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 ||||
감독상 | ||||
제30회 (1977년) | → | 제31회 (1978년) | → | 제32회 (1979년) |
밀로스 포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 | 우디 앨런 (애니 홀) | → | 앨런 파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
제38회 (1985년) | → | 제40회 (1987년) | → | 제41회 (1988년) |
빔 벤더스 (파리 텍사스) | → | 우디 앨런 (한나와 그 자매들) | → | 올리버 스톤 (플래툰) |
각본상 | ||||
제30회 (1977년) | → | 제31회 (1978년) | → | 제32회 (1979년) |
알란 파커 (벅시 말론) | → | 우디 앨런 마셜 브리크먼 (애니 홀) | → | 엘빈 사전트 (줄리아) |
제32회 (1979년) | → | 제33회 (1980년) | → | 제34회 (1981년) |
엘빈 사전트 (줄리아) | → | 우디 앨런 (맨하탄) | → | 제지 코신스키 (찬스) |
제37회 (1984년) | → | 제38회 (1985년) | → | 제39회 (1986년) |
폴 D.짐마맨 (코미디의 왕) | → | 우디 앨런 (브로드웨이의 대니 로즈) | → | 우디 앨런 (카이로의 붉은 장미) |
제38회 (1985년) | → | 제39회 (1986년) | → | 제40회 (1987년) |
우디 앨런 (브로드웨이의 대니 로즈) | → | 우디 앨런 (카이로의 붉은 장미) | → | 우디 앨런 (한나와 그 자매들) |
제39회 (1986년) | → | 제40회 (1987년) | → | 제41회 (1988년) |
우디 앨런 (카이로의 붉은 장미) | → | 우디 앨런 (한나와 그 자매들) | → | 데이빗 르랜드 (위 스 유 워 히어) |
제45회 (1992년) | → | 제46회 (1993년) | → | 제47회 (1994년) |
안소니 밍겔라 (유령과의 사랑) | → | 우디 앨런 (부부 일기) | → | 대니 루빈 (사랑의 블랙홀) |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 ||||
각본상 | ||||
제42회 (1985년) | → | 제43회 (1986년) | → | 제44회 (1987년) |
피터 쉐퍼 (아마데우스) | → | 우디 앨런 (카이로의 붉은 장미) | → | 로버트 볼트 (미션) |
제68회 (2011년) | → | 제69회 (2012년) | → | 제70회 (2013년) |
아론 소킨 (소셜 네트워크) | → | 우디 앨런 (미드나잇 인 파리) | → | 쿠엔틴 타란티노 (장고: 분노의 추적자) |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 |||||
각본상 | |||||
제16회 (2011년) | → | 제17회 (2012년) | → | 제18회 (2013년) | |
데이비드 셀리더 (킹스 스피치) | → | 우디 앨런 (미드나잇 인 파리) | → | 쿠엔틴 타란티노 (장고: 분노의 추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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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1897e><colcolor=#fff> 우디 앨런 Woody Allen | |||
출생명 | 앨런 스튜어트 코니그즈버그 Allan Stewart Konigsberg | ||
출생 | 1935년 12월 1일 ([age(1935-12-01)]세) | ||
미국 뉴욕주 뉴욕 시 브롱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미드우드 고등학교 (졸업) 뉴욕 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 ∙ 영화학 / 중퇴)[1]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 (영화학 / 중퇴)[2] | ||
직업 | 영화감독, 작가, 배우, 코미디언 | ||
신체 | 165cm | ||
서명 | |||
링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1897e><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마틴 코닉스버그(1901년 12월 25일생~2001년 1월 8일 사망) 어머니: 네티 코닉스버그(1906년 11월 8일생~2002년 1월 27일 사망) | |
형제자매 | 여동생: 레티 아론슨(1943년 11월 30일생, [age(1943-11-30)]세) | ||
배우자 /파트너 | 할린 로젠(1956년 결혼~1962년 이혼) 루이즈 래서(1966년 결혼~1970년 이혼) 다이앤 키튼(1970년 ~ 1979년) 미아 패로(1980년~1992년) 순이 프레빈(1997년 결혼~현재) | ||
자녀 | 장남: 모세 패로(1978년생, [age(1978-01-01)]세)[A] 장녀: 딜런 패로(1985년생, [age(1985-01-01)]세)[A] 차남: 로난 패로(1987년생, [age(1987-01-01)]세) 차녀: 베쳇 앨런(1998년생, [age(1998-01-01)]세)[A] 3녀: 맨지 티오 앨런(2000년생, [age(2000-01-01)]세)[A]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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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심한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이 우디 앨런의 오만함은 무한하다. 조용하게 말하고 구석에 움츠러져 있는 사람들은 몹시 오만하다.
그는 부끄러운 듯 행동하지만, 그는 겁에 질려 있는 것이다. 자신을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자기 불안 탓에 스스로 흠결을 드러내 남을 웃기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가 영화 속에서 하는 것들은 모두 자기 치료를 위한 것이다.
―오슨 웰스 #[8]
그는 부끄러운 듯 행동하지만, 그는 겁에 질려 있는 것이다. 자신을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자기 불안 탓에 스스로 흠결을 드러내 남을 웃기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가 영화 속에서 하는 것들은 모두 자기 치료를 위한 것이다.
―오슨 웰스 #[8]
책 <우디가 말하는 앨런> 중
미국의 유명 영화감독, 배우, 작가, 코미디언[9]이다.
할리우드와는 차별화된 성향을 가진 뉴욕파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 중 한명으로[10] 1969년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2024년 현재까지 매년 1,2 편의 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다.
순수문학에도 재능이 있어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의 문예잡지인 뉴요커에 단편 소설을 기고했었다. 몇 개는 영화화되었으며 한국에도 그의 소설이 번역되어 출판된 바 있다.
뉴욕이라는 도시를 사랑하는 대표적인 뉴요커이며, 프랑스도 아예 조국같이 여긴다는 말도 하고 자주 오고갈 정도로 좋아한다. 프랑스에서 일어나던 반유대계 분노 시위에서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비난하던 이스라엘에게 '우리도 좀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는 중립적인 말을 했고 이 당시 일부 미국 내 유대인들이 프랑스를 나치 독일과 같다고 비난하자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나치와 싸우고 친나치를 철저하게 뿌리뽑은 프랑스를 나치와 견주다니 너무 엉터리로 빗대어 분노한다!"[11]라고 적극적으로 반론하기도 했다.
19살에 처음으로 결혼했고 2번의 이혼경력이 있다.[12] 이후 다이앤 키튼, 미아 패로 등 유명 여배우들과 사귀었으며 이외에도 여친이 몇 있는 등 샌님같은 이미지와 다르게 여성편력이 화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애니 홀(1977), 맨하탄(1979), 스타더스트 메모리즈(1980), 젤리그(1983),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 한나와 그 자매들(1986), 범죄와 비행(1989), 브로드웨이를 쏴라(1994), 매치 포인트(2005), 미드나잇 인 파리(2011), 블루 재스민(2013) 등이 있다.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비평가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고 아카데미상, 골든글로브 등에서 수상 및 노미네이트 성적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2017년부터 미국에서 일어난 미투 운동이 영화계로 옮겨붙으면서 우디 앨런도 수양딸인 딜런 패로에 대한 성추행 의혹 때문에 아마존과 수백억에 달하는 영화 제작 건이 취소되는 등 사회적으로 매장위기다.
2. 일생
2.1. 학창 시절
1935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 출생. 원래 이름은 앨런 스튜어트 코니그즈버그(Allan Stewart Konigsberg)로 유대인이다. 예명이 헤이우드 앨런(Heywood Allen), 즉 우디 앨런.우디 앨런의 가족은 브루클린을 중심으로 10차례 이상 이사를 다녔다.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이민 온 이웃들, 흉악해 보이는 보모와도 살았다고. 그렇지만 훗날 작품을 만들 때는 유대인 특유의 민족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지적이고 신경질적인 뉴요커로서 자신을 표현한다.
1953년에 뉴욕 미드우드 고등학교를 나와 뉴욕 대학교에 들어갔으나 학기 중 필름 프로그램에 등록했다가 영화 제작 과목에서 낙제를 하는 바람에 학교를 중퇴했다. 1954년,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에 입학했는데 이 대학에서도 1학기만에 시험 중 앞 학생을 커닝(cheating)하다 퇴학당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시절 우디 앨런은 공연에서 이를 개그 소재로 삼으면서 "저는 그저 앞 녀석의 영혼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어요"라는 드립을 쳤다.
2.2. 코미디 작가 활동 (1955 ~ 1959)
우디 앨런은 15세부터 스스로 짧은 유머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는 시험삼아 그것들을 브로드웨이 작가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아가씨와 건달들의 공동작가였던 에이브 버로스는 우디 앨런이 보내온 조크들이 대단히 참신하다고 여겨 즉시 시드 시저, 필 실버스, 피터 린드 헤이즈에게 우디 앨런을 소개하는 편지를 썼고 이들은 앨런이 샘플로 보낸 유머 글에 대한 대가로 수표를 지급했다. 그 결과 우디 앨런은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을 중퇴한 직후인 1955년, NBC의 작가 개발 프로그램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고 이어 로스앤젤레스의 NBC 코미디 아워에 일자리를 얻는다. 이후 우디 앨런은 일주일에 25달러를 받으며 코미디언 허브 슈라이너의 전속 작가로서 일하게 되었다.우디 앨런은 코미디 작가로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능력을 인정받았고 에드 설리번 쇼, 투나잇 쇼 등 각종 예능 프로그램과 TV 토크쇼의 대본을 쓰는 방송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앨런은 그와 마찬가지로 코미디 작가로 활동하던 멜 브룩스와 협업하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유명 코미디언들의 TV 쇼 대본을 쓰면서 우디 앨런은 밥 호프 등 당대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들로부터 '천재 코미디 작가'라는 평을 듣는다. 어떤 쇼든지간에 우디 앨런에게 대본을 맡기면 그는 바로 다음 날 완성된 원고 뭉치를 들고 나타났다고 한다.
50년대 후반, 우디 앨런은 TV 쇼 대본 원고료만으로 일주일에 1,500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었고 하루에 15시간씩 글을 쓸 정도로 매우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유명 TV 토크쇼 진행자인 딕 카벳(Dick Cavett)은 우디 앨런의 워커홀릭적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며 놀라워 했다. "He can go to a typewriter after breakfast and sit there until the sun sets and his head is pounding, interrupting work only for coffee and a brief walk, and then spend the whole evening working (그는 아침 식사 후 타자기가 있는 책상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그리고 머리가 자끈거릴 때까지 글을 썼다. 그의 유일한 휴식 시간은 커피를 마시고 짧은 산책을 할 때 뿐이었다. 약간의 휴식을 가진 후 그는 다시 저녁 내내 일에 몰두했다.)
2.3. 코미디언 활동 (1960 ~ 1969)
1960년, 우디 앨런의 새 매니저가 된 잭 롤린스는 우디 앨런에게서 코미디언으로서의 자질을 느끼고 앨런에게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자는 제안을 했다. 우디 앨런은 처음에 그 제안을 거절했으나 모르트 살의 무대를 보고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 무대에 설 결심을 했다고 한다. 앨런은 "용기를 낼 수 없었을 때 모르트 살이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유머를 선보이며 나타났고 나와 같은 이들의 눈을 열어주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우디 앨런은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다. 앨런은 기존의 스탠드업 코미디언들과는 달리 캐주얼한 옷을 입은 채로 무대에 서서 관객들에게 젠틀하게 자신의 유머를 선보였으며 무대에서 '평범하게' 행동하였다. 즉, 여타 코미디언들과는 달리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또한, 우디 앨런은 유대인이었지만 당시에 유행하던 유대인 관련 농담을 전혀 하지 않았고 정치 및 사회 풍자적 요소도 자신의 코미디에 섞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일상을 웃음의 소재로 쓰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의 조크는 대부분 자신의 실제 경험담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다만,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우디 앨런이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서 보여준 예민하고 소심한 페르소나는 실생활에서의 우디 앨런과 무척 달랐다고 한다.
우디 앨런은 다른 스탠드업 코미디언들과는 달리 즉흥 코미디를 하지 않았다. 앨런은 무대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도중에 종종 내뱉을 말을 생각하려는 듯이 말을 멈추곤 하였지만 그 모든 것은 사전에 계획된 조크였고 충분한 리허설을 거친 뒤에 행해진 코미디였다.
코미디 작가로서 일했을 때 우디 앨런은 대개 10개의 개그 아이디어 중에 8개 정도를 살렸는데 자신이 펼치는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를 위한 대본을 쓸 때는 10개의 개그 아이디어 중에 가장 잘 된 하나만을 골라 썼을 정도로 까다롭게 원고를 작성했다고 한다.
시종일관 진지한 자세로 개그를 펼치는 우디 앨런의 독특한 캐릭터와 자신의 일상을 유머스럽게 풀어내는 그의 코미디 스타일은 처음에는 미국 대중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디 앨런의 무대를 직접 본 관객들의 입소문을 통해 차츰차츰 인지도를 얻은 끝애 1964년 즈음부터 우디 앨런은 유명 코미디언으로서 미전역에서 높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또한, 1963년 11월 1일,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 첫 출연한 우디 앨런은 이후 9년간 17번 호스트를 맡는 등 투나잇 쇼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
코미디 역사가인 제럴드 나크만은 "우디 앨런은 비록 최초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아니지만 1960년대에 걸쳐 행해진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통해 미국의 코미디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것을 재정의했다."라고 설명한다.
60년대 우디 앨런이 행한 스탠드업 코미디를 녹음한 앨범들은 총 3장이 있다. Woody Allen (1964), Woody Allen Volume 2 (1965), The Third Woody Allen Album (1968)이 그것들이다.
1965년, 우디 앨런은 피터 오톨, 피터 셀러스 주연의 영화 <What's New Pussycat?>의 각본을 맡게되었는데 감독 클라이브 도너의 권유로 영화에 직접 출연하게 되면서 영화 배우로 데뷔했다.
1967년에는 007 시리즈를 패러디한 영화 007 카지노 로얄에 출연하였다.
1969년, 우디 앨런은 연극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의 각본을 쓰고 직접 남자주인공 역으로 출연했다. 이 연극은 1972년에 허버트 로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으며 앨런은 연극과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 다이앤 키튼과 연인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1979년까지 연인 관계였으며 다이앤 키튼은 총 8편의 우디 앨런 영화에 출연했다.
2.4. 영화 감독 활동 (1969 ~ )
우디 앨런은 1969년 코미디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바나나 공화국》(1971), 《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1972)[13], 《슬리퍼》(1973) 등 일련의 코미디 영화들을 주연, 감독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이후 우디 앨런은 《사랑과 죽음》(1975)을 시작으로 정극을 찍기 시작했으며 애정 심리극 《애니 홀》(1977)[14], 뉴욕 상류층의 인생에 대한 불안감을 시적으로 표현한 진지한 드라마 《인테리어 Interiors》(1978), 예술영화적인 색체가 짙은 흑백 영화 《맨하탄》(1979)을 연이어 발표하며 단순한 코미디 영화 감독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색채를 가진 작가주의 감독으로서 도약하였다.
80년대에도 앨런은 《젤리그》(1983), 《카이로의 붉은 장미》 (1985), 《한나와 그 자매들》(1986) 등 당시 자신의 여자친구였던 미아 패로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일련의 명작들을 꾸준히 내놓았으며 이를 통해 영화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부상하였다.
비록 몇 몇 영화들의 흥행은 다소 부진했지만 사실 거액을 펑펑 들이는 감독이 아닌지라 우디 앨런이 감독한 영화들 중 쫄딱 망한 영화는 그리 없다.[15] 인플레이션 조정을 안한 그의 최대 대박작은 《미드나잇 인 파리》로 북미에서만 5,6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
상복도 꽤 많은 편이며 팬들이 많아서인지 예술영화광들의 지지 및 투자가 꾸준히 이뤄진다. 일각에서는 감독, 각본, 주연의 3역을 해낼 수 있는 건 찰리 채플린이나 오슨 웰스, 우디 앨런 3명뿐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물론 이건 그를 높게 평가하기 위해 나온 말이고 감독, 각본, 주연을 혼자 도맡을 수 있는 영화인들은 생각보다 많다. 코미디 영화 감독 혹은 코미디언 출신 감독들로 한정한다 하더라도 멜 브룩스, 자크 타티, 기타노 다케시, 주성치 등이 있다.
감독으로서 다루는 내용이 꽤나 폭넓기로 유명하다. 로맨틱 코미디, 정통 추리물, SF, 대하 역사극, 가짜 표현주의 영화, 잉마르 베리만식 심리극까지 포괄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다만 장르를 진지하게 다루는 감독이라기 보다는 자기식으로 비틀거나 재해석하는 쪽의 감독이라 볼 수 있다. 주로 중산층 지식인들을 주인공으로 남녀간의 연애 문제라던지 윤리적인 딜레마, 지적 스노비즘 같은 문제들을 소재로 삼으며, 시네필적인 면모를 강하게 드러낼때도 있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을 오마주한 《그림자와 안개》, 영화광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카이로의 붉은 장미》가 대표적인 예다.
첨단 기술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감독인지라, 모노 녹음이 멸종하고 돌비 디지털이 자리잡던 1990년 초에도 음향을 모노로 녹음하기로 유명했다. 2000년대 이후로도 평균 정도로 녹음해놓는 수준. 홈 비디오에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라 부록도 전무해, 홈 비디오 수집가나 리뷰어들 사이에서 우디 앨런 DVD/블루레이는 심심하기 그지없다라고 평판이 자자하다.
대신 촬영에 꽤나 심혈을 기울이는 편으로 유명하다. 대표작인 맨하탄은 대부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고든 윌리스를 기용해 흑백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걸로 유명하며, 그 결과 맨하탄은 고든 윌리스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대규모 프로젝트에도 욕심이 있는지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영화를 구상해놓은 게 있다고 한다. '아메리칸 블루스'라는 영화인데 재즈광답게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한 루이 암스트롱과 시드니 베셰이의 전기 영화라고 했다. 앨런이 밝히길 예산이 최소 8백억-천억 원[16] 든다고 하니깐 제작될 가능성은 영원히 없다. 실제로 해당 발언이 나온 지 10년 되었는데 제작 착수 얘기조차 없는 걸 보면 그냥 만들었으면 좋겠다- 수준인듯 하다.(출처: Conversations with Woody Allen – His Films, the Movies and Moviemaking.)
한때 한국에서는 영화가 제대로 개봉하지 못했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슬금슬금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그리 많은 상영관에서 상영도 안한 《미드나잇 인 파리》가 전국 36만 관객이라는 상당히 짭짤한 흥행 수입을 올렸다. 이후 로마 위드 러브가 독립영화 수준 적은 개봉관에서 상영하여 전국 18만 관객, 블루 재스민이 전국 14만 관객을 기록하며 은근히 흥행이 좋은 영화 감독으로 자리잡았다.
2.4.1. 작품 목록
- 1966 《타이거 릴리》
- 1969 《돈을 갖고 튀어라》[17]
- 1971 《바나나 공화국》[18]
- 1972 《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19]
- 1973 《슬리퍼》[20]
- 1975 《사랑과 죽음》
- 1977 《애니 홀》[21]
- 1978 《인테리어》[22]
- 1979 《맨하탄》[23]
- 1980 《스타더스트 메모리스》
- 1982 《한여름 밤의 섹스 코미디》
- 1983 《젤리그》[24]
- 1984 《브로드웨이 대니 로즈》
- 1985 《카이로의 붉은 장미》[25]
- 1986 《한나와 그 자매들》[26]
- 1987 《라디오 데이즈》
- 1987 《9월》
- 1988 《또 다른 여인》
- 1989 《뉴욕스토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환자)
- 1989 《범죄와 비행》
- 1990 《중년의 위기》
- 1991 《그림자와 안개》
- 1992 《부부일기》
- 1993 《맨하탄 살인사건》
- 1994 《브로드웨이를 쏴라》
- 1995 《마이티 아프로디테》
- 1996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 1997 《해리 파괴하기》
- 1998 《셀러브리티》
- 1999 《스윗 앤 로다운》
- 2000 《스몰 타임 크룩스》
- 2001 《제이드 스콜피온의 저주》
- 2002 《헐리우드 앤딩》
- 2003 《애니씽 앨스》[27]
- 2004 《멜린다와 멜린다》
- 2005 《매치 포인트》
- 2006 《스쿠프》
- 2007 《카산드라의 꿈》
- 2008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 2009 《왓에버 웍스》
- 2010 《환상의 그대》
- 2011 《미드나잇 인 파리》
- 2012 《투 로마 위드 러브》
- 2013 《블루 재스민》
- 2014 《매직 인 더 문라이트》
- 2015 《이레셔널 맨》
- 2016 《카페 소사이어티》
- 2017 《원더 휠》
- 2018 《레이니 데이 인 뉴욕》
- 2020 《리프킨스 페스티벌》[28]
- 2023 《Coup de chance》
3. 논란
3.1. 여자친구의 딸과 결혼
자신의 여자친구[29] 미아 패로의 수양딸 순이 프레빈(한국계)과 사랑에 빠졌다. 우디 앨런이 미아 패로와 아직 연인 사이이던 1992년 패로가 앨런의 집 서재 벽난로에서 순이 프레빈(당시 21세)의 나체 사진들을 발견하면서 둘 사이를 눈치챈다. 곧바로 패로는 우디 앨런과의 관계를 끝냈고 딸인 순이 프레빈과도 의절했다.1994년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으로 우디 앨런은 큰 위기를 맞는다. 미국 전체에 윤리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큰 사건으로 모든 여론은 앨런에게 비난을 던졌다. 그럼에도 그는 순이 프레빈과 1997년 결혼해 현재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고 중국계 첫째 딸, 멕시코계 둘째 딸을 입양했다. 패로는 앨런과의 동거 전에 프랭크 시나트라, 앙드레 프레빈과 이혼했던데다 앨런의 이런 짓까지 겪다보니 남자 혐오증이 생겼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2018년 9월 17일 인사이더지와의 인터뷰에서 순이 프레빈은 '후회한다'라고 말했다. "사진을 발견한 엄마는 끔찍한 기분이었을 거다."라면서도 "우디 앨런과의 사랑은 엄마 때문"이라며, "그녀가 항상 자신을 어린애 취급을 했고, 이미 1992년 당시 그들의 가정 생활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앨런과 자신은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어엿한 성인이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순이 프레빈은 어렸을 때 미아 패로에게 구타와 학대를 당했다고 밝혔다. 순이의 오빠인 모제스 패로는 블로그를 통해 '어린시절 미아 패로가 커다란 도자기 장식품을 순이의 머리 쪽으로 던졌고 다행히도 빗나갔지만 조각난 파편에 다리를 다쳤다. 몇년 후엔 수화기로 때리기도 했다. 순이가 원한 것은 그저 홀로 남겨지는 것이었으며, 우디와의 관계가 비록 파격적이었지만 그것은 그녀를 탈출할 수 있게 해줬다. 다른 사람[32]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았다.' 라고 글을 올렸다.모제스 패로의 글
3.2. 딜런 패로 성추행 논란
2014년 우디 앨런은 제 7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는데 직후 전여친인 미아 패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로넌 패로가 앨런이 입양한 딸인 딜런을 7세 때 성추행 했다고 폭로하면서 그에 대한 맹렬히 비난을 퍼부었다. 그 결과 위에 언급된 한국계 입양아 순이 사건과 맞물려 우디 앨런이 소아성애자란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33] 미국야후의 영문기사딜런 패로는 "7살 때 아버지가 나를 어두운 다락으로 데려가 동생의 기차놀이 장난감 앞에서 엎드리게 한 뒤 성추행했다"며 "그 이후로 장난감 기차를 볼 때마다 괴롭다"고 털어놨다. 이어 "아버지가 나의 입에 엄지손가락을 넣거나, 나의 맨 무릎에 얼굴을 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것이 싫어 침대 밑이나 화장실로 숨기도 했다"며 "이런 일은 너무 자주(so often) 일상적이었으며 워낙 교묘해서 어머니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당사자인 딜런은 자해를 할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수양딸 성추행 억울한 우디 앨런의 뉴욕 타임스 기고글과 이에 대해 계속해서 달리는 반박기사#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이 일 때문에 소신인지 아니면 그저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어떠한 할리우드 배우들도 우디 앨런과 일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리고 새 프로젝트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제작한 미디어프로와 돌아온다고 했지만, 앞으로 굉장한 난항을 겪게 될 것이다.
패로와 앨런 사이의 친아들[34]인 로넌 패로[35]는 인터뷰에서 아버지이자 매형이 되어버린(…) 앨런과의 의절에 대해 "순이는 입양아, 그러니까 자신과 피가 섞이지 않은 누나니까 괜찮지 않아?"라는 주장에 "순이를 나의 누나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든 입양아들에 대한 모욕"이라며 분개했다.로넌 패로는 과거 아버지날에 우디 앨런을 저격했다.[36][37]
한편, 미아 패로가 딸 딜런에게 성추행당한 기억을 주입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딜런이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고 그녀의 진술에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점이 근거다. 일요신문
2018년 5월 24일, 미아 패로의 한국계 입양아들인 모제스 패로가 미아 패로의 아동 학대를 폭로하는 동시에, 앨런의 딜런 패로 성추행은 거짓이라는 주장을 담은 글을 올렸다. 또한 그는 우디 앨런의 성추행 혐의 재판 당시 미아 패로에 의해 거짓 진술을 강요받았다고 폭로함으로써 논란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 함께한 하비에르 바르뎀은 2018년 인터뷰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법적으로 밝혀진 건 없다. 나는 소문과 의혹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며 "우디 앨런같은 천재가 그가 다음 작품을 위해 부른다면 바로 비행기를 탈수있다."고 말했다.#
2019년 9월 4일 스칼렛 요한슨이 할리우드 리포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디 앨런을 옹호해 논란이 됐다. 스칼렛은 우디 앨런의 매치포인트(2005), 스쿠프(2006),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 등의 주연을 맡았었다. 앨런을 늘 옹호하고 존경을 표했던 그녀의 인터뷰 내용은 '나는 그를 사랑하며 그를 믿는다.' 였다. 그러면서 인터뷰어가 그런 의견을 피력하면 난처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사람들이 매우 열이 받은 상태라 쉽지는 않다. 이해는 한다. 한 번 이슈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많은 열정, 강한 감정으로 화를 내게 된다. 강한 정의감으로 말이다. 지금이 그런 때다'[38]라고 덧붙여 일을 크게 만드는 중.
우디 앨런에 대한 1993년 양육권 판결문이 공개되어 있다.# 당시 법원은 우디 앨런의 양육권을 박탈하면서, 몇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1) 미아 패로가 딜런을 코치했다는 앨런의 주장에 대한 신빙성 있는 증거는 없다. 2) 패로가 부모로서 결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 그의 부모로서의 책임감 부족이 딜런과 앨런의 관계가 지속되는데 일조했다. 3) 앨런의 자기 도취적 성향, 판단력 부족 및 분열을 초래하는 지속적인 공격적 행동을 감안할 때 그와 아이들의 관계는 앞으로도 주의깊게 관찰될 필요가 있다. 4) 본질적으로 1992년 8월 4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모세 패로가 말했듯 미아 패로는 아이들을 학대하고 불륜을 저질렀다. 미아 패로의 아동학대가 직접적으로 법적인 처벌을 받은 적은 없지만 그녀가 입양한 자녀 중 2명이 자살하고 한 명은 자포자기해 살다가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은 점, 모세와 순이가 '미아 패로는 아동학대를 일삼았고 백인 자녀만 편애했다'고 폭로한 점으로 보아 미아 패로도 정상적인 부모는 아니다.
우디 앨런이 회고록 출판을 가지려다가 출판사가 포기했다.# 이후 출판사를 바꿔서 출간한다.#
우디 앨런은 인터뷰에서 '25년 동안 아이들을 볼 기회가 없었으며 아이들이 자신을 최악의 인간이라 교육받으며 커버렸다'고 하소연했다. #
결론적으로 양육권을 박탈당할 때 부모로서의 소양이 모자라다는 것을 인정받은 적이 있지만 2024년 시점까지 우디 앨런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확실한 근거나 판결은 없다. 게다가 아동학대 의혹만 따지면 오히려 미아 패로 측이 딜런에게 가스라이팅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그런 식의 성범죄 기억 강제 주입이나 증언 강요 사건은 상당히 흔한 케이스라서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미아 패로 자체의 부모로서의 소양 부족이나 가정폭력 의혹 역시 미아 패로의 증언 신빙성을 낮추는 요소이다.[39] 즉 우디 앨런이 범죄자로 취급받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우디 앨런에 대한 차별이자 인권침해가 되는 상황. 배우들이 개인적으로 피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공식적으로는 무죄추정을 해야 한다. 스스로도 죄를 인정한 로만 폴란스키 [40]와는 다른 사례이다.
3.3. 아마존 소송 사건
2019년 9월 7일 우디 앨런은 아마존에 무려 700억원 대의 소송을 걸었다. 각종 성추문으로 타격을 입은 그에게 아마존이 일방적으로 계약 취소를 했다는 것. 앨런은 수십년 전의 성추문이 증거도 없고 딜런 패로의 증언이 흔들리고 모순되는 등 근거가 없는데도 무려 4편의 제작 약속을 깼다며, 계약 파기 시점은 2018년 6월로 확정했다. 아울러 최근작인 <A rainy day in New York>에 약속한 900만 달러를 미지급하는 등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고 덧붙였다. 참고로 2019년 현재 그의 나이는 한국 나이로 무려 85세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물론 세계 최대 기업의 법무팀을 상대해야 하는 등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전망이다.3.4. 티모시 샬라메 저격
2020년 출간된 자신의 자서전에서 실명으로 티모시 샬라메를 비난했다. # 샬라메는 2019년 우디 앨런 감독의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당시 할리우드는 하비 와인스틴으로 촉발된 미투 운동으로 인해 우디 앨런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와 작업한 샬라메 역시 비난을 들었는데, 샬라메는 인터뷰에서 “우디 앨런과 함께 작업한 것을 후회한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출연료를 LGBT와 여성 단체에 기부하겠다”며 앨런을 공개 비판하고 수습하려는 태도를 취했다.그러나 우디 앨런은 자서전에서 대놓고 이를 반박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티모시 샬라메는 나중에 공개적으로 나와 함께 일한 것을 후회하고 그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한다고 말했지만, 그와 그의 에이전트는 나를 비난하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오스카상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즉, 샬라메는 대외적으로는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을 지지 하는 척 해놓고 뒤로는 앨런의 측근을 만나서 “어쩔수 없었다”고 무마하는 등 말 그대로 패션 페미, 액세서리 미투를 장착했다는 게 앨런 측의 주장이다.
4. 기타
일본의 007 시리즈 아류작인 국제비밀경찰 시리즈의 필름을 짜깁기해서 새로 녹음한 《무슨 일이야, 타이거 릴리?(1966)》가 흑역사로 꼽힌다. 우디 앨런이 처음으로 감독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영화로 정확하게는 개그 패러디인데, 원작과 달리 '계란 샐러드' 레시피를 훔치려는 국제 악당에 맞선 개그 수사대 영화로 더빙 및 편집했다.
당시의 일본 등 아시아 영화를 이런 식으로 짜깁기 내지는 미국화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고지라 시리즈 중 하나가 로저 코먼이 개입해서 미국인 배우가 관찰하는 이야기로 마구 편집된 것도 그렇고 유명한 《아들을 동반한 검객》도 미국 시장에서는 상당 부분 삭제되고 다른 편의 이야기를 합쳐서 개봉되기도 했다. 앨런은 아예 엉뚱한 더빙을 입혀서 코미디물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이 다르다.[41]
우디 앨런의 《무슨 일이야, 타이거 릴리?》는 앞서 말한 영화들과 달리 원작 영화의 주제 의식을 완전히 죽여놓고 고의로 개그 영화로 재편집했던 것이었으므로 말이 많았다. 좀 간단히 말하면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를 다른 나라에서 섹스 코미디로 편집한 거나 마찬가지다. 워낙 심각한 마개조인 탓에 불법 해적판 아니냐는 말까지 있었지만, UPA가 토호에게서 정식으로 저작권을 사서 만든 작품이라 불법은 아니다. 사실 미국 제작사인 UPA도 할 말은 있는 게, 본래 UPA는 원작 판권을 살 마음이 없었지만, 토호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반강제로 판권을 구입한 경우였다. 이후 원작 그대로 더빙해서 개봉하면 미국에서 절대 흥행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제작사에서 당시 코미디계에서 알아주던 우디 앨런에게 맡겨 코미디 영화로 마개조시켰다는 게 타이거 릴리의 탄생 비화다. 어쨌든, 원작 영화를 만든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행태이기도 하니까 문제되기는 한다.
사실 이후에 나온 개그물인 《퓨전 쿵푸》는 수정이나 출연도 하는 등 용납할 점은 있는데 일본에서도 말이 많은 게 비밀경찰 시리즈의 쿠로베 스스무는 울트라맨(1966)의 주인공인 하야타 신 역을 맡았었다.(...) 해외에도 DVD는 발매되지만, 일본에서는 제작사인 토호와 저작권 문제가 있어서 빛을 보지 못했다.
[1]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3년 뉴욕 대학교에 입학하여 커뮤니케이션과 영화를 공부했으나 "Motion Picture Production"라는 수업 과정에 낙제하는 바람에 1년만에 중퇴하였다.[2] 1954년에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에 입학해 영화를 공부했지만, 1학기만에 그만두었다.[A] 입양[A] [A] [A] [7] The films that Abbas Kiarostami carries inside.[8] 흥미롭게도 우디 앨런은 영화를 만드는 이유 중 한가지로 영화를 통해 자기 치료를 하기 위해서라고 밝힌적이 있었다. #[9] 우디 앨런은 2004년 세계 100대 코미디언 중 4등으로 이름을 올렸고, 2005년 영국인들이 뽑은 가장 위대한 코미디언 중 3등에 올랐다.[10]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자신의 영화가 수상하게 되었는데 시상식을 팽개치고 바에서 클라리넷을 불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 (우디 앨런은 재즈에 일가견이 있으며 클라리넷을 능숙하게 연주한다.) 우디 앨런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여한 것은 9.11 테러 이듬해였던 2002년이 유일하다.[11] 그러나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프랑스의 친독부역자 처벌은 상당히 불합리적으로 이뤄졌으며, 정작 친독행위를 하고도 떵떵거리며 잘 사는 프랑스인들도 많았다.[12] 우디 앨런의 첫번째 부인은 앨런과 이혼 후 우디 앨런이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서 자신을 비하했다며 앨런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으며 우디 앨런의 2번째 부인인 루이스 래서는 1970년에 앨런과 이혼했지만 이혼후에도 1972년까지 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13] 단편 영화집으로, 이중 'Do Aphrodisiacs Work?'가 인터넷에서 꽤 잘 알려져 있다. 섹스를 할 때 인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인화한 것이다. 캡쳐 장면들, 소개 영상 그 외에 거대 가슴과 싸우는 명장면으로도 유명한 영화로 이때 우디 앨런은 한 에피소드에서 소심한 정자 역으로 카메오로 출연했다(...).[14] 같은해 개봉한 '스타워즈'를 제치고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그해의 영화상을 휩쓸었다.[15] 《아바타》 제작비를 듣고 '젠장, 나는 그 돈이라면 영화를 50편은 만들 텐데 말야. 뭐...수익은 장담 못하지만...' 이라는 농담도 한 적이 있다. 이 농담은 《타이타닉》 때도 비슷하게 했다고 한다.(타이타닉 때는 이 제작비라면 내 영화 30편은 만들겠는데!)[16] 이 정도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중에서도 제법 쓴 축에 속한다. 상술한 타이타닉의 절반이다.[17] 150만 달러로 만들어서 3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18] 200만 달러로 만들어서 1,18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19] 200만 달러로 만들어서 1,801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20] 200만 달러로 만들어서 1,834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21] 400만 달러로 만들어서 3,8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사실상 우디 앨런 감독의 최고 흥행작이다.[22] 300만 달러로 만들어서 1,0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23] 900만 달러로 만들어서 3,97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24] 300만 달러로 만들어서 1,183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25] 150만 달러로 만들어서 1,6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26] 640만 달러로 만들어서 4,0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27] 사실상 우디 앨런이 마지막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 이후로는 감독일에 집중하고 있으며 영화에는 별로 출연을 하지 않는다.[28] 2020 제68회 산세바스티안 영화제 개막작[29] 한국 언론에선 흔히 동거녀라고 표현했지만, 둘은 혼인신고는 물론이고 같이 살지도 않았다. 그냥 둘 사이에 애가 있었을 뿐. 그리고 이 사건에 때문에 미아 패로에게 동정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미아 패로도 불륜으로 한 가정을 파탄내는 등 본인도 피장파장이다.[30] 미아 패로도 앙드레 프레빈을 불륜을 통해 얻은 전력이 있다. 도리 프레빈은 둘의 불륜에 열받아 '젊은 여자(=미아 패로)를 조심하세요'라는 곡을 만들어 미아 페로를 대차게 비난하기도 했다.[31] 다만 입증되진 않았지만 로넌의 친아버지가 프랭크 시나트라가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사진을 보면 로넌이 앨런은 별로 닮지 않았지만 시나트라와 똑같이 생기긴 했다. 로넌과 시나트라, 앨런 비교사진 기사[32] 미아 패로의 14명 자식 중에서 사회지도층으로 키운 백인 친자식 4명을 제외한, 해외 입양아 중 약물중독으로 사망하거나 자살한 자식들[33] 사실 80년대 이후 미국 사회에서 소아성애자라는 딱지는 합리적으로 쓰인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비난의 수사로 쓰인다.[34] 비교적 한참 지나서 미아 패로가 밝히길, 프랭크 시나트라가 친부일 수도 있다고 한다. 사실 워낙에 얼굴이 우디 앨런은 하나도 안 닮고, 시나트라와 붕어빵이라서 전부 의심하고 있었기는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혼 후에도 패로와 친한 관계를 유지해서, 순이 사건 터진 다음에 아는 마피아 보내서 손좀 봐줄까라고 했다는 말도 돌았다. (이런 일화가 많지만 정작 시나트라는 자기와 마피아와의 관계를 무조건 부인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으로 알려진 이러한 떡밥으로 인해 타블로이드지의 가십이 굉장했는데, 패로 입장에서 앨런과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던 상황에서 낳은 아들이 알고보니 전전남편과의 관계에서 낳은 아이라면 참 복잡해진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로넌은 트위터로 쿨하게 "여보세요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 모두가 사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잠재적인 아들딸 아니겠어?"라며 위트있게 받아쳤다. 희대의 카사노바인 프랭크 시나트라의 이미지를 적절히 활용해 논란을 종식시킨 것이다. 또한, 프랭크 시나트라의 딸인 낸시 시나트라는 로넌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프랭크 시나트라는 정관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루머가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일 수도 있다'라는 말도 어이없었다고 한다. 현재도 로넌 패로는 DNA 조사를 거부하고 있으며 우디 앨런을 '나의 아버지'라고 말한다.[35] 무려 15살에 대학 졸업을 하고 16살에 예일 대학교 로스쿨에 합격한 영재 출신이다. 수차례 졸업을 미룬 후에 21살에 졸업했다. 어머니의 영향인지 청소년 시절에는 유니세프의 청소년 대변인으로 활동하였고 오바마 행정부에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담당 특별보좌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힐러리의 국무장관 시절에는 세계청년문제 보좌관으로, 그리고 해당 담당부의 총괄자로 활동했다. 2014년부터 1년간 MSNBC에서 Ronan Farrow Daily라는 프로그램도 진행했으며 하지만 시청률 저조로 시즌 1만에 막을 내렸다. 코쿠리코 언덕에서와 바람이 분다의 영어판에서 성우 활동도 하였다. 언급한 활약만 보더라도 나이가 꽤 있을 듯 하지만 겨우 1987년생이다. 한 마디로 엄친아.[36] 다만 근친혼이 금기시되는 이유는 유전학적인 이유기에 유전적으로 남인 입양아들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37] 해석: "즐거운 아버지날 되세요! 아, 우리 가족사이에서는 매형날이라고 부르죠"(...) 미아 패로는 "Boom!"이라는 코멘트와 함께 해당 글을 리트윗 하였다.(현재 트위터링크는 삭제되어서 다른 뉴스 링크로 대체함)[38] 원문: "It's hard because it's a time where people are very fired up, and understandably. Things needed to be stirred up, and so people have a lot of passion and a lot of strong feelings and are angry, and rightfully so. It's an intense time." 2019.9.4 by Rebecca Keegan, Hollywood Report[39] 물론 우디 앨런의 성범죄 의혹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어떤 특정 인물의 윤리성이나 행동의 일관성도 증언의 신빙성 판단에는 중요한 근거이다.[40] 그러나 유죄만 인정했지 죄값은 치르지 않았다. 미국에서 징역 50년을 선고받자 유럽으로 도망가서 수십년째 도피중이다.[41] 이 영화 속에서 우디는 이런 종류의 영화가 예전에도 있었느냐는 극중 인터뷰어의 질문을 받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있었죠. 그 영화는 사실 일본 배우들이 출연한 일본 역사물인데 영어 더빙만 입힌 겁니다."라고 조크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