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3:27:16

존 라세터

존 라세터 감독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베니스 국제 영화제 로고.svg

베니스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70년1971년1972년
오슨 웰스 잉마르 베리만 마르셀 카르네 존 포드 찰리 채플린
1972년1982년
아나톨리 골로브냐 빌리 와일더 알레산드로 블라세티 루이스 부뉴엘 프랭크 카프라
1982년
조지 큐커 장뤽 고다르 세르게이 유트케비치 알렉산더 클루게 구로사와 아키라
1982년1983년
마이클 파웰 사티야지트 레이 킹 비더 세자르 자바티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985년1986년1987년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존 휴스턴 페데리코 펠리니 타비아니 형제 루이지 코멘치니
1988년1989년1990년1991년
요리스 이벤스 로베르 브레송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얀초 미클로시 마리오 모니첼리
1991년1992년1993년
지안 마리아 볼론테 잔느 모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파올로 빌라조 스티븐 스필버그
1993년1994년
로버트 드 니로 로만 폴란스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알 파치노 수소 체키 다미코
1994년1995년
켄 로치 우디 앨런 모니카 비티 마틴 스코세이지 알베르토 소르디
1995년1996년
엔니오 모리코네 주세페 드 산티스 조프레도 롬바르도 알랭 레네 로버트 올트먼
1996년1997년
비토리오 가스만 더스틴 호프먼 미셸 모르강 제라르 드파르디유 스탠리 큐브릭
1997년1998년1999년
알리다 발리 워렌 비티 소피아 로렌 안제이 바이다 제리 루이스
2000년2001년2002년2003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에릭 로메르 디노 리시 디노 드 로렌티스 오마 샤리프
2004년2005년2006년
스탠리 도넌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미야자키 하야오 스테파니아 산드렐리 데이비드 린치
2007년2008년2009년
팀 버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에르만노 올미 존 라세터 브래드 버드
2009년2010년2011년
피트 닥터 앤드루 스탠튼 리 언크리치 오우삼 마르코 벨로키오
2012년2013년2014년2015년
프란체스코 로시 윌리엄 프리드킨 델마 스쿤메이커 프레더릭 와이즈먼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2016년2017년2018년
장폴 벨몽도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제인 폰다 로버트 레드포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18년2019년2020년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줄리 앤드류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허안화 틸다 스윈튼
2021년2022년2023년
로베르토 베니니 제이미 리 커티스 카트린 드뇌브 폴 슈레이더 양조위
2023년2024년2025년
릴리아나 카바니 피터 위어 시고니 위버
}}}}}}}}} ||

파일:Annie_Award.png
윈저 맥케이상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0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72년1973년1974년
맥스 플라이셔 데이브 플라이셔 월터 란츠 텍스 에이버리 프리즈 프레렝
1974년1975년
척 존스 아트 배빗 윈저 맥케이 그림 네트윅 월트 디즈니
1975년1976년
존 허블리 페이스 허블리 노먼 맥라렌 로버트 캐넌 휴 하먼
1976년1977년
루돌프 이징 마이클 말테스 조지 팔 워드 킴볼 윌리엄 해나
1977년
조셉 바베라 멜 블랭크 오스카 피싱거 빌 스콧 밀트 칼
1978년
제이 워드 어브 아이웍스 딕 휴머 칼 스탈링 한스 콘리드
1979년1980년
클라이드 제로니미 빌 멜렌데즈 매 퀘스텔 오토 메스머 올리 존스턴
1980년1981년
프랭크 토머스 칼 하워드 폴 줄리안 라번 하딩 T. 히
1981년1982년
빌 피트 빌 타이틀라 존 휘트니 켄 헤리스 켄 엔더슨
1982년1983년
브루노 보제토 준 포레이 도날드 W. 그레이엄 마크 데이비스 에릭 라슨
1983년
프레드 무어 클라렌스 내쉬 볼프강 레이더먼 레오 살킨 스티븐 보수스토
1983년1984년
윌프레드 잭슨 다우스 버틀러 데이비드 핸드 잭 키니 마이클 라
1984년1985년
로버트 매킴슨 리처드 윌리엄스 해밀턴 러스크 로버트 아벨 프레스턴 블레어
1985년
조 그랜트 존 핼러스 스털링 홀러웨이 짐 맥도날드 필 먼로
1985년1986년
벤 워셤 프레더릭 백 샤머스 컬해니 윌리엄 T. 허츠 이르벤 스펜스
1986년1987년
에머리 호킨스 존 란즈베리 폴 드리센 잭 해나 빌 리틀존
1987년1988년
모리스 노블 켄 오코너 노먼 퍼거슨 멜 쇼 랠프 박시
1988년1989-1990년
밥 크렘펫 티사 데이비드 가와모토 기하치로 버질 로스 아트 클로키
1989-1990년
힉스 로키 알렉스 로비 돈 메식 데즈카 오사무 레스터 노브로스
1991년
레이 해리하우젠 허버트 클린 밥 커츠 유리 노르슈테인 조 시라쿠사
1991년1992년1993년
루스 키산 레스 클라크 스탠 프레버그 데이비드 힐버만 조지 더닝
1993년1994년
로이 E. 디즈니 잭 잰더 에드 베네딕트 아서 데이비스 장 밴더 필
1995년1996년
줄스 엥겔 반스 게리 댄 맥로린 메리 블레어 버니 매티슨
1996년1997년1998년
타카모토 이와오 윌리스 H. 오브라이언 마이런 왈드먼 폴 윈첼 에위빈드 얼
1998년1999년
미야자키 하야오 어니스트 핀토프 레이 패터슨 마르셀 얀코비츠 콘 페더슨
2000년
노먼 맥케이브 호이트 커틴 루실 블리스
}}}}}}}}} ||
21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001년2002년
빌 저스티스 피트 알바라도 밥 기븐스 진 하젤튼 플로이드 노먼
2002년2003년2004년
셔먼 형제 진 디치 존 헨치 썰 라벤스크로프트 돈 블루스
2004년2005년
버지니아 데이비스 아놀드 스탱 코니 콜 프레드 크리펜 타이러스 웡
2006년2007년
안드레아스 데자 겐디 타르타콥스키 빌 플림턴 존 케인메이커 글렌 킨
2007년2008년 2009년
존 크릭팔루시 마이크 저지 존 라세터 닉 파크 팀 버튼
2009년2010년
제프리 카첸버그 브루스 팀 브래드 버드 에릭 골드버그 맷 그레이닝
2011년2012년
월터 페리고이 뵈르게 링 로널드 설 테리 길리엄 오스카 그릴로
2012년2013년 2014년
마크 헨 오토모 카츠히로 스티븐 스필버그 필 티페트 디디에 브루너
2014년2015년
돈 러스크 리 멘델슨 조 랜프트 필 로먼 타카하타 이사오
2016년2017년
데일 베어 캐롤라인 리프 오시이 마모루 제임스 백스터 스티븐 힐렌버그
2017년2018년 2019년
웬디 틸비
아만다 포비스
랄프 이글스톤 안드레아 로마노 프랭크 브랙스톤 곤 사토시
2019년2020년
헨리 셀릭 론 클레먼츠 존 머스커 윌리 이토 수 C. 니콜스
2020년2021년 2022년
브루스 W. 스미스 루벤 A. 아퀴노 릴리언 슈워츠 스즈키 토시오 피트 닥터
2022년2023년
에블린 램바트 크레이그 맥크라켄 로테 라이니거 히사이시 조 마시 페이지
}}}}}}}}} ||
}}}}}}}}}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특별업적상
제68회
(1995년)
존 라세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svg
이름 존 라세터
JOHN LASSETER
분야 영화
입성날짜 2011년 11월 1일
위치 6834 Hollywood Blvd.

}}} ||
존 라세터
John Lasseter
파일:external/www.thetimes.co.uk/110343997_lasseter_322238b.jpg
<colbgcolor=#ff8000><colcolor=#000000> 본명 존 앨런 라세터
(John Alan Lasseter)
출생 1957년 1월 12일 ([age(1957-01-12)]세)
미국 캘리포니아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0cm[1]
가족 배우자 낸시 라세터(1998년 결혼~현재), 자녀 5명
학력 페퍼다인 대학교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소속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1986~2018)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1979~1983, 2006~2018)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 (2019~현재)
직업 애니메이터, 영화감독
활동 1978년 ~ 현재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John_Lasseter_signature.svg.png
링크 파일:IMDb 아이콘.svg


[clearfix]

1. 개요

The art challenges the technology, and the technology inspires the art.

예술은 기술에 도전하고, 기술은 예술에게 영감을 준다.
ㅡ 존 라세터
미국의 애니메이터, 감독이자 픽사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전 CCO.

2. 생애

쉐보레 판매원인 아버지와 미술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만화영화를 보고 자랐는데, 10대가 되었어도 남들은 자동차나 여자친구에 관심을 가질 때도 여전히 만화영화에 빠져 살았다. 고등학교 1학년때 도서관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한 책을 읽고,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진로를 정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한국으로 고3이 되는 나이에도 만화영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방과 후에 달려왔을 정도다.

어린 시절부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대학에 진학할 때 칼아츠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 1977년에 개봉한 스타워즈를 보고 그는 큰 감명을 받았고 이는 곧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2][3] 그리고 1979년 대학을 졸업하고 꿈에도 원하던 디즈니에 입사해 애니메이터로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는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이 아티스트들이 아닌 경영진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실망에 빠지게 된다. 그 무렵, 라세터는 디즈니 내부에서 제작되어 컴퓨터 그래픽을 도입한 1982년작 트론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일찌감치 CG 애니메이션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라세터는 글렌 킨(Glen Keane)[4]과 함께 이러한 비전을 디즈니 측에 강력하게 어필했지만[5] 그 때는 CG 산업이 정말 태동기에 있었던 상황이라 당시 디즈니의 CEO였던 론 밀러[6]는 이러한 비전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훗날 컴퓨터가 2D 애니메이터들의 일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7]에 론 밀러는 얼마 안 가 라세터를 디즈니에서 해고했다.[8]

하지만 곧 기회는 찾아왔고, 라세터는 루카스필름 산하의 컴퓨터 그래픽 팀[9]에 입사했다. CGI 부서를 이끌던 에드윈 캐트멀과 올비 레이 스미스는 CG 애니메이션에 대한 열정은 뚜렷했으나 전문 애니메이터가 아니었던 만큼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은 부족했고, 라세터는 훌륭한 스토리텔러로서 CGI 부서의 애니메이션 제작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 때 동료들과 실험적으로 만들었던 단편 애니메이션이 'The Adventures of André and Wally B'로, 이를 통해 CG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업계에 어필하는 데에 성공한다. 영 셜록 홈즈(피라미드의 공포)를 만들 때 스테인드글라스 기사가 나오는 부분은 같은 루카스필름 산하의, 아날로그 시각효과를 담당하는 ILM과 함께 4달 동안 만들었다. 그 스테인드글라스 기사세계 최초로 100% CG로만 된 캐릭터이다.

조지 루카스가 이혼과 관련한 문제로 픽사를 스티브 잡스에게 팔아치운 이후, 그는 잡스의 후원 아래서 이전에 만들었던 단편 작품 틴 토이를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로 확장시켜 개봉함으로서 그의 비전이었던 3D 애니메이션의 시대를 열었다.[10] 이후 스티브 잡스의 전폭적 지원 하에 픽사의 수장으로 발탁되고 토이 스토리 시리즈부터 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걸작 CG 애니메이션들의 제작을 지휘했다.

2006년, 삽질을 반복하던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픽사를 인수했고, 존 라세터는 근 20년만에 자신을 내쳤던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로빈슨 가족'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 제작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존 라세터가 디즈니에 돌아와서 가장 처음 한 일은 스튜디오의 분위기 쇄신이었다. 2006년까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경영진의 통제 아래 철저히 묶여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스튜디오 환경을 픽사와 같은 영화 제작자 위주의 환경[11]으로 바꿈으로써 제작진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고 겨울왕국의 프로듀서인 피터 델 베초는 인터뷰에서 밝혔다. 빅 히어로의 프로듀서인 로이 콘리도 인터뷰에서 라세터의 열정적인 지원이 스튜디오의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말하며 비슷한 코멘트를 남겼다. #

그가 처음으로 제작에 관여한 작품인 로빈슨 가족은 평과 흥행 모두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볼트공주와 개구리의 흥행 성공[12]을 기점으로 재기를 시작하여 라푼젤, 주먹왕 랄프겨울왕국까지 연달아 성공시킴으로써[13], 2000년 중반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할 뻔했던 디즈니를 완벽하게 부활시키고 제 2의 디즈니 르네상스디즈니 리바이벌을 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을 쫓아냈던 회사가 훗날 맞닥뜨린 위기를 자기 손으로 직접 끝낸 것이다. 묘하게 스티브 잡스랑 겹친다

2011년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명에 포함되었다.

2018년까지 CCO(Chief Creative Officer)로서 모든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지휘하며[14], 애니메이션 제작 기획 역시 에드 캐트멀(픽사 CEO)과 함께 심사했다.

2019년부터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의 대표로 재직하고 있으며 2022년 작품 《럭(Luck)》으로 업계에 다시 복귀했다. # # #

3. 작품

작품명 옆에 세부적인 직책이 첨언되지 않은 작품은 책임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로 참여한 작품들이다.

픽사의 경우에는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부터 존 라세터가 관여하지 않았으며 디즈니의 경우에는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부터 존 라세터가 관여하지 않았다.

3.1. 디즈니 계열

3.1.1. 픽사


그 외 인크레더블 2까지의 모든 픽사 작품에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하는데, 이 사람이 하차하고 토이 스토리 4 이후 피트 닥터가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한다.

3.1.2.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3.1.3. 디즈니툰 스튜디오

3.2.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

4. 사건 사고

4.1. 성추행 논란과 디즈니 퇴사

2014년에 토이 스토리 4의 제작이 발표되면서 카 2 이후로 오랜만에 감독에 복귀하게 되었는데, 2017년 말에 하비 와인스틴 성범죄 파문 이후 미국 전역에서 성추행 의혹이 나오면서 같이 성추행 의혹이 터졌고 본인이 이를 인정하며 6개월간 회사를 떠날 것이라고 했다. 원래 연출을 맡게 될 예정이였던 토이 스토리 4의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조시 쿨리로 변경 되었다.

결국 디즈니는 2018년 12월 31일자로 라세터가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퇴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회사를 나가기 이전까지는 사내에서 컨설팅 역할만 맡을 거라고. #

그리고 2019년 초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17] 대표로 부임하면서 논란이 커질 전망이다. # 이로 인해 엠마 톰슨은 원래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의 신작 '럭(Luck)'에서 더빙을 맡을 계획이었으나 존 라세터의 영입 소식에 분개하며 영화에서 하차했다.

5. 여담

  • 여느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히, 능력도 능력이지만 운도 좋았다. 저물어가던 애니메이션 업계를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되살려낸 것은 때를 잘 만난 것과 스티브 잡스, 밥 아이거 등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밀어주거나 최소한 믿고 맡겨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 공교롭게도 라세터가 업계의 업무전반에 대해서 잘 알아가고 본격적으로 자신이 능력을 펼쳐보일 때 픽사를 스티브 잡스가 인수했던 것은 신의 한수였다. 다만 스티브 잡스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잡스가 애니메이션에 대한 엄청난 꿈이나 애정이 있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픽사를 인수했을 당시 애플의 창업자로 애플에서 쫓겨난 상태에서 잡스에게는 권토중래할 어떤 무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픽사였다. 3D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당연히 고도의 컴퓨터 기술과 멋들어진 디자인이 필요했는데 잡스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인 iPhone을 보면 알겠지만 디자인과 컴퓨터 기술의 고도의 집합체이다. 잡스로서는 자신이 애플에 복귀할 때를 대비해 내공을 키울 필요가 있었고 이에 픽사를 선택하여 전폭적으로 투자를 하였다. 하지만 역시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서 수익이 나지 않자 마구잡이로 화를 내었던 사람 또한 역시 잡스였다. 그럼에도 토이 스토리의 성공 이후 마음이 변했는지 픽사와 그 직원들을 매우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디즈니에 픽사를 매각할 때 밥 아이거와 가장 많이 논의를 했던 문제도 픽사의 사내 문화를 어떻게 유지하고 보존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고 스티브 잡스 본인이 말하길 라세터가 찬성하지 않았더라면 픽사의 매각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 #
  • 셀 애니메이션을 끝장낸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있지만 본인은 그런 평가에 대해 굉장히 가슴 아파한다. 애초에 라세터는 CGI 전문가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을 배운 애니메이터 출신이며, 심지어 애니메이션 연출의 기본을 정립한 디즈니의 소위 '아홉 원로(Nine Old Men)'에게 애니메이션을 배운 2D 애니메이션 업계의 성골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존재다. 픽사와 디즈니의 합병 후 와해된 2D 제작팀을 끌어모아 공주와 개구리, 곰돌이 푸 2011을 제작한 것도 애드 캐트멀과 라세터의 공이 컸다.
  • 라세터의 셀/CG 애니메이션에 대한 견해는 '애니메이션은 어디까지나 메시지를 건네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구상하는가가 중요하지, 무슨 연필이나 프로그램을 쓰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19]
  • 1987년 11월 11일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 중 하나가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라는 것을 안 현지인 측의 소개로 스튜디오 지브리를 찾아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첫 만남을 가졌다. 그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웃집 토토로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라세터는 고양이 버스라는 설정에 감탄을 했고 그림을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 이후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그는 미야자키와 만남을 가지고 우정을 쌓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는 라세터가 선전활동과 번역총지휘로 도움을 주었고, 토이 스토리 3에는 지브리의 마스코트인 토토로가 찬조 출연하기도 했다. 미야자키도 존 라세터를 좋아해서 직접 존 라세터 작품에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다.
파일:포춘지 존 라세터.jpg
  • 차덕후다. 쉐보레 판매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차를 좋아했다고. 희대의 차덕후 영화인 를 본인이 감독, 각본, 스토리를 전부 맡으면서 제작했으며, 후속작인 카 2 역시 본인이 감독했다. 영화 내에서도 존 라세타이어라는 이름으로 출연. 픽사의 신작으로 인크레더블 2와 함께 뜬금없이 카 3: 새로운 도전이 발표된 것도 그의 입김이 가해진 결과라는 이야기가 있다(...). 에라이 물론 주요 이유는 카 시리즈의 완구 판매량이 높아서겠지만.[20]

파일:external/3.bp.blogspot.com/john_lasseter_hawaiian_shirt_collection.jpg
  • 하와이안 셔츠를 좋아한다. 당장 이 문서의 상단의 프로필 사진에도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것을 확인 할 수 있고 사적인 자리는 물론이고 시사회 등의 공적인 자리에서도 입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옷장에 1000장 정도 구비해 놨다고(...). 또한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들을 바탕으로 직접 디자인한 셔츠들을 주문제작해서 입고 등장하기도 한다. 픽사의 자유분방한 사내 문화를 상징하는 복장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최근엔 자신이 참여한 작품들을 집대성한 셔츠를 입고 등장하였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4년엔 FreeBSD 책의 표지에 FreeBSD의 마스코트인 BSD Daemon을 그려놓았는데, 이 그림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BSD 데몬의 모습이 되었다. 그 이전에 흑백 버젼을 그린 적도 있었다.
  • 픽사 애니메이션에 조연 (목소리 출연)으로 등장을 많이 했다.일본어 더빙에서는 이 사람이 픽사작품에서 맡은 캐릭터 대부분을 타치키 후미히코가 맡았다.

[1] 출처[2]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그 당시 스타워즈에 충격을 먹은 동료 애니메이터들이 대부분 VFX 쪽으로 직업을 바꾸려고 했다고.[3]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디즈니는 월트 디즈니의 사망과 함께 디즈니의 핵심 애니메이터들이 전부 은퇴할 무렵으로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상황이였으며 애니메이션 그 자체에 대한 인식도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오락물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스타워즈에 열광을 하던 광경은 그에게 애니메이션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새롭고 혁신적인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4]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원로 애니메이터. 인어공주, 알라딘, 미녀와 야수 등 굵직한 작품을 작업했다. 마지막으로 라푼젤을 작업한 후 디즈니를 퇴사했고, 2013년 디즈니 레전드에 올랐다.[5] 이 때 만든 테스트 애니메이션이 Where The Wild Things Are(1983)이다.[6] 월트 디즈니의 맏사위이며 1978년부터 사장직을 맡았고 1983년부터 CEO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장인어른과 달리 사업적 수완은 부족했는지 론 밀러가 이끌었을 당시의 디즈니는 그야말로 내리막길 그 자체였고 이같은 침체기는 마이클 아이스너에게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계속되었다.[7] 실제로 토이 스토리의 대성공 이후 헐리우드에서는 2D 애니메이션 인력을 대폭 축소하고 3D 애니메이션의 투자에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어떤 점에서는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픽사 스토리(The Pixar Story)라는 다큐에서 론 클레멘츠(인어공주알라딘의 존 머스커 감독의 친구)가 CG 애니메이션 때문에 많은 2D 애니메이터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훗날 곰돌이 푸 2011 이후 디즈니가 더이상 2D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는다고 선언을 하면서 이 불안감은 결국 실현이 되었다.[8] 라세터가 디즈니에서 쫓겨난 지 1년 후 디즈니의 임원진들이 싹 물갈이되었고 새롭게 영입된 마이클 아이스너제프리 카첸버그는 단편 틴 토이를 보고 가능성을 엿본 후 라세터에게 디즈니로 다시 돌아오라고 계속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라세터는 '지금 디즈니로 가면 감독 자리는 얻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 남는다면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9] 이후 픽사로 개명한다.[10] 이후 드림웍스가 '신밧드-7대양의 전설'의 흥행실패로 2D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하게 되면서 고자본이 들어간 극장판 2D 애니메이션은 사실상 사양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당황한 디즈니는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보물성 등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지만 연이은 흥행 실패로 카우 삼총사 이후 5년 후에 나온 공주와 개구리곰돌이 푸 리메이크판을 낸 후로는 극장판 장편 2D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했다.[11] 스튜디오 내의 재무팀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영화 제작진이 자율적으로 예산을 집행할 수 있게끔 회사 구조를 재편하였다. #[12] 다만 이 과정에서 의견 충돌로 비뮤지컬 계열 애니메이션 최고 흥행작 중 하나인 릴로와 스티치의 감독이자 스티치의 성우인 크리스 샌더스을 해고했다. 그는 이후 드림웍스로 들어가 드래곤 길들이기를 만든다.[13] 곰돌이 푸(2011)는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 면에선 아쉽게도 제작비 정도를 벌어들이는 데 그쳤다.[14] 현재 모든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에 'Executive Producer'로 이름을 올렸다. 바지사장은 아닌 것이, 제작 인터뷰마다 존 라세터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Let It Go의 영상 제작 과정이나 올라프의 캐릭터 형성 과정.[15] 당초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하였으나 제작 중간에 쫓겨났기 때문에 크레딧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16] 애플 tv 오리지널로 방영된 애니메이션 시리즈, SF동화인 「원더라를 찾아서」를 원작으로 한다.[17] 영화 제작사 스카이댄스 미디어의 신설된 애니메이션 부서다.[18] 라푼젤의 빛 효과와 겨울왕국에서의 각종 얼음결정, 눈 효과가 대표적인 사례이다.[19] 아카데미 시상식의 연설에서 '아무도 마크 데이비스나 올리 존스턴에게 '무슨 연필을 썼느냐'고 묻지 않는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라세터가 올리 존스턴에게 연필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는 말이 있다(...).#[20] 카 시리즈는 픽사 작품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완구 판매량은 어마어마하다.[21] 디즈니의 메인 작품이 아닌 홈비디오용 후속작품을 제작하는 스튜디오이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