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밀러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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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밀러 Arthur Miller | |
본명 | 아서 애셔 밀러 Arthur Asher Miller |
출생 | 1915년 10월 17일 |
뉴욕 주 뉴욕 시 맨해튼 할렘 | |
사망 | 2005년 2월 10일 (향년 89세) |
코네티컷 주 록스베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작가 |
신체 | 191cm |
학력 | 미시간 대학교 (영문학 / 학사) |
배우자 | |
마리 슬레터리 (1940 - 1956; 이혼) | |
마릴린 먼로 (1956 -1961; 이혼) | |
인게 모라스 (1962 - 2002; 사별) | |
자녀 | 2남 2녀 |
대표작 | |
세일즈맨의 죽음(1948) | |
시련(1953)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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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세기 미국 연극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극작가.2. 경력
미시간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에서 영어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다음에 쓴 <악인이 아니다.(No Villain. 1936)>를 시작으로 극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세일즈맨의 죽음>, <모두 내 아들>, <시련>, <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이 있다.그의 작품은 연극의 사회적인 역할과 극적인 감동을 적절하게 살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그리고 사회적 갈등에서 인간의 사회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고통까지 심도있게 묘사하는 힘이 있다.
50년대 매카시즘에 휘말려서 상당히 곤욕을 치렀으며,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 생활은 황색언론의 집요한 사생활 침해와 염문설, 고정된 이미지로 인한 먼로의 정신적 고통으로 순탄치 못하였다. 그가 받았던 고통은 1953년 작품인 <시련>[1]에서 잘 드러난다.
1954년, 자신의 연극 크루서블의 런던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비자를 신청한 아서 밀러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2]의 반대로 출국을 하지 못했다. # 이후 1956년 여권을 갱신하려고 다시 비자를 신청한 아서 밀러에게 HUAC는 비자 발급을 조건으로 1956년 6월 HUAC(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의 청문회 출석을 요구했고, 아서 밀러는 청문회에 출석했다. 하지만 한때 자신의 각별한 친구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엘리아 카잔과 달리 아서 밀러는 끝끝내 다른 누군가의 이름 대는 것을 거부했고, 끝까지 저항했다. #1 #2 그러자 해당 청문회의 한 공화당 의원은 “당신의 아내(마릴린 먼로)와 사진을 찍게 해주면 당신을 사면해 주겠다.”는 말로 아서 밀러를 도발하기도 했다. HUAC 입장에서는 잡아 족치거나, 미국 밖으로 추방해버려야 할 빨갱이들이 마릴린 먼로 같은 여자와 결혼[3]하거나 미국 내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서 밀러는 이런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1956년은 매카시즘이 한풀 꺾여 HUAC의 힘이 예전 같지 않아서 엘리아 카잔 때처럼 2번씩이나 출두하란 명령을 내릴 수 없었고, 아서 밀러가 청문회 참석을 거부만 했어도 자신들이 멋대로 적용한 혐의들에 대한 형벌들을 강제집행했겠지만, 출두해버려서 HUAC 입장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결국 HUAC는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고, 아서 밀러를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도 올려버리는 것으로 결론 맺었다. 그리고 다음 해 1957년 5월, 법원은 아서 밀러에게 적용된 혐의들 중 '의회 모독 죄' 하나만 유죄로 인정하며 징역 1년과 10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 아서 밀러는 분명 비자 발급을 조건으로 출두한 청문회인데, 해달라는 비자 발급은 안 해주고 '의회 모독 죄'란 희한한 결론에 도달한 법원의 판결에 항소했고, 1958년 8월 판결이 뒤집혀 무죄를 선고받았고 비자도 발급되었다.[4] 이로써 아서 밀러는 일단 공식적으로는 매카시즘에서 벗어났지만, 비공식적으론 HUAC의 뒤끝, 할리우드의 열혈 공화당원, 우익세력들 등등에게 시달리며 갖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매카시즘은 한풀 꺾인 1958년에도 미국 전역의 직장인 중 5명당 1명꼴로 주기적으로 사상검증을 받게 할 정도의 여전히 막강한 뒷심을 발휘했다. # 또 매카시즘의 희생자 중엔 토마스 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라이너스 폴링 같은 노벨상 수상자도 여럿 있었다. # 이런 HUAC인데 사람 하나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었다.
이후 1960년대 린든 B. 존슨과 리처드 닉슨[5] 특히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실책과 베트남 전쟁의 교착 상태로 염증을 느끼던 무렵부터, 미국인들의 매카시즘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이 시기부터 아서 밀러를 비롯한 매카시즘의 피해자들은 하나둘 제자리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히피의 등장과 뉴 할리우드 등등의 기존 세대에 반항하는 제2의 비트 세대가 등장하던 시기와 일치하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이런 힘든 시기를 겪고 겨우 숨통이 트인 아서 밀러이지만 그는 먼 훗날 1999년, 제7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엘리아 카잔이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하는 것을 지지해 줬다. 또 당시 시상식에서 카잔을 냉대하던 이들을 “an orgy of self-righteous frenzy.”(독선적인 광란의 난교)라고 비판했다. #
한국에서는 <세일즈맨의 죽음>의 명성이 드높은데 비해, 막상 밀러의 존재는 다소 가려진 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미국 극작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기록되어있고, 그의 모교에 그의 이름을 딴 극장이 있으며, 많은 극작가와 배우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등 미 문학계에서 단연 존경받는 거장으로 유명하다.
3. 작품
- 1936년 악인이 아니다(No Villain)
- 1944년 행운을 잡은 사나이(The Man Who Had All the Luck)
- 1947년 모두 내 아들 (All My Sons)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군수 업자와 그 일가의 몰락을 통해 전쟁과 자본 논리에 의해 붕괴되는 인간 양심의 문제를 고발하는 작품. 자수성가한 사업가 조 켈러는 동업자와 함께 사업을 이끌면서 전쟁 발발 이후 전투기 부품 군납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던 중 납품 전 부품에서 ‘아마도 안전할 것으로 보이는’ 결함이 발견되지만, 부품은 그대로 출하되고 그 결함 때문에 스물한 명의 조종사가 전투기 사고로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한편 전쟁터에 파병된 조의 둘째 아들 래리는 아버지의 죄 때문에 죽어 간 동료들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리던 끝에 약혼녀 앤에게 편지를 남기고 출격 중 스스로 비행 사고를 일으켜 버린다. 자신의 잘못으로 죽어 간 생명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아버지, 둘째 아들의 죽음을 부정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죄를 부정하는 큰아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앤과 그녀의 오빠 조재, 남매의 아버지이자 조 대신 수감된 동업자의 폭로로 인해 어느 날 불현듯 잊으려 했던 과거가 유령처럼 되살아나 일가를 위협하고...
- 1948년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
- 1955년 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A View From The Bridge)
- 1964년 비시에서 생긴 일 (Incident at Vichy)
4. 여담
- 딸 레베카 밀러는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결혼해 두 아들 로난 칼 데이-루이스와 카쉘 블레이크 데이-루이스를 낳았다. 즉, 아서 밀러는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장인어른이며 두 손자의 외할아버지이다. #
- 사위 다니엘 데이루이스와는 영화 크루서블에서 각본가와 배우로 협업한 적이 있다.
- 첫 번째 아내 마리 슬레터리 사이에서 장녀 제인 엘렌 밀러(1944년생), 차남 로버트 A. 밀러(1947년생)를 얻었다.
- 두 번째 아내 마릴린 먼로 사이에는 1956년, 1958년 두 번의 유산으로 자녀는 없다.
- 세 번째 아내 인게 모라스 사이에서 첫째 딸 레베카 밀러(1962년생)와 다니엘 밀러(1966년생)를 얻었다. 이중 둘째로 태어난 아들 다니엘은 1966년 11월,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내의 바람과는 반대로, 밀러는 그를 처음에는 뉴욕시에 있는 유아 요양원에, 그다음에는 코네티컷에 있는 Southbury Training School에 입원시켰다. 모라스는 대니얼을 자주 방문했지만 밀러는 학교에서 대니얼을 찾아온 적이 없었고, 대니얼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대다수의 남성들과 달리 징집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를 하다가 입은 왼쪽 슬개골 부상으로 인해 군면제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1] 1660년대에 마녀사냥에서 아내를 변호하다 악마로 몰려서 희생당한 한 농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 인간의 죄와 집단적인 광기가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속에서 주인공은 끝까지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고 처형 당한다.[2] HUAC 또는 HCUA라고도 부른다.[3] 1956년 6월 29일 결혼식을 올렸다. 라이프誌의 기사 #[4] 1965년 세 번째 아내 인게 모라스와 모스크바를 방문#, 1969년 논픽션 《In Russia》 (1969)를 쓰기도 하였다.[5] 재밌는 우연으로 리처드 닉슨은 조지프 매카시 장례식에 참석한 몇 안 되는 정치인들 중 한 명이다.(...)[6] 1996년에 나온 영화판의 각본도 맡았다고 한다.[7] 이 작품에서 먼로와의 결혼 생활을 다루고 있다.[영상] 밀러와의 인터뷰와 '전락 이후' 공연 중 일부분. 공연은 8:24부터..해당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