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주요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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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프랭크 카프라 Frank Capra | |
본명 | 프랭크 러셀 카프라[1] Frank Russell Capra |
출생 | 1897년 5월 18일 |
이탈리아 왕국 시칠리아 | |
사망 | 1991년 9월 3일 (향년 94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라킨타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2] |
학력 |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화학공학 / B.S.) |
직업 | 영화감독 |
활동 | 1922년 ~ 1964년 |
배우자 | 헬런 하우얼 (1923년 결혼 ~ 1928년 이혼) 루실 워너 (1932년 결혼 ~ 1984년 사별) |
자녀 | 아들 프랭크 카프라 주니어 (1934년생) 아들 존 카프라 (1935년생)[3] 딸 룰루 카프라 (1937년생) 아들 톰 카프라 (1941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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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이탈리아 국적의 영화 감독.20세기 초반 고전 할리우드 시기에 활약한 위대한 영화인이며,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작품들로 유명하다. 생전에 아카데미 감독상을 3번이나 거머쥔 거장 감독으로, 특히 1934년작 어느 날 밤에 생긴 일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싹쓸이하는 아카데미 최초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것으로 유명하다.[4]
로버트 올트먼, 구로사와 아키라, 데이비드 린치, 마틴 스코세이지,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그에게 존경심을 드러낸 바 있다. 이들 역시 위대한 감독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캐프러는 현대 영화 감독들의 우상이라는 것.
미국식 인민주의와 날카로운 풍자, 휴머니즘으로 존 포드와 함께 미국 영화의 정신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힌다. 포드에 비하면 좀 더 도회적인 감수성이나 소재를 쓰는 편.
2. 여담
-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자마자 할리우드 감독을 때려치운 뒤 워싱턴 D.C.로 가서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다녔는데, 그러던 도중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청년들이 참전의 대의를 믿게끔 설득할 수 있는 영상물을 제작해줄 수 있겠느냐는 의뢰를 받았다. 소령 계급으로 미 육군에 입대해 작품 제작을 총지휘했고, 그 결과물이 유명한 7부작 전시 다큐멘터리 "Why We Fight" 시리즈다. 이러한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공로로 대령까지 진급했으며, 훈장을 5개나 받은 진정한 미국인이었다.
- 베트남 전쟁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 아들인 프랭크 카프라 주니어(1934 ~ 2007)도 영화 제작자였으나 아버지만큼 인지도나 위상이 높지는 못하다.
- 당시 사회를 재치있게 풍자하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 크리스마스가 되면 〈멋진 인생〉을 가족들과 관람하곤 했다.
- 특유의 연설 장면이 유명해서 후대 감독들이 오마주를 바치곤 했다.
- 193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점, 아카데미 시상식과의 잦은 인연,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경력 등 존 포드와 접점이 많은 편인데, 실제로 카프라는 존 포드를 존경하며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했다. 전해지는 일화 중 하나로, 1960년대 감독조합에서 존 포드가 "카프라를 위해서라면 물구나무라도 서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카프라는 "저도요."라고 화답하며 무대 위에서 곧장 물구나무를 서기도 했다. 그랜절의 원조라면 원조다.
물구나무 사건 증거 사진
- 할리우드 황금기를 풍미했던 식당 Chasen's가 세워지는 데 공헌했다. 코미디언 데이브 체이슨(Dave Chasen)에게 식당 개업 아이디어를 줬을 뿐만 아니라 은제 식기를 통째로 빌려줬다. 1936년 문을 연 이래로 아카데미상 파티가 자주 열렸다. 1937년 월트 디즈니가 바로 이곳에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에게 단편 <마법사의 제자(The Sorcerer's Apprentice)>의 작곡을 부탁하면서 <판타지아>가 탄생하게 되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아내 낸시 레이건에게 청혼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 외에 리처드 닉슨, 프랭크 시나트라, 알프레드 히치콕, 엘리자베스 테일러, 케리 그랜트, 제임스 스튜어트, 그라우초 막스, 그레고리 펙, 밥 호프, 자니 카슨, 잭 니콜슨, 존 트라볼타, 멜 깁슨 등이 단골이었다. 칠리 요리가 유명했다. 90년대에 쇠퇴기를 맞아 1995년 문을 닫았다.
- 컬럼비아 픽처스를 하드캐리한 감독이라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이지 라이더랑 더불어 고전 계열에서는 소니 픽처스에서 공을 들여 보존/복원하는 감독이다. 새로운 홈 비디오 매체가 출시되면 제일 먼저 복원 출시될 정도.
- # 전간기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과 민주당을 반대한 일관적인 보수주의자였다. 심지어 무솔리니와 프랑코를 존경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다만 이러한 성향이 영화 제작 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정치 성향이 반대인 사람과도 문제없이 협업했다.
3. 대표작
생전 36개의 작품을 만들었기에, 가장 유명한 몇가지 작품만 서술한다.- 1933년 레이디 포 데이: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에 후보로 오른 작품.
- 1934년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1936년 디즈씨 도시에 가다: 두 번째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작. 한국에선 '천금을 마다한 사나이'로도 알려졌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와 제목뿐 아니라 스토리 구성도 거의 비슷하다.
- 1937년 잃어버린 지평선: 개봉 당시 대차게 망했지만 훗날 재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2016년 National Film Registry 선정작.
- 1938년 우리 집의 낙원: 세 번째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작.
- 1939년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 1944년 아세닉 엔 올드 레이스
- 1946년 멋진 인생: 미국 TV 방송국이 크리스마스마다 방영하는 영화로 유명하다.
[1] 출생명 프란체스코 로자리오 카프라 (Francesco Rosario Capra).[2] 1920년 취득.[3] 3살 때 사망했다.[4]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영화 인생을 대표하는 작품들이자 인지도도 높은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멋진 인생으로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