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8:49:43

루이스 부뉴엘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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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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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1971년1972년
오슨 웰스 잉마르 베리만 마르셀 카르네 존 포드 찰리 채플린
1972년1982년
아나톨리 골로브냐 빌리 와일더 알레산드로 블라세티 루이스 부뉴엘 프랭크 카프라
1982년
조지 큐커 장뤽 고다르 세르게이 유트케비치 알렉산더 클루게 구로사와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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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파웰 사티야지트 레이 킹 비더 세자르 자바티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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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존 휴스턴 페데리코 펠리니 타비아니 형제 루이지 코멘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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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1994년
로버트 드 니로 로만 폴란스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알 파치노 수소 체키 다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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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후안 카를로스 1세 미겔 데 세르반테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아돌포 수아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펠리페 6세 파블로 피카소 예수의 테레사 펠리페 곤살레스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이사벨 1세 세베로 오초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호세 사파테로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16위17위18위19위20위
살바도르 달리 안토니오 가우디 엘 시드 알폰소 10세 페르난도 알론소
21위22위23위24위25위
프란시스코 데 고야 프란시스코 프랑코 안토니오 마차도 미겔 인두리안 미카엘 세르베투스
26위27위28위29위30위
로라 플로레스 펠리페 2세 카를로스 1세 로시오 주라도 그레고리오 마라뇬
31위32위33위34위35위
디에고 벨라스케스 이사벨 판토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미겔 데 우나무노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36위37위38위39위40위
비센테 페레르 카밀로 호세 셀라 페드로 두케 다니 페드로사 파우 가솔
41위42위43위44위45위
다비드 비스발 라파엘 나달 카마롱 데 라 이슬라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
46위47위48위49위50위
산티아고 카리요 안토니오 반데라스 이냐시오 데 로욜라 페드로 알모도바르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51위52위53위54위55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미겔 에르난데스 후안 마누엘 세라 로페 데 베가 엘 그레코
56위57위58위59위60위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호아킨 사비나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앙헬 니에토 마누엘 아사냐
61위62위63위64위65위
조르디 푸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알레한드로 산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에르난 코르테스
66위67위68위69위70위
카를로스 사인츠 파퀴리 텔모 사라 몽세라 카바예 마누엘 데 파야
71위72위73위74위75위
이삭 페랄 플라시도 도밍고 미겔 길라 루이스 부뉴엘 엘 코르도베스
76위77위78위79위80위
프란시스코 피사로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라울 곤살레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81위82위83위84위85위
아만시오 오르테가 마놀레테 에두아르도 칠리다 페란 아드리아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86위87위88위89위90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호아킨 로드리고 에밀리오 보틴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프란시스코 헨토
91위92위93위94위95위
세바 바예스테레스 이삭 알베니스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카르멘 아마야
96위97위98위99위100위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 마누엘 산타나 알리시아 코플로비츠 안토니오 루이스 솔러 자코네로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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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칸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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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려상
<rowcolor=#000000> 제13회
(1960년)
제14회
(1961년)
제15회
(1962년)
페데리코 펠리니
(달콤한 인생)
루이스 부뉴엘 / 앙리 콜피
(비리디아나) / (이토록 긴 부재)
안셀무 두아르트
(산타 바바라의 맹세)
감독상
<rowcolor=#000000> 제3회
(1950년)
제4회
(1951년)
제5회
(1952년)
수상자 없음 루이스 부뉴엘
(잊혀진 사람들)
크리스티앙 자크
(팡팡 튤립)

역대 베네치아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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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자상
<rowcolor=#000000> 제27회
(1966년)
제28회
(1967년)
제29회
(1968년)
질로 폰테코르보
(알제리 전투)
루이스 부뉴엘
(세브린느)
알렉산더 클루게
(서커스단의 예술가들)
특별 심사위원상
<rowcolor=#000000> 제25회
(1964년)
제26회
(1965년)
제27회
(1966년)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 그리고리 코진체프
(마태복음) / (햄릿)
루이스 부뉴엘 / 마를렌 후치예프 / 레이프 크란츠
(시몬 오브 더 데저트) / (나는 스무살) / (용감한 하층민들)
콘래드 룩스 / 알렉산더 클루게
(샤파쿠아) / (어제와의 고별)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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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상
제26회
(1973년)
제27회
(1974년)
제28회
(1975년)
피터 보그다노비치, 래리 맥머트리
(마지막 영화관)
루이스 부뉴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로버트 타운
(차이나타운 / 마지막 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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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루이스 부뉴엘
Luis Buñuel
파일:LuisBuñuelㄹ1929.jpg
본명 루이스 부뉴엘 포르톨레스
Luis Buñuel Portolés
출생 1900년 2월 22일
스페인 왕국 칼란다
사망 1983년 7월 29일 (향년 83세)
멕시코 멕시코시티
국적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스페인 (1949년 포기)

[[멕시코|]][[틀:국기|]][[틀:국기|]] (1949~)
직업 각본가, 감독, 프로듀서
데뷔 1928년, 〈어셔가의 몰락[1]
활동 1929년 ~ 1977년
학력 마드리드 대학교
가족 배우자 (1934년 결혼)
자녀 2명[2]
종교 무종교(무신론)

1. 개요2. 생애3. 특징4. 작품 목록

[clearfix]

1. 개요

''초현실주의는 유머의 힘으로 태어났고 유머의 힘으로 해방을 꿈꾼다. ''
''지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은 루이스 부뉴엘입니다.”
앨프리드 히치콕

스페인/멕시코영화감독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명으로 불리는 거장 중의 거장이다. 초현실주의 사조를 이끌었으며, 사회 풍자적인 내용과 정렬된 서사를 파괴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동원해 영화적 가능성을 확장시킨 작품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라틴 영화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카를로스 사우라, 훌리오 메뎀, 심지어 기예르모 델 토로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지대하다.

특히 부르주아가톨릭에 대한 반발감이 엄청나 커리어 대부분이 신성모독적이며 소송방지급 블랙 유머로 가득한 편이다. 황금시대와 제 2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비리디아나는 신성 모독적인 내용으로 인해 스캔들로 번졌을 정도. 이러한 부뉴엘의 대담함은 표현의 자유를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에선 과거에 루이스 부뉘엘, 루이 부뉘엘로 적었으나 전부 잘못된 표기로,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루이스 부뉴엘에 가깝다.

2. 생애

1900년 2월 22일 아라곤(Aragon) 지방의 칼란다(Calanda)라는 시골[3]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동네 유일한 여관을 경영하던 집안이고, 아버지는 쿠바 아바나에서 철물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좋은 집안의 아들이었다. [4] 지방의 수도 사라고사에 위치한 예수회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자서전 '마지막 숨결'에 따르면[5] 매우 엄격한 종교교육을 행하고 중세 라틴어를 사용했을 정도로 보수적이어서 14살 때 신앙에 회의감을 느꼈고 오히려 거부감만 많아졌다고 한다. 결국 기말 시험 도중 감독관에서 모욕당하고 쫓겨난 뒤 예수회 학교로 돌아가는 걸 거부했고 [6] 지역 공립학교로 편입해 학업을 마쳤다. 성과 신성모독에 눈을 뜬 것도 이 시기이며(...) 특히 인간의 욕망을 종교가 어떻게 억압하고 남은 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강렬하게 체험한 이 유년기의 경험은 훗날 창작력의 원천으로 평생 자리잡는다.

1917년부터 1925년까지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대학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동안 살바도르 달리,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비롯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예술/인문학적 감수성을 기르게 된다. 졸업 후 파리로 건너가 프리츠 랑의 운명(Der Mude Tod, 1921)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장 엡스탱 감독이 에드거 앨런 포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어셔가의 몰락(28년작)의 조감독으로 참여했으나 의견 차이로 중간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7] 이후 고향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제작비를 받아 달리와 함께 꾸었던 꿈을 토대로 안달루시아의 개를 완성해 대중에 선보였고, 초현실주의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듬해 드 누아유 자작(Viscount of Noailles)으로부터 지원받은 5백만 프랑으로 황금시대를 연출, 11월 28일 '스튜디오28' 극장에서 상영됐으나 우파 지식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스크린에 잉크통과 연막탄을 던지는 등 수모를 겪었다.[8]

1933년에는 '아신'이라는 가명의 친구가 복권에 당첨되어 받은 상금으로 우르데스 마을(Las Hurdes)의 빈민들의 시궁창스러운 일상을 담아낸 빵 없는 세상을 개봉해 국가와 종교가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는 문구로 크레딧을 장식해서 프랑코파를 비롯한 보수층들의 심기를 건드려 상영금지를 당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승리를 거두자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시MoMA에서 스페인어 더빙 편집 등 유성영화 기술을 익히지만 미국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막스 에른스트의 증언에 따르면 1946년 하루는 박물관 감독관들이 그에게 와서 정통 가톨릭을 부정하는 영화인 황금시대살바도르 달리와 공동으로 각본을 집필한 것이 사실이며 무신론적이고 불경한 작품이 맞냐고 물었고, 부뉴엘은 무신론적인 작품이 맞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감독관들은 사직을 요구했고, 며칠 후 해고된 부뉴엘은 막스와 함께 달리가 살고 있는 5번가로 찾아가 뺨을 때리고 그대로 나온 뒤 인연을 끊게 되었다고 한다.[9] 달리가 자서전에 부뉴엘을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해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는 사실 와전된 것이다. [10] 최종적으로 멕시코에 정착해 시민권을 얻게 되고 1947년부터 1965년까지 21편의 영화를 감독하였으며[11] 프랑스로 넘어가 세브린느를 포함한 후기 명작들에서도 스페인 혹은 라틴 아메리카와 관련된 문화 요소를 곳곳에 삽입했다. 1983년 7월 29일 멕시코 시티에서 눈을 감는다. 부인 말에 따르면 사인은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간경화증이었다고 한다. 장례식은 친지들과 옥타비오 파스 같은 지인들끼리 조용히 치렀다.

도발적인 작풍과는 달리 아내 잔 루카 [12]하고는 50년동안 해로했다. [13] 아들 후안 루이스 역시 감독이 되었으나, 별 반향을 얻지 못했다. [14] 후안 전 아내도 감독이자 극작가였고, 손자 디에고 부뉴엘 [15]도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면서 3대가 영화인 가족이 되었다.

3. 특징

초현실주의로 이름을 알린 만큼 흔히 전형적인 논리적 관습을 전복하고 권력 및 상류층들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를 조롱하고 관음증을 특유의 도발로 빗나가게 만든다. 당장 데뷔작부터 개는 한 마리도 씬에 담겨있지 않고 "옛날 옛적에" "8년 후" "봄이 되어" 같은 자막 카드가 뒤죽박죽 섞여 관객들이 서사 자체를 이해하는 것을 비웃으며, 황금시대의 마지막 시퀀스는 사드 후작소돔의 120일의 결말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블랑지 공작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형상화해 당시 프랑스의 우익, 반유태인 단체가 난동을 피우기까지 했다. 또한 트리스타나에서 극 중 주연인 카트린 드뇌브가 하인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그녀가 냉소를 머금고 있는 표정만을 비추어 관객들의 욕망을 걷어차 버린다.

또한 미겔 데 세르반테스라든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라틴 문화 특유의 세속적이고 뻔뻔한 상상력을 펼치기로 유명했다. 태연하게 비현실적인 상황을 들이대면서 대상을 조롱하는 부뉴엘의 유머는 판타지 장르와 현대 부조리 코미디블랙 코미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뉴엘 본인이 밝히길 에른스트 루비치, 앨프리드 히치콕,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마르크스, 프리츠 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루비치에게서는 코미디를, 히치콕에서는 시선의 영향을,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랑에게서는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무신론 뿐만이 아니라 반교권주의, 세속주의적 성향이 강한 편이라. 제도권 종교에 냉소적인 비판을 가하는 영화가 많다. 종교가 추구하는 선함과 깨달음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진 않지만, 세속적 상황에 둔감하고 교조적인 종교 시스템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편. 때문에 고결한 인물이 세속에서 더럽혀진 후 선함을 실천한다는 아이러니한 전개가 자주 등장하곤 한다. 멕시코에서 버스 타기, 사막의 시몬이나 나자린 같은 영화에서 이런 성향이 두드러진다. [16]

4. 작품 목록

<rowcolor=#fff> 년도 제목 연출 각본 출연 비고
1928 어셔가의 몰락
La chute de la maison Usher
각색 참여
1929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
단편, 첫 연출작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1930 황금시대
L'Age d'Or
중편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1933 빵 없는 세상
Las Hurdes
다큐멘터리, 단편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1947 그랑 카지노[17]
Gran Casino
1949 위대한 난봉꾼
El gran calavera
1950 잊혀진 사람들
Los olvidados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제4회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세계기록유산 등재 (2003)#
1951 수산나
Susana
1951 책략의 딸
La hija del engaño
1952 멕시코에서 버스 타기
Subida al cielo
1952 사랑 없는 여자
Una mujer sin amor
1953 [18]
Él
1953 짐승[19]
El bruto
1954 환상의 전차를 타고 여행하다
La ilusión viaja en tranvía
1954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1954 폭풍의 언덕
Abismos de pasión
1954 강과 죽음
El río y la muerte
1955 범죄에 대한 수필
Ensayo de un crimen
1956 새벽
Cela s'appelle l'aurore
1956 애련의 장미
La mort en ce jardin
1959 나자린
Nazarín
1959 죄의 공화국
La fièvre monte à El Pao
1960 젊은이
The Young One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1961 비리디아나
Viridiana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제14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1962 절멸의 천사[20]
El Ángel exterminador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1964 어느 하녀의 일기
Le journal d'une femme de chambre
1965 시몬 오브 더 데저트[21]
Simón del desierto
단편, 수상
1967 세브린느
Belle de jour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제28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1969 은하수
La voie lactée
1970 트리스타나
Tristana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1972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제47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
1974 자유의 환상
Le fantôme de la liberté
1977 욕망의 모호한 대상
Cet obscur objet du désir
유작

[1] 장 엡스탱 감독 작품. 각본가이자 조감독으로 참여[2] 1명은 2017년에 사망.[3] 사라고사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굉장한 산골 깡촌이다. 인구는 3700명 정도. 루이스 본인은 이 마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도 중세였던 곳'이라 설명했다.[4] 결혼 당시 아버지가 45살, 어머니가 18살 (...)이라 그떄 기준으로도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결혼이었다. 루이스는 7남매 중 장남.[5] 후기 작업 파트너였던 각본가 장클로드 카리에가 정리했으며, 2021년 11월 5일 을유문화사에서 번역 출간했다. 참고로 초현실주의자답게 구술 내용에 허풍이 강한 편이니 적당히 필터링해서 보라는 얘기가 많다.[6] 퇴학 당했다고 어머니에게 거짓말했지만 사실은 세계사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우등생이었지만 자의로 나온 것.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으로 진학한 것도 그렇고 공부는 잘했던 모양.[7] 엡스탱과 부뉴엘은 아벨 강스나폴레옹(1927년 영화) 참여 여부로 싸우기도 하는 등 이전부터 충돌이 많았다. 부뉴엘이 참여 요청을 조롱하듯 거부하자 엡스탱이 강스 같은 대감독을 모욕하다니, 초현실주의자 같은 미친 놈 같다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이후 어셔가의 몰락을 끝으로 갈라섰지만 개인적 교류는 있었는지 엡스탱이 후술하듯이 부뉴엘의 미래 아내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고.[8] 시사회 당시 부르주아 관객층들은 "유대인 타도"를 외치면서 달리와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들을 훼손하기까지 했다.[9] 같은 해 다섯 손가락을 가진 괴수(The Beast with Five Fingers)를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다.[10] 사실 예전부터 부뉴엘이 달리와 로르카의 관계를 질투한데다 일찍부터 예술가로 성공한 달리한테 열등감이 있었다고 한다.[11] 새벽+애련의 장미로빈슨 크루소+젊은 연인의 경우 각각 프랑스, 미국 자본으로 제작했다.[12] 특이하게도 1924 파리 올림픽 체조 동메달리스트였던 프랑스인 체조 교사였다고 한다. 1994년 타계.[13] 의외로 만든 영화랑 대조되게 향락 같은 거하고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파티장에 갔는데 적응을 못했다고. 장 엡스탱은 이 둘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 못 갈거라고 경고했지만 예상을 깨고 앱스탱 타계 후로도 해로했다.[14] 호러 영화랑 TV쪽으로 활동했으며 아버지 명성 때문인지 같이 작업한 배우들은 화려했다.[15] 후안의 전 아내가 러시아 유대계 미국인이기에 디에고는 스페인-러시아-유대-미국계 프랑스인이다.[16] 나자린은 이런 제도권 종교 비판 성향에도 불구하고 바티칸 선정 위대한 영화에 오른 적이 있다.[17] 멕시코에서의 첫 영화이며, 평범한 뮤지컬 멜로물이다.[18] 영제를 번역한 '이상한 정열'로 표기하기도 한다.[19] '야만인'으로 표기하기도 한다.[20] '학살의 천사'로 불리기도 한다.[21] '사막의 시몬'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