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학자에 대한 내용은 제임스 뷰캐넌(1919) 문서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ffc22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
}}}}}}}}}}}} |
제임스 뷰캐넌 관련 틀 | |||||||||||||||||||||||||||||||||||||||||||||||||||||||||||||||||||||||||||||||||||||||||||||||||||||||||||||||||||||||||||||||||||||||||||||||||||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 |||
본명 | 제임스 뷰캐넌 주니어 James Buchanan Jr. | ||
출생 | 1791년 4월 23일 |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머서스버그 | |||
사망 | 1868년 6월 1일 (향년 77세) |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 | |||
재임기간 | 제15대 대통령 | ||
1857년 3월 4일 ~ 1861년 3월 4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 아버지 제임스 뷰캐넌 1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피어 | |
배우자 | 없음 | ||
자녀 | 없음 | ||
학력 | 디킨슨 칼리지 (문학 / 학사) | ||
종교 | 개신교 (장로교회) | ||
신장 | 183cm | ||
정당 | |||
의원 선수 | 3 (상원) 4 (하원) | ||
의원 대수 | 17, 18, 19, 20 (하원) 23, 25, 28 (상원) | }}}}}}}}} |
백악관 공식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제임스 뷰캐넌: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오. 당신은 행복합니까?
에이브러햄 링컨: 임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는 상황이라면 더 행복하겠죠.
제임스 뷰캐넌: 만약 백악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만큼이나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이 나라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오.
후임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취임식장으로 가던 중 링컨과 만나서 나눈 대화.[1]
미국의 제15대 대통령.에이브러햄 링컨: 임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는 상황이라면 더 행복하겠죠.
제임스 뷰캐넌: 만약 백악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만큼이나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이 나라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오.
후임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취임식장으로 가던 중 링컨과 만나서 나눈 대화.[1]
2. 약력
- 1820. 제17대 하원의원 (연방당 / 펜실베이니아 제3선거구)
- 1822. 제18대 하원의원 (연방당 / 펜실베이니아 제4선거구)
- 1824. 제19대 하원의원 (민주당 / 펜실베이니아 제3선거구)
- 1826. 제20대 하원의원 (민주당 / 펜실베이니아 제3선거구)
- 1834. 제23대 상원의원 (민주당 / 펜실베이니아 제3부)
- 1836. 제25대 상원의원 (민주당 / 펜실베이니아 제3부)
- 1843. 제28대 상원의원 (민주당 / 펜실베이니아 제3부)[2]
- 1845. 제17대 국무장관 (1845.3.10. ~ 1849.3.7.)
- 1852. 주영 미국 공사
- 1857.3. 제15대 미국 대통령
3. 생애
펜실베이니아에서 제임스 뷰캐넌 1세와 엘리자베스 스피어 사이에서 11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넉넉한 가정의 지원을 바탕으로 1809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뷰캐넌은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자진하여 군에 입대하여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병사 신분으로 군 복무를 마친 대통령이라는 이력을 얻었다. 전쟁이 끝난 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민주당에 입당한 뷰캐넌은 펜실베이니아의 주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 후로도 러시아 대사, 펜실베이니아 하원의장을 거치며 승승장구한 뷰캐넌은 1844년 대선에 도전하지만 앤드루 잭슨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제임스 포크에게 패배했다. 대신 포크에 의해 국무장관이 되어 오리건 협약으로 미국 영토를 거의 완성시켰다.[3] 국무장관 시절에는 매우 유능한 인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기대를 받았고 뷰캐넌을 지명한 포크 역시 뷰캐넌의 능력을 후하게 칭찬하였다.[4]정치인 시절 뷰캐넌의 초상화 |
1848년과 1852년에도 대선에 도전하나 모두 패배한 뷰캐넌은 프랭클린 피어스에 의해 영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1856년에 대통령 후보가 된 뷰캐넌의 경쟁자는 피어스와 스티븐 A. 더글러스였는데, 뷰캐넌은 영국 대사를 지내면서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으로 인한 대혼란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강점이 있었다. 피어스와 더글러스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으로 미주리 협정을 뒤집은 점이 남부에서 인정되어 남부 대의원들의 표를 받은 반면, 뷰캐넌은 북부의 지지를 받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뷰캐넌은 임기 기간 동안 피어스와 더글러스보다도 더 친남부로 치우친 정책을 보였다. 당내 경쟁이 치열해서 피어스와 더글러스가 당의 화합을 위해 중도에 사퇴했고, 17번의 경선 끝에 뷰캐넌이 후보가 되었다.
뷰캐넌은 노예제에 유화적이면서도 북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남북의 화해를 도모할 수 있다는 강점을 중진으로부터 인정받아 후보가 되었다. 실제로 당시 민주당 경선 후보 중에는 뷰캐넌이 가장 노예제에 유화적이었다. 다른 후보인 스티븐 A. 더글러스와 루이스 카스는 노예제가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새로 생겨나는 주들 대부분의 주민들이 노예제에 반대했으므로 노예제를 반대하는 입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피어스도 노예제에 유화적인 인물이었지만 임기 도중의 실책으로 남부와 북부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상대 정당인 휘그당이 밀러드 필모어와 존 C. 프리몬트 등 여러 후보들로 분열된 상태였고 미국 국민들이 북부의 강경한 노예제 반대정책을 우려한 점이 맞물려 뷰캐넌은 아주 쉽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뷰캐넌 역시 전임자인 피어스와 마찬가지로 북부 출신임에도 남부의 노예제를 용인하는 도우페이스(doughface) 성향이었다. 실제로 뷰캐넌은 임기 도중 남부를 달래려고 노력하는데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부 편만 드는 대통령이라고 비난한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뷰캐넌의 성향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드레드 스콧 사건.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의 치열한 대립이 벌어지는데 뷰캐넌은 북부 출신 민주당 계열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을 설득하여 결국 남부의 편을 들도록 만들어 북부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거기다가 뷰캐넌은 당시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오르던 스티븐 A. 더글러스를 매우 싫어해서 은근히 견제했고 이는 민주당이 분열되어 선거에서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 부통령 존 C. 브레킨리지가 남부 민주당(South Democratic) 후보로 따로 출마하면서 그 결과 표가 분산된 민주당은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패배했다.[5] 퇴임 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후임인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면서 지지도가 대폭 상승하였기 때문에 민주당은 오랜 시간을 낮은 지지도와 함께했다.[6]
링컨 당선 이후 남부 주들은 연방을 탈퇴한 뒤 독립국을 세울 준비를 진행해 나갔고, 레임덕이었던 뷰캐넌은 이를 제지할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뷰캐넌은 공식적으로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연방의 영속성을 의도하였고 각 주에는 마음대로 연방을 탈퇴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한 연방이 각 주의 탈퇴할 권리를 막을 수 없다고 믿었고 본인은 무력 사용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남부의 주들이 연방 탈퇴를 선언한 뒤에도 자신의 임기 내에 전쟁이 터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 군대가 섬터 요새를 습격하지 않도록 설득하고 자신의 퇴임 및 링컨 취임 이후로 전쟁을 미루는 데 성공했다.[7]
뷰캐넌은 종전 이후 연방이 분열되기 직전의 자신의 상황에 대해 해명하는 자서전을 썼다. 하지만 당시는 물론 현재도 뷰캐넌의 남부 달래기 정책은 조명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비난받았다. 게다가 1857년에 발생한 경제 공황으로 인해 뷰캐넌이 퇴임할 당시 연방 정부의 빚이 1,700만달러가 더 늘어났다는 점 역시 뷰캐넌이 비판받는 이유이다.
4. 평가
미국 대통령 인기 순위에서는 항상 최하위권을 고수하고 있다. 후임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업적이 막강하기도 하고 밀러드 필모어와 달리 임기 중에 남북 대립 문제로 소소한 업적도 세우지 못했으며, 위기의 순간에 연방을 분열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21세기에 들어서는 20세기 만년 최하위였던 워런 G. 하딩[8]을 제치고 거의 항상 최하위에 위치하며, 가끔 앤드루 존슨이 담당하는 정도인데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뷰캐넌이 2위를 맡고 있다. 전임자 피어스와 후후임자 앤드루 존슨, 그리고 한참 뒤의 하딩과 함께 미국 최악의 대통령 TOP 5에 거의 항상 꼽히는 4인방. 2021년 C-SPAN 조사에서도 여전히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9] 그나마 2022년에는 앤드루 존슨 덕에 꼴찌를 탈출(?)했다. 물론 그래봤자 뒤에서 2위에 불과했지만. 링컨이라는 빛이 있는 이상 전쟁을 유발하고 연방을 수호하지 못한 뷰캐넌은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유능한 장관이자 정치인인 뷰캐넌의 실패는 대공황을 마주한 허버트 후버와도 겹친다.[10]
역사가 마이클 홀트는 뷰캐넌 정부를 남북전쟁 이전의 모든 행정부들 중 가장 부패했으며, 미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부패한 정부 중 하나라고 평하기도 했다. 뉴욕과 시카고의 공적자금이 민주당의 자금으로 유용되었으며, 사법부에 뇌물을 주고 이민자 유입을 늘려 펜실베이니아, 인디애나 등 핵심 주의 선거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전쟁장관 존 플로이드는 특히 부패한 인물로 꼽혔다. 1860년 선거에서 공화당은 이러한 민주당의 부패를 공격하며 선거전에 활용했다.
뷰캐넌의 임기에 전쟁이 발발하였다면 차라리 평가가 더 나을 것이란 평가가 있는데, 뷰캐넌도 남부의 무력 사용은 명목상으로는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뷰캐넌이 링컨 임기로 전쟁을 떠넘기기 위해 남부연합 정부와 물밑으로 딜을 한 것을 생각하면 결국 뷰캐넌 본인의 책임이다.
대통령으로는 평가가 매우 나쁜 것과 달리, 인간으로서의 뷰캐넌은 선한 사람이어서 본인이 노예들을 구입해서 자유주인 펜실베이니아에 해방시킨 일화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노예제 허용 여부는 주의 의사에게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뷰캐넌의 부통령 존 C. 브레킨리지는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사퇴하고 남부로 넘어가서 장군에 이어 전쟁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노예제 폐지를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5. 여담
장년기. |
중년기. |
노년기. |
- 항상 좌측으로 머리를 기울인 상태로 사진을 찍었는데 일부러 머리를 기울인 것은 아니고 선천적인 부동시가 원인이다. 뷰캐넌은 왼쪽 눈이 근시이고 오른쪽 눈이 원시라서 물체를 바르게 보려면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시선을 집중할 때는 눈을 심하게 깜빡거리는 증세를 보였다. 뷰캐넌이 안경을 착용한 이야기나 사진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아서 사용 여부는 불확실하다.
- 역대 미국 대통령중 유일하게 배우자가 없는 미국 대통령이다.[12]
- 서재필의 아내인 뮤리엘 암스트롱은 제임스 뷰캐넌의 사촌 형제이자 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한 미국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이다.
- 생가가 펜실베이니아의 소도시인 랭카스터에 소재한다. 뷰캐넌의 생가는 이후 기념관으로 꾸며졌지만 인기가 바닥인 대통령이라 관광객들도 잘 찾지 않는다.
- 취임 당시 65세 315일, 퇴임 당시 69세 315일이였는데, 이는 당시 미국 대통령들 중 두번째로 최고령이였다.(두개의 기록 모두 2위)[13]
5.1. 사생활
평생 결혼하지 않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하지만 평생 친밀한 사람은 있었는데 바로 전임자 피어스의 부통령인 윌리엄 킹.[14] 킹도 평생 미혼이었다는 사실과 겹쳐서 역사학자들은 뷰캐넌을 게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다. 그게 사실인지는 앞으로도 밝혀질 가능성이 적지만 뷰캐넌과 킹은 15년을 같은 집에서 살았고, 그 시기에 킹은 '미시스 제임스 뷰캐넌'이나 '팬시 아줌마 (Aunt Fancy)'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동성애가 혐오받던 시절이라 게이라는 분명한 증거를 남기는 경우는 많지 않으므로 사실 확인이 어렵다.다른 설로는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앤 콜먼이라는 여성과 약혼하게 된 뷰캐넌은 앤의 집안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파혼에 이른다. 앤의 아버지는 철강공장을 소유한 부유한 인물이었는데 앤은 약한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질환을 가진 딸을 열렬히 사랑하는 뷰캐넌을 본 앤의 아버지는 뷰캐넌이 자신의 재산을 목적으로 결혼하려는 것이라고 의심하고 둘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한다. 계속된 갈등 끝에 앤의 아버지가 강제로 필라델피아로 가족들을 데리고 떠나버리면서 둘의 관계는 파경을 맞는다. 파혼으로 상심한 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훗날 앤의 부고를 듣고 충격받은 뷰캐넌은 앤의 죽음을 애도하며 평생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두 이야기 모두 검증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기 때문에 뷰캐넌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한다. 아내가 없던 뷰캐넌의 임기에는 조카가 영부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뷰캐넌 이외의 미국 대통령 중 임기 동안 영부인이 없던 사례는 토머스 제퍼슨,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체스터 A. 아서가 있지만, 이들은 취임 전에 결혼한 전적이 있지만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아내가 먼저 사망한 사례이다.
6.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연방당| 연방당 ]] | ? - 1822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822 - 1824 | 탈당 |
| 1824 - 1868 | 입당 사망 |
7.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82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펜실베이니아 제3구 | [[연방당| 연방당 ]] | 7,809 (27.88%) | 당선(1위) | 초선 |
182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펜실베이니아 제4구 | 7,021 (18.61%) | 재선 | ||
182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잭슨 민주주의 | 6,968 (17.97%) | 3선 | ||
182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5,950 (18.50%) | 4선 |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0 (5.53%) | 낙선 (5위) | ||||
182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펜실베이니아 제4구 | | 10,004 (17.62%) | 당선(1위) | 5선 |
183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펜실베이니아 | 5 (3.76%) | 낙선 (4위) | ||
1834 |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 66 (49.62%) | 당선(1위) | 초선 | ||
183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85 (63.91%) | 재선 | |||
1843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74 (56.06%) | 3선[15] | |||
1856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1,836,072 (45.28%, 174명) | 초선 |
[1] 그러나 링컨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2] 1845년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지명되면서 사임.[3] 정확히는 워싱턴 주, 오리건, 아이다호 주가 이 무렵에 미국 영토가 되었다. 이전에는 영국과 공동으로 점유한 지역이었다.[4] 하지만 동시에 포크는 뷰캐넌의 지나칠만큼 신중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을 우려하였다. 포크가 우려한 뷰캐넌의 성격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뷰캐넌의 문제점으로 극명하게 드러났다.[5] 브레킨리지는 역대 최연소인 만 36세에 부통령에 취임한 인물이다. 그래서 뷰캐넌과의 나이차가 29년 9개월로 미국 역사상 최대의 러닝메이트 나이 차이다. 그리고 2번째로 단명한 미국 부통령이다. 수정헌법으로 러닝메이트제가 도입된 이후의 미국의 선거법 상 대통령 후보는 만 35세 이상, 부통령 후보는 만 32세 이상이면 출마가 가능하다. 뷰캐넌은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민주당의 차세대 주자를 민다는 명목으로 30살이나 어린 브레킨리지를 부통령으로 지명한 것. 브레킨리지 이후로는 30대 부통령은 나오지 않았다. 닉슨은 당선은 39세지만 취임시 나이는 40세.[6] 1865년 남북 전쟁이 끝난 후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당선 이전까지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우드로 윌슨과 그로버 클리블랜드 단 둘뿐이다. 다만 1876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후보였던 새뮤얼 틸던이 득표에서 이겨 대통령이 될 뻔했으나, 러더퍼드 B. 헤이스에게 선거인단 단 1표 차이(헤이스 185, 틸던 184)로 졌다.[7] 뷰캐넌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미룬 것일 뿐이다. 당시 분위기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분위기였고 뷰캐넌은 요새의 미 연방군 증원 요청도 거부하였다.[8] 물론 이쪽도 악명이 어디 안 가서 최하위만 면한 것이지 뒤에서 2~4위는 꾸준히 하는 편이다. 그나마 순위가 올라간 것도 뒤에서 10위권 이내에 불과하다.[9] 10개 평가 지표들 중 무려 5개에서 꼴등을 기록했다. 같은 조사에서 같은 최하위권 그룹 멤버인 앤드루 존슨과 도널드 트럼프도 겨우(?) 2개 지표에서 꼴등을 기록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점. 참고로 남은 1개에서 꼴등을 차지한 대통령은 허버트 후버다.[10] 이후 후버의 후임자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하여 뷰캐넌-링컨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다만 후버는 그래도 하딩이나 뷰캐넌마냥 뒤에서 5위에 간 적은 의외로 적은 편이다. 그래봤자 뒤에서 10위권이지만...[11] 다만 전임자인 프랭클린 피어스는 19세기에 태어났다.[12] 1876년 대선에서 선거인단 단 1표 차이로 졌던 새뮤얼 틸던도 배우자가 없었다.[13] 취임 당시 가장 최고령은 9대 윌리엄 H. 해리슨 대통령(당시 68세 23일), 퇴임 당시 가장 최고령은 7대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당시 69세 354일)이다. 이 두 기록은 20세기에 각각 로널드 레이건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깼다.[14] 60대 후반의 나이에 취임하여 1달 보름 후 사망한 부통령이다. 뷰캐넌보다 5살 연상이었고 임기가 짧지만 뷰캐넌처럼 미국 역사상 유일한 미혼 부통령이다.[15] 1845.3.5. 미국 국무장관이 되기 위해 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