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20:56:36

린든 B.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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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Year 196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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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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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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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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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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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6대 대통령
린든 베인스 존슨
Lyndon Baines Johnson
파일:린든 B. 존슨.pn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908년 8월 27일
텍사스 주 스톤웰
사망 1973년 1월 22일 (향년 64세)
텍사스 주 스톤웰
재임기간 제37대 부통령
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제36대 대통령
1963년 11월 22일 ~ 1969년 1월 20일
서명 파일:린든 존슨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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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새뮤얼 일리 존슨 주니어[1]
어머니 리베카 베인스 존슨[2]
형제자매 여동생 레베카[3]
여동생 요제파[4]
남동생 샘 휴스턴 존슨[5]
여동생 루시아[6]
배우자 레이디 버드 존슨[7]
자녀 린다 존슨[8]
루시 존슨[9]
학력 존슨 시티 고등학교[10] (졸업)[11]
사우스웨스트 텍사스 교육대학교 (B.A.)
조지타운 대학교 법학대학원
병역 미합중국 해군 중령 전역[12]
종교 개신교 (그리스도의 교회)
신체 192cm / 체중 91kg
소속 정당

의원 선수 3 (상원)
6 (하원)
의원 대수 75, 76, 77, 78, 79, 80 (하원)
81, 84, 87 (상원)
문장 파일:Coat_of_Arms_of_Lyndon_B._Johnson.png
약칭 LBJ }}}}}}}}}
파일:800px-Ljohnson.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약력3. 생애
3.1. 대통령이 되기 전3.2.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대통령 취임3.3. 재선과 베트남 전쟁3.4. 내치와 경제의 다양한 평가3.5. 퇴임 이후
4. 어록5. 선거 이력6. 기타7. 한국과의 관계8. 매체에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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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6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13]
All the Way with LBJ!
LBJ와 함께 끝까지!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내세운 슬로건

미국의 제36대 대통령.

대통령 취임 이전에는 상원 원내총무, 원내대표, 부통령을 역임했다. 저명한 하원의장 샘 레이번과 상원의원 리처드 러셀 주니어의 수제자로, 젊은 시절부터 노련한 정치 감각으로 1948년 상원의원으로 당선된지 불과 4년만에 원내총무를 거쳐 원내대표로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14] 상원 원내대표 시절 그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상원의원들의 개인적인 치부와 약점, 지역구의 특성, 개인사 등을 바탕으로한 협박과 회유로 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오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그 어떤 상원의원도 존슨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이러한 권력을 토대로 1960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고 비록 존 F. 케네디에 밀려 근소하게 낙마하긴 했지만, 그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케네디 행정부 시절 부통령을 지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그는 에어포스원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제3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의 임기는 내치는 FDR의 뉴딜과 트루먼의 페어딜을 계승, 확대한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로, 외치는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된다. 그는 재임 기간 중 3번의 민권법(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 1968년 공정주거법)을 통과시켜 남북전쟁 이래 핍박받던 흑인의 인권을 처음으로 국가적으로 보장하였다. 또 확장적인 재정지출 정책으로 복지를 확대하고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해 빈곤률을 떨어트리고자했으며 공공주택을 확충해 국민이 저렴한 값에 집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1960년대 후반까지 미국은 호황을 맞았으며,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슨은 공화당 후보 골드워터를 꺾고 미국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재선 이후 초선 임기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을 확전시켰다. 베트남 전쟁은 민주당 내의 반전파[15]를 소외시켰을 뿐 아니라, 전쟁의 장기화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지도 떨어지면서 존슨의 지지율은 하락세를 탔다. 또한, 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 시대의 지속된 경기호황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사회분위기가 계속되면서 이에 대한 청년세대와 유색인종의 반발이 반문화에 대한 지지로 확산되었으나, 여기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며 1967년~1968년 사이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대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68년 대선에서 3선 도전을 선언했으나, 3월 뉴햄프셔 경선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 후보인 유진 매카시가 돌풍을 일으키자 스스로 3선을 포기했다. 그해 11월 대선에서는 린든 존슨의 베트남 전쟁 정책과 위대한 사회를 비판하던 보수파 후보 리처드 닉슨이 승리하였다. 존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나, 그의 리더십은 무너지지 않았으며 무려 1980년대 중반까지도 존슨의 뜻에 따르던 속칭 "위대한 사회 민주당원"[16]이 민주당 내에서 당권을 잡고 있었기에 존슨의 유산은 오래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린든 B. 존슨은 그의 후임자인 리처드 닉슨과 더불어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평가하기 어려운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뉴딜 정책 이후 가장 야심찬 복지 정책이었던 "위대한 사회"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남부에서의 반발을 무릅쓴 흑인 민권 정책으로 널리 고평가받는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을 무리하게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진보 성향 사학자들에게 크게 비판받으며, 보수성향 사학자들에게는 그의 재정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해 1970년 단기공황과 1970년대 후반 경기 침체에 부분적인 영향을 주었고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에도 일조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역사학자들은 그를 평균 이상의 대통령으로 평가하며 대통령 순위에서는 8~9위 혹은 10위권대 초반에 주로 위치해있다.

2. 약력

  • 1930. 샘 휴스턴 고등학교 교사
  • 1937. 제75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0선거구 / 민주당)
  • 1939.1. 제76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0선거구 / 민주당)
  • 1941.1. 제77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0선거구 / 민주당)
  • 1943.1. 제78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0선거구 / 민주당)
  • 1945.1. 제79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0선거구 / 민주당)
  • 1947.1. 제80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0선거구 / 민주당)
  • 1949.1. 제81대 상원의원 (텍사스 제2부 / 민주당)
  • 1955.1. 제84대 상원의원 (텍사스 제2부 / 민주당)
  • 1961.1. 제87대 상원의원 (텍사스 제2부 / 민주당)
  • 1962. 미국 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 1961.1. 제37대 미국 부통령
  • 1963.11. 제36대 미국 대통령
  • 1964.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 1980.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추서

3. 생애

3.1. 대통령이 되기 전

파일:린든 B.존슨 리즈시절.jpg
청년 시절.

텍사스 주 스톤웰에서 태어났다. 그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을 기념하여 린든 B. 존슨 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린든 B. 존슨의 텍사스 저택 근처의 존슨 시티라는 도시는 그의 집안의 이름을 딴 것이다.[17] 외가는 유명한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저명한 침례교 목사이자 교수로 베일러 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외조부인 조지프 윌슨 베인스는 텍사스 주무부 장관과 주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그의 미들네임 베인스는 외가의 성씨를 따온 것. 아버지 새뮤얼 일리 존슨도 주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고, 샘 레이번 하원의장 등 텍사스 출신 유명 정치인과도 줄이 닿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젊은 학교 교사였던 린든 B. 존슨은 민주당에 입당하고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승승장구하며 대표적인 정치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린든 B. 존슨의 졸업년도와 생년월일 자료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당시 반에서 제일 어렸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가량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여 친척들의 비즈니스를 도왔다. 그리고 텍사스 주로 돌아와 샌마르코스에 있는 사우스웨스트 텍사스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텍사스의 도시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었다.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특이하게 정계 입문 전 직업이 교사였던 이색적인 경력이다. 이때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교육 시스템에 더욱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길지 않았던 교사 생활을 뒤로 하고 아버지를 따라 민주당에 들어가 1930년 하원의원 출마자의 선거운동을 하며 본격적으로 정치를 익히기 시작했다.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며 텍사스 민주당 청년조직을 이끌었다. 또한 텍사스 출신인 존 낸스 가너 부통령을 도왔고, 당시 전국구급으로 떠오른 텍사스 출신 하원의원 샘 레이번도 도왔다. 1936년 선거에서 루스벨트와 가너는 재선에 성공했고, 샘 레이번은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되어 집권 여당 대표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7년, 텍사스 연방하원의원 10번 선거구 의원이 사망하면서 열린 보궐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린든 B. 존슨이 공천되었다. 주도 오스틴이 포함된 비중있는 선거구였다. 린든 B. 존슨은 만 30세도 되기 전인 젊은 나이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 문제로 크고 작은 갈등이 있던 텍사스 출신의 가너 부통령을 견제하는데 텍사스 출신의 젊은 의원인 린든 B. 존슨을 적합한 인물로 보아 린든 B. 존슨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했다. 1940년, 그의 정치적 스승인 샘 레이번이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 자리에 오르면서 린든 B. 존슨은 레이번의 측근으로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합중국 해군 장교로 복무, 중령으로 전역했다.

린든 B. 존슨은 194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전 주지사인 코크 R. 스티븐슨을 상대로 치열한 경선을 거쳐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다. 이때 경선에서 고작 87표 차이로 존슨이 승리해 후보가 된다. 단순히 표차만 적었던 게 아니라 각종 논란이 연이어 일어나 여러모로 번잡한 선거였다.[18] 이렇게 어렵게 후보로 선출된 존슨은 넉넉한 표차로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그러나 상대 후보도 당시만해도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텍사스의 공화당 후보로서는 많은 득표를 했고, 존슨의 반대자들은 그를 'Landslide'(원래 산사태라는 뜻이지만 선거에서의 압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린든이라고 부르며 비꼬았는데, 훗날 존슨이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본의아니게 예언이 되어버렸다.

이후 민주당 현직 원내대표 어니스트 맥팔랜드낙선으로[19] 1953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되어, 야당 대표 자격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 윌리엄 노랜드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와 협력했다.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로서 린든 B. 존슨이 보여준 리더십과 정치기술, 협상력과 타협술은 미국 의회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여서 린든 B. 존슨은 "나는 내 아내만큼 의회를 잘 알고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정교분리를 명확히 한 수정헌법의 발의 및 통과를 주도했다.[20] 존슨은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반발한 딕시크랫들의 남부 선언문[21]에도 서명하지 않았지만 1957년 민권법[22]을 무의미할 수준으로 뭉개버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민주당 후보로 떠올랐다. 경선에서 존 F. 케네디이전투구를 벌였다. 케네디는 린든 B. 존슨에 비해 정치 경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의 젊은 이미지는 돌풍을 일으켰고 마침내 케네디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자신의 지지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남부 지역의 표를 끌어들이기 위해 린든 B. 존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했고,[23] 린든 B. 존슨은 케네디를 적극적으로 보좌하며 선거운동을 해 남부 지역에서 도움을 준다. 이들은 11월 8일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에게 신승하며 그 다음해 초 대통령-부통령에 취임한다. 린든 B. 존슨은 텍사스 출신으로는 존 낸스 가너에 이어 2번째로 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정적이었던 존슨에게 실권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케네디의 동생이자 법무장관인 로버트 F. 케네디에게 견제당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존슨의 옛 측근이었던 바비 베이커(Bobby Baker)가 뇌물 수수로 상원에서 조사받자 1964년 대선에서는 케네디가 존슨을 부통령 후보에서 제외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던 중...

3.2.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대통령 취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3px-Lyndon_B._Johnson_taking_the_oath_of_office%2C_November_1963.jpg
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진 린든 B. 존슨의 대통령 취임선서[24]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될 때 린든 B. 존슨도 자리에 있었다. 당시 린든 B. 존슨의 측근이기도 한 텍사스 주지사 존 코널리랄프 야버러 상원의원 간의 불화를 해소하고 텍사스 민주당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대통령과 부통령은 텍사스 주를 방문했다. 이들은 텍사스 주요 도시를 순회하고, 마지막에 린든 B. 존슨의 텍사스 지역에서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댈러스의 거리에서 차량 행진을 할 때, 케네디 대통령은 코널리와, 린든 B. 존슨 부통령은 야버러와 함께 차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케네디 대통령이 탄 차량에 저격이 가해지면서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하여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하였다.

모든 일정이 중단되고 케네디 대통령의 시신을 실은 에어 포스 원 공군기가 워싱턴 D.C.로 향하는 가운데, 린든 B. 존슨은 이 비행기 안에서 케네디의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제36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일반적으로 미국 대통령 취임선서는 성경에 손을 얹고 하는데[25] 특이하게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미사경본(Roman Missal)에 손을 얹고 했다. 린든 B. 존슨은 케네디의 시신을 실은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황망하게 취임선서를 해야 하는데 비행기 안에 아무리 찾아도 성경이 없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케네디 대통령[26]이 사용하던 미사경본만 있었던 것. 그나마 미사경본이 성경 구절로 쓰여진 것이어서 큰 문제는 없었으며, 선서시 성경에 손대고 해야 한다고 법적으로 명문화된 건 없어서 법적인 문제도 없었다.

3.3. 재선과 베트남 전쟁

린든 B. 존슨은 대통령이 된 이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케네디 시절부터 개입해오던 베트남 전쟁의 확전을 결정[27], 의회의 지지를 얻어내고 각종 국내 정책도 착실히 추진해 연이은 64년 대선에서 61.1%라는 압도적 득표로 승리한다.


1964년 린든 B. 존슨이 재선에 도전할 당시 방영된 데이지 걸 TV 광고.

대선에서 린든 B. 존슨은 데이지 꽃을 세는 평화로운 소녀와 핵폭탄 폭발 초세기를 하는 장면을 대치시켜 상대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 후보(공화당)가 당선이 되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담은 광고를 내보냈다. 이 광고는 데이지 꽃 소녀가 나와서 "데이지 걸" 광고로도 불리며, 지금도 세계 역사상 가장 임팩트가 강한 정치광고라고 평가받으며 실제 당시 골드워터 낙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베리 골드워터 후보는 64년 대선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된 흑인민권운동으로 촉발된 연방 민권법 제정 문제를 인종차별엔 반대하지만 연방정부가 주정부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주의 권리(states' rights)를 내세우며 반대했고, 린든 존슨은 이걸 역이용해서 골드워터를 '모든 국민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기 싫어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공격하였다. 덕분에 표심이 많이 기울어 린든 존슨은 선거인단 수 486명 대 52명, 득표율 61.1%[28] 압승한다. 저 61.1% 득표율은 린든 존슨 이후의 민주당 아니 어느 정당 대선 후보도 얻지 못한 엄청난 득표율이다.[29]

하지만 대승에 뒤이은 현실은 헬게이트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진 데다가, 외부 공격 막기도 바쁜데 내부에선 다음 대권을 노리던 정적 로버트 F. 케네디가 끊임없이 견제를 해 재임 기간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렸기 때문. 덕분에 원래 법적으로는 대통령직 승계 기간이 2년이 안 되어서 다시 대선에 출마할 수 있었지만, 결국 스트레스 + 노환으로 악화된 건강과 베트남전으로 떨어진 지지도를 인정하고, 출마를 포기하였다. 존슨이 재출마하여 당선되어 임기(1969년~1973년)를 마쳤다면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가장 장기간 집권한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르나[30][31] 이 결정으로 미국 역사상 8년 이상을 재임한 대통령은 계속 프랭클린 루스벨트 하나밖에 없게 되었다. 만약 재선에 성공했다면 10년 가까이 재임하게 될 뻔 했지만 뉴햄프셔 주 경선에서 현직 대통령이 초접전승을 거뒀다는 OME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더 해보기도 귀찮았던지 경선을 포기하고 만다.[32]

그리고 민주당은 내분과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 등으로 선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휴버트 험프리 후보가 공화당 리처드 닉슨 후보에게 석패하고 정권을 내주게 된다.

그러나 린든 B. 존슨의 베트남전 지지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험프리의 패배를 야기했다는 것은 상당히 부당한 주장이다. 험프리의 패배는 시민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남부 민주당원의 독자 출마를 막지 못한[33] 민주당 주류파의 선거 전략 미비 탓이 크며 실제 닉슨과 험프리의 득표율 차는 겨우 0.42%에 불과했다.

다만 선거인단에선 301명 : 191명 : 46명으로, 딕시크랫 없는 간발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결과에서 민주당에 딕시크랫을 더했으면 험프리가 압승하긴 한다. 근데 딕시크랫 대선후보인 조지 월리스[34]는 민권운동의 철저한 반대자인데 그 양반 뽑던 사람들이 월리스 출마 안했다고 곱게 험프리를 뽑을지도 의문이긴 하다. 그리고 이를 노린 닉슨의 소위 남부 전략으로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 텃밭은 확 바뀌게 된다. 돈과 선거 전략에서도 절치부심한 닉슨에 비해 험프리가 여러모로 부족했단 평도 있다.[35]

그래도 베트남전을 지원해야 된다는 신념은 있었는지, 존슨은 퇴임한 후에도 "우리는 베트남전 계속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해인 1973년까지도 전쟁은 나날이 미군에 불리해져갔고, 미국 내에서도 회의론이 벌어졌기에 존슨 본인도 이 주장이 무력함을 느끼며 죽고 만다. 본인도 후회되는 부분은 있는지, 자서전에서 "나는 훌륭한 아내(국내 정책)를 길거리 창녀(베트남전 참전)에게 잃은 꼴이다"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3.4. 내치와 경제의 다양한 평가

자유주의(내지 진보) 진영,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복지 등 그의 사회 정책에 매우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반면 보수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결국 전쟁과 복지 퍼주기를 위한 달러 찍어내기가 하술된 재정 문제와 나아가 70년대를 관통하는 세계적 경제 위기를 야기했고, 미국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떨어뜨렸다는 비판도 받는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 행정부는 미국의 빈곤에 대해 무조건의 선전포고를 하겠습니다."
1965년 3월 15일 존슨의 연설. 연설영상, 연설문.

존슨은 소위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 정책과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을 선포하며, 연방정부의 공립학교(초, 중학교)에 대한 대대적 재정지원 정책[36]과 미국 환경 보호 정책의 기틀을 만들었다. 또 현재 미국의 의료보험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메디케어(Medicare; 65세 이상의 미국인에게 제공되는 의료보험)와 메디케이드(Medicaid;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극빈층[37]에게 제공되는 의료보험) 역시 모두 존슨 행정부에서 시작되었다.[38]

Tax-cut bill of 1964으로 경제 성장 촉진 및 기업 투자 증가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으며, Economic Opportunity Act of of 1964로 직업 프로그램 지원, VISTA 자원봉사 프로그램, Head Start Project 등을 시작했다.

흑인에 대한 법적인 평등이 보장된 것도 그의 손에 의한 것이었으며, 흑인민권운동에서 촉발된 1964년 민권법 제정은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이다. 케네디 때 못이룬 민권법 통과를 그는 지지층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밀어붙였는데, 이 법이 통과된 후 존슨은 측근에게 "잘 한 일이야. 하지만 이로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몇몇 지역은 공화당이 지배하겠군."이라는 씁쓸한 말도 남겼다고 한다.[39]

그 밖에도 1965년 이민 및 국적법으로 비유럽인들이 미국에 더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인간의 달 착륙을 성공시킨 아폴로 계획도 존슨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실현시켰다.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다소 무모한 선언은 케네디 암살 이후 동력을 잃고 흔들릴 뻔했으나, 존슨 대통령은 아폴로 계획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계속했다.[40] 덕분에 케네디 재임기간에는 상당히 불확실하고 무모한 계획에 불과했던 아폴로 계획이 존슨의 재임기간 동안 구체화되었다. 즉, 냉전기 우주개발 경쟁에서 소련에 계속 뒤처졌던 미국은 존슨 재임기 중반에 실시된 제미니 계획을 통해 비로소 소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존슨 대통령은 아폴로 11호가 성공하기 반년 전에 임기가 끝났기 때문에 닐 암스트롱에게 축하해준 대통령은 후임인 리처드 닉슨이었다.

존슨 대통령의 국내 정책에 대해 호평만 있는건 아니라, 미국의 본격적 복지 프로그램인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의 재정 투입 대비 효율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정책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하는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로 인해 70년대에 들어서면 정책 집행과 정책 평가 분야가 크게 각광받게 되었다.[41]

경제 정책에 있어서 존슨 정부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상당한 비판을 받는다. 그의 대외 정책(베트남 전쟁)과 위대한 사회를 위한 복지 정책 및 우주 개발 등에 필요한 과도한 예산을 끌어오기 위해 ,존슨 정부는 달러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 찍어냈다. 이러한 유래없는 과도한 재정팽창 정책에도 불구하고 금태환제/고정환율제와 기축 통화국의 지위 덕분에 60년대 미국은 오히려 호황을 맞이하는 혜택을 누렸지만 이로 인한 피해는 다른 나라들, 특히 서유럽이 고스란히 뒤집어 쓰게 되었다. 이에 피해에 열받은 샤를 드 골이 미국을 대놓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를 드러내지 못했다.

존슨 정부의 과도한 통화팽창 정책으로 인해 야기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위기는 마침내 닉슨 정부 초기에 터지고 말았고, 80년대 초까지 후유증이 이어졌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서독브레튼우즈 체제 탈퇴를 선언하자 세계 각국 정부는 패닉에 빠졌고 미국에 금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쳤다. 결국 내줄 금이 없었던 닉슨 정부는 금태환 중지를 선언했고, 브레튼우즈 체제는 붕괴되었다.

물론 일각에서 우려했던 것처럼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가치가 붕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70년대 미국은 기축통화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중동의 독재자들과 검은 거래를 해야했고, 이러한 페트로 달러는 정의로운 국가 미국의 이미지를 구기게 되었다.

이정도로만 끝났으면 다행인데, 이런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이후 급격한 달러 평가 절하로 서방과 중동 각국의 피해는 막심했고 각국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특히 산유국들의 피해는 막심했다. 결국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표면적으로는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서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미 이전에서 3차례나 터졌던 중동전쟁에서 멀쩡했던 석유 값을 4차 중동전쟁 때 갑자기 폭등시킨 것은 두가지 원인이었다. 중동 국가들이 달러 가치 폭락으로 인한 손실을 메우기 위한 목적에 더해, 달러 평가절하를 야기시킨 미국에 대한 분노가 내재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 2차 오일쇼크의 발생은 미국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지미 카터 정부를 각각 단임 정부로 끝냈다.

요약하면 달러 찍어내기에 의존해서 존슨 시절 미국은 호황을 누렸고, 덕분에 존슨의 지지율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를 대신 감당해야 했던 유럽은 경기 침체, 실업율 증가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이는 유럽에서 68 혁명이 발생하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존슨의 이 돈지랄(?)에 덤터기를 톡톡히 쓴 건 70년대의 대통령들이었다.

결국 이런 재정 정책은 비대한 정부를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득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후 미국의 신자유주의에는 공화당 정권 뿐만 아니라 빌 클린턴의 민주당 정부 역시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소위 신자유주의를 내세운 80년대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도 만만치 않는다는 반론이 있다. 다만 존슨 정부의 재정 팽창 정책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라는 역반론도 많다. 존슨 정부의 재정 적자가 겉으로 보기에 크지 않은 것은 순전히 달러를 그냥 마구 찍어냈기 때문이다. 반면 훗날의 레이건 정부는 그 무엇보다도 인플레이션이라면 경기를 일으킨 정부였기 때문에 팽창 재정을 실시하지 않았고, 고스란히 재정 적자로 이어졌던 것이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존슨 정부의 미친 수준의 재정 팽창 정책의 여파로 인한 피해는 후임 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 정권 초기까지 직접적으로 이어졌다.

한편 린든 존슨은 거물 정치인이었던 만큼 만큼 정경유착 의혹도 받았는데, 조지 W. 부시의 부통령 딕 체니에 이르기까지 정경 유착으로 악명높았던 핼리 버튼이 급성장한 시기가 이시기 쯤부터라 그렇다. 핼리 버튼의 건설 엔지니어링 분야 자회사인 ‘브라운 앤드 루트(Brown & Root)’는 1962년 핼리 버튼에 합병되었는데, 이 브라운 앤 루트가 존슨의 정치 캠페인을 전적으로 밀어주는 대가로 독점적인 관급공사 계약, 즉 베트남전 동안 미군이 발주한 인프라 공사의 85%를 차지했다. 이는 당시 참여한 4대 컨소시엄 가운데 압도적인 몫으로 반전 시위자들의 조롱감이 되었으며 참전 군인들도 브라운 앤 루트를 '번 앤드 루트(Burn & Loot)', 그러니까 방화하고 노략질하는 기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5. 퇴임 이후

존슨은 실질적으론 5년 약간 넘게 집권하다 1969년 1월 20일 닉슨에게 대통령직을 인계하고 출신 지역으로 돌아와서 생애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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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5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서관을 개관했을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회동한 모습.

존슨은 젊은 시절부터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댄 골초였고, 이로 인하여 이미 여러 차례 심장에 문제를 일으킨 바 있다. 건강을 위해 한때 금연하고, 백악관까지 처음으로 금연구역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대통령 재임 중 많은 스트레스로 담배를 다시 찾았고,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존슨은 퇴임 후 텍사스의 저택에서 조용히 지냈으나, 그의 몸은 더욱 비대해지면서 동시에 쇠약해졌다. 1972년 12월 28일,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고, 이것이 존슨의 거의 마지막 대외 활동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달도 채 못된 후였던 1973년 1월 22일, 농장에 있던 중 신체의 이상을 느꼈는지 경비업체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마이크를 당장 보내!"
Send Mike Immediately!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헬리콥터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샌안토니오의 병원으로 옮길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연락을 받은 경비업체 직원이 그의 집에 가니 존슨은 수화기를 붙잡은 채로 이미 숨져 있었다고 한다. 손을 쓸 시간도 없었던 것. 사인은 동맥경화로 인한 심장마비. 그가 퇴임한 지 불과 4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향년 64세.[42][43] 시신은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에 옮겨져 조문객을 받았고, 미국은 트루먼 전 대통령 추모 열기가 식기도 전에 다시 대통령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44] 국장이 치러진 후[45], 시신은 텍사스 저택으로 다시 옮겨져 묻혔다.

결국 베트남전의 수렁 속에 빠져들며 국내에서 이루어낸 많은 업적이 묻힌 대통령. 그래도 21세기 들어 다시 재평가를 받는 경향은 있다.

많은 미국 역사학자들은 존슨을 "미국 대통령들 중 가장 복잡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곤 한다. '위대한 사회'라는 프렌차이즈를 내건 그의 내치는 상당히 진보적이고 훌륭한 지향을 가진 정책이었지만, 외적으론 베트남 전쟁의 실책과 방만한 통과정책이 함께하며, 성격적으로도 쾌활하고 노회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한편으론 직설적이고 짓궂은 화법에 어딘가 나사 빠진 모습 또한 상당히 보여줘서 인물상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존슨 당시 공보담당 비서관을 지낸 조지 리디는 1982년 존슨 회고록에서 "그는 개자식(son of a bitch)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훌륭한 개자식이다. 라고 존슨을 평가했다.

2018년 미국 정치학회 회원들이 참여한 대통령 순위 조사에선 10위에 올랐다. 2014년 진행된 비슷한 조사에서도 12위로 평가받았다. 2024년 조사에서는 9위로 상승, 10위권 안쪽으로 다시 들어왔다.

다만 보수에서는 상대적으로 다양하게 평가되는데, 해리티지 재단에서 내린 순위에서는 다섯번째에 속했다. 다양한 유형의 지미 카터 또한 다양하게 평가되는데, 비슷한 출신이면서 인종화합에 힘쓴 것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함께 나타나는 상황이다.

4. 어록

"Until justice is blind to color, until education is unaware of race, until opportunity is unconcerned with the color of men's skins, emancipation will be a proclamation but not a fact."
"정의가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을 때까지, 교육이 인종을 상관하지 않을 때까지, 기회가 인간의 피부색을 고려하지 않을 때까지는, 노예 해방은 단지 선언일 뿐 사실이 되지 못한다."

5.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37 미국 연방하원의원 보궐선거 텍사스 10구

8,280 (27.65%) 당선 (1위) 초선
193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4,476 (100.00%) 재선
194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47,442 (100.00%) 3선
1941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텍사스 174,279 (30.26%) 낙선 (2위)
194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텍사스 10구 12,799 (100.00%) 당선 (1위) 4선
194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44,602 (92.87%) 5선
194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6,947 (100.00%) 6선
194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텍사스 702,985 (66.22%) 초선
1954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538,417 (84.59%) 재선
196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306,625 (57.98%) 3선[46]
미국 부통령 선거[A] 미합중국 34,220,984 (49.72%, 303명) 초선[48]
1964 미국 대통령 선거 43,127,041 (61.05%, 486명) 재선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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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견 '유키(Yuki)'와 함께. 그는 이렇게 개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장난을 많이 쳤다고 한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에이브러햄 링컨의 뒤를 이어 2번째의 장신(192cm)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공동 2등이다.

이니셜 LBJ를 자칭, 타칭으로 많이 쓴 대통령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JFK(존 F. 케네디), FDR(프랭클린 D. 루스벨트), TR(시어도어 루스벨트) 등이 있다. 부인 클로디아 앨타 테일러는 원래 애칭이 레이디 버드(Lady Bird)인데, 아예 이 애칭을 정식 이름처럼 내세웠고, 이니셜까지 LBJ가 되었다. 그리고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딸의 이름도 린다 버드, 루시 베인스로 지어 딸들의 이니셜까지 LBJ로 맞췄다.

파일:ZBZ9Egz.jpg

일명 The Johnson treatment로 유명했다. 존슨 자신이 원하는 법을 빨리 통과시키기 위해서 상원의원들을 설득시키는 방식으로 상원 원내 대표이던 시절부터 자주 써먹었다. 쉽게 말해 권모술수의 달인. 존슨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현직 상원의원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한 다음, 좋은 풍채와 직위에서 나오는 위엄, 언변과 융합시켜 공갈, 호소, 협박, 읍소 등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상원의원들이 그의 제안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게 만들어버렸다. 위 사진은 Johnson Treatment를 당하고 있는 시어도어 그린 상원의원. 두 사람 모두 표정과 몸짓이 압권이다.

쉬지 않고 하루에 18~20시간씩이나 일하는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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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13일 백악관에서. 좌측 인물은 훗날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관이 되는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이다.[49]

존슨 대통령은 마셜에게 법무부 차관직을 제의했는데[50] 이상하게도 마셜은 존슨의 제안에 선뜻 답을 않고 차일피일 미루며 묵묵부답이었다. 위 사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흑인이었기 때문. 뒤늦게 마셜의 의중을 눈치 챈 존슨은 그를 집무실로 불러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시오? 법무차관 자리에 검둥이(Nigger)가 앉아있는 걸 사람들이 보면 뭔 낯짝을 하게 될지 궁금하단 말이오!"라고 질러 버렸다. 즉, 흑백 차별 철폐의 일환으로 법무차관에 흑인인 마셜을 앉혀서 인종 차별주의 성향을 지닌 백인들의 속을 뒤집어버리려는 의도였던 것. 그렇게 존슨 대통령의 뜻대로 서굿 마셜은 1965년 8월부터 1967년 8월까지 법무부 차관으로 일하다가 연방 대법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심지어 존슨이 마셜을 대법관으로 임명하기 위해서 한 일이 걸작인데, 당시 대법관으로 있던 탐 클라크의 아들인 램지 클라크를 법무장관에 앉혀 버렸다. 즉 법무부와 대법원은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부자(父子)가 동시에 양쪽에서 재임할 수는 없는 노릇인걸 존슨이 노린건데, 결국 탐 클라크 대법관이 이해 관계를 이유로 은퇴하자 바로 마셜이 대법관으로 지명되었다.

사실 마셜과 존슨은 동갑내기에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사이였고, 마셜 이 양반도 존슨 못지 않게 한 성격해서 둘이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에서는 여지없이 불타는 뒷담화가 오갔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만날 때마다 평소 자기네들이 안 좋게 보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 X새끼, X해버릴 새끼." 뭐 이런 식의 수다를 떨었다고.

워렌 하딩이나 존 F. 케네디, 빌 클린턴에 밀려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존슨은 이들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이들보다도 더한 엄청난 바람둥이였다.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고 이를 넘어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성범죄라 볼 수도 있는 짓도 자주 했던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존슨은 친분이 있던 에드거 후버 FBI 국장과 결탁하고, 스트롬 서먼드, 제이콥 재비츠, 에스테스 키포버 등 수많은 상원의원들의 여성 관계의 추문을 먼저 캐내는 등의 철두철미한 공작으로 본인의 이 여성 편력을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감출 수 있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지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중 최고의 욕쟁이로 뽑은 인물이기도 하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1964년 그리스 왕국키프로스 침공 때 주미 그리스 대사를 백악관으로 불렀는데, 그리스 대사가 앉자마자 "당신네 나라(그리스)는 벼룩이야. 미국은 코끼리고. 코끼리가 벼룩 한 마리 밟아뭉개는 건 식은 죽 먹기라구."라는 폭언을 내뱉었다. 그리스 대사가 헌법을 거론하며 그리스의 침공을 변명하려 하자 존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네 의회랑 헌법 따위 좆까라 그러지. 미국은 코끼리야. 키프로스는 벼룩이지. (근데,) 그리스도 벼룩이야. 만약 벼룩 둘이 계속 코끼리를 가렵게 한다면, 한 방 제대로 쳐맞을 거요."
Fuck your parliament and your constitution. America is an elephant. Cyprus is a flea. Greece is a flea. If these two fleas continue itching the elephant, they may just get whacked good.
이 폭언에 뒤이은 경고도 걸작이다.
"우리는 그리스인들에게 많은 달러를 제공하고 있소, 대사. 만약 당신네 총리가 나한테 민주주의, 의회하고 헌법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당신네 총리, 의회와 헌법은 아마 오래가지 못할거요."
We pay a lot of good American dollars to the Greeks, Mr. Ambassador. If your Prime Minister gives me talk about democracy, parliament and constitution, he, his parliament and his constitution may not last long.
이 살벌한 경고에 식은 땀만 실컷 빼고 온 그리스 대사는 본국에 급전을 쳤고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알아챈 그리스 정부는 키프로스에서 철군 명령을 내렸다.

흔히 텍사스 부자(富者) 대통령으로 조지 부시 부자 (父子) 와 함께 린든 B. 존슨은 최고의 부유한 대통령 중 한명이다. 린든 B. 존슨은 부시 부자보다 재산이 훨씬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재산 순위 상위권에 든다. 현재 물가 기준으로 7번째로 재산이 많았던 미국 대통령이라고 한다. # 인플레이션을 반영할 경우 부시 부자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은 것. 그의 집안은 텍사스 곳곳에 여러 사업에 투자하며 한때 복잡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그도 젊은 시절 학비를 생각하면서 대학교에 다닌 적도 있기는 하나, 이후 다시 사업이 번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고, 부인도 사업에 재능을 보였다. 린든 B. 존슨의 텍사스 저택에는 그의 묘지가 있으며, 가족들은 국가에 토지를 일부분 기증하여 국립 역사 유적지로 등록되어 있다.

린든 B. 존슨 재임기간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사망해서 조문사절을 보내야 했는데, 당시 영국 주재 미국 대사에게 사절 역할을 맡겨 상대적으로 급이 낮다며 눈칫밥을 먹기도 했다. 이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장례식에 참석을 했기에 린든 B. 존슨 본인이 정 가기 싫었으면 그냥 처음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대리인 및 미국 대표를 맡기거나 당시 부통령이었던 허버트 험프리를 조문 사절 대표로 보내면 아무 문제 없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지만[51] 굳이 그렇게 안해 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쯤 되는 사람이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왜 린든 B. 존슨이 굳이 이런 악수를 뒀는지는 정확한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린든 B. 존슨은 아이젠하워 이래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나지 않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사실 여기엔 린든 B. 존슨도 케네디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을 수습하느라 바쁘고, 엘리자베스 2세 역시 임신 문제로 인해 순방이 곤란했던 측면도 있었다.

여행 시에 수십병의 커티 삭 위스키와 함께 특수 샤워기 노즐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샤워기에 집착하기도 했다. 부통령 시절에 머무른 저택의 샤워실이 훨씬 나았다고 타박을 해대서 백악관 담당자가 신경쇠약에 걸려서 휴직을 했을 정도라고. 소방차 호스 정도의 수압에다가 한번 스위치를 누르면 물 온도가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확 바뀌기를 원하는 바람에 결국 수만 달러를 들여 백악관에 추가 배관과 펌프를 설치해야 했고, 6개의 샤워기 노즐에서 분 당 수백 갤런의 물이 쏟아지게 해서 몸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벽으로 밀릴 정도인걸 앞에 전기 엔지니어를 세워놓고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만족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즐 중 하나는 LBJ의 '점보'로 직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고생하면서 설치한 샤워기는 그가 퇴임한 후에 철거되었다. 닉슨이 싫어했다는 모양이다.

미국을 방문한 독일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가 "대통령께서는 통나무집에서 태어나셨다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존슨은 "저랑 에이브러햄 링컨을 혼동하셨군요. 저는 예수처럼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대통령 퇴임 후 교통 속도 위반으로 경찰에 적발된 적이 있었는데, 경찰이 전직 대통령인 린든 B. 존슨을 알아보고 놀라서 "Oh, my god!"이라고 외치자 린든 B. 존슨은 바로, "내가 신인 걸 잊지 마시오."라고 받아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과연 꿈은 이루어졌는지, 원시부족의 섬에서 신격화되고 왕 노릇을 해달라고 요청받기도 했다. 사실 진지한 신앙은 아니고 정치 운동에 가까웠다. 자세한 것은 화물 신앙 문서 참고.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임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 배후에 린든 B. 존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케네디의 암살로 제일 이익을 본 인물이고 당내 경선에서 케네디에게 패해 이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것, 텍사스의 다양하고 부유한 재벌 가문들의 협력으로 정계에 입문한 인물이었으며 그 당시 케네디와 린든 B. 존슨이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허나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기 때문에 그냥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다. 린든 B. 존슨 본인은 케네디의 암살 배후를 쿠바피델 카스트로로 지목했다. 또 리처드 닉슨 항목에서 보듯 닉슨 배후설도 만만찮다.

줌왈트급 구축함 3번함의 이름으로 린든 B.존슨이 쓰였다. 다만 해외 반응은 월남전의 여파인지 반응은 좋지 않은 편.

텍사스 주 휴스턴의 NASA 본부는 린든 B. 존슨 우주센터로 이름지어졌다. 발사장은 플로리다 주 케이프 커내버럴존 F. 케네디 우주센터. 댈러스 지역을 반쯤 순환하는 I-635 또한 LBJ Freeway라고 명명되어 있다.

그 유명한 SR-71 블랙버드 정찰기의 이름을 지금처럼 SR-71로 만든 대통령이기도 하다.
원래 제식 명칭은 SR이 아닌 RS-71이었으며 "정찰 및 타격(Recon & Strike)"의 약자였지만 RS-71이라는 명칭을 당시 미국 대통령인 린든 B. 존슨이 실수로 SR-71로 읽은 바람에 대통령이 실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 공군이 관련 서류에 있던 기종 명칭을 모두 SR-71로 뜯어고치는 삽질을 해서 결국 제식명칭이 SR-71이 되었다. 나중에 전략정찰기(Strategic Reconnaissance)라는 말이 나와서 나름 그럴듯해 보이긴 했다. 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최근까지 알려져 있던 내용인데, 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게 100% LBJ의 삽질인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닌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이 린든 B. 존슨 대통령 몰래 백악관 보좌관에게 압력을 넣어 자신이 원하는 전략정찰기(Strategic Reconnaissance)라는 이름으로 바꾸기 위해 대통령이 읽을 원고에서 RS를 SR로 바꾸게 했다고 한다.[52]

LBJ의 성씨인 존슨은 17대 대통령 앤드루 존슨과 겹치지만, 서로 혈육 관계인 것은 아니다. 완전한 생판 남으로서 겹친 사례.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에서 정 반대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앤드루 존슨은 남부 재건을 방해해 궁극적으로 노예 해방 이후 흑인 민권의 신장을 가로막은 인물로 평가받지만, 반대로 린든 B. 존슨은 당 내의 반발을 무시하고 연방 민권법을 통과시켜 흑인 인권 신장의 포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민주당, 그것도 남부 출신.[53]

우드로 윌슨 이후 50년만에 나온 전임자보다 연장자인 대통령이다.[54] 참고로 29대 워런 G. 하딩부터 34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까지는 순서대로 태어났다.[55]
"나는 그 깜둥이들이 200년 동안 민주당에 투표하도록 할 것입니다."
"I'll have those niggers voting Democratic for 200 years."
- 린든 B. 존슨
존슨이 본인과 두명의 주지사들이 제안한 민권법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던 중 했다고 알려진 발언이다. 존슨이 실제로 위와 같은 발언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이는 존슨이 평소 사석에서 니거라는 흑인 비하성 단어를 자주 사용한 점, 흑인들이 뱀을 무서워한다는 고정관념으로 트렁크에 뱀을 싣고 주유소로 차를 몰고 가서 흑인 승무원을 속여 열어보게 한 일화가 있는것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있다. 또한 친민주당 성향으로 알려진 MSNBC에서조차 그에 대해 의회에서 20년 동안 그는 민권법 제정을 막는 데 도움을 주면서 남부 블록의 신뢰할 수 있는 의원[56]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걸 보면 존슨 스스로 신념의 변화가 있었거나 신념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정략적으로 이용하였거나 둘중 하나일것이고, 그와 같은 맥락에서 위 발언이 나왔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존슨의 지지자들도 존슨이 개인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임은 부정하지 못한다. 위의 발언이야 사실관계가 부정확하다고 해도 그 외에도 존슨은 일상적으로 인종차별적 용어를 사용했다.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흑인 운전기사에게 '가구', '니그로' 등의 폭언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슨의 정책이 모두 정략적 행동이라고 보는것 역시 옳지는 않다. 존슨은 (발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민권법 법안으로 민주당이 흑인의 지지를 얻을 것을 아마 알고 있었겠지만 또한 민주당이 남부의 지지를 잃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민권법이 통과된 뒤 사석에서 "나는 우리가 오랫동안 남부를 공화당에 넘겨주었다고 생각한다.(I think we just delivered the South to the Republican party for a long time to come)"고 말했다. 또 상원의원으로서 존슨이 남부 백인들의 눈치를 본 건 맞지만 그는 민권운동가들의 눈치(?)도 보았고, 오히려 이쪽을 더 많이봤다. 그는 1957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반발한 남부 민주당원들이 이른바 "남부 선언문"이라고 불리는 인종차별적 선언을 발표할때 이에 서명하지 않은 세명 뿐인 (구)남부연합 출신 상원의원이었고[57] 같은 해 공화당이 주도한 민권법이 통과하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이와같은 린든 존슨의 이중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 흑인이자 과거 존슨의 운전기사였던 로버트 파크의 증언이다.(바로 존슨에게 '가구', '니그로' 등의 폭언을 들은 장본인이다.) 그는 자기에게 폭언을 하는 '그 존슨'이 싫었지만 한편으론 자신에게 잘해주고 인종평등정책을 추진한 '그 존슨'을 사랑한다며 애증을 드러내기도 했다. 다음은 모두 로버트 파크의 증언.
"I loved that Lyndon Johnson"
"나는 (흑인 인권의 옹호자인) 그 린든 존슨을 사랑했다."
"I hated that Lyndon Johnson"
"나는 (자신에게 폭언을 일삼는) 그 린든 존슨을 증오했다."
"존슨은 나에게 잘해주었습니다. 나는 그가 없이는 이 일을 해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58] (...) 그리고 그가 시민권을 위해 한 일은 매우 귀중했습니다. 흑인들은 이 사람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Lyndon Johnson was good to me. I couldn't have made it without him . . . And what he did for civil rights was priceless. Black people are terribly indebted to this man."
"나는 린든 존슨이 편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가 사용해야 하는 모든 전술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는 남부 정치인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는 나에게 매우 잘해줬고, 저는 그가 두 얼굴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단지 정치인일 뿐입니다."
"I never thought Lyndon Johnson was a bigot. He would just use whatever tactics he had to use to get what he wanted. He played to the southern politicians. He was very good to me, and I don't believe he was two-faced -- he was just a politician."

이런 일화들을 통해 린든 B. 존슨이 흑인에게 잘해줘야겠단 생각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흑인을 자기와 대등한 존재로 고려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린든 B. 존슨이 지내던 미국의 시대적인 특성으로 미루어 생각할 때 인종차별주의자라기보다는 시대적 한계를 가진 사람으로 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위의 서굿 마셜과의 일화를 보더라도, 이 시기의 미국흑인이 공직에 있는 것조차도 논란을 낳을 정도로 인종차별적인 분위기가 매우 강했고, 그런 상황에서 흑인을 법무부 차관을 거쳐서 대법관에 임명하거나, 민권법을 발의하고 통과시켰다는 점을 보면, 현대의 인종평등주의자들보다는 못해도 인종차별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고 볼 여지는 많다.

7. 한국과의 관계

파일:art_16054903690064_79ebaa.jpg

린든 B. 존슨 집권기 당시 한국 정부는 박정희 정권이였는데, 베트남 전쟁 참전 결정을 내려줘서 그런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1965년 박정희 방미때는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빌려주기도 했었다.[59] 사실 월남전 당시 미국의 파병 요청을 거부한 캐나다 피어슨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났을 때 화를 내며 멱살까지 잡았다고 알려진 걸 보면[60] 월남전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지 알지 못한 이때까지만 해도 파병국은 다 이뻐보였을 것이다.

1966년 린든 B. 존슨이 방한했을 당시엔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가뜩이나 베트남전과 반핵 운동 때문에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반미시위와 양키 고 홈 구호에 난타당하고 있던 린든 B. 존슨은 이때 한국 시민들의 환대를 받고 감동의 도가니탕이 되었단 후문이 있다. 물론 동원된 시민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관용차가 지나가는 길에도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모든 시민들이 꽃다발을 들고 열렬히 환영했다. 참고로 이 때 정부에서도 엄청나게 신경을 썼는데, 급하게 거리를 단장하느라 운행을 중지한 서울 전차 궤도는 철거되지 않고 그냥 파묻혀버렸으며(이 선로는 2023년 3월 6일 월대 복원 중에 발굴되었다), 남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의 판잣집(하꼬방)이 린든 B. 존슨 방한 때 TV로 미국에 생중계되면서 "이건 나라 망신이다"라는 여론이 높아졌고,[61] 서울 중심가는 정부와 서울시에 의해 대대적인 재개발에 들어가게 되었다.[62]

여튼 방한한 존슨 대통령은 한국에서 마치 팝스타와 같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63] 이런 이유로 기분에 취했는지 존슨은 갓을 쓴 노인장을 헬기에 태우고 수원 상공을 도는 서비스를 해 주었으며, 방문지 마을에 TV를 한 대 놔주고 갔다. 이에 노인들은 존슨에게 새신랑이 입는 사모관대를 입히고 마침 방문 중인 마을 촌장과 사진 촬영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사하였다. 덩치 큰 존슨[64]이 새신랑마냥 관모 쓰고 얌전히 있는 모습이 볼 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성 이벤트에만 그치지 않고 존슨은 마침 설립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던 KIST 설립에 협조해주었다.[65] 이 덕분에 서울 홍릉에 있는 KIST 본원에는 연구시설 가장 한가운데에 존슨 강당이 있다.[66]

이 시절 개발된 부대찌개의 일종인 존슨탕이 이 양반의 이름을 붙여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방한 당시 청와대에서 배달시켜 먹은 음식이 부대찌개라 존슨탕이 되었다는 말도 있고, 주한미군 부대 시찰 당시 부대에서 먹어보고 맛있다고 칭찬을 해 존슨탕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물론 다 설들 중 하나로 확실하진 않다. 자세한건 문서 참고. 방한 당시 국내엔 흔하지 않았던 위스키커티 삭을 찾는 바람에 전국을 뒤져 공수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음담패설식으로) 이동원이 "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의 외교는 더욱 능숙"하다고 받았다. 이에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박정희는 "난 마누라한테 잡혀 사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별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 대통령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영부인 버드 여사가 존슨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이 옆방에 가있을 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고려원, 1992, 155~156쪽[67]

8. 매체에서

  •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등장한다. 검프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면서 "미국은 자네에게 큰 빚을 졌네"라고 말한다. 농담삼아 엉덩이 상처를 보고 싶다고 했다가 검프가 엉덩이를 바로 까버려서 곤욕을 치룬 것을 덤.
  • 베트남 전쟁 개전 과정을 다룬 HBO의 2002년작 TV영화 <전쟁으로 가는 길>(Path To War)에선 영국 배우 마이클 갬본이 연기했다.
  • 게임 메탈기어 솔리드 3에서 등장한다. 등장 장면은 짧지만 버추어스 미션과 스네이크 이터 작전의 최종 결재자였던만큼 중요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게임 초반, 스네이크 이터 작전 브리핑 중에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과 통화하는 장면이 있고 게임 엔딩에서 스네이크 이터 작전을 완수하고 귀환한 네이키드 스네이크에게 직접 훈장과 빅 보스 칭호를 수여한다. 다만 게임상에선 한가지 옥의 티가 있는데, 여기서는 180cm의 스네이크보다도 키가 작게 표현되었다. 성우는 나카에 신지(일)/Richard McGonagle(영).
  • 영화 올 더 웨이는 JFK암살사건 이후 대통령이 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인종차별을 금지한 1964년 공민권법에 서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었다. 브라이언 크랜스톤은 이 역으로 2014년 토니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TV영화에도 린든 존슨 대통령역으로 출연.
  • 넷플릭스 오리지널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가 존슨을 모델로 창작된 인물이다. 작가가 직접 인증한 사실. 하원의원 시절부터 정치 스타일이 존슨 스타일과 매우 흡사하며, 남부 민주당원이고[68], 의회에서 요직을 맡았으며[69], 대통령이 된 이후 대외관계에서 과격하고 직설적인 발언을 하는 것 역시 존슨을 모방한 것. 단,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닉슨과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을 보인다. 또한 내치에서 여러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받는 존슨과 달리 언더우드는 내외치 모두 말아먹는다.
  • 더 크라운 시즌 3 2화에 등장하며 클랜시 브라운이 연기한다.[70] 영국이 경상수지 적자로 미국에 재정지원을 요청하지만, 베트남전을 지원하지 않는 영국에 화가 난 존슨은 무시해버린다. 이에 미국 여론을 영국에 우호적으로 돌리기 위해 마거릿 로즈가 순방에 오른다. 마거릿은 마지막 날 백악관 만찬에서 언니와 총리의 조언을 무시하고 격식없이 케네디에 대한 인물평과 음담패설을 늘어놓는데, 이게 입담 걸걸하기로 유명한 존슨의 성향과 딱 맞은데다가 1인자의 휘광에 가린 2인자라는 동질감까지 이끌어내 미국의 재정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 LOCAL58의 영상인 'Contingency'에서는 시대 배경상 비상사태 성명 영상에 연설문을 발표한 대통령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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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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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7년 출생, 1937년 사망.[2] 1881년 출생, 1958년 사망.[3] 1910년 출생, 1978년 사망.[4] 1912년 출생, 1961년 사망.[5] 1914년 출생, 1978년 사망. 위키피디아[6] 1916년 출생, 1997년 사망.[7] 1912년 출생, 2007년 사망.[8] 1944년 출생.[9] 1947년 출생.[10] 현재는 린든 B. 존슨 고등학교로 개칭했다.[11] 졸업 후 2년 동안은 다양한 지역에서 친척과 함께 여러 비즈니스를 함께 하였다고 전해진다.[12]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해군에서 현역으로 복무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13] 재선 이후 2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취임선서. 부통령 시절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건으로 하루 아침 만에 대통령이 되었다보니 첫번째 취임 선서는 당시 케네디의 시신이 운구된 에어포스 원 안에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당시 취임 선서[14] 1950년에는 트루먼의 낮은 인기 때문에 현직 원내총무가 낙선했고 2년 뒤에는 원내대표 어니스트 맥팔랜드가 낙선해서 어부지리로 직위를 얻은 면도 있었다. 또한 상원 원내총무 및 원내대표 도전 당시에 북부에서 비토를 받아 당직을 맡기 어려웠던 리처드 러셀이 존슨을 대타로 밀어줬다.[15] J. 윌리엄 풀브라이트, 로버트 F. 케네디, 유진 매카시, 조지 맥거번, 프랭크 처치[16] 휴버트 험프리, 마이크 맨스필드, 월터 먼데일, 로버트 버드[17] 성격은 검소하고 유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18] 존슨의 경선 과정 중 물어뜯기에 원한을 가진 스티븐슨은 탈당은 하지 않았지만 이후 리처드 닉슨,존 타워,배리 골드워터 같은 공화당 후보들을 지지한다.[19] 미국에서 현직 상원 원내대표의 낙선은 드문 일이다.[20] 실제 내용은 면세혜택을 받는 교회 등 비영리단체의 정치활동 참여 및 정치적 발언을 금하고, 만약 위반시 면세혜택을 박탈하는 것. 이는 교회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오히려 국가, 혹은 정치의 교회 개입을 막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21] 리처드 러셀 주니어,J. 윌리엄 풀브라이트등이 주도했다.[22]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리처드 닉슨 부통령이 주도했다.[23] 이는 가톨릭 신자로 표를 얻지 못할까 우려한 케네디가 린든 B. 존슨을 끌어들인 것이란 분석도 있다. 또는 케네디의 비서 이블린 링컨은 1993년 인터뷰에서 린든 B. 존슨이 후버로부터 얻은 케네디의 여성 편력 관련 증거물을 가지고 자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도록 협박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24] 린든 B. 존슨의 오른쪽에 위치한 망연자실한 표정의 여인은 다름아닌 피살당한 존 F.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재클린의 옷에는 피격당한 남편의 핏자국이 묻어있는 상태였다.[25] 이는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청교도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 본인의 종교와 관계없이 그냥 관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26]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첫 가톨릭 신자였고, 60년 후 취임한 바이든 현 대통령이 두번째다.[27] 사실 베트남 전쟁 참전은 전임 케네디의 노선을 따르면서도 또 그와는 차별화를 해야 했던 린든 B. 존슨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란 분석도 있다. 케네디는 명분론적 우위 속에서 친미 국가의 경제 발전을 돕는다면 굳이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 다만 일각에선 린든 B. 존슨도 베트남전 개입을 최대한 억제하려했으나, 당시 남베트남 정부가 워낙 노답이라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면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당시 남베트남은 툭하면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는 군부독재에, 부정부패 등으로 베트남인들의 지지를 영 못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하면 1년에 3번씩 쿠데타가 일어날 지경이었으니 안보 태세가 휘청이는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28] 골드워터는 인종차별철폐에 반대했던 Deep South(사우스캐롤리이나,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다섯 주와 자신의 고향인 애리조나 주를 제외하고 모조리 다 패배했다. 텍사스는 린든 B. 존슨의 고향이어서 린든 B. 존슨에게 갔고, 와이오밍, 유타, 아이다호, 네브래스카, 캔자스 등 공화당 우세 지역에서도 린든 B. 존슨이 신승을 거두었다.[29] 민주당 역사에서 손꼽히는 이력을 남긴 그 프랭클린 루스벨트조차도 최고 득표율은 60.8%였다. 다만 선거인단 수는 존슨보다 훨씬 많이 얻었는데, 1936년 대선 당시 523명을 얻어 1984년 대선의 로널드 레이건이 얻은 525명에 이은 2위다. 배리 골드워터 후보의 득표율은 38.5%.[30] 사망한 해가 1973년인 관계로 만약 이럴 경우(특히 22일 사망이라 사실상 퇴임 2일 만일 수도 있었다.), 후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존슨의 장례식을 주관하는 입장이 됐을듯 하다. 실제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자 마자 존슨의 장례식을 주관했다.[31] 존슨의 재선 불출마에 건강 문제도 한몫한걸 감안하면 임기를 끝마치지 못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렇게 되면 부통령이자 실제 68년 대선 후보였던 험프리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것이다.[32] 대통력직에 있는 경선 후보가 경선을 포기한 최초의 사례이다.[33] 당시 민주당내 비주류 보수파로, 사실상 인종주의를 장착한 극우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흑인민권운동을 당시 민주당 주류 진보파들이 지지하니 당연히 뿔이 날수 밖에 없다. 이들은 이후 일부가 공화당에 입당한다.[34] 이 사람은 대선 결과랑은 별개로 인류 역사에 영원히 그 이름을 남겼는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나오는 앨라배마의 주지사가 바로 이 사람이다. 대선 당시나 그 이후에도 인종분리정책을 열렬히 펼쳤으나 암살 시도를 겪은 뒤 과거의 행보를 반성했다.[35] 그러나 초반 여론조사에 비해 험프리는 매우 선전한 편이다. 선거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닉슨은 1948년 대선토머스 듀이 꼴이 났을 수 있었다.[36] 여담으로 특수학교에도 더 큰 투자를 하도록 하였다.[37] 정확히는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있는 극빈층.[38] 다만 이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는 미 정부의 재정지출의 30%가 넘는 비중을 차지하며 미 정부 재정적자의 큰 원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의료비가 원체 비싸지다 보니...게다가 의료비가 너무 올라서 재정 부담이 크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즉 정부에게나 개개인에게나 모두 부담이 큰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수혜자를 줄이기도 어렵다. 이렇게 된 것은 미국의 의료체계가 영리병원과 대기업 보험회사 위주로 되어있는 것이 가장 크다. 사기업의 특성상 최대한 많은 이윤을 짜내야 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의 재정지출을 이기지 못하고 닉슨이 의료보험을 국영화하지 못한 것이 21세기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OECD 국가들의 의료비 지출은 GDP 대비 평균 9%, 한국은 7% 수준인데 비해 미국은 무려 15%나 된다. 그래서 클린턴, 오바마 모두 의료보험 대개혁을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당선됐지만, 결국 기득권 세력의 극렬한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39] 실제 이때부터 기존 민주당의 블루 스테이트로 평가받던 몇몇 지역이 공화당의 레드 스테이트로 넘어갔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내막은 약간 복잡하다.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는 카터 대통령의 첫 번째 선거를 제외하고는 민주당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80년대까지도 주지사와 하원 의원, 상원 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계속 우세를 점했다. 민권법 이후로 민주당이 지지를 잃어버렸다는 설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현 상황과 대통령 선거 결과들만 보고 말하는 단견에 불과하다. 민권법 이후로도 'Solid South'는 수십 년 동안 굳건했다.[40] 케네디의 발언은 나사 직원들한테 용기를 줬으나, 기본적으로 공밀레였다. 존슨이 "그냥 하지 맙시다." 한마디만 하면 끝이었다. 1968년 유인우주선이 달을 순회하는데 성공하자 “여러분들은... 우리 모두를, 전세계 인류를, 새로운 시대로 안내했습니다."라고 말을 못 잇기도 했다고. 하지만 최초의 달 착륙의 영광은 다음 대인 닉슨 때로 넘어간다.[41] 문제는 이때도 정치적으로 피드백을 받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후임 닉슨 대통령은 존슨의 정책을 상당부분 뒤집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는 그대로 남아서 계속 미국의 재정을 좀 먹었다.[42] 대통령 취임 때부터 사망까지의 과정 및 시간이 캘빈 쿨리지와 너무나도 비슷한데, 두 사람의 전임 대통령이 모두 0년대에 당선되었다가 3년 뒤 대통령 직무 수행 중 사망했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두 사람은 이로 인해 대통령직을 승계받았다. 그리고 둘 다 재선을 거쳐 6년 동안 대통령을 지내고 퇴임 후 4년 뒤에 사망하였다.[43] 그 외에도 이 사람 이후의 대통령들은 대다수 70세를 넘겼다. 버락 오바마는 이제 60대에 들어섰지만, 의료기술이 발달되고 있고, 그로 인해 평균수명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사고로 죽지 않는 이상 70은 넘길 가능성이 높다.[44] 이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도 1969년에 타계하여 당시 미국엔 생존한 전직 대통령이 한명도 없게 되었다. 참고로 아이젠하워, 트루먼, 존슨 모두 닉슨 대통령 재임기에 죽었으며, 이후 닉슨은 빌 클린턴까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사망했다.[45] 반대로 트루먼의 장례식은 가족들의 뜻에 따라 국장으로 거행되지 않았다.[46] 1961.1.3. 미국 부통령 취임을 위해 사임[A] 대통령 후보는 존 F. 케네디[48] 1963.11.22. 전임 존 F. 케네디 암살로 인해 대통령직 승계[49] 1908~1993. 이 사람은 첫번째 흑인 법학자이기도 하다. 1967년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법관이 되어 20년 넘게 재임했다. 볼티모어 워싱턴 국제공항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볼티모어 워싱턴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은 Baltimore/Washington International Thurgood Marshall Airport, 즉 볼티모어-워싱턴 서굿 마샬 국제공항이다.[50] 당시 마셜은 미국 연방 항소 법원 판사.[51] 거기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처칠은 연합국의 지도자, 아이젠하워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으니, 참전 용사가 옛 전우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상징성까지 있었다.[52] <월간 항공> 2009년 11월호 기사 참고 바람.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공개는 당시 극비였던 CIA가 운용하던 SR-71의 1인승 원형기인 A-12를 가리기 위한 일종의 연막이었다고 한다.[53] 다만 우파 성향인 앤드루 존슨과 달리 린든 B. 존슨은 좌파 성향이다.[54] 다만 이 사람은 전임자의 암살로 승계받았기 때문에 전임자가 만기퇴임하고 나서 연장자인 후임 대통령이 나온 경우는 지미 카터보다 13살 더 많은 로널드 레이건때 68년만에 나온 것이다.[55] 하딩 1865년, 쿨리지 1872년, 후버 1874년, FDR 1882년, 트루먼 1884년, 아이젠하워 1890년.[56] Lyndon Johnson was a civil rights hero. But also a racist.[57] 다른 두명은 에스테스 키포버와 앨 고어 Sr.로 둘다 테네시 주의 상원의원이었다. 키포버는 1956년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고 앨 고어 Sr.는 앨 고어 전 부통령의 아버지이다.[58] 파크는 상원 의회 식당의 첫 흑인 지배인이었다.[59] 1961년 11월 처음 박정희가 미국을 찾았을땐 미국 민항기를 이용했고, 케네디도 쿠데타군의 수장인 박정희를 그닥 호의적으로 보진 않았다. 사실 이때부터 박정희는 경제 원조를 요구하며 파병 제안도 먼저 했으나, 케네디 정부는 공산권을 자극할 가능성도 있고 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허나 케네디가 암살되고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뒤 월남전이 격화되자(케네디와 차별화된 노선도 필요했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1964년 25개 우방국에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했고, 한국은 이에 적극적으로 응한다.[60] 정확히는 파병도 파병이지만 1965년 피어슨 총리가 방미했을 당시 린든 B. 존슨 대통령을 만나기 전날 미국의 통킹 만 폭격을 비판하는 강연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61] 이것이 나중에 일어난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62] 참고로 이 때 시가지 정비를 하며 소공동 차이나타운 중 절반이 밀려 사라졌고 현재의 서울프라자호텔이 들어섰다. 원래 이 자리는 화교회관을 지어주기로 약속했었으나 호텔이 들어서는 바람에 양택식 서울시장과 손정목 교수(당시 서울시 간부) 등 서울시 관계자들이 타이베이까지 가서 대만 화교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63] 참고로 북한이 이걸 보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평양 방문 때 똑같이 환영 행사를 했는데 이 쪽은 강제동원이라 영상을 보면 공산주의 체제 특유의 숨길 수 없는 위화감이 드러난다.[64] 192cm. 참고로 박정희 키는 164cm였다.[65] 물론 기분에 취해 해줬다기보단 베트남전 참전 대가로 협조해줬다는게 유력한 설이긴 하다.[66] 실제 표기가 존슨이 아니라 방한 당시 그대로 '죤슨'이다. 문자 그대로 큰 공연장같은 강당이 있고 구내식당이 있는 건물이다.[67] 현직 대통령이 기생 파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 언론들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은 소재임을 고려하면 현실성이 있는 얘기인가 싶지만, 상술했듯이 존슨은 생전에 이 기생 파티는 우습게 보일 수준의 엄청난 여성 편력을 자랑하고도 이를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숨긴 사람이었음을 고려하면 의외로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이야기다. 물론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100%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판단은 각자 알아서.[68] LBJ는 텍사스, 언더우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69] LBJ는 상원 원내대표, 언더우드는 하원 원내총무(whip).[70] 네모바지 스폰지밥에서 집게사장의 원판 성우를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