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6-14 19:15:16

린든 B.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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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6대 대통령
린든 베인스 존슨
Lyndon Baines Johnson
파일:린든 B. 존슨.png
출생 1908년 8월 27일
미국 텍사스 주 스톤웰
사망 1973년 1월 22일 (향년 64세)
미국 텍사스 주 스톤웰
재임기간 제37대 부통령
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제36대 대통령
1963년 11월 22일 ~ 1969년 1월 20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Lyndon_B._Johnson_signatur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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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colbgcolor=#fff,#191919>아버지 새뮤얼 일리 존슨 주니어(1877 ~ 1937)
어머니 리베카 베인스 존슨(1881 ~ 1958)
형제자매 여동생 레베카(1910 ~ 1978)
여동생 요제파(1912 ~ 1961)
남동생 샘 휴스턴 존슨(1914 ~ 1978)
여동생 루시아(1916 ~ 1997)
배우자 레이디 버드 존슨#(1912 ~ 2007)
자녀 린다 존슨(1944년생)
루시 존슨(1947년생)
종교 개신교 (그리스도의 교회)
학력 존슨 시티 고등학교[1] (졸업)[2]
텍사스 주립대학교 (B.A.)
조지타운 대학교 법학대학원
신체192cm, 91kg
정당

상훈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1980)
경력 샘 휴스턴 고등학교 교사
텍사스 주 연방 하원의원
텍사스 주 연방 상원의원
1962년 대통령 선거 민주당 부통령 후보
제37대 미국 부통령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제36대 미국 대통령
}}}}}}}}}
파일:800px-Ljohnson.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활동
2.1. 대통령이 되기 전2.2.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대통령 취임2.3. 재선과 베트남 전쟁2.4. 괜찮았던 내치2.5. 퇴임 및 사후의 평가
3. 선거 이력4. 기타5. 한국과의 관계6. 매체에서

[clearfix]
제36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3]

1. 개요

"Until justice is blind to color, until education is unaware of race, until opportunity is unconcerned with the color of men's skins, emancipation will be a proclamation but not a fact."
"정의가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을 때까지, 교육이 인종을 상관하지 않을 때까지, 기회가 인간의 피부색을 고려하지 않을 때까지는, 노예 해방은 단지 선언일 뿐 사실이 되지 못한다."

미국의 제36대 대통령.

본래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제37대 미국 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 이후 그의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풀네임은 "린든 베인스 존슨"으로 이를 줄여서 "LBJ"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내 정책 추진에 있어 괜찮은 성적을 거뒀고 의회와도 나름 안정된 정치를 펼쳤지만[4]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어 평이 많이 깎인 인물이다. 재임기 실시한 각종 복지 정책이 후임 정부 재정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있다.

2. 활동

2.1. 대통령이 되기 전

파일:린든 B.존슨 리즈시절.jpg
청년 시절. 눈빛이 매혹적이다 매상

텍사스 중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텍사스 농촌 스타일의 소박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의 집안은 지역 유지이고 재산도 꽤 많았다고 한다. 그의 고향 근처의 존슨시티라는 도시는 그의 집안의 이름을 딴 것이다.[5] 외가도 꽤 알려진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저명한 침례교 목사이자 교수로 베일러 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외조부인 조지프 윌슨 베인스는 텍사스 주무부 장관과 주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그의 미들네임 베인스는 외가의 성씨를 따온 것. 아버지 새뮤얼 일리 존슨도 주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고, 샘 레이번 하원의장 등 텍사스 출신 유명 정치인과도 줄이 닿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젊은 학교 교사였던 존슨은 민주당에 들어간 후 승승장구하며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린든 존슨은 후에 본인의 이름을 따 린든 B. 존슨 고등학교로 불리우게 되는 존슨(...) 시티 고등학교를 1924년에 졸업하게 된다. 졸업년도와 생년월일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반에서 제일 어렸다고 한다. 졸업 후 2년 가량은 캘리포니아 남부로 이사하여 친척 일을 도왔다, 이후 텍사스로 돌아와 샌마르코스에 있는 사우스웨스트 주립 사범대(현 텍사스 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얻었다. 이에 따라 텍사스 남부 시골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었다.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특이하게 정계 입문 전 직업이 교사였던 이색적인 경우. 이때 가난한 학생들의 열악한 환경을 목격했고, 당시의 경험으로 후에 공립학교에 대한 대대적 재정지원 정책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후 짧은 교사 생활을 뒤로 하고 아버지를 따라 민주당에 들어가 1930년 하원의원 출마자의 선거운동을 하며 정치를 익히기 시작했다.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며 텍사스 민주당 청년조직을 이끌었다. 또한 텍사스 출신인 존 낸스 가너 부통령을 도왔고, 당시 전국구급으로 떠오른 텍사스 출신 하원의원 샘 레이번도 도왔다. 1936년 선거에서 루스벨트와 가너는 재선에 성공했고, 샘 레이번은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되어 집권 여당 대표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7년, 텍사스 연방하원의원 10번 선거구 의원이 사망하면서 열린 보궐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존슨이 공천되었다. 주도 오스틴이 포함된 비중있는 선거구였다. 존슨은 만 30세도 되기 전인 젊은 나이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 문제로 알력이 있던 텍사스 출신의 가너 부통령을 견제하는데 텍사스 출신의 젊은 의원인 존슨을 적합한 인물로 보아 존슨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했다. 1940년, 그의 정치적 스승인 샘 레이번이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 자리에 오르면서 존슨은 레이번의 측근으로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합중국 해군 장교로 복무, 소령으로 전역했다.

존슨은 상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거물 정치인이 되었다. 1955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되어, 야당 대표 자격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협력했다.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로서 린든 존슨이 보여준 리더십과 정치기술, 협상력과 타협술은 미국 의회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여서 존슨은 "나는 내 아내만큼 의회를 잘 알고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또한 인종주의가 남아있던 남부 출신이면서도 흑백 인종분리에 반대했고 연방 민권법안이 통과되는데 기여하였으며, 미국의 정교분리를 명확히 한 수정헌법의 발의 및 통과를 주도했다.[6]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민주당 후보로 떠올랐다. 경선에서는 존 F. 케네디이전투구를 벌였고, 결국 케네디가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대승적 차원에서 존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했고,[7] 존슨은 앙금을 풀고 케네디를 적극적으로 보좌하며 선거운동을 해 이들은 11월 8일 선거에서 닉슨에게 신승하며 그 다음해 초 대통령-부통령에 취임한다. 존슨은 텍사스 출신으로는 존 낸스 가너에 이어 2번째로 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8]

2.2.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대통령 취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3px-Lyndon_B._Johnson_taking_the_oath_of_office%2C_November_1963.jpg
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진 존슨의 대통령 취임선서[9]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될 때 존슨도 자리에 있었다. 당시 존슨의 출신주인 텍사스 주지사와 상원의원 간의 불화를 해소하고 텍사스 민주당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대통령과 부통령은 텍사스 주를 방문했다. 이들은 텍사스 주요 도시를 순회하고, 마지막에 존슨의 텍사스 목장에서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댈러스의 거리에서 차량 행진을 할 때, 케네디 대통령은 텍사스 주지사와, 존슨 부통령은 상원의원과 함께 차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케네디 대통령이 탄 차량에 저격이 가해지면서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하여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하였다.

모든 일정이 중단되고 케네디 대통령의 유해를 실은 에어 포스 원 공군기가 워싱턴 D.C.로 향하는 가운데, 존슨은 이 비행기 안에서 케네디의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제36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일반적으로 미국 대통령 취임선서는 성경에 손을 얹고 하는데[10] 특이하게 존슨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미사경본(Roman Missal)에 손을 얹고 했다. 존슨은 케네디의 유해를 실은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황망하게 취임선서를 해야 하는데 비행기 안에 아무리 찾아도 성경이 없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케네디 대통령[11]이 사용하던 미사경본만 있었던 것. 그나마 미사경본이 성경 구절로 쓰여진 것이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2.3. 재선과 베트남 전쟁

존슨은 대통령이 된 이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케네디 시절부터 개입해오던 베트남 전쟁의 확전을 결정[12], 의회의 지지를 얻어내고 각종 국내 정책도 착실히 추진해 연이은 64년 대선에서 61.1%라는 압도적 득표로 승리한다.


1964년 린든 존슨이 재선에 도전할 당시 방영된 데이지 걸 TV 광고.

대선에서 존슨은 데이지 꽃을 세는 평화로운 소녀와 핵폭탄 폭발 카운트다운을 세는 장면을 매치시켜 상대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 후보(공화당)가 당선이 되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담은 광고를 내보냈다. 이 광고는 데이지 꽃 소녀가 나와서 "데이지 걸" 광고로도 불리며, 지금도 세계 역사상 가장 임팩트가 강한 정치광고라고 평가받으며 실제 당시 골드워터 낙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베리 골드워터 후보는 64년 대선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된 흑인민권운동으로 촉발된 연방 민권법(Civil Rights Act) 제정 문제를 인종차별엔 반대하지만 연방정부가 주정부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주의 권리(states' rights)를 내세우며 반대했고, 린든 존슨은 이걸 역이용해서 골드워터를 '모든 국민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기 싫어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공격하였다. 덕분에 표심이 많이 기울어 린든 존슨은 선거인단 수 486명 대 52명, 득표율 61.1%[13] 압승한다. 저 61.1% 득표율은 린든 존슨 이후의 민주당 아니 어느 정당 대선 후보도 얻지 못한 엄청난 득표율이다.[14]

하지만 대승에 뒤이은 현실은 헬게이트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월남전의 수렁에 빠진 데다가, 외부 공격 막기도 바쁜데 내부에선 다음 대권을 노리던 정적 로버트 F. 케네디가 끊임없이 견제를 해 재임 기간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렸기 때문. 덕분에 원래 법적으로는 대통령직 승계 기간이 2년이 안 되어서 다시 대선에 출마할 수 있었지만, 결국 스트레스 + 노환으로 악화된 건강과 베트남전으로 떨어진 지지도를 인정하고, 출마를 포기하였다. 존슨이 재출마하여 당선되어 임기(1969년~1973년)를 마쳤다면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가장 장기간 집권한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르나[15][16] 이 결정으로 미국 역사상 8년 이상을 재임한 대통령은 계속 프랭클린 루스벨트 하나밖에 없게 되었다. 만약 재선에 성공했다면 10년 가까이 재임하게 될 뻔 했지만 뉴햄프셔 주 경선에서 OME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더 해보기도 귀찮았던지 경선을 포기하고 만다.[17]

그리고 민주당은 내분과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 등으로 선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허버트 H. 험프리 후보가 공화당 리처드 닉슨 후보에게 석패하고 정권을 내주게 된다.

그러나 존슨의 베트남전 지지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험프리의 패배를 야기했다는 것은 상당히 부당한 주장이다. 험프리의 패배는 시민권법 제정에 뿔이 난 남부 미국독립당(딕시크랫)의 독자 출마를 막지 못한[18] 민주당 주류파의 선거 전략 미비 탓이 크며 실제 닉슨과 험프리의 득표율 차는 겨우 0.42%에 불과했다.

다만 선거인단에선 301명 : 191명 : 46명으로, 딕시크랫 없는 간발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결과에서 민주당에 딕시크랫을 더했으면 험프리가 압승하긴 한다. 근데 딕시크랫 대선후보인 조지 월러스[19]는 민권운동의 철저한 반대자인데 그 양반 뽑던 사람들이 월러스 출마 안했다고 곱게 험프리를 뽑을지도 의문이긴 하다. 또 선거인단 수를 합쳐도 237명 밖에 안됐으니 득표 수는 험프리가 앞섰으나 선거인단에서 져 대선에서 낙선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를 노린 닉슨의 소위 남부 전략으로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 텃밭은 확 바뀌게 된다. 돈과 선거 전략에서도 절치부심한 닉슨에 비해 험프리가 여러모로 부족했단 평도 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여기리처드 닉슨 항목도 참조.

그래도 베트남전을 지원해야 된다는 신념은 있었는지, 존슨은 퇴임한 후에도 "우리는 베트남전 계속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해인 1973년까지도 전쟁은 나날이 미군에 불리해져갔고, 미국 내에서도 회의론이 벌어졌기에 존슨 본인도 이 주장이 무력함을 느끼며 죽고 만다. 본인도 후회되는 부분은 있는지, 자서전에서 "나는 훌륭한 아내(국내 정책)를 길거리 창녀(베트남전 참전)에게 잃은 꼴이다"(...)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2.4. 괜찮았던 내치

외치에서 죽을 쒀서 그렇지, 내치에 있어서는 업적이 상당히 많은 대통령이었다. 때문에 베트남 전쟁만 없었더라면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들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정권기를 거치며 린든 존슨이 상당한 재조명을 받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 행정부는 미국의 빈곤에 대해 무조건의 선전포고를 하겠습니다."
1965년 3월 15일, 재선에 성공하게 만든 존슨의 연설. 연설영상, 연설문.
존슨은 소위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 정책과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을 선포하며, 연방정부의 공립학교(초, 중학교)에 대한 대대적 재정지원 정책[20]과 미국 환경 보호 정책의 기틀을 만들었다. 또 현재 미국의 의료보험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메디케어(Medicare; 65세 이상의 미국인에게 제공되는 의료보험)와 메디케이드(Medicaid;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극빈층[21]에게 제공되는 의료보험) 역시 모두 존슨 행정부에서 시작되었다.[22]

Tax-cut bill of 1964으로 경제 성장 촉진 및 기업 투자 증가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으며, Economic Opportunity Act of of 1964로 직업 프로그램 지원, VISTA 자원봉사 프로그램, Head Start Project 등을 시작했다.

흑인에 대한 법적인 평등이 보장된 것도 그의 손에 의한 것이었으며, 흑인민권운동에서 촉발된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 제정은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이다. 케네디 때 못이룬 민권법 통과를 그는 지지층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밀어붙였는데, 이 법이 통과된 후 존슨은 측근에게 "잘 한 일이야. 하지만 이로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남부는 공화당이 지배하겠군."이라는 씁쓸한 말도 남겼다고 한다.[23]

그 밖에도 1965년 이민 및 국적법으로 비유럽인들이 미국에 더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인간의 달 착륙을 성공시킨 아폴로 계획도 존슨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실현시켰다.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다소 무모한 선언은 케네디 암살 이후 동력을 잃고 흔들릴 뻔했으나, 존슨 대통령은 아폴로 계획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계속했다.[24] 덕분에 케네디 재임기간에는 상당히 불확실하고 무모한 계획에 불과했던 아폴로 계획이 존슨의 재임기간 동안 구체화되었다. 즉, 냉전기 우주개발 경쟁에서 소련에 계속 뒤처졌던 미국은 존슨 재임기 중반에 실시된 제미니 계획을 통해 비로소 소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존슨 대통령은 아폴로 11호가 성공하기 반년전에 임기가 끝났기 때문에 닐 암스트롱에게 축하해준 대통령은 후임인 리처드 닉슨이었다.

하지만 후임 닉슨 대통령은 그런 그의 정책을 상당부분 뒤집었으니, 베트남전은 몰라도, 닉슨의 당선으로 미국은 다른 의미의 워터게이트헬게이트를 열게 되었다.[25]

다만 존슨 대통령의 국내 정책에 대해 마냥 호평만 있는건 아니라, 미국의 본격적 복지 프로그램인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의 재정 투입 대비 효율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정책학(Policy Science)이라는 학문이 등장하는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로 인해 70년대에 들어서면 정책 집행과 정책 평가 분야가 크게 각광받게 되었으나, 문제는 이때도 정치적으로 피드백을 받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고.(...)

또 국제금융 제도로서의 금태환제/고정환율제와 미국의 기축 통화국으로서의 지위가 맞물려, 재정 투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미국이 아닌 서유럽이 뒤집어쓰는 꼴이 되자 열받은 샤를 드 골이 미국을 대놓고 디스하기도 했다. 애초에 존슨은 그닥 유럽 신경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결국 이런 재정 정책은 비대한 정부를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득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이에 대해선 당시 민주당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감세안의 영향도 있으며, 소위 신자유주의를 내세운 80년대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뿐이라는 평가도 있다.

거물 정치인인 만큼 정경유착 의혹도 받았는데, 조지 W. 부시의 부통령 딕 체니에 이르기까지 정경 유착으로 악명높았던 핼리 버튼이 급성장한 시기가 이시기 쯤부터라 그렇다. 핼리 버튼의 건설 엔지니어링 분야 자회사인 ‘브라운 앤드 루트(Brown & Root)’는 1962년 핼리 버튼에 합병되었는데, 이 브라운 앤 루트가 존슨의 정치 캠페인을 전적으로 밀어주는 대가로 독점적인 관급공사 계약, 즉 베트남전 동안 미군이 발주한 인프라 공사의 85%를 차지했다. 이는 당시 참여한 4대 컨소시엄 가운데 압도적인 몫으로 반전 시위자들의 조롱감이 되었으며 참전 군인들도 브라운 앤 루트를 '번 앤드 루트(Burn & Loot)', 그러니까 방화하고 노략질하는 기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2.5. 퇴임 및 사후의 평가

존슨은 실질적으론 5년 약간 넘게 집권하다 1969년 1월 20일 닉슨에게 대통령직을 인계하고 텍사스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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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5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서관을 개관했을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회동한 모습.

존슨은 젊은 시절부터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댄 골초였고, 이로 인하여 이미 여러 차례 심장에 문제를 일으킨 바 있다. 건강을 위해 한때 금연하고, 백악관까지 처음으로 금연구역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대통령 재임 중 많은 스트레스로 담배를 다시 찾았고,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존슨은 퇴임 후 텍사스 고향 농장에서 은둔하다시피 하며 지냈으나, 그의 몸은 더욱 비대해지면서 동시에 쇠약해졌다. 1972년 12월 28일,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고, 이것이 존슨의 거의 마지막 대외 활동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달도 채 못된 후였던 1973년 1월 22일, 농장에 있던 중 신체의 이상을 느꼈는지 경비업체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마이크를 당장 보내!"
(Send Mike Immediately!)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헬리콥터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샌안토니오의 병원으로 옮길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연락을 받은 경비업체 직원이 그의 집에 가니 존슨은 수화기를 붙잡은 채로 이미 숨져 있었다고 한다. 손을 쓸 시간도 없었던 것. 사인은 동맥경화로 인한 심장마비. 그가 퇴임한 지 불과 4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향년 64세.[26] 유해는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에 옮겨져 조문객을 받았고, 미국은 트루먼 전 대통령 추모 열기가 식기도 전에 다시 대통령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27] 국장이 치러진 후,[28] 유해는 텍사스 농장으로 다시 옮겨져 묻혔다.

결국 베트남전의 수렁 속에 빠져들며 국내에서 이루어낸 많은 업적이 묻힌 대통령. 그래도 21세기 들어 다시 재평가를 받는 경향은 있다.

많은 미국 역사학자들은 존슨을 "미국 대통령들 중 가장 모순덩어리인 인물"이라고 평가하곤 한다. '위대한 사회'라는 프렌차이즈를 내건 그의 내치는 상당히 진보적이고 훌륭한 지향을 가진 정책이었지만, 외적으론 베트남 전쟁의 실책이 함께하며, 성격적으로도 쾌활하고 노회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한편으론 직설적이고 짓궂은 화법에 어딘가 나사 빠진(...) 모습 또한 상당히 보여줘서 인물상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 그래서인지 일부는 "이 양반은 유능한 정치가야? 아니면 그냥 생각 없는 텍사스 카우보이야?"라고도 했다고..

존슨 당시 공보담당 비서관을 지낸 조지 리디는 1982년 존슨 회고록에서 "그는 개자식(son of a bitch)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훌륭한 개자식이다. 라고 존슨을 평가했다. 빌 클린턴과 대권을 두고 경쟁했던 공화당 상원의원 밥 돌은 존슨을 "텍사스 허풍의 대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2018년 미국 정치학회 회원들이 참여한 대통령 순위 조사에선 10위에 올랐다. 2014년 진행된 비슷한 조사에서도 12위로 평가받았다.

다만 보수에서는 매우 낮게 평가되는데, 해리티지 재단에서 내린 순위에서는 최하위 5에 속했다. 같은 남부 출신 카터 또한 낮게 평가되는데, 남부 출신이면서 인종화합에 힘쓴 것에 대한 (구)딕시크랙의 분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37 미국 연방하원의원 보궐선거 텍사스 10구

8,280 (27.65%) 당선 (1위) 초선
193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4,476 (100.00%) 당선 (1위) 재선
194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48,442 (100.00%) 당선 (1위) 3선
1941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텍사스 174,279 (30.26%) 낙선 (2위)
194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텍사스 10구 12,799 (100.00%) 당선 (1위) 4선
194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44,602 (92.87%) 당선 (1위) 5선
194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6,947 (100.00%) 당선 (1위) 6선
194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텍사스 702,985 (66.22%) 당선 (1위) 초선
1954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538,417 (84.59%) 당선 (1위) 재선
196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306,625 (57.98%) 당선 (1위) 3선[29]
미국 부통령 선거[A] 미합중국 34,220,984 (49.72%, 303명) 당선 (1위) 초선[31]
1964 미국 대통령 선거 43,127,041 (61.05%, 486명) 당선 (1위) 재선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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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견 '유키(Yuki)'와 함께. 그는 이렇게 개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장난을 많이 쳤다고 한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에이브러햄 링컨의 뒤를 이어 2번째의 장신(192cm)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공동 2등.

이니셜 LBJ를 자칭, 타칭으로 많이 쓴 대통령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JFK(존 F. 케네디), FDR(프랭클린 D. 루스벨트), TR(시어도어 루스벨트) 등이 있다. 부인 클로디아 앨타 테일러는 원래 애칭이 레이디 버드(Lady Bird)인데, 아예 이 애칭을 정식 이름처럼 내세웠고, 이니셜까지 LBJ가 되었다. 그리고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딸의 이름도 린다 버드, 루시 베인스로 지어 딸들의 이니셜까지 LBJ로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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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The Johnson treatment로 유명했다. 이게 뭐냐면, 자신이 원하는 법을 빨리 통과시키기 위해서 상원의원들을 설득이라 쓰고 협박이라 읽는다시키는 방식이었다. 쉽게 말해 권모술수의 달인.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현직 상원의원들의 최대한 많은 정보를 이용해서 말빨, 그리고 큰 덩치와 직위에서 나오는 위엄 등을 합쳐 상원의원들이 그의 제안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게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이건 상원 다수 리더였던 시절 때부터 자주 써먹었던 방식이다. 위 사진은 Johnson Treatment를 당하고 있는 시어도어 그린 상원의원. 둘다 표정과 몸짓이 압권이다.

쉬지 않고 하루에 18~20시간씩이나 일하는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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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13일 백악관에서. 좌측 인물은 훗날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관이 되는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이다.[32]

존슨 대통령은 마셜에게 법무부 차관직을 제의했는데[33] 이상하게도 마셜은 존슨의 제안에 선뜻 답을 않고 차일피일 미루며 묵묵부답이었다. 위 사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흑인이었기 때문. 뒤늦게 마셜의 의중을 눈치 챈 존슨은 그를 집무실로 불러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시오? 법무차관 자리에 깜둥이(Nigger)가 앉아있는 걸 사람들이 보면 뭔 낯짝을 하게 될지 궁금하단 말이오!"라고 질러 버렸다(...). 즉, 흑백 차별 철폐의 일환으로 법무차관에 흑인인 마셜을 앉혀서 인종 차별주의 성향을 지닌 백인들의 속을 뒤집어버리려는 의도였던 것. 그렇게 존슨 대통령의 뜻대로 서굿 마셜은 1965년 8월부터 1967년 8월까지 법무부 차관으로 일하다가 연방 대법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심지어 존슨이 마셜을 대법관으로 임명하기 위해서 한 일이 걸작인데, 당시 대법관으로 있던 탐 클라크의 아들인 램지 클라크를 법무차관에 앉혀 버렸다. 즉 법무부와 대법원은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부자(父子)가 동시에 양쪽에서 재임할 수는 없는 노릇인걸 존슨이 노린건데, 결국 탐 클라크 대법관이 이해 관계를 이유로 사퇴하자 바로 마셜이 대법관으로 지명되었다.

사실 마셜과 존슨은 동갑내기에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사이였고, 마셜 이 양반도 존슨 못지 않게 한 성격해서(.....) 둘이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에서는 여지없이 불타는 뒷담화가 오갔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만날 때마다 평소 자기네들이 안 좋게 보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 X새끼, X해버릴 새끼." 뭐 이런 식의 수다를 떨었다고.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지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중 최고의 욕쟁이로 뽑은 인물이기도 하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1964년 그리스 왕국키프로스 침공 때 주미 그리스 대사를 백악관으로 불렀는데, 그리스 대사가 앉자마자 "당신네 나라(그리스)는 벼룩이야. 미국은 코끼리고. 코끼리가 벼룩 한 마리 밟아뭉개는 건 식은 죽 먹기라구."라는 폭언을 내뱉었다. 코끼리가 설마 이 코끼리를 뜻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스 대사가 헌법을 거론하며(...) 그리스의 침공을 변명하려 하자 존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네 의회랑 헌법 따위 X까라 그러지. 미국은 코끼리야. 키프로스는 벼룩이지. (근데,) 그리스도 벼룩이야. 만약 벼룩 둘이 계속 코끼리를 가렵게 한다면, 한 방 제대로 쳐맞을 거요." (Fuck your parliament and your constitution. America is an elephant. Cyprus is a flea. Greece is a flea. If these two fleas continue itching the elephant, they may just get whacked good.)
이 폭언에 뒤이은 경고도 걸작이다.
"우리는 그리스인들에게 많은 달러를 제공하고 있소, 대사. 만약 당신네 총리가 나한테 민주주의, 의회하고 헌법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당신네 총리, 의회와 헌법은 아마 오래가지 못할거요." (We pay a lot of good American dollars to the Greeks, Mr. Ambassador. If your Prime Minister gives me talk about democracy, parliament and constitution, he, his parliament and his constitution may not last long.)
이 살벌한 경고에 식은 땀만 실컷 빼고 온 그리스 대사는 본국에 급전을 쳤고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알아챈 그리스 정부는 키프로스에서 철군 명령을 내렸다.

흔히 텍사스 부자(富者) 대통령으로 조지 부시 부자(父子)를 들고, 존슨은 텍사스 농촌 스타일의 서민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존슨은 부시 부자보다 재산이 훨씬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재산순위 상위권에 든다. 현재 물가 기준으로 7번째로 재산이 많았던 미국 대통령이라고 한다. # 인플레이션을 반영할 경우 부시 부자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은 것. 그의 집안은 텍사스 곳곳에 여러 사업에 투자하며 한때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고, 그도 젊은 시절 학비를 아껴가며 대학에 다닌 적도 있기는 하나, 이후 다시 사업이 번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고, 부인도 사업에 재능을 보였다. 조지 W. 부시가 대통령 재임 중 텍사스의 크고 아름다운 농장 때문에 자주 까였지만, 사실 존슨의 텍사스 농장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컸고, 존슨도 틈만 나면 백악관을 떠나 농장에 머물고는 했다. 존슨의 텍사스 농장에는 그의 묘지가 있으며, 가족들은 국가에 토지를 일부분 기증하여 국립 역사 유적지로 등록되어 있다.

수륙양용 자동차를 갖고 있었는데, 텍사스 존슨 시티에 있는 자기 집에 온 손님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빙을 즐기다가 언덕길을 내려가며 갑자기 브레이크가 고장난 척 하고 비명을 지르며 호수에 그대로 들어가버리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존슨 재임기간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사망해서 조문사절을 보내야 했는데, 당시 영국 주재 미국 대사에게 사절 역할을 맡겨 상대적으로 급이 낮다며 눈칫밥을 먹기도 했다. 이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장례식에 참석을 했기에 존슨 본인이 정 가기 싫었으면 그냥 처음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대리인 및 미국 대표를 맡기거나 당시 부통령이었던 허버트 험프리를 조문 사절 대표로 보내면 아무 문제 없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지만[34] 굳이 그렇게 안해 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쯤 되는 사람이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왜 존슨이 굳이 이런 악수를 뒀는지는 정확한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존슨은 아이젠하워 이래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나지 않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사실 여기엔 존슨도 케네디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을 수습하느라 바쁘고, 엘리자베스 2세 역시 임신 문제로 인해 순방이 곤란했던 측면도 있었다.

한번은 기자가 베트남전 관련해서 날선 질문을 하자, 빡친 나머지 바지를 내리며(...) "이거 보이시오? 훌륭한 텍사스산 거시기라구. 이거 괴롭히지 마시오."라는 말을 뱉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성기는 점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고(...). 관계자들은 그가 "핵무기를 언제든 사용할 만한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소련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조울증을 앓고 있는 그가 돌발적으로 한 행동이다" 등 온갖 추측을 내놨으나 결국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 또 그는 이 '점보'를 자랑스러워 했는데, 일화로 그는 백악관 화장실을 사용할 때 항상 문을 열어놓고 볼 일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비서관에게 보고를 받기도 했다고.꼬부심 하긴 190이 넘는 거구인데 그곳도 어지간히 컷겠지...

존 에드거 후버FBI 국장 자리에서 경질하려다가 취소하면서 "후버가 텐트 밖에서 안으로 오줌 싸는 것보다야 안에서 밖으로 싸게 하는 게 낫겠지.[35]"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을 방문한 독일의 에르하르트 총리가 "대통령께서는 통나무집에서 태어나셨다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존슨은 "저랑 에이브러햄 링컨을 혼동하셨군요. 저는 예수처럼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라고 자뻑 받아쳤다고 한다.

대통령 퇴임 후 교통 속도 위반으로 경찰에 적발된 적이 있었는데, 경찰이 전직 대통령인 존슨을 알아보고 놀라서 "Oh, my god!"이라고 외치자 존슨은 바로, "내가 신인 걸 잊지 마시오."라고 받아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과연 꿈은 이루어졌는지, 원시부족의 섬에서 신격화되고 왕 노릇을 해달라고 요청받기도 했다. 사실 진지한 신앙은 아니고 정치 운동에 가까웠지만. 자세한것은 화물 신앙 문서 참고.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제럴드 포드에 대해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껌 씹는 것과 방귀 끼는 것을 동시에 못하는 사람이지."라고 평했는데, 쉽게 말해 "포드, 참 덜 떨어진 친구야"라는 뜻(...). 노골적으로 내뱉는 걸 좋아한 존슨의 농담 치고는 신사적인(?) 표현.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임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 배후에 존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케네디의 암살로 제일 이익을 본 인물이고 당내 경선에서 케네디에게 패해 이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것, 고향 텍사스의 군수 재벌, 석유 재벌들의 협력으로 정계에 입문한 인물이었으며 그 당시 케네디와 존슨이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허나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기 때문에 그냥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다. 존슨 본인은 케네디의 암살 배후를 쿠바피델 카스트로로 지목했다. 또 닉슨 항목에서 보듯 닉슨 배후설도 만만찮다. 애초에 대통령 암살 사건이라는게 온갖 음모론이 떠돌기 마련이라...

텍사스휴스턴의 NASA 본부는 린든 B. 존슨 우주센터로 이름지어졌다. 발사장은 플로리다케이프 커내버럴존 F. 케네디 우주센터. 댈러스 지역을 반쯤 순환하는 I-635 또한 LBJ Freeway라고 명명되어 있다.

그 유명한 SR-71 블랙버드 정찰기의 이름을 지금처럼 SR-71로 만든 대통령이기도 하다.
원래 제식 명칭은 SR이 아닌 RS-71이었으며 "정찰 및 타격(Recon & Strike)"의 약자였지만 RS-71이라는 명칭을 당시 미국 대통령인 린든 B. 존슨이 실수로 SR-71로 읽은 바람에 대통령이 실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 공군이 관련 서류에 있던 기종 명칭을 모두 SR-71로 뜯어고치는 삽질을 해서 결국 제식명칭이 SR-71이 되었다. 나중에 전략정찰기(Strategic Reconnaissance)라는 말이 나와서 나름 그럴듯해 보이긴 했다.
... 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최근까지 알려져 있던 내용인데, 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게 100% LBJ의 삽질인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닌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이 존슨 대통령 몰래 백악관 보좌관에게 압력을 넣어 자신이 원하는 전략정찰기(Strategic Reconnaissance)라는 이름으로 바꾸기 위해 대통령이 읽을 원고에서 RS를 SR로 바꾸게 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원고를 멋대로 바꾸는 어느 한 공참총장의 똘끼?[36]

5. 한국과의 관계

존슨 집권기 당시 한국 정부는 박정희 정권이였는데, 베트남 전쟁 참전 결정을 내려줘서 그런지 속내야 어떻든 겉으론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1965년 박정희 방미때는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빌려주기도 했었다.[37] 사실 월남전 당시 미국의 파병 요청을 거부한 캐나다 피어슨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났을 때 화를 내며 멱살까지 잡았다고 알려진 걸 보면(...)[38] 월남전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지 알지 못한 이때까지만 해도 파병국은 다 이뻐보였을듯.

1966년 존슨이 방한했을 당시엔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가뜩이나 베트남 문제로 국내에서 난타당하고 있던 존슨은 이때 한국 시민들의 환대를 받고 감동의 도가니탕이 되었단 후문이 있다. 물론 동원된 시민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관용차가 지나가는 길에도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모든 시민들이 꽃다발을 들고 열렬히 환영했다. 때문에 기분에 취했는지 존슨은 갓을 쓴 노인장을 헬기에 태우고 수원 상공을 도는 서비스를 해주었으며, 이에 노인들은 존슨에게 새신랑이 입는 사모관대를 입히고 마침 방문 중인 마을 촌장과 사진 촬영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사하였다. 덩치 큰 존슨이[39] 새신랑마냥 관모 쓰고 얌전히 있는 모습이 볼 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성 이벤트에만 그치지 않고 존슨은 마침 설립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던 KIST 설립에 협조해주었다.[40]

이 시절 개발된 부대찌개의 일종인 존슨탕(!)이 이 양반의 이름을 붙여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방한 당시 청와대에서 배달시켜 먹은 음식이 부대찌개라 존슨탕이 되었다는 말도 있고, 주한미군 부대 시찰 당시 부대에서 먹어보고 맛있다고 칭찬을 해 존슨탕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물론 다 설들 중 하나로 확실하진 않다. 자세한건 부대찌개 항목 참고. 방한 당시 국내엔 흔하지 않았던 위스키커티 삭을 찾는 바람에 전국을 뒤져 공수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음담패설식으로) 이동원이 "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의 외교는 더욱 능숙"하다고 받았다. 애무를 잘하는 외무장관 이에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순간 흠칫.. 박정희는 "난 마누라한테 잡혀 사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별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 대통령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영부인 버드 여사가 존슨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이 옆방에 가있을 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 1992, 155~156쪽)에서[41]

6. 매체에서

  •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등장한다. 검프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면서 "미국은 자네에게 큰 빚을 졌네"라고 말한다. 그리고 검프가 베트남 전쟁에서 엉덩이에 상처를 입었다는 걸 듣고 "나도 한 번 그 상처를 보고 싶군."이라고 농담을 던진다. 물론 검프는 진담으로 알아듣고 대통령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상처를 보여준다. 좌중은 웅성웅성대는데 존슨은 웃고 "농담도 못 하겠군"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걸어나간다. 짧은 일화지만 농담을 즐긴 존슨의 스타일을 잘 묘사한 장면. 영상.
  • 베트남 전쟁 개전 과정을 다룬 HBO의 2002년작 TV영화 <전쟁으로 가는 길>(Path To War)에선 영국 배우 마이클 갬본이 연기했다.
  • 게임 메탈기어 솔리드 3에서 등장한다. 등장 장면은 짧지만 버추어스 미션과 스네이크 이터 작전의 최종 결재자였던만큼 중요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게임 초반, 스네이크 이터 작전 브리핑 중에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과 통화하는 장면이 있고 게임 엔딩에서 스네이크 이터 작전을 완수하고 귀환한 네이키드 스네이크에게 직접 훈장과 빅 보스 칭호를 수여한다. 다만 게임상에선 한가지 옥의 티가 있는데, 여기서는 180cm의 스네이크보다도 키가 작게 표현되었다. 성우는 나카에 신지(일)/Richard McGonagle(영).
  • 영화 올 더 웨이는 JFK암살사건 이후 대통령이 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인종차별을 금지한 1964년 공민권법에 서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었다. 브라이언 크랜스톤은 이 역으로 2014년 토니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TV영화에도 린든 존슨 대통령역으로 출연.
  • 넷플릭스 오리지널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가 존슨을 모델로 창작된 인물이다. 하원의원 시절부터 정치 스타일이 존슨 스타일과 매우 흡사하며 대통령이 된 이후 대외관계에서 과격하고 직설적인 발언을 하는 것 역시 존슨을 모방한 것. 단,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닉슨 대통령의 모습을 보인다.
  • 더 크라운 시즌 3 2화에서는 클랜시 브라운이 연기한다. 영국이 경상수지 적자로 미국에 재정지원을 요청하지만, 베트남전을 지원하지 않는 영국에 화가 난 존슨은 무시해버린다. 이에 미국 여론을 영국에 우호적으로 돌리기 위해 마거릿 로즈가 순방에 오른다. 마거릿은 마지막 날 백악관 만찬에서 언니와 총리의 조언을 무시하고 격식없이 케네디에 대한 인물평과 음담패설을 늘어놓는데, 이게 입담 걸걸하기로 유명한 존슨의 성향과 딱 맞은데다가 1인자의 휘광에 가린 2인자라는 동질감까지 이끌어내 미국의 재정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1] 현재는 린든 B. 존슨 고등학교로 개칭했다.[2] 졸업 후 2년 동안은 캘리포니아에서 친척과 함께 일을 하였다고 한다.[3] 재선 이후 2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취임선서. 부통령 시절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건으로 하루 아침 만에 대통령이 되었다보니 첫번째 취임 선서는 당시 케네디의 시신이 운구된 에어포스 원 안에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당시 취임 선서[4] 이 당시는 민주당이 입법부와 행정부 권력을 다 차지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5] 다만 아래에도 나와 있듯이 집안 재산과 별개로 성격만은 좋게 말해 소탈하고 유쾌한 텍사스 농부 맞았다(...).[6] 실제 내용은 면세혜택을 받는 교회 등 비영리단체의 정치활동 참여 및 정치적 발언을 금하고, 만약 위반시 면세혜택을 박탈하는 것. 이는 교회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오히려 국가, 혹은 정치의 교회 개입을 막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7] 이는 가톨릭 신자로 보수적인 남부 표를 얻지 못할까 우려한 케네디가 남부 출신의 존슨을 끌어들인 것이란 분석도 있다. 또는 케네디의 비서 이블린 링컨은 1993년 인터뷰에서 존슨이 후버로부터 얻은 케네디의 여성 편력 관련 증거물을 가지고 자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도록 협박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8] 3번째는 조지 H. W. 부시. 조지 H. W. 부시에게 텍사스는 나고 자란 실제 고향은 아니지만, 20대 때 텍사스로 건너온 이후 줄곧 텍사스를 기반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텍사스가 정치적 고향인 텍사스 출신 부통령이 된다.[9] 존슨의 오른쪽에 위치한 망연자실한 표정의 여인은 다름아닌 피살당한 존 F.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재클린의 옷에는 피격당한 남편의 핏자국이 묻어있는 상태였다.[10] 이는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청교도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 본인의 종교와 관계없이 그냥 관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11]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첫 가톨릭 신자였고, 60년 후 취임한 바이든 현 대통령이 두번째다.[12] 사실 월남전 참전은 전임 케네디의 노선을 따르면서도 또 그와는 차별화를 해야 했던 린든 존슨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란 분석도 있다. 케네디는 명분론적 우위 속에서 친미 국가의 경제 발전을 돕는다면 굳이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 다만 일각에선 존슨도 베트남전 개입을 최대한 억제하려했으나, 당시 남베트남 정부가 워낙 노답이라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면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당시 남베트남은 툭하면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는 군부독재에, 부정부패 등으로 베트남인들의 지지를 영 못받고 있었기 때문. 심하면 1년에 3번씩 쿠데타가 일어날 지경이었으니 안보 태세가 휘청이는건 어찌보면 당연했다.[13] 골드워터는 인종차별철폐에 반대했던 Deep South(사우스캐롤리이나, 조지아, 알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다섯 주와 자신의 고향인 애리조나 주를 제외하고 모조리 다 패배했다. 텍사스는 린든 존슨의 고향이어서 존슨에게 갔고, 플로리다와 노스캐롤라이나, 인디애나, 아이다호, 아칸소, 캔자스 등 공화당 우세 지역에서도 존슨이 신승을 거두었다.[14] 민주당 역사에서 손꼽히는 이력을 남긴 그 프랭클린 루스벨트조차도 최고 득표율은 60.8%였다. 다만 선거인단 수는 존슨보다 훨씬 많이 얻었는데, 1936년 대선 당시 523명을 얻어 1984년 대선의 로널드 레이건이 얻은 525명에 이은 2위다. 배리 골드워터 후보의 득표율은 38.5%.[15] 사망한 해가 1973년인 관계로 만약 이럴 경우(특히 22일 사망이라 사실상 퇴임 2일 만일 수도 있었다.), 후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존슨의 장례식을 주관하는 입장이 됐을듯 하다. 실제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자 마자 존슨의 장례식을 주관했다.[16] 존슨의 재선 불출마에 건강 문제도 한몫한걸 감안하면 임기를 끝마치지 못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렇게 되면 부통령이자 실제 68년 대선 후보였던 험프리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것이다.[17] 대통력직에 있는 경선 후보가 경선을 포기한 최초의 사례이다.[18] 당시 민주당내 비주류 보수파로, 사실상 인종주의를 장착한 극우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흑인민권운동을 당시 민주당 주류 진보파들이 지지하니 당연히 뿔이 날 밖에.. 이들은 이후 상당수가 공화당에 입당한다. 결국 월남전은 아니지만 존슨 탓이 있긴 하다?[19]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나오는 앨라배마의 주지사가 이 사람이다. 대선 당시나 그 이후에도 인종분리정책을 열렬히 펼쳤으나 암살 시도를 겪은 뒤 과거의 행보를 반성했다.[20] 여담으로 특수학교에도 더 큰 투자를 하도록 하였다.[21] 정확히는 정부로부터 제정 지원을 받고 있는 극빈층.[22] 다만 이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는 미 정부의 재정지출의 30%가 넘는 비중을 차지하며 미 정부 재정적자의 큰 원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의료비가 원체 비싸지다보니...게다가 의료비가 너무 올라서 재정 부담이 크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즉 정부에게나 개개인에게나 모두 부담이 큰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수혜자를 줄이기도 어렵다. 이렇게 된 것은 미국의 의료체계가 영리병원과 대기업 보험회사 위주로 되어있는 것이 가장 크다. 사기업의 특성상 최대한 많은 이윤을 짜내야 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의 재정지출을 이기지 못하고 닉슨이 의료보험을 민영화시킨 악영향이 21세기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OECD 국가들의 의료비 지출은 GDP 대비 평균 9%, 한국은 7% 수준인데 비해 미국은 무려 15%나 된다. 그래서 클린턴, 오바마 모두 의료보험 대개혁을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당선됐지만, 결국 기득권 세력의 극렬한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23] 실제 이때부터 기존 민주당 텃밭이던 남부는 공화당 텃밭으로 넘어간다. 더군다나 LBJ는 남부의 상징 텍사스 출신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자기 고향을 공화당에 넘겨줄 것까지 각오하고 민권법을 밀어붙였다고 이야기해도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24] 케네디의 발언은 나사 직원들한테 용기를 줬으나, 기본적으로 공밀레였다. 존슨이 "그냥 하지 맙시다." 한마디만 하면 끝... 1968년 유인우주선이 달을 순회하는데 성공하자 “여러분들은... 우리 모두를, 전세계 인류를, 새로운 시대로 안내했습니다."라고 말을 못 잇기도 했다고. 하지만 최초의 달 착륙의 영광은 다음 대인 닉슨 때로 넘어간다.[25] 사실 베트남전도 존슨만 탓하긴 뭐한게, 존슨의 후임자 닉슨도 결국 이도저도 못하다 남베트남 멸망을 부채질했기에 비판받을 소지는 분명히 있다. 물론 그 닉슨조차 또 할 말이 없냐 하면, 이 사람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했기에 자신은 남베트남 멸망과 무관하다며 포드 탓을 했다.(...) 실제 남베트남이 멸망한건 닉슨의 사임 이듬해인 1975년으로 제럴드 포드의 집권기긴 했다.[26] 여담으로 대통령 취임 때부터 사망까지의 과정 및 시간이 캘빈 쿨리지와 너무나도 비슷한데 두 사람의 전임 대통령이 모두 0년대에 당선되었다가 3년 뒤 대통령 직무 수행 중 사망했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두 사람은 이로 인해 대통령직을 승계받았다. 그리고 둘 다 재선을 거쳐 6년 동안 대통령을 지낸 뒤 퇴임 후 4년 뒤에 사망하였다.[27] 이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도 1969년에 타계하여 당시 미국엔 생존한 전직 대통령이 한명도 없게 되었다. 참고로 아이젠하워, 트루먼, 존슨 모두 닉슨 대통령 재임기에 죽었다.[28] 트루먼의 장례식은 가족들의 뜻에 따라 국장으로 거행되지 않았다.[29] 1961.1.3. 미국 부통령 취임을 위해 사임[A] 대통령 후보는 존 F. 케네디[31] 1963.11.22. 전임 존 F. 케네디 암살로 인해 대통령직 승계[32] 1908~1993. 이 사람은 첫번째 흑인 법학자이기도 하다. 1967년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법관이 되어 20년 넘게 재임했다. 볼티모어 워싱턴 국제공항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볼티모어 워싱턴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은 Baltimore/Washington International Thurgood Marshall Airport, 즉 볼티모어-워싱턴 서굿 마샬 국제공항이다.[33] 당시 마셜은 미국 연방 항소 법원 판사.[34] 거기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처칠은 연합국의 지도자, 아이젠하워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으니, 참전 용사가 옛 전우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상징성까지 있었다.[35] It's probably better to have him inside the tent pissing out, than outside the tent pissing in.[36] <월간 항공> 2009년 11월호 기사 참고 바람. 존슨 대통령의 공개는 당시 극비였던 CIA가 운용하던 SR-71의 1인승 원형기인 A-12를 가리기 위한 일종의 연막이었다고 한다.[37] 1961년 11월 처음 박정희가 미국을 찾았을땐 미국 민항기를 이용했고, 케네디도 쿠데타군의 수장인 박정희를 그닥 호의적으로 보진 않았다. 사실 이때부터 박정희는 경제 원조를 요구하며 파병 제안도 먼저 했으나, 케네디 정부는 공산권을 자극할 가능성도 있고 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허나 케네디가 암살되고 존슨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뒤 월남전이 격화되자(케네디와 차별화된 노선도 필요했던) 존슨 대통령은 1964년 25개 우방국에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했고, 한국은 이에 적극적으로 응한다.[38] 정확히는 파병도 파병이지만 1965년 피어슨 총리가 방미했을 당시 존슨 대통령을 만나기 전날 미국의 통킹 만 폭격을 비판하는 강연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39] 192cm. 참고로 박정희 키는 160cm대였다(...).[40] 물론 기분에 취해 해줬다기보단 베트남전 참전 대가로 협조해줬다는게 유력한 설이긴 하다.[41] 물론 현직 대통령이 기생 파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 언론들의 먹잇감 되기 딱 좋은 소재임을 고려하면, 이게 과연 현실성 있는 얘기인지는 각자 판단할 부분. 아무리 자신의 점보를 자랑스러워했다고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