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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e Nichols 마이크 니콜스 | |
출생시 이름 | Mikhail Igor Peschkowsky 미카일 이고르 페스체코우스키 |
국적 | 독일, 미국 |
출생 | 1931년 11월 6일 |
나치 독일 베를린 | |
사망 | 2014년 11월 6일 (향년 83세) |
미국 뉴욕 맨해튼 | |
직업 | 영화감독 |
활동 | 1955년-2014년 |
배우자 | 다이앤 소여 |
자녀 | 아들 맥스 니콜스,딸 데이지 니콜스,제니 니콜스 |
1. 개요
미국의 영화감독.에미, 그래미 어워드, 오스카, 토니상를 수상한 이른바 'EGOT' 수상자중 한 명이다.
영화 감독으로 전업하기 전에는 즉흥 코미디에 능한 코미디언이자 리 스트라스버그로 부터 메소드 연기법을 익힌 배우였으며 그가 감독한 영화들 중 《졸업》은 특히 많은 영화들이 오마주를 표할 정도로 후배 영화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더스틴 호프만, 잭 니콜슨 등의 연기파 배우들을 자신의 영화에 자주 출연시킨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2. 코미디언 활동
니콜스 앤 메이의 스캐치 모음
1953년부터 세컨 시티 극단의 전신인 시카고의 즉흥 코미디 극단 Compass Player에서 활동하다가 같은 극단에서 공연하던 여성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일레인 메이(1932년 ~ )와 함께 극단을 나온 후 1957년 코미디 듀오 "니콜스 앤 메이(Nichols and May)"를 결성하여 코미디언으로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1]
기존까지 미국에서 인기를 누리던 로렐과 하디, 애보트와 코스텔로, 마틴-루이스 등의 콤비나 일련의 부부 코미디언들과 차별화되는 이들만의 특징은 '상황(Scene)' 중심의 코미디를 선보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특정한 캐릭터나 남녀간의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이 구상한 스케치 코미디의 상황에 맞게 매 스케치마다 자신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변형시켰다. 약속에 늦을 것 같아 공중전화에서 급히 통화를 하려다가 전화교환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 의사와 진찰을 받는 환자가 대화를 나누는 것 등 일반인들이 일상에서 겪는 평범한 일들을 코미디의 주요 소재로 썼다는 것도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다.
남녀관계의 모순과 사회 억압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는 두 사람의 코미디는 1958년 첫 앨범이 나온 직후부터 인기를 얻었다. 1959년에 이미 그들은 약 5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으며# 1960년에는 NBC 라디오에서 송출된 Monitor라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일련의 코미디 녹음물을 남겼다.[2] 이후 1960년 10월 6일부터 1961년 7월 1일까지 브로드웨이에서 306회 동안 펼쳐진 그들의 단독 코미디 쇼 <An Evening with Mike Nichols and Elaine May>가 큰 흥행을 거둠으로서 그들의 인기는 절정을 맞이하였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그들이 발매한 3장의 코미디 앨범들도 모두 빌보드 차트 40위권 안에 진입하는 등 큰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일레인 메이가 각본과 감독을, 마이크 니콜스가 주연을 맡아 1961년 말에 개막한 연극 A Matter of Position이 흥행에 크게 실패하였고 승승장구하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실패를 겪은 것에 낙담한 나머지 결국, 다툼 끝에 각자의 커리어를 위해 듀오를 해체하는 것이 낫다고 합의한다. 그 결과 1962년 베스트 앨범 In Retrospect를 발매한 뒤 두 사람은 듀오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후 일레인 메이는 극작가로, 마이크 니콜스는 연극 연출가를 거쳐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커리어는 니콜스 쪽이 훨씬 잘 나갔던 편이다. 일레인 메이는 일적으로 지독한 완벽주의자여서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많았고 영화 감독으로서도 그녀의 완벽주의자적인 면모 때문에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예로 미키와 니키 촬영 당시 든 필름 양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미국 영화)의 3배나 되었다고 한다. [3] 여기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포착해야 한다는 이유로 존 카사베츠와 피터 포크가 카메라 밖으로 나갔음에도 돌아올지 모른다면서 카메라 기사가 컷을 외치는 걸 막았다. 이러다보니 시간과 예산도 초과해 파라마운트 픽쳐스하고 대판 싸웠으며, 분쟁 도중 메이는 필름 릴을 숨겨버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감독했던 영화는 역대급으로 거하게 말아먹은 이슈타르(1987)[4]였기에 여러모로 굴욕을 많이 당했다. 2010년대 이후부터 재평가가 들어가는 추세.
콤비를 해체한 이후에도 두 사람은 친구 관계를 계속 유지했지만 콤비를 재결성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다시 같이 공연한 것은 1972년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의 대선 캠페인을 위한 집회에 참여했을 때와 1977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취임식 갈라 쇼에서의 공연이 전부였다.
그들의 코미디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받은 후배 코미디언이자 영화 감독 우디 앨런[5]은 "그들은 미국의 코미디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천명하기도 했으며 스티브 마틴, 빌 머레이, 데이비드 레터맨 등 미국의 많은 유명 코미디언들은 자신들의 코미디 스타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두 사람을 꼽는다. 90년대 방영된 미국의 전설적인 시트콤 사인펠드의 주연 겸 제작자인 제리 사인펠드 역시 "유년 시절부터 이들의 코미디 음반을 듣고 자랐으며 아직도 듀오가 발매한 코미디 앨범 전집을 집에 소장하고 있다."라고 직접 밝힐 정도로 이들의 팬이다.
3. 영화 감독 활동
마이크 니콜스 감독에 대한 시네 21의 소개글3.1. 주요 연출 작품
- 1966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 1967 졸업
- 1970 캐치 22
- 1971 육체의 인식
- 1975 포춘
- 1983 실크우드
- 1988 워킹 걸
- 1991 헨리의 이야기
- 1994 울프
- 1996 버드케이지
- 1998 프라이머리 컬러스
- 2003 엔젤스 인 아메리카
- 2004 클로저
- 2007 찰리 윌슨의 전쟁
4. 기타
- 출생연도와 출생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가족사가 드라마틱 했던 걸로 유명하다. 유대인 가문이라[6] 독일에서 탈출해야 했는데 가족 전체가 이산가족이 돼서 아버지가 먼저 미국으로 간 뒤, 동생과 함께 단둘이서 미국까지 가야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1년 늦게 이탈리아로 탈출해서 왔다고. 난민으로 온지라 미국 국적도 1944년에야 획득했다.
- 미국으로 건너온 뒤 아버지가 니콜스(Nichols)로 개성하면서 가족 전체가 함께 법적으로 개명했다. 마이크 니콜스는 이때 개명한 정식 이름이다.
[1] 마이크 니콜스가 혼자 너무 튄다고 판단한 극단의 동료들이 극단에서 마이크를 강제로 쫓아내자 그와 절친한 친구사이인 일레인 메이가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마이크와 함께 Compass Player극단을 나와서 코미디 듀오를 결성했다.[2] 이 녹음물은 미국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서 60년대 내내 재방송되었고 이후 4장짜리 CD 세트로 발매되었다.[3] 이 영화의 상영 시간은 감독판 기준 106분이다.[4] 더스틴 호프먼, 워렌 비티, 이자벨 아자니까지 투입된 제작비 5500만 달러짜리 대작이였으나 800만 달러라는 처참한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더스틴 호프먼과 워렌 비티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압권으로 꼽히며 이자벨 아자니의 출연작 중 최초의 흥행 실패작이다. 이 영화도 메이의 완벽주의 때문에 촬영 기간만 1년을 소모했다.(1985년부터 1986년까지 촬영)[5] 코미디 작가인 래리 겔바트는 우디 앨런의 코미디 스타일을 일레인 메이와 비교하며 "그는 그녀의 코미디 스타일을 완전히 모방했다"고 평했다. 실제로 우디 앨런은 니콜스 - 메이 콤비와 유사하게 종종 지식인들을 놀리는 유머를 했다.[6] 아나키즘을 선도한 학자와 과학자가 있는 학자 집안이라고 한다. 사실상 남 수준이긴 하지만 니콜스 본인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인척 관계일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