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61332><colcolor=#ffffff> 셀레나 Selena | |
본명 | 셀레나 킨타니야-페레스[1] Selena Quintanilla-Pérez |
출생 | 1971년 4월 16일 |
미국 텍사스 주 레이크 잭슨 | |
사망 | 1995년 3월 31일 (향년 23세) |
미국 텍사스 주 코퍼스 크리스티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활동 | 1981년 ~ 1995년 |
장르 | 테하노, 라틴 팝, R&B |
배우자 | 크리스 페레스[2] (1992년 결혼) |
데뷔 | 1984년 1집 앨범 'Freddie Label' |
링크 | [3]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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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모델, 배우, 패션 디자이너. 라틴 아메리카에서 선풍적인 인기와 사랑을 받았고, 미국 텍사스 지역과 멕시코의 음악을 혼합시킨 테하노(Tejano) 음악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3천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으며, 샤키라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라틴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도 꼽힌다.2. 생애
셀레나 킨타니야는 1971년 미국 텍사스주의 멕시코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4] 음악가 출신인 그녀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막내딸의 천재적인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고, 맏아들에게 베이스를, 둘째인 딸에게 드럼을 가르쳐 남매 밴드를 결성하였다. 남매가 처음 공연한 장소는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가게의 매출이 날로 떨어져 가고, 이내 운영이 어려워지자 남매의 아버지는 사업을 접고 딸 셀레나를 리드 보컬로 한 밴드의 매니지먼트에 모든 것을 걸었다. 멕시코계 미국인이 영어 곡으로 현지 활동을 하기는 쉽지 않아, 자연스레 밴드의 음악 장르는 히스패닉을 대상으로 한 텍사스 기반 멕시코 퓨전 음악인 '테하노'가 되었다. 이때의 밴드명은 Selena y Los Dinos였다.오랜 기간 커버곡 및 기성 작곡가의 곡을 부르던 셀레나의 밴드는 데모 음반 제작을 계기로 오빠인 베이시스트 에이비의 프로듀싱 체제로 거듭난다. 뛰어난 라이브 실력과 곡 퀄리티로 테하노 장르에서 스타로 부상한 셀레나의 밴드는 이내 CBS와 EMI, 대형 레코드사 두 곳에서 데뷔 앨범 계약을 제안받고, 리드 싱어 셀레나를 아이코닉한 스타로 홍보하고자 하는 소속사의 제의에 따라 활동명을 솔로 프로젝트인 '셀레나'로 바꾸게 된다. 세부 조율이 끝나고 EMI의 라틴 레이블에서 발매한 밴드의 데뷔 앨범 'Selena'는 제2의 글로리아 에스테판을 예감한 소속사의 기대에 부응하듯 바로 차트 상위권으로 뛰어오른다.
이윽고 대형 음반사의 홍보를 등에 업은 히트곡이 터진다. 중독성 있는 리듬의 Baila Esta Cumbia가 미국의 라틴계 팬층의 수요를 넘어 멕시코 및 스페인어권에서도 크게 호응을 얻으며 셀레나는 테하노의 대표 가수로 등극하게 된다. 2집 앨범은 첫 주에 골드 인증을 받았는데, 이 장르의 여성 아티스트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라틴 음악을 방송하는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방송한 아티스트가 된 것은 물론이고, 오랜 기간 쌓아온 라이브 능력에 대한 평판은 갈수록 높아져 투어에만 6만명을 동원할 정도였다. 가죽 자켓을 입고 모히칸 헤어스타일을 한 앨범 커버의 모습은 촬영 직전에 소속사와의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착한 여자'가 되기 싫다는 그녀의 소망을 반영했다.
3번째 앨범을 낼 때 쯤 셀레나는 이미 동종 업계 최고 지위에 올라 있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새로 영입한 기타리스트 크리스 페레스와 사랑에 빠지는데,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도피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결혼과 함께 '셀레나 페레스'로 이름이 바뀌지만 연애가 인기에 지장을 미칠거라는 아버지의 우려와는 달리 그 명성은 갈수록 높아져 갔다. 아름다운 멜로디의 메가 히트 싱글 Como la Flor는 콘서트를 마친 그녀의 오빠 에이비가 어느날 밤 조화를 파는 가난한 노점상의 모습을 보고 감흥을 얻어 만든 곡이다.
정규 앨범 발매가 없었던 이듬해에 셀레나는 팬들을 위한 라이브 앨범을 냈다. 1993년 2월 7일 텍사스의 메모리얼 콜로세움에서 열린 공연 실황을 담은 이 음반으로 셀레나는 첫 그래미 상을 받았고 테하노 뮤지션으로는 첫번째 수상이다. 이때부터 장르 내에서 그녀의 위상은 마돈나와 비교되기 시작한다.
1994년은 셀레나의 커리어에서 정점과 같은 해였다. 그동안 쌓아온 대중적 호감도와 라이브에 대한 호평, 차근차근 다져온 음악적 내실이 결실을 이루며 셀레나의 4집은 기존의 테하노 가수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성공을 낳는다. 여러 곡의 초대형 히트 싱글을 낸 이 앨범으로 셀레나는 빌보드 라틴 차트 1위를 거머쥐며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테하노 가수가 된다. 멕시코 차트에서는 무려 97주간 1위를 차지하여 가히 비견될 존재가 없을 정도였다. 댄스팝과 하드록, 흑인 음악을 넘나드는 다양한 음악을 수용한 이 앨범은 지금도 라틴 음악 최고의 명반이자, 비평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여성 가수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롤링 스톤에서 선정한 명반 500선에도 선정되었다.
1995년 초, 셀레나는 휴스턴의 아스트로 돔에서 단독 공연으로 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팝 시장 전체에 충격을 안긴다. 이 시기의 라틴 차트는 가히 셀레나의 독무대라고 할 만했다. 기존 1위 싱글을 본인 앨범의 후속곡이 갈아치우는 식으로, Bidi Bidi Bom Bom은 정점에 오른 가수가 메가 히트곡을 연발할 경우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았다. 이 곡은 현재까지도 가장 인기있는 라틴 음악 중 하나인데, 히스패닉의 앤섬과도 같은 대접으로 결혼식이나 행사 같은 흥겨운 장소에서 자주 연주된다. 불행하게도 해당 콘서트는 후술할 이유로 생전 마지막 콘서트가 되고 말았으며, 유튜브 등지에서 "마지막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2.1. 사망
어린 시절부터 셀레나의 오랜 목표는 영어 앨범을 내는 것이었다. 영어권에서 자란 미국 시민으로, 오랫동안 마돈나 같은 팝스타가 되기를 꿈꾼 그녀는 멕시코계 출신의 장벽을 넘고 드디어 영어 앨범 제작에 착수, 여러 유명 작곡가들을 동원한 첫 크로스오버 앨범을 완성해간다. 하지만 그렇게 염원하던 첫 영어 앨범이 출시되기도 전에 그녀는 불의의 사건으로 사망하고 만다.사건은 셀레나가 자신의 팬클럽 회장이자 그녀의 굿즈 판매를 담당하던 여성 매니저 욜란다 살디바르의 자금 횡령을 발견한 것이 발단이었다.[5] 셀레나의 아버지는 셀레나에게 욜란다 살디바르를 해고하라고 권했고 셀레나가 이를 받아들여 정리해고를 하자, 이내 앙심을 품은 살디바르가 셀레나를 찾아가 해고를 취소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하자 숨겨온 권총을 쏜 것이다.[6] 총에 맞은 셀레나는 인근 건물로 뛰어갔고, 그 건물에서 쓰러진다. 그 뒤 건물의 사람들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끝내 사망했다. 당시 그녀를 진단한 의사는 셀레나의 동맥이 총탄에 의해 파열된 것을 알고[7], 셀레나를 살릴 수 없음을 알았다고 한다. 1995년 3월, 당시 그녀의 나이 23살이었다.
살해범 살디바르는 범행을 저지르고 나서 자신의 차를 타고 도주했는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추적하여 포위되었고 9시간을 대치하다 자살을 시도하려 했는데 이때 출동한 SWAT 팀에게 제압당해 실패하고 체포된다.[8] 체포된 살디바르는 자신의 범행을 전혀 반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판에서도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며 변호사를 고용해 풀려나려고 해 여론의 공분을 크게 샀다.[9] 하지만 검찰은 그녀를 1급 살인혐의로 기소했고 1995년 10월 23일에 열린 재판 1심에서 살다바르는 30년 후 가석방 신청이 가능한 종신형인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살다바르는 항소했으나 2심과 3심에서도 1심의 형이 그대로 선고되면서 형이 확정되어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범인 살디바르는 종신형으로 복역하면서 항소했는데, 2심 재판 중에 교도소에서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내용이 가관인 것이 살디바르가 한 편지를 읽었는데 이게 셀레나가 자신에게 보내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살디바르는 자신의 꿈에 셀레나가 나왔고, 자신을 걱정했으며, 자신이 종신형을 받은 것에 셀레나가 화가 났다며, 셀레나가 원한다며 자신의 형량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셀레나가 보내온 편지라고 주장하는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실제로 이 편지는 교도소 외부에서 익명으로 보내진 편지가 맞았는데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이것도 범인 살디바르의 자작극이었다. 살디바르가 외부에 이러한 편지를 쓰라고 지시를 내렸고, 편지를 보낸 사람이 살디바르에게 돈을 받고 보낸 것이었다. 오히려 이 편지가 자작극인 것이 밝혀지면서 2심에서도 그대로 형이 선고되었음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항소했고 3심에서는 아예 기각당해서 1심 선고가 그대로 확정되었다. 30년 뒤에 가성방 심사를 받을 수 있으므로 2025년부터 셀레나를 살해한 살디바르는 종신형의 가석방을 신청할 자격이 생긴다.
셀레나가 몇 곡의 영어 신곡을 녹음해둔 미완성 영어 앨범은 그녀의 미공개곡과 기존 곡을 섞어 'Dreaming Of You'라는 타이틀로 공개했다. 유작이자 그녀의 마지막 앨범인 'Dreaming of you'는 발매 첫날 17만장 판매라는 위업을 세우며 여성 가수 판매 기록을 경신하였다. 그녀의 우상인 마돈나나 3대 디바도 세우지 못한 대기록이다.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팔린 라틴 앨범 중 하나인 이 음반에서는 낭만적인 노랫말의 발라드 곡 'I Could Fall In love'가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오랜 기간 그녀의 대표곡으로 꼽히며 웨딩 송으로도 사랑받은 이 곡이 싱글 차트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이 곡의 지나친 인기가 앨범 판매를 떨어뜨릴까 우려한 소속사의 방침 때문이었다.
라틴 음악의 신화인 그녀의 일대기는 영화로, 뮤지컬로, 드라마로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1997년에 제작한 영화는 당시 무명의 신인이던 제니퍼 로페즈의 연기가 크게 호평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편견으로 가득차 히스패닉 출신들이 제대로 진출하지 못한 영어권 음악계에 셀레나의 존재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3. 기타
- 도나 서머, 마돈나, 마이클 잭슨, 자넷 잭슨, 폴라 압둘, 글로리아 에스테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 가수 활동 뿐만 아니라 배우, 작곡,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보인 멀티 엔터테이너였다. 그래서 그런지 별명이 멕시코의 마돈나였다.
- 특히 패션 디자인에 탁월한 감각을 드러냈는데, 모든 무대 의상을 스스로 디자인하기로 유명했다.
- 사후 [age(1995-03-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라틴 문화권에서 자주 회자되며, 히트곡들도 꾸준한 사랑을 받는다.
- 셀레나라는 이름은 이전부터 쓰였던 이름이지만, 유명세를 탄 해부터 텍사스 지역 히스패닉 여아를 셀레나로 이름 짓는게 유행이 되었다. 사망 이후에도 어느정도 이어지고 있다. 셀레나 고메스 역시 마찬가지. 혹자에 의하면 당시 히스패닉 여아의 30-40%가 셀레나 였다고 한다...
[1] 당연히 라틴계에서의 성 규칙에 따른 이름이 아니다. 멕시코 등 라틴계 국가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킨타니야"는 아버지 성을 물려받은 것이고, 어머니 성은 "사모라" (Samora)이나 멕시코 국적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물려받지 않았다. "페레스"는 결혼 이후 반려자의 성을 받은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아무리 결혼해도 성이 바뀌지 않는데, 과거에는 여성의 경우 결혼하면 아버지 성은 그대로 두고 어머니 성 자리에 "de 남편의 성" 식으로 되었으나, 지금은 라틴계 남성들처럼 죽을 때까지 성이 바뀌지 않는다.[2] 미국의 기타리스트[3] 유족이 공인한 계정[4] 이로 인해 미국 단일 국적이다. 멕시코 국적은 작고할 때까지 가져본 적이 없었다.[5] 당시 욜란다 살디바르가 횡령한 것은 셀레나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었는데 셀레나가 운영하는 뷰티크의 직원들이 몇 달치 급여를 받지 못했다고 아브라함에게 하소연했고 그가 뷰티크의 장부를 확인하자 욜란다가 수표의 발행인이자 수취인으로 서명하여 돈을 횡령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횡령한 돈은 4만달러로 당시 환화로 4천만원, 현재 가치로는 8,300만원에 달한다.[6] 범인 욜란다 살디바르는 자신이 해고당하자 뷰티크의 세무관련 서류들을 모두 자신의 집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없으면 셀레나가 세금을 제대로 납부할 수 없어 이것을 빌미로 해고를 취소하려고 흥정했으나 거절당하자 서류를 돌려준다는 핑계로 자신이 머무르는 모텔로 오게하였고 범인 욜란다 살디바르가 숨겨온 총에 맞게되었다.[7] 이미 동맥이 끊어져 수혈을 받는다고 해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였고 결국 셀레나는 동맥 파열로 인한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된다.[8] 실제로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 공개된 영상에 의하면 욜란다 살디바르는 경찰과 대치하며 "고의가 아니었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준비한거다, 자기가 자살하려고 쏜건데 총이 뒤집혀서 셀레나에게 맞았다" 등을 떠들며 우발적 범행을 내내 주장하며 카메라가 비칠때만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행동을 취했다.[9] 여론이 너무 안좋아서 변호사들이 모두 외면하여 법정에서 강제로 텍사스 주의 한 로펌에 맡겨 국선변호인이 살디바르를 변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