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가드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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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7857e><colcolor=#fff> 에바 가드너 Ava Gardner | |
본명 | Ava Lavinia Gardner (에이버 러비니어 가드너) |
출생 | 1922년 12월 24일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랩타운 | |
사망 | 1990년 1월 25일 (향년 67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배우, 가수 |
학력 | 바턴 대학 |
신체 | 168cm |
활동 | 1941년 – 1986년 |
배우자 | 미키 루니(1942년–1943년) 아티 쇼(1945년–1946년) 프랭크 시나트러(1951년–1957년) |
종교 | 무신론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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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 사내처럼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뱃사람처럼 입이 걸지만, 어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몸에 갇힌 영혼.
― 클라크 게이블
미국의 영화 배우.― 클라크 게이블
잉그리드 버그먼, 비비언 리, 바버라 스탠윅과 함께 1940년대에 활동한 여배우로. 빛나는 미모와 강렬한 카리스마와 더불어 벨벳처럼 부드럽고 그윽한 목소리도 특징이다. 아카데미상, BAFTA, 골든 글로브에 후보 지명됐었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25위[1]에 올랐다.
2. 생애 및 활동
2.1. 어린 시절
어린 가드너는 남자아이들과 어울리며 맨발로 들판을 뛰어다니던 선머슴 같은 아이였다. 인형에도 별 취미가 없었다. 13살 때 가드너의 가족은 버지니아주 뉴포트 뉴스로, 다시 노스캐롤라이나주 윌슨의 락 리지[2] 교외로 이사를 간다.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기관지염으로 사망했다.
2.2. 데뷔
18살 때 윌슨에 있는 애틀랜틱 크리스천 대학에 다니며 비서직 수행 관련 수업을 수강하던 중 언니 "배피" 가드너[3]를 만나러 뉴욕을 방문했다가 사진작가인 형부[4]의 부탁으로 잠깐 모델을 서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를 따라한 초상이었다. 형부는 그 사진을 뉴욕의 번화한 5번가 사진관 쇼윈도에 장식했다.1941년 이 사진은 로우스[5] 극장의 법률 서기이자 MGM의 탤런트 스카우트로도 일하던 "바니" 듀헌[6]의 눈길을 끌게 된다. 듀헌의 제안으로 언니와 형부는 MGM에 사진을 보내게 된다. 바로 탤런트 부서로 연결이 됐지만 심한 남부 사투리가 문제였다. 가드너는 캐롤라이나 지역 출신 특유의, 뒤를 길게 빼는 발음 버릇이 있었다.
필름 테스트를 본 MGM의 수장 루이 B. 메이어는 "노래도 못하고 연기도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어쨌든 굉장하다"며 바로 7년 짜리로 주급 50달러에 고용하고 사투리를 교정할 보컬 코치와 노래 교사를 붙여주었다.
그 해 대학을 그만 두고 상경해 <Fancy Answers>로 데뷔했다. 어차피 공부엔 평생 소질이 없었다. 언니 배피도 18살 짜리 "시골뜨기 스타" 동생의 매니저 일을 해주기 위해 함께 했다. 이후 가드너는 1945년까지 크레디트에 이름도 나오지 않는 영화 20여편에 출연했다. 그나마 1943년부터는 가끔 이름이 올라가는 작품들이 생겼지만, 전부 B급이었다. 이 당시 가드너는 소위 '발연기'를 구사했지만, 필름 속 존재감만큼은 이미 탑스타의 자질을 보이고 있었다.
라나 터너, 헤디 러마 등 미인 배우들이 즐비한 MGM에서도 가드너의 미모는 유독 눈에 잘 띄었다. 그리고 가드너는 MGM의 간판이었던 미키 루니의 눈에 들게 된다. 루니는 자서전에서 가드너에게 첫눈에 반했던 순간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내 심장. 내 숨결. 내 사고." 가드너는 루니와의 연애 초반엔 언니 배피를 대동했다. 아역 스타 출신인 160cm의 루니는 가드너에게 정중하게 대하며 식사를 여러 번 대접했고, 가드너는 루이 B. 메이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42년 1월 10일 루니와 결혼했다. 가드너는 루니를 사랑한 건 아니었지만, 루니의 구애 방식이 맘에 들었다.
루니는 나름 할리우드에 아내를 알리려고 나섰지만 가드너는 너무 유명한 루니의 그늘에 늘 가려지곤 했다. 곧 가드너는 루니를 난쟁이라고 욕하면서 업신여기곤 했고 루니는 루니대로 신나게 바람을 피고 돌아다녔다. 사실 이게 신인 가드너는 잘 몰랐지만 주변 업계에선 익히 잘 알려져있던 루니의 원래 모습이었다. 충격을 받은 가드너는 언니 배피에게 몸을 기대고 울었다. 결국 두 사람은 17개월 만에 헤어진다. 1943년이었다. 그러나 가드너에 따르면 이혼 절차를 밟는 중에 둘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부부생활도 했다고. 가드너는 말년에도 루니에 대해 좋게 생각했다.
이혼하자마자 하워드 휴즈가 찾아왔다. 휴즈는 보석, 모피 등을 선물하고, 리무진, 캐딜락, 비행기 등으로 환심을 샀다. 가드너에 따르면 휴즈는 "성적으로 절제돼있고" "편협하지만" "배짱이 있는" 남자였다. 이미 그때부터 개인위생 문제가 있던 휴즈는 질투심이 심하고 가드너를 통제하려 들었다. 한 번은 가드너를 심하게 때려서 가드너의 턱이 나간 적이 있었다. 이에 가드너는 줄 마노 소재의 재털이로 휴즈의 머리를 쳐서 휴즈를 거의 죽일 뻔 했다. 근처에 있던 블러디 메리 칵테일 잔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고.[7] 그보다 더 유명한 일화는 가드너가 촛대로 휴즈의 머리를 때려 휴즈가 기절했던 사건이다. 그럼에도 가드너는 휴즈와 20여 년간 관계를 지속했고 그가 죽을 때까지 친구로 남았다.
루니와의 이혼 다음 해에 재혼한 사람은 가드너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이라고 했던 음악가 아티 쇼였다. 가드너는 그의 여섯 번째 아내였다. 아티 쇼는 매우 지적인 사람이었고, 가드너의 무식을 비웃으며 자존감을 무너뜨렸는데, 정작 그가 1년 만에 가드너를 버리고 재혼한 사람은 통속[8] 소설 작가였다. 심지어 쇼는 가드너가 이 작가의 책을 읽는 것을 비난한 적도 있었다. 그건 가드너가 쇼에게 더 이상 지적 받지 않기 위해 시도한 독서의 일환이었음에도. 가드너는 이때부터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 세 남자는 전부 절친 라나 터너와 이래저래 엮인 사람들이었다. 터너는 루니의 은막 속 첫 입맞춤 상대라 대중들 사이에 터너와 루니에 대한 소위 망붕이 퍼져있었다. 휴즈는 한때 터너가 만났던 인물이었다. 결정적으로, 아티 쇼는 터너의 전 남편이었다.
2.3. 비상
드디어 MGM은 가드너에게 <Whistle Stop>(1946)이란 주연작을 내줬지만, 평단도 대중도 반응하지 않았다. 가드너의 이름은 그때까지 그저 잡지에서 다채로운 연애사로만 소비되는 대상이었다.그러나 마침내 기회가 온다. MGM이 마찬가지로 신인이었던 버트 랜캐스터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원작의 누아르 <살인자들>(1946)을 찍을 수 있게 가드너를 유니버설로 대여해준 것이다. 가드너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요부 역을 강렬하게 소화해내 뭇 남성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줬을 뿐만 아니라 여성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상도 동시에 잘 표현해냈다. 가드너는 역시 주당으로 유명한 헤밍웨이와 술 대결을 할 정도로 친해졌고 나중에 <킬리만자로의 눈>(1952), <해는 또다시 뜬다>(1957) 등 그의 원작 영화에 두 편 더 출연했다.
버트 랜캐스터와 찍은 <살인자들>(1946) 홍보샷 |
그야말로 만개한 가드너는 MGM에서 "왕"으로 불리던 클라크 게이블과 <The Hucksters>(1947)에서 함께 연기하게 된다. 또한 1948년 <The Great Sinner>(1949)을 찍으면서 평생의 절친 그레고리 펙도 만났다.
1948년 잡지 Look의 시상식에서 그레고리 펙과 |
한편, 프랭크 시나트러와 가드너 두 사람이 첫 관계를 가졌던 때는 시나트러가 유부남이었던 1949년이었다. 아내 낸시 시나트러는 아이를 둘 낳은 상태였다. 함께 만취한 가드너와 프랭크 시나트러는 엉망진창으로 정사를 치른 뒤 거리로 나와 함께 38구경 총으로 가로등과 철물점 유리를 쏴 부셔버렸다. 경찰서로 끌려갔지만 소속사가 무마했다. 둘은 늘 마티니, 스카치 위스키, 버번을 들이키고, 섹스를 하고, 싸우고, 다시 화해하는 일을 반복했다. 천주교 신자 낸시 시나트러는 이혼을 거부했다. 프랭크 시나트러의 이혼을 기다리는 사이 가드너는 일부러 투우사와 하룻밤 관계를 가진 얘기를 하며 싸움을 부추겼다. 절친 라나 터너와 함께 있던 가드너에게 프랭크 시나트러가 물이 담긴 휴대용 질 세척기를 집어던진 일화도 유명하다. 그 사이에 대표작 중 하나가 되는 뮤지컬 <쇼보트>(1951)가 나왔다.
1951년 11월, 가드너는 라나 터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랭크 시나트러와 결혼했다. 낸시 시나트러에 대한 별거 신청 법적 효력이 발휘된 지 겨우 72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프랭크 시나트러는 대중의 호감을 잃었고, 가드너는 가정파괴범이라 불렸다. '현실판 팜 파탈' 소리를 듣는 와중에도 가드너는 클라크 게이블과 출연한 영화 <모감보>(1953)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본업인 연기 분야에선 잘해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결혼생활은 엉망이었다. 이미 결혼할 때부터 "한물 간" 인간으로 여겨지던 시나트러는 일이 완전히 슬럼프에 빠지면서 "가드너의 남편"으로 전락했다. 가드너의 표현에 의하면 시나트러는 "X 빠지게 노력했지만" MGM에서 쫓겨났고, 돈이 다 떨어져 요금 하나를 내려고 해도 가드너에게 기대야 했다. 가드너는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고 자신이 승승장구하는 사이 바로 옆에서 몰락하고 있는 시나트러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누군가가 왜 그 50kg 정도 밖에 나가지 않는 남자랑 헤어지지 않냐고 묻자 가드너는 "그거 다 고추 무게야"라고 응수했다. 잠자리에서 끝내주는데 왜 헤어지겠냐며.
하지만 가드너는 시나트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시나트러는 가드너 자신과 많은 면에서 닮은 사람이었다. 언니 배피는 동생 에바 가드너를 두고 "여장한 시나트러"라고 일컫기도 했다. 심지어 가드너는 시나트러가 <지상에서 영원으로>에 캐스팅 될 수 있게 힘을 쓰기도 했다. 이 영화의 성공은 시나트러 경력 부활의 신호탄이 되었다. 시나트러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까지 탔다.
그러나 시나트러는 의처증을 보이며 가드너를 괴롭혔는데, 가드너에 대한 시나트러의 집착은 사실상 시나트러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마치 그가 가드너를 생각하며 쓴 "I Am a Fool to Want You" 가사처럼 말이다. 시나트러는 가드너를 겁주기 위해 가드너가 옆방에 있는 걸 알면서 베개에 총을 쏘는 등 자살소동을 벌였다. 자연히 가드너 안에서 시나트러를 증오하는 마음도 커졌다. 가드너는 시나트러 몰래 불법 낙태를 두 번 했는데, 시나트러가 "너무 미워서" "그의 아이를 태어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이 가드너는 험프리 보가트가 상대역이었던 <맨발의 백작부인>(1954), <보와니 분기점>(1955) 등의 대표작을 만들었다.
한참 둘이 사이가 냉랭해졌을 때 시나트러는 오직 가드너와 가까이 있기 위해서 스페인에서 촬영된 <자랑과 정열>(1957)을 찍었다. 이때 가드너는 <해는 또다시 뜬다>를 찍기 위해 유럽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늘 '천사(Angel)'라고 부르던 가드너와 관계를 결국 회복하지 못하자 시나트러는 자신의 배역을 최대한 줄여달라고 감독에게 요청하고 스페인을 떠났다.
그렇게 1957년 가드너는 프랭크 시나트러와도 이혼을 했고, 이걸 두고 할리우드에선 가드너가 "시나트러학(學)" 학위를 땄다고 표현했다. 별거는 이미 1953년부터 하고 있었다. 둘의 결별 당시 시나트러 심경을 다룬 앨범이 바로 In the Wee Small Hours다. 이후에도 둘 사이는 끈끈해서 시나트러는 가드너를 늘 걱정했고, 가드너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시나트러를 그리워했다. 모든 것을 찢어발기던 부부싸움마저도.
2.4. 후반
1958년 가드너는 MGM과의 계약을 종료했다. 할리우드에 진절머리가 나 스페인으로 이사도 했다. 가드너는 스페인의 투우에 열광했다.마드리드에서 살 때 이웃이 아르헨티나에서 망명한 독재자 후안 페론이었다. 역시 독재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허가한 것이었다. 가드너가 연일 시끄럽게 플라멩코 댄스 파티를 하자 페론은 항의했는데, 가드너는 자신의 개를 푸는 것으로 대응했다. 프랑코가 자신의 경호원들을 보내 가드너를 체포하려 했을 때 가드너는 마침 미 공군과 함께 있었고 국가적 긴장으로 촉발될 것을 우려한 프랑코는 그냥 물러났다.
할리우드와 생활권이 멀어진 뒤에도 절친 그레고리 펙과 뉴클리어 아포칼립스물 <해변에서>(1959) 등에 출연하며 연기 생활을 이어나갔다. 존 휴스턴의 <이구아나의 밤>(1964)으로 산세바스찬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가드너가 보인 연기를 평론가들은 가드너의 전 출연작들 가운데 최고로 친다.
1966년 존 휴스턴의 <천지창조>를 찍으면서 조지 C. 스콧과 사겼는데 스콧은 술에 취하면 인사불성이 돼 가드너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다음 날 가드너가 온몸에 멍이 든 채 누워있으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가드너는 스페인에서 10년을 살다가 1968년에 영국 런던으로 이사했다.
가드너는 늘 일하고자 했지만 이미 60년대부터 들어오는 일감이 줄어 있었다. 평론가들은 그 이유가 가드너 본인과 작업 환경 둘 모두에 있었다고 본다. 가드너는 스스로도 자신의 삶은 "영화를 만들었고, 잠자리를 만들었고, 인생을 X같이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잼은 결코 만든 적이 없다"로 압축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술, 담배, 그리고 남성을 탐닉한 것으로 유명했다. "밤새 춤추고 새벽 5시에 돔 페리뇽을 마시며 스튜디오에서 화장을 받는 게 일상"이었다. 몇 십 년에 걸친 이런 무절제한 생활 습관이 자연히 가드너의 건강을 크게 해쳤을 뿐만 아니라 외모도 망가뜨려 같은 나이대의 여성 스타들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70년대부터는 미국 영화의 경향성이 바뀌면서 고전 할리우드 시대 여배우들을 선호하지 않게 됐다.
결국 가드너는 60년대 후반부터는 산발적으로 일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외모가 망가진 건 가드너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개는 런던 아파트에서 은둔하며 지냈다. 젊은 시절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컸기 때문에 상실로 인한 고통이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사진작가 테리 오닐[9]의 작품. 1973년, 애리조나주에서 촬영되었다. |
그래도 1985년엔 "Knots Landing"이라는 CBS 통속 드라마에까지 나갈 정도로 연기에 대한 의지는 늘 강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마지막 영화 작업은 ABC TV 영화 <Harem>(1986)이었다.
2.5. 말년과 죽음
1986년 가드너는 두 번의 뇌졸중을 겪으면서 반신이 마비돼 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 자연히 가드너는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이를 친구 그레고리 펙과 전남편 미키 루니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된 현실은 가드너가 평생 지켜온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었다.가드너는 1990년 1월 25일 런던의 자택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 평생에 걸친 흡연이 원인이었다. 장례식 비용은 전남편 프랭크 시나트러가 부담했다. 이때 프랭크 시나트러는 바버러 시나트러[10]와 결혼생활 중이었다. 가드너는 노스캐롤라이나 스미스필드의 선셋 메모리얼 파크[11]에 매장되었다. 부모님과 형제가 묻힌 바로 옆 자리였다.
1992년 절친 그레고리 펙은 1981년에 세워진 스미스필드 타운의 '에바 가드너 박물관'을 방문해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이미 세상을 뜬 평생의 친구를 추억하기도 했다.
1998년 여름, 가드너가 1951년에 <판도라>를 찍었던 스페인의 토사 데 마르[12]에 가드너의 동상이 세워졌다.
가드너가 말년에 거주했던 런던 자택이 런던 내 명사 관련 장소에 다는 문패인 파란 명판[13]을 받았다.
2.5.1. 자서전 관련
한국에선 화제가 되지 않았지만 미국에선 자서전과 관련한 일화가 업계에 끼친 영향이 꽤 크다.1988년 가드너는 자서전을 내기 위해 유령작가를 고용했다. 그러나 유령작가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시나트러가 마피아와 연루돼있다고 주장한 걸 알고 1990년 갈라섰다. 가드너는 어째서인지 이미 익히 알려져있던 시나트러와 마피아의 친분을 늘 부인하고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유령작가가 2012년 사망한 뒤 그가 남긴 원고 등을 토대로 2013년 "Ava Gardner: The Secret Conversations"란 책이 나왔다. 이 작가와의 인터뷰 녹음 속에서 가드너는 다른 스타들의 자서전 작성용 대담과는 다르게 매우 솔직한 태도를 보였고 그 무엇도 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나이를 먹어서 미모를 잃는다는 건 개X같이 고통스러운 일이야. 내가 라나 터너보다 주름이 많다니."
이때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팬티 서랍을 들추게 해도 되는지" 끝까지 고민하면서도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이 유령작가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덕에 오늘날 많은 사실들이 알려져있다.
베스트셀러 소설 The Seven Husbands of Evelyn Hugo의 작가 테일러 젠킨스 레이드는 가드너가 도중 협력을 그만 뒀던 이 자서전에서 보여준 극한의 솔직함에서 한 여배우의 회고 형태로 진행되는 해당 소설의 양식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백작부인 코라 역으로 유명한 배우 일리저버스 머거번[14]은 아예 이 자서전을 바탕으로 직접 희곡 "Ava: The Secret Conversations"를 써서 2022년부터 본인이 가드너 역을 맡아 공연을 올리고 있다. 가드너 신탁[15]의 협조도 받았다. 평이 좋은 편이다.
미국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마이어 랜스키 역을 연기한 아나톨 유세프[16]가 유령작가는 물론 가드너의 삶에 주요했던 남성들 전부를 일인다역 연기한다.
Ava: The Secret Conversations |
가드너는 이 유령작가와의 자서전 작업을 중단한 뒤 다른 작가를 섭외해 1990년 자서전 "Ava, My Story"를 냈다. 여기에선 사실을 일부 왜곡했다는 얘기가 있다.
3. 출연작
<rowcolor=#ffffff> 연도 | 작품 | 배역 |
1942 | Reunion in France | |
1943 | 히틀러스 매드맨(Hitler's Madman) | 프란시스카 프리트릭 |
1944 | Two Girls and a Sailor | |
3 Men in White | 랜덜 "레드" 애덤즈 | |
Three Men in White | 진 브라운 | |
1945 | She Went to the Races | 힐더 스팟츠 |
1946 | Whistle Stop | 메어리 |
살인자들(The Killers) | 키티 칼린스 | |
1947 | The Hucksters | |
1948 | 비너스의 한 번의 손길 | |
1949 | The Great Sinner | |
East Side, West Side | 이저벨 로리슨 | |
The Great Sinner | ||
The Bribe | ||
1951 | 판도라(Pandora and the Flying Dutchman) | 팬도러 |
쇼보트(Show Boat) | 줄리 러번 | |
1952 | 킬리만자로의 눈(The Snows Of Kilimanjaro) | |
Lone Star | ||
1953 | Knights of the Round Table | |
Ride, Vaquero! | ||
밴드 웨건(The Band Wagon) | 본인 | |
모감보(Mogambo) | ||
1954 | 맨발의 백작부인(The Barefoot Contessa) | |
1956 | 80일간의 세계일주(Around The World In 80 Days) | |
보와니 분기점 (Bhowani Junction) | ||
1957 |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 |
오두막집(The Little Hut) | ||
1958 | 마야(The Naked Maja) | |
1959 | 그날이 오면(On The Beach) | |
1960 | La sposa bella(The Angel Wore Red) | |
1963 | 북경의 55일(55 Days At Peking) | |
Seven Days in May | ||
1964 | 이구아나의 밤(The Night of the Iguana) | |
1966 | 천지창조(The Bible: In The Beginning) | |
1968 | 비우(Mayerling) | |
1970 | The Ballad of Tam Lin | |
1972 | 폴 뉴먼의 법과 질서(The Life and Times of Judge Roy Bean) | |
1974 | 대지진(Earthquake) | |
1975 | 허가받은 살인(Permission To Kill) | |
1976 | 파랑새(Blue Bird) | |
카산드라 크로싱(The Cassandra Crossing) | ||
1977 | The Sentinel | |
1979 | 시티 온 파이어(City on Fire) | 매기 그레이슨 |
1980 | The Kidnapping of the President | |
1994 | 이것이 엔터테인먼트 3(That's Entertainment! III) |
4. 여담
- 그레고리 펙이 가장 친하고 가장 좋아했던 여배우였다. 둘 다 시골 출신이라 마음이 잘 맞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세 편을 같이 작업했다.
- 20대에 타임지 표지를 장식해내는 쾌거를 이뤘다. 1951년 9월 3일자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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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테일러, 데이비드 니븐, 스티브 맥퀸, 멜 토메이, 말런 브랜도 등 할리우드 스타들은 물론 여러 투우사들과 가벼운 정사를 즐겼고, 로버트 스택과는 포썸을 하려다가 실패했다.[18] 존 F. 케네디와도 관계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 투우사 루이스 미겔 도밍긴과 사귄 적이 있다.
- 첫 남편 미키 루니가 "빨갱이"라 부를 정도로 골수 민주당원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비서이자 연인이었던 마리타 로렌츠에 따르면, 가드너는 1959년에 당시 미국 좌파 사이에서 해방가로 인식되고 있던 카스트로와 만났고 대화를 나눈 끝에 그의 사상에 매혹돼 유혹하려 한 적이 있다. 당시 신경이 곤두선 가드너는 로렌츠의 뺨까지 때렸는데, 카스트로는 가드너를 진정시키고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신의 보좌관을 대신 소개시켜주었다.
- 흑인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와 잡지 표지를 찍어 소란이 있었다. 당시로선 금기시돼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 눈색이 그리 선명하지 않아 영화상으로나 사진상으로나 분명하게 보이는 경우가 드물지만, 당시 영화사들이 늘 찾아헤맸음에도 고전 여배우들 중에선 좀처럼 없는 녹안의 소유자였다.
- 타고난 머리카락 색은 갈색이다.
- 할리우드의 술집인 Chasen's, Ciro's, the Coconut Grove, Don the Beachcomber의 단골이었다.
- 영화 <에비에이터>(2004)에서 케이트 베킨세일이 가드너를 연기했다. 영화 속 인물의 성격 묘사는 실제 가드너와 어느 정도 닮아있지만, 하워드 휴즈에게서 가드너가 청혼을 받았다는 설정 등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다.
- <Frank and Ava>(2020)에서 에밀리 얼리시어 로우[20]가 가드너 역을 연기했다. 영화는 혹평을 받았다. 그 외에 루카스 하스[21], 에릭 로버츠, 디안 워윅 등이 출연했다.
[1] #[2] Rock Ridge.[3] Beatrice "Bappie" Gardner.[4] Larry Tarr.[5] Loews.[6] Barnard "Barney" Duhan.[7] 즉 핏빛의 술 안에 진짜 핏방울이 섞인 것이다.[8] 당시 기준으로.[9] Terry O'Neill.[10] Barbara Sinatra. 제포 막스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11] Sunset Memorial Park.[12] Tossa de Mar.[13] Blue plaque.[14] Elizabeth McGovern. 1961-.[15] Ava Gardner Trust.[16] Anatol Yusef.[17] Joseph Nicolosi.[18] 스택이 갑자기 장폐색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19] Marcia Gay Harden.[20] Emily Elicia Low.[21] Lukas Ha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