를 진행했던 우리는 하이틴, 그를 대표하는 음악도시와 고스트네이션을 방송했던 MBC는 28일 방송되는 두시의 데이트오후의 발견, 배철수의 음악캠프[45]를 신해철 추모 방송으로 꾸몄다. 그 외의 방송에서도 신해철 개인에 대한 조의를 표하는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써니의 FM데이트에서는 지난 8월 출연하였던 신해철의 방송분을 들려주었고, 타블로의 꿈꾸는 라디오에서도 코너 하나를 취소하고 조의를 표하는 차분한 분위기로 방송을 진행했다. 이외에 "신해철이 DJ로 활약했던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을 긴급 편성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는 의견을 밝혔고 편성시간대는 과거 고스트네이션이 방영되었던 새벽 시간대가 유력하는 의견까지 흘러나왔지만 # 결국 분량 문제로 편성우 불발되었다. 대신 추모방송을 하는 프로그램에서 음악도시와 고스트네이션의 녹음분을 일부 들려주었다. #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는 임시DJ직을 마치며 청취자에게 건네는 작별인사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써니의 FM데이트는 배캠 임시 DJ 진행 1주일 후의 방송이어서 신해철의 마지막 라디오 출연분에 해당한다.

표준FM 고스트네이션과 같은 시간 대에 경쟁했던 FM4U 이주연의 영화음악에서는 11월 1-2일 이틀간 신해철의 인생을 조명하는 특집, 그가 음악을 맡았던 영화 '정글 스토리'의 김홍준 감독과 함께 신해철을 추억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인터넷 방송으로 시작한 고스트스테이션을 처음으로 정규 지상파 프로그램으로 방송하게 한 SBS에서도 호흡을 맞춘 프로듀서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뮤지션 DJ가 많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추모 분위기 방송이 이루어졌다. 김창열의 올드스쿨은 화요일 정규코너와 보이는 라디오를 중단하고 방송분량 2시간 전체를 신해철 특집으로 꾸며 진행했고, 고스트스테이션의 인디뮤지션 코너를 통해 신해철과 연을 맺은 장기하대단한 라디오에서 추천앨범을 정해 틀어주는 코너인 '기하네 집'에서 넥스트 1집 Home을 선정해 1주일 동안 들려주었다.

EBS는 연이어 세상을 떠난 두 뮤지션 신해철과 색소폰 연주자 정성조를 기리는 의미에서, 30일 12시 30분 스페이스 공감을 긴급 편성하고 방영하였다.

사회인 야구 이야기의 작가 유영태는 2014년 10월 29일 고스트스테이션을 패러디 한 사야이 스테이션이라는 회차로 추모했다.

SBS 한밤의 TV연예는 29일 장장 15분에 달하는 신해철 추모 특집을 마련하여 방영하였다. 신해철의 후배이자 절친한 사이기도 했던 진행자 윤도현이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전날인 28일에는 SBS MTV는 신해철 추모특집 REST IN PEACE를 마련하여 다양한 그의 음악들을 방영하였다.

MBC 라디오스타는 11월 1일이 기일인 유재하 특집을 준비하면서, 프로그램 말미에 신해철에 대한 추모 메시지와 함께 일상으로의 초대 뮤직비디오를 방영하였다. # 또한 MBC다큐스폐셜을 통해 11월 3일 신해철과 관련한 특집 다큐 '신해철, 마왕이라 불리운 사나이'를 준비하여 방영하였다.

KBS연예가 중계는 11월 1일 50여분의 방영분중 18분이 넘는 시간을 통해 신해철을 추모하고 그의 사망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조명하였다. 마찬가지로 신해철과 친분이 있었던 진행자 신현준[46]이 복받쳐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인터뷰에서 신해철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추모했다.

tvN은 과거 SNL코리아에서 호스트로 출연했던 신해철을 신성우 편에서 추모하며 당시 그가 유희열과 하며 남겼던 "아프지만 마세요."라는 말 등을 방영하였다. "당신의 열정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최고의 호스트로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그곳에선 아프지 마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애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대학가요제는 11월 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2014 대학가요제 포에버 콘서트'를 통해 고인을 기릴 예정이다.

Mnet은 28일 오후 11시부터 30분간 '굿바이 마왕' 특집을 편성하였으며, 30일 엠카운트다운은 생방송이 아닌 신해철의 앨범 메들리를 방영하며 추모를 이어갔다. 엠카운트다운 방영시 조연출의 "넥스트의 기타리스트가 되어 이 곡을 함께 연주하는 게 꿈이었다. 넥스트의 멤버는 되지 못했지만 엠카 조연출이 됐다"는 내용의 텍스트가 삽입되기도 했다. #

2014년 11월 2일엔 신해철이 마지막으로 출연한 JTBC의 속사정쌀롱이 방영되었다. 촬영은 10월 초에 이뤄졌지만 방영 이전 사고가 있어 계속해서 미뤄지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보고 싶다는 팬들의 요청과 제작진이 유족과의 협의를 하여 방영이 결정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해철의 음악이 곳곳에서 들려졌고, 방송 말미엔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와 함께 그에대한 팬들과 제작진의 추모 메시지가 방영되었다. 방송 중엔 신해철이 제작진이 가장 공들여 섭외한 MC라는 이야기가 진행자인 윤종신의 이야기가 있었고, 첫 출연진들 역시 신해철과 이런 저런 관계가 있어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올 수 있는 멤버들이었다. 신해철의 역할은 산만하거나 너무 깊어진 이야기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정리정돈. 방영 이전 속사정쌀롱과 관련하여 뒤풀이 장면이 공개되어 갓 친해진 장동민과의 격의없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4년 11월 7일에는 서강대에서 87학번인 신해철을 기리며 축제기간 추모공연을 하였다. #

이외 KBS 우리동네 예체능, MBC의 나혼자 산다,SBS 자기야 백년손님 등 여러 예능프로그램에서도 민물장어의 꿈이나 그대에게 같은 곡 등을 BGM으로 선곡하며 신해철을 떠올릴 수 있게 하였다.

12월 27일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밴드의 멤버들은 물론 신해철과 친분이 있던 뮤지션, 역대 넥스트 멤버들 그리고 신해철과 음악적 작업을 했던 이들이 넥스트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으로 추도 콘서트를 열었다. 본래 11월 말에 넥스트로 컴백하여 활동하고 12월 31일 콘서트를 예정해두고 있었던 것을 조금 앞당긴 것으로 게스트 보컬 출연진만해도 신해철과 사적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한 신성우, 신해철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엠씨더맥스이수, 신해철을 공공연히 존경한다 이야기해왔던 홍경민, 사적 친분은 물론 콜라보를 하기도 했던 김진표, 90년대 신해철과 함께 활동했던 김원준, 신해철과 김영석이 추천한 멤버들로 이뤄진 프로젝트 그룹 에메랄드 캐슬에서 보컬로 활동했던 지우, K2의 김성면, 신해철이 토이에 추천하고 또한 솔로 앨범의 프로듀스를 맡았던 변재원, 넥스트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으로 함께 보컬로 활동 하기로 했던 트윈 보컬의 한 사람인 이현섭,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로 활동하였던 크래쉬의 안흥찬 등이다. 또한 역대 넥스트 멤버들의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김영석, 김세황, 지현수, 이수용, 데빈, 김동혁, 쌩, 쭈니, 정기송, 노종헌, 김구호, 신지, 임동창, 신지우가 함께 한 것. 넓은 음악 스펙트럼 덕에 많은 뮤지션들이 3부의 구성속에 넥스트의 음악을 보여준 알찬 구성으로 좋은 반응속에 마무리 되어 1회 계획된 콘서트가 전국 콘서트로 진행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

이외 신해철의 유작 앨범에 실릴 것으로 알려졌던 '핑크 몬스터(Pink Monster)'가 수록된 베스트 앨범과 한정판 음반이 발매되어 수량이 부족할 정도의 인기를 끌었다.

2015년 10월 24일 토요일에 불후의 명곡히든싱어가 동시에 신해철 편을 방송했으며 1주기를 앞두고 후배 가수들과 그의 팬들이 고인의 노래를 부르는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2015년 10월 25일 추모식 및 봉안식이 25일 안성 유토피아 추모관에서 진행됐다. 그리움의 편지와 퍼플 리본 달기 등 식전행사에 이어 추모 미사와 추모사 낭독, 기제사 예식이 이어졌으며 유토피아 납골당에 안치된 유골을 야외 안치단으로 옮기는 봉안식과 장지 헌화식 등을 끝으로 자유 참배로 마무리 되었으며 고 신해철의 장례를 치를 당시 생전 고인의 뜻을 받들어 일반인들의 조문이 자유롭게 이어졌었듯이 추모식 역시 자유로이 이루어졌다.

2019년 10월 26일 MBC에서 방송된 놀면 뭐하니?의 '유플래쉬' 코너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히든 무대가 공개되었다. 미발표곡이었던 '아버지와 나 파트3'를 기초로 유재석의 드럼에 이승환하현우가 릴레이로 힘을 보탰다. 이승환은 '서태지와 이승환, 신해철이 함께 한 마태승 콘서트라고 팬들이 기획해서 성사될 뻔했던 공연이 있었다. 서태지의 설득으로 공연 참여를 결심했는데 일주일 쯤 있다가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이후 아내분을 뵈었을 때 공연이 결정되어 (이승환이) 참여하기로 결정했을 때 기뻐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내가 너무 늦게 결정했다는 미안함이 있었다.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음악인이었는지 다시 각인시켜주고싶다. 아이들에게 아빠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고 밝게 자라나게 해주고 싶다.' 라며 참여의사를 밝혔다.

이후 이승환에게 릴레이 바톤을 넘겨받은 하현우는 "초등학생때부터 (신해철의) 완전 팬이었다. 새 앨범 나오면 선물로 꼭 드리면서 뵙겠다고 했는데 앨범이 나오기 직전 선배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게 저한테는 되게 슬픈 일이었다. 지금도 공연장에서 선배님 노래를 부른다. 음악적으로 저에게는 선생님이자 락스타다." 라며 참여했다.

공연 당일 유재석은 추모의 의미로 유고스타 분장을 모두 지우고 검정색 정장을 입고 공연에 임했고 신해철의 생전 목소리와 이승환, 하현우의 연주와 코러스가 어우러진 공연은 많은 감동을 안겼다. 공연을 함께 보던 팬들과 그와 친분이 있던 연예인들은 공연 도중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쏟으며 그와의 추억을 기렸다.

이 회차 이후 놀면 뭐하니?에서는 그의 기일 근처 방영일마다 그의 노래를 오프닝으로 쓰고 있다.

2.1.2. 유명 인사들의 추도 및 추모

그는 음악인으로서 저에게 커다란 산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순수한 영혼과 진실된 의지로 우리를 일깨워준 진짜 음악인이었습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조용히 다가와 어깨를 다독여 주던 맘 좋고 따뜻한 형님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신해철이라는 커다란 이름을...
우리의 젊은 날에 많은 추억과 아름다운 음악을 선물해준 그 멋진 이름을 기억해 주실 겁니다.

항상 최고의 음악 들려주어 고맙다는
그래서 형이 멋지다는 말을 차마 다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그리고 모두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노래해주세요.
서태지, 서태지닷컴에 올린 추도문
실감은 안나고 가슴은 멈칫멈칫 거리고,
난 형한테 마음의 빚도 있고...
남은 가족분들은 얼마나 더 허망할까요?...
한국 록의 큰별이 떠나갔습니다.
해철이형 미안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윤도현
후배의 ‘삶’을
애틋해 하던 선배
동생의 ‘앎’을 기특해 하던 형.
‘사람의 삶과 죽음’을 들려주던
음악가
‘음악과 철학’이라 쓰고
‘신해철학’이라 읽어봅니다.
싸이
좋은 곳에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장기하
이제부터 형한테 잘하려고 했는데...
기회를 안 주네... 해철 형 편히 쉬어요.
윤종신
그대의 존재가 참 고마웠다.
잘 가, 해철 씨
진중권
다음 세상에도 내 친구
우리들의 친구로
다시 태어나주세요.
장동민
사진도 더 많이 찍고
얘기도 더 해볼 걸
형과의 기억을
더 많이 쌓을 걸
...
강남
누군가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가수를 꿈꿨고,
누군가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작가를 꿈꿨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고 존경하고 많이 의지하던
가수 신해철 씨가 이제 하늘나라로 갔네요...
뭐가 그리 급해서...
뼈에 사무치는 노랫말만 남기고 가셨습니까...
그곳에서는 아프지만 마세요.
김창열
1988년, 무한궤도로 만났던 신해철님.
그 때 그 모습 기억합니다.
비보에 가슴이 아프네요.
고인이 편히 쉬시길.
백지연
아무것도 모르던 꼬맹이가 형을 만난 이후, 이렇게 20년동안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멋진 후배가 되고 싶단 맘만 앞서서, 좋은 동생이 되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스럽고 죄송할 뿐입니다.
형한테 채 못 갚은 것들, 형이 그랬듯, 대신 후배들에게 베풀며 살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김동률
소중한 친구를 잃은 저녁입니다.
여러가지 생각으로 버겁기만 하네요.
배철수, 배철수의 음악캠프 오프닝에서
불과 몇 시간 전에 따뜻하게 손잡고 있었잖아...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 거지.........
형... 미안한데 눈물이 멈추질 않아...
그니까 한 번만.... 한 번만 더 얘기해 줘.......
정말 안 울게!!!!!!...
지현수(N.EX.T 키보디스트, 본명 주윤채)[47]
해철아, 사랑한다. 보고싶다.
남궁연, 히든싱어 신해철편에서
나의 힘들었던 시절, 형님의 노래 '날아라 병아리'를 들으며 위로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날아오를 그 날을 꿈꾸던 내게 친구가 되어 준 그 노래.
그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릅니다.
'언젠가 다음 세상에도 내 친구로 태어나 줘.'
내 마음 속 영원한 마왕, 그대에게...
유재석[48]
지구의 별이 되어 살다 우주의 별로 돌아가다
이승환, 하현우, STARMAN 中[49]
제가 아는 신해철씨는 불합리한 것에 앞서서 당당하게 맞서는 용기를 가진,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대선 때 유세하러 가는 곳마다 울려퍼지던 "그대에게"의 벅찬 음악은 제게 평생의 고마움입니다.
부디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
문재인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 같았던 '마왕'의 빈자리는 지금보다 살아가며 그 크기가 커져갈 것입니다.
신해철씨, 당신의 팬이었음에 행복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원순
저는 100분 토론에서 신해철 씨를 다섯 번 만났습니다.
나왔을 때마다 논란의 한 가운데 섰고, 그래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신해철 씨는 가수였지만,
어떤 주제를 놓고도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해서 논쟁할 수 있는 논객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욕을 많이 먹어 영생할 것이라고 농담으로 말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를 사랑했던 팬들에게는 마음속에서 영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석희
내 어릴 적 독특하고 특별했던 문화 아이콘 신해철,
그의 '민물장어의 꿈'을 부르며 영면을 기린다.
유지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우리들의 마왕
이외수
당신의 음악과 함께
청춘을 보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언제나 당신의 음악과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하겠습니다.
김혜수
“신 해 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으로
우리의 마음에
살아 숨쉬길...
심혜진
음악적 동료였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과 가치를
이야기할 땐 전우였다.
외면당하는 록 음악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했었던 동료와 답답한
사회현실을 가슴 아파하던 전우를
난 한꺼번에 잃었다.
냉철하지만 따뜻했고 논리적이지만
늘 행동하던 그는 지금 없지만
난 늘 그와 함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은미
집에 가는 늦은 길...
불현듯 읊조리는 일기처럼,
형의 음악은 하루의 위로였어
누군가의 음악이 삶을 위한
기도가 될 수 있다면
그건 형의 노래였으면 해요
보고 싶어요. 아련함으로...
반듯하게 남은 사람.
장진
신해철은
힘든 우리들에게 전하는
영원한 위로이자
용기와 희망이다.
엄홍길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많은 노래들을 따라부르며
우리도 꿈을 꾸었답니다
고맙습니다, 형... 나중에 봐요.
임창정
형님, 너무 감사했고 위에서는 매일 편안하게
잔치하시며 즐겁게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양동근
그는 빨리, 너무 빨리 지독하게 빨리 세상을 떠났다.
굿바이 마왕.
이젠 아픔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언젠가 다음 세상에서도 내 친구로 태어나줘
최훈, 2014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1차전 리뷰에서
그는 나에게 친동생보다 가까운 동생이었고,
나보다 나이가 어린 유일한 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글과 같은 바닥에서 나의 유일한 벗이자
하나밖에 없는 동료이기도 했습니다.
강헌

2.1.3. 의료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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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음악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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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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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199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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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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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ngs For the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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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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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베스트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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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199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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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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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3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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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데뷔 30주년 기념

Ghost Touch Part 2
(201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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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
(199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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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urn of N.EX.T Part 2: The World
(1995.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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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enca - A Space Rock Opera
(1997.11.05.)
5집

The Return of N.EX.T Part 3: 개한민국
(200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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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ame?
(200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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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집

666 Trilogy Part I
(2008.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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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Here, I Stand For You
(1997.02.01.)
선공개

I Want It All (Demo 0.7)
(2014.09.18.)
Cry OST

Cry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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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
(199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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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
(199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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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Is ALIVE
(199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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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Concert Album
(199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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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음악 외 활동

5.1. MC 활동

  • 신해철의 사이버 뮤직 스페이스 (1996~1998, Mnet)
  • 고스트TV (2003~2004, MTV 코리아[50])
  • 신해철의 대국민 고충처리반 (2006~2007, 채널블루)
  • 신해철의 100초 토론 (2007~2008, YTN 스타)
  • 신해철의 데미지 (2008, 코미디TV)
  • 인간실험극장 (2008, MBC 에브리원)
  • 안티 VS 스타 (2008, E채널)
  • 이색뉴스쇼 SMASH (2008, tvN)
  • 신해철의 스페셜 에디션 (2008~2009, MBC 에브리원)
  • 이야기쇼 두드림 1기 (2011~2012, KBS2)
  • 생방송 세계는 지금 - 〈신해철의 지구 뉴스〉 (2011, SBSE!)
  • K소리 악동 (2013, KBS1)
  • 속사정 쌀롱 (2014, JTBC) - 신해철의 생전 마지막 출연 방송이다.

5.2. 성우 활동


전문 성우는 아닌지라 단 3개의 작품밖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신해철 특유의 목소리와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단련된 연기력을 통해 꽤 준수한 퀄리티를 뽑아냈다. 2003년에 나온 길티기어 XX의 한글판 버전 테스타먼트 더빙은 신해철과 신해철의 팬 모두 인정하는 흑역사이지만 3년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는지 2006년 개봉된 아치와 씨팍에서는 보자기 킹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실제로 연예인 더빙의 좋은 예 중 하나로 뽑힐 정도였다.

5.3. 배우 활동

  •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1993) - 카메오 출연
  • 정글 스토리(1996) - 카메오 출연
  • 거짓말 폭탄(2005) - 주연
  • 안녕, 프란체스카(2005) - 조연, '앙드레 대교주' 역
  • 나의 PS 파트너(2012) - 카메오 출연

신해철은 의외로 영화와 드라마에 자주 출연했다. 물론 주로 카메오 출연이었지만,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 2에서는 '앙드레 대교주'역으로 출연하여 괜찮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다만, 앙드레 대교주가 작중에서 진지한 허당 캐릭터였는지라 그동안 마왕 신해철을 접했던 사람들은 물론 신해철의 팬들에게까지 신해철의 앙드레 대교주 연기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참고로 이 시트콤에 출연하기 전, 신해철은 싸이의 패션 센스를 가지고 자주 태클을 걸었었는데, 이 앙드레 대교주 분장을 본 싸이는 한동안 신해철을 엄청나게 놀렸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2014년 SNL 코리아 중 중2병 학교에 특별 출연했을때는 안녕, 프란체스카 때보다 더욱 발전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5.4. 라디오 DJ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타자 마자 바로 MBC 라디오 '하나둘셋 우리는 하이틴[51]'의 DJ를 장윤정[52]과 맡아 커리어를 시작했다.

가수로서 첫 앨범인 무한궤도의 앨범이 나오기전 라디오 DJ로서 먼저 데뷔를 한 것으로 신해철이 데뷰 부터 사망시점까지 이어졌던 라디오 DJ로서의 역할은 그 프로필에서 음악 관련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할만 하다.
"아이돌 DJ로서" - 하나둘셋 우리는 하이틴, 밤의 디스크쇼.

"전문 음악인으로서의 진중한 방송" - FM 음악도시

"전문 음악인으로 인디 음악등을 소개 해주는 희귀한 전문 채널임과 동시에
다소 가볍고 대놓고 마이너한 소재와 청자를 위한 방송" - 고스트스테이션
자기 색깔을 수십년 진득하게 유지하는 다른 DJ들과 달리, 신해철의 경우 그 색깔이 계속 바뀌며 중년이 넘은 상태에서도 오히려 새로운 "청취 세대"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방송

6. 논객 · 정치연예인 신해철

신해철의 100분 토론 출연 하이라이트 편집본

그는 100분 토론에 가장 많이 출연한 연예인이었다. (밑의 TV 출연 항목 참조). 100분 토론에 수차례 출연하여 대마초 비범죄화, 간통죄 폐지, 체벌 금지 등을 주장하였으며 100분 토론 300회, 400회 특집에서는 '최고의 비정치인 논객'으로 선정돼 참석하기도 했고 400회 특집에선 국회를 유해매체로 지정하고 뉴스에 내보내지 말자는 발언을 함으로서 비판을 이어갔다. 이러한 정황들로 봤을때 신해철은 진보적 자유주의, 리버럴적 성향을 보였다고 할수 있다.

이처럼 100분 토론에 출연하여 대마초 비범죄화, 간통죄 폐지(비범죄화)[53], 체벌 금지 등 자칫하면 수많은 안티를 양상해낼 수 있을 수도 있는 주장을 한 것과 관련하여[54][55]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현실적으로 바뀔 수도 없고, 질 수밖에 없는 문제에 왜 뛰어드냐고 주변에서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영악하게 지는 싸움을 피해가는 사람은 많습니다. 저는 지는 싸움도 때로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하였다. 출처

이처럼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주장이 일부 현실화되었다. 체벌 금지는 2010년 이후 각 지역 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함으로써 현실화되었고[56] 간통죄 비범죄화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개월 뒤 헌법재판소에서 간통죄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실현되었다. 결국 발언 당시에는 비난을 피할 수 없던 지는 게 당연한 3번의 싸움에서 2승을 거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 후보 지지의사를 밝히며 선거유세에 참여하였다.[57] 당시 TV 찬조 연설자로 나서기도 했는데 훗날 문성근은 “대통령 선거 TV 지원연설에서 대본 없이 20분간 할 말을 한 사람은 백기완과 신해철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출처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TV 찬조 연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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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 이후에는 삭발하고 추모 공연에 참석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03년에는 참여정부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에 반대하며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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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서면서 “깡패가 칼질할때, 나는 칼을 안 쥐었다고 하더라도, 뒤에서 칼 갈아주고, 심부름해주고, 뒤처리해준다고 해서 나는 책임이 없고 도덕적으로 깨끗한가? 설령 힘의 논리에 의해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더라도, 지금 당장의 국익을 위해 부도덕한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까지 한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씻을 수 없는 도덕적 부담감을 남기는 죄악을 저지른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

2004년에는 '체벌 금지 법제화 추진 모임'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학교 내 체벌 금지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해당 카페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훗날 제가 눈을 감을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음악을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체벌을 금지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힘을 모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단순히 체벌을 받는 학생들에 대한 동정의 차원이 아니라 체벌이라는 독버섯의 밑에 우리 시대의 거대한 부조리와 사회악의 상징들이 상상보다 커다란 규모로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파악하고 알리며 싸워나가달라.". 출처

이어 2006년에는 체벌 금지를 주제로 100분 토론에 출연하기도 하였는데 해당 토론에서 "폭력은 전염되면 점점 강해지고 그 효과는 약해진다. 폭력 이외의 대안을 먼저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캠페인은 2010년 10월 경기도교육청의 '경기학생인권조례' 공포를 시작으로 이후 광주광역시교육청, 서울특별시교육청, 전라북도교육청이 차례로 학생인권조례를 공포함으로써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출처

한편 2009년 2월에는 입시학원(하이스트)의 전면광고에 출연하였는데 이를 두고 이율배반적 행동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즉 평소 진보적인[58][59] 주장을 한 신해철이 어떻게 사교육 학원 광고에 등장할 수 있냐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와 더불어 신해철이 광고 슬로건인 "개인별 맞춤형 교육"이란 말을 진짜로 믿었던 것과 24시간 운영 학원이란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는 것은 본인의 사전조사와 주의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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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서 입장을 밝혔는데 해당 글에서 이 사건을 "왜곡의 메카니즘"으로 칭하면서 그동안 자신은 "공교육의 총체적 난국을 비판해 왔지만 사교육과는 거의 무관한 얘기였다"고 하는 한편 "신해철은 평소 교육에 대해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자세를 취했으니 ‘마땅히’ 사교육에 강경히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어야 한다"는 일부 언론 보도를 비판하였다.

사실 그는 공교육절멸론자였다. 이는 그가 최초로 주창한 이론은 아니고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주창한 것인데[60] 그도 이에 동의함을 늘 밝혀 왔고 미래에 공교육의 대안은 홈스쿨링과 사교육이 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즉, 오히려 사교육찬성론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싸이렌 음악원이라는 사교육업체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두 자녀를 모두 대안학교에 진학시킨 바 있고 모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공교육절멸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 적도 있다. 출처
신해철: "나는 공교육이 사멸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의료민영화는 반대해도 교육은 민영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현재의 공교육은 수습될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들었고. 수많은 정권들이 들어서서 입시 제도를 수도 없이 뜯어고치고, 엄청나게 많은 짓을 했는데도 그 누구도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도 성공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본다. 물신주의 패러다임 아래서는 교육 문제는 해결 안된다. 내가 너무 감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공교육은 지금까지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했다.

(중략)

사교육을 비난하는 사람들 중 과연 몇이나 사교육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교육은 무조건 악인가. 권력이나 부의 세습을 강화하고 빈자들을 고립시키는 대표적인 악으로만 이야기될뿐이지 사교육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공교육의 미래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앨빈 토플러가 이야기했다. 21세기의 조직 가운데 제일 먼저 사라질 게 학교라고. 우리는 학교가 소멸하는 미래를 생각해봐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학교가 나쁜 짓을 많이 한 나라에서는 학교를 빨리빨리 없애야 한다.

홈스쿨링이 빈약한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대단히 강력한 교육수단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경우도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사교육이 그런 진화 단계를 밟게 될 것이라고 본다. 사교육 시장이 동네 학원에서 거대 학원으로 진화하고, 온라인 툴을 갖추고, 공교육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고. 또 그 다음엔 같은 사교육 업자들끼리 경쟁을 통해서 가격을 밑으로 내리게 되고. 미래의 사교육은 저렴한 가격으로, 온라인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에게도 얼마든지 공급될 수 있는 형태로 재편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공교육이 빨리 몰락해야 한다는 게 제 사고방식이니 (나를) 과격하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공교육 불신에 대한 발언은 그가 싸이렌 음악원을 세우기 한참 전부터 해 오던 것이다. 초창기부터 라디오 등을 통한 그의 발언을 들어 온 사람이라면 이전부터 해온 새로울 것 없는 발언이었다.

한편 해당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정도 흐른 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출처
기자: 입시 위주 교육을 비판하면서 학원 광고에 등장하고 학원을 운영하는 건 어폐가 있는데.

신해철: 입시 위주 공교육을 비판했지, 지금껏 내 발언 중 사교육에 부정적인 시각은 없다. 학생 때부터 내게 학교는 시간 낭비였다. 중고등학교 때 수업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고 참고서로 공부했다. 인성적으로 감화되지 않는 선생들에게 고개 숙이는 위선도 짜증났다. 지식을 가르치는 전문가에게 '하드하게' 배우고 나머지 시간에는 내 생활을 갖고 싶었다.

기자: 사교육 과열이 가져오는 문제점도 있지 않나.

신해철: 사교육의 기능과 비용 문제를 구분 못한 것이다. 사교육이 악인 것은 가정경제를 압박하고 학생들에게 과도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교육 문제를 지적하려면 비용 문제를 짚어야 한다. 학원이 영세업에서 벗어나 전국 체인화된 대기업이 되면 박리다매가 가능하다. 입시 학원 광고를 한 것도 그 학원이 대형 체인이었기 때문이다. 앨빈 토플러가 21세기 소멸할 첫 번째로 꼽은 게 학교였듯이 난 공교육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학교는 대중을 통제하고 정권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

나중에 SNL 코리아에 출연해서 유희열이 후회하는 광고 없냐고 물었을 때 "아파트 광고를 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그 아파트에서 살 필요는 없지만 학원 광고는 자식이 학원 갈 나이가 돼서 같이 힘들어하게 되기 전까지는 안 하는 게 낫겠다"고 하기도 말한 바 있으며 김구라의 '진실의 순간'에 출연했을 때도 학원광고를 찍은 걸 후회하냐는 질문에 "내가 대처를 잘못 하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해도 변명 밖에는 안되는 상황이 되고말았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사교육비 때문에 학부모들이 허리가 휜다고 날 비난하지만 10년 후에 보자."고 하면서 또 앨빈 토플러를 인용했지만 이미 10년이 지났는데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북한 미사일 관련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는데 2009년 4월 8일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북한이 합당한 주권과 적법한 국제절차에 따라 로켓을 발사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축하한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었다.

이에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출처
"안보 이슈는 대국민 겁주기용으로 사용된다. 로켓 발사 상황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적법하다고 생각한 국가도 많다. 정보가 차단되니 대중은 바보가 된다. 내 의도는 '북한이 인민군복을 입은 늑대'라는 반공 포스터 세대에서 벗어난 사람들, 북한을 동포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표시였을 뿐이다. 보수단체도 애국한다고 뛰고 있으니 나와 방법이 다를 뿐 무시하지 않는다. 이런 글이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을 노무현 대통령 때 살았다. 집과 차는 한 단계 내려 못 살듯이 자유도 내려 못 산다."

그는 "북한이 합당한 주권과 적법한 국제절차에 따라 로켓을 발사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축하한다"고 하면서 북한의 미사일에 대해 축하를 했는데 합당한 주권과 적법한 국제절차는 논외로 하더라도 남한과 대치상황중의 있는 북한의 미사일이 과연 민족의 일원으로서 축하할 일인지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당시까지만 보더라도 북한은 김정일 세습정권으로 수십년간 독재를 통하여 북한 인민들을 옥죄어 왔고 대남적화전략을 방침으로 남한에 대한 군사적 도발도 이어왔다. 거기다 체제유지 및 대외적인 군사적 위시를 위해 핵실험 및 미사일 개발 등을 해 왔다. 이러한 국가의 미사일 발사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해명에 있어서도 황당한 주장을 했는데 "로켓 발사 상황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적법하다고 생각한 국가도 많다."고 했다. 도대체 지구상의 정상적인 나라 중 북한의 입장이 적법하다고 주장하는 나라가 몇나라나 있을까. 이 정도면 논리를 한참 벗어나간 해명. 나머지 해명 부분을 보면 발언의 자유를 말하고 싶었거나 보수성향들이 가진 북한에 대한 편협적인 생각을 비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해당 사건은 북한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를 긴장시킨 군사적 위협으로, 이런 사안 자체가 축하한다는 말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던 상황이며 누가봐도 북한이 비난 받아야할 행동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훗날 시간이 흘러 신해철의 정치적 자존심이나 중2병이 한풀 꺾인 후 이에 대해 간접적으로 후회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다만, 이 발언은 북한 체제를 옹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절반은 진심이고, 절반은 비꼰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링크
또한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해명한 바에 따르면 북한에서 발사한 로켓은 일본에서 발사한 로켓과 비교하면 성능이 매우 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발사한 로켓은 십 몇 톤의 짐을 공중에 부려 놓은 반면, 북한에서 발사한 로켓은 고작 100kg짜리 라디오 하나 내려놓은 정도였다는 것. 그런데 양쪽 모두 연료 주입에 수십 시간이 걸려, 군사용 무기로는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링크

즉, 북한의 로켓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난 일본 로켓도 이슈가 되지 못했는데, 북한의 로켓에만 반응하는 현실을 비꼬았다는 얘기다.

사실 이 해명도 궁색한 게 한국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위에 서술했듯이 북한과 휴전선을 두고 대치중이기 때문이다. 또 세계 모든 나라가 규탄하는 사안이기도 하고 국제정세를 긴장시키는 도발인데, 거기에다가 엄한 일본의 로켓 발사를 변명거리로 삼아 '일본은 해도 되고 북한은 하면 안되냐?'고 주장하는 것은 반일감정으로 물타기하는 수준의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정도면 논점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셈.

한편 이 발언에 대해 탈북자 단체에서 신해철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여 검찰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최종 결론은 무혐의였다.링크[61]

2011년 승승장구에서 "독설가로서의 나 때문에 음악가로서의 내가 죽었다. 이제 새로 시작할 것이다"고 말했다. SNL에 출연했을 때도 유희열이 욕설과 막말을 후회하느냐고 묻자[62] "누굴 가르치려고 들면 안 되는데, 기술적으로 서툴렀다."고 고백했다.

사망한 지 1년이 된 2015년 10월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JTBC 뉴스룸에 아내 윤씨가 출연했는데 손석희는 신해철의 죽음을 듣고 한 명의 음악가보단 한 명의 좋은 논쟁가가 떠났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내도 생전 남편이 손 앵커가 잘 이끌어주셨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번은 신해철이 한 손에만 하얀 장갑을 끼고 이대로 방송해도 되냐고 해서 그러시라고 했단다.[63]

신해철이 말년에 했던 인터뷰를 보면 신해철 본인은 이러한 사회적 이야기나 정치적 이야기를 하는 것 모두 음악의 일부이며 당연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Q.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A. 사회적 발언을 하거나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게 다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와 사회와 음악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음악이 이상해진다.

Q. 파장이 두렵지는 않나?

A. 안 두려운 사람이 어디 있겠나. 선의로 이야기 해도 반사돼 돌아오는 증오의 양이 너무 크더라. 하지만 그 때문에 가수 생명이 끝날지 모른다는 공포는 갖고 있지 않다. 물론 가족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있다. (사회적 발언이) 음악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20대 때 충분히 고민했다. 가수가 '저는 말 잘 못하고요, 그런 건 잘 모르겠고요' 하면서 음악에만 집중할 때 대중이 예뻐한다는 사실도 안다. 그런데 사회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연예인으로서 생명이 안전할 것이라는 보장 또한 없다. 설사 그런 보장이 있다 한들 모든 걸 내려놓으면 스스로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음악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2014년 7월 23일, 신해철 "대중에 봉사하고 싶지 않았다"

7. 다양한 경력과 에너지의 소유자

7.1. 서강대 중퇴

수포자 출신으로서 학력고사 수학 0점에 타 과목 최상위권이라는 기형적인 성적으로[64] 대학에 합격한 신해철은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대학 중퇴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떠드는 것처럼 명문학교 지향적인 현실의 작태를 비판하는 것 따위는 절대 아니고, 자기가 게으르고 학점이 안 돼서 퇴학 되기 전에 때려치고 나오는 명예로운 방향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학사경고를 1번만 더 받으면 퇴학이었다고 하며 이후에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을 주려고 했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당시 그의 지도교수가 말하길, "내 주변에도 12학기까지 학점이 1점을 넘지 못한 학생은 신해철이 유일했다"라고 했다. 본인 말로도 선동열 방어율급 학점이라고 했다. 원래 서강대학교가 공부를 매우 빡시게 시키는 대학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서강대가 빡센 것은 마찬가지지만, 1980~1990년대 당시엔 다른 대학들은 상대적으로 널널한 데 반해 서강대만 빡센 것으로 유명했다. 1980~1990년대는 명문대, 지방대 할 것 없이 데모로 인한 휴강,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취소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당시는 경제 성장기이자 호황이라 그렇게 놀면서 대학 생활을 해도 명문대 출신이면 대기업 몇 군데 씩은 복수 합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굳이 공부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때문에 서강대생으로서의 학교 생활은 음악인인 그에게는 안 맞았다.

위쪽에 링크되어 있는 신해철이 당시 쓴 에세이 1편에는 학업과 음악활동을 하느라 너무 바빴고, 1시쯤 활동이 끝난 후에 컴퓨터를 사용한 음악 공부 내지는 연습을 하느라 하루에 4-5시간 밖에 못 자고 9시에 학교로 향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에세이만 보면, 음악 활동으로 바빠서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신해철이 서강대 밴드부에 안 들어간 건(사실은 못 들어갔다) 위의 2.1 문단에서 설명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운동권에 약간 관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에 소수파였던 CA와 관련이 있었고 교련 반대투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NLPDR들은 어중이 떠중이 모여있어서 최루탄이 터지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도망가기 바빴는데, CA들은 소수정예로 전투력이 잘 다져진 투사들이어서 최루탄 연기를 헤치고 화염병과 짱돌로 응수하는 능수능란함이 있어서 더 괜찮아 보였다고 한다.

7.2. 라디오 진행

2014년 11월 3일 MBC 다큐스페셜 방송 중. 신해철의 음악도시 방송 음성이 나온다.

신해철 데뷔 직후 "우리는 하이틴"에서 장윤정과 함께 DJ를 맡았었고, 이후 밤의 디스크쇼 및 특히 전설적인 인기를 끌었던 "음악도시"의 "초대 시장"으로서 신해철은 DJ로서도 탄탄한 입지를 다졌고, 뒤이어 설명되는 "고스트 스테이션"까지를 언급해보면, 신해철의 생에서 "라디오 DJ"라는 위치가 얼마나 길고 중요한 것인지 드러난다.

그가 유명해진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65]이었다. 이전 큰 인기를 끌었던 "음악도시"등의 진중한 진행이 아닌, 특유의 "제멋대로 진행"으로 당시 기존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었다. 당시 신해철 본인은 존댓말을 썼으나, 심야방송의 특성상 존댓말을 생략하여 청취자들은 반말을 쓰는 형태. 그러나 전화 연결 등 일부 시청자에 한해서 대화를 나눌 때에는 신해철도 반말을 쓴다. 가식 따위 집어던져버린 사연들을 마구 소개하며,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모습에서 가히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 이전에 MBC FM의 신해철의 음악도시[66]로 전국 중고등학생들의 밤잠을 부족하게 만든 적이 있다. 오죽하면 한 중학교의 국사 선생님이 애들이 그거 듣느라고 수업시간에 존다고 성질을 냈다고 한다.

신해철은 자신의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인디 뮤지션들에 대해서도 아낌 없는 지원을 하고 있는데, 그의 라디오 방송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일반적으로 트는 노래는 외국계 밴드의 노래와 인디밴드의 노래다. 아무튼 더 나아가 인디밴드들을 게스트로 부르고, 아예 인디밴드들만의 인기 차트인 인디 차트도 진행한다. 이 인디 차트는 인디 계열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하기 때문에 이 인디 차트의 상위권에 랭크된 밴드는 이쪽 계열에서 나름대로 유명해진다. 또 자신의 라이브 공연에 인디밴드를 게스트로 부르거나 아예 밤에 전차 끊기는 시간에 콘서트를 시작해서 첫 전차 다니는 시간까지 인디 밴드들이 라이브를 하는 밤샘 공연 같은 것도 할 정도였다.

방송 시작 전에 홍대 모 클럽에서 번개가 있음을 공지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그 뒤 한 시간 동안 청취자가 들을 수 있었던 건 음악 뿐 시간에 맞춰 홍대로 가면 정말로 넥스트를 볼 수 있었고, 댄스클럽에서 신해철과 메가데스에 맞춰 부비부비를 추는 경험을 할 수도 있었다.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각종 변칙적인 선곡을 했는데 40분짜리 삼태기 메들리를 틀고 방송을 날로 먹는다든가, 한 방송에 같은 곡이나 같은 뮤지션을 왜 여러번 틀면 안 되냐며 같은 노래를 7번 틀어버린다든가. 한국 라디오 선곡의 불문율을 정면으로 깨는 전무후무한 구성을 많이 보여주었다.[67] 대표적으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를 듣고서는 완전히 꽂혀 1시간 동안 싸구려 커피 평론을 하며 3연속 틀어 제끼기도 했다.[68] 보통 라디오 프로그램이 오프닝 로고가 나온 후 오프닝 멘트를 하고 음악이 나가는 형태로 시작하곤 하는데 고스트스테이션은 바로 건너뛰고 고스 식구들의 방송 후기나 자신이 할 말을 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해외 밴드 하나를 집어서 방송 내내 트는 건 정리가 무의미하다. 유명한 해외 락 밴드는 거의 다 건드렸을 정도. 메탈리카 앨범 트랙리스트를 틀고 1시간을 날로 먹은 적도 아주 많았다.[69]

방송 형식도 인터넷과 지상파를 오가면서 갖가지 시도를 하였다. 방송 시간대가 심야이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하는 정기 전파 점검 때문에 방송을 쉬게 되면 인터넷으로 대피해 방송을 했다. 이는 지상파에서 폐지되고 난 이후 인터넷으로만 송출하며 복귀 때까지 버티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다. 자신을 비롯해 몇몇 음악가들의 방송 녹음본[70]을 자신의 인터넷 방송국에서 푸는 형태로 2010년대의 팟캐스트 방식과 가장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병원이나 개인 녹음실에서 편집 녹음한 내용을 방송국으로 전송해 틀게 했는데[71], 개인 장비를 이용해 라디오 방송을 만들어 본 경험들을 통해 개인 방송 장비가 방송용으로도 적합한 퀄리티의 결과물을 뽑아내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방송국이 자신들의 능력을 과하게 믿는다면[72] 미래에는 개인 방송들이 경쟁력을 갖춰 기존 거대 방송국들의 경쟁 상대로 떠오를 수 있다는 예측을 방송에서 했다.[73]

7.3. 신해철 닷컴 폐쇄사건

2011년 5월 15일에 한 회원이 신해철 닷컴에 다수의 여성 사진을 올려놓고 외모를 비하하자, 그 회원의 행동을 강간범이나 다름없는 짓을 저질렀다란 표현을 쓰면서 그 범죄의 장소가 다름 아닌 내 집이라는 것에 슬퍼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냐는 말과 함께, 비하의 목적으로 게재된 8명의 소녀들과 가족에 대한 사과 표시로 48시간 후 신해철 닷컴의 폐쇄를 명령했다.

5월 17일에 진짜 폐쇄, 정확히는 자유 게시판이 완전히 닫혀서 글을 쓸 수도 볼 수도 없다. 확실히 분노가 느껴지고 있다.[74]

7.4. 유사 나치 복장, 밀리터리 룩

1994년 넥스트 2집 활동 때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전차병 군복과 친위대 군복을 믹스한 듯한 스타일의 의상에, 왼팔에는 나치당 완장을 연상케 하는 빨간 완장을 착용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N.EX.T의 안티들이 N.EX.T를 까는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 후엔 이런 비판 여론을 인식하였는지 검정-빨강 베이스는 유지하였으나 조금 더 중세 판타지스럽게 재디자인 하였다.

다만 당시에도 복장만 그랬을 뿐, 나치나 파시즘을 옹호했던 적은 전혀 없었다. 훗날 진중권의 문화다방에 출연했을 당시 이에 대해서 다시 얘기하면서 나치의 사상이나 행동에 대해선 절대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깠다.

여담으로 이 검정-빨강 베이스의 넥스트 유니폼은 계속 바뀌어 오다가 훗날 다른 이유로 논란이 되었는데, 바로 넥스트 6집 활동 당시 복장이 촌스러워서 논란이 되었다. 2000년대가 패션 암흑기라 불렸던 만큼 넥스트도 당시의 괴상한 패션 스타일 유행을 피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에는 다들 패션이 이상해서 별로 이상함을 못 느꼈다가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촌스럽다고 놀림 받게 된 케이스다.

7.5. TOP밴드 코치 거부 논란

그의 괴짜 행위는 TOP밴드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패자부활전에서 부활시킨 밴드 번아웃하우스에게 맨처음 경연곡으로 레이디 가가의 'Poker Face'를 하도록 지도했으나, 불과 경연 1주일을 앞두고 느닷없이 카라의 '미스터'로 변경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번아웃하우스로서는 기껏 열심히 준비해왔던 곡을 하루아침에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터. 번아웃하우스는 경연곡을 'Poker Face'로 강행했고, 신해철은 일방적으로 코치 거부를 문자로 통보했다. 타협점을 보기 위해 번아웃하우스는 대화를 권했으나 신해철은 완강히 거부를 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시청자 간의 의견이 설왕설래하다. 강압적으로 지시한 신해철이 잘못했다는 편과 코치가 구상했던 방향을 따르지 않았던 번아웃하우스가 잘못했다는 편이 나뉘었다. 실제로 TOP밴드의 심사위원이었던 유영석은 "(신해철이) 아무리 싸가지 없는 이미지를 가졌다 할지라도 음악 경력이 20년이 된 뮤지션이다. (번아웃하우스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선곡와 연습 과정을 무시했으니 부족한 티가 날 수 밖에"라는 심사평을 했다. 전반적인 상황으로 봤을 때 큰 틀을 짜주지 않고 갑자기 경연곡을 바꾸고 제대로 연습을 이행하지 않았단 이유로 코치를 거부한 신해철의 잘못도 있지만, 번아웃하우스도 코치의 지도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잘못도 있다.

어쨌거나 경연을 앞두고 코치 거부라는 초강수 폭탄발언을 한 신해철의 행동은 두고두고 해당 방송을 본 이들에 의해 회자되고 있다.

7.6. 맥심 편집장 취임 취소

군대 간 남성들 최고의 구독서 중 하나인 잡지 맥심의 편집장으로 이미 취임했다 한다. 28일 맥심 신입사원 면접 현장에 참석도 했다니 이야기 끝. 맥심은 2010년 한국 라이센스가 종료돼 잡지 재창간을 준비하고 있다. 한때 사실무근으로 알려졌으나 2010년 03월 17일 텐아시아 인터뷰로 확인사살 인증. 앞으로의 맥심이 기대된다... 지만 결국 하지 않았다. 이건 구 맥심인 줄 알았더니 신 맥심(새로 라이센스 받은 출판사)이었다는 점이 강하게 작용한 듯. 신 맥심은 과거 기자들을 쓰지 못하여 퀄이 구맥심보다 떨어진다는 평이 초기에 많기도 했다. 구 맥심은 2010년 10월 소송에서 패해 잡지 접었다.

이러한 이유도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이 편집장을 맡고 허지웅이 부편집장 자리에 앉는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신해철에게 일종의 항명이 있었고(결코 예의바른 '의견제시'의 형태는 아니었던 듯하다) 결국 신해철을 얼굴마담으로써 쓸 거였다는 것을 알고 신해철이 분개하며 맥심을 그만두고, 소송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8. 신해철의 오덕력

생전에 게임이나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방송에서도 게드전기, 슬레이어즈,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짱구는 못말려, 닥터 슬럼프[75], 소년탐정 김전일, 천랑열전, 아름다운 그대에게, 슬램덩크, 고우영 삼국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아기와 나, 들장미 소녀 캔디, 디아블로, 골때리는 연극부 등의 서브컬쳐계 소재를 종종 인용하거나 언급이 나오곤 했다.[76] 절친한 남궁연의 증언에 의하면 집에 만화책이 3천 권쯤 있는 것 같다고 했으며 라디오에서 건담 프라모델 샀다는 자랑을 한 적도 있다.

PS2(후에 X-BOX로도) 정발된 길티기어 샤프 리로드의 오디오 트랙을 담당했으며, 캐릭터인 테스타먼트의 더빙도 했다. 특유의 저음에서 나오는 사악한 포스가 절절히 느껴진다. 물론 성우는 아니다보니 약간 미묘하다.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라는 사람도 있고, 테스타먼트가 나오면 아예 음소거로 게임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팬들 사이에선 좀 굴욕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평균적인 평은 '전투 대사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스토리 모드 대사는 영 아니다'. 명대사는 "너에게 주마!" 였다.

사운드트랙의 경우 원판과 비교해 들어보는 것도 재미. 원판을 듣고 '재해석' 한 것이 아닌 완전히 새롭게 만든 트랙이기 때문에 느낌이 꽤 다르다. 한국에서는 게임 한정판에 동봉하여 판매했고 일본에서는 아예 한국판 사운드트랙을 정식으로 출시했다. 다만, '인기가 있으니 정식 발매를 했겠지'라는 팬들의 생각과 달리[77] 현지 기존 팬들의 반응은 긍정 반 부정 반으로 갈린다. 캐릭터의 이미지와 동떨어지는 곡들이 많다는 것이 그 이유.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원판은 게임 설정 담당 및 게임 제작자가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의도적인 복고풍 곡조를 지향했고, 한창 밴드민주주의 실험하던 넥스트 5기 멤버 시절이다 보니 곡들의 퀄리티가 들쑥날쑥한 것도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튜브 등을 살펴보면 일본 외 타국가 길티기어 덕후들의 평가는 극상급이며[78] 일본에서도 초반의 부정적 평가와는 달리 판매량이 상당히 나왔고, 아크 시스템 웍스에서 대단히 만족했기에 이후 시리즈의 OST 제작을 요청했으나 자신의 스케줄이 빠듯해 거절하게 된다.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거절한 것을 후회한다고 나중에 밝혔다. 후에 출시된 엑스박스용 일판에서는 한국판이 역수입되어서 본체 언어를 한국어로 해놓으면 한글 텍스트, 한국어 음성, 넥스트 BGM으로 플레이가 가능하다. 단, 인게임 옵션이 아니므로 일본어 음성+넥스트 BGM 등의 일부 조합으로 플레이 가능한 타이틀은 PS2용 한국 정발판이 유일하다. 그런데 그 뒤 나온 음반의 수나 활동이 별로 없었다. 여기서 사용된 곡 중 일부분이 동일하게 5기시절 발매한 넥스트 5집에서 재활용되기도 했다(감염, Dear America, Laura,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79] 등). 여담으로 SBS 스포츠의 EPL에도 하프타임 때 이 사운드 트랙에 수록된 곡이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간혹 원판 사운드 트랙 곡도 나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방송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옛날 넥스트 3집 앨범이 발매 연기된 적이 있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건강 문제라든가 하는 식으로 발표가 났지만, 실상은 '김세황과 게임하느라 정신없어서' 였다고 라디오에서 밝혔다. 그 게임이라는 게 발매 이전 나왔던 워로드 체험판이었는데, 체험판에 50턴 제한이 걸려있어서 깨는 게 무리였던 것을(땅따먹기 게임을 50턴 안에 끝낼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끝까지 붙잡고 늘어져서 결국 엔딩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건강을 걱정하여 찾아간 소속사 매니저는 그러고도 재클리어를 위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신해철과 김세황을 보았고 디스크를 부숴버린 뒤 넥스트 멤버 전원을 감금하여 3집 앨범을 완성시키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PS2와 PSP를 소유했다고 밝힌 바 있다.

약간의 오덕성 소문을 추가하면, 가장 재미있게 했던 게임은 동급생. 일정 기간마다 한 번씩 클리어한단다.

차 트렁크에는 팬이 보내준 세라복이 있으며[80] 그러나 강호동의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아세요?"에 결정타 맞고 데꿀멍했다. 그래도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집 안에서 동물이 되면 된다고 소신은 굽히지 않았다[81].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AV 배우라 했다. 이유는 합법적으로 아내 이외의 여자를 안을 수 있어서라고 했으며, AV용 예명도 생각해 놨다고 했다. 방송에서 AV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다. 후배들이 집에 놀러와서 자기가 방에 없는 사이 컴퓨터를 뒤지다가 나와서 "형도 하세가와 이즈미 좋아하세요?" 라고 물어봤다는 내용이었다.

신해철과 스타크래프트는 꽤 인연이 깊다. 겜덕 신해철이 후술할 영국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접하지 않았더라도 자연히 했을 것이기도 하고, 후술할 저그의 해처리 때문에 신해철은 저그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처음 PC방에 갔을 때 약간 화가 났었다고 한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던 어린 학생들이 '야, 해처리부터 까'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지은 해처리는 신해철이라고 한다. 이건 뭐 '새로지은 해처리'는 예전 온게임넷의 게임캐스터 최상용이 챌린지리그에서 "새로 피는 해처리는 신해철이겠죠"라는 농담을 한 데서 따왔다. 참고로 라디오 방송에서 밝힌 내용인데 신해철은 스타크래프트의 발매 당시였던 1998년에 영국에 공부차 유학가 있었고, 스타크래프트의 해처리를 보고 "'하체리'겠지. 그래 하체리일 거야. 설마 해처리(해철이)일 리가 없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단다. 그러나 한국에 귀국해 스타크래프트 경기 중계를 보다 "해처리 터져요 해처리 터집니다 아 해처리 터졌습니다~!" 등의 중계에 아연실색해서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Starcraft Game Music Vol.1'[82]라는 한국 가수들이 낸 스타크래프트 관련[83] 앨범에서 저그의 테마로 'Zerg are coming' 이라는 곡을 직접 써서 부른 적이 있다. 가사 내용은 테란과 프로토스를 까는 내용인데 본인 말로는 자신이 기타를 쳐서 사운드가 시궁창인데 가사는 좋다고 했다.[84] 여담이지만 프로토스의 테마곡은 노바소닉의 'For Adun.'[85]으로 이 쪽은 비겁하게 튀지 말고 제대로 붙어보자며 테란을 까는 내용(...)[86]

DJ DOC가 케이블 TV 'e채널'의 '독한민박'에서 소개한 일화 중에도, 멤버인 정재용이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다가 저그 유저에게 "저기 해처리(Hatchery: 부화장) 있잖아, 해처리. 해처리 거기다 짓지 말라고. 해처리 빠개진다."라고 외치던 것을 공교롭게도 같은 PC방에 있는지도 몰랐던 신해철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뭐라고, 임마?"라고 발끈하는 바람에 난감했다고 했다.

9. TV출연


2014년 11월 3일 MBC 다큐스페셜 방송 중. 그의 100분 토론 방송장면과 아래 나온 악플진화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100분 토론[87]에 가장 잘 섭외되는 연예인. 다른 연예인은 찔러도 끝까지 고사하고, 신해철 본인도 한번 나가고 나면 다음엔 절대 안 나간다고 후회하곤 하지만 이내 100분토론 제작진이 찾아와 이빨 좀 까주면 어느새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출연하게 된단다. 의외로 귀가 얇을지도. 그런 그가 2008년 12월 18일에 방송된 100분 토론 400회 특집의 패널로 출연하였다. 이번이 무려 여섯번째 출연. 아마도 비 정치인중 최고의 논객으로 선정이라는 말에 넘어간 듯 하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무릎팍도사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백분 토론에 나갈 때마다 악플이 진화했다고 하는데
대마초 토론 이후: 신해철 대마초나 피워라
간통죄 토론 이후: 신해철 대마초나 피우고 간통이나 해라
체벌 토론 이후: 신해철 니 아들내미 딸내미가 대마초 피우고 간통하든말든 때리지 마라
특집 토론 이후: 신해철 네 자식이 대마초 피우고 간통하더라도 때리지 말고 혼자 영생해라[88]

정작 본인은 이런 리플을 재기발랄하다 하여 오히려 좋아한 듯 하다.

많은 인터넷 언론들이 그의 팬 사이트(신해철 닷컴) 혹은 방송에서 그가 한 이야기의 한 꼬투리만 잡아서 낚시성 기사를 쓰는 경우가 많으며, 그 때문에 기자는 아무나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그가 내놓은 고민은 '사람 얼굴을 못 알아봐요'. 안면인식장애가 있다고 한다. 방송국에서 손석희를 봤는데 '키 크고 안경 끼고 잘 생긴 사람 = 성시경'이라는 결론이 도출돼서 왜 얘가 인사를 안 하나 고민한 적도 있다고 한다.

가수들이 버라이어티 쇼에 나와서 흔히들 말하는 피에로가 되는 것을 보면 정말 불같이 화를 낸다고 하는데, 그런 그가 MBC 심야 시트콤인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충격적인 등장을 하기도 했다. 훗날 과거에 학옷 입고 춤췄다가 대판 혼난 싸이가 이를 추궁하자 그는 "시끄러!"라고 했다고 한다.[89]

아무튼 그의 연기는 회가 지나면서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긴 했으나 초반엔 상당히 발연기였다. 이 또한 팬들 사이에선 '마왕의 굴욕'이라 칭하며 서로 기회만 있으면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신해철과 팬들 사이에선 오랫동안 두고두고 회자되었다고 한다. 본인은 교양 프로그램 나오기를 굉장히 꺼리는 듯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기꺼히 얼굴을 비치곤 한다.


뜬금없지만 2007년 개그야사모님이란 코너의 마지막회에 회장님 역할로 특별 출연한 적이 있다. 5:33초에 신해철이 어~서~라고 대본대로 대사를 말해야하는 부분이 있는데, 많이 부끄러웠는지 어~류겐!이라고 외친다. 싸해진 현장과 그걸 또 능청스럽게 넘기는 신해철이 킬링포인트.

특이경력이 있다면 KBS 스타 골든벨 초대 골든벨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것. 현재 스타 골든벨과 다르게 초창기 스타 골든벨은 도전 골든벨과 포맷이 거의 같았다. 2011년 3월 26일부터 tvN에서 방송 예정인 서바이벌 프로그램 오페라 스타 2011에 출연했다. 심사위원들도 많이 아쉬웠다고 회고했다.

2011년 하순에 TV 출연이 잦았다. TOP밴드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승승장구에서 아내 윤원희와 함께 출연한 것에 이어 KBS 2TV 이야기쇼 두드림과 SBS E! 시간여행 메모리의 MC로 발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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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3년 8월부터 KBS 1TV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그램인 'K소리 악동'에서 코치로 등장했는데, 마왕은 어디로 가고 웬 후덕한 동네 아저씨가 나와서 이전까지의 신해철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였다. 2011년 승승장구에 출연했을 때는 동갑의 김승우와 비교해 어느 정도 동안이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후덕해지고 체격이 좀 큰 탓에 노안도 된 것이다. 즉, 김광규처럼 동안과 노안의 속성을 둘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김광규는 얼굴만 보면 동안이지만 탈모때문에 노안으로 보인다. 참고로 비슷한 나이의 뮤지션들과 비교해보면 6촌인 서태지보다 3살 형, 김종서, 이승환보다 3살 동생, 신승훈보다 실제로 2살 동생이다!

2013년 말에 MBC에서 했던 파일럿 프로그램인 '우리집 막둥이'[90]에 가족들과 출연했는데, (신해철은 이 프로그램에서 미니피그를 길렀다)집안 서열 4위에서 5위로 밀려날 것 같다는 소리를 했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파일럿 프로그램이라 그런지 2회만에 종방되었다.

TV는 아니지만 김아중이 나온 영화 나의 PS 파트너에 카메오로 잠깐 나왔다. 김아중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데[91] 노래는 본인 노래인 "일상으로의 초대". 신해철 본인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의 음반 작업에도 참여했다고. 그러고는 라디오 DJ로 또 나온다. 진행하는 프로그램 이름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뮤직 스테이션이다. 결혼식 파토 사건 이후 작곡가로 변신한 남주인공과 함께 방송 진행하다 방송사고가 터지자 급히 당황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던 일(DJ)을 연기해서 그런지 연기가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2014년 7월 5일에는 SNL 코리아에 출연하여 유희열에게 따귀를 맞았다. 상술했던 음악의 선후배 관계를 떠나 두 사람 각기 빼놓을 수 없는 음악도시 선후배이자 라디오 스타로 나름대로 괜찮은 캐미를 보여주기도. 특히 출연진 놀리기의 대명사인 SNL에 신해철이 출연했다는 데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다는 반응도 있었다. 괄목할 만한 건 약간 오버하는 면이 없잖아 있어도 연기력이 안녕 프란체스카 당시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아졌다는 점. 또 중2병학교에서 막판으로 나와서 인생이라는 이름의 과목을 공부 하고 있지라고 하였다. 마침 같은 회의 다른 코너인 극한직업 신해철 매니저 편에서 유병재가 악플을 단 초딩과 경찰서에서 말싸움을 하던 중 돌아가신 할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울면서 외친 "사람은 다 죽어!!! 사람은 언젠가 다 죽는다고!!!"라는 말이 약 3개월 뒤 갑작스러운 신해철의 사망과 겹쳐 보여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에 올라온 해당 클립을 보며 슬퍼하기도 했다.

같은 달 21일에는 비정상회담 3회 한국 대표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예고편 당시 엄청난 포스를 지닌 마왕의 출현을 예고했으나 방송 본편에서는 마실 나온 cute한 동네 아저씨로 컨셉이 잡혔다. 과거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본인이 진행했던 토크 프로그램에서처럼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병풍 논란 아닌 병풍 논란을 겪기도. 하지만 이후 조세호장미여관이 겪은 논란을 생각해보면, 신해철은 오히려 방송 프로그램의 성질을 잘 이해하고 출연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외국인 패널들에게 인생 선배로서의 좋은 충고와 교훈을 말해주며 엔딩 전의 발언은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9월 4일에는 라디오 스타에 노목들 컨셉으로 출연하게 된다. 그러니까 외모 리즈 시절에 비해 살이 쪄서 목이 없어진 가수들 특집으로. 실제로 SNL 코리아에 출연해서도 살찐 모습으로 웃음을 주었던 신해철인데, 같이 출연한 노유민의 역변에 다소 묻힌 면이 없잖아 있다. 역변의 아이콘 노유민. 일단 머리도 기르고 살도 꽤나 뺀 모습이어서 어쩔 수 없기도 했다. 대신 딸바보로서의 면모를 뽐내고, 아내 자랑을 하는 팔불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해당 방송에선 월간 신해철을 기획했었는데, 그걸 윤종신이 먼저 실행해서 아쉬웠다고 한다. 그래서 계간 신해철을 해볼까 생각 중이라고 했는데 사실 미스틱89에서 계간 박지윤을 실행중이다. 아무래도 이러한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에는 오랜만에 출연하는 것이라 방송의 트렌드 변화에 적응을 못해 쩔쩔대는 모습을 보이며 웃음을 주었는데, 혁신적인 방송의 선구자격이었던 신해철이 나이가 먹긴 했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주기도 했다.

신해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속사정 쌀롱에 출연했으며 사후에 그의 유작 중 하나로 조명받았다. 그의 죽음으로 방송이 잠정 보류되다가 결국 11월 2일 방송이 나왔다.

10.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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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평가 및 영향력

해철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글쎄요,
'작지만 속이 꽉 찬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을지 않을까요?
음악적인 모험 정신이나 욕심이 대단했던 친구다.
음악적인 대화를 많이 했는데, 나에게 묻기도 하고 내가 경청하며 배우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은, 훌륭한 뮤지션을 잃었다는게 안타깝다." (2014년 신해철 사망 직후)
- 조용필
실제로 제가 데뷔하기 전부터 해철이 형은 아마 재즈 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이런 명곡들을 만드셨고,
저도 그걸 듣고 자란 세대 중에 한 명이죠.
근데 아마 누구보다도 (제가 해철이 형한테서) 더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특히 가사 같은 부분은 제 마음을 너무 흔들어 놨었어요.
'음악도 음악이지만, 가사를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다.' 하는 게 너무 신기했었고...
(중략)
저도 그래서 "나도 이런 가사를 쓰고 싶다"라는 (생각의) 시작이 아마 해철이 형이었을 거예요.
- 서태지
저는 그가 진정 천재라고 생각했고, 마치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초월한 우주에 사는 사람이란 느낌?
이미 20대에 세상에 대해 통찰이 있었던 친구 같고...
- 이승환
신해철 선배님의 음악은 다른 노래에서 말하지 않은 말을 하고 있는 유일한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에 아직까지, 제 생각에는...
- 하현우
1990년대의 신해철은 ‘위대한 2인자’였다.
서태지라는 ‘언터쳐블’이 항상 앞에 있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결코 비관하지 않았다.
또 다양성의 공존을 중시했다. 록 진영이 폄하한 댄스뮤직 그룹들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바라봤다.
이 점이 동시대 다른 예술가나 경쟁자들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이다.

라디오 DJ를 할 때도 무명의 신인 앨범에서도 장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멀리 떨어진 핑크플로이드만 동경하지 않고, 앨범 한 장만 내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동료나 후배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뮤지션 이전에 인간으로서 높이 평가하는 점이다.
-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11.1. 프로듀서 신해철

생각보다 훨씬 많은 가수들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엄정화[92], 이승기[93], 싸이, 김동률[94], 문차일드[95], 변재원[96] 등이 있다.

프로듀서로의 신해철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독재자 스타일하고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는 후진 양성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며, 그가 프로듀싱하는 싱어 또는 밴드를 파트너로 대우한다. 그래서 앨범 한 장으로 최대치의 성과를 뽑아내기 보다, 그 가수나 밴드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생력을 키워주는 것을 지향한다. 대표적인 케이스 위에서 언급한 전람회, 그리고 그 개인적으로 흑역사가 바로 문차일드가 되겠다.

전람회 같은 경우 김동률이 대학가요제 등장부터 워낙 역량이 뛰어났기에 신해철은 음악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김동률의 음악적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나마 전람회 1집 이후에는 김동률이 스스로 프로듀싱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했기에 신해철은 뒤치다꺼리만 했다고 하며 이런 케이스를 프로듀서로 행복한 경우라고 언급했다.
"야, 돈 걱정은 너네가 하는 거 아니니까 그냥 해!"
전람회 1집, 2번 트랙 '여행'에서 브라스를 직접 써서 녹음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들 거 같다고 걱정하는 김동률과 서동욱에게.

정반대로 문차일드는 최악의 경우이다. 신해철은 남궁연에게 문차일드를 소개 받았고, 때마침 문차일드의 기획사 사장이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해서 그들의 음반 작업을 돕게 된다. 그 때 신해철은 조건으로 몇 가지 사항들을 요구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문차일드 멤버 스스로 곡을 쓸 수 있도록 악기 등을 포함해서 그들이 작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줄 것이었다. 후배를 사랑하고 키워주려는 마음이 선명히 보인다. 그러나 그 곡 작업의 결과가 좋지 않았고[97] 기획사 사장은 조급함에 (신해철이 가장 싫어하는) 작곡가랑 세션맨을 투입시켜버렸다. 이런 행동은 신해철의 밴드 음악에 대한 애정에 비춰보면 최악의 수였고, 신해철은 그 사장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물론 문차일드 멤버들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예를 들면 음악밖에 모르고 살던 어린 멤버들에게 PC방에 데려가 스타크래프트를 줄기차게 가르쳐줬다고 했다. 멤버 제이윤이 신해철 사후, 그를 추억하며 트위터에 글을 남겼다. 또 이러한 애정은 훗날 엠씨 더 맥스로 개편된 뒤까지도 이어졌다.

예시로, 본인의 홈페이지에 엠씨 더 맥스의 팬들에게 글을 남겼다. '엠씨 더 맥스 팬들에게 고함'이란 글에서 "이수가 오토바이 탄다는 사실을 어제 알았다"며 "오토바이로 많은 후배들을 잃었다. 당신들이 진정한 팬임을 믿는다. 데모를 하든, 집에 쳐들어 가서 바이크에 불지르든, 혈서를 쓰든 바이크를 뺏어라"고 말했다.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새끼"라며 "이수까지 바이크 타다 죽으면 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는데, 넥스트 공연 당시 코러스를 담당했던 여성 두 명이 버튼이라는 이름으로 데뷔를 했는데, 앨범 프로듀서에는 신해철의 이름이 올라갔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이 허접한 앨범에 모든 책임을 신해철에게 돌리듯 비판했는데, 정작 신해철은 꼴랑 두 곡 작업해서 줬던 것 뿐이었으며 한마디로 신해철의 이름을 팔아 먹은 것이었다.

불독맨션 이한철은 신해철이 자신의 앨범을 프로듀싱할 때 신해철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돈 많이 벌고 싶냐? 네가 하고 싶은 음악 하고 싶냐?"
신해철이 이한철한테 이 둘 중에 뭘 하고 싶냐는 말.

물론 이한철은 후자를 택했으며 이것이 자신의 음악적 방향에 영향을 끼친 것을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그가 주도적으로 컨셉을 잡고 신인 가수를 프로듀싱한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엄정화다. 신해철과 엄정화는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의 OST에서 프로듀서와 가수로서 정식으로 조우했다. 엄정화의 데뷔를 앞두던 199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섹시와는 거리가 먼 청순한 모습에 가까웠고, 엄정화의 소속사 측에서도 당시 대세였던 청순가련 컨셉의 여가수로 데뷔 앨범을 준비했으나 엄정화의 잠재된 섹스어필의 끼를 포착한 신해철이 소속사를 설득하여 기존 계획을 모두 뒤엎고 OST곡을 타이틀곡인 '눈동자'를 베이스로 섹스어필의 컨셉으로 방향을 수정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 실제로 청순한 이미지에 내성적인 성격으로 외적 부분에서 섹스어필과는 거리가 멀었던 엄정화의 잠재된 끼를 끌어내기 위해 신해철이 녹음실에서 윽박도 지르고 북돋아 주는 등 고생도 많았다고 한다. 덕분에 엄정화는 이 데뷔곡을 통해 당시에는 드물었던 섹시 컨셉의 여가수로서 포지션을 제대로 잡으면서 데뷔 때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컬트적인 인기를 모으며 섹시 디바로서의 가능성이 돋보였고, 결국 한국 가요계의 섹시 디바로 대성공하게 된다. 엄정화 본인도 훗날 '눈동자'라는 곡을 가수로서 컨셉을 잡아준 가이드라인 같은 곡으로 상당히 애착을 가진다고 회고하며, 신해철의 장례식 때에도 신해철이 아니었으면 가수 엄정화는 없었을 것이라고 고인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의 모노크롬 앨범이나 N.EX.T 시절 앨범을 보면 결코 저평가 될 수 없는 수준의 프로듀서가 바로 신해철이다. 독설에 가려져서 그렇지 음악성으로는 사실 현재도 적수가 없는 원탑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인디 음반 기획사인 싸이렌 엔터테인먼트(이후 루씨엔 엔터테인먼트로 바뀜)를 설립, 후배 양성에 힘쓴 바 있다. 스키조, 피터팬 컴플렉스, 뷰티풀 데이즈, 도그테이블, 윈터그린[98] 등 소속이었다. 특이하게 임요환의 그분인 배우 김가연이 이 회사에 있었었다. 문제는 크게 말아먹어서 빚더미에 올랐다고 하며, 현재 싸이렌의 이름은 음악원에 남아 있긴 하다.

밴드 피터팬 컴플렉스가 그룹 해체를 결심했을 때 이를 만류, 그룹 해체를 철회케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신해철은 이들의 앨범을 프로듀싱해 주었고, 피터팬 컴플렉스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지 신해철의 곡 '안녕'을 리메이크해 부르기도 했다. 곡 중반의 영어 랩 부분은 신해철이 담당이었다.

현재 그가 '조련'한 5인조 여성밴드 '스핀'이 앨범 작업 준비 중이다. 2009년 8월에 키보디스트를 영입하며 5인조를 완성, 거쳐간 사람들만 40명 이상에 지금의 멤버를 완성하는데 꼬박 8년이 걸렸다고. 참고로 과거 고스트스테이션 작가인 '양송이버섯'(은가은)이 보컬이다. 스핀은 넥스트 6집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현재까지 소식전무하다.

2014년, 스핀은 여전히 소식이 없다. 그리고 진중권의 문화다방 팟캐스트에서 2010년대에 6년 넘게 잠수를 타고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밝혔다. 다름아닌 자동작곡 알고리즘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신해철 특유의 SF적 상상력과 엔지니어링에 관한 높은 이해력으로 인해 작곡에 조예가 깊지 않은 개인이라도 적당한 느낌을 주면 그에 맞는 멜로디를 뽑아내는 알고리듬을 만드는 데 힘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충공깽. 아직까지는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완성시키지는 못했으나, 작곡 과정에 뮤지션의 기술적인 수고를 덜어주는 시스템까지는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장르든 자주 쓰이는 양식(소위 프레이징)이 있고 코드를 입력하면 반주를 자동 생성하는 알고리즘 이른바 '아르페지에이터'는 이미 한참 전에 개발되어 그냥 신디사이저나 미디 프로그램의 기본 옵션 구석탱이에 하나씩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신디사이저 덕후였던 신해철이 몰랐을 리는 없고, 뭔가 신해철스러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려고 했던 듯. 자동작곡 알고리즘 자체는 딱히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노래방의 '디스코' 리듬 변환이 자동작곡 알고리즘이다.

11.2. 악기 덕후 신해철

일단 생전의 신해철은 음악 뿐만이 아니라 악기에 관심 많은 걸로 유명하다.

신디사이저 같은 경우는 무한궤도의 대학가요제 출전 영상을 보면 신디사이저가 여러 대가 있는데, 이게 신해철이 신디사이저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었고, 당시 문화 개방도 안 되어 있었던 데다 당시에 한국에 정식 진출한 신디사이저 브랜드가 거의 없어서 구하기도 힘들었고[99] 당시 신디사이저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100] 그리고 몇 안 되는 신스팝 음악이었던 "그대에게"를 연주를 한 적 있고, 이후 신해철은 90년대 초반 한정으로 광범위하게 쓴 적 있다. 이 항목 어딘가에 있는 동영상을 보면 Waldorf(신디사이저 회사명)[101]라고 적혀있는 신디사이저를 봤을 것이다. 이 회사도 당시에 진짜 알기 힘든 회사인데도 불구하고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신디사이저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 한 사례로, 데뷔 이후 서태지가 샘플러 사용법을 배우기 위해 신해철에게 찾아간 게 둘 사이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일 정도로, 신해철의 선구자적 기질은 초창기부터 유명했었던 모양.[102][103]

그리고 신해철이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신디사이저는 'SEQUENTIAL CIRCUITS'社[104]에서 1986년에 출시한 'Prophet VS'[105]라는 모델인데, 당시 650만원[106]이라는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VS의 음색에 반해 2대씩이나 사서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영국 유학을 떠날 때에도 그 2대를 다 갖고 갔는데, 한 대가 영국에서 완전 사망했다고 한다. 자세한 건 2000년에 했던 인터뷰 영상 참고. Prophet VS 외에 2000년 당시 그가 사용했던 악기들(기타 포함)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아있던 한 대는 지현수가 넥스트 가입할 때 계약금이라며 선물로 줬다고 한다.

그리고 신디사이저 뿐만이 아니라 일렉트릭 기타에도 관심이 있었다. 무한궤도에서 그의 파트가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 였고, 대학가요제 출전 영상에서도 중반부 신해철의 잘 짜여진 기타 솔로를 들을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서강대 그룹사운드 '킨젝스'에 들어갈 때도 기타로 들어갈려고 했다가 피우던 담배를 기타에 꽂는 퍼포먼스를 했다가 선배가 건방지다고 해서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고, 원래 보컬이 아니라 기타리스트를 하려다가 손에 땀이 많이 차서 보컬로 전향한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신해철이 사용한 적 있는 기타들을 보면 스타인버거 GL-2T, 뮤직맨 EVH[107] (현재 판매되는 AXIS 모델의 전신 격인 모델) 등등이 있는데, 특히 저 두 기타는 중고 시장에서 나름 고가에 거래되며 명기로 대우받는 기타이다. 그리고 김세황이 넥스트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해철이 기타에 워낙 관심이 많았고 속주가 가능했던 김세황을 보고 '이 사람이 내가 찾던 기타리스트구나'하고 그의 역량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그 외 생전에 솔로 마지막 앨범에 아카펠라에 도전하기도 했었고 그리고 몇 안 되는 광범위한 신디사이저 이용자였다. 그대에게, 도시인 등 그 외 N.EX.T의 대다수곡들을 들어보면 신디사이저 음이 당시 다른 아티스트곡과 달리 튀고 화려함과 동시에 신디사이저를 평범하게 다루지 않는다. 신해철이 악기덕후란 소리와 신디사이저를 잘 다루기로 유명한 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11.3. 작사가 신해철

신해철 선배님의 음악은 다른 노래에서 말하지 않은 말을 하고 있는 유일한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에 아직까지, 제 생각에는...
- 하현우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만큼이나 가사에서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보통 한국 가요에서 많이 쓰이는 남녀간의 사랑에 국한되지 않고[108] 삶을 사는 이유, 존재의 자각, 자아성찰, 사회비판, 가족 등 세상의 수 많은 소재들로 가사를 쓰고 노래하였다.

이것은 솔로 2집부터 시작하여 N.EX.T의 초기 앨범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N.EX.T의 앨범명을 살펴보면 신해철이 생전에 음악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1집 Home에서는 현대 사회에서의 가정 변화와 인간 소외 현상을, 2집 The Being에서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3집 The World에서는 인간이 성장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 신해철은 다른 가요처럼 연애나 사랑을 읊조리거나 피상적인 사회 비판을 하기보다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철학을 논한다. 신해철의 진정한 재능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에 있으며 그 전달매체가 되는 작사에 관하여 작곡만큼이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신해철의 곡들을 살펴보면 이상주의적인 가사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위로가 항상 그 중심에 서있다. 그 가사들은 날아라 병아리에서처럼 작고작은 인연의 소중함을 가르치기도 하고 Hope에서처럼 말그대로 삶을 이겨나가는 희망과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다. 또한 Here, I Stand For You에서는 현대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변하지 않는 가치의 소중함을 되새겨주었다. 현재 30대 후반~50대 초반의 대한민국 국민의 가치관이 신해철의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유튜브에 올라가있는 그의 곡들엔 끊임없이 인생의 조언자로서의 고마움에 대한 댓글이 달리고있다.

이러한 작사 성향은 일본의 오자키 유타카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기존의 가요들의 전형적인 가사들과는 다른, 자아성찰적이면서도 다양한 주제를 바탕으로 작사를 하였으며, 당대의 젊은이들과 후대에 나타나는 뮤지션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11.4. 선구자 신해철

음악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부분에서 혁신적이고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했던 신해철인 만큼 여러 부분에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오늘날 K-POP의 기반이 되는 MIDI 음악의 선구자 겸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신해철의 솔로 2집 Myself는 신해철 혼자 작사, 작곡, 편곡, 악기 연주, 프로듀싱 등 대부분을 혼자서 한 원맨밴드 앨범으로도 유명하지만 동시에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MIDI를 적극 활용하여 작업 & 녹음한 역사적인 앨범이다. 게다가 이 앨범 또한 크게 히트했던 앨범이기도 하다. 이 앨범 이후로 대중들의 음악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낮아지고 다양한 신인 아티스트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훗날 문화 대통령이 되는 서태지강남스타일을 통해 월드스타가 되는 싸이도 신해철에게 MIDI 음악 장비 사용법과 곡 제작법을 배웠다. 그리고 신해철에게서 이와 관련된 지식과 기술들을 전수받은 서태지가 현재의 K-POP과 한국의 아이돌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과장 조금 보태서 신해철과 그의 실험이 없었다면 현재의 한국 아이돌 문화는 지금과는 모습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MIDI 음악 외에도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던 것으로도 유명한데, 대표적으로 1집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의 수록곡인 안녕을 통해 국내 최초로 영어 랩을 시도하기도 했고, 2집 수록곡인 나에게 쓰는 편지를 통해 한국어 랩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일상으로의 초대, 아! 개한민국 등 본인의 음악에 랩을 자주 넣었다. 그 외에도 말년에는 Catch Me If You Can(바퀴벌레)를 통해 사투리를 랩으로 사용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콘서트 중간 중간 각 멤버들의 개성을 뚜렷하게 나타내게끔 솔로 파트를 자주 넣거나, 개인기를 보여주게 하거나 정규 앨범에 Inst.를 넣는 등 서태지의 '다른 하늘이 열리고' 이전까지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보컬 뿐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했던 것도 신해철이다.

말년인 2014년에 들어서 나온 그의 음악들은 6년이란 긴 공백기동안 열심히 만들어진 음악들인 만큼 풍부하고 세련된 사운드를 갖추고 있었다. 한국 최상위 음악가인 신해철 답게 트렌드를 파악하고 이끌어가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항상 선구자로써 크든 작든 한국 대중 음악의 유행과 분위기에 영향을 주었던 신해철이 살아있었을 경우 현재 한국 대중 음악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달랐을 가능성도 크다. 또한 가끔씩 락 팬들은 신해철이 살아있었을 경우 국내에서의 락의 입지가 지금보단 컸을 것이라며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109]

신해철은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인터넷 방송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터넷으로 진행하는 라디오이긴 하지만, 라디오라는 점만 제외하면 사실상 인터넷 방송과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신해철은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시도해보다 훗날 인터넷 방송이 대세가 될 것이라 예언하기도 했는데,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신해철이 진행했던 고스트스테이션의 진행 방식과 그의 인터넷 방송 역사 및 인터넷 활용력등을 생각해보면 신해철은 0세대 인터넷 방송인이자 인터넷 방송의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신해철이 시도했던 인터넷을 통한 방송은 라디오 방송이었던 만큼 현재의 인터넷 방송과는 모습이 많이 다르긴 하다.

실제로 2015년, 신해철이 사망한지 1년 후 뒤늦게 밝혀진 신해철의 계획 중 하나가 팟캐스트를 통해 고스트스테이션을 다시 방송하는 것이였다. 그 후 인터넷 방송과 유튜브가 점점 대중화 되어 판이 커지고 인터넷 방송인 및 유튜버라는 직업이 대세가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신해철이 살아있었을 경우, 그 어떤 연예인 보다 빠르게 유튜브 및 인터넷 방송을 시작하고 이용했을 수도 있다.

2014년 생전 진중권의 문화다방에 게스트로 출연하였을때엔 당시 제작중이던 음악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때 신해철은 자동 작곡 프로그램[110]을 제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2015년 즈음 상용화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얘기했었는데, 안타깝게도 2014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 2020년대를 넘어서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신해철이 했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당 프로그램 시스템은 원하는 장르의 패턴을 조합하여 큰 틀을 우선 만들고 그 후 디테일한 부분은 작곡가가 직접 조정하는 식의 프로그램으로 추정된다. 어찌보면 한국 가요계는 물론, 세계적으로 큰 변화를 몰고 올 수도 있었던 셈이다.

또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프로그래머와 뮤지션의 경계가 사라지고, 그 프로그래머(뮤지션)이 만든 자동 작곡 패턴 기계를 구입하게 될 것이며, 그 패턴 플레이어는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비틀즈나 모차르트의 음악도 그 안에 모두 내장이 되어 있어서 그런 것들을 들려주고 이용자의 패턴과 청취 역사들을 학습하여 예를 들어 매 기상때마다 비발디의 사계스러운 변형 패턴들의 매번 다른 곡들을 연주해서 들려주는 식의 시스템도 등장할 것이라며 예언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아예 프로와 아마추어, 대중의 경계 자체도 사라질 것이며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는 시대가 올 것이고, 그것은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실현할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하였다. 가장 뛰어난 수준의 인터넷 환경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1.5. 저평가

국내 최초 MIDI를 활용한 앨범 제작, 국내 최초 영어 랩, 국내 홈 레코딩 방식의 시작 등 많은 업적이 있고 싸이, 서태지 등 많은 국내 최정상 가수들의 스승이자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별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저평가 받는 가수이기도 하다.

이는 신해철이 인기나 유행에 매달리지 않고 꾸준히 새로운 방식의 음악을 실험했던 것도 있지만, 2000년대 들어서 그가 정치적인 발언을 많이 함에 따라 언론이 신해철을 국민 관종으로 만들며 영향력을 낮췄던 것도 크다. 신해철은 노무현을 지지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당연히 노무현과 사이가 안 좋았던 언론들은 신해철을 공격하고 신해철의 말과 행동을 왜곡하며 논란을 만들어냈다. 물론 신해철이 스스로 만든 것도 없지는 않지만 많은 말과 행동들이 완전히 왜곡되었던 것이 크다.
세상이란 게 하나의 연극이면 악역이 있어야 하는데…그 정도 악역 내가 하지, 보람만 있다면….
근데 그거를 되게 '''보람 없이 쓰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착한 신해철 아니어도 좋다."라고 얘기하는 게
'나란 사람의 인격과 이미지를 만신창이로 다뤄도 좋다'라는 얘기를 한 건 아닌데….
모든 말이 왜곡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는….
2011년 2월 16일 SUPER JUNIOR선견지명 中

또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등재되면서 음악 활동 자체가 힘들었었다. 게다가 2009년에 노무현세상을 떠난 충격과 그로 인한 건강 악화로 5년 정도 칩거를 했었는데,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중들 사이에서 잊혀지기도 했었고 막 복귀를 하려던 차에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기에 다시 대중들에게 가수로써의 모습을 보일 기회가 그닥 많지 않았다.

게다가 보컬 능력에 대해서도 신해철 까들이 아주 오랫동안 '신해철은 노래는 못 부른다. 보컬 능력이 떨어진다.'며 계속 저평가를 했었는데 이게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아서 보컬 능력마저 저평가 받고 있다. 물론 2000년대 중후반부터 신해철의 목 상태가 악화되어 노래 부르는 것을 힘들어하긴 했으나[111] 절대 다른 가수들에 뒤쳐지지는 않았다.

12. 팬덤

신해철의 팬덤을 부르는 이름은 철기군이다.

철기군이라는 이름은 신해철의 예명이자 별명인 Crom과 연관이 있다. 이 Crom은 올리버 크롬웰에서 따온 예명인데, 올리버 크롬웰의 마지막 까지 곁을 지켰던 정예부대가 철기 크롬웰의 철기군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따와 '크롬웰의 철기군'이 아닌, '크롬(신해철)의 철기군으로 하자고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철기군 사이트도 있는데, 비공식 팬사이트이지만 신해철은 이곳에 그대에게 Reboot the Nation Ver 1.0의 파일을 업로드 하기도 하는 등 신해철도 이 사이트를 자주 이용했었다.

고스트스테이션 청취자 한정으로는 식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12.1. 팬들과의 관계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저랑 길게 얘기를 안 해봤거나, 혹은 같이 술잔을 맞 부딪혀본 적이 없는 분들이지만...
술잔을 평생 수 천 번 마주치고도 전혀 쓸모없는 인간관계도 세상에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하고 저 하고는 대단히 특수한 관계의 친구 사이라고 생각해요.
그니까 집에 가실 때는 해철이네 파티에 들렸다가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가시면 되고요.

그리고 뭐 20주년이라고 해가지고 특별히 막 이렇게 시간 내고 막 이렇게 마련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은데
30주년도 합니다. 10년 뒤에 하고...
그리고 10년 전에 여러분들께 드렸던 약속을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드리자면,
저는 절대로 은퇴하지 않습니다.

삶의 어느 순간에서 저나 넥스트의 음악이 여러분들에게 위안이 되거나, 위로가 되어준다면 좋은 일이고
그냥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지금은 그렇게 자주 찾지 않는 친구들처럼
그렇게 CD 케이스에 먼지가 쌓이게 되면 그래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저는 이 자리에 늘 서있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여러분들 사정이 허락할 때 저에게 돌아오시면 됩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옛날처럼 음악가가 대우받던 시대는 지났고...
음악으로 돈을 벌어서 또 뭔가를 해보려던 그런 꿈을 꾸던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여전히 노래를 하고, 앞으로도 노래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없다면 방구석에서 혼자 음악을 만들고 나 혼자 듣고 그리고 던져두고 버려두겠지만,
저는 CD라는 게 없어지는 마지막 그날까지 앨범을 내고
CD라는 게 없어진 뒤에도 음악을 만들고 여러분들에게 다가설 방법을 다시 찾아낼 겁니다.
잘들 사시고, 행복하세요.
2008년 신해철 데뷔 20주년 콘서트 中

팬들과의 소통이 활발하기로 유명했다. SNS와 고스트스테이션등으로 굉장히 많은 소통을 했으며 조언을 바라는 팬들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거나 진지하게 고민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쇼케이스나 콘서트 등에서도 팬들과 함께 제창을 하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2014년 솔로 6집 쇼케이스에서는 감격하여 우는 팬들을 안아주기도 했다. 그만큼 팬들의 신해철에 대한 충성도는 대단히 높았다. 이 때문에 신해철이 사망했을 당시 많은 팬들이 굉장히 슬퍼했다. 신해철 사망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신해철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다.

13. 특이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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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루머 및 오해

  • 머리의 뱀 문신은 이명박을 겨냥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추모 무대에 삭발과 함께 뱀 문신을 하고 등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의 멸칭인 쥐명박에 빗대어 '뱀은 쥐를 잡아먹는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명박에 대한 분노를 담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딸의 태몽이 구렁이었기에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뱀 문신을 새긴 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신해철은 이명박을 싫어했던 게 사실이고, 삭발을 한 것도 노무현의 추모에 대한 의미가 맞다고 했지만 그러면서도 쥐명박과 같은 멸칭에 대해서는 외모지상주의에서 비롯된 외모를 비하하는 행위는 상대가 누가되었건 옳지 못하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으며, 거기에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몹시 불쾌해 했다.
    정말 경멸했다. 사람로 비유하는 건 외모 비하고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다.

    전두환·이순자를 대머리·주걱턱으로 말하는 건 대중 탄압에 대한 반감이 있기 때문이다.

    루키즘(외모지상주의)은 기본적으로 옳지 못한 태도다. 그것까지도 좋은데, 왜 거기에 나를 끌어들이나.
  • 돈이 많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나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 자라 90년대에는 신해철의 재산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유학 이후에는 재산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인 스스로 자신은 집도 차도 없다고 했으며, 음악 학원 사업 실패로 인해 꽤 돈을 버렸고, 외압으로 인해 수익이 적었다고 한다. 다만 사후에 알려진 바로는 저작권으로 벌어들이는 수익만큼은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벌어들인 돈 대다수를 음원 작업하는데 쏟아부었다고 하는데, 일단 신해철은 아내와 아이들을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생활비를 걱정하게 해가면서까지 음악에 돈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112] 즉 먹고사는 데 부족함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말년에는 건강 악화로 인해 돈도 많이 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며, 외압으로 인해 제대로 된 활동을 못했던 점, 운영하는 회사와 학원은 적자에 (사실인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보증을 잘못 서서 빚이 2억이라고 발언한 적도 있기 때문에 더욱이 위상과 유명세에 비해선 부유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 가부장적, 폭력적인 사람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신해철은 오히려 애처가였으며 가부장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노래들 중에서도 가부장을 디스하는 곡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아! 개한민국'에는 '계집과 새끼들 그 위에 해묵은 가부장의 논리로 군림한다.'라는 가부장을 디스하는 가사를 찾을 수 있으며, '오버액션 맨'은 대놓고 가부장과 데이트 폭력을 비꼬는 노래이다. 그는 결코 가부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고스트스테이션 진행때에는 자신이 플레이 보이라며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차며 상처를 주었던 한 시청자의 사연에 대해 "상대방에게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 헤어지더라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게 해주어야 한다."며 충고하기도 했으며, 데이트 폭력을 비판하는 청취자가 "애인이 폭력을 가한다면 3번 이상 용서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내놓자 "왜 3번이죠? 그럼 한두번은 실수로 때릴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요?"라며 단 한번도 폭력을 용납해선 안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 호색한이다?
    많은 여자를 안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100분토론에서 간통죄 폐지를 주장한 데다가, 한 방송에서의 발언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의 무라카미 류에 대해 개인의 감상을 담은 에세이를 읽어보면 실제로는 여자 경험이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섹스, 마약 두 가지 모두에 탐닉하지 못했다. (중략)

    내가 여자를 알 때는 이미 스타가 되어 버린 후였고 남들에 의해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경험의 폭이 유달리 좁았던 것이다.



  • 마약 합법화를 주장했다?
    신해철이 마약 합법화를 주장했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마약 합법화가 아닌, 대마초 비범죄화를 주장하였다. 즉, '마약' 전체가 아닌 '대마초' 하나만 '합법화'가 아닌 '비범죄화'를 주장하였다.[113] 게다가 이것마저도 대마초를 권장하는 의미의 비범죄화가 아닌,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 하자는 의미의 비범죄화였다. 따라서 마약 합법화를 주장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또한 그는 대마초는 백해무익하다며 크게 후회했고, 대마초가 비범죄화 되더라도 다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스스로들 알고 있는 듯했지만 음악에 임하는 자세는 확실히 그전보다 못했다.

    이 무렵 특히 나는 음악적으로 한계에 부딪치는 느낌이었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한 무력감에 서로 잡히는 듯 했다.

    정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당시의 심정이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눈을 돌렸던 게 대마초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귀를 뚫리게 하고 자신의 능력 이상의 음악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대마초를 피운다'는 가요계 주변의 이야기를 미친 소리라고 치부했고,

    대마초를 하는 음악인들을 쓰레기 취급을 했던 내가 말이다.

    음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나는 당시 '국악을 하는 사람들은 목청을 틔우기 위해 똥물까지 먹는다는데 대마초를 못할 이유가 어디있겠냐며


    대마초를 하고난 느낌은 역시 백해무익하다는 후회 뿐이었다.

    뉘우침과 회한이 엄습할 무렵인 지난해 10월 중순 나는 대마초 흡연으로 불구속 입건되기에 이르렀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게 아니구나 하는 뼈저린 자성을 하며 또 한번 울음을 삼켜야 했다.





15. 저서

  • <신해철의 쾌변독설> , 부엔리브로 , 2008년 3월 7일[114], #
  • <마왕 신해철>, 문학동네, 2014년 12월 24일, #

16. 관련 서적

  • 권유리야 外 다수 <인간 신해철과 넥스트 시티>, 문화다북스, 2015년 10월 21일[115], #
  • 고종석 外 다수 <신해철 다시 읽기>, 한울, 2016년 1월 5일 / 2018년 11월 1일 재출간[116], #
  • 강헌 < 신해철(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 >, 돌베개, 2018년 3월 30일[117], #
  • 지승호 <아, 신해철!>, 목선재, 2019년 10월 27일[118], #

17. 여담

[ 프로필 펼치기 · 접기 ]
* 어렸을때 꿈은 번데기 장수, 개그맨이었다고 했다. 아주 어린 시절에 골목길에 번데기 장수가 오는 소리가 나면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한 다음에 바로 달려가 사 먹었다고 한다. 실제로 학교에서 장래희망이 번데기 장수라고 해서 잠시동안 왕따가 됐었다고 한다. 또 남을 웃기는 것을 좋아해서 개그맨 시험을 준비하기도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 자신의 직업을 '사기꾼'이라고 기재했다.
  • 좌우명은 '뭔 놈의 이름이 왼쪽 따로 오른 쪽 따로인 경우가 있냐?'
  • 인생 모토는 '걸리면 뒈진다'
  • 취미는 사기 쳐 먹을 자료 수집, S%& or #%X.,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분석, 고찰 및 조언(=사기),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 괴롭히기(저항해도 괴롭힘)이며 아주 가끔 시간 나면 음악을 한다고 한다.
  • 용돈은 하루 2만원이면 충분하다고 하는데 정작 비즈니스 때문에 한달 지출액이 2,000만원이 넘는다고 하였다.
  • 좋아하는 여성 스타일에 대해 '우체통에 치마만 두르면 다 여자로 보임.'라고 기재하였다. 그 직후 '호불호가 명확하며 의사표시 분명히 하는 '여성'들'이라고 적었으며, 싫어하는 여성 스타일에 대해서는 '뜯어고친 외모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 경제력을 가지려는 노력은 없고 남자 한테 얹혀가려는 스타일'이라고 기재하였다.
  • 좋아하는 남성 스타일은 '두뇌 있으나 잔대가리 굴리지 않고 시원한 데가 있는 약간 양아 스타일'이라고 기재하였으며, 싫어하는 남성 스타일은 '여자한테 명령조로 말하는 게 지가 뭐 잘나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애송이들, 그러다가도 센 상대 만나면 겸손한 척 하는 쓰레기 새끼들'이라고 기재하였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 활동 당시 발매한 곡 중에는 가부장제나 데이트 폭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오버액션 맨'이라는 곡이 있다.
  • 시간이 나면 주로 책을 본다고 한다.
  • 소유 음반량은 200장 정도의 옛날 빽판, 100장 정도의 원판, 몇천장 되는 CD가 있으나 워낙 함부로 다루고 인심 좋게 남들 막 빌려주는데다가 런던과 뉴욕에 흩어져 있어서 정확한 갯수는 모른다고 한다.
  • 소유 장서량은 3,000~4,000권 정도 된다고 한다.
  • 좋은 영화의 기준은 'UFO외계인이 얼마나 많이 나오나?'라고 한다.
  • 식성은 '사람만 빼고 다 먹음.' 단, 수제비는 아픈 기억이 있어서 사절한다고 써놨다.
  • 흡연량은 와이프랑 붙어있는 날은 1개피, 작업하는 날은 2갑.
  • 주량은 막걸리 - 못마심, 소주 - 2잔 이후 엄마 이름 기억 못함, 맥주 - 배불러서 안 마심, 백세주 - 5잔 이후 아빠 이름 모름, 와인은 우아한 척 꼴갑하는 넘들 보기 싫어서 안 마신다고 한다.
  • 음료수는 스파클링 워터, 홍차, 콜라, 녹차를 자주 마신다고 한다.
  • 좋아하는 색상은 블랙 or 레드, 혹은 블랙 and 레드, 때로는 퍼플.
  • 가장 처음 구입한 앨범은 딥 퍼플의 "deepest purple"
  • 문신은 무서워서 못하고 판박이 스티커를 붙이며[120] 귀걸이는 뉴욕에서 데빈과 귀를 뚫으러 갔다가 무서워서 혼자 도망쳤다고 한다.
  • 아끼는 물건은 거의 없다고 한다.
  • 향수는 여성은 에스테로더 뷰티풀, 남성용은 캘빈의 이터니티를 좋아하나 정작 신해철 본인은 향수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팬들이 선물해 준 향수만 백여개 쌓여있다고 한다.

  • 중학교 2학년 즈음 측정한 IQ검사에서 IQ가 150이 나왔다고 한다. 신해철 본인은 '중학교 시절 정신 없는 음악 소리에 묻혀 공부를 했는데도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이 순전히 IQ 덕분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 그의 외할머니의 아버지, 즉 외외증조부는[121] 1919년 3.1 운동 당시 수원군 성호면 오산리(현 오산시 오산동)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복역한 이성구 선생이라고 한다.
  • 솔로 음반, 넥스트 음반, 무한궤도 음반, 비트겐슈타인 음반, OST 음반을 모두 포함하면 약 822만 장 정도 팔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한 정보는 파악하기 힘들다.
    •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음반은 N.EX.T 정규 1집 Home으로 102만 장이 팔렸다.
    • 50만장 이상 팔린 음반은 N.EX.T 정규 2집(80만), 3집(71만), 4집(53만)과 솔로 1집(87만), 2집(83만)이며 OST 음반인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와 '정글스토리'의 음반도 각각 63만, 53만 장이 팔렸다. 갹 70만장이 팔린 Here, I Stand for you를 포함해 계산하면 662만장이므로 나머지 앨범을 포함하면 822만장정도 팔렸다는 게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 Into the Arena (2002년 붉은악마 주제곡, 작곡, 편곡: 신해철) 월드컵 시기만 되면 쉽게 들을 수 있는 "대~ 한민국! 짝짝짝짝짝"의 음원 소유권자이다. # 사실 신해철이 만든 음원 중 널리 쓰였지만 대중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대한민국"을 외치는 소리인데, 신해철은 2002년 당시 이 음향을 녹음하기 위해 극장 한 관을 빌려 울림 정도와 파형을 분석해 음향설비를 세팅한 다음 안양 LG 치타스 서포터스들을 모아놓고 녹음했다. 그런 뒤 오버더빙 등의 후반작업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 'Into the Arena'에 나오는 "대한민국" 구호. 그냥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소리지른 것을 녹음한 것이 아니라, '음원'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깨끗한 "대한민국" 소리는 신해철이 녹음/제작한 이 음원이 거의 유일한 것이다. 때문에 몇몇 대기업들은 월드컵 특수를 노린 광고를 제작방영 하면서, 신해철이 만든 이 음원을 피치만 조절하는 수준으로 조작해 무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122] 인디나 사회 소외 문화계통 예술가들에게는 "허락만 구한다면" 자신의 음원을 무료로 사용하도록 하는 신해철이지만, 이런 대기업들의 치졸한 행태는 참기 힘든 것이어서 법적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123] 단순한 이벤트성 음악으로 가볍게 취급되는 것과는 달리, 'Into the Arena'는 모노크롬 때부터 신해철이 열중해오던 테크노와 국악을 결합하는 실험의 "완성체"로써, 신해철 본인의 곡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아끼는 곡이라고 밝힌바 있다. 다만 이것이 응원 구호 자체의 저작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호 자체에 대한 저작권을 가진 걸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본인이 스스로 자신은 응원 구호에 대한 권리는 없고 해당 음원에 대한 권리만 갖는다고 해명하였다. 즉, 직접 해당 응원구호를 녹음해서 사용할 경우에는 신해철이 보유한 음원 저작권과는 무관해지는 셈이다.
  • 축구에 대한 관심이 제법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인증한 건 다름아닌 2007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소속으로 K리그에 복귀했던 안정환이 서울과의 2군 경기에서 부인에 대한 욕설을 퍼붓던 서울 서포터 수호신 쪽과 충돌하다 퇴장당한 사건에서였다. 이 사건 직후 신해철은 고스트스테이션을 통해 " 연고이전 때문에 엄청나게 까이는 건 알아도 주제가 때문에 마음속으로 가깝게 생각하고 응원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사과가 없는 한 앞으로 절대 그럴 일 없을 것이다, FC 서울의 사과를 촉구한다."고 제대로 디스했기 때문. 그리고 안정환 선수에 대해서는“안정환 선수가 아무리 많은 야유가 있어도 묵묵히 참고 끝까지 경기를 치르고 경기 후에 제소를 하거나 상대팀 팬들의 나쁜 점을 지적했으면 전 안정환 선수를 존경했을겁니다. 하지만 경기 중에 가족과 아내에 대한 모욕을 참지 못하고 관중석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전 안정환 선수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와 관련 신해철이 고스트스테이션 2007년 9월 16일 방송에서 서포팅 포기 선언을 할때 FC 서울에 대하여 '북패'라는 멸칭까지 써가면서 비하했다는 썰이 있지만 이것이 진실이라면 당시 축구 커뮤니티에서 서포팅 포기 선언 자체보다 이 멸칭 사용으로 엄청나게 화제가 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이에 대한 게시물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여러 축구 커뮤니티 게시물을 당시 기간 검색을 해 봐도 그런 게시물은 찾을 수 없으며 아래 기사화된 내용 정도로 자신의 견해와 함께 FC 서울에 사과를 요구하고 사과가 없을시 서포팅 포기 선언을 하겠다고 발언한 것이 진실에 가깝다. 사커라인 2007년 9월 17일 신해철 고스트스테이션 방송 관련 게시물

    아마 '북패' 멸칭 사용 썰은 후대에 FC 서울 안티팬들이 신해철의 명성에 기대어 FC 서울에 대한 이미지를 더 나쁘게 만들기 위해 과장했고, 그 후 나무위키 내용 등을 근거삼아 이 사건에 대해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던 네티즌들이 단순하게 서포팅 포기 선언 이 정도로는 밋밋하니 더 자극적으로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면서 퍼진 것으로 보이는데 신해철이 고인이 되어 앞으로 확인할 수가 없는 점을 악용하여 실제로 하지도 않은 발언을 자신들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아무 증거도 없이 사실인양 퍼트리는 행태는 경우에 따라 사자명예훼손죄가 성립될 수 있으며 인간적인 도리상 신해철의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고인들에 대한 예우와 존중 차원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해철 FC 서울 서포팅 포기 선언 관련 기사화된 내용

'마왕' 신해철이 FC 서울에 대한 서포트를 포기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신해철은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MBC 표준 FM <고스트네이션>을 통해 "서울 구단에 응원가를 제공하는 등 응원을 보냈지만 안정환(31, 수원 삼성)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가 없는 한 더이상 서울을 서포트할 수 없다"며 "응원가는 다시 회수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앞으로 넥스트를 통해 서울 구단의 공식 행사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지난 16일 새벽 2시부터 방송된 이 프로를 통해 신해철은 "안정환 뿐만 아니라 박찬호(34, 휴스턴 트리플 A)에 대해서도 지금 부진하다고 해서 그 누구도 비난할 권리가 없다"며 "박찬호와 안정환은 이미 영웅이며 우리를 열광시켰기 때문에 그들로서 임무를 다했다"고 주장했다.

신해철은 또 "선수생활에서 은퇴한 뒤 탈세를 했다든지 본래의 영역에서 벗어난 행위를 했을 때는 비난할 수 있지만 그 외에 대해서는 영웅 대접을 해야한다"며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했던 차범근 수원 감독도 선수시절 영웅이었는데 그를 비난하는 누를 다시 범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신해철은 "박찬호, 안정환 등 스타들에게 꽃을 뿌리고 화관을 씌워주지는 못할지언정 그들을 모욕하고 짓밟는다면 스포츠에 대한 의미는 없는 것"이라며 폭언을 퍼부은 서울 구단 서포터들의 공식 사과와 처벌이 이뤄진 이후에 안정환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라고 요구했다.

FC 서울 구단에 대한 서포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신해철은 그동안 'We are FC SEOUL'이라는 응원곡을 만드는 등 그동안 서울 구단에 대한 지원을 해왔다. 한편 신해철이 작고한 후 FC 서울 구단 측에서 2014년 11월 2일 홈경기에서 추모 행사를 진행하였다.[124]
  • 2007년부터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KBS 스포츠의 시그널 음악도 신해철의 작업이다.[125] 특히 야구중계에서 많이 들을 수 있다. 듣다 보면 NHK 프로야구 구성이랑 비슷하다.[126] 사실 시그널뮤직 구성은 기존 음원을 깔아다 쓰지 않는 이상 뱀프나 인서트컷 같은 화면 구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나 저기나 비슷할 수 밖에 없다.
* 옛날 옛적 PC통신이 활발했을 때 넷 상에서 언니네이발관의 리더인 이석원이 넥스트를 깠다. 원래 이석원은 하이텔의 모소모(모던락 소모임)에서 독설 평론가로 유명했었다. 하지만 언니네 이발관이 고스트스테이션에 출연했을때 이 에피소드를 즐겁게 이야기하였다.
  • 한때 박철과는 함께 철철 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낸다고 헛소문이 돌았지만(자기들이 흘렸다) 시작이 그러했듯 그냥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애초에 박철이 고스트스테이션에 게스트로 나왔을 때 한 마디 한 걸로 청취자들이 오오 한 것이다.
  • 2005년 7월 30일에 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이 일어난 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조차 인디밴드 멤버들을 섭외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때가 있었는데, 당시 MBC FM4U의 신해철이 진행하던 고스트네이션 정도가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인디밴드와 그들의 음악을 소개했다. 당시 해당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10년쯤 뒤로 후퇴시킨 쓰레기'라고까지 표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히 이게 저항 정신이라며 떠받드는 놈들이 있을 거"라며 착잡해 하기도 했으며, 동료들과 인디 음악 팬들의 등에 칼을 꽂은 격이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아울러 생방송 음악 방송을 종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해철 "생방송 음악프로그램 폐지하자"
  • 2009년 3월, 엠씨 더 맥스의 이수가 오토바이를 탄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팬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오토바이를 타지 못하게 하라'고 부탁했다. 팬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나서서 갈비뼈든 다리든 부러뜨릴 것이라고 선언. # 결국 이수는 팬들의 문자공세에 괴로워하다 어머니한테 들켜(정확하게는 신해철이 일렀다.)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의 앨범을 통해 데뷔하다시피 했던 먼데이 키즈김민수가 2008년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 영향을 준 듯 하다.
  • 2010년 2월 6일에는 외톨이야 표절논란이 터졌을 무렵 신해철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팬들과 대화를 하다가 "씨엔블루가 인디밴드면 파리가 새다."라고 비하한 전력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씨앤블루가 밴드면 파리가 새다."로 와전되었다. 이러한 와전과 관련하여 신해철이 사망 직전에 인터뷰를 하였다. 아래 인터뷰를 참조.
    기자: 마지막으로 방송을 접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나요.


    신해철: 미디어의 사냥감이 돼 버렸다는 생각이었어요. 6년 잠복기 직전 상황이죠. 인격살해가 일어나더라고요.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한 이야기들이 기사화됐어요. 그 사람이 한 모든 이야기들이 보도된다는 건 그 사람 말의 가치가 0이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라디오에서 하는 자잘한 이야기를 다 끄집어 내면 처음엔 왜곡되고 그 다음엔 하지 않은 말이 등장하기 시작해요. 그 걸로 난도질을 당했고요. 씨엔블루 논쟁이 대표적이죠. 팬들과 채팅하는 창에서 "씨엔블루가 인디밴드면, 파리가 새다."라는 말을 했어요. 처음에는 정확한 보도가 나가더니, 어느 순간 '인디밴드'에서 '인디'가 빠지더라고요. 인격살해라고 생각했어요. 얼마 전 한 방송에서는 개그맨이 그 때 이야기를 또 꺼내더니 이번에는 씨엔블루에 FT아일랜드까지 붙여서 얘기하던데요."
  • 선술했듯이 고스트스테이션에서도 라디오 방송에서 유일하다 싶을 정도로 인디 음악을 정기적으로 소개하기도 했고, 특히 사건의 중심이 되어버린 와이낫이 자신의 곡인 '일상으로의 초대'를 리메이크 했을 때 기꺼이 피쳐링 참여하기도 했을 정도. 어찌보면 이 정도로 까이는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 평소 인터넷의 파급력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런 파급력을 남용하는 일부 몰상식한 기자개티즌을 향해 반감을 가지고있는 그이기에, '인터넷으로 엿먹는 게 뭔지 너네도 함 처먹어 봐라'라는 의미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생명을 창조하게 된다. 2007년 6월 19일 새벽2시,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을 진행하던 그는 돌연 청취자들에게 어떤 미션을 부여하게 된다. 이것의 시작은 한 사연이었는데, '화장실을 같이갔던 친구가 눈이 가렵다며 눈에 이물질이 들어갔는지 대신 봐달라 부탁했고, 속눈썹같은 것이 어설프게 눈두덩이에 걸려 있는 거 같아서 손톱으로 뽑아봤더니 엄청난 길이의 머리카락이었다' 라는 그로테스크한 사연이었다. 이것을 신해철은 장난스런 말투로 '그거 사실 기생충'이라며 너스레를 떨다가 '그 친구 빨리 병원 가봐야 할듯'하며 겁을 주더니 '움베르 파르가스 리코타시움'이라는 학명까지 만들어냈고 청취자들에게 "이 기생충을 내일 아침까지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로 띄워놓아라" 라는 명을 내리고 방송을 마친다. 방송 이후 이 기생충은 화려한 글귀와 광클로 무장되어 여러 커뮤니티에 퍼날라지며 떡밥의 크기를 불려나가게 되고 오전부터 정오가 살짝 넘어갈 때까지 네이버 급상승 검색어에 올라가기도 했다. 거짓 정보임을 알아챈 일부 네티즌은 허위사실 유포죄로 고스트스테이션을 고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사건 발생 3일 후 신해철이 라디오에서 '여러분이 자랑스럽다' 라는 말을 시작으로 '기생충 창조에 크게 일조하여 마땅히 그 공을 인정받아야 할 두 사람'을 선정 후 자신의 콘서트 티켓을 무료로 보내주었고, '그래도 우리가 벌린 일이니 우리가 수습하자'는 의미로 유포했던 모든곳에 수습글귀를 올릴 것을 명하여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 아직도 포털사이트에서 '움베르'를 검색하면 자동완성 기능으로 뜨는 이 기생충의 정보를 열람할수 있다.
  • 데뷔 전 부활 팬클럽의 부회장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친구가 죽여주는 밴드가 있다고 해서 따라간 밴드가 부활이라고. 신해철은 부활의 무대를 봤던 때를 고스트스테이션에서 회상하기도 했다. 그 계기로 김태원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128] 신해철은 그 계기가 한창 에너지가 피어나던 뮤지션을 바로 옆에서 관찰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하며 그 계기가 인생을 바꿨다고도 말했다.[129]
  • 2012년 2월에는 극심한 복통으로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했다. 이유는 담낭염. 수술 직후 자신의 복부에 있던 검은 덩어리를 사진으로 찍어 공개하기도 했다. 이는 MBC 고스트스테이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인 말로는 마귀의 권능인 흑사리가 나온데다 검은 예언이 곧 이루어져 온 세상이 짜장면으로 뒤덮힐 것이며, 토마토 케첩을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고 하는 둥 농을 쳤지만, 본래 한 시간 걸릴 수술이 다섯 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꽤 큰 수술이었던 듯하다. 고스트스테이션 진행은 잠시 스폐셜편으로 대체되었고, 이주연의 영화음악이 2시부터 4시까지 대체 편성되어 방송했다. 일단 신해철이 라디오 DJ에서 하차한 건 아니지만 6월이 된 시점에도 복귀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7월, 20여일이 지나 드디어 라디오에 복귀했다. 수술도 수술이지만 MBC파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기에(해당 방송국 PD 역시 파업에 참여중이었다) 쉬는 김에 푹 쉰 듯. 복귀 후엔 놀라울 정도로 착실하게 방송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이 정규편성되었던 신해철의 마지막 라디오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후 라디오방송에 대해서 본의 아니게 그만두게 되었다는 뉘앙스의 트윗을 몇 번 했지만 라디오가 없는 삶을 몇 년 동안 살아보니 그것도 괜찮더라고 트윗했다. 비록 복귀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나 지상파 라디오에서 받은 상처가 없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 2014년 8월 15일 전후로 일주일 가량,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대타 DJ로 들어와서 차분한 진행을 선보였다. 그런데 PD와 작가의 농간으로 예전 고스트스테이션에서 TTS를 동원한 헤비메탈 제국의 역습이라는 녹음본을 그대로 가져와 재방송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그램 중간 광고 때,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재방송이 이루어진다'는 안내 메시지 겸 애드립을 29만원 성대모사로 한 걸로 봐선 순전히 강요당한 건 아닌 듯하다. 또한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노래가 잘리자 미안하다~ 드립을 치는 등 방송 순간순간 개드립 본능이 튀어나왔다. 프로그램의 주인인 배철수는 귀엽다고 평가했다.
  • 과거 신해철과 같이 방송을 했던 SBS 라디오 PD의 말에 의하면 락소맥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방송 편집을 PD에게 맡겨놓고 먼저 고깃집 가서 고기를 구으며 야 빨리 와! 를 시전해서 헐레벌떡 가면 락커가 어떻게 일반인이랑 같은 소맥을 먹냐며 락소맥이란 걸 마시는데 정확히 맥주와 소주의 비율이 반대인 소맥이라고 한다.
  • 싸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뮤지션이라고 했고 서로 친했다고 한다. 2014 올나잇 스탠드에선 추모곡으로 조용필의 '친구여'를 불렀다. 싸이 7집 수록곡 'Dream'을 발표 할때 신해철 형을 위한 곡이라고 발표했다.
  • 국카스텐에게 "앨범 좀 빨리 내라 이 새끼들아."라며 애정 섞인 디스를 했다. "장수 한 명이 앞장서서 성문을 뚫어야 병사들이 진격하듯, 뛰어난 밴드 하나가 성문을 뚫어줘서 후배 밴드들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며 국카스텐을 독려하는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해철은 생전에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고스트스테이션)에서 "이 정도 연주에 이 정도 외모에 이 정도 음악에 뭘 더 해야 밴드가 잘 될 수 있는 건가?" "국카스텐 같은 밴드면 못해도 지금쯤 200~300만 장 쯤은 팔렸어야 되는 게 아닌가?" 라고 할 정도로 국카스텐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결국 2집 발매를 몇 달 앞두고 사망하고 만다. # 그만큼 신해철에게 사랑받은 데 대한 헌정인지 보컬 하현우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우리 동네 음악대장으로 출연하여 44회차에서 2라운드와 3라운드에서 각각 신해철의 곡 '민물장어의 꿈'과 'Lazenca, Save Us'를 불렀다. 그 결과 모든 대전자들을 압도적인 표차로 이기며 가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56회차에서도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를 선곡, 신해철로 시작하여 신해철로 끝내고 싶어하는 듯 보였지만 이번에도 승리하며 가왕자리를 이어나갔다.[130] 2016년 MBC 연예대상에서는 하현우가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소감으로 "하늘에서 저를 기특하게 바라보고 계실 신해철 선배님께 다시 한 번 이 상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국카스텐 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찡하게 했다.
  • 길티기어 음악과 더빙을 작업하면서 길티기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시와타리 다이스케와도 공통 점이 어느정도 있는데 , 이시와타리 역시 길티기어의 더빙과 음악 작업을 하였고 이시와타리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솔 배드가이는 프레디 머큐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며 등장인물들 역시 퀸의 다른 멤버들을 모티브했다고 볼 수있는데, 신해철 역시 넥스트의 5.5집 ReGame? 앨범 자켓 이미지를 퀸의 2집 앨범 자켓 이미지에서 모티브를 한 적이 있다.
  • KBS 2FM에서 새벽에 방송하였던 매니아 취향의 레전드급 프로그램인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낳은 스타이기도 하다.[131]으로 보성고 시절이었던 1986년에 방송되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을 덕후 수준으로 좋아했는지라, 이 프로그램을 접한 것을 계기로 음악을 접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해철의 아버지는 “전영혁 때문에 음악을 하게 됐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서울대 갈 수 있는 머리인데 만날 밤에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듣느라고 서강대 갔다”고 말했을 정도. 나중에 신해철이 심야 DJ를 맡았을 때 전영혁과 같은 시간대에 방송을 한 적이 있다.
  • 2015년 제19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상'을 수상하였다. #
  • 2017년 2월 25일 모여라 딩동댕의 코너 중 번개타운에서 N.EX.T의 곡인 '날아라 병아리'를 극화한 '별이 된 얄리'가 방영되었다. 내용은 병아리 얄리가 죽어 실의에 빠진 펌핑조이를 번개걸이 위로하는 내용. 펌핑조이와 얄리가 해후하는 장면에서는 날아라 병아리가 합창으로 불려졌다. 시청 연령 특성상 죽음에 대해 논한 가사들(2절)은 전부 제외했다.
  • 처음 PC방에 갔을 때 약간 화가 났었다고 한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던 어린 학생들이 '야, 해처리부터 까'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내용으로 한 해설자가 스타크래프트 게임 중계를 하던 중 해처리가 새롭게 생기자 캐스터에게 "그럼 저건 신 해처리인가요?"라는 드립을 쳤다.
  • 2020년 1월 3일, 영화 투자배급사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가 신해철이 25년 동안 남긴 음악과 삶의 흔적을 담을 영화 '그대에게' [132] 를 2020년부터 제작한다고 밝혔다. 신해철의 육성과 노래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넥스트 유니이티드가 공동 제작자로 들어갈 예정이다.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신해철과 비슷한 배우와, 신해철의 목소리를 섞고 신해철의 몸 등을 만들 것이며, 대학가요제 당시 무대를 만들 것이라고 한다.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발이봉로 10에 신해철이 솔로 앨범부터 수많은 N.EX.T의 노래를 썼고, 죽기 전까지 사용하던 작업실와 거리를 통틀어 '신해철거리'가 일반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되었다. 그의 마지막 사진이 이 곳을 배경으로 찍었다. #
  • 다한증이 엄청나게 심했다. 한겨울에도 땀이 줄줄 날 정도라서, 기타랑 피아노 등도 못 친다고 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어렸을 때 녹용을 잘못 먹어서라고 한다.[133]
  • 자신이 이유 없이 모욕을 당한다면 적개심을 넘어선 살인 충동 정도의 공격력이 생긴다고 한다.
  • 양쪽 팔이 잘 빠진다, 5키로 이상 물건을 들면 양쪽 손 어디든 빠진다고 한다.[134] 왼팔은 교통사고, 오른팔은 보트 사고로 다쳤다고 한다. 그리고 양쪽 발 연골막은 군대에서 훈련을 하다가 다 찢어져 버려서 공익 판정을 받아도 될 몸이였지만, 당시에 연예인 군대 비리 때문도 있고, 중대장사단장에게 욕 먹을까봐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 노래들의 2차 가공을 허용한 적도 있다. '연극무용및 비영리예술에 저작권오픈한다니까' 이라 하며 허용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
  • 신해철에게는 큰 징크스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신해철이 OST로 참여하는 작품은 OST만 흥하고 작품이 망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OST는 국내 최정상급 음악가인 신해철이 참여하기에 아주 좋은 평가를 받으며 흥하지만, 반대로 작품은 크게 흥하지 못하고 망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혼기병 라젠카, 정글 스토리, 세기말 등이 있다. 신해철 사후 개봉된 영화 골든 슬럼버의 경우, 크게 망하진 않았지만 영화의 평가가 썩 좋진 않았다. 단, 길티기어 XX 한글판의 경우에는 크게 흥했고 신해철이 제작한 한글판 OST들은 일본에 역수입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나의 PS 파트너도 대박을 치진 못했지만 어느정도 흥행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에 신해철 본인이 설명하기에는, 신인 영화 감독들이 투자받기 위해 첫 영화에는 상업적으로 성공할만한 요소를 때려박아 성공해놓고서는 두번째 영화부터는 자기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나 예술 영화를 만들겠답시고 온갖 잡다한 요소를 넣어서 망작을 만들어 놓고 음악은 좋은 음악을 쓰고 싶어서 국내 음악 업계 원탑 중 하나인 그 마왕 신해철을 섭외한 다음 영화는 망하고 OST는 흥하는 루트를 탄다고 한다.
  • 2000년대 후반부터는 외압으로 인해서 음악 활동보다도 TV 활동을 많이 했었는데, 출연하는 방송에서 악플러 체크기 드립을 많이 쳤다. 카이스트와 협업하여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듀얼 코어 업그레이드, 쿼드 코어 업그레이드와 같은 드립도 많이쳤다.
  • 슈퍼주니어의 선견지명에 출연했을때, 독설 조건으로 4가지 뽑아달라는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화내지 말 것
    • 직접적인 비속어를 사용하지 말 것
    • 유머를 빠트리지 말 것
    • 상대방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것
  • 신해철은 2014년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사실 이전에도 한번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바로 2006년 10월 즈음인데, 이 당시엔 ReGame? 발매 이후 N.EX.T 자가 팬들과의 불화와 본인의 입지가 줄어든 것에 고민으로 인해 기타리스트 데빈이 N.EX.T를 탈퇴한 후 였다. 새벽녘에 데빈의 탈퇴에 관한 글을 쓰고 직접 강북강변을 질주하다가 길이 휘어지는 가드레일을 정통으로 들이받았는데, 자동차는 360도 회전을 두 바퀴 돈 후에야 멈췄고, 본넷을 포함한 거의 모든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신해철 본인은 핸들에 몸을 부딪힌 뒤, 유리창에 머리를 박으면서 잠시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이틀 뒤 샤워를 할 때에도 몸에 유리 조각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갈비뼈 하나가 금이 간 조짐을 보였으며 나머지는 전부 찰과상이나 타박상이었다고 한다. 물론 음주운전은 절대 아니었으며 넋을 놓고 운전을 하다 자살 충동을 느껴 한강을 향해 계속 직진을 하려 하였으나 그 직전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재즈 음반이 생각나 왼쪽으로 핸들을 틀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또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다고 한다.
    나는 살아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게 당연하게 살아 남은 것은 아니다.


    새벽녘에 바로 이 전의 글을 쓰고 팬클에 올린 후 직접 운전하는 차량을 끌고서 강북강변을 질주하다가 길이 휘어지는 가드레일을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음주 운전은 물론 아니었지만 완전히 넋이 나간 텅빈 상태에서 운전을 했으니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먹은 진정제 탓 인 것 같기도 하고... 깜박 완전탈진 상태에서 졸음에 빠져든 것 같기도 하다.


    자동차는 360도 회전을 두 바퀴 돈 후에야 멈췄고, 본넷을 포함한 거의 모든 부분이 파손되었다. 나는 핸들에 몸을 부딪힌 뒤 유리창에 머리를 박으면서 의식을 잠시 잃었다. 이틀 뒤에 샤워를 할 때도 몸에 유리 조각이 붙어 있었다.


    갈비뼈 하나가 금이 간 조짐을 보일 뿐, 나머지는 심한 타박상과 찰과상 등이다. (자동차 수리 견적은 2000만원 쯤이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눈 앞에 파노라마처럼 살아온 인생이 지나간다는데, 나도 그랬다.


    그 짧은 순간에 내 모든 삶의 모든 진행이 한꺼번에 보였다. 그리고 이 이후의 일들은 믿거나 말거나 인데, 나는 차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 말은 처음 듣는 종류의 언어였으나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


    “직진을 하면 넌 죽는다. 다른 사람들이 슬퍼 할지는 몰라도 너는 영원한 고독으로부터 해방되지. 그러나 왼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넌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증오하고 경멸하는 자들과 계속 싸움을 계속하겠지. 그 선택은 항상 인간에게 있다”


    나는 항상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가사의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죽음, 혹은 자살에 대한 주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앞으로 쭉 뻗은 길, 직선으로 속도가 올라가며 입을 벌린 한강을 향해 굴러떨어질수 있을 가능성이 높은 길, 끝없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출 길.


    그러나 나는 왼쪽으로 핸들을 잡아 돌렸다, 그 짧은 시간에 내 머리에 스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얼마 전 딸을 낳은 내 아내? 내 딸?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음악을 한다. 음악을 해서 살아남은지도 모르겠다.


    팬들에게 말한다 있을 때 잘 하라고. 나는 여러분의 곁에 영원히 있지 못 할 것이기에.



  • 생전 집을 가진 적이 없었다. 어렸을 적 무언갈 가지면서 사는 게 싫어서 자기자신에게 평생 집을 안 산다고 맹세를 했다고 한다. 훗날 결혼 후 재테크 도사인 아내에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돈을 버는 게 뭔 뜻이냐?'고 물어봤을때 아내가 설명을 해줬었는데, 그 설명을 들으니 '이러니까 사람들이 화를 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돈이 돈을 버는 구조에서는 있는 사람들만 더 벌고 없는 사람들은 죽어나는 노릇인데 당연히 사람들이 화가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 연예인의 욕설에 비판적인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놓고 욕설을 썼던 연예인이기도 하다. 물론 전부 삐처리가 되었으나 대놓고 욕설을 쓰거나 뻐큐를 날린 사람은 신해철이 유일하다. 이경규박명수도 욕설에 가까운 말을 하긴 했으나 신해철처럼 대놓고하진 못 했다. 이는 마왕독설가 이미지도 한 몫했는데 원래 과격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사실 신해철이 TV에 자주 출연했던 2000년대 말부턴 언론들의 공작에 의해 국민관종이 되어버려 뭘 해도 욕을 먹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일들 때문에 독설가, 나쁜 남자등의 이미지를 가졌었고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는 신해철이 사망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이미지가 사라지게 된 것은 순애보, 애처가, 딸바보, 아들바보등의 일화나 이승기, 은가은 등 신해철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후배들의 이야기로 '사람 신해철'의 모습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부터이다.
  • 의외로 EDM, 그중에서도 덥스텝 장르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듯 하다. "EDM 은 음악 장르중에서도 제일 못 한 거 같애…왜 있는지 모르겠어…."라고 하기도 했다는 듯. 하지만 이때는 만취해서 말이 꼬일 정도였다는 상황이니 이 부분은 어느정도 감안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후에 한 말을 보면 장르 보다는 해당 장르를 주로 다루는 뮤지션들의 믹싱 방식에 불만이 있었던 듯 하다. 뮤지션들은 어느 정도 엔지니어에게 맡길 필요가 있고 믹스의 밸런스만 신경써도 된다고 한다. 또한 리버브는 원래 스네어 용도라며 딜레이만으로도 리버브 효과를 줄 수 있으니 딜레이를 더 연구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 2022년 1월 31일, 2월 1일에 KBS에서 방영한 자본주의 학교에 신해철의 자녀인 신하연과 신동원이 출연했다. 여기서 두 자녀 모두 젊은 시절의 신해철을 빼닮은 모습을 보고 출연진들 모두 놀랐다.[135] 방송에 따르면 신해철의 사후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신하연 양이 아버지의 별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마왕티콘'을 만들어 네이버 OGQ마켓에 출시했는데 방영전부터 출시한 뒤 얼마 안 돼서 인기 이모티콘 1위에 올랐다. 이후 방송을 통해 이것을 신해철의 딸이 만들었다는게 공개되자 신해철을 추억하는 팬들이 응원 댓글을 달기도 했다. 반응이 좋았는지 후에 정규편성이 되자 고정 출연진으로 합류했다.
    3월과 7월에는 신하연의 오마주 화보가 공개됐다. #1 #2
  • 2008년 6월 7일에 개최된 드림콘서트에서 소녀시대가 무대를 할 당시 S♡NE을 제외한 모든 팬덤들에게 야광봉을 끄고 침묵 또는 야유를 당한 사건[136]이 벌어지자 사건 당일 이를 언급하며 당시 S♡NE을 제외한 이 사건에 가담하였던 관객들을 대놓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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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전 세계 진출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1995년 The Return of N.EX.T Part 2: The World 콘서트 당시 투어 이름이 World Tour였다는 것에 대리 만족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2004년 발매된 The Return of N.EX.T Part 3: 개한민국의 수록곡 사탄의 新婦는 로열 앨버트 홀에서 공연하는 느낌을 내고 싶어서 제목 뒤에 (Full Bet Mix)를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는 등 항상 세계 진출을 꿈꿔왔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세계 진출은 하지 못했는데, 1997년엔 일본 진출이 가능했고 신해철 본인도 일본 진출을 하고 싶어했으나 멤버들이 원치 않았기에 멤버를 갈아치우고 일본 진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 Lazenca - A Space Rock Opera를 제작한 후 그 해 해체하였으며, 이후 2000년대에는 넥스트를 재결성하고 새 멤버들과 오랫동안 활동하며 실력을 키우고 재도전 하려 했으나 이는 멤버들의 탈퇴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말년에는 넥스트를 유나이티드 체제로 개편하여 다시 시작하려 했으나 의료사고로 인해 결국 세계 진출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18.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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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관련 문서



[1] 대중들이 신해철 하면 떠올리는 사진 중 하나로, 2007년 나온 솔로 5집이자 재즈 앨범인 The Songs For the One 부클릿에 수록된 사진이다. 이후 머리에 문신을 한 것과 더불어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몇 년간의 여러 부침으로 인해 말년의 모습은 이 사진과는 크게 달랐다.[2] zum 프로필에서는 부산광역시 출생으로 나와 있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본적은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관련 기사[3] 발인도 4일 후인 10월 31일 오전 9시에 이곳에서 진행되었다.[4] 마왕 신해철 책에 171cm라고 적혀 있다.[5] 2007년무릎팍도사에 나왔을 때는 170cm대였다.[6] 생전 음악 관련 프로그램 및 플러그인들을 제작하여 이를 이용해 Princess Maker 같은 곡들을 만들기도 하였다.[7] 하단 MC 활동 문단 참조.[8] 사실상 트위터가 본진이었다. 페이스북은 잘 이용하지 않았다.[9] 사실상의 불명예 전역이었다. 자세한 건 신해철/음악 활동의 2.1 문항 참고.[10] 약사였다고 하며, 약 2번의 뇌출혈 병력으로 거동이 불편하다고 한다. 그래서 공식 석상에서도 신해철거리 완공식 당시 마지막으로 휠체어를 타고 온 이후 잘 보이지 않는다. 당시 영결식 때도 걸음이 부자연스러웠다.[11] 신해철은 어머니에게는 넥스트 3집의 Mama라는 곡을 썼고, 아버지에게는 우리가 잘 아는 노래 중 하나인 아버지와 나를 썼다.[12] 당시 Crom's Techno Works 제작과 유학생활을 위해 영국에서 갔다가, 모임에서 만났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던 윤원희 씨를 위해 신해철은 매주 주말마다 도쿄-뉴욕 비행기를 타며 뉴욕까지 건너가 연애를 했다.[13] 처음에 딸을 낳았을 당시에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해철이 공연 중에 '저 아빠 됐어요.'라고 말했다. 개명 전 이름은 신지유. 다만 신해철 사망 5주기 인터뷰에서 신지유라는 이름을 썼다. 처음에는 언론에 신해철과 그의 아내 윤원희의 이름을 따서 신해철 - 윤원희의 앞자인 신윤, 해원, 철희가 될 수 있다고 했었고, 해원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한다.#[14] 신해철의 '날아라 병아리'에서 언급된 과거 신해철이 키웠던 병아리이다.[15] ‘조이 러커스(Joy Ruckus) 클럽 K-팝 슈퍼페스트’ 라인업 확정…故 신해철 사촌 쿠블라이 권 주최[16] 양측 어머니끼리 사촌, 외할머니끼리 자매 관계다.[17] 서태지의 딸. 이름이 외자인지 애칭으로 이름 끝 부분만 부르는 것인지는 불분명.[18] # 실제로는 둘은 9촌으로 신정환의 항렬이 하나 높다. 둘의 공통 조상은 신재기로 신재기의 첫째 아들 신석일, 둘째 아들이 신석필인데, 신석일 계통은 신석일-신태욱-신경균-신현우-신해철이고 신석필 계통은 신석필-신태곤-신부균-신정환이다.[19] 2003년에 ‘포이보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8~2014년에는 소속사보다는 음반 레이블로써 신해철의 음반을 발매했으며, 이후 이름을 원래대로 바꾼 건지는 모르지만 2014년 발매된 Reboot Myself Part 1에는 음반 레이블 중에 ‘대영AV’가 존재했다.[20]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존재했던 신해철이 설립한 회사로 박노해 시인 헌정 앨범 제작 중 폐업하였다.[21] 2005년 신해철이 SBSi와 공동 출자 방식으로 설립한 회사였으며, 싸이렌 음악원을 운영했으나 2011년에 최종 폐업하였다.[22] K.C.A는 Korea Casting Agency의 약자이다. 2016년 이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신해철의 음반 및 음원 저작권을 관리하고 있는 실질적인 소속사는 넥스트유나이티드이다.[23] 신해철의 아내인 윤원희 씨가 대표이사로 있다. 모든 노래와 저작권을 소유 중.[24] 간혹 N.E.X.T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New EXperiment Team의 줄임인 N.EX.T가 올바른 표현이다.[25] 성당에 나가지는 않으며, 본인 스스로는 사상적으로는 무신론자적 입장이라고 주장했으나 천주교 교적을 버리지 않은 이유는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다만 말년까지도 계속 신을 언급하거나 인생을 신이 선물해준 보너스 게임이라고 말하는 등의 모습도 보여 유신론자, 이신론자로 볼 수도 있으나 확실한 건 알 수 없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믿지만 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 기독교 무신론자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장례는 후술하듯 천주교식으로 치러졌다.[26] 비공식 사이트이나, 신해철 본인도 이 사이트를 이용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27] 다만 신해철 본인이 좋아하는 색상은 레드와 블랙, 가끔씩 퍼플이라고 밝혔다. 실제로도 레드 계열의 색상을 자주 사용했다.[28] FM 음악도시 시절 별명이며 고스트스테이션 이후로는 마왕이란 별명이 더욱 자주 쓰이게 되었다.[29] 서태지의 경우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밝힌 것으로는 친척인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PD랑 싸우곤 하는 그의 악명 덕분에 무서워하며 찾아갔는데 의외로 따뜻하게 맞아주고 하나하나 성심성의껏 알려줬었다고 술회했다. 그걸 들은 유희열 역시 음악하는 후배들에게 너무 잘해줬었다고 맞장구를 쳤다.[30] 도시인, 이중인격자, 나는 쓰레기야, The Age Of No God, Question, Generation Crush, 서울역 등[31] 그대에게, 영원히, The Dreamer, Hope, 해에게서 소년에게, It's Alright, 힘을 내!, 단 하나의 약속[32] I'm Your Man, Playboy의 최후, Show Me Your S.E.X[33] 아! 개한민국, Dear American 등.[34] 대표적으로 Dance United, Catch Me If You Can이 있다.[35] 당시 주제는 간통죄 폐지였다. 신해철은 폐지 찬성 쪽이었다. 이때 시민 논객으로부터 질문을 받아 신해철과 시민 양쪽 모두 차분하게 웃으며 의견을 주고 받았다.[36] 고스트스테이션 진행시에 본인 스스로를 '대마왕'이라고 칭하고, 청취자들을 '어둠의 아이들'이라고 칭했던 게 시초다. 당시 신해철의 미디어 노출이 적었던 시절이었기에 신해철의 팬들의 고스트스테이션 청취율은 상당히 높았고, 자연스럽게 팬덤 내에서도 '대마왕'이라는 호칭이 정착되어, 고스트스테이션 종방 후에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마왕', '대뫙', '뫙' 등으로 줄여 부르는 팬들도 많이 있었고, 매스컴에서 '마왕'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 팬들 사이에서도 '마왕'으로 통일되었다.[37] 친척이 많다고 한다. 아버지 쪽은 10남매 중 장남이고 어머니 쪽은 7남매다. 그래서인지 신해철 포함 자녀를 둘만 두었다고 한다.[38] 당장 2014년 여름 휴가를 떠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대신 진행할 때 자신을 신대철로 부르는 청취자에게 "크, 게, 라디오를 켜고!" 드립을 치기도 했다.[39] 참고로 신해철 의료사고 사망사건의 발단이 된 것도, 신해철 사망 이후 신대철이 트위터로 매우 격노한 것부터 시작했다.[40] 대마초를 경험한 동기는 환각 상태에서 음악이 어떻게 들리는지 궁금해서였는데, 창작에 있어서 큰 의미는 없다면서, 대마초가 비범죄화될지라도 자신은 절대 대마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넷 문화 초창기인 90년대 말, 2000년대에 등장했던 급진적인 네티즌들은 대마초의 효능, 효과를 강조하며 대마 합헙화를 주장하였으나, 이들과는 살짝 결이 다르며, 오히려 대마초에 대한 환상을 차단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오히려 고스트스테이션 등에서 평소 했던 발언들을 보면, 취한 상태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강력 비판하는 등, 의외로 보수적인 면모도 있었다. 술 먹고 개 되는 걸 알면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 남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그게 대마 흡입이든 음주이든 처벌하는 게 맞으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관대하게 넘어가자는 게 본인의 지론이었다.[41] 안산 유토피아추모관에 있다. 평상시에는 닫혀 있으며, 안에는 신해철거리에 있는 생전 신해철의 마지막 작업실을 축소시킨 모형과, 안경, 넥스트 물품, 참여한 카세트테이프 등등의 유품이 있다. 겉에 새겨진 가사는 Here, I Stand For You의 가사로, 본래 신해철은 민물장어의 꿈의 가사가 새겨지길 원했으나 유족들의 뜻에 따라 Here, I Stand For You의 가사가 새겨졌다.[42] 묘가 삼각형인 이유를 음모론자들이 이상한 뜻으로 선동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당시 어리던 신해철의 딸이 그린 거라고 한다. 피라미드에서 착안한 형태인 듯 하다.[43] 공교롭게도 그와 생전 친분이 있었던 가수 유니와 같은 장지에 안장되었다.[44]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신해철의 매니저가 언급한 신해철의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45] 특히 사망 2달 전에 배철수의 휴가로 인해 신해철이 1주일간 배캠의 대타 DJ를 맡기도 했다.[46] 믿지 않는 사람,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코멘트를 날리자면, 이 두 사람은 1997년 MBC에서 방영된 심야프로그램 '김승현의 잠 못 이루는 밤에'에 같이 출연한 계기로 친분을 쌓았었다.[47] 해당 트윗과 함께 이경규의 몰래카메라 신해철 편에서 신해철이 "야! 네가 왜 울고 짜냐?"라고 말하는 장면의 사진을 올렸다.[48] 신해철거리의 추모 블럭에 써있는 유재석의 추모글이다.[49] 2004년 37살의 신해철의 육성이 담긴 미발표곡 '아버지와 나 Part 3'를 토대로 이승환하현우, 유재석놀면 뭐하니?를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시킨 곡. 이 회차가 공개된 날이 마침 5주기를 앞둔 시기이기도 했다.[50]SBS MTV.[51]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고스트스테이션 금지어였다고 한다. 한예로 남궁연의 고릴라디오와의 전화 연결 사건 당시 식구 한명이 언급을 하자 아이디정지 24시간을 먹였다.[52] 트로트 가수가 아닌 당시 미스코리아[53] 당장 10여년 전에는 마광수김광석이 라디오에서 간통죄에 대해 '인권을 침해하는 악법'이라며 비판적인 이야기를 했다가 외설스러운 발언이라고 같이 방송 출연정지 처분을 받는 등 간통죄 폐지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고, 자칫 연예계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었다.[54] 실제로 당시 100분 토론 게시판은 신해철을 까는 글들로 넘쳐났다.[55] 무릎팍도사 출연 당시 본인에게 달린 악플을 회상하였는데 대마초 비범죄화 주장 당시 '신해철 집에서 대마초나 펴라', 간통죄 폐지 주장 당시 '신해철 집에서 대마초 피면서 간통이나 해라', 체벌 금지 주장 당시 '나중에 니 자식이 대마초 피고 간통해도 때리지 마라'라고 달렸다고 하소연했다. 이 때 달린 자막은 "3단 변신하는 악플"(....)[56] 물론 이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진보 성향 교육감들이 당선되었고 그들이 신해철과 의견을 같이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57] 앞서 말했다시피 신해철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과감하게 나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노무현과 코드가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58] 정작 신해철 본인은 자신을 진보주의자로만 규정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혹자는 신해철 사후 신해철에 대해 회고하면서 신해철은 오히려 자유주의자에 가까웠다고 평가한 바 있다).[59] 사실 진보주의라고 사교육보다 공교육에 긍정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가령 김상봉 교수도 <내부로의 망명만이 길>이라는 글에서 억압이 덜하다는 면에서는 사교육이 공교육보다 차라리 나으므로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에 다니면서 나머지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며 교사들은 교직에 연연하지 말고 더 나은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학교를 떠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교육기관을 민영화한 뒤에 저소득층일수록 학생들에게 교육비를 더 많이 지원해주면 (교육 바우처 제도)진보적 가치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다.[60] 신해철은 앨빈 토플러만을 언급했지만 사실 현대적인 탈학교론의 주창자는 이반 일리히와 에버트 라이머다.[61] 참고로 당시는 이명박이 집권하던 보수 정권이었다.[62] 실제로 한창 때 신해철의 인터넷 게시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로 도배가 되어있다시피 했다. 욕하는 게 버릇이 된건지 일부러 그런 건지는 본인만이 알겠으나 중2병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자 나중에는 점잖아진 모습을 보였다.[63] 신해철은 다한증을 가지고 있었다. 기타리스트였던 그가 보컬로 전향한 게 다한증으로 인해 기타를 오래 칠 수 없었기 때문. 간혹 넥스트 데뷔 후 방송무대에 일렉기타를 가지고 출연하는 경우엔 비닐장갑을 끼고 출연한 적도 있었다.[64] 지금이야 이런 성적으로는 아예 수학을 배제하는 홍익대 자전같은 극소수의 전형을 제외하면 모든 과목에서 최소 점수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름 없는 지방대조차도 못 가지만 신해철 시기에는 수학이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 난이도였고 수학을 아예 망쳐도 다른 과목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내면 나름 인서울은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수학은 기본만 받쳐줄 공부만 하고 다른 과목에 올인해 인서울을 노리던 수험생들도 많았다. 신해철은 아예 0점이었기 때문에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65] 중간에 MBC FM으로 옮겨 '고스트네이션'이란 이름으로 진행하기도 했다.[66] 이후 2대 유희열 → 3대 이소라 → 4대 성시경 순으로 이어졌다가 2014년 폐지되었다.[67] 백라일테(백 번 라디오에 노래를 트는 게 한 번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과 같다)라는 방송계 은어를 씁쓸하게 말하며 그럼 후배들의 음악을 백한번 틀어주겠다는 발언도 하였다.[68] 이때만 하더라도 장기하와 얼굴들은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전이었다.[69] 딥 퍼플, 메탈리카는 연례 행사급이었고 프린스 같은 팝스타까지 특집으로 진행했다.[70] 신해철 본인뿐 아니라 일렉트로니카, J-POP, 병맛 방송 등 여러가지 방송을 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들 중 몇몇은 신해철의 지상파 라디오에 고정 코너로 참여하기도 했다.[71] 사실 고스트스테이션의 시작부터 이런식으로 녹음 장소와 방송국이 달랐는데, 이는 당시 신해철이 미국에서 유학 생활 중이었기 때문. 지하실에서 스스로 녹음한 걸 방송국으로 전송했다고 한다. 이 지하실에 물이 새서 녹음중에 수리하러 가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72] 텔레비전-라디오간의 차별의식, 인터넷에 대한 과소평가, 방송국의 장비가 없으면 방송은 불가능할 거라는 예측 등.[73] 결국 이 예측은 적중하여, 아프리카TV, 다음팟, 팟캐스트, 트위치를 필두로 한 인터넷 방송들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유시민, 김어준, 물뚝심송 등의 전문가들이 일반에 보급하였고, 나아가 일반인 유튜버, 스트리머까지 계보가 이어지게 된다. 사실상 신해철은 인터넷 방송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비슷한 시기 아프리카TV와 세이클럽이 초기 서비스를 런칭했으며 우왁굳 등의 젊은 세대가 이를 통해 데뷔해 프로페셔널한 인터넷 방송인이 되지만, 신해철의 나이와 세대를 감안하면 새로운 문화에 빠르게 적응해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나가는 데 성공했으니 선구자라 부를 수있는 셈.[74] 넥스트 팬 사이트도 이때 사라져서 연관된 걸로 착각할 수 있는데, 넥팬이 사라진 것은 운영자의 독단으로 신해철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해 이에 분노하고 아무런 공지도 없이 사이트를 닫은 것이다. 업로드 된 데이터도 모두 자신의 것이라며 주장하고 원한다면 따로 준다는 어처구니 없는 대응을 했다. 그 뒤 신해철의 안티가 되었다가 그가 떠난 이후 블로그에서 안타까워 한다며 팬인 척 다시 활동하고 있지만 악명이 자자하다. 자신의 말에 안 따라서, 자신이 곁에 없어서 신해철이 잘못되었던 것이라는 투로 글을 쓰는 등,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듯. 파벌을 만들어 신규 팬들에게 갑질을 하거나 넥스트 새 멤버에게도 성형을 해야 한다는 등 막말을 해 올드 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러나 신규 팬들은 이 사실을 몰라 지금도 네이버 블로그에서 농락당하고 있다.[75] 제일 많이 언급한 만화로, 캐릭터 하나하나까지 언급했을 정도다.[76] 간혹 달빛천사정글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 등의 애니 오프닝을 틀어준 적도 있다.[77] 한국에선 두 달만에 작업하다니 인간이냐, 원곡들보다 좋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사실 작업 속도가 빨랐던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길티기어 시리즈의 제작사 아크 시스템 웍스와 현지화를 진행한 YBM 게임사업부와의 협의 하에 기존에 작업하던 곡을 일부 재활용했다.[78] 일부 영상에는 외국인들의 RIP Crom Shin 같은 댓글도 있다.[79] 2003~2005 라이브 리믹스에서 Ditto가 사용됨[80] 농담이라고 자주 말한다. 하지만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그 세라복은 와이프님 전용이라고 일갈했다.[81] 여담으로 유희열은 이걸 실제로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변태라고 단정지었다.[82] Vol.2는 안 나왔다.[83] 나름 정식 라이센스도 받았다.[84] 홈 레코딩이었는지 사운드에서 조잡함이 묻어나긴 하는데, 오히려 그 점이 더욱 더 저그스러움을 부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85] 김진표 작사, 김영석 작곡[86] 가사에 기진 왜 띄워! 디슨 왜 걸어! 이제와서 거기 벙커엔 왜 숨어!가 있다.[87] 총 7회로 233회, 263회, 291회, 300회, 313회, 400회, 501회에 출연했다.[88] 400회 특집 토론에서 그가 "욕 많이 먹으면 오래산다는데 그럼 전 이미 영생의 길을 걷고 있지 않나..."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89] 상상 플러스 싸이 & 신해철 출연 당시 싸이의 증언[90] 연예인들의 가족이 애완동물을 기르면서 있던 일을 찍은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에서 지석진의 아들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91] 머리에 뱀이 아주 예술이다.[92] 엄정화가 주연으로 데뷔한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의 OST를 프로듀싱하고, OST 타이틀곡이자 엄정화의 데뷔곡인 '눈동자'를 작사/작곡했다.[93] 1집을 싸이와 공동 프로듀스. 1번 트랙의 작곡자가 신해철이다.[94] 전람회의 데뷔 앨범과 2집을 맡았다. 4번 트랙 여행에는 신해철의 육성이, 10번 트랙 '세상의 문 앞에서'는 신해철과 김동률의 듀엣곡. 이후 이 인연으로 김동률은 정글 스토리 앨범에서 피아노를 쳐 줬고, 비트겐슈타인 시절 신해철의 타이피스트 역할을 맡았다.[95] 1집의 많은 곡들을 작곡•프로듀싱했지만 정작 흥한 건 윤일상의 태양은 가득히. 2집이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하는 대박을 거두지만 모종의 사고로 유의미한 활동을 못하게 되고, 소속사를 옮겨 엠씨 더 맥스로 개편하여 대박을 쳤다(!).[96] 토이 보컬 출신.[97] 당시 문차일드 멤버들 나이가 워낙 어린 데다, 경험과 훈련 없이 갑작스럽게 회사에 '팔려오다시피' 들어온 탓에 현재와는 다르게 당시에 멤버들의 작곡 능력은 미흡할 수 밖에 없다.[98] 이 밴드의 기타 겸 보컬리스트였던 사람이 DJMAX 시리즈의 후기 프로듀서였던 PlanetBoom이다.[99] 거의 대부분의 회사들은 문화 개방 이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 때에도 몇몇 소규모 수입업체에서 몇 대 들여와 낙원상가에서 판매하긴 했었다는 듯.[100] 지금도 신디사이저를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그 때 당시에는 지금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도 지금처럼 피아노로 생각하진 않았고(하긴 당시에는 피아노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순수 디지털 신디사이저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이렇게 쓰기는 힘들었다.)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신디사이저가 좋은 취급을 받았던 적도 있다.[101] 정확한 모델명은 Q이다.[102] 서태지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언급한 바로는 친척인것도 모르고 PD와 싸우는 무서운 선배(...)이미지여서 겁을 먹고 찾아갔는데 예상 외로 아주 친절하고 서글서글하게 맞아주었다고 한다. 유희열 역시 많은 분들이 모르는데 후배들에게 참 따뜻한 사람이라며 동의했다. 이현도 역시 20살에 신디사이저(Korg 01/W)와 아타리 컴퓨터를 구입했을 적부터 무작정 신해철을 찾아가 설명과 조언을 들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103]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당시, 서태지가 갖고 있던 상당수의 악기는 신해철이 대신 처분하였다고 한다.[104] 1987년 야마하에서 인수했다.[105] 세계 최초의 디지털 벡터 신디사이저이다. 야마하는 Sequential Circuits를 인수하며 얻은 이 기술을 자사의 신디사이저인 SY22에 써먹었다.[106] 당시 일본의 판매가는 98만엔이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차 한 대는 뽑을 수 있었던 가격.[107]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밴드인 밴 헤일런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의 시그네쳐 모델이다. 정글스토리 앨범 가사집에 의하면, 신해철은 정글 스토리 OST 앨범 녹음할 때(그리고 수록곡인 '아주 가끔은' 뮤비 찍을 때) 이 기타를 사용했는데, 김세황의 것을 빌려서 쓴 것 같다. 참고로 이 때 신해철은 당시 넥스트의 베이시스트였던 김영석이 쓰던(지금도 쓰는) '스테이터스 그래파이트'社의 S2 헤드리스 5현 베이스 기타도 빌려 썼다.[108] 한국 가요에 대해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다수가 줄곧 지적하는 것이 노래의 소재가 다양하질 못하고 사랑타령이라는 것인데 실제로는 유명한 뮤지션들의 대다수들은 사랑 외에도 수많은 소재들을 노래로 불렀다. 다만, 한국인들의 취향이 사랑타령을 크게 선호한 것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모든 노래가 사랑 노래인 것은 아니지만 타이틀곡은 거의 다 사랑 노래다. 이해하기 쉽고, 감정이입하기 쉽고, 그래서 잘 팔릴 수 있기 때문이다.[109]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90년대 당시 N.EX.T는 락 팬들 사이에서 진정한 락 밴드가 아니라고 까였다는 것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내의 락씬이 굉장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 그리고 현재의 락씬은 시간이 흘러 세대가 교체되었으며, 무엇보다 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 당시 한번 죽었다 겨우 부활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많은 인디밴드들이 신해철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신해철에 대한 시선이 바뀐것도 있다.[110] 노래방 자동 변주 시스템 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의 시스템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11] 특히 2010년대에는 노무현의 자살로 인한 충격 때문에 과음을 하여 목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112] 과거 어느 방송에 출연해서 밝히길 아내가 재테크에 제법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본인은 그런걸 전혀 몰라서 아내가 해주는 설명이 어려워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남에도 돈이 있는 사람은 말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번다는게 어떤 것인가는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113] 사실 합법화와 비범죄화라는게 자대고 줄긋듯이 명확하게 차이점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이건 어느정도 논란을 자처한 것도 있다. 이는 신해철 본인도 무릎팍도사에서 대중들의 오해를 사기 쉬운 주제라 이미 지고 가는 싸움이었다고 언급했다.[114] 국내 최고의 인터뷰어인 지승호 작가와의 대담집이다. 어째서인지 네이버 책에는 발행 날짜가 2003년 1월 27일라고 잘못 적혀있다.[115] 마왕의 첫 번째 기일을 기하여 출간된 종합 비평집이다.[116] 앞선 저작이 신해철의 삶을 종합적으로 톺아본 책이라면, 이 책은 15명에 이르는 유수의 음악평론가들이 신해철과 넥스트, 그 외 음악활동까지를 비평하고 재조명한 저작이다.[117] 신해철과 관계가 각별하였던 음악평론가 강헌이 집필한 신해철 평전이다.[118] 쾌변독설의 대담을 진행하였던 지승호 작가가 신해철의 다섯 번째 기일을 기하여 편집하고 엮은 책이다. 쾌변독설에서의 구절과 말들을 발췌했고 마왕에 대한 지승호 작가의 소회가 덧붙었다.[119] 사기 쳐먹을 자료 수집[120] 다만 나중에는 진짜 문신을 했다.[121] 2009년에 신해철은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외증조부'가 독립운동가라고 했는데, 신해철의 어머니는 '김화순'으로 외증조부도 자연히 김씨가 되어야 옳으므로, 외증조부라고 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정확한 표현은 어머니 김화순이 자신의 외조부가 이성구 선생이라고 하거나 신해철 자신의 외외증조부라고 하는 게 맞다.[122]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무단사용의 메인 타겟이 된 인트로 부분의 "대한민국" 목소리는 신해철 본인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솔로다. 솔로 파트인데도 무단으로 갖다 쓴 것이다. 깔끔한 떼창 목소리가 필요해서 부득이하게 갖다 쓴 것도 아니란 얘기다.[123] 대신 비영리적 목적에는 해당 음원 사용을 허용하는 대인배적 모습을 보여주었다.[124] 일부 네티즌은 FC 서울의 추모행사가 고인능욕이라고 하는데, FC 서울의 추모행사가 정말 고인능욕이 맞다면 언론에서도 엄청나게 비판했겠지만 당시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덧붙여 서로 비난하고 맹렬히 싸우는 정치인들조차 상대 진영 정치인이 상을 당하면 조문을 가는 것이 예의인데 하물며 신해철이 개인적인 소신으로 FC 서울 응원을 철회했고 그래도 FC 서울은 과거 클럽송을 만들었던 인연이 있기 때문에 추모행사를 한 것인데 이것이 고인능욕이라는 것은 아무 공감을 얻을 수 없는 FC 서울 안티팬의 억지 주장일 뿐이다.[125] 지현수가 작곡 및 편곡, 김세황이 기타 연주를 맡았고, 신해철은 최종 사운드 믹싱을 담당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U3D3b6wPFU[126] NHK 프로야구는 재즈 팝이고 KBS 스포츠는 프로그래시브 록이다.[127] 당시 신해철이 M.C The Max 팬카페에 올린 부탁 포스트.[128] 김태원은 훗날 유튜브에서 그를 회고하며 똑똑한걸 숨기느라 고생 많이 했다고 밝혔다. 똑똑한걸 들키면 선배들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고.[129] 부활 1집의 뒷표지에 적힌 라우드니스를 지옥으로 보낼것이라고 적혀있는 문장을 쓴 이호석이라는 사람이 부활 팬클럽 회장이었던 그의 친구라고 한다. 다만 그 문장은 매니저가 쓰고 친구의 이름을 도용당한 것이라고...[130] 여담이지만 하현우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밝히기를,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출연 당시 에메랄드 캐슬'발걸음'도 부르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발걸음'이라는 노래도 신해철이 프로듀싱한 곡이다. 또한 10연승에 성공했을 경우 11연승 도전 시에 부르려고 했던 곡이 Here, I Stand For You였다고 한다.[131] 레어한 음반을 통으로 선곡해서 틀어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난해한 프로그램이었지만 다양성에 있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뮤지션들도 참고삼아 이 프로그램을 들었을 정도로, 전영혁은 대중음악계의 숨은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전영혁 DJ의 학력 파동 이후 아쉽게 2007년에 종영했다.[132] 언론에서 부른 가칭.[133] 다한증 때문에 무대에서 보여준 기타 연주는 대학가요제 당시 기타 솔로 밖에 없었다.[134] 이거 때문에 자신의 유고집에서는 자신을 마징가 Z라고 한다.[135] 신하연은 1990년대 넥스트 시절 신해철을, 신동원은 신인 시절 신해철을 닮았다.[136] 주도는 카시오페아, 트리플S, E.L.F.가 하였고 이들을 묶어 카트엘이라고도 한다. 이 때 원더걸스를 외치는 관객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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