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존스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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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존스 Chuck Jones | |
본명 | 찰스 마틴 존스 Charles Martin Jones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12년 9월 21일 |
미국 워싱턴 스포케인 | |
사망 | 2002년 2월 22일 (향년 89세) |
미국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1] | |
학력 |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
직업 | 애니메이터, 작가, 영화제작자, 각본가, 만화가, 화가 |
활동 | 1933년 ~ 2000년 |
배우자 | 도로시 웹스터 (1935~1978) 마리안 던 (1981~2002) |
링크 | [2] |
서명 |
<colcolor=#000000,#dddddd> 프리즈 프레렝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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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척 존스가 태어난 지 몇년 후 가족들은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를 갔는데, 자서전 Chuck Amuck에 의하면 본인이 지닌 미술 재능은 사업을 실패한 기업인이였던 아버지가 종종 쓸모없어진 연필, 문구들을 집으로 들고 와서 나눠줬는데 이때 그림들을 그리게 된 영향으로 축적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미술 학교의 수업에서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가치있는 것을 그리기 전에 10만장의 졸작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에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시나드 예술학교(Chouinard Art Institute)[3]를 졸업한 후엔 어브 아이웍스의 스튜디오에서 셀화 세탁을 맡으며 일했는데, 여기서 첫번째 부인인 도로시 웹스터를 만났다. 얼마 뒤(1933년), 루니 툰 단편을 제작하던 워너 브라더스 내부 스튜디오인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 이직하여 보조 애니메이터로 일하기 시작해 1935년에는 애니메이터로 승진하였고, 이 때 텍스 에이버리의 '에이버리 유닛' 중 1명으로 배정되었다. 당시 워너브라더스 내부 스튜디오엔 새로 일하는 애니메이터들이 머물 작업공간이 협소해진 상황이라 스튜디오 근처의 5평 규모의 작업실로 이동해 밥 크렘펫, 버질 로스, 시드 서덜랜드 등과 같이 일하게 되었다. 이 작업실은 터마이트 테라스(Termite terrace)란 별명이 붙여지게 된다.
초창기(1940년)에 연출한 단편인 Elmer's Candid Camera. 엘머 퍼드와 벅스 버니의 프로토타입이 되는 토끼가 등장하는데, 엘머 퍼드는 이후에 정립된 디자인과는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벅스 버니의 프로토타입이 되는 토끼의 목소리는 대피 덕의 목소리와 비슷하다. 이 단편은 생전 척이 자서전에서 직접 흑역사로 평가했던 작품으로 몇 달 후 텍스 에이버리가 이 단편을 기반으로 새 단편을 제작했는데, 그 작품이 바로 벅스 버니의 공식적인 데뷔작인 산토끼(A Wild Hare)이다.
1936년엔 디렉터로 승진한 밥 크렘펫의 '크렘펫 유닛' 휘하 애니메이터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1937년) 디렉터에 등단함으로써 연출가의 직위에 올랐다. 연출가 활동 초기엔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척 본인은 디즈니에서 만든 작품의 퀄리티와 디자인에 필적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으나 만들어진 그의 단편들은 느린 속도의 타이밍과 부족한 개그가 두드러졌다. 이에 제작자 슐레진저와 스튜디오의 임원들은 그 단편들에 만족하지 못했고 더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 것을 요구했으며, 1940년 작품 Tom Thumb in Trouble을 만들던 도중에 감독에서 해고되고 애니메이터로 강등당할 뻔한 일도 있었지만 다른 연출가들이 리언에게 척이 더 좋은 감독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척을 변호해 준 덕분에 다행히 자리를 지켰다. 이에 대응해 척은 1942년 개봉한 드래프트 호스(The Draft Horse)와 도버 보이즈(The Dover Boys)를 연출했는데, 이들 중 후자는 이전보다 빠른 타이밍의 개그와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광범위한 사용이 눈에 띄게 늘었으나 그에도 불구하고 슐레진저를 포함한 임원들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고 척의 해고 절차를 진행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한 미국 내 노동 인력의 감소로 적절한 후임자를 찾지 못해 척은 워너에 남을 수 있었다.
1940년대 초엔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의 급여 삭감에 항의해 내부의 애니메이터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존스는 노동조합의 본부에서 직원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었다. 당시 노조 계약을 체결한 MGM 카툰 스튜디오의 직원들 또한 파업에 참여한 이들을 격려해 줬는데, 프로듀서인 리언 슐레진저는 이들에게 비신사적으로 우대했고 관련된 계약서를 서명하기 전에 그들을 스튜디오에 며칠간 가두는 등의 마찰을 빚었으며, 노사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척 자신은 중재자로 활동했지만 (연출가로 일하던 중인 관계로) 노동조합에 가입하지는 못했었다고 한다.[4] 진주만 공습 직후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영향으로 닥터 수스와 협력해 워너브라더스의 해외 주둔 미군 병영 보급용 선전 애니메이션 이등병 스나푸(private snafu)의 감독진 중 1명으로도 일했고, 1940년대 후기부터 50년대까지 척 본인이 창작해낸 루니 툰 캐릭터들의 디자인과 그들이 나오는 단편들의 연출을 맡았다.
워너 브라더스가 1953년 3D 영화 제작을 이유로 몇달 간 워너 브라더스 카툰즈를 폐쇄하자,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으로 이직해 4개월간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애니메이터로 참여한 일이 있었다.[5] 같은 해 스튜디오가 다시 개업한 뒤론 남은 1950년대를 워너 브라더스에서 활동했으며, 1962년 중반에 아내 도로시와 UPA에서 제작한 영화 gay purr-ee의 시나리오를 작업한 경력이 독점 계약을 위반한 정황을 워너브라더스가 파악했으며, 논의가 진행된 끝에 척을 워너 브라더스 카툰즈에서 해고 조치했고 그의 애니메이션 유닛은 the iceman ducketh를 완성한 후 해고되었다. 이듬해엔 레스 골드먼과 함께 1960년 설립된 시브 타워 12 프로덕션이란 독립 제작사를 인수해 4년 동안 톰과 제리 단편 시리즈를 제작하였으며[6], MGM 휘하 스튜디오에서 활동할 당시엔 TV 스페셜 애니 How the Grinch Stole Christmas!와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2편을 제작하기도 했다.
1970년 mgm이 애니메이션 사업부를 폐쇄하자 제작하고 있던 the cat in the hat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에서 부득이하게 물러나야 했고, 척은 척 존스 엔터프라이즈란 이름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설립하여 tv 스페셜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집중했으며 1971년엔 ABC가 방영한 '큐리오시티 숍'이란 토요일 아침 어린이 TV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다 1976년쯤에 워너 브라더스로 복귀해 1990년대 후기까지 여러 루니 툰 단편 애니들과 벅스 버니/로드 러너 무비[7]의 감독을 담당했다. 이듬해엔 시카고-트리뷴 ny 뉴스 신디케이트에서 1년간 코믹을 연재했었는데, 연재가 끝난 년도(1978년)에 도로시가 세상을 떠나자 1981년, 코믹 '릭 오 셰이'의 작가인 마리안 던과 결혼하였다.
1980, 90년대엔 딸 린다 존스 클러프가 설립한 린다 존스 엔터프라이즈에 자신이 제작한 작품들과 그를 패러디한 그림을 그리는 등의 삽화 활동과 그렘린 1편에서의 카메오 출연, 후속편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의 애니메이션 시퀀스 감독을 맡는 등 말년까지 업계 내외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8] 2002년 2월 22일, 캘리포니아 뉴포트비치에 있는 자택에서 일어난 심부전으로 인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며, 유골은 화장되어 해안가에서 흩뿌려졌다. 부고 당시에 카툰네트워크는 그를 애도하는 문구와 함께 척의 초상화를 첨부한 20초 분량의 세그먼트를 방영하였다.
2. 평가
척이 감독 활동 초창기에 연출한 단편들은 디즈니 작품의 영향이 상당히 짙었었지만, 1942년 개봉된 The Dover Boys & The Draft House & Hold the Lion, Please! 편들에서부터 프로토타입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과 시나리오 전개 변경, 캐릭터 성향 조정으로 조금씩 연출 스타일을 변화시키기 시작했고, 작품을 만들면서 영감을 받은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의 드로잉 연출과 텍스 에이버리의 타이밍 연출을 조합하는 시도를 거듭한 끝에 1948년부터 본인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확립하여 작품 내에서 묘사하게 된다.[9] 루니 툰 팬층에서도 인기가 많은 척 존스의 단편들은 (다수가 척의 연출 기법이 정립된) 1948년 이후에 개봉된 작품들을 많이 거론하며, 2010년 발간된 the 100 greatest looney tunes cartoons에서도 투표로 뽑힌 단편들 중에 척의 작품들은 1948년 이후 개봉된 작품들이 상당수가 선발되었다.1940년대 해나-바베라 콤비의 톰과 제리로 업계 전반에서 추격물 신드롬이 활발하던 무렵엔 패러디이면서도 내부 설정 & 공식을 꼼꼼하지만 매우 단순화시킨 추격물 로드 러너를 제작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창작해낸 와일 E. 코요테, 페페 르퓨, 찰리 독, 미시건 프록 등은 목표를 시도하지만 결코 동정받지 못하는 결과와 캐릭터의 표정, 행동의 묘사를 섬세히 표현해 내면적인 목적[10]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드러냄과 동시에 배경 설정으로 무거운 조크를 덧입히는 본인의 코미디 연출을 구상하고 발전시켰다.
캐릭터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선 화성인 마빈이나 High Note 편에서 등장한 캐릭터들처럼 얼굴의 일부 기관들이 없는 캐릭터를 창작하는 등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단순화가 1940년대 후기부터 더욱 두드러졌는데, 이는 업계 내외에서 1940년대 초에 큰 주목을 받은 UPA(United Productions of America)보다 조금 앞서서 시도한 프로토타입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의 부분적인 영향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척의 작품에서 보다 두드러진 캐릭터의 규칙적인 공식 구조와 포스트모더니즘 지향적 캐릭터 & 타이밍 개그 연출, 냉소적인 줄거리 설정은 업계 내외적으로 큰 이목을 얻게 되었으며,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단편 영화 부문에서 총 8편이나 척의 작품이 지명되었고, 2번의 트로피가 수여되기도 했다.[11] 1960년대 후기부턴 애니메이션 역사가들과의 교류를 이어가면서 척의 작품들이 이들의 분석과 비평이 담긴 애니메이션 매거진에 차츰 언급되기 시작했고, 1974년 윈저 매케이 어워드 수여, 1993년 오글소프 대학 명예 학위 수여, 1988년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일생 공로상 수여,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 인물 선정, 1996년 아카데미 공로상 수여, 1997년 에드워드 맥도웰 메달 수여 등의 여러 어워드에서 공헌을 인정받으면서 20세기 애니메이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권위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척 존스가 완성하다 시피했던 캐릭터 구조들 중 냉소적인 성격을 지닌 독설가이지만 무슨 일이 터지면 자기 이익에 앞장서서 행동하는 대피 덕 또한 유명해져서 1960년 방영된 벅스 버니 쇼부터 시작해 2011년 방영한 루니 툰 - 벅스 버니와 대피 덕까지 루니 툰 애니메이션 관련 미디어 믹스 매체에서 공식으로 활용되었었다.
3. 여담
- 1940~50년대 당시 제작된 루니 툰 단편들을 그림체로 잘 살펴보면 척이 연출한 작품들을 쉽게 구분해낼 수 있다.이미지 이미지 이는 프리즈 프레랭, 로버트 매킴슨 등이 연출한 작품들과도 확연히 캐릭터들의 표정이 차이가 나 있다.
- 황금기에 활동한 미국인 애니메이터 중에선 현대기까지 장수한 애니메이터 중 1명이었다.[12] 또한 루니 툰을 만들던 워너 브라더스 애니메이터 중 유일하게 아카데미상을 수여받은 애니메이터이다. 1996년에 수여받았으며, 황금기의 미국 애니메이터 중에선 아카데미상을 수여받은 몇 안 되는 연출가이기도 했다.[13] 말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한 여력 덕분에 척 본인을 촬영한 인터뷰 영상 자료들과 기사 자료들, 관련된 도서 자료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존재한다.
- 195~60년대 당시 태동하던 미국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에 대해 훗날 인터뷰에서 'illustrated radio'(편집된 라디오)라 발언하며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chuck jones conversation 64페이지 사실 척 존스가 작업해왔던 극장용 애니메이션들에 비하면 동화 프레임도 적고 작붕도 심하며 퀄리티가 떨어지는지라 어쩔 수 없긴 하다. 그래서인지 1970년대에 한창 TV판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했을 때는 해나-바베라 프로덕션, 필메이션 등의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활동하지 않고 직접 척 존스 엔터프라이즈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해 20분 이상의 긴 분량의 TV 스페셜 애니메이션을 주로 만들었었다.
- 인터뷰 자료들과 자신의 전기 등에서 1980년대 중반과 그 이후에 제작된 현대기의 TV 애니메이션들도 많이 시청하지 않았는지 거의 언급하진 않았다. 언급한 작품들은 랄프 박시의 마이티 마우스 1987년 TVA[14]와 1990년대의 한 인터뷰에서 언급한 맷 그레이닝이 일했던 폭스에서 방영한 심슨 가족이 전부. 다만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은 말년까지 시청했었으며, 1998년 벅스 라이프를 보러 갈 때 극장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진을 구글링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1948년 이전에 작업한 작품들 대다수를 싫어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줄거리의 전개가 느렸던 것과 (여러 점에서) 디즈니 작품들을 닮은 듯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 루니 툰 제작에 참여했던 연출가 중에선 훗날 원작 작품을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독보적으로 참여했었는데, 그린치 1966년판 TVA와 톰과 제리 단편처럼 시청자들한텐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서 원작과 비교해 척 본인의 시그니처 스타일과 유머가 덧입혀진 작품들이 많아서 방영 이후 여러 번이나 원작을 만든 작가들에게 혹평을 받기도 했다. 생전 척과 친분을 쌓았던 닥터 수스 또한 척이 (본인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물러난 이후에 드파티-프레렝 엔터프라이즈나 랄프 박시 등의 다른 제작사나 연출가들한테 원작의 TVA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 http://tvtropes.org/pmwiki/pmwiki.php/Creator/ChuckJones - 척 존스가 연출한 작품들에서 나왔던 애니메이션 기법 & 공식들을 분류한 티비 트룹스 문서 웹페이지가 있다.
- 척의 작품에서 데뷔한 캐릭터는 클로드 캣, 고새머, 허비 & 버티, 마크 안토니 & 푸시풋, 화성인 마빈, 미시건 J. 프록, 페페 르 퓨, 페넬로페 푸시캣, 양치기 개 랄프 & 늑대 샘, 스니플즈, 곰 세 마리, 마녀 헤이즐, 로드 러너 & 코요테 등이 있다.
- 블랙윙 연필을 즐겨썼다고 한다.
- 1999년에 캘리포니아에서 비영리 단체 Chuck Jones Center for Creativity를 설립했는데 현재도 운영하는 중이며 어린이와 노인을 대상으로 창작 기술의 교육을 제공하는 예술 시설이다.
4. 관련 인물
- 영향을 받은 인물
- 동료
- 텍스 에이버리[20]
- 프리즈 프레렝 : 서로 말년까지 교류한 척의 (또다른) 절친이자 동료 애니메이션 감독.
- 로버트 매킴슨[21]
- 리처드 윌리엄스 : 크리스마스 캐롤(1971),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 공동 애니메이션 제작.
- 닥터 수스[22]
- 멜 블랭크
- 준 포레이
- 썰 라벤스크로프트
- 레스 골드먼(Les Goldman)[23]
- 스탠 프리버그(Stan Freberg)
- 칼 W. 스털링(Carl W. Stalling)[24]
- 밀트 프랭클린(Milt Franklyn)[25]
- 돈 메식(Don Messick)[26]
- 도스 버틀러(Daws Butler)[27]
- 조지 셸던(George Selden)[28]
- 유진 포더니(Eugene Foddany)[29]
- 딘 엘리엇(Dean Elliott)[30]
- 워드 킴벌(Ward Kimball)[31]
- 보리스 칼로프[32]
- 상사
- 기용한 애니메이터, 연출가
- 마이클 몰티즈(Michael Maltese)[42]
- 테드 피어스(Tedd Pierce)[43]
- 밥 기븐스(Bob Givens)
- 마사 시걸(Martha Sigall)
- 켄 해리스(Ken Harris)
- 모리스 노블(Maurice Noble)[44]
- 로버트 그리브록[45]
- 벤 워셤(Ben Washam)
- 로버트 캐넌(Robert Cannon)
- 필 먼로(Phil Monroe)
- 리로이 바한
- 에이브 레비타우(Abe Revitow)
- 배질 데이비도비치
- 루디 라리바(Ruby Rariva)
- 샤머스 컬헤인(Shamus Culhane)[46]
- 그레그 포드(Greg Ford)[47]
- 톰 레이(Tom Ray)
- 폴 줄리언(Paul Jullian)[48]
- 추종자
5. 관련 영상들
1996년 아카데미상 시상식 영상 중 일부. 로빈 윌리엄스가 사회자를 맡았다.
유튜버 Every Frame a Painting의 영상. 한글자막이 지원된다.
6. 연출 & 제작 작품들
- 루니 툰 단편 카툰 209편(루니 툰/에피소드 문서 참조.) - 척 존스의 명실상부한 대표작.
- 톰과 제리 단편 카툰 34편(톰과 제리/에피소드 문서 참조.) - 본인은 저평가했지만 또다른 수작으로 평가받는 작품.
- UPA 제작 카툰 Hell-Bent for Election(1944), Gay Purr-ee(1962)[54]
- Adventures of the Road Runner(1962) - 척이 최초로 연출한 총집편 애니메이션 영화
- Bugs Bunny/Road Runner movie(1979) - 척이 두 번째로 연출한 총집편 애니메이션 영화.
- The Bear That Wasn't(1967)[55]
- How the Grinch Stole Christmas(1966) - 최초로 제작을 맡은 닥터 수스 원작의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척 존스의 명성 높은 또다른 대표작.
- The Pogo Special Birthday Special(1969)[56]
- The Phantom Tollbooth(1970) - 애니메이션 피쳐 감독, 제작
- Horton Hears a Who!(1970) - 두 번째로 닥터 수스 원작을 기반으로 제작한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 모자쓴 고양이(1971)[57]
- A Cricket in Times Square(1973), A Very Merry Cricket(1973), Yankee Doodle Cricket(1975)[58]
- Rikki-Tikki-Tavi(1975), The White Seal(1975), Mowgli's Brothers(1976)[59]
- The Great Santa Claus Caper(1978), The Pumpkin Who Couldn't Smile(1979) - 래기디 앤과 앤디 시리즈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 Daffy Duck for President(1997)[60]
- For Centi-mental Reasons(1949), The Dot and The Line(1965), So much for So little(1949) [61]
- Bugs and Daffy's Carnival of the Animals(1976)[62]
- A Connecticut Rabbit in King Arthur's Court(1978)
- Freeze Frame(1979)
- Duck Dodgers and the Return of the 24½th Century(1980)[63]
- Bugs Bunny's Bustin' Out All Over(1980) - tv 스페셜[64]
- Chariots of Fur(1994), Another Froggy Evening(1995), Superior Duck(1996), From Hare to Eternity(1997) - 감독, 제작자, 작가
- Father of the Bird(1997), Pullet Surprise(1997) - 제작자
- Peter and the Wolf(1995)[65]
- The Timber Wolf(2001) - 척의 실질적인 유작. 웹 플래시 애니메이션.
7. 다큐멘터리
- Chuck Amuck: The Movie(1991)
- Chuck Jones: Extremes and InBetweens(2000)
- Chuck Jones: Memories of Childhood(2009)
[1] #[2] 전부 척 존스 센터의 링크이다.[3] 훗날 칼아츠로 교명이 변경된 대학교이자 전신.[4] 애니메이터 마사 시걸의 언급(2005년).[5] https://www.mouseplanet.com/8944/Chuck_Jones__Four_Months_At_Disney 링크 참조.[6] 해당 년도에 워너 브라더스 카툰즈는 폐쇄되어 이듬해부터 3년간(1966년까지) 루니 툰 제작은 외주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담당했다. 시브 타워 12 프로덕션은 1964년 mgm에 인수되어 명칭이 바뀌었다.[7] 척 존스 자신의 일부 작품들(1948년 이후 개봉된 자신의 작품들)을 모은 총집편 영화.[8] 1996년 개봉된 루니 툰 단편 From Hare to Eternity에선 전년도에 작고한 동료 연출가 프리즈 프레렝을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배 갑판에 새겨 놓았다.[9] 루니 툰 단편들의 제작 완료 후 개봉까지의 기간 일정은 평균 1년 반에서 2년 남짓이었으므로 빠르게 잡아도 대강 1949년 초중기에 개봉한 단편들에서부터 그런 기조가 정해졌다고 보면 된다.[10] 페페 르퓨의 애정 행각, 코요테의 로드러너 잡기, 미시건 프록의 노래 부르기 등등.[11] 1949년 for centi-mental reasons, 1965년 the dot and the line.[12] 다른 사례 중 유명한 사람들은 윌리엄 해나 & 조셉 바베라 콤비가 있었다.[13] 나머지 연출가 중 유명한 사람들은 월트 디즈니와 월터 란츠가 있다.[14] 존 크릭팔루시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내용에서 씹는(어떤 상대방을 풍자하는) 느낌이 있다고 고평가했었다고 한다.[15] 윈저가 연출한 애니메이션이 상영된 이후 윈저의 추종자들이 그가 그것을 어떻게 했는 지에 대해 알아내는 데 거의 20년이 걸렸으며, 애니메이션은 윈저 매케이와 월트 디즈니이고 어느 쪽을 먼저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윈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16] 척은 1997년 (자신의) 85번째 생일 기념회에서 수년 간 여러 번 편지를 써가면서 월트와 상시적인 교류를 이어갔고, 어느날 월트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편지를 쓰는 애니메이터("Well, of course, you're the only animator that ever wrote to me!")라 칭찬했었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서 잠시 휘하 애니메이터로 일한 경력도 있었다.[17] 벅스 버니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척을 포함한 많은 워너 브라더스 카툰즈의 스탭이 이 콤비의 영향을 받았다.[18] 와일 E. 코요테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트웨인이 저술한 작품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19] 척이 제작한 로드러너 시리즈의 모티브가 된 작품을 연출한 제작자 콤비. 훗날 인터뷰에서 척 자신이 만든 톰과 제리 시리즈에 대해 캐릭터의 역동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당시에 다른 기회가 있었다면 또다른 많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낮게 평가하였고, 텔레비전 아카데미 웹페이지에 수록된 본인의 말년 인터뷰에서도 간략하게 말하고 넘어가기도 했다.[20] 1935년에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서 만나 같이 일하면서부터 인연을 쌓은 평생의 친구. 1941년 에이버리가 mgm으로 이직하여 현장을 떠난 일도 있었지만, 1975년에 밥 크렘펫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은 편지#를 보낸 일도 있었고, 같은 해에 자신들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팬 영화(Rabbit Habit Cartoon)을 감상하러 같이 영화제에 갔던 일도 있었다. 에이버리가 세상을 떠나자 로스엔젤레스 트리뷰 신문지에 다음의 추모사를기사 이미지 게재하여 에이버리가 본인의 작품에 남겼던 6가지의 영향점을 서술하기도 했다. 그가 본인에게 상기시켰던 애니메이션의 타이밍에 대한 중요성과 코미디의 활용 가능성을 깨닫고 척 스스로 연출 & 제작한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해 발전시켜 나갔으며, 에이버리의 개그 연출을 보다 상향시킨 밥 크렘펫과 같이 에이버리(의 작품들의) 연출에 있어 계승자로도 볼 수 있다.[21] 1962년 척 본인이 해고당하기 전까지 같은 스튜디오에서 근무해 애니메이터 유닛을 운영하는 디렉터로써 서로 안면이 짙은 동료였다. 다만 1971년 마이클 베리어와의 인터뷰에서 척이 표현한 캐릭터 연출은 내심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데뷔 초창기와 혼재된 성향의 캐릭터 연출을 주로 발휘하였다. 1960년대 초기부턴 프리즈가 설립한 회사(드파티-프레렝 엔터프라이즈)가 만든 작품들에서 주로 활동하였다.[22] 1940년대 초기 전시 상황 때에 선전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서 서로 만나 인연을 쌓았다. 훗날 그린치 TV 스페셜(1966년작)과 호튼 TV 스페셜(1970년작)을 같이 제작하기도 했다. 전자의 스페셜은 21년간 CBS에서 크리스마스 스페셜로 재방송되었을 만큼 TV 스페셜의 마스터피스로 유명해졌지만, 척의 예술 스타일에 대해선 공감하지 않았다고 언급해서 훗날 이에 대해 척 본인이 인터뷰에서 짤막하게 해명한 일이 있었다.[23] 1960년대 중후기에 척과 같이 활동했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시브 12 타워 프로덕션의 제작자.[24] 루니 툰 & 메리 멜로디즈 단편의 1930년대 후기 ~ 50년대 중기 음악 작곡가.[25] 루니 툰 & 메리 멜로디즈 단편의 1954년 ~ 1962년 음악 작곡가.[26] 척의 일부 TV 스페셜 애니메이션에서 배역을 맡은 성우.[27] 척의 1970년대 TV 스페셜 애니에서 배역을 맡은 성우.[28] 척이 TV 스페셜 애니들을 제작할 때 공동으로 각본을 집필한 경력이 있다.[29] 1966년 그린치 스페셜 TV 애니메이션의 음악 작곡가.[30] 척이 1970년대에 제작한 스페셜 TV 애니메이션들에서 음악 작곡을 전담했다.[31] 척이 잠시 디즈니에서 활동했을 때, 같은 유닛의 애니메이터로 일했던 경력이 있다. 다만 척 본인이 디즈니의 애니메이터들 중에서 가장 호평한 애니메이터는 워드와 동일한 디즈니의 아홉 노인 중 1명인 프랭크 토마스(Frank Thomas)였는데, 한 번은 프랭크를 '애니메이터의 로런스 올리비에'라 부르며 언급한 일도 있었다.[32] 1966년 그린치 스페셜 TV 애니 제작 과정에서 서로 교류를 가졌다.[33] 크렘펫이 워너를 떠난 이듬해(1946년)와 1960년대 후기에 한 잡지와 bugs bunny the superstar(1975년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동료 감독들의 기여를 포함하지 않고 자신이 벅스 버니와 포키 피그의 창시자라 강조하며 말한 것을 두고 이듬해(1970년)에 자기중심적이라고 디스한 인터뷰가 있으며[66], 1975년부터 척 본인을 만났던 팬들에게 (텍스 에이버리한테 보낸) 편지를 복사해 나눠주기도 했다.[67] 2020년대 현재는 많은 세월이 지나고 모든 관련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논쟁의 불씨도 사그라들었으며, 팬덤에서도 척과 밥의 작품에 대해 호평하는 사람들이 각각 늘어나면서 재발할 여지조차 사라지는 상황에 있다. 사건이 빚어진 뒤로 척 본인이 제작한 (1979년의 총집편 극장판을 포함한) 저술한 전기들, 다큐멘터리 자료에서도 크렘펫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거나 미미하게 서술했으며, 공식적인 절연 선언은 없었지만 사망하기 전까지 화해하지 못했다.[34] 한창 논쟁이 빚어졌을 때에 생존해 있던 프레렝과 매킴슨 등의 다른 루니 툰 연출가들은 어느 한 쪽을 편향해 옹호하진 않고 척처럼 크렘펫을 비난하진 않았으며, 에이버리도 척의 편지에 반응한 것에 대해 2년 후 밥의 지인한테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로 집어본다면 인터뷰 당시의 크렘펫은 루니 툰 제작에 참여하면서 발휘한 (자신의) 재능에 취해 여러모로 이기적이고 허세스러운 면모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며, 이에 대해 척이 다소 과민하게 반응하여 크렘펫한테 오해를 풀기 위해서 같이 만나 대화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편지를 적어 마구잡이로 비난을 저질렀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완전한 진실과 이유는 둘이 세상을 떠난 현재 알 수 없더라도 당시 미국 애니메이션 커뮤니티에선 화젯거리가 되었으며, 이 시기에 척이나 크렘펫과 각각 교류하던 애니메이션 역사가 & 평론가들의 인터뷰가 잡지 매체에 기고되기도 했다.[35]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에서 척은 애니메이션 컨설턴트로 스태프롤의 크레딧에 표기되었지만, 만화 주인공보다 실사의 영웅이 공감이 더 가는 영화가 뭔가 잘못됐다고 자서전에서 영화를 디스했으며 그것을 명예롭게 설정한 오랜 카툰에 대한 역겹고 재치 없는 오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원래 리처드와 자신이 함께 계획했던 피아노 애니메이션 시퀀스를 (자신들과의 상의 없이) 갈아엎고 변경한 것에 대해 리처드의 창의적인 입력을 강탈했다고 저메키스를 맹렬히 비판했었다.[36] 태슐린은 척이 제작한 the beat that wasn't에 대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요점을 완전히 놓쳤다고 보았고, 곰이 담배를 무는 것에 대해 심리적인 성인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여 크레딧에 나온 본인의 이름을 없앨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원하는 것보다 문제가 더 많단 이유로 보류했고 척과는 대화도 하지 않았을 만큼 말년엔 원만하지 못했다.[37] 1969년에 척이 제작한 자신의 작품 포고(Pogo)를 기반으로 한 TV 스페셜 애니메이션에 대해, 그가 작품에 있었던 모든 선명함을 제거한다고 언급하면서 혹평했고 자신이 직접 작품의 애니화를 위해 말년까지 아내와 함께 작업했다고 한다.[38] 1941년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 애니메이터 파업 이후, 해고당한 빌이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 이직했을 때 척과 그가 이끌던 유닛을 살펴본 뒤 자신과 스타일이 어울리지 않다고 판단해 크렘펫의 휘하 애니메이터로써 활동을 시작했었다.[39] 척이 현장에서 처음 일했던 스튜디오의 설립자 & 애니메이션 감독. 어브의 애니메이터 실력에 대해선 칭찬했지만, 그가 연출 & 제작한 작품들의 코미디나 유머 감각은 부족했던 사람이었다고 훗날 평가하기도 했다.[40] 척이 감독으로 승진한 초창기에 연출한 작품들에서 나타난 척의 연출 스타일이 개성적이지 않다고 평가했고 제작 과정에서 많은 예산을 소모해 싫어하였으며, 2차례나 리언한테 해고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1941~2년 사이에 해고당할 뻔했던 비화가 유명하지만, 존 크릭팔루시의 2004년 인터뷰에 의하면 1940년 작품 Tom Thumb in Trouble를 만들던 과정에서 해고당할 위기에 있었으며,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 내부의 다른 감독들이 그가 곧 좋은 감독이 될 것이라고 리언한테 변호해 준 덕분에 넘어갔었다고 한다.[41] 워너 브라더스의 공동 창립자이자 형제 경영자. 위의 세 제작자들과는 다르게 현장에서 서로 직접 대면한 경험은 1953년, 1번밖에 없었다고 한다.[42] 척 본인이 연출한 많은 작품들에서 기용한 스토리 전담 작가. 팬들 중에선 몰티즈가 해나-바베라로 이직한 이후(1963 ~ 1967년에 척이 제작한 톰과 제리 단편 시리즈와 1979년 공개된 벅스 버니/로드 러너 무비, 돌아온 24 반세기의 덕 다저스는 몰티즈가 작가로 참여했으므로 제외.)와 그가 세상을 떠난 1979년 이후에 척이 감독한 작품들에서 스토리가 전반적으로 가벼워졌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43] 1950년대 초반까지 척의 일부 작품에서 스토리 작가를 맡았다.[44] 1952년 이후 개봉된 척의 상당수 작품들에서 레이아웃 & 배경 아티스트를 맡았다. 1934년에 디즈니의 스카우트가 그를 영입하여 1941년 파업 이전까지 디즈니에서 일했으며, 2차 세계대전 시기엔 미 육군 통신대에 입대하여 닥터 수스가 있던 군부대에 배치되어 이등병 스나푸란 명칭의 선전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했다. 노블이 레이아웃 & 배경을 맡은 단편들에선 비사실주의적인 도면과 채색, 공간 배경이 두드러져 묘사되며 2001년까지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했다.[45] 척의 일부 작품에서 레이아웃을 맡았으며, 1950년대 중반부턴 로버트 매킴슨의 작품에서 레이아웃을 맡았다.[46] 척의 1944년 작품(bugs bunny and the three bears)에서 원화 애니메이터로 참여했다.[47] 애니메이션 역사가이자 애니메이터이며, 척의 말년기 작품들에서 원화 애니메이터로 참여했다.[48] 워너 브라더스 카툰즈의 애니메이터이자 캐릭터 로드 러너의 배역을 담당한 성우.[49] 1996년 아카데미 시상식 진행자로써 아카데미 위원회가 '반세기 넘게 우리의 삶에 기쁨을 가져다 준 고전 만화와 만화 캐릭터를 창조한 공로'를 인정한 공로상 트로피를 척한테 전달해주기 얼마 전에 그를 애니메이션계의 오슨 웰스(The Orson Welles of Animation)라고 고평가하는 등 속사포로 애드립을 말하여 청중을 웃음짓게 하였다.[50] 1966년에 미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 Funnyworld를 발간한 미국인 애니메이션 역사가.[51] 웹사이트 카툰리서치 닷컴(Cartoon Research)을 운영 중인 미국인 애니메이션 역사가.[52] 도서 Chuck Amuck: The Life and Times of an Animated Cartoonist에서 척 존스에 대해 "월트 디즈니가 내게 꿈꾸는 법을 알려준 최초의 애니메이터였다면, 척 존스는 그 꿈을 비웃게 만들어준 최초의 애니메이터"란 평가를 내렸으며,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제작된 척의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도 출연하여 자신한테 준 영향을 밝히기도 했다.[53] 디즈니 작품 라이온 킹을 연출한 애니메이션 감독.[54] 후자는 척 존스가 해고된 원인을 제공함. 원래는 UPA의 작품들을 전담으로 배급했던 컬럼비아 픽처스가 배급할 예정이었으나, 1001 Arabian Nights(1959)의 흥행 실패로 워너브라더스가 대신 배급을 맡았다.[55] MGM에서 일할 때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루니 툰 스태프였던 프랭크 태슐린의 작품이 원작.[56] 감독 & 제작자 & 성우, 애니메이터 월트 켈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함.[57] 본래는 MGM 사내 스튜디오에서 제작 예정이었지만 스튜디오가 폐업한 여파로 드파티-프레렝 엔터프라이즈가 제작함, 척은 스토리보드만 담당.[58] 조지 셸던 원작의 크리캣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 tv 스페셜 애니메이션.[59] 러디어드 키플링의 작품들을 원작으로 한 tv 스페셜 애니메이션들.[60] 애니메이션은 당초 2000년에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개봉 일정이 2004년으로 연기되었다.[61] 각각 아카데미 상 애니메이션 단편 영화 부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영화 부문 수상 작품들.[62] 워너 브라더스로 복귀한 후 첫 번째로 제작한 루니 툰 애니메이션.[63] Duck Dodgers in the 24½th Century(1953)의 속편.[64] 스페셜 내부의 세 단편 애니들(Spaced Out Bunny, Soup or Sonic,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Bunny)을 제작.[65]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를 원작으로 한 ABC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66] 밥의 모친이 당시 제작자 리언 슐레진저와 친분이 있던 사이라 다소 편애받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후문도 있었다. 10년간 같이 스튜디오에서 일한 성우 멜 블랭크도 자서전에서 함께 일해야 했던 최악의 감독이자 이기주의자라고 서술하였다.[67] 이에 크렘펫과 친한 동료인 애니메이션 역사가 밀턴 그레이는 에세이에서(마이클 배리어 홈페이지 참조) 업계에서의 라이벌에 의한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비방 캠페인이라고 반론했으며, 당시 에이버리의 비극적인 가정 생활로 인해 쉽게 편을 들게끔 유도시켰고, 밥이 척의 비난을 알아챘지만 그에 대처하지 않고 오히려 깊게 슬퍼하였으며 척에 대해서도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척이 라이벌인 밥에게 위협을 느끼고 행동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척과 밥의 작품에 대해서 계속 찬사받기를 바란다고 말미에 언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