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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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arkred><colcolor=gold> 호세 카레라스 José Carreras | |
| |
본명 | 주제프 마리아 카레라스 이 콜 Josep Maria Carreras i Coll |
출생 | 1946년 12월 5일 ([age(1946-12-05)]세) |
스페인국 바르셀로나 | |
국적 | 스페인국(1946~1975)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1975~현재) |
직업 | 성악가, 자선 활동가[1] |
활동 | 1954년 ~ 현재 |
신체 | 170cm |
학력 | 바르셀로나 대학교(화학 / 중퇴)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요셉 |
가족 | 아버지 주제프 카레라스 이 솔레 |
[clearfix]
1. 개요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더불어 '쓰리 테너'라 불렸다.동향 출신의 소프라노 몽셰라 카바예와 이탈리아 로비고[2] 출신의 성악가 카티아 리치아렐리[3]와는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기도 했고, 필립스와 EMI, 도이치 그라모폰에서도 많은 음반을 남기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리스 출신의 성악가 아그네스 발차와도 여러 편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호세 카레라스/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음악적 성향
들어가기 전에: 만약 호세 카레라스를 ‘쓰리 테너 중 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면 그의 음악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1990년에 로마에서 시작해 카레라스를 비롯한 세 명의 테너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쓰리 테너 콘서트는 사실 예술성 따위 내다버린 상업 공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괜히 상업 공연이 아닌 것이, 쓰리 테너의 성공과 함께 카레라스의 인지도는 급상승하였고, 동시에 세 명 중 가장 기량이 떨어지는 가수라는 인식이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쓰리 테너 콘서트는 카레라스가 백혈병 투병으로 인해 기량이 크게 감소한지 2년 뒤에 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혈병에 걸리기 전에도 카라얀의 주문에 따른 무리한 활동으로 인해 목에 무리가 온 상태였다. 그의 화려한 전성기 시절의 노래를 감상할 수 있는 오페라 녹음들은 대중성이 떨어지고 접근성이 매우 낮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백혈병으로부터 회복한 이후 기량이 감소한 상태에서 쓰리 테너 콘서트에서 부른 곡들을 그의 음악의 전부로 알고 있다. 쓰리 테너 콘서트에서 볼 수 있는 카레라스의 노래들은 그의 실력의 전부가 아니며 그에게는 누구보다도 빛났던 전성기 시절이 존재했음을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리릭 테너로 분류되는 목소리지만 음색 자체는 스핀토 만큼이나 어둡다. 그러한 속성이 목소리를 너무 쨍하지 않도록 하여 화려하고 풍부한 음색을 만든다. 오래 전부터 평론가들은 이러한 그의 목소리를 ‘벨벳 같다’라고 표현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음색에 독자적인 해석을 더한 열정적이고 호소력 짙은 노래와 연기로 유명하다.
그의 리릭 테너로서의 성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랑의 묘약 중 ‘Una furtiva lagrima’ |
20세기 극후반, 기량이 쇠퇴한 이후 쓰리 테너로의 활동으로 인해 3인 중 가장 실력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카레라스의 전성기는 70년대 초중반~중후반으로 상당히 짧지만, 그 기간동안은 잠시지만 세 명 중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설명할 조기 기량 쇠퇴 이후의 후반기 활동으로 인해 그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가지는 사람들마저도 젊은 시절 그가 가지고 있었던 위대한 테너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은 누구보다 뛰어났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반이 76년에 녹음된 토스카이다. 또, 77년에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녹음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는 3옥타브 미 플랫을 안정적으로 내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다. (아래 영상의 10분 36초)
일반적으로 그의 기량이 쇠퇴한 것은 백혈병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뿐만은 아니다. 카레라스는 카라얀의 지도 하에 목소리에 무리를 줄 수 있는 배역을 너무도 많이, 그리고 자주 맡았다. 무리해서 크고 강력한 소리를 내려 한 것이 그의 목을 조기에 해쳤다. 그러나 잃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스핀토 역할을 위해 목을 해쳤지만, 그 결과 잠시동안(목을 해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목이 완전히 다치기 전까지) 그의 풍부하고 화려하고 또 서정적인 음색과 드라마틱한 퍼포먼스가 결합하여 다시 보지 못할 해석으로 스핀토 역들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러한 행위는 성악가의 경력에 치명적이기에 아무도 하지 않지만, 카레라스는 그렇게 해서 짧은 몇 년간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최고의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비록 목소리에 무리가 오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 시기의 카레라스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리리코-스핀토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76년~77년에 녹음된 그의 카바라도시는 진정 최초이자 최후로 남을 전설적인 해석이다. 그중에서도 아래 두 곡은 정말 최고의 녹음이니 꼭 들어보기 바란다.
1976년 녹음된 토스카 중 ‘Recondita armonia’ |
1977년 녹음된 토스카 중 ‘E lucevan le stelle’ (4분 36초부터) |
대표적으로 초기 베르디 작품들과 카르멘의 돈 호세,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라 보엠의 로돌포는 그가 누구보다 가장 잘 연기했다고 알려진 배역들이다. 아래 영상은 그가 1977년에 부른 라 보엠의 ‘Che gelida manina’이다. 역시 조회수는 저조하지만 그의 전성기 시절 최고의 기량을 볼 수 있다.
백혈병 치료 이후 성량이 줄면서 기량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가를 적시게 했다. 특히 복귀 이후 그는 포르티시모에서 부드럽게 피아니시모를 표현하는 해석을 자주 선보이곤 했다. 당장 밑의 50주년 바르셀로나 앵콜을 뒤 관객들을 향해 불러주는 노래 마지막 부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 투병 전에도 다른 테너들이 카르멘의 ‘La fleur que tu m'avais jetée’에서 기량을 과시하기 위해 피아니시모의 고음을 포르티시모로 표현할 때, 그는 동요하지 않고 비제가 의도한 대로 오페라의 맥락에 맞는 표현을 하여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피아니시모 표현은 그의 미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섬세한 감정 연기에서 빛을 발한다. 그가 쓰러지기 직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했던 카르멘(1986년 공연)은 그의 연기와 연주의 진면목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명반이다. 로맨틱하면서도 비굴한 음색을 요구하는 카르멘의 돈 호세와 같이 불쌍한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을 경우, 그의 목소리의 진가가 멋지게 드러난다.
카르멘 중 ‘La fleur que tu m'avais jetée’ |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인데, 카레라스는 성악 훈련을 시작할 때 바리톤으로 시작했었다. 그래서인지 극고음에서 파바로티와 같은 편안함을 주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부분이 클라이막스의 고음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딱히 단점으로 보지는 않는 편이다. 적어도 전성기 동안에는 그랬다.
2000년대 이후에는 오페라 공연보다는 주로 연주회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 일본에서의 베르디 에르나니 공연을 마지막으로 오페라에는 출연하지 않던 중 무려 12년 만인 2014년에 그에게 헌정된 오페라 크리스티안 콜로노비츠의 '엘 후에즈'에 출연하였다. 다음 링크에서 전체 공연 실황을 감상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sRcHBJXLFY&t=5398s 초연 후에도 2017년까지 주연으로 출연했으며 이후에는 일본, 호주 등에서 비공개 리사이틀을 주로 다니거나, 지역 행사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4. 내한
외국 성악가로서는 드물게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4]인지 자주 내한해서 콘서트를 가지는 편.[5]국내 연주를 자주 왔던 몇 안 되는 성악가로, 한국 출신 성악도들에게도 호의를 보이고 있다. 한국에 대한 좋은 감정이 있는 듯. 파바로티와 도밍고의 내한 횟수가 7회 이하인데 비해 카레라스는 15회 이상이다. 아무래도 박수와 브라보, 환호소리를 제대로 선사해주는 곳이 한국이기 때문인 듯하다. 카레라스 고향과도 비슷한 국가이고. 연주회에서 몇 차례 앵콜을 받으면, 그중 한 곡은 무대 뒷쪽 좌석 방향으로 돌아서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들을 위해 한 곡을 불러주는, 좋은 매너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17년 3월 4일 공연에서도 첫 번째 앵콜곡은 합창석 자리를 보고 불러주어서 노래시작과 동시에 환호와 박수의 도가니가 되었고, 노래를 마치자마자 합창석은 물론 일반석에서도 기립박수와 환호가 들렸다.
해당 영상... chitarra romana 로마의 기타
바르셀로나 데뷔 50주년 앵콜에서도 뒷 관중들을 향해 불러주었다. 카레라스의 무대 매너를 확실히 보여준다.
노래 시작할 때 뒤를 부드럽게 돌아보는 것이 백미. 1분 13초부터 볼 수 있다. 마치고 전체 기립박수를 받았다.
1993년 2월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4000여 석의 당시 우리나라 가장 많은 좌석을 가진 공연장에서 4000여 명의 기립박수를 받은 것으로 아주 유명했다. 이 공연은 mbc에서 방영되었다.
본 공연
앵콜 공연
다만, 2014년 내한 연주회[6]에서는 11월 23일자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준비하던 중, 급성 후두염과 감기로 인해 공연을 취소했는데, 언론에서 자극적인 기사로 이를 비난하며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당시 공연 포스터 자체가 "전설을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식으로 홍보했기에 그의 생전 한 번 더 공연을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듯. 토요일은 공연을 했는데, 공연 시작 직전 안내 멘트로 '호세 카레라스씨가 감기 걸렸으나 최선을 다해 부른다고 관객의 양해 부탁드립니다'가 나왔다. 공연 도중에도 계속 코나 입주변을 손수건으로 닦기도 했다. 언론에선 토요일 공연은 애기도 안 하고 일요일 공연취소에 대해서 매우 신랄하게 까댔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게 주최측에서는 일요일 공연을 무리하게 진행하려는 의지로 관객들을 공연장에 입장시켰고, 입장한 관객들은 약 30분 동안이나 주최측의 별다른 설명없이 기다리기만 하였다. 알고보니 그 당시에도 호세 카레라스는 병원에 있었던 모양. 추후에 일요일 공연을 예매한 관객들에게는 추가로 10프로를 더 환불해 주는 걸로 일단락됐다.
2017년 3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세계투어 공연의 일환으로 한국에서도 공연할 계획이 전해졌다.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번이야말로 그를 무대에서 접할 마지막 기회가 될듯. 이 투어는 서울이 마지막이라고 알려졌다. 16년부터 시작한 그랜드 월드 파이널 투어를 유럽부터시작해서 마지막 한국 서울에서 공연할거라고... 알려졌지만 터키에서도 하는 걸 보니 더 계약이 된 듯 하다.
2017년 3월 4일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는 무려 앵콜만 6곡을, 커튼콜만 4번 이상을 보여주었다.(확실친 않다. 그렇지만 횟수는 물론 무대에 있어준 시간이 엄청 길었다.) 1부에서는 아끼듯이 노래를 불렀으나 2부에서는 클래식 매들리부터 뒤를 생각않고 열창했다. 다만 고음이 힘들기에 팔리아치는 고음은 1키 내렸고 브린디시에서는 마지막 부분에선 소프라노에게 넘겨주었다. 그렇지만 다수의 공연 후기와 기사에서 보듯이 고음만[7] 안 나왔을 뿐 나머지에서는 마에스트로, 3대 테너,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카레라스가 옛날부터 즐겨 불렀던 Cardillo : Core 'ngrato는 정말 잘 표현해주었다. 마지막 인사 중에 사진 찍고 있는 앞좌석 관람객에게 권총?꺼내는 장난도 하고 장사익으로부터 받은 꽃다발에서 장미 한 송이는 옆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도 선사하는 듯. 14년 11월 22일 공연과는 다르게 여러모로 컨디션 관리를 잘 했고, 한국 관람객들의 열띤 호응과 박수에 공식적인 마지막 무대를 세계를 호령했던 테너로서 마무리했다. 무엇보다 이날은 마이크를 쓰지 않고 콘서트홀이 떠나가게 열창했다. 2부 후반에선 매 노래와 커튼콜마다 전원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날 공연은 2500여석 좌석 가운데 2400여석이 넘는 관중이 있었고, 2100여석의 일반판매석이 매진되었다고 한다. 장비 등으로 인해 관람이 여의치 않은 자리와 초대석 일부를 제외하면 가득 찼다.
더불어 도밍고가 그리운 금강산을 내한 공연 때 자주 불렀다면, 카레라스는 공연에서 부르진 않았지만 역시 한국노래를 불러서 녹음한 적이 있다.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노래이다.
[1] https://fcarreras.org/en/[2] 베네치아 지방의 일부이다.[3] 심지어 리치아렐리와는 연인관계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설명들 참조.[4] 실제로 인터뷰에서 한국은 자신의 고향과 굉장히 비슷해서 친숙하다고 얘기했다.[5] 단, 2011년 11월 23일,24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내한공연은 취소되었다. 공연 주최사인 애셋 &밸류 인베스트 그룹(Asset & Value Investment Group)의 사정 및 부가적인 문제가 그 이유였다고...[6] 플라시도 도밍고의 연주회와 겹친 데다 최고가 티켓 값이 44만원에 달해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참고로 파바로티가 150만불, 도밍고가 135만불 카레라스가 80만불 정도이며 3태너 합동 땐 각자가 10억원의 게런티가 있었다. 모든 콘서트가 저 게런티는 아니다. 보통 저 당시에 잘나가는 태너들은 1억 내외의 게런티를 받았다. 파바로티가 90년대에 내한했을 땐 30만불 정도 받았다. 물론 평소보다 게런티를 무척 적게 받은 계약이었지만 21세기에 와서 이 게런티를 받는 테너는 없다. 오직 3대 테너만 가능했다. 더군다나 3대 테너 공연을 하면서 합동으로 공연시에 게런티가 더 주어지는 경향이 있다. 더하여 이 3명 모두 전용기가 있다. 서울 3태너 공연 때도 3명 모두 전용기를 탔다. 서울 3태너 공연시 3테너에게만 30억의 게런티가 있었다. 정확히는 3사람에게 2001년 당시 324만불이 게런티였다. 당시 한국 3대 테너 공연 최고가는 25만원으로 당시 역대 최고 표값이었다. 그런데 같은 공연의 시카고라던지 일본의 공연값이랑 비교하면 매우 저렴했다. 최고가가 일본은 69만원, 미국은 75만원 수준이다.... 저 게런티가 20세기 금액이다. 21세기에 조수미가 1억원 정도이며 안나 네트렙코는1억4천만원 수준이다. 그 20세기 당시에 3-4-5억 인데 지금에서야 몸값이 많이 낮아졌어도 티켓값이 비싼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7] 하지만 전체 프로그램 중 2곡 정도(Cardillo : Core 'ngrato, Leoncavallo : Pagliacci - Vesti la giubba)에서 한순간 고음이 시원하게 나오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