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07 23:21:26

오자키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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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오자키 유타카 (尾崎 豊, Yutaka Ozaki)
국적일본 파일:일본 국기.png
출생1965년 11월 29일, 도쿄 도 세타가야 구
사망1992년 4월 25일 (향년 만 26세), 도쿄 도 도쿄 닛폰 의과대학 부속병원
직업가수, 싱어송라이터
신장178cm
활동1983 –1992
가족오자키 시게미 (1988년–1992년), 오자키 히로야 (1989년생)

보다 자세한 내용은 블로그 참조.

1. 개요2. 생애3. 갑작스런 죽음과 논란4. 여담5. 정규 앨범

1. 개요

그가 노래하기에 세상은 너무 각박했다
당신이 알아야 할 일본가수들에서의 소개 멘트.
일본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한국에서는 포지션이 리메이크한 I Love You 등 발라드 곡의 원곡자로 유명하지만, 자국에서는 록큰롤 전반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전설적인 뮤지션으로 평가받고 있다. 활동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10대 락커라는 반항적이고 파격적인 컨셉으로 주로 젊은 연령대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현지 나이로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의문사한 이후부터는 그가 발표한 곡들 자체에 보다 집중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굳이 한국의 아티스트와 비교하자면 김광석[1] 또는 김현식[2], 혹은 신해철[3]과 비슷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의 오자키 유타카는 그들보다 훨씬 클래식하다. 김광석, 김현식, 신해철 모두 한국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가수이면서도 젊은 세대에겐 이미 구식인데, 오자키 유타카는 아직 일본에서 10대, 20대에 의해 흔하게 커버되며 옛날 노래라는 인식도 거의 없다. 직접적으로는 사노 모토하루의 적자라 할 만 하며 잭슨 브라운, 브루스 스프링스틴, 빌리 조엘, 하마다 쇼고, 이노우에 요스이, 아나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활동 당시에는 반항적인 이미지를 배경으로 한 절대적 인기때문에 중고교에서 터부시되어왔으나 그가 죽고 난 후에 곡들이 재평가되어 〈열다섯의 밤(15の夜)〉이 학교나 세상에 반항하는 내용의 가사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사진과 함께 실리게 되었다. 교과서의 설명에는 '1980년대에 활약하여 요절한 싱어송라이터', '작사 작곡에 몰두하여 라이브에서 자신의 곡을 전심전력을 다해서 노래한~' 등의 글이 실려있다. 실제로 라이브 때 오자키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듯이 절규하듯이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중간중간에 독백을 자주 넣곤 했다.

2. 생애

학생 시절에는 성적이 우수하여 명문고인 아오야마 학원에 합격함과 동시에 육상자위대소년공과학교에 20대 1의 경쟁률로 합격. 그러나 머리를 짧게 깎아야하는 교칙 때문에 아오야마 학원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흡연으로 정학, 밤 중에 시부야에서 친구들과 술마시다 대학생들과 한판 붙어 경찰이 출동하는 등의 말썽을 일으켜 무기한 정학을 받는 반항아적인 성향이 있었고. 결국 출석일수까지 모잘라서 완전 퇴학당했다.(...) 그리고 이것이 첫번째 앨범을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4]

1983년 17세 나이에 《열다섯의 밤(15の夜)》[5], 《I Love You》 등이 수록된 1집 <17세의 지도>로 데뷔했으며 1985년에 발표한 2집 <회귀선>에 수록된 《졸업》이 락음악이라는 장르 + 사춘기의 10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사 + 곱상한 외모 +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가수로 데뷔한 이력 등으로 대히트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팬을 자처하는 10대들이 계속 늘어나기 시작하고 언론으로부터도 '10대들의 대변자'라는 명칭을 받게 되자 오자키는 학교 폭력이 문제시되었던 80년대와 맞몰려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졸업》의 가사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여 학교 창문을 박살내는 학생들까지 나타나자 이 노래는 당대 일본에서 금지곡이 되었다. 당시 소속사측은 "오자키 유타카는 아이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부를 곡을 직접 쓰는 뮤지션이다." 라며 TV 출연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오자키 유타카를 접할 수 있는 매체는 라이브 공연, 잡지에 실린 그의 사진들과 인터뷰가 전부였다. 당시 오자키 유타카의 소속사인 마더 엔터프라이즈는 오자키의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 매체에 실리는 오자키의 사진을 항상 흑백 사진으로 찍었고 오자키가 미소 짓는 모습이 파파라치 등에게 찍히지 못하게 철저히 막았다고 한다.

이렇게 《I Love You》와 《졸업》의 히트로 확실히 뜨는데는 성공했지만 점차 오자키 유타카는 '불량한 10대들의 대변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시도하였고, 소속사는 기존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시키려고 한데다가 오자키를 무리하게 굴려서 다른 사업에 투자하여 생긴 빚을 갚으려는 행태를 보였다. 이후 오자키는 방황을 시작하여 이른바 '10대 3부작' 활동을 마치고 미국에서 휴식을 취할 때 각성제 및 마약에 중독되었다. 결국 6번째 싱글 '核 (핵)'으로 컴백한지 얼마 안된 1987년 9월 24일 오자키는 컨디션 문제로 투어를 중단하였고, 12월 22일 각성제 복용혐의로 구속되었다. (언론에 보도된 것은 1988년 1월 8일)

1988년 2월. 오자키는 집행유예로 출소했고[6] 같은 해 5월에는 자신이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유일하게 꾸준히 면회를 오던 시게미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1988년 6월 21일 싱글 <太陽の破片(태양의 파편)>을, 9월 1일에는 4집 앨범 <가로수>를 발표하고 9월 12일 도쿄 돔에서 부활 라이브를 가졌다. 그러나 당시 오자키는 소속사 마더 엔터프라이즈와의 마찰과 마약 중독의 후유증으로 두차례의 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보였기에 도쿄 돔 공연 이후, 오자키는 1년간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89년 아들 오자키 히로야가 태어나고 기존 소속사와의 관계가 정리되자 오자키는 절차부심하여 1990년 11월 15일 5집 <탄생>을 더블 앨범으로 발표, 성공적으로 재기했고 12월 19일에는 자신의 개인 사무소 ISOTOPE를 설립하였다. 1991년 3월 공식 팬클럽 Edge Of Street를 창단했고 3월 21일에는 자신의 곡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인 <I Love You>를 정식 싱글로 발표했다.[7] 5월 20일부터는 요코하마 아레나를 시작으로 4년만에 전국 투어를 재개하여 10월 30일 성황리에 끝마쳤다. 한편, 오자키는 1991년 당시 인기 여배우였던 사이토 유키불륜 스캔들을 일으켰고 부인 시게미와 이혼 소송에 들어갔다. 오자키 유타카의 유작 앨범인 6집에는 사이토 유키와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가사가 많이 들어있으며 6집의 표지 사진도 사이토 유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주장이 있다. 참고로 스캔들이 터질 당시 사이토 유키는 오자키와의 밀회 사실을 부인했으나 오자키 사후인 1993년 오자키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3. 갑작스런 죽음과 논란

6집 앨범 녹음을 끝마친 지 일주일 후이자 오자키가 그토록 염원하던 일본무도관에서의 공연이 2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1992년 4월 25일 아침, 오자키는 한 민가 앞에서 나체로 쓰러진 채로 동네 주민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발견 당시 오자키의 온 몸에는 멍과 끔찍한 상처 투성이였지만 그를 진찰했던 의사는 과음이라며 부인 시게미를 불러서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 날 시게미가 오자키의 숨이 끊겨있는 것을 발견, 다시 병원으로 이송되어 사망이 확인되었다. 오자키의 공식적인 사인은 폐수종[8]이다. 그러나 민가 앞에서 발견된 모습이 아무리 봐도 집단으로 구타당해서 쓰러진 모습이었고 당시 오자키는 마약중독에서 완전히 치유된 상태였으며 사망 당시 폐수종의 전조 증상도 보이지 않았기에 죽음에 대한 논란이 아직까지도 꺼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 오자키 유타카는 죽기 직전 불편한 관계였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우선 오자키는 자신이 속해있었던 소속사 마더 앤터프라이즈에서 독립하여 자신만의 회사를 설립, 기존의 반항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순수한 뮤지션으로서의 이미지로 활동을 재기하며 투어를 성공적으로 돌았고 민가 앞에서 발견되기 일주일 전 새 앨범 녹음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전 소속사 대표인 후쿠다와 상당히 관계가 안 좋았다.[9] 오자키는 복귀 후 인터뷰에서 "마더 앤터프라이즈 시절 자신의 모습은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단 '노예' 였을 뿐이었다."고 표현하면서 마더 엔터프라이즈의 사장 후쿠다를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가장 싫어하는 사람으로 언급하며 가열차게 비난하였다. 마더 엔터프라이즈의 사장인 후쿠다가 자신을 묶어놓기 위해 자신을 미국에 보내서 강제로 각성제에 중독시켰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또한, 오자키는 개인 사무소 ISOTOPE 사무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경영에 미숙함을 보였다. 오로지 오자키의 팬이라는 이유로 회사에 지원한 젊은이들을 많이 고용하여 회사의 일 처리가 신통치 않았고 오자키 본인도 투자자들과 마찰을 자주 빚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오자키는 사이토 유키와의 불륜으로 부인이었던 시게미와 이혼 소송 중이었고 죽기 직전까지 연재 했던 소설에서 시게미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동의도 하지 않고 폭로하여 그녀가 오자키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상태였다.

생전 오자키가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확인되는 사람도 4월 24일 밤 같이 술자리를 가진 전 부인 시게미였으며 그녀가 계속해서 오자키의 의문사 가능성을 완고히 부정했다는 점이 당시에 꽤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오자키의 몇몇 팬들은 아직까지도 '오자키는 시게미가 죽였다'라고 의심하는 판국이다.

하지만, 그녀가 범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실제로 1994년 TV 아사히에서 오자키 유타카의 의문사 의혹을 보도하는 특집 방송을 제작하기 위해 취재를 하던 도중 제작진이 오자키의 부인 시게미가 오자키의 사망과 관련되어있다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시게미는 제작진을 고소하였고 재판에서 승소하여 프로그램이 엎어져버렸다. 비록 시게미는 오자키와의 이혼 소송이 진행중이었고 오자키가 사망한 당일 1차 술자리에 같이 있긴 했지만 오자키가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마주치자 직접 시게미에게 술 한잔 더 마실테니 먼저 돌아가라고 말한 장면이 CCTV와 종업원들의 진술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사망 원인을 폐수종으로 계속 주장하며 의문사 가능성을 완고히 부정해서 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던 시게미는 2007년 신문 인터뷰를 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시게미는 오자키가 민가 앞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지인들 중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이었으며 오자키는 당시 병원에서 주사를 맞은 것을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놓은 것이라며 무서워 했다고 한다. 결국 연락을 받고 온 매니저와 함께 의사의 말에 따라 오자키를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직후 자신의 손을 붙잡고 '이겨낼 수 있을려나... 미안해'라는 말을 남긴 뒤 사망했다고.

사망 이후 오자키 유타카의 곡에 대한 판권은 소니뮤직으로 옮겨갔는데 그야말로 우려먹기의 신화를 써가고 있다. 오자키를 두 번 죽이는 소니뮤직

4. 여담

  • '10대 3부작'이라 불리는 정규 1집, 2집, 3집은 세 장이 전부 다 버릴 곡 하나 없는 명반이다. 일본 팬들 사이에서는 오자키의 음악은 10대와 20대로 나뉜다는 말도 흔하게 오고갈 정도. 특히 1집 '17세의 지도'는 베스트 앨범보다 더 좋다는 평을 받는 마스터피스로, 일본 음악사로 놓고 봐도 중요한 앨범 중 하나이다.
  • 라이브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를 때마다 실력 기복이 상당히 심하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같은 곡을 불러도 어떤 영상은 무리없이 소화해내는데 어떤 영상은 일반인이 보기에도 좀 심하게 못 부르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가혹한 라이브 스케줄과 잦은 흡연 및 음주로 3집을 녹음할 무렵에는 이미 성대에 무리가왔고 오자키가 마약에 빠지기 시작한 이후 진행된 거의 모든 라이브는 엉망 그 자체였다고 한다. 라이브에서 노래를 하는 도중에 정신나간 사람마냥 한참을 멍떼리고 있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으니.
  • 생전에 자신은 아이돌이 아니라며 TV 출연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오자키를 접할 수 있는 매체는 라이브 공연, 잡지에 실린 그의 사진들과 인터뷰가 전부였다. 오자키의 유일한 TV 출연은 각성제 복용으로 구속된 후 1988년에 복귀했을 때 사죄의 의미로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 太陽の破片(태양의 파편)을 부른 것. 참고로 이때 녹화가 끝나고 나카모리 아키나의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誰かのクラクション(누군가의 클락션) 이라는 제목의 라디오를 진행하기는 했다.[10]
  • 그의 형인 오자키 야스시(尾崎 康)는 판사 출신의 변호사이다. 형제 간의 사이는 원만했고 오자키 유타카는 5살 연상의 형을 존경하여 잘 따랐다고 한다. 오자키 유타카의 '15の夜'의 유명한 가사 '훔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나간다.'에서 훔친 오토바이는 오자키 야스시의 오토바이라고 한다. 오자키 유타카 사후 1994년 회고록 '동생 오자키 유타카의 사랑과 죽음(弟尾崎豊の愛と死と)'을 집필하였는데, 오자키 형제의 유년기와 방황의 시절, 각성제 사건, 소속사 문제 등의 여러가지 사정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 싱어송라이터이자 동시대에 비슷한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던 오카무라 야스유키와는 둘도 없는 절친으로 아주 유명했다. 오카무라가 오자키의 부음을 듣고 난 뒤, 한동안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오열하며 지낼 정도였다고.
  • 2003년 TBS 테레비의 유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학교에 가자(学校へ行こう)의 코너였던 B-Rap High School[11]에서 그의 이름을 패러디한 오자키 마메(尾崎 豆)(...)라는 남성 참가자가 있었다. 오자키 유타카의 한자 이름에서 豊(유타카)[12]의 윗부분인 曲자를 빼버려 豆(마메)[13]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네이밍 센스로는 연식글로브와 필적할 정도의 수준으로, 오자키 유타카의 이름을 패러디 한 만큼 노래도 그의 명곡들을 골라 자신의 작은키 때문에 겪는 에피소드들을 셀프디스 형식으로 코믹하게 개사하여 표현했고, 음성변조를 한 거 같은 특이한 목소리까지 웃음 포인트가 되는 바람에 연식 글로브의 명맥을 잇는 인기 참가자로서 상당히 인기를 얻으며 리퀘스트 어워드에서 연식글로브를 비롯한 쟁쟁한 참가자들 중에 우승을 차지 할 정도였다.물론 오자키 유타카 팬들은 고인드립이라고 싫어했을 듯(...)
  • 오자키가 1989년에 낳은 아들 오자키 히로야는 아버지의 뜻을 물려받았는지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2004년 15세 때 오자키의 데뷔곡인 15の夜(열다섯의 밤)을 불렀다.
  • 일본에서 국민적 인기를 누린 드라마 북쪽 고향에서에서는, 주인공 쿠로이타 준이 첫사랑과 함께 좋아했던 가수로 나온다. 각본가는 오자키 유타카의 곡이 나오는 장면을 쓰기 전, 주연배우인 요시오카 히데타카에게 그저 젊은층이 좋아하는 유행가를 조사해오라고 시켰었는데, 요시오카는 바로 오자키 유타카를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한다.
  • 아라카와 히로무백성귀족 1권에서 작가가 담당기자 이시이와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이시이가 열다섯의 밤을 부르는데,우리의 소여사님은 훔친 오토바이부분을 훔친 덤프트럭으로 바꿔 부른다.
  • 여담으로 잘생겼다. 우리나라에서도 포지션I Love You의 원곡자로 알려져 있지만 잘생긴 외모로도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와 일본 성인 남성 평균 키를 훌쩍 넘는 178cm이다. 얼굴도 우리나라 미남 연예인에 비하면 꿀리지 않을 정도고 30년전 사람이지만 지금으로 쳐도 잘생긴 편에 속한다. 약간 배우 정우성 느낌이 난다는 의견도 있는 편 일본에서도 얼굴로 인기가 많았다.
  • I Love You는 일본 국민 대표 러브송이다. 우리나라에서 포지션 덕분에 이 노래가 유명해진 케이스지만 다른 노래도 엄청난 명곡이다. Oh My Little Girl이나 Forget-me-not (물망초) 이 노래도 꼭 들어보자
  • 일드 바람의 소년~오자키 유타카 영원한 전설에서는 나리미야 히로키가 맡았다. 실제로 그 두 사람이 매우 닮았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나라에서 김광석이랑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받는다. 1집[14] 2집 3집이 다 히트를 했고 유명한 곡들이다. 김광석과는 다르게 사망 이유가 약물 중독이지만 타살 의혹이 있는 편이다. 아라치구 주근 민가에서 몸 전체가 폭행당한 채로 발견되었다. 소속사랑 갈등으로 야쿠자까지 불러들어서 타살했을 가능성이 있었고 폭행 흔적도 있어 타살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약물중독이었다. 여러므로 김광석과 같은 인생을 살다 간 가수다.

5. 정규 앨범

오자키 유타카/음반 목록을 참고하십시오.
[1] 일본인이 대구 김광석 거리로 여행을 올 때 한국의 오자키 유타카라고 이해한다고 하며, 일본인의 관광 소개 또한 한국의 오자키 유타카로 소개한다. 죽음 과정에서 사이가 극히 좋지 않은 아내가 일으킨 타살이라는 설이 나돌고, 이 설이 조사결과 사실이 아님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 또한 비슷한 면이 있다.[2] 오자키 유타카가 조금 더 사회에 대한 비판, 반항적인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3] 오자키 유타카는 노래로, 신해철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사회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심지어 그 둘의 음악 장르도 로큰롤로 똑같다! 또한 그 둘의 죽음에는 병원 측에도 책임이 있다.[4] 사실 퇴학이 아니라 본인이 자퇴한 것이다. 오자키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유급당하더라도 학교를 졸업해서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그를 담당했던 선생님이 그에게 졸업할 때까지 매일 반성일기를 쓰라고 강요했고, 이에 격분해 선생님과 말다툼을 한 뒤 "자퇴서를 낼거라면 나를 죽이고 가라"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5] 그가 중학교 시절에 가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곡으로 친구가 두발검사에 걸린 것이 가출의 동기였다고 한다.[6] 판사는 판결을 내리면서 오자키에게 "인기 가수로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업무상의 슬럼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이 금지하고있는 각성제의 사용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부모가 가수 생명이 끊길 위험을 감수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아들이 마약에서 벗어나게 하려 한 열정을 참작하여 다시 갱생의 기회를 준다. 하루 빨리 회복하라 "고 말했다. 또한, 오자키는 판결이 내려 질 때까지 자신이 실형을 살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다.[7] 그 전까지 <I Love You>는 싱글로 발매된 적이 없었다.[8] 폐포 속에 많은 점액이 축적되어 팽창하는 질환. 주로 마약중독이나 폐가 약할때, 또는 천식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이나 심부전인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질병이다.[9] 참고로 일본은 한국과 달리 기획사와 음반사가 다르다. 소속사는 가수의 매니지먼트를, 음반사는 앨범의 제작 및 판매를 전담한다. 위키에 쓰여져있던 것과는 달리 오자키와 소니 뮤직과의 사이는 좋았다. 죽기 일주일 전 녹음한 새 앨범도 소니 뮤직 산하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10] 청취자들이 보내온 사연이나 자신이 감명깊게 읽은 글귀들을 오자키가 낭독하는 방송이었다. 사전 녹음으로 제작되었다. 1985년 10월부터 1986 년 3월, 1986년 10월부터 1987 년 3월까지 방송. 방송일자를 보면 알겠지만 오자키가 Last Teenage Appearance 투어를 끝내고 무기한 활동중지를 선언하고 휴식 겸 음악연수를 받으러 뉴욕에 있을 때 송출되었다. 참고로 이 시기에 TV에서 《너무 빠른 전설》이라는 타이틀로 오자키 유타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했다.[11] 연식글로브가 출연했던 그 코너다.[12] 우리나라에서는 풍년 풍으로 유명한 한자다. 참고로 삼풍백화점에도 들어가는 한자다(...)[13] 우리나라에서는 '콩 두'로 불리는 한자.[14] 김광석의 1집 앨범은 매니아사이에서 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