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폰다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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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1601 Vine Street |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헨리 폰다 Henry Fonda | |
본명 | 헨리 제인즈 폰다 Henry Jaynes Fonda |
출생 | 1905년 5월 16일 |
미국 네브래스카 주 그랜드 아일랜드 | |
사망 | 1982년 8월 12일 (향년 77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장 | 185cm |
지지 정당 | |
부모 | 부 윌리엄 브레이스 폰다(1879년생~1935년 사망) 모 헤르베르타 엘머 제인즈 폰다(1879년생~1934년 사망) |
배우자 | 마거릿 설러밴(1931년~1933년 이혼)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1936년~1950년 사별) 수전 블랜처드(1950년~1956년 이혼) 아프데라 프란케티(1957년~1961년 이혼) 셜리 메이 애덤스(1965년~1982년 헨리 폰다 사망) |
자녀 | 딸 제인 폰다(1937년생) 아들 피터 폰다(1940년생~2019년 사망) 딸 에이미 피시먼(1953년생)[1] |
데뷔년도 | 1925년[2] |
종교 | 크리스천 사이언스 → 성공회 → 불가지론 |
계급 | 미합중국 해군 중위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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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배우.2. 위상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할리우드의 선역의 아이콘. 동시에 할리우드 가족의 상징이기도 하다. 최근 프로레슬링계에 존 시나가 있다면, 1930~50년대 할리우드에는 헨리 폰다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까지도 그의 영화들은 많은 후배 배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3. 생애 및 활동
베티 데이비스와 함께 출연한 <제저벨>이나 선량하고 정직해보이는 이미지로 에이브러햄 링컨의 젊은 시절을 다룬 존 포드 감독의 <젊은 날의 링컨>에 나오기도 하고 서부영화에서는 개척정신이 있는 역할로 나왔으며 존 스타인벡의 유명한 명작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존 포드 감독의 동명 영화 <분노의 포도>와 톨스토이 원작의<전쟁과 평화>와 같은 명작영화에도 출연했다.이렇게 선량하고 정직한 이미지의 그가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인 무법자 시리즈로 유명해진 세르조 레오네의 작품 <옛날 옛적 서부에서>에 출연을 하는데 예상을 뒤엎고 악역이었다.
그 결과 당초 배급을 맡은 MGM 영화사가 파장을 두려워해 배급을 취소할 지경이었다. 미국인 관객들 역시 악역 변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악역으로도 명연기를 보여줬다. 사실 레오네의 작품엔 선역과 악역의 구분이 애매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누가 봐도 그가 악역이다. 이 작품에서 그가 맡은 악역 묘사가 어느 정도냐면, 한 가족을 몰살시키고 남은 어린아이마저도 자신의 이름을 알았다고 쏴죽이고, 젊은 시절엔 재미삼아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는데. 그냥 총을 쏘아서 죽이는 것이 아닌 매우 잔혹한 방법으로 죽였다.[3][4] 하지만 폰다는 악역을 연기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 즐겼다고 한다. 결국 배급은 파라마운트 픽처스가 맡았다.
그래서인지 1970년에 나온 <크루키드맨(대탈옥)>에선 정의로운 보안관으로 나오는데 결말이 안 좋았으며[5] 이후 <무숙자>에도 출연하기도 했다.
전쟁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였는데,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1965년작 <벌지 대전투>에서는 경찰 출신으로 날카로운 분석력과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육군 중령 카일리를 연기하였다. 1970년작 <불타는 전장>에서는 주인공의 상관 역으로 특별 출연, 오만 불손한 주인공을[6] "말 안 들으면 해군 이등병으로 강등시켜서 최전선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해 데꿀멍시킨다.[7] 이후 1976년작 <미드웨이>에서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해군 대장 역을 맡아 열연,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냉정한 역을 제대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작에 참여한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표작이자 전설적 걸작으로 이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작이다. 차후에 이 영화의 감독이었던 시드니 루멧이 연출한 <핵전략사령부>에서도 좋은 연기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헨리 폰다의 정치적 성향에 잘 부합하기도 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선 유죄 판결을 내리는 사람과 무죄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 갈등하는데, 헨리 폰다가 맡은 역할은 처음으로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 즉 정치적으로 보자면 리버럴에 가까운 사람이다.
다양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상복이 없었다가 극장 영화 유작인 <황금 연못>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딸 제인 폰다와 함께 출연했는데, 실제 사이가 영화 속 인물들보다도 좋지 않았으나 촬영을 통해 화해했다.
생전 마지막 출연작 <Summer Solstice>(1981)는[8] TV 영화로 1981년 9월 30일에 방영했다.
4. 사망
흥행과 평에서 대박을 거둔 <황금 연못>이 개봉하고 1년도 안 돼 77세로 세상을 떠났다.5. 출연작
5.1. 영화
- Spendthrift, 1936 - 타운젠드 "타우니" 미들턴(Townsend "Towny" Middleton) 역
라울 월시 연출. 롱아일랜드의 백만장자가 낭비벽(spenthrift)으로 전재산을 거의 다 날리고 암망아지 블랙 맘바(Black Mamba)의 켄터키 더비 우승에 희망을 건다. 메리 브라이언[9]이 속물적인 미인 아내로, 팻 패터슨[10]이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말 훈련사로 나왔다. 리노 이혼이 소재로 나온다. 흥행에 실패했다.
- 단 한번뿐인 삶(You Only Live Once), 1937 - 에디 테일러(Eddie Taylor) 역
프리츠 랑 연출.
자신을 지고지순하게 믿고 기다려준 아내(실비어 시드니 분)와 새 삶을 살아보려했던 전과자가 직장에서 쫓겨나고 은행강도 범인으로 오해 받은 끝에 사형을 언도 받는데...[11]
- That Certain Woman, 1937 - 잭 메릭 주니어(Jack Merrick, Jr.) 역
핼 B. 월리스가 제작에 참여했다. 감독 에드먼드 골딩[12]은 후에 베티 데이비스와 세 작품[13]을 더 찍었지만 폰다와의 작업은 이게 유일하다.
부잣집 아들이 밀주업자 남편과 사별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여성(베티 데이비스 분)과 사랑에 빠졌다가 집안의 반대로 헤어져 같은 계급의 여성과 결혼한다. 헤어진 연인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것도 모른 채. 밸런타인 데이 학살이 초반에 소재로 나온다.
- 제저벨, 1938
- 모호크족의 북소리, 1939
- 젊은 날의 링컨, 1939
- 무법자 제시 제임스(Jesse James), 1939
헨리 킹(Henry King) 연출. 타이론 파워가 제시 제임스를, 헨리 폰다가 동생 프랭크를 맡았다. 철도건설회사 대리인은 노선이 지나갈 자리에 땅을 가진 농부들에게 헐값에 넘길 것을 강요한다. 이들 중 하나인 제시 제임스 형제가 대리인과 싸우던 중 제시는 대리인의 손에 총상을 입히고 철도회사 사장은 사형선고를 원하는데...
- 돌아온 프랭크 제임스(The Return of Frank James), 1940
프리츠 랑 연출. 진 티어니의 데뷔작이다. 프랭크가 형 제시를 죽인 밥 포드와 찰리 포드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티어니는 더 덴버 스타(The Denver Star)의 기자 역이다. <무법자 제시 제임스>보다 높게 평가하는 평자도 있다.
- 분노의 포도, 1940
- Rings on Her Fingers, 1942 - 존 윌러(John Wheeler)역
코미디. 루벤 마물리안 연출. 상류층과 어울리는 생활을 꿈꾸던 백화점 거들[14] 판매원(진 티어니 분)이 우연찮게 혼기가 찬 젊은 부자 남성들을 등쳐먹는 사기단에 들어가 (비롯 가짜이긴 하지만) 원하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던 중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회계사 존을 부자로 오인해 먹잇감으로 삼았다가 사랑에 빠지고 마는데...
- 옥스보우 인서던트, 1943
- 황야의 결투, 1946
- 아파치 요새, 1948
- 미스터 로버츠(Mister Roberts), 1955
- 12인의 성난 사람들, 1957
폰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제작에도 참여한 작품.
- 서부 개척사, 1962
- 지상 최대의 작전, 1962
- 핵전략사령부, 1964
- 벌지 대전투, 1965
- 외로운 보안관(Firecreek), 1968
- 옛날 옛적 서부에서, 1968
- 무숙자, 1973 - 잭 역
- 수요일(Ash Wednesday), 1973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남편으로 나왔다.
- 미드웨이, 1976
- 홀리데이 킬러(Tentacoli), 1977
- 스웜, 1978
- 미티어, 1979
- 시티 온 파이어(City on Fire), 1979 - 앨버트 리즐리(Albert Risley) 역
대화재로 위기에 처한 한 도시를 구하는 소방서장을 연기했다. 삼부비디오 제목은 시티 파이어. 데드 쉽을 감독한 앨빈 라코프 감독 영화인데 데드 쉽이나 이 영화나 삼부비디오에서 냈다.
6. 사생활
결혼을 다섯 번 했다.- 첫 번째 아내 마거릿 설러밴은 헨리 폰다와의 결혼이 초혼으로, 폰다와 이혼한 뒤 윌리엄 와일러와 두 번째 결혼을, 유부녀 캐서린 헵번과 불륜 중이었던 제작자 릴랜드 헤이워드와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마지막 결혼은 제작자 케네스 웨그(Kenneth Wagg)와 했으며 설러밴의 사망으로 사별했다.
- 두 번째 아내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와의 사이에서 첫째 딸 제인 폰다와 막내 아들 피터 폰다를 보았고, 피터 폰다의 딸인 손녀 브리짓 폰다가 있다.
피터 폰다는 회고록 <Don't Tell Dad>에서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밝혔다. 다만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우리를 때린 적은 없고 굶기지도 않았다"며 그런 종류의 학대는 아님을 분명히 했다.
헨리 폰다는 우울증을 앓던 두 번째 아내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를 두고 수전 블랜처드와 바람을 핀 끝에 아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혼 신청을 했고, 아내는 그 충격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헨리 폰다는 아내가 사망하고 얼마 안 가 바로 블랜처드와 재혼했다. 몇몇 다른 일화들까지 더해 헨리 폰다는 한동안 소시오패스로 의심 받기도 했다. 아들 피터 폰다는 아버지 헨리 폰다가 우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도로 자란 영향 탓인지[15] 감정에 휩쓸리는 걸 두려워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터 폰다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과 누나 제인 폰다는 장례식장에 가지도 못했고, 그 뒤로 헨리 폰다는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으로 자기들 남매를 속였다고 말했다. 아버지 헨리 폰다가 신문이나 잡지 일체를 못 보게 치워버리고 집에서 일하던 고용인들도 어머니에 대해 함구해서 진실을 모르다가 어느 날 누나 제인 폰다가 우연히 잡지에서 기사를 읽고 진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동생 피터 폰다와 공유했다고 한다. 제인 폰다는 헨리 폰다가 엄마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관계가 악화 되었다.
- 세 번째 아내 수전 블랜처드는 결혼 당시 21살, 헨리 폰다는 45살이었다. 헨리 폰다와 함께 두 번째 아내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를 자살로 내몬 장본인이나 막상 결혼 후엔 제인-피터 폰다 남매에게 좋은 새엄마가 되어줘서 두 남매 모두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수전 블랜처드는 전설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 도로시 해머스타인(Dorothy Hammerstein)의 친딸이자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의붓딸로, 헨리 폰다의 두 번째 아내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와 마찬가지로 사교계 명사였다.
그러나 수전 블랜처드는 24살의 나이차, 헨리 폰다의 무관심과 냉정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했다. 나중에 블랜처드는 헨리 폰다와의 결혼생활을 회고하며 자신은 "게이샤"나 다름 없었다고 회상했다. 피터 폰다는 둘이 이혼하게 됐을 때 통곡했는데, 아예 아버지 곁을 떠나 블랜처드를 따라가려고까지 했었다.
수전 블랜처드는 이후 세 번 더 결혼하는데, 마지막 남편이 리처드 위드마크다. 위드마크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했다.
- 네 번째 아내 아프데라 프란케티는 남작 지위를 지닌 이탈리아 귀족으로 오드리 헵번의 절친이었다. 폰다가 헵번과 <전쟁과 평화>를 찍던 중에 헵번의 소개로 알게 돼 결혼했다. 결혼 당시 프란케티는 25살, 헨리 폰다는 52세, 제인 폰다는 18살이었다.
- 피터 폰다와 제인 폰다는 헨리 폰다와 성인기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아 함께 모인 인터뷰에서 서로 어색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 말년엔 자녀들과 사이가 좀 가까워졌는지 1978년 헨리 폰다가 AFI 공로상을 받았을 땐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 당시 한창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던 딸 제인 폰다를 욕하는 사람들을 향해 "닥쳐, 제인은 최고니까."라고 한방 날려줬다. 아버지의 말에 감동한 제인 폰다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영상 11:55부터)
- 1981년에 제인 폰다와 <황금 연못>에 함께 출연하며 화해했다. 사실 화해라기 보단 제인 폰다가 남편과 아버지로서 평생 잘못해온 헨리 폰다를 일방적으로 용서해준 것에 가깝다. 1981년에 마지막 공로상을 받고 1년 뒤인 1982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헨리 폰다의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황이라 제인 폰다가 대신 수상했다. 당시 헨리 폰다는 대리 수상한 제인 폰다와 화상통화를 하면서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지만, 실제로는 이번에도 오스카상을 못 탈까봐 안절부절했고, 제인과 피터를 닥달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7. 정치 성향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은 할리우드[16]에서도 매우 리버럴한 성향으로, 인종 문제에 깨어 있는 인물인지라 딸인 제인 폰다가 어렸을 때 자신의 앞에서 "니거"(nigger:깜둥이)라는 말을 쓰자 그녀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물론 당시가 1950~60년대인만큼 흑인 인종차별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기에 오히려 헨리의 행동이 더 드물고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제인도 리버럴한 성향을 띠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인권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전쟁 중인 적국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해서 자국을 비난한 건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훗날 그 점을 사과하였다.관련 기사특히 보수주의자인 존 웨인과 비견되는데, 존 웨인의 경우 참전하지 않아 겁쟁이 이미지가 박혔지만 헨리 폰다는 2차 세계대전에 친구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참전했기에 영웅으로 남았다.[17]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이미 나이가 3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스튜디오에서 가짜 전쟁이나 치르고 싶지 않다"는 그다운 의기의 발로였다. 처음에는 구축함 USS 새털리 호(DD-626)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하였으며, 나중에 임관하여 태평양 전선에서 항공전투정보 장교로 중위까지 진급했다. 이때 동성 훈장도 받았다. 3년간 야전에서 복무한 뒤에는 예비역으로 전환되어 1948년까지 예비역 해군 장교직을 유지했다.
또한 매우 독실한 민주당원이기도 해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적이 많다.
폴 뉴먼과 함께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진보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제임스 스튜어트와는 평생지기로 아주 절친한 사이였는데, 제임스 스튜어트가 공화당 지지자였기 때문에 처음에 정치 논쟁을 하다 싸움이 나서 그 제임스 스튜어트를 일방적으로 패버렸다고.[18] 싸움이 끝나고선 이래선 안되겠단걸 알겠는지 제임스에게 먼저 앞으로 절대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하여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매번 선거철만 되면 정치 이야기가 아주 없진 않아서 서로 냉대하긴 했었다고 한다.
8. 여담
- 실제 성격은 차가운 한편 화를 잘 내는 성미였다.
- 피터 폰다는 사탕을 몰래 까먹다가 걸려서 엉덩이를 얻어맞은 적이 있다.
- 제인 폰다의 경우 오히려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고 한다.
- 제인 폰다에 따르면 대본을 한 번만 보고 대사를 전부 암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연기 연습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 떨떠름한 표정과 씨익 웃는 표정을 잘 짓는 편이다.
- 제임스 스튜어트와 무명시절부터 같은 방을 쓰는 등 친해 늙어 죽을 때까지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같은 영화에 출연한 적이 많다.
- 말론 브란도의 어머니 도디 브란도(Dodie Brando)와 젊은 시절 같은 극단 소속이었고, 헨리 폰다의 어머니 엘머 허버터 폰다(Elma Herberta Fonda)가 아들의 연기 지도를 도디 브란도(Dodie Brando)에게 맡겼을 정도로 굉장히 막역한 사이였다 한다.
- 존 포드 감독과 무려 9작품을 함께한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이었다. 존 웨인이 14작품을 함께해서 가려졌을 뿐. 참고로 헨리 폰다는 존 웨인과는 <아파치 요새>, <지상 최대의 작전>, <서부 개척사[19]>, <In Harm's Way>(1965) 이렇게 4 작품을 함께 한 사이다. 이중 <아파치 요새>는 헨리 폰다와 존 웨인의 불화로 악명 높았다.#
- 한동안 침체기가 와서 연극에만 나오다가 존 포드의 <미스터 로버츠>(1955)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촬영장에서 존 포드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은 뒤 다시는 같이 일하지 않았다.## 이 사건 당시 헨리 폰다는 존 포드와 9 작품, 존 웨인은 존 포드와 8 작품 함께한 사이였기에 이 사건이 없었다면 오늘날 시네필들에겐 헨리 폰다가 존 포드의 페르소나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드가 자신의 경력을 되살려주기 위해 <미스터 로버츠>에 자신을 기용해야 한다고 제작사에 강력하게 주장했었다는 걸[20] 알게 된 후 존 포드 사망 2년 전인 1971년에서야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만든 다큐멘터리 <감독 존 포드(Directed by John Ford)>에 나와 존 포드와 함께 둘의 인연을 회상했다.#
- 소두인지라 비율이 극도로 좋은데, 키는 185.4cm라고 한다. 늙어서 줄어든 것으로 프로필상 187cm이고, 젊은 시절에는 절친 제임스 스튜어트와 큰 차이가 없었다. 특히나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잘 드러나는데, 본작의 등장인물들(3번, 7번)은 매우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들 180cm의 거구들이다.
- 2020년 9월 06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딸인 제인 폰다와의 사연이 방영되었다.
- 비교적 동안인 편이었는데, <옛날 옛적 서부에서>에 출연 당시 63세였다. <12인의 성난 사람들> 출연 당시에도 52세로 중년기였다. 젊은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제임스 스튜어트가 노안인지라 더욱 대조된다고.# 참고로 폰다가 스튜어트보다 3살 더 많다. 여담으로 제임스 스튜어트의 노안은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했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는 이유로 케리 그랜트에게 배역을 빼앗긴 일화도 있다. 실제 나이는 그랜트가 스튜어트 보다 4살 더 많다.
- 일본의 대배우인 나카다이 타츠야와 말할 때 모습과 외모가 닮았다. 둘 다 미남이고 선역, 이성적인 캐릭터를 자주 맡는다는 점도 비슷하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나카다이 타츠야는 일본의 헨리 폰다라고 인터뷰한 적도 있다.
[1] 입양[2] 1928년은 헨리 폰다가 배우만을 평생 직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고 고향을 떠났을 때이며, 진짜 데뷔는 1925년 고향 Omaha Community Playhouse에서 했다. 본문 AFI 공로상 수상 동영상에서도 자신의 연기 인생은 1925년부터라고 밝히고 시작한다.[3] 형제를 사로잡아서 형의 목을 매달고 동생의 어깨 위에 서 있게 해서, 아래에 있는 동생이 지쳐 쓰러지면 목이 매여 죽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 그다음 거친 숨 몰아쉬며 힘들어하는 동생 입에 하모니카를 꽂아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즐겼다.(...)[4] 그러다 결국 복수귀가 되어 돌아온 동생 손에 죽는다. 동생도 똑같이 죽어가던 자신의 입에 그때 그 하모니카를 박아 넣는 건 덤.[5] 마지막 돈을 차지한 탈옥범이 독사에 물려 죽고 그 돈들은 보안관 본인이 가져가 멕시코로 달아난다.[6] 일본어 통역장교인 중위였다.[7] 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며, 단지 미 해군 소속으로서 대령 계급장을 단 것만 알 수 있다.[8] 하지란 뜻이다.[9] Mary Brian.[10] Pat Paterson. 1910 - 1978. 샤를 부아예의 아내.[11] 스포일러 진범이 잡혀 사형 직전 사면 됐는데 이를 믿지 못하고 억지로 교도소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살해를 저지르고 도망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12] Edmund Goulding.[13] <다크 빅토리>(1939), <노처녀(The Old Maid)>(1939), <대단한 거짓말(The Great Lie)>(1941).[14] girdle. 여성 몸매 교정용 속옷.[15]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여전히 성경 구절을 근거로 들며 우는 건 나쁜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16] 사실 당대에는 세실 B. 드밀, 제임스 스튜어트, 게리 쿠퍼, 월트 디즈니 등 보수적인 사람도 많았다. 오히려 매카시즘 이전에는 리버럴보다 보수 세력이 더 컸을 정도다.[17] 다만 헨리 폰다의 자식들인 제인 폰다, 피터 폰다는 베트남전 반전운동을 하다가 이적행위를 한 적이 있어 비난받는 반면 제임스 스튜어트의 아들은 베트남전에 참전해 전사하는 등 애국적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스튜어트가 영웅, 애국자 이미지가 더 많이 박혀있다.[18] 이건 헨리 폰다가 언급한 것이 아닌 제임스 스튜어트가 지나가는 말로 '그때 내가 신나게 얻어맞았다네'라고 했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키가 5cm 이상 더 크지만 아무래도 체격 차이가 나다 보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19] 옴니버스식 구성이라 촬영장에서 만나진 않았다고. 참고로 존 웨인 주연 에피소드는 존 포드가 감독했다고 한다.[20] 당시 제작사는 주연배우로 윌리엄 홀덴 또는 말런 브랜도를 원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