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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 1782년 12월 5일 | ||
미국 뉴욕주 킨더후크 | |||
사망 | 1862년 7월 24일 (향년 79세) | ||
미국 뉴욕주 린더널드 | |||
재임기간 | 제8대 부통령 | ||
1833년 3월 4일~1837년 3월 4일 | |||
제8대 대통령 | |||
1837년 3월 4일~1841년 3월 4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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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한나 호이스 밴 뷰런(1783~1819, 사별) | ||
자녀 | 아브라함 밴 뷰런 2세, 존 밴 뷰런 포함 5명 | ||
학력 | 해당사항 없음 | ||
종교 | 개신교(미국 개혁교회)[1] | ||
신체 | 키 168㎝[2] / 체중 74㎏ / O형(Rh-) | ||
최종 당적 | [3] | ||
문장 | }}}}}}}}} |
백악관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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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8대 대통령.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최초로 미국이 독립한 이후에 태어난 인물로, 그래서 그런지 미국에서는 'First president to be born as an american(직역하면 '미국인으로 태어난 첫 번째 대통령'이 된다)'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2. 약력
- 1829년 1월: 제9대 뉴욕 주지사(1월 1일~3월 12일)
- 1829년 3월: 제10대 국무장관(3월 28일~1831년 5월 23일)
- 1833년 3월: 제8대 미국 부통령
- 1837년 3월: 제8대 미국 대통령
3. 생애
1782년 12월 5일, 미국 뉴욕주 킨더후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밴 뷰런의 시작은 농부이자 선술집 주인으로 평민이었다. 미국은 신분이 없는 공화정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밴 뷰런이 활동했던 당시에는 국가의 주요 요직을 '귀족'이나 다름없는 명문가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마틴 밴 뷰런은 그런 점에서는 당대 거물 정치인 앤드루 잭슨과 함께 '평민' 출신이나 다름없었다.정규 교육 과정은 거친 적이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말솜씨가 좋아 뛰어난 언변과 법률 견습 과정을 거쳐 1803년에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진출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하고 뉴욕주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1815년 뉴욕주 검찰총장이 된 것을 시작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상류층의 예의범절을 완전히 익히게 되는데, 이처럼 과도하게 드러나는 '배운 예의범절'이 데이비드 크로켓 등에게는 위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1824년 자신이 지지했던 앤드루 잭슨이 존 퀸시 애덤스에게 낙선 아닌 낙선을 당하게 되자 강력한 선거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자신의 본거지 뉴욕주를 중심으로 파벌을 만들었다. 일명 '올버니 섭정(Albany Regency)'으로 불리며 1820년대, 1830년대의 뉴욕주 정치를 장악했고, 잭슨의 민주당 조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미국 정치에 남긴 영향으로는 직업 정치인으로서 '머신(Machine)'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머신이란 대중을 투표에 동원하는 촘촘히 구축된 선거 조직을 말한다. 이렇게만 보면 멀쩡해 보이는 '머신'이 왜 문제가 되냐면,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대중들을 동원한다는 것이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를 떠올리게 하는 금품 살포를 비롯한 부패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머신'은 구축과 유지에 큰 비용이 드는 탓에 한 사람이 쓰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계자가 물려받는 경우가 빈번하고, 따라서 '계파'의 구축과도 친연성이 크다. 그래서 영단어 '머신 폴리틱스(Machine Politics)'에는 부정적 의미가 짙게 깔려 있다. 그만큼 밴 뷰런의 악평도 높은 것.
1828년 잭슨이 당선되는데 큰 공을 세워 국무장관에 오르게 되었고, 1832년에는 부통령 존 C. 칼훈이 사직하자[4] 잭슨은 그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그리고 4년 뒤에는 잭슨의 인기를 등에 업고 마침내 미국의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현행 제도상의 부통령이 대통령에 오른 첫 사례.[5]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마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취임한 지 불과 약 2개월 만인 1837년 5월 10일에 1837년 공황이 터지고 만 것이다. 이 공황의 규모는 1930년대 허버트 후버 재임기의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사상 최악의 공황으로 꼽힐 정도였다. 이로 인해 그의 인기는 급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사실 이 1837년 공황의 원인은 전임 대통령인 잭슨 정부에서 연방은행을 강력히 반대하고 없애기 위해 뺀 돈을 사은행들에게 넣어놨더니 돈놀이나 마구 하다가 거품이 꺼졌는데, 여기에 영국 자본까지 함께 빠져나가면서 생긴 문제였는지라, 밴 뷰런의 전적인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헨리 클레이가 은행 폐지에 극구 반대하며 협력을 요청할 때도 멍 때리고 돕지 않았기에, 본인의 책임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타 국가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텍사스 공화국의 연방 가입을 거부하는 등, 화끈했던 전임자 잭슨에 비해 우유부단하게 비춰졌고 이를 두고 휘그당에서는 그의 이름을 빗대 'Martin Van Ruin(마틴은 폐허를 만들었다)'이라는 식으로 공세적인 선거를 펼쳤다. 임기 중 윈필드 스콧 장군을 파견해 캐롤라인호 사건을 해결하여 영국과의 분쟁을 차단한 것, 제2차 세미놀 전쟁(인디언 전쟁의 일부)을 승전으로 이끌고 아메리카 원주민 이주 정책을 유지했으며 1839년에는 메인주와 캐나다 뉴브런즈윅주 사이에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자 전쟁 없이 원활하게 분쟁을 해결하도록 조치하는 등 대외적으로 업적들을 세웠지만 크게 의미를 부여받지는 못했다.
이미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잭슨 밑의 많은 이들이 등을 돌린 상태였고, 결국 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후보 분열이 일어나 러닝메이트도 없을 정도였다. 1840년 결국 재선에 실패, 윌리엄 헨리 해리슨에게 패하고 백악관을 나오게 되었다.[6] 사실 선거인단에 비해 선거 격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고 한다. 127만 표 대 112만 표로, 6.1% 격차였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통령에 도전했고 기어이 1848년에는 독자 출마를 감행하였다. 밴 뷰런은 부통령 재직 당시에는 대통령으로 모신 잭슨이나 민주당 내부의 미국 남부 세력을 고려하여 노예제를 암묵적으로 용인했지만, 대통령 재임을 거치며 칼훈 등 남부 민주당원들과의 사이가 악화된 결과 점점 노예제 반대 쪽으로 기울었다. 그가 새로 만든 자유토지당은 서부 개척지에서 노예제를 금지하고 자유민들이 진출하여 스스로 농사짓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낫다는 주장을 했다. 자유토지당은 비록 선거에서는 실패했지만 하원과 상원에서 4년간 의미 있는 제3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밴 뷰런의 선전(10% 득표)은 민주당의 표를 일부 갉아먹어 재커리 테일러의 당선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참고로 자유토지당은 1852년 공화당에 합류하지만, 밴 뷰런은 민주당으로 복당하여 죽을 때까지 민주당원으로 남았다. 정계 은퇴 이후에는 조용히 살다 1862년 세상을 떠났다. 강력한 노예제 반대 입장으로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어느 정도 역할을 한 셈이다.
4. 여담
- 키가 168㎝였는데 23대 대통령인 벤저민 해리슨과 같으며, 163㎝였던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에 이어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두 번째로 키가 작았다. 그래도 밴 뷰런은 위의 사진에서 보이듯이 비율이 좋아 170㎝ 중후반 정도로 보일 만큼 더 커 보이는 편이다. 이는 벤저민 해리슨도 마찬가지이다.
- 그의 낙선 이후 20여 년간 누구도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는데, 밴 뷰런은 퇴임 후 이때까지 생존하여[7] 에이브러햄 링컨의 당선까지를 보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게다가 존 타일러보다도 늦게 사망했다(밴 뷰런과 타일러 모두 1862년에 사망했지만, 타일러가 6개월 정도 먼저 사망했다). 퇴임 후 21년 동안 생존하면서 무려 8명의 후임 대통령을 보고 죽은 대통령이다. 현 기준 미국 최장수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39대)도 도널드 트럼프(47대)가 퇴임하기 전에 사망하여 이 기록을 아깝게 세우지 못하게 된다.[8] 또 부통령직과 대통령직을 승계 절차를 밟지 않고 모두 선거를 통해 연속해서 역임한 인물이기도 한데 이 기록에 해당되는 인물로는 밴 뷰런과 조지 H. W. 부시로 단 둘 뿐이다.
- 미국 독립 전쟁 이후에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9] 미국 역대 대통령들 최초로 영국 신민 출신이 아닌, 내츄럴 본 미국인인 셈이다. 그리고 퇴임 후 13년 만인 1853년에 유럽을 방문해, 유럽을 방문한 최초의 전직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 그의 아내였던 한나 호이스 밴 뷰런(Hannah Hoes Van Buren)은 그의 먼 친척이자 어린 시절 짝사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나 밴 뷰런은 결핵을 앓던 중에 출산까지 하게 되며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1819년 2월 5일에 35세로 사망하고 말았다. 밴 뷰런이 훗날 쓴 본인의 자서전에도 한나에 대해서 잘 언급되어 있지 않아 아내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밴 뷰런이 아내가 죽은 후로도 43년을 살았음에도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나 주변인들의 언급을 볼 때 부부애는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는 소꿉친구와 결혼한 케이스가 제법 있다. 밴 뷰런 외에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등이 있다.
-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인해 얻은 별명은 찬양자들 사이에서는 '작은 마술사(The Little Magician)', 정적들 사이에서는 '킨더후크[10]의 붉은 여우(The Red Fox of Kinderhook)'라고 불렸다고 한다. 유려함과 우유부단함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전형적인 정치인이라 부를만 했던 것. 존 퀸시 애덤스는 '제임스 메디슨에 표리부동을 겸비한 사람'이라며 비판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인기 순위나 업적 평가에서는 중위권~중하위권 정도에 든다.[11]
- 대통령이 되기 전 한 상원의원이 밴 뷰런에게 "해는 동쪽에서 뜬다고 하는데 자네는 그걸 믿나?"라고 묻자, 밴 뷰런은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이 상식인 것은 알고 있지만 "난 동이 틀 때까지 일어나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 없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밴 뷰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
-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대통령 편에서 죽기 직전에 노예제에 대한 대립으로 남북 전쟁이 터지리라는 것을 예견했다고 나와 있는데, 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밴 뷰런이 사망한 시기는 1862년 7월이고 남북 전쟁이 발발한 시기는 그보다 1년여 전인 1861년 4월이다. 물론 정치적 감각을 보아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인물은 아니었을 것 같다.[12]
- 1837년에 대통령 취임 당시, 최초로 최연소 기록을 경신한 대통령이다. 취임 당시 54세로, 그 이전에 최연소 기록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57세 67일)이 가지고 있었다.[13] 이후 최연소 취임 기록은 존 타일러, 제임스 K. 포크, 프랭클린 피어스, 율리시스 S. 그랜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순서대로 경신했다.
- 우리나라에서는 특이하게도 미국 역사에 관심 없는 게임 덕후들이 의외로 이름을 알고 있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반 뷰렌 프로젝트 때문에 반 뷰렌 페이지를 읽어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인터플레이가 자기네 프로젝트에 이 이름을 붙인 까닭은 처음에 V13 프로젝트라 부르던 것이 VB와 비슷해보이자 아예 대통령 이름을 붙여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 굴을 굉장히 좋아하여 대통령 시절 즐겨먹었다.
4.1. 이름 관련
성은 뷰런이 아닌 '밴 뷰런'이며,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네덜란드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마르턴 판뷔런(Maarten Van Buren)이었으나 후에 이름 '마르턴'을 영어식인 '마틴'으로 고쳤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네덜란드어)를 모어로 쓴 대통령이다.그의 성에 붙은 'van'은 독일어 'von'과 의미가 같지만 'van'은 귀족 성씨 뿐만이 아니라 평민의 출신지를 가리키기 위해서도 많이 사용되었는데[14], 그의 성인 '밴뷰런(판뷔런)'은 미국으로 이주한 첫 조상이 자신의 출신지인 뷔런(Buren, 네덜란드 헬데를란트 주 뷔런)에서 따와 정한 성으로 귀족 핏줄과는 상관없다.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821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뉴욕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88 (58.28%) | 당선 (1위) | 초선 |
1824 | 미국 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9 (3.46%) | 낙선 (5위) | ||
1827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뉴욕 | 잭슨 민주주의 | 105 (71.92%) | 당선 (1위) | 재선[15] |
1828 | 미국 주지사 선거 | 뉴욕 | | 136,794 (49.46%)[16] | 초선 | |
1832 | 미국 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701,780 (54.24%, 189명) | |||
1836 | 미국 대통령 선거 | 764,176 (50.83%, 170명) | ||||
1840 | 미국 대통령 선거 | 1,128,854 (46.81%, 60명) | 낙선 (2위) | |||
1848 | 미국 대통령 선거 | [[자유토지당| 자유토지당 ]] | 291,501 (10.12%, 0명) | 낙선 (3위) |
[1] 네덜란드계 개혁교회 교단이다.[2]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벤저민 해리슨과 더불어 두 번째로 키가 작은 대통령이다. 가장 키가 작은 대통령은 제임스 매디슨(163㎝)이었다.[3]
→ [[자유토지당|
[4] 그와 절친했던 헨리 클레이 때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5]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의 경우는 당시 선거 제도에 따라 대통령 선거에서의 차점자, 즉 2등이 부통령으로 된 것이다.[6] 그러나 해리슨은 취임식 날 내린 비를 철철 맞으면서 장시간 동안 연설하다가 폐렴에 걸려 취임 한 달만에 사망했다.[7] 특히 자신의 재선을 막은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이후 대통령인 재커리 테일러가 임기 중 사망한 것도 있었다. 예외는 제임스 K. 포크와 제임스 뷰캐넌인데, 둘은 재선 출마를 하지 않았고, 특히 포크는 임기 마치고 3개월 만에 사망했다.[8] 카터는 퇴임 후 2024년까지 무려 43년을 생존했는데, 자신의 후임 대통령들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현재까지 7명) 카터의 후임 대통령들은 조지 H. W. 부시와 조 바이든을 제외하면 모두 재선에 성공하여 8년 동안 재임했기 때문에(반대로 도널드 트럼프는 두 번 연속이 아닌 징검다리 임기로 8년을 하게 됐으며, 조 바이든은 재선 실패가 아니라 대선 후보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중간에 출마를 포기하여 4년만 재임했다), 밴 뷰런보다 적을 수밖에 없었다.[9] 그러나 워싱턴 취임 이후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은 존 타일러이다. 이후 12대 대통령이 되는 재커리 테일러는 밴 뷰런과 같이 독립 전쟁 이후이자, 워싱턴 취임 전에 태어난 대통령이다.[10] 밴 뷰런의 고향으로, 뉴욕주에 속해 있다.[11] 그래서 C-SPAN이 평가하는 미국 역대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는 재커리 테일러, 러더퍼드 B. 헤이스, 체스터 A. 아서, 벤저민 해리슨과 같이 중하위권~하위권에 속할 정도로 평가가 좀 박한 편이다. 심지어 버락 오바마 퇴임 후인 2017년에는 체스터 A. 아서와 함께 하위 10위 내에 들기도 했다(전체 43명 중에서 밴 뷰런은 34위, 아서는 35위를 기록했다). 도널드 트럼프 퇴임 후인 2021년에 이 둘은 하위 10위 내에서 벗어나고 트럼프와 재커리 테일러가 새로 하위 10위 내에 들었지만, 밴 뷰런의 순위는 테일러 바로 위였고 순위도 지난 평가와 같은 34위 그대로이다. 그래도 C-SPAN을 제외한 다른 조사에서는 전술한 대통령들보다는 평가가 높은 편이며, 20위대 중반~후반 정도에 머무르는 편이다.[12] 다만 아주 오류만은 아닌데, 다들 남북 전쟁이 4~5년이나 지속될 줄은 몰랐다. 즉 남북 전쟁의 발발이 아닌 남북 전쟁의 참혹한 결말을 예견했다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전쟁으로 남북을 합쳐 총 63만 명이 희생당하고 부상자 37만 명에 전쟁 비용은 북부만 32억 달러로 부채가 30배 가까이 늘어난 결말을 낳았음을 감안해보면(더군다나 전쟁 직후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여기서 묘사된 대로 '끔찍한 동란'이라는 표현은 크게 이상할 것이 아니다.[13] 밴 뷰런 이전의 대통령들은 모두들 거의 비슷한 나이에 취임했다(존 애덤스와 앤드루 잭슨은 61세에 취임했고, 나머지는 전부 57~58세에 취임했다).[14] 다른 예시로 네덜란드 출신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도 성씨 자체가 '반고흐(판호흐)'다.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혈통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형 알렉스 밴 헤일런도 마찬가지)은 '밴헤일런(판할런)'이 성씨이다.[15] 1828.12.20. 뉴욕 주지사가 되기 위해 사직[16] 1829.3.12. 미국 국무장관이 되기 위해 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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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그와 절친했던 헨리 클레이 때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5]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의 경우는 당시 선거 제도에 따라 대통령 선거에서의 차점자, 즉 2등이 부통령으로 된 것이다.[6] 그러나 해리슨은 취임식 날 내린 비를 철철 맞으면서 장시간 동안 연설하다가 폐렴에 걸려 취임 한 달만에 사망했다.[7] 특히 자신의 재선을 막은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이후 대통령인 재커리 테일러가 임기 중 사망한 것도 있었다. 예외는 제임스 K. 포크와 제임스 뷰캐넌인데, 둘은 재선 출마를 하지 않았고, 특히 포크는 임기 마치고 3개월 만에 사망했다.[8] 카터는 퇴임 후 2024년까지 무려 43년을 생존했는데, 자신의 후임 대통령들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현재까지 7명) 카터의 후임 대통령들은 조지 H. W. 부시와 조 바이든을 제외하면 모두 재선에 성공하여 8년 동안 재임했기 때문에(반대로 도널드 트럼프는 두 번 연속이 아닌 징검다리 임기로 8년을 하게 됐으며, 조 바이든은 재선 실패가 아니라 대선 후보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중간에 출마를 포기하여 4년만 재임했다), 밴 뷰런보다 적을 수밖에 없었다.[9] 그러나 워싱턴 취임 이후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은 존 타일러이다. 이후 12대 대통령이 되는 재커리 테일러는 밴 뷰런과 같이 독립 전쟁 이후이자, 워싱턴 취임 전에 태어난 대통령이다.[10] 밴 뷰런의 고향으로, 뉴욕주에 속해 있다.[11] 그래서 C-SPAN이 평가하는 미국 역대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는 재커리 테일러, 러더퍼드 B. 헤이스, 체스터 A. 아서, 벤저민 해리슨과 같이 중하위권~하위권에 속할 정도로 평가가 좀 박한 편이다. 심지어 버락 오바마 퇴임 후인 2017년에는 체스터 A. 아서와 함께 하위 10위 내에 들기도 했다(전체 43명 중에서 밴 뷰런은 34위, 아서는 35위를 기록했다). 도널드 트럼프 퇴임 후인 2021년에 이 둘은 하위 10위 내에서 벗어나고 트럼프와 재커리 테일러가 새로 하위 10위 내에 들었지만, 밴 뷰런의 순위는 테일러 바로 위였고 순위도 지난 평가와 같은 34위 그대로이다. 그래도 C-SPAN을 제외한 다른 조사에서는 전술한 대통령들보다는 평가가 높은 편이며, 20위대 중반~후반 정도에 머무르는 편이다.[12] 다만 아주 오류만은 아닌데, 다들 남북 전쟁이 4~5년이나 지속될 줄은 몰랐다. 즉 남북 전쟁의 발발이 아닌 남북 전쟁의 참혹한 결말을 예견했다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전쟁으로 남북을 합쳐 총 63만 명이 희생당하고 부상자 37만 명에 전쟁 비용은 북부만 32억 달러로 부채가 30배 가까이 늘어난 결말을 낳았음을 감안해보면(더군다나 전쟁 직후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여기서 묘사된 대로 '끔찍한 동란'이라는 표현은 크게 이상할 것이 아니다.[13] 밴 뷰런 이전의 대통령들은 모두들 거의 비슷한 나이에 취임했다(존 애덤스와 앤드루 잭슨은 61세에 취임했고, 나머지는 전부 57~58세에 취임했다).[14] 다른 예시로 네덜란드 출신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도 성씨 자체가 '반고흐(판호흐)'다.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혈통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형 알렉스 밴 헤일런도 마찬가지)은 '밴헤일런(판할런)'이 성씨이다.[15] 1828.12.20. 뉴욕 주지사가 되기 위해 사직[16] 1829.3.12. 미국 국무장관이 되기 위해 사직