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2-26 13:42:33

빌리 조엘

파일:로큰롤 명예의 전당 로고.pn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1]
{{{#!folding [ 펼치기 · 접기 ]이름빌리 조엘
BILLY JOEL
멤버(개인자격)
입성 연도1999년
후보자격 연도1997년
후보선정 연도1998년, 1999년}}}
빌리 조엘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Kennedy Center honors.jpg
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0세기 수상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1978년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조지 애벗, 릴리안 기쉬,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흄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앨빈 에일리, 조지 번스,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베티 콤덴, 로이 아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조니 카슨, 아서 미첼, 조지 숄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포이티어, 닐 사이먼
1996년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닐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앤절라 랜즈베리 }}}
21세기 수상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2001년줄리 앤드루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제임스 브라운, 캐럴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콜세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매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만 레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셰어, 필립 글래스, 리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
}}} ||

파일:external/www.brooklynvegan.com/grammy.jpg 그래미 레전드상 수상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1990년1991년1992년1993년1994년
앤드루 로이드 웨버
라이자 미넬리
스모키 로빈슨
윌리 넬슨
아레사 프랭클린
빌리 조엘
조니 캐쉬
퀸시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마이클 잭슨 프랭크 시나트라
커티스 메이필드
1998년1999년2003년
루치아노 파바로티 엘튼 존 비 지스 }}}

파일:external/www.brooklynvegan.com/grammy.jpg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수상자
Grammy Award for Album of the Year
1980년~1999년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959년 ~ 1979년
2000년 ~ 201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파일:81oaJzaPW3L._SY355_.jpg 파일:A4180BF9-C356-43D4-AE5E-C515E9927CF0.png 파일:external/imaginepeace.com/doublefantasy.jpg 파일:46129390-CC16-489C-9318-A4C673113F53.png 파일:Thriller.jpg
빌리 조엘크리스토퍼 크로스존 레논 & 오노 요코토토마이클 잭슨
52nd Street Christopher CrossDouble FantasyToto IVThriller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파일:45E44654-9CA4-4B5F-AD3B-F597ED98D9E9.png 파일:33BD2E7E-F407-4DCC-B29C-445466D96D15.png 파일:A1CBFCEE-BD23-4489-BE0D-BCC993C3AA5A.png 파일:external/cdn.u2.com/600.jpg 파일:george-michael.jpg
라이오넬 리치필 콜린스폴 사이먼U2조지 마이클
Can't Slow DownNo Jacket RequiredGracelandThe Joshua TreeFaith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파일:EB17CFD7-E7B9-475F-BA56-6E165CA67ECE.png 파일:8DAD396F-C810-4272-8E6A-57B710FADE25.png 파일:9F7ED88D-1CC6-4AC4-A91C-8D15C2E845FF.png 파일:AD70BF4C-8FD4-4A48-A21F-B9E067FFD967.png 파일:The Bodyguard Soundtrack.jpg
보니 레잇퀸시 존스 & Various Artists내털리 콜에릭 클랩튼휘트니 휴스턴
Nick of TimeBack on the BlockUnforgettable... with LoveUnplugged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파일:28F09689-FF26-4BB1-9530-E997863C6EC9.png 파일:81UsU658UVL._SL1425_.jpg 파일:CB48ABDF-3DD5-41CA-BCA9-00BA55351129.png 파일:531A5E74-8685-40EF-A3F4-8DFE19CC5A26.png 파일:images fjxjwk.jpg
토니 베넷앨라니스 모리셋셀린 디옹밥 딜런로린 힐
MTV UnpluggedJagged Little PillFalling into YouTime Out of Mind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 {{{#000000 ※2018년 [[빌보드]]가 발표한 빌보드 HOT 100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순위다. 얼마나 많은 곡들을 차트에 높은 순위로 진입시키고 유지했는가를 기준으로 산정한 리스트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싱글을 많이 낸 뮤지션들이 더 유리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크다. 새롭게 순위가 업데이트된다면 수정바람.}}}
1위2위3위4위5위
비틀즈 마돈나 엘튼 존 엘비스 프레슬리 머라이어 캐리
6위7위8위9위10위
스티비 원더 자넷 잭슨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리아나
11위12위13위14위15위
롤링 스톤스 폴 매카트니 비 지스 어셔 시카고
16위17위18위19위20위
슈프림즈 프린스 홀 앤 오츠 로드 스튜어트 올리비아 뉴튼 존
21위22위23위24위25위
드레이크 아레사 프랭클린 마빈 게이 테일러 스위프트 케이티 페리
26위27위28위29위30위
필 콜린스 빌리 조엘 다이애나 로스 포 시즌스 템테이션스
-2 {{{#000000 [[https://www.billboard.com/charts/greatest-hot-100-artists|출처]]}}}
-2 {{{#000000 같이 보기: [[틀:빌보드 차트 올타임 아티스트(앨범)|앨범]]}}}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 {{{#000000 ※2015년 [[빌보드]]가 발표한 빌보드 200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순위다. 얼마나 많은 앨범들을 차트에 높은 순위로 진입시키고 유지했는가를 기준으로 산정한 리스트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앨범을 많이 낸 뮤지션들이 더 유리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크다. 새롭게 순위가 업데이트된다면 수정바람.}}}
1위2위3위4위5위
비틀즈 롤링 스톤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가스 브룩스 엘튼 존
6위7위8위9위10위
머라이어 캐리 허프 알퍼트 테일러 스위프트 시카고 마이클 잭슨
11위12위13위14위15위
레드 제플린 브루스 스프링스틴 로드 스튜어트 에미넴 휘트니 휴스턴
16위17위18위19위20위
빌리 조엘 마돈나 산타나 이글스 플리트우드 맥
21위22위23위24위25위
밥 딜런 스티비 원더 셀린 디옹 에릭 클랩튼 닐 다이아몬드
26위27위28위29위30위
존 덴버 핑크 플로이드 자넷 잭슨 프린스 캐롤 킹
-2 {{{#000000 [[https://www.billboard.com/charts/greatest-billboard-200-artists|출처]]}}}
-2 {{{#000000 같이 보기: [[틀:빌보드 차트 올타임 아티스트(싱글)|싱글]]}}}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png
이름빌리 조엘
BILLY JOEL
분야음악
입성날짜2004년 9월 20일
위치6235 Hollywood Blvd.}}}
Billy Joel
파일:빌리 조엘.jpg
이름빌리 조엘(Billy Joel)
본명윌리엄 마틴 조엘(William Martin Joel)
국적미국 파일:미국 국기.png
출생1949년 5월 9일, 뉴욕 주 브롱크스
직업싱어송라이터
신장166cm
배우자엘리자베스 웨버(1973~1982)
크리스티 브링클리(1985~1994)
케이티 리(2004~2010)
알렉시스 로데릭(2015~)
자녀장녀 알렉서 레이 조엘, 차녀 델라 로스 조엘
활동1965년~
데뷔1971년 1집 《Cold Spring Harbor
악기보컬, 건반 악기, 기타
장르, , 피아노 록, 팝 록, 로큰롤, 소프트 록,
컨트리 록, 포크, 재즈, R&B, 클래식
링크BJ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파일:유튜브 아이콘.png 파일:VEVO.png
1. 소개2. 경력
2.1. 초기 시절
2.1.1. 밴드 활동과 세션연주자 (1965~1970)2.1.2. Cold Spring Harbor부터 Turnstiles까지 (1971~1976)
2.2. 전성기
2.2.1. The Stranger부터 Songs In The Attic까지 (1977~1981)
2.3. 위기와 새로운 만남
2.3.1. The Nylon Curtain부터 Концерт까지 (1982~1988)
2.4. 다시 찾아온 위기와 제2의 전성기
2.4.1. Storm Front부터 River Of Dreams까지 (1989~1993)
2.5. 투어 활동 (1994~)
2.5.1. Face To Face (1994~2010)2.5.2. 이후 활동 (1994~)
2.5.2.1. 1994~20052.5.2.2. 2006~
3. 내한공연4. 엘튼 존5. 빌리 조엘 밴드6. 개인적인 삶
6.1. 가족6.2. 건강
6.2.1. 오토바이 교통사고
6.3. 그 외
7. 디스코그래피
7.1. 싱글
7.1.1. 빌보드 1위7.1.2. 빌보드 2위7.1.3. 빌보드 3위~10위7.1.4. 빌보드 11~20위7.1.5. 빌보드 21~40위

1. 소개

미국싱어송라이터. 1949년 5월 9일 출생. 미국 뉴욕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2] 유대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이다. 아버지는 독일인, 어머니는 미국인.

작사작곡은 본인이 혼자서 하며 주로 피아노를 기반해서 작곡된 곡들이 대부분이다. 대표곡 "Piano Man"처럼 서사적이고 애환을 담은 통렬한 가사를 써서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으로 평가를 받고 남성적인 파워풀한 보컬이 인상적이다. 그를 명칭하는 닉네임은 "Piano Man".

1971년 1집 Cold Spring Harbor부터 1993년 《River Of Dreams》까지 총 12집의 정규 앨범들을 발매했으며 12집을 끝으로 앨범 작업에서 은퇴를 했다. 그 이후로 발매된 앨범들은 라이브 실황과 컴필레이션 앨범. 2001년에 13집이자 클래식 앨범 《Fantasies & Delusions》을 발매했는데 팝 앨범이 아니라 피아노 연주곡들로 수록된 클래식 앨범이다. 이 앨범 이후에도 정규 앨범은 한장도 안 나왔다. 2007년에 발매된 싱글로 "All My Life"와 "Christmas In Fallujah"가 발매되었지만 팝 음악 작업에서 사실상 은퇴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1987년 7~8월, 구소련에 방문하여 순회 공연을 진행한 첫번째 미국의 뮤지션이고 최초로 서방 뮤지션의 공연이 FM라디오로 통해서 방영되었다.

전세계적으로 1억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으며 RIAA에 따르면, 미국에서 6번째로 가장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린 뮤지션이라고 한다. 참고로 음반 판매량 인증 시스템이 있기 전에 활동하던 가수들은 이 집계에서 제외되었다. 1985년에 발매된 《Greatest Hits - Volume I & Volume II》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를 거둔 앨범들 중 하나이다. 빌보드 200에서 가장 성공한 뮤지션 16위로 꼽히기도 했다.

199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3년에는 버클리 음악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Hon DMus)를 받았으며 총 6개의 명예 학위를 보유하고 있다. 2013년에는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2013년 12월, 뉴욕의 실내 경기장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특허권을 받아 무한정으로 공연을 진행할 수 있고 그 뒤로 대부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들을 진행했기 때문에 2010년대 시점으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진행한 뮤지션이 바로 빌리 조엘이다. 1978년 12월 14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첫 공연을 진행한 이후로 2017년 7월 기준으로 102차례의 공연을 진행했다. 2위는 70차례의 공연을 진행한 엘튼 존.[3][4]

2. 경력

2.1. 초기 시절

2.1.1. 밴드 활동과 세션연주자 (1965~1970)

파일:external/www.nytimes.com/mag-26Joel-t_CA1-popup.jpg
15세의 빌리 조엘. 1964년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윌리엄 마틴 조엘(William Martin Joel)의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 유대인 하워드 줄리어스 조엘(Howard Joel), 어머니는 미국 유대인 로서린드 니만 조엘(Rosalind Nyman Joel). 하워드 조엘은 태어났을 때 성이 헬무트(Helmuth)였고 이후 하워드로 개명했다.

부모는 1942년에 만났고 4년 뒤인 1946년에 결혼했다. 빌리 조엘은 브롱크스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뉴욕의 레빗타운에 이사를 가서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레빗타운에서 보냈다. 8살이 되던 해인 1957년에 부모는 이혼했고 아버지 하워드는 오스트리아으로 건너가 다른 여성과 재혼해 아들 '알렉산더 조엘'(Alexander Joel)을 얻어 가정을 새로 차렸고 어머니 로서린드는 재혼하지 않았다.[5]

빌리 조엘은 3살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어머니에 의해 피아노 레슨도 받기 시작했다. 빌리 조엘을 가르쳤던 피아노 교사들 중에서 미국의 피아니스트 모튼 에스트린과 뮤지션 티모시 포드가 있었다. 그렇게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면서 십대때는 아마추어 복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총 22번의 경기에서 우승했지만 24번째 경기에서 코 부상을 심하게 당해서 복서 생활을 중단했다. 이때 부러진 코의 모양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고등학생부터 여러 클럽들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일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본인이 다니던 힉스빌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피아노 레슨을 받았을 때 클래식을 전공했는데 이때 로큰롤R&B의 다양한 뮤지션들의 음악들도 들으면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빌리 조엘이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가지기 시작한 건 1964년 2월, 에드 설리번 쇼에서 방영하던 비틀즈의 라이브 영상을 본 것이었다.

16살이던 해인 1965년, 친구들과 함께 뮤지션의 곡들을 커버하면서 부르던 밴드 <에코스>를 결성했고 피아노 세션으로 고용되어 여러 음반사에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그룹 샹그리-라스(The Shangri-Las)의 "Leader Of The Pack"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데모로 녹음하기도 했고 이 곡은 이 그룹의 히트곡이 되었다. 같은 그룹의 "Remember (Walking In The Sand)"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했다.[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Hassles.png
더 해슬스 (The Hassles). 왼쪽이 빌리 조엘
에코스는 1965년에 "Lost Souls"로 이름을 교체되었지만 빌리 조엘은 밴드에서 탈퇴해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더 해슬스(The Hassles)에 들어가 키보디스트로 활동했다. 1967년 11월 21일에 1집 《The Hassles》를 발매해 가수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해슬스의 1집은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했고 1969년에 발매된 2집 《Hour Of The Wolf》 역시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두 앨범의 음악성은 피아노 록사이키델릭 록의 사운드에 충실하고 있지만 워낙 실험적이고 난해한 탓에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67년 11월에 발매된 리드 싱글이자 커버곡인 "You've Got Me Hummin'"은 빌보드 112위로 1주 동안 기록되는 안습한 성적을 보였지만 이는 더 해슬스의 유일한 성공이었다. 이후 빌리 조엘은 이 곡을 한창 전성기인 1983년에 발매된 "Tell Her About It" 12인치 싱글 B면에 수록하기도 했다.

결국 빌리 조엘은 상업적인 실패와 멤버들 간의 불화로 인해 더 해슬스에서 탈퇴했고 더 해슬스의 드러머 '존 스몰'과 같이 1970년에 2인조 듀오 아틸라(Attila)를 결성했다. 1970년 7월 27일에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메탈 사운드를 담은 1집 《Attila》를 발매했지만 역시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했고 올뮤직에서 역사상 최악의 록 앨범 중 하나라는 혹평을 내리면서 아틸라 활동도 접었다. 1970년 10월, 빌리 조엘이 존 스몰의 아내였던 엘리자베스 웨버 스몰과 불륜을 저질러 존 스몰과의 관계도 막을 내렸다.

빌리 조엘은 친구의 아내를 뺏었다는 죄책감, 몇년간 이어온 상업적인 실패와 이어지던 무명으로 인해서 음악적으로 큰 좌절감을 느껴 우울증을 가지게 되면서 어두운 기간을 보내었다. 결국 당시 아틸라의 매니저이자 빌리 조엘의 매니저였던 어원 만주르의 아파트에서 가구 세정제를 한병을 마셔 자살을 시도했지만 존 스몰이 바닥에 의식을 잃어 누워있던 빌리 조엘을 발견해 서둘리 병원으로 보내졌다. 3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고 주변 동료들이 도와주게 되면서 정신을 차렸다.

당시 도움을 준 사람 중에서 빌리 조엘의 이복 누나인 쥬디트 조엘도 있는데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Why Judy Why"를 쓰기도 했다.

비록 존 스몰과의 관계를 청산하긴 했지만, 존 스몰은 이후 1987년 《Концерт》, 2008년 《Live At Shea Stadium: The Concert》 라이브 영상들의 프로듀서로 맡기도 한 걸 보면 관계는 그럭저럭 왠만했던 걸로 보인다.

2.1.2. Cold Spring Harbor부터 Turnstiles까지 (1971~1976)

1970년에 여러 힘든 고비를 보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여자친구였던 엘리자베스[7]와 뉴욕의 Cold Spring Harbor 항구 주변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1971년 7월에 Family Productions 음반사와 계약을 하게 되면서 솔로 앨범을 작업했다. 그해 여름에 작업되어 1971년 11월 1일에 발매된 1집 Cold Spring Harbor으로 솔로로 데뷔했다. 하지만 이 데뷔도 순탄치 않았다. 앨범의 마스터링 중에 턴테이블이 빨리 돌아가는 채로 작업되어 곡의 속도와 빌리 조엘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음이 몇 피치나 올라갔다. 이를 전혀 고치지 않고 그대로 발매했다.[8]

1971년 원본 판, Cold Spring Harbor의 1번 트랙 She's Got A Way.

그 결과 성공은 커녕, 또다시 커다란 실패를 맛보았다. 빌리 조엘이 자신의 앨범을 듣다가 화가 치밀어 올라 음반을 찢어버리고 창 밖에 던져버렸다. 빌리 조엘은 24년 뒤인 1995년, 독일 뉘른베르크 대학 강연에서 이에 대한 비화를 자세히 설명했는데, 당시 자신의 친구들과 같이 앨범을 듣고 있다가 친구들이 목소리가 계집애 같다고 놀리면서 대폭소를 했다고 한다. 본인의 보컬을 다람쥐[9]로 표현했다.

결국 빌리 조엘은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프로듀서이자 Family Production 음반사의 사장 아티 립,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의 소유자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고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곡들의 저작권에 대한 모든 권리를 빌리 조엘한테 서명했다. 하지만 빌리 조엘은 1971년에 Family Production에서 10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기 때문에 1973년 콜롬비아 음반사와 계약 이후, 1977년부터 전성기를 보내면서 발매된 히트 앨범과 싱글들의 커다란 수익을 Family Production이 여전히 받고 있었고 1986년 10집 《The Bridge》까지 15년 동안 빌리 조엘의 음반사로 유지하고 있었다. 빌리 조엘의 경력에서 한동안 붙어있던 혹이었던 셈.

앨범의 사운드 에러와 무관한 "She's Got A Way"와 "Everybody Loves You Now" 등의 싱글들도 차트 진입에 실패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변함없이 이어진 상업적인 실패, 음반사와의 계약 문제로 데뷔 초부터 갖가지 문제들을 안고 오히려 더욱 힘들고 순탄치 못한 시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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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센트럴 파크에서
빌리 조엘은 Cold Spring Harbor에 참여한 세션 연주자들과 투어 밴드를 결성하여 1971년 11월부터 투어 활동을 시작했고 Family Productions의 계약 문제와 음반 작업으로 인해서 뉴욕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겼다. 그럼에도 빌리 조엘은 다른 음반사와 계약을 원했다. 1972년 봄까지 《Cold Spring Harbor》 투어 활동을 마치고 나서 1972년에 6개월 동안 로스앤젤레스의 윌셔와 웨스턴 애비뉴의 교차로 근처에 위치한 한 술집에서 빌 마틴이라는 가명으로 피아노 연주자로 잠시 일했다. 어떻게든 음반사의 계약을 따기 위해서 다시 밑바닥부터 일했던 것.

무명의 빌리 조엘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었던 필라델피아 라디오 방송국 WMMR의 음악 감독 데니스 윌렌이 빌리 조엘을 초대해 본인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공연을 진행하게 준비하려 했다. 그렇게 빌리 조엘은 1972년 4월 15일, 토요일 밤에 밴드와 같이 공연을 진행하게 될 준비를 했다. 그렇게 라디오 방송국의 스튜디오에서 1집 수록곡들과 일부 미발매곡들[10]로 구성된 12곡을 불렀고 이 공연은 라디오에서 전파됐다. 특히 이 공연에서 부른 "Captain Jack"가 라디오에서 수차례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싱글로 발매하지 않아도 커다란 인기를 끌었을 정도.

몇개월 뒤, 뉴욕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이 라이브 버전을 복사한 여러 테이프를 방영하는 등 상황이 좋아지고 있었고 그 결과 각종 음반사에서 빌리 조엘과 계약을 하기를 원했다. 1973년 1월, 아틀란틱 음반사에서 제안이 왔지만 이를 거절을 했고 본인이 원하던 콜롬비아 음반사와 계약을 했다. 당시 콜롬비아의 사장이 "Captain Jack"의 라이브 버전을 우연히 듣게 되면서 빌리 조엘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 콜롬비아와 계약 이후, 8개월 뒤인 1973년 9월, 로스앤젤레스의 Devonshire Sound 스튜디오에서 2집 《Piano Man》을 작업했다.

타이틀 트랙 "Piano Man"이 1973년 11월 2일에 리드 싱글로 발매되었고 앨범은 11월 9일에 발매되었다. 미국 빌보드 27위, 캐나다 26위, 호주 16위[11]로 올라 처음으로 차트 진입에 성공하여 히트를 거두었고 이후 미국에서 4백만장 이상의 판매를 거두어 플래티넘 4장을 기록했다. 앨범 발매 당시 수록곡 "Piano Man", "Captain Jack"과 더불어서 평론가들한테 호평을 받았고 본격적으로 무명을 벗어나 정상적인 가수 활동이 시작되었다.

"Piano Man"으로 무명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Piano Man"으로 생긴 수익 중 대부분은 빌리 조엘에게 오는건 별로 없었다. 《Piano Man》에 참여한 세션연주자들은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손 꼽히던 전문 세션들이었지만 몇년 간 밴드와 활동했던 빌리 조엘은 솔로 가수처럼 정식 밴드가 아닌 세션들과 같이 작업한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꼈다. 결국 가수 생활도 어정쩡하게 되었고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던 생계 문제와 《Piano Man》의 성공과 인기를 편승시켜야 할 다음작을 작업하기에 상당한 부담감과 압박을 느꼈다.

그렇게 1974년 봄부터 여름까지 노스 할리우드의 Devonshire Sound 스튜디오에서 3집 《Streetlife Serenade》를 작업해 그 해 10월에 발매했지만 미국 빌보드 35위, 캐나다 16위, 호주 85위로 올랐고 백만장 정도의 판매량을 거두어 《Piano Man》에 비하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싱글들도 크게 히트치지 못했고 전작과 달리 평론가들은 3집에 대해 혹평을 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Streetlife Serenade》는 전작에 비해 한층 안정적이고 간결한 음악성을 보이는데 반응이 좋지 못했던 것.

《Streetlife Serenade》는 콜롬비아에서 《Piano Man》에 이을 편승작으로 작업하라는 반 강요로 시작해 작업된 앨범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빌리 조엘은 평론가와 음악 업계의 껄끄럽고 냉담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사실 이는 "Piano Man"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콜롬비아에서는 러닝타임이 5분이나 되는 곡은 라디오에서 방영되기엔 길다고 생각해 빌리 조엘의 동의 없이 본인들 마음대로 곡의 2절 반 이상을 편집하고 3분으로 줄인 버전으로 싱글로 발매했다. 결국 빌리 조엘은 이에 관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졌다고. 그래서 이에 관한 비화와 음악계 산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3집의 6번 트랙 "The Entertainer"를 작곡했지만 "The Entertainer"도 예외가 아니었으므로 4분 정도의 곡을 3분 5초로 편집해 싱글로 발매했고 빌보드 30위 정도 올라 크게 히트치지 못했다.

비록 무명에서 벗어났음에도 변하지 않던 생계 문제와 《Piano Man》 이후로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성공, 본인보다 대표곡 "Piano Man"과 "Captain Jack"이 더욱 알려진 상황이라서 오히려 반 무명에 가까웠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1971년 이후로 꾸준히 진행하고 있던 투어 활동, 1974년부터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본인의 입지도를 넓히려고 노력했고 인지도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1972년부터 3년간 이어졌던 로스앤젤레스의 생활을 마치고나서 1976년 1월, 뉴욕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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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Turnstiles》 투어
본인의 고향인 뉴욕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빌리 조엘은 기쁜 마음으로 뉴욕에 관한 주제로 삼은 4집 《Turnstiles》를 작업했다. 콜롬비아는 시카고의 프로듀서인 제임스 윌리엄 가르시오를 영입하여 4집의 프로듀싱을 맡게 했고 엘튼 존 밴드의 전 멤버 드러머 나이절 올슨, 베이시스트 디 머리[12]를 영입하여 콜로라도의 Caribou Ranch 스튜디오[13]에서 녹음했다.

하지만 빌리 조엘은 가르시오의 프로듀싱을 맘에 들어하지 않아해 가르시오를 프로듀서 직에서 물러가게 했고 편곡자 켄 애셔와 같이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으면서 뉴욕 헴스테드의 Ultrasonic 스튜디오에서 앨범을 재녹음했다. 당시 아내였던 엘리자베스 웨버를 자신의 사무 관리자로 세우기도 했다. 4집 《Turnstiles》는 전작들에 비해 월등히 높아진 완성도로 올뮤직에선 별 4개 반이나 줄 정도로 호평을 받은 수작이다.

가장 돋보이는 수록곡 "Say Goodbye To Hollywood", "Summer, Highland Falls", "New York State Of Mind", "Prelude/Angry Young Man", "Miami 2017"으로 빌리 조엘의 클래식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4집은 미국에서 빌보드 122위 밖에 오르지 못해 전작들보다 더욱 크게 실패했고 거의 시망 수준이었다. 하지만 호주에선 12위로 올라 골드를 기록해 크게 면했으며[14] 팬들도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7년에 발매된 리드 싱글 "Say Goodbye To Hollywood"는 차트 진입에 실패했고 "James"는 네덜란드 16위, 벨기에 22위로 올라 유럽에서 비교적 양호한 성적을 거두었다.

1975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빌리 조엘 밴드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1974년 《Streetlife Serenade》 투어에서 베이시스트 '더그 스테그마이어'가 합류한 걸로 시작해 1975년에는 기타리스트 '러셀 재버스', '하위 애멀슨',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 색소폰 '리치 카나타'가 합류했다. 러셀 재버스는 1979년에 영입된 스티브 브라운과 같이 기타 세션으로 활약했고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는 2004년까지 30년 동안 함께한 대표적인 동료 중 하나이다. 1975년에 구성된 라인업으로 《Turnstiles》부터 선보이기 시작했고 1988년까지 8년간 함께했다.

2.2. 전성기

2.2.1. The Stranger부터 Songs In The Attic까지 (1977~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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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52nd Street》 투어. 항상 담배를 물며 간지를 보였다.
꾸준히 투어 활동을 하고 있던 1977년 여름, 빌리 조엘은 프로듀서 계의 거물인 필 라몬과 함께 5집 《The Stranger》를 작업했다. 빌리 조엘은 1973년 2집 《Piano Man》 이후로 큰 성공을 맛보지 못해 새 앨범도 전작들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약세를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1977년은 세계적으로 디스코가 크게 유행하던 해였기 때문에 우려했던 것. 하지만 필 라몬은 빌리 조엘의 음악성을 확실히 짐작하여 큰 기대를 걸면서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5집은 1977년 7~8월 뉴욕 7번 거리의 A&R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작업되었는데 수록곡들은 대부분 1977년 초~중순에 작업되었기 때문에 앨범 작업이 신속했다.

빌리 조엘의 우려와 달리 5집은 대성공이었다. 미국 빌보드에서 2위로 올라 처음으로 10위 진입에 성공했고 영국에서도 처음으로 차트에 진입한 앨범이 되었다. 영국 24위, 호주 3위, 캐나다 2위, 일본 오리콘 LP 차트 3위 등 다수의 국가에서 10~20위 안에 진입되어 높은 성적을 기록하여 전작들에 비하면 일취월장 그 자체였다. 미국에서는 무려 1천만장 이상이나 하는 판매를 거두어 다이아몬드를 기록했으며 다른 국가에서도 높은 판매량을 보여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Bridge Over Troubled Water의 기록을 깼고 1985년에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콜롬비아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앨범이 되었다.

5집의 싱글 "Movin' Out (Anthony's Song)"은 빌보드 17위, 캐나다 11위, "She's Always A Woman"은 빌보드 17위로 올랐으며 1977년 9월에 발매된 리드 싱글 "Just The Way You Are"는 빌보드 3위, 빌보드 AC 1위, 캐나다 6위, 영국 19위 등 빌리 조엘의 첫 히트곡이자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가 되었다. "Just The Way You Are"는 커다란 사랑을 받아 2년 뒤 1979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곡, 올해의 음반 부문에서 우승했다. 앨범과 싱글의 대성공으로 1977년 이전의 반 무명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슈퍼스타 반열에 올라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보내었다. 1967년 이후로 무려 10년 만에 이룬 쾌거. 필 라몬은 5집부터 1986년 10집 《The Bridge》까지 참여하여 빌리 조엘의 프로듀서로도 유명해졌다.

1978년 10월에 발매된 6집 《52nd Street》는 빌보드 200 1위, 캐나다 1위, 호주 1위, 뉴질랜드 1위, 영국 10위로 올라 대성공을 거두었고 처음으로 1위로 오른 앨범이 되었다. 전체적인 판매량은 《The Stranger》가 더욱 높지만 이 앨범 전작 못지 않는 대성공을 거두어 음악적 완성도와 전작의 인지도도 같이 편승하는데 성공했다. 1979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후보로 오른 "Just The Way You Are", 《52nd Street》가 우승했고 "Honesty"는 노미네이트로 그쳤다. 《The Stranger》와 더불어 가장 큰 영예를 누린 앨범이자 가장 커다란 성공을 거둔 앨범이 되었다. 1978년 10월에 발매된 리드 싱글 "My Life"은 빌보드 3위로 기록해 6집의 최대 히트곡이 되었고 1979년 1월에 발매된 "Big Shot"은 빌보드 17위, 1979년 3월에 영국에서만 발매된 "Until The Night"은 영국 50위, 1979년 4월에 발매된 "Honesty"는 빌보드 24위로 기록되었다. "Honesty"는 북미 지역보다 오히려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에서는 1위나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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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Glass Houses》 녹음 당시 본인 저택에서 촬영된 사진.
1979년 가을, 7집 《Glass Houses》를 뉴욕에서 작업했고 4개월 뒤 1980년 3월에 발매되었다. 전작들의 커다란 성공으로 승승장구했지만 "Just The Way You Are"로 인해서 빌리 조엘은 하모니카를 부르면서 피아노 연주하는 가수라는 이미지 뿐 만이 아니라 로즈 피아노에 앉아서 차분한 발라드를 부르는 이미지로 인식되는 면도 있었다. 강력한 곡들을 부르는 록커의 이미지를 원했던 바와 달리 발라드 가수라고 인식되는 걸 원하지 않았으므로 7집을 더욱 강력한 사운드로 작업했고 70년대 말부터 유행하던 뉴웨이브펑크의 요소도 크게 차용했다.

《Glass Houses》는 빌보드 200 1위, 캐나다 1위, 호주 1위, 뉴질랜드 1위, 일본 오리콘 LP 차트 6위, 영국 9위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빌보드에서는 1위로 6주간 기록되었고 빌보드 연말 차트에서는 4위, 7백만장 이상의 판매를 거두어 1980년대 미국에서 41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기도 했다. 1981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올라 노미네이트,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앨범 후보에 올라 우승했고 빌리 조엘 본인도 그해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 최고의 로큰롤 남성 보컬 부문에 올라 우승했다.

7집의 싱글들도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빌보드 7위로 기록된 "You May Be Right", 캐나다 4위, 빌보드 19위로 기록된 "Don't Ask Me Why",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는 첫번째 빌보드 1위 곡이 되었다. 1980년 1월 23일에 발매된 리드 싱글 "All For Leyna"는 영국에서 40위로 오르는데 그쳤지고 스페인에서는 16위로 기록되었다.

1981년에는 첫 라이브 앨범 《Songs In The Attic》을 발매했고, 1980년 6~8월까지 미국의 여러 주에서 진행된 《Glass Houses》 투어의 실황을 담았다. 한창 전성기를 보내던 시기에 묻혀있던 1970년대 초기 음악들을 다시 보여주려는 시도와 팬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시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15] 초기 시절의 곡들만 골라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11곡을 골라서 수록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8위, 호주 9위, 네덜란드 1위, 덴마크 9위, 일본 3위로 다수의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해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서 4곡이 싱글로 발매되었는데, 차트 진입에 실패한 1970년대 싱글을 라이브 버전으로 재발매한 경우. 차트에 진입된 곡은 2곡인데 "Say Goodbye To Hollywood"는 빌보드 17위, 캐나다 27위, "She's Got A Way"는 빌보드 17위, 빌보드 AC 차트 4위를 기록되었다.

2.3. 위기와 새로운 만남

2.3.1. The Nylon Curtain부터 Концерт까지 (1982~1988)

4년간 전성기를 보내던 빌리 조엘은 1982년 봄부터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1982년 4월 15일, 롱아일랜드에서 1978년형 할리 데이비슨을 몰다가 오른쪽에서 64km로 달려오던 자동차에 치어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시 빨간불에 질주하던 차에 부딪히는 바람에 빌리 조엘은 몇미터를 날아갔고 왼손 엄지손가락이 굽어지고 오른손이 반대 쪽으로 펴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후 뉴욕의 대형 병원에 입원해 봉합 수술을 해서 회복을 했다. 하지만 현재도 오른손을 70도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엄지손가락의 윗쪽 뼈를 제거해 물렁거린다고 한다.

퇴원하고나서 본인의 손을 다시 이전처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하루종일 피아노를 연주했다.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손에 커다란 깁스를 찬 상태에서 팬들에게 받은 편지에 사인을 하고 있었는데 의사가 사인해주는 걸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부상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뮤지션으로서 매우 치명적인데 망치로 때리는 듯한 강력한 터치가 돋보이는 빌리 조엘의 피아노 연주를 보면 연주자/뮤지션의 생명을 잃지도 몰랐었다. 당시 의사들은 피아노 연주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우려했지만, 정작 빌리 조엘 본인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어차피 자신은 록 뮤지션이기 때문에 손이 안되면 팔꿈치로 건반을 치겠다고 농담하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후유증이 심했는지 1982년에는 투어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1982년 11월부터 12월까지 《The Nylon Curtain》 투어를 1개월 동안 진행한게 전부이고 1년간 100차례 이상의 공연을 진행하던 시기에 비하면 잠깐 수준이다.

그랬던 시기에 뉴욕에서 8집 《The Nylon Curtain》을 작업했고 그해 9월에 발매되었다. 8집은 뉴웨이브와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상당히 차용하여 신시사이저의 비중이 크고 비틀즈의 헌정을 담아 전반적으로 비틀스러운 사운드를 담았다. 또한 로널드 레이건 정권의 어두운 면과 베이비붐 세대의 애환,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비관론 등의 사회적인 주제를 삼아 작업한 점과 음악적인 완성도도 상당히 치밀해 빌리 조엘의 명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전작들과 다음작들에 비하면 진지하면서 어두운 사운드를 담았고 기존의 빌리 조엘에 비하면 독특한 작품.

앨범 작업 몇개월 뒤인 1982년 7월, 9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아내 엘리자베스와 이혼했다. 오토바이 사고와 이혼으로 인한 개인적인 어려움이 본인의 경력과 당시 잘 나가던 전성기 시절에 직접적인 영향이 가진 않았지만 8집은 전작들에 비하면 꽤 처진 성적을 거두었다. 미국에서는 2백만장의 판매를 거두었고 다수의 국가에서도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싱글들 "Allentown", "Pressure", "Goodnight Saigon"는 20~30위 안에 진입했다. 8집의 싱글은 오히려 다른 국가에서 큰 반응을 모았는데, "Pressure"는 캐나다에서 9위로 기록, "Goodnight Saigon"은 벨기에, 네덜란드 1위로 올라 차트 정상에 올랐으며, 유럽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빌리 조엘의 곡 중 하나가 되었다.

198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올랐고 일부 국가에서는 큰 성공을 보여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애매하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처진 성적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음악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과 대비되는 점.

1982년 12월 29일, 《The Nylon Curtain》 투어의 마지막 공연 중 하나이자 롱아일랜드 나소의 베테랑 콜로세움에서 진행된 공연이 1983년 HBO 채널에서 <Live from Long Island>라는 제목의 방영되었는데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빌리 조엘의 공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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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 1983년
1983년 초반, 카리브 해로 가던 크루즈에서 슈퍼 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 '엘 멕퍼슨'을 만나게 되면서 사귀었다. 처음에는 엘 멕퍼슨과 사귀었지만 나이 차이로 인해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사귀었다. 1983년 당시 빌리 조엘은 34살이었고 엘 멕퍼슨은 겨우 20살으로 나이차가 14살이나 났다. 당시 센트럴 파크에서 같이 산책하다 찍힌 사진이 다음 날 신문에 대문짝하게 올라와 당혹스러웠다고 1990년 공연 중에 뒤늦게 밝혔다.

새 연인에 대한 감정으로 본인이 십대였을 때 자주 들었던 1950~60년대 R&B, 로큰롤, 모타운 뮤직에 관한 낭만적인 기억까지 회상한 계기로 통해 9집 《An Innocent Man》을 작업했다. 1983년 봄, 뉴욕에서 작업된 9집은 1983년 8월에 발매되어 호주 3위, 뉴질랜드 1위, 일본 오리콘 LP 차트 3위, 영국 2위, 빌보드 200 4위로 여러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되어 크게 히트쳤다. 상업적으로 부진했던 전작 《The Nylon Curtain》에서 다시 원래의 자리를 탈환했다.

싱글들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1983년 8월에 발매된 "Tell Her About It"은 영국 4위, 1980년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이후로 두번째로 빌보드 1위 곡이 되었다. 1983년 9월에 발매된 "Uptown Girl"[16]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국에서 1위로 오른 곡이 되었고 1983년 12월에 발매된 타이틀 트랙 "An Innocent Man"는 빌보드 10위, 영국 8위 기록, 1984년에 발매된 "The Longest Time", "Leave A Tender Monet Alone"는 차트 20~30위 안에 진입했다. 9집은 1983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1984년 그래미 어워드에 후보로 올랐지만 괴물 같은 넘사벽로 인해 노미네이트로 그쳤다.[17] 1984년 12월까지 《An Innocent Man》의 7곡을 몇개월 간격으로 싱글로 발매했고 마지막으로 발매된 곡은 "Keeping The Faith"으로 1985년 1월에 차트에 올라 빌보드 18위, 빌보드 AC 차트 3위를 기록했다.

1983년에는 투어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84년 1월부터 《An Innocent Man》 투어로 다시 투어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6월 8일에 웸블리 아레나에서 진행한 공연은 BBC One에서 방영되었다. 1985년 1월 23일, 세계적인 히트곡 We Are The World에 피처링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에서 1분 10초에 티나 터너와 같이 노래를 부르는 턱수염 남성이 빌리 조엘.

1985년 9월 2일에 발매된 첫번째 컴필레이션 앨범 《Greatest Hits - Volume I & Volume II》는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RIAA에 의하면 미국에서만 23,000,000장의 판매를 거두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들 중 하나이자 가장 많은 판매를 거둔 빌리 조엘의 앨범이 되었다. 동시에 1985년 봄에 녹음된 신곡 "You're Only Human (Second Wind)"와 "The Night Is Still Young"도 그 시기에 같이 싱글로 발매했다. 두 곡 다 싱글 차트 40위 안에 진입해 각각 9위, 34위를 기록했다.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1985년 3월에 결혼했고 그해 12월 29일에 딸 '알렉서 레이 조엘'이 태어났다. 결혼 생활과 컴필레이션 앨범의 막대한 성공으로 인해 투어 활동, 앨범 작업을 할 여유가 없어 《An Innocent Man》 이후로 약 2년간 앨범을 작업하지 않았다가 그해 12월부터 10집 《The Bridge》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The Bridge》은 1985년 12월부터 1986년 봄가지 뉴욕에서 작업했다. 앞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된 앨범들과 달리 1978년 《52nd Street》처럼 뉴욕 음악으로 되돌아가 복고적이면서 동시에 뉴웨이브의 요소를 꽤 크게 차용한 음악을 담았다. 이 시점부터 빌리 조엘은 작곡에 어려움을 느꼈고 9번 트랙 "Code Of Silence"에서 신디 로퍼가 참여하여 작사를 맡았다. 10집의 5번 트랙 "Baby Grand"에서는 본인의 우상 레이 찰스와 함께 듀엣으로 불렀다. 10집은 빌보드 200에서 7위, 호주 2위, 영국 38위, 일본 2위 등으로 기록해 전작들 만큼은 아니지만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10집의 싱글 "Modern Woman"[18], "A Matter Of Trust", "This Is The Time", "Baby Grand" 중에서 가장 크게 히트친 곡은 빌보드 10위로 기록된 "A Matter Of Trust"와 "Modern Woman"이다. "This Is The Time"는 빌보드 19위, 빌보드 AC 1위, "Baby Grand"는 빌보드 75위, 빌보드 AC 3위를 기록했다.

10집 《The Bridge》부터 빌리 조엘은 큰 전환기를 맞이하기도 했는데, 1971년부터 15년간 끈질기게 붙어있던 Family Productions 음반사와 계약을 드디어 해제했다. 당시 콜롬비아 음반사의 회장이자 CBS의 사장 월터 예트니코프(Walter Yetnikoff)가 오랫 동안 이어온 거래를 끝내자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압력을 주었고 이로 인해 Family Productions의 사장 아티 립은 빌리 조엘의 음악 카탈로그와 판권을 조엘에게 팔면서 빌리 조엘의 음반사 자리에서 벗어났다. 당시 계약 문제에서 해방하는 내용으로 "Getting Closer"를 쓰기도 했다.

《The Bridge》는 필 라몬이 참여한 마지막 빌리 조엘의 앨범이 되었다. 이후 필 라몬은 30년 뒤, 2006년 싱글 "All My Life"에 프로듀싱을 맡았다.

1986년 9월부터 2년 만에 투어 활동을 다시 재개했고 1987년 12월 오세아니아까지 1년 동안 진행했다. 1975년에 결성된 빌리 조엘 투어 밴드 3기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투어가 되었고 1988년 이후로 러셀 재버스, 데이비드 브라운, 더그 스테그마이어가 밴드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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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 1987년 8월 소련에서
1986년 10월, 빌리 조엘은 소련에서 투어를 진행할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고 1년 뒤 1987년 7월 26일부터 8월 5일까지 11일 동안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6차례의 공연을 진행하게 되면서 최초로 소련에서 공연을 진행한 미국의 뮤지션이 되었다. 투어 밴드 멤버들과 아내, 어린 딸을 데리고 소련에서 투어 활동과 동시에 여행을 즐겼고 11일 간의 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당시 공연에서 빌리 조엘은 관중에게 조명을 빛추는 것에 대해 몹시 화내 야마하 CP를 뒤집어 버리거나 마이크를 때려 부시는 등 다른 공연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과격한 쇼맨쉽을 보였다. 빌리 조엘은 당시 공산주의 체계에 억압받던 사람들에게 주었던 일종의 희망이라고 설명했다. 본인이 소련 해체의 제공자 중 하나라고 은근 슬쩍 자랑하기도. 하지만 공연을 진행하던 중에 성대결절이 생겨버리는 바람에 이 시기부터 보컬 톤을 살짝 내렸다.

당시 빅터라는 광대를 만나기도 했는데 그에 대해서 영감을 얻어 "Leningrad"를 작곡하기도 했다. 해당 곡은 1989년 11집 《Storm Front》의 7번 트랙. 참고로 빌리 조엘은 이 곡을 2015년 10월 2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서 불렀는데 당시 빅터가 관객으로 참석했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불렀다. 곡을 부르는 와중에 빅터는 감명을 받아 눈물을 흘렸고 곡을 부르고나서 무대 화면에 빅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7~8월 공연 실황을 담아서 1987년 10월에 라이브 앨범 《КОНЦЕРТ》로 발매했다. 1988년에는 라이브 버전의 Back in the U.S.S.R.을 싱글로 발매하기도 했다. 빌리 조엘은 소련에서의 기억은 소중하다고 여러번 회고했는데 정작 투어를 진행하면서 무려 백만달러의 적자가 생겨 본전을 뽑지 못했다. 하지만 본인은 돈보다 보내온 경험이 더 소중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1987년은 빌리 조엘에겐 투어 활동만 돋보였던 해였다. 1988년 7월 일본에서 투어를 진행한 걸 제외하면, 1988년에는 투어 활동을 멈추었으며 이 시기에는 디즈니 영화 올리버와 친구들에서 테마곡 뉴욕판 Hakuna Matata "Why Shoud I Worry"를 불렀던 걸 제외하면 별 활동이 없었다. 빌리 조엘에게 1988년은 조용했던 해라고 해도 무방하다.

2.4. 다시 찾아온 위기와 제2의 전성기

2.4.1. Storm Front부터 River Of Dreams까지 (1989~1993)

1988년 가을부터 1989년 여름까지 뉴욕에서 11집 《Storm Front》를 작업했다. 1986년 10집 《The Bridge》 이후로 3년 만. 필 라몬은 10집을 끝으로 프로듀싱을 맡지 않아 믹 존스가 프로듀싱을 맡았고 새로운 세션들이 합류되었다. 이 앨범부터 복고적인 방향으로 음악적인 변화를 가졌다. 전작들과 달리 사뭇 다른 분위기와 이질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빌리 조엘 본인은 이 앨범을 말그대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앨범이라고 평했다. 8집 《The Nylon Curtain》처럼 사회적인 내용의 비중이 크기도 한데, 특히 We Didn't Start The Fire와 "Leningrad"를 예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앨범이 발매되기 전인 1989년 8월, 또 다시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빌리 조엘의 매니저였던 프랭크 웨버[19]를 해고했고 프랭크 웨버를 9천만 달러 횡령의 이유로 고소해 법정 다툼을 벌였다. 1990년 1월, 프랭크 웨버에게 2백만 달러를 받았는데 프랭크 웨버는 그해 4월, 3천만 달러를 받으려고 맞고소를 했지만 기각되었고 전 매니저와의 법정 다툼은 1990년에 조용히 끝났다.[20]

법정 다툼이 이어지던 기간에 빌리 조엘은 신장결석으로 1989년 9월 25일, 뉴욕의 대형 병원에서 수술하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건강에 문제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고 2000년대까지 여러 질병을 달고 다녔다.

개인적인 어려움이 오고 가던 시기에 《Storm Front》가 그해 10월에 발매되었고 오랜만에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3년 9집 《An Innocent Man》 이후로 큰 판매를 거둔 앨범이 되었고 빌보드 200 1위, 호주 1위, 캐나다 4위, 영국 4위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 10위 진입, 미국에서는 1980년 7집 《Glass Houses》 이후로 9년 만에 빌보드 200에서 1위로 오른 앨범이다. 싱글은 "The Downeaster Alexa", "I Go To Extremes", "And So It Goes", We Didn't Start The Fire, "Leningrad", "That's Not Her Style", "Shameless"[21]로 1990년까지 발매되었고 We Didn't Start The Fire는 빌보드 1위, 영국 7위, 캐나다 2위로 여러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되었고, 3번째로 빌보드 1위 곡이 되었다.

"The Downeaster Alexa"는 캐나다 25위, 빌보드 57위, 영국 76위로 북미와 유럽에서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일본에서는 6위로 기록되었다. "I Go To Extremes"는 캐나다 3위, 빌보드 6위, 일본 1위로 We Didn't Start The Fire 다음으로 큰 히트곡. "And So It Goes", "Leningrad", "That's Not Her Style", "Shameless"는 여러 국가에서 싱글 차트 20~50위 안에 진입되어 그럭저럭 기록되었다. 오랜만에 거둔 큰 성공과 앨범도 수려한 완성도의 수작이라는 평을 받게 되어 제2의 전성기를 가졌다.

1989년 여름부터 다시 투어를 재개했고 그해 12월부터 1991년까지 《Storm Front》 투어를 진행했다. 1990년 6월 22~23일 뉴욕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진행된 공연은 제작 과정부터 공연 실황까지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되었고 DVD로 발매되기도 했다.

1991~92년에는 주로 투어 활동에 집중했으며 1991년에는 When You Wish Upon a Star를 커버, 1992년에는 All Shook Up을 커버해 싱글로 발매했다. 1992년 여름, 빌리 조엘은 전 변호사 알렌 그루브먼을 사기죄, 수탁책임, 의료 과오와 계약 문제로 소송을 걸었다. 이 건은 1992년에 조용히 끝났는데 정확한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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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River Of Dreams 호주판 박스 세트
1992년 가을부터 1993년 봄까지 12집 《River Of Dreams》를 작업했다. 1989년 《Storm Front》 이후로 3년 만에 작업된 앨범이기도 한데, 이쯤 되면 3년 간의 텀을 두고 앨범을 작업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이 앨범이 마지막 팝 앨범이라는 점. 12집은 《Storm Front》와 유사한 구성으로 작업되었고 1980년대부터 이어온 주변 사람들의 배신, 은애(恩愛) 같은 자전적이고 주변인에 대한 비판적인 주제를 삼았다. 전반적으로 밝고 경쾌한 곡들로 수록된 음악성과 달리 상반적인 내용을 담은 셈.

《River Of Dreams》은 1993년 8월에 발매되었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호주 1위, 캐나다 6위, 빌보드 200 1위, 영국 3위 등 다수의 국가에서 10위 진입에 성공해 높은 판매량을 보였다. 싱글은 "The River Of Dreams", "No Man's Land", "All About Soul", "Lullabye (Goodnight, My Angel)"가 발매되었다. 타이틀 트랙 "The River Of Dreams"는 영국/미국 3위, 호주 1위, 캐나다 2위 등 다수의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하여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빌리 조엘의 싱글 중 하나가 되었고 나머지 싱글들도 그럭저럭 양호한 성적을 거두었다. 1994년 그래미 어워드에 4번이나 후보에 들었지만 전부 노미네이트로 그쳤다.

《River Of Dreams》을 끝으로 빌리 조엘은 더 이상 정규 앨범을 작업하지 않았고 팝 앨범 작업에서 은퇴했다고 선언했다. 마지막 트랙 "Famous Last Words"가 이에 대해서 묘사되었다. 제2의 전성기를 보내던 시점에 갑자기 앨범 작업에서 은퇴했으니 팬들에게는 두고두고 아쉬운 점으로 남게 되었다.

2.5. 투어 활동 (1994~)

2.5.1. Face To Face (199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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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미국 Face To Face 투어 포스터
1994년 7월부터 엘튼 존과 둘이서 합동 투어 Face To Face를 진행했다. 이 투어는 빌리 조엘의 아이디어였고 엘튼 존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곧바로 진행한 것. 1994년 7월 8일 필라델피아 PA의 베테랑 스타디움에서 첫 공연을 연 이후로 1994~95년, 1997~98년, 2001~03년, 2009~10년까지 16년 간 진행하면서 북미와 유럽, 오세아니아, 일본을 방문했다.

모든 공연은 스타디움에서만 열렸고 엘튼 존 밴드와 빌리 조엘 밴드가 참여해 두 밴드가 함께 했다. 모든 공연의 무대에는 피아노 건반들로 장식되었다. 공연의 첫번째 곡들은 듀엣으로 Your Song, "Honesty",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고 이어서 엘튼 존의 15곡, 빌리 조엘의 15곡 정도의 본인 곡들로 각각 부르고나서 마지막에 다시 듀엣으로 자신의 곡들과 커버곡을 포함하여 약 7곡 정도 불렀던 형식이다. 합쳐서 총 40곡에 가까운 셋리스트에다 3시간이 넘는 초대형 공연이다.

그리고 비틀즈Birthday, Here Comes The Sun, Back In The U.S.S.R., A Hard Day's Night이나 리틀 리처드의 "Lucille", 제리 리 루이스의 "Great Balls Of Fire" 같은 고전 로큰롤 넘버들도 자주 불렀고 서로의 곡들을 부르기도 했다. 엘튼 존은 빌리 조엘의 "New York State Of Mind", "Uptown Girl"을 불렀고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Candle In The Wind,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다. 엘튼 존/빌리 조엘 듀엣으로 부른 본인들의 곡들은 "Your Song", "Piano Man", "Honesty",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My Life", "Just The Way You Are", "You May Be Right", "Uptown Girl", "Goodbye Yellow Brick Road", "Bennie And The Jets", "The Bitch Is Back", "Candle In The Wind"가 있다. 각자 스타일로 각자의 곡을 부른 것도 꽤 인상적이다.

1998년 투어를 진행하던 중, 당시 빌리 조엘이 독감에 걸려 6월 6일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서 빠졌고 엘튼 존이 혼자서 공연을 진행했다. 6월 6일 웸블리 스타디움부터 6월 30일까지 스위스 취리히까지 엘튼 존이 혼자서 진행했지만 사실상 엘튼 존 단독 공연이다. 당시 엘튼 존 솔로로 부른 "Piano Man"는 이 시기에만 존재하는 귀한 라이브 버전. 빌리 조엘은 2001년 투어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9~10년 투어에서는 빌리 조엘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서 공연을 여러차례 취소했고 2011년의 개인적인 불화로 인해서 2010년 시카고, 피츠버그, 보스턴에서 진행할 예정이었던 여름 공연들을 취소했다. 2010년 3월 11일 뉴욕 올버니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Face To Face>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고 더이상 합동 투어를 진행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2.5.2. 이후 활동 (1994~)

2.5.2.1. 1994~2005
《River Of Dreams》로 팝 앨범 작업에서 은퇴한 빌리 조엘은 1994년부터 투어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River Of Dreams》 투어를 1995년까지 진행했는데 1990년대에는 오히려 엘튼 존과 <Face To Face> 투어를 더 자주 진행했다. 또한 1990년대부터 미국의 여러 대학으로 가서 음악에 관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본인 곡들도 피아노 한대로 부르거나, 공연에서 거의 부르지 않는 희귀곡도 부를 때도 잦다. 예를 들면 1996년 롱아일랜드 주에서 열린 강연에선 1986년 "Temptation"을 불렀고, 2015년 10월 4일 뉴욕에서는 40년 만에 "Falling Of The Rain"과 "Roberta"를 불러 팬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1994년에는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9년 간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이혼했고 친구 사이로 남게 되었다. 이후에도 가끔씩 딸과 데리고 만나는 경우도 잦다. 2014년 8월 9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서 "Uptown Girl"을 불렀을 당시, 크리스티 브링클리가 관객으로 참석했다.

1997년에는 밥 딜런의 "To Make You Feel My Love", 프레디 스콧의 "Hey Girl"을 커버해 싱글로 발매했다. 각각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에서 9위, 10위로 기록되었고 다른 국가에서는 50위 안에 진입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밀레니엄 공연을 진행했다. 30곡을 넘는 셋리스트에 3시간 넘는 공연이고 이 공연은 ABC에서 스페셜로 방송되기도 했다. 당시 밀레니엄 공연에 딱 알맞는 "2000 Years"도 불렀고 공연의 실황을 2000년에 라이브 앨범 《2000 Years: The Millennium Concert》으로 발매했다. 이 앨범에 수록되지 못한 다른 라이브 버전들은 부틀렉으로 돌아다닌다.

2000년 10월 2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엘튼 존의 One Night Only 공연에 출연하여 듀엣으로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다.

2001년 10월 2일, 13집 《Fantasies & Delusions》를 발매했다. 팝 앨범이 아닌 연주곡들로 수록된 클래식 앨범. 이 앨범은 1999년 6월, 오스트리아에서 작업했고 본인의 이복 동생 알렉산더 조엘과 작업했다. 모든 수록곡들은 빌리 조엘이 작곡했고 연주는 한국계 영국인이자 빌리 조엘과 오랜 사이를 유지한 피아니스트 주형기가 연주했다. 13집은 빌보드 200에서 83위를 기록했다.

2001년 10월, 펜실베이니아의 대학에서 진행된 강연에서 빌리 조엘이 주형기를 초대했고 수록곡 "Invention In C Minor", "Air"를 연주했다.

2001년 10월 20일, 뉴욕 위문 공연에서 "Miami 2017", "New York State Of Mind"를 불렀다. "Miami 2017"은 뉴욕 아포칼립스에 대한 내용을 담은 곡이라서 당시 공연에서 이 곡의 내용 중 일부가 현실화 되었다고 하지만, (곡 후반부에서 수많은 뉴욕커들이 뉴욕을 떠나 마이애미로 정착하는) 내용과 달리 우린 어디에나 가지 않는다고(We ain't go Anywhere)라고 하면서 관중들에게 커다란 환호를 받았다.

2001~03년에는 엘튼 존과 <Face To Face> 투어를 진행하고나서 2004~05년까지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2005년 3월에는 알콜 중독성 문제로 베리 포드 센터에 30일 동안 입원했고 1975년부터 함께했던 초창기 동료이자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와 불화로 잠시 투어 활동을 중단한 것이다. 결국 빌리 조엘은 리버티 드비토를 해고했고 대신 드러머 척 버기를 영입했다.

2005년 새로운 드러머가 합류하면서 밴드 라인업을 바꾸었고 2005년 가을 코난 오브라이언 쇼에 출연했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2006년 1월 7일부터 3년 만에 투어 활동을 시작했고 1월부터 4월까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총 12차례의 공연을 진행해서 이 공연들의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12 Gardens Live》로 그해 6월에 발매했다. 당시 공연에선 한동안 부르지 않던 희귀 곡들까지 포함해 총 30곡이나 공연에서 불렀고 낮아진 보컬 톤으로 인해서 2006년부터 대부분 곡들의 키를 낮춰서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상 2003년 <Face To Face>가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곡을 키를 낮추지 않고 부른 해가 되었다.
2.5.2.2. 2006~
2006년 1월부터 12월까지 미국, 일본, 영국, 아일랜드, 호주,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등을 방문하면서 투어를 진행했고 오랜만에 전세계적으로 진행된 투어가 되었다. 그해 11월 30일 일본 도쿄 돔에서 진행된 공연은 DVD로 발매되었고 빌리 조엘의 2000년대 공연 중에서 2008년 7월 16~18일 쉐어 스타디움 공연과 더불어서 유일하게 풀버전 영상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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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My Life 싱글 표지
2006년 12월 29일, 뉴욕의 Legacy 스튜디오에서 신곡 All My Life을 녹음했고 1993년 《River Of Dreams》 이후로 무려 13년 만에 작곡된 곡이다. 빌리 조엘의 전성기 시절때 함께 한 프로듀서 필 라몬이 프로듀싱을 맡았고 1986년 10집 《The Bridge》 이후로 무려 20년 만이기도 하다. 이 곡은 프랭크 시나트라 풍의 재즈 발라드이고 당시 아내였던 케이티 리에게 바치는 사랑 노래이자 본인에 관한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곡이다.

이 곡은 2007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날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B면에는 2006년 4월 뉴욕에서 부른 라이브 버전의 "You're My Home"이 수록되었다. 일본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 94위, 빌보드 '핫 싱글 세일스' 차트 1위로 올랐다.

2007년 12월 4일, "All My Life"에 이은 두번째 신곡 "Christmas In Fallujuh"[22]을 발매했다. 거친 사운드의 하드 록 넘버이고 빌리 조엘치고 상당히 드문 형태의 곡이다. 이 곡은 빌리 조엘이 키운 가수이자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캐스 딜런(Cass Dillon)이 부른 버전으로 싱글로 발매되었다. 당시 스튜디오에서 곡이 녹음되고 몇 주 뒤인 2007년 12월 시카고에서 진행된 공연에서 이 곡과 캐스 딜런을 소개하기도 했다. 정작 부른 사람은 따로 있지만, 빌리 조엘은 이 곡을 2008년 12월까지 간간히 공연에서 본인 솔로로 불렀다.

2008년 7월 16~18일 뉴욕의 쉐어 스타디움의 역사를 닫는 마지막 공연을 열었다. 16일과 18일에 두 차례의 공연을 진행했고 총 35곡을 불렀다. 당시 공연에선 폴 매카트니가 게스트로 출연해 Let It Be를 불렀고, 빌리 조엘은 백보컬을 맡았다. 이 공연은 2011년에 라이브 앨범 《Live At Shea Stadium: The Concert》로 발매되었다.

2009년 5월 19일, 빌리 조엘의 전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가 빌리 조엘과 소니 뮤직를 10년 간의 인세 지불로 소송을 걸었다. 2005년에 빌리 조엘이 밴드 라인업을 바꾸게 되면서 리버티 드비토를 밴드에서 영입시키지 않은 이유. 도대체 주변 인물에게 소송 문제가 생긴 게 몇번인지 리버티 드비토는 빌리 조엘의 곡들에서 한번도 작곡에 도움을 주거나 표기되지 않았지만 "Honesty", "Only The Good Die Young"을 포함한 일부 곡에서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Only The Good Die Young"는 원래 레게 리듬으로 녹음할 예정이었지만, 리버티 드비토는 레게를 혐오 수준으로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업비트의 로큰롤 넘버로 바꾸라고 제안을 했다.

1년 뒤 2010년 4월, 빌리 조엘과 리버티 드비토 간의 소송 문제는 타협적으로 끝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리버티 드비토는 빌리 조엘 밴드에 들어오지 않았고 여전히 소원한 관계로 볼 수 있다. 리버티 드비토의 강력한 드럼 실력을 좋아하는 팬들에게 두고두고 아쉬운 점으로 남게 되었다.

2012년 12월 12일, 허리케인 샌디의 피해자들과 미국 동부 복구를 위한 자선 공연 <12-12-12: The Concert for Sandy Relief>에서 곡을 불렀고 당시 부른 곡 중 하나인 "Miami 2017"를 허리케인 피해에 대한 내용으로 가사를 수정해서 불렀다.

2008년 12월 아시아 투어를 마치고나서 2009~10년 <Face To Face> 투어와 2012년 허리케인 샌디 공연을 제외하면 5년 간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케이티 리와 이혼, 리버티 드비토와 소송, 건강 문제 등이 원인. 2013년 4월 21일 호주 시드니, 4월 27일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로 다시 공연을 재개했고 11월 1일 아일랜드 더블린 공연, 11월 영국 런던 공연을 시작으로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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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빌리 조엘, 2014년
2014년 1월부터 정규적으로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2014년부터는 거의 미국에서만 공연을 진행했다. 왠만하면 미국 동부를 벗어나지 않고 거의 대부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을 진행한다. 2013년 12월, 빌리 조엘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무한정으로 공연을 진행해도 된다는 특허권을 받아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독점적으로 공연을 진행하는 중.

2014년 5월 9일, 65번째 생일 공연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진행했고 2015년 7월 1일, 빌리 조엘의 65번째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기념한 공연도 열었다. 이 공연에서 "Honesty"를 2008년 11월 18일 일본 공연 이후로 7년 만에 불렀고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부르기도 했다.

2014~16년 공연들은 1개월에 3~4번 정도 정도 여는 진행하는 식이고 1년 간 약 30차례의 공연을 진행한다. 이전에 거의 부르지 않던 곡이나 한번도 부르지 않던 희귀곡들도 가끔씩 부르거나[23] 커버곡도 정규 레파토리다. 브라이언 존슨, 스팅, 루퍼스 웨인라이트, 지미 팰런, 아이작 펄만 등의 유명인들도 공연에 참여해 듀엣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2015년 8월 4일에는 빌리 조엘의 단골 공연장 중 하나인 롱아일랜드의 나소 콜로세움의 마지막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2016년 6월 1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서 올란도 총기난사 사건의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1985년 히트곡 "You're Only Human"을 불렀다. 1987년 이후 무려 29년 만에 부른 것이기도 하다.

2016년 9월 3일 독일 프랑크프루트, 9월 10일 영국 런던에서 공연을 진행했는데 2013년 12월 이후로 거의 3년만에 진행된 해외 공연이다.

2017년 5월 25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2017년 맨체스터 경기장 테러 사건의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비틀즈A Day in the Life를 불렀다.

3. 내한공연

2008년 11월 15일 내한 공연에서 부른 Piano Man
2008년 11월 15일, 현대카드에서 주최하는 슈퍼 콘서트를 통해 첫 내한 공연을 했다. 2008년 7월 18일 쉐어 스타디움의 마지막 공연을 진행하고 나서 11월 12일부터 아시아에서 투어를 진행했고 홍콩 다음으로 한국으로 방문했다. 11월 14일 오후 2시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고 기자들 앞에서 현대 카드 피켓을 들고 인사했다. 공연은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진행했고 공연은 아무 이상 없이 무난하게 진행했다. 당시 "The River Of Dreams"를 부르던 중에 1층과 2층에 있던 일부 관객들이 흥에 겨운 나머지 무대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이후 사람들이 앞으로 몰려 들었는데 혹시 모를 안전사고를 대비해 공연에 투입된 경호원들이 무대 앞에 있는 이들을 저지하며 자리로 돌려 보냈다.

이를 지켜 본 빌리 조엘은 곡 연주를 중단하고 관객들을 저지하고 있는 경호원에게 "무슨 일이냐!(What’s Going On!)"며 호통을 쳤다. 공연을 즐기고 있는 관객들을 그대로 놔 두라는 의미였다. 이후 경호원은 물러났고 빌리 조엘의 대인배스러운 행동으로 관객들은 더욱 환호했다. 빌리 조엘은 무대 앞 관객들에게 그대로 있으라는 듯 손으로 표시를 하며 다시 연주를 이어갔다.

당시 공연은 방송에서 방영되지 않았고 방송국 촬영팀이 와서 촬영하지 않았다. 유튜브에 일부 직캠 영상들만 남아있고 풀버전 영상은 없다.

4. 엘튼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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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미국 〈Face To Face〉 투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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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Face To Face〉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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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Face To Face〉 투어
엘튼 존은 빌리 조엘과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으로 거론되거나 서로 엮이는 경우가 많다. 유년 시절의 음악 관심, 부모님의 이혼, 긴 무명, 피아노를 바탕하여 음악을 하는 등 공통점들이 많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로 음악적인 만남이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는 엘튼 존의 라이벌이 빌리 조엘이라고 언급되는 경향이 큰데, 엘튼 존의 라이벌로 볼 수 있는 뮤지션은 로드 스튜어트가 더욱 가깝고 경력 상으로 솔로로 활동한 폴 매카트니스티비 원더, 밴드로 보자면 레드 제플린 정도가 1970년대 당시 엘튼 존과 용쟁호투를 벌인 대상이다. 거기다 빌리 조엘은 1967년 데뷔 이후로 10년 가까이 무명을 보냈기 때문에 전성기를 보내던 시점이 달랐다.

빌리 조엘은 1977년 5집 《The Stranger》로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해 198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보내었는데, 이 시기는 엘튼 존에게 침체기였다. 엘튼 존은 1983년 17집 Too Low For Zero의 상업적 성공 이후로 히트 음반을 꾸준히 발매해 빌리 조엘과 사실상 활동 기간이 같아졌지만 1980년대에도 접점이 없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로커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라이벌 운운은 비약이다.

음악적인 만남은 거의 없었지만 데뷔 초기부터 서로의 음악을 접하면서 알게 된 사이였다. 1970년 8월 25일, 엘튼 존이 미국 진출 공연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시기부터 엘튼 존 음악을 접했고 당시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을 1950년대 로큰롤 시절 이후로 오래간만에 나온 파격적인 록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듣게 된 곡은 Border Song이라고 했다. 엘튼 존은 빌리 조엘을 그의 첫 히트곡 1973년 "Piano Man"으로 통해서 알게 되었다. 다양한 음악을 수시로 듣고 지내는 엘튼 존 특성상, 무명이던 빌리 조엘을 모를 리 없었다.[24]

1976년 1월에 4집 《Turnstiles》를 작업했을 때, 빌리 조엘의 음반사였던 콜롬비아가 시카고의 프로듀서였던 제임스 가르시오를 영입해 프로듀싱을 맡게 했고 제임스 가르시오는 엘튼 존 밴드에서 해고된[25] 디 머리와 나이절 올슨을 세션으로 영입해 엘튼 존이 1974년 8집 Caribou, 1975년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1975년 10집 Rock Of The Westies를 작업했던 콜로라도의 Caribou Ranch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하면서 앨범을 작업했다. 그러나 빌리 조엘은 제임스 가르시오의 프로듀싱을 맘에 들지 않아 하여 콜로라도에서 녹음한 걸 폐기했고 다시 뉴욕으로 가서 편곡자 켄 애셔와 함께 프로듀싱을 맡으면서 기존의 빌리 조엘 밴드 멤버들과 함께 앨범을 작업했다.[26]

나이절 올슨은 빌리 조엘의 4집 《Turnstiles》의 1번 트랙 Say Goodbye To Hollywood를 커버해 1978년에 싱글로 발매한 적도 있다.

1976년 음악 잡지 <쥬크>에 실린 빌리 조엘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은 엘튼 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엘튼 존은 피아노가 중심을 이루는 록 음악을 다시금 인기를 끌게 만든 뮤지션이라고 여겼고 엘튼 존 음악을 좋아하긴 하지만 서로 비교 대상으로 두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27]

두 사람은 1976~78년 사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로열 소네스타 호텔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당시 엘튼 존은 1976년 12월 홀란드 방송에 출연해서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를 불렀고 빌리 조엘은 1978년 3월 5일, 홀란드에서 《The Stranger》 투어 공연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엘튼 존의 말로는 눈이 왔다고 하니 1976년 12월로 보인다.[28] 첫 만남에서 서로의 음악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한다.

1988년 10월, 엘튼 존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서 빌리 조엘이 무대로 올라와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같이 즉흥 연주를 했다.[29]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뉴욕 5번가에서 우연히 지나가던 만나면서 안부 인사를 하고 몇 분간 얘기를 했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이라서 바빴고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혼잡해지지 않으려고 이 만남도 짧게 이어졌다.[30]

1990년 6월 6일, 제2회 록 어워드에서 엘튼 존이 코미디언 샘 키니슨에 대해 비판하는 연설을 했을 때 빌리 조엘이 당시 사회를 맡았는데, 1994년 합동 공연 이전의 모습을 담은 유일한 영상이다.

첫 만남 이후로 20년 가까이 단순한 만남으로만 이어졌고 접점도 거의 없던 사이였지만 1994년 7월부터 함께 〈Face To Face〉 투어를 진행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부각시켰다. 합동 투어는 빌리 조엘의 아이디어였고 엘튼 존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곧바로 계획에 실행한 것이다.[31]

1994년 7월 8일 필라델피아에서 첫 공연을 연 이후로 1994~95년, 1998년, 2001~03년, 2009~10년까지 16년 간 진행하면서 북미와 유럽, 오세아니아, 일본을 방문했고 총 200차례의 공연들을 진행했다.[32] 모든 공연은 스타디움에서만 열렸고 엘튼 존 밴드와 빌리 조엘 밴드가 참여하는 구성이었다. 모든 공연들의 무대 테두리는 피아노 건반들로 장식되었다. 공연의 첫 번째 곡들로 Your Song, "Honesty",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듀엣으로 불렀고 이어서 엘튼 존의 15곡, 빌리 조엘의 15곡 정도의 곡들로 각각 부르고 나서 마지막에 다시 듀엣으로 자신의 곡들과 커버 곡을 포함하여 7곡 정도 불렀던 형식. 종합하자면 30곡 이상의 셋리스트에 3시간이 넘는 대형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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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5일
제12회 엘튼 존 에이즈 재단 주최로 진행된 파티에서.
비틀즈Birthday, Here Comes The Sun, Back in the U.S.S.R., A Hard Day's Night이나 리틀 리처드의 "Lucille", 제리 리 루이스의 "Great Balls Of Fire" 같은 곡들도 자주 불렀고 서로의 곡을 바꿔서 부르기도 했다. 엘튼 존은 빌리 조엘의 "New York State Of Mind", "Uptown Girl"을 불렀고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Candle In The Wind,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다.

엘튼 존/빌리 조엘 듀엣으로 부른 곡들은 "Your Song", "Piano Man", "Honesty",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My Life", "Just The Way You Are", "You May Be Right", "Uptown Girl", "Goodbye Yellow Brick Road", "Bennie And The Jets", "The Bitch Is Back", "Candle In The Wind"가 있다. 각자 스타일로 각자의 곡을 부른 모습이 인상적이다.

1998년 6월, 빌리 조엘은 질병 문제로 인해 공연에서 잠시 하차했고 6월 6일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부터 6월 30일까지 스위스 취리히 공연까지 엘튼 존 혼자서 투어를 진행했는데[33] 사실상 엘튼 존 단독 투어이다. 엘튼 존 솔로의 "Piano Man"는 이 시기에만 부른 귀한 라이브 버전.

〈Face To Face〉 말고 다른 공연에서도 함께 모습을 보인 적도 있는데,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2000년 10월 20~21일 One Night Only 공연에 참여해서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같이 불렀고 2001년 10월 20일 뉴욕 위문 공연에서 빌리 조엘과 함께 9.11 테러 당시 희생된 소방관들을 추모하기 위해 Your Song을 불렀다.

2003년 2월 6일 카네기 홀에서 진행된 열대우림 보호 단체 자선 공연에서는 마이클 J. 폭스Johnny B. Goode을 부르는 사이에 엘튼 존과 함께 키보드를 연주했다.

2004년 케네디 센터 공로상에 헌액된 엘튼 존을 축하하는 공연에서 빌리 조엘은 Bennie And The Jets/The Bitch Is Back을 메들리로 불렀다.

2009년 11월 20일, 솔트레이크 시티에 진행될 예정이던 공연은 빌리 조엘의 질병으로 인해 취소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날 엘튼 존은 리언 러셀과 30집 The Union을 작업하기 시작한 날이다.[34]

2011년부터 한동안 사이가 갈라졌다. 빌리 조엘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서 2009~10년 투어 공연이 취소되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이에 불만을 품은 엘튼 존이 빌리 조엘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다가 감정싸움으로 번졌다.[35] 2012년에 화해했고 2013년 2월, 엘튼 존 에이즈 재단 주최로 진행된 아카데미 시상식 후속 파티에 빌리 조엘이 참석해 같이 사진을 촬영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지 못했고 빌리 조엘은 2012년 인터뷰에서 앞으로 〈Face To Face〉를 진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빌리 조엘은 2010년 투어 이후로 3년 동안 투어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몇 차례의 공연만 간간이 진행하다가 2013년 10월 16일 뉴욕 공연을 시작하여 그해 10~12월 영국, 아일랜드 투어를 진행하고 나서 2014년부터 미국 동부 주 위주로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2013년 이후로 가끔씩 서로에 대해서 언급하거나 곡을 부르는 편이다. 빌리 조엘은 2014년부터 자신의 공연에서 "Your Song"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1절의 'I don't have much money' 구절 다음으로 Bullshit이라고 하면서 곡을 끝낸다. 그러고 "우린 그저 친구예요!!"라고 하면서 웃고 넘어간다. 이런 식의 장난도 이제는 정규 레퍼토리다. 2015년 7월 1일, 자신의 65번째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기념하여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다.

레코딩 스튜디오에서의 만남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 없다. 빌리 조엘은 1993년 12집 《River Of Dreams》로 음반 작업에서 은퇴를 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엘튼 존과 스튜디오에서 작업할 가능성은 없다. 1994년 2-4월, 25집 Made In England 작업 중에 작곡된 "Red Rock Roll"과 1995년 "Red, White And Blues"라는 곡에서 듀엣으로 불렀다고 하지만 미공개로 남겨졌으며 정확한 정보도 없다.[36] 엘튼 존의 2006년 29집 The Captain & The Kid의 3번 트랙 "Wouldn't Have You Any Other Way (NYC)"에 보컬을 맡으면서 피처링으로 참여할 예정이었다가 무산되었다는 얘기도 있다.[37]

빌리 조엘은 "Your Song"과 "Goodbye Yellow Brick Road" 말고도 가끔씩 엘튼 존의 다른 곡을 짧게 연주하거나 부른 적도 있다. 2014년 1월 17일 뉴욕 탬파 공연에서 Tiny Dancer의 인트로를 잠깐 연주했고 2016년 11월 3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Honky Cat을 살짝 불렀다.

2017년 1월, 스티븐 콜베어 토크쇼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방영분에서 밝히기를, 엘튼 존은 항상 자신에게 앨범을 더 내야 한다고 했는데 빌리 조엘은 반대로 엘튼 존에게 "앨범을 내야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웃음을 주었다. 빌리 조엘의 정규 앨범은 13장이고 엘튼 존은 32장이다.

5. 빌리 조엘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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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1기 (1971~1972). 1971년 11월부터 투어 밴드를 결성했다. Cold Spring Harbor에 참여한 세션들 기타리스트 알 허츠버그, 베이시스트 래리 러셀, 드러머 리스 클락이 밴드에 합류했다. 첫 공연은 11월 9일 뉴욕의 Ultra Sonic 스튜디오 공연으로 추정되고 1972년까지 거의 스튜디오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겨우 5곡 밖에 부르지 않다가 1972년에는 5~10곡 정도 늘어났다. Cold Spring Harbor의 정식 수록곡이나 발매 예정이었던 미발매곡, 커버곡들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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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2기 (1973~1975). 1973년 《Piano Man》의 성공으로 투어 활동도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드러머 리스 클락을 제외하면, 베이스와 기타를 새로 영입했고 《Piano Man》에 참여한 기타리스트 돈 에반스, 베이시스트 패트릭 맥도널드가 합류했다. 1973년 11월부터 1974년 5월까지 진행되었고, 1973년 11월 뉴욕의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공연이 영상으로 촬영되기도 했다.

그해 5월까지 진행되다가 3집 《Streetlife Serenade》가 발매된 시기인 1974년 10월부터 다시 투어를 진행했고 1975년 10월까지 약 1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밴드 라인업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2기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1974년 10월에는 베이시스트 더그 스테그마이어가 합류했고 1988년까지 14년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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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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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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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3기 (1976~1988). 빌리 조엘의 대표 밴드 라인업. 1975년 10월 이후로 더그 스테그마이어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전부 팀에서 떠났고 당시 더그 스테그마이어의 동료들이던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 색소폰/키보드/퍼커션 리치 카나타[42], 기타리스트 러셀 재버스, 하위 애머슨이 합류했다. 이 라인업으로 1976년 1월, 4집 《Turnstiles》를 작업했다. 이 시기의 라인업은 탄탄하고 빼어난 연주 실력을 보였기 때문에 팬들에게 역대 최고라는 평을 자주 받는다.

1976년 4월부터 이 라인업으로 《Turnstiles》 투어를 1977년 6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진행했다. 《Turnstiles》 투어부터 15~20곡 정도 더욱 많은 곡을 불렀고 1976년 5월에는 호주 시드니에서 공연을 진행하게 되어 처음으로 해외 공연을 진행했다. 이 라인업으로 5집 《The Stranger》를 작업했고 5집의 막대한 성공 덕에 무명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 후로 빌리 조엘 밴드의 모습도 더욱 각인되기 시작했다. 1977~80년에는 세계적으로 진출하여 투어를 열었고 일본,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의 국가를 방문했다. 1980년 6~8월 미국의 여러 주에서 진행된 공연들 실황을 담은 1981년 라이브 앨범 《Songs In The Attic》이 발매되기도 했다.

1975년 가을에 결성된 라인업으로 1978~79년 《52nd Street》 투어까지 함께 했지만 1980년 7집 《Glass Houses》부터 하위 애머슨이 밴드에서 탈퇴했고 대신 데이비드 브라운이 영입되었다. 데이비드 브라운으로 바꿔지고나서 1981년까지 1년간 활동했지만 1982년 4월, 빌리 조엘의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인해서 1년 가까이 휴식기였다. 리치 카나타는 1982년 11~12월 《The Nylon Curtain》 투어 이전에 탈퇴했고[43] 대신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리볼트, 색소폰/호른/타악기 마크 리베라가 영입되었다. 마크 리베라는 현재도 함께하고 있다.

1984년 1월부터 7월까지 《An Innocent Man》 투어를 진행했다. 1984년 투어는 1982년과 거의 동일하지만 차이범이 있다면 그해 2월 1일부터 백보컬리스트 프랭크 심스, 마이크 휴렛, 마크 매큐언과 호른 세션이 합류했다. 6월 6~9일 웸블리 아레나 공연에서는 벨기에의 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먼스'가 참여해 "Leave A Tender Moment Alone"에서 하모니카를 불기도 했다. 참고로 투크 틸레먼스는 1984년 투어에 여러차례 참여했으며 1991년 8월 8~9일 뉴욕 공연에서도 참여해 하모니카를 불렀다.

1986년 7월, 10집 《The Bridge》가 발매되던 시기부터 2년 만에 투어 활동을 재개했고 1988년 7월까지 2년간 진행되었다. 1986~87년의 라인업은 1984년과 거의 동일하다. 당시 빌리 조엘은 "A Matter Of Trust"를 부를때 기타를 연주하면서 불렀는데 처음으로 피아노가 아닌 다른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1987년 7~8월에는 구소련에 방문해서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2016년 방영된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하이어드 건'은 이 시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러 세션 뮤지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다큐멘터리로, 러셀 재버스와 리버티 드비토의 인터뷰와 그 당시 빌리 조엘 영상 등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조지 마틴과 함께할 수 있었지만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필 라몬과 작업을 택했다는 이야기나, 이들과 함께하는 건 가족과도 같다는 말을 하는 등 백밴드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시절의 빌리 조엘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법적 분쟁에 휘말린 빌리 조엘은 수백만 달러를 매니저에게 사기당해 잃어버리고 밴드를 조정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해고된 걸 러셀 재버스는 굉장히 분통해 했고, 더그 스테그마이어의 자살이 이와 관련됐다는 얘길 강하게 남겼다. 혼자 남아 빌리 조엘과 20여년을 더 함께 했던 리버티도 2005년 불화에 대한 인터뷰를 남겼다. 소송전을 염두에 둔 듯 빌리 조엘에 대한 서운함과 아쉬움이 가득한 인터뷰였다. 그래도 빌리가 전화해서 사과만 해준다면 언제든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세션 연주자들은 해고가 아니라 그저 재계약 통보를 받지 못할 뿐이라는 점이 그들이 더 서운해했던 이유라고 한다. 빌리 조엘이 자신들도 모르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 콘서트를 열게 되는데 지인들이 그 표를 부탁할 때 자기가 짤린 걸 알게 됐다고.


파일:external/www.davidrosenthal.com/album2-img14.jpg[44]

밴드 4기 (1988~2003). 1988년부터 데이비드 브라운, 리버티 드비토, 마크 리베라를 제외한 멤버들이 밴드에서 탈퇴했고 1975년 이후로 13년 만에 밴드 라인업을 바꾸었다. 러셀 재버스 대신 토미 번스[45], 더그 스테그마이어[46] 대신 스카일러 딜이 합류했고 흑인 여성 퍼커션/백보컬 크리스털 텔리페로[47]가 영입되었다. 1989년 여름부터 투어 활동을 재개했고 1991년까지 《Storm Front》 투어로 진행되었다. 3년 뒤, 1994년 6월에는 《Storm Front Returns》라는 투어를 진행하기도 했다.

1993년 《River Of Dreams》 투어의 라인업도 대부분 같지만 데이비드 브라운이 탈퇴했고 대신 톰 "T-본" 울크가 합류했다. 데이비드 브라운이 떠나게 되면서 리버티 드비토가 유일한 1970년대 멤버가 되었었다. 1993년에는 키보드리스트 데이비드 로젠탈[48]이 합류했다. 1988~93년 투어때 합류한 몇 멤버들은 현재도 꾸준히 함께 하고 있으며 엘튼 존과의 합동 투어 <Face To Face>에서도 함께 했다. 몇년 동안은 일부 세션이 바꿔지는 변천사도 있었지만 왠만하면 이 라인업으로 2004년까지 15년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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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6기 (2005~). 건강상 문제로 2004년에는 투어 활동을 하지 않았고 2005년부터 밴드 라인업을 새로 결성했다. 1988년 이후로 17년 만이다. 리버티 드비토를 불러오지 않았고 대신 척 버기를 영입했다. 참고로 척 버기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Movin' Out에서 드럼을 연주한 적 있다. 1975년 이후로 30년 만에 드러머를 교체한 경우. 이후 리버티 드비토는 빌리 조엘과 법적 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빌리 조엘의 2000년대 문단 참고.

베이시스트는 마이클 델쥬디체로 교체되었고 호른 세션으로 칼 피셔, 앤디 시콘이 합류했다. 2006년 1월 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첫 공연을 가지며 3년 만에 투어 활동을 시작했고 1~4월 뉴욕에서는 리치 카나타가 밴드에 잠시 참여하여 색소폰을 불기도 했다.

2005년 이후로 교체되거나 새로 합류한 멤버는 단 한명도 없고 10년 넘게 이 라인업으로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6. 개인적인 삶

6.1.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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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의 부친과 어머니 로서린드 조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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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 동생 알렉산더 조엘, 아버지 하워드 조엘, 빌리 조엘. 1996년 오스트리아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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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과 로서린드 조엘. 2013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유대인 부부에서 태어난 '로서린드 조엘'은 1942년에 뉴욕 시립대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고 당시 '하워드 조엘'과 만나 교제하기 시작했다.

'하워드 조엘'은 독일에서 태어났고 하워드의 아버지, 즉 빌리 조엘의 할아버지 '칼 앰슨 조엘'(Karl Amson Joel)은 독일의 유대인이자 제조업자였다. 조엘 가는 당시 독일에서 알아주던 재벌 가문이었고 하워드 조엘도 20대까지 독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조엘 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하려 1938년 7월에 스위스로 이주했고 1938년 8월에는 프랑스와 영국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 시기에 이민 문제로 잠시 쿠바에 머물기도 했다. 칼 앰슨 조엘은 미국에서 새 기업을 차리기 시작했고 당시 하워드 조엘이 뉴욕에서 로서린드 조엘을 만나게 된 것.

하워드 조엘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육군으로 참전하다가 이후 전역했고 1946년에 24살, 23살의 나이로 결혼했다. 참고로 로서린드 조엘이 한살 연상. 결혼 3년 뒤에 빌리 조엘을 낳았고 이후 로서린드의 언니 뮤리엘 니만의 딸 쥬디트 조엘을 입양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워드 조엘은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했으며, 빌리 조엘이 8살이던 1957년 부모는 이혼을 했다. 하워드 조엘은 오스트리아 으로 건너가 새 가정을 차려 평생을 오스트리아에서 보냈다. 하워드 조엘의 아들 중 한명인 알렉산더 조엘(Alexander Joel)은 197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오스트리아에서 클래식 피아니스트이자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어머니 로서린드는 누구와 재혼하지 않았다. 빌리 조엘은 어머니를 모시고 지냈으며 가족을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떠나버려 새 가정을 차린 아버지를 원망했다. 이후로 약 20년간 본인의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가 1976~77년, 아버지를 만나려고 직접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났고 20년만에 만나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빈에서의 경험으로 "Vienna"를 작곡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와 이복 동생들을 만나었고 오랫동안 소원했던 사이는 조금씩 풀었다. 1995년 6월 4일, 뉘른베르크에서 강연을 열었을 때 알렉산더 조엘과 하워드 조엘이 강연에 참여했으며 당시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서 잠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하워드 조엘은 2011년 3월 8일, 88세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했다. 하워드 조엘은 말년에 대머리였고 현재 빌리 조엘이 아버지의 말년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 이 점 때문인지 2006년 이후로 공연 중, 본인이 "아버지와 똑같이 생겼는데 난 그게 싫다"면서 드립을 치기도 했다. 심지어 아버지가 사망하고나서도 똑같이 드립을 쳤다. 허공에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하면서 고인드립을 시전하는 모습이 압권.

빌리 조엘은 60년 동안 어머니를 모시며 살았고 어머니에 대한 "Rosalinda", "Rosalinda's Eyes"를 작곡하기도 했다. 로서린드 조엘은 2014년 7월 13일에 92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어머니가 입양한 쥬디트 조엘은 빌리 조엘의 누나이고 빌리 조엘이 1970년 자살 시도로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을 때 그를 도와주었다. 빌리 조엘은 이에 대한 "Why Judy Why"를 썼다. 쥬디트 조엘에 대한 별다른 정보가 없는 걸 보면 조용한 삶을 사는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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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과 엘리자베스 웨버. 1977년
빌리 조엘은 여자 관계가 그리 평탄하진 않았다. 이전부터 바람기가 꽤 있었고 결혼과 이혼을 4번이나 반복했다. 1970년에 아틸라의 드러머 존 스몰의 아내였던 엘리자베스 웨버와 바람을 폈고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존 스몰과 이혼했고 1973년 여름 로스앤젤레스에서 결혼을 해서 빌리 조엘의 첫번째 아내가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인들에게 지적이고 상당히 똑똑한 여성으로 불렸고 1976년에 엘리자베스를 본인의 사무 관리자로 세웠다. 슬하에 자식을 두지 않았으며 1970년대 말부터 비지니스 관계로 발전하기 시작해서 애정도가 크게 떨어졌고[50] 결국 1982년 7월 20일에 이혼했다.

빌리 조엘은 엘리자베스에 대해서 영감을 얻어 "She's Got A Way", "You're My Home", "Just The Way You Are", "She's Always A Woman"을 작곡했는데 이혼 이후로 위 곡들을 덜 애착하는 경향이 잦아졌다. 문제는 대부분의 곡들이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는 빌리 조엘의 발라드 넘버들. 1984~86년 이후로 부르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가 1990년대부터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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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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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서 조엘과 빌리 조엘. 1990년 7월 22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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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서 레이 조엘. 2010년
이혼 이후로 일종의 위로 여행으로 1983년 1~2월 경, 생바르텔레미로 여행을 떠났고 카리브 해로 가던 크루즈로 가려고 이동하던 비행기에서 미국의 슈퍼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를 만나 한 눈에 반해 그녀한테 접근하기로 했다. 당시 크루즈에 예약했던 크리스티 브링클리도 프랑스에서 만난 첫번째 남편이자 예술가 장 프란치스코와 1981년에 이혼하고나서 1982년에 프랑스 카레이서 올리비아 샹동과 연인 사이로 지냈지만 올리비아 샹동은 1983년 3월에 카레이서 사고로 사망하게 되어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큰 상심에 빠졌었다.

이후 두 사람은 크루즈의 라운지에서 다시 만났고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생기는 덕에 그녀에게 곡을 연주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 라운지에선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당시 20살의 호주의 모델 엘 멕퍼슨과 당시 무명이었던 휘트니 휴스턴이 빌리 조엘을 지켜보기도 했다. 당시 휘트니 휴스턴은 빌리 조엘에게 "Just The Way You Are"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빌리 조엘은 좀 조용히 하라고 했다고.

재미있게도 빌리 조엘과 엮이게 된 여성은 크리스티 브링클리가 아니라 엘 멕퍼슨이 되었고 그 후로 잠시 사귀었다. 하지만 1983년 당시 엘 맥퍼슨은 20살, 빌리 조엘은 34세로 거의 삼촌과 조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나이 차이에 정작 마음은 크리스티 브링클리에게 가있었기 때문에 엘 멕퍼슨과 헤어졌고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사귀기 시작했다.

당시 새 연인에 대한 감정으로 1950~60년대 모타운, R&B, 소울에 대한 헌정을 담은 8집 《An Innocent Man》을 작업했는데 8집의 수록곡 "Tell Her About It"이 크리스티 브링클리를 위한 러브콜 노래이다. "Uptown Girl"은 원래 엘 멕퍼슨에 대해서 썼고 크루즈 라운지의 일에 대해 상상하면서 "Uptown Girls"로 붙일 예정이었지만 크리스티 브링클리에 대한 곡으로 바꾸었다. 참고로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Uptown Girl"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렇게 2년간의 교제 끝으로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1985년 3월에 결혼했고 그해 12월 29일, 맨하튼 병원에서 딸 '알렉서 레이 조엘'(Alexa Ray Joel)이 태어났다. 중간 이름 '레이'는 빌리 조엘의 우상 레이 찰스에 따온 것이다.[51] 이후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좋은 사이로 지내었다가 9년 뒤, 1994년 8월 25일에 이혼했다. 하지만 친구 사이로 남았으며 이후 2010년대에도 가끔씩 만나거나 공식 석상에서도 동행하는 경우가 잦다.

빌리 조엘은 딸 알렉서에 대한 곡 "Lullabye (Goodnight, My Angel)"[52][53]을 쓰거나, 여러 곡에서 딸에 대해 언급하는 등 딸바보이다. 참고로 알렉서 레이 조엘도 가수 활동을 한다. 2006년에 EP "Sketches"로 데뷔했고, 몇년간 싱글을 발매했지만, 워낙 성공한 아버지로 인해서 그리 뜨지 못했다. 사실 대부분 유명인들의 자식들과 마찬가지이긴 하지만.[54][55] 여담으로 알렉서 조엘은 어렸을때 어머니를 크게 닮았지만, 어른이 된 현재는 오히려 아버지 얼굴이 크게 보인다. 그래도 슈퍼 모델 어머니의 유전자를 받아서 그런지 상당한 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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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과 케이티 리. 2007년
1994년 이혼 이후 약 10년동안 혼자서 지내왔지만, 2004년 10월 2일에 미국의 요리사이자 음식 평론가 케이티 리(Katie Lee)와 결혼했다. 2004년 봄, 뉴욕의 Peninsula 호텔의 옥상 술집에서 만났고, 이후 몇개월 동안 교제하다가 그해 10월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의 빌리 조엘 집에서 결혼했다. 2004년 당시 케이티 리는 23세였고, 빌리 조엘은 55세였다. 무려 30살 연하에 알렉서 조엘과 겨우 4살 차이! 하지만 5년 뒤 2009년 7월에 서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2010년에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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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과 알렉시스 로데릭. 2015년
케이티 리와 결별하던 시기인 2009년부터 알렉시스 로데릭(Alexis Roderick)과 사귀기 시작했고,[56] 2015년 7월 4일 독립기념일 날에 결혼했다.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의 본인 집에서 비밀 결혼식을 열었고, 2번째 아내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딸 알렉서 조엘 등의 지인들이 참석했고, 뉴욕 주지사이자 빌리 조엘의 오랜 친구인 앤드류 쿠오모가 주례를 맡았다. 사실 속도위반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혼식을 울리게 된 것이다. 결혼 당시 알렉시스 로데릭은 33세였고, 빌리 조엘은 65세였다. 무려 32살 연하에 알렉서 조엘과 겨우 3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서로 혼인 서약을 했고, 2015년 8월 12일에 딸 '델라 로스 조엘'이 태어났다.

6.2. 건강

1970년에 몇 년 간 이어진 상업적인 실패로 인한 무명의 좌절감과 생계 문제, 동료 존 스몰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으로 인해서 우울증조울증을 앓았고, 당시 매니저 어원 만주르의 아파트에서 자살 유서를 쓰고나서 가구 세정제 한병을 마셔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존 스몰이 바닥에 누워 있던 빌리 조엘을 발견하고 나서 엠뷸런스를 불렀고, 3주 동안 병원에 입원해 목숨을 구했다. 확인된 결과 복부가 아주 심하게 부어 올랐다고 한다. 처음엔 가구세정제가 그나마 맛이 나을 것 같아서 이걸 골랐다고 1990년 인터뷰에서 밝혔다. 당시 병원에 입원했던 빌리 조엘이 매니저 어원 만주르에게 이봐 어원! 나를 여기서 깨너줘,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야!라고 제정신이 아닌채 본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병원에 퇴원하고 나서 정신을 차렸고, 본인을 크게 도와준 누나 쥬디트 조엘에 대한 "Why Judy Why"를 작곡했고, 자살 유서에 영감을 얻어 "Tomorrow Is Today"를 작곡했다.

본인의 우울증과 조울증에도 영감을 얻어 "Summer, Highland Falls"를 쓴 계기가 되었고, 1985년에 자살 시도에 영감을 얻어 자살 예방 메세지를 담은 "You're Only Human (Second Wind)"를 작곡하기도 했다.

오토바이 사고 이후로 2번의 교통사고를 겪기도 했다. 2003년 롱아일랜드에서 2002년형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다가 나무에 부딛혀 차를 폐차했고, 왼손에 몇주 동안 깁스 했다. 2004년 9월 뉴욕에선 1967년형 시트로엥 2CV를 잠시 주차해두고 피자를 사러갔다가 화재로 전소해버렸다.

신장결석으로 1989년 9월 25일에 뉴욕의 대형병원에서 수술했다. 그리고 1994년 토론토에서 투어를 진행하던 중에 다시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았다.

1980년대부터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고, 2002년에 약물 남용으로 코네티컷 주의 실버힐 병원에 입원했다. 2005년 3월에는 알코올성 장애로 베티 포드 센터에 30일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6.2.1. 오토바이 교통사고

1982년 봄 뉴욕에서 8집 <The Nylon Curtain>을 작업하던 시기에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1982년 4월 15일 롱아일랜드에서 본인의 1978년형 할리 데이비슨을 몰고 있었고, 신호를 기다리다가 초록불로 바뀌고 다시 출발했는데, 오른쪽에서 빨간불에 64km로 질주하던 한 여성이 타고 있던 차에 부딪혔다. 차와 오토바이의 간격의 차이가 짧아 브레이크를 잡아도 소용 없었고, 운전석 쪽으로 크게 박았다고 한다. 차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고, 빌리 조엘은 몇미터를 날아갔다. 왼손의 엄지가 안쪽으로 굽어지고 오른손은 반대 쪽으로 펴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손이 크게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내 오토바이 어딨냐고 오토바이부터 챙겼다고. 당시 빌리 조엘은 선글라스와 헬맷, 가죽 자켓을 착용하고 턱수염을 길렀던 상태로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본인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도로에서 움크리고 있었지만, 옆에 경찰이 와서 오토바이 뒤에 써져있던 이름 "조엘. 윌리엄"을 읽고 그가 빌리 조엘이라는 걸 알아채고 차에 타있던 여성한테 이봐 아가씨, 당신이 빌리 조엘을 쳤어!라고 크게 말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빌리 조엘은 빨리 엠뷸런스를 부르라고 짜증냈다고.

그렇게 뉴욕의 대형 병원에서 두 손의 봉합수술을 마치고나서 병원에 잠시 입원했고, 퇴원하고나서 본인의 손을 제대로 돌리기 위해 자주 피아노를 연주했다고 한다. [57] 더군다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뮤지션이라서 손 부상은 매우 치명적이라서 의사들은 피아노 연주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우려했지만, 정작 빌리 조엘 본인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어차피 본인은 록큰롤 뮤지션이기때문에 손이 안되면 팔꿈치로 건반을 치겠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당시 수술로 왼손의 엄지 손가락 윗부분의 뼈를 제거했기 때문에 현재도 왼손 엄지에 뼈가 없다. 그 때문에 엄지를 몇센치 정도 바깥으로 휠 수 있고, 오른손은 70도 아래로 잘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1982년 12월 인터뷰에선 기자가 "그럼 지금은 괜찮냐고'" 물어보자, "이전에도 썩 좋지 않았다고" 농담했다. 가수나 피아노 연주자로서 생명력을 잃을 뻔 했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낙관적으로 대한 것도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일.

6.3. 그 외

Don't take any Shit from anybody!!
- 빌리 조엘의 유명한 어록이다. 항상 공연을 마치고나서 마지막에 하던 말.
* 유대인이지만 무신론자이고 유령은 믿는다. 어느날 본인의 저택에서 18세기 옷을 입고 있던 여성 유령을 보고 나서 유령이 존재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 실질적인 음악 활동은 상당히 짧은 편이다. 빌리 조엘과 비슷한 나이대의 노년 뮤지션들은 2010년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꾸준히 음반을 내지만, 빌리 조엘은 음반 작업에서 완전히 은퇴해 투어 활동만 하는 중이는게 아쉬운 점. 빌리 조엘은 데뷔 후 무명이 길었으며, 1977년 5집 《The Stranger》로 본격적인 인기를 끌기 전까진 10년간 무명이었다고 해도 무방했다.[58] 60년대에 데뷔한 동기 뮤지션들과 달리 성공을 비교적 늦게 맞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인기를 가지고 마지막 음반을 내고 활동한 시기를 보면 1977~1993년으로 16년 정도로 확실히 짧은 편이다. 음반을 몇 년에 한 번씩 내던 수준이라서 2001년에 발매된 클래식 음반까지 합치면 정규 앨범이 총 13장 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며 여전히 큰 인지도를 끄는 뮤지션으로서 음반 작업을 일찍 접은 것이 아쉽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짧은 활동에 비해 높은 음반 판매량을 거두어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을 거둔 뮤지션들 리스트에서 상위권으로 올라가는 점이 놀랍다는 평도 있다.
  • 보통 노래방 같은 곳에서 가창력에 의지해 그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교만 잘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빌리 조엘 특유의 뉴요커로서의 정체성과 느낌을 잘 고려하고 담아서 불러야 맛이 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도 힘 안 들이고 편하게 불러대서 그렇지 노래들이 생각보다 고음인 편이다.
  • 젊은 시절 때 이목구비와 헤어 스타일과 전체적인 모습이 실베스터 스탤론과 상당히 닮았다. 잘 모르는 사람은 헷갈려할 정도. 거기다 빌리 조엘은 십대 때 복싱을 취미로 했다.
  • 거의 모든 뮤지션들에게 해당하는 점이지만, 비틀즈의 광팬이다. 빌리 조엘의 음악을 살짝 들어봐도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걸 확인할 수 있고, 빌리 조엘 본인도 공연에서 비틀즈 곡들을 자주 불렀다.
  • 상당한 오토바이 마니아다. 집에 전시해둔 오토바이가 수십대가 넘고, 아예 거대한 창고로 제작해서 사용한다.
  • 1960~70년대에는 장발이었지만, 1980년대부터 단발에 곱슬로 헤어스타일을 바꾸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머리가 많이 빠져 현재는 대머리.
  • 1995년 고베 대지진을 겪기도 했었다. 다행히 다른 지역으로 황급히 피했던 모양이었다. 당시 CNN에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 1996년 위어드 알 얀코빅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빌리 조엘을 We Didn't Start The Fire 남자로 부르거나 이불에 지도 그린적 있냐고 놀리는 등 얀코빅스러운 질문을 많이 던졌다. 위어드 알 얀코빅는 1980년에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를 It's Still Billy Joel To Me로 패러디해서 부르기도 했다. 마지막에 빌리 조엘에게 이 쓰레기 좀 대신 버려줄 수 있냐고 묻다가 거절당했고, 결국 화나서 빌리 조엘을 패버린다. 물론 전부 연출이고, 위어드 알 얀코빅 컨셉이 원래 저렇다.
  • 빌리 조엘은 공연을 할 때 맨 앞줄 티켓을 팔지 않고 아껴뒀다가 맨 뒷줄의 관객들을 무작위로 뽑아서 앞줄로 초빙한다고 한다. 그냥 돈이 있으니 와서 보는둥 마는둥 하다가 가는 부자들보다 없는 돈 써서 뒷자리라도 겨우 잡는 진짜 팬들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라고.

7. 디스코그래피

7.1. 싱글

7.1.1. 빌보드 1위

7.1.2. 빌보드 2위

  • 없음

7.1.3. 빌보드 3위~10위

  • Just The Way You Are (1977)
  • My Life (1978)
  • You May Be Right (1980)
  • Uptown Girl (1983)
  • An Innocent Man (1983)
  • You're Only Human (Second Wind) (1985)
  • Modern Woman (1986)
  • A Matter Of Trust (1986)
  • I Go To Extremes (1989)
  • The River Of Dreams (1993)

7.1.4. 빌보드 11~20위

  • Movin' Out (Anthony's Song) (1977)
  • She's Always A Woman (1977)
  • Big Shot (1978)
  • Don't Ask Me Why (1980)
  • Say Goodbye To Hollywood (Live) (1981)
  • Pressure (1982)
  • Allentown (1982)
  • The Longest Time (1984)
  • Keeping The Faith (1985)
  • This Is The Time (1986)

7.1.5. 빌보드 21~40위

  • Piano Man (1973)
  • The Entertainer (1974/1975)
  • Only The Good Die Young (1977)
  • Honesty (1978)
  • Sometimes A Fantasy (1980)
  • She's Got A Way (Live) (1982)
  • Leave A Tender Moment Alone (1984)
  • The Night Is Still Young (1985)
  • And So It Goes (1990)
  • All About Soul (1993)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2] 영미권에서는 Joel을 조엘이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지역에 따라 이나 조얼, 조을이라고 발음한다.[3] setlist.fm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라이브 목록[4] Meet Madison Square Garden's new franchise: Billy Joel[5] 참고로 알렉산더 조엘은 오스트리아에서 저명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빌리 조엘이 동생, 주형기와 함께 1999년 6월, 클래식 앨범인 13집 《Fantasies & Delusions》를 작업한 적도 있다.[6] 참고로 "Remember (Walking in the Sand)"의 프로듀싱은 전직 가수이자 프로듀서, Family Production 음반사의 사장이었던 아티 립이 맡았는데 이후 빌리 조엘의 1집 프로듀싱을 맡게 되면서 한동안 빌리 조엘의 걸림돌이 되었다.[7] 당시 존 스몰과 이혼한 상태였고 1973년 여름, 로스앤젤레스에서 빌리 조엘과 결혼했다.[8] 이후 리마스터 판에서는 수정되었다.[9] Chipmunks, 실제로는 앨빈과 슈퍼밴드(Alvin and the Chipmunks)를 뜻한다.[10] 1973년 2집 《Piano Man》의 수록곡.[11] 호주에서는 3년 뒤 1976년에 뒤늦게 발매되었다.[12] 이 둘은 엘튼 존 밴드에서 1969~70년부터 함께한 원년멤버이지만 1975년 초에 해고되었다. 5년 뒤 1980년에 다시 합류했고 이후 다시 해고되었다가 합류하면서 반복했다. 자세한 내용은 엘튼 존/1970년대, 엘튼 존/1980년대, 엘튼 존 문서의 밴드 문단 참고 바람. 참고로 나이절 올슨은 1978년에 《Turnstiles》의 1번 트랙인 Say Goodbye To Hollywood를 커버해 싱글로 발매하기도 했다.[13] 공교롭게도 엘튼 존은 이 스튜디오에서 1974년부터 1975년까지 Caribou,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Rock Of The Westies를 작업했다.[14] 1976년에 방영된 광고에서 호주에서 꽤 크게 히트쳤다고 주목하는 부분이 있다.[15] 《Songs In The Attic》의 라이너 노트에 적혀있는 내용[16] 이 곡은 추후 웨스트라이프가 리메이크하고 글리에서도 리메이크했다.[17] 비슷하게도 198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오른 《The Nylon Curtain》는 토토의 《Toto IV》로 인해서 노미네이트로 그쳤다.[18] 이 곡은 1986년 당시 개봉된 대니 드비토 주연의 골치 아픈 여자(Ruthless People)의 주제가로 사용되었다.[19] 빌리 조엘의 첫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의 오빠[20] 이후 빌리 조엘은 1992년에 전 매니저에 대해서 비꼬는 "The Great Wall Of China"를 작곡했다.[21] 이 곡은 가스 브룩스가 1991년에 커버해 싱글로 발매하기도 했다.[22] 참고로 곡에서 말하는 Fallujuh는 이라크 중부 알안바르주에 속한 도시이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당연히 반전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23] Surprises, A Room Of Our Own, Scandinavian Skies, Running On Ice, All About Soul, This Night 등[24] 1998년 뉴질랜드 인터뷰[25] 자세한 내용은 엘튼 존 문서 참고.[26] 빌리 조엘 다큐멘터리[27] Unforgettable People (XV): Billy Joel[28] 1998년 3월 도쿄 인터뷰[29] Rocket Man: Elton John From A-Z, 50 페이지[30] 1998년 3월 도쿄 인터뷰[31] Unforgettable People (XV): Billy Joel[32] 엘튼 존/빌리 조엘 셋리스트[33] 엘튼오그래피의 '1998년 투어' 페이지, ELTON JOHN 353 페이지[34] The Union 다큐멘터리[35] Billy Joel Has Patched Things Up With Elton John[36] Rocket Man: Elton John From A-Z, 188 페이지[37] Unforgettable People (XV): Billy Joel[38] 왼쪽부터 래리 러셀, 빌리 조엘, 알 허츠버그, 리스 클락.[39] 왼쪽부터 더그 스테그마이어, 빌리 조엘, 리버티 드비토, 하위 애머슨[40] 왼쪽부터 리버티 드비토, 더그 스테그마이어, 빌리 조엘, 리치 카나타[41] 1982년 12월 29일 롱아일랜드 나소 콜로세움. 빌리 조엘, (빌리 조엘 뒤에) 데이비드 브라운, (색소폰) 마크 리베라, (드럼) 리버티 드비토, 1982~1986.[42] 참고로 리치 카나타는 엘튼 존의 14집 21 AT 33에 참여한 적 있다.[43] 참고로 리치 카나타는 1993년 12집 《River Of Dreams》에 다시 참여했지만 밴드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2006년 1~4월 뉴욕 공연에서 밴드에 잠시 합류했다.[44] 1998년 라인업. 뒤 왼쪽부터 마크 리베라, 크리스털 텔리페로, 비카 브램레트, 마이클 멜렛. 앞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젠탈, 데이비드 산토스, 빌리 조엘, 리버티 드비토, 토미 번스.[45] 1988년 이후로 현재도 함께 하고 있다.[46] 1995년.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본인의 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47] 1988년 이후로 현재도 함께 하고 있다.[48] 1993년 영입 이후로 현재도 밴드의 키보드로 활동하고 있다.[49] 2016년 4월 15일, 왼쪽 상단부터 마이클 델쥬디체, 척 버기, 앤디 시콘, 토미 번스. 토미 번스 아래부터 마크 리베라, 크리스털 텔리페로, 빌리 조엘, 데이비드 로젠탈, 칼 피셔.[50] 이 시기 빌리 조엘은 다른 여성들과 사귀며 원나잇 스탠드를 꽤 즐겼다.[51] 참고로 알렉서는 The Downeaster 'Alexa'의 이름이기도 하다.[52] 알렉서 조엘이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의 곡이라고 한다.[53] 어린 딸이 아빠에게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고 어디로 가는지를 물어본 일이 있는데 그에 대한 답으로 만든 곡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제목은 자장가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장송곡이나 추모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54] 2013년에 Just The Way You Are를 커버하기도 했다.[55] 알렉서 조엘은 2009년에 공황발작으로 약물을 복용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떠오르는 아이러니한 일.[56] 2009년 당시 29세.[57] 입원 당시 손에 커다란 깁스를 차고 있었고, 사인을 요청하는 종이들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의사가 사인해주는 걸 도와줬다고 한다.[58] 1964년부터 세션연주자로 활동 시작, 1967년부터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므로 제대로 성공하기 전까진 무명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