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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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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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블라디미르 사모일로비치 호로비츠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1] |
출생 | 1903년 10월 1일[구력] |
러시아 제국 키예프 | |
사망 | 1989년 11월 5일 (향년 86세)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 |
국적 |
(1903-1917)
(1917)
(1917-1928)
(1922-1928)(1928-1989) |
레이블 | |
직업 | 피아니스트, 작곡가 |
배우자 | 완다 토스카니니 호로비츠 (1933년 결혼) |
자녀 | 소니아 토스카니니 호로비츠 (1934~1975) |
수상 |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클래식 연주 상 - 독주자 부분[3] (1968, 69, 87)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기악곡 연주자 연주 상[4] (1979, 89)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기악곡 연주자 연주 상[5] (1963, 64, 65, 66, 72, 73, 74, 77, 79, 80, 82, 88, 91, 93)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클래식 앨범 (1963, 66, 72, 78, 87, 88) |
Prix Mondial du Disque (1970) 그래미 평생 공로상 (1990) 왕립음악원 명예회원 (1972) 울프 재단 음악상 (1982)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85) 이탈리아 공화국 훈장 (1985) 대통령 자유 훈장 (1986) | |
서명 |
1. 개요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미국계 피아니스트. 1903년생으로 1920년대에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이후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2. 생애
유대계인 사무일 호로비츠와 소피아 보딕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여 6살 때부터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첫 스승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소피아였고, 세르게이 타르놉스키 아래에서 제일 오래 공부하였다. 그 결과, 키예프 음악원에 겨우 9세에 입학. 삼촌과의 연을 통해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앞에서 연주하고 재능있다는 평가를 들은 적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 사사하였는데, 이 때 대부분의 기교나 스타일은 완성기에 접어들어, 블루멘펠트는 "피아노에 관해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서유럽으로 떠날 때 블루멘펠트는 "너는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니 어떤 스승도 모시지 말라"고 했다(!). 다만 굳이 찾아야겠다면 베를린에 있는 페루초 부소니를 찾아가라고 했다.[6]그가 가장 존경했던 스승인 블루멘펠트의 영향과, 그의 우상이였던 라흐마니노프의 영향을 받아 본래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를 겸하는 라흐마니노프와 리스트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지만 이후 러시아 혁명 때문에 집안이 쫄딱 망하면서[7] 생계를 위해 피아니스트로서, 소년가장으로 데뷔하게 된다. 소년 가장이라고 하지만, 이 때 양친은 멀쩡히 생존. 호로비츠는 훗날 이 시절에 무슨 정신으로 콘서트 준비를 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회고했다. 당시 준비한 프로그램은 총 열 개. 두 시간 길이 기준이다. 2년간 수십번의 공연을 했는데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3회), 당시 러시아 내전 직후의 국내 사정 때문에 공연비를 자주 빵, 초콜릿, 버터 등으로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러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중 유럽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슈나벨과 호로비츠의 두번째 매니저인 메로비치의 도움을 받아 유럽으로 떠나게 되고, 1925년에 함부르크에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대단히 호평받았다.
이때부터 라벨, 풀랑크 등의 작곡가와도 친해지고 루빈스타인, 코르토 등과도 연을 쌓으며 음악 인맥을 넓혀갔고, 당시 그의 매니저였던 메로비츠의 세 음악인, 호로비츠, 밀스타인, 피아티고르스키는 매우 친한 사이를 유지했다. 또한 코르토에게는 수차례 레슨도 받기도 하였다. 이후 1928년 미국 데뷔도 하게 되고 우상이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과 만나면서 음악적으로 한층 성숙하게 된다. 1933년에는 음악적 능력이 있던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 토스카니니 호로비츠와 결혼하고 딸 소냐를 얻기도 했다.[8] 당시 그는 동성애자 의혹이 있었고 실제로 동성애 기질이 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를 보면 양성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 연주를 이어가던 그는 건강에 대한 불안, 과도한 스케줄과 평생 가는 우울증 때문에 콘서트를 중간중간 쉬곤 했었다. 1936년에는 결혼생활의 피로와 맹장수술로 인해 첫 휴식기가 있었고, 특히 1953년부터 1965년까지 12년간 한 번도 콘서트를 열지 않은 최장 기간의 은퇴가 있기도 했다. 첫 2년간은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1년간 피아노에 손도 대지 않으며 피아노 연주 자체를 포기하려고도 했었다고. 그래도 RCA에서 음반 제작은 비교적 꾸준히 했고, 이는 아내 완다의 도움과 함께 그가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 카네기 홀에서의 복귀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1965년 5월 8일에 카네기 홀에서 열린 복귀 리사이틀은 20세기 클래식 음악 역사에 길이 남는 이벤트였다. 이틀 전부터 카네기홀 안에 있는 매표소에서 서쪽 57번가로 이어져 6번 도로 모퉁이로 내려가서 모퉁이를 돌아 다음 블록까지 줄을 서 있었다고 한다. 완다의 회고에 따르면 아예 매트리스를 들고 와 잠을 지새운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호로비츠는 표를 사려는 이들을 위해 커피를 보내줬다고 한다. 표는 인터넷 예매 등이 없던 당시로써는 매우 빠른 시간인 2시간만에 매진돼버렸다. 이는 1966년 4월 17일에 열린 1년만의 복귀 연주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때는 호로비츠가 도넛을 보내주었다.
1965년 복귀 이후 호로비츠는 아주 가끔씩 공연을 열었으며, 공연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다가 1968년 후반부터 이어지던 악평 때문인지 1969년, 팬들에게는 전설적으로 여겨지는 뛰어난 보스턴 공연을 이후로 1974년까지 콘서트를 열지 않는다. 하지만 1974년 복귀 이후 그는 거의 젊은 시대에 버금가는 힘든 투어 스케줄을 계속하여 이어갔으며, 1978년 그의 미국 데뷔 50주년 ‘골든 쥬빌리’에는 라흐마노프 협주곡 3번을 연주하며 25년만에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하였다. 노년의 라흐마니노프 3번 협주곡 연주는 당시에 많은 비평을 받았던 연주이지만 관객녹음만이 남아있는 4월 30일 연주는 매우 훌륭하다는 평을 많이 받는다. 1983년 의사가 처방한 항우울제로 인해 심각한 연주상의 문제를 겪어 잠깐 쉬긴 했지만, 2년 만에 화려하게 복귀해 최고로 무르익은 노장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하기도 했다. 쉬면서 제자들을 받을 나이인 80세 이후에도 음반사와 전속계약까지 맺어가며 녹음활동 또한 계속 이루어졌다. 마지막 연주 여행은 1986년~1987년에 있었으며 마지막 리사이틀은 1987년 함부르크에서 있었다. 그 이후로도 녹음 활동을 계속하였고, 1989년에 머리 페라이어 부부의 저녁약속을 앞두고 아내 완다와 이야기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음반은 RCA, CBS와 도이치 그라모폰 등에서 나와 있다. RCA의 녹음들은 주로 20~50년대, 그리고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CBS는 60년대 초반~70년대 초반, DG(도이치 그라모폰)에서는 1985년부터의 극후기 레코딩이다. 그의 마지막 녹음은 소니에서 나왔다. 계약은 CBS와 했고 녹음도 그들이 하였으나 CBS가 호로비츠 사후 소니로 편입되며 소니에서 출판되었다. 1930-50년대 RCA와 계약을 맺던 HMV (EMI 혹은 그라모폰 컴퍼니로도 불린다)에서 호로비츠가 유럽 투어를 할 때 마다 대신 레코딩 세션을 만들어 레코딩을 남겼다. https://www.youtube.com/watch?v=fRJ_etlzUBE
RCA는 초기여서 음질이 좋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호로비츠가 RCA의 음질과 악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기록도 꽤 있다. CBS는 스테레오 시절 이후라 좋은 음질을 보여준다. DG 판은 정말정말 손쉽게 구할 수 있는데 모스크바 실황연주와 그 이후의 음반들로서 전성기의 기교보단 노장으로서의 훌륭한 통찰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그가 소니에서 남긴 마지막 앨범또한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녹음 중 하나이다.
3. 연주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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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데리크 쇼팽, 발라드 1번 g단조 1968년 2월 1일 카네기홀 실황 |
20세기의 뛰어난 피아니스트들 중 한 명인 호로비츠는 기교와 표현력 모두 균형을 잃지 않는 연주를 보여준다. 그는 작품들을 '해석'한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색채를 입히는 연주자다. 개성이 너무 강해서 그가 친 모든 곡들은 마치 도장을 찍은듯이 호로비츠라는 걸 알기가 쉽다. 다만 그의 손에 거치는 모든 곡들에 그 특유의 다이내믹과 페달 사용법이 묻기 때문에 원작자의 의도에 충실해야하는 몇몇 작곡의 연주는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 그의 쇼팽이 대표적인 예시. 절제미와 페달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대의 쇼팽 해석과는 다른, 페달없이 메마른 사운드가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 물론 뛰어난 테크닉과 강렬한 색채 덕분에 "호로비츠의 연주"로서 들을 가치는 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이 특이한 색채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는 그의 피아노에 대한 논란이 있다. 호로비츠는 1925년 서방에 진출했을 때 많은 피아노들을 연주하는 과정에서 스타인웨이를 본인의 피아노로 선택했다. 당시에는 스타인웨이 회사에서 피아노를 빌려서 사용하다가, 1933년 호로비츠에게 결혼선물로 스타인웨이가 제작해준 피아노 또한 연주에 자주 사용되었다. 이 외에도 호로비츠는 약 5개의 피아노를 추후 구매하고 연주에 사용하는데, 이는 어떠한 특별 제작 및 특별 처리를 거치지 않은 1900년대 초반에 제작된 (결혼선물 피아노 외에 전부 호로비츠 전에 다른 주인이 있었던) 피아노였다. 그의 조율자가 쓴 책을 보면, 호로비츠가 요구했던 여러가지 조율적 테크닉들은 다른 피아니스트들 또한 자주 요청했던 흔한 요청이였으며 그의 피아노가 좋은 음색을 가진 것은 그저 그가 좋은 피아노를 잘 고르고 선택하기 때문이라 밝혔다.
호로비츠의 트레이드 마크는 크게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옥타브처럼 난해한 패시지들을 장난처럼 가볍고 깔끔하며 빠르게 넘겨버리는 테크닉, 속삭이는 듯한 피아니시모부터 천둥이 내려치는 듯한 포르티시모까지, 십여개 단위로 쪼갠듯한 압도적인 셈여림 조절, 이러한 다이나믹 조절 능력, 각 성부의 분리감, 호로비츠 특유의 다채로운 터치와 절묘한 페달링이 결합되어 내는 화려한 색채감과 음색. 숙련된 거장 피아니스트들도 힘들어하는 패시지들을 페달없이 여유있게 스타카토로 통통 튀어 넘기는 걸 보면 정말 피아노를 가지고 노는 듯한 느낌을 준다.
러시아의 대표적이라 할 만한 피아노 음악 작곡가들, 즉 스크랴빈,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를 레코딩한 호로비츠의 연주는 지금까지도 독보적이다. 특히 리스트 곡에 대해선 화려함과 박력으로 전문가와 일반 대중들에게 크게 환호받았다. 이 외에도 50년대까지는 대중들에게 자신만의 기교적인 면모를 어필하기 위해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몇곡에 붙인 자신만의 카텐차, 소품 편곡, 수자의 '성조기여 영원하라'에 붙인 매우 화려하고 기교적인 편곡, 카르멘 변주곡 등이 레퍼토리에 있었고, 소품을 좋아하여 말년에는 표현력이 드러나는 슈만의 소곡, 모츠코프스키의 소품곡, 쇼팽의 마주르카, 스카를라티 곡 등을 자주 연주하기도 했다. 특히 스카를라티 곡에 대한 재발견으로 주목받기도 하고, 말년에 그가 연주한 슈만의 소품곡 중 어린이 정경의 트로이메라이는 그의 라스트 트레이드마크로 그 아름다움과 색채감에 있어서 최고의 절찬을 받는 곡이기도 하다.
호로비츠는 연주할 때 특이한 손가락 주법을 사용했다. 이는 알려지길 호로비츠의 세번째이자 호로비츠가 가장 존경했던 스승 블루멘펠트로부터 지시받은 손가락 주법을 호로비츠가 재해석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때문에 그의 누이이자 또다른 블루멘필트의 제자인 라제냐 호로비츠의 제자들 그녀의 손가락주법이 호로비츠와 비슷한 모양이였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것이 당대의 유럽 주법과는 상당히 달랐기에 당대의 피아니스트들은 그의 테크닉을 제대로 평하길 곤란해 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다르게 곧게 편 손가락으로 연주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20-50년대에는 호로비츠의 테크닉이 당대 피아니스트, 아니 역대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테크닉 중에서도 가장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정도로 매우 뛰어난 테크닉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지금와서 보면 그의 연주법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호로비츠의 주법은, 조셉 레빈에 의해 널리 알려진, 당겨치는 손가락 주법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보면 무리가 없다. 전통적인 연주법은 손가락을 구부려서 밀어치는 방식인데, 20세기 초에 조셉 레빈은 이와 다르게 손가락 전체를 그대로 당기듯 내려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연주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는 현대 피아니스트들에게 기본적인 피아노 주법이 되었다. 어찌보면 호로비츠는 이 효과적인 주법을 과거부터 잘 활용한 피아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3.1. 1920~1950년대
리스트-파가니니 연습곡 2번 (rec. 1930) | 카르멘 변주곡 (rec. 1947) |
브람스, 왈츠 Op.39 No.15 (rec. 1950)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rec. 1943) |
생상스-리스트-호로비츠 편곡 죽음의 무도 (rec. 1942) | 수자-호로비츠 성조기여 영원하라 (rec. 1948)[9] |
프로코피예프, 토카타 (rec. 1930) | 도흐나니, 6개의 콘서트 에튀드 Op. 28, No. 6 (rec. 1928) |
스크랴빈, 소나타 Op.68 (rec. 1953) | 클레멘티, 소나타 Op.34 No.2 (rec. 1954) |
데뷔 당시 뛰어난 테크닉으로 인정, 칭송받았다. 당연하지만 이 시기의 가장 확연한 차별점은 젊은 호로비츠의 신체적 능력인데, 특히 가장 젊었던 30년대의[10] 녹음들은 테크닉도 테크닉이지만 기계적일 정도로 오차없는 정확도를 자랑한다. 깔끔한 음질의 70-80년대의 녹음에 먼저 익숙한 팬들이 처음 접했을 때 바로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인데,[11] 후기 호로비츠의 연주에게 인간미를 느끼게 할 정도로(!) 사기적인 테크닉, 힘, 정확도를 모두 갖춘 시기였다.
옥타브 연타나 빠른 속도의 화음 패시지 등의 기교가 가장 단단했었는데, 40년대 초반에 녹음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연주들을 들타보면 3악장 피날레 옥타브 난사 부분에서 초당 10회 꼴로 건반을 두드리는 초인적인 손목힘을 보여준다. 그 와중에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하듯이 페달을 통해 음을 흐리는 요령 하나 없이 옥타브 전체가 총을 난사하듯 또박또박 들린다.
1920~50년대의 그는 우상으로 섬겼었던 라흐마니노프 풍의 전통을 많이 물려받았다. 즉, 직선적이고 박력있으며 모든 부분에서 깔끔하고 완벽함을 이상으로 삼았다 할 수 있으며 그의 스타일은 그가 가진 완벽한 테크닉과 조화를 이루면서 더욱 찬란히 빛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랬기에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권위자로서 작곡가에게까지 인정받았고[12] 심지어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연주에 너무 감명받았는지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한 편집권을 호로비츠에게 맡겼다.
여러 녹음에서 보통 연주 속도를 늦출 가장 까다로운 부분에서 오히려 속도를 더 높여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걸 보면 경악스러울 정도이다(...) 이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1942년에 녹음된 <죽음의 무도>다. 그리고 단연코 압도적이다. 클라이막스는 여타 악명높은 곡들에 비해 기교적으로 난해하지 않지만 피아니스트들이 매우 힘들어 하는 부분이다. 대다수의 경우 페달에 많이 의존하고 간간히 템포를 늦추며 힘조절을 하는게 보통인데 호로비츠는 페달을 거의 쓰지 않고도 모든 음을 하나하나 뚜렷하게 강타하고, 피날레에서는 힘이 빠지는 기색을 보이기는 커녕 더욱 앞부분보다 템포를 훨씬 더 올려서 연주를 한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힘의 한계에 달해서 페달로 뭉개기 시작하는 양손 옥타브에서는 마치 건반이 튕겨져 나오는 듯한 소리를 내고(그것도 매우 빠르게), 이것마저도 모자라 원래 왼손은 그냥 코드이고 오른손만 옥타브로 연주하는 클라이막스를 왼손까지 옥타브 연타가 생기게 직접 바꿨다. 이 모든것을 아예 페달을 안쓰고 눌러 찍는 초인적인 힘을 보여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녹음에서는 당시 27세였던 호로비츠의 힘과 정확도가 인상적이다. 특히 33:30초에 천둥처럼 울리면서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포르테시모의 클라이막스 코드는[13] 섬뜩할 정도의 테크닉에 대한 방증이자, 전성기 시절의 트레이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33:36초의 양손 옥타브 하행은 저게 어떻게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의심이 갈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다.
심지어 이런 전설적인 라흐마니노프 3번 녹음또한 호로비츠는
당시에 레코딩사가 본인에게 연습 및 리허설 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았고 급박한 일정에 연주하다보니 평소에 본인이 연주하던 연주보다 훨씬 부족한 연주였다고 말했다. 그의 최고의 라흐마니노프 연주는 아쉽게도 아직까지 앨범으로 나오지 않은 1944년 4월 23일 연주로 많이들 평가한다.
그가 워낙 옛날 사람이다 보니 이러한 초기 녹음 자체가 많이 남지 않아있고, 남은 것 자체도 음질이 열악하다는 점은 상당히 아쉬운 점. 이때는 LP도 있기 이전어어서 SP 음반에 녹음을 했고, 녹음비 자체도 매우매우 비쌌다. 그래서 흔히 죄르지 치프라등의 기교파 피아니스트들과 테크닉 면에서의 비교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녹음조차 되지 않은 리스트의 돈 주앙의 회상이나 스페인 랩소디, 단테 소나타 등 호로비츠의 초기 기교적인 레퍼토리들을 고려하면 비교 자체가 힘들다.
3.2. 1960년대~1970년대
스크랴빈, 에튀드 Op.8 No. 12 (rec. 1968) | 스카를라티, 소나타 K.466 (rec. 1964) |
스크랴빈, 시곡 Op.32 No.1 (rec. 1965) | 리스트, 오베르만의 골짜기 (rec. 1966) |
쇼팽, 발라드 1번 (rec. 1968) | 라흐마니노프, 에튀드 Op.39 No.5 (rec. 1975) |
1965년, 12년만의 카네기 홀 복귀 이후로 그는 두 번째 전성기를 맞는다. 특히 복귀 후 잠시 콘서트 휴식이 있기 전인 1969년까지는 매우 인상적인데, 이때 쇼팽 발라드 1번, 스크랴빈 에튀드 8-12,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 등의 전설적인 녹음을 한꺼번에 남기고 콘서트 자체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직 잃지 않은 젊은 시절의 테크닉과, 12년의 공백 사이에 매우 성장한 음악적 감각의 결합, 그리고 LP의 발명으로 인한 고음질의 녹음기술이 폭발적인 시너지를 이루어내며 엄청난 명연들을 쏟아내게 된다. 특히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젊은 시절과 비교해봐도 압도적인 다이내믹 폭과 음 자체에 대한 조절[14]은 말년까지 이어지는 그의 음악능력의 초석이 된다.
1970년대는 약간의 과도기적인 시기이다. 그의 전체적인 음악성향의 변화를 살펴보면, 60년대에서 80년대로 거쳐가며 레퍼토리와 연주 스타일이 상당히 변했는데, 70년대의 연주는 그 사이에 껴있어 다소 혼란한 느낌을 준다. 이 시기의 그의 해석은 과장된 셈여림 등의 신경질적인 면이 상당히 돋보이곤 한다. 이는 곡의 자유스러움이 결여되고 불안정감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너무나 자세히 곡을 쪼개놓아서 전체적인 흐름 자체를 절단낸다는 것이다. 이 시기때 연주된 그의 쇼팽 레퍼토리를 들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한편 레퍼토리 자체는 60년대와 비슷한데, 같은 곡의 연주에 있어서 속도와 테크닉은 60년대보다 다소 뒤쳐지지만 새로운 해석의 방향을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의 연주는 악마적인 저음과 함께 과격하면서도 신경질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 특징으로, 1979년에 몇 번 연주한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의 연주를 들어보면 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39-5의 1962년과 1975년 연주를 비교해서 들어보는 것도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전자는 물 흐르는듯한 깔끔함이라면 후자는 다소 걸쭉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음색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
3.3. 1980년대
스크랴빈, 에튀드 Op.2 No.1 (rec. 1986) | 로베르트 슈만, 트로이메라이 (rec. 1986) | |
리스트, Au Bord d'une Source (rec. 1985) |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 3번 (rec. 1987) | |
슈베르트, 즉흥곡 D. 899 No.3 (rec. 1987) | 모차르트, 론도 K. 485 (rec. 1989) |
그러나 항우울제 복용을 중단한 그는 아내 완다의 도움과 함께 다시 한번 우울증을 이겨낸다. 1985년에 2년 만에 복귀한 그는 과도기를 완전히 끝내고 말년의 스타일을 제대로 정립하는데, 우선 예전과 같은 과격한 스타일 자체를 버리면서도 이전부터 뛰어나게 평가받던 음색에 대한 조절을 살려 가히 피아노 음색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조절이라고 할만한 스타일을 가지게 된다.[15] 위의 모차르트의 론도 등에서 얼마나 깔끔하면서도 구성감 있는 연주를 해내는지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16] 또 이전 레퍼토리를 더이상 연주하지 않는 대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스카를라티를 상당히 발굴해내며 본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새뢰 성공적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1986년에는 61년 만에 조국인 소련에서 연주를 가지게 되는데 당시의 연주회는 미-소 양국간의 정치 문제와도 연관될 만큼 단순한 연주회 외에도 많은 의미를 가졌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취임 이후 냉전이 점차 완화되는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소련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을 한 피아니스트가 다시 소련으로 와 공연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 호로비츠는 1987년에 콘서트를 끝낼 생각이었다고 했고[17] 지금이 아니라면 다신 그곳에서 연주회를 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모든 부담을 감수하고 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연주회에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통해 관객 여럿을 눈물 흘리게 만든 점은 매우 인상적.
4. 이모저모
-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모티브다.
- 특유의 테크닉으로 난곡들을 소화했지만, 건반 장10도를 짚을 정도로 손 크기는 다소 평범했다.
- 호로비츠의 아버지는 그가 징집되어 손가락을 잃을 것을 염려해 그의 나이를 1년 어리게 조작했다. 이 때문에 오래된 자료를 찾아보면 그의 출생연도가 1904년으로 기재된 곳이 많다.
- 졸업연주로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2번과 리스트의 <돈 주앙의 회상> 등을 쳤는데 키예프 음악원 역사상 처음으로 심사위원들이 졸업생 애송이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 아내 완다와의 사이에 소니아(Sonia)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1934년생이었으나 1975년에 자살했다.[18]
- 아내의 요리솜씨가 매우 형편없어서 매번 화를 삭혀야 했다고 한다. 덕분에 피아노 칠 시간이 더 생기는 셈치고 체념했다고 한다.
- 디누 리파티는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브람스 왈츠 작품 39-15를 듣고 '호로비츠는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다'라는 극찬을 했다. 들어보기
-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도 자신의 악기 인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공연을 다니는데 피아니스트는 왜 못하냐면서 3-40년대 이후 거의 모든 공연에서 자신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면서 콘서트를 했다. 이는 당시에는 꽤 흔한 일이였다. 요제프 호프만또한 본인의 피아노를 모스크바까지 들고갔으며, 콘서트장에 피아노가 모두 잘 배치되어있는 현재와는 다르게 프랑스 전체에 스타인웨이가 겨우 2대밖에 배치되지 않았던 힘든 시기에 그런 자금력과 유명세를 가진 연주자라면 대부분 본인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선택했다. 또한 호로비츠는 1940년 이후 거의 미국땅을 떠나지 않았기에, 이런 피아노의 운반 또한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19][20] 그가 가지고 다니는 피아노가 5-7대였으며, 이는 모두 호로비츠를 위해 특별 제작된 것이 아닌, 몇대는 호로비츠보다도 나이가 많은 올드 뉴욕 스타인웨이였다. 어떠한 특별한 제작이 첨가되지 않았다고 그의 조율사는 수차례 밝혔다.
- 그의 어록들을 보면 그가 그의 미스터치를 별로 신경쓰지 않은것 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본인 또한 본인의 미스터치를 상당히 신경썼다.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이름 불렸던 그 또한 노년이 되니 미스터치가 많아지자 이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으며, 오히려 미스터치에 더 본인이 신경을 많이 쓰기에 외부에게 그것을 덜 노출하고 싶은 경향으로 저런 어록들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콧구멍이 굉장히 크다- 조르주 비제의 카르멘을 피아노로 편곡하기도 했다.[21]
5. 어록
타악기처럼 두들기기만 하는 피아노 소리는 지루하다. 내가 콘서트에 갔는데 누가 그런식으로 연주한다면 내 반응은 둘중에 하나다: 집에 가든가 졸든가. 피아니스트의 목적은 피아노로 하여금 노래, 노래, 노래하게 하는 것이다. [22][23]
피아노의 미스터치는 인간의 것입니다. 왜 모든것이 완벽해야 하겠습니까? 완벽 그 자체로 불완전함입니다. [24]
나는 장군이다. 건반이 내 병사들이며 나는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다.[25]
나에게 있어서 논리는 항상 (연주의) 가이드가 되지만 그것이 공연의 목표는 아닙니다. 3가지가 조정되어야 하고 그 중 하나라도 튀어서는 안 됩니다. 학자가 돼버릴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은 지성은 피합니다. 슈말츠[26]가 돼버릴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은 감성은 피합니다. 기계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은 테크닉은 피합니다.[27]
내가 끔찍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내 연주가 매우 명확하기 때문에, 내가 실수를 하면 당신이 그것을 듣게 됩니다. 다이내믹 조절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난 단 한개의 미스터치도 없을 것입니다. 결코 엄두 내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28][29]
말하자면 음악을 열어서 그 뒤에 뭐가 들어있는질 확인해야 한다. 바흐든 누구든 음표는 다 같기 때문이다. [30]
악보는 성경이 아니며 난 두려워하지 않는다. 음악은 그 점들 뒤에 있는 것이다. [31]
[1] 러시아어로는 Владимир Самойлович Горовиц(블라디미르 사모일로비치 고로비츠), 우크라이나어로는Володимир Самійлович Горовиць(볼로디미르 사미일로비치 호로비츠). 일각에선 원래 이름이 고로비츠(Gorowitz)였으나 호로비츠로 개명했다고도 하는데, 사실 어느 쪽이든 맞으며 단지 키릴 문자 г가 우크라이나어에서는 h 발음이지만 러시아어에서는 g 발음이라 나타나는 차이. 이후 서방 데뷔 때 Horowitz라는 철자를 사용할 것을 제안받아 이 이름으로 알려졌다.[구력] 9월 18일.[3] 오케스트라 유무 무관.[4] Grammy Award for Best Instrumental Soloist(s) Performance, 오케스트라와 함께함.[5] Grammy Award for Best Instrumental Soloist Performance, 오케스트라 제외.[6] 물론 부조니는 호로비츠가 서유럽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시기 이미 사망하여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7] 아버지가 전기 모터 유통업자였는데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재산을 몽땅 뺏겼다.[8] 인식과는 다르게 둘은 음악가 사이의 보여주기식 결혼이 아닌 진짜로 사랑한 결혼을 했다. 이것은 아내가 직접 회고하기도 한 부분. 이후 호로비츠 연주 경력의 위기마다 완다가 준 도움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9] 라이브 공연이다. 다소 정적인 녹음보다 훨씬 더 박진감 넘치게 친다.[10] 즉, 호로비츠의 20대 시절.[11] 특히 같은 레퍼토리를 대조했을 때.[12] 20년대 호로비츠의 미국 데뷔(뉴욕) 직전에 만난 후 라흐마니노프가 43년에 죽을 때까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가 친 그의 3번 협주곡에 대해 엄청난 찬사와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호로비츠가 자신보다 이 협주곡을 더 잘 연주하며, 자신은 항상 이 곡이 이렇게 연주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생전에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13] 그만이 낼 수 있다는 소리로,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아 일부러 그런 소리를 내지 않은 그에 견줄 만한 피아니스트들도 있지만, 극소수이다. 물론 어차피 오케스트라에 묻혀 들리지도 않을테니(...) 힘을 아끼는 피아니스트들이 대부분이다.[14] 음색을 자유자재로 바꿈과 더불어, 손 3개가 필요할 다성부의 패시지를 각각 분리해내면서도 서로 융합되게 연주하는 것 등[15] 이것을 그가 나이를 이유로 이전 스타일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야만 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런 와중에도 1950년대 이후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그만의 스타일이 여전히 분명 존재하기 때문.[16] 피아노 연주자의 입장에서 저런 방식의 연주는 듣기에는 쉬워보이면서도 치기에는 오히려 굉장히 어렵다. 음 하나하나를 균일하게 빠짐없이 다뤄야 하기 때문.[17] 실제로도 마지막 연주회는 1987년 함부르크에서 있었다.[18] 매우 딱딱하고 차가운 성격의 완다였으나 이 사건 이후로 딸의 이름 "소니아"만 들어도 바로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마음고생이 극심했다고 한다[19] 실제로 피아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악기를 매고 비교적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현악기와 관악기 주자들을 부러워 하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최상의 연주를 하기 위해선 자기가 평생동안 길들인 악기로 연주를 해야 유리한데 피아노계에서는 콘서트 때마다 낯선 악기로 적응을 해야 하는 것이 숙명이자 현실이기 때문이다.[20] 마찬가지로 완벽주의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도 최상의 연주를 위해 콘서트 때마다 항상 피아노를 비행기로 싣고 다닌다.[21] schott사에서 출판해 국내에선 대한음악사등을 통해 악보를 구입할수 있다.[22] Played percussively, the piano is a bore. If I go to a concert and someone plays like that I have two choices: go home or go to sleep. The goal is to make the piano sing, sing, sing.[23] 실제로 호로비츠의 연주 스타일 중 하나인 멜로디의 노래하는 듯한 강한 드러남을 생각해보면 그의 실제 연주 성향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24] False notes (on the piano) are human. Why does everything have to be perfect? You know, perfection itself is imperfection.[25] I am a general. My soldiers are the keys and I have to command them.[26] 거위나 닭 등의 지방 조직에서 나온 기름을 굳힌 것[27] For me, the intellect is always the guide but not the goal of the performance. Three things have to be coordinated, and not one must stick out. Not too much intellect because it can become scholastic. Not too much heart because it can become schmaltz. Not too much technique because you become a mechanic.[28] I must tell you I take terrible risks. Because my playing is very clear, when I make a mistake you hear it. If you want me to play only the notes without any specific dynamics, I will never make one mistake. Never be afraid to dare.[29] 베이브 루스가 "내가 홈런을 노리지 않고 단타만 쳤으면 타율이 6할은 됐을 것이다"라고 한것과 비슷한 맥락[30] You have to open the music, so to speak, and see what's behind the notes because the notes are the same whether it is the music of Bach or someone else.[31] The score is not a bible, and I am never afraid to dare. The music is behind those do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