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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6100 Hollywood Blv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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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14141><colcolor=#fff> 그레고리 펙 Gregory Peck | |
본명 | 엘드리드 그레고리 펙 Eldred Gregory Peck |
출생 | 1916년 4월 5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러호이어 | |
사망 | 2003년 6월 12일 (향년 87세)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90cm |
직업 | 배우 |
학력 |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 UC 버클리 영문과 |
활동 | 1941년 - 2000년 |
종교 | 가톨릭 |
가족 | 아버지: 그레거리 펄 펙(1886~1962) 어머니: 버니스 메이 에어즈(1894~1992) |
배우자 그레터 쿠커넌(1942 결혼-1955 이혼) 배우자 베로닉 파사니(1955 결혼-2012 사망) | |
자녀 4남 1녀
| |
손주 5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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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든 배우들의 위엄있는 아버지.
스티븐 스필버그
스티븐 스필버그
펙은 배우들에게 있어서 성실과 정직의 아이콘이다.
커크 더글러스
커크 더글러스
미국의 영화 배우.
열정적인 태도로 단호한 행동을 실천하는 남성성 넘치는 권위나 사회 도덕과 전통적 가치의 대변인을 주로 연기해 전후 세대에게 울림을 주었다. 미국과 미국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을 구현했던 하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많은 출연작들이 인간의 가능성과 사회 현실 사이의 복잡성과 모순, 가족의 중요성을 조명한다. 배우 본인과 거의 구분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된 인물들이 많았다. 거친 사내성을 강조한 커크 더글러스, 버트 랜캐스터와 같은 세대지만, 좀 더 나이대가 있는 게리 쿠퍼,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신사 부류로 묶인다.
아카데미상 수상 1회/후보 지명 4회, 골든 글로브 수상 3회/후보 지명 3회, 에미상 후보 지명 1회를 기록했다.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남성 배우 12위에 등극했다.
활처럼 분명한 호를 그리는 눈썹이 특징이다. 라이프지는 "링컨처럼 사나이답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 생김새로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표현했다.
<로마의 휴일> 덕분에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상당히 높다.
2. 생애 및 활동
어린 시절을 캘리포니아 러호이어에서 보낸 펙은 6살 때 부모님이 이혼한 뒤 어머니는 재혼한 방문판매원 새남편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니고 약사인 친부는 야근이 잦았던 탓에 한동안 친할머니 손에 컸다. 10살 때 로스앤젤레스의 세인트 잔 육군사관학교[1]로 보내져 4년을 보내며 자기수련법을 익혔으며 권위 있는 인물 존재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지하게 됐다. 이후엔 아버지 밑에서 공립 고등학교를 다녔다.주립 샌디에이고 교육대학[2]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열렬한 염원을 이뤄드리기 위해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1학년을 마치고 UC 버클리 영문학과와 의과준비과정[3]으로 편입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던 중 연극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는데 연극 특유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공동체 분위기에 끌려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과준비과정은 그만두었다.
1939년 대학을 졸업하고 이름을 엘드리드에서 그레거리(Gregory)로 바꾸고 뉴욕시로 향했다. 일 년 만에 순회공연에서 작은 역할들을 따내게 되었고 1942년 "The Morning Star"로 브로드웨이 데뷔를 해냈다.
펙이 출연했던 연극 대다수는 인기가 없어 금방 막을 내리곤 했지만 펙은 1944년 <영광의 나날>에서 블래디미어 역을 따내며 영화판에 데뷔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평단으로부터 차가운 반응을 받았지만 두 번째 주연작인 <천국의 열쇠>(1944)에서 과묵한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 연기로 아카데미상에 처음 후보 지명이 되었다.
곧 펙은 조셉 코튼보다 출연료가 낮다는 이유로 발탁된 앨프리드 히치콕의 <망각의 여로>(1945)로 당대의 섹스심벌이 되었다. <로마의 휴일>(1953)처럼 로맨틱한 역도 잘 어울렸다.
존 웨인의 배역을 이어받은 킹 비더 연출의 <백주의 결투>(1946)에서의 부도덕하고 차가운 인물, <황색 하늘>(1948)의 착한 무법자도 잘 소화해냈다. <권총왕>(1950) 역시 존 웨인을 위해 기획된 영화였지만 펙이 대신 받았다. <권총왕>(1950)에서 시대 고증에 걸맞은 풍성한 콧수염을 달았는데, 20세기 폭스 수장 스피어로스 P. 스쿠러스[4]는 그로 인해 펙이 제작사에 백만 달러의 손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망각의 여로>(1945) | <권총왕>(1950) |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리어 커잰이 연출한 <신사협정>(1947)의 필 그린처럼 도덕 신념이 확고한 인물상이 펙의 상징이었다. 완고한 한편 잘 보살피기도 하는 가부장상은 <정오의 출격>(1949), <모비 딕>(1956)이나 <나바론의 요새>(1961)같은 강인한 남성성으로도 이어졌다.
특히 <앵무새 죽이기>(1962) 이후 역할이 고착화 됐다. 작은 남부 시골마을 변호사가 겪는 개인 갈등과 비인간적 조건에 처한 타인을 향한 인류애를 통해 인종차별, 도덕, 정의의 문제를 강렬하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펙은 출연작 중 이 영화를 가장 좋아했는데, 아이들의 삶을 묘사하고 가족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기 때문이었다.
<앵무새 죽이기>(1962) |
1960년대와 70년대에 연기에 다변화를 주려고 노력한 결과 스릴러, 전쟁물, 서부극 출연이 많아졌다. 그 예가 <맥아더>(1977)와 나치 전범을 연기한 <브라질에서 온 소년>(1978)이다.
80년대엔 TV와 영화를 병행했다.
1991년 <케이프 피어>를 끝으로 연기 일선에서 거의 물러났으나 85세 때 소극장과 대학을 돌며 배우, 아버지, 유명인사로서의 삶에 대해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말년인 2002년에는 로마의 휴일의 개봉 50주년을 맞아 제작된 특별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도 했고, 게리 피시걸이 그와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한 회고록이 나오기도 했다.
2003년 6월 12일,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망할 당시 부인의 손을 꼭 잡고 편하게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가톨릭 장례미사를 치른 뒤 화장해 납골당에 안장되었으며, 9년 뒤 타계한 부인 베로니크와 함께 합동안치되었다.
3. 주요 출연 작품
- 영광의 나날, 1944
- 천국의 열쇠, 1944
- 망각의 여로, 1945
- 사랑의 결단, 1945
- 가장 특별한 선물, 1946
- 백주의 결투, 1946
- The Macomber Affair, 1947
- 신사협정, 1947
- The Paradine Case, 1947
- 황색 하늘, 1948
- 정오의 출격, 1949
- 권총왕, 1950
- 다윗과 밧세바, 1951
- Only the Valiant, 1951
- 킬리만자로의 눈, 1952
- 로마의 휴일, 1953
- 나이트 피플, 1954
-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나이, 1956
- 모비 딕, 1956
- 아름다운 질투, 1957
- 거대한 서부, 1958
- 브라바도스, 1958
- 비수, 1959
- 그날이 오면, 1959
- 나바론의 요새, 1961
- 케이프 피어, 1962
- 서부 개척사, 1962
- 앵무새 죽이기, 1962
- 캡틴 뉴먼, M.D., 1963
- 비루먹은 말을 봐라, 1964
- 맥켄나의 황금, 1969
- 오멘, 1976
- 맥아더, 1977
- 브라질에서 온 소년, 1978
- 케이프 피어, 1991
4. 개인사
알코올 의존증, 몇 차례의 불륜 등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인간성 좋기로 평판이 자자했다.1942년 첫 번째 부인 그레터 쿠커넌(Greta Kukkonen)과 결혼했다.
1945년 <망각의 여로>를 찍으며 역시 가정이 있던 잉그리드 버그먼과 불륜했다. 이를 1987년 피플지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고백했다.
1952년 신문기자 베로닉 파사니(Veronique Passani)를 만나 불륜 관계에 접어들었다. 파사니와의 첫 데이트 일화가 꽤 재미있다. 펙이 점심 식사 초대를 하자, 파사니는 굉장히 망설인 끝에 겨우 승낙했단다. 재혼 후 첫 데이트 신청을 왜 주저했었냐고 묻자 파사니는 그날 기자로서 매우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 답했다. 바로 장폴 사르트르의 집에서 진행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와의 인터뷰였다. 이 말을 들은 펙의 대답은 "선택 잘 했네"였다.#
1955년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이 완료된 다음날 바로 파사니와 재혼했다.
1975년 장남 조너선 펙이 자살했다.
1986년에 태어난 손자 이선 펙도 할아버지처럼 185cm의 장신에 얼굴도 쏙 빼닮아 미남에 중저음의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는데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에서 주인공 마이클 버넘의 의붓동생 스팍 역으로 출연해서 호평을 받았다.
1990년대에 넷째 아들 앤서니 "토니" 펙이 슈퍼모델 쉐럴 티그즈[5]의 세 번째 남편이었다.
5. 여담
- 유명한 진보 성향이었다. 데뷔 5년차 때 매카시즘을 반대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동시에 전장의 복잡성과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통 속에서 싸우고 있던 아들에게 지지를 표했다.
-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회장을 역임했다.
- 연기란 배우 개인의 인간성과 경험, 그리고 감정을 관객과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우가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는 인물이 좋은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 다양한 역할 연기보다는 자신이 해왔듯이 일정 영역 내의 배역들을 계속 자의식 없이 효과적으로 선보여서 관객들이 그 연기를 진실로 믿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험프리 보가트와 게리 쿠퍼를 그 예시로 들었다. 실제로 그레고리 펙은 연기가 안정되긴 했지만 폭 넓은 개성을 지닌 배우는 아니었다. 주로 모범적이고 성실한 남자 역에 잘 어울렸다는게 중론으로, 히치콕의 망각의 여로에서는 아무래도 다른 히치콕 남자 배우들에 비해서는 딸린다는 평이 많았다.
-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는 그레타 가르보, 그리고 함께 세 편을 작업한 에바 가드너를 꼽았다. 가르보는 메소드 연기를 초창기에 실현한 배우로 자신의 진실된 감정을 카메라, 그리고 관객과 공유하며 영화를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지성을 갖췄다고 평했다. 에바 가드너는 펙이 가장 친밀하게 지낸 여배우로, 같은 시골 출신이라 마음이 잘 맞았다고 한다. 가드너가 말년에 반신불수가 된 후 자살 충동에 시달릴 때도 얘기를 잘 들어주었다.
- 가장 좋아한 남배우는 로런스 얼리비에이와 스펜서 트레이시였다. 펙은 셰익스피어를 섭렵하고 영국 국립 극장 감독일을 하면서 무수한 영화까지 찍는 다재다능한 얼리비에이를 동경했고, 트레이시의 집중력과 연기를 하려고 애쓰지 않는 점을 좋아했다.
- 2류 영화를 1류처럼 보이게 만드는 게 스타의 자질인데, 그게 바로 험프리 보가트였다고 말했다.
- 코미디 연기에 욕심이 있었다. <로마의 휴일>(1953)과 <아름다운 질투>(1957) 이후로 코미디 제의가 쏟아질 것을 기대했는데 전혀 아니라 낙심했다고.
- <로마의 휴일>(1953) 촬영 도중 신인 오드리 헵번의 잠재성을 알아보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스타로 대접해 이름이 똑같이 영화 제목 위에 올라가게 만들어 달라고 에이전트[6]에게 요청했다. 에이전트는 당신 이름이 영화 제목 위로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아냐며 만류했지만, 펙은 "헵번이 아카데미상을 탈 게 분명한 마당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난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셈이 되는 거"라고 반박했다. 펙의 고집대로 헵번의 이름은 펙과 마찬가지로 영화 제목 위에 올라갔고, 헵번은 정말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펙은 헵번이 작고한 직후 199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헵번의 진 허숄트 박애상 시상자로 서기도 했다.
- 아내 베로닉 펙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절친한 사이라 함께 테일러의 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다.
- 에어 프랑스 광고를 찍은 적이 있다.
- 소피아 로렌은 자서전에서 두 사람이 둘 다 각자 결혼생활 중일 때 잠시 관계를 가졌던 적이 있는 것으로 암시했지만 다른 증인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아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소피아 로렌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로렌은 같은 사안을 두고 말을 여러 번 바꾸는 경향이 있다.
- 국내 원로 영화배우 남궁원이 펙을 닮았다는 평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