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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제플린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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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이름 |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 | |
헌액 부문 | 공연자 (Performers) | ||
멤버 | 지미 페이지, 로버트 플랜트, 존 폴 존스, 존 본햄 | ||
입성 연도 | 1995년 | ||
후보자격 연도 | 1995년 | ||
후보선정 연도 | 1995년 | }}}}}}}}} |
| |
{{{#!wiki style="margin: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6px" | 2004년 헌액 |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 섀도우즈 1960년대: 비틀즈, 롤링 스톤스 1970년대: 밥 말리, 퀸 1980년대: 마이클 잭슨, 마돈나 1990년대: U2, 로비 윌리엄스 | |
2005년 헌액 | |
핑크 플로이드 유리드믹스 아레사 프랭클린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 조이 디비전 / 뉴 오더 더 후 킹크스 블랙 사바스 오지 오스본 | |
2006년 헌액 | |
제임스 브라운 레드 제플린 로드 스튜어트 브라이언 윌슨 본 조비 프린스 더스티 스프링필드 조지 마틴 | }}}}}}}}} |
폴라음악상 수상자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992년 | 1993년 | 1994년 | 1995년 | 1996년 |
폴 매카트니 발트 3국 | 디지 길레스피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 퀸시 존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 엘튼 존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 조니 미첼 피에르 불레즈 | |
1997년 | 1998년 | 1999년 | 2000년 | 2001년 | |
브루스 스프링스틴 에릭 에릭슨 | 레이 찰스 라비 샹카르 | 스티비 원더 이안니스 크세나키스 | 밥 딜런 아이작 스턴 | 버트 배커랙 로버트 무그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 |
2002년 | 2003년 | 2004년 | 2005년 | 2006년 | |
미리엄 마케바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 키스 재럿 | 비비 킹 리게티 죄르지 | 지우베르투 지우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 레드 제플린 발레리 게르기예프 | |
2007년 | 2008년 | 2009년 | 2010년 | 2011년 | |
소니 롤린스 스티브 라이히 | 핑크 플로이드 르네 플레밍 | 피터 가브리엘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 엘 시스테마 | 비요크 엔니오 모리코네 | 크로노스 콰르텟 패티 스미스 | |
2012년 | 2013년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폴 사이먼 요요마 | 유수 은두르 카이야 사리아호 | 척 베리 피터 셀라스 | 에밀루 해리스 에벌린 글레니 | 맥스 마틴 체칠리아 바르톨리 | |
2017년 | 2018년 | 2019년 | 2020년 | 2021년 | |
스팅 웨인 쇼터 | 메탈리카 아프가니스탄 국립 음악 연구소 |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안네 소피 무터 플레잉 포 체인지 | 안나 네트렙코 다이앤 워런 | 없음 | |
2022년 | 2023년 | 2024년 | 2025년 | 2026년 | |
이기 팝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 | }}}}}}}}} |
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세기 수상자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000000> 1978년 | <colbgcolor=#fff,#1f2023>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
1979년 |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 |
1980년 |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카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 |
1981년 |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 |
1982년 | 조지 애벗, 릴리안 기쉬,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 |
1983년 |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 |
1984년 |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 |
1985년 |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 |
1986년 |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 |
1987년 |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 |
1988년 |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 |
1989년 |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 |
1990년 |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 |
1991년 | 베티 콤덴, 로이 아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 |
1992년 |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 |
1993년 |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 |
1994년 |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 |
1995년 |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포이티어, 닐 사이먼 | |
1996년 |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 |
1997년 |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 |
1998년 |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 |
1999년 |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 |
2000년 |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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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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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Artist Award |
1995년 |
레드 제플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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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제플린 (Celebration Day) | 약 20,000,000명 | 2007년 12월 10일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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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fff> |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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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1968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존 본햄, 로버트 플랜트, 존 폴 존스, 지미 페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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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1971년) 왼쪽부터 존 폴 존스, 존 본햄,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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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기 (1979년) 왼쪽부터 존 본햄,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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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Day에서의 재결성 당시 라인업 (2007년) 왼쪽부터 존 폴 존스,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
<colcolor=#333><colbgcolor=#DBC9B7> 국적 | [[영국| ]][1] |
결성 | 1963년 5월[2] 1968년 7월 20일[3] |
잉글랜드 런던 | |
데뷔 | (미국 데뷔일로부터 [dday(1969-01-12)]일째) |
(영국 데뷔일로부터 [dday(1969-03-22)]일째) | |
데뷔 앨범 | |
해체 | 1980년 12월 4일 |
재결성 | 1985년, 1988년, 1995년, 2007년 |
멤버 | 지미 페이지 (기타) 로버트 플랜트 (보컬) 존 폴 존스 (베이스, 키보드 등) 존 본햄† (드럼) |
전 멤버 | 크리스 드레야 (베이스)[4] |
장르 | 록, 팝, 하드 록, 블루스 록, 포크 록,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소프트 록[5] |
레이블 | |
| |
|
[clearfix]
1. 개요
|
2. 상세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켰던 밴드 중 하나인 야드버즈가 전신이며, 야드버즈에서 마지막까지 몸담고 있던 지미 페이지가 1968년에 유능한 세션맨들을 영입하여 결성된 슈퍼밴드에 준하는 밴드이다.[6] 1969년 1월 역사상 가장 강렬한 데뷔 앨범이라고 불리는 1집 Led Zeppelin을 발매했고, 동년 발표한 Led Zeppelin II는 그 유명한 비틀즈의 Abbey Road와 빌보드 차트 경쟁을 했을 정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7] 이후 밴드가 해체된 198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록밴드 중 하나로서 하드 록의 대중화와, 헤비 메탈 장르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레드 제플린에 대해 잘 모르면 그저 가장 성공한 록 밴드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들은 하드 록, 블루스 록, 프로그레시브 록, 포크 록, 소프트 록, 레게 등 수많은 장르들을 시도한 록밴드였다.[8]이들은 더 후, 크림,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딥 퍼플, 블랙 사바스 등의 밴드들과 더불어 블루스 혹은 블루스 록이 하드 록 및 헤비 메탈로 발전하는 데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초창기 헤비 메탈의 3대 밴드로 딥 퍼플, 블랙 사바스와 함께 꼽히는데, 그중에서도 레드 제플린은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밴드로서[9]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만큼 하드 록, 메탈 음악과 이 장르들의 영향을 받은 얼터너티브 록을 하는 밴드 중 이 밴드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밴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대표적으로 퀸이나 러시, 너바나 같은 후대의 하드 록 및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은 레드 제플린의 곡을 커버하면서 연주 실력을 키우고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비틀즈, 롤링 스톤스, 더 후 등의 밴드가 주도했던 1차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미국 내에서 미국 밴드들이 인기를 얻는 와중에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킨 밴드이기도 하다.
단순한 음악적 평가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영향력 역시 대단하다고 평가받는데, 멤버 개개인들의 최정상급 역량은 후일 록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드 록, 헤비 메탈 가창법의 역사가 로버트 플랜트 전후로 나뉘고, 지미 페이지는 에디 밴 헤일런과 함께 메탈 기타 연주법의 창시자로 불리고 있으며, 존 폴 존스의 베이스 주법은 후대의 수많은 베이시스트들에게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나 존 본햄의 드럼은 드럼의 역사를 거론할 때 절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유명하다.
레드 제플린은 음악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부분에서도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역대 음반 판매량이 공식적으로 약 3억 장 이상으로, 역사상 6번째로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이다.[10] 록밴드에만 국한한다면 비틀즈에 이어 2위이며[11], 약 2억 5천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으로 역대 록밴드 판매량 순위 3위를 기록한 핑크 플로이드와는 무려 약 5천만 장이나 차이가 난다. 또한 하드 록으로만 범위를 한정시킨다면, 약 2억 장의 판매량을 기록한 AC/DC를 제외한 나머지 밴드들은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성공하였으며, 특히 미국에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둬 현대까지도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록밴드 순위에서 종종 1위에 오르곤 한다.[12] 또한 이들은 비주얼도 출중하였기에 활동 당시 롤링 스톤스와 함께 가장 많은 수의 그루피 부대를 끌고 다녔던 밴드였다.
해체한지 40년이 넘어가고 정규 앨범도 8장밖에 되지 않으며[13], 활동 기간도 공백기를 제외하면 10년이 채 안 되는, 유명 록밴드들 중 굉장히 짦은 축에 속하지만[14], 대중음악과 록 음악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밴드라고 평가받는다. 음악 평론가들에게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어느 리스트던간에 최고의 록밴드를 뽑을때 5위 밖으로 빠지는 일이 드물 정도로 높은 음악적인 평가를 받는다.[15] 후술할 표절 논란 때문에 오리지널리티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 음악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키고 하드 록과 메탈의 가장 상징적인 뮤지션으로서 영국은 물론 록 음악 그 자체를 대표하는 뮤지션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3. 상징
3.1. 밴드명
레드 제플린은 원래 "레드 제플린"이 아니었다. 전신인 야드버즈의 이름을 따서 "뉴 야드버즈"로 불렸었고, 심지어 1집을 다 녹음했을때도 밴드 명이 "뉴 야드버즈"였다. 그러나 야드버즈의 전 멤버이자, 지미 페이지의 친구이기도 했던 크리스 드레야가 해당 이름이 독창성이 떨어진다면서 반대하여, 새 이름을 물색하고 나섰다.이후 지미 페이지, 로버트 플랜트가 더 후의 멤버였던 키스 문과 대화를 했을때, 짖궂은 성격의 키스 문이 "너네 밴드는 납으로 만든 풍선처럼 추락할거야"라고 하며 "Lead Balloon"을 언급했다. 그때 옆에 있던 존 엔트위슬이 "납으로 만든 비행선"(Lead Zeppelin)이라고 외치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밴드 멤버들이 그대로 이걸 밴드의 이름으로 붙였다.
여기서 "Lead"는 "Led"가 되었는데, 이는 미국식 영어의 발음 때문이었다. 영국식 영어로 "Lead"는 "레드"로 발음되었지만, 미국에서는 "리드"로 읽었기 때문에 지미 페이지가 미국 사람들이 밴드 명을 잘못 읽을 것을 고려하여 Lead에서 a자를 빼버렸다. 이후로 이 밴드명은 레드 제플린이 해체할 때까지 존속했다.
한국 팬들에게는 레젭으로 줄여서 불리며, 해외 팬들에게는 제플린(Zeppelin)으로 줄여 부른다.
3.2. 로고
| |
글씨체 로고 | |
| |
멤버 심볼 | 천사 로고 |
멤버들의 심볼은 1971년 Led Zeppelin IV 앨범 발매와 동시에 공개되었다. 왼쪽부터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 존 본햄 그리고 로버트 플랜트를 상징한다. 영어로는 "Four Symbols"라고도 한다. 수수께끼 같은 디자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추측했지만, 페이지와 플랜트 둘 다 "별 의미 없고 그냥 멋있어보여서 쓴거다"(...)라고 답했다. 지미 페이지의 로고는 지미 페이지가 직접 디자인 했으며, 로버트 플랜트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존 폴 존스와 존 본햄은 고대 기독교의 삼위일체 상징에서 디자인을 따왔다.
이 두가지 로고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비행선 로고를 썼었다. 이는 1집과 2집의 초판 뒷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당 로고는 1집의 커버 디자인 후보였는데, 지미 페이지가 탈락시킨 것을 레이블사가 설득하여 재활용(...)한 것이다. 지미 페이지를 비롯한 모든 멤버들이 해당 로고를 싫어했기 때문에 3집에서 해당 로고는 버려지고, 이후 천사 로고가 사용되었다.
이 천사 로고는 위의 심볼이나 글씨체만큼 자주 사용되지는 않지만, 무척 간지가 나는 탓에 타투와 티셔츠, 머그잔 등에서 절찬리에 활용되는 중이다. 로고의 원본이 된 그림은 아폴론을 그린 것이었지만,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의 과거 종교 성향[16] 때문에 루시퍼를 나타낸게 아니냐는 헛소문이 돌았다. 이후 레드 제플린의 홈페이지가 개설되면서 해당 그림은 타락 천사인 이카루스를 형상화한것이라고 정정되었다.
멤버 심볼은 지미 페이지의 심볼이 알파벳 "Zoso"와 비슷해서 팬들 사이에서는 그냥 편하게 "Zoso"라고 자주 불린다. 또한 이 Zoso라는 명칭은 제목 대신에 이들의 심볼이 적혀있는 Led Zeppelin IV 앨범의 애칭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4. 멤버
레드 제플린의 구성 멤버 | ||
지미 페이지 Jimmy Page | ||
<colbgcolor=#CCBBAA><colcolor=#000> 출생 | 1944년 1월 9일 ([age(1944-01-09)]세) | |
출신지 | [[잉글랜드| ]] 미들섹스 해스턴 | |
활동 | 1968년 - 1980년 | |
포지션 | 기타 | |
로버트 플랜트 Robert Plant | ||
출생 | 1948년 8월 20일 ([age(1948-08-20)]세) | |
출신지 | [[잉글랜드| ]] 웨스트브로미치 스테포드셔 | |
활동 | 1968년 - 1980년 | |
포지션 | 보컬 | |
존 폴 존스 John Paul Jones | ||
출생 | 1946년 1월 3일 ([age(1946-01-03)]세) | |
출신지 | [[잉글랜드| ]] 켄트 시드컵 | |
활동 | 1968년 - 1980년 | |
포지션 | 베이스, 건반 등 | |
존 본햄 John Bonham | ||
생몰 | 1948년 5월 31일 - 1980년 9월 25일 (향년 32세) | |
출신지 | [[잉글랜드| ]] 우스터셔 레디치 | |
활동 | 1968년 - 1980년 | |
포지션 | 드럼 | |
|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음악적 역량이 뛰어난 4명이 합친 밴드로 평가받는다. 어느 정도냐면 멤버 전원이 각자의 분야에서 역량으로 TOP 5 안에 가뿐히 들어간다. 그중에서도 존 본햄은 무조건 1위에 선정되고 지미 페이지는 저평가를 받더라도 최소 세 손가락 안에는 무조건 꼽히며, 존 폴 존스나 로버트 플랜트도 록 음악의 범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무조건 들어간다.[17] 게다가 존 폴 존스는 베이시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키보디스트로도 올타임 레전드로 평가받는다.[18] 인간 흉기들의 모임인 더 후나 크림조차 레드 제플린에 비하면 멤버 개개인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 지미 페이지는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쇼팽과 같은 음악가의 클래식 곡까지 일렉트릭 기타로 편곡해 연주할 정도의 어마무시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넘사벽인 지미 헨드릭스를 빼면 지미 페이지 위에 있는 하드 록 기타리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19] 또한 메탈 계열 한정으로는 지미 페이지를 넘어서거나 동급인 기타리스트가 없다는 말도 나온다.[20]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뽑는 투표에서도 대체로 지미 페이지는 2위나 3위[21]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괜히 에릭 클랩튼, 제프 벡과 함께 세계 3대 기타리스트로 불리는게 아니다.[22] 하드 록의 기타 연주법은 지미 페이지의 전후로 나뉘며, 헤비 메탈의 기타 연주법도 이 사람이 없었다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대중음악 종사자이자 기타 연주자로서 그는 브라이언 메이나 앵거스 영 같은 전설적인 하드 록 기타리스트들보다도 더 방대한 영향을 끼쳤다.
- 로버트 플랜트는 로니 제임스 디오, 믹 재거, 프레디 머큐리, 로저 달트리, 이안 길런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로버트 플랜트를 제외하고는 하드 록, 헤비 메탈 보컬의 역사가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수많은 록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심지어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의 팝 가수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보컬이다. 맑은 미성을 바탕으로 굵직하게 긁어서 처리하는 중음과 날카롭고 선명한 두성으로 처리하는 고음이 트레이드 마크. 때문에 맑은 미성과 거친 탁성이 공존하는 모순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음역대 또한 매우 넓어서[23] 전성기 때는 0옥타브 대의 저음과 4옥타브 대의 고음을 안정적으로(!) 구사하였다. 1973년 이후에는 무리한 창법과 부족한 관리 때문에 목이 많이 나가서 1969~1972년에 보여줬던 마성적인 역량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이후 창법을 바꾸고 꾸준히 관리를 한 덕에 70이 넘은 지금까지 3옥타브는 손쉽게 넘나들고 가끔 4옥타브까지 내다지르는 놀라운 발성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플랜트-페이지의 일원답게 송라이팅에도 능했는데, 그는 특히 작사에 일가견이 있었다. Stairway to Heaven, Kashmir 등 레드 제플린의 대표곡들은 전부 그가 작사를 맡았는데, 이 곡들은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가사를 뽑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곡들이기도 하다.
- 존 폴 존스는 존 엔트위슬, 잭 브루스, 폴 매카트니, 브라이언 윌슨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베이시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천방지축으로 날뛰어다니는 3명의 연주를 조용히 뒷받침해줘 하나의 통일성 있는 곡으로 만들어준 것은 존 폴 존스의 영향이 컸다. 또한 베이시스트로서의 평가뿐만 아니라 키보디스트로서도 존 로드 등과 함께 최고의 하드 록, 메탈 키보디스트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수많은 악기들을 수준급으로 다루기에 폴 매카트니, 브라이언 존스, 브라이언 윌슨, 게디 리, 프린스와 함께 최고의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를 꼽을 때 항상 거론되는 전설적인 멀티 플레이어다. 이처럼 다양한 악기를 아우르는 그의 능력은 밴드의 3집에서부터 빛을 발했으며 그중에서도 4집, 5집, 6집 세 앨범이 위대한 앨범이 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더 나아가 8집 앨범은 본인이 직접 주도권을 잡고 작곡하여 빌보드 200과 UK 차트에서 전부 1위를 차지할 만큼 작곡 능력도 뛰어나다.
- 존 본햄은 이견이 없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로 평가받는다. 드럼계에서 이 사람의 입지는 기타계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입지와 같다.[24] Moby Dick과 같은 곡을 들어보면 왜 그가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리스트에서 최고의 드러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본인의 친구인 키스 문과 함께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드러머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도 드럼을 음악의 주요 요소로 끌어올렸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드럼 연주법의 상당수를 정립했다는 점에서 매우 고평가받는다.
이 4명은 핑크 플로이드나 퀸처럼 대학교 밴드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비틀즈나 더 후처럼 고등학교 밴드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야드버즈 해체 직전 지미 페이지가 밴드를 살리기 위해 당시 영국에서 실력을 인정받던 세션맨들을 영입하여 모인 것이었기에 각각 출생지도 다 다르다.[25] 즉 슈퍼밴드에 준한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슈퍼밴드가 짧게는 하루에서,[26] 길게 가도 3년을 채우기가 어려운데, 무려 12년 동안이나 유지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27] 멤버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최상이었기 때문에, 멤버들의 역량은 매우 뛰어나면서도 동시에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하며 통일성도 갖추게 된 것이다.
레드 제플린은 퀸, 핑크 플로이드와 마찬가지로 영국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미들클래스 출신의 록밴드인데,[28]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 모두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상당히 부유한 어린 생애를 보냈으며, 특히 로버트 플랜트는 원래 회계사를 준비했을 만큼 머리도 좋았다. 밴드 멤버들중에서 워킹클래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존 본햄 뿐이다.
4.1. 플랜트-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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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트-페이지 (Earls Court 1975) |
5. 역사
1968년. 극초창기 시절 찍은 사진이다. | 1973년. 배경은 전용기인 Starship이다. |
1979년. 네브워스 공연 당시로, 해체 1년 전의 모습이다. | 2007년. 재결성 공연 당시의 사진. |
1970년 로열 앨버트 홀 공연에서의 "Whole Lotta Love" 연주. | 19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서의 "Stairway to Heaven" 연주. |
1979년 네브워스 공연에서의 "Kashmir" 연주. | 2007년 런던 O2 아레나에서의 "Rock and Roll" 연주. |
6. 평가와 영향력
7. 인기
언론에 의도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멤버들 개개인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역량, 헤비하면서도 세대를 아우르는 하드 록, 하드 록 외에도 다양한 장르들을 시도했던 점 등 때문에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가장 인기있는 록밴드로 자리잡고 있다. 활동 당시 밴드의 별명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밴드’였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했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메탈 음악에 빠지는 젊은 세대들이나 기타라는 악기를 접하고 록 음악을 접하는 이들에게 록 음악 역사상 가장 화려한 연주를 보여주는 밴드 중 하나인 레드 제플린은 정말 아이돌같은 인기를 가지고 있다.[29]1970년대 레드 제플린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해, 1970년대 총 앨범 판매량을 정산할때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았다.[30] 이는 퀸, 핑크 플로이드, 폴 매카트니 등 1970년대에 인기 있던 다른 음악가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다.[31] 하드 록/메탈 계열 밴드 중에서 레드 제플린은 독보적인 음악 판매량 1위이다. 흔히 3대 클래식 메탈로 불리는 밴드중 레드 제플린을 제외한 블랙 사바스와 딥 퍼플의 앨범 판매량을 합쳐도 레드 제플린의 절반밖에 되지 않을 정도다. 하드 록 계열 밴드중 판매량 2위인 AC/DC의 앨범 판매량이 약 2억 장인데 레드 제플린의 앨범 판매량은 약 3억 장으로 AC/DC를 무려 1억 장 차이로 상회한다. 또한 레드 제플린은 정규 앨범이 고작 8장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15장의 정규 앨범이 있는 핑크 플로이드와 퀸, 그리고 23장의 정규 앨범이 있는 롤링 스톤스보다도 약 1억 장 정도나 더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 특히 미국에서의 인기가 엄청났기에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기도 했다.[32][33]
70년대에 활동한 밴드라 베이비 부머 세대들에게만 인기가 높을 것 같지만,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헤비한 사운드를 선호하는 현 젊은 세대들에게도 높은 인기를 자랑한다. 비틀즈, 퀸 등과 함께 현 세대들에게 인기 있는 록밴드 top 3 안에는 꼭 들어간다. 심지어 인터넷 투표나 잡지 독자 투표에서는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퀸이나 핑크 플로이드는 물론이고 영향력과 시기상 레드 제플린보다 선배인 비틀즈나 롤링 스톤스보다도 더 많은 표를 받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2018년 월스트리트 저널의 통계 산출에 의해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록밴드' 순위를 매겼는데, 레드 제플린은 여기서 2위를 기록했다.[34]#
단순한 대중적 인기 뿐만 아니라 록 전문가들 중에서도 팬들이 아주 많다. 어느 리스트에나 레드 제플린은 위대한 아티스트 top 20 안에는 무조건 들어가며, 하드 록이나 메탈로만 한정할때는 1위를 하는 경우가 잦다. 또 록 밴드로 한정할때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다음의 위치를 핑크 플로이드와 라디오헤드와 함께 3위 자리를 노린다. [35] 또한 음악가들 중에서도 팬들이 아주 많은데, 자세한 것은 후술할 ‘유명한 팬들’ 문단 참조. 그런만큼 메탈, 하드록 입문자들에게 추천 아티스트로 많이 언급된다. 유명한 영화인 스쿨 오브 락에서도 주인공이 록 음악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36]
영국 밴드이지만 미국에서 더욱 큰 성공을 거뒀고, 지금도 영국보다는 미국에서 더 큰 사랑을 받는 밴드이다. 헤비 메탈의 역사를 거론할때도 영국 음악계에서는 대체로 블랙 사바스를 메탈의 시초로 보지만, 미국에서는 레드 제플린을 메탈의 시초로 보는 의견이 더 많다. Led Zeppelin IV 역시 영국에서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도 미국인들의 레드 제플린 사랑은 유별나서, 20대들을 대상으로 한 "인기있는 록밴드" 투표에서도 언제나 3위권 안에 들고, 미국의 케이블 음악 채널 VH1이 조사한 "최고의 하드 록 밴드" 투표에서도 레드 제플린이 압도적인 표차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이는 1980년대 미국에서 건즈 앤 로지스나 밴 헤일런, 메탈리카 등 여러 헤비 메탈 밴드들이 아주 큰 인기를 끌었던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퀸은 미국에서는 인기가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영국에서는 매우 인기있는 밴드다. 당연하지만 영국에서의 레드 제플린 인기도 매우 높은데, 이를 반영하듯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폐회식 당시 다음 개최지인 런던을 소개하는 무대에서 지미 페이지가 초대받아 Whole Lotta Love를 연주하기도 했다.
한편 의외로 빌보드 핫 100에서는 신통찮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내 인기는 한참 아래였던 퀸도 빌보드 핫 100 1위 곡은 2개를 냈고, 핑크 플로이드도 1개의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냈는데, 레드 제플린의 빌보드 핫 100 최대 기록은 Whole Lotta Love가 기록한 3위였다. 이는 레드 제플린이 싱글 발매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하더라도 제한적으로 발매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37] 레드 제플린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 초중반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빌보드 경쟁이 그 어느때보다 치열했던 시기 한 가운데에 껴있음을 감안해야한다.[38] 그중에서도 레드 제플린이 전성기를 누린 1970년대 초중반은 1980년대 중반과 더불어, 레전드급 아티스트들의 차트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다. 핑크 플로이드, 퀸, 롤링 스톤스, 더 후, 제네시스, 스티비 원더, 데이비드 보위, 비 지스, 딥 퍼플, 윙스, 밥 딜런, 폴 사이먼까지 대중음악 그 자체를 만든 뮤지션들이 그야말로 폭탄처럼 명반과 명곡을 쏟아내던 시기가 바로 1970년대 초중반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터 그랜트와 지미 페이지는 앨범 판매량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해 싱글 발매를 무척 꺼리던 경향이 있었다.[39]
레드 제플린은 역사상 3번째로 많은 RIAA 다이아몬드(1,000만장) 인증 판매고를 올린 앨범을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총 5회이며 Led Zeppelin II, Led Zeppelin IV, Houses of the Holy, Physical Graffiti, Led Zeppelin Boxed Set이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았다. 참고로 1위는 9회를 올린 가스 브룩스, 2위는 6회를 올린 비틀즈이다. 이 외에 2회 이상의 RIAA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은 아티스트가 별로 없다.[40]
7.1. 한국에서의 인지도
세계적으로는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세대를 가리지 않고 레드 제플린을 잘 알고 있으나, 록 불모지인 국내에서는 가뜩이나 인지도가 적은 록 아티스트 중에서도 롤링 스톤스, 프린스, 더 후, AC/DC. U2와 함께 더욱 인지도가 낮은 대표적인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41] 이는 레드 제플린의 활동 시기인 1970년대 당시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인 사회 정책으로 인해 레드 제플린의 곡이 철저히 검열당했으며, 후술하겠지만 내한 공연조차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레드 제플린의 각종 히트곡들이 방송 프로그램들에 자주 쓰이며 전술한 밴드들에 비해 인지도는 조금 올라간 건 사실이다.[42][43] 그렇기에 레드 제플린 활동 당시 월드 투어를 할 때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수많은 밴드들처럼 아시아 투어는 일본까지밖에 오지 않았다.[44]이처럼 일반인들이나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 인지도는 낮을 수 있지만 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밴드들 중 하나인 만큼 한국의 록덕후들은 뼛속까지 잘 알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서는 모르면 간첩 취급을 받는 밴드이기도 하다. 또한 70년대와 80년대 팝 음악을 향유하던 세대들에게는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45] 대한민국 록 음악 계보의 2세대인 시나위, 부활, 백두산 같은 메탈, 하드 록 밴드들에게는 성서처럼 받들여지는 밴드이며, 특히 김태원은 지미 페이지의 기타 연주를 보면서 음악을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각종 예능, 영화에 Immigrant Song이 BGM으로 자주 삽입되었으며, Stairway to Heaven, Whole Lotta Love, Rock and Roll, Black Dog같은 곡들은 유명 팝 아티스트들과 국내 가수들도 많이 커버한 곡인지라 록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노래이기에, 레드 제플린의 히트곡들을 들려주면 젊은 세대들도 아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말하자면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 개봉 전의 퀸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46] 현재 떡밥만 나오고 있는 레드 제플린의 전기 영화가 제작되어 국내에 개봉한다면 퀸처럼 국내에도 잘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47]
또한 밴드 인지도 자체는 낮지만, 악기를 배우는 사람들은 ‘레드 제플린’이라는 밴드는 몰라도 개별 멤버들은 알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기타를 배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 바로 지미 페이지이며[48], 드럼을 배우는 사람들은 전부 존 본햄이 확립한 주법들을 배운다.[49] 로버트 플랜트는 헤비 메탈 보컬의 대명사로 꼽히며, 존 폴 존스의 베이스 라인은 하드 록, 블루스 록을 연주하면서 한 번은 연주하고 넘어가야 할만큼 중요하다보니[50] 알 사람들은 다 아는 편이다.
종합하자면 레드 제플린은 더 후, U2, 롤링 스톤스만큼 국내에서의 인지도가 극도로 낮은 밴드는 아니지만, 록 불모지인 한국답게 세계 시장에서만큼 인기가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앨범이 아닌 곡으로 록밴드들에 입문하는 한국 특성상 Stairway to Heaven, Babe I'm Gonna Leave You, Immigrant Song 등의 명곡들은 인기가 많은 편이다. 또한 젊은 록 팬들한테도 인기가 많은 해외와는 다르게 레드 제플린은 주로 7080 록덕후 세대들에게 인기가 많으며, 국내의 젊은 세대들은 일부 히트곡들을 제외하면 밴드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곡도 이게 레드 제플린의 곡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록 음악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70년대와 80년대에 라디오 혹은 빽판으로 록 음악을 듣던 세대들에게는 록밴드 중에서도 레드 제플린, 퀸, 핑크 플로이드, 딥 퍼플의 음악을 좋아하고 즐겨 들었다는 증언들이 많다.
7.1.1. 내한 공연
1960 — 70년대 활동 당시부터 2021년 현재까지 생존한 레드 제플린의 멤버 3명이 단체로 내한 공연을 했던 적은 없으나, 내한 공연이 개최될 뻔했던 적은 있다. 1970년대 중반, 즉 레드 제플린의 전성기 시절 한 회사에서 레드 제플린의 내한 공연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70년대 중반, 즉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정부는 레드 제플린이 청년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험한 밴드라며[51] 멤버들이 머리를 전부 밀고 오면 내한 공연을 허가해준다며 엄포를 놓았으며[52], 당연히 레드 제플린의 처음이자 유일한 내한 공연 추진 시도는 이렇게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었다. 만약 레드 제플린 급의 거대 밴드가, 심지어 전성기 시절에 내한 공연을 했다면, 한국 록 음악의 역사 역시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53] |
내한 공연에서의 존 폴 존스. |
그런데 2019년 9월 2일 레드 제플린 멤버 중 처음으로 존 폴 존스가 기습적으로 내한 공연을 개최하였다. 존 폴 존스 본인이 결성한 2인조 밴드 ‘선스 오브 치폴레’의 동북아 투어 일환으로 내한 공연을 한 것인데, 심지어 유료 공연이었던 일본 공연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무료로(!) 공연을 열었다.[54] 개최된 내한 공연은 이메일로 미리 예약한 100명의 관객들만 관람할 수 있었으며, 셋리스트를 미리 정한 것이 아닌 즉흥 연주로 진행되었다. 내한 당시 존 폴 존스는 “한국에서 공연할 수 있게 되어 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공연이 끝나고 존 폴 존스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사진도 찍는 등 국내의 레드 제플린 팬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다른 멤버들의 내한 공연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나, 2020년 코로나 19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다른 멤버들의 내한 여부는 불투명해졌다.[55]
7.2. 유명한 팬들
- 믹 재거
레드 제플린의 하드한 음악을 좋아하여 1960년대부터 이들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믹 재거는 시간이 나면 레드 제플린의 전성기 시절에 이들의 콘서트를 보러 왔으며, 후술하듯이 이들의 라이브를 칭찬했다. 2007년 재결성 공연도 관람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들이 재결성 공연을 딱 한 번만 하고 이후에는 레드 제플린으로서 활동을 하지 않은것에 대해 레드 제플린의 팬으로서 매우 실망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전 세계의 제플린 팬들도 같은 마음이다
- 로저 달트리
로저 달트리는 레드 제플린의 선배격인 더 후의 보컬리스트이지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록스타로 로버트 플랜트를 꼽을 정도로 레드 제플린을 좋아한다고 한다. 위의 믹 재거와 마찬가지로 이쪽도 레드 제플린의 전성기 시절에 간간히 이들의 콘서트를 보러 왔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로저와 콤비를 이루는 피트 타운젠드는 레드 제플린을 싫어한다.
- 퀸
퀸 멤버 전체가 레드 제플린의 광팬이었으며, 특히 프레디 머큐리는 로버트 플랜트를 매우 존경하였고 보컬적인 부분에서 로버트 플랜트에게 영향도 많이 받았다. 브라이언 메이 또한 초등학교 선배이자 같은 동네 동향인 지미 페이지를 존경하여 레드 제플린의 곡들을 커버하면서 실력을 키웠으며, 로저 테일러는 존 본햄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고, 존 디콘 또한 존 폴 존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퀸 멤버들은 아예 Innuendo라는 노래를 작곡하여 레드 제플린에게 바치기도 했다.
- 너바나
커트 코베인은 생전 페미니스트였기에 인터뷰에서는 레드 제플린의 곡에는 여성 혐오적인 가사가 많기 때문에 레드 제플린을 싫어한다고 했으나,[60] 너바나 데뷔 전 Immigrant Song 등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커버하면서 실력을 키웠고, 너바나 데뷔 후에도 공연에서 Heartbreaker, How Many More Times, Dazed and Confused 등 레드 제플린의 수많은 곡들을 커버하는 등 찐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머지 멤버들도 레드 제플린의 팬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데이브 그롤은 레드 제플린을 신으로 숭배한다고 할만큼(…) 레드 제플린의 팬이라고 한다.
- 밴 헤일런
에디 밴 헤일런이 라이브에서의 지미 페이지는 기타를 못 치는 아기들처럼 연주한다고 극딜(…)한 인터뷰는 매우 유명하지만,[61] 정작 에디 자신은 레드 제플린의 팬이었다. 또한 실제로 그는 지미 페이지와 친분이 있어서 같이 찍은 사진들도 존재하며, 에디가 별세했을 때 지미 페이지는 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며 추모하기도 했다. 보컬리스트인 데이비드 리 로스 또한 레드 제플린의 팬이었으며, 라이브 공연에서 Rock and Roll 등 레드 제플린의 수많은 곡들을 커버하였다.
- 레이디 가가
후술할 말말말 문단에서도 볼 수 있듯이, 레이디 가가는 레드 제플린과 퀸의 엄청난 팬이다. 공연에서 D’yer Mak’er, Black Dog 등 레드 제플린의 노래들을 많이 커버했으며, 음악적으로도 이 두 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인이 직접 언급하였다.
- 잭 블랙
잭 블랙이 AC/DC와 레드 제플린의 광팬이라는 사실은 영미권에서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며, 푸 파이터스가 Immigrant Song을 커버할 때 객원 보컬로 참여해서 훌륭한 보컬을 보여준 바 있다.
- 김종서
보컬 부문에서 로버트 플랜트에게 영향을 짙게 받았으며, 레드 제플린의 신봉자 수준으로(…) 레드 제플린의 광팬이다. 또한 여러 방송 프로그램이나 공연에서 레드 제플린의 곡들을 수없이 커버하였으며, 자신의 노래를 부를 때보다 더 잘 부른다는 말도 나온다(…). 아시아에서 로버트 플랜트와 가장 유사한 보컬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겐키 히토미
일본의 록밴드인 VOW WOW의 보컬리스트로, 보컬 부문에서 1집 시절의 로버트 플랜트에게 영향을 짙게 받았다. VOW WOW 시절에는 Communication Breakdown 등 레드 제플린의 여러 곡들을 커버하였으며, 영어 교사로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Rock and Roll 등 레드 제플린의 여러 곡들을 커버해서 들려주기도 한다.[62] 위의 김종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로버트 플랜트와 가장 유사한 보컬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제임스 롤프
록덕후인 제임스 롤프답게 레드 제플린의 어마어마한 팬으로 유명하다. 당장 제임스 롤프 문서의 프로필 사진에서 롤프가 입고 있는 티셔츠가 레드 제플린의 티셔츠이다(…). 또한 그는 The Song Remains the Same을 리뷰하면서 레드 제플린 앨범 전집을 모은 것을 인증하기도 했다.[63]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소련은 영미권의 록 음악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소련 시절 때부터 메드베데프는 어마어마한 록덕후였어서 레드 제플린뿐만 아니라 딥 퍼플, 블랙 사바스같은 다른 록밴드들의 음악들도 몰래몰래 즐겨 들었다.
- 한동훈
한동훈과 35년 지기인 A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동훈은 학창시절 때부터 재즈, 블루스, 록 음악을 모두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레드 제플린을 좋아했다고 한다. 레드 제플린 외에는 비틀즈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며, 지미 헨드릭스도 좋아했다고.
- 도널드 트럼프
고전 록 음악을 좋아하는 도널드 트럼프답게 레드 제플린도 좋아한다고 한다. 2020년에는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의 사이를 중재하면서 이들의 악화된 관계를 정상화할 평화 협정을 발표하기도 했다.
8. 시도한 음악 장르
9. 논란 및 사건 사고
10. 밴드 관련 인물
10.1. 밴드 관계자
- 피터 그랜트 (Peter Grant)
비틀즈에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있다면, 레드 제플린에는 피터 그랜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피터 그랜트는 본래 영화 배우로, 1958년판 타이타닉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음악 산업에 관심을 가져 야드버즈와 제프 벡 그룹의 매니지먼트를 맡으면서 음악 매니저 활동을 시작했다. 야드버즈가 레드 제플린으로 재편된 이후에도 레드 제플린의 매니저 역할을 맡았다. 그는 레드 제플린의 앨범 홍보, 싱글 발매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앨범 판매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싱글 발매를 자제했다. 또 방송 출연과 불법 해적판 적발[64]에도 크게 기여해, 레드 제플린의 인기는 피터 그랜트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또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매니저 뿐만이 아니라 멤버들과 사적 친분도 있었다. 존 폴 존스는 피터 그랜트는 겉 모습만 흉악해보이지 실제로는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라고 평한 적 있었고, 특히 지미 페이지와는 매우 친했다. 안타깝게도 1995년 서식스주에 위치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려졌으며, 6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되었다.
- 에디 크라머 (Eddie Kramer)
남아공 출신의 레코딩 엔지니어로 1,2,3,4,5집의 총괄 엔지니어를 맡았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와의 협력 관계가 가장 유명하며, 이 외에도 KISS, 피터 프램튼, 알카트래즈의 프로듀싱과, 로드 스튜어트, 비틀즈, 롤링 스톤스 등의 레코딩 엔지니어로 활동했다. 2007년에는 레드 제플린의 패러디 밴드인 레즈 제플린(Lez Zeppelin)의 프로듀싱을 맡기도 했었다.
- 조지 치언츠 (George Chkiantz)[65]
영국의 레코딩 엔지니어로 상술한 에디 크라머와는 동료 관계였다. 1960년대 스몰 페이시스의 레코딩 엔지니어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유수의 록밴드 및 아티스트들과 협력하였다. 그는 지미 헨드릭스의 전용 레코딩 엔지니어였을 정도로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유명했던 실력파 엔지니어였다. 지미 헨드릭스는 그의 엔지니어링 기술을 "꿈에서 듣던 소리"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소문을 들은 지미 페이지가 2,4,5,6집의 엔지니어가 되달라고 요청하여 해당 앨범들의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 외에도 킹 크림슨, 롤링 스톤스의 엔지니어로 일하기도 했다.
- 앤디 존스 (Andy Johns)
- 힙노시스 (Hipgnosis)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의 앨범 커버 디자인 회사이다. 폴 매카트니, AC/DC, 스콜피온즈,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등 수많은 밴드 및 음악가들과 협연하였고 그 중에서도 핑크 플로이드 및 레드 제플린과 함께했던 활동이 가장 유명하다. 힙노시스 소속의 디자이너들은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과[66] 어릴 때부터 친한 소꿉친구였으며, 1968년 핑크 플로이드가 이들에게 앨범 자켓 디자인을 요청한 이래 1980년대까지 앨범 커버 제작을 전문하였다. 1971년 Meddle 커버로 일약 인기를 얻은 이후, 레드 제플린측에서 힙노시스에 관심을 가지고 Houses of the Holy의 앨범 커버 디자인을 의뢰한 이후, 레드 제플린과 힙노시스는 밴드 해체 때까지 같이 활동했다. 이 외에도 힙노시스에 의해서 Presence, The Song Remains the Same, In Through the Out Door 등의 커버가 제작되었고, 이 커버들은 독특하면서도 인상적인 것으로 현재까지 고평가받고 있다.
10.2. 투어 및 세션 멤버
- 제이슨 본햄 (Jason Bonham)
존 본햄의 아들이다. 무려 4살 때부터 드럼을 쳤다. 미국의 하드 록 밴드 포리너에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멤버로 있었고, 마이클 솅커로 유명한 영국의 헤비메탈 밴드 UFO에서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잠깐 드러머로 소속되어 있었다. 이 외에는 마이클 잭슨, 새미 헤이거[67]와도 같이 활동했다. 그는 1987년과 1996년 재결성 공연에서 드럼을 맡았으며, 2007년 Celebration Day 재결성 공연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옛 동료들과 함께 레드 제플린의 곡들을 연주했다. 이후 뉴 레드 제플린 프로젝트 출범시 드러머로 고려되었지만 당초 보컬로 예상되었던 스티븐 타일러가 불참하고 레드 제플린의 옛 팬들이 로버트 플랜트 없는 레드 제플린은 말도 안된다며 항의하여 현재는 없는 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세션 드러머로서 활동하고 있다.
- 필 콜린스 (Phil Collins)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네시스 소속의 드러머이자, 1980년대를 풍미한 전설의 팝 음악가이다. 헤비 메탈, 포크, 블루스 성향인 레드 제플린과 별 접점이 없었지만[68], 존 본햄 사후 영국 내에서 가장 실력있던 드러머로 정평이 나있었던 만큼 차후 멤버로 고려되었다. 또 필 콜린스는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 드러머로 뛰며[69] 레드 제플린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 객원 드러머를 맡았으나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레드 제플린 사상 최악의 공연으로 불리는 만큼, 팬들 사이에서 필 콜린스의 드럼 실력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원곡의 드러머인 존 본햄을 발탁한 로버트 플랜트와 솔로시절 같이 활동한 경험도 있고, 장르를 가리지 않는 최고의 파워 드러머로 유명한 필 콜린스였지만 라이브 에이드에서도 레드 제플린의 공연에서만 유독 실수를 많이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필 콜린스 본인조차도 최악의 실수였다며 후회하는 인터뷰를 했다.[70] 그래도 이 건으로 서로간에 크게 뒤끝은 없었는지 토니 톰슨, 필 콜린스와 레드 제플린 멤버들의 친분은 계속 이어졌다.
- 마이클 리 (Michael Lee)
- 토니 톰슨 (Tony Thompson)
- 폴 마르티네즈 (Paul Martinez)
- 이언 스튜어트 (Ian Stewart)
롤링 스톤스의 그 이언 스튜어트가 맞으며, Rock and Roll 등의 곡에서 건반 세션을 맡아주었다.
10.3. 기타 관련 인물
- 크리스 드레야 (Chris Dreja)[71]
야드버즈에 소속되어있던 베이시스트로 지미 페이지와 함께 야드버즈에 가장 마지막까지 잔류한 멤버였다. 로버트 플랜트가 밴드에 가입한 직후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를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사진 활동을 하기 위해 밴드를 탈퇴했다. 이후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의 사적 친분을 유지했으며, 레드 제플린의 극초창기 시절 여러가지 조언들을 해줬다. 뉴 야드버즈라는 밴드 이름보다 독창적인 밴드 이름이 있는데 낫겠다고 밴드명을 교체할 것을 요청해 레드 제플린이라는 밴드명이 탄생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1집 커버의 뒷면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이후 그는 야드버즈에서 간간히 활동하였고 2013년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음악계를 은퇴했다.
- 데이비드 주니퍼 (David Juniper)
2집의 커버를 제작한 인물이다. 그는 지미 페이지가 예술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친구였는데, 지미 페이지가 2집 커버의 디자인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면서 흔쾌히 Led Zeppelin II의 커버 디자인을 담당했다. 이 커버는 앨범의 유명세와 더불어 높은 평가를 받았고, 1970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베스트 레코딩 패키지 부분에 노미네이트된 적도 있다. 이후로는 평범한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듯하다.
- 제프 벡 (Jeff Beck), 에릭 클랩튼 (Eric Clapton)
크리스 드레야와 마찬가지로 야드버즈 소속 멤버였으며, 현재까지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둘은 지미 페이지와 사적으로 친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지미 페이지, 제프 벡, 에릭 클랩튼을 엮어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는 한국에서만 통용된 어휘이다. 이 세 명은 레드 제플린 해체 후 세계 투어를 함께 다니는 등 야드버즈 소속으로 같이 협업도 했었고, 야드버즈 재결성 공연 때 언제나 함께 라인업으로 서는 사람이기도 하다. 에릭 클랩튼과 지미 페이지는 1960년대 후반 레코딩 문제로 잠깐 사이가 멀어졌지만, 이후 원만하게 잘 해결됐는지 현재까지도 공식 석상에서 같이 나오는 등 잘 지내는 관계인 듯하다.
- 키스 문 (Keith Moon)
동료 밴드였던 더 후의 드러머이다. 키스 문은 1960년대부터 지미 페이지와 사적으로 친했으며,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와 함께 음악 활동을 하기도 했다. 또한 ‘레드 제플린’이라는 밴드 이름을 지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지미 페이지뿐만 아니라 레드 제플린 멤버 전체와 친했기에 1977년에 레드 제플린 공연에 게스트로 참석하여 존 본햄과 함께 드럼을 연주하기도 했다.
11. 기타
- 걸작 코미디 영화이자 모큐멘터리(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계의 레전드급 작품으로 치는 롭 라이너 감독의 1984년작 영화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 (This Is Spinal Tap)에서 레드 제플린이 여러 번 패러디된다. 이 영화는 Spinal Tap이라는 가상의 헤비 메탈 밴드를 설정해 놓고[72] 그게 마치 실존 밴드인 척 다루며[73] 그 밴드의 역사를 회고하는 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다. 록음악계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하여 웃음을 주는 게 목적이라서 여러 실제 유명 록밴드들의 일화와 디테일들을 이 가상 밴드에 이입시켜서 패러디하고 있는데, 70년대를 대표하는 록밴드인 레드 제플린 역시 여러 번 패러디된다.
예를 들어, 스파이널 탭의 공연 중에 기타리스트가 기타 솔로연주를 할 때 피크가 아닌 무려 바이올린(!!!)으로 전기기타 줄을 문지르며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지미 페이지가 바이올린 활로 기타 연주를 했던 퍼포먼스를 코믹하게 패러디한 것이다. 지미 페이지는 바이올린 '활'로 연주했지만, 스파이널 탭은 활도 아닌 바이올린 '몸통' 그 자체로 연주하는 것이니 그 황당한 모습에 폭소가 안 나올 수 없는 장면이다.
그리고 스파이널 탭의 전 드러머가 광란의 파티 중에 과음하다가 토사물에 목이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물론 존 본햄의 그리 깔끔하지 않은 사망 과정을 대놓고 패러디한 것. 근데 그 영화속 드러머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의학적 검사 결과 드러머 자신의 토사물이 아닌 다른 멤버들의(!!!) 토사물이 목을 막아서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져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나온다. 70년대를 주름 잡았던 공룡급 인기 록밴드들의 방탕한 쾌락문화를 조롱하기 위한 의도로 과장해서 풍자한 장면인데, 아무리 풍자 코미디 영화라고 해도 고인의 사망까지 코미디의 대상으로 삼는 건 심하다는 느낌도 드는 장면이다.
그밖에도, 공연 중에 무대에 웅장한 스톤헨지 모형을 멋지게 등장시키려다가 일이 꼬여버려서 코미디가 되는 장면은, 레드 제플린의 1977년도 미국 오클랜드 공연 때 스톤헨지 석상 모양의 모조품을 무대에 등장시켰던 것을 패러디한 것이다.
* 밴드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전용기까지 따로 있었다. 해당 기체는 보잉 720의 "Starship" 기체로 본래는 레드 제플린의 전용기가 아니었지만 1973년경 레드 제플린이 3만달러 정도를 주고 기체를 빌려 전용기로 타고 다녔다. 이 기체는 라이벌 밴드였던 딥 퍼플은 물론이고 롤링 스톤스와 올맨 브라더스 밴드 등 여러 거대 록밴드들이 타고 다녔다. 1977년 레드 제플린 멤버들을 태우고 마지막 비행을 했으며 이후 결함이 생겨 루턴 공항에 보관되어져있다가 1982년 해체되었다.
- 더 후의 보컬인 로저 달트리가 레드 제플린을 가장 좋아하는 밴드로 꼽은 것과 달리, 기타리스트인 피트 타운젠드는 레드 제플린을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레드 제플린이 메탈 음악에 대한 더 후의 업적들을 전부 가로채갔고 하드한 드럼과 베이스 등 여러 부분들에서 더 후를 따라했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그러나 정작 피트 타운젠드는 지미 페이지와 친한 사이이며 존 폴 존스, 존 본햄과는 음악 활동도 같이 했던 적도 있다(…).
츤데레?사실 본인도 레드 제플린을 음악적으로만 싫어하는 거지 멤버들과의 우정이 싫다는 건 아니라고 밝혔다.
-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즈는 레드 제플린의 광팬까진 아니라고 하지만, 지미 페이지와의 우정 때문에 레드 제플린의 콘서트를 자주 보러 왔었다고 한다. 키스 리처즈와 콤비를 이루는 믹 재거도 지미 페이지와 친했지만 상술하였듯이 레드 제플린의 팬인것도 있어서 콘서트를 자주 보러 갔었다고.
- 2012년에 결성되고 2017년에 데뷔한 미국 미시간 주 출신 록밴드 그레타 반 플릿이 레드 제플린의 재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음악 스타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보컬의 목소리가 로버트 플랜트와 너무 비슷해서.. 그래서인지 플랜트도 인터뷰에서 이들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했었다.
- 교통 사고를 많이 당한 밴드이다. 로버트 플랜트가 총 3번, 존 본햄이 총 2번의 교통 사고를 당했다.
- 과거 문희준이 한 라디오 방송에서 “레드 제플린이 누구예요?”라고 발언했다가 논란이 되어 대중들에게 대차게 까였던 적이 있다. 당연히 레드 제플린을 진짜로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고, 문희준이 이러한 질문을 하면 이윤석이 레드 제플린에 대해 설명해주는 컨셉으로[74] 방송을 진행했던 것이다. 당시 문희준은 안티가 어마어마하게 많았기에 이러한 방송 컨셉으로도 욕을 먹었던 것.
- 레드 제플린의 곡들은 저작권료가 비싸기도 하고, 밴드 멤버들이 대중매체에 밴드의 곡들이 쓰이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대중매체에 레드 제플린의 원곡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인지도가 인지도인 만큼 언급 자체는 굉장히 많이 된다. 대표적으로 각종 마블 영화들부터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그리고 CONAN같은 토크쇼들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 유독 로스엔젤레스 공연에서 퀄리티 좋은 라이브 실력을 뽐냈다.
- 데뷔 50주년을 맞아 전용 플레이리스트 프로그램을 출시했다.
- 1969년 1월 Let It Be 세션 당시 신인 밴드였던 레드 제플린이 무려 비틀즈 멤버들에 의해 거론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닌 것이, 리더 지미 페이지는 유능한 세션맨이자 야드버즈 소속 멤버였기에 영국 음악계에서 이미 유명한 뮤지션이었고 더 후, 롤링 스톤스, 제프 벡, 에릭 클랩튼 같은 유명 뮤지션들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기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소식을 접했을 수 있다. 물론 레드 제플린 데뷔 이후 해당 영상에서 점심 타령을 하던(…) 조지 해리슨은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친해지게 된다.
글린 존스[75]: 너 지미 페이지 앨범 들어볼래?
조지 해리슨: 지미 페이지?
글린 존스: 이번에 새로운 그룹에서 앨범 냈어.
조지 해리슨: 지미 페이지는 야드버즈 멤버 아니야?
글린 존스: 맞아.
(중략)[76]
글린 존스: 진짜 엄청난 그룹이야. 존 폴 존스가 베이스 치고 존 본햄이라는 애[77]가 드러머인데 얘도 개쩔어.
조지 해리슨: 지미 페이지?
글린 존스: 이번에 새로운 그룹에서 앨범 냈어.
조지 해리슨: 지미 페이지는 야드버즈 멤버 아니야?
글린 존스: 맞아.
(중략)[76]
글린 존스: 진짜 엄청난 그룹이야. 존 폴 존스가 베이스 치고 존 본햄이라는 애[77]가 드러머인데 얘도 개쩔어.
- 몬머스 대학교의 조사에 따르면, 레드 제플린은 계급별로 취향이 가장 크게 갈리는 밴드 중 하나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레드 제플린은 미국 우파, 공화당 지지자들로부터 매우 인기있는 밴드이다. 더욱 특기할 만한 건 레드 제플린은 남성 팬의 수가 여성 팬에 비해서 압도적이고, 60세 이상의 팬은 거의 없지만 20대 팬의 수가 상당하다는 점이다.[78] 참고로 AC/DC가 레드 제플린과 거의 일치하는 결과를 보였다.
- 눈에 띄는 신인들이나 뮤지션들이 보이면 ‘제2의 레드 제플린이다’라는 식으로 사람들이나 언론들이 평하기도 한다. 이런 타이틀로 불렸던 밴드로는 러시가 있다.[79][80] 현재는 위에 언급된 그레타 반 플릿이라는 밴드가[81] 미국의 레드 제플린으로 불리고 있다.
11.1. VS놀이?
레드 제플린이 워낙 상업적, 음악적으로 성공했던 밴드였다보니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레드 제플린과 다른 밴드를 비교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당장 구글에서도 Led Zeppelin을 검색하면 VS놀이의 결과물(…)들이 연관 검색어에 뜰 정도…11.1.1. 핑크 플로이드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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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Led Zeppelin IV를 합성한 사진. |
서구권에서 가장 많이 비교되는 밴드는 핑크 플로이드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고, 비슷한 수준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으며, 출신지와 출신 계급까지 같기 때문이다.[82] 또한 두 밴드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기네스북에 등재된 네 개의 밴드 중 하나라는 공통점도 있다.
두 밴드는 비슷한 점도 많았지만 다른 점도 많았다. 먼저 레드 제플린은 지미 페이지가 야드버즈를 이어 나가기 위해 유능한 세션맨들을 영입해서 결성한 슈퍼밴드에 가까웠지만, 핑크 플로이드는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끼리 만든 스쿨 밴드에서 출발했기에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데이비드 길모어를 제외하면 연주적 기량이 준수하다는 평은 들을지언정 일류급으로 칭송받지는 않는다.[83] 또한 레드 제플린은 하드 록, 블루스 록, 헤비 메탈, 포크 록, 인도 및 중동 음악 등 수많은 장르의 음악을 추구한 반면, 핑크 플로이드는 사이키델릭 록이 발전한 형태의 프로그레시브 록[84]을 추구했다는 점 역시 다른 점이다. 이렇듯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듯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밴드가 차트에서 비슷한 수준의 성공을 거뒀단 사실 때문에 해외 리스너들과 심지어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는 비교의 대상이 된다.
이를 반영하듯 구글에서 Led Zeppelin vs 혹은 Pink Floyd vs라는 검색어를 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연관 검색어가 상대 밴드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극성 레드 제플린 빠들과 극성 핑크 플로이드 빠들은 한 쪽을 찬양하면서 한 쪽을 까내리기도 하지만[85], 사실 두 밴드의 멤버들은 서로 친한 사이이며 서로의 콘서트도 자주 보러 갔다고 한다.[86]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는 음악 스타일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당대에 라이벌 취급을 받지는 않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음악적인 평가나 위상 모두 거의 동급으로 평가받는다.
11.1.2. 딥 퍼플과의 비교
국내에서는 보통 딥 퍼플과 비교된다. 모두 70년대에 활동한 하드 록 및 블루스 록 기반의 메탈 밴드이고, 두 밴드 모두 아시아권에서는 클래식 록을 처음 접할 때 많이 추천되는 밴드이기 때문이다.이 두 밴드가 비교되는 것은 둘 모두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의 경계선에 있는 음악을 했지만 둘의 음악은 사실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레드 제플린의 경우 주로 블루스 같은 흑인 음악에 뿌리를 둔 밴드였기 때문에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보다는 즉흥성에 초점을 두었고, 또한 네 명이 온전히 통일되어 하나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멤버들이 자신의 기량을 따로따로 분출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반면 딥 퍼플은(Mark 2 기준) 흑인 음악 계열이 아닌 클래식, 즉 백인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리치 블랙모어나 존 로드는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수업을 받았고, 이안 길런 역시 아버지가 성악가였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많이 접할 수밖에 없었다. 클래식 음악은 개개인의 개성 발현보다는 합주하는 인원 전체의 조화를 훨씬 중시하기 때문에 딥 퍼플의 경우 개인주의적 성향보다는 공동체주의적 성향을 지녔고, 멤버 다섯 명이 완전히 합을 맞춰 통일된 사운드를 만드는 경향이 강했으며[87], 즉흥 연주는 최대한 자제되었다.[88] 거기에 기타 솔로를 강조했던 레드 제플린과는 달리 기타와 키보드가 서로 솔로를 주거니 받거니하는 방식을 강조했던 것까지, 거의 공통점이랄 것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양쪽 팬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비교는 심한데, 한국 내에서 레젭 팬들과 딥 퍼플 팬들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록 커뮤니티 내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기도 했고, 음악적인 성향도 비슷했으며 록 음악 팬들 특유의 록부심까지 겹쳐 일어난 일. DP팬은 LZ가 약쟁이들이고 표절곡 투성이에 라이브의 연주 실력도 좋지 않다고 까며[89], LZ팬은 DP가 리치 블랙모어가 성격이 나쁘고 멤버들 간의 불화가 심하며 시기별로 멤버 실력과 곡 수준 차이가 많이 난다고 깐다. 종종 나이 지긋이 먹은 레젭 팬과 딥 퍼플 팬이 인터넷 게시판에서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서로를 욕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물론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 둘 다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90] 이쪽도 위의 핑크 플로이드와 마찬가지로 각 밴드의 멤버들은 서로 친한 사이이며, 심지어 존 본햄과 리치 블랙모어는 엄청난 절친이다.[91] 또 이건 딥 퍼플 시절 이야기는 아니지만 리치 블랙모어가 Rainbow로 활동할 당시 만들었던 대곡 Stargazer를 만들었을 때도 레드 제플린의 Kashmir를 듣고 영감을 얻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이 70년대 당시 라이벌이었다는 평가는 명백히 잘못된 평가이다. 아시아에서 딥 퍼플의 위상이 엄청났기에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레드 제플린이나 블랙 사바스와 엮는 관점이 많아졌지만, 두 밴드가 가장 잘 나가던 70년대 당시에도 레드 제플린은 딥 퍼플보다 10배 이상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고 라이벌로 인식하는 경향은 전혀 없었다.[92]
지금도 서구권에서는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을 동급으로 보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는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을 비교하는 글이 수두룩하지만, 구글에서 영어로 레드 제플린 vs 딥 퍼플을 검색해도 어느 밴드의 기타 리프가 더 낫냐 정도의 영상들은 존재하지만 밴드 자체의 위상이나 업적을 비교하는 글은 거의 없다.
11.1.3. 블랙 사바스와의 비교
블랙 사바스는 레드 제플린보다 조금 더 헤비하고 스트레이트한 음악으로 헤비 메탈을 정립한 밴드이고, 국내에서는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에 월등히 밀리지만 해외에서는 올타임 록 밴드를 꼽을 때 20위권 안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음악적인 영향력을 떠나서 당대의 인기나 위상으로 비교해 볼 때, 블랙 사바스 역시 딥 퍼플보다는 높지만 레드 제플린보다는 확연히 한 단계 아래로 평가받는다.11.1.4. 그 외
이 외에도 해외에서는 데이비드 보위, 아이언 버터플라이, 더 후, 롤링 스톤스 등의 아티스트들과도 VS놀이를 하며 심지어 비틀즈까지 소환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다만 비틀즈는 음악적인 위상 면에서 넘사벽 수준이기에, 비틀즈와는 음악적인 면모가 아닌 상업적인 인기 측면에서만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93] 롤링 스톤스 또한 인기는 레드 제플린보다는 낮았지만 음악적 영향력 면에서는 레드 제플린보다 더 높은 밴드라고 평가받기에, 보통 레드 제플린은 데이비드 보위, 닐 영과 더불어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밥 딜런 다음가는 아티스트로 평가받는 경우가 대다수이다.또한 국내에서는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를 퀸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이는 퀸의 인기가 높은 국내에서만 이루어진다.[94] 다만 각주로 서술된 몇몇 부분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비교들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에, 이러한 VS놀이가 진지하게 밴드들 간의 우열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12. 레드 제플린에 대한 언사
나는 헤비한 음악을 좋아하고, 이런 음악을 ‘록 음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는 레드 제플린을 좋아한다. 이들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미 페이지는 개쩌는[95] 기타리스트이다.
존 레논
존 레논
나는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와 1960년대부터 알고 지냈다. 그리고 약 10년 뒤 그들은 (레드 제플린이라는) 매우 훌륭하고 성공적인 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레드 제플린의 콘서트를 보러갔을 때가 생각난다. 우레와도 같은, 아주 훌륭한 라이브였다.
믹 재거
믹 재거
관리구조나 음악, 이미지까지, 그들은 록 밴드의 청사진이었다.
브라이언 메이
브라이언 메이
레드 제플린의 1집을 들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오지 오스본
오지 오스본
훌륭하고, 단단하고, 아주 헤비한 로큰롤 밴드다. 그들이 만든 곡에서 촌스러운 곡은 하나도 없다.
키드락
키드락
레드 제플린은 이미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있던 밴드였다. 우리는 그들처럼 노래를 쓰고 싶었고,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고 싶었으며 행동도 그들처럼 하고 싶었다.[96]
알렉스 라이프슨
알렉스 라이프슨
나는 지미 페이지가 정통 블루스를 연주했다기 보다는 로커빌리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가 연주하는 스타일을 즐긴다. 레드 제플린과 제프 벡, 그리고 나 사이에는 아무런 경쟁 관계도 없다. 그저 독특하고 훌륭한 다른 스타일을 연주할 뿐이다.
에릭 클랩튼
에릭 클랩튼
내가 새 노래를 작곡하면 얼마 안 가 레드 제플린의 노래 중 정확히 내 노래와 같은 스타일의 곡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한다.
액슬 로즈
액슬 로즈
내가 처음으로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들었을 때 차를 세우고 노래를 끊임 없이 계속 들었다.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4인조 밴드이다.
리치 샘보라
리치 샘보라
레드 제플린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그들이 환상적이고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초창기의 우리는 크림, 지미 헨드릭스와 공연을 하면서 발전했지만, 제플린은 전혀 다른 단계로 밴드를 발전시켰다. 여기에 제플린의 힘이 있다.
로저 달트리
로저 달트리
지미 페이지는 기타리스트로서 매우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좋아한다. 또한 나는 레드 제플린이 시도했던 (음악적) 실험들을 정말 좋아한다.
잉베이 말름스틴
잉베이 말름스틴
만약 당신이 미국에서 자랐다면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그리고 롤링 스톤스의 영향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음악이 항상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크리스 코넬
크리스 코넬
난 어릴적 가톨릭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가톨릭 학교에서 내가 믿던 유일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레드 제플린이었다.
데이브 그롤
데이브 그롤
나는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에 어마어마한 열렬함을 가지고 있으며, 레드 제플린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레이디 가가
레이디 가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가 단 하나의 밴드와 잼을 할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레드 제플린을 택하겠다.
조나단 데이비스 (Korn의 리더)
조나단 데이비스 (Korn의 리더)
13. 투어
14. 개별 문서가 존재하는 곡
분류:레드 제플린 노래 참조.15. 디스코그래피
<rowcolor=#333> 앨범 | 차트 성적 | 인증 판매고 | ||
| | |||
1집 | Led Zeppelin 발매일 : 1969년 3월 28일 레이블 : 애틀랜틱 레코드 588 171 | 6 | 7 | RIAA : 8×플래티넘 BPI : 2×플래티넘 총합 판매량 : 10,445,000장 |
2집 | Led Zeppelin II 발매일 : 1969년 10월 31일 레이블 : 애틀랜틱 레코드 588 198 | 1 | 1 | RIAA : 12×플래티넘 (다이아몬드) BPI : 4×플래티넘 총합 판매량 : 15,285,000장 |
3집 | Led Zeppelin III 발매일 : 1970년 10월 23일 레이블 : 애틀랜틱 레코드 2041 001 | 1 | 1 | RIAA : 6×플래티넘 BPI : 플래티넘 총합 판매량 : 7,265,000장 |
4집 | 무제 (가칭 Led Zeppelin IV) 발매일 : 1971년 11월 12일 레이블 : 애틀랜틱 레코드 2401 012 | 1 | 2 | RIAA : 24×플래티넘 (더블 다이아몬드) BPI : 6×플래티넘 총합 판매량 : 37,000,000장 |
5집 | Houses of the Holy 발매일 : 1973년 3월 26일 레이블 : 애틀랜틱 레코드 K 50014 | 1 | 1 | RIAA : 11×플래티넘 (다이아몬드) BPI : 플래티넘 총합 판매량 : 12,000,000장 |
6집 | Physical Graffiti 발매일 : 1975년 2월 24일 레이블 : 스완 송 SSK 89400 | 1 | 1 | RIAA : 16×플래티넘 (다이아몬드) BPI : 3×플래티넘 총합 판매량 : 17,215,000장[97] |
7집 | Presence 발매일 : 1976년 4월 5일 레이블 : 스완 송 SSK 59402 | 1 | 1 | RIAA : 3×플래티넘 BPI : 플래티넘 총합 판매량 : 3,595,511장 |
8집 | In Through the Out Door 발매일 : 1979년 8월 20일 레이블 : 스완 송 SSK 59410 | 1 | 1 | RIAA : 6×플래티넘 BPI : 플래티넘 총합 판매량 : 6,618,161장 |
※ 발매일과 앨범 코드는 영국 기준. 자료 : #1, #2 |
15.1. 싱글
싱글 자체를 거의 발매하지 않았고, 그나마 발매된 싱글도 죄다 제한적으로만 발매했기에 싱글 차트에서는 죽을 쑨 것으로 유명하다.[98] 그렇기에 심지어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보다도 싱글 성적이 안좋다.레드 제플린이 싱글 발매를 거의 안 했던 이유로는 196~80년대의 빌보드 핫 100이 지금과는 달리 레드오션이었던 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미 페이지가 싱글 발매가 앨범 판매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싱글 발매에 극도로 부정적이었던 점도 컸다.[99] Black Dog의 싱글 발매도 원래 예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수익금을 벌기 위하여 발매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발매한 몇 안되는 싱글도 상술했듯이 제한적으로만 발매되었다. 오히려 그러고도 빌보드 핫 100에서 4위를 차지한 Whole Lotta Love가 정말 대단한 것.
15.1.1. 미국 빌보드 핫 100
레드 제플린의 Billboard HOT 100 차트인 목록 | |||
년도[100] | 곡명 | 최고 순위 | 수록 앨범 |
<colbgcolor=#DBC9B7> 1969년 | Good Times Bad Times[101] | 80위 | |
Whole Lotta Love[102] | 4위 | ||
1970년 | Immigrant Song[103] | 16위 | |
1971년 | Black Dog[104] | 15위 | |
1972년 | Rock and Roll[105] | 15위 | |
1973년 | Over the Hills and Far Away[106] | 51위 | |
D’yer Mak’er[107] | 20위 | ||
1975년 | Trampled Under Foot[108] | 38위 | |
1976년 | Candy Store Rock[109] | - | |
1979년 | Fool in the Rain[110] | 21위 |
15.1.2. 영국 차트
15.1.2.1. 11위~30위
- Whole Lotta Love (21위, 1969)
[1] 인기는 자국인 영국보다 미국에서 더 높았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레드 제플린을 미국 밴드라고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지미 헨드릭스와는 반대인 셈이다.[2] 야드버즈의 결성일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결성일.[3] 지미 페이지가 로버트 플랜트를 밴드에 영입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결성일.[4] 1968년 8월 밴드 탈퇴.[5] 시도했던 장르가 많기에 전부 기재하기는 어렵지만, 주 장르는 블루스 록과 이를 기반으로 한 하드 록과 헤비 메탈, 그리고 포크 록이었다.[6] 다만 레드 제플린이 슈퍼밴드로 분류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미 유명 아티스트였던 지미 페이지와 존 폴 존스를 제외한 둘은 1968년 당시에 무명이었기 때문이다.[7] 애비 로드와 레젭 II가 몇 주 씩을 주기로 번갈아가면서 차트 1위를 차지했다.[8] 이와 관련하여 후대 뮤지션인 액슬 로즈는 건즈 앤 로지스를 글램 메탈 밴드로 규정짓는 것에 대해 부정할 때 레드 제플린을 예로 들면서 건즈 앤 로지스는 레드 제플린처럼 장르에 얽매이지 않은 음악 활동을 한 밴드라고 밝혔다. 또한 레드 제플린의 보컬인 로버트 플랜트부터가 밴드 곡의 1/3이 잔잔한 포크 록이라며, 레드 제플린이 메탈 밴드임을 부정하였다.[9] 딥 퍼플과 블랙 사바스의 음반 판매고를 합쳐도 레드 제플린의 1/2도 안된다. 비단 이 두 밴드 뿐만 아니라 메탈이나 하드 록 계열에서 레드 제플린보다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는 없다.[10]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엘튼 존, 마돈나 다음에 위치한다. 엘튼 존과 마돈나와는 차이가 거의 나지 않으며, 레드 제플린이 더 앞선다는 통계 또한 존재한다.[11] 3위는 핑크 플로이드, 4위는 퀸, 5위는 AC/DC. 퀸과 AC/DC, 그리고 롤링 스톤스는 음반 판매량이 거의 비슷하나, 퀸이 살짝 앞선다는 주장이 주류이다.[12] 미국인들이 이글스, 보스턴, 메탈리카 등 자국 출신의 밴드들을 선호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13] 레드 제플린 만큼 활동 기간이 짧은 비틀즈도 정규 앨범은 12장이나 된다.[14] 당장 레드 제플린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롤링 스톤스와 더 후는 60년 가까이 현역으로 활동중이며, 레드 제플린의 라이벌이라고 불리던 핑크 플로이드 또한 30년 가까이 활동했다.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이 이례적으로 활동 기간이 짧은 것.[15] 리스트를 보면 2위부터는 레드 제플린, 롤링 스톤스, 핑크 플로이드 세 밴드가 경합하는 구도이다. 1위 자리는 당연히 비틀즈의 차지.[16] 알레이스터 크로울리를 찬양하고 흑마법을 추종하는 등 오컬트 사상에 깊이 심취했었다.[17] 로버트 플랜트같은 경우 보컬이라는 분야는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분야이기에 ‘록 음악의 범주’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사실 록 보컬뿐만 아니라 팝 보컬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플랜트의 영향력으로만 평가한다면 충분히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평가받는다. 존 폴 존스같은 경우 그의 주요 분야인 베이스는 재즈 계에서의 거물이 매우 많기에 존 엔트위슬같은 넘사벽 베이시스트를 제외하면 록씬의 베이시스트들은 재즈씬의 베이시스트들보다 평가가 낮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록 음악만 한정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무조건 꼽히기 때문에 ‘록 음악의 범주’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18] No Quarter나 All My Love와 같은 곡에서 잘 느낄 수 있다. 다만 존 폴 존스가 활동한 시기가 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받아 키보드 연주를 강조하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최전성기였던 1970년대다보니, 존 로드나 릭 라이트, 키스 에머슨, 토니 뱅크스, 릭 웨이크먼 같은 괴물들에게 밀리는 바람에 훌륭한 건반 악기 연주자로서의 존 폴 존스는 대중들에게 잘 안 알려진 편이다.[19] 더군다나 헨드릭스는 27세에 요절했으므로 살아있는 하드 록 기타리스트 중에서는 최고로 평가받는다. 물론 지미 페이지 역시 요절할 것 같았던 락스타 순위에서 항상 최상위권을 차지했을 정도로 약을 했던 것은 비밀이다.[20] 기타 속주로만 놓고보면 잉베이 말름스틴도 지미 페이지보다 더하다고 평가받지만, 잉베이는 속주를 제외하면 볼게 없다는 식의 악평도 많다. 또한 속주 실력이 곧 기타 실력이 되지는 않는다.[21] 저평가받았을 때.[22] 물론 3대 기타리스트는 한국에서만 쓰이는 표현이다. 지미 헨드릭스가 없다는 것부터 3대 기타리스트 리스트가 엉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23] 남성 보컬리스트 중에서 로버트 플랜트보다 음역대가 더 넓거나 비슷한 보컬은 액슬 로즈와 프레디 머큐리밖에 없다.[24] 현대 드럼의 기본 주법들을 정립했기에 어지간한 드럼 교본에는 존 본햄의 이름이 무조건 등장한다. 그렇기에 드럼을 배운 사람들 중 레드 제플린은 잘 몰라도 존 본햄을 모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25] 존 본햄과 로버트 플랜트는 버밍엄 출신이나 서로 사는 곳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로버트 플랜트는 유복한 중산층 계층에 속했는데, 존 본햄은 워킹클래스로 인연은 커녕 공통점도 찾기 어렵다.[26] 사실 더티 맥은 멤버간의 갈등으로 해체된 것이 아니라, 롤링 스톤스 로큰롤 서커스에서의 공연을 위해 결성된 일회성 슈퍼밴드다.[27] 공백기를 제외하면 10년 조금 안 되는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퍼밴드에 준하는 밴드 중에서는 활동 기간이 상당히 긴 편이다.[28] 영국 록 밴드의 대다수는 비틀즈, 더 후, 오아시스 등 대체로 저소득층 노동계열 출신이다. 중산층 출신으로 알려진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즈도 어릴때는 전형적인 워킹클래스였다.[29] 특히 기타를 치는 사람들에게 레드 제플린이나 건즈 앤 로지스의 곡들은 과제가 될 정도이다. 반면에 롤링 스톤스나 더 후같은 밴드들은 비교적 따라 연주하기 힘들다. 롤링 스톤스는 키스 리처즈가 워낙에 쿠세가 강한 기타리스트이면서 스킬보다는 그루브함이 강조되고 오픈 튜닝이 사용되어서 연주하기가 번거롭고, 더 후의 음악은 리듬 기타가 위주여서 따라하기 힘들다. 다만 더 후의 음악은 존 엔트위슬의 베이스 속주 때문에 베이스 연주자들에게 언젠가 꼭 도전해보고 싶어하는 성서로 받아들여지는 곡들이 많다.[30] 70년대 활동 음악가만 따지면 엘튼 존이 위이지만, 이는 라이온킹 등 8~90년대의 커리어까지 다 합친 수치다. 순수 1970년대만을 쳤을때는 레드 제플린이 1위.[31] 싱글 판매량이나 빌보드 핫 100 1위곡으로 한정할 시 폴 매카트니나 롤링 스톤스에 밀리긴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걸 종합했을 때 레드 제플린이 굉장한 인기를 보여주었던 건 사실이다. 다만 레드 제플린은 싱글 발매를 굉장히 꺼리던 밴드였다. 이유는 후술함.[32] 참고로 이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는건 한국에서만 쓰이는 표현이다. 미국 음악가들이 영국에서 온 음악가들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1차 브릿 인베이전과 달리 70년대 미국에서는 CCR 같은 미국출신의 루츠 록 밴드들이나 흑인 소울 음악이 영국에서 온 록 음악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다. 하드 록의 경우 70년대에 레드 제플린을 능가했던 밴드는 없었지만 포리너나 보스턴, 밴 헤일런, 에어로스미스 등 많은 아메리칸 하드 록 밴드들이 제플린에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렇기 때문에 평론가들중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없으며 미국의 메탈, 하드 록 음악에 강하게 영향을 주었던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 블랙 사바스의 업적과 영향력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이다.[33] 물론 1차 브리티시 인베이전 때도 몇몇 미국의 음악가들은 영국의 아티스트에 밀리지 않거나 오히려 더한 영향력을 보여줬다. 대표적으로 3J라고 불리는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도어즈나 밥 딜런.[34] 1위는 당연하지만 비틀즈가 차지했다. 3위는 퀸, 4위는 핑크 플로이드, 5위는 롤링 스톤스.[35] 사실 핑크 플로이드를 롤링 스톤같은 정통 평론지에서 은근히 저평가하기도하였다. 또한 인디음악과 얼터너티브 음악이 재평가받은 현재에는 라디오헤드의 평가가 올타임 록밴드들과 순위를 겨룰수 있을 정도로 높아졌다. 어쨌든 올타임 리스트를 뽑을 때 이 세 밴드가 위대한 록밴드 3위 자리를 겨누는 단골 밴드들이라는건 변함이 없다.[36] 이때 영화 제작진들이 저작권료가 비싼 레드 제플린의 곡들은 어떻게든 영화 내에서 사용하는 것을 허락받으려고 배우들이 레드 제플린을 찬양하는(...)영상을 찍어 보냈다.[37] Stairway to Heaven같은 인기 곡들마저 싱글로 내지 않았을 정도. 그렇기에 레드 제플린이 발매한 싱글의 수는 더 후, 퀸 등 동시대의 다른 밴드들에 비해 매우 적다.[38] 일례를 들자면 1984년 빌보드 5주 연속 1위를 했던 밴 헤일런의 곡 Jump를 넘어서는 기록은 무려 7년이 지난 1991년에서야 나왔다. 1990년대 이후로는 그나마 빌보드 차트 경쟁이 완화되었다.[39] 이와 반대인 밴드로는 롤링 스톤스가 있다. 롤링 스톤스는 Exile on Main St.이나 Let It Bleed같은 앨범들을 제외하고선 항상 앨범을 만들때 가장 화려한 곡을 리드 싱글로 먼저 발표했는데, 그들은 음반 판매량보다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하는게 인기를 유지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들은 빌보드 핫 100 1위 기록은 많지만 음반 판매량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40] 3회를 올린 휘트니 휴스턴, 2회를 올린 에미넴, 브루스 스프링스틴, 마돈나, 빌리 조엘, 핑크 플로이드, 데프 레파드, 밴 헤일런, 머라이어 캐리, 마이클 잭슨, 셀린 디옹,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제외하면 없다.[41] 참고로 프린스와 AC/DC, 그리고 제플린 본인은 국내에서는 젊은 세대들보다 오히려 70, 80년대 시절 팝 음악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더 유명한 경우이다. 당장 이 아티스트들의 히트곡이 우리나라에서도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42] 가령, AC/DC와 제플린 본인의 곡들이 마블 영화에 쓰이면서 젊은 세대들에게도 인지도가 살짝 올라갔다.[43] 비틀즈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엄청나게 성공했지만, 페퍼 상사나 화이트 앨범의 곡들을 아는 경우조차 드물며, 소프트 록 몇 곡만 알고 있는 경우가 상당수이기에 한국 한정으로 록밴드라기보다는 올드 팝 그룹으로 받아들여지기에 록밴드로서 성공을 거뒀다고 하기는 어렵다.[44] 다만에 이건 일본에서 록 음악의 인기가 매우 높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 일본은 잉베이 말름스틴이나 레인보우 같은, 인기가 예전같지는 않은 하드 록, 헤비 메탈 밴드들이 아직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국가다. 심지어 블랙모어스 나이트 결성 이후 리치 블랙모어가 하드 록을 버리고 독일 중세풍의 르네상스 음악으로 방향을 선회했을때도 독일과 더불어 유이하게 리치 블랙모어에게 마음을 열어준 국가가 일본이었다. 이 때문에 록 음악가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무척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미스터 빅은 밴드의 앨범에 일본 음악 리메이크 버전을 수록하기도 하고, 퀸 또한 앨범에 일본어로 된 곡을 수록하기도 했다. 밴 헤일런의 보컬로 유명한 데이비드 리 로스와, 메가데스 소속의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은 아예 일본에 건너가서 살고있다. 게다가 일본은 서구권의 록뿐만 아니라 자국의 록 아티스트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국가이다. 대표적으로 ONE OK ROCK. 그리고 이 시기의 한국은 유신 정권이었기에 내한하기 힘들었던 것도 있었다.[45] 젊은 세대들에 비해 부모님 세대들에서 인지도가 더 높은 밴드여서 그런지 유튜브 댓글같은 것을 보면 아버지가 들려주셔서 알았다라는 댓글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46]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 개봉 전의 퀸은 제플린보다 많은 곡들이 이미 알려져 있었으므로, 퀸보다는 인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이긴 하다. 진짜 영화 개봉 전의 퀸과 똑같은 상황의 밴드는 이 밴드이다.[47] 다만 레드 제플린의 사생활은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아주 막장이기로 유명하기에, 만약 각색을 하지 않고 개봉한다면 19금 처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롤링 스톤스도 마찬가지.[48] 특히 기타를 배우게 되면 무조건 한 번씩은 쳐보는 곡 중 하나가 바로 Stairway to Heaven이다.[49] 대부분의 드럼 교본에는 아예 존 본햄의 이름이 무조건 들어간다고 한다.[50] The Lemon Song 같은 곡들의 베이스 라인이 예시인데, 특히나 이 곡은 베이시스트들 사이에서 블루스 베이스의 교과서라고 추앙받는 곡이기도 하다.[51] 정작 The Lemon Song과 같은 야한 노래들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금지곡 처리하지 않았다(…).[52] 이는 똑같은 독재 국가인 싱가포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53]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핑크 플로이드, 퀸 등 1970년대를 주름잡던 대부분의 록밴드들이 활동 당시 내한공연을 오지 못했다. 퀸 또한 1984년에 로저 테일러와 존 디콘이 내한 공연장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까지 왔으나, 주요 히트곡들이 한국에서는 금지곡 처리되었기에 내한 공연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핑크 플로이드의 로저 워터스가 2000년대에 내한 공연을 왔고, 이글스가 정말 뒤늦게 2010년대가 되어서야 내한 공연을 왔으며, 퀸이 프레디 머큐리 사후로도 한참이나 지난 2014년에야 록 페스티벌을 통해 내한했다.[54] 일본 공연은 유료였음에도 티켓이 금방 매진되었다.[55] 당장 예정되어 있던 그린 데이의 내한 공연도 취소되는 판이다.[56] 질투심이 많았던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는 달리 웬만해서는 후대 밴드에 대한 언급을 꺼리던 성향이 있었다.[57]
[58] 사실 1972년 로버트 플랜트와 조지 해리슨이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냈을 정도로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은 친한 편이다. 애초에 1960~1970년대 음악 활동을 같이 했던 록 음악가들은 다 한두다리 건너서 아는 사이였다.[59] Massive Fan이라고 직접 말한다.[60] The Lemon Song 같은 노래를 들어보면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에어로스미스, AC/DC도 싫어했다.[61] 1977년 제플린의 LA 라이브 공연을 담은 "Listen to This, Eddie!"라는 유명한 부틀렉이 있는데, 여기서 Eddie가 도대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대중음악계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여러 추측이 나도는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추측은 여기서 에디가 에디 밴 헤일런을 가리키는 것이며, "니가 구리다고 한 라이브 공연이 얼마나 대단한거인지나 봐라"라는 식으로 팬들이 부틀렉에 이름을 붙여 테이프를 공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루머에 가까운 것이 이 부틀렉이 녹음된 1977년은 밴 헤일런이 정식으로 데뷔하기도 전이었다.[62] 일본의 록밴드 ONE OK ROCK가 현재 일본의 1020 세대에서 인기가 높은 만큼 일본에서 록 음악의 입지는 매우 탄탄하다.[63] 심지어 라이브 앨범들도 포함되어 있다![64] 불법 녹음기를 사설 경호원을 풀어서 잡아냈고, 압수한 녹음기는 수영장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의 부작용으로 인해 로버트 플랜트의 전성기였던 1968~72년도 사이의 라이브에서 괴물같은 보컬을 녹음한 테이프나 영상을 찾는건 하늘의 별따기 수준으로 어려워졌다.[65] 표트르 차이콥스키처럼 성에 있는 "Chk"는 "치"라고 발음한다.[66] 정확히는 시드 바렛, 로저 워터스, 데이비드 길모어.[67] 데이비드 리 로스의 탈퇴 이후 전설적인 팝 메탈 밴드 밴 헤일런의 보컬 겸 공동 프론트맨을 맡은 그분 맞다.[68] 필 콜린스는 1970년대에는 프록 성향, 80년대 전성기 때에는 팝 록, R&B 성향이었다. 하지만 세션 드러머로 다양한 장르를 소화한 바 있으며, 제플린 해체 후 로버트 플랜트 솔로시절 드러머였고 하드 록이나 블루스쪽 세션 경험도 있는 베테랑이었다.[69] 1985년 필 콜린스의 인기는 정말 하늘 같았기 때문에 런던 공연을 하고 콩코드 여객기를 타서 뉴욕으로 날아가 드럼을 쳤다. 라이브에이드에서 런던과 뉴욕 2개의 도시에서 공연을 한 사례는 필 콜린스가 유일하다.[70] 사실 공연 당시의 두 드러머 필 콜린스와 토니 톰슨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상태도 엉망이었다. 우선 로버트 플랜트는 해체 이후 목이 아예 상해버려서 최악의 보컬을 보여줬다. 지미 페이지는 공연 전 튜닝조차 되지 않은 기타를 받아 멘붕 상태였다. 다른 라이브 공연에서도 그랬지만 페이지는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 솔로 도중 피크를 떨어뜨리는 등 잔실수도 엄청나게 했었다. 화룡점정으로, 밴드의 음악을 받춰줘야할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는 사전에 그 어떠한 지시조차 받지 못한 상태였고, 그야말로 즉흥 잼을 하는 수준이었다. 이러니 공연이 잘 될 리가 없었고 주요 언론과 팬들로부터 최악의 공연이라는 타이틀을 받으며 난타를 당했다. 결정적으로 토니 톰슨은 파워 스테이션의 공연에서, 필 콜린스는 에릭 클랩튼의 공연에서 흠잡을 데 없는 기량을 보여줬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냥 레드 제플린과의 공연에서만 손발이 안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71] 스칸디나비아계 성씨이기 때문에 드레자라고 하지 않고 드레야라고 발음한다.[72] 이 외에도 하드 록, 사이키델릭 록, 글램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등 여러 장르를 다루는 것으로 묘사된다.[73] 그것도 시대를 풍미한 유명 인기 록밴드로 설정된다.[74] 이윤석은 록덕후인 연예인으로 유명하다.[75] 비틀즈, 롤링 스톤스, 더 후, 에릭 클랩튼, 레드 제플린, 이글스 등의 밴드들과 협업하던 유명 음악 프로듀서이다.[76] 조지 해리슨이 점심 타령을 한다(…).[77] Kid라고 말한다(…).[78] 현역 당시에는 그루피 부대를 이끌고 다닐만큼 여성 팬의 수가 어마어마했고, 현재의 60대 이상의 세대들이 레드 제플린의 현역 시절에 청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사실이다.[79] 극초반에는 제2의 레드 제플린이 아니라 레드 제플린 커버 밴드라고 폄하받았었다. 이후 음악성이 올라가면서 레드 제플린과 킹 크림슨의 훌륭한 만남, 제2의 레드 제플린이라는 호평을 받은 것.[80] 이와 맥락은 다르지만 1970년대의 퀸은 평론가들에게 ‘짝퉁 레드 제플린’이라고 비난받았었다.[81] 2012년도에 결성되어서 2017년도에 첫 앨범을 낸 밴드다. 70-80년대 클래식록 스타일로 곡을 쓰고 있으며 밴드 컨셉 역시 그 당시 록밴드들의 복장이다.[82] 레드 제플린 : 1970년대 초중반 / 록밴드 역대 2위 / 아티스트 전체 6위 / 런던 / 중산층, 핑크 플로이드 : 1970년대 중후반 / 록밴드 역대 3위 / 아티스트 전체 8위 / 런던 / 중산층[83] 스쿨 밴드에서 출발했음에도 연주적 기량이 역대급이라고 평가받는 더 후가 정말 특이한 케이스인 것이다.[84] 사실 포크 음악 등 다른 요소들이 많이 섞이기도 했지만, 사이키델릭 록을 기반으로 하는 건 맞다. 이후 6집부터 진정한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85] 물론 진지하게 이 두 밴드중 어느 밴드가 더 위대하거나 대단한지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부터 두 밴드가 추구했던 음악이 개성이 강했기 때문에 1대 1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86] 이를테면 1970년에 데이비드 길모어가 폴 매카트니와 함께 레드 제플린 공연을 보러갔을 때 찍힌 사진도 있고, 로버트 플랜트는 라이브 8에서의 핑크 플로이드의 재결성 공연에 감동받아 레드 제플린 재결성 공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87] 이런 경향은 각 밴드의 연습 방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레드 제플린이 각자 연습한 후 모여서 합을 맞추는 방법을 택한 반면 딥 퍼플은 일단 헤쳐모인 뒤 서로 싸워가면서 합을 맞추는 방법을 택했다. 여담으로 레드 제플린의 방법을 택한 후배는 메가데스, 딥 퍼플의 방법을 택한 후배는 메탈리카였다고 한다.[88] Made In Japan처럼 애드립이 가미된 음반도 있었으나, 이는 레드 제플린의 경우처럼 완전히 즉석에서 합을 맞췄다고 보기엔 너무 합이 잘 맞아떨어져서 사전에 연습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89] 딥 퍼플은 당시 리치 블랙모어가 라이브에서 완벽한 연주를 보일 것을 강조하며 마약류의 엄금 및 사생활의 철저한 통제를 강요했으며, 이 때문에 당대 록씬에서는 퀸, 핑크 플로이드와 더불어 굉장히 드물게 마약을 하지 않은 밴드였다. 이뿐만 아니라 사실 딥 퍼플은 담배를 제외한 유흥거리들을 거의 즐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보통 동 시대 밴드들은 마약이나 술에 관련된 가십거리들이 많은데, 딥 퍼플은 그런 가십거리가 전무하기 때문. 리치 블랙모어는 밴드의 키보디스트를 마약 중독 문제로 해고한 적이 있는데 이는 레인보우 시절 가십이라 딥 퍼플의 가십이 아니다.[90] 재밌는 점은 싫어한다고 해서 상대 쪽 음악을 안 듣고 음반도 안 사는 극렬 분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음반도 다 사고 음악도 듣는데 그냥 록부심이 겹쳐 어느 한 쪽이 더 좋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서로의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어느 한쪽만 까는(…) 현상이 생긴 것. 요즘 케이팝 팬이 어느 한 그룹만 좋아하지 않고 이 그룹 저 그룹 다 팬이라고 활동하면 가짜 팬, 잡덕 소리 듣는 풍조와 당시는 많이 다르다.[91] 존 본햄과 술을 마시던 리치 블랙모어에게 어느 무명 기타리스트가 사인을 받으러 갔다가 술 마신 블랙모어에게 욕설을 듣고 쫓겨났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92] 이것은 상술된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의 음악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록 음악을 듣던 젊은 세대들은 기성 세대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녔기에 기성 세대의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딥 퍼플의 뿌리인 클래식 음악은 기성 세대들의 음악이었다.[93] 사실 상업적인 인기 면에서도 비틀즈의 음반 판매고가 레드 제플린의 두 배인 만큼 넘사벽이긴 하나, ‘록 밴드’ 중에서는 비틀즈에게 인기로 그나마 비빌 수 있는 밴드가 레드 제플린밖에 없으며(…), 전체 아티스트로 범위를 넓혀봐도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정도밖에 없다.[94]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을 로버트 플랜트와 비교하는 경우는 꽤 있지만, 퀸의 인기가 높은 한국을 빼면 레드 제플린과 퀸을 비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퀸의 음악적 영향력이 레드 제플린 등 다른 S급 밴드들에게 못 미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95] bloody good[96] 정작 사생활이 난잡한걸로 손에 꼽는 밴드인 레드 제플린과 달리 러시는 사생활이 깨끗한 것으로 손에 꼽힌다.[97] RIAA는 더블 앨범을 2장 팔린 것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실질적 판매고는 9,215,000장이다.[98] 레드 제플린의 음악성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 AC/DC도 이와 비슷한데, 더욱 심한 것이 AC/DC는 빌보드 핫 100 20위권 내의 곡이 단 하나도 없다. 그나마 Thunderstruck이 1990년에 호주 차트에서 4위를 차지한게 거의 유일한 싱글의 성공 사례이다. 다만 앨범의 차트 성적이 좋았던 레드 제플린과 달리, AC/DC는 인기에 비해 앨범 차트 성적이 별로여서 Back in Black도 빌보드 4위에 오르는데 그쳤다.[99] 이와 반대되는 밴드로는 롤링 스톤스가 있는데,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는 앨범 판매량보단 차트 1위를 더 중시하여 싱글을 매우 많이 발매하였고, 이에 따라 음반 판매량은 적은 대신 빌보드 핫 100 1위곡이 1970년대에만 3곡이 있다.[100] 최고 순위 시점 기준.[101] B면은 Communication Breakdown.[102] B면은 Living Loving Maid (She's Just a Woman).[103] B면은 Hey, Hey, What Can I Do.[104] B면은 Misty Mountain Hop.[105] B면은 Four Sticks.[106] B면은 Dancing Days.[107] B면은 The Crunge.[108] B면은 Black Country Woman.[109] B면은 Royal Orleans.[110] B면은 Hot D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