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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액 부문 | 공연자 (Performers) | ||||||||||||||||||||||||||||||||||||||||||||||||||||||||||||||||||||||||||||||||||||||||||||||||||||||||||||||||||||||||||||||||||||||||||||||||||||||||||||||||||||||||||||||||||||||||||||||||||||||||||||||||||||||||||||||||||||||||||||||||||||||||||||||||||||||||||||||||||||||||||||||||||||||||||||||||||||||||||||||||||||||||||||||||||||||||||||||||||||||||||||||||||||||||||||||||||||||||||||||||||||||||||||||
멤버 | (개인 자격) | ||||||||||||||||||||||||||||||||||||||||||||||||||||||||||||||||||||||||||||||||||||||||||||||||||||||||||||||||||||||||||||||||||||||||||||||||||||||||||||||||||||||||||||||||||||||||||||||||||||||||||||||||||||||||||||||||||||||||||||||||||||||||||||||||||||||||||||||||||||||||||||||||||||||||||||||||||||||||||||||||||||||||||||||||||||||||||||||||||||||||||||||||||||||||||||||||||||||||||||||||||||||||||||||
입성 연도 | 2020년 | ||||||||||||||||||||||||||||||||||||||||||||||||||||||||||||||||||||||||||||||||||||||||||||||||||||||||||||||||||||||||||||||||||||||||||||||||||||||||||||||||||||||||||||||||||||||||||||||||||||||||||||||||||||||||||||||||||||||||||||||||||||||||||||||||||||||||||||||||||||||||||||||||||||||||||||||||||||||||||||||||||||||||||||||||||||||||||||||||||||||||||||||||||||||||||||||||||||||||||||||||||||||||||||||
후보자격 연도 | |||||||||||||||||||||||||||||||||||||||||||||||||||||||||||||||||||||||||||||||||||||||||||||||||||||||||||||||||||||||||||||||||||||||||||||||||||||||||||||||||||||||||||||||||||||||||||||||||||||||||||||||||||||||||||||||||||||||||||||||||||||||||||||||||||||||||||||||||||||||||||||||||||||||||||||||||||||||||||||||||||||||||||||||||||||||||||||||||||||||||||||||||||||||||||||||||||||||||||||||||||||||||||||||
후보선정 연도 | }}}}}}}}}''' |
<colbgcolor=#770809><colcolor=#FFFFFF> 노토리어스 B.I.G. The Notorious B.I.G. | |
본명 | Christopher George Latore Wallace 크리스토퍼 조지 라토어 월리스 |
출생 | 1972년 5월 21일 |
뉴욕 주 브루클린 | |
사망 | 1997년 3월 9일 (향년 24세) |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8cm, 155kg |
자녀 | 딸 티야나 월리스(1993년생)[1] 아들 크리스토퍼 조던 월리스(1996년생)[2] |
별명 | 비기, 비기 스몰즈, 비아이지, 뉴욕의 왕, Big Poppa, 힙합의 황제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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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972년 5월 21일,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자메이카 출신 흑인이었는데, 아버지는 그가 2살 때 가정을 떠났으며 어머니 볼레타 월리스가 투잡을 뛰면서 그를 키웠다. 어린 시절 동네 이웃인 색소폰 연주자 도널드 해리슨에게 음악에 대한 많은 걸 배웠다고 한다.[3]가톨릭 학교를 다니며 JAY-Z, DMX 등과 동문이었던 그는 뛰어난 수재였으나 불우한 환경 탓에 12살부터 마약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리에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며 랩을 시작하였는데[4] 이미 이때부터 거리에서 뛰어난 랩핑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7살 때 프리스타일 랩배틀을 하는 영상 그러나 17살 때 몇몇 범죄에 연루되면서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감옥을 나온 후 Biggie Smalls라는 예명으로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였는데,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DJ Master Cee는 그의 테이프를 힙합 전문지 THE Source의 기자이자 랩퍼 빅 대디 케인과 같이 일하는 '메티 시'에게 들려주었다. 결국 비기는 THE Source 매거진의 'Unsigned Hype'란에 실리게 됐고, 업타운 레코드의 인턴으로 있던 프로듀서 퍼프 대디의 눈에 띄게 된다.[5] 동시에 추후 서부 힙합의 거물이 되는 투팍 샤커와의 친분도 쌓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리게 되고 1993년 8월 8일 이미 결별한 여자친구 사이에서 덜컥 딸을 갖게 되자, 어머니와 딸을 먹여살리기 위해 음악을 포기하고 다시 마약 판매에 손을 대게 되는데, 퍼프 대디가 간곡하게 설득해 다시 음악을 하게 된다.
이후 퍼프 대디가 세운 배드 보이 레코드와 계약을 하고 1992년부터 The Notorious B.I.G.라는 새로운 예명으로 여러 리믹스 곡의 피쳐링과 객원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많은 노래들이 빌보드 차트에 높은 순위를 기록, 나름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1994년 R&B 가수 페이스 에반스와 결혼, 아들을 갖게 된다.[6]
1994년 8월 9일, 그의 첫 개인 활동 싱글인 'Juicy'[7]가 빌보드 팝 차트 27위로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되고, 9월 13일 첫 정규 앨범 <Ready to Die>가 엄청난 히트를 치면서 순식간에 거물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후배 그룹 Junior M.A.F.I.A.를 성공적으로 데뷔시키고 걸출한 R&B 뮤지션들과도 작업을 하면서 그 해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솔로 랩퍼로 거듭났으며,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그 해의 최고의 랩 아티스트 상을 받는다.
1995년 9월, 두 번째 앨범 Life After Death의 레코딩 작업에 들어갔으나, 법정 논쟁 때문에 질질 끌리게 되어 무려 18개월이나 걸리게 된다. 1996년 5월 23일에는 맨해튼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두 사람을 폭행하고 살해 위협을 가한 죄로 체포되어 100일 동안의 자원 봉사 명령을 받았으며, 같은 해 몇 달 후 집에서 마약과 총기가 발견되어 벌금을 물었다. 또한 차 사고를 당해 왼쪽 다리가 박살나면서 지팡이를 쓰게 된다.
비기는 원래 투팍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이후 11월 30일 투팍이 맨해튼의 Quad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무장강도를 만나고 귀중품을 내놓으란 말에 총을 꺼내다 총격을 당해 5발이나 맞고도[8] 기적적으로 생존하는 일이 생기는데, 투팍은 비기를 의심하게 된다. 강간 관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수감 중일 때 그는 바이브 매거진과 인터뷰에서 '1994년 11월 30일 내가 총격을 당하기 전에 비기랑 퍼프 대디는 내가 총격을 당했던 맨해튼 스튜디오에 있었어. 그들이 날 쏜거라고. 그리고 내 보석이랑 돈을 빼앗았겠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투팍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우린 안 그랬고 그가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을 거야. 생각해 봐, 총을 몇 발이나 맞은 사람이 제 정신일 수 있겠어?'라고 결백함을 주장했다.
어쨌든 일련의 사건과 의심이 겹치면서 힙합계는 배드 보이 레코드 및 노토리어스 BIG로 대표되는 동부와 데스 로우 레코드 및 투팍으로 대표되는 서부로 갈라졌고, 경쟁이 격화되면서 비기와 투팍은 디스전을 벌인다. 1996년 투팍이 전설적인 디스곡인 'Hit 'Em Up'을 공개하면서 힙합계의 갈등은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러던 1996년 9월 투팍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격을 당하고 중태에 빠져있다 결국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총격의 배후에 비기를 비롯한 동부 힙합계가 연관 되어있다는 의심이 떠오르게 되었다. 비기의 당시 아내 페이스 에반스는 투팍의 총격이 알려진 당일 밤 비기가 충격과 공포에 빠져 울먹이며 전화를 걸어왔다고 증언했다. 이미 살인 협박을 여럿 받아오던 비기로선 자기 통제 이상으로 커져버린 사태에 엄청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투팍도 처음에는 비기를 비롯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동부 래퍼들을 모조리 디스했지만 이후 점점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에 인터뷰를 통해서 "상황이 미디어에 의해 과장되었고, 이건 비기와 자신의 개인적인 갈등일 뿐"이라며 무마를 시도했던 적이 있다.
2.1. 사망
비기의 마지막 공식 석상 모습[9] |
비기의 생전 마지막 사진 중 하나[10] |
<노토리어스>에서 묘사된 비기의 총격 장면 | 비기의 총격 당시 실제 영상 (성인인증 필요) |
1997년 2월, 비기는 3월 25일 발매할 예정인 2집 <Life After Death>의 프로모션과 리드 싱글 'Hypnotize'의 뮤직 비디오 촬영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런데 3월 9일 오전 12시 45분, 비기가 타고 있던 GMC 서버번이 멈춰선 사이 쉐보레 임팔라를 탄 흑인 괴한들이 총격을 가했고, 9 mm 총알[11] 4발을 맞은 비기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30분 후인 3월 9일 오전 1시 15분에 사망 판정을 받는다. 사망 15년 만에 공개된 부검 보고서에 의하면 4발의 총알 중 3발은 생명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의 부상만 입혔던 것으로 밝혀졌다. 첫 번째 총알은 왼쪽 팔뚝에 맞은 뒤 손목에 박혔고, 두 번째 총알은 등에 맞은 뒤 왼쪽 어깨로 빠져나간 관통상이었다. 세 번째 총알은 음낭 왼쪽에 맞았는데 상처가 얕아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 번째 총알이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는데, 오른쪽 엉덩이를 뚫고 들어간 총알이 몸통 전체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면서 결장, 간, 심장, 왼쪽 폐 등 중요한 장기에 큰 손상을 입힌 뒤 왼쪽 어깨에서 멈췄다.[12]
그의 나이 24세. 투팍이 죽은 지 불과 6개월도 안 되어 동부와 서부의 힙합 거물이 비슷한 방식으로 암살되어 사망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두 사건을 엮는 음모론도 여럿 나왔다.
비기의 장례식은 3월 18일 치러졌다. Run DMC, 릴 킴, 버스타 라임스, DJ 쿨 허크[13] 등 350명의 문상객이 다녀갔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다.
이후 3월 25일에는 본래의 계획대로 2집인 <Life After Death>가 정상적으로 발매되었다. 앨범의 높은 완성도를 바탕으로 크게 호평을 받았으며 여기에 비기의 추모 열풍까지 겹쳐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범인이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의심받는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증거가 불충분해서 범인으로 지목되지는 못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14]
암살되기 전까지 앨범의 홍보 때문에 인터뷰, 라디오와 같은 여러 매체에 등장을 해왔기에 사망하기 전의 행보가 상세하게 밝혀져 있는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3. 랩 실력에 대한 평가
1989년 프리스타일 영상. 당시 17세.[15]
1995년 Juicy 공연.
1990년대, 일명 미국 힙합의 황금기에 동부 힙합을 대표하며 서부 힙합의 투팍 샤커와 함께 씬을 양분했던 래퍼였다.[16][17][18] 생전에 만든 2장의 정규 앨범[19] 모두 힙합씬을 넘어 미국 음악사에서 손꼽히는 명반이다.
역사상 최고의 랩 실력을 가진 래퍼 중 하나로, 상당수의 리스트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래퍼' 1위에 선정했다. 1990년대 중반 당시 투팍이 정규 앨범 3장을 먼저 내고 랩으로 하는 사회운동을 통해 대중성, 상업성, 예술성까지 모두 잡고 명실상부 '힙합계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때에 비기가 감히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 시대를 앞선 랩 실력 하나 때문이었다. 사망한 뒤 음악적 커리어를 재평가받아 레전드가 된 게 아니라 그냥 데뷔와 동시에 레전드가 되었다는 평까지 받을 정도.
뻥뻥 뚫리는 시원시원한 발성 + 아이덴티티인 허스키하고도 독특한 비음이 섞인 묵직한 톤[20] + 드럼소리처럼 툭툭 끊어지면서 만드는 그루브 + 말하듯이 자연스러운 플로우 + 시대가 변해도 촌스럽지 않게 시원하게 꽂히는 고도의 라임 배치 + 밀고 당기는 천재적인 박자감각 등, 랩 실력으로는 완전체라 할 만하다. 또한 음원도 좋지만 라이브는 더 잘했으며 심지어 랩 메이킹을 종이 없이 머릿 속에서 생각한 후 녹음했다고 한다. 모든 곡을 프리스타일로 만들었다는 뜻이며, 말 한마디가 곡이 됨을 몸소 보여줬다.[21]
허나, 현재엔 시대가 많이 바뀌었기에 라이트 팬이나 대중 입장에서는 에미넴이나 켄드릭 라마 등의 화려한 랩을 구사하는 래퍼에 비해 역대 최고까지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22][23] 전형적인 옛날 붐뱁 비트에 느리게 랩을 하고 있으니, 최근 랩과 힙합의 조류에 길들여진 이들은 비기가 최고의 래퍼냐는 말에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24]
하지만, 수 많은 래퍼들과 관계자, 팬들이 말하는 비기 랩의 특징이자 강점은 'effortless'. 즉, 청자가 가장 듣기 편하게 뱉는 랩이라는 점이다. 이 강점을 이해하려면 래퍼의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래퍼의 실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나 비트에 어울리는 라임메이킹을 했는가'와 '비트에 어울리는 플로우를 구사했느냐'가 주 기준이 되기에 힙합이 음악인 이상 시청자는 래퍼의 플로우에 집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래퍼가 아무리 좋은 주제와 표현을 쓰고 라임을 떡칠해봤자 랩 스킬에 묻혀서 기껏 쓴 가사를 날려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기는 그러한 딜레마를 자신만의 자연스러운 플로우를 연구해서 라임은 라임대로 들리고, 리듬감도 살리고, 가사도 각인시키는데 성공했고 Juicy, Hypnotize 등의 명곡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아직도 그의 랩 메이킹과 라임은 힙합계의 연구 대상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게다가 그가 가진 특유의 사기적인, 하이톤이면서도 로우톤을 뛰어넘는 무게감이 깃든 목소리는 힙합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평가 받는다. 굳이 기교를 넣지 않아도 이미 두껍고 위압적이며 한방 한방에 묵직한 타격감을 지닌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에 Big Poppa나 Suicide Thoughts같은 조용하고 느린 곡을 부르더라도 매우 듣기 좋으며, Party & Bullshit처럼 큰 소리로 힘주며 랩할 땐 듣는 입장에서는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 타격감이 장난 아니다.
90년대 초반 대부분의 래퍼들은 빅 대디 케인과 라킴의 라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기의 라임 패턴은 기존 래퍼들과 음반 제작자들이 그동안 들어왔던 라임과는 전혀 다른 발전된 형태였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라임은 숱하게 올라오는 라임채킹 영상만 봐도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의 박자 완급 조절은 현재 래퍼들 사이에서도 매우 독특하다고 평을 받는다. 분명 정박과 엇박을 넘나들기는 하는데, 생각보다 가사량이나 들리는 음절 수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동시대에 나온 나스의 <Nas Is Like>만 들어봐도 대부분 래퍼들의 엇박은 구사할수록 랩이 빨라져서 라임이 안 들리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비기는 가사와 박자를 동시에 설계한 듯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랩을 구사했다. 이런 특이한 박자를 타게 된 비결이 비기가 어릴적 재즈 아티스트를 지망했던 때 쌓은 드럼 이해도 덕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프리스타일 실력 역시 최상위권이었다. 실제로 투팍의 디스곡 "Hit 'Em Up"중에서 "이거 프리스타일 배틀 아냐 임마" 라인이 있었던 것 또한 투팍이 비기보다 프리스타일이 좀 쳐져서 그렇지 않느냐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 물론 투팍도 프리스타일로는 한 가닥 인정 받은 래퍼였고, 당시에는 랩배틀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었기에 본인의 디스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으로 썼을 가능성이 크다.
힙합 음악의 중심이 지펑크 붐뱁을 거쳐 트랩, EDM으로 옮겨지고 그 때문에 래퍼에 대한 평가도 변화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비기의 랩은 시대를 넘어 힙합 역사상 최고의 래퍼 중 한명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다. 보통 이 GOAT에 꼽히는 다른 래퍼들로는 투팍, 나스, 제이지, 안드레 3000[25], 라킴, 에미넴, 켄드릭 라마, 빅 대디 케인, 쿨 지 랩에 언더그라운드까지 포함하면 MF DOOM 정도가 있다. 물론 이러한 최정상급 아티스트들을 비교해서 우열을 정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고, 결국 취향 차이로 귀결하지만 단순히 누가 더 위대하냐를 떠나서 순수 랩 실력만으로 최상위 자리에 오른 사람은 거의 비기만이 꼽히는데 다른 래퍼들은 랩 실력 외의 다른 공적을 조명받는 면이 크기 때문이다. 라킴은 랩 가사에서 라임쓰는 법을 최초로 정립했다는 역사적 의미, 투팍은 주제의 다각화와 소수자[26] 인권 운동, 나스는 일매틱과 거리의 삶을 잘 묘사하는 뛰어난 작사력, 안드레 3000은 Outkast과 각종 피쳐링에서 보여준 장르를 초월한 다양한 음악적 실험과 프로듀싱, 에미넴은 슬림 셰이디라는 안티팝 & 비주류 컨셉의 성공 사례와 힙합 역사상 최다 음반 판매, 흑인의 장르였던 힙합에서 인종 장벽을 깬 상징성, 제이지는 그래미 어워드 다수 수상과 칸예 웨스트 등의 인재 발굴, 힙합 씬에서의 이례적인 롱런[27]등이 있지만 비기는 오로지 랩 실력 하나다.
랩 스킬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표현력을 저평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사도 잘 쓴다. 흔히 "힙합을 하려면 투팍처럼, 랩을 하려면 비기처럼."이라는 명언 때문에 생긴 오해다. 싱글 판매량을 위해서 살짝 독기빼고 만들었다는 <Juicy>[28], <Big Poppa>를 들어보면 각각 밑바닥에서 성공한 자신과 여자와의 애정 행각을 구체적이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했다. 특히 범죄 관련 스토리텔링 능력에 대해서는 나스와 함께 최상위권에 뽑힌다.[29] 다만 비기는 딱히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하는 컨셔스 랩은 한 적은 없고, 이게 투팍과의 차별점이다. 즉, 되게 맛깔나게 스토리텔링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딱히 특별한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곡을 쓰지는 않는다는 것.
4. 뉴욕의 왕
비기는 생전 'Respect', 'Kick In The Door'라는 곡에서 뉴욕의 왕이라는 표현를 사용하고, 왕관 쓴 컨셉 화보까지 찍으면서 동부의 왕, 또는 뉴욕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다만, 서부의 왕이라는 칭호가 투팍에서 켄드릭 라마로 이어졌는데에 비해 뉴욕의 왕이라는 칭호는 비기 사후 나스와 제이지가 디스전으로 붙었다가 무승부로 끝나고 왕좌가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 힙합 팬들 사이에서 무용담처럼 전해지는 얘기는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90년대 동부-서부 힙합 전쟁 문서에도 잘 나와있듯이 투팍과 비기의 싸움도 사실 전쟁하듯이 동부 대 서부로 나눠서 싸운 게 아니라 그냥 투팍이 동부 래퍼들을 싸잡아서 디스한 것이다. 또한 비기를 노골적으로 디스한 투팍과 달리 비기는 투팍을 언급하면서 디스한 적도 없다. 대중들은 "Who Shot Ya?"가 투팍을 조롱하는 디스곡이라고 생각했고 투팍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이 곡은 투팍의 총격 사건 전에 이미 완성됐었던 곡이며 비기 역시 해당 곡이 디스곡이라는 설 자체를 부인한 바가 있다. 다만 스닉 디스[30]로 투팍을 디스한 적은 여러번 있는데, "The Ugliest"[31], "Brooklyn's Finest"[32], "Long Kiss Goodnight"[33]에서의 디스가 대표적이다. 또한 비기가 동부 힙합을 대표한다는 말은 당시 투팍의 디스 주 대상이었기에 언론에서 만들어준 말에 지나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Kick In The Door"에서는 나스, 제루 더 다마자, 래퀀, 고스트페이스 킬라와 같이 자신과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부 래퍼들을 광역 디스한 적이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서부의 왕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래퍼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서부의 왕이 있다면 누구냐는 질문에는 캘리포니아 래퍼 중 독보적인 위상과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투팍을 대부분 꼽을 것이고, 현재 캘리포니아 출신 중 투팍과 가장 비슷한 음악성과 위상을 가진 래퍼가 누구냐 하면 대부분 켄드릭 라마를 투팍의 후계자로 꼽을 것이다. 하지만 "서부의 왕"은 투팍의 별명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애초에 저런 구절을 투팍 본인이 쓰지를 않았기 때문이다.[34] 이에 반해 비기는 "뉴욕의 왕"이라는 구절을 생전에 곡에서도 몇 번 썼고, 무엇보다 왕 컨셉으로 왕관 쓰고 왕좌에 앉아서 화보까지 찍었다. 그렇기에 리스너들 머릿속에 비기=뉴욕의 왕이라는 등식이 생겼고, 비기는 최고의 래퍼기에 다들 받아들였을 뿐이다. 동료 래퍼들은 물론 대중들 사이에서도 해당 문구가 비기한테 잘 어울려서 타칭이 되었고 공식 별명이 되었지만, 처음 시작은 자칭이었을 뿐이다.[35]
비기 사후 빈 자리가 된 뉴욕의 왕좌를 두고 나스와 제이지가 한 판 붙었다는 것도 무용담스러운 과장이다. 실제로 둘은 비기가 죽기 전인 1996년부터 자잘한 갈등이 있었으며 이후 제이지가 "The City Is Mine"이라는 곡에서 이 도시(뉴욕)은 나의 것이라는 식의 노래를 낸 걸 나스가 아니꼽게 보고 비꼰 적이 있었을 뿐, 실제로는 이 '뉴욕의 왕'이라는 칭호 때문에 싸운게 아니라는 것.[36] 심지어 나스의 데뷔는 비기보다 빠르고, 그 데뷔 앨범마저 힙합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으로 이구동성으로 뽑히는 <Illmatic>이다. 비기가 나스를 디스할 때도 자신의 데뷔 이전에는 나스가 정상에서 군림했다고 인정하고 있다.[37] 비기가 <Illmatic>을 듣고 자신의 1집 앨범 <Ready To Die>의 구성을 바꿨다는 증언도 있기에, 만약에 1대 뉴욕의 왕이 있다면 그건 비기가 아니라 나스일 것이다. 심지어 데뷔가 비기보다 늦은 제이지도 2년밖에 차이가 안 나며, 제이지는 80년대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 작업하고 비기와 친분도 있었던 인물인데, 나스나 제이지 모두 비기와 동시대 사람이지 후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기가 1997년에 요절했지만 나스와 제이지는 살아있기에 후대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지, 이 둘은 비기의 동료이자 강력한 경쟁자로서 비기의 랩과 앨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래퍼들이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이는 "뉴욕의 왕"이라는 별명을 너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생기는 문제다. 당대에도, 지금도 비기는 역대 최고의 래퍼들 중 한 명이지만, 그렇다고 비기만이 뉴욕의 왕이었고 나스랑 제이지가 해당 칭호를 받기엔 비기보다 급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MC들이 절대 아니다. 90년대의 뉴욕은 힙합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엠씨들의 전성기 시절이었으며, 앞서 언급했던 라킴의 "God MC"라는 칭호와 마찬가지로 "뉴욕의 왕"이라는 별명 역시 그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비기는 이 별명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자신만의 캐치프레이즈로 만들었을 뿐이지, 래퍼들이 비기의 뒤를 이어 "뉴욕의 왕"이 되기 위해 디스전까지 벌여가며 경쟁했다는 식으로 믿으면 곤란하다. 즉, "뉴욕의 왕"이라는 칭호는 비기한테 어울리는 별명 정도로만 생각하면 된다.
5. 싱글
5.1. 빌보드 핫 100 1위
- Hypnotize (1997)
- Mo Money Mo Problems[38] (1997)
5.2. 빌보드 핫 100 2위
- One More Chance/Stay with Me (1995)
- It's All About the Benjamins (1997)[39]
- Been Around the World (1997)[40]
5.3. 빌보드 핫 100 3~10위
- Big Poppa (1994) - 6위
5.4. 빌보드 핫 100 11~40위
- Juicy (1994) - 27위
- Can't You See (1995) - 13위[41]
- Player's Anthem (1995) - 13위[42]
- Get Money (1996) - 17위[43]
- Only You (1996) - 13위[44]
- Going Back to Cali / Sky's the Limit (1997) - 26위
- Victory (1998) - 19위[45]
- Runnin' (Dying to Live) (2003) - 19위[46]
5.5. 빌보드 핫 100 41~100위
- Runnin' (1995) - 81위
- Stop the Gunfight (1997) - 77위[47]
- Notorious B.I.G. (1999) - 82위[48]
- Nasty Girl (2005) - 44위
6. 디스코그래피
6.1. 정규
6.1.1. Ready to Die
자세한 내용은 Ready to Die 문서 참고하십시오.6.1.2. Life After Death
자세한 내용은 Life After Death 문서 참고하십시오.6.2. 사후 앨범
6.2.1. Born Again
Born Again (1999)
- 첫 사후 앨범이다.
- 1993년~1994년에 녹음되었던 곡을 가지고 새롭게 프로듀싱해서 만들었다. 피처링진이 화려하다. 나스, 아이스 큐브, 에미넴, 버스타 라임즈, 맙 딥, 메소드 맨 & 레드맨, 스눕 독이 참가했다.
- 2pac과의 사이에서 문제가 되었던 곡 Who Shot Ya?, 비기와 에미넴의 하나뿐인 콜라보곡인 Dead Wrong이 수록되어 있다. 후덜덜한 거물급 피쳐링진에도 불구하고 1집, 2집에 비해서는 평이 좋지 않고, 비기를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평도 어느정도 있다.
- 여담으로 재밌는 점은 본 앨범에 실린 'Come on'이 게시된 유튜브 영상 댓글들을 보면 하나같이 토마스와 친구들의 오프닝과 리믹싱한 노래보다 원곡이 못하다는 평이 주류다.원곡믹싱한 노래
6.2.2. Duets: The Final Chapter
Duets: The Final Chapter (2005)
두 번째 사후 앨범. 그가 죽기 전에 녹음했던 곡들을 리믹스해서 만든 컴필레이션 성격의 앨범이다. 평가는 매우 좋지 않다. 롤링스톤지에서 별 2개를 받았을 정도이니 중간도 못갔다고 할 수 있다.
6.2.3. Greatest Hits
Greatest Hits (2007)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가 되는 해에 나온 베스트앨범.
7. 필모그래피
7.1. 영화
- 노토리어스 (2009)
- 비기 : 할 말이 있어 (2021)
8. 여담
- 절친인 퍼프 대디의 명곡으로 꼽히는 I'll Be Missing You는 노토리어스의 추모곡이다.[49]
- 랩 네임인 노토리어스 B.I.G.와 비기 스몰즈의 경우에는 처음엔 1975년 영화인 'Let's do it again'이란 영화에서 캘빈 록하트(Calvin Lockhart)의 '비기 스몰즈(Biggie Smalls)라는 캐릭터의 이름을 그대로 따와서 오마주의 형식으로 비기 스몰즈라고 지었으나, 이미 그 랩네임을 사용 중인 다른 사람이 있음을 알고, 결국 처음의 랩 네임이었던 비기 스몰즈를 일종의 비공식적 랩 네임처럼 취급하고 노토리어스 B.I.G.라는 새로운 랩 네임을 사용하게 되었다.[51]
그리고 당시 '오리지널 비기 스몰즈'[52]가 비기에게 자신의 이름을 한번이라도 더 사용한다면 고소하겠다는 메일을 보내기도 해서 "자신의 랩네임은 '노토리어스 B.I.G.'이며, 이 외에도 '노토리어스 빅' 혹은 그냥 '빅'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으니 '비기 스몰즈'라는 이름만으로는 부르지 말아달라"고 직접 당부한 적도 있다.
- 2013년 6월 6일, 비기 살해 공범자로 불리는 클레이턴 암스트롱 힐이 탈옥했다.
- 드라마 루크케이지의 악역 코튼마우스가 방 안에다 그의 초상화를 고이 모셔두고 있다.
- 생전에 심한 사시를 가지고 있었다.[53] Life After Death의 앨범 커버도 자세히 보면 비기의 왼쪽 눈의 시선이 바깥 쪽으로 심하게 치우쳐져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나 잡지 사진을 찍을 때는 눈에 힘을 주어 중간으로 모았던 것으로 보인다.[54]
- 2015년에 비기가 배드보이 레코즈와 계약할 때 사용된 계약서가 경매 사이트에 올라왔다.# 이는 비기가 계약서에 직접 서명을 한 유일한 계약서다.
- 비기가 생전 마지막으로 녹음한 곡은 퍼프 대디의 Victory로 암살되기 하루 전인 1997년 3월 8일에 녹음을 했다.
- 비기는 살면서 총 7번 체포됐다. 1989년 불법 총기 소지 혐의로 처음 체포됐고, 이 외에도 강도질, 마약팔이, 폭행 등으로 체포됐다. 참고로 비기가 감옥에 가장 오랫동안 수감된 기간은 9개월이다.
- 비기의 첫 롤렉스 시계는 투팍 샤커가 사줬다.
- 투팍이 죽었을 때 그것에 대한 인터뷰를 했는데 투팍을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해서 또 이 사건을 들었을 때 그 역시 충격을 금치 못했으며 사이는 좋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고 밝혔다. # 후에 그의 아내가 말하길 투팍이 죽은 날 자신에게 전화해서 울었다고 한다.
- 2016년 5월 21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비기의 생일을 공식 기념일로 지정했다.
- 래퍼로서 위압감 있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평소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 2009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노토리어스>(Notorious)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조지 틸먼 주니어가 감독을 맡았으며 자말 울러드(Jamal Woolard)[55][56]라는 래퍼가 노토리어스를 맡았다. 특이하게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월리스 주니어가 그의 어린 시절을 연기 했다. 참고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팔콘을 맡은 앤서니 매키가 투팍을 맡았다.[57] 2021년, 그의 생애를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비기: 할 말이 있어(Biggie: I Got A Story To Tell)>가 공개되었다.
-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작성된 FBI 보고서에 따르면 비기는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제노비스 패밀리와 관계가 있다고 적혀있다. 다만 구체적인 관계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 2021년 3월 9일, 그의 사망 24주기를 맞아 팻 조가 밝힌 사실로, 비기와 생전에 작업해둔 곡이 5곡 정도 있었으며 그중엔 투팍의 디스곡도 있었다고 한다.
- 마이클 잭슨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HIStory의 수록곡 This Time Around에 피쳐링으로 참여를 했다. 비기는 마이클 잭슨을 만나자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비기의 사후에 작업이 시작된 Invincible의 수록곡 'Unbreakable'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비기가 생전에 녹음한 랩을[58] 차용해 곡을 만들기도 했다.
[1] T'yanna Wallace. 비기의 전 여자친구 잔 잭슨(Jan Jackson)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2] Christopher Jordan Wallace. 전 배우자 페이스 에반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다.[3] 비기는 처음엔 재즈 아티스트를 꿈꿨다고 한다. 그의 스승에 따르면 비기의 변칙적인 라임은 재즈의 스네어를 옮겨놓은 듯 하다고 말했다.[4] 이후 이들이 모인 크루가 바로 Junior M.A.F.I.A.다. 유명 여성 래퍼 릴 킴도 이 그룹 소속이다. 비기가 주니어 마피아의 리더로서 각자의 랩네임, 컨셉, 심지어 가사까지 대신 써줬다.[5] 퍼프 대디는 비기의 데모 테이프를 처음 듣던 순간 "이게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신에게 감사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자신이 들은 래퍼 중에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라고.[6] 참고로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Notorious>의 어린 시절 비기를 연기한 바로 그 아이다.[7] 비기는 원래 Juicy를 하기 싫어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곡을 하게된 이유를 추측하자면 당시 비기와 사이가 좋았던 투팍이 먼저 데뷔한 음악 선배로써 어떻게 힙합 뮤지션으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해줬다고 하는데 그때 그 조언이 "여성을 위한 음악을 하라"였다고 한다. 갱스터였던 삶을 담아낸 빡센 음악을 하는 것도 좋지만 대중적이고 부드러운 음악 역시 필요하다는 뜻. 퍼프 대디 역시 1집이 너무 무거워질 것을 염려해 Big Poppa와 Juicy를 넣기를 권유했다고 한다.[8] 그 중 머리에도 2발 총격을 당했다.[9] 1997년 3월 7일에 진행된 '소울 트레인 뮤직 어워즈'에서 비기가 '최우수 여성 솔로 R&B/소울 아티스트' 부문의 시상을 맡아 수상자인 토니 브랙스턴을 호명하는 장면이다. 영상 제목에는 3월 8일이라고 적혀있지만 3월 7일 저녁에 진행되었다.[10] '소울 트레인 뮤직 어워즈'가 끝나고 하루 뒤인 1997년 3월 8일 저녁에 Vibe 매거진, Qwest 레코즈, 탱커레이가 공동 주최하여 진행된 '소울 트레인 뮤직 어워즈' 애프터 파티에서 퍼프 대디와 함께 찍힌 사진. 해당 사진이 찍히고 불과 몇 시간 뒤에 비기는 괴한의 총격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당시 파티에 참석한 비기의 사진은 해당 사진 외에도 여럿 남아있으며, 총격 사건이 일어난 차를 타기 전에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11] 범행에 쓴 총기는 청색 빛을 띠는 권총이었다고 하고, 자세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12] 엉덩이에 맞은 총알이 온갖 장기들에 손상을 입힌 뒤 어깨에 멈췄다는 점에서 의아해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총격이 시작되자 이를 피하기 위해 몸을 숙인 것이 오히려 총알의 궤적 상 그의 몸을 정통으로 관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정확한 조준사격을 고사하고 난사를 한 뒤 재빠르게 도주하는 드라이브 바이 수법의 특성과 4번째 총알 이외에는 치명상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기에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였다.[13] 장르로서의 힙합을 창시하다시피 한 전설의 DJ이다.[14] 그의 일생의 라이벌이었던 투팍 샤커가 살해당한 사건 또한 범인이 잡히지 않아 미제사건으로 남을 뻔했으나, 사건으로부터 27년 후인 2023년에 용의자가 검거되었고, 2024년엔 법원 문서를 통해 종범까지 드러나며 사건이 해결되었다.[15]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2~3학년이다. 성인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저 정도 수준의 프리스타일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그의 재능을 알 수 있다.[16] 동부와 서부라는 지역으로 나눈 것은 언론과 기획사의 고도의 상업적인 마케팅 전략이었다. 또한 이를 두고 동부 vs 서부간의 전쟁이라고 언론에선 부풀렸지만, 사실상 배드보이 레코드 vs 데스로우 레코드 간 싸움이었다. 하지만 진영논리를 떼놓고 봐도 둘 다 미국 힙합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시대의 아이콘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다.[17] 사실 힙합의 시작을 지역으로 본다면 뉴욕을 비롯한 동부에서 클럽음악으로 시작되었고 1982년 The Message를 통해 사회 비판이 시도된 이후 19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야 Ice-T, N.W.A와 같은 래퍼가 등장하면서 동부 서부가 나눠졌으며 갱스터 랩이라는 서부스타일만의 힙합이 만들어졌다. 이를 계기로 1990년대 들어서 각 지역별로 서부의 닥터 드레, 스눕 독, 투팍, 아이스 큐브, 동부의 비기, 나스, 우-탱 클랜, JAY-Z과 같은 실력자들이 나왔다. 다만, 동부와 서부 둘 다 힙합 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18] 사실 나스는 비기보다 데뷔가 빠른데(데뷔 앨범 발매: 나스 1994년 4월 19일, 비기 1994년 9월 13일) 어쩌다 보니 '뉴욕의 왕' 칭호는 비기가 가져가고 비기 사후에야 그 칭호 놓고 제이지랑 붙는 형편이 됐다.[19] 2집인 Life After Death는 비기가 죽은 후 발매되기는 했지만 수록곡 녹음, 믹싱, 뮤직비디오 촬영 등 발매를 제외한 모든 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사후 앨범으로 분류되지 않는다.[20] 깔끔하고 딱딱한 저음의 투팍과는 대비되는 허스키한 중고음의 톤이 일품. 참고로 굵은 목소리 탓에 로우톤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톤 자체는 하이톤으로 분류되는 편이다. 이 때문에 비기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랩을 하는 도중에 삑사리가 나는 것을 의외로 자주 들을 수가 있다. 실제로 목소리를 굵게 낸다고 해서 비기의 톤을 절대로 따라할 수가 없으며, 목소리를 굵게 냄과 동시에 톤은 최대한 올려야 비슷하게나마 따라할 수가 있다. 비기의 톤이 얼마나 사기적인지 알 수 있는 부분.[21] JAY-Z의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이 먼저 이렇게 랩을 하기 시작했다가 같이 곡을 녹음하는 과정(JAY-Z의 1집 수록곡 'Blooklyn's Finest')에서 비기가 배웠다고 한다. 제이지는 랩을 막 시작했을 때 가사를 쓸 시간은 넘쳤지만 정작 노트를 살 돈이 없어서 이렇게 랩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22] 하지만 생각보다 정상급 래퍼 중에 속사포를 메인으로 하는 이는 많지 않다. 'Rap God'으로 인해 속사포 랩을 구사한다는 인식이 있는 에미넴도 그 이후에 속사포를 앨범 당 한 곡 꼴로 간간히 선보일 뿐, 예나 지금이나 에미넴은 기술적인 면에 있어 다음절 라이밍, 발음 굽히기, 라임 배치 등을 주력으로 삼고 있다. 또한 에미넴 본인도 사실 언더그라운드 초창기 시절 때는 속사포를 주력으로 삼아 랩을 했지만 이후 스타일을 바꾸며 성공을 한 것이다. 같은 언더그라운드 시절이어도 Soul Intent 시절의 작업물과 Infinite, Slim Shady EP와 같은 솔로 전환 이후의 작업물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23] 속사포 랩이 쾌감은 탁월해도, 결국 쉽게 질린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래퍼의 개성은 음절 하나를 뱉더라도 비트에 따라 자유롭게 밀고 당기는 데에서 나오는데, 그냥 음절을 빨리 발음하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면 자연스레 랩이 비슷비슷해지며 듣기에 피로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조광일이나 아웃사이더가 다른 래퍼들에 비해 안티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속사포 랩을 할 수 있는 래퍼들은 많은데, 대부분은 절제하거나 안 쓴다. 예시로, 제이지는 어릴 때는 속사포 랩으로 유명했으나 데뷔 후에 스타일을 느리게 바꾸고 최정상급 MC 반열에 올랐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속사포 랩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테크 나인도 완급 조절을 한다던가, 멜로디를 섞는다던가 하는 테크닉을 덧붙인다.[24] 사실 자주 안해서 그렇지 빠르고 화려한 랩도 얼마든지 가능하기도 하다. 데뷔 싱글인 Party & Bullshit부터가 상당히 빠른 템포에 맞춰 타이트하게 랩을 하는 곡이며, 2집 수록곡인 Notorious Thugs에서도 피처링으로 참여한 본 석스 엔 하모니 못지않은 속사포 래핑을 보여주기도 했다.[25] 특히 래퍼들이 좋아하는 래퍼로, 영향력도 엄청나다. 대표적으로 켄드릭 라마의 라이밍은 안드레 3000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26] 흑인, 여성, 빈민가 등[27] 90년대의 Reasonable Doubt, 00년대의 The Blueprint와 The Black Album, 10년대의 4:44와 같이 각 시대마다 힙합 클래식이라 칭할 만한 앨범을 갖고 있다.[28] 그러나 이렇게 만든 Juicy는 비기의 대표곡일 뿐만 아니라 힙합을 상징하는 명곡으로 꼽힌다.[29] Warning과 Gimme the Loot에서는 피처링 없이 1인 다역으로 스토리텔링 랩을 하기도 했다.[30] 상대방의 이름은 직접 언급하지 않고 상대를 돌려까는 방식의 디스. 실제로 비기는 이러한 스닉 디스에 도가 텄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타 래퍼들에게 스닉 디스를 자주 행했다.[31] 버스타 라임즈의 곡에 피쳐링으로 참여한 곡으로, 미발매 유출곡이다. 투팍의 "I Get Around"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디스했으며, 원래 이 곡은 버스타의 데뷔 앨범 <The Coming>에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비기가 투팍을 디스함으로써 버스타는 투팍과의 비프를 피하기 위해 수록하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후 비기의 해당 벌스는 비기의 첫 사후 앨범인 <Born Again>의 수록곡 'Dangerous MC's'에서 재사용된다.[32] 제이지의 데뷔 앨범 <Reasonable Doubt>의 수록곡으로 당시 투팍이 비기의 아내인 페이스 에반스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루머가 돌 때 이를 이용해 투팍을 디스한 구절이 있다. 또한 투팍이 제이지까지 디스하게 된 계기가 된 곡이기도 하다.[33] 2집 <Life After Death>의 수록곡이며 투팍의 I Ain't Mad At Cha를 대놓고 인용했다.[34] 실제로 그의 곡 'Bomb First'에서 Outlawz의 멤버인 Young Noble이 "뉴욕의 왕? 우리 그딴 식으로 안 놀지"라는 가사를 쓴 적이 있다.[35] 또 이런 별명은 은근 많은 래퍼들이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라킴은 자신을 "God MC"라고 자칭했고, 대중 및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실력과 업적이 모두 인정되는 MC여서 충분히 쓸 만하다고 평가되기에 "God MC" 하면 라킴을 리스너들은 모두 떠올리는, 라킴의 대표적인 별명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36] 다만 제이지는 비기 사후 자신이 뉴욕의 왕이라는 식의 구절을 몇 번 적은 적이 있고, Takeover에서는 "왕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게 필요해"라는 구절로 나스를 디스한 적이 있으나, 나스는 오히려 Ether에서 "Pac, Nas 그리고 Big? 최고는 없어. 동부, 서부, 북부, 남부 허세만 부리고 욕심만 많아."라는 구절로 이러한 제이지의 행보를 비꼰 적도 있을 정도다.[37] Your reign on the top was short like Leprechauns (네 정상에서의 군림은 레프리컨 키처럼 짧았지). 다만, 해당 곡 자체가 스닉 디스로만 이루어져 있는 곡이다보니 해당 구절을 나스가 아닌 투팍에 대한 디스라고 보는 시선들도 꽤 있다.[38] 전설적인 여가수 다이애나 로스의 I'm comingout을 샘플링한 곡으로 아리아나 그란데가 Break Your Heart Right Back이라는 곡에서 샘플링했다.[39] Puff Daddy의 곡을 Lil' Kim, The Lox와 함께 피쳐링.[40] Puff Daddy의 곡을 Mase와 함께 피쳐링.[41] Total의 곡에 피쳐링.[42] Junior M.A.F.I.A.의 곡에 피쳐링.[43] Junior M.A.F.I.A.의 곡에 피쳐링.[44] 112의 곡을 Mase와 함께 피쳐링.[45] Puff Daddy의 곡을 Busta Rhymes와 함께 피쳐링.[46] 2Pac의 곡에 피쳐링.[47] Trapp의 곡을 2Pac과 함께 피쳐링.[48] 듀란 듀란의 Notorious를 샘플링.[49] 사용된 샘플이 폴리스의 그 유명한 Every Breath You Take 인데, 노래 가사가 잘못 이해되는 곡중 하나 라는걸 생각하면 참 묘하다. 사실은 이 노래는 스토커 얀데레적인 전 애인 관점에서 적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비기의 곡들이 어떻게 고인드립되는지 생각한다면... 그러나 샘플링을 한다고 꼭 원곡의 해석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원작자의 의도만을 따른다는 것은 재창작에 제한을 두는 셈.[50] 대표곡 중 하나인 Juicy의 가사에 "Remember when I used to eat sardines for dinner"라고 언급된다.[51] 워낙 그 이름만큼이나 힙합 역사에서의 존재감이 크다 보니, 이후로는 어쩐지 미국 래퍼들 사이에서 (혹은 미국 랩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도) Biggy나 Biggie라는 단어를 자기 랩 네임에 사용하길 꺼리는 풍조가 생겼다.[52] 상단에 언급한 캐릭터인지 해당 랩네임을 먼저 사용하던 래퍼인지는 불명.[53] 1 2 3 영상[54] 이는 문서 상단 프로필에 기재된 왕관 사진을 촬영했을 당시의 카메라 필름에도 잘 나와있다. 필름을 보면 제대로 찍은 사진에는 눈이 중간으로 모여있지만, 중간에 장난식으로 웃으면서 찍은 사진을 보면 각 눈의 시선이 다른게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55]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래퍼이지만 미국에서는 꽤나 인지도 있는 래퍼이자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실제로 노토리어스와 퍼프 대디랑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생김새나 체격도 둘이 비슷하다.(자말이 키가 좀 더 크다.) 노토리어스의 역할을 맡기 위해 생전 노토리어스의 말투와 습관을 거의 완벽히 재현해내어 페이스 에반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할 정도.[56] 이후 투팍의 전기 영화 All Eyez On Me에서도 비기의 역을 그대로 맡았다.[57] 또한 앤서니 매키는 8 마일에도 파파 독 역으로 출현하였는데, 다름 아닌 B. 래빗 (에미넴)과 대립하는 배역이었다! 여러모로 힙합과 인연이 있는 배우.[58] 정확히는 비기가 피쳐링으로 참여해 1996년에 발매된 샤킬 오닐의 곡 'You Can't Stop the Reign'. 비기의 2번째 벌스가 차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