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 ||||
편집상 | ||||
제34회 (1981년) | → | 제35회 (1982년) | → | 제36회 (1983년) |
앨런 하임 (올 댓 재즈) | → | 델마 스쿤메이커 (분노의 주먹) | → | 프랑수아즈 보노 (의문의 실종) |
제43회 (1990년) | → | 제44회 (1991년) | → | 제44회 (1992년) |
게리 햄블링 (미시시피 버닝) | → | 델마 스쿤메이커 (좋은 친구들) | → | 게리 햄블링 (커미트먼트) |
<colbgcolor=#026892><colcolor=#ffffff> 델마 스쿤메이커 Thelma Schoonmaker | |
이름 | 델마 콜베어 스쿤메이커 Thelma Colbert Schoonmaker |
출생 | 1940년 1월 3일 ([age(1940-01-03)]세) |
알제리 알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영화 편집자 |
활동 | 1966년 – 현재 |
학력 | 코넬 대학교 (정치학 / 학사) |
배우자 | 마이클 파웰 (1984년 결혼 / 1990년 사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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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녀는 놀라운 경력으로 많은 편집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안내하는 북극성입니다. 제가 그녀에 대해 너무 좋아하는 것은 그녀가 엄청나게 재능 있고 영향력이 있지만 완전히 이기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녀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듣거나 읽을 때마다, 그녀는 항상 협업의 중요성과 감독의 비전을 실현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반복합니다.
그것은 작업의 기본이며 저는 그것을 매우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인 스코세이지 씨의 작품에서 중요하고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일을 그렇게 잘 하게 만드는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 제니퍼 레임 (영화 편집자)[1] #
그것은 작업의 기본이며 저는 그것을 매우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인 스코세이지 씨의 작품에서 중요하고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일을 그렇게 잘 하게 만드는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 제니퍼 레임 (영화 편집자)[1] #
미국의 영화 편집자.
아카데미 편집상을 최다 수상[2]한 베테랑 편집자이며, 50년이 넘는 기간동안 마틴 스코세이지의 전담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
2. 생애
델마 스쿤메이커는 알제리의 알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정치인 가문의 후손이었으며, 석유 회사인 스탠다드 오일에서 근무했다.1955년 15살이 되어서야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해외에서 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외교관을 목표로 했다. 그래서 코넬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당시,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 미국 국무부 시험을 보기도 했으며, 실제로 시험을 통과하기도 했으나 최종 시험에서 불합격했다.[3] 스쿤메이커가 편집자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은 컬럼비아 대학교 미술 대학원 원시주의 교육 과정 중이었다.
대학원에서 미술에 대해서 배우는 동안, 스쿤메이커는 뉴욕 타임스에서 편집 보조직을 구하는 광고를 보게 된다. 곧바로 신문사에 편집직에 지원했고 일자리를 얻게 된다. 이곳에서 편집이라는 직업이 흥미롭다는 것을 알게 됐고, 뉴욕 대학교의 영화 편집 과정에 등록했다. 당시에는 영화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지 못했는데, 골수 시네필이 아니어서 텔레비전에서 옛날 영화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쿤메이커가 영화 학교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을 꽤 빨리 발견했다고 한다.
스쿤메이커는 뉴욕대에서 전문적인 편집 기법을 배웠다. 대표적으로 자막 제작을 도왔고 커팅 기술을 배웠다. 그 후 뉴욕대에서 6주간 영화 제작 과정을 수강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학생 마틴 스코세이지를 만나게 된다. 스쿤메이커는 후일 인터뷰에서 뉴욕 대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스코세이지가 자신에게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 스코세이지가 선생이었고 자신이 학생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것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 말은, 만약 제가 그(스코세이지)를 거기서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영화 제작을 계속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티를 만났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건 그냥 운명이었어요.
델마 스쿤메이커 #
델마 스쿤메이커 #
당시 스코세이지는 6명으로 구성된 팀을 나눠서 10분짜리 단편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팀의 누군가가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잘못 편집했다. 당시 스쿤메이커는 이 부분을 팀의 일원이 잘못 편집했다고 빠르게 지적했고, 그 과정에서 교수는 스쿤메이커에게 스코세이지의 영화를 편집하는 것을 도와주라고 요청했다. 영화의 편집작업을 시작하면서 스쿤메이커와 스코세이지는 빠르게 친해졌고, 지금까지 이들은 평생의 절친으로 유명하다. 또한 스코세이지는 스쿤메이커의 편집 능력을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1967년 개봉한 자신의 데뷔작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의 편집 감독으로 기용했다. 참고로 편집자로서 스쿤메이커의 첫 번째 일은 미국 TV의 시간 간격에 맞추기 위해 고전 유럽 영화를 잘라내는 것이었다.
델마 스쿤메이커와 마틴 스코세이지 |
데뷔 이후 4년 뒤인, 1971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우드스톡'으로 커리어 최초로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에 오른다. 다만, 커리어 초창기에는 편집자 활동의 어려움을 겪었는데, 영화 편집자 협회의 회원이 될 수 없어서 장편 영화 편집 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4] 그래서 1970년대 마틴 스코세이지 작품의 편집 감독으로 활동하지 못했다.[5] 다만, 크레딧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택시 드라이버'의 보조 편집자로 들어와 편집 작업을 도와줬다.
스쿤메이커는 1980년이 돼서야 친구 스코세이지의 도움으로 영화 편집자 협회 회원이 된다.[6] 스코세이지는 스쿤메이커가 회원이 되자마자, 자신의 영화 '분노의 주먹'의 편집 감독으로 기용했다. '분노의 주먹'은 역대 최고의 편집 영화로 꼽힐 정도로, 편집 예술의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스쿤메이커는 이러한 뛰어난 성과를 인정받아 많은 시상식에서 상을 수상했다. 스코세이지의 연출작 중에서 처음으로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에 올랐으며, 자신의 첫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게 된다.
'분노의 주먹' 이후 스코세이지의 많은 영화를 편집하면서 명편집자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67년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부터 2023년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까지 스코세이지의 전담 편집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무려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스코세이지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편집했다. 그만큼 스코세이지가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인물이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알겠지만, 극소수의 영화를 제외하면 전부 스코세이지 작품이다. 스쿤메이커는 아카데미 편집상을 총 3번 수상해 최다 수상자 기록을 갖고 있으며, 8번 후보에 올라 최다 후보자 기록도 갖고 있다.[7] 현대 미국 영화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중요한 편집자 중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2년 콜라이더가 선정한 영화사의 위대한 편집자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편집자로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명예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명예 황금사자상을 받은 최초의 편집자이다. 2019년에는 영국 아카데미에서 평생 공로상(BAFTA Fellowship)을 수상했다.[8]
3. 편집 스타일
할리우드 포스트 프로덕션의 원리는 최고의 편집을 완벽한 투명성을 유지하고 최고의 편집자들은 그들의 작품에 관심을 끌지 않는것이다. 델마 스쿤메이커는 동시에 그 원리를 구체화하고 파괴한다. (중략) 분노의 주먹부터 모든 영화를 편집하면서, 그녀는 항상 스코세이지가 자신을 위해 촬영하고 편집하기 때문에 그 공로가 스코세이지에게 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스코세이지의 영화에 대한 그녀의 기여는 미미하지 않다. 비록 그녀의 편집 능력이 고전적인 할리우드 파라미터 안에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실현된 예술 형태로서 그 자체로 관심을 끌고 현대의 편집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요를 제공한다.
제프리 레스너는 "분노의 황소, 좋은 친구들, 그리고 카지노는 편집 기술을 포스트 모더니즘, 거의 환각에 가까운 예술로 밀어넣었다."라고 말했다. (중략) 1980년 이래로, 그녀의 편집은 매우 혁신적이고, 복잡하며, 계속해서 진화해 왔기 때문에 짧은 에세이로 그것의 모든 측면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것만큼이나 불공평하다. (중략) 아마도 다른 현대 할리우드 편집자들보다 그녀의 독특한 편집 시그니쳐는 그녀를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할 것이다. 스코세이지와 거의 독점적으로 작업하는 것은 확실히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고 편집이 예술로 여겨져야 할 뿐만 아니라 영화가 창의력의 협력적인 행동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제프리 레스너는 "분노의 황소, 좋은 친구들, 그리고 카지노는 편집 기술을 포스트 모더니즘, 거의 환각에 가까운 예술로 밀어넣었다."라고 말했다. (중략) 1980년 이래로, 그녀의 편집은 매우 혁신적이고, 복잡하며, 계속해서 진화해 왔기 때문에 짧은 에세이로 그것의 모든 측면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것만큼이나 불공평하다. (중략) 아마도 다른 현대 할리우드 편집자들보다 그녀의 독특한 편집 시그니쳐는 그녀를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할 것이다. 스코세이지와 거의 독점적으로 작업하는 것은 확실히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고 편집이 예술로 여겨져야 할 뿐만 아니라 영화가 창의력의 협력적인 행동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델마 스쿤메이커는 긴 커리어동안 다양한 편집 스타일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주로 점프 컷, 프리즈 프레임, 병치법(juxtapositions)을 자주 사용한다. '분노의 주먹',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와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즉흥적인 요소를 가장 잘 다루는게 스쿤메이커의 트레이드마크다. 초기 편집 영화들인 '분노의 주먹', '코미디의 왕', '특근', '카지노', '좋은 친구들'에서 이러한 편집 방식을 볼 수 있다. 스쿤메이커는 이러한 편집 방식을 퍼즐과 같다고 말했는데, 완성된 씬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가지 씬들을 함께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 즉흥적인 영화 영상을 편집하는 것을 훈련시키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다큐멘터리 편집에서의 일이었다고 말했다.
스쿤메이커의 편집 스타일은 표현력이 풍부하다고 평가받는다. # 장면을 특별한 것으로 변화시켜 출연진과 제작진의 작품에 삶의 층을 추가한다. 스쿤메이커는 "스코세이지는 제가 편집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화에서 인간성을 끌어낸다고 주장합니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또한 자신이 여성으로서 스코세이지의 영화에서 감정적인 것들을 끌어내는데 더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 그리고 그녀의 편집은 시퀀스들이 거의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다. 스코세이지의 영화는 상영 시간이 굉장히 긴 편임에도 불구하고 리듬감과 페이싱을 잘 살려서 몰입감도 훌륭하다.
감독과의 협력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대본을 한 번밖에 읽지 않지만, 스코세이지와 날마다 토론하는 데 적극적이며, 촬영일로부터 많은 메모를 하고, 어떻게 이야기가 편집에서 연결될 것인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 스코세이지가 촬영을 시작하자마자 편집을 시작한다. 이 둘은 매일 밤 함께 촬영한 영상들을 보며 테이크를 식별한다.[9] 스쿤메이커는 대략적인 컷을 준비하여 스코세이지에게 보여주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편집 작업이 시작된다. 편집 기간이 굉장히 긴 편이다. 종종 9개월까지 지속되는 매우 치열한 기간 동안 편집실에서 함께 작업한다고 한다. 또 스코세이지의 영상을 다룰 때 자신이 직면한 주요 과제는 컷들을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컷들을 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영상 편집 시스템으로 주로 Lightworks를 사용하고 있다. 여전히 플랫베드 편집의 일부 특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훌륭한 시스템이라고 평했다. #
델마 스쿤메이커는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은 말들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인터뷰에서 편집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편집의 가장 멋진 점은 이 모든 원료를 제공하는 것이고, 이 경우 스코세이지와 함께 장면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편집자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언제 다른 배우가 아닌 한 배우의 클로즈업으로 자르나요? 당신은 언제 와이드 샷을 사용합니까? (중략) 우리는 할리우드 편집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영화 편집 스타일의 거친 부분을 좋아합니다. 할리우드 편집자들은 모든 충돌이 제거된 매끄러운 편집 스타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마티와 저는 그 충격들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화에 어떤 중력과 어떤 현실을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
편집자는 영화와 연기를 구성하기 때문에 편집실에서 매우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감독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모든 힘든 일을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당신은 그들의 작업 리듬과 속도를 주고 때때로 필름이 작동하도록 구조를 조정합니다. 즉, 필름이 화면에 흐르기 시작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1년의 작업 후에 여러분이 극장에서 한 일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보람 있는 일입니다. #
저와 스코세이지는 자존심 싸움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매우 잘 협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화 산업은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항상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 중 하나는 여러분이 함께 일하게 될 모든 사람들의 자아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그것을 파괴적인 상황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스코세이지]는 제가 그의 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집은 바로 조각가가 점토 덩어리를 가져다가 누군가의 초상화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는 재료가 얼마나 원자재인지, 그리고 그것을 조작하고 그것을 작동시키기 위해 절단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배우의 연기란, 어떤 테이크를 쓰는가, 배우의 얼굴에 얼마동안 머무르는가, 어느 대사를 상대 배우의 얼굴에 거는가, 그리고 언제 클로즈업이나 와이드 샷, 투 샷을 쓰는가에 따라, 향상되고 형성되거나 망쳐지게 된다. #
4. 필모그래피
※ 표시를 제외하면 모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연출 작품이다.<rowcolor=#fff> 년도 | 제목 | 비고 |
1967 |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 Who's That Knocking at My Door | 장편 데뷔작 |
1970 | 우드스톡 ※ Woodstock |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
1980 | 분노의 주먹 Raging Bull | 아카데미 편집상 수상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수상 |
1982 | 코미디의 왕 The King of Comedy |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
1985 | 특근 After Hours | |
1986 | 컬러 오브 머니 The Color of Money | |
1987 | Bad |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 |
1988 |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 |
1989 | 뉴욕 스토리 New York Stories | 단편 영화 |
1990 | 좋은 친구들 Goodfellas |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수상 |
1991 | 케이프 피어 Cape Fear |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
1993 | 순수의 시대 The Age of Innocence | |
1995 | 카지노 Casino | |
1997 | 쿤둔 Kundun | |
1999 | 비상 근무 Bringing Out the Dead | |
2002 | 갱스 오브 뉴욕 Gangs of New York |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
2004 | 에비에이터 The Aviator | 아카데미 편집상 수상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
2006 | 디파티드 The Departed | 아카데미 편집상 수상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
2010 | 셔터 아일랜드 Shutter Island | |
2011 | 휴고 Hugo |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
2013 |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
2015 | 붐페이 벨벳 ※ Bombay Velvet | |
2016 | 사일런스 Silence | |
2017 | 스노우맨 ※[10] The Snowman | |
2019 |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
2023 | 플라워 킬링 문 Killers of the Flower Moon |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영국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 |
5. 여담
결혼식 당시의 사진 |
- 델마 스쿤메이커가 편집한 '분노의 주먹'은 2015년 '영화 편집자 조합' 회원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편집이 잘 된 영화 순위'에서 1위에 선정됐다. 이외에도 스쿤메이커가 편집한 '좋은 친구들', '휴고'가 순위에 올랐다. # soundstripe 역시 분노의 주먹을 '역사상 가장 편집이 잘 된 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 #
-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편집할 때 스쿤메이커와 스코세이지 둘 중 누가 우위에 있는지 알고 싶어해서 이러한 질문을 한다고 한다. 스쿤메이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함께 일했기 때문에 정말 아름답게 함께 협력하고, 우리는 하나의 마음과 같습니다.
- 편집이 여전히 오해를 받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쿤메이커는 편집보다 조명, 카메라 작업, 연기, 세트 디자인 및 의상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쉽다고 지적했다. 또한 편집을 보이지 않는 예술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우리는 때때로 정말 보이지 않는 컷으로 관객들의 얼굴을 때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중략) 그것은 매우 창의적이고 저는 그것이 세계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비롭습니다."라고 말했다. #편집은 가장 놀랍도록 창의적인 직업입니다. 마치 생 점토 덩어리를 조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점차 구체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
- 기자가 어떻게 스코세이지의 폭력적인 갱스터 영화를 편집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델마 스쿤메이커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 하지만 제가 편집하기 전까지는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
- 델마 스쿤메이커는 평론가에게 "우리가 여기 편집실에서 그런 폭력을 만든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쿤메이커는 여성 편집자들에 대한 초기 고정관념을 깨뜨린 인물이기도 하다. #
- 2014년 1월과 2월에 맨해튼에 있는 뉴욕 역사 학회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세 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1943), 분홍신(1948), 천국으로 가는 계단(1946). 모두 남편의 연출작이다.
- 2019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5편을 골랐다. #
-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1943)
- 분홍신 (1948)
-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 (1950)
- 얼굴들 (1968)
- 분노의 주먹 (1980)[11]
- 기자가 스코세이지와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를 물었는데, 스쿤메이커는 사이좋게 지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결코 우리는 논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에게 선택지를 제시할 것입니다. 많은 편집자들과 감독들이 영화를 두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존심 싸움이고, 그것은 영화에 끔찍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 결국 그는 나를 훈련시켰습니다 - 나는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압니다.
- 국내에는 '셀마 스쿤메이커', '셀마 슈메이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6. 외부 링크
[1] 노아 바움백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2] 3번 수상. 마이클 칸(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전담 편집자), 다니엘 만델, 랄프 도슨과 타이 기록.[3] 스쿤메이커는 최종 시험 당시, 아파르트헤이트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책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했는데, 감정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합격하게 됐다.[4] 편집자 협회 가입 조건이 견습생으로 5년을 보내는 것과 어시스턴트로 3년을 보내는 것인데 스쿤메이커는 이걸 싫어했다고 한다. 스쿤메이커는 인터뷰에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던 제가 왜 갑자기 어시스턴트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5] 1970년대에는 마샤 루카스와 톰 롤프가 스코세이지의 전담 편집자였다.[6] 하지만 스쿤메이커는 알 파치노가 자신을 협회에 가입시켰다고 믿고 있다. 다만, 이쪽도 확실하지 않아서 누구의 도움으로 회원이 됐는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말했다.[7] 이 기록도 스필버그 영화를 전담하고 있는 편집자 마이클 칸과 타이 기록이다.[8] 수상 당시, 케이트 블란쳇이 헌정하는 연사를 했다.[9] 하루에 100번 이상의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10] 스코세이지가 감독직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이후에 하차한 영화다.[11] 자신이 편집할 때 연출, 카메라 워킹, 연기, 음악 모든 것이 최고였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